김복동할머니를 생각한다 3

3. 일본패전 이후

<정대협설명>


1945년, 싱가폴에서 일본군 제16사령부 소속 제10육군병원에서 간호사로 위장당하여 일본군인들 간호노동, 버려짐. 미군포로수용소에 수감.
1947년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지 8년 째 되던 22세에 귀향

<증언집>

“어느 날 갑자기 위안소의 일본 군인들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관리인인 한국 사람의 밥을 해 주면서 위안소에 그대로 있었다. 한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 그려져 있는 차를 타고 위안소에 와서 우리를 태우고 떠났다. 이때 그 한국인 관리인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차에 타고 보니 차 안에도 없었다. 그 길로 어디론가 숨어버렸나 보다. 우리는 그때까지 해방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그놈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일본군인들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싱가포르에 있는 제10 육군병원이었다.””일본군인들은 우리에게 간호훈련을 시켰다.”

“하루는 누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나가보니, 어떤 조선인 남자가 와서, 자기가 나의 형부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
“형부는 미군 수용소에 있는 중이었다.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수용소로 가자고 했다.”
“형부가 병원에다가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다. 형부가 왔다갔다 교섭을 하더니, 병원에 있는 조선인 여자300명이 다같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람이 굉장히 높고 큰 미군트럭을 가지고 와서 여자들을 전부 태우고 미군 수용소로 왔다.”

(어머니와의 해후)”열다섯 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5년만인 것이다.”

“형부는 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아는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후에 결혼을 하라 해서)”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말하니 어머니는 통곡을 하셨다.””부모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고 (결혼하라고)애원하셨다.”

<박유하해설>

전쟁이 끝나고 김할머니를 “버린”건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였다. 여기서의 “해방”은 명백히 ‘업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위안부가 도망을 시도하다 구속당하는 대상은 군이 아니라 업자였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미움/분노의 대상이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인 이유이기도 하다.

김할머니가 “간호”를 하게 된 건 “위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헌혈을 당하기도 했지만, 어지럼증을 호소하면 군인이 “포도당”주사를 놔 주기도 했다고 김할머니는 말한다.

수용소에 가게 관건 일본군에게 버려져서가 아니라 형부가 데려갔기 때문이다. 처음엔 거부당했지만 결국 “조선인 여자 300명”은 모두 무사히 미군에게 갈 수 있었다. ‘버려지고 학살’당했다는 스토리는, 전쟁터 극한상황에서 어쩌다 일어날 수 있었던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버려짐과 학살’이 전체양상인 것처럼 강조된다.

또, 김할머니는 그저 “수용소”라고 말하고 있을 뿐, “포로수용소”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포로”가 된 경우도 있지만, 점령군으로서의 미국이 점령지 사람들을 그저 ‘관리’차원에서 ‘수용’한 곳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위안부’를 포함한 조선인들은, 때로 일본인들과 함께, 미국의 도움을 받아 귀국했고 김할머니 역시 그렇게 귀국했다.

위안소에 있었던 기간을 김할머니는 “5년만”이라거나 “내가 없는 6년동안”이라고 표현한다. “8년”이 아니라.
김할머니의 “어머니의 통곡”은 “위안부”생활이 유발했지만, “부모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는 회한에 ‘일본군의 강제연행’이라는 인식은 없다.


과거 어떤 시기에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건 맞다. 하지만, ‘누가’ ‘왜’ 끌어 갔는지, ‘누가’ 한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는 총체적으로 봐야 한다. 규탄대상이 단순화될수록, “김복동”이라는 여성은 ‘역사’에서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