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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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의적인 판결

2017년10월27일, 서울고등법원은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위안부에 대한 명예훼손을 한 책으로 판단하고 벌금 1000만원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2017년 1월 1심에서의 무죄 판결이후 나를 유죄로 판결할 만한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것이 아님에도 무죄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말하자면, 2심은 같은 책에 대한 판단을 증거가 아니라, 책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만으로 뒤집었다. 당연히 승복할 수 없었고 나와 변호사는 곧바로(10월30일) 상고했다. 법원에 제출할 상고이유서는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쓰게 되겠지만, 아래는 재판부뿐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이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선 간단히 써보는 글이다.

2심 판결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조선인위안부’와는 다른 위안부상을 보여 주고 있다. 또 저자는 ‘조선인위안부의 고통’에 관해서도 이 책에 쓰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을 책에서의 기술 전부에 쓰고 있지는 않다. 그 때문에 ‘자발적 매춘부였던 일본인위안부와는 다른, 성노예 조선인위안부’라는, 우리사회와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인식과는 다른 인식을 독자가 갖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다. 즉 ‘조선인 위안부=자발적 매춘부’라는 인식이다. 또한 유엔보고서등 국제사회와 일본의 고노담화등이 제시하는 인식에 따르면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인식은 명백한 허위이다. 저자의 인식을 허위로 단정하는 이유는 국제사회의 인식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인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제사회의 인식을 저자는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와 다른 인식을 말했다. 말하자면 ‘허위’를 말했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하면 대상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될 것인지를 인식했는지 여부도 명예훼손 여부 판정에서는 중요한데, 저자는 오래 위안부문제를 연구했으므로 그 파생효과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허위사실 적시와 집필목적에서 ‘고의(범의)’가 인정되므로 유죄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2심 판결은 ‘독자의 독해에 저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나에게 내려진 ‘벌금 1,000만원’을 검찰이 구형한 3년 징역형보다 가벼워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혹은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1,000만원이라는 액수는 징역이라면 5년에 해당하는, 명예훼손 관련 벌금형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금액이다. 재판부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처럼 강조했지만 징역형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3년 이상의 징역 형에 해당하는 처벌이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마치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명예훼손법률상 유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해당내용이 ‘사실’이어야 할 것이 첫번째 조건이 된다. 나에게 무죄를 내린 1심은 검찰이 지적한 35곳 중 30곳을 ‘의견표명’으로 규정하고 처음부터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5곳은 ‘사실’에 관한 기술로 규정하면서도 위안부의 사회적평가를 저하시키는 표현이 아니라거나, 개개인을 특정한 것이 아니므로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저자에게 명예훼손을 하려는 목적(고의)이 있었다고 볼 수 없고 “위안부문제는 국민들이 알아야 할 공공성/사회성을 갖는 공적관심사항이므로 활발한 공개토론과 여론형성을 위해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 해야 한다면서 무죄를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기까지 1심재판부는 무려 1년에 걸쳐 10회 넘게 재판을 진행했고, 본재판 이후에는 매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긴 시간을 들여 재판을 진행했다. 검사는 나를 비판한 학자들의 논리를 들고 와 나의 ‘범죄’를 주장했고, 결국 법정에서의 공방은 학술세미나와 다름없는 내용이 되었다. 그에 비해 2심은 고작 4번 진행되었고, 매번 한두시간만에 끝났다. 그렇다면 1심에서 제출된 방대한 자료를 세심하게 봐야만 이 사건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을 터인데 2심 판결은 결코 그랬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 왜곡과 소송의 본질

이 판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검사가 제출한 왜곡된 책 요약(악의적인 독해)을 그대로 차용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래에 인용해 두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책의 취지를 충분히 살펴 요약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가장 신경을 써서 독자의 오해가 없도록 쓴 부분에 관해 재판부는 검사가 멋대로 왜곡한 요약을 가져와 내가 한 말처럼 왜곡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위안부는 강제 연행되지 않았다’고 쓰지 않았다. 일본군의 모집과 관여/관리도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관여했는지 자세히 썼다.

“조선인 위안부가 해야 할 일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면서 본인 혹은 부모의 선택에 의해 자발적으로 갔다” 고 요약된 부분도 엉터리 요약이고,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도 내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위안부 비판자들의 말이다. “1996년 시점에서 위안부란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던 여성들” (42)이라는 표현 역시 재판부가 인용한 유엔보고서의 내용이다. 이런 논리라면 박유하가 `위안부는 자발적매춘부`라고 했다고 보도해 온 모든 언론과 개인도 명예훼손으로 고소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나는 “법률상 배상책임이나 공식사죄를 받을 수도 없다” (2)고 한 적이 없다. 나는 그런 방식만을 지고지선의 해결방법으로 생각해 온 지원단체의 운동방식과 논리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다. “공식사죄를 받을 수 없다”가 아니라 20년 이상 법적책임만을 주장해온 지원단체 생각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니 한일협의체를 만들어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 내가 책에 쓴 내용이다. 한국판 간행 이후 나온 일본판에서는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썼다.

내가 “피고인이 주장하는 해결방식을 제시” (39)했다는 말은 검사의 주장인데, 앞에서 쓴 것처럼 나는 한국어판에서는 구체적인 해결방식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고측도, 검사도 재판과정에서 내내 이런 말로 비난했는데 실은 이 주장에 ‘제국의 위안부’ 소송의 본질이 있다. 원고측(지원단체)이 소송을 시작한 건 사실, `위안부의 명예`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운동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책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이라는 부제목에서 나타낸 것처럼 90년대 이후 위안부문제지원운동의 문제를 비판한 책이기도 한데, 그것이 고발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해 온 `법적책임`에 대해 아는 분들은 최소한 내가 만난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는 안 계셨다.

3. ‘사실적시’라는 전제에 대해

이 판결은 나의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에서 모든 조선인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니고 직접적인 폭행·협박 또는 기망·유혹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가 있으며, 일본국이나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한 증거가 없으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하여 강제력이 행사되었으며,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도 착취당했고, 일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등 내용을 함께 서술하고 있다.”(32)
“피고인은 이 사건 도서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을 모집한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모집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위안부들은 가난, 가부장제, 국가주의에 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위안소 내에서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해 강제력이 행사되었고,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 착취당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식민지인으로서 애국이 강제되었고,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동지적관계에 있었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37)
“피고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존재하고 조선인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매우 다양하며, 이 사건 도서는 피고인이 기존 자료를 토대로 현재 우리사회 주류적인 시각과는 다른 입장에서 위안부문제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내용이고, 이 사건 도서 곳곳에서 여러 예외적인 경우와 다양한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서술되어 있다.”(41)

“예외적”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쓴 사람의 견해가 드러나 있어 꼭 전부가 완전한 건 아니지만 나의 책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한 요약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유죄가 내려졌을까?

사실 나는 명예훼손 소송에서는 ‘의견’인지 ‘사실’인지가 중요하다고 듣고 학술적인 책에서의 모든 기술은 기본적으로 의견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학문이란 `진실`을 찾는 과정이지만, 아무리 내가 알게 된 사항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내가 믿었던 `사실` 역시 언제고 새로운 탐구와 학설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학문은 `의견`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헤이든 화이트의 ‘메타역사'(1973)이후,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한 것처럼 보이는 역사서조차, 입수된 자료를 두고 학자가 문학적상상력으로 엮은 `문학`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은 점차 상식이 되고 있는 중이다. 다수의 지지와 검증을 거친 가설들이 세월과 공간을 넘어 ‘진리’, ‘사실’로 정착되어 오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은 문학적 플롯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플롯을 만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라는 인식은 과거의 역사에 겸허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말하자면 모든 역사서/학술서는 ‘진실=사실’을 추구하는 것이되 하나의 사항을 최종적 ‘사실’로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논리적으로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 시점에서의 ‘인식’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나의 문맥이나 표현자체도 ‘의견’으로서 표현한 곳이 많다.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자체보다 증언을 포함해 역사를 둘러싼 담론을 분석한 학술적 비평서이기 때문이다.

4. ‘사회적 평가 저하’라는 인식에 대해

재판부는 결과적으로 나의 책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 시킨다고 말한다. 재판부가 말하는 ‘사회적 평가 저하’란 위안부 할머니들이 ‘강제연행을 주장’ 하고 있는데 그와 반대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은 그런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내 책을 읽은 이들 중에는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더 생각하게 보게 되었고, 이전에 못 느꼈던 슬픔을 느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적지 않다. 오로지 그들의 독해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이 판결은 그렇게 읽은 모든 이들을 무시한 판결이다. 대신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이들의 존재와 그렇게 유인한 이들의 오독의 ‘가능성’을 편파적으로 우선시했다. 나에 대한 유죄판결은 그렇게 내려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서라기보다는 역사를 둘러싼 담론을 분석한 메타역사서다. 한국과 일본의 여러 층위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썼고, 하나의 ‘진실’ 자체보다 눈앞에 있는 진실(대상/정황)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를 모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필요한 만큼 ‘사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 ‘사실’을 둘러싸고 대립중인 이들이 서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지향하면서 쓴 책이다. 접점을 찾기 위해 양국 정부와 지원단체를 비판했지만, 위안부에 대해서는 부정도 비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시도한 건 오히려 그동안 지원단체가 묵과하거나 은폐했던 목소리를 살려내는 일이었다. 그동안 의식/ 무의식적으로 묻혀 왔던 그 모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야 말로 과거와의 대면에서 성실한 방식– 바람직한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판부는 나의 그런 시도를 인정하면서도, 나의 책에 반발한 지원단체(와 검찰)의 나의 책에 대한 왜곡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조차 제대로 읽고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면서도, 이 판결은 결국 재판부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독자를 무시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판결문에 일부 요약된 것처럼, 나는 ‘위안부의 자발성’을 강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구조를 만든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비판했다. 설사 자발적으로 간 위안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 경우라고도 썼다. ‘(관리) 매춘’이라는 단어는 재판부가 인용한 유엔보고서와 여러 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치평가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하나의 정황설명일 뿐이다. 문맥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의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가 되어야 한다면, 1996년에 보고서를 작성한 유엔보고관, 그리고 일본군위안소를 국가가 관리한 공창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는 다른 모든 학자들도 기소되고 유죄가 내려져야 한다.

5. ‘허위’라는 인식에 대해

재판부가 나의 책을 허위라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자료는 90년대 중반, 즉 20년도 더 전에 나온 자료들이다. 그나마 고노담화는 일본정부가 직접 조사해 내놓은 견해지만, 다른 유엔보고서나 국제사법위원회의 자료는 위안부문제가 문제로서 발생되기 시작한 초기에 지원단체들이 유엔등 국제사회에 제출한 자료등을 비전문가들이 검토해 나온 자료다.

물론 유엔의 쿠마라스와미보고서는 일본이나 한국, 그리고 북한에서 학자나 위안부의 증언을 듣고 종합한 보고서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공정하게 취합하려 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보고서는 지금은 부정되고 있는 (이 문제해결을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온 와다 하루키 교수조차 작년에 낸 책에서 요시다증언을 부정했다)요시다 증언등을 근거로 나온 보고서다. 그리고 동시대에 벌어졌던 유럽등 내전에서의 강간/학살과 똑같은 것으로 이해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학계는 이후 20년이상 연구를 진행했고 지금은 학계에서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위안부의 물리적 강제연행’을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강제동원을 주장했던 이들은 지금은 동원에서의 강제가 아니라 위안소에서 부자유했다는 식으로 내용을 바꿔서 여전히 똑같은 ‘강제성’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연구자나 지원단체관계자들이 그런 정황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변함없이 ‘강제연행’에 집착하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장해 온 ‘법적책임’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 방식만이 정의로운 사죄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책을 ‘허위’라면서 고발한 이유는, 위안부할머니를 모욕하거나 일본의 책임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법적책임’의 가능성에 내가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원단체의 사고에 의문을 제기한 나를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라며 목청높여 비난하고 급기야 고발/기소에 이른 원고측과 검찰의 주장을 2심 재판부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재판부의 판결문은 1심에서 제출한 방대한 나의 자료를 완벽하게 무시했음을 보여준다.

재판부는 나의 책을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댓가를 받고 성매매를 했다`(31)”,”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 고 했다고 요약한다. 그러면서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일본국가나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동원되어 일본군 위안소에서 성적 학대를 당하며 성노예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했다`” (31)는 것이야말로 “사실” 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모집은 했지만 일본군이 납치나 속임수를 허용한 정황이 없고 “공적으로는” (즉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지시한 흔적이 없고 오히려 그에 반하는 정황이 증언/수기등에서 보인다) 오히려 그런 정황을 단속한 정황이 보인다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할머니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당사자의 증언은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다만, 경찰과 같이 혹은 혼자 나타난 ‘군인’처럼 보였던 이들은 군속대우를 받고 군복을 지급받은 업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재판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곳을 나의 글로 착각하고, 그 부분에 내가 일일이 그에 반하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분을 ‘범죄’로 단정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대부분, 말한 이들을 비판하는 문맥, 혹은 전체를 정리하는 부분에서 쓰인 내용들이다. 오히려 지적된 대부분 앞뒤에 반박/비판이 들어가 있는데도. 그런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에만 반응한 셈이다.

재판부는 유엔보고서에 나오는 “일본정부가 강간수용소의 설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군부는 물리적 폭력, 유괴 강요와 속임수를 동원했다” (34)는 말, 일본군이 여성이나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업자에게 적극적 지원을 부여했다” 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 인식이 “위안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 이라고 주장한다(36). 나의 책은 이런 “중요한 부분이 사실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에 “허위” 라는 것이다.

재판부가 유엔보고서쪽이 진실일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국제사회’라는 단어를 무조건 권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원고측과 검찰이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원고측은 그동안 나온 국제보고서들과 고노담화를 나의 ‘범죄’를 증명하는 자료로 검찰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들의 고소/기소 취지는 말하자면 ‘국제사회는 물론 일본까지 공유하는 인식을 박유하가 혼자 부정하고 있다’였다.

하지만 나는 고노담화를 부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높이 평가했다. 다만 해석을 달리 했을 뿐이다. 지원단체는 예전에는 고노담화가 강제성을 부정한 것이라면서 미봉책으로 치부하고 비판했었다. 그러다가 아베정권에서 고노담화가 재검증대상이 되자 갑자기 고노담화가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라면서 지키기에 나섰을 뿐이다.
그런데, 고노담화를 만든 전 관방장관은 나의 기소반대성명에 서명하기도 했다(2015/11,http://www.ptkks.net/approval/). 나의 해석이 그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다면 그가 참여했을 리가 없다.

재판부는 국제보고서의 ‘성노예’인식이 옳고, 나의 책은 그에 반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지원단체의 성노예인식에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동시에 위안부가 분명히 `성노예적`존재라고 썼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하지만 피고인은 처음에는 일부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거나 여러가지 경우가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다가 이 사건 표현들에서는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서술하거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위 표현을 접하는 독자들은 ‘전체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또는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였고, 애국적으로 일본군과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서술되어 있고, 이러한 내용이 객관적인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사건 표현들은 허위사실에 해당한다”(37)고 말한다.

이런 재판부의 인식은 ‘자발적 매춘부’라면 피해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만든 것이기도 한데, 원래는 지원단체의 인식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 있던 이들이 오히려 ‘매춘’에 대해 차별적인 생각을 스스로 가졌거나(그들이 오로지 ‘순결한 소녀상’에 집착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20년 이상 여성인권운동을 하면서, 사회가 필요시하고 차별해 온 문제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시도한 나를 죄인으로 치부하고 고발한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한 상황을 모르는 채로, ‘사회가 위안부를 차별(사회적 평가 저하) 할 수 있으니 (저자의 의도가 그게 아니더라도) 처벌한다’ 고 한 셈이다.

6. 인물특정 여부에 대해

재판부는 나의 책이 특정 위안부를 지칭해 명예훼손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2심 재판부의 말이 맞다면 오히려 원고로 이름이 올라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 개별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누구의 이름도 의식하지 않고 책을 썼다. 그런데 원고측이(검찰이) 나의 ‘허위’ 를 증명하기 위해 재판부에 제출한 나눔의 집 거주 다섯분의 구술서에 따르면 오히려 아무도 그런 경험을 한 분은 없다. 심지어 그 중에는 ‘보국대’로 갔다고 말한 분조차 있다.

그런데 재판부는 내가 집필목적에 대해 쓴 서문중에서

“말하자면 한일양국은 20여년의 역사문제갈등을 거치면서 심각한 소통부재 상황에 빠져 버렸다. (중략) 그 갈등의 중심에 위안부문제가 있고, 그들(일본의 부정자)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위안부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38-39)라는 서문일부와, 이하 인용한 부분을 가져와 내가 구체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는 위안부를 특정했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과 일본사이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다. 피고인도 이 사건 도서에서 [한국의 위안부들과 지원단체는 그 후에도 일본정부와 세계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사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로 간주되고 있지만, 다른 나라는 사죄를 받아들였으므로 현재의 위안부 문제란 실은 이 몇십명의 위안부와 위안부지원단체가 주체가 된 한국인 위안부문제이기도 하다(171)] 라고 썼다” 면서 “스스로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나타내고 있는 사람에게만 명예훼손 문제가 생길 뿐” 이므로 “제3자가 일본군 위안부를 생각할 때는 전체 ‘조선인 위안부’보다는 우선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힌 ‘위안부피해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위안부를 “특정” 했다고 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 인용된 부분에서 내가 강조한 건 ‘한일갈등의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일 뿐, ‘갈등을 빚고 있는 그 위안부’가 아니다. 이 부분에서도, 책 전체에서도 나는 위안부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사죄요구가 옳지 않다고 쓴 적이 없다. 일부 할머니들에게 주어진 정보가 과연 정확했는지, 그렇게 생각하도록 이끈 지원단체의 사고가 과연 절대선인지를 의문시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300쪽이 넘는 나의 책을 읽으면서 위안부의 슬픔을 느꼈다는 이들은 대부분 재판부나 원고가 말하는 ‘특정한 그 위안부’가 아니라 ‘이름모를 위안부’, ‘전쟁터에서 동원된 위안부’를 떠올린 이들일 것이다. 그런 독자들이 실재하는 한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만일 내가 위안부문제를 그저 ‘사죄보상을 요구하는 그 위안부들의 문제’로 생각했다면 애써 ‘위안부의 슬픔과 고통’을 전하려는 책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기존지원단체과 같은 규탄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귀를 기울이면서, 문제적인 생각을 비판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위안부’의 실상을 보여주는 추상적인 ‘위안부’가 있고, 현재의 한일갈등의 중심인 구체적인 ‘위안부’ 할머니가 있다. 나의 책은 후자에도 주목했지만, 고찰 대상은 어디까지나 전자였다. 검찰이 매춘/강제성/동지적관계, 이 세 부분을 문제삼았다는 것은 전자를 문제삼아 기소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이름모를 위안부’를 포함해 모든 (추상적) 위안부에 관해 쓴 부분에 주목하면서 내가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현재의 구체적인) 위안부’를 특정했다는 말은 그들의 기소취지에 비추어 봐도 비논리적이다. 설사 오로지 나의 책을 읽고 현재의 위안부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의도하지 않은 한 그건 저자의 책임일 수 없다. 나의 고찰 대상이 어디까지나 전쟁터에서 사망한 ‘그녀들 모두’였다는 건 위안부에 대해 설명한 책의 1부를 이렇게 끝맺었다는 만으로도 분명하다. (2부와 3부는 90년대 이후의 갈등양상에 대해 썼고 4부는 현대가 과거를 반복하고 있는 구조에 대해 썼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들이 아닐까.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다 생명을 잃은 이들—말없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일본이 사죄해야 하는 대상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름을 잃은채로 성과 생명을 ‘국가를 위해’바쳐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제국의 위안부’들에게.” (104)

7. 목적 (“고의”)에 대해- ‘사회적 평가저하’를 한 건 누구인가?

재판부는 나의 책이 다양한 위안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피고인은 이 사건 표현들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서술하지 않거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를 접하는 독자들은 마치 대부분 또는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였고 애국적으로 일본군에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피고인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서 이 사건 표현들을 서술하였다고 보인다”고 했다 (41).

그러면서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를 집필한 목적, 이 사건 도서의 성격 및 전체내용을 감안하더라도 피고인은 이 사건 표현들에서 적시한 사실이 허위인 점과 그 사실이 피해자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 시킬 만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였다고 보인다. 피고인에게 명예훼손 고의가 인정된다” 는 것이다. (41-41)

말하자면 재판부는 그저 ‘가능성’을 처벌하고자 했고, 그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책의 모든 부분에서 재판부 스스로가 옳게 요약하기도 한 나의 책의 취지를 반복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책이라는 매체가 한 개인의 표현이기도 한 이상, 이런 생각은 개인의 표현방식에까지 국가가 관여해야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과 한국의 독자를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책을 썼고 각각의 부분에서 그 독자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나갔다. 같은 소재를 두고 약간 다른 뉘앙스로 기술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진실을 가능한 한 보되 더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어떻게 생각할 지’ 여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고와 검찰과 재판부는 나의 책이 정작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한 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부분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단어에만 집착했다. 하지만 단어자체가 문제라면, 나를 고발한 이후 언론이 나를 비난하면서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고 한 박유하”라고 반복해 온 시간들, 이 3년반의 시간들이야말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모욕적인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위안부를 비방할 의도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웬만한 독해력을 가진 독자라면 반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썼다. 책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악의적’으로 읽는 독자가 설사 있다 해도 그건 저자의 책임이 아니다.

내가 이 책에서 강조한 건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소녀’만 피해자로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인식이 오히려 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상황이었다. 설사 자발적으로 갔다 해도 그 사실이 은폐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50년 가까이 위안부 체험을 한 이들이 침묵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로 하여금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운 지원자들조차, 그러한 구조를 오히려 공고히 해 버린 건 단순한 오해나 시대적인 문제가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운동의 확산을 위해 전략적인 것으로 바뀌어 간 측면이 있다. 나는 그 전략을 이해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전략이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명백히 적어둔 나의 집필목적을 왜곡해가면서까지 지원단체들이 주장하는 대로 고의/범의를 보려 했다.

물론, 우리사회의 매춘에 대한 인식—‘사회적 평가 저하’를 재판부가 우려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책이 나온 후 나의 책을 근거로 그저 ‘위안부는 매춘부’로 생각하고 위안부에 대해 비판적이 된 이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렇게 읽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저 나의 책을 멋대로 왜곡해 자신들이 이미 해 왔던 말을 보완하기 위해 이용한 이들일 뿐이다. 중요한 건 매춘여부가 아니라 그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해여부다. 나는 오로지 그 옛날 소녀/여성들의 신산한 삶을 더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를 지향하며 자료와 글쓰기 방식을 골랐다. 그런 나의 책을 왜곡한 건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렇게 대립해 온 이들의 접점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썼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책을 있는 대로 받아들여 준 건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반독자들이었다. 이번 판결은 그렇게 ‘오독하는 독자들 ‘,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독자들’을 우선시한, 사회적 성숙을 오히려 퇴보시키는 판결이다.

8. 식민지 트라우마

원고측과 검찰과 재판부의 생각과 판단의 저변에는 우리의 식민지 트라우마가 있다.

예를 들면 재판부는 내가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과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한 부분을 들어 문제시했다. 물론 나는 완전히 같지 않다고 분명히 썼고, 조선인은 기본적으로 차별구조 속에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에 동원되어 다수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생활이 가져다 준 ‘여성’으로서의 고통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전대표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위안부속에서 굳이 한일차이를 보고 싶어 하는 건 그들이 인간의 아이덴티티를 성보다 민족에서 보고 싶어한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아이덴티티는 다양하고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것이 ‘여성’이기 때문이었는지, ‘조선인’이기 때문이었는지는 한마디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양쪽에 다 이유가 있었다고 썼다. 하지만 기존학자 대부분은 ‘여성의 인권’을 앞세워 운동과 연구를 해 왔으면서도, ‘일본’국적을 갖고 태어난 ‘여성’의 인권은 애써 무시 혹은 간과해 왔다. 그건 세계연대를 위해 ‘여성문제’임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조선인 위안부의 ‘여성’으로서의 고난 역시 도외시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여성’이면서도 공적으로는 ‘남성’을 비판할 수 없었고, 자신들을 착취한 ‘계급’의 문제를 말하지도 못했다. 물론 증언에서는 그런 구조를 충분히 말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묻혔던 말들을 살려내 언어화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만 여기서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지원단체와 일부 학자는 자신들의 인식만이 절대 옳은 것으로 간주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입을 막으려 했다. 혹은 재판 중에 나를 비판하는 일로 직간접으로 고발에 가담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서’를 지향한 것이 아닌 이 책을 두고 ‘역사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더구나 그들은 나의 책이 이른바 일본우익의 책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일본우익과 같다고 외치는 일로 나에 대한 국민비난을 조장하고, 대중에 의한 끔찍한 여성혐오적 비난과 협박을 방치했다. 이것이 대한민국과 재일교포 ‘페미니스트’와 위안부관련 학자와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3년 반 동안 보여준 모습이었다. 그런데 2심 재판부는 결국 그들의 손을 든 것이다.

재판부는 ‘동지적 관계’도 ‘허위’로 판단했지만, 나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라고 분명히 적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나의 책이 ‘애국을 강제했다’고 쓰고 있다고 적고 있으니 내가 강조한 메시지는 분명히 받아든 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원고측과 검찰의 왜곡요약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가 애국적 자긍적으로 협력하였다’고 썼다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물론 실제로 ‘애국적/자긍적’이었다고 스스로 말한 자료들도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목소리까지 포함해 위안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어야 한다. 한사람의 인간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싶다면.)

원고측 고발, 검찰기소, 그리고 이번 형사 2심 판결까지, 이들이 나의 책을 왜곡해 언급할 때마다, 그리고 이들의 말을 그대로 언론이 보도하고 SNS가 확신시킬 때마다, 나는 이들의 ‘허위’사실 유포에 의해 학자로서의 명예에 상처를 입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로 인해 실제로 ‘사회적평가가 저하’된 건 다름아닌 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원고측-고발자들의 목적이었다. 나에게 이 3년반동안 쏟아진 수많은 비난과 협박들은 그들의 의도가 성공했음을 증명한다.

공정하게 평가해야 할 사법부가 스스로 국가의 얼굴을 한 민간인의 손을 들어 한사람의 학자에게 형사처벌을 내린, 2017년 대한민국의 공간이 내게는 아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渦中日記 2015/12/15

기소 이후 한달이 되어가는데 아직 원래의 일상을 못 찾고 있다. 원래의 일상이란, 재판과 그에 관련된 일들이 생활과 감정의 중심이 되지 않는 상태다.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은 기본적으로 내게 “비일상”일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많이 지난 탓에 기소 이전에는 조금은 평정심을 찾았었다. 그런데 기소 이후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일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아직 살아나지 않는다. 그저, 필요 최소한도의 말과 글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한일 양쪽 성명을 비롯해 이런 글들, 그리고 페북에서 여러 글들을 써 주는 분들을 위해서 기운을 차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장정일 작가의 말은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나는 이 1년동안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저 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해왔을 뿐이다.
얼마 전에 인터뷰를 해 주었던 기자가 이번에는 칼럼을 써 주었다. 욕 먹을 걸 알면서도 이렇게 쓴 기자가 여성이라서 더 기쁘다.

http://www.hankookilbo.com/m/v.aspx…

http://news.donga.com/3/00/20151215/75364063/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6940285332883

渦中日記 2015/12/1 – 기자회견 전야

그저께는 마이니치신문 인터뷰를 했고, 어제는 뉴욕타임즈 인터뷰를 했다. 한 일본인기자는 나에게 전화해서 한국언론의 반응을 물었다. 한국언론에서는 아직 인터뷰신청이 없고 기소를 직접 비판하는 기사나 칼럼은 내가 아는 한 아직 없다고 했더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이유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응원을 보내 주는 분들은 계시다.

내일 기자회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1년반 동안 재판소와 세상을 향해 “내 책은 위안부할머니를 비난하는 책이 아니다” 라고 외쳐왔지만 그 외침은 철저하게 묵살당했다. 읽은 이든 안 읽은 이든 나를 비판하는 이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책임을 부인하는 일본””피해를 호소하는 할머니”라는 두가지 대비되는 이미지인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그들에게 내 책은 그러한 “정황”에 대한 인식이 없는, 그러한 “정황과 싸우고 있는 할머니의 인권”을 짓밟고 있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 읽은 이들조차 “똥을 먹어봐야 아느냐”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전제”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문하지 않는다. 조금 사려깊은 이들은 “책이 설사 그런 의도를 담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상처입었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검사는 내게 책의 문맥을 보면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구절”이 문제제기되는 한 그건 “법적”으로는 문제삼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1년 반동안 알게 된 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검찰과 법정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사태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방면으로 생각하려 한 인문서적에 대해 “판단”이 맡겨져서는 안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법학자의 발상이 인문학자의 발상과 얼마나 다른지도 알았다.

가처분재판부와 검찰이 나의 책을 성실하게 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의 답변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했다고 쓴 원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데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검사는 “내가 한국에서 이 문제를 세번째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검사는 원고측이 제출한 방대한 자료들–유엔보고서니 그외 자료들을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출한 또다른 자료, 1992년에 한국정부가 만든 자료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료는 나의 견해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은 나의 책을 판단할 때 단순히 “할머니의 명예”침해 여부로만 묻지 않는다. 그들이 갖고 있는 현대일본에 대한 이해, 식민지시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 책에 대해 말한다. 나눔의집 측이 내 답변서를 읽고 “허위!”라고 주장했던 처음 주장을 바꾸어 나의 “역사인식”이 “공공선”에 반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전쟁범죄를 찬양”하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런 생각이 잘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그런 그들의 전략은 유효했고 “삭제하라”는 명령과 “기소”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내 책은 바로 그런 그들의 “전제”와 “사고”에 대해 물으려 한 책이었다. 그러니 나는 어쩌면 그동안 접점자체가 없는 싸움을 해 온 셈이다.
수십번 한 이야기지만 이 싸움은 할머니와의 싸움이 아니다. 지원단체와의 싸움조차 아니다. 그저, 20년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했이들, 그들이 이 사회에 심어놓은 “인식”과의 싸움일 뿐이다. 그 인식의 뒤에는 때로 이런저런 권력도 보이지만.
나를 지지해 준 이들 중에 외국등 “바깥”에 있는 이들이 많았던 건, 이 사회를 지배하는 통념과 힘에서 자유로운 이들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혹은 “안”에 있을지라도 우연한 인연이나 통념을 존재와 생각과 행동의 근거로 삼지 않고, 그래서 생각이 자유로운.

나를 위한 “지식인성명”에 서명을 받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내일 나의 기자회견에 이어 발표된다. 주로 학계, 문인을 포함한 문화예술계, 출판계, 언론계, 그리고 법조계 분들이 참여해 주었다.
오래 교류해 온 학문적동지이기도 한 분과, 고발이후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셨던 명망가가 나서주고 계신데 나는 늘 교류하는 페이스북 친구들에게조차 미처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유명진보논객들이 동참해 주었지만, 발표되는 첫성명에 늘 지지해 주었던 페북친구들의 이름이 없으면 그간의 상황이 반영되지 않은 성명서라는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었습니다.

혹 이제부터라도 참여해 주실 “해당분야” 분들은 아래 댓글에 있는 백승환군에게(이미 저에게 보내신 분은 괜찮습니다) 페이스북메시지로 이메일주소와 함께 성함(신분)을 적어 알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예:박유하(연구자), 홍길동(언론인)등. )
오늘밤 10시까지입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8473506179561

渦中日記 2015/10/22-2

하루에 渦中日記를 두 번 쓴 적은 거의 없다.

이 제목으로 쓰는 내용은 <제국의 위안부>, 혹은 재판에 관한 얘기들이다. 낮에 <제국의 위안부>가 높이 평가받았단 얘기를 썼는데 저녁에는 반대되는 상황을 써야 하니 아이러니다.

오늘, 그동안 진행해 왔던 “조정”이 중단되었다. 따라서 이제, 형사고발에 관한 결정은 검사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제시된 원고측 요구는,
1.사과,
2.삭제요구부분을 000표시한 한국어삭제판을 다른 형태로 낼 것(000표시가 삭제된 내용을 “간접적으로”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3. 제3국에서 내는 책도 한국에서 삭제한 부분을 삭제할 것,
이 세가지였다. 그러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2번도 일종의 검열이었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다. 대신 3번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일본어판은 번역도 아니고 독자적으로 낸 책이어서 권리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요구를 내가 수용해 일본측 출판사에 요구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받은 연락은, 원고측은 일본어판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조정에 부응하기 어렵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2번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모든 게 아마도 나눔의집 소장의 생각일 것이다. 내가 얼마전에 통화했던 할머니는, 자신이 형사고발인 명단에 오른 줄도 모르고 계셨다.

두통/근육통에서 해방되었나 했더니 오늘은 기침이 심하다. 문득 겁먹으면 기침을 심하게 하던 영화속 러시아의 공주가 생각난다. 잉그리드 버드만이었을 것이다.
겁을 먹은 건 아니지만 긴장되기는 한다. 아무튼 이 달 안에 형사고발에 관한 결정이 날 것 같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17953421564903

渦中日記 2015/9/11

김곰치작가님이 재판에 대해 궁금해 해주셔서 간단히 씁니다.(관심,고맙습니다.😊)

1.가처분 소송
지난 2월에 원고가 지적한 53곳 중 34곳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출판, 판매 등등을 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났고 이에 따라 지난 6월말에 지적된 부분을 000 처리한 삭제판을 발간했습니다. 현재 서점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출판사와 함께, 판매수익은 전부 동아시아 평화운동에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판결에 대한 이의신청을 준비중입니다.

2.민사소송
지난 5월과 8월에 서울 동부지원에서 두 번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세번째 재판이 10월7일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3.형사소송
검찰이 조정을 권해 조정위원회가 작성한 두번째 조정안을 받은 참입니다. 고발날짜에서 벌써 1년 3개월이나 지난 상태라 조만간 결정해야 하고,만약 성립되지 않으면 기소여부가 결정됩니다.

문안 중에는 “(가처분)결정 주문 1항에서 금지한 행위를 한국 및 제 3국에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하지 아니한다”는 구절이 있어 원고측이 의미하는 바를 확인 중입니다.
결정주문 1항이란 “(인용목록의)밑줄친 부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서는 위 도서를 출판, 발행,인쇄,복제,판매,배포및 광고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내용입니다.
최종 확인이 필요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원고측의 요구는 “일본어판등 해외판과 함께 한국어삭제판도 판매금지” 인 듯 합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93119434048302&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5/23

5월의 두번째 연휴. 이틀째 변호사님과 함께 재판준비중이다.

새로 담당해 주게 된 변호사님은 책을 좋아하고 근대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한일관계관련 나의 책을 전부 읽었을 뿐 아니라 그런 책을 쓰도록 만든 이론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책까지 소개해 달라고 해서 나를 살짝 감동시킨.

이번 주 수요일에 민사재판이 시작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22041717822741

渦中日記 2015/4/6

오늘, 새 변호사를 선임했다. 1심에서 승소한다 해도, 혹은 원고측이 취하한다 해도 6천만원 가까이 들어가는 소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2심이나 3심으로 이어지거나 혹 패소까지 하게 되면 비용이 더 추가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이 내겐 진짜로 재판이 시작되는 날이 되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94686587224921&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4/3

어젯밤 귀갓길. 생일파티를 해 준다는 동료들과 개강모임겸 만나 식사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났다. 앞차가 사고난 것도 모르고, 밀리는 건 줄 알고 한참을 얌전히 기다렸을만큼, 비가 퍼부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 앞을 보고 있지만 아무도, 정말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올해는 꽃을 봐도 여느 때처럼 설레지 않는다. 아무래도 감각기관의 어딘가가 상처입었나 싶기도 하다. 나를 향해 겨누어지는 적의와 다가오는 위로의 반복 속에서, 내 마음도 부침을 반복한다. 꼭 병행되는 건 아니지만. 가라앉는 나는 어린아이의 자아이고, 담담하고 당당한 나는 어른의 자아이다. 어린아이의 자아와 어른의 자아는 아직 내 안에서 행복하게 조우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과잉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지나치게 경박하거나 지나치게 냉철하게.
어린아이의 자아가 부끄러워질 때,문득 노인의 자아를 생각한다. 여러가지로, 아이와 노인에겐 공통점이 많다.

하나의 사태에 대해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마도 윤동주는 “쉽게 쓰여진 시”를 부끄러워 했을 것인데, 윤동주를 사랑하는 우리는 “쉽게 말하고 쉽게 단정하고 쉽게 규탄하는” 일에 대한 주저와 부끄러움이 없다. 온나라에 분노와 규탄과 고발이 넘치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터. 분노와 규탄, 그에 대한 무시와 조롱과 경멸이 넘치는 지금의 대한민국상황은, 뒤늦게 온 세기말적 상황처럼도 보인다.

본안재판을 향해,이제 수임료를 지급하고 진행하기로 했다. 최소 수천만원의 소송비용에, 패소할 경우 지급해야 할 수억원의 돈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나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도, 함께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납득가능한 답이 있다면, 내게 보내 주기를.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92172664142980

渦中日記 2015/2/17

8개월만에, 판매금지에 관한 가처분결정이 나왔다.
원고측의 두가지 신청중 출판판매금지는 원고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위안부할머니 접근금지신청은 기각되었다.
이렇게 나의 책은 오늘、”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하여” 본안이 이루어지기 전에 판매금지되게 되었다.

이시점에서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재판의 원고는 나눔의 집에 계시는 할머니 아홉분 뿐이다.

그 중 다섯 분의 할머니의 진술이 결정문에 있었다. 그런데 속아서 가거나 한 경우를 인용하면서도, 결정문은 전부 “일본군의 강제연행”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런 식의, 너무나 거친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은, 아마도 , “강제연행”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결과일 것이다. 책에 없는, 원고측이 멋대로 요약한 얘기를 내가 쓴 것처럼 정리해 둔 이 글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명예훼손이 될 수 없고 해결을 위한 방안제시”임을 인정한 부분도 있었다. 사실 그래서 이 결정문이 아직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결론
2014년6월, 100여곳을 허위라며 고발했다가 10월에 53곳으로 줄였던 원고측 삭제요구는 재판부에 의해 34곳으로 줄었다. 삭제하면 출판해도 좋다고 하지만, 물론 나는 단 한곳도 삭제 생각이 없다. 조금씩, 이들의 요구에 어떻게 답변했었는지 자료를 올릴 생각이다. 결정문에도 있는 것처럼, <시민사회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건전하게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3957406964506

渦中日記 2014/12/16

<노골적불평>을 포스팅하는 건 위로받고 싶어서인 게 내가 봐도 뻔하다. 그런데 실제로 위로를 받으면 많이 민망하다. “나 힘들어요!”를 한정된 관계가 아닌 만천하를 향해 외치는 일이란 옷벗고 거리에 나선 거나 마찬가지일 터. 페북에는 수많은 거리관계가 공존하기 때문에 드는 감정일 것이다.

그럼에도 명색이 <渦中日記>이니 재판의 <과정>뿐 아니라 심경과 상태도 남겨 두어야 맞다는 생각은 한다. 씩씩한 모습, 의연한 모습만 남긴다면 좋은 모습만 남기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역사교과서”와 뭐가 다를까. 역사도 좋아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건, 문학이 모든 악을 포함한 인간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보이기 위한 일기가 아닌 바에야, 역사 아닌 문학을 지향하고 싶다. 해피엔딩이 될런지 <옥중일기>로 이어질런지 알 수 없지만.

“인권”–“나의 본연의 삶을 누릴 권리가 필요해!”라고 외쳤더니 일본인친구가 아마존의 사진을 보내 주었다. 며칠 전부터 내 책이 <일중/태평양전쟁>분야에서 베스트셀러1위를 오르내리고 있다고. 음.책 팔리면 평화운동에 쓰겠다고 공언한 바 있는데. 우선은 나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 주셨던 김관기변호사님과 친구들에게 한턱 쏘아야겠다.

고발당한 날짜, 그 소식을 듣고 “목이 탄다 “는 것이 무언지 처음 알았던 그 날짜에서 꼭 6개월이 지났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18426094850971&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0/29

<총체적 우울>
87세의 일본인목사님이 만나자 하셔서, 종로YMCA에서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왔다.
오야마레이지 목사님. 제암리교회사건에 대한 사죄운동을 펼쳐 재건되도록 힘쓰신 분이다. 2012년여름, 와세다대학에서 강연했을 때 아드님 며느님을 대동하시고 와 주셔서 처음 만났는데, 이후 해마다 사진이 들어 있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 주신다.
이제 고작 두번째 만남인데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만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그 분이 자신이 겪었던 고충을 얘기하시면서 “당신이 옳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알게 될 거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단지 옳다는 것이 증명되기 위해서라면 너무 힘들다…고 순간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분이 나보다 삼십년이나 위이시고 목사님이라는 것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겐 지금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의 배경과 구조가 명료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걸 전부 말하지는 못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고작 고발장에 대한 반박이나 그 고발장의 생각을 지지하고 실제로 지원하는 이들의 사고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일 뿐이다. 그나마도 충분하진 않고, 나머지 부분은 내 안에 쌓인다. 내 손과 체력이, 혹은 이런저런 배려들이 그걸 다 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요일에 느긋한 내용의 포스팅을 했더니 한 페친이 가끔은 그런 글을 올리라 하셨다. 그러겠다고는 했지만 최소한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나는 근본적으로는 “총체적 우울”의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설사 변호사님 말씀대로 “즐겁게, 유쾌하게”싸운다 해도.

사태 이후 내가 페북에 쓴, 일상으로 돌아왔다던가하는 식의 글들, 다른 이의 포스팅에 다는 댓글을 포함해서, 밝다 못해 경박해 보일 수도 있는 글들은 어떤 의미에서 내겐 우울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 부분도 있다. 평온을 유지하기 위한. 내 몸을 그곳에 두고 싶은, 밝고 고요하고 깨끗한 영혼들에 대한 화답. 내가 변함없이,늘, 씩씩하기를 바라는 그들에게 전하는 안부.

그러나 나는 때로 씩씩하고 때로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건, 교보문고에 내 책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고 페친이 알려줘도, 기쁘기보다 그 책을 향한 적의를 동시에 느껴 버리는 식으로 내 영혼이 총체적 우울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정권, 세월호사태, 이웃과 사회의 이런저런 소식들. 2014년의 한국은 나에 대한 고발사태가 아니어도 우울할 수 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러니 우울에 짓눌리지 않고 또다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건 거의 의무일 지경이다.
누군들 그런 우울에 빠져 보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학대, 이웃과 상사의 경멸, 선생님과 친구와 애인의 무관심등, 태어난 이후로 우리는 수많은 노골적이거나 눈에 띄지 않는 폭력을 견디며 살아왔고 살아간다. 언젠가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

” 총체적우울” 속에서도 우울증에 빠지지는 않도록, 그럼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해 주는 건 사람이고 자연이고 문화-표현들이다. 과거와 현재의 또다른 삶들을 보여주는.
그 중에서도 사람들–생각하고 유보하고 사태를 밝은 눈으로 보려 하는 동시대의 그들을 나는 “지성”이라 부르고 싶다. 인류역사–폭력적인 사회에서 언제고 작지만 꺼지지 않는 빛이 되었던. 그래서 주변사람들에게 언제고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살아갈 힘을 주었던.

악의와 적의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재판에 이기는 것보다 그게 내겐 더 중요하다. 세상의 폭력은, 인간이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걸 모르는데서 일어난다.

오야마목사님이 당신이 30년 걸려 번역하셨다는 성경을 주셨다. 고발사태에 대해 모르고 오셨는데 이 시기에 성서를 받았다는 것이 우연같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오야마 목사님이 말을 잇지 못하는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해 주셨다. 신자는 아니지만 나도 눈을 감고 빌었다.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이 아름다운 가을날, 부끄러운 이야기를 고백하는 이유는, 내일이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이 그런 날.)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8696407466384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0/24

어제는 성균관대학에서 작은 세미나를 하고 왔다. <제국의 위안부>를 테마로 한 모임으로는, 출간 이후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한번 서평회를 열어준 것에 이어 두번째, 고발사태 이후로는 첫번째인, 내게는 역사적(!)인 초청이었다. 같은 성균관대에서 열린 다른 연구회에서는 작년에 내 책을 대상으로 논의했다는데 나를 부르진 않았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내겐 아주 중요해 보인다.

그저께, 두번째 재판이 있었다. 출석을 심각하게 고려했는데 변호사님을 비롯한 주변친지들의 만류도 있어 결국 나가지 않았다.
꼭 할머니들의 고성을 듣고 멱살을 잡히는 장면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다(원고측은 그걸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가능한 한 보지 않은 채로 있고 싶은 심경. 그게 강했다. 그리고 참석한 이들의 참관기를 들어보니, 그날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책을 출판한 탓에 졸지에 “피고”이자 “채무자”라는 호칭을 얻게 된 정종주대표가 이번심리에 맞춰 멋진 답변서를 제출해 주었다.
몇년전 어느날, 나는 그가 내 친구와 논전을 펴는 장면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과연 굴지의 법대출신답게 치밀한 논리력의 소유자라는 걸 알았다. (그 때 그와 논전을 펼쳤던 초등학교 동창과, 고발사태이후 페이스북에서 만났다는 아이러니.)

그의 글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때의 논전이 다시 생각나는, 섹시한 글. 태그되었지만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해서 다시 올린다.
정대표와 만난지 어느새 14년. 그리고 그와 나는 지금 함께 “피고”의 신분이 되었다..

<제국의 위안부> ‘사태’와 관련된 이런저런 일 때문에 그동안 알맹이 없음을 핑계로 안 하던 페이스북에 가입했으나 여전히 알맹이 없어 아무것도 없는 맹탕이었던 이곳에, 오늘 열린 ‘도서출판등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신청’ 2차 심리를 앞두고 재판부에 냈던 ‘채무자 정종주’의 진술서를 올린다. 원래는 초안이었으나, 제대로 채울 틈이 없었던.
어쨌든, 소박하나마, (‘단순가담자’^^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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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비 서 면

사 건 2014카합10095 도서출판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

채권자 이옥선 외 8

채무자 박유하 외 1

위 사건에 관하여 채무자 정종주는 다음과 같이 심문을 준비합니다.

다 음

1. 채권자 측의 ‘신청 취지’ 및 ‘신청 이유’에 대하여

(1) 채무자들의 대리인이 2014년 7월 8일자로 제출한 「답변서」 및 답변서와 함께 채무자 박유하가 제출한 참고자료 「도서출판 금지 가처분신청에 대해서」, 그리고 2014년 9월 3일자로 대리인이 제출한 「준비서면」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 답변을 원용합니다.

(2) 그중에서도 특히 채권자들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의 근거로 들고 있는 대표적인 표현, 즉 ‘매춘으로 매도’하고, ‘일본군/일본제국의 동지이자 협력자로 매도’하고, ‘성적 착취와 학대를 당한 피해자임을 부정’했으며, ‘허위사실’로써 채권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장은, 채무자 박유하의 진술과 준비서면을 통해 명백히 사실 무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320쪽인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108개소를 명예훼손의 근거로 적시하는 채권자들(의 대리인 혹은 지원자)의 주장은 심각한 오독이거나 어떤 특정한 정치적 의도 또는 이해관계가 개입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 백보천보 양보해서, 설사 채권자들이 이 도서의 내용에서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이 책이 법학 원론과 판례를 통해 확립된 ‘위법성 조각 사유’인 ‘진실한 사실’을 담고 있고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책이라는 점 또한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채권자들의 신청은 기각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출판의 경위에 대하여

본 채무자는 출판인입니다. 따라서 먼저 이 도서를 출판하게 된 경위, 그리고 채무자 박유하 교수의 문제의식에 대한 본 채무자의 이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본 채무자가 저자인 채무자 박유하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5월경의 일입니다. 2년 동안의 일본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 외국인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출판사 (주)사회평론의 편집주간 직을 맡은 본인에게 처음 주어진 원고가 박유하 교수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초고였습니다. 저자는 게이오(慶應) 대학과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했고, 귀국 후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웅진출판)를 기획-번역하고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같은 일본의 지성을 소개하는 작업을 해온 저명한 일본/일본문학 전문가였습니다. 그 책은 본 채무자가 편집을 맡아 2000년 8월 1일자로 출간되었고,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일본은 없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들의 허실에 대해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한 책으로서 언론의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사직한 이후인 2004년 4월에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역시 같은 (주)사회평론에서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2) 본 채무자는 2001년 말에 출판사 ‘뿌리와이파리’를 창립했고, 2005년 9월 30일자로 박유하 교수의 전작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의 출간은 본 채무자에게는 뿌리와이파리의 ‘동아시아(한․중․일) 민중의 진정한 상호이해와 공동의 미래를 향한 우호협력’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관심들은 『공자의 식탁―중화요리 4,000년의 문화사』,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향하여』(2002), 『민족은 없다』(2003), 『한시와 일화로 보는 꽃의 중국문화사』,『해삼의 눈』,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옥황상제에서 서왕모까지, 도교의 신과 신선 이야기』, 『미녀란 무엇인가―중․일 미인의 비교문화사』(2004), 『일본불교사』(2005), 『돈가스의 탄생―튀김옷을 입은 일본근대사』, 『자이니치(在日),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요시카와 고지로의 공자와 논어』(2006), 『한일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히스토리』(2008),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요시카와 고지로의 두보 강의』(2009), 『일본국헌법의 탄생』(2010), 『근대 도시공간의 문화경험―도시공간으로 본 일본근대사』(2011) 등등의 책을 관통하며 ‘뿌리와이파리’에서 출간된 도서 130여 종의 중요한 한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자 박유하 교수는 『한일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히스토리』의 지은이인 한일 지식인들의 모임 ‘한일, 연대 21’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3)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는 한일 간의 ‘화해’를 가로막고 해묵은 갈등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가장 첨예한 현안 네 가지에 대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비판적인 제언을 한 책입니다. 이 책의 출간 ‘경위’는 간단합니다. 출판인인 본 채무자가 친분이 있는 저자에게 좋은 책을 한 권 써달라고 부탁했고, 그 부탁이 마침 저자가 관심을 가진 주제, 즉 한일 간의 ‘화해’를 위해 한국/일본의 시민과 지식인이 한국/일본 사회의 일반화된 ‘이미지’와 인식틀을 깨고 함께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 싶다는 의지와 만나 원고를 쓰고 편집해서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대단히 논쟁적인 주장을 편 까닭인지 이 책은 한국에서는 3,000부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다음해인 2006년의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었고, 일본어판(헤이본샤平凡社 발행)은 아사히(朝日) 신문사에서 수여하는 권위 있는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논단상’을 한국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최초로 수상하는 등 그 문제의식과 ‘용기’를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4) 다만,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가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가 워낙 민감하고 의견 대립이 첨예한 데다가, 저자의 주장 또한 대단히 근본적이고 (한일 양국의 기존의 인식과 주장들에 대해) 비판적인 까닭에, 한국의 이른바 진보와 보수 진영에서도, 일본의 진보와 보수 진영에서도, 다양한 찬성과 반대의 주장들이 나오고 비판-반비판과 논쟁이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5) 그런 가운데, 저자 박유하 교수가 연구년 등으로 미국과 일본에서 체류하며 연구하고 있었던 2011~12년 사이에도, 교과서 문제,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문제, 독도 문제(바로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가 다루고 있는 현안들입니다.) 등을 둘러싸고 한일 관계는 더욱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동안에도 일본 아사히 신문사의 웹논단 ‘론자(論座)’에 일본인 독자들을 향해 ‘위안부 문제’ 관련 글(이 내용도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 약간 수정되어 실려 있습니다.)을 연재하는 등 한일관계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오던 저자는 ‘위안부 문제’를 다시 한번 총체적이고 구조적으로 조명하고 그 해결책을 한일 양국의 독자들과 함께 모색하는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본 채무자에게 연락을 해왔고, 본 채무자는 원고를 보내달라고 응답했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5~9쪽의 ‘서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6) 2012년 11월경에 초고를 받은 본인은 민감한 사안을 다룬 책이기에 본 채무자가 직접 편집작업을 맡기로 했고, 저자가 서너 차례에 걸쳐 원고의 구성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보충하는 과정에서 긴밀하게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2013년 7월 22일자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출간했고, 8월 초순에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국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에 큼직하게 소개되었습니다. [이하, 경향-동아-한국일보 서평기사 링크: 여기선 삭제함]

(7) 이 책의 문제의식은 책 뒤표지의 글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하여!

위안부 문제는 왜 20년이 되도록 풀리지 않는가
이 책은 그 원인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그 ‘복잡한 구조’를 해부한다

● ‘강제로 끌려간 20만 명의 소녀’라는 인식은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업자의 소거, 예외적인 사례의 일반화된 수용에 의해 만들어진 상이다.
● ‘위안부’의 불행을 낳은 것은 식민지배와 가난과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고,
그들의 체험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 위안부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의식되지 않았던 ‘죄’와
이미 존재하는 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구별해서 물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국가의 세력확장)의 문제로 다루었다. 근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생각해본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며, 구체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든 것은 ‘냉전’적 ‘좌우갈등’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의 또 하나의 결론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모두가 함께 보는 일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풀고 제국과 냉전이 남긴 문제들을 함께 넘어설 수 있는 ‘동아시아’를 상상하고 기대하면서 이 책을 썼다.”

본 채무자는 저자 박유하 교수의 문제의식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며, 저자의 학자적 양심과 식견, 한일 간의 진정한 상호이해와 ‘우애와 평화의 동아시아’라는 공동의 미래를 향한 열정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책이 ‘위안부 문제’라는 민감한 사안을 다루고 있으며, 20년 동안 쌓여온 한일 두 나라의 다양한 인식 및 이해관계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논쟁적인 글이라는 사실 또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앞장서서 많은 성과를 거둔 한편으로, 현재의 우리 사회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주도적으로 만들어왔고 지금의 운동을 잘못 이끌고 있(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이 책이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대협을 중심으로 한 반발이 있으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의 온갖 문제들이 그렇듯이 ‘위안부 문제’ 또한 비판과 반비판, 토론을 통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제대로 이해하고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에 관한 공론장의 생산적인 논쟁을 통해서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생산적인 토론과 논쟁을 위한 한 학자의 충정과 거기에 대한 본 출판인의 공감의 산물입니다.

3.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그리고 공론장에서 더욱 심층적이고 폭넓게 이루어져야 할 토론에 대하여

(1)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채무자 박유하 교수와 도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은 결코 채권자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할머니들이 이미 아흔 살 안팎의 고령에 이르렀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도 많은 터에 20년이 되도록 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과 반목이 이어지고 심지어 더 악화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의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구조를 규명하고 한일 양국과 두 나라 국민들이 어떻게 미래지향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고찰한 대단히 귀중한 연구-출판물입니다.

(2)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되짚고 진정한 해결의 길을 모색하면서,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사이’에 서서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운동과 움직임들을 평가하고 비판해가며 공통의 인식틀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고착화된 ‘주류의 인식과 이미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또한 피하지 않습니다. 학계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론장의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 도서의 출간 이후에 나온 여러 신문 및 논객, 독자들의 큼직한 기사와 서평들은, 저자의 주장이 우리 사회/독자들의 일반적인 인식에 비추어볼 때 ‘불편’할 수 있고 ‘자극적’일 수 있지만 공론장에서 토론되어야 할 ‘의미있는 문제제기’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류’의 비판과 감성적 반발이 쏟아지기는 했지만, 이 ‘가처분신청’ 사태 이후에도 저자의 견해와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의미있는 문제제기’라는 평가는 적지 않았습니다.

(4) 이 ‘가처분신청’이 이루어진 직후인 2014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 간의 공방의 경위’라는 제목의 ‘고노(河野) 담화 검증 보고서’ 결과를 발표했고, 8월 5일자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전쟁 때 제주도에 가서 여성을 강제로 끌고 왔다’는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된 사실과 관련하여 그 증언과 관련된 이전의 기사들을 취소했습니다. 식민지지배와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전반적인 사안에서 진보적인 아사히 신문은 이후 우익 세력과 산케이 신문, 요미우리 신문 같은 우익 신문의 공격을 받아 존폐가 거론될 정도로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열려왔던 정례 한일 국장급 논의 또한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됩니다. 이런 작금의 상황을 단순히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는’ 일본의 우경화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70년, 한일 국교정상화 50년을 맞는 2015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지향적인 공동의 우호협력관계를 구축해나가야 할 두 나라의 정부와 국민들이 ‘위안부 문제’를 더욱 폭넓게, 더욱 깊이 있게 고찰하고 두 나라 안에서, 그리고 두 나라가 함께 더욱 활발하게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할 것입니다.

(5) 거듭 말씀드리지만, 채무자 박유하 교수와 도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은 결코 채권자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지 않습니다. 형법 제309조 1항의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신문, 잡지 또는 라디오 기타 출판물에 의하여 제307조 1항의 죄를 범한 자’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방할 의사도 목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307조 1항과 2항의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 채권자들(의 대리인)이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느꼈다고 하더라도, 제310조에 규정된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 해당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 그러므로, 본 도서와 저자인 채무자 박유하 교수는 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을 이루는 헌법상의 학문의 자유(제22조 1항), 언론-출판의 자유(제21조 1항), 표현의 자유를 보호받아 마땅합니다. 제21조 3항에서 규정하는 바와 같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이 ‘가처분신청’, 그리고 채무자들의 반박 혹은 입장 표명조차도 거의 없이 쏟아진 관련 언론 보도들이야말로 위 헌법상의 자유들을 위축시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7) 결론적으로 본 도서의 내용과 주장은, 사실과 해석, 주장과 비판 모두 학계와 국민/독자들의 공론장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맡겨져야 할 사안이지, 결코 법정에서 다툴 바가 아닙니다.

2014. 10. 21.
채무자 정종주

서울동부지방법원 제21민사부 귀중

작성일: 2014.10.24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3395771687337

渦中日記 2014/10/21

일제시대때, 나카노시게하루라는 일본작가가 쓴 <비오는 시나가와 역>이라는 시는, 활자화되면서 일부가 ***** 로 지워져 발표되었었다. 천황에 관한 표현이 당국의 검열에 걸렸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2014년 가을, 비슷한 일이 내게도 일어나려 하고 있다.

오늘, 원고측이 “고발취지”를 바꾸어 다시 신청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새로운 고발취지는, 나의 책이 “공동선”에 반하므로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칠 것이라는 내용. 그러므로 판금해야 하지만, 안된다면 책의 일부를 삭제하도록 해 달라고 쓰여 있었다.
원래는 9월이었던 재판날짜를 원고측이 연기한 이유는 바로 그런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결국, 여름내내 준비했던 나의 반박자료는 무효화되었다.
“전쟁범죄를 찬양”했다고까지 쓰인, 법무법인 세곳의 8명의 변호사이름이 열거된 소장을 보면서 오늘 나는 다시한번 4개월전의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비판했던 내용과 각종자료까지 나열된 수십장의 준비서면은 분명 학자들이 깊숙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내용이었다.

이제 이 싸움은 위안부지원단체와의 싸움을 넘어 “국민정서””국민감정””국민상식”을 등에 업고 나를 친일파/매국노로 몰아 처벌하려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될 것 같다. 싸움은 두렵지 않지만, 역사를 획일화하고 전유하려는 그들의 투지가 두렵다.

2014년 대한민국은, 자신과 다른 생각은 “불온” “불경”으로 간주하고 검열해 처벌하려 한다. 대통령은 국가체제를,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은 국민을 앞세우면서.
그러나 양쪽 다 국가권력에 기대고 있으니 분명 대한민국은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오늘, 비오는 가을저녁이 슬픈 이유.

작성일: 2014.10.2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1782835181964

渦中日記 2014/10/20

오늘도 재판관련 작업으로 하루를 보냈다. 언론에 보내기 위한 보도자료를 만들었고, 언론중재위에 올렸던 신청서를 보완했고, 재판진행상황을 보기 위해 <전자소송>사이트에 가입했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언론에 보도자료를 보냈지만 얼마나 보도해 줄런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가장 빠르고(), 어쩌면 유일한 보도매체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페이스북에 노트로 올려둔다.

오랫만에 비가 왔는데 너무 일찍 그쳐 아쉽다. 내일도 비가 왔으면 좋겠다.

<My favorite musics>
ryuichi sakamoto – rain(live)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1324815227766

渦中日記 8/10

비바람이 친다. 보통때 같으면 그 풍경에 그냥 자신을 내맡겼을텐데 오늘은 감상에 빠질 수도 없다. 광화문에서 단식투쟁할 이들의 곤혹스러움도 함께 떠오른다.

재판자료준비를 하면서 우울한 건, 책을 쓰면서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들까지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쓴 얘기가 부정, 혹은 곡해당하니, 소송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굳이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자료까지 사용해야 한다. 그런 아이러니 앞에 놓이게 된 것이 많이 우울하다.

사진은, 위안부에게 의뢰받아 모르핀 외 군용약품을 반출하려다가 “영창20일”의 처분을 받았다는 자료. 1941년, 일본 육군군인/군속들의 <非行표>.
수많은 일탈행위들 속에서, 수많은 드라마를 본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635571639134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