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진, 문맥의 창조적 오독에 대해

배홍진

December 5, 2015 ·

제국의 위안부, 문맥의 창조적 오독에 대해

텍스트는 다양한 문맥의 핏줄들로 짜여진 복잡한 유기체다. 하나의 텍스트를 읽을 때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문맥만 따라가다 아뿔사 창조적 오독에 빠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문맥의 지도를 섬세하게 짚어가며 텍스트의 의미망을 객관적으로 포착하기도 한다.

제국의 위안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꾸 쓰지도 않은 자발적 매춘부다란 표현을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는 건, 그들 말대로 어떤 문맥이 그들에겐 그렇게 창조적으로 읽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 치자. 그럼 왜 그들은 자발적 매춘부로 읽힐 수 있는(편협한 오독이지만) 문맥만 읽고, 그 문맥을 전반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여러 다양한 층위의 문맥들은 읽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일테면 위안부란 가부장적 제국주의와 식민지가 만들어낸 명백한 피해자들이며, 설령 그곳에서 형식적인 자발성이 있었다 해도, 그건 국가와 계급, 남성권력이 벼랑으로 내몬 가혹한 자발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리고 이 외에도 일본과 제국과 식민지의 모순을 신랄하고 꼼꼼하게 비판한 다른 수많은 문맥들은 왜 읽어내지 못했는가? 아니 읽으려 하지 않았는가. 쓰지도 않은 자발적 매춘부란 말을 문맥에서, 무슨 달걀 꺼내듯이 마구 끄집어낼 정도로 창조적인 독해를 할 줄 아는 양반들이 우째서 다른 문맥들은 개무시를 하고 휑 지나갔는냐 말이다. 참으로 아리송한 일이다.

아리송하지만, 요건 분명히 말하고 싶다. 역사의 정의란 미명하에, 한 학자를 마녀재판의 가혹한 불길로 몰아넣을 정도로 당신들은 확신하고 있는가? 당신들이 그 놀라운 문맥을 본 곳이, 당신들이 손에 들었던 그 책의 지면인지, 혹은 그 책을 냉소적으로 내려다 보던 당신들 눈동자의 심연인지…..

Yong Kyun Kim, 현재에도 자행되는 구조적 폭력

Yong Kyun Kim

December 4, 2015 ·

무하마드를 풍자한 <샤를리 에브도>가 모독한 건 신이 아니라 그 신을 추앙하는 신도들이었다. 신성모독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 신에게 불경을 행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을 때, 그로인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할 때, 그가 모욕한 건 정작 신이 아니라 그 신의 절대성을 절대적으로 숭배한 나머지 그의 이름조차 입에 올릴 수 없었던, 세차게 돌을 던지는 바로 그 군중들 자신이었다.

<제국의 위안부> 사태를 바라보며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까닭은, 위안부 할머님들이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느꼈다는 사실 자체를, 그리고 그분들이 자신들이 당한 피해에 대해 민형사상 법적 구제를 청구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내가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할머님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느낀 것은 하나의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하나의 사실 이상이기 때문이다. 아니, 위안부 문제가 수천여 명의 위안부들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문제가 되어버린 이상,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실에 그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인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가 공격한 건 위안부 할머님들이 아니라, 일본순사에게 끌려가는 열네살 소녀이자 일본대사관 앞에서 사죄와 배상을 외치는 칠순 투사로, 그렇게 단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우리 안의’ 위안부였으며, 그 박제화된 이미지에 사로잡혀 다른 어떤 해석의 시도조차 용인할 수 없었던, 박유하 교수를 향해 사정없이 돌을 던진 군중들 그 자신이었다. “할머님들이 피해를 입었다”라는 사태 자체와 바로 그 진술을 대변하는 단체, 학자, 정치인,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내보이는 할머님들에게 투영된 피해의식을 구분하는 건 따라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명예훼손을 당한건, 그리고 그 피해의 구제를 바라는 건 누구보다 바로 그들이다. 이 점에서 이번 사태는 법적 문제 이전에 정치적 문제인 것이고, 이를 법적 문제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대해 나는 반대한다.

어디 위안부 문제 뿐이겠는가. 굴곡의 한국 현대사 장면장면마다, 하나의 ‘올바른 역사 해석’에 도전해 그 획일화된 단순한 이미지 속에 감춰져 있던 수많은 다양한 진실들을 누군가 들춰낼 때마다 그 재해석되는 역사 속의 인물들의 명예는 그럼 어떡해 해야 하나. 아직 살아있는 ‘건국 공신들’의 명예는 훼손되어도 상관없는가. 4.3 항쟁은 모두 ‘무고한’ 양민이었고 군경은 ‘모두’ 학살자였는가. 베트남전에 참전해 나라를 위해 목숨걸고 싸웠던 것을 평생의 명예로 살아온 월남용사들을 이제 와서 베트남 양민을 무참히 살해한 전쟁범죄자라고 말한다면 그분들의 참혹히 무너진 명예는 그럼 중요하지 않은가. 이 모든 문제들을 법정으로 가져가 누구의 명예는 어떤 주장, 어떤 표현에 의해 훼손되었음이 인정되기에 삭제하고, 보상하고, 인신을 구속해 죄값을 치르게 해야 맞는 것인가.

내가 생존해 계시는 위안부 할머님들의 아픔을 단 1센티라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동시엔 난 위안부 할머님들이 명예훼손으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입었다며 이의 법적 구제를 옹호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같은 고백을 할 것을 요구한다. 올해 봄 <제국의 위안부>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내가 가지고 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식과 관심 수준은 한국 국민 평균을 결코 넘어서지 못했다. 할머님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깊은 연민을 가지고 그분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14세 소녀를 강제로 끌고간 일본 순사에 대한 분노에 치가 떨리는 대신,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그분들이 아팠다. 의붓아버지 손에 위안부로 팔려가는 걸 옆에서 눈감았던 자기 어머니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는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에 마음이 무너졌다. 학교에 가고 싶다는 여동생을 두들겨 패고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린 오빠를 피해 결국 학교가 아닌 위안소에서 성노예로 청춘을 보내야 했던 또 다른 할머니의 증언을 읽고 그 오빠를 대신해 사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꼭 분노가 아니어도 좋지 않은가. 그분들의 아픈 과거를, 우리의 잘못된 역사를, 그리고 여전히 자행되는 구조적 폭력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래서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그분들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 난 그렇게 간곡히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규항, 배설


김규항

November 27, 2015 ·

배설

당연히 박유하의 견해를 비판할 수 있다. 학자가 책을 쓰는 것 자체가 비판과 토론을 위한 것이다. 다만 비판은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한다.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은 박유하의 말이 아니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일본 극우 세력을 비판하기 위해 박유하가 그들의 발언 중에서 인용한 말이다. 또한 비판과 토론은 민주적 공론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얼마든 비판하고 토론할 공간이 열려있는데 왜 법정에 내맡기는가. 그럴 거면 국정교과서는 왜 반대하며 세월호 사건도 법의 처분만 기다리면 되지 왜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는가. 박유하의 견해에 비판적일수록 오히려 더 검찰기소를 반대하는 게 정당한 태도다. 그런 분별이 없다면, 스스로 비판이 아니라 감정적 배설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일본 극우세력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바로 그런식의 감정 배설을 위안부 문제를 뒤트는 데 애용해왔다. 좀더 냉정해지지 않으면, 좀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 그들을 꿇릴 수 없다. 덧붙여, 근래 사회적 비판엔 끔찍한 수준의 성차별적 발언이 널리 용인되고 있는데 이글 역시 그렇다. 전체 비유도 그렇고.. 아버지는 딸을 미친년이라 욕해도 되고 뺨을 때려도 되는가? 말을 말자.

조석주, 이 책은 여러분을 꽤나 불편하게 할 것이다.

“무언가 하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오해하는 백 가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다. ‘우리 농업 지키기 운동본부’에서 아이들 그림책을 낸게 꽤 있나 본데, 우리 집에도 몇 권 있다. 아래의 첫번째 사진은 그 중 한 권인데, 우리 나라산 곡식이 왜 몸에 좋은가를 재밌는 그림동화들로 이야기해놓은 것으로 일곱 살 딸래미가 좋아하는 책이다. 나는 사실 이 책 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로, 어떤 곡식은 무엇에 좋고 어떤 곡식은 다른 무엇에 좋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중 과학적 근거가 별로 없는게 꽤나 보인다. 둘째, 외국산 농산물과 우리산 농산물을 대비하면서 전자는 건강에 나쁘고 후자는 건강에 좋다는 주장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예컨대, 어떤 공주는 외국산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몸에 가스가 차서 완전 뚱뚱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방구가 안 나와서 해결할 수가 없다가 우리 나라 곡식들을 먹고 방구를 많이 뀌니 다시 날씬해졌다. 뭐 이런 스토리들이다.

근데, 아직 한글을 잘 못 읽는 우리 딸이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나는 그냥 재미있게 읽어준다. 공주가 방구뀌는 소리도 리얼하게 내주고 딸래미 배도 누르면서 가스빠지는 묘사도 하면서. 어떤 때는 책 내용에 대해 커멘트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아이가 재미있어 하면 그냥 그대로 놔둔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어차피 이 책은 우리 딸이 앞으로 읽을 수많은 책 중의 하나이고, 이 책의 관점은 앞으로 우리 딸이 살면서 접할 수많은 관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이 책을 쓰지 않는 이상 세상에 ‘틀리지’ 않는 책은 없다. 한 권의 책을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올바르게’ 만든다 하여 그게 얼마나 깊이 얼마나 넓게 얼마나 시간을 초월하여 오랫동안 ‘올바를’ 수 있겠는가? 쌀을 수출했다고 쓴 책도 있고, 쌀을 수탈했다고 쓴 책도 있으면 사람들이 그 둘을 다 읽고 토론해가면서 수출의 의미와 수탈의 의미 그 각 주장의 맥락을 짚으며 일제하에 있었던 일들을 판단해 간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수출이라고 쓰는 책이 더 많이 읽히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수출도 아니고 수탈도 아닌 새로운 단어를 사용한 책도 나오게 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사람들이 ‘수출’과 ‘수탈’ 중 꼭 어느 것이 올바른가를 토론하여 오직 ‘수출’만을 쓰고 ‘수탈’이라고 쓴 책은 없애 버린다면, 이후 세대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99프로 올바른 한 권의 책을 읽기 보다는, 다양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틀린 책 백 권을 읽는 사람이 훨씬 세상을 넓고 깊게 지속적으로 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교과서는 한 권일 필요가 없다. 나는 내 딸이, 내 아들이 진보교과서를 가르치는 학교를 가든, 보수 교과서를 가르치는 학교를 가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딸에게 아들에게 특정한 관점의 책은 아예 읽지 못하게 한다면 나는 반드시 상관할 것이다.

오늘 아침은 우울한 소식으로 시작하였다. 검찰이 기어이 박유하 선생님을 기소하였다 한다. 그리고, 기소를 보도한 기사의 여파인지 박유하 선생님은 또 항의전화에 시달리셨다 한다. 아마도 국정교과서를 반대하기 위해 교육부에 항의전화한 누군가가 박선생님에게 항의 전화를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우울해진다.

더 많은 분들이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 보셨으면 좋겠다. 아마도 여러 분은 그 책의 주장에 백프로 동의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근데, 돌이켜 보면 내 평생 읽어본 책 중에 내가 백프로 동의하는 책은 미적분학과 선형대수 딱 두 권밖에 없다. 사람이 살아있는 경험세계를 다루는 어떤 책도 백프로 동의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제국의 위안부로부터 많이 배웠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중첩된 모순으로서의 위안부 문제와 그것이 드러난 많은 사실들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여러분께 권한다. 이 책의 관점에 동의하는가란 질문을 던지시기 보다 이 책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는가란 질문을 던져주시기 바란다. 아니, 본인이 배울 것이 설사 없더라도 다른 독자들도 배울 것이 없을까란 질문을 던져 주시기 바란다. 학술적 연구의 목적은 관점의 주입이 아니라 지식의 확대다. 따라서 학술적 연구의 공익이란 그 관점의 보편성에 의해서 판단되는게 아니라, 의미있는 지식의 발견내지 재편성이라는 영역에서 판단된다.

또 하나, 아마도 이 책의 내용은 여러분을 꽤나 불편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정확히 이 책의 저자와 출판사가 형사처벌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다. 불편하지 않은 관점과 책에만 저술과 출판의 자유를 줄 것 같으면, 그런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지 않아도 된다. 그때그때 다수결로 혹은 다수의 위임받은 법관이건 누구건 판단해서 하면 된다.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필요한 ‘공익적 이유’는 그러한 자유가 우리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새로운 관점과 사상과 학술을 시도하게 하고, 그것이 곧 우리 사회가 시대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게 만들 다양성을 확보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려서, 두 가지 공익이다. 이 책의 구체적 학술적 내용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식을 자극하는 공익. 둘째, 이러한 시도들을 물리적으로 억제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의 장기적 발전에 기여할 공익. 그리고, 다시한번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다. 이 책의 관점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다. 이 책은 정말 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책을 쓰는 연구자는 이런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는 형사처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냥 불편하다고 틀렸다고 혹자들은 다른 책을 쓰면서, 그렇게 논쟁해가면 안 되는 것인가? 그것만으로는 정녕 부족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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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진, 위안부를 보는 3가지 시각

Sejin Pak

September 23, 2015 · Adelaide, SA, Australia ·

[위안부문제][책 제국의 위안부][한국사회의 반일감정] 위안부를 보는 3 가지 시각 –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 위안부문제에 대해 내가 올리는 글이 불편한 페친을 위한 정리.

위안부를 보는 3 가지 시각
1] 일본우익: 위안부는 매춘부이다.
2] 한국사회: 위안부는 소녀상같은 인물들이다.
3] 제3의 시각: 위안부는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 반일감정에 쌓인 한국사회에서는 [3]을 말하면, [1]로 듣는다.
– 책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작)은 제3의 시각을 말한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이 책을 읽지도 않고 [1]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반일감정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 위안부 지지단체들의 시각은 [2]이다. 소녀상시각 [2]를 만드는데 가장 공헌한 그룹이 위안부지원단체들이었다. 시각[2]를 퍼트리는 국민운동을 해 왔다. 당연히 시각[3]을 도전이라고 생각하고 싫어한다. 그뿐 아니라, 시각[3]을 시각[1]이라고 주장한다.
–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시각[1]은 비판하되, 시각[2]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각[3]을 시각[1]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이 시각 [2]를 받아드이게 만드는데서가 아니라, 시각[3]이야 말로 한국을 위안부문제로 부터 해방시킨다.
– 일본사회에서도 위의 3가지 시각이 있다. 일본사회의 모두가 시각[1]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아니나, 대다수가 시각[2]를 받아드리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 제 3의 시각이 당연히 일본에서도 제일 쉽게 받아들여 진다. 시각[1] 보다도 받아들여진다. “일본인은 사죄하고 싶다.” “일본인들도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 그래서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한국에서도 제 3의 시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시각[2]를 주장하면 끝없이 해결되지 않는다.

 

임현규, 화해를 위해서

임현규
August 11, 2015 ·

‘앎’이라는 동전의 뒷면에는 ‘괴로움’이 도사리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괴로웠다. 괴로움이란 결국 양심의 문제일 것이다. 일본에 대한 내 편협하고 그래서 편향된 생각, 편견들이 깨져 나갈 때 난 아픔을 느꼈다. 물론 한국에 대해서도.
아픔을 겪고나면 사람은 늙지만 마음은 평화를 얻는다. 그리고 화해를 원한다.박유하교수님은 많은 고초를 겪고 계시다. 그저 난 교수님의 양심과 용기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따름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으며 당혹과 의심 그리고 분노 이후에 행동, 실천에 이르렀었다. 그 때에는 썩어빠진 역사교육에 대해 분노했는데 오늘 이 책을 읽고서는 나의 무지에 대해 고개를 숙인다.
요즘 학자나 교수들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질 수 밖에 없었던 여러가지 경험들을 한 켠에 두고 공부하고 공부하고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화해를 위해서”를 꼭 읽어보시길. 세상을 편한대로 보는 시각에 균열이 일어날 것이니 그것이 불편하다면 읽지마시길.

설안재, ‘친일파’ 와 민족주의에 관해

 

4월 6일 포스트

‘친일파’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모호하고, 포괄적이며 때론 오해의 여지가 있으며, 한편 식민지 상황에서 자기배반의 매국적 변절의 길을 걸었던 일부 지식인들을 지칭하는 한정된 것이라면 적절한 것도 같고.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 하루밤 간호 당번서느라 왔는데, 별로 할일도 없고 잠도 안올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며, 혹시 사실과 다른, 또는 논리적인 문제가 있어 지적하시면 받아들일 거임) 親曰이라면 나도 한때 친일파였는데, 이유는 IMF이후 계열사 분리로 남쪽 섬의 어느 대형조선소로 발령이 났고, 한 10여 년 근무하며 ‘일본인 Inspector(감독관)’들과 친하게 지냈다. 저녁에는 BAR에 가서 맥주도 같이 마시고.

친일은 원래 1880년대부터 일본 공사관을 들락거리며 일자리라도 하나 얻을까 하던 조선인을 지칭하던 말로써 당시에는 그리 부정적이진 않았다. 그러다가 을사조약, 한일합병을 거치며 반민족 매국 행위자를 이르는 표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좀 더 본격적으로는 독립협회 소속이었던 인사들이 만든 일진회, 동학에서 떨어져 나온 진보회가 합쳐 만든 ‘일진회’와 보수 유학자-대개 과거 위정척사파-중심의 ‘의병’들의 대립과정에서 민족/친일이 본격화 됨)

최근 <민족/식민>과 관련된 책들을 저녁마다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20세기 초반의 10년이란 기간이 꽤 중요하고 이 시기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 이 시기의 역사만 잘 알아도,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과거의 어느 한 시기를 ‘소실점’ 삼아 원근법적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편이다. 그 소실점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민족의 역사와 동질성을 말하지만, 너무도 먼 시간대의 성서 창세기를 바라보듯 하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

일연스님도 분명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서 신화를 괴력난신怪力亂神(이상하고 괴이한 신들의 이야기)이라고 하며, 역사를 꽤 합리적/이성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대몽 항쟁이 끝날 무렵에 쓰여졌고 민족의 뿌리를 밝힌 저술이지만, 그 해석에는 신중해야 한다. 삼국의 역사를 마치 첨부터 민족공동체로서 출발했고, 분열/통일의 과정으로만 본다면 고대사를 너무 쉽게 바라보는 것이다.

몽고의 침입에 맞선 대몽항쟁 시기에 민족 공동체 의식이 시작되었다는 얘기가 많지만 이건 사실이면서도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시각이다. 당시 고려인들이 과연 민족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식이 존재해서 대몽투쟁에 나섰을까,하는 것인데 당시의 역사적 정황은 농민들이 향촌사회의 자위적 측면에서 반외세 항쟁을 했고, 민족의식에 기초한 항쟁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농촌 사회를 지키기 위한 항쟁이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고려인들이 몽고에 투항(투몽, 전쟁에 의한 항복과는 다름)하는 사례도 많았다. (여기엔 계급 모순/대립의 문제도 있었는데, 유럽은 혁명을 통하여 민족주의가 형성되었으며 부르조아가 등장하여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상하계급의 완충역할을 하면서 계급모순을 해결했다)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보니까 고려 대몽항쟁시기와 20세기초 한일병합까지의 시기가 겹쳐보이며, 한국의 민족주의에 관해서는 너무나 할말이 많이 쌓여가는 것 같다.

대중사학자 이덕일 선생이 아무런 배경 설명없이 손병희에게 쫓겨난 이용구가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설립했고 매국경쟁에 뛰어들었다, 라는 얘기를 자신의 책에 썼는데, 맞는 얘기이지만 당시의 정확한 상황도 함께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난 지금 일진회나 이용구를 변호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이덕일의 ‘우리안의 식민사관’이 극단과 배제의 논리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마찬가지로 ‘우리안의 민족사관’도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부정적 측면도 함께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역사는 긍정적 역사에서 자부심도 느낄 수 있지만, 부정적인 역사에서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함께 엮여져야 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주의 사관은 급박한 시대상황에서 당연한 것이었지만, 세계 민족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계도 있었다 )

이인직, 이광수의 민족배반은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유지하기에는 인격적 결함과 함께 식민상황에서 강요된 저항과 비굴의 양립할 수 없는 선택의 길목에서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인데, 이런 모습은 한국 정치사에 그대로 유전되어 내려오는 전통이며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진보든 보수든 자기 자신이 어떤 영웅적 환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기만적 오류를 저지르며 자가당착에 빠진 정치인은 얼마든지 있다.

민족주의적 진보정치 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모두 과거 친일파들에게 원인을 돌린다는 것은 곧 우리가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인데, 같은 논리구조에서는 친일파뿐만 아니라 당시 ‘망국’에 내몰리게 된 역사적 상황과 관련 세력들 전체에 대한 비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역사로부터 진지한 성찰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사’의 경우 대개 지식인들 위주였으며 과거 위정척사파의 유학자 집단도 많다는 것과 동학을 탄압하고 수십만 명의 농민을 죽이며 계급대립을 해소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우당 이회영 선생께서 압록강을 건너며 지으신 詩에서 자신의 恨은 이 강물이 다 마르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난 이분의 말씀을 ‘참회’ 즉, 나라를 지키지 못한 지식인이자 전통적 지배층으로서의 죄책감과 더불어 참회의 눈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독립운동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그 ‘정당한/위대한’ 가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민족 문제에 좀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이유가 있는데,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그리고 이 땅의 남성 지배계층의 책임까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에서 ‘왜’ 피해 당사자인 할머님들과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풀어보려는 ‘여성’학자가 소송의 당사자로 법정에 서야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대협에서 발간한 증언집1을 보았는데, 증언집이야말로 박유하 교수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내가 변호사라면 공동 변호인단을 구성해서 할머님들의 의사와는 사실상 무관한 이 소송의 부당함을 강변하고 싶을 정도다!) 이 소송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든, 결국 ‘민족공동체’ 구성원의 공동패배의식과 분열만 깊어질 것이란 개인적 자각에서 앞으로 ‘민족’과 관련된 얘기를 좀 지속적으로 페북에 쓸 생각이다.

 

서윤,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서윤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서 윤 (대중예술인/자유기고가)

 

진보가 정치적 의제로 자리한 것은 87년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부정권의 몰락과 함께 보통선거제가 수십 년 만에 다시 실시되고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시민들의 힘으로 다시금 세워진 민주적 정치체가 형식을 갖추어 가며 진보는 사회운동에서 정치운동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2014년 현재 우리사회에선 진보정치의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선 교육감을 제외한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장에서 진보정당의 후보들은 당선사례가 별로 없습니다. 원외정당인 노동당과 녹색당은 2% 미만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저널리스트 한윤형은 지방선거 이후 쓴 칼럼(미디어스)에서 “민주노동당이 확보하고 있던 의석수가 가장 많았을 때보다도 현재 진보정당의 원내 의석수는 많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이 민주노동당이 활동하던 시절보다 진보적 가치의 실현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사회의 진보정치가 87년 본격화된 이후 가장 힘겨운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이것은 진보정치의 문제인 것입니까? 혹시 우리는 진보를 잊은 채 진보정치의 실현만을 위해 애써온 것은 아닙니까? ‘진보’에 방점이 찍히지 않은 ‘정치’를 해온 것은 아니었습니까?

이 질문은 정치와 사회의 변화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정치를 통한 사회의 변혁을 위해 그 바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그것이 잊히거나 간과되었던 것은 아닌지를 묻는 것입니다. 서민 교수는 8월 3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야당의 실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능과 부패의 극치를 보이는 여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는 국민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는 언급을 하였습니다. 이 글의 논지를 선거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싶지만, 나는 서민 교수의 기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전혀 민주적이거나 진보적이지 못한 언행을 너무나 쉽게 보며 삽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그런 현실을 개선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체념해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불합리하고 모순에 가득한 일들 전부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생각건대 우리가 접하게 되는 모든 일들이 정말 체념 외에 답이 없을지는 의문입니다.

90년대 직장인들에게 불문율처럼 각인되어 있던 것들 중 하나는 ‘까라면 까야지’였습니다. 많은 다른 단어와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뜻은 매일반이었습니다. 20년 가까이 지난 요즘은 어떻습니까?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당시 ‘까라면 까야만 했던’ 자기 경험을 진로그룹 매상 올려주며 육두문자와 함께 내뱉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그들이 바로 지금도 변치 않는, ‘까라면 까야’ 하는 말단직원들의 관리자들입니다. 반복하여 묻겠습니다. 우리의 진보정치는 무엇을 잊고 있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진보를 정치적 용어가 아닌 태도를 가리키는 속성의 형용사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진보적 생각과 행동, 이것은 바로 진보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보적 태도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형용사이겠습니까?

추상적으로 말하여서 진보란 개선과 동의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선이란 어떠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초로 할 것입니다. 기존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체제나 조건들이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느낌과 그 느낌을 구체적으로 정돈한 것이 바로 문제의식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형성된 문제의식이 공유될 때 진보는 연대를 구성합니다.

다시 말해 진보는 태생적으로 분열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행위는 가장 개인적인 행위로 말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발 물러선다 하더라도, 진보의 출발은 언제나 개인의 태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연대 속에서 공유된 문제의식은, 그것을 이끌어 낸 개인의 모든 맥락을 포함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문제의식에 이르는 각각의 맥락과 문제의식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가 발생합니다. 모든 개인의 맥락을 고려할 수 있는 연대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발생한 위계가 견고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진보적 문제의식은 더욱 강화된 권위를 얻고 연대는 내부적 보수화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연대’의 필연성-내부적 보수화의 과도한 진행이 바로 현재 비판받고 있는 진보세력의 내부 민주주의 확립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허용하고 최대한으로 그것을 수용하여 의제를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의 결여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진보적 태도는 언제나 개별적으로 창발한다는 것, 그리고 모종의 문제의식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는 연대가 필연적으로 보수화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숙지하지 않는 한 어떤 조직도 경직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조직의 내부적 보수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면 내부적 자기비판의 원천차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외부의 자기비판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자기비판에 대한 원천차단의 가장 좋은 예시가 우리나라의 진보정치운동 내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한 간과 내지는 묵살이겠습니다. 즉 내부적 자기비판의 원천차단은 자기반성을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가해오는 비판에 대한 반응은 필요 이상으로 격한 것이 대체적인 모양으로 보입니다. 이 격함은 때로 탄압이 되기도 합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소송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로 정대협의 정치세력화를 언급했습니다. 정대협을 정면으로 비판한 셈입니다.

물론 비판의 여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맥락을 살피건대 저자는 정대협과 일본 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가들(이후 ‘위안부 활동가들’)이 정치적 실리주의 노선을 선택한 것에 대한 비판을 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의도가 쉬 파악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그들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흐르며 사회변혁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이런 서술이 ‘권력쟁투로서의 정치’와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를 구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분리되기 어려울 것이며 거의 언제나 한데 뒤채여 갈마드는 사안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변혁을 위한 권력의 쟁취’와 ‘권력을 위한 권력의 쟁취’는 또한 다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자가 비판을 하기 위해선 ‘권력을 위한 권력의 쟁취’를 분명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저자는 정치적 정당성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뒤섞어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구분되어야 할 이유는, 현재 소송에서 문제시되는 ‘동지적 관계’라는 논리적 장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장치가 지금까지 국가 대 국가의 프레임으로 나뉘어 진행된 위안부 문제, 나아가선 식민지시대의 문제를 바라보는 역사관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며 이점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박유하 교수는 전쟁수행을 위해 동원된 집단이란 점에서 위안부와 군을 ‘같은 목적에 복무하는 집단’으로 상정하고 이를 줄여 ‘동지적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군위안부라는 기관이 제국 일본의 통치체계 내에서의 한 부분이었음을 뜻하는 말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동지애적 의미가 결여된 건조한 표현입니다. 박유하 교수가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으로 드러내려 했던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 식민지 백성으로서 근본적으로는 노예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 여성들의 애환과 삶의 모순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무리 형식적으로 동일한 일본인이었으며 군과 함께 전쟁에 동원된 ‘전쟁수행을 위한’ 같은 처지였다 하더라도, 위안부에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점령한 일본의 지배를 받는 노예 신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실제적인 사실과 형식적인 사실 사이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의 삶의 첫 번째 외연적 모순이 드러납니다. 즉 식민지 백성으로서 노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점령국 백성으로서 형식상 일본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 사이에 발생하는 형식적 충돌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 외연적 모순은 그들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위안부들과 다르게 받았던 차별대우입니다. 전쟁 중 일본이 설치하고 관리했던 위안소의 요금표만 보아도 내지인(일본인)과 반도인(조선인) 위안부 간의 차별은 아예 형식적으로 굳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속에서도 그런 내용이 적잖이 나옵니다. 그들은 ‘대동아 공영’이라는 기치를 내건 “제국 일본”의 통치를 받는 같은 일본인이면서도 민족적 이유로 인해 차별을 받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것은, 비록 동지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군인(남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여성)였다는 점입니다. 군인들이 제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 선봉을 섰다면, 위안부들은 그들의 노곤함을 달래는 역할을 함으로써 군인들의 사기진작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성 차별의 역사는 고대시대 승리한 장수가 시침을 받던 것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뿌리가 깊습니다만, 위안부와 관련하여 보다 직접적인 연원을 찾으면 “제국 일본”의 시대 이전에 공창이었던 가라유키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이러한 삶의 외연적 조건들 때문에 위안부로서 살았던 조선인 여성들의 생활이 피폐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일본군이 국가적으로 관리, 통제하며 위안부들에 대한 처우를 보장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야만으로 불리는 홀로코스트 가운데서조차 감금되어 있던 유태인들이 낭만을 찾으려 몸부림쳤듯, 위안부들도 그처럼 피폐한 삶속에서 인간으로 살고자 몸부림쳤던 사례가 있습니다. 조선 여성이지만 위안부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역할에 적극적이었거나 혹은 그 안에서 일본 군인과의 로맨스가 있었다는 것 등이 그러한 사례입니다. 박유하 교수가 제시하는 사례들이 이러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사례들은 조선인 위안부 전체의 모습일 리 없습니다. 저자 역시 이점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부분적이든 대개의 경우였건 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부분적인 사례라 한들 묻히거나 삭제되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역사란 늘 실재했던 당대의 복잡다단한 양태를 완전하게 기술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위와 같은 사례들은 분명 삶의 지독한 모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순점 때문에 그에 관해 “본질적으로는 노예이며 여성에 대한 국가의 폭력이었으므로 그러한 낭만 자체가 평가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섣부른 예단이며 타자의 삶에 대한 이념적 오만입니다. 역사가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대상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한 예단보다는 명백히 있었던 모습을 토대로 하여 평가가 출발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점들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삭제될 수도 있고 혹은 보태어질 수도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서술은 서술자의 시점이 품은 이념적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식 때문입니다. 만일 역사를 되돌아보는 모종의 논리적 장치-시점-가 그 같은 구조 내 개인들의 모순된 모습을 조명할 수 없다면 새로운 논리 모델을 계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시점이 될 것입니다. 심지어 서술의 형식에 따라서도 그러한 모순점들이 표현되는 양식이 다른데, 그것을 기본적으로 구성하는 시점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결국 기록이란 이러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박유하 교수가 ‘동지적 관계’라는 논리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은, 그것이 설령 부분적인 기억이었다 하더라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모순과 그 다양한 양태들을 선연히 드러내고자 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일본이 지금껏 잘못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제국주의 기조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유린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일본의 새로운 국가적 조치를 요구하는 설득의 초석을 마련코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1965년의 한일 양국 간의 협정은 일본이 벌였던 전쟁에 관한 것으로서, 일본 측에서도 현재 위안부 문제에 관한 사죄 및 보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내세우는 논리는 “이미 당시에 전후처리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묻고자 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책임이 아닌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입니다. 한반도를 점령하고 통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삶의 균열과 모순이 존재했는지를 밝힘으로써 타국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다스리는 행위 자체가 잘못임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는 3부의 마지막과 4부에 또렷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종국적으로 이런 논지가 향하는 곳은 제국주의 일반에 대한 반성일 것입니다. 그리고 박유하 교수는 그로 향하는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합니다.

 

일본은 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은 졌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후 처리’였고 ‘식민지지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일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생각하고 보완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사죄’를 한 적이 없는 다른 전前‘제국’ 국가들보다 일본이 한 발 앞서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전쟁뿐 아니라 강대국에 의한 타국의 지배는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앞장서서 표명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 표명은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263쪽)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언뜻 저자가 3장에서 정대협과 일본 내 위안부 활동가들을 비판하는 대목은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그들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흐르고 사회변혁을 위한 활동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제국주의 기조 자체가 그릇되었음을 지적한 대로라면, 정대협과 일본 내 위안부 활동가들의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활동은 장려되어야 마땅합니다. 국가적 폭력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국가 체제를 경영하는 입법체계의 재정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형식적으로 온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박유하 교수의 논지는 국가라는 외연 자체에 회의적이지 않은 이들 혹은 국가의 주체성을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인정하는 이른바 “국가주의자”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국제관계에서 그 외연을 필요 이상으로 간과하는 낭만적 논지를 펼치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재승 교수가 서평에서 (평가의 타당성이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취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을 비판할 수 있다면, 그 활동의 목적이나 진행상황 속에서 정치적 정당성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골몰하는 부분을 명확하게 분리하여 짚어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박유하 교수가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선을 긋는, 다시 말해 좀 더 닫힌 문장을 사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실 박유하 교수는 정대협 측에서 형성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 구도”를 강하게 비판함으로써 정대협 측의 정치적 태도를 우회적으로 짚어내고는 있습니다. 즉 정대협 측의 논리는 일본이 형언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가해자이고 우리는 오로지 피해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박유하 교수가 이런 이분법 구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국에 위안부>에도 명확히 적혀있듯, 조선인 위안부들의 삶이 그러한 모순을 품고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 하여 일본이 가해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판하는 지점은, 비록 부분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았을지언정 엄연히 존재했던 삶의 모습을 삭제하는 이분법 구도의 효과, 더 정확히는 그러한 이분법 구도를 통해 엄연히 존재했던 삶의 모습을 소거하려는 정대협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치적 필요에 의한 기억의 소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정대협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취하였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는 경직된 이분법 구도가, 위안부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은폐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그리고 현재 세계 곳곳에 세우려 하는 소녀상입니다.

식민통치 당시 조선인 위안부들의 평균 연령을 감안할 때(『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전5권)에서의 증언들은 위안부들의 평균 연령이 20세 어름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10대 후반의 여성들이 있기는 하였어도 대개의 증언에서는 그 정도의 연령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녀상은 사실적 타당성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순진하고 가난한 조선 처녀들을 강제로 끌어갔다’는 의미로 해석되면서 일본의 범죄행위만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위안부 제도에 적극적으로 응하고자 조선 여성들을 꾀어 위안부에 밀어 넣은 ‘통치구조 내에서 방기된 범죄자들’은 은폐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지적하는 “식민지의 분열증”을 세밀히 살필 수 있는 시각은 쉽게 기각되고 맙니다.

소녀상이 문제시되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남성본위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나라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근대 이후 남성본위의 이데올로기가 두드러진 국가적 정책 속에서 억압받고 희생을 강요당한 여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정대협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와중에 2000년대 들어 여성 보편의 인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피력해온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녀’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데 대해 저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결주의적 사고의 결과로써,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을 만들어냈던 빅토리아 시대의 야만적인 남성중심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이율배반은 비단 그들의 남성중심주의적 태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정대협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지지를 받아온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방식은, 불행하게도, 일본을 비롯한 과거 제국주의적 기조를 천명하고 나섰던 국가들이 채택했던 것과 꼭 닮아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제국주의적 기조란 무력을 앞세워 영토를 침탈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힘의 논리를 의미하였음은 이미 상식입니다. 현재 정대협의 활동방식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국제적 연대를 이끌어낸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업적입니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제적 연대로써 그들이 일본에 대해 하는 일은 “설득”이 아닌 “압박”입니다. 다시 말해 “초국적 연대”라는 힘으로 “일본”이라는 국가를 압박하는 형식입니다. 이것은 힘으로 한반도를 병합하고 수탈했던 일본의 방식과 닮은꼴입니다.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여성들을 데려다 착취했던 책임을 물으면서 꼭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것이 보복성이라는 측면에서 정당성이 약화될 것이요, 둘째로는 힘을 앞세운 국가주의의 극단인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의 역사 일반에 상존했던 위안부 문제를 “일본만의 것으로” 특수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입니다. 이 둘째 문제는 결국 “보편적 여성 인권”이라는 정대협 활동의 명분을 약화시킵니다. 마지막 하나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힘의 논리를 앞세워 단일 슬로건 아래 동원된 개인들의 피폐함을 제대로 볼 수 없거나 혹은 억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력을 앞세워 타국을 점령하는 행위는 개인의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군인으로 징병되어 가족이나 고향과 떨어져 지내는 일도 그러하지만, 전쟁을 위한 물자동원으로 인해 갖은 부역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을 배분하는 데서도 문제는 발생합니다. 아직도 ‘영광의 시대’라며 적잖은 사람들이 야만적인 평가를 서슴지 않는 빅토리아 시대에도 노동자 계급은 미성년인 이들까지 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식민지 수탈의 전리품을 나눠 갖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타국을 점령하고 수탈하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는 식민지든 본국이든 일부 계급을 제외한 개인들의 삶이, 비록 외적 조건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그와 같은 양상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난 20년간 애써온 정대협에서도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자도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듯 하는 정대협의 활동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인용한 바 있는 심미자 할머니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심미자 할머니는 유언장에서, 정대협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하여 출세하였으며, 정대협 출신의 국회의원이 허위 의정보고를 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또한 정대협이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해외에서 데려와 수요집회에 참석시킴으로써 ‘앵벌이’를 시켰다고도 하였습니다. 저자가 말하듯, 이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유언장에 이런 비난을 적을 정도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꼭 부당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 정대협은 진정으로 위안부 할머니들 개인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 그들은 일본과 한국을 나눈 이분법 구도를 강화함으로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의 민족적 피해정서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어떻습니까? 터무니없는 의구심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골몰하는 탓인지 아니면 투쟁의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추측일 뿐이니까요. 다만 그들이 20년이 되도록 해왔어도 요지부동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 이제는 투쟁의 방식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유하 교수의 이 책은 그런 인식의 산물이라고 함직합니다. 다시 말해 정대협에 대한 비판을 담고는 있지만, 박유하 교수 역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되찾아주고 그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어루만져주려는 의도로 쓴 책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지금까지의 정대협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살피고 있는 나눔의집과도 그 뜻을 함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같은 길에서 다른 방안을 제기하는 것이 아무리 의미가 있더라도, 어떤 식의 접근법이든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박유하 교수의 논지는 그 의도와 관계없이 일본의 부정파들에게 모종의 프레임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통치술의 일환 속에서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다중적 억압과 수탈”로 파악하는 박유하 교수의 시점은 당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통치했던 “제국 일본”의 통치구조를 면밀히 살피는 일이 됩니다. 문제는 이를 통해 박유하 교수가 “제국 일본”의 모순을 드러내려 했던 반면, 부정파들에게는 그것이 “제국 일본의 점령지로서의 조선”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이 바로 박노자 교수가 그토록 우려하고 경계하는 포스트주의 담론의 한계와 약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포스트주의 담론이 일궈왔던 성과 또한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포스트주의 담론을 간단히 말해 “역지사지” 담론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타자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취해야 하는 관점이라면 나보다는 타자의 관점에 가장 근접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함은 당연지사입니다. 물론 인식론적 장애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모릅니다만, 현상학적 진공-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불렀던, 이성의 바로 그러한 움직임을 신뢰할 수 있다면, 타자의 관점에로 육박하는 시점의 전환은 그 자체로 거리두기를 통한 관조적 이성의 열림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나 국가가 주체적으로 이념을 생산하고 재구성하며 스스로 섭생하는 유기체라고 볼 수 있다면, 거기에도 무심한 관조 속에서 피어나는 열림과 공감이라는 자율적 이성의 정묘한 이치를 대입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이러한 대입에서의 세밀한 논변의 필요성 때문에 (혹은 개별적 이성과 국가이성의 본질적 차이 때문에) 국가이성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국가나 사회와 같은 거대한 주체의 윤리적 입장을 관조할 수 있는 이성의 힘이 개인의 자율성 속에 있음은 분명합니다. 공동체의 이념성이 아무리 개인의 몸을 통해 발현된다 하더라도 개인이 고스란히 그에 따라 실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단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박유하 교수의 시점과 논변을 말하자면 그것은 “피해자의 이념성을 지닌 공동체 속에서 가해자와의 교착상태를 돌파하려는 개인의 자율적 사유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이념성에서 어떤 갈등양상이 야기되거나 혹은 그것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자율적 개인의 움직임은 돌파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개인의 부질없는 무력함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사실은 많은 경우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율적 개인의 움직임이 평가할 만 한 점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이 쉬 기각되거나 억압받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념을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소송이 그 모습을 닮았다고 보입니다.

소송을 건 나눔의집 고문변호사 박선아 교수는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 번 할머니들 앞에서 책에 썼던 단어의 뜻을 해명한다면 오해는 풀릴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이라면 비록 소송을 건 후라 해도(이 인터뷰는 소송을 건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박유하 교수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여 나눔의집에 기거 중인 위안부 할머니들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박유하 교수를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계속해서 차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 하며 도움이 되고자 쓴 책에 대해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을 내고, 동지적 관계라는 말이 ‘맥락과 관계없이’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가 있다며(이 문구는 박선아 교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처벌 및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서이든 학술서이든, 연구의 결과물에서 ‘맥락’을 제외한 부분적인 것만을 떼어 그것을 재해석한 것은 정당한 행위입니까? 소송대리인이 “다시 한 번 해명해준다면 오해는 풀릴 것”이라 말하는데도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는커녕 어떤 접촉도 금지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입니까?

박선아 교수는 박유하 교수가 9년 전에 쓴 『화해를 위해서』를 공격하고도 있습니다.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되었던 것을 취소할 방안을 검토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엔 『화해를 위해서』에서 다루는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영토분쟁에 관한 것은 더욱 그러합니다. 비록 박유하 교수가 코즈모폴리터니즘 내지는 아나키즘적인 인상을 풍긴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이들의 생각을 희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박유하 교수의 생각은 이런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 문학연구를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너무 낭만적으로만 본다. 국제정세는 낭만이 아니다. 논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국제적인 학술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양국의 분쟁에 대해 연구해온 학자의 논지에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일종의 폄훼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폄훼가 아니라면, 박유하 교수와 함께 해당 학술모임에 참여해 온 학자들은 지속적으로 공염불만 해온 셈이 됩니다. 진정으로 그들이 어처구니없는 말만을 되풀이하여 왔다고 만인이 공인하지 않은 한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설령 허튼 활동으로 공인된다 하더라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도태될 테니까요.

학술적인 부분에서 살펴보아도 이러할진대, 『제국의 위안부』에서 몇 부분만을 떼어 윤리적 판단과 처벌(형사고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박유하 교수가 근무하는 세종대학교로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찾아가 교수직 파면을 요구하였습니다. 전체적인 논지의 맥락과 관계없는 ‘자신의 재해석’이 누군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그 논지를 편 사람이 직업을 잃어도 좋은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만일 나눔의집 측에서 취하는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사회가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지길 원한다면, 이러한 문제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앞선 부분에서, 진보란 그 태생이 개인적인 차원으로부터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진보란 명백히 그릇된 일을 개선하는 것임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보입니다. 그러하다면 나눔의집 측에서 취하는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다 여길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진보적인 행동이겠는지요?

여기에 일률적인 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눔의집 측에서 취하는 행동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겐 박유하 교수가 직업을 잃고, 연구결과물이 시중에 나오지 못하며, 나눔의집 할머니들에게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해외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받았던 보상금의 총액보다도 많은 거액을 배상하는 것이 오히려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보일 것입니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삶을 온전히 되돌아보고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길을 찾는 시도가 하등 쓸모없는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위일 것입니다. 그 논리적 결함이 있든 없든 전체 맥락과 관계가 있든 없든 표현 자체가 참혹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들을 언짢게 했으므로, 그것을 윤리적으로 판단하여 처벌하는 것이 진보적인 길일 것입니다. 그들에겐 위안부 문제의 교착상태를 풀 다른 논리의 계발이 필요 없으며, 이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진보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반면 그와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진보적인 태도는 어떤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온당하겠는지요?

이 글의 앞부분에서는 우리사회 진보정치의 위기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작금의 위기를 초래한 진보정치운동이 간과한 것은 무엇이었을지 질문하였습니다. 넌지시 논급하였지만 여기서 잠정적인 답을 내리자면 진보적 태도의 보급에 실패한 까닭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즉, 서민 교수의 취지처럼 정치 차원에서의 진보적 의제 수립과 추진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진보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설득하는 일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빼어난 지성과 글솜씨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하지 않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칙과 신념을 외치면서도 당내 민주적 절차를 확립하지 못한 진보정당의 모습에 실망하여 등 돌린 시민들이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말입니다. 자신의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그릇된 일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어떤 식으로든, 어느 정도로든 행동을 취하는 사람을 볼 때 사람들은 비로소 조금씩 변화해 갑니다.

Anna Roh, 우리는 정말 ‘해방’ 된 것이 맞는걸까?

 

Anna Roh

2015년 3월 2일 ·

Park Yuha 선생님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요즘 유럽에서 대세인 학문 중에 <memory studies> <memory policy>라는 것이 있다. 넓게 보아 메타 역사학이라 할 수도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집단과 개인의 역사는 선택적으로만 수용된다는 전제 아래 어떤 내러티브들이 어떤 집단에 의해 역사와 문화로 수용되고 거부되었는지 분석하는 학문이다. 똑같은 시공간을 관통하며 똑같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기억하는 바는 개인의 정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심지어 경제적(계급적)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만 보아도, 남한과 북한의 분단 이전 역사인식에 차이가 있고, 같은 남한 안에서도 박정희 시대에 대해 서로 다르게 추억하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역사의 선택적 수용은 역사 왜곡과 다른 문제이다. 자연스럽게 수용된 문화와 역사가 있지만 각자의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로 인해 의도적으로 정책적으로 걸러지는 역사가 있다. 역사 안에 A와 B라는 사건이 모두 터졌는데, 누군가는 A만 기억하고, 누군가는 B만 유달리 강조한다. 이럴때 누구는 틀리고 누구는 맞다고 할 수 없다. 그보다는, 그들이 왜 유독 A혹은 B만 강조하고 기억하는지 현재의 관점을 분석하는 것이 더 현명한 시도이다. 다만, 나의 관점은 더 넓은 스펙트럼을 포괄하며 기억되는 역사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이익만을 염두에 둔 역사보다 더 인류에 대한 포용력이 있다고 본다. 강자 뿐 아니라 약자의 역사를 포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에게 치욕스럽고 도덕적으로 불쾌한 기억 또한 포괄한 역사가 더 설득력 있다는 소리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일제 식민지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 뿐 아니라 한민족의 골치아픈 숙제라고 생각한다. 일제의 패망덕분에 한민족은 당당하게 ‘제국주의에 저항한 희생자’로 일반화되었지만 실제로 그러했을까. 친일명부에 오른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하고 모두 그렇게들 저항만 했을까. 제국주의의 시스템 아래서 한반도에서 그들에게 세금을 내고, 그들이 제공하는 직업을 가지고, 그들이 제공하는 교육을 받으며 묵묵히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한 이들이 과연 나는 ‘반일’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땅을 떠나 망명 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친일’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모 역사학자의 일침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는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해 강압적인 폭압뿐 아니라 문화적 교란과 동질화 정책도 한민족에게 해를 미쳤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한 그들의 문화정책도 실은 불공정한 식민지 폭압의 일부였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한데, 해방되고 나니 그렇게 일제에 설득당하고 동조한 사람들이 싹 사라지고 불굴의 애국투사들만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제의 문화 정책에 대한 책임을 거론하는 것은 물건너 갈 수밖에 없다.

36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쨌든 일본인들과 한데 어울려 그럭저럭 살던 사람들이 해방이 되고 나니 갑자기 모두 사라지고 저항하거나 강제 폭압에 시달리던 희생자들만 이 땅에 남았다. 소수의 친일파들에게 자신들의 제국에 대한 복종의 죄과를 모두 미뤄버리고, 이런 Victimisation은 해방 후 반식민지 역사교육을 통해 한층 더 한민족의 뇌리에 뿌리박혔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식민 통치에 대해 보상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인 일본은 다른 기억을 한다는 것이다.

한쪽은 억압의 기억만을 고집하고, 한쪽은 ‘그래도 동조한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이 한-일 양쪽 상황에서, 누구의 기억이 맞다고만 말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서 계속 강제동원의 근거를 발굴해내더라도 다른 한쪽이 자발적 참여의 근거를 계속 들고 나오는 한 이 보상 협상은 평행선을 이룰 수밖에 없다. 왜냐. 양쪽 다 실제 존재했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읽은 <제국의 위안부>는 이 양쪽의 역사를 모두 인정하고 문화적 동질화 정책도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동질화되어 자발적으로 일제 정책에 참여한 한민족 또한 희생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일본 정부가 계속 끌어내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위안부에 대한 주장을 무색하게 만드는 제안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이에 반기를 드는 이유는 기억하기 싫은 역사를 끄집어냈다고, 그 끄집어낸 역사가 – 엄연한 사실임에도 – 한민족의 희생자적 입장에 불리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가 휩쓸고 간 뒤에도 살아남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불의에 저항한 희생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촉발된 논쟁이, 그리고 내가 존경하던 학자들마저 양쪽으로 대립하는 이 모양새가 남탓을 하기 위해 나의 약점을 숨기는 것처럼 보여 못내 씁쓸하다. 반세기도 한참 지난 식민의 역사에서 우리는 정말 ‘해방’된 것이 맞는 걸까.

 출처 : https://www.facebook.com/anna.roh.94/posts/10203832833372490

Meesun Min, 같은 문제의식임에도 불구하고..

 

Meesun Min

2015년 3월 2일 ·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우리 조상들에 대해서 한 학자가 쓴 글들이다. 이제 이 학자를 물어뜯자!!!

“하지만 현실의 콰이강의 다리에 대한 앞에서 언급한 르포 기사는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충격을 전해준다.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버마전투의 당사자로 ‘지금까지도’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태국인들의 착각이라고 가벼이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부를 더 하면 할수록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서 연합군 포로를 교량 공사에 동원하고 학대하던 일본군 포로 감시병 속에 조선인이 섞여 있었던 점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 등장하는 일본군 포로 감시병 가운데 조선인이 포함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렇다면 태국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아직도 한국을 전쟁 당사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까? 태국의 박물관으로부터 태극기를 끌어 내린다고 해서 조선인들이 제국주의 일본의 태국 침략전에 참여했던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등 국민을 꿈꾸는 새끼 제국주의자: ‘대영제국’을 제압하는 ‘대일본제국’의 힘에 압도될 때 조선의 피지배 식민지민들은 제국 속의 ‘이등국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리콴유가 증언하는 싱가포르에 있던 조선인들의 모습은 바로 이런 이등국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침략전에 나섰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요컨데 앞의 두 삽화는 모두 ‘식민지’로서의 조선이 그냥 ‘식민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은 식민지이기도 했지만, 제국 일본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조선이 식민지일 ‘뿐’이었다고 생각하는 데 비해, 일본의 침략을 당했던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조선이 제국 일본의 일부분이자 침략의 당사자라고 믿고 증오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조선인을 제국 일본의 식민지 피지배민이 아니라 오히려 거칠고 고압적인 일본군의 형태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새끼’ ㅈ국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 일본 속에서 이등국민의 가능성을 엿보던 조선인들은 제국주의자로서의 욕망을 가슴속에 감춘 ‘새끼’ 제국주의자였다.”

“이미 이 시기에 조선인들은 ‘강제된’ 한 손에 ‘피’를 묻히고 있었다. 강제로 침략전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리하여 한손에 이미 피를 묻혀 버린 사람이 바로 식민지하의 조선인들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국 일본의 침략 전쟁에 가제로 동원된 조선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분열현상을 극복해야만 했다. 요컨데 식민지는 바로 식민지민에게 분열증을 강요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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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동 교수의 책에서 인용한 이 글들의 내용은 보다시피 철저하게 박유하교수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근데 정말 이상한 것은 지금 윤해동 교수의 비판이 비판자들의 글들에 인용된다. 비겁한건가 분열적인건가 아님 둘다 인가!

 

최범, 친일과 반일

3월 1일 포스트

친일과 반일

한국은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여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우리 삶을 크게 변화시켰고 그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에 협력했다. 그들을 가리켜 친일파 또는 민족반역자 또는 매판세력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계속된 불행은 일본으로부터 자주적으로 해방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친일파 또는 민족반역자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지배되고 있다는 점이다.

친일파를 제거하기는커녕 거꾸로 친일파들이 민족주의자들을 처단한 것이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흑역사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한편으로는 친일파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증오와 함께 반일에의 정념에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비극적인 것은 바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이 뒤집어진 혀로 반일을 부르짖으며 대중을 오도해왔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그랬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친일에 대한 증오와 함께 맹목적인 반일이라는 덫에 빠지게 된 것이다. 반일은 친일의 단순 안티테제(반명제)일 뿐 결코 식민주의를 극복할 진테제(합)가 되지 못한다. 친일과 반일은 개화와 척사, 찬탁과 반탁, 종북과 반공, 친미와 반미라는 잔인한 이분법으로 우리 민족의 삶을 옥죄어 온 쇠우리의 하나이다. 한 마디로 무간지옥이다.

친일파의 지배에 대한 증오에 비례하여 반일에 대한 어떠한 이의제기나 수정도 허용되지 않는다. 최근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존의 정식화된 반일에 대한 어떤 수정주의나 재해석도 친일로 매도되고 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 친일 못지않게 반일도 또 하나의 야만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역시 얼마 전 페이스북에, 식민지배 당한 것에는 우리 자신의 책임도 크다라는 글을 올렸고 직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집중공격을 당했다. 내가 정식화된 반일 도그마에 수정을 가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나를 친일파로 몰고 가려고 했다. 나의 주장을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입하면서 친일파임을 자백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반드시 상대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것이 되는가. 그것은 제로섬 게임인가. 윈윈이 될 수는 없는가.

그렇다. 나는 친일파도 아니지만 반일파도 아니다. 나는 친일과 반일이라는 무간지옥을 벗어나고 싶다.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밖에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토끼가 설 자리는 없다. 나는 우리에게 친일의 폐해 못지않게 일본을 무조건 악마시하면서 민족주의의 숭고함을 확보하려는 그릇된 충동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크게 우려하는 바이다. 나는 친일도 아니고 반일도 아니다. 나는 친미도 아니고 반미도 아니다. 나는 이 이분법이 지배하는 무간지옥을 벗어나고 싶은 하나의 중생일 뿐이다.

김도언, 지식인들의 위선에 관해

 

2월 23일 포스트

지식과 권력의 유착, 다시 말해 지식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권력의 지식에 대한 욕망을 말하는 것은 인류가 탄생된 이래 너무나 뻔한 사실로 간주된 것이어서 새삼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내 눈에 우리사회에서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첨예한 관심은 ‘포지션’인 것처럼 보인다. 적실한 포지션은 그에게 발언할 권리, 대우받을 자격, 영형력을 미치고 꾀할 자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담론의 선취에 따라 권력의 지형이 쉽게 바뀌는 우리 사회 구조 안에서는 특히 그렇다.) 너무 삐딱한 시선인지는 모르지만 지식의 권력적 행사에 용이한 포지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유지하려는 욕망은 매우 본능적인 것이어서 이것은 심지어 학자적 양심에 우선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결국 자신의 생래적 계급과 상대적으로 모순을 덜 일으키는 진영 안에서 ‘자리’에 대한 헤게모니를 다투고 취하는 것에 자신의 지식을 소비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인이 다 그렇다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이런 의심의 정황이 지식인 사회의 모순에서 이미 충분히 노출되었다고 믿는다. 비주류로 분류되는, 국내에 학맥이 전혀 없는 학자의 학술적 저작물을 고소고발하고, 학문적 작업을 방해하는 중심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정적으로 구축한 포지션에 이 학자의 작업이 균열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지 그들이 자신의 위선을 은폐하려고 다분히 감각적으로 짜놓은 민족적 자존심 대 매판적 친일의 프레임이 아니다. 나는 그들이 해당 책의 학술적 가치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잘 알기에 논의를 차단하고 법원에 단죄부터 요구한 것이겠지. 나는 그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양심의 심판이 필요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일본정부의 돈을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말을 퍼뜨리고, 강간을 당해봐야 한다느니 ‘국민쌍년’이라느니 하는 막말로 자행되는 인격살인을 용인하는 것도 범죄행위에 준하는 것이다.) 내가 이번 사태를 두고 관심과 절망이 교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가 일본제국주의의 범죄를 두둔하겠는가. 종전 70년이다. 우리는 이제 ‘친일/반일’이 아니라 ‘극일’을 말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일본도 변한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지식과 권력의 위선이 정말 지겹다.

 

2월 28일 포스트

  1. 2월 마지막 날이다. 내일부터는 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대청소를 했다. 대청소라고 해봐야 청소기 돌리고 걸레로 훔친 것뿐이지만. 어쨌거나 청소를 마치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지금은 열어놓은 창을 통해 산새소리가 제법 선명하게 들린다. 가벼운 산책, 청소를 마치고 새소리를 듣는 것, 온수와 냉수로 번갈아 샤워를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사람을 너그럽게 하는 것 같다. 우주적인 ‘망원감’을 가질 수 있다면 맹렬해보이는 우리의 삶 역시 꼼지락거리며 싸우는 진드기들의 싸움밖에는 안 될 터인데. 이딴 소릴 해놓고 나는 또 어딘가에 제출해야 할 서류 생각에 골몰하겠지.
  2.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에 복지를, 그리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 통일이라는 담론을 선점했을 때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야권과 진보세력의 반응이 생각난다. 전통적으로 진보 쪽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의제인 ‘복지’와 ‘통일’을 뜬금없이 ‘독재자의 딸’이 들고 나오니 뒤통수를 맞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들의 심정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대놓고 비판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었을 그 자중지란의 포지션이 말이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거나 짐짓 무관심한 척하는 학계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복잡한 표정을 발견한다. 한일간 역사 문제를 주조음으로 하는 근대의 극복과 민족주의의 성찰이라는 가장 뜨겁고 민감한 의제를, 자기들 딴에는 ‘쳐주기도 싫은’ 비주류 학자가 자기들 눈에는 ‘되지도 않는 깜량’으로 계속 말하고 있으니, 일단은 기를 죽이고 싶은 심정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그 의제는 오로지 자기들이 기득권을 가져야만 하는 사유화私有化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팩트가 아니라 내가 가진 심리적 추정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내 심증이 보기 좋게 틀리기를 바란다. 그렇게 우리의 학계가, 지식이 작동하는 매커니즘이 위선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한번쯤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3. 또 현실적인 정치 이야기를 하고 보니, 청소 후의 상쾌한 기분이 조금 망가졌다. 나를 잘 아는 분들은 진지하게 정치현안에 대한 발언을 가급적 삼가라고 조언하시는데, 내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내가 사는 동시대와 세계, 그리고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나 혼자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면 문학적 피안으로 벌써 도피했을 텐데. 술이나 먹고 누워서 흐린 하늘이나 보며 살 텐데.

 

설안재, 한겨레의 사실 왜곡에 관해

2월 28일 포스트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 한겨레가 그 책을 까는 기사는 언제쯤 나오나 했다. 역시 예상은 조금도 빗나가질 않네. 언제부터인가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난 늘 한겨레와 상반된 입장인 게 신기할 정도다. 샤를리 엡도, 정명훈 고액 연봉,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까지.
정명훈 고액 연봉만해도 한겨레 칼럼에 가난한 예술가들을 빌미삼아 까기 시작했을때, 난 그게 한국 음악계의 오랜 권력관계와 일부 음악가들의 타락으로 인한 내부갈등이 아무 관계없는 정명훈 선생에게로 덧씌운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실제 서울시 의원이 줄기차게 이것을 거론하며 문제 삼았을때, 무지를 넘어 악의가 엿보이기도 했다. 그뒤로 한겨레를 줄곧 비판하고, 페친 몇명과도 소통관계를 끊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명절 연휴에는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 약 50여 명의 페친을 끊기도 했다. 어차피 소통하려고 페북하는 것도 아니고 나의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한겨레 길윤형 도쿄 특파원은 제국의 위안부를 어떻게 읽은 걸까. 오늘 토요판 기사는 책 내용의 일부분, 특히 중요한 대목은 왜곡하다시피 하면서 자신의, 그리고 박유하 교수 비판자들의 시각과 거의 중첩되는 논지의 기사를 쓰는 이유는 뭘까. 마지막에 ‘심장’ 어쩌구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내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너무 민감한지라 되도록 자극적이며 논쟁적인 의견 피력을 삼가해 왔다만, 앞으론 내가 느낀 점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싶다.

위안부 문제는 역사와 절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니까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각이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조선 500년이라는 시간동안, 피지배 계층에서 ‘정치적 공론의 장’을 요구하는 최초의 정치 투쟁은 ‘동학 농민 전쟁/혁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배계층은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에 대한 인식에 너무 안일했고, 민중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공론의 장’에서의 사실 왜곡은 이미 공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수일 때에는 심리적 폭력에 다가서는 길이다. 토론은 이성적이며 비평/해석학의 관점에서 정확해야 한다. 심리/감정의 세계와 관심법은 毒이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는 이미 맛이 살짝 간 것 같다.

역사 논쟁은 대개 ‘현재화한 과거’와 ‘현재화한 미래’가 부딪히는 지점이고, 위안부 문제는 고통이라는 본질이 더해져 ‘현재’를 더 난해하게 만든다는 점. 박유하 교수의 집필 방향/의도와는 다를 수도 있지만, 내가 제국의 위안부를 읽는 독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할 거리가 많고, 섣불리 의견 피력을 삼가는 것일 뿐.

오석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몇가지 생각

오석태

https://www.facebook.com/suktae.oh.5?fref=ufi

 

2월 26일 포스트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몇 가지 생각

  1. ‘제국의 위안부’는 ‘회색지대’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다양한 회색지대를 제시하고 있다. 본국과 적국(교전상대국) 사이의 회색지대인 식민지, 연애와 강간 사이의 회색지대인 매매춘, 정부차원의 사과와 민간차원 사과의 회색지대에 위치했던 고노담화와 아시아여성기금, 위안부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는 우파와 철저한 국가차원의 사과를 요구하는 좌파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지식인들 등이다.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흑과 백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진실은 보통 흑색이나 백색이 아닌 회색이다.

  1. ‘제국의 위안부’는 한일간의 화해를 위한 책이다.

원래 일본문학 연구자였던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 야스쿠니 신사, 독도 등 한일관계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게 된 것은 한일간의 화해를 위해서였다. 화해를 위해서는 회색지대를 인정해야 한다. (‘철저한 과거 청산과 사죄 후의 화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속내는 화해를 하지 말자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과거 청산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루게 된다. 남북한 관계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화해를 위해서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하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유하 교수는 일본인, 그 중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회색지대에 서 있는 여러 사람들(와다 하루키, 가라타니 고진 등 잘 알려진 지식인들을 포함하는)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유하 교수는 친일파가 맞다. 한일간의 화해를 위해서는 일본 내 친한파 뿐 아니라 한국 안에도 친일파가 필요하다. (나 자신도 한일간의 화해를 원한다.)

  1. ‘제국의 위안부’는 한일기본협약의 불완전성을 상기시켰다.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협약은 식민지 해소의 조약도, 전쟁 후의 강화 조약도 아니다. 일본이 한국에 ‘청구권 자금’을 제공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연장선상이었으며, 이는 결국 ‘징용 징병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었을 뿐 식민지배 전체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 한일조약 어디를 봐도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는 없다. 그리고 한일간의 모든 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규정하여, 이후 일본정부가 위안부에 대한 보상을 거부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박유하 교수는 고노 담화와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회색지대’를 긍정하면서 이를 계승,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한일기본협약을 대체하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포함한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 적대적 대상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 대상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 모두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천안함이나 연평해전 전사자, 아니면 대한항공 858기 폭파 희생자나 아웅산 폭탄테러 희생자 가족 모두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진심어린 설득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아래는 제가 작년 여름에 쓴 서평입니다.)
http://blog.naver.com/neolone/220123355036

김미영, “자발적 매춘” 에 대한 단상

김미영

https://www.facebook.com/miyong.kimto?fref=nf

 

2월 10일 포스트

(하얀 거짓말 혹은 과장 …. 에 대한 비교문화적 단상)
한국으로 말하면 손석희씨 정도의 영향력 있는 미국 NBC방송 앵커가 수년 전 보도에서 과장한 일로 평생 닦아놓은 커리어가 무너질 위기-그의 과장으로 딱히 피해자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간 그의 젊잖고 친화력 있는 분위기로 막강한 팬덤이 있는 인물이지만 사건보도를 둘러싼 과장이 드러났을때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니까” 로 인정하고 자숙하라는 비난은 있을지언정 그가 말한 하얀 거짓말들의 디테일의 오류를 발견, 지적한 이들에게 돌팔매질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황우석 사태나 박유하샘 사건을 보면 불편한 진실은 폭력을 써서라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꽤 있는게 우리나라의 현실. 언제까지나 진실의 메신저 들에게 돌팔매질하며 되지못한 괴논리를 펼치려는지. 공공의 선 이라니 .. 부끄럽지도 않은가.

 

2월 23일 포스트

자발적 매춘에 관한 단상:

내친구 “딥 뉴웬”

살다보면 동기간 같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나이도 인종도 살아온 과정도 아주 달라도. 대학원때 우리 동기 다섯명이 그랬다. 보스톤 토박이 키다리 아이리쉬 맨 “바비”, 쥬위시 공주 “데나” , 레바논 출신의 천재 “쑤라야” , 베트남을 틴 에이저일때 마지막날 보트로 탈출했던 “딥”, 그리고 남편 공부시키러 왔다 우연찮게 공부하게 된 나. 공부도 한방에서 하고 밥도 같이 해먹고 싸우기도 무단히 싸우고. 이제는 다 뿔뿔이 흩어졌지만 형제자매 만큼 끈끈한 마음은 변함없다.

몇년전 모교에서 나한테 학교를 빛낸 동창에게 주는 상을 준다 하여 망설이다 갔었는데 그 상보다 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캐나다 까지 각지에 흩어져 사는 내 친구들이 다 함께 모인 것. 산장 비슷한 교외의 리조트 스위트를 빌려 다섯이 일주일을 정말 논스톱을 먹고 놀다 왔다.
마지막 날밤은 모두 다 달빛 비치는 거실에 담요를 깔고 남녀 불문 중년의 “혼숙” 을 하게 되었는데 그밤을 잊지 못하게 한것은 내친구 “딥”의 난민 수용소 시절의 아리고 아린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그녀가 어린시절 베트남을 탈출하다가 식구의 반을 잃은 것, 고생고생하며 학부 마치고 미공군에 입대해서 당시 대령이었던 그녀는 군장학금으로 석박사를 마친 재원. 깔끔한 성격이라 내 너저분한 책상 치워주는걸 부전공으로 삼은 그녀(이제야 이야기지만 난 그거 속으로 싫어했다). 우린 그아이에 모르는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희들 내가 미국 오기 전 라오스 난민수용촌에서 삼년이나 살았던 걸 모르지?”

“………..”
그렇게 시작된 그이야기. 같이 울고 웃으며 들은 그 아이의 그 아픈 삼년 생활 중 요즘 부쩍 더 생각나는 부분이 있어 반추한다. “난민수용소 생활이라는게 참 루머가 많은 곳이라 하루에도 몇번씩 우리는 모두 다시 공산화된 베트남에 압송될 거라는, 그러면 우린 앞날을 기약할수 없는 수용소로 가거나 친미분자로 가려져 처단 될거라는 등의 이야기들…”
“그런데 그 와중에 채 여자티도 안 나는 나 같은 아이들이 어쨌거나 살아보려고 경비병들에게 추파를 던지는거야…”
“나? 물론 나도 몇날 며칠 어떤 경비병 에게 내 장래를 의탁해야 하나 그 감수성 예민한 시절을 고민하며 보냈지…”
“……..”

그리고 갑자기 그녀가 울기시작했다. 서럽게 서럽게 오래도록. 우리도 나직하게 숨죽이며 울었다. 달빛이 막 감당할수없이 쏟아 지고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어린 친구들이 어떤 경로로 “자발적”인 매춘을 계획했던 실행으로 옮겼던 아니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이 가져다 준 그 폭력적인 상황이, 그래서 멍이 들었을 그녀들의 영혼들이 가여워서.

그날 밤 같이 울던 우리 친구들의 측은지심은 내 친구 딥과 그 아이 친구들을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를 전제로 한 조건부의 마음 울림이 아니었다. 내 일천한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자면 개중 식구들을 살리려고 쫌 발랑 까진 아이들이 껌씹으며 걸어갔던, 혹은 능력없고 심약한 어떤 아버지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그 아이들을 떠밀었다 해도, 우리의 마음 울림과 전쟁상황에 대한 분노나 그속에서 무시되는 인권옹호를 위한 작은 액션을 취하자는 우리의 결의는 변함없었다. (여담이지만 이 친구들중 셋이 인권옹호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최근 다시 불붙기 시작한 Park Yuha 선생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을 보며 내가 조용히 좋아해왔던 폐친들도 박유하샘의 관점을 오해하신듯 하여 안타깝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저자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어떤 경로로 위안부가 되었던 우리 모두가 안아드려야 한다는 것. 그녀들이 딱히 소녀상에 맞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해서 우리가 모두 등돌릴 만큼 미성숙한 사회가 아니라면 꼭 묻어만 둘 게 아니라 이런저런 다양한 형태의 모집과정, 그 과정 속에 강하게 자리잡은 못난 가부장적인 문화의 역할도 살펴보면서 이제 몇 년 안 남은 이들의 여생을 제대로 보상하고 전쟁종주국이었던 일본에게도 팩트에 의거한 책임을 물어보자, 법정에서도 보면 큰 줄기가 있다 해도 디테일에서 틀리면 결국 힘있는 변론하기가 어렵지 않은가로 읽힌다.

요즘 미국에서 탈북자들의 인권을 위해 일을 하는 친구들이 고민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많은 탈북자들이 그들의 탈북과정이나 북한의 상황을 과장하여 발표하는데 그러다가 그 디테일의 틀리면 그들이 해온 모든 말의 신뢰성이 한방에 무너지고 만다. 그분들의 말로는, 우리 대중들의 너무 선명한 이원론적 내레이티브 선호가 그런 “하얀” 거짓말을 부른다 한다.

글로벌시대에 맞추어 스탠다드를 맞추자는 각성은 수출해야 할 컴퓨터 프로그램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박유하는 그 수많은 돌팔매를 맞으며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은것 같다.

“꼭 총칼의 위협으로 끌려간 소녀들의 이미지가 이책으로 훼손 된다해도 우리가 그이들을 사랑하고 안쓰러워 하는 맘이 달라져야 하는 걸까요?”

안개비 내리는 일요일 아침. 모두에게 따뜻한 생각 보냅니다 . 내친구 딥에게 전화나 해야겠네요.

김도언, 파시즘에 반대하며

2월 20일 포스트

어제 어떤 분이 박유하 선생의 <제국의 위안부>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판매금지 가처분 결정을 옹호하는 포스팅을 했길래, 나도 차분하고 진실되게 반론 성격의 댓글을 세 개 정도 달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그분 담벼락에 들어갔더니, 내가 달았던 댓글이 지워지고 온통 그분의 의견에 동조하는 댓글만 도배되어 있는 걸 보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차분하게 내가 달았던 댓글이 지워진 사실을 적시하는 댓글을 달았던 것인데, 그러고서 정확히 1분 후에 그분으로부터 차단당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차단 당한 남자. 내가 바란 건 이성적인 토론이었는데 뭐가 그분을 불편하게 했을까. 그분 이름은 죽어도 밝히지 않겠다.

 

2월 22일 포스트

작가적 양심 운운할 것도 없이 개인적으로 소시민일 뿐인 내가 반대하는 건, 소시민적인 개인의 일상을 기만하고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파시즘이다. 하나의 정의만이 인정될 때 독점적인 이익을 얻는 세력의 위선과 탐욕이 그 파시즘을 견고하게 추동한다. 기막힌 역설이지만 교조주의와 전체주의는 종종 교조주의와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형식으로 새로운 차원의 파시즘을 구축한다. 그걸 알고 경계하는 것과 모르는 채 자기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욕망과의 싸움, 그게 나는 모든 개인의 전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믿는 진실을 소신있게 말하되,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삶부터 조롱의 대상으로 삼아보는 것은 그래서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조롱은 성찰의 유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의해 선택된 단어다. 상처와 고통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여러 입장이 있을 수 있는데, 북한정권처럼, 혹은 1970년대의 박정희처럼, 혹은 IS처럼 정신무장이나 개조 차원의 국가주의적 강요로 단속하는 게 과연 지금도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고통스럽게 자문하고 싶은 것이다.

 

2월 22일 포스트

혹시 나도 그런 오류를 범했을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공방에서 저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혹여 상대 쪽 사람들을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종속된, 덜 각성된 근대적 우민이라고 간주하면서 비난하고, 자신들은 세련된 무정부주의자나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탈근대 합리적 시민(지식인)으로 자처(포지셔닝)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쟁의 본질을 엉뚱한 데로 끌고 갈 소지마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저쪽이 자신들은 약자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휴머니스트들이고 이쪽을 친일잔존 세력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는 값싼 감정의 포즈밖에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비판의 목적은 사람을 평가하고 배제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의견이 가진 논리적 모순을 공박하는 데 있다. 학술적 의견이 담긴 책은 해석의 여지에 따라 찬반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외부자로서 나는 이 문제의 출발이 연구자의 학문적 소신이 담긴 책을 법정에 세운 원고측의 야만적인 고소고발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것인지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작물을 법적 판단에 맡겨 처벌을 요구한 것이야말로 이 사태가 보여준 다양한 장면 중, 가장 명백하게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에 반대하는 쪽 일부도 인정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의 해석과 수용에 따른 다양한 논쟁은 그것의 부당함이 인정받은 다음 공론의 장에서 이어져도 늦지 않다.

김진우, 여성적 관점으로 본 위안부

Andrew Jinwoo Kim

2015년 2월 22일 ·

여성적 관점으로 본 위안부

<제국의 위안부>에서 지적하고 있는 위안부라는 폭력적인 제도의 가장 큰 범인은 가부장주의다. 가부장주의는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일본과 조선뿐 아니라 당시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있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 위안부를 모집하기 전부터도 일본과 조선에서는 성매매가 흔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또한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내가 서평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위안부의 archetype로서 17세기부터 존재했던 ‘가라유키상’을 들수 있다. 가라유키상은 특히 메이지유신 이후 많아졌는데, 해외에 나가 있는 일본 상인, 관료, 군인들의 수요에 부응했다. 오늘날 한국의 비즈니스맨들이나 남자 관광객들이 가는 곳에 어김없이 한국식 성매매업소가 들어서고 심지어 그 문화(?)가 한국인들과 사업상 관계를 맺는 현지인들에게까지도 전파되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할만하다.

위에서 내가 든 사례들을 보면, 여성을 성매매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것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9세기식 제국주의 방식이든, 21세기식 자유주의 방식이든 간에, 여성의 몸은 철저히 세계 곳곳으로 ‘진출’하여 국가의 이익이나 기업의 부를 키워주는데 복무해야 할 근대적 남성 주체의 ‘위안’을 위해 희생되고 이용되는 것이다. 비록 가부장주의 자체는 전근대의 유산이지만, 근대와 결합하며 어떤 면에서는 더 악질적으로 변하기도 했고, 남성은 근대의 주체가 될 자격이 주어졌던데 반해 여성은 여전히 객체로 남아있어야 했다.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이 1910년대 이후의 일이었고, 실제 사회생활의 영역에서는 더욱 오랫동안 차별당했다. 산업혁명기의 섬유산업이나 전시의 군수공장 등에서 일은 일대로 했는데 말이다. 전업주부로 사는 것이 덕목으로 강조되던 건 부르주아 가정의 경우 또는 1950~60년대 미국과 서유럽의 중산층 가정의 경우였다.

어쨌든 일제시기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이미 식민지인으로서 2등 시민 대우를 받아야 했던 차에 여성으로서 이중적인 차별을 감내하고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 놓여 있었다. 집안에서도 아버지나 남자 형제, 남편과 시댁에 눌려 살아야만 했고, 사회에서도 종사할수 있는 직업이나 개인적으로 할만한 활동의 선택지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비록 1920~30년대에 경성을 비롯한 도시의 일부 교육받은 중, 상류층 출신들 중에 ‘신여성’이라는 근대적 여성상이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조선여성들(심지어 일본여성들에게조차)에게 그것은 아주 먼 이야기였다. 어쩌면 종군위안부는, 특히 전시가 되며 경제상황이 악화되어가던 차에, 평범한 식민지 여성의 몇 안되는 삶의 선택지였을지도 모른다.

소설 <감자>에서 무능한 남편을 둔 복녀가 중국인 부자 왕서방에게 몸을 팔고, 심지어 죽어서도 그 댓가(보상금)는 남편과 장의사에게만 돌아가는 것을 볼수 있다. 복녀의 모습은, 그 당시의 적지 않은 조선인 여성들의 현실적인 처지를 나타내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복녀를 우리가 죄인이라 할수 있는가. 죄인은 오히려 왕서방과 남편, 그리고 그 모든것을 용인하는 가부장적 사회가 아닐까.

나는, 위안부로 간 수많은 조선여성들 역시 복녀와 같은 체제의 피해자라고 파악한다. 그렇게 파악할 때, 물리적인 강제연행이 부정되더라도 위안부를 일제의 피해자라고 볼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사실 <감자>와 같은 이야기는, 계몽주의적 시각으로 보기엔 아주 불편한 이야기인데,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알고있던 위안부의 서사는 계몽주의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사료된다.

이처럼, 모더니티는 결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던 게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의 동아시아를 기준으로 보자면, 가장 우선적으로 모더니티의 권리를 향유할수 있었던 이들은 일본인 남성이었다. 그 다음은 조선인, 중국인, 타이완인, 오키나와인, 홋카이도 원주민들 중 근대 문물에 접근이 가능한 남성이었다. 아마도 지주나 상인 계급에 속해있던 이들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일본인이건 식민지인이건, 상류계급 출신이건 빈민이건 간에 1945년 이전까지는 모더니티의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일본과 한국 모두 여성의 선거권이 1945년 이후에야 처음 보장되었으며, 나혜석을 비롯한 조선의 신여성들은 당시 일본이나 서양의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독보적인 경우에 속했다.)

정승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읽기 2

정승원
2015년 2월 22일 ·

‘제국의 위안부’ 읽기 2
– 서로 다른 일본에 대한 인식

‘제국의 위안부’ 책 내용은 지금까지와 다른 일본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여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일본에 대한 인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본을 긍정하는 일부 내용을 가지고 교묘하게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긍정하는 사람이니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에 사실상 동조하는 내용이라고, 일본의 우익에 교묘하게 동조하는 사상이라고 봅니다. 뉴라이트 사상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의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 우리는 주로 식민지 시기의 일본 이미지를 머리 속에 떠올립니다. 그것은 굉장히 부정적인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지난 해방이후 70년동안 일본이 변해온 모습에 대해 눈을 사실상 감아왔습니다. (참고로 일본의 세계적인 이미지는 굉장히 좋습니다. 우리와 달리, 세계인들은 평화적인 국가로 인식합니다.)

2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지원활동, 그리고 일본식민주의를 청산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상만을 주입받았고, 여기에 반대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일본을 이롭게 해주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3. 우리는 위안부 지원 단체에 대해 맹신합니다. 하지만, 박교수가 책에서 여러 사례들을 들었듯이, 위안부 지원 단체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공론화되지 못했을 뿐,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의 위안부 단체를 비판하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4. 기존의 좌우, 보수와 진보 대립 구도하에서 양자 어느 쪽에 속하지 않는, 속해보이자 않는 학문은 낙인을 찍습니다. ‘뉴라이트’니! 박유하 교수의 책은 좌우 틀을 모두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7053156654931

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3

박일환
2015년 2월 22일

<잠시 쉬어가며>

다른 이의 담벼락에서 논전이 이어지는 걸 보고 있는 중에, 박유하 교수가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그래서 아래 글을 타이핑해서 댓글로 달았다.(비판자들은 박유하 교수의 책에 있는 이런 구절들은 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차라리 책 전체를 타이핑해서 연재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에 앞서 ‘제국’ 구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위안부를 필요시했던 나라로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제국’의 욕망과 지배를 다른 제국 국가에 앞서서 반성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미 영국과 이탈리아가 그런 사죄를 한 적이 있지만, 서양의 제국주의를 의식하며 제국주의로 향하게 된 일본의 사죄는 아시아의 통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해질 때, ‘전후 일본’은 비로소 ‘제국후 일본’(포스트 제국 일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일본 정부의 ‘기금’ 안이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죄나 보상의 형태를 정하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배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원단체와 ‘위안부’를 참여시켜 협의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원단체나 위안부들도 이제까지의 대표적인 주장 이외의 의견을 가진 이들 또한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부와 당사자 간의 협의를 위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양국의 관계자/지식인들도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란 당사자와 운동가들만의 판단으로는 합의에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20년 동안의 세월이 그것을 증명한다.

만약 해결안에 대한 합의에 도달해서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세계를 향해 일본의 생각을 밝히는 공식적인 형태를 취하는 편이 좋다.

그때 일본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위안부’라는 존재를 통해 드러난 ‘식민지배’ 문제임을 말하고,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그런 한일협정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한일기본조약 자체를 흔드는 어려운 사태를 감수하지 않고도 한국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때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는 기간에 희생당했던 수많은 사람들 – 3·1 독립만세운동, 간토 대지진, 병사로 동원되어 참가한 전쟁, 고문 등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 – 에 대한 진심을 그 ‘사죄’ 속에 담아야 한다.” (271~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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