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4/8/12-2

며칠전에 했던 모월간지 인터뷰가 결국 게재되지 않게 되었다고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 그런 결정을 내린 건 데스크가 아니었다고. 기자는 죄송하다 말했지만 그의 선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섭섭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언론왜곡”을 문제시한 그의 노력을 짓밟은 해당언론이 안타까울 뿐.

나에 대한 고발사태가 안타까운 건, 혐한주의자들이 “한국엔 언론의 자유조차 없다”면서 한국때리기의 또하나의 근거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이 개인적인 일을 넘어서 한국의 위상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38207342872847

渦中日記 2014/8/13

낮에 잠깐 올렸던 <실리지 못한 인터뷰>를 몇시간 후에 내렸다. 한번 수락했던 기자가 그래 주기를 다시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진지함과 선의로 기사를 만든 그가 불이익을 당하는 건 원치 않았기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다른 곳과 인터뷰. 마지막에 말했다.
“내가 한일관계에 대해 말하는 건 냉전을 넘어서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는 제국과 냉전을 경험했고 유일한 분단국이기도 합니다. 강대국의 세력다툼에 말려들어 제국과 냉전을 경험한 우리에겐, 그런 역사성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만드는 주체가 될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 책을 써야 했던 이유입니다.”

며칠전에 70세 넘으신 지인이 후원하고 싶으니 계좌번호 알려달라 해서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는데, 오늘은 새로 페친이 된 16세 중학생이 느닷없이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우선은 마음만 받겠다 했지만,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경험을 또하나 했던 날.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840404951984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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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씨의 작업> 가라타니 고진

최근 들어 한일·중일간 긴장이 높아진 것은 일본정부가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일본)내 제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긴장/대립을 이용해서 일본을 언제든 전쟁가능한 체제로 만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문제든 영토문제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일본국민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그 나라 국민들이 (자국을) 비판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러한 상호간 신뢰를 바탕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되는 일이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발신하려 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한국에서는 친일적이라고 비난 받고 일본에서는 반일적이라고 비난 받을 것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나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다.

(2014 년 8 월)

<원문>

パク・ユーハ氏の仕事 柄谷行人

近年、日韓や日中間の緊張が急激に高まって来たのは、日本の政府があえてそれ を作りだそうとしているからだ。それによって、国内における諸問題を打ち消すた めである。そして、対外的な対立・緊張を利用して、日本をいつでも戦争できる体 制に変えようと図っている。したがって、従軍慰安婦問題であれ領土問題であれ、 それらを解決する気などさらさらない。

私がこのように日本の政府を批判するのは、日本の国民だからだ。外国に関し ては、その国の国民が批判するだろうと思う。実際、韓国にもそのような人達が 大勢いる。私はこうした相互的信頼にもとづいて活動してきたのである。とはい え、それだけではすまないことがある。

その点で、私は、積極的に日本と韓国の間に立って発言しようとしてきたパ ク・ユーハ氏に注目している。彼女の仕事は、韓国では親日的と非難され、日本 では反日的と非難されるだろう。そのことを最初から覚悟して、従軍慰安婦問題 に長年取り組んできた氏に、私は深い敬意を抱いている。

(2014年8月)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제국의 위안부』 – 발간 직후 신문사 서평 및 인터뷰 모음

서평

인터뷰

박유하-주진오 대담 :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

[박유하-주진오 대담]

국산은 후지다는 편견은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확실히 국산은 후지다. ‘학자'(혹은 ‘교수’)는 그 중 대표적인 품목이다. 학자 행세를 하려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에다 박사 공부까지 짧게 잡아도 10년은 공부해야 한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 10년을 했다면 ‘귀신처럼’은 아니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은 가지는 법인데 이상하게 한국의 학자들은 그런 사람이 참 드물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월드컵이나 독도 같은 광풍이 한번 몰아치면 그저 ‘축구 응원단의 일원’으로 ‘우익 시위대의 일원’으로 그 초라한 몰골을 드러내고 만다. 해서, 이따금씩 괜찮은 학자를 만나면 그것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관점이나 의견에 차이가 나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만 있다면 충분히 기쁘다. 박유하 씨는 그런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책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보석과 같다. 어제 신문에 난 그의 대담 기사를 읽다보니 ‘남성 학자는 단지 냉철할 뿐이지만 여성 학자는 냉철한 데다 부드럽기까지 할 수 있구나’ 싶다.

(김규항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