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1)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한일관계가 빈사상태다. 1965년에 수교를 회복한 이후 “사상최악”이라는 표현을 쓰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해마다 열어왔다는 한일경제인 회의가 연기되었고, 지금과 같은 정황이 이어지는 한 6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G20 회의에서 한일수뇌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크지 않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대부분 그런 현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건 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칠한 일본의 태도를 적반하장이라고만 여긴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건 일본의 정치가들이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대통령의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틀렸다. 대통령도 이제는 한일관계회복을 바라고 있는 듯 한데, 분석이 옳지 않은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6년전,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책을 통해 현재와 같은 정황이 닥칠 수 있음을 예고한 적이 있다. 나의 문제제기는 자신들의 운동과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 이들에 의해 법정에 갇히는 사태를 맞았지만, 그 책은 오로지 오늘과 같은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쓴 책이었다. 지금의 한일관계는 단적으로, 나의 입을 막으려 한 이들과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만든 것이다.

작년가을에 신일철 징용판결이 나온 이후 한일관계는 이전에 비해 훨씬 자주 삐걱이고 있지만,그런 양국갈등의 연원에는 위안부문제가 있다. 일본이 참을성이 없어지고 때로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곤 하는 것도 모두 위안부문제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국 쪽에도, 위안부문제를 4반세기 겪으면서 ‘사죄하지 않는 일본’관이 정착되어 버린 탓에 불신이 가득하다.

말하자면, 현재 한일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각각의 문제 이전에, 오랜 갈등의 세월을 겪으면서 쌓여온 불신과 체념 쪽이다. G20이 일본에서 열리는데도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과 수뇌회담일정을 일본이 잡지 않고 있는 것도 그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른바 ‘한일관계’ 전문가들과,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 전문가 혹은 지원자들은 사실 접점이 거의 없다. 전자는 대개 ‘국익’을 언급하며 앞으로 나아가자는 제언을 하고, 후자는 ‘국익보다 개인’이라면서 ‘피해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그 양쪽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거의 없고, 그 점 역시, 문제해결을 방해하는 이유중 하나다. 대통령이 취임초기와 달리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는 발언과 행동을 취하게 되었음에도 실질적 변화가 없는 건, 실제정책은 후자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대통령은 그 양쪽이 합쳐져 분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일간 갈등을 빚고 있는 각각의 문제들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하지만, 한쪽은 정치경제문제를 앞세워 생각하느라 문제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른 한쪽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한 발언권을 독점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론 그 그 독점이 옳은지 여부를 따지기 위해 독자적인 조사와 취재로 ‘발언의 독점’양상의 내부를 제대로 들여다 보려는 언론도 없다. 언론들 대부분은 그저 전자와 함께 탄식하거나, 그저 후자와 똑같은 목소리가 되어 ‘운동’에 참여한다. 한일간갈등문제가, 수많은 언론의 참여 덕분에 전국민이 아는 문제가 되면서도 정작 그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은 늘지 않고 인식은 천편일률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최근 들어 전서울대 교수 이영훈 교수가 열정적으로 위안부문제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아마도 진보쪽 사람들은 이교수의 강의를 그저 일본우익과 동일시하며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위안부문제 담론을 관장해 온 이들은 이영훈교수의 강의에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과의 접점을 찾는 일은, 한국내부의 접점을 찾는 일도 되어야 한다.

사실 90년대엔 위안부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했던 김대중시대를 맞아 2000년대 초반은 수교이후 최고조로 한일관계는 좋았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때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에 진 정부가 문서들을 공개하게 되고, 개인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금을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다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국정부는 다시한번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법을 만들어 보상했다. 징병/징용자는 물론, 위안부할머니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일부 위안부할머니들과 지원자들은 같은 무렵에 이번에는 외교부를 상대로 또다른 소송을 일으킨다. ‘정부가 위안부문제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소송이다. 5년이 지나고 2011년 여름에 정부-외교부가 패소했는데, 같은 해 겨울에는 이른바 ‘수요데모’ 1000회를 맞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들어서게 된다.

90년대에 일어났으면서도 국민적인 관심을 받지는 못했던 위안부문제가 국민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운동의 흐름이 바뀐 건 이때부터다. 이 무렵부터 이른바 ‘평화나비’라 불리는 대학생조직의 포스터가 대학마다에 나붙기 시작했고, 서울시후원으로 이런저런 이벤트를 기획하고 수요집회에 참여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교등학생과 초등학생까지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패소한 외교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위헌’이 되지 않도록 위안부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관여방식과 내용은 맥락상 하나부터 열까지 지원단체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위안부문제는 본격적으로 ‘외교’문제이자 ‘정치’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정부대상으로 소송까지 걸어 위안부문제를 외교문제로 만들었던 지원자들이, 이제 와서 위안부문제는 ‘정치/외교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라고 주장한다. 정치경제 중심의 국가간문제 따위가 아니라,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우선적으로 나서야 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 자체로는 옳은 주장이지만 그 주장은, 위안부문제를 앞장서서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이 바로 지원자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