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5/12/5

기자회견이 끝나고 사흘. 기소 이후 이주일 여, 내내 경황이 없어 답하지 못했던 전화, 문자, 메일, 메시지등에 답하기 시작했다.
이 주말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원고도 써야 한다.

경향신문 기자가 이번사태에 대해 정리한 기사를 써 주었다. 생각해보면 <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전면기사로 서평을 써주었던 매체다. 그럼에도 얼마전엔 나를 “친일교수”로 모는 기사를 쓰기도 했던.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의 매체가 결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책을 간행한 이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이 내 이름과 함께 돌아 다닌다. 어떤 이는 “설사 직접 쓰지 않았어도 그렇다고 알 수 있는 내용을 쓰지 않았느냐”고 한다.
위안부문제 해결은 어쩌면, 뿌리깊은 매춘차별의식에서 벗어날 때에야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당사자든 주변인이든.

“논박”이란 때로 필요하지만, 때로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논지도 아니고, 지식도 아닐 수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건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태도, 그리고 타자와 마주하는 자세일 뿐이다.

http://h2.khan.co.kr/20151203163105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1018259258419

渦中日記 2015/12/2-2

며칠간 경황이 없어 어젯밤 늦게야 오늘 기자회견에서 발표할 글을 썼다. 허핑톤포스트가 게재해 주었는데, 다시 보니 중요한 말을 빠뜨렸다.

나를 비판하는 이들은, 내가 “당사자/피해자를 배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의도했던 건, 또다른 “당사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문제발생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공존했던,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정부보고서에조차 등장할 수 있었던 “당사자”들. 세월이 가면서 지원자와 국가의 목소리에 묻혀 “삭제”당했던 목소리들.
나는 그렇게 해서 우리시야에서 사라졌거나 혹은 여전히 존재함에도 들리지 않는,”언로”를 갖고 있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위안부 할머니의 목소리를 나는 아직 세상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도하자마자, 고발당했다. “당사자”란 하나가 아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yuha-park/story_b_8695314.html…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9404569419788

渦中日記 2015/12/2

기자회견과 지식인 성명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한국언론 일본언론은 물론 미국 스페인 언론까지 와 주어 장내가 가득 찼을 정도였습니다. 관심 가져주신 기자,언론인 여러분들, 특히 Facebook 친구 언론인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위한 성명에 참여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어떤 국면이 될지 모르지만 선생님들이 함께 해주셨으니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려주신 분 중 한 분인 김원우 선생님께서 내내 뒤에 앉아 계시다가 가셨는데 저와 함께 찍힌 사진이 있기에 올려 둡니다. 우연히도 옆에는 역시 오래 함께 해준 친구들이 있군요

우선 간단히 보고 드립니다. 먼저, 오래오래 소중하게 기억될 이름들, 191분의 성함을 옮겨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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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강남순 (교수)
구인모 (교수)
권보드래 (교수)
권순엽 (교수)
권영돈 (교수)
권정희 (연구자)
권창규 (학자)
권희주 (교수)
김경옥 (교수)
김규현 (교수)
김두철 (교수)
김미영 (교수)
김석희 (교수)
김성보 (교수)
김승구 (교수)
김예림 (교수)
김용균 (교수)
김용찬 (교수)
김우재 (교수)
김유수 (학자)
김 철 (교수)
김현석 (교수)
김현주 (교수)
나병철 (교수)
나일경 (교수)
남기정 (교수)
남상욱 (교수)
문정인 (교수)
박경수 (교수)
박노현 (교수)
박삼헌 (교수)
박성현 (연구자)
박세진 (교수)
박슬기 (교수)

박정란 (교수)
박재석 (학자)
박진영 (교수)
박진용 (학자)
박현선 (교수)
박혜란 (교수)
박혜성 (교수)
배승주 (강사)
배아란 (연구자)
백규석 (연구자)
백문임 (교수)
서동진 (학자)
서현석 (교수)
소문수 (교수)
송기문 (교수)
송은영 (학자)
신경숙 (교수)
신인섭 (교수)
신형기 (교수)
심준섭 (교육가)
오경환(교수)
오김숙이 (연구원)
오덕재 (교수)
오석태 (학자)
오정환 (연구자)
유승경 (연구자)
유승진 (학자)
윤성호 (교수)
윤태진 (교수)
이강민(교수)
이경분 (교수)
이경원 (교수)
이경훈 (교수)
이권희 (교수)
이기연 (강사)
이순재 (교수)
이승은 (학자)
이승희 (학자)
이영준 (교수)
이우연 (학자)
이윤석 (교수)
이윤영 (교수)
이종일 (교수)
이진경 (교수)
이창남 (교수)
이한정 (교수)
이혜령 (교수)
이효석 (과학자)
임정화 (연구원)
임진영 (학자)
장세진 (교수)
장영철 (교수)
정규영 (교수)
정병호 (교수)
정승원 (연구원)
정영희 (교수)
정의태 (교수)
정종현 (교수)
정혜선 (교수)
정희모 (교수)
조관자 (교수)
조문영 (교수)
조석주 (연구자)
조세영 (교수)
진영복 (교수)
차승기 (교수)
최건영 (교수)
최길성 (교수)
최순애 (학자)
표세만 (교수)
한승욱 (연구자)
허병식 (학자)
홍윤표 (교수)

*작가・문인

고영범 (극작가)
고종석 (작가)
김경옥 (공연평론가)
김곰치 (소설가)
김도언 (작가)
김병익 (평론가)
김원우 (작가)
김현호 (사진비평가)
류 근 (시인)
문강형준(문화평론가)
문부식 (시인)
박일환 (시인)
배수아 (소설가)
배홍진 (작가)
변정수 (평론가)
서준환 (소설가)
손이상 (문화평론가)
송태욱 (번역가)
신은실 (영화비평가)
양한승 (문인)
양혜진 (번역가)
유시민 (작가)
이광호 (평론가)
이문재 (시인)
이원석 (문화비평가)
이제하 (작가)
장윤선 (번역가)
장정일 (소설가)
정과리 (평론가)
정숙희 (극작가)
정찬용 (작가)
조영일(평론가)
최규승 (시인)
최 범 (평론가)
함성호 (시인)
홍미화 (번역가)
홍세화 (작가)

*문화・예술인

강운구 (사진작가)
경 순 (다큐감독)
고성용 (건축사)
김인범 (예술가)
박진영 (사진작가)
안악희 (독립음악가)
유성준 (예술가)
임옥상 (화가)
장현우 (사진작가)
정경록 (독립영화감독)
조미영 (예술가)
조민숙 (예술가)
조세영 (독립영화감독)
최정우 (작곡가)
태준식 (독립영화감독)

*언론・출판인

김규항 (칼럼니스트)
김다미 (출판인)
김용범 (프로듀서)
김종영 (언론인)
김지현 (언론인)
노재현(출판인)
박성태 (언론인)
안보영 (프로듀서)
오태규 (언론인)
이강택 (프로듀서)
이수경 (언론, 예술인)
임현규 (광고인)
장혜경 (언론인)
정종주 (출판인)
조기조 (출판인)
조동신 (출판인)
조용래 (언론인)
주연선 (출판인)
최성욱 (언론인)
황성기 (언론인)
황영식 (언론인)
*법조인

금태섭 (변호사)
김용찬 (변호사)
김향훈 (변호사)
박도준 (변호사)
정우성 (변리사)
최명규 (변호사)

*의료계

김택수 (의학박사)
박성환 (의사)
윤종완 (의사)
윤준호 (치과의사)
정 부 (의료인)
최명환 (의사)

*종교계

이정우 (목사)

총 서명인 194명

『제국의위안부』의 형사 기소에 대한 지식인 성명

2015년 11월 19일, 서울 동부지방 검찰청은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 종군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묘사하고 일본군과 종군위안부를 “동지적 관계”로 표현하였다는 이유로 저자를 형법상의 명예훼손죄로 기소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 17일, 서울 동부지방 법원은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학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취지로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 가운데 서른네 곳의 삭제를 명하는 “가처분 신청 일부인용”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 일련의 조치에 대해 우리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선, 검찰 측에서 제시한 기소 사유는 책의 실제 내용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습니다.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은 저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인사들을 비판하기 위해 저자가 그들의 발언 중에서 인용한 것이며, “동지적 관계”라는 말은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조선인의 사정을 그 전쟁의 객관적 상황에 의거해서 기술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입니다. 검찰이 과연 문제의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기소 결정이 과연 공정한 검토와 숙의의 결과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공론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책입니다. 특히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집단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이 주관하는 아시아태평양상, 와세다 대학이 주관하는 이시바시 단잔 기념 저널리즘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국내 출판사 마흔일곱 곳이 참여하는 모임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 책의 삭제판 출간이라는 오늘의 출판현실에 주목하여 이 책을 올해의 책 중 한 권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에 논란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학술적으로 보다 철저한 조사와 정교한 분석을 요하는 대목이 있을 수 있고, 국내외의 이런저런 정치사회단체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군위안부는 당초부터 갈등을 유발할 요소를 가지고 있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까다로운 사안입니다. 이 사안을 다루는 합리적인 방법은 어느 특정 정치사회집단이 발언의 권위를 독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표출되고 경합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검찰의 기소 조치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사법부가 나서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론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와 발언의 자유가 당연히 제한을 받을 것이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주장들이 진리의 자리를 배타적으로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군위안부 문제의 범위를 넘어 역사 문제 일반과 관련해서도, 국가가 원한다면 시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도 무방하다는 반민주적 관례를 낳을 것입니다.

한 학자가 내놓은 주장의 옳고 그름을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발상은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입니다. 우리 사회는 1987년 권위주의 정권을 퇴출한 이후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민주적 관례와 제도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으며 사법부를 포함한 국가 기구 또한 그러한 사회적 진보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습니다. 검찰이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를 형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한 것은 그러한 민주화의 대세에 역행하는 조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시민들과 함께 박유하 교수에 대한 기소 사태를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부디 검찰의 기소가 취하되기를 바라며,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2015년 12월 2일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39315759428669&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theater

渦中日記 2015/12/1 – 기자회견 전야

그저께는 마이니치신문 인터뷰를 했고, 어제는 뉴욕타임즈 인터뷰를 했다. 한 일본인기자는 나에게 전화해서 한국언론의 반응을 물었다. 한국언론에서는 아직 인터뷰신청이 없고 기소를 직접 비판하는 기사나 칼럼은 내가 아는 한 아직 없다고 했더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이유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응원을 보내 주는 분들은 계시다.

내일 기자회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1년반 동안 재판소와 세상을 향해 “내 책은 위안부할머니를 비난하는 책이 아니다” 라고 외쳐왔지만 그 외침은 철저하게 묵살당했다. 읽은 이든 안 읽은 이든 나를 비판하는 이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책임을 부인하는 일본””피해를 호소하는 할머니”라는 두가지 대비되는 이미지인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그들에게 내 책은 그러한 “정황”에 대한 인식이 없는, 그러한 “정황과 싸우고 있는 할머니의 인권”을 짓밟고 있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 읽은 이들조차 “똥을 먹어봐야 아느냐”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전제”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문하지 않는다. 조금 사려깊은 이들은 “책이 설사 그런 의도를 담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상처입었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검사는 내게 책의 문맥을 보면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구절”이 문제제기되는 한 그건 “법적”으로는 문제삼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1년 반동안 알게 된 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검찰과 법정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사태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방면으로 생각하려 한 인문서적에 대해 “판단”이 맡겨져서는 안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법학자의 발상이 인문학자의 발상과 얼마나 다른지도 알았다.

가처분재판부와 검찰이 나의 책을 성실하게 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의 답변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했다고 쓴 원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데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검사는 “내가 한국에서 이 문제를 세번째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검사는 원고측이 제출한 방대한 자료들–유엔보고서니 그외 자료들을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출한 또다른 자료, 1992년에 한국정부가 만든 자료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료는 나의 견해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은 나의 책을 판단할 때 단순히 “할머니의 명예”침해 여부로만 묻지 않는다. 그들이 갖고 있는 현대일본에 대한 이해, 식민지시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 책에 대해 말한다. 나눔의집 측이 내 답변서를 읽고 “허위!”라고 주장했던 처음 주장을 바꾸어 나의 “역사인식”이 “공공선”에 반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전쟁범죄를 찬양”하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런 생각이 잘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그런 그들의 전략은 유효했고 “삭제하라”는 명령과 “기소”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내 책은 바로 그런 그들의 “전제”와 “사고”에 대해 물으려 한 책이었다. 그러니 나는 어쩌면 그동안 접점자체가 없는 싸움을 해 온 셈이다.
수십번 한 이야기지만 이 싸움은 할머니와의 싸움이 아니다. 지원단체와의 싸움조차 아니다. 그저, 20년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했이들, 그들이 이 사회에 심어놓은 “인식”과의 싸움일 뿐이다. 그 인식의 뒤에는 때로 이런저런 권력도 보이지만.
나를 지지해 준 이들 중에 외국등 “바깥”에 있는 이들이 많았던 건, 이 사회를 지배하는 통념과 힘에서 자유로운 이들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혹은 “안”에 있을지라도 우연한 인연이나 통념을 존재와 생각과 행동의 근거로 삼지 않고, 그래서 생각이 자유로운.

나를 위한 “지식인성명”에 서명을 받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내일 나의 기자회견에 이어 발표된다. 주로 학계, 문인을 포함한 문화예술계, 출판계, 언론계, 그리고 법조계 분들이 참여해 주었다.
오래 교류해 온 학문적동지이기도 한 분과, 고발이후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셨던 명망가가 나서주고 계신데 나는 늘 교류하는 페이스북 친구들에게조차 미처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유명진보논객들이 동참해 주었지만, 발표되는 첫성명에 늘 지지해 주었던 페북친구들의 이름이 없으면 그간의 상황이 반영되지 않은 성명서라는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었습니다.

혹 이제부터라도 참여해 주실 “해당분야” 분들은 아래 댓글에 있는 백승환군에게(이미 저에게 보내신 분은 괜찮습니다) 페이스북메시지로 이메일주소와 함께 성함(신분)을 적어 알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예:박유하(연구자), 홍길동(언론인)등. )
오늘밤 10시까지입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8473506179561

渦中日記 2015/11/29

열흘이 지나고, 오늘은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며칠 전에 페친 설안재 선생님이 보내주신 김치와(오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다.) 그 전에 페친 송민수님께 구입했던 사골국을 챙겨 먹고 기운도 차렸다.

나를 비난하는 층위가 너무 여러가지라서 벅차게 느낄 때가 있다. 위안부문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게 쌍욕을 쓰는 이들부터, 팩트가 틀렸다는 사람들, 태도가 나쁘다는 사람들, 방법이 나쁘다는 사람들까지. 심지어는 하는 얘기는 틀리지 않지만, 타이밍이 나쁘다는 사람들까지 있다. 내가 읽은 원고측 마지막 문서에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일본에 강제연행을 인정하게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딴소리를 해 일을 복잡하게 만드냐는 내용 조차 있었다. “한반도는 식민지 통치 하에 있었기 때문에 강제연행이 있을 수 없었다”고까지. 그러면서도 외부에는 “박유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한다”는 식으로 비판중인 것이 현재 상황이다. 그리고 그 비판들이 나를 감옥에 보내고 싶어하는 한, 나는 그 비판의 숫자만큼 대답해야 한다.

비판자들은 개인도 있지만 다수 혹은 집단으로, 조직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 나의 SNS까지 감시하며 즉각적으로 한일 양국어로 비판의 자료로 삼는다. 고발사태를 겪으면서 나는 스토커에게 감시당하는 기분이 어떤건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2년 전에 나온 이재승교수 글에 대한 반론을 써놓고도 아직 발표하지 않았을 만큼, 느리고 소극적이었다. “위안부 문제를 잘 모르고 있다””반론을 쓰지 않는 건 반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오늘의 기소가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에게 책임이 있다면 이 사회의 양식을 너무 믿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자기방어에 게을렀던.

어쨌든 이제 정신을 차렸다. 사골국과 김치와 찜질방 덕분이다. 일본에 가서 살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역시 여지없이 이런 것들을 사랑하니 좀 더 이곳에서 버텨 볼 생각이다. 고발사태를 겪으면서 서로 깊이 알게 된 사람들이 있어서 소중한 이 공간에서.
내 장점 중 하나는 상황이(상대가) 너무 심하면 씩씩해진다는 점이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7699806256931

渦中日記 2015/11/28

기소이후 열흘이 지났는데 여전히 제시간에 밥을 먹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비일상”의 시간들.

그동안 받은 염려와 위로의 문자와 메시지와 메일들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약간의 평정을 찾고, 댓글에 답글을 달려 하니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느낀다. 말을 하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아마도 죽기 전에 침대 옆에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볼 때, 비슷한 생각이 들 것 같다.

바보들이 바보인 건 자신들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어둡고 흐린 날. 많이 추운 날이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7068392986739

渦中日記 2015/11/27

아침에 나를 기소한 검사가 전화를 했다. 검찰에 오라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전자 지문날인”을 위해서라고 했다. 처음으로 “범죄 혐의자”가 되었음을 절감했다.

만인의 비난을 받는 사태는 이번이 세 번째다. 하지만 조금씩 그 양상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작년 6월에는 내 담벼락에 쏟아지는 댓글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지만, 이제 그런 일은 없다.
어떤이는 내가 친구만 댓글을 달 수 있도록 한 건 다른 의견은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힐난하지만 나는 들을 만한 의견은 듣는다. 두번의 경험에 의해 그런 비난의 대부분은 들을 만한 의견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어떤 비난들이 있는지는 내가 원하면 트위터로 쉽게 볼 수 있다. 해명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부분들은 메모 중이다. 사태가 안정되면 쓸 생각이다.

김규항 선생님이 올려주신 정철승씨의 글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나는 그런 이들의 글에 더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가부장제의식으로 똘똘뭉친 남성들의 비난이 내포한 폭력성에 대해서도 조만간 쓸 예정이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대한민국의 문제점은 그런 이들이 인기가 있다는 점이다.

고발 이후 모든 비난은 고발을 지탱했다. 특히 “박유하의 책은 문제 있는 책”이라는 암시를 흘려 대중을 호도했던 지식인들의 비판이야말로 기소를 이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지식인의 권위”는 때로 우아하게 폭력을 유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고발에는 반대한다”는 말은 지극히 자가당착적이다. 정말 비판하고 싶었으면 고발부터 비판했어야 했다. 그런 아이러니한 정황을 만든 것이 고발이라는 사태였다.

다음 주 수요일에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 서구 언론들이 관심을 보여 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서글프다. 위안부 문제를 미국에 호소하지 말고 직접 일본에 이야기하자고 나는 말해 왔는데, 정부와 지원단체가 기댔던 매체들이 이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찾아오는 아이러니라니. 나는 이런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아사히신문칼럼은, 어제 성명에 언급하면서 “하지만 정말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한국인들”이라고 쓰고 있었다.

가능한 일이라면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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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안내 記者会見案内

<제국의위안부>검찰 기소관련 박유하교수측 회견

언론매체 각위

일시 : 2015년 12월2일(수) 오전 10시
장소 :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쓴 박유하 교수가 검찰기소와 2014년6월의 고발사태 전후, 그리고 그 이후의 정황에 대해 말합니다.

기소 이후 대부분의 언론들이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할머니들을 “자발적 매춘부” 로 썼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안부들을 그렇게만 보아온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그들이 한 말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고발당시 원고측이 보도자료를 통해 내보내고 법원제출서류에도 사용했던 이러한 오해는 박유하교수가 법원제출서류와 그밖의 매체를 사용하여 반복적으로 설명했음에도 1년반 가까이 지나도록 시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소라는 사태를 맞아 반복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는 원고측 주장을 전혀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법원과 검찰에 특히 중대한 책임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동안 박유하교수는 여러 정황을 감안하여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수단을 충분히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가처분재판부와 검찰에서 상식에 바탕한 결론을 내려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음이 판명되었으므로 이제 언론을 향해 이 고발과 기소,그리고 책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2015년11월26일 무라야마담화의 무라야마 전수상, 고노담화의 고노전관방장관, 그리고 작가 오에겐자부로선생까지 동참한 일본에서의 성명을 받아 한 언론인은 박유하의 책이 “오독되었을 가능성” 을 제기했습니다.
위안부문제는 너무나 여러갈래로 착종되어 있어, 짧은 시간에 책과 고발사태에 대해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언론/학문의 자유가 없는 것으로 비치게 되어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마저 땅에 떨어지게 된 지금, 우선 시급하게 해명과 항의가 필요하다고 간주했습니다. 언론관계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2015년 11월 27일

세종대 박유하
뿌리와 이파리 대표 정종주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3667615302596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1/26

오늘 오후에, 나에 대한 기소를 비판하는 성명이 나왔다.

이번에 중심에 있어준 건 와카미야 아사히신문 전주필이고, Masahiko Nishi 교수, 우에노치즈코 교수, 고모리요이치교수, 작가 나카자와 게이선생등이 각각 발벗고 나서 주었는데, 오에겐자부로 선생에 더해 무라야마담화의 무라야마전수상, 고노담화의 고노전관방장관까지 동참해 주었다.

일본 최고의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내 책은 세간에서 말하는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얼마전에 통화했던, 원고가 된 한 할머님도, “당신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었다.

기사에 서명자 이름이 빠져 있어 첨부해 둔다.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이름들.

浅野豊美(Asano Toyomi, 아사노 토요미)、蘭信三(Araragi Shinzo, 아라라기 신조)、石川好(Ishikawa Yoshimi, 이시카와 요시미)、入江昭(Irie Akira, 이리에 아키라)、岩崎稔(Iwasaki Minoru, 이와사키 미노루)、上野千鶴子(Ueno Chizuko, 우에노 치즈코)、大江健三郎(Oe Kenzaburo, 오에 겐자부로)、大河原昭夫(Okawara Akio, 오카와라 아키오)、大沼保昭(Onuma Yasuaki, 오누마 야스아키)、小倉紀蔵(Ogura Kizo, 오구라 키조)、小此木政夫(Okonogi Masao, 오코노기 마사오)、加藤千香子(Kato Chikako, 가토 치카코)、加納実紀代(Kano Mikiyo, 가노 미키요)、川村湊(Kawamura Minato, 가와무라 미나토)、木宮正史(Kimiya Tadashi, 기미야 타다시)、グレゴリー・クラーク(Gregory Clark, 그레고리 클러크)、ウィリアム・グライムス(William Grimes, 윌리엄 그라임스)、栗栖薫子(Kurusu Kaoru, 쿠루수 카오루)、河野洋平(Kono Yohei, 고노 요헤이)、アンドルー・ゴードン(Andrew Gordon, 앤드류 고든)、古城佳子(Kojo Yoshiko, 코죠 요시코)、小針進(Kohari Susumu, 고하리 스스무)、小森陽一(Komori Yoichi, 고모리 요이치)、酒井直樹(Sakai Naoki, 사카이 나오키)、島田雅彦(Shimada Masahiko, 시마다 마사히코)、千田有紀(Senda Yuki, 센다 유키)、添谷芳秀(Soeya Yoshihide, 소에야 요시히데)、高橋源一郎(Takahashi Genichiro, 다카하시 겐이치로)、竹内栄美子(Takeuchi Emiko, 다케우치 에미코)、田中明彦(Tanaka Akihiko, 다나카 아키히코)、茅野裕城子(Chino Yukiko, 치노 유키코)、津島佑子(Tsushima Yuko, 쓰시마 유코)、東郷和彦(Togo Kazuhiko, 도고 가즈히코)、中川成美(Nakagawa Shigemi, 나카가와 시게미)、中沢けい(Nakazawa Kei, 나카자와 케이)、中島岳志(Nakajima Takeshi, 나카지마 다케시)、成田龍一(Narita Ryuichi, 나리타 류이치)、西成彦(Nishi Masahiko, 니시 마사히코)、西川祐子(Nishikawa Yuko, 니시카와 유코)、トマス・バーガー(Thomas Berger, 토마스 버거)、波多野澄雄(Hatano Sumio, 하타노 수미오)、馬場公彦(Baba Kimihiko, 바바 기미히코)、平井久志(Hirai Hisashi, 히라이 히사시)、藤井貞和(Fujii Sadakazu, 후지이 사다카즈)、藤原帰一(Fujiwara Kiichi, 후지와라 키이치)、星野智幸(Hoshino Tomoyuki, 호시노 도모유키)、村山富市(Murayama Tomiichi, 무라야마 도미이치)、マイク・モチズキ(Mike Mochizuki, 마이크 모치즈키)、本橋哲也(Motohashi Tetsuya, 모토하시 데츠야)、安尾芳典(Yasuo Yoshinori, 야스오 요시노리)、山田孝男(Yamada Takao, 야마다 다카오)、四方田犬彦(Yomota Inuhiko, 요모타 이누히코)、李相哲(Lee Sangchul, 리상철, Li Sotetsu, 리 소테츠)、若宮啓文(Wakamiya Yoshibumi, 와카미야 요시부미)  (54명)

사무국:西成彦( 니시 마사히코) [email protected]

http://news.donga.com/Inter/3/02/20151126/75041382/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6093969750848

渦中日記 2015/11/25 강의가 없었던 날.

강의가 없었던 날.

하루종일, 제 시간에 식사조차 못할 정도로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중인 성명작업을 지켜보는 일과, 전화와 메일과 이런 저런 연락에 시달렸다.
일본에서의 성명은 내일 오후에 동경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다고 한다. 회견에 나서 줄 이들은 와카미야 아사히신문 전 주필, 여성학자 우에노치즈코 교수, 일본근대문학자이자 “헌법9조를 지키는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아온 고모리요이치 교수가 될 듯 하다.

처음으로, 일본언론 중 아사히신문의 인터뷰에 응했다. 다른 언론들에는 다음주 기자회견(12월 2일 오전 10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을 기다려 달라 했지만, 아사히신문은 책을 낸 곳이기도 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발 후 받았던 형사조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 때 느꼈던 수모의 기억이 떠올라 잠시 고통스러웠다.

뉴욕타임즈 한국인기자에게서 인터뷰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내 사태가 “인권문제”로 보이고 그래서 관심이 있다 해서 응할 생각이 들었다.
고발 이후 짓밟히고 실제로 명예를 훼손당한 건 위안부할머니가 아니라 나다. 내 책을 읽고 할머니들한테 “매춘부!”라고 손가락질했을 이는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말해온 이들과 그런 차별의식에 동조한 이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언급했을 뿐이다.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다 해서.

저녁 무렵에, 비로소 기소장을 받았다. 내용을 읽고 그만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고측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안부문제 연구자가 아닌 그들이 어떻게 내 책이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일까.
결국 그들은 누군가의 주장을 믿고 대리싸움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박유하라는 개인보다는, 지원단체라는 오랜 권력, 힘을 가진 “기존”연구, 여론과 국가라는, “다수의 주장”을 선택한 셈이다.

기소장에 대해 썼던 메일 일부를 옮겨 둔다.
이제 저녁식사를 해야겠다. 다행히 구토증세는 없어졌다..(걱정해 주신 분들,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이 문제에 대한 과거의 이해를 그냥 적고, <박유하의 책은 그런 기존인식을 부정하고 있으니 범죄>,라는 논리입니다.
그런 논리가 성립한다면 학자는 누구나 기존인식만을 말해야 하고 국가를 대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저로서는 물리적강제연행을 부정했으나 구조적 강제성을 강조했고 실제로는 위안부연구자들도 그점에서 일치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고
제가 업자의 책임을 강조한 것을 두고 <국가책임 없다>(이것을 법적책임주장을 비판한 것과 연계시켜 <박유하는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고 하는 거지요)
고 말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왜곡하고 있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지적된 내용 대부분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이처럼 이중삼중의 비틀림들에 의한 억압이 제가 처한 상황입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5603783133200

渦中日記 2015/11/23

며칠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실망과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위안이 교차했던 시간들. 나쁜 기억은 내 안에만 기록할 생각이지만, 한가지만 써 두려 한다.

기소 다음날 아침, 대일피해자 보상문제분야에서 오래 일해 온 한 변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와는 어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 차 한잔 한 사이일 뿐이다. 그는 나의 책의 취지를 이해한다면서, “해결하고 화해하자는 것이니, 당신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했다. 뭐냐고 물으니 일본외무성이 뭔가 자료를 감추고 있는데 그걸 공개하라는 요구를 한국에서 기자회견이나 글로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 대해 요구할 것이 있으면 한국이나 외압동원이 아니라 직접 일본을 향해 말하는 것이 나의 방식이니 그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그럼 재판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나눔의집과 가까운 사이다. 그들의 생각이 새삼 명백히 보이는 듯 했다. 함께 하지 않는 자에 대한 처벌. 나에 대한 고발은 분명 그런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그런 요구를 받아 들였다.

암담한 건 기소 다음날 아침에 전화해서 나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그런 감성을 가진 그가, “약자”를 대변하는 이로 자신을 정의하고 또 보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진부하리만큼 횡행해 왔다는 것. 그게 어쩌면 우리사회의 본질중 하나일 수 있다는 것.

내 사태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는 성명서 작성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조만간 발표될 듯 하다. 두군데가 될 것 같다.

나는 나대로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정한 날, 냉전 종식후 태어난, 1992년의 문민정부를 상징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서거했다. 위안부문제는 문민정부의 출발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이어진 20여년에 대해 고찰한 책으로 인해 나는 국가에 의해 “범죄”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며칠동안, 무기력과 나를 포함한 세개의 의견표명을 위한 작업과 예정되었던 일정을 펑크내지 않기 위한 긴장의 무게에 짓눌렸다. 오늘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는데 그러자 구토가 시작되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구토할 때가 있는데 컨디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별로 없던 현상이 일어나는 걸 보니 생각이상으로 충격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기소 축하합니다. 유죄가 되기를 빌겠습니다” 라고 일본어로 트윗에 쓴 걸 봤다. 아마도 재일교포일 것이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눈의 여왕”얘기를 떠올렸다. 세상엔, 무언가가 눈에 박힌 채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눈에 있는 거울조각은 씻겨내려질 수 있을까. 게르다와 카이의 이야기는 늘 내게 많은 시사를 준다.

(며칠전 포스팅에 달아주신 격려의 댓글과 좋아요에 감사드립니다. 당분간 일방적인 글쓰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日本の友人たちへ
ご心配をかけています。大丈夫ですから心配しないでください。少数ではありますが、韓国人友人たちにも支えられています。検察の暴挙は検事の考えに過ぎません。時間がかかるかもしれませんが、なんとかこの難関を打開していきたいと思ってます。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4594109900834

渦中日記 2015/11/19 – 起訴

검찰이 나를 어젯밤에 기소했다고 한다.
조금 전에 간접적으로 알았다.

나눔의집에서 내보냈다는 보도자료를 우선 올려둔다.

検察が、私と出版社を起訴したようです。
———

보도자료-나눔의 집

<제국의 위안부>저자 박유하를 일본군’위안부’피해자 할머님들이 동부지검에 2014년 6월10일에 고소를 했습니다.

나눔의 집 할머님들은 저자 세종대 박유하 교수가 책에서 할머님들을 <자발적 매춘부>, <일본군의 동지이자 협력자>로 묘사하여 모욕했다고 하여, 출판물에 의한 <일본 군’위안부’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를 했습니다.

동부지방검찰청은 2015년 11월 18일 저녁, 저자 박유하와 출판업자 정종주를 기소(불구속)했습니다.

그리고 저자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 책이 동부지방법원으로부터 출판금지가처분을 받은 상태에서 문제된 내용을 “ㅇㅇㅇㅇㅇ” 하여 출판하고, 일본어판을 출판하는 반인권적 행위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법적 판결도 무시하는 반복적인 범죄 행위로 할머님들을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 했습니나.

권방문 검사(02-2204-4440)
사건번호 서울동부지방검찰청2014형제 25099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2216783471900

渦中日記 2015/11/18-2

광고하는 김에 하나 더.

일본에서 받은 상에 대해 한국언론은 보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딱 한군데 보도해 준 곳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분명, 포커스뉴스의 신윤석 국장님께서 마음 써 주셨을 것 같다.

실은 일본에서 주는 상을 받아야 할 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지난주 시상식에 불참하면서 보냈던 메시지에 쓴 것처럼, 수상하는 일은 이 책을 지지하고 응원해 준 여러 일본인들의 “마음”을 받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출판사와 편집자를 포함한 그 마음을 받아들고 연대하는 일이, 한일관계개선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 상을 받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의 문제를 잘 인식하는 이들이었으니까.
한 언론인은 내 책이 “자본과 군대의 이동이 여성의 상품화를 강화시키”는 구조를 지적한 책이라고 정확히 읽어내면서 “일본을 향해서는 어느나라나 다 한 일이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말하지 말고, 제국적팽창을 넘어서는 사상을 만들어내라고 말하”는 책이라고 정확히 칼럼에 쓰기도 했다.

아무튼, 일본쪽도 그렇지만 특히 페북에서 너무 많은 페북친구들의 옹호와 격려와 도움과 위안을 받았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두고두고 갚을 수 있을텐데.

http://m.focus.kr/view.php?key=2015102200172511519&share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1824696844442

渦中日記 2015/11/11

오늘은 원래는 아시아태평양상 수상식 날이었다.
하지만 일본에 가는 대신, 우연히도 겹쳤던 네번째 민사재판에 참석했다. 재판은, 참석자와 쌍방이 제출한 서류를 확인 후 향후 일정을 잡기만 하고 10분만에 끝났다.

민사재판 마지막 날은 12월16일로 잡혔고, 1월에 선고가 내려지게 되었다. 조정위원회에서 검찰로 다시 돌아간 형사소송도 조만간에 기소여부 결정이 날 것이다. 약 1년 반만에, 또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될 것 같다.

법원으로 가기 전 아침에, 저녁에 있을 수상식에서 편집자가 대독해 주기로 된 스피치를 써서 보냈다.

오늘은 빼빼로 데이라는데, 내게도 앞으로는 해마다, 바다 하나 사이에 두고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극명한 대조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일본어지만 기념으로, 오늘 아침에 주최측 언론사인 마이니치신문에 난 “심사평”과 스피치를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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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ジア太平洋賞 受賞スピーチ(2015・11・11、朴裕河)

このたびは『帝国の慰安婦』にアジア太平洋賞特別賞を授けてくださり、心から感謝しております。11月11日の朝、ソウルでこのスピーチを書いています。本当は日本に赴いてご挨拶すべきでしたのに、足を怪我して行けなくなったことをまずお詫び申し上げます。
受賞のお知らせを聞いたとき、嬉しいながらも複雑な心境でありました。というのも、みなさんのご存知の通り、現在この本は韓国で、慰安婦支援団体によって、慰安婦の名誉を毀損したとして訴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そのような状況の中にいるので、賞を受け取るべきかどうか、少し迷いました。ひとつには、わたしの意図とは別であるにしろ、原告として名前を連ねているおばあさんたちを無視したとみなされるだろうということ、もうひとつは、「日本」の賞であるだけで「日本の味方をしている、日本政府を代弁している」とする、原告側やその周辺人物の主張を証明するものと見られることが分かっていたからです。
しかし、そうした迷いの時間は長くありませんでした。わたしは、ある選択をめぐって迷うとき、そのことが発生させるであろう様々なことが、わたしたちの守るべき、考慮すべき、モラルと本質的に関係があるかどうかということを考えながら決めてきました。そして、今回の受賞は、誰かを傷つけるものでは、本質的にはないと考えたからです。そして私への評価や裁判に不利か有利かは、受賞自体が決めるのではなく、受賞を眺める人々の良識が決めるもの、と考えたからです。そして、その結果を、わたしは引き受けるつもりです。さらに言えば、現在私に向けられている批判より、わたしの拙い本を高く評価してくださった方々の「心」を受け止めることこそが、おそらく閉塞の中にある今の時代を切り開く方向のものと信じているからです。

この日本語版は、私が書きましたが、もはや私だけの本ではないと思っています。装丁を見たとき、とても嬉しかったのですが、装丁をデザインしてくださった方は、わたしがこの本に込めた意図を、本当に的確に受け止めてくださったと思っています。一輪の、韓国では国の花となっている、可憐なむくげの花は、少女であれ大人であれ、不遇な時代に生まれて耐え忍びながら生きた慰安婦の方々、そして砲弾の飛び交う中で亡くなった方々、そして病気で与えられた命を全うできずに亡くなった方々の悲しみと強さを、あますところなく表現していたからです。本の編集者である岡恵里さんは原稿を読んでいて涙が出そうになったと言ってくださり、日本人の最初の読者であるお二人にそのように受け止められたことは大きな励みになりました。そして、その二人をはじめ、出版するまで、そして出版してから多くの方たちの理解と気持ちが込められているわけですから、この本はもはやわたしだけ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書評や個別の感想の形で高く評価してくださった日本の方々との「合作」のようなものです。ですから、この賞はそうした方々と「一緒に」受け取るものと考えています。

日韓基本条約さえも締結まで14年かかりましたが、慰安婦問題は、はや四半世紀になろうとしています。この二十数年間わたしたちが経験してきたことが、後日どのように受け止められるのか、わたしたちはまだ分かりません。しかし、この本を評価してくださった方々の気持ちこそが今後を開いていけるとわたしは確信しています。わたしの本がよいからではなく、みなさんの気持ちをわたしがよく分かっているからです。様々な批判にさらされながらも、自分が考えていることを書いてこられたのには、ひとえにわたしが信頼する方々が支えてくださってきたからにほかなりません。
思えば数十年前に出会った日本人の方々がそうした信頼を最初に植え付けくれました。様々な事柄や人々が存在するなかで、信頼すべきものを見つけ、 大切にしていくことこそが世の中を平和に導いていくものと考えます。過去を考えるときも今を考えるときも。
悪い記憶や経験をみつめながらもそれに振り回されず、暗黒の中でも一筋の光のようなものを見つける心を維持し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それこそが、今を生きるわたしたちが次の世代のためにすべき、もっとも価値のあることと考えます。今後もそうした姿勢を維持し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ほんとう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2015年11月11日
民事裁判4回目の日の朝に、ソウルにて、 朴裕河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28221010538144

渦中日記 2015/11/8

주말엔 사실, 역사니 사회문제 같은 것보다 삶과 우정과 사랑,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너무나 “사건”이 많아 그럴 여유를 빼앗는다. 불과 2박3일로 일본에 다녀왔을 뿐인데도, 돌아와 보니 아이유와 성추행과 국방부의 교과서참여라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나역시도 “사건”을 겪고 왔다.

아이유사건이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건 나 역시도 “왜곡해석”으로 인한 적의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워해야 할 대상은,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의가 살의(殺意)가 된 장면에 맞닥뜨릴 때, 그런 나의 생각이 옳은지 의심하곤 한다. 오늘은 스카프를 살인도구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이를 만나, 이재명시장이 나를 공격했을 때 내게 겨눠지던 칼과 총사진들을 오랫만에 떠올렸다.

생각하면 “업자”의 문제를 제기했던 것도, 국가정책(중심담론)에 자신의 잔혹성을 감추고 참여해 이익을 얻었던 이들의 문제를 말하고 싶어서였다.
재벌을 비난하는 오늘의 노동자 안에도, 국가를 비난하는 오늘의 국민들 안에도, “그들”은 있다..

(학자들에 대한 반론, 연재하자고 연락해 온 곳이 있어 당분간 쉽니다. 정식연재를 시작하게 되면 다시 올리겠습니다.
어젯밤에 수많은 분들이 친구신청해 주셨는데 친구정리를 해야 해서 많이 기다리시게 될 지 모릅니다..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26756497351262

渦中日記 10/31 – 젊은 역사학자들에게 답한다 1

지난 봄에 <역사문제연구>에 게재되었던 젊은 역사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답한 글입니다. 긴 글이라 조금씩 나누어 올려 둘 생각입니다. 이 짧은 연재가 끝나면, 한꺼번에 읽을 수 있도록 노트에 링크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재승 교수에 대한 반론도 올릴 생각입니다.

지난번에 올린 재일교포 정영환교수에 대한 반론도 그렇지만, 이런 모든 논쟁들이 고발 이전에 이루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고, 이제 올해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군요.

———-
<1>
1. 비판 방식에 대해

1) 허위 적시

『역사문제연구』33호에 집담회 「젊은 역사학자들, 『제국의 위안부』를 말하다」(
『역사문제연구』33호, 2015.)가 게재되었다. 이들의 비판 역시 재일교포학자 정영환과 마찬가지로 오독과 곡해 그리고 적의로 가득한 내용이었던 것과,( 정영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 체제의 재심판」, <역사비평>111, 2015.) 한 학자의 고민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거친 말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로 학술지에 게재된 데 대해 먼저 깊은 유감을 표한다.
비판은 전체 문맥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각 기술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며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내가 책에서 비판했던 정대협에 대해서는 “맥락까지”(앞의 집담회, 561쪽. 이하 쪽수만 표시) 살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의 책에 대해서는 맥락은커녕 쓰여 있는 내용조차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이들의 비판이 논지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이 아니라 인상비평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위안부 문제 연구자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겸허해야 했다. 그러한 성급함과 은폐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정영환에 대한 반론도 참조해 주기 바란다.( 박유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체제」, <역사비평>112, 2015.)

이들의 비판이 얼마나 성급한 오독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먼저 제시해 둔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 2부 3장, 즉 위안부의 재현의 문제를 다룬 부분에서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의 문제와, 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해 간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소녀 이야기』의 경우 할머니의 증언이 애니메이션에서 어떤 식으로 변형되었는지를 지적한 것이니 이 부분이 할머니들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또 후자에 관해서도, 나는 “그런 변화는 의식적인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듣는 이들의 기대가 그렇게 만든 측면이 크다”라고 썼다. 이어서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의 증언에 차이가 난다고 해서 위안부들만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또 그런 증언을 듣고 싶어 했던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이라고 해야 한다. (…) 피해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민족 담론은 표면적인 피해 인식 외의 모든 기억을 말살시키려 한다”( 박유하,『제국의 위안부』, 뿌리와이파리, 2015, 133-134쪽.)라고 썼다.

그렇게, 이 부분의 비판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 피해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민족 담론임을 분명히 하면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영원히 안 볼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는 우리 안의 욕구에 대한 언급에 이어 이렇게 썼다. “그러나 70세가 되어가도록 그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없다면, 그건 과거의 상처가 깊어서라기보다 상처를 직시하고 넘어서는 용기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혹은 우리가 아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보듬는 자신에 대한 사랑 대신 타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더 큰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제국의 위안부, 뿌리와이파리, 2015, 134)라고.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대상이 위안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자 해방 후 한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젊은 학자들은 “위안부경험을 했던 사람들한테 이런 반성과 비판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는데도 저자는 이 비판을 그녀들에게 집중하죠. 예를 들어 <70세가 되어가도록 과거의,(중략)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표현처럼요. 용기의 부족, 미성숙 등으로 몰아세우고 있어요.”(550)라면서 비난한다.
사실 이 부분은 『제국의 위안부』를 고발한 이들이 첫 번째 고발장에서 적시한 109곳 중의 하나였다. 지원단체는 이후 내가 반박문을 제출하자 지적 내용을 반으로 줄이고 고발 취지를 바꾸기까지 했는데, 이 부분은 그때 사라진 지적부분이다. 젊은 학자들 중에 소송문서작성에 직접 관여한 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기서 문제 삼은 내용 역시 이들의 주장과 같았다.
해방 후 70년이라는 시기에 할머니가 70세라면, 해방 무렵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연히 위안부 체험을 했을 리도 없다. 이 집담회는 이런 식의 웃지 못할 오독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은 『제국의 위안부』 33쪽에 나오는 웃고 있는 이미지의 사용을 문제 삼으며 사진 위치가 의도적(554)인 것이 명백하다면서 비겁하다는 식의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는데, 33쪽은 물론 32쪽에도 34쪽에도, 이들이 지적한, 위안부의 숫자가 20만명보다 적고 상대한 숫자도 적고 연애도 하는 존재였다는 대목은 이 사진이 실린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미지 사용 위치는 출판사가 정한다. 명백히, 나를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로 몰아가기 위한 허위이자 근거 없는 비방이다. 이들의 비판은 유감스럽게도 정영환에 못지않게 악의적이고 그 왜곡 수준이 범죄적이다. 또한 『소녀 이야기』에 대한 나의 지적을 두고, 내가 없는 얘기를 한 것처럼 말하면서 비웃지만,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보았을 때는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근거 없는 비판은 하지 않는다. 또 나는 『제국의 위안부』의 비판에 대한 반박에 “표현의 자유”(543) “학문의 자유”(543, 572, 575)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옹호해야 하는 문제적인 기술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이들은 하지도 않은 행위를 한 것처럼 말하면서 허위에 입각한 비방에 치중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22584924435086

渦中日記 2015/10/22

그저께저녁, 감기로 골골거리고 있는데 와세다대학에서 연락이 왔었다. 와세다에서 주관하는 “이시바시탄잔 기념 저널리즘 대상”수상자로 결정되었다고.

얼마전에 쓴 것처럼 지난번 마이니치신문사의 수상소식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이번 소식은 순수하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소감을 써 보내라기에 그 이유를 썼다.

실은 마이니치의 경우 수상식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밝고 화려한 장소에 나가 웃는 얼굴을 할 기분은 아직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지인의 의견에 힘을 얻었고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결코 위안부할머니를 모욕하지 않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점 부끄럼이 없다. 그래서 수상에 대해서도 당당해지기로 했다.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오해를 풀어 주시리라 믿는다. 수상 덕분에 이 책을 읽는 일본인들이 한사람이라도 더 늘어난다면 위안부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면 되었지 결코 방해가 되는 일은 아니라는 확신에도 변함이 없다.

감기가 나으면 그동안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셨던 페친여러분들과의 만남도 가져야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들께 감사 전하면서 보고드립니다.

<소감>

“대학원에서 배웠던 와세다대학이 주관하는, 그것도 이시바시탄잔을 기념하는 상을 수상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시바시탄잔은, 반전, 반군대, 식민지 포기, 소일본 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국가/제국의 욕망에 개인이 어떤식으로 동원되고 착취당하는지를 생각해 본 책이니, 의도하지 않았으나 이시바시의 사상과 접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계를 넘어, 이시바시와 같은 사상을 계승하고 공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작금의 동아시아가 불안정한 만큼 간절히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집필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大学院で学んだ早稲田大学からの、しかも石橋湛山の名を冠する賞を受賞することになってとても嬉しく思います。石橋湛山は、反戦、反軍、植民地放棄、小日本主義を目指しました。「帝国の慰安婦」は、国家/帝国の欲望に個人がどのように動員され、搾取されるのかを考えてみた本ですから、石橋湛山の思想に図らずも接し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境界を越えて、石橋のような思想を受け継ぎ共有することが本当に必要と、現在の東アジアが不安定なだけに切に思います。そうした賞をいただいたことは、今後の仕事の上でも大きな励みになり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17801724913406

渦中日記 2015/10/22-2

하루에 渦中日記를 두 번 쓴 적은 거의 없다.

이 제목으로 쓰는 내용은 <제국의 위안부>, 혹은 재판에 관한 얘기들이다. 낮에 <제국의 위안부>가 높이 평가받았단 얘기를 썼는데 저녁에는 반대되는 상황을 써야 하니 아이러니다.

오늘, 그동안 진행해 왔던 “조정”이 중단되었다. 따라서 이제, 형사고발에 관한 결정은 검사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제시된 원고측 요구는,
1.사과,
2.삭제요구부분을 000표시한 한국어삭제판을 다른 형태로 낼 것(000표시가 삭제된 내용을 “간접적으로”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3. 제3국에서 내는 책도 한국에서 삭제한 부분을 삭제할 것,
이 세가지였다. 그러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2번도 일종의 검열이었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다. 대신 3번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일본어판은 번역도 아니고 독자적으로 낸 책이어서 권리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요구를 내가 수용해 일본측 출판사에 요구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받은 연락은, 원고측은 일본어판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조정에 부응하기 어렵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2번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모든 게 아마도 나눔의집 소장의 생각일 것이다. 내가 얼마전에 통화했던 할머니는, 자신이 형사고발인 명단에 오른 줄도 모르고 계셨다.

두통/근육통에서 해방되었나 했더니 오늘은 기침이 심하다. 문득 겁먹으면 기침을 심하게 하던 영화속 러시아의 공주가 생각난다. 잉그리드 버드만이었을 것이다.
겁을 먹은 건 아니지만 긴장되기는 한다. 아무튼 이 달 안에 형사고발에 관한 결정이 날 것 같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17953421564903

渦中日記 2015/10/19

어제 유달리 건조하다고 느꼈던 건 감기가 오는 전조였던 것 같다. 바쁜 일정들 대충 끝내고 좀 여유롭게 지낼 수 있겠다 생각했던 첫날,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결정해야 하는 몇가지 일이 있어서 머리를 아주 쉬어 주지는 못한다.

2주일 전엔 오랫만에 검찰에 갔었다. 이제 곧 결정해야 할 “조정”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여름부터 3회의 가처분재판, 5회의 검찰조사, 3회의 민사재판을 받으며 느낀 것은,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나의 책에 관해 논하는 일의 무의미함이다. “법”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일이란 “이미 존재” 하는 규범에 근거해 사고하는 일이어서, 나와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자체가 다르다는 걸 나는 법학자들의 사고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위안부문제가 학계에서는 어떻게 이해되어 왔고 운동은 어떠했으며 나의 주장은 이러한 것이라는 주장을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말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동안 원고측 주장에 최대한 답변해 왔지만, 검찰은 “정말 나쁜”일을 한 수많은 사람들을 조사하고 구속하는 일만으로도 바쁠테니 국력을 소모하는 일에 나역시 가담해 온 셈이다.

최근 등장한 “고소사회”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 소모가 많은 사회에 살고 있다. 결코 그럴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하긴 늘 그랬는데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만큼 에너지가 넘쳐난다는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고발은, 할머니가 아니라 내가 비판했던 주변인들이 제기했고 주변인들의 의사만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최근에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재판에 대한 나의 회의의 첫번째 이유였다.
법의 억압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답변을 해 왔지만 그런 의미에선 나역시 나를 엉뚱한 방식으로 소모해 온 건지도 모른다. 1년하고도 4개월동안.

날이 흐리다. 비가 온다면 어젯밤 포스팅은 “기우제 포스팅”이 되는 걸텐데. 그랬으면 좋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1641782171846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