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Vladimir Tikhonov (박노자)선생께

이소영

https://www.facebook.com/duckling.hyeon?fref=ts

 

2월 18일 포스트

Vladimir Tikhonov 선생님께,(다 쓰지 못했는데 실수로 올라갔습니다. 수정한 글도 다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박노자 선생님 글을 읽으며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한 여성주의자로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 식견이 깊지도 넓지도 못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의 글이 저를 계속 아프게 하여 망설이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 물음이랄까 주장이랄까… 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지배자가 아닌 피해자 위주의 역사해석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노동자, 장애인, 소수인종, 여성 들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필요한 일이며 <제국의 위인부>는 그 중 피해당사자였던 여성의 입장에서 기존의 역사 틀을 깨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돼 금서?!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전쟁시 여성이 겪었던,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금에도 끝나지 않는, 고통받는 여성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주류의 입장과 달라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마치 주류에서 제외된 그 여성들 처럼 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피고인’을 보면 “네가 정숙하지 못하여 당한 일이다”라는 비난을 받는 강간피해자가 나옵니다. 네, ‘가난하고 교육 받지 못한’ 그녀는 정숙하지 못하게 놀았고 남자들을 꼬셨습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끼부린 것은 맞지만 그것이 강간 당해도 좋을 일은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좀 거칠게 얘기하자면 <제국의 위안부>는 ‘피고인에 나오는 주인공’같은 여성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숙한 민족의 딸도 그렇지 않았던 여성들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겁니다. 이 것이 정대협 피해자 할머님들을 모욕하고 명예훼손 했다는 것인데, 저는 반대로 정숙하지 못했던 우리의 딸들을 배제하는 이긴 자의 역사 속에 있는 분들이 부리는 횡포에 할머님들이 속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툭하면 “우리는 동두천에서 몸 파는 여자들이랑 달라. 우리는 강제로 끌려간 거라구”하시는 할머님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문제가 많은, 차별을 잉태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할머님들은 역사의 당당한 주체이며 활동가이며 투사라고 생각하기에 이 발언에 매우 유감이며 반드시 비판 받아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두천에서 몸파는 여성들도 가난하고 배움의 기회가 없어서 그것 밖에 할 수없는 피해자들입니다. 그녀들에겐 선택의 기회가 있었고 할머님들은 강제로 끌려갔기에 선택의 기회가 없었으니 둘은 다르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위안부할머님들처럼 양지에서 자신의 피해를 말 할 기회조차 없는 이 여성들은 그야말로 피해자 중에 피해자입니다. 제 발로 기기촌으로 걸어들어가 양공주가 됐다해서 자발적선택인가요?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도 이렇게 각자의 사연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일본에 팔아넘겨 그렇게 된 경우, 돈 벌러 간다고 생각했다가 그렇게 된 경우, 그야말로 강제로 끌려간 경우, 모두 제국주의 전쟁을 벌인 일본의 구조적 범죄의 피해자이며 이런 기록들을 적은 책이 <제국의 위안부>인 것입니다. 박노자 선생님의 의견과 전혀 다르지 않은데 왜 책이 금서가 되는 것이 다행이라는 것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쟁성범죄는 정숙한 여성만을 할퀴고 가지 않습니다. 사회가 인정하는 ‘정숙’의 틀을 벗어났다 해도 피해자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입닥쳐’라는 강요를 받는 피해자. 이들의 얘기를 누락하는 것은 말 그대로, 역사가 강자의 요구대로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없는 여자, 미친 *, 위안부피해자 여성처럼 하루에 몇 번 씩 강간 당해야 할 *”등등의 욕을 먹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야 말로 아직도 그렇고 그런 여성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여자는 안되고 남의 여자라고 느껴지면 마구 학대하는 그런 사회의 반증, 짐승들의 시간입니다.

(박노자 교수의 본글) 우리 사회는, 아쉽게도 대개는 력사를 피해자 위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김홍집은 여전히 개혁가고 유길준은 여전히 계몽가지, 둘이 일군과 공모하여 동학농민 학살을 지저른 범죄자라는 시각은 아직도 주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건국”을 이야기할 때에 그 “건국”의 밑바탕에 깔린 제주4.3부터 시작해서의 여러 학살들을 우리는 보통 의식하지 않습니다. “산업화” 의식에서도 그 과정의 피해자 (저임금 고강도 착취를 당한 노동자)를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니고 그 “성공”(?)부터 의식하게 되고, “한미동맹”을 생각할 때도 그 “동맹”에 희생된 이들 (“양공주”부터 기지촌과 그 주변의 주민까지)을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공주의/개발주의 사교의 광신자들은 대개 “피해자”에 무관심한 특징은 있죠.

그나마 위안부라는 미증유의 범죄를 우리가 피해자 위주로 의식해야 한다는 게 통념화되고, 이 통념이 이런 판결에 반영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일본과 한국, 미국 등의 여타의 성폭력 국가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돼 철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배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히 조선전쟁 시절의 미/한국군 “위안”시설 운영과 월남 파병 시절의 한국군의 각종 성폭력도 우리에게 “우리 력사의 가장 큰 치부”로 옳게 의식되는 것은, 차후 이런 일들의 재발의 방지에 가장 필요한 조치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한국”도 “일본”도 “한일관계” 그 자체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은 (주로 빈민층 등 피착취계급에 속하는) 녀성에 대한 국가/군대의 조직적 성폭력, 즉 국가/군대의 범죄성, 그리고 그 범죄성에 대한 우리 의식입니다.

 

김도언, 법원 가처분 결정을 보며

김도언

https://www.facebook.com/doeon.kim.58

 

2월 18일 포스트

1.

우리나라는 20세기 초엽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많은 고통을 겪은 나라다. 명백한 피해자다. 그걸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피해자의 상처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 국민 대부분은 국가주의의 어떤 의도적인 전략 때문에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 ‘머물러 있는 상태’인 것 같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그편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우리에게 가해를 한 상대에게 정신적으로 짓눌려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전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자로서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피해망상’이라고 한다.

2.

어떤 국가든 정치권력자들은, 국민 혹은 민족의 피해망상을 자극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보전한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도 예외 없이 자신의 인기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질 때면 가장 상기하기 쉬운 민족적 상처를 끄집어내 감정적으로 자극하고 그 관련국에 강성발언을 하는 것으로 인기를 만회하고는 했다. 우리의 경우, 그 상대는 일본이나 북한이다. 일본이나 북한의 정치권력자들에게는 우리나라가 그런 상대국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수법은 미국 대통령이나 프랑스 대통령, 중국 주석, 영국 총리나 이란, 러시아의 정치지도자들도 다 똑같다. 강성발언을 쏟아내면서 우민정치를 하고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것이다. 그래 히틀러가 했던 짓, 바로 그 짓이다. 그래서 나는 정치하는 인간들에겐 역사적 진실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에겐 역사적 진실보다는 한줌의 권력을 보전하는 게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내가 믿는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나 일본의 기득권 정치세력은 한일 간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노출된 문제들이 해결되길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일 간 역사적 갈등은 역대 정권이 다음 정권에게 그대로 보전해서 내려주는 ‘전가의 보도’ 같은 것이다. 정권에 민심이 이반할 때 써먹으라고 전수해주는 것이다. 훈훈하면서 더러운 유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 실제로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역대 모든 대통령은, 내치의 부진에 대한 국민의 원성을 일본에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만회하고는 했다. 대표적인 게 이명박의 독도 상륙 아니던가. 이 정치권력의 위선에 놀아나는 건, 오랜 시간 동안 일관되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세뇌와 세례를 받은 우리 국민뿐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4.

이처럼 전후 70년 동안 되풀이해온 구습을 다시 바라볼 것을 주문한 책 한 권이 어제 법원으로부터 판매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박유하 著 <제국의 위안부>가 바로 그것이다. 21세기 개명한 세상에 금서禁書라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어이가 없고 치가 떨릴 뿐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위선으로 이루어진 세상인지를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지인이 내게 이렇게 묻더라. 당신은 소설가인데 왜 그토록 제국의 위안부 논란에 관심이 많으냐고.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이 문제는 내게는 위선과 양심의 싸움, 야만과 합리의 싸움처럼 보여서 그런 거라고. 그건 내 문학적 주제이기도 하다고.

 

Genichiro Takahashi, ‘Comfort women’ denied ownership of their memories

Source: http://ajw.asahi.com/article/views/column/AJ201412240070

Genichiro Takahashi

Park Yu-ha, a professor at Seoul’s Sejong University, was sued for “defaming” former comfort women when her book, “Comfort women of the empire,” was published in South Korea last year. A Japanese translation was finally released in November.

I was moved–or jolted, to be more accurate–by its sheer impact. I believe that her work will become an unwavering axis–something of a fixed star–in the firmament of all future writings on the subject of wartime comfort women, whether one agrees or disagrees with her.

I also felt her book must be about the loneliest star I have ever come across, if I may continue the astronomical analogy. And as I wondered what had compelled Park to embark on such a lonely mission, I was stunned into silence, unable to fathom the depth of her feelings.

Years of bitter controversy over Korean comfort women have created a deep and seemingly irreparable rift between Japan and South Korea.

On the one hand, there are people who refuse to see any difference between those women and prostitutes. On the other hand, there are people who insist that the women were forcibly taken away for “sexual slavery.”

The two camps have argued acrimoniously over the question of state responsibility.

In her book, Park notes: “The comfort women have recounted their experiences dispassionately for all these years. But the people who listened to them have chosen to hear only what they wanted to hear. On this score, there is basically no difference between the women’s supporters and those who insist there was never such a thing as the ‘comfort women issue.’

“While the comfort women discussed diverse situations, both sides picked out only the parts of their ‘memories’ that matched their own images of the Empire of Japan.”

What Park proceeded to do was to listen closely, with a totally open mind, to what each former comfort woman had to say. And what she heard were stories none of us has ever heard.

* * *

While maintaining that the “responsibility” and “guilt” of sending Korean comfort women to the battlefront lay with the Empire of Japan, Park also severely condemns Korean dealers who actually recruited the women, as well as the Korean “patriarchal system that subjugates the women’s lives”–similar to Japan’s–that condoned the arrangements.

“The Empire of Japan is not the only party that must apologize to the women,” she wrote. “There are also people in South Korea (and North Korea) who must apologize.”

But this fact has remained overlooked. Why?

Sometimes, colonial subjects pledged their love, allegiance and cooperation to the suzerain state more fervently than the people of Japan even if their loyalty did not spring from the depth of their hearts. And that was the sort of “memory” nobody wanted to keep.

For Korean comfort women who were sent to the battlefront as substitutes for their Japanese counterparts, Japanese soldiers were, at times, most reprehensible beings who violated their minds and bodies. At other times, the women could also see them as comrades who were being dehumanized by the war as much as they themselves were.

The true voice of those women who had to live with such conflicted emotions was inconvenient for both Japan and South Korea. Neither nation wanted, nor needed, their true voice to be incorporated into its official “memory.”

Park wrote: “More than anything, ‘sexual slavery’ is an expression that obscures and suppresses all personal experiences and memories other than those of sexual abuse.

“There is no question that the comfort women were victims as a group. But to focus solely on that aspect and ignore their memories other than those as ‘victims’ is tantamount to denying their whole personality.

“This is the same thing as depriving them of ‘ownership’ of their own memories. In a sense, people will keep the women enslaved if they choose what memories they should retain.”

Comfort women, who used to be denied ownership of their bodies and minds, are now denied ownership of their own “memories.” The sorrows of their lives have turned Park’s book into the color of utmost loneliness.

In his book “Nikkan Rekishi Ninshiki Mondai towa Nanika” (Explaining the Japan-South Korea dispute over perceptions of history), political scientist Kan Kimura offers what I consider one sincere response from the Japanese side to the point raised by Park.

Kimura, who took part in a joint history research project of Japanese and South Korean scholars, became exhausted from the dispute over perceptions of history that no researcher on the Korean Peninsula could avoid.

He left Japan for the United States, where he wrote this book “for purposes of my own rehab training,” as he put it.

* * *

Kimura ponders: Why does a bitter and seemingly fruitless dispute continue over perceptions of history? Why does a matter that was a nonissue in the past suddenly emerge as an important issue? And why does such an issue still torment us?

His answer: Because the “past” is never quite finished, and it becomes a contemporary issue for us in the present age when we face it.

But if the “past” is our present issue, how should we face it?

In “The Past Within Us: Media, Memory, History,” historian Tessa Morris-Suzuki observes that since our present lives continue to be shaped by oppressive regimes built upon past acts of brutality, this is how our future will also be shaped unless we take action to change the situation.

And she warns that since the prejudice that supported past acts of aggression is still within us, this prejudice will remain firmly entrenched in the hearts of the present generation unless we act proactively to eliminate it.

World War II and Japan’s colonial rule ended a long time ago. But do they really belong only to the distant past?

The answer is no. If the prejudice and bigotry that led Japan to that war are still alive within us today, the “past” is still very much alive.

* * *

Genichiro Takahashi, born in 1951, is a professor of Japanese literature at Meiji Gakuin University.

‘Comfort women’ denied ownership of their memories

Source: http://ajw.asahi.com/article/views/column/AJ201412240070

The Asahi Shimbun, POINT OF VIEW/ Genichiro Takahashi

Park Yu-ha, a professor at Seoul’s Sejong University, was sued for “defaming” former comfort women when her book, “Comfort women of the empire,” was published in South Korea last year. A Japanese translation was finally released in November.

I was moved–or jolted, to be more accurate–by its sheer impact. I believe that her work will become an unwavering axis–something of a fixed star–in the firmament of all future writings on the subject of wartime comfort women, whether one agrees or disagrees with her.

I also felt her book must be about the loneliest star I have ever come across, if I may continue the astronomical analogy. And as I wondered what had compelled Park to embark on such a lonely mission, I was stunned into silence, unable to fathom the depth of her feelings.

Years of bitter controversy over Korean comfort women have created a deep and seemingly irreparable rift between Japan and South Korea.

On the one hand, there are people who refuse to see any difference between those women and prostitutes. On the other hand, there are people who insist that the women were forcibly taken away for “sexual slavery.”

The two camps have argued acrimoniously over the question of state responsibility.

In her book, Park notes: “The comfort women have recounted their experiences dispassionately for all these years. But the people who listened to them have chosen to hear only what they wanted to hear. On this score, there is basically no difference between the women’s supporters and those who insist there was never such a thing as the ‘comfort women issue.’

“While the comfort women discussed diverse situations, both sides picked out only the parts of their ‘memories’ that matched their own images of the Empire of Japan.”

What Park proceeded to do was to listen closely, with a totally open mind, to what each former comfort woman had to say. And what she heard were stories none of us has ever heard.

* * *

While maintaining that the “responsibility” and “guilt” of sending Korean comfort women to the battlefront lay with the Empire of Japan, Park also severely condemns Korean dealers who actually recruited the women, as well as the Korean “patriarchal system that subjugates the women’s lives”–similar to Japan’s–that condoned the arrangements.

“The Empire of Japan is not the only party that must apologize to the women,” she wrote. “There are also people in South Korea (and North Korea) who must apologize.”

But this fact has remained overlooked. Why?

Sometimes, colonial subjects pledged their love, allegiance and cooperation to the suzerain state more fervently than the people of Japan even if their loyalty did not spring from the depth of their hearts. And that was the sort of “memory” nobody wanted to keep.

For Korean comfort women who were sent to the battlefront as substitutes for their Japanese counterparts, Japanese soldiers were, at times, most reprehensible beings who violated their minds and bodies. At other times, the women could also see them as comrades who were being dehumanized by the war as much as they themselves were.

The true voice of those women who had to live with such conflicted emotions was inconvenient for both Japan and South Korea. Neither nation wanted, nor needed, their true voice to be incorporated into its official “memory.”

Park wrote: “More than anything, ‘sexual slavery’ is an expression that obscures and suppresses all personal experiences and memories other than those of sexual abuse.

“There is no question that the comfort women were victims as a group. But to focus solely on that aspect and ignore their memories other than those as ‘victims’ is tantamount to denying their whole personality.

“This is the same thing as depriving them of ‘ownership’ of their own memories. In a sense, people will keep the women enslaved if they choose what memories they should retain.”

Comfort women, who used to be denied ownership of their bodies and minds, are now denied ownership of their own “memories.” The sorrows of their lives have turned Park’s book into the color of utmost loneliness.

In his book “Nikkan Rekishi Ninshiki Mondai towa Nanika” (Explaining the Japan-South Korea dispute over perceptions of history), political scientist Kan Kimura offers what I consider one sincere response from the Japanese side to the point raised by Park.

Kimura, who took part in a joint history research project of Japanese and South Korean scholars, became exhausted from the dispute over perceptions of history that no researcher on the Korean Peninsula could avoid.

He left Japan for the United States, where he wrote this book “for purposes of my own rehab training,” as he put it.

* * *

Kimura ponders: Why does a bitter and seemingly fruitless dispute continue over perceptions of history? Why does a matter that was a nonissue in the past suddenly emerge as an important issue? And why does such an issue still torment us?

His answer: Because the “past” is never quite finished, and it becomes a contemporary issue for us in the present age when we face it.

But if the “past” is our present issue, how should we face it?

In “The Past Within Us: Media, Memory, History,” historian Tessa Morris-Suzuki observes that since our present lives continue to be shaped by oppressive regimes built upon past acts of brutality, this is how our future will also be shaped unless we take action to change the situation.

And she warns that since the prejudice that supported past acts of aggression is still within us, this prejudice will remain firmly entrenched in the hearts of the present generation unless we act proactively to eliminate it.

World War II and Japan’s colonial rule ended a long time ago. But do they really belong only to the distant past?

The answer is no. If the prejudice and bigotry that led Japan to that war are still alive within us today, the “past” is still very much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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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ichiro Takahashi, born in 1951, is a professor of Japanese literature at Meiji Gakuin University.

박진용, 명예훼손 그 치열한 삶의 존재양식 – 박유하씨의 소송과 관련하여

명예훼손 그 치열한 삶의 존재양식

(박유하씨의 소송과 관련하여)

반목과 조롱과 고소의 ‘세월’이자 ‘명예훼손’의 시대이다. 얼마전 한 보수논객은 특정 다수인을 종북으로 몰아대다가 실형을 선고받았고, 극우청년들의 게시판 ‘일간베스트’ 이용자들은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을 ‘유족층, 시체장사를 하는 좌익좀비’라 몰아간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이 한창이고, 이성적인 가치를 몰각한 ‘팩트주의자, ‘개인적 취향의 옹호자‘들은 행동의 일선에서 폭식이라는 엽기적인 애국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엊그제는 대한민국 청와대에 의해 같은 죄로 고소당한 일본 일간지 기자에 대하여 ‘국경없는기자회’가 불기소를 촉구했다는 기사까지 나왔으니 대한민국은 현재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니다.

한때 나치들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전용하여 유태인의 열등함, 이기심이 독인인의 고통의 원인이며, 유대인을 박멸하는 논리로 게르만의 우수성이 ‘팩트’라는 우생학을 끌여들였다. 1차대전 패전후 독일인들에게는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 했고, 이에 부화뇌동한 지식인들은 주변의 이웃이기도 한 유대인을 대량학살 할 수 있는 제도와 법률을 만들었다. 이것을 독일인들만의 ‘특이한 뇌구조’라고 말할 사람들은 없다. 그게 우리의 잠재된 본능이고 그들처럼 ‘일베’는 본능에 충실한 놀이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연혁은 권력에 대한 시민의 자유로운 비판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기에, 인종, 여성, 장애자 등 약자에 대한 공격과 혐오 표현은 애초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려던 가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표현의 자유를 한계로 헌법이 명시한 명예훼손은 변종 나찌의 부활을 사회공동체의 힘으로 견제하고자 하는 이성적인 결단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예훼손 소송의 증가는 사회적 비경제를 창출하는 면이 있다. 특히 국가 사법권의 총화인 ‘형사법정’에 표현 내용을 세우는 제도는 구시대적이며, 말로 인한 처벌가능성의 대중적 자각은, 표현을 요체로 하는 학문, 언론 출판의 영역에 있어서 소위 ‘자기 검열의 일상화’를 구축할 위험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최근에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피소는 이런 위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고의 집합적 표현 양식인 책은 저자의 본질적 주장 즉, 전체의 맥락으로 읽혀져야 하며, 주장의 근거는 ‘사상의 시장’에서 동종의 사인들 끼리 논박되고 비판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예컨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혁명가 염상진이 꽤나 멋지고,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이 많은 부분 할애되었다고 해서 소설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이유이다. 태백산맥은 단순한 허구 이상의 역사에 대한 기록과 이에 대한 작가적 관점이 함축되어 있지만 그 시각은 실정법으로 단죄될 수 없는 부분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수백 개의 자극적인 표제를 단 기사들이 쏟아졌다. 아니 위안부가 일본군의 동지라니 “박유하 교수’제국의 위안부 책 내용 보니…충격 넘어 경악” 이 서적은 현재 출판금지 가처분, 형사상 명예훼손, 또 그 이상의 송사에 휘말린 듯하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여러 서평을 읽어봤다.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할 고의가 있다는 평가는 그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았고, 그의 결론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일본 제국의 성노예로 규정하고 있다. 즉 기술의 관점을 민족주의적 시각이 아닌 국가와 개인의 관점으로 정리하고 논의를 방향을 설정했다. 이 관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즉 법학의 틀로 바라볼 때 전제 개념에 해당되는 법적 책임의 주체인 국가를 제국과 혼동했으며, 반사적으로 국가범죄로서의 위안부 모집범죄에 대한 방조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 점에서 법학자 이재승 교수의 비판은 동종의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관점은 학자의 고유한 영역이고, 학문의 방향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고, 현행법에 의할 때 논리적 흠결을 가져온다는 점, 그리고 법적인 관점을 견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문의 영역에서 형사처벌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문적 관점에 관한 차이는 논쟁을 낳고 논쟁을 통한 상호침투는 학문간의 경계를 허물고 다른 관점에 대한 사고의 범주를 확장시키며 전향적이고 진일보한 질서와 원칙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간학문적(interdisciplinary)접근방식이 추구하는 소통과 보완의 과정이다.

결국 명예훼손의 주체가 된 제국의 위안부는 상식적 논쟁과 비판을 넘어 바람직하지 않는 사법적 판단의 절차로 이송되었다. 일반적인 법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법적’으로 이 사건이 명예훼손의 구성요건인 허위사실의 인식, 비방의 목적을 인정하기 어렵고, 이에 대한 고소는 무리한 소송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행위를 위한 사법권의 사적 전용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게 된다. 고소가 권리남용이 된다면 제고하고자 하는 공익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일반인의 법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의 ‘조리를 향한 도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논리는 집단명칭에 의한 모욕죄의 부당함을 다투고자 수많은 사람을 고소했던 정치인 출신의 모 변호사의 항변과 닮아있다.

친일의 칠을 덧씌우는 언론의 행태는, 종북의 칠에 익숙한 극우세력의 행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터넷 언론의 ‘자극적 제목 뽑기’라는 선정주의는 학문으로 논쟁하고자 하는 학자를 법정에 세웠으며, 다른 한편으로 피고소인을 수많은 명예훼손과 모욕죄의 피해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명예훼손적 친일 작품이 아니라면 이는 무고죄에 해당 할진데 과연 그는 평등하게 사법적인 구제를 구할 수 있는 지위인가?

부연컨대 무리한 사법의 사용은 결국 사고를 검열하게 만들고 표현을 위축시키게 된다. 또한 주류질서의 경제주의, 이와 결합한 언론의 선정주의, 그리고 ‘대세’로 구분하는 편의주의를 통해 비주류적인 관점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공세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조직적 일관성은 다양한 사고와 표현을 공격함으로서 결국 적군과 아군의 논리로만 준별되는 학문적 이분법이라는 퇴행으로 이끌게 되어, 궁극적으로 일체의 다양성이 용인되어야 할 학문질서를 후퇴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법학자들, 법조인들은 이 유죄 추정된 금서에 대한 가벌성과 관련하여 직업적 양심에 의한 어떤 법적평가를 내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론의 재판을 통한 유죄평결에 맞서는 정치적 부담을 감당하느니 가만히 있고 싶은 생존 본능이리라
이 점에서 마치 국회의원 이석기의 내란음모사건에서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침묵했던 모습이 교차되기도 한다. 아직 우리는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안전하게

https://www.facebook.com/jinyong.park.18/posts/615030681948300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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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씨의 작업> 가라타니 고진

최근 들어 한일·중일간 긴장이 높아진 것은 일본정부가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일본)내 제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긴장/대립을 이용해서 일본을 언제든 전쟁가능한 체제로 만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문제든 영토문제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일본국민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그 나라 국민들이 (자국을) 비판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러한 상호간 신뢰를 바탕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되는 일이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발신하려 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한국에서는 친일적이라고 비난 받고 일본에서는 반일적이라고 비난 받을 것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나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다.

(2014 년 8 월)

<원문>

パク・ユーハ氏の仕事 柄谷行人

近年、日韓や日中間の緊張が急激に高まって来たのは、日本の政府があえてそれ を作りだそうとしているからだ。それによって、国内における諸問題を打ち消すた めである。そして、対外的な対立・緊張を利用して、日本をいつでも戦争できる体 制に変えようと図っている。したがって、従軍慰安婦問題であれ領土問題であれ、 それらを解決する気などさらさらない。

私がこのように日本の政府を批判するのは、日本の国民だからだ。外国に関し ては、その国の国民が批判するだろうと思う。実際、韓国にもそのような人達が 大勢いる。私はこうした相互的信頼にもとづいて活動してきたのである。とはい え、それだけではすまないことがある。

その点で、私は、積極的に日本と韓国の間に立って発言しようとしてきたパ ク・ユーハ氏に注目している。彼女の仕事は、韓国では親日的と非難され、日本 では反日的と非難されるだろう。そのことを最初から覚悟して、従軍慰安婦問題 に長年取り組んできた氏に、私は深い敬意を抱いている。

(2014年8月)

와카미야 요시부미,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고 부르라 (동아일보)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역사교과서, 독도, 위안부 다룬 박유하 교수의 ‘화해를’ ‘제국의’
일부 한국인 “日우익 대변” 비난, “위안부 명예 훼손했다” 고소
치밀한 논리, 균형적 시각으로 한일간의 난제 해결 애쓴 朴교수의 용기와 노력 지지

원문: [와카미야의 東京小考]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고 부르라 (동아일보)

『제국의 위안부』 가처분신청 기각을 요청하는 탄원 성명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0년대였지만, 당시에는 커다란 사회적 관심사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까지도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에서 신문기사, 소설, 영화 등의 형태로 산발적인 문제제기가 이뤄졌을 뿐입니다. 이런 가운데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증언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50년간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로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왔던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랐으며, 이를 후원하는 단체들도 생겨났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단체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과 ‘나눔의 집’입니다. 정대협은1992년 1월부터 이른바 ‘수요시위’를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1000회 이상 주최하면서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눔의 집’은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을 겪은 할머니들이 함께 생활하는 터전이자 전시 여성폭력에 대한 역사교육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지금과 같이 세계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주목하게 된 것은 정대협을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지원 단체들의 헌신적인 활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운동’으로 발전해나가는 가운데,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그 존재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가 점차 ‘학문’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박유하 교수가 출판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운동’이 아니라 ‘학문’의 관점에서 논의를 심화시킨 국내의 몇 안 되는 연구 성과물 중 하나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성・민족・식민・계급 문제가 응축된 20세기의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는 ‘운동’의 대상만이 아니라 20세기에 잉태되고 지금도 계속되는 여러 사상적 과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학문’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제기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운동’이 아니라 ‘학문’의 영역에서 진지하게 검토하고 논의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더구나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를 재검토하고 집단자위권 해석을 변경하는 이 시점에서 국내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싸고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법정 소송’이라는 윤리적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포함한 외교적 이해득실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보입니다. 따라서 누구누구 이하 몇 명은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고, 이후 ‘학문‘의 영역에서 보다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바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2014.07.07.

김철 외 224명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이권희,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폭력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폭력

일국의 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 문제가 되어 그렇지 않아도 월드컵을 앞두고 서서히 끓어오르던 값싼 민족주의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 불똥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로 튀었다.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고 있는 특정 단체에 의한 ‘정의’의 독점을 우려하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단초로써 우리가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혹은 감히? 언급하려 하지 않았던 종군위안부의 다양한 층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에 박 교수에 의해 비판을 받은 지원단체는 자기들과 음으로 양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며 박 교수를 ‘친일’, ‘반민족주의자’라는 프레임에 가두려 하는 폭력적 여론 몰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박유하 교수는 지금까지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화해를 위해서』 로 대표되는 다양한 저작물과 활발한 학술활동을 통해 우리가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갖고 이를 직시해 왔다. 이는 한일 양국의 특정적이며 부정적인 대결과, 해묵은 갈등 구조의 해소, 나아가서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구축을 위한 학자로서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감에 기인하고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이라 믿어 왔던 기억의 다른 한편에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기에는 일제 식민지배 36년 동안에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민족 자존감의 상처가 너무나도 크고 깊다는 것 또한 안다. 결과적으로 식민통치 기간 동안 앓아야 했던 다양한 정신적 외상은 ‘민족적’ ‘민족주의’적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하며 오랜 세월 역사의 한 쪽 면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절대 담론을 형성해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과 핍박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는 ‘민족주의적’ 담론 형성과정에 파묻혀 버린 할머니들의 또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주장하고, 자기 검증과 내적 성찰보다는 이를 전국민적 저항운동으로 변질시키며 정치권력화되어 가는 특정단체의 ‘정의’의 독점을 우려한다. 나 또한 박 교수의 이러한 우려에 깊이 동감한다. ‘정의’의 독점은 필시 폭력으로 이어지고, 폭력은 자유로운 사고를 질식시키며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박 교수의 글에 대해 ‘문학적 상상력’ 이나 ‘감수성’으로 역사를 파악하려 한다며 이를 폄하한다. 비록 위안부에 참가한 여성들 중에 자발적 참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또한 ‘부당한 제국성’ ‘제국의 숨은 의도’라 하며 박 교수의 역사인식의 결여를 지적한다. 나 또한 미시적 가지들에 집착하는 일문학의 연구방법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역사학자들의 이러한 지적에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역사학이 어떠한 방법론에 의해 지탱되어지고 있는 학문 분야인가. 멸치조차 회를 뜨려 드는, 초 울트라 미시적 연구 방법론에 의해 성립되는 실증주의, 사료 지상주의의 학문 분야가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역사는 지구상 가장 오래된 문학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유하 교수가 문제 삼고 있는 다층적 기억을 거북하다 하여 이를 애써 외면하며 ‘부당한 제국성’이라는 거대 담론만을 고집한다면 일제식민통치 기간 동안 깊어지고, 해방 이후 반복 재생되고 있는 정신적 외상에 대한 치유는 앞으로도 영원히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학자가 어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 있겠는가. 학자로서의 양심과 자유로운 학문 탐구마저 ‘민족’ ‘민족주의’라는 이 땅의 ‘절대선’으로 재단하려 드는 ‘정의’의 독점에서 오는 ‘폭력’을 나는 경계한다. 또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파시즘적 민족주의에 기인하는 인민재판식 마녀사냥을 나는 비판한다. 나는 민족주의라는 감성을 자극하며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일부 단체들의 절대 권력화에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학자의 자유로운 연구를 용인하지 않는 이 사회의 천박함에 절망한다.

 

이권희(단국대학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