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역사의 사법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그런데 지금, 위안부문제와 똑같은 일이 징용문제에서 벌어지려 하는 중이다. ‘징용’자체에 대한 공통인식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태인데도(도노무라 마사루의 <조선인강제연행>, 이우연의 논문등도 참고될 필요가 있음에도), 사법부는 역사학자의 학문성과는 배제하고 법률가들의 주장에만 호응해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위안부문제의 경우, 지원자들은 사법부의 권위를 빌려 행정부를 움직였고, 국민의 세금과(정부지원/지자체지원) 국민의 기부금을 사용해 국민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최봉태변호사는, 작년 10월말에 나온 대법원징용판결의 흐름을 만드는 데 기여한 핵심인물이자, 2006년에 정대협과 함께 위안부문제에서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일으킨 헌법소원의 주역이기도 하다. 작년 가을 판결이후, 그는 여러 언론에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며 ‘정부가 양국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주장 중이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 4반세기의 ‘법’의 관여가, 역사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검증이다.
‘법’이 갈등해결의 최종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 인류의 오래된 습관이자 약속이다. 법은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룰‘로서 작동하고, 그런 의미에서 때로 인권보호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법‘의 관여는 그 자체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곧 역사문제갈등의 최종판단주체가 꼭 법률가이거나 법정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사실 한일양국은 그 점을 알고 있었고, 역사문제에서 양국인식의 접점을 찾기 위해 함께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만들어 가동시킨 적도 있다.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학자들조차 접점을 찾을 수 없었던 문제를 법정으로 보냈다는 것은, 상대의 주장에 대한 경청과 접점찾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목소리 높여 외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역사공동위원회의 실패는 인선에 있다. 학자들 중에도 상대편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접점을 찾거나 업그레이드된 비판으로 논의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이들은 적지 않다. )
하물며 법정에서도 역사문제를 판단하려면 학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법정은 결국 ‘학술적’ 공방이 된다.그렇다면,역사를 둘러싼 학술적 논쟁의 장이 법정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구나, 역사학자조차도 자신의 생각을 변함없는 정언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학문이란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의 사태에 관한 인식에서 당사자와 주변인들 ‘모두가 완전히’ 일치하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능한 건 그저, 관계자들 최대다수의 ‘합의점’을 찾는 일일 뿐이다. 실제로 법정에서도 ‘합의’라는 이름의 접점 찾기가 곧잘 이루어지는 건 이미 잘 알려진 대로다.
법정이란, 어떤 사태를 두고 예스와 노를 명백히 해야 하는 공간이다. 예스인지 노인지에 대답하는 일이란 문제를 한없이 단순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화시키는 이유는, 법정에서는 오로지 기존의 ‘법’을 어겼는지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법을 위반한 ‘범죄’로 간주되어야만 처벌가능한 ‘법’의 성격상,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이들 역시, 그 때문에 위안부동원과 위안소라는 장소가 ‘불법‘여부인지에 주목하면서 기존의 ’법‘을 어겼다고 강조해왔다.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강제연행’이라고 말해 왔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물론 그들은 처음엔 위안부동원을 군인에 의한 강제동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이 애매해지자, 이번에는 강제성을 위안소에서의 생활로 옮겨 설명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후에 다시 보겠지만 이미 성립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이 말은 위안부문제에서 일본이나 군의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강제성’강조가 위안부문제를 국가와 국가간의(민족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일본인위안부‘가 잊혀진 이유는 거기에도 있다. ‘일본인위안부’란 당연히 ‘일본군(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에 의구심을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안부문제가 ‘인권’문제라면 당연히 ‘일본인위안부’문제도 주목받았어야 했음에도, 일본인위안부는 그렇게 해서 같은 4반세기동안 철저히 잊혀졌다. 다름 아닌 ‘인권’문제를 직접 다루는 이들에 의해서다.
일본인 위안부가 주목받지 못한 건 다른 이유도 있지만 ‘위안부문제의 사법화’에도 있다. 위안부문제가 민족간 문제이기 이전에 남녀문제이자 계급문제라는 인식을 미처 갖지 못했던 ‘법지상주의’는, 많은 이들이 위안부문제를 오로지 <일본군이 ‘타국’여성을 노예처럼 끌어간 국가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역사의 사법화’는 때로 순기능도 한다. 하지만 위안부문제의 경우, 문제자체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정황에서 과거의 ‘전쟁범죄’로만 인식되면서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를 배제했다.
징용문제 판결을 두고 대통령과 외교부가, 사법부가 하는 일이니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이런 과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대통령 자신 변호사로서 ‘역사의 사법화’에 관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의 최봉태 변호사에 따르면 문대통령은 2000년에 부산에서 일으킨 최초의 징용자소송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사반세기에 걸친 ‘역사의 사법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사법화’는 또다른 모순을 만들면서 동시대뿐 아니라 차세대의 평화마저 위협하게 것이다. 그 조짐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의 사태에서의 정의를 판단하는 능력은 법관들에게만 있지 않다. 더구나 사법이 때로 거꾸로 폭력이 되어 온 역사는 멀리 가지 않아도 냉전시대의 인혁당사건이 보여 주었다.
‘역사의 사법화’의 세월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지원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당사자주의가 중요하다면 더더욱, ‘역사의 사법화’의 주역이었던 대리인/대변인들이 아니라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목소리를 내 온 ‘당사자’는 실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사법공간은, 대립되는 의견의 한쪽 손을 들어주는 일로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도 ‘법’이란 역사문제를 관장하는 장으로 최적의 도구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역사문제가 정치문제이자 외교문제가 되어 국민모두의 문제가 된 이상, 그 해결은 당사자들은 물론, 해당국민들이 함께 납득 가능한 해결이 되어야 한다. 접점을 찾기 위한 모든 과정은 내외부간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어야 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힘으로 제압하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의 목표는 동시대는 물론 차세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