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7/7/14

형사2심 두번째 재판이 있었다. 무더웠던 하루.

검사는 사흘전에 “공소사실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겉으로는 큰 차이 없어보이지만, 단어를 바꿔 어떻게든 괘씸죄를 물으려는 목적이 뚜렷한 내용. 그리고 며칠전에 보도된 위안부 동영상 관련 기사, 그리고 일본정부가 강제동원관련문서존재를 인정했다고 보도한 기사를 추가 증거로 제출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둘 다, 검사가 증명하고 싶어하는 나의 “범죄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자료다. 나는 위안부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고, 더구나 이 기사에서 언급한 서류는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네덜란드나 인도네시아 여성 관련 서류이고, 나는 조선의 위안부에 대해 말했던 것이니까.
1심에서도 검사가 국민의 세금을 써가며 해 온 일은 대부분 그런 일이었다.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나자신에 대한 누명과 억압이상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무의미함을 참아내는 일이다.
아무튼 오늘, 향후 일정이 정해졌다. 한두번만에 기각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배반당했고, 피고인 심문과 증거설명과정을 다시 반복하게 되었다.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법정에 서게 된다. 다음 재판은 9월6일 오후 4시. 이 가을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형사재판의 가을”이 되게 되었다.

渦中日記 2017/7/13

그리이스 신전기둥같은 멋진 건물형태를 빌어 억지 논리를 세워놓은 이 자료는, 검찰이 1심형사재판때부터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가며 강조해 왔던 논지자료다. 왜 억지왜곡논리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수십번 말해왔는데도, 내일은 다시 이논리와 싸워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내용은 엉터리지만, 이 논지에 따르면 나는 위안부할머니를 비난한 게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이 기소와 재판이, 실은 “해결 방법을 둘러싼 생각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역력한 자료이기도 하다.
무죄판결문을 왜곡하면서까지 내 책을 “조악한 연구”라 했던 경향신문 기자의 칼럼 역시 검찰은 “범죄증거자료”로 제출했다.
2017년 7월14일 오후 4시.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서관 제403호 법정 (6번 법정출입구)에서 형사재판 검찰항소심 두번째 재판이 있다.

渦中日記 2017/7/13-2

어젯밤에 김도언 작가 담벼락에 들렀던 걸 계기로, 나를 아이히만에 비교하고 “제국의 변호인”이라는 소리를 서슴치 않았던(이 두개의 비유를 하나의 대상에 쓰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걸 그는 모르는 것 같다)손종업교수가 여전히 나를 비난중이라는 걸 알았다.
국가재판뿐 아니라 여론재판도 여전히 내겐 진행중이다.
비난이든 비판이든, 옳은 내용이면 언제든 경청하고 싶다. 그런데 다른 이의 말을 내가 한 소리로 간주하고 비난하거나, 내가 쓴 말은 손정업씨가 쓴 걸로 생각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댓글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실, 내가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은 처음부터 이런 일들이었다.
내가 그 대상이 되어서가 아니라, 비평가라는 이름을 단 사람조차 저지르는 총체적 경박성이 서글프다. 우리시대 한국을 소모시키고 좀먹고 있는 한장면.
위안부문제에서도 이런 일이 있으니 그런 부분을 지양하자고, 나는 말했을 뿐이다.



渦中日記 2017/7/12

탁현민의 문제는 그의 생각패턴이 변하지 않았다는데에 있다. 자신이 “전쟁광 ” 이라고 판단한 사람이면(라이스 전 미국무총리) 강간해 죽이자는 발언마저 허용하는 식의 인권에 대한 무감각은,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그 옛날 탁현민이 만든 “오늘의” 탁현민이다.
송영무 장관후보의 문제 또한, 3000만원의 자문료자체보다(물론 이 부분은 양극화를 빚는 한국적 시스템 문제)그 정황을 “일반사람, 서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로 말하는 정당화에 있다. 서민들이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를 정당화하는, 내면화된 차별의식과 기존세계에서의 안주욕망을 드러내는 이가 어떻게 개혁을 할 수 있다는 걸까. “개혁”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한다.
이들의 감각은 진보/보수 할 것 없이 공통된 것이겠지만, 이들이 진보쪽 텃밭에서 성장/성공한 사람들이라는 건 “한국적 진보의 모순”을 여과없이 상징한다.
문재인대통령이 이들에 대한 비호를 멈추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페미니스트 이전에 서민대통령이자 인권대통령이고자 한다면. “멋진”대통령이, 연출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혐한을 생각하기

어제 지원단체장의 일갈에 언론들이 나서서 비난한데 대한 비판을 썼지만, 그 내용이 옳기만 하다면 당연히 문제될 것이 없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들의 발언에 곧잘 무/의식적 과장과 독단, 때로 왜곡이 섞이곤 한다는 점에 대해서였다.
2주일 전 학회에서는, 미국거주 일본인학자–최남선을 연구해 왔다는 여성학자가 “솔직히 말해 이제 더이상 한국을 연구하기 싫다”고 말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었다. 일본인의 혐한이 학계에까지 확산된다는 건,
차세대 한국연구자들이 줄어드는 걸 의미한다.
얼마전엔 전주한일본대사가 한국비판 책으로 비난받은 사건이 있었지만(물론 그 자체야 결코 칭찬할 일이 못 되지만), 사실은 비난만 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학자나 외교관—상호이해를 위해 노력해 온 이들조차 혐한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좀더 심각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모든 감정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최근엔 百田尚樹라는 작가가 낸 <이제 한국에 사과하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데, 작가 자신이 쓴 글을 보니, “우리가 당신들의 생각을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지배했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는 있지만, 정말은 ” (문명을 받아들일 능력조차 없는) 당신들을 바꾸려 해서 미안해”하는, 조롱으로 가득한 책으로 보였다.
물론 그런 그들을 비판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우리는 그런 정황자체를 모르고 있거나, 그저 그들한테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에 있다. 그리고 그런 한 현상황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데에 있다.
여전히 잘못된 기사들이 넘치는 (강제연행 증거! 라면서 나오는 보도들이 보여주는 자료는 대부분 일본이거나 중국이거나 혹은 인도네시아등 동남아에서의 일이다) 언론현실과,그런 언론에 기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국민현실을 이시점에서 한번쯤 생각하고 개선하지 않는 한, 사태는 분명 더 심각해진다.
아마도 정부는 당분간 청년들의 일본 기업취직이니 한미동맹이니 한일스와프 협정등 때문에 어느정도 눈치를 볼 것이다. 하지만 불신을 안은 채 그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도대체 뭐가 잘못 되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청년들과 차세대를 위해서라도.
이전에 쓴 글들을 정리하다가, 이하의 글을 만났다. 2년 전 글이지만 상황이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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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친일”이라는 딱지는, 익숙하지 않은 생각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지적태만을 드러내는 사고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복잡하고 섬세한 문제들을 단순하고 거칠게 뭉뚱그려 결과적으로 폭력을 만드는 사고로 이어집니다. 무엇보다, 그런 딱지를 두려워해 침묵하거나 딱지를 붙이는 쪽으로 돌아서고 마는, 전체주의에 가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대세와 다른 말은 하지 못하는 자폐적 공간이 확장되고 있고, 자유로운 사고의 주인공이어야 할 젊은 학생들조차 자기검열에 급급한상황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입니다.
그런 지적태만은, 일본에 대한 근거없는 비난까지 허용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사회에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습니다. 특히 피해자관련 혹은 영토문제 관련단체들은 위안부문제에 관해 언급할 때마다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라고 비난해왔고 그 결과, 2015년 현재, 한국인의 70퍼센트 이상이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로 생각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나도록 사죄와 반성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타국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갖도록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인식이 불식되지 않는 한 한일간의 화해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 2015년 현재의 언론과 외교와 지원운동이 지극히 자폐적이 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일본에서는 이제, 위안부를 위한 <아시아여성기금> 의 모금에 참여하는 이들의 존재를 더 이상 상상하기힘들만큼 국민감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언론과 외교와 운동은, 그런 현황을 직시하기보다 일본의혐한파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사고와 주장만을 반복중입니다. 위안부문제를 생각하는 일은, 늦었지만 이러한 현상황을 파악하고 일본을 총체적으로 아는 일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

渦中日記 2017/7/10

지원단체의 말 한마디를 언론이 그대로 옮겨 쓰고, 국민이 동참해 누군가를 함부로 비난해도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나자신 비슷한 경험을 했고 여전히 그 자장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일이 더이상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물론 나는 강은희 전장관과 일면식도 없고,
한일합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비난 댓글로 동참한 사람 중에는 무려 교수도 있다.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
생각해 보면, 정대협은 이미 10년전에, 한국의 한 언론이 나를 “지일파”로 표현한 기사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친일파”로 번역해서 내 보내기도 했던 곳이다.
운동이든 연구든, 지키는 일 자체에 연연하면 자신이 타자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에 둔감해진다.

하라구치 요시오(原口由夫), 「정영환-망각을 위한 화해: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비판

 2017-02-12

 〔정영환 『망각을 위한 ‘화해’』에 대해서〕

 

본서에는 확실히 박유하씨가 말하듯, 수많은 ‘오독’, ‘곡해’가 있다. 내가 발견한 그 몇 가지를 제시하고 싶지만, 전체의 3분의 2정도 읽었을 즈음에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무엇도 증명하지 않고 오로지 자의적인 해석으로만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본서에서 더 이상 계속 읽을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투고는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았지만, 나 자신을 위한 비망록도 될 터이니 투고하기로 했다.

 

【일러두기】

1) 최초 페이지 번호는, 본서의 페이지 번호.

2) ≫로 시작되는 부분은 정씨에 의해 본서에 게재된 『제국의 위안부』의 인용.

3) (제, P.135) 등의 ‘제’는 『제국의 위안부』를, (망, P.46) 등의 ‘망’은 『망각을 위한 ‘화해’』를 가리킴.

4) >로 시작되는 부분은 본서의 지문(정영환씨의 문장).

5) ――로 시작되는 부분은 내 문장(코멘트).

6) ‘Soh’는 Sara Soh “The Comfort Women: Sexual Violence and Postcolonial Memory in Korea and Japan, 2008.

7) [ ] 안은 내 보충 주석.

 

P.17 ≫당시에 이미 정신대에 가면 위안부가 된다고 하는 오해가 있었으니 (중략) 경우에 따라서는 당시의 윤교수도 그러한 소문을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실제로 정신대에 간 뒤, 위안부가 되는 케이스도 있었으므로 그 소문이 반드시 거짓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이러한 혼동이 생긴 것은 실제 케이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문’ 자체로 인한 것일 것이다. (중략) 식민지 특유의 공포가 그러한 거짓말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제, P.135)

>이 짧은 기술 안에는, (a)소문은 ‘오해’다, (b)소문은 ‘꼭 거짓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c)소문은 ‘식민지 특유의 공포’가 유발한 ‘거짓말’이다, 라는 얼핏 보기에 모순되는 세 개의 주장이 병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내용에 대한 찬성 여부 이전에 저자의 ‘소문’에 관한 인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간단한 기술이 정씨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일까? 정씨 스스로 ‘일견 모순되는’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어디까지나 ‘얼핏 보기에’ 그런 것이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a) (b) (c)등으로 새삼스레 나누는 것은 왜일까(억지로 나눠서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내용을 보면, 정신대에 가면 위안부가 된다고 하는 소문은 ‘오해’이며, 진실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거짓말’이지만 그 중에는 실제로 정신대에 간 뒤 위안부가 된 케이스도 있었다. 누구나 이해가 가는 내용이다. ‘일반’과 ‘특수’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자의적으로 ‘모순되는 세 개의 주장’이라고 분석해서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P.24-25 ≫’위안부’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한국에서 위안부란 우선 <일본군에 강제 연행된 무구한 조선인 소녀들>이다. 그러나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문제―소위 ‘위안부 문제’를 없었던 것으로 하려는 부정자들은 <위안부란 스스로 군을 따라다닌 단순한 매춘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20년간, 한국과 일본의 사람들은 그 양쪽 기억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해 왔다. (제, P23)

>박유하가 제시하는 2항대립은 기묘하다. 대립의 한쪽이 ‘한국’인 데에 반해, ‘매춘부’라고 생각하는 쪽은 ‘일본’이 아니라 ‘부정자’로 설정된다. ‘20년간, 한국과 일본의 사람들’이 ‘격렬하게 대립해 왔다’고 한다면 ‘부정자’를 제외한 ‘일본’ 또한 대립의 내부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항대립은 그 존재를 애매하게 만든다. 이 기묘함에 알아차리느냐 마느냐가 본서 평가의 분기점이 된다.

――여기에서도 정씨는 박씨의 문장을 ‘2항대립’이라고 해석하여 이 ‘기묘함’에 알아차리느냐 마느냐가 본서 평가의 분기점이 된다고 하면서, ‘2항대립의 자의성’이라고도 말하고 있지만, 이 해석이야말로 자의적이다. 박씨는 한국에서 일반화된 기억―강제 연행된 무구한 소녀―(20만 명이라는 표현을 덧붙여도 된다)와 일본의 일부 극단적인 부정자―‘자발적 매춘부’파―를 대치시키고 있을 뿐이다. 정씨는 이 해석 후에 강제성과 군의 관여 문제에 대해 약간의 논의를 전개하고 나서 부정자가 논점을 강제성의 문제로 옮기고 있기 때문에 박씨의 주장은 ‘부정자의 쟁점 설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크게 틀린 말이다. 강제성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부정자뿐만이 아니다. 그 강제성의 문제도 포함하여 한일의 대립이 있다는 말이다. 정씨는 강제성의 문제를 부정자의 견해로 설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왜소화시키며, 박씨가 제기한 문제를 쟁점으로 삼지 않고, 박씨 저작의 ‘2항대립’이라는 스스로가 설정한 논리로 문제를 슬쩍 바꿈으로써 이 문제로부터 쟁점을 비켜 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본서에서는 자료에 기초를 둔 강제성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지 않는다. 정씨는 P.28에서 ‘물론 일본군 ‘위안부’ 제도 전체를 바라보면, 군에 의한 직접적/폭력적인 강제 연행도 존재한 것이 밝혀졌’다고 하는데, 일단 ‘전체’라고 쓰고는 있으나 직접적/폭력적인 예가 있는 것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과 관련해서이고 조선과 관련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의 강제성 문제가 크게 의문시되고 있는 현재, 그것을 쟁점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굳이 강제성의 문제를 부정자의 쟁점이라고 하여 스스로 설정한 ‘2항대립’의 도식 안에 넣고 덮어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제국의 위안부』를 문제시하는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강제성, 자발성을 문제시해야 할 터인데, 본서는 박씨의 ‘기묘한’, ‘자의’적인 논리를 시종일관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

 

P.31 >위안소 설치는 병사의 강간 방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되고 있다.

――연구 성과의 불충분한 이해다. 집단적 강간은 감소했다는 지적이 있다(Soh, P.142). 또 위안소 설치의 목적에는 성병의 예방도 있었다.

 

P.32 ≫그러한 의미에서 위안부들을 데리고 간(‘강제 연행’이라는 말이 공권력에 의한 물리적 힘의 행사를 의미하는 한, 적어도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는 군의 방침으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것의 ‘법적’ 책임은 직접적으로는 업자들에게 물어져야 한다. 그것도 명백한 ‘사기’나 유괴의 경우에 한한다. 수요를 만들어 낸 일본이라는 국가의 행위는 비판은 할 수 있어도 ‘법적 책임’을 묻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제, P.46)

>결국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은 부정되는 것이다.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도 자의적인 해석이 있다.

 

P.32 >한편 박유하는 ‘군속 취급을 받은 업자’가 여성들을 데리고 간 것을 인정하고 있다. 군속이란 일본 육해군에 근무한 군인 이외의 구성원에 대한 총칭이기 때문에 당연히 ‘군속 취급을 받은 업자’에 의한 징집은 군에 의한 직접적인 연행에 대한 관여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위와 같은 업자=군속이라는 규정이 자신의 설명과 모순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을 증거로 삼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얘기다. 대체로 ‘군속 취급을 받았다’고 박씨가 진술하고 있듯이 업자는 ‘군속’이 아니다. ‘조선인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에도 쓰여 있는 것처럼 군속이 아닌 조선인 관리인은 군속에게만 허용된 장소로의 출입을 거부당하고 있다.

 

P.34 >하지만 요시미의 지적을 지지한다면····.군이 여성의 징집을 명하지 않았다면, 인신 매매도 일어날 리 없었고 그 책임을 군 또한 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유하는 징집 명령이 ‘물리적인 강제 연행을 상상시키’기 때문에 ‘섬세한 규정’이 필요하다고 하며 일본군의 관여 사실에 관한 논의를 이미지의 문제로 살짝 바꾼다.

――이 장에서 정씨는 군의 관여 문제에 대해 박씨를 비판하고 있는데, 나가이씨 논문의 지적도 포함하여 군에 의한 위안소 설치와 관여(병참부로의 귀속, 소모품의 급여 등)는 명확한 사실이다. 단, 모든 위안소가 그렇지 않았던 것은 위안부 문제를 조금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주지의 사실일 터이다. 그 사실을 박씨가 말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요시미씨의 지적을 거론하고 있는데, 요시미씨조차도 정씨가 말하는 것 같이 군에 의한 ‘징집’, ‘징집 명령’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요시미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한가지는 파견군에게 요청을 받고 일본의 내지 부대나 대만군/조선군이 업자를 선정하여 그 업자가 위안부를 모으는 방식이다’(요시미 요시아키 『종군 위안부』 이와나미신쇼, P42). 박씨의 의견 그대로다. ‘연구 성과를 전혀 근거로 하고 있지 않은 틀린 논의’라는 표현은 정씨에게 돌아가야 할 말일 것이다. ‘전혀’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P.35-36 ≫군이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사기 등의 위법 행위를 단속하려고 했다····이러한 권력의 존재야말로 군의 <관리> 사실이나 주체적인 관여를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즉, 설령 군이 모집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실이 곧장 군의 관여가 없었다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법 강제 모집을 ‘단속했다’는 것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한 군의 인지와 권력과 주체성을 나타낸다.

즉, 사기든 납치든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지속적인 수요를 만들어, 업자들이 아무렇게나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여성들을 데리고 가기만 하면 장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식의 시스템을 유지한 것 자체가 문제다.(제, P.224-225)

>····일본군의 역할은 업자의 ‘불법 강제 모집을 ‘단속했다’는 데’에 있다고 하는 이해는, 박유하가 그나마 인정하고 있었던 업자의 불법 행위를 ‘묵인’한 책임이라는 주장 조차도 뒤엎는다. ‘묵인’이란 문자 그대로 침묵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군이 업자의 위법행위를 단속했다면, 이것을 ‘묵인’했다라는 주장은 당연히 성립되지 않게 된다. 업자가 군의 눈을 피해 위법행위를 했다고 한다면 ‘묵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유하가 ‘좋은 관여’론을 채용한 결과, ‘묵인’한 책임조차 부정되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도 ‘기묘한’ 말 바꿔치기, 정씨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면 ‘트릭’이 있다. ‘일본군의 역할은 업자의 불법 강제 모집을 단속하는 데에 있다’라는 식으로 박씨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 군의 주체적인 관여가 있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력이 모자란 것인지,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바꿔 말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묵인’책임론과의 모순이 나오고, ‘‘묵인’책임 조차’ 부정한다고 결론짓는 것인데, 폭론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것은 자의적으로 박씨를 깎아내리기 위한 ‘틀린 논의’이다.

 

P.40-41 >본서는 일본군 ‘위안부’제도가 군에 의한 ‘성노예제’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때 ‘성노예’설 비판도····특이한 용어법으로 이루어진다. ···· ‘노예’ 개념을 변형시킨 뒤에 언명되는 ‘‘노예’였다’라는 주장은 사실상 ‘노예가 아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정씨가 인용하고 있는 박씨의 문장은 인용하지 않겠는데, 위안부가 ‘성노예’인가 아닌가는 논의가 갈라지는 지점이고, 박씨가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든 거부하든 그것은 논의할 문제이며, 그것을 비판한다면 그것을 비판하면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씨는 그 비판에 있어서 여기에서도 또 박씨의 언설을 바꿔치기하고 곡해해서 박씨 주장을 ‘변형’시키고 있다. 박씨가 신체적인 구속을 수반한 ‘노예’ 개념과 구조적으로 강제당하는 존재로서의 ‘노예 상태’를 구별하여 논하고 있는 것을 개념의 ‘변형’이라 하고 그 결론을 전도시키고 있다. 게다가 근거도 없이 ‘국제법학적 논의나 정대협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한다’라든가, ‘‘성노예제’ 개념을 ‘성노예’ 이미지의 문제로 살짝 바꿔···· ‘위안부’ ‘모두를 표현’하고 있지 않다며 요점에서 벗어난 비난을 하는 것이다’라고 박씨를 비난한다. 박씨의 논의가 다양한 ‘위안부’ 증언에 기초한 실태 규명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로는 들어가지 않고 개념 이해가 틀렸다며 묵살해 버리는데, 정씨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논점 바꿔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정씨 자신이다. 위안부/위안소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성노예제 개념의 정치적 측면에 관한 Sarah Soh의 연구도 있으니 참조해 본다면, 정씨 자신이야말로 정치적인 언설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연구자로서 실태를 조사해 보면 ‘강제’나 ‘성노예’의 개념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P.44 >일단 박유하의 사실 인식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다. 박유하는 미국의 전시정보국심리작전반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제49호에 있는 버마/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기록을 근거로 평균 연령이 ‘25세’라고 주장한다. ···· 게다가 포로 때의 평균 연령도 23.15세이며 ‘25세’가 아니다. 또, 박유하는 피해자들의 증언으로부터 ‘‘소녀위안부’의 존재가 반드시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었다’(제, P.64)고 주장하지만, 증언한 조선인 피해자들의 대다수는 징집시의 연령이 20세 이하이며····

――여기에서는 박씨의 원문이 웬일인지 생략되고 있는데, 원문은 ‘····심문을 받은 조선인 위안부들의 ‘평균 연령은 25세’였다(「Japanese Prisoners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 후나하시 요이치 2004로부터 재인용). 그리고 한 전직 조선인 일본병사도 위안부들이 ‘20, 21세’였던 자기들보다도 연상이어서 ‘누나’라고 불렀다고 말한다(『하이난섬에 연행된 조선인 성노예에 대한 진상조사』…2011, P.69·72·120).‘이다.

어디가 사실 인식의 오류라는 말일까? 깎아내리기 위한 과장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25세라고 하는 숫자는 증언 기록에 쓰여져 있는 ‘average Korean girl…is about twenty-five years old’에서 왔을 뿐이다. 즉 계산에 의한 정확한 평균 연령인 것이 아니라 증언 기록자의 인상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 연령도 같은 보고서의 부록 리스트에 있는 기록 번호순으로 적어 보면, 21, 28, 26, 21, 27, 25, 19, 25, 21, 22, 26, 27, 21, 21, 31, 20, 20, 21, 20, 21이며 기록자가 ‘about 25’로 한 것도 수긍이 간다(평균치는 정씨도 쓰고 있지만 23.15이기 때문에 ‘about 25’와 전체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사실을 오인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징집’시(1942년. 심문시는 1944년)의 연령은 19, 26, 24, 19, 25, 23, 17, 23, 19, 20, 24, 25, 19, 19, 29, 18, 18, 19, 18, 19이므로 ‘징집’시의 연령이 20세 이하의 인원수는 20명중 12명이다. 이것을 정씨는 ‘대다수’라고 말하고 있지만 틀린 말이며, 이것이야말로 사실 오인이며 기만이다. 게다가 ‘이름을 밝히고 나온 피해자들 52명 가운데, 징집시의 연령이 20세 이하였던 사람은 46명에 이른다’라든가, ‘정진성씨에 의하면, 1993년 12월 시점에 한국 정부에 신고한 전 ’위안부’ 피해자 175명 가운데, ‘징집’시 연령이 20세 이하였던 사람은 156명이었다’라고 표까지 붙여서 보여주고 있는데, 전후 50여년의 시점에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젊었을 때 ‘징집’된 사람이 많다는 것은 당연하다. 고연령자일수록 돌아가신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즉, 정씨가 말한 52명과 175명의 연령은 ‘징집’된 사람이 20만명이든 3만명이든 상관없이 50년 이상 지난 ‘징집’시의 위안부 전체의 연령에 대해서는 미성년자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타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1944년에 있었던 20명의 기록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최근 타이에서 발견된 종전 직후 수백명의 위안부 기록을 정밀히 조사해보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내가 KBS에서 방송된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25명의 연령을 평균하여 본 바, 그것은 26.8세였다.

이상의 위안부 연령 문제에 이어 정씨는 우에노 치즈코의 위안부 패러다임을 소개하고, 박씨가 ‘적지 않은 영향’(망, P.46)을 받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제국의 위안부』가 그 기본적인 모티프를 우에노의 논문에서 차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망, P.47), ‘우에노 치즈코의 레토릭을 본서가 차용하고 있다’(망, P.47)고까지 말하고 있는데, 내재적인 비판은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지적이다.

 

P.57 ≫거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모들이 딸들의 행선지가 단순한 ‘정신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그 형태가 <자발>이든 <강제>든 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위안부’ 일이라고 생각해서 느끼는 슬픔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딸들 자신들의 슬픈 <거짓말>――성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고 자신과 부모를 납득시키기 위해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신대’에 간다고 이야기하는 식의――이 있었을 수도 있고, 딸을 가난 때문에 판 부모들의 <거짓말>이 개재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매춘 여성이나 강간당한 여성들이 그 사실을 공적으로는 말할 수 없었던 차별적인 사회구조야말로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을 일으키고,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제, P.62)

>충격적인 해석이다. 만약 박유하가 말하듯이 부모들이 ‘정신대’를 ‘위안부’라고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최대의 요인은 일본군이나 업자가 정신대 명목으로 조선인 ‘위안부’를 모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당사자 여성이나 그 부모들에게 <거짓말>의 책임이 있다고 한다.

――‘충격적인 해석이다’. 본서 P.17에서 이미 다루어진 내용에 나오듯이 ‘정신대에 간 뒤, 위안부가 되는 케이스도 있었다’라는 <소문>이 그 요인이라는 사실을 저자인 정씨가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게다가 ‘당사자 여성이나 그 부모들에게 <거짓말>의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일본군이나 업자를 면책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완전히 문맥에서 벗어난 곡해다. 나아가 정씨는 계속해서 말한다.

>애초에 박유하가 말하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간 여성도 딸을 판 부모도 모두 ‘정신대’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면, 왜 부모들은 정신대 동원을 ‘위안부’로의 징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인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인지(그럴 리는 없다), 이해가 가지 않는 척하고 있는 것인지, 앞선 P.17의 저자의 말을 보노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P.59 ≫분명 이러한 혼동을 만들어 낸 것은 우선은 업자의 거짓말에 의한 것이었을 터이다. ‘정신대에 간다’라고 속이고, 실제로는 ‘위안부’로 만들기 위해서 전장으로 보내는 식의 거짓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군이 원하는 압도적인 숫자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정신대’라는 장치가 필요했던 것일 것이다. 합법적인 정신대의 존재가 불법적인 사기나 유괴를 조장했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 개재했던 거짓말은 위안부가 될 운명의 여성들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을 그러한 구조로 들어가기 쉽게 만드는, 무의식 중에 공모한 <거짓말>이기도 했다.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마지막 단계에서의 민족적 유린을 직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던, <민족의 거짓말>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즉, 그녀들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지키지 못한 식민지 사람들 모두가 <위안부가 아니라 정신대>라는 <거짓말>에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가담한 결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거짓말을 필요로 하는 사태야말로 ‘식민지 지배’라는 시스템이었다.(제, P.62)

>····용의주도하게 일본군의 거짓말만을 배제한 뒤, <민족의 거짓말>이라는 놀라운 말이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이 ‘공모한 <거짓말>‘이라는 언설이 파탄 나고 있는 것은 위의 인용만 봐도 명확하다. 여성이나 부모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업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업자가 데리고 갈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면 부모나 여성들은 거짓말 같은 것을 할 방법이 없다. 결국 박유하가 말하는 ‘공모한 <거짓말>‘, ‘민족의 <거짓말>‘론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업자마저 면책하고 말단의 민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언설이다. 이 <민족의 거짓말>이라는 언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를 살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 민중의 경험을 부당하게 깎아내리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씨는 이해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하에 이어지는 결론으로 가져 가기 위해서 박씨의 언설을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나 부모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업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는 말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이해일까? 곡해다. 업자가 하는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알면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납득시키려는 부모나 여성 자신, 또는 서로를 향해 거짓말을 하는 구조가 식민지 지배의 질곡의 근원이었으며, 그 구조적인 <거짓말>을 박씨는 ‘민족의 <거짓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이나 업자를 면죄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P.63 >2 센다 가코 『종군 위안부』의 오독에 의한 ‘애국’의 조탁

――‘조탁’이라는 말은 ‘보석 등을 쪼아서 다듬는 것. 나아가 시문의 자구를 다듬는 것’(고지엔)이라고 하니 이해 불가능한 표제다. ‘···의 오독에 의한, ‘애국’ 의식의 자의적 조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중에 등장하는 ‘찬탈’이라는 표현도 과장된 말이다. 게다가 오용이다.

 

P.63 >····박유하는 ···· 센다가 ‘위안부’에 대해 취재하는 계기가 된 사진을 언급하며 ···· 일본옷 차림을 한 조선인 ‘위안부’와 그것을 ‘경멸의 눈’으로 보는 중국인의 사진을 상상[하게 만드는 기술을 하고 있지만], ···· 노가와씨가 밝힌 것처럼 그러한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실제로 본서의 P.63에 있는 사진이 그것이다. 강을 건너는 두 사람의 여성 사진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씨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P.64 >실제 『종군』 [센다 가코 『종군 위안부』]을 아무리 찾아봐도 조선인 ‘위안부’의 본질이 ‘애국’적 존재였다는 주장은 보이지 않는다. 놀랍게도 ‘어느 연구보다도’,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냈다’고 칭찬함에도 불구하고 센다가 어디에서 그렇게 지적했는지도 쓰여 있지 않다.

――여기에서도 박씨의 언설을 교묘하게 바꿔 말하고 있다. 박씨가 ‘위안부’ 일반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센다는 위안부를 병사와 똑같이 자신의 신체를 희생하면서 전쟁 수행을 도운 <애국>적 존재라고 이해하고 있다’(제, P.25)), ‘조선인 ‘위안부’’라고 한정함으로써 ‘아무리 찾아도’ 그런 말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센다가 어디에서 그렇게 지적했는지도 쓰여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조선인 ‘위안부’’라는 문구에 한정하는 한 존재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P.66 >애초에 일본인 여성들이 말한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다’라는 증언을 봐도, 전쟁 수행을 돕는 ‘애국’적 존재라고 하는 해석에는 끝까지 납득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여성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모두 모집할 때나 ‘전장에 도착한 당초’ 시점이다. 사이토씨의 증언은 오히려 후방에서는 ‘공동 변소’ 취급을 당하는 현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문장 앞에 정씨가 인용하고 있는 센다의 문장은 박씨도 인용(제, P.73)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지적되고 있지 않다. 그것은 P.64에서 ‘센다가 어디에서 그렇게 지적했는지도 쓰여 있지 않다’라고 박씨의 논거를 비판한 직후라서 그렇게 지적하는 것을 피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오독이다. 마치 ‘당초’에는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인용되고 있는 사이토 기리씨의 증언은 ‘제1선’과 ‘후방’에서의 취급의 차이를 진술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성실하게 쓰고 있는 것이라면 오독이겠지만, 박씨의 ‘애국’적 존재론을 부정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P.66 >박유하는 증언 이전에 센다의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센다의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내보이기 위해서 박씨의 언설에 변형을 가한 것이다.

 

P.66-69 >이 해석의 문제점은 명확하다. 조선인에 관한 증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위안부’=일본인 ‘위안부’>라는 도식에 따라 그대로 조선인도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 박유하는 검증해야 할 가설을 마치 증명된 명제인 것처럼 이용해서 각각의 사례를 연역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목소리에 한결같이 귀를 기울이’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정씨는 박씨가 수없이 많이 들고 있는 『증언집』(정대협 편찬)으로부터의 인용(제, P.80-88)을 완전히 무시한 채, 센다로부터의 인용만을 문제삼으며 박씨의 논거를 ‘이해 불가’, ‘비약’, ‘오류’라고 단정하고 있는데(망, P.68), 『증언집』이나 ‘여성들의 목소리에 한결같이 귀를 기울이’는 박씨의 자세를 무시하고 자신의 명제로 결론짓기 위한 자의적인 논법이다.

 

P.72 >박유하의 해석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다. ‘동족’이라고 하는 말이나 ‘동지의식’은 ‘하루에’나 ‘우메보시’의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소설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안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나’의 모습이다.

――이것도 궤변이다. ‘동족’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일단 병사의 말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식이 위안부들에게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안부가 군인을 자신과 동일시한 ‘하루에’의 말은 여기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된다. ‘동족’이라는 말이 사용된 의미를 무시하고 말로 표현된 ‘동족’만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위안부가 군인을 자신과 동일시한 적은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자의적인 논법이다.

 

P.78 >2 증언의 찬탈

――‘찬탈’이란 ‘제위를 강제로 빼앗는 것’(고지엔)이라고 하니, 이것도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제다. 거창한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오용이다. 하나의 예 밖에 들고 있지 않은데, ‘증언의 약취’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P.80 >····중요한 부분이므로 인용하겠다(【 】는 박유하가 인용한 부분이다).

“나는 말이 능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도 잘 못하고, 나는 생각한대로 밖에 말을 못하는 인간이라. 【일본 사람한테 나가 압박은 많이 받았지. 압박은 많이 받았지마는, 내 운명인디. 내가 세상을 잘못 만나고 내 운명이고, 나를 그렇게 한 일본 사람을 나쁘다는 소리는 안 해.】 그리고 같은 한국 사람이지마는 한국 사람이 주인이 돼갖구는 얼마나 나를 뚜들겨패는지 몰라. 손님을 안 받을라 한다구. 샅이 아파싸서 죽갔는디. 막 눈물이 절로 나오는 기라. 밥도 못 먹지. 밤에는 군인이 안 오니까 내 세상이다 생각해서 괜찮지만, 날이 밝아 군인이 온다고 생각하면, 그냥 그대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지옥에서 사는 것 같아. 군인들이 무서워서. (중략 [원문])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싶어. 나는 개나 다름 없었지. ····아이구, 일본 군인을 생각하니 정말로 원망스럽다. 원망스러운 것은 원망스럽지만 그 군인들도 다 죽었을 거야”.

 

P.80> ‘고통을 만든 상대’란 자신을 총대로 계속 때렸던 군인을 가리키는데, 황씨의 역점은 ‘운명’에 있지, 용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쁘다는 소리는 안 해’라고 하지만, ‘용서한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통을 만든 상대’란 자신을 총대로 계속 때렸던 군인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씨는 언외의 의미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튼 박씨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인용해 두겠다. 박씨는 증언을 인용한 후, ‘자신의 몸에 쏟아진 고통을 만든 상대를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말로 용서하는 듯한 그녀의 말은 갈등을 화해로 인도하는 한 갈래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용서하는 듯한 그녀의 말은’ ‘한 갈래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디가 ‘찬탈’이라는 것일까? 나도 이 황씨의 말에 감동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지만, 거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운명’이라고 하는 말로 ‘용서하는 듯한’ 그녀의 넓고 깊은 마음이다. 박유하씨는 그 마음의 소리를 알아 듣고 거기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Original Link  2016년8월21일

フェイスブックから、2017年5月11日

今回の大統領選挙で安哲秀候補を支持した私に対して、フェイスブックの友人の多くが失望あるいは憤慨したようです。私のことが革新的に見えていたのは、表面的なものに過ぎなかったと思われたようですね。
日本について意見を述べるというだけで、私のことを、日本との「妥協」支持者あるいは担当者だと考えたがっていた人々の「念願」あるいは「呪文」が表面化したと言え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私にはその現象が、安哲秀は洪準杓と連帯するはずだとしてきた、間違っているだけでなく、悪意に満ちた期待と、とても似ているように見えます。
実際、どこに焦点を置くかによって、革新の基準は異らざるを得ません。私は、私たちの社会の革新、保守という区分が、もはや意味のないものになっていると考えており(最も革新的な男性が最も家父長的でもありますから)、あえて言うなら、私の価値観はむしろ急進(という表現も実は適当ではありませんが)に近いということを長い間の付き合いのフェイスブックの友人たちはご存知でしょう。
それでも、私の志向が、資本と国家の問題をわかっていないことに由来する無邪気なものだという人もいました。疎通が十分でなかったせいでしょうが、そのような断定から、私はフェミニズム論争の頃から考えていた「概念の浅薄化」とでもいうべき状況がもたらした現場を再度発見しました(これについては、いつかまた書きます。今は詳しく書く気力がありません)。
私が葛藤の治癒に関心が高い理由は、憎悪と差別と敵対が、不和と戦争をもたらし、他者の生命を奪う根源にあるものだからです。そして多くの場合反知性主義的な態度が作る偏見と敵対が、いかなる暴力を生み出すのかは、私をめぐって起こったことが十分に説明しています。
私が今回の選挙で悩んだ末に、保守/進歩の既存の構図を打ち破るという安哲秀候補の試みを誰よりも進歩的な試みだと考えた理由も、そこにあります。それは政策ではなく、方向性への支持でした。
そして、失敗はしましたが、その試み自体は、韓国社会に未だ訪れていない、それゆえに「革新的」な価値であると考えます。その到達点は、恐らく統一であり、東アジアの平和でしょう。私の志向性を、単に分裂を「無化」させるものだとか、国家間の政経癒着的な和解とみなそうとする理解は、学問と政治の違いを無化させる大変単純な理解だと言えます。私はいわゆる「政治」に大きな期待はしていないけれど、それでも時に全ての学問を超える価値の実現が可能となるものとして、なおその役割に期待しています。それは、学問的には厳しい批判が可能でも、政治的にはその曖昧さを許すことに繋がります。
今回の選挙では、どんなに革新的な候補であっても、彼らの支持者たちが、口にするのもおぞましい悪態を私に浴びせかけたり、よく知りもせず嘲笑した人々でもあるというアイロニーが、私には存在しました。そのため、私には、代議民主主義を具体化させられる候補自体が存在しませんでした。そのようなアイロニーを抱きながらロウソクデモに参加し、投票に参加したのは、ただ、その多数の隙間のどこかにいたはずの「彼らの中の別の存在」と連帯したかったからです。フェイスブックが私に教えてくれた存在、つまり皆さんです。

選挙は終わりましたが、文在寅大統領を誕生させるための自らの運動を、書きたい小説を書くことに集中したかったからだと述べた作家の言葉を遅ればせながら見つけました。また、新たに始まる文在寅大統領時代を「詩だけを書いて研究にだけ専念できる太平聖代」の始まりだと見做す詩人もいました。
しかし、私にはそのような時間はまだ来ていません。長い苦痛の果てに無罪判決が下されたにもかかわらず、むしろより陰湿な石が私に飛んで来ます。何よりも、私をそのような苦難に陥れ、積極的に加担した人々が保守ではなく、「革新」層だということが、私のジレンマです。彼らと最も近い場所にいた候補が、文在寅候補でありましたが、社会構造に対する問題意識を彼から見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に、私は彼を支持できませんでした。
私の本は、革新の中の欺瞞について問題提起しているだけです。しかし、待っていたのは公開討論ではなく、長い沈黙と、口封じでした。また、同じような欺瞞と暴力を今回の選挙でも、見せ付けられました。
私にとって、文在寅政権が新しい時代になる日は、<革新>層の中に存在する欺瞞と暴力を、革新層みずからが認識する日です。私への嫌悪や抑圧に対する「主流革新層」の沈黙が破れる日です。その日が来ない限り、私にとって文在寅時代も朴槿恵時代と変わりません。
参考までに申し上げれば、私を非難していた人々も、慰安婦問題をもっと知るようになれば、考えが変わると確信しています。もちろん、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がある人には期待していません。
3年近く、裁判の反論のために止むを得ず多くの資料を見ましたが、私の考えを修正する必要を感じませんでした。さらに大きなアイロニーは、私の苦難が、実は本の問題でさえ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排斥は、知識人の偏見と排斥主義が、告訴は、ロースクールの学生と弁護士の蛮勇さと運動家の策略が作り出したものでした。
このことについてもっと詳しく書かなくてはなりませんが、まだできずにいます。判決後、3ヶ月以上経ちましたが、緊張が解けたのか、気力と体力が回復していないためです。彼らの中からもこの問題を提起する人が出てく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少しフェイスブックをお休みします。その間、フェイスブックの友達を削除したい方はどうぞなさってください。無罪判決の出た日、「いいね」を押してくださった方が2千数百名いました。その方たちだけが残ってくださったとしても、とても多いのです。
選挙結果について、「パルゲンイ(赤)国家」云々する方については、私から削除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
フェイスブックの友人の整理をする余裕がないため、これまで承認を待ってくださった多くの方には、心から申し訳ないと思っています。もう少しで友達承認できるようになると思います。

17年前に最初の日韓関係論を出した時から、私は綱渡りをする心境で書いて来ました。
17年が過ぎた現在、私が立っている空間は、ようやく足がつける程度の面積です。あえてこのような空間に立っているのは、稚気や周りに逆らおうとする情熱があり余っているからではありません。その面積がいつかはもっと広くなるという確信を持っているからであり、その空間が必要な人々がいると思うためです。
狭くて危なっかしく見えるその空間に、共に立ってくださったり、支持してくださる方だけが残ってくだされば嬉しいです。可能なら、私が会いたいと思っていた方々とまた会えると嬉しいです。
(1月に行った「無罪判決を記念する毎月の会合」も継続できず、個人的に会いたい方にも連絡できませんでした。心身の状態があまり良くなかったためです。しかしまたすぐに連絡できるでしょう)
近頃私を非難したツイートを添付しておきます。このすさんだ「言葉」に、改めてやるせない気持ちになります。「和解は加害者が先(許しを請うことから)」だと説教した方が多くいましたが、この言葉もやはり、私の本を理解できていないだけでなく、先に述べた「概念の浅薄化」が生み出した言葉です。

2017・5・11

翻訳: 金良淑

무엇을 지킬 것인가

무엇을 지킬 것인가 <허핑턴 포스트> 바로가기

무엇을 지킬 것인가

외교부가 부산 소녀상문제 풀기에 나선 것 같다. 하지만 소녀상 이전요구는 문제의 답이 아니다.
분명, 일시귀국이라고는 하지만 일본대사가 본국귀국후 이렇게 오래 복귀하지 않은 적은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외교부가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지자체가, 시민의 의사를 넘어서 행동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강제이전`은 현재이상으로 사태를 악화시킨다.

사실 나는, 부산소녀상 설치문제를 두고 일본정부가 대사를 복귀시킨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분노를 표명하면 소녀상이 철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일본의 한국이해는 아직 충분치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우선 한국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정치가, 언론, 국민들 대부분이 `한일합의는 잘못된 것이고 소녀상은 그것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니 옳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한일합의의 정당성이나 빈조약을 들어 철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토록 갈등이 깊은데도, 문제의 소녀상이 어떤 의미인지, 한일합의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성한다. 그런 식의 사고정지사태가, 한쪽은 `지키는` 일에 온힘을 다하도록, 다른 한쪽은 이제 물리력을 행사할 지 여부를 재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물론 첫번째로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위안부문제의 경우 오랜 세월에 걸쳐 언론이 적극적으로 보도한 결과, 이미 `온국민의 상식`이 된 구체적인 이해가 존재한다. 작년에 개봉한 `귀향`은, 그런 현대한국의 `집단기억`을 담은 영화다.

그런데, 그런 이해는 과연 옳은 것일까. 나는 작년에 개봉 직후에 이 영화를 봤는데 심경이 복잡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영화에 표현된 `정서`는 옳고, `사실`은 옳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정서에 공감하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한 예로, 불에 태워지는 장면은 한 할머니의 그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데, 이 할머니의 첫 구술에 의하면, 여성들을 불에 태운 건 학살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들어 죽은 여성들을 화장하기 위해서다. 또다른 분의 수기에는, 스스로 다른 위안부여성을 화장해야 했던 이야기도 나온다.
비판을 하려면, 그런 끔찍힌 경험을 하도록 만든 전쟁과 군인/위안부간의 위계질서, 그리고 그런 위계질서를 만들었던 일본의 식민지지배 책임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한다. 비판은, 정확해야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결국 위안부문제는, 조선인위안부란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이 문제발생 이후 4반세기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본이 무엇을 했거나 못했는지를 정확히 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더구나 초기와 달리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국민적인 이해와 합의가 필요해졌다.

따라서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한일정부는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협의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논의를 위해 일본정부는 주한일본대사를 즉각 복귀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협의체는, 위안부문제에 관해 오래 관여해 온, 그러나 대립중인 한일학자들을 주구성원으로 하되, 지원단체와 위안부당사자와 언론이 방청하거나 중계하도록 하고, 의문을 던지고 답하는 일이 가능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 사실 논점은 많지 않다. 그리고 양국민들의 공통의 이해를 이끌어야 한다.
위안부문제는 양국국민이 너무나 잘 아는 문제가 되어 더이상 정부간 합의만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었다. 박근혜정부가 간과한 것은 그 지점이다.
갈등이 2000년대 이후 본격화 된 것은, 민주화와 인터넷 보급의 결과로 시민들이 힘을 갖게 된 21세기적 세계를 반영한다.

소녀상 비판 중에 `당사자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내가 만났던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은 `왜 해결이 안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계셨다.
그런데, 지원단체는 외교부와 무려 십수회의 의견조정을 거쳤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사자를 도외시`한 건 누구일까.

이 모든 물음이 다시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돈을 받았으니 끝났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물음이 없고, `돈따위로 해결하려 하지 말라`는 생각에는 어렵게 합의를 이루어낸 `외교`에 대한 존중이 없다. 무엇보다, `책임이란 무엇으로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없다.
소녀상을 지키려는 이들은 소녀상이 `아픔`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분명 소녀상 자체는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 아닌 영사관이나 대사관 앞에 서 있는 소녀상은 분명 `저항과 항의`를 표상한다. 실제로 소녀상 뒷면에는 `숭고한 정신`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소녀상은 정말은 `그` 위안부 소녀가 아니라, 90년대 이후의 `운동`과, 운동에 담겼던 `끈기있는 항의정신`의 표상이다. 이런 식으로, 4반세기 이어지면서, 위안부문제에는 적지 않은 의식 혹은 무의식의 트릭이 존재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 항의가 옳다면, 얼마나 옳은지,왜 옳은지에 대한 국민적인 물음과 확인이 다시 필요하다.

소녀든 항의정신이든 `지키는`일은 숭고하다. 하지만 사고정지상태로 `지키`거나 반대하는 일은, 결국 누구의 자존심도 지키지 못한다.
더 늦기 전에, 사려깊은 행동이 필요하다. 불화는, 상대뿐 아니라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에서 승소한 이유 [허핑턴 포스트]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에서 승소한 이유 [허핑턴 포스트] 바로가기

경향신문 이범준 기자님과 타언론 관계자 여러분께,
승소 이유를 알려드립니다. (긴 글입니다)

형사소송에서 승소했지만, 누가 알려 줘서 보게 된 이 기자님 글을 보니, 저의 명예회복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는군요. 아니, 오히려 법원이 말한 “틀린 표현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을 대부분 언론이 앞뒤 맥락 없이 인용한 탓에 오히려 법원이 나의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간주하면서도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한 것처럼 인식한 이들이 더 많아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기자님은 제가 패소한 가처분과 손해배상 판결이 옳다는 전제하에 이번 형사판결문을 읽고 있지만, 가처분 소송과 손해배상 소송에서 제가 진 이유를, 저는 명확하게 압니다. 달리 말하자면 형사소송에서 이긴 이유를 명확하게 압니다.

이하, 참고하십사 하고 간단히 설명 드립니다.

변호사 등 주변인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저는 가처분재판에 한번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도중에 이건 아니지 싶어 출석하려 했지만 결국 그랬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말린 이유는 ‘위안부 할머니’들께 심한 언행을 당할 수 있다는, 저를 생각한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반성도 담아서, 5,6회 이어진 손해배상재판에서는 꼬박꼬박 출석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은 언제나, 10분 이내에 끝났습니다. 제출한 자료들을 앞 좌석에 앉은 양측 변호사들과 재판장이 확인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에서 저는 준비한 진술문을 읽었지만(다 읽었어도 10여분이나 되었을 짧은 글이었는데도), 재판장은 도중에 빨리 끝내라는 말로 제지했고 결국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가처분재판과 손해배상재판에서 나는 판사에게 나의 생각을 충분히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더 나빴던 건, 재판 대응 자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처분과 손해배상에서도 저는 최선을 다했고, A4 150매 되는 답변서를 비롯한 수많은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국의 위안부”자체에 집중했습니다. 책에 대한 원고 측 지적이 악의적인 오독의 결과이자 모함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 재판을 맡은 판사들은 끝까지 제가 제출한 자료와 진술은 무시하고 원고 측이 만든 프레임에 갇혀 이 사건을 바라보았지요.

그래서 형사재판에서는 다르게 대응했습니다. 원고 측과 검찰이 내놓은 모든 자료 자체에 대해 일일이 다 반박했습니다. 제가 높이 평가했던 고노담화마저 내가 그것을 부정했다면서 나를 공격하는 자료로 제출되는 아이러니를 견뎌야 하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대응했습니다. 그중에는 “유엔보고서”도 있고 젊은 학자들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 좌담회도 있었고, “제국의 변호인 – 박유하에게 묻는다”라는 책과 재일교포 정영환씨의 책도 있었습니다. (그의 책이야말로 얼마나 왜곡으로 점철된 책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검찰과 원고 측의 모함과 억측과 아집의 논리 자체에 “논리”로 대처했습니다. 형사재판부가 나의 손을 들어준 것은, 오로지 형사재판부터 참여한 새 변호사의 “법리적 논리”와 그런 나의 “논리”가, 검찰이 앵무새처럼 대변한 기존 논리들의 문제점을 논파한 결과입니다.

이 기자님은 물론 언론관계자들께, 먼저 이 사실을 인식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형사재판부 판사와 내가 맞대면한 기간은 거의 1년이고, 10회 이상 재판을 통해 논박한 시간은 재판 때마다 거의 하루 종일이 걸렸으니, 수십 시간에 이릅니다. 이 기자님은 혹시 이 시간들 중 일부라도 방청하셨나요? 이 기자님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오류와 비난은 , 방청하지 않으셨기에, 혹은 잘 듣지 않았기에 이루어진 일로 생각합니다.

학자는커녕, 인간에 대한 존중 자체가 없는, 적대와 모욕을 대면하고 견뎌온 지 벌써 2년하고도 8개월입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힘겹게 노력했고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신 결과로 승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판결, 판사가 검찰이 대변한 학자들의 말을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말을 재판부가 “인용”했다고만 써서 원글 전체 맥락의 반대로 이해되도록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법원의 판결문이니, 마음에 안 들어도 왜곡은 하지 않아야 기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것 아닌가요.

또, 판사가 저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무엇보다 저의 항변에 시간을 들여 귀 기울여 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기존 상식에 기대어 사태를 판단하지 않는 날카로운 직관과, 그런 직관을 만든, 인간에 대한 존중이 있었습니다.

저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지 않았고, 위안부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원고 측이 멋대로 읽어 저를 밀어 떨어뜨린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그 결과로 승소했습니다. 이 기자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조악한 연구”를 재판부가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지킨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와 납득이 아니라 오히려 적개심을 증폭시키고 그런 감정을 판결 왜곡으로 보여준 이 기자님의 칼럼, 연합뉴스와 뉴시스의 악의적인 사진으로 (연합뉴스는 원고 측의 악의적인 프레임을 정식고발 전에 유포시킨 곳이고, 뉴시스는 법정을 지켜보러 와 있는 저의 가족을 향해 제가 잠깐 미소 짓는 그 순간을 포착해 “웃으면서 법정에 들어서는 박유하”라는 캡션을 달아 유포시켰던 곳이지요) 변함 없이 마녀사냥에 골몰하는 수많은 기사들에 뒤늦게 접하고 보니, 저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는 날이 내 살아 생전에 올는지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악의적인 틀을 씌워서 고발한 나눔의집 관계자들에게 있고 저에 대한 명예훼손과 인권 침해 가해자는 우선은 그들입니다. 더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들의 주장에 반하는 심포지엄을 지인들과 함께 열었던 일과 제가 가까이 지냈던 나눔의집 거주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이 저에 대한 고발의 직접적인 배경이었습니다. 심포지엄이 열린 지 한 달 반 만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일주일 만에 저는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발장에는 〈박유하는 예전에 `화해를 위해서`를 썼다. 그러더니 `제국의 위안부`를 썼다. 또 사람들을 모아 심포지엄까지 열었다, 그대로 놔두면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 방해가 된다〉는 취지의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재판경과 바로가기

또 하나의 고발장에는 서경식 교수 등 일부 재일교포의 저와 일본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마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정말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의 홈페이지 자료들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형사1심] 〈제국의 위안부〉최후진술

정리하자면, 이 고발은 진보 간의 생각 차이가 빚은 고발입니다. 그리고 그에 편승한 지원단체가 자신들의 문제를 덮기 위해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가 조심스러워서 저는 그 사실을 아직 세상에 분명하게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지원단체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한 학자를 함정에 빠뜨린 사건임에도,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려고 한 언론도 유감스럽게도 거의 없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이토록 많은 갈등을 유발 중인 사건임에도 말입니다.

승소를 했음에도, 여전히 기존 틀에 갇혀 사물을 보려 하는 경직된 사고와, 재판을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행간의 의미를 모를 젊은 기자님이 , 판결문마저 곡해하면서 한 학자의 책을 “조악한 연구”라 공공의 장에서 말해 버리는, 그리고 어쩌면 그런 자신의 글을 “정의의 필봉”쯤으로 여길 오만이 빚은 폭력은, 온전히 이 기자님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이 기자님 같은 얄팍한 인식과 태도가, 한국사회 자체를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서 분노보다 서글픔이 먼저 밀려 옵니다. 한국사회는 병들어 있고, 그 정도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덕분에 다시 깨달았습니다. 피부가 매끈한 골다공증 여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무려 2년여나 국가 기관을 동원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서 책을 쓴 나를 공격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곳이, 다른 곳이 아닌 내 나라여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꽁꽁 뭉친다 해도 미래가 불투명하고, 오히려 우리가 잠시 봤던 자화상이 허울 좋은 신기루일 수 있다는 것이 하루하루 드러나고 있는 이 시대에, 진영논리가 만든 지적 태만에 기대어 오해하고 곡해하고 공격하고 반목하는 일에, 이 기자님 같은 젊은 분들이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슬프군요.

제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경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포기와 체념과 허무에 맞서 이 시대를 견디고 건너갈 수 있는 힘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부디, “정의의 필봉”으로 사람을 하루하루 새롭게 죽이지 마시고, 판결문을 다시 읽어 보시고 사태를 제대로 이해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재판에 정말 관심이 있다면 제가 재판부에 제출한 모든 자료들도 봐주시기 바랍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하십사, 이기자님이 일부를 빼놓고 전달해 반대 의미가 된 판결부분을, 보여 드립니다. 녹색 부분이, 빠진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