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2

박일환
2015년 2월 21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2>

두 번째 글입니다. 다른 사람 담벼락에서 짧게 논쟁을 이어가다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아예 제 담벼락에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쓰려고 했던 내용과 다른 내용을 먼저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른 비판들은 대부분 근거가 부족하거나 허위에 의한 비방이라고 보이는데, 이 부분만큼은 충분히 논쟁이 될 만한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법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최소한의 상식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발은, 박유하 교수가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한다고 말씀하기에 그건 사실과 다르며 분명히 책임을 묻고 있다고 했더니, 박유하 교수는 일본국가의 ‘강제성’ 부분을 부정한다면서 저에게 법원의 가처분 결정문과 고노담화를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쟁점은 일본의 책임을 어디까지 묻느냐는 것이겠지요.)

핵심은 조선인 위안부의 강제연행 여부인데요. ‘강제성’과 ‘강제연행’은 분명 다르지요.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에 대해 일본 국가가 기획하고 관리(주체적으로 관여) 했으며, 위안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 군인의 직접 강제 연행은 드물며 예외적 일탈 정도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구체적 사례가 드물다는 거지요. 이에 대해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일본도 고노담화를 통해 ‘강제성’을 인정했는데, 오히려 박유하 교수가 그런 부분을 사상함으로써 법적 배상을 어렵게 한다는게, 제가 이해하는 비판자들의 주된 요지입니다. 우선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고노담화에서 해당되는 부분을 살펴볼까요?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한국위키피디아의 번역문)

자세히 읽어보면 표현이 모호합니다.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라는 부분은 직접 연행을 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강한데, 뒤에 나오는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라는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관헌은 아마도 총독부의 말단 관리(관헌이라고 했으니 군인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일 겁니다. ‘가담’이 ‘감언, 강압’인지 강제연행인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에 문맥상으로는 ‘감언, 강압’에 가깝다고 보입니다. 문장의 출발과 중간 내용이 ‘모집’에 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박유하 교수는 모집 과정에서 있었던 ‘감언, 강압’을 부정하지 않으며, 다만 직접 강제연행은 사례가 드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해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물론 강제연행이 없었어도 ‘감언, 강압’만으로도 충분히 범죄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박유하 교수도 일본국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요.(지원단체는 보상이 아닌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이의 담벼락 논쟁에서 상대방에게 직접 강제연행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쉽게 풀릴 문제라고 했습니다(최소한 의미있는 정도의 수치가 나와야겠지요). 그에 대해 돌아온 답이 고노담화를 보라는 것이었고, 살펴본 것처럼 고노담화의 내용은 모호합니다.

현재 일본 우익은 고노담화를 부정 내지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위안부 지원단체는 고노담화로는 부족하며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국가범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죄문제에 있어서는 고노담화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

제가 보기에 진심은 어떤지 몰라도 문구상으로는 사과의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습니다. 이후에 후속조치로서 보상 혹은 배상의 문제에 있어 ‘아시아여성기금’ 문제가 불거지는데, 여기서 정대협 등 위안부 지원단체는 일본의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이 문제는 복잡해서 따로 다루어야 합니다)

정리를 해야 할 듯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부분을 어떻게 보느냐는 충분히 논쟁이 될 수 있으며, 이 문제에 국한해서 문제가 불거졌으면 전문가도 아니고 특별히 아는 것도 없는 제가 나설 이유도 없었습니다. 학자들끼리 논쟁을 하면 되니까요. 언뜻 보기에 강압이나 강제연행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 차이가 작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줄곧 문제가 되고 있는 거지요. 일본은 고노담화에서 많은 것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고노담화에서 더 나아가게 하려면 강제연행 부분을 더 명확하게 밝혀내는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박유하 교수는 본인이 파악한 자료에서 그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고요. 말로 떠드는 건 상대를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구체적 자료에 근거한 치밀한 논리가 필요한 법입니다.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작성일: 2015.02.2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7051649988415

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1

박일환
2015년 2월 21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1>

책을 안 읽은 분들이 많고, 구하기 어려워서 내용을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시므로 제가 이해한 대로 몇 차례 서술하고자 합니다. 물론 저 역시 오독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며,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위안부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위안부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상은, 어린 소녀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하루에 수십 명씩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능욕당한 민족의 수난자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박유하 교수는 대체로 이렇게 말합니다.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들은 10대도 있지만 주로 20~25세 정도의 여성들입니다.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간 사람도 있지만 그건 소수이며, 다수는 민간의 업자나 관청의 말단관료들이 감언이설로 속여서 데려간 경우이고, 나아가 위안부의 성격을 알고 간 사람도 있고, 실제로 매춘에 종사하다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위안부를 구성하고 있는 여성들은 층위가 매우 다양하며 하나의 이미지로 획일화해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박유하 교수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러한 팩트마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우선 민간업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을 면해주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유하 교수는 그런 민간업자들을 만들어낸 일본 국가에게 1차적 책임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 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을 직접 ‘동원’한 것이 업자들이었다고 해도, 또 그들이 ‘가라유키상’처럼 유괴되거나 자발적으로 팔려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또한 위안소를 기획하고 관리한 주체가 일본임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군이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는 사실도, 일본군이 상품과 그것이 유통되는 시스템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식의 일방적 권력의 존재는 군이 시스템을 ‘관리’한 관리자라는 사실, 다시 말해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온건통치를 유지하면서) 식민지인들에게 불법행위를 전담시켜 그들을 동족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다음은 ‘자발성’과 ‘매춘’이라는 말에 대해 살펴볼까요? 혹자는 박유하 교수가 조선인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표현했다고 하는, 오도된 이야기를 사실처럼 퍼뜨리기도 합니다. 위안부들은 일본 군인들에게 관계의 대가로 분명히 돈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팩트이며, 이 점을 가지고 일본 우익들은 위안부를 돈을 벌기위한 자발적인 매춘부일 뿐이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박유하 교수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그런 ‘추업’에 그녀들이 ‘자발적’으로 향했다면 무엇이 그런 표면적인 ‘자발성’을 이끌어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남성이고 군대이고 국가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부’란 어디까지나 국가와 남성, 그리고 격리된 남성 집단을 만드는 전쟁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생긴 존재다. 위안부의 자발성이란, 본인이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국가와 남성과 가부장제의 차별(선별)이 만든 자발성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폭탄이 터지는 최전방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며 병사들의 욕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 를 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이유는 우리가 ‘일본군에게 순결을 짓밟힌 어린 소녀’, ‘일본에게 범죄를 추궁하며 싸우는 투사 할머니’ 정도로 알고 있는 위안부 상에 대한 단일한 이미지를 벗겨내야만(그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하나이고, 다음으로는 지금도 일본의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우익들에게 근거를 들이대며 당신들 국가의 잘못이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자꾸만 길어지네요. 이만하고, 다른 이야기는 이어서…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7051543321759

정우성, <금서> 『제국의 위안부』에 관하여

정우성

(출처) https://www.facebook.com/woosung.jeong.7/posts/838926126148741

<제국의위안부>라는 책은 이제 한국에서는 읽을 수 없게 됐습니다. 금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자는 손해배상책임과 형사고소 이 두 개의 소송이 남았습니다. 긴 싸움이 될 것이며, 수년의 피곤함을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수준이 드러날 것입니다. 저는 저자인 박유하 선생을 몰랐다가, 독서를 하고 서평을 쓰면서 페북으로 연결되었죠. 작년 여름의 일입니다. 제가 그때 7편의 서평을 썼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남을 인정하는 기준이 매우 높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저서에 대해 서평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무려 7편의 서평을 쓴 까닭은 <제국의위안부>에 담긴 글이 제 사유를 많이 넓혔기 때문입니다. 금서가 된 이 책은 중학교수준의 문장이해력이라면 읽고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책입니다(물론 심리적 편향이 문장이해력을 방해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말할 때 그것은 매우 묘한 의미랍니다. <자유>에는 사적 본질이 있과 사회적 본질이 있습니다. 사적 본질은 사실상 “나의 양심”과 “나의 의지”에 관한 것인데, 이게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서양 철학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사회적 존재를 이야기할 때, 예컨대 페북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칼럼나 저술을 하여 주장을 하거나, 거리에서 뭔가를 말할 때의 자유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모두 사회적 차원입니다.

<자유>의 사회적 본질은 <나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의 본질은 <타인의 자유>에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나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류의 사상가들이 자유를 탐구하고, 수많은 목숨들이 자유를 이뤄냈을 때의 그 자유는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었습니다. 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면서 자신의 자유가 확립되는 것이 자유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자유를 외면하는 자유는 없으며, 그런 자유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꼴값을 떠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먼저, <자유>에 대한 저의 생각이 깊게 묻어난 <제국의위안부서평 7>을 소개합니다. 이글은 제가 쓴 게 아닙니다. 1859년에 출간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영국에서 출간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의 문장을 인용해서 쓴 서평입니다. 2014년 9월 6일에 쓴 글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지요. 인간은 매우 볼품없이 야만적이고 미개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게 대부분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 인류는 스스로 개선해 왔고 한 번 이룩한 진보는 좀처럼 후퇴하지 않습니다. 갈등과 파국은 있으나 더 나은 개선이 없는 한 그 진보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게 역사입니다. 정우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존 스튜어트의 밀의 목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서평 7: http://wp.me/p3Xhl1-lz

금서 <제국의위안부>를 읽으면서 저는 아주 많은 사유의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그중 빛나는 발견 중의 하나가 <과장>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짓말을 <완전한 날조>로 이해해 왔습니다. 만약 그것이 새빨깐 거짓말로 밝혀지는 순간 그런 거짓말은 이제 괜찮습니다. 재판을 받는 거짓말은 그 위험까지 단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좀처럼 밝혀지지 않고, 양심을 핍박하지 않으며 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과장하는 거짓말>입니다. 저는 금서 <제국의위안부>를 읽고 <과장하는 거짓말의 존재와 위험>을 깨닫게 됐습니다. 중년이 돼서 알게 된 이 위험은 어떻게 생각하면 지나치게 늦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빨리 알게 돼서 기쁩니다. 저는 이것을 주제로 장차 <어린이 철학 강의> 책을 저술할 작정입니다. 서평 2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평 2: http://wp.me/p3Xhl1-kv

몇몇 똑똑한 사람은 <위안부>와 <정신대>를 구별하겠습니다만, 저는 잘 몰라서 그것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저만 그럴까 싶어서 주위에 많은 사람한테 물어봤습니다. “정신대와 위안부의 차이를 아니?” 제 주위에는 모두 무식한 사람만 있을까요? 모두 몰랐습니다. 매주 수요일에는 수요집회가 열립니다. 우리 회사 앞에는 <위안부 소녀상>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정대협 주최로 수요집회가 열리는데 중학생 아이들이 많이 옵니다. 그 학생들에게 정대협의 주장이 각인됩니다. 이것은 매우 강렬한 메타포입니다. 우리 인간은 서술형 문장으로 기억하지 않고 메타포(비유)로 기억합니다. 그것이 머릿속 사유체계에 강력한 프레임을 만들죠. 아이들은 자기 나이 또래들이 일본군에 끌려갔다고 생각하면서 증오심을 갖고 돌아갑니다. 얼마나 올바른 일이지 의문입니다만, 그런데 그 아이들이 정신대와 위안부의 차이를 알까요? 서평 3는 주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서평 3: http://wp.me/p3Xhl1-kF

물론 박유하 선생의 금서 <제국의위안부>는 매우 불편한 책입니다. 우리가 진리처럼 알고 있는 사실과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할 뿐더러, 그 이야기가 수많은 “증언”과 “기록”에 의해서 뒷받침되며,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등장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이 책을 읽다가 몇몇 단어에 열폭하기도 하죠. 열폭을 부른 단어 때문에 다른 문장, 사실, 문장들의 맥락, 저자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조차 모두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립니다. 그중 상당수가 교수나부랭이들과 <지식인>이죠. 저도 매우 낯선 체험을 했고 또 그런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반대한다고 머뭇거리며 표현했다손 치더라도, 이 책으로 말미암아 내가 만난 <와타나베>와 <메이>의 존재는 제국과 전쟁을 바라보는 내 시야를 넓혔습니다.
서평 4: http://wp.me/p3Xhl1-kH

만약 여러분께서 인내심이 있고, 또 지적 호기심이 있다면 여기까지 네 편의 서평을 읽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인내심과 지적호기심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진정한 에너지랍니다. 위의 네 가지 서평만으로도 금서 <제국의위안부>가 만만한 책이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의 첫번째 서평은 매우 소박했답니다. 마이너스와 플러스가 함께 병존하는 입장처럼 읽히는군요. 2014. 7. 13.일의 서평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거의 두 달에 걸쳐 서평을 쓴 셈입니다. 엔터테인먼트로 저술하는 사람이 아니라면(그런 사람도 많습니다), 한 권의 책을 쓸 적에는 수많은 시간, 수많은 자료,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번뇌가 들어갑니다. 모든 서평에 저자의 그런 노력에 준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만, 제가 첫번째 서평을 쓸 때 들었던 느낌은 ‘이 책, 좉됐다. 승냥이들이 몰려오겠군”하는 것이었습니다. 금서 <제국의위안부> 는 제국주의를 겨누고 있지만 슬프게도 한국인의 정신세계가 제국주의적이라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세계에 대한 약탈과 방화와 침략이 행해지는 것은 이 사회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서평 1: http://wp.me/p3Xhl1-kq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금서 <제국의위안부>를 읽으면서 저의 역사에 대한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독서를 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그 책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이분법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독서의 본질은 사유함에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내가 알고 있는 지식에 중대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또 40년을 넘게 살면서 듣고 겪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저의 이런 체험은 이 책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사유를 확장했습니다. 예컨대 소주를 마시면서 친구와 허튼소리를 할 때, 그러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거나 자기 생각이 정리되었던 체험, 누구나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저는 대결함으로써 존재성을 확인하는 80녀대 이후의 진보주의자들의 헤겔철학적인 습성과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그게 철학적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진보파들에 만연된 국가주의적 관념이 어떻게 역사에 발현되는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역사는 사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관념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죠. 이 서평은 비교적 난해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이 서평을 끝까지 읽어냈다면 당신의 내 영혼의 친구입니다.
서평 5: http://wp.me/p3Xhl1-kP

여러분, 여러분은 팬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각자 자기 사유의 힘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어린 아이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스스로를 명망가와 대등하게 생각하시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학자나 지식인이나 정치인,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에, 그렇게 정신세계가 깊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저도 여러가지 할 말은 있습니다만,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기본적으로 “오만”하기 때문이며, 더욱 문제는 그 오만함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엘리뜨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은 있어도 남에 대한 생각을 “습관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게 어디 한국인의 DNA겠습니까. 아마도 그런 문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말을 하려면 귀가 있어야 합니다. 박쥐의 귀가 아니라 사람의 귀, 이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문장을 이해하고 진심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없는 사람의 논쟁은 간단합니다. 이미 쓰기 전에, 이미 말하기 전에 결론이 난 “논쟁”, 그것도 아주아주 민감한 주제에 관한 논쟁 글은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씨발 죽어라 마녀야” 박노자교수와 이재승교수를 반박하고 금서 <제국의위안부>를 옹호하는 서평입니다.
서평 6: http://wp.me/p3Xhl1-l7

이렇게 저는, <제국의위안부>에 대해서 7편의 서평을 썼습니다. 이제 금서가 됐으니까 책을 들고 저자를 찾아가서 싸인이라도 받아야겠습니다. 보통 파시스트는 한 가지의 정의, 다 하나의 길만을 생각합니다. 대개 그들의 눈빛은 단호합니다. 박유하와 한 하늘 아래 사는 것을 비통하다고 말했던 성남시 시장 이재명 변호사의 눈빛처럼 말이죠. 파시스트는 자기가 위험한 생각에 젖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필연적입니다.

너무나 태평하고 자연스러운 <반일파시즘> 프레임. 관심없습니다. 금서와 금기를 아무리 주장한다 하더라도, 과거가 될 것은 이미 과거입니다. 저는 그저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류의 온유한 공생을 위한 길을 모색할 작정입니다. 더디더라도 그런 지구를 내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본문:

고발당했던 작년 6월에도 지금과 같은 마녀사냥식 비난과, 그들의 비난을 정당화해 주는 지식인들의, 왜곡과 곡해와 근거없는 중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면식 한 번 없었던 이들의…

게시: 박유하 2015년 2월 19일 목요일

이관식, 난독, 오독에 관해

이관식

https://www.facebook.com/lukeinsaipan?fref=ts

 

2월 19일 포스트

난독, 오독이란 게 별 거 아니다.
게으르면 그리된다. 물론 인간은 이미 결론을 정한 채 편향된 컨텐츠에 끌리기 마련이지만 최소한의 양식이 있다면 양쪽, 아니 여러 입장의 글을 읽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이재명 시장으로부터 촉발된 논쟁에서 꽤나 명망있다는 학자나 책 좀 본다는 이들조차 기본적으로 게으르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무리일까?

다시 밝히자면 이재명 시장은 이제 내게는 후안무치하며 선동을 일삼는 모리배쯤으로 남았다. 실망을 넘어 그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수많은 폭력적인 댓글을 일부 선동했고 아직까지도 본인이 한 짓이 폭력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 사태가 우리 사회의, 특히 정의롭다고 주장하는 몰지각한 대중의 폭력적 단면을 드러낸 일이라고 본다.

책으로 인해 촉발된 논쟁이라면 책을 우선 읽는 게 옳다. 책의 일부 표현에 대한 법원은 판단을 내세우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법원의 판단은 항상 옳은가? 그리고 재판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하급 법원의 1차 판결일 뿐이며 그조차도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갈리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된 문제이긴 하나 이 일에 관심을 가지며 제국의 위안부는 물론 증언록과 관련자료 몇권을 읽었다. 물론 온라인 상의 여러 주장도 거의 대부분 스크립해서 읽었고 아직도 읽는 중이다. 위안부들이 직접 증언한 몇개의 이야기만 읽어도 기존에 우리가 알던 이야기와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증언록은 위안부 문제가 지금처럼 편향된 방향으로만 알려지기 전에 녹취,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다. 몇권이 아니라 몇분의 증언만 읽어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기본적인 자료조차 습득하지 않은 채 그동안 체제 안에서 받은( 그토록 부정하는 전 정권들이 고의적으로 저지른) 편향적인 정보만으로 폭력적 댓글놀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박유하 교수의 주장이 온전히 옳다는 것이 아니다. 법원을 끌어들여 입을 틀어막고 책을 판금하기 전에 최소한 이 문제에 대해선 논의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우루루 몰려가 돌을 던지기 전에 말이다. 연휴 내내 우리 사회의 폭력적 단면을 다시 확인한 것 같아 씁쓸한 새벽이다.

 

이소영, Vladimir Tikhonov (박노자)선생께

이소영

https://www.facebook.com/duckling.hyeon?fref=ts

 

2월 18일 포스트

Vladimir Tikhonov 선생님께,(다 쓰지 못했는데 실수로 올라갔습니다. 수정한 글도 다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박노자 선생님 글을 읽으며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한 여성주의자로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 식견이 깊지도 넓지도 못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의 글이 저를 계속 아프게 하여 망설이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 물음이랄까 주장이랄까… 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지배자가 아닌 피해자 위주의 역사해석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노동자, 장애인, 소수인종, 여성 들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필요한 일이며 <제국의 위인부>는 그 중 피해당사자였던 여성의 입장에서 기존의 역사 틀을 깨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돼 금서?!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전쟁시 여성이 겪었던,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금에도 끝나지 않는, 고통받는 여성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주류의 입장과 달라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마치 주류에서 제외된 그 여성들 처럼 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피고인’을 보면 “네가 정숙하지 못하여 당한 일이다”라는 비난을 받는 강간피해자가 나옵니다. 네, ‘가난하고 교육 받지 못한’ 그녀는 정숙하지 못하게 놀았고 남자들을 꼬셨습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끼부린 것은 맞지만 그것이 강간 당해도 좋을 일은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좀 거칠게 얘기하자면 <제국의 위안부>는 ‘피고인에 나오는 주인공’같은 여성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숙한 민족의 딸도 그렇지 않았던 여성들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겁니다. 이 것이 정대협 피해자 할머님들을 모욕하고 명예훼손 했다는 것인데, 저는 반대로 정숙하지 못했던 우리의 딸들을 배제하는 이긴 자의 역사 속에 있는 분들이 부리는 횡포에 할머님들이 속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툭하면 “우리는 동두천에서 몸 파는 여자들이랑 달라. 우리는 강제로 끌려간 거라구”하시는 할머님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문제가 많은, 차별을 잉태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할머님들은 역사의 당당한 주체이며 활동가이며 투사라고 생각하기에 이 발언에 매우 유감이며 반드시 비판 받아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두천에서 몸파는 여성들도 가난하고 배움의 기회가 없어서 그것 밖에 할 수없는 피해자들입니다. 그녀들에겐 선택의 기회가 있었고 할머님들은 강제로 끌려갔기에 선택의 기회가 없었으니 둘은 다르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위안부할머님들처럼 양지에서 자신의 피해를 말 할 기회조차 없는 이 여성들은 그야말로 피해자 중에 피해자입니다. 제 발로 기기촌으로 걸어들어가 양공주가 됐다해서 자발적선택인가요?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도 이렇게 각자의 사연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일본에 팔아넘겨 그렇게 된 경우, 돈 벌러 간다고 생각했다가 그렇게 된 경우, 그야말로 강제로 끌려간 경우, 모두 제국주의 전쟁을 벌인 일본의 구조적 범죄의 피해자이며 이런 기록들을 적은 책이 <제국의 위안부>인 것입니다. 박노자 선생님의 의견과 전혀 다르지 않은데 왜 책이 금서가 되는 것이 다행이라는 것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쟁성범죄는 정숙한 여성만을 할퀴고 가지 않습니다. 사회가 인정하는 ‘정숙’의 틀을 벗어났다 해도 피해자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입닥쳐’라는 강요를 받는 피해자. 이들의 얘기를 누락하는 것은 말 그대로, 역사가 강자의 요구대로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없는 여자, 미친 *, 위안부피해자 여성처럼 하루에 몇 번 씩 강간 당해야 할 *”등등의 욕을 먹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야 말로 아직도 그렇고 그런 여성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여자는 안되고 남의 여자라고 느껴지면 마구 학대하는 그런 사회의 반증, 짐승들의 시간입니다.

(박노자 교수의 본글) 우리 사회는, 아쉽게도 대개는 력사를 피해자 위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김홍집은 여전히 개혁가고 유길준은 여전히 계몽가지, 둘이 일군과 공모하여 동학농민 학살을 지저른 범죄자라는 시각은 아직도 주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건국”을 이야기할 때에 그 “건국”의 밑바탕에 깔린 제주4.3부터 시작해서의 여러 학살들을 우리는 보통 의식하지 않습니다. “산업화” 의식에서도 그 과정의 피해자 (저임금 고강도 착취를 당한 노동자)를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니고 그 “성공”(?)부터 의식하게 되고, “한미동맹”을 생각할 때도 그 “동맹”에 희생된 이들 (“양공주”부터 기지촌과 그 주변의 주민까지)을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공주의/개발주의 사교의 광신자들은 대개 “피해자”에 무관심한 특징은 있죠.

그나마 위안부라는 미증유의 범죄를 우리가 피해자 위주로 의식해야 한다는 게 통념화되고, 이 통념이 이런 판결에 반영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일본과 한국, 미국 등의 여타의 성폭력 국가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돼 철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배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히 조선전쟁 시절의 미/한국군 “위안”시설 운영과 월남 파병 시절의 한국군의 각종 성폭력도 우리에게 “우리 력사의 가장 큰 치부”로 옳게 의식되는 것은, 차후 이런 일들의 재발의 방지에 가장 필요한 조치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한국”도 “일본”도 “한일관계” 그 자체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은 (주로 빈민층 등 피착취계급에 속하는) 녀성에 대한 국가/군대의 조직적 성폭력, 즉 국가/군대의 범죄성, 그리고 그 범죄성에 대한 우리 의식입니다.

 

김도언, 법원 가처분 결정을 보며

김도언

https://www.facebook.com/doeon.kim.58

 

2월 18일 포스트

1.

우리나라는 20세기 초엽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많은 고통을 겪은 나라다. 명백한 피해자다. 그걸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피해자의 상처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 국민 대부분은 국가주의의 어떤 의도적인 전략 때문에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 ‘머물러 있는 상태’인 것 같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그편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우리에게 가해를 한 상대에게 정신적으로 짓눌려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전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자로서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피해망상’이라고 한다.

2.

어떤 국가든 정치권력자들은, 국민 혹은 민족의 피해망상을 자극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보전한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도 예외 없이 자신의 인기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질 때면 가장 상기하기 쉬운 민족적 상처를 끄집어내 감정적으로 자극하고 그 관련국에 강성발언을 하는 것으로 인기를 만회하고는 했다. 우리의 경우, 그 상대는 일본이나 북한이다. 일본이나 북한의 정치권력자들에게는 우리나라가 그런 상대국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수법은 미국 대통령이나 프랑스 대통령, 중국 주석, 영국 총리나 이란, 러시아의 정치지도자들도 다 똑같다. 강성발언을 쏟아내면서 우민정치를 하고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것이다. 그래 히틀러가 했던 짓, 바로 그 짓이다. 그래서 나는 정치하는 인간들에겐 역사적 진실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에겐 역사적 진실보다는 한줌의 권력을 보전하는 게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내가 믿는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나 일본의 기득권 정치세력은 한일 간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노출된 문제들이 해결되길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일 간 역사적 갈등은 역대 정권이 다음 정권에게 그대로 보전해서 내려주는 ‘전가의 보도’ 같은 것이다. 정권에 민심이 이반할 때 써먹으라고 전수해주는 것이다. 훈훈하면서 더러운 유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 실제로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역대 모든 대통령은, 내치의 부진에 대한 국민의 원성을 일본에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만회하고는 했다. 대표적인 게 이명박의 독도 상륙 아니던가. 이 정치권력의 위선에 놀아나는 건, 오랜 시간 동안 일관되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세뇌와 세례를 받은 우리 국민뿐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4.

이처럼 전후 70년 동안 되풀이해온 구습을 다시 바라볼 것을 주문한 책 한 권이 어제 법원으로부터 판매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박유하 著 <제국의 위안부>가 바로 그것이다. 21세기 개명한 세상에 금서禁書라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어이가 없고 치가 떨릴 뿐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위선으로 이루어진 세상인지를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지인이 내게 이렇게 묻더라. 당신은 소설가인데 왜 그토록 제국의 위안부 논란에 관심이 많으냐고.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이 문제는 내게는 위선과 양심의 싸움, 야만과 합리의 싸움처럼 보여서 그런 거라고. 그건 내 문학적 주제이기도 하다고.

 

박진용, 명예훼손 그 치열한 삶의 존재양식 – 박유하씨의 소송과 관련하여

명예훼손 그 치열한 삶의 존재양식

(박유하씨의 소송과 관련하여)

반목과 조롱과 고소의 ‘세월’이자 ‘명예훼손’의 시대이다. 얼마전 한 보수논객은 특정 다수인을 종북으로 몰아대다가 실형을 선고받았고, 극우청년들의 게시판 ‘일간베스트’ 이용자들은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을 ‘유족층, 시체장사를 하는 좌익좀비’라 몰아간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이 한창이고, 이성적인 가치를 몰각한 ‘팩트주의자, ‘개인적 취향의 옹호자‘들은 행동의 일선에서 폭식이라는 엽기적인 애국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엊그제는 대한민국 청와대에 의해 같은 죄로 고소당한 일본 일간지 기자에 대하여 ‘국경없는기자회’가 불기소를 촉구했다는 기사까지 나왔으니 대한민국은 현재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니다.

한때 나치들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전용하여 유태인의 열등함, 이기심이 독인인의 고통의 원인이며, 유대인을 박멸하는 논리로 게르만의 우수성이 ‘팩트’라는 우생학을 끌여들였다. 1차대전 패전후 독일인들에게는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 했고, 이에 부화뇌동한 지식인들은 주변의 이웃이기도 한 유대인을 대량학살 할 수 있는 제도와 법률을 만들었다. 이것을 독일인들만의 ‘특이한 뇌구조’라고 말할 사람들은 없다. 그게 우리의 잠재된 본능이고 그들처럼 ‘일베’는 본능에 충실한 놀이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연혁은 권력에 대한 시민의 자유로운 비판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기에, 인종, 여성, 장애자 등 약자에 대한 공격과 혐오 표현은 애초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려던 가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표현의 자유를 한계로 헌법이 명시한 명예훼손은 변종 나찌의 부활을 사회공동체의 힘으로 견제하고자 하는 이성적인 결단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훼손 소송의 증가는 사회적 비경제를 창출하는 면이 있다. 특히 국가 사법권의 총화인 ‘형사법정’에 표현 내용을 세우는 제도는 구시대적이며, 말로 인한 처벌가능성의 대중적 자각은, 표현을 요체로 하는 학문, 언론 출판의 영역에 있어서 소위 ‘자기 검열의 일상화’를 구축할 위험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최근에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피소는 이런 위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고의 집합적 표현 양식인 책은 저자의 본질적 주장 즉, 전체의 맥락으로 읽혀져야 하며, 주장의 근거는 ‘사상의 시장’에서 동종의 사인들 끼리 논박되고 비판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컨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혁명가 염상진이 꽤나 멋지고,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이 많은 부분 할애되었다고 해서 소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이유이다. 태백산맥은 단순한 허구 이상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이에 대한 작가적 관점이 함축되어 있지만 그 시각은 실정법으로 단죄될 수 없는 부분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수백 개의 자극적인 표제를 단 기사들이 쏟아졌다. 아니 위안부가 일본군의 동지라니 “박유하 교수’제국의 위안부 책 내용 보니…충격 넘어 경악” 이 서적은 현재 출판금지 가처분, 형사상 명예훼손, 또 그 이상의 송사에 휘말린 듯하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여러 서평을 읽어봤다.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할 고의가 있다는 평가는 그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았고, 그의 결론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일본 제국의 성노예로 규정하고 있다. 즉 기술의 관점을 민족주의적 시각이 아닌 국가와 개인의 관점으로 정리하고 논의를 방향을 설정했다. 이 관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즉 법학의 틀로 바라볼 때 전제 개념에 해당되는 법적 책임의 주체인 국가를 제국과 혼동했으며, 반사적으로 국가범죄로서의 위안부 모집범죄에 대한 방조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 점에서 법학자 이재승 교수의 비판은 동종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관점은 학자의 고유한 영역이고, 학문의 방향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고, 현행법에 의할 때 논리적 흠결을 가져온다는 점, 그리고 법적인 관점을 견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문의 영역에서 형사처벌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문적 관점에 관한 차이는 논쟁을 낳고 논쟁을 통한 상호침투는 학문간의 경계를 허물고 다른 관점에 대한 사고의 범주를 확장시키며 전향적이고 진일보한 질서와 원칙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접근방식이 추구하는 소통과 보완의 과정이다.

결국 명예훼손의 주체가 된 제국의 위안부는 상식적 논쟁과 비판을 넘어 바람직하지 않는 사법적 판단의 절차로 이송되었다. 일반적인 법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법적’으로 이 사건이 명예훼손의 구성요건인 허위사실의 인식, 비방의 목적을 인정하기 어렵고, 이에 대한 고소는 무리한 소송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행위를 위한 사법권의 사적 전용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게 된다. 고소가 권리남용이 된다면 제고하고자 하는 공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일반인의 법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의 ‘조리를 향한 도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논리는 집단명칭에 의한 모욕죄의 부당함을 다투고자 수많은 사람을 고소했던 정치인 출신의 모 변호사의 항변과 닮아있다.

친일의 칠을 덧씌우는 언론의 행태는, 종북의 칠에 익숙한 극우세력의 행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터넷 언론의 ‘자극적 제목 뽑기’라는 선정주의는 학문으로 논쟁하고자 하는 학자를 법정에 세웠으며, 다른 한편으로 피고소인을 수많은 명예훼손과 모욕죄의 피해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명예훼손적 친일 작품이 아니라면 이는 무고죄에 해당 할진데 과연 그는 평등하게 사법적인 구제를 구할 수 있는 지위인가?

부연컨대 무리한 사법의 사용은 결국 사고를 검열하게 만들고 표현을 위축시키게 된다. 또한 주류질서의 경제주의, 이와 결합한 언론의 선정주의, 그리고 ‘대세’로 구분하는 편의주의를 통해 비주류적인 관점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공세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조직적 일관성은 다양한 사고와 표현을 공격함으로서 결국 적군과 아군의 논리로만 준별되는 학문적 이분법이라는 퇴행으로 이끌게 되어, 궁극적으로 일체의 다양성이 용인되어야 할 학문질서를 후퇴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법학자들, 법조인들은 이 유죄 추정된 금서에 대한 가벌성과 관련하여 직업적 양심에 의한 어떤 법적평가를 내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론의 재판을 통한 유죄평결에 맞서는 정치적 부담을 감당하느니 가만히 있고 싶은 생존 본능이리라
이 점에서 마치 국회의원 이석기의 내란음모사건에서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침묵했던 모습이 교차되기도 한다. 아직 우리는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안전하게

명예훼손 그 치열한 삶의 존재양식(박유하씨의 소송과 관련하여)반목과 조롱과 고소의 '세월'이자 ‘명예훼손’의 시대이다. 얼마전 한 보수논객은 특정 다수인을 종북으로 몰아대다가 실형을 선고받았고, 극우청년들의…

게시: Jinyong Park 2014년 9월 10일 수요일

 

이권희,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폭력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폭력

일국의 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 문제가 되어 그렇지 않아도 월드컵을 앞두고 서서히 끓어오르던 값싼 민족주의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 불똥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로 튀었다.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고 있는 특정 단체에 의한 ‘정의’의 독점을 우려하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단초로써 우리가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혹은 감히? 언급하려 하지 않았던 종군위안부의 다양한 층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에 박 교수에 의해 비판을 받은 지원단체는 자기들과 음으로 양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며 박 교수를 ‘친일’, ‘반민족주의자’라는 프레임에 가두려 하는 폭력적 여론 몰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박유하 교수는 지금까지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화해를 위해서』 로 대표되는 다양한 저작물과 활발한 학술활동을 통해 우리가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갖고 이를 직시해 왔다. 이는 한일 양국의 특정적이며 부정적인 대결과, 해묵은 갈등 구조의 해소, 나아가서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구축을 위한 학자로서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감에 기인하고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이라 믿어 왔던 기억의 다른 한편에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기에는 일제 식민지배 36년 동안에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민족 자존감의 상처가 너무나도 크고 깊다는 것 또한 안다. 결과적으로 식민통치 기간 동안 앓아야 했던 다양한 정신적 외상은 ‘민족적’ ‘민족주의’적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하며 오랜 세월 역사의 한 쪽 면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절대 담론을 형성해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과 핍박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는 ‘민족주의적’ 담론 형성과정에 파묻혀 버린 할머니들의 또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주장하고, 자기 검증과 내적 성찰보다는 이를 전국민적 저항운동으로 변질시키며 정치권력화되어 가는 특정단체의 ‘정의’의 독점을 우려한다. 나 또한 박 교수의 이러한 우려에 깊이 동감한다. ‘정의’의 독점은 필시 폭력으로 이어지고, 폭력은 자유로운 사고를 질식시키며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박 교수의 글에 대해 ‘문학적 상상력’ 이나 ‘감수성’으로 역사를 파악하려 한다며 이를 폄하한다. 비록 위안부에 참가한 여성들 중에 자발적 참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또한 ‘부당한 제국성’ ‘제국의 숨은 의도’라 하며 박 교수의 역사인식의 결여를 지적한다. 나 또한 미시적 가지들에 집착하는 일문학의 연구방법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역사학자들의 이러한 지적에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역사학이 어떠한 방법론에 의해 지탱되어지고 있는 학문 분야인가. 멸치조차 회를 뜨려 드는, 초 울트라 미시적 연구 방법론에 의해 성립되는 실증주의, 사료 지상주의의 학문 분야가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역사는 지구상 가장 오래된 문학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유하 교수가 문제 삼고 있는 다층적 기억을 거북하다 하여 이를 애써 외면하며 ‘부당한 제국성’이라는 거대 담론만을 고집한다면 일제식민통치 기간 동안 깊어지고, 해방 이후 반복 재생되고 있는 정신적 외상에 대한 치유는 앞으로도 영원히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학자가 어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 있겠는가. 학자로서의 양심과 자유로운 학문 탐구마저 ‘민족’ ‘민족주의’라는 이 땅의 ‘절대선’으로 재단하려 드는 ‘정의’의 독점에서 오는 ‘폭력’을 나는 경계한다. 또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파시즘적 민족주의에 기인하는 인민재판식 마녀사냥을 나는 비판한다. 나는 민족주의라는 감성을 자극하며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일부 단체들의 절대 권력화에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학자의 자유로운 연구를 용인하지 않는 이 사회의 천박함에 절망한다.

 

이권희(단국대학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