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 1. 역사의 사법화 (2)

1.역사의 사법화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를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지원자들, 그 중에서도 ‘법’전문가인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이 해야 할 사죄가 ‘법적사죄’라는 주장을 해 온 것도,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온 것도 법학자/법률가들이다.

그런데, 한시대의 역사가 야기한 문제에 대한 사죄가 왜 꼭 ‘법적’사죄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없었다. 자세히는 따로 쓰겠지만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강제연행-국가책임’이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이 왜 ‘법’을 기반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없었다는 얘기다.

일본이 90년대 이후 여러번에 걸쳐 사죄와 보상을 실시하며 위안부할머니들의 목소리와 지원자들의 요구에 대답했음에도, 그런 사죄는 의미가 없다면서 국회에서 ‘배상’법을 만들어서 사죄/보상해야 한다는 게 ‘법적사죄’의 내용이다. 

그런데 일본국회의원들 중 일부는 90년대에서 2000년대초반까지, 그 배상법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이 아닌데 왜 국가범죄인가?’ 라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그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반발이 생겼는지 분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그 반발을 경청하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이후 있었던 건, 자신들의 주장을 돌아보고 일본을 움직이도록 만들 더 날카로운 비판방식모색이나 새로운 접점찾기가 아니라, 실질적 내용을 바꾼 ‘강제연행’주장과, ‘죄의식도 책임의식도 없는’ 일본에 대한 비난, 그리고 소송이었다.

2015년말에 있었던 ‘한일합의’에 지원자들이 반대한 이유도, 실은 그것이 ’법적‘사죄가 아니었다는, 그 단하나의 이유에 있다. 나는 그 주장의 문제점을 이미 논한 바 있지만, 이 글 후반에서 다시한번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한다. 

사실, ‘위안부를 매춘부라 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 역시 나에 대한 고소의 표면적 이유일 뿐, 고발자들이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고소한 이유는 ‘박유하의 활동이 자신들의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이 내용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고소장에 명확히 쓰여 있다. 덧붙여 두자면, 그 터무니 없는 주장을 담은 보고서를 만든건 로스쿨 학생들이고, 그렇게 읽도록 이끈 것도 변호사였다.

위안부지원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고소하고 승소하여 정부를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앞에 썼지만, 문제해결수단으로 사법부나 국제재판소가 쉽게 이용되는 건 한국만이 아닌 듯 하다. 그런 현상을 두고 어떤 이는 “정치의 사법화”“외교의 사법화” 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지금 더 심각한 건 ‘역사의 사법화’ 현상이다.

20세기말에 일어나 21세기로 이어진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건 학자 이상으로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실제로, 위안부문제담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논리를 만든 것도, 역사학자 이상으로 법률가들이다. 그 선두에 섰던 건 도츠카에츠로라는 일본인 변호사였다. 그는 80년대부터 인권문제를 유엔에 어필하는 활동을 해 왔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어필하고 싶어했던 정대협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에 따르면, 지금은 일반화된 ‘성노예’라는 단어도 그가 만든 단어였다.

90년대 이후 정대협 역시 유엔을 향해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나(쿠마라스와미도 법학자다) 맥두걸 보고서가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든 건 이들 일본인변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변호사협회자체가, 단체로서, 조직적으로 일찍부터 이 문제와 마주해 왔다.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등 ‘피해자’문제에 일찍부터 관여해 온 최봉태변호사가, 자신이 피해자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가 일본유학 당시 일본인 변호사들이 열정적으로 이 문제를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본 것에 있다고 한 말은 그런 정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위안부문제가 대두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인 1994년에 국제법률가위원회가 보고서를 내놓은 것도, 이들 일본법률가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현시점에서의 시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끼친 건 역사가나 증언자 이상으로 법학자/법률가들이다.

법률가들을 역사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만든 건 ‘동경재판 혹은‘ 뉴른베르크재판’이었다. 말하자면 과거의 역사에서 일어난 문제가 법정에서 ‘처벌’된 것을 아는 이들이, 새롭게 맞닥뜨리게 된 과거문제 역시 그와 비슷한 문제로 이해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처벌’하려 했던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위안부문제를 ‘전쟁‘중인 적대국가 사이에 일어난 일로만 이해하고, ’전쟁범죄‘로 이해했다. 이들의 보고서는, 동시대에 일어난 아프리카/동유럽의 내전에서의 부족간강간납치등 여성들의 피해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자들이 위안부문제를 그런 문제들과 같은 문제인 것처럼 어필했기 때문이고, 유엔인권위원회나 국제법률가위원회는 그런 의견을 받아들여 동시대비극과 위안부문제를 동일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미 위안부동원은 공창제를 이용한 간접적 동원이었음이 연구되었고 발표되고 있었다(김부자, 송연옥., 야마시타영애등). 하지만 그런 ‘학문’내용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유엔에 제출된 흔적은 없다. 물론, 위안소에 조선인 대만인 뿐 아니라 일본인도 많았고, 오히려 일본인여성들이 위안부제도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도 강조되지 않았다. 

기존학자들은 1932년 상하이에서 처음 위안소가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미 청일전쟁때 한반도에는 군인을 위한 일본여성들이 있었다. 러일 전쟁 직후에 1910년에 만들어진 진해의 일본군기지가 ‘위안’을 의뢰한 여성들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여성들이었다.

일본과 조선은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화’를 매개로 한 관계였다. 좋든 싫든 조선은 이 시기 ‘일본제국’치하에 놓였으니 일본과 국가단위로 적이 되어 싸운 중국과는, 만주국을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관계가 달랐다. 따라서 조선인 위안부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고찰해야 하는 문제였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제목에 굳이 <제국><식민지지배>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상호관계를 정확히 보아야만 정확한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판만이 해결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이다.

<제국의 위안부>이후, 20년 이상 ’전쟁범죄‘ 라는 말만을 사용해 왔던 연구자/활동가들은 ‘전쟁책임’이라는 단어대신 ‘식민지지배책임’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은 나의 책을 법정으로 보낸 이들에게 동조해 <제국의 위안부>를 계속 비난중이다.

90년대이후 한일갈등문제에서 ‘법’관계자들은 분명 선의와 열정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써 왔다. 그리고 그 노력은 충분히 평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활동은 안타깝게도 4반세기가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법률가들에 의해 사법부가 그들의 손을 들어줬고 그에 따라 정부까지 나섰음에도. 선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세상의 오해와 대립을 증폭시키고 ,결과적으로 갈등을 유지시켰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