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론가 유창선 Facebook
요즘 정의연과 윤미향 의원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는 내 관심은 돈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사자는 횡령을 부인하고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검찰수사 결과를 지켜보기로 하자. 의도적 횡령이 없었다 하더라도, 개인 돈과 기부금을 같은 계좌에 넣고 섞어쓰다 보면 여간 꼼꼼하고 엄격한 사람이 아니면 구분이 안 되기가 쉽다. 단체가 어려울 때는 내 돈까지 써가며 헌신했으니, 그 돈이 그 돈이라는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그러니 죄의식 없는 횡령이나 유용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는 있는 일이고. 횡령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부인하는 당사자도 모두 검증된 주장이 아니니 더 지켜보기로 하자.
돈 문제 말고도, 사태를 지켜보면서 수많은 질문들이 생겨난다. 이제까지 당연시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혼자서 다시 질문하고 숙고해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정대협이나 정의연의 생각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적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그것은 옳은 것인가. 단적으로, 정의연은 할머니들의 복지를 위한 단체가 아니라는 설명은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 정의연에게는 피해자 중심주의 운동이 올바른 것인가, 아니면 활동가 중심주의 운동이 올바른 것인가. 피해자 할머니들은 이제 편안한 여생을 보내는 개인으로 돌아가게 해드리는게 옳은 것인가, 아니면 소녀상이 요구하듯이 ‘민족의 딸’로 유관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야 옳은 것인가…… 여러가지가 얽혀있는 질문들이 머리 속을 맴돌면서 정대협과 정의연의 노선에 대해서도 질문들이 생겨난다. 사실 이제까지는 절대선이라고 믿어왔지만, 정의연의 노선으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가능할 수 있을까라는, 금기시되어온 질문까지 떠오른다.
이 기회에 2015년 한일 정부 간의 합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 당시에는 나도 밀실합의라는 비난에 의견을 같이 했지만, 냉정하게 다시 읽어보니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일본 정부의 사죄, 일본 정부 예산에 의한 출연이 명기되어 있었다. 물론 ‘법적’ 책임이 아닌 수준이긴 했지만, 우리 측 위안부 운동의 요구의 기조와 큰 차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소녀상 문제 등의 부대 조건들로 인해 이 합의는 결국 무효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할머니들을 ‘민족의 딸’ ‘민족의 투사’로 형상화한 소녀상을 지키는 것이, 핵심적 합의들을 뒤집어야 할 정도의 의미를 갖는 것인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런 소리를 꺼내면 ‘토착왜구’ 식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피해자 할머니들과도 정상적인 협의가 없었던 정의연의 입장이 곧 한국의 입장이 되곤 했던 지난 과정이 온당했던 것인지, 그런 질문도 하게 된다. 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한일 간의 역사적 숙제가 충분한 사회적 공론화 과정 없이 정의연의 몇몇 활동가들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던 것은 정상적인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윤미향의 생각이 정의연의 생각이 되고 정부의 생각이 되고, 국민의 생각이 되는….. 사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현상인가. 위안부 운동에서의 절대 권력이 되면서 위안부 운동의 사유화가 있게 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윤미향 당선자의 그런 문제의식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의 생각이 자신의 결백만을 주장하는데 머무르고 보다 근본적인 지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는 전통적 교리만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늙은 수도사 호르헤가 등장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이 웃음에 탐닉하게 만들기애 수도사들이 읽어서도 안 되고, 그 책이 세상으로 나가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는 이 책을 읽는 수도사들이 웃음에 탐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책장에 독약을 묻혔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던 수도사들은 연이어 변사하게 된다.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진리를 절대적으로 신봉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손대서는 안 된다. 수도원 연쇄 살인사건은 진리에 대한 맹신이 낳은 비극적인 파멸이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가 법정에까지 가야했던 역사를 떠올리며 호르헤가 지키려 했던 진리의 얘기도 떠올랐다. 역사 속에 불편한 진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거세한 역사만을 믿으며 지키려는 것도 역사를 대하는 좋은 태도는 아니라 생각한다. 금기가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 할머니들도 하나로 묶기 어려운 여러 경우, 여러 생각들이 있을 것이고, 연구자들의 생각과 의견도 다를 수 있다. 함께 다양한 의견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 한 사람이 의견과 판단의 권력을 독점하는 일 없이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 위안부 인권운동의 앞길이 찾아져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할머니들 생전에 문제 해결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원리주의식 강변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사실, 윤미향이 돈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여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문제라 생각한다.(2020.5.30, 유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