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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혁상,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 “당사자들 마음 치유할 방법 찾아야” (국민일보)
2014.4. 고발직전 심포지엄 발제문 <위안부문제,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외교’란 무엇인가
`외교`란 무엇인가—조세영 전 외교부국장의 `실현불가능한 차선과 실현불가능한 최선의 사이에서`를 읽고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위안부문제와 처음맞닥뜨린 건 1991년이었다.유학 마지막 무렵이었는데,동경YMCA에서 했던 위안부할머니증언모임에서 동시통역봉사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당시 아르바이트하던 NHK국제국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의 부탁이었던 것 같다. 통역하던 내내 할머니들의 한 맺힌 호소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걸 기억한다.
그렇게 위안부문제를 만나게 되었지만, 다음해 봄 귀국한 이후부터는 `위안부문제`해결 운동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당시 일본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연관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던 참이어서 나는 위안부문제가 민족주의적 담론이 되고 있는데 회의적이었고 돌아온 `문민정부`시대 한국의 민족주의적 담론과 풍경은 메이지 시대 자료를 통해 보았던 광경을 다시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런 민족주의적 풍경의 한가운데에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서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더 정확히는 다가갈 계기가 없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대협은 후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80년대 민주화투쟁에 관여한 사람, 기독교여성단체, 이화여대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어디와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월을 지나 내가 다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2000년대 들어서였다. 위안부문제로 시작된 1990년대의 한일갈등은 독도문제등을 거치면서 심화되고 있었는데2001년에 교과서문제가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고,그런 갈등들이 서로에 의해 중폭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서 갈등의 원점에 있었던 `위안부문제`에 대해 제대로 고찰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처음으로 나눔의 집을 방문했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가까이에서 들었다. 그런데 그 때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눔의 집에서 떨어져 혼자 살면서 일본군과의 연애와 안타까운 이별에 관한 추억을 들려준 할머니의 미소띤 얼굴이었다. 또 `일본군보다 (자신을 팔아넘긴) 아버지가 더 밉다`던 또 다른 한맺힌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의 의미를 생각하며 나는 2005년에『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썼다.
조세영 전 외교부국장(이하, 편의상 조국장으로 사용)이 얼마전 발표한 글을 읽고 나는 먼저 그런 기억들을 먼저 떠올렸던 것 같다. 위치한 장소는 달랐지만 그 역시 이 20년동안 나름대로 `위안부문제`와 만나고 있었고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91년에 그는 스물아홉이었다는데 같은 해에 나는 서른 넷이었다. 내가 몇 살 더 많았지만 위안부문제에 관한 `거리`로 치자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기에 접했고 관심은 있었지만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고 세월이 흘러 그가 국장으로서 다시 위안부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을 때 나는 위안부문제만을 다룬 또다른 책을 쓰고 있었다.
위안부문제가 어려운 건 중심에 있었던 이들이 대부분 20년이상 관여해 온 문제가 되어 대부분사람들에게 이 문제가 이미 그들의 인생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해 온 일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그들의 신념과 정의감을 신뢰하지만, 바로 그런 부분이 위안부문제가 이토록 오래 이어지고 있는 또하나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않는 한 아마도 위안부문제의 해결은 어렵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제3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그때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여성기금`
기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대세인 가운데 조국장의 글은 정대협이 비난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일본의 `선의`였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한국인으로서 그렇게 명확히 이야기 한 또다른 사람은 별로 없다. 하긴 글이 아닌 말이라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많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공식석상이 아닌 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위안부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 또하나의 이유는 그런 `침묵`에도 있다. 어쩌면 그 부분이야말로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언제까지고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대로 `공론`화 해야만 논의가 깊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을터인데 해방 후 70년이 되어 가도록 우리는 `일본`에 관해서만큼은 옳던 그르던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와 `다른 생각`은 무조건 `친일파`로 간주되는 것도 모자라 그런 발언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자는 발상까지 나오는 상황이니 충분히 이해하지만,중요한 건 침묵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국장의 글을 반갑게 읽었다. 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보여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또 최근 페이스북에 위안부문제에 관한 글을 올리고 있는지라 나의 반응을 보고 싶어하는 몇몇 페친들에게 감상문을 올리기로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첫번째 이유는 오랜 고민끝에 작년에 다시 낸 나의 위안부문제론을 `문학자`다운 발상으로 치부하고 일본국가를 `형법몇조..`등에 의해 `법적 책임`을 지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법학자`다운 발상`으로 나의 책을 비난했던 어느 법학자보다는,(비록 나만을 향한 글은 아니지만)훨씬 `대화`의욕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조국장의 글의 주안점은 한국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을 대신해 위안부할머니들에게 `차선의 정책`을 취했고 그것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에 있는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위해 전개된 내용에 몇가지 오류가 보인다.
1,아시아여성국민기금이 한국정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주장
조국장이 당시의 외교부직원으로서 그러한 조치에 자부심을 느낀 건 당연하다. 사실 나 역시 한국정부가 초기에 500만원을 지급했다는 것은 얼마전에 조국장과 만났을 때 처음 알았다. 따라서 그 부분이 나의 책에 빠져 있다는 지적은 겸허히 수용하고 싶다. 그러나1998년에 이루어진 4300만원의 정착금에 관해서는 『화해를 위해서』에 쓴 적이 있다. 다만 비판적으로 썼다. 지급 자체가 아니라 그 이유가 일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한 데 대해서였다. 물론 `도덕적 우위`를 느끼는 것 자체야 크게 문제시 할 것은 없다. 문제는 일본에 그러한 `도덕==모럴`이 없다고 전제한 단정에 대해서였다. 이미 페이스북에 쓴 적이 있지만(2013/2/15) `아시아여성기금`은 우리가 지키라고 요구중인 고노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이 계승된 기금이었다 (무라야마 수상이 이 기금의 2대째 이사장을맡았던 것도 그 증거다).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자민당 정권때 발상된 냉전종식이후 국제사회와의 화해를 지향해 `역사문제를 염두에 두고자`한 정책과 이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자민당은 무조건 사죄의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적대시하지만 `고노담화`를 내놓은 고노전관방장관 역시 자민당 출신이다.
따라서, 당시의 일본이 한국의 `자구조치`를 참고로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자구책이 일본을 `바늘방석`에 앉혔고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건 우월감이 낳은 일방적인 생각 아닐까 싶다.
물론 현장의 일부 외교부 직원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조국장의 자부심이, 김영삼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는 사죄의식이 없다고 하는 근거없는 단정에 따른 우월감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우월감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까지 포함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식의 일방적 선언으로 이어졌는데 그건 위안부여성들의 `개인`의 의지를 무시한 선언이었다. `국가`의, 가부장제적 사고에 의한. 오빠나 아버지가 여동생이나 딸의 권리를 `대신`해서 처리해 온 것처럼.
무엇보다 그 돈은 국민의 세금이었고 그녀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주도의 국가로서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나는 그 일이 한국남성들이 일본에 대해 `도덕적우월감`을 느껴야 할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구조치`로 선택된 그 일은, 오히려 그녀들을 그런 처지로 떨어지게 만든 국가로서 뒤늦게 다소간의 `책임`을 진 일일 뿐이다. 국민을 지키지 못한 국가로서.
2,기금이 `민간기금`이라는 주장
`기금`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쓴 적이 있으므로 자세히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조국장이 쓴 것 처럼 기금은 `속죄금 `200만엔과 의료복지비`300만엔`으로 나뉘어 지급되었는데 처음에 `속죄금`부분을 `국민의 모금`으로 하려 한 것은 책임을 지고싶지 않아서가 아니라,즉 도덕의식—모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1965년에 모든 것이 청산되었다는 `협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그야말로 `자구책`이자 `수단`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숨은의도`의 존재가능성을 굳이 언급하고 `책임인정/보상생각이 없는`이라고 적는 조국장은,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일본에 대한 불신을 안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나는 기금의 내용이 당사자들과의 협의없이 정해진 것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역시 나중일인데 `기금`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고 그들간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금`도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전달자 역할을 맡았던 이들 중 일부는 정대협에 대한 예상 이상의 증오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면서, 정대협과의 갈등의 배경을 다른 측면에서 유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사 성립과 전달과정에서 문제가 있다 해도 기금을 `독선`이라 말하는 것은 기금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았던 정대협의 비판에 가담하는 일이 된다. 무엇보다, 기금에 대한 격한 비난과 거부는 위안부할머니들 당사자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주변에 있던 운동가들과 엘리트연구자들의 생각이었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부를 제외하면 위안부할머니들은 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분들조차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내가 만난 위안부할머니들은 자신이 일본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조차 지금껏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법적책임`에 대해 설명하면 그제서야 `그런 것 필요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지원단체 빼고 해결해 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단체들과 위안부할머니들의 관계가 보여주는 몇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말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그런 `현실`을 조국장은 아마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인용한 위안부 할머니의 `말`을 그는 `전해들은`것이라고 적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바로,조국장의 글의 한계이자 이 땅에서 위안부문제에 대해 발언했거나 해 온 대부분의 남성들의 한계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기금은 그렇게 `수단`을 선택했지만 결국은 `의료복지비`도 한국에는 현금으로 지급되었다.일본의 `국고금`(일본국민들의 세금)이 지급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말하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다. 60명이 기금을 받았다 는 기사가 나와도 `기금은 민간기금`이라는 주장만이 회자되면서 받은 이들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있다. 그들이 아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 받은 7명의 할머니를 정대협이 배척한 일에 이어지는 그런 억압적인 담론 때문이다. 사실 1998년에 한국정부가 위안부들에 대한 `자구조치금`을 4300만원으로 올려 지급한 것은 기금의 지급액을 의식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기금을 받지 말라는 각서까지 쓰게 하면서 지급되었다.
외교부는 기금 발족당시 기금을 높이 평가한다고 발표했었다. 생각이 바뀌었다면 언제 바뀌었는지 왜 바뀌었는지 국민들에게 한번쯤은 설명해야 옳다. 그건 한국국민에 대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일본의 외교관들과 나누었을 대화와 우정과 신뢰를 무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
`법`과 `외교`
기금보다 외교부의 노력을 기억해 달라고 강조하는 듯한 이 글은 헌재판결에 대해 대단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외교부는,외교부를 피고로 제소한 위안부할머니들과 지원자들의 논지에 대해 반박하고 있었고, 조국장의 `자구조치`발언과,`외교를 법으로 판단해도 되는가`하는 말은 헌재와 제소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판에서 졌다는 사실만으로 헌재의 판결을 수용해 `중재위원회`로 가져가야 한다는 주장은 모순이 있어 보인다.
헌재결정은 <제국의 위안부>에도 썼지만 문제가 많은 결정이었다. 무엇보다,1965년에 일본이 다른 어떤 류의 피해자가 나올지 모르니 피해보상은 개인이 할 수 있도록 청구권을 남겨주다고 한 일본의 제안을 물리치고 굳이 국가가 받아 대신 지급하겠다고 나선 것은 한국정부였다. 일본을 비판한다면 그에 대한 반성도 병행되어야 합리적인 처사이자 용기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당시의 회담내용을 보고 한국정부가 최대한 할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 대해 감동하기도 했다. 또 그런 요구들이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아 눈물을 삼켰을 회담출석자들과 배후에서 함께 움직였을 이들에 대해 존경의 념도 갖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한 일이 은폐되어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이 그런 것처럼 국가도,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밝히고 반성하는 일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경과에 대한 고찰 없이 위안부에 대한 그야말로 `돈 몇푼`을 지급했다는 것만으로 `국가의 우월감`이 보장될 수는 없다.
중재위원회로 가지고 가는것은,국가간 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력은 아니지만 그건 `전쟁`을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일당사국이 아닌 제3자에게 그 판단을 묻는 일은 50년이 되어가는 한일외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모든 재판이 그렇듯 중재위원회에 가는 일은 현재의 갈등을 공식화하고 `대화`를 차단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때 한일양국에 남는 것이 식민지배역사에 이어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이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미 이 20여년동안 정착된 오해와 미움을 차세대에게 본격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그 일이 과연 `외교`가 해야 하는 일일까. 외교의 목적을 그저 국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아직껏 있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기도 했던 도고시게노리 전외무장관이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을 막으려 했고 종전때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군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던 정신을 지금 우리는 되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외교의 궁극은 전쟁을 막는 일이고,대화를 지속시키는 일이라고,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생각한다. 조국장은 이미 외교의 현장을 떠난 사람으로서 발언했지만 외교부에 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글이고 아직은 중재위원회에 가지 않을 방법을 신중히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현외교부에 영향을 미칠수도 있을 것 같아 굳이 쓴다.
조국장은 피해자의 `납득`을 말하지만 피해자들의 생각은 하나가 아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진짜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위안부할머니들을 그저 성녀나 투사취급을 하지만,그들 역시 피가 있고 살이 있는,그래서 어제와 오늘 생각이 달라질 수 있고 이런저런 욕망도 갖고 있는 한사람의 `개인`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반목과 갈등의 주체였던 그들이 용서와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는 사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만 달려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갑작스런 정치적 타결은 결코 해결을 갖고 오지 않으리라는 조국장의 예상에 나는 찬성한다.그런데 이 성실한 글이 `피해자가 납득하지 않을 구조`를 오히려 굳건히 하고 만다는 데에 위안부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인도적조치의 돈 몇푼`이라는 말 역시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실은 `도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을 상위의 것으로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근대주의적이자 국가주의적이자 남성주의적인 발상이다. `법`이란 얼마전까지 오로지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위안부문제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남성들에게 보장된 `법`을 그녀들은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위안부문제를 논의하려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미움의 연쇄작용
‘한국아이들이 음식에 침을 뱉었다”한국아이들이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위협하듯 소리쳤다” 며 ‘그러니 밖에선 내 이름을 일본어로 부르지 말라’고 부모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위안부소녀상이 들어선 미국 글렌데일에서의 일이다.
그렇게 보고한 이들이 위안부소녀상에 대해 항의하러 갔던 지방의회의원들이니, 그들의 국회에서의 보고가 긍정적인 것일리는 없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여성들을 끌어가 강간하고 노예화했다는’식의 한국의 비난때문에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특히 아이들)의 정신적피해가 크다는 것은 진작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주미일본영사관이 나서서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고 이들은 강조한다.
글렌데일에는 한국계주민이 12000명,일본계주민이 100명정도라고 한다. 전체인구가
20만명 정도라니 한국역시 20분의1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인 셈이지만 그래도 20퍼센트 가까이 된다는 히스패닉계를 제외하면 소수민족중에는 다수라 할 수 있겠고 일본인들은 여기서는 압도적인 ‘소수민족’인 듯 하다.
아이들이란 원래 폭력적이고 때로 야비하기까지 한 존재이니 여기서 아이들을 탓할 필요는 없겠다. 또 100명밖에 안되는 일본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괴롭힐 리도 없으니 이런 사례는 아직 많지는 않을 것이다.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협조하며 살아야 할 소수민족의 아이들끼리,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살도록 만든 건 어른들이다.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에 의하여 납치된 20만 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들을 추모하며”라는,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소녀상의 글귀를 통해서다.
먹기위해 준비된 음식에 침을 뱉은 한국인 아이는 그 사실을 잊거나 ‘과거에 받은 피해에 대한 당연한 응징’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음식을 부정당한 아이는, 아마도 일생동안 그 사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에 대해 단단한 응어리를 지니고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그랬고 현재에 여전히 그런 것처럼.
위안부문제가 설사 해결된다 해도 한일간의 감정갈등이 쉽게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1월초에 올린 ‘사고의 파시즘’이라는 내 글에 대해 반박한 이들중 나의 노력이 ‘약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한 이들이 있었다. 그건 내 생각을 그저 국가간 정치경제 유착을 지향하는 것으로 오독한 결과(혹은 단순히 또다른 정치적유착지향?)일 뿐이다.
‘인권’을 강조하는 이들이 가끔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국적’이나 ‘민족’의 이름만으로 보호받지 못해도 되는 인권은 없다. 과거의 우리,식민지가 되어 그저 ‘조선인’이었다는 것만으로 차별받아야 했던 우리이니 더더욱,똑같은 폭력을(모든 폭력의 저변에는 미움이 있다),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진보’이리라고 나는 믿는다.
http://sankei.jp.msn.com/smp/world/news/140215/amr14021507010000-s.htm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828046540555595
남북관계에 대한 미국국회의원의 의견.
남북관계에 대한 미국국회의원의 의견. 무심히 읽어내려가다가 ?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을 만났다. ‘일본이 20만명의 여성을 납치해 위안부로 일하게 했다’고 말한 부분. 이 사람이 주도했다는 미하원의 위안부문제결의는 ’20만명 납치’라는 잘못된 정보가 만든 것이었고 그 결의는 이후 다른 나라의 결의까지 이끌어 ‘세계의 의견’을 만들었다.
물론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물론 지원단체나 지원자들, 그리고 증언자일 것이다( 하원에서 증언한 이의 20년전 증언은 모르는 이가 옷가지등을 보여주며 꾀어서 따라갔다는 내용인데 이후 자다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는 식으로 바뀐다)
지원단체는 최근 업자의 존재를 인정한 듯 한데 그렇게 새롭게 알게 된 정보는 그에게 전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는데 새로운 인식을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한국의 언론에도 공식적으로 알리는 일은 없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잘못된 인식자체보다 그것이 슬프다. 자신의 기존 주장을 바꾸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런 용기를 관계자들이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이들도 사실을 알고 그들을 비난하게 되기 전에. 그들에 대한 비난은 ‘한국’에 대한 비난이 될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 ‘한국의 거짓말’에 대항하는 움직임에 동참하는 이들중엔 한국에 대한 차별의식을 가진이들이나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 그들의 움직임 역시 옳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 기사는, 그들의 움직임이 단순히 책임을 부정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한번 보여준다. 아베의 유엔총회발언보다 더 주목되어야 할 기사.
김경훈·박현진·이규정, 제자리 걸음인 위안부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오마이뉴스)
발간직후 서평 (오마이뉴스)
이상엽, ‘위안부=비극의 소녀상’ 뒤집는 두 가지 시선? (프레시안)
[프레시안 books] 안세홍의 <겹겹>·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한 장의 사진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안세홍의 책 <겹겹>(서해문집 펴냄)의 35쪽에 실린 사진을 찍은 사진이다. 흙바닥에 살포시 놓인 흑백 가족사진은 프레임 안의 프레임으로 존재한다. 사진이 사진을 찍을 때는 그것이 유일무이한, 복제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암시한다. 사진이지만 원본은 사라지고 프린트된 한 장만이 세상에 남았을 때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아우라’라 존재한다. 그 아우라는 사진이 아름답다거나 예술적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것이 기록한 무엇이 개인에게든 사회에게든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로 자살골 넣은 전범기업 미쓰비시
이 사진은 중국 훈춘시 동닝에서 홀로 살아가는 이수단(91) 할머니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고향이 평양인 할머니는 이 사진을 북조선과 서신 왕래가 가능했던 70년대 초 전달받았지만 73년을 마지막으로 주소불명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사진을 보건대 1940년 할머니가 평양을 떠나오던 그해쯤 찍힌 사진이다. 할머니는 19살에 동네 처녀 3명과 함께 군복 입고 칼을 찬 일본의 앞잡이에게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밥해주는 허드렛일을 하는 줄 알고” 만주로 끌려왔다. 하지만 실상은 제국 군인들을 몸으로 위안하는 것이었다. “하루에 군인 8명 내지 10명 정도 받았어.” 할머니는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아청위안소에서 군표를 받으며 일본군의 위안부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으며 살았다. 그리고 중국에 남았다. 이 책에는 이수단 할머니와 같은 처지의 여성 8명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과 글로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난 건 1996년이었다. 그때 한 잡지의 사진 화보 취재를 위해 할머니들이 있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그 뒤로 17년 동안 전국에 계시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처음엔 할머니들의 낯가림이 심했다. 하지만 점차 가까워지면서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는 할머니들의 고통과 한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2001년부터는 중국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과도 만났다. 나라 없이 떠도는 그들의 비참한 실상은 과거의 삶을 그대로 연장시키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들을 보며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우선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사진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리자고 결심했다.”
사진가 안세홍(41)씨는 두 달 전 일본에서 포토에세이집 <겹겹>을 출간했다. 한 달 사이 한국에서도 동명의 책을 낸 것이다. 17년 가까이 진행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작업이 봇물처럼 터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덕이었다.
개인이 쌓아올린 작은 아카이브
올해 도쿄 긴자의 니콘 살롱에서는 안세홍의 사진전 <겹겹>이 예정되어 있었다. 안 씨는 이곳에 초대전을 신청했고 저명한 일본 사진가와 평론가로 구성된 위원회는 1월 그 요청을 승낙했다. 하지만 5월쯤 니콘 살롱은 일방적으로 취소 통지를 했다. 여러 차례 대화를 요구했지만 묵살 당했다. 결국 도쿄지방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전시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 사태에 배경에는 미쓰비시가 있었다. 니콘은 한반도 강점의 첨병 역할을 했던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계열사였다. 그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었던 것이다. 결국 도쿄 전시는 우익들의 반대집회 속에서 어렵게 진행되긴 했지만, 미쓰비시 그룹과 니콘은 사진전을 계속해서 훼방하고 있다. 올 9월에 열기로 예정돼 있던 오사카 니콘 살롱 전시 역시 장소 제공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로 인해 안 씨의 사진전은 미국 의 주요 뉴스로 취급됐고 미국에서도 동명의 사진전을 열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출판도 급물살을 타 일본어판에 이어 한국어판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안 씨는 “도쿄 니콘 살롱 전시는 2주 동안 79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대부분 일본인이었는데 20, 30대가 관람객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이들은 위안부에 대해 잘 몰랐는데 사진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고, 앞으로 자신이 어떤 실천을 하면 좋을지도 물었다. 사진전이 일본 곳곳에서 계속 이어진다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큰 힘이 되리라는 희망을 체험했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아카이브’다. 책에 담긴 글 사진 모두 작가의 감정이 억제되어 있다. 애초 정신대문제연구소와 함께 이루어진 기록 작업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후 진행된 개인적인 작업도 이 선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글은 모두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클로즈업이 절제된 사진들은 인물의 감정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포토에세이라는 대중성을 표방해도 역사 연구자들을 위한 1차 사료의 역할까지 훌륭히 해내고 있다.
기억과 망각으로서의 ‘소녀상’
사진은 프레임이라는 공간의 제약과 조작 가능하다는 어두운 약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생에서 지금까지 ‘증거’하는 역할을 잘 수행해 왔다. 사진에 담긴 정보는 미약하나마 표면의 진실을 담았고 사진가는 양심이라는 망점을 새겼다. 하지만 인간의 뇌에 입력된 기억은 그다지 디테일하지 못하다. 필요에 따라 출력되고 일부는 지워진 채, 일부는 왜곡된 채 떠오른다.
“소녀상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저항하고 싸우는 소녀’의 모습이야말로 한국인 자신과 오버랩시키고 싶어 하는 아이덴티티로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리얼리티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위안부’를 바람직한 ‘민족의 딸’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서 동원되었고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
참으로 불편한 이 이야기는 박유하 세종대학교 일문과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펴냄)에 등장한다.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20만 명 소녀 강제 연행’이 상식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20만’은 한국과 일본을 합한 정신대 숫자를 위안부로 오해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위안부는 예를 들면 일본군이 점령지에서 모집한 위안부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네덜란드인 강제 연행이나 중국인 강간 등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조선인 위안부에 일반화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피해에 얹혀 가는 것이다.”
이미 출간 후 격렬한 논쟁을 예고할만한 대목이다. 게다가 이 책은 논쟁 대상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해 온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로 삼고 있다. 박 교수는 정대협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박 교수는 정대협이 “저항하는 위안부’의 이미지와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이에 어긋나는 다양한 양상은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또 정대협의 주요한 요구인 일본의 법적 배상,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와 배상은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고 요구할 근거도 불충분하다면서 “반제국의 의미를 가졌던 저항이 그곳에서는 어느새 민족권력화 되어 있었다”고 까지 말한다.
이에 대해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그는 일본의 양심 있는 지식인조차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으며, 윤정옥 전 정대협 대표는 “박 교수가 일본 우익의 흐름에 맞는 얘기를 하고 있다”며 강하게 우려했다고 한 언론사는 전한다. 전면전 양상이다. 게다가 소위 진보적인 언론에선 이 책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었던 데 비해 보수 언론에서는 자세한 인터뷰까지 하며 지면을 할애하는 것을 보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하지만 책의 저자는 이 책의 의미를 좀 더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위한 집도 땅 한 뼘도 없이 몸담을 곳을 찾아 이동을 당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빈곤이 고향을 떠나도록 그들의 등을 떠밀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위안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할 만한 문화자본(교육)과 사회안전망을 갖지 못한 탓에 다른 직업을 못 찾고 자신의 신체(장기, 피, 성)를 팔게 된다.” 박 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민족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와 자본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시스템은 단지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으로 확장된다고 본다. 그곳의 조선족, 러시아, 필리핀, 페루 여성은 이러한 시스템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정대협의 민족주의적인 요구인 ‘국회입법에 의한 국가배상’만 고집하면서 일본 진보진영의 침묵과 우익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악마’를 깨웠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충돌이다.
민족주의 탈피와 세계적 시각
이러한 박 교수의 담론은 민족을 ‘근대 상상의 공동체’라고 보는 탈민족주의 사관과도 연결된다. 당대의 기록은 당대인의 눈으로 본다. 오늘의 가치로 과거의 문제를 재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는 국사를 한국사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 임지현 교수나 한국사에서 요동을 분리해 새롭게 고대사를 볼 것을 요구한 김한규 교수의 담론과도 맥을 같이한다. 박 교수는 친일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도 이석기 유의 주체사상파에 부화뇌동하는 민족 모순의 진보론자들과도 다른 방향에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박 교수는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아베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설득할 수 있다고 본다. 먹혀 들어갈 논리를 제시해야 한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법적 해결이 끝났다고 일본 정부에서 말하면 식민지 지배 사죄 의식이 없었다는 문제를 지적해야 하고, 그에 대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으로 끝났다고 하면 한국에서 반발해 그 사죄가 충분히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는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안세홍 씨가 <겹겹>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연구할 ‘아카이브’를 던졌다면 박유하 교수는 그것을 겹겹이 꿰어 ‘맥락’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문제를 풀 단 하나의 길만 알고 있다면 위안부를 만들었던 저들의 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 책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불편한 기억… 가려진 절반을 들추다 [중도일보]
출처: http://m.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1308140324
『제국의 위안부』 – 발간 직후 신문사 서평 및 인터뷰 모음
서평
- 2013년 8월 9일 경향신문
위안부 해법, 일본정부는 물론 한국의 민족주의도 걸림돌 - 2013년 8월 9일 서울신문
또다른 위안부 시각… 불편한 재인식 - 2013년 8월 10일 동아일보
위안부의 반쪽 진실… 가려진 절반을 들추다 - 2013년 8월 14일 중도일보
불편한 기억… 가려진 절반을 들추다 - 2013년 9월 6일 프레시안
‘위안부=비극의 소녀상’ 뒤집는 두 가지 시선? - 2013년 9월 26일 오마이뉴스
제자리 걸음인 위안부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인터뷰
- 2013년 8월 27일 주간동아
박유하 교수 “위안부 강제동원 법적 책임, 인신매매 업자에 먼저 물었어야”
[신년 기획 – 2013년을 말한다](6) 일본 사상가 가라타니 (경향신문)
장정일, 일본 ‘국민 작가’의 숨은 국가주의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박유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서평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세계관과 시대상을 통해 국민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는지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한갓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조자에게 허여되는 칭호임을 밝힌다.
나쓰메 소세키는 ‘하루에 세 편씩 논문이 나온다’고 할 만큼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다. 나쓰메 소세키가 이처럼 일본인의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차지한 ‘국민 작가’라는 부동의 자리 때문이다. <나의 개인주의>(책세상 펴냄, 2004년)라는 제목의 나쓰메 소세키 강연집을 편역했던 한국 역자의 약력에 적힌 “일본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를 중심으로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하고 있다”라는 문장은 더하거나 뺄 게 없는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박유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 펴냄, 2011년)는 보유 격의 논문 몇 편을 빼고는 통째 나쓰메 소세키를 분석한다. 지은이는 이 책 전체를 나쓰메 소세키가 창안한 ‘자기 본위(개인주의)’를 해명하는 데 바쳤다. 그 전에 언제부터인가 당연시된 ‘국민 작가’라는 용어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우리는 ‘국민 가수’ ‘국민 배우’ ‘국민 투수’에다 ‘국민 여동생’까지 있으니, 국민 작가도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국민 문학’이 문학사나 이론서에 등재된 것인 데 반해, 국민 작가는 문학을 설명하는 보편 용어가 못된다.
국민 작가라는 용어를 여기저기서 접하다보니,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전문적인 연구자들까지 저 용어가 근대문학이 발생한 모든 나라에 으레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 작가에 해당하는 영미(英美)·프랑스·독일·러시아·스페인어권의 대응어나 개념이 있느냐, 없느냐 따위가 아니다. 진짜 곤혹스러운 것은 저 용어를 통해 근대문학을 고민해보겠다는 비평가가 곧바로 ‘국민 작가를 가지지 못한 나라는 근대문학에 미달한 나라’라는 성급한 단정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런 억견에 대해서는 국민 작가가 일본에서만 쓰이는 그들만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의 산물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갱신된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근대적 헌법·군대·교육·의료 체계 등을 모방하면서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식의 문화적 상징물마저 갈구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슨 공식처럼 외우고 있는 ‘영국=셰익스피어’ ‘프랑스=위고’ ‘독일=괴테’ ‘러시아=푸시킨’ 따위 믿거나 말거나 한 상식에는 어서 서양을 따라 잡아야겠다는 일본의 문화적 후진성이 상당히 투영되어 있다. 한국 비평가가 일본의 전근대성에서 생겨난 국민 작가를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늠하는 기준인 양 받아들이는 것은, 이만저만한 촌극이 아니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국민 작가를 주조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이 있었다면,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국민 작가가 만들어질 수 없었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이 있었다. 그것을 무시하면, 문학 연구라는 이름을 빙자한 또 다른 식민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없다’는 이미 ‘있다’는 전제를 수긍한다. 따라서 ‘있다’를 거부하며 ‘없다’를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항상 ‘있다, 그러나 어떻게 있게 되었다’를 통해, 만들어진 기원을 폭로하고 허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전복은 외국인을 위한 일본의 어느 역사 교과서가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 일본의 아시아 지역으로의 무력 진출을 기술하면서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방식에 대해 반대한 것은 사회주의자나 나쓰메 소세키, 요사노 아키코 등의 문인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작업이다. 위의 인용에서 문제가 되는 천황제(일왕제)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던 사회주의 작가의 막대한 고난과 희생은 익명으로 표시되는 대신, 당대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했던 정도의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대한 아리송한 회의를 토로했을 뿐인 나쓰메 소세키가 마치 일본의 양심이었던 양 제시되는 일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서는 입 닫아
나쓰메 소세키는 어떤 기준에서 국민 작가가 되어 교과서를 오르내리고, 여타의 작가는 문학사에서조차 난외로 처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의문 없이 마치 자연인 양 국민 작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 만들기’와 ‘국가 비판’을 양축으로 했던 근대문학의 임무 가운데 저항성(국가 비판)을 거세하는 일이다. 박유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는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세계관과 시대상을 통해 국민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한갓된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조자 내지 제조자에게 허여되는 칭호라는 것을 밝힌다.
일본의 근현대 작가와 평론가는 물론이고 이른바 패전 이후 일본의 진보 지식인에게까지 나쓰메 소세키가 추앙받게 된 데에는, 그가 펼쳤던 문명론과 개인주의 언설이 큰 몫을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서구를 발달한 문명(과학·기술) 세계로 간주하고, 일본을 문명 세계에 위협받지만 그보다 뛰어난 문화(정신)를 가진 나라라고 여겼다. 문명과 문화를 양극단으로 나누는 이런 대립 구도는 프랑스 혁명 전후로 줄곧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독일 지식인이 프랑스에 대항하고자 만든 일종의 정신승리법이면서, 누군가로부터 침략받고 있다는 유사 식민지적 공포를 통해 민족주의를 동원하는 기제였다. 그렇게 저장된 독일과 일본의 민족주의는 머지않아 제국주의로 진화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항상 서양에 대항해서는 일본 문화를 내세웠지만, 조선이나 중국보다 앞서 문명화된 일본이 두 나라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의 문명론은 흔히 자기 본위라고 부르는 개인주의 옹호와 결합되어, 국가주의와 물질문명에 저항했던 것으로 예찬된다. 하지만 그의 모든 대표작을 분석한 이 책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의 개인주의는 항상 국가나 사회 질서의 한 분모로서만 존재했다. 또 한번 그의 동서문명론을 끄집어내자면, 서양이 도전과 투쟁을 통해 불평등을 뒤집는 문명이었던 반면 동양은 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가 등식화한 ‘문명/문화/자연’ 사이의 각축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잠시 요약했던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는 서양을 문명의 총화로 보고,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자리에 일본 문화를 올려놓았다. 여기에 책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계몽되어야 할 여성이 자연으로 등장한다. 메이지 시기와 같은 국민국가 탄생기에 자연과 동급으로 취급된 여성은 문명과 문화의 담지자인 남성에 의해 길들여져야 했다. 이런 분석을 통해 지은이는 다시 한번, 나쓰메 소세키의 개인주의가 철저히 근대국가의 기획을 거들었던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이 지은이가 파헤친 국민 작가의 본모습이다.
‘우경화’ 원인먼저 생각해봐야 – 서경식 교수의 ‘일본 리버럴’비판, 이의 있다 (교수신문)
노재현, 일본, 알고나 비판하자 (중앙일보)
김남중, ‘화해를 위해서’..욕 먹을 각오로 쓴 반일감정 비판 (국민일보)
박유하-주진오 대담 :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
국산은 후지다는 편견은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확실히 국산은 후지다. ‘학자'(혹은 ‘교수’)는 그 중 대표적인 품목이다. 학자 행세를 하려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에다 박사 공부까지 짧게 잡아도 10년은 공부해야 한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 10년을 했다면 ‘귀신처럼’은 아니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은 가지는 법인데 이상하게 한국의 학자들은 그런 사람이 참 드물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월드컵이나 독도 같은 광풍이 한번 몰아치면 그저 ‘축구 응원단의 일원’으로 ‘우익 시위대의 일원’으로 그 초라한 몰골을 드러내고 만다. 해서, 이따금씩 괜찮은 학자를 만나면 그것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관점이나 의견에 차이가 나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만 있다면 충분히 기쁘다. 박유하 씨는 그런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책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보석과 같다. 어제 신문에 난 그의 대담 기사를 읽다보니 ‘남성 학자는 단지 냉철할 뿐이지만 여성 학자는 냉철한 데다 부드럽기까지 할 수 있구나’ 싶다.
(김규항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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