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1)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한일관계가 빈사상태다. 1965년에 수교를 회복한 이후 “사상최악”이라는 표현을 쓰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해마다 열어왔다는 한일경제인 회의가 연기되었고, 지금과 같은 정황이 이어지는 한 6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G20 회의에서 한일수뇌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크지 않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대부분 그런 현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건 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칠한 일본의 태도를 적반하장이라고만 여긴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건 일본의 정치가들이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대통령의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틀렸다. 대통령도 이제는 한일관계회복을 바라고 있는 듯 한데, 분석이 옳지 않은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6년전,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책을 통해 현재와 같은 정황이 닥칠 수 있음을 예고한 적이 있다. 나의 문제제기는 자신들의 운동과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 이들에 의해 법정에 갇히는 사태를 맞았지만, 그 책은 오로지 오늘과 같은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쓴 책이었다. 지금의 한일관계는 단적으로, 나의 입을 막으려 한 이들과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만든 것이다.

작년가을에 신일철 징용판결이 나온 이후 한일관계는 이전에 비해 훨씬 자주 삐걱이고 있지만,그런 양국갈등의 연원에는 위안부문제가 있다. 일본이 참을성이 없어지고 때로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곤 하는 것도 모두 위안부문제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국 쪽에도, 위안부문제를 4반세기 겪으면서 ‘사죄하지 않는 일본’관이 정착되어 버린 탓에 불신이 가득하다.

말하자면, 현재 한일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각각의 문제 이전에, 오랜 갈등의 세월을 겪으면서 쌓여온 불신과 체념 쪽이다. G20이 일본에서 열리는데도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과 수뇌회담일정을 일본이 잡지 않고 있는 것도 그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른바 ‘한일관계’ 전문가들과,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 전문가 혹은 지원자들은 사실 접점이 거의 없다. 전자는 대개 ‘국익’을 언급하며 앞으로 나아가자는 제언을 하고, 후자는 ‘국익보다 개인’이라면서 ‘피해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그 양쪽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거의 없고, 그 점 역시, 문제해결을 방해하는 이유중 하나다. 대통령이 취임초기와 달리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는 발언과 행동을 취하게 되었음에도 실질적 변화가 없는 건, 실제정책은 후자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대통령은 그 양쪽이 합쳐져 분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일간 갈등을 빚고 있는 각각의 문제들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하지만, 한쪽은 정치경제문제를 앞세워 생각하느라 문제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른 한쪽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한 발언권을 독점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론 그 그 독점이 옳은지 여부를 따지기 위해 독자적인 조사와 취재로 ‘발언의 독점’양상의 내부를 제대로 들여다 보려는 언론도 없다. 언론들 대부분은 그저 전자와 함께 탄식하거나, 그저 후자와 똑같은 목소리가 되어 ‘운동’에 참여한다. 한일간갈등문제가, 수많은 언론의 참여 덕분에 전국민이 아는 문제가 되면서도 정작 그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은 늘지 않고 인식은 천편일률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최근 들어 전서울대 교수 이영훈 교수가 열정적으로 위안부문제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아마도 진보쪽 사람들은 이교수의 강의를 그저 일본우익과 동일시하며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위안부문제 담론을 관장해 온 이들은 이영훈교수의 강의에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과의 접점을 찾는 일은, 한국내부의 접점을 찾는 일도 되어야 한다.

사실 90년대엔 위안부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했던 김대중시대를 맞아 2000년대 초반은 수교이후 최고조로 한일관계는 좋았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때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에 진 정부가 문서들을 공개하게 되고, 개인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금을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다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국정부는 다시한번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법을 만들어 보상했다. 징병/징용자는 물론, 위안부할머니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일부 위안부할머니들과 지원자들은 같은 무렵에 이번에는 외교부를 상대로 또다른 소송을 일으킨다. ‘정부가 위안부문제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소송이다. 5년이 지나고 2011년 여름에 정부-외교부가 패소했는데, 같은 해 겨울에는 이른바 ‘수요데모’ 1000회를 맞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들어서게 된다.

90년대에 일어났으면서도 국민적인 관심을 받지는 못했던 위안부문제가 국민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운동의 흐름이 바뀐 건 이때부터다. 이 무렵부터 이른바 ‘평화나비’라 불리는 대학생조직의 포스터가 대학마다에 나붙기 시작했고, 서울시후원으로 이런저런 이벤트를 기획하고 수요집회에 참여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교등학생과 초등학생까지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패소한 외교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위헌’이 되지 않도록 위안부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관여방식과 내용은 맥락상 하나부터 열까지 지원단체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위안부문제는 본격적으로 ‘외교’문제이자 ‘정치’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정부대상으로 소송까지 걸어 위안부문제를 외교문제로 만들었던 지원자들이, 이제 와서 위안부문제는 ‘정치/외교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라고 주장한다. 정치경제 중심의 국가간문제 따위가 아니라,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우선적으로 나서야 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 자체로는 옳은 주장이지만 그 주장은, 위안부문제를 앞장서서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이 바로 지원자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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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4)

1.역사의 사법화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위안부문제 관계자들은 2000년에 있었던 여성국제전범재판을 통해 히로히토천황을 ‘유죄’로 단죄했다. 변호사였던 박원순 시장은 그 판결을 내리도록 종용한 ‘검사’중 한사람이었다.

아키히토전천황을 ‘전범의 자식’이라고 규정한 문희상의장의 인식이 2000년 여성국제전범재판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은 커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역시도 ‘법적판단’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케이스가 된다.

물론, 국제여성전범법정은 위안부문제 발생 이후, 냉전붕괴와 세계화의 영향으로 더 가까워진 세계여성들이 급격히 교류의 장과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그 결과로 국경을 넘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놓은 장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 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인’ 위안부는 이 자리에서도 배제되었고 그런 한 이 ‘여성’법정은 반쪽짜리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법정’의 권위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정체시켰다.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한 연합국조차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으로 판결하지는 않았다. 군부와 천황을 따로 놓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판결이 맞는지 여부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직 위안부문제에 관해 충분한 이해가 없는 채로, 또 왜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는 대신 ‘상징’으로나마 천황으로 남겨두었는지를 모르는 채로 50여년 후 ‘현대’의 법관들이 성급한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처벌’을 강조하는 이들은 곧잘 매춘을 강요한 군인을 사형시킨 스마랑 사건을 강조하지만, 스마랑사건판결은 국가의 수장이나 군대의 수장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황이 ‘처벌’당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국민의 동요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연합국은 일본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황은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 헌법9조와 맞바꾸어져 말 그대로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이후 44년을 살았다.

그런데 과거의 연합국의 판단에 대한 국제여성전범재판의 관심은 오로지 ‘처벌’여부에만 있었던 듯 하다. 그 판결은 시대적 진보의 양상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시대를 정체시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판결은 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의 여론을 급격히 악화시켰다.

일본의 천황은 일본인들에게는 정치가 아니라 문화다. 일본인들에게는 국제여성전범재판의 판결이나 문희상의장의 발언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부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다만, 문의상의장이 천황의 사죄를 요구한 건 다른 한편으로는 지원자들이 주장해 온 ‘법적사죄와는 대치되는 발언이기도 하다. 일본은 그런 맥락도 읽을 필요가 있다. )

더구나 설령 천황이든 상황이든 일본을 상징/대표하는 이의 사죄가 있다고 한들 위안부문제자체와 해결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그것이 곧바로 한일관계우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가능하기엔 오해와 과장과 독주가 만든 상호불신과 혐오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사회는 그저 ‘사죄하지 않던 뻔뻔한 일본이 국제사회 압박에 못이겨 드디어 무릎을 꿇었다’고만 여길 것이다. 

이 4반세기동안, 법률가에 의해 역사문제가 좌지우지되고, 법정은 개인의 입을 틀어막고 정부를 조종하고 타국을 겁박하는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다. 정의롭고 공정해야 할 법의 공간, 책임을 져야 할 주체조차 존경의 념을 가져야 할 공간을 그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복잡다단한 역사를 외교/정치문제화시키고, 단순한 예스 혹은 노로 대답하도록 만든 건 누구인가?

‘재판이 (일본재산의) 가압류판결을 내린 건 당연한 일이다. 일본과 한국정부가 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최봉태)는 주장은 가히 오늘의 사법의 권력화 현장을 보여준다.

물론 그 조치가 옳다면 사법이라는 권력사용은 고귀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지원자들은 정부가 지원자들과의 논의를 거쳐 일본과 협의한 끝에 ‘한일합의’를 내놓자, 이번에는 그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서 반대에 나섰다. 곧바로 수용하겠다는 의견을 낸 위안부할머니도 있었지만 그런 분의 목소리는 곧바로 묻혔고 지금까지도 그 정황엔 변함이 없다. 그 분들을 그저 회유당한 것으로만 보는(보게 만든 이들이 물론 있다)시선은,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는 듣지 않았던 이 4반세기 한국사회를 상징한다. 

한일합의에 대해서는 다시 쓰겠지만, 그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실은 기억되어야 한다. 사법이 역사를 관장하는 주체로 나서 개인과 정부와 타국에 대한 압박의 도구로 쓰여졌으나,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는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대통령과 국회의장께 제안한다. 한일관계를 회복시키고 장기적인 화해평화를 지향한다면 대화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동시에 그 논의과정을 언론이 국민들에게 전달해 모든 국민들이 듣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고. 시급히 접점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는 1년 단위로, 긴 시간이 필요한 프로젝트는 5년 10년 단위로 대화하면서 학자와 관계자들에게 논의를 맡기고 언론이 보도하도록 하면, 국민들은 그 보도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하면서 싸우지 않고 교류할 수 있다. 10년, 30년, 50년,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고 합의된 사항을 각각의 교과서에 반영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한일양국은 역사인식에서 접점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프로세스에는 북한도 참여해도 좋을 것이다. 백년대계란 그런 것이다.

동시에 정부는, 2005년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나온 징용문제는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민관합동위원회의 견해와 이후,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정부가 해 온 일을 제대로 공지할 필요가 있다. 논의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아직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야 밝혀진 것처럼, 역사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도 지원자들과 법정은 자신들만의 이해와 판단만이 옳다고, 그것에 따르라고 무려 4반세기동안 주장해 왔다. 심지어 알게 된 사실을 언론이나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밝히는 일도 없었다. 그 결과가, 현재의 한일관계다.

이 글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사고를 재검증하기 위한 글이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형사1심] 박유하, 검찰기소장 반박문

1. 서론

(1) 검찰은, ‘피고인이 이 사건 서적을 통하여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① 위안부를 일본국에 애국적 자긍적 협력자로 표현하였고, ②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 표현하였으며, ③ 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을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을 부정)함으로써 고소인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기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먼저, 뒤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첫째, 피고인은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적도 없고,
둘째, 피고인은 이 사건 서적을 통하여 검찰이 말하는 의미로는
① 위안부를 일본국에 애국적 자긍적 협력자로 표현한 바도 없고,
②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 표현한 적도 없으며,
③ 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을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을 부정)한 바도 전혀 없습니다.

(2) 피고인을 기소한 검찰의 공소장은, <기초사실>과 <범죄사실>, 그리고 고소인측이 지목하고 민사재판부가 2015. 2.에 그 일부를 인정한 34개 항목에 1항목을 추가한 <범죄일람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기소는, 책의 전체적인 그리고 부분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고소인측의 웃지 못할 오독(예를 들면 “해방 70년“이나 지났으니 일제시대를 다시한번 돌아보자는 제언부분을 위안부할머니에 대해 말한 부분으로 오독, 위안부할머니를 비난한것처럼 간주)에 더해 곡해로 가득한, 악의적인 고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어이없는 기소입니다.

(3) 피고인은 이 서면을 통하여, <범죄일람표> 각 항목을 구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재판부의 공판 준비명령, 즉 ‘위법성 조각사유와 관련하여 피고인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무엇인지, 즉 피고인이 어떠한 자료를 참조하고, 어떠한 취재와 조사 등을 실시하였으며, 어떠한 연구과정을 거쳐서 이 사건 서적을 서술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것’이라는 명령에 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자료집’은 그 ‘증거설명서’와 함께 따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4) 이하에서는 <범죄일람표> 각 항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이전에, 우선, 공소장 본문의 <기초사실>, <범죄사실> 부분을 반박합니다.

2. 공소장의 <기초 사실>에 대하여

(1) 우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검찰이 <기초사실>에 설시한 내용을 보더라도, 이러한 자료가 어떻게 활용되어, 피고인이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였다는 것인지, 그리고 피고인의 서술부분(즉, <범죄일람표>기재 각 항목의 서술부분)이 범죄일람표 <비고>란의 내용, 즉, 피고인이 이 사건 서적을 통하여 ① 위안부가 일본국에 애국적 자긍적 협력자로 표현하였고, ②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 표현하였으며, ③ 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을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였다는 것인지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 검찰은 피고인의 <범죄>의 근거로 먼저 <기초사실>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기초사실이 있는데 박유하가 엉뚱한 거짓말을 하였으니 명예훼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검찰이 말하는 <기초사실>로는, 피고인이 이 사건 서적을 통하여 ① 위안부가 일본국에 애국적 자긍적 협력자로 표현하였고, ②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 표현하였으며, ③ 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을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였다는 점을 뒷받침할 수 없습니다.

(3) 한편, 검찰은 학계에서 어떤 논의가 있는지도 전혀 조사하지 않고, 고소인측의 왜곡된 의견을 그대로 베꼈을 뿐입니다

(4) 이하 검찰이 언급한 자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가) 고노담화

1) 검찰은 ‘피고인이 고노담화를 부정한 것’처럼 고노담화를 기초자료로 제시합니다.

① 그러나 피고인은 고노담화를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높이 평가했습니다.(책 173면-176면 참조)

② 그리고 피고인은,
“고노담화가 인정한 것은 우리의 이미지-`총칼로 무장한 군인이 강제로 끌어갔다`는 `강제성`은 아니다. 요청은 군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업자들이 한 감언이나 강압이라는 제3의 강제성만을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고 요청을 한 주체가 군이니,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의 간접적 강제성에 대해서도 총체적 책임을 지겠다고 한 것이 고노담화다”라고 전제한 후(175면 7줄-12줄), “일본은 조선의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욕을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 것이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던’ 결과. 즉 식민지배라는, 정신적 강제체제하의 일이었다고 인정했던 것이다”라고 서술하였습니다.(175면 14줄-17줄)

`또한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성차별과 계급차별 이상으로 ‘식민지배’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었고, 고노담화는 그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응답한 담화였다”고 평가하였던 것입니다.(176면 3줄-6줄)

2) 그럼에도 검찰이 ‘피고인이 고노담화를 부정한 것’처럼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첫째, 피고인이 ‘일본의 양심으로 여겨져 온 고노담화(그나마 고노담화가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위안부 문제 책임을 부정하는 일부 일본인들이 고노담화를 폐기하라고 요구한 최근 몇 년 전입니다)를 박유하가 부정한 것 같은 인상을 재판부 및 일반인에게 심어, 책을 읽지 않은 이들을 향해 피고인에 대한 나쁜 인상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 (책을 읽었을 경우입니다만) 피고인의 정확한 고노담화해석을 완전히 무시하고, ‘고노담화가 물리적 강제성을 인정한 것’처럼 말해 온 지원단체 등 관계자들의 그간의 주장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검찰이 책을 읽지 않았거나, 아니면 20여년의 기존 인식에 갇혀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성이 결여되고 만 결과라 하겠습니다. 참고로, 기소 이후 고노전관방장관이 기소에 반대하는 일본지식인의 성명에 서명한바 있다는 사실도, 피고인의 해석이 정확했다는 사실과 피고인의 책이 검찰이 말하는 식의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합니다.

3) 고소인측이나 검찰은 이런 부분을 무시하고, ‘피고인이 한국을 향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움을 표했던 우리 안의 책임자(대부분의 업자와 유괴범, 그리고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했던 가족과 이웃)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고 했던 서술 부분’만을 떼어내어, 그 서술 부분에서 ‘피고인이 일본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해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피고인은 ‘이 책 중 일본을 향해 일본의 책임을 서술한 부분’에서 이를 충분히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향해 한국의 문제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 일본에 대한 비판이 없다고 억지를 부린 셈입니다.

(나) 유엔 등 해외에서의 인식

검찰은 ‘피고인의 인식이 해외의 인식에 반하는 것’처럼 말하기 위해, 유엔보고서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증거자료로 고소인측이 제출한 자료를 그대로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유엔 등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좀 더 면밀히 검토하여, ① 이 자료들 대부분이 지원단체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 ② 그러나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서문에 ‘세계의 상식에 이의제기를 하는 셈’이라고 썼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역시 피고인이 ‘지원단체 등이 한국에 유리한 부분만 전달한 결과, 그동안 한국에서는 한국의 인식이 전부 맞는 것으로만 인식된 유엔보고서’에 반하는 인상을 만들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쿠마라스와미 보고서(1996/1998)

검찰은 1996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일본에 대해 행한 권고만 쓰고 있고, 이후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의 권고는 이후 대부분 실현되었습니다. 즉, 정부 차원의 손해배상(1997년 일본 정부가 주도한 아시아여성기금발족, 보상금 지급), 일본 정부의 문서 및 자료 공개(종군위안부 자료 집성 5권으로 출판하고, 인터넷 공개), 서면에 의한 공적인 사죄(기금 전달시 총리의 편지로 표현), 역사적 사실의 교과서 게재 등입니다.

1991년에 문제로서 발생한 위안부문제에 대답해 1997년 시점에서 일본 교과서의 대부분에 위안부 문제가 실렸었습니다. 다시 교과서에서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사라지거나 수정되기 시작한 것은, 그 기술이 <강제연행>에 치중되어 있어 그러한 기술에 반발한 이들이 반대 운동을 펼치게 된 이후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을 지원단체와 고소인측이 인식하지 못했거나 말하지 않은 탓에, 여론과 국민이 오랜 세월 사실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사재판부나 검찰은 이러한 부분을 충분히 검토했어야 마땅함에도, 피고인의 반박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이행하지 못한 것은, <범행자 확인 및 처벌>부분입니다. 그러나 누구의 어떤 죄목을 범행자로 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하려면 사태를 우선 정확히 봐야 합니다.

피고인이 시도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음에도, 고소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방식만을 옳다고 주장하고,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에 대한 국가권력을 동원한 입막음’에 나섰습니다.

또한 검찰 역시, 고소인측과 똑같이 책을 왜곡하여 발표함으로써 전국민의 비난을 야기하도록 하였습니다.

2) 맥두걸 보고서

맥두걸 보고서는 지원 단체의 법적책임 요구 주장에 손을 들어 준 보고서입니다. 이 맥두걸 보고서는 ‘지원단체가 주장한 <강제연행> 주장’에 기반을 둔 보고입니다. 이에 대하여 피고인은 이 책을 통하여 그런 인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서술하였던 것입니다.(제1부1장 `강제연행과 국민동원 사이`)

3) 미하원의 결의/유럽 등 타국 의회의 결의

2007년에 나온 미하원의 결의는, 시간이 흘러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 결과 위안부 문제의 기반이 강제연행이 아니라 인신매매임을 인식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강제낙태 등을 일본군의 소행으로 말하고 강조해 보수의원들까지 설득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여성의 증언에 자극을 받은 유럽이나 캐나다 의회 등도 이 결정을 그대로 이어갔던 것입니다.

이에 피고인은, 이러한 결정이 ‘네덜란드인에 대하여 행해진 일과 조선의 위안부를 대상으로 행해진 일의 차이’를 보지 못해 일어난 일임을 서술한 것입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인에 대한 주동자는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도 서술하였습니다. 동시에 미하원의 결의가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을 높이 평가한 사실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원단체는 이러한 사실을 한국 사회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4) 유엔인권이사회

검찰은 이 외에도 유엔인권이사회의 보고서나 권고를 <기초사실>로 언급합니다.

그러나 유엔인권이사회나 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정대협의 전 대표들(정진성 서울대 교수, 신혜수 이화여대 교수)이 각각 이사나 위원으로 활동해 왔다는 사실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여성들의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은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지원단체의 목소리가 이러한 보고서들에 검증 없이 반영된 배경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5) 검찰이 제시하는 <기초사실>은, 검찰이 결국 일부 학자나 지원단체의 기존 인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피고인의 책이 그러한 기존 인식에 대한 재검증을 시도한 책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하여 기소에 이른 것입니다. 새로운 학설이 기존학설과 다르다는 이유로,또한 국가가 기존학설만 믿었다는이유로 새로운 학설을 입막음하는 사태를 개탄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언론이 공식적으로 인신매매 사실을 인정하고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일입니다.

피고인은 이런 사태가 일어난 원인을 해명해 보려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피고인의 책은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갈등의 원인과 배경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 위안부라는 대상에 대해서도 연구하게 된, 학제간 연구, 융합학문서입니다. 일부 역사학자나 법학자들이 피고인의 책을 폄하하는 것은, 이 책이 자신들의 학문체계나 이론을 넘어선 이론과 체계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시도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실을 제대로 알고 그에 기반한 비판과 요구를 하여,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평안을 바라는 피고인의 마음이 만든 집필인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인식으로 오해가 깊어져 한일관계가 날로 험악해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또헌 그러한 사태가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 데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일본전문가/학자로서의 양심과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이 시킨 일이기도 합니다.

3. 공소장의 <범죄 사실>에 대하여

(1) 검찰이 피고인에게 <범죄>라 하는 것은, <일본군에 애국적 협력자였음을 표현><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 부정)><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임을 표현>했다고 하는 3개 사항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허위사실을 적시>했으니 명예훼손이라는 것입니다.

(2) 검찰의 이러한 기소(고소인측의 고소)는 ‘잘못된 독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라유키상의 후예. 위안부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라는 문장을, 검찰은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임을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앞뒤를 보면, 피고인은 가라유키를 매춘부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피고인은 가라유키를 <가난해서 팔려간 소녀><국가의 세력확장에 따라 이동/당한 여성들><일본인 여성>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매춘이 아니라도 그런 식으로 <가난해서 이동당한 일본인여성들>은 부지기수였으며, 조선인 위안부란 식민지화로 인해 그러한 틀 안에 들어가게 된 존재라는 것이, 피고인이 `가라유키상의 후예`라는 말에 담은 뜻입니다. 그녀들은 매춘이 아니고도 여러 직종에 있었으며, 매춘업은 어디까지나 그 일부일 뿐이므로 `가라유키=매춘`이 되지도 않습니다.

피고인은 <가라유키의 본질은 매춘>이라고 쓰지 않았고, 따라서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도 쓰지 않았습니다. `가라유키의 후예`라는 표현으로 박유하가 무엇보다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입니다. 일본군의 의뢰가 먼저 있었고 실제로 동원대상이 되었던 건 일본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한 위안부 제도에서 국가가 자국민을 <강제연행>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있을 수 없었고, 식민지화되어 <일본제국>의 일부가 된 식민지에서도, <연행>이란 <공식적으로> 지시될 수 는 없는 일이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검찰의 이 지적은 지극히 자의적인 오독일 뿐 아니라 악의적 허위라 하겠습니다.

(3) 그럼에도 조선인 위안부에게 <물리적 강제>를 가한 것은 군대이기 이전에 업자들이며,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차별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폭행을 금지했다는 점, 업자들에게 계약서를 확인해 본인 혹은 부모의 의사를 확인하도록 했다는 점 등을 따로 상세하게 밝히겠습니다. 이는 기존 연구자들이 지적하지 않았음은 물론, <제국의 위안부>에도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에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해 피고인이 이 책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시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특히 후반에는 <애국을 종용>하는 시대를 살았고, 따라서 <강제>하지 않고도 모집이 가능했으며 여성들을 속이거나 강제한 주체는 주로 업자였음을 설명할 것입니다.

(4) 피고인이 <애국>을 말한 것은, ‘위안부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당시 식민지의 정황을 아는 일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입니다.
식민지에 대해서도 일본이 애국을 강요하는 과정이 있었고, <일선동조론>이니 <내선일체>결혼 등은 그런 시대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 시대의 한 가운데에 위안부도 놓여 있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본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여성들이 그런 슬픈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요한 일본에 대해 반성과 책임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위안소와 공창제와의 관계 등에 대한 언급은 다른 학자들, 특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적지 않습니다. 자료로 제출하겠습니다.

피고인의 인식은 주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집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고, 그 골자는 이미 10년 전에 <화해를 위해서>라는 책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문화관광부의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도 발간 직후에 여러 매체들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인터뷰와 서평을 게재한 바 있습니다. 검찰이 말하는 것 같은 책이었다면 고발이전에 언론에 의해 비난받았을 것입니다.

(5) 이하 각항목에 관해 앞뒤 맥락을 살펴봄으로써 피고인의 책은, 검찰이 말하는 것과 달리,

(가)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는커녕 반복적으로 성노예적 측면이 있음을 기술했다는 점, 따라서 <위안부의 본질은 매춘>이라고 쓰기는커녕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향해 비판한 책이라는 점,

(나) 원고로 기명된 위안부할머니들이 직접 수류탄을 나르거나 일본군의 빨래를 한 적이 없다 하더라도, 당시의 위안소가 <애국><고향><평화>라는 이름을 달았던 데서 위안부제도가 <애국>의 틀에 편입된 제도였다는 점, 당사자들이 그러한 구도를 알았거나 믿었는지 여부를 떠나, 위안부에게 요구된 역할이 그런 것이었다는 것이며, 피고인이 그런 정황을 굳이 설명한 것은,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정책과 사고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희생구도에 들어가기 쉽게 만든 국가시스템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 따라서 일본에 대한 책임을 기존의 한국의 주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묻기 위한 것이라는 점, 결론적으로 원고나 검찰이 말하는 것처럼 <위안부가 일본에 애국적 협력자>라고 비난한 것일 수 없다는 점,

(다) 결국 피고인이 기존 <강제성>인식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강제성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눈에 띄는 강제성’ 이상으로 ‘교묘한 강제성—<구조적 강제성>’이라고 이미 피고인이 10년 전에 자신의 저서에서도 기술한 개념을 더욱 명확히 강조해 일본의 책임을 정확히 물으려 한 책이라는 점

등을 밝힐 것입니다.

(6) 피고인의 책은 기존 연구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일본에 책임을 물은 책이며, 그를 위해 한국/일본 사회에 이 문제에 관한 공통인식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임을 밝힐 것입니다.

4.

전국민의 지지와 후원을 받아온 지원단체가 한 학자의 책을 고발한다는, 결코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면, 검찰은 중립적 입장에 서서 고소인측 주장도 충분히 재검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아무런 재검증 없이 기존 인식에 얽매여 기소에 나섰을 뿐 아니라, 피고인이 `자발적 매춘부`라고 썼다고 보도 자료에 써서 배포한 일은,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피고인을 전국민의 지탄을 받도록 한 일은,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검찰이 국민의 명예와 인권을 심각하게 훼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인포로심문 조서

와세다대학의 Toyomi Asano 교수가 중요한 자료를 발굴했다는 기사가 오늘아침 마이니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국언론도 많이 보도한 듯 한데,아사노교수의 허락을 얻어 원자료를 번역한 내용을 올려둔다.

하나하나 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나로서는 특히 18번 위안부문제 관련발언과 일제시대 종식이후에 대한 동시대인의 인식이 드러나는 25번,26번이 흥미로웠다.

사실,`여성들을 강제로 끌어갔다면 남자들이 앉아서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건 오늘날도 가끔 듣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말을 동시대인의 입으로 듣는 건 묘한 긴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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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주: PW는 Prisoner of War (포로), PsW 는 Prisoners of War (포로들), Allied 는 연합국으로 번역하였으며, conscription 은 경우에 따라 징용 (업무의 경우), 징병 (군의 경우), 또는 징발 (위안부의 경우) 으로 번역함. MOO는 Military Operation Officer (군 운영 장교) 로 번역함)
국립 ARC 로부터 재발급
기밀문서
군 정보국
포로 및 물자부
보고일 : 1945년 4월 24일
(포로)심문일: 1945년 4월 11일
(포로)번호 및 계급: 41J-1150, 민간인, 이복도
14J-185, 민간인, 백송근
41J-393, 민간인, 강기남
WME
한인 해군 민간인 3명에 대한 종합 보고서,
리스트 78번. 45년 3월 28일 “한국인에 관한 특별 문의사항” 에 대한 회신
1538

서두
심문자에 의해 질문받은 약 100 명의 한국인 포로들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반일감정을 공유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기회주의자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 3명은 자신의 증언에 있어 신뢰할 만한 매우 진실한 증언을 보여준다. 한 포로에 대하여 별도 보고서가 만들어질 것이고 다른 두명은 추가의 심문이 필요하지 않다.

설문지
이 보고서는 45년 3월 28일의 “한국인 심문” 리스트 78번에 기초하였다. 단락 번호는 이 리스트의 질문 번호에 상응한다.

2. 지방정부의 한국인:
마을의 우두머리는 항상 한국인이다. 우두머리는 그의 정직함과 리더쉽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선출된 연장자이다. 일본인은 이 선거를 조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 관청의 관리장:
“면” 대부분의 사무소장은 한국인이다. 10개중 2개 정도가 일본인이다.
“군” 사무소의 장은 보통 한국인이다. “전라북도” 에는 14개의 ‘군’ 이 있고, 1942년 기준 9개소의 장은 일본 정부에 의해 임명된 한국인이다. (상세 정보 없음)
“읍” 사무소의 장은 주요 인구 구성에 따라 일본인과 한국인 양쪽 모두가 있다.
“부” (시) 의 장은 언제나 일본인이지만, 이외 직책은 한국인일 수 있다.
“도” 지사는 대개 일본인이다.
1942년, 전라북도, 충청북도, 강원, 황해도의 도지사는 한국인이었으며,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다.
1940년 이래 정부 관리 직책을 가진 한국인 숫자 변경은 알려진 바 없다.

3. 한국 남성은 1942 이래 일본에서 일을 하도록 징용되어 왔다. 그들은 면사무소에 의해 통지되었다. 한번에 300 에서 1,000 명이 징용되어 일본에 이송되기도 했다. 이런 이송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93 가옥이 있는 한 마을에서는 30명의 남성이2년의 기간 (1942-44) 동안 징용되었다. 징용 기간은 2년이지만, 많은이들이 3년 또는 그 이상 기간동안 체류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 포로는 석탄과 철광 광산 및 비행장 건설에서 일하던 한국인들과 여러 개인적 연결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광산의 가장 깊고 뜨거운 곳에서 일하는 등 가장 열악한 노동이 요구되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는 일당 ¥ 3.50 을 받았고 그중 ¥ 0.10 은 우편 적립으로 공제되었다. 그들에게는 음식과 숙소가 제공되었다. 징용자들의 가족을 위한 보조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그들의 집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친나이 카라푸토 (Chinnai, Karafuto) 탄광에서는 현지인과 일본인 노동자는 일당 ¥ 7.00 에서 ¥ 24.00 을 받았으나, 징용자들은 고정 급여만을 받았다. 통신은 허용되었으나 모든 서신은 검열되었다.
이들 한국인들에 대한 처우는 연합국 포로들보다 열악했다. 일본에 살던 포로는 요시마 후쿠시나켄 (Yoshima, Fukushina Ken, 역자주, Fukushima Ken 일수 있음.) 근처의 탄광으로부터 3명의 한국인이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거기엔 500 징용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들 중 한명은 그가 아키라(Akira) 로 데려가 한 탄광에서 일하게 했지만, 그가 가족에게 쓴 편지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요시마 (Yoshima)로 끌려가 15일간 고문을 받고, 타이라 (Taira) 에 수감되었다. 다른 2명은 잡히지 않았다.

4. 한국인은 1942년 이후 중국 북부, 만주 또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한 포로는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일하도록 징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두명은 만주로 보내어진 징용자는 없었다고 한다.

5. 징용을 거부하는 자는 투옥되었고 그의 가족은 식량을 빼았겼다.

6.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사진과 서명이 부착된 신분증을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

7. 농민들에게는 하루 2 합 5국 (*역자주: 2 合5局,2 go, 5 shaku,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15 리터에 해당) 의 쌀이, 그리고, 사무 직원에게는 하루 2 합 4국 (*역자주: 2 合4局,2 go, 4 shaku =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33 리터에 해당)의 쌀이 할당되었다. 추수 전, 정부 관리는 곡식을 검사하고 추수량을 예상하여 그해 농부와 그 가족 할당량을 공제한다. 나머지는 정부 관리에게 판매해야 한다.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많을 경우 농부에게 행운이고 여분의 쌀을 숨길것이지만,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적을 경우,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양에서 빼내 요구조건을 맞춰야만 한다.

8. 한국인들은 일본인 농민들은 그런 배급할당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대단히 분개하고 있다. 농민들이 반쯤 굶주리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냥 열심히 일한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1942년 전라북도의 쌀 농사는 흉년이었다. 같은 이유로 1945년의 쌀농사 결과도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 뿐이었다. 1941년 이후, 상용 비료가 모두 사라져, 모든 농사가 평균 이하의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력 부족이란 이유로 사용되지 않고 내버려진 농토는 없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전쟁 전에 비해 더 많은 농사 일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필요한 곳에 어디든 함께 돕는다.
한국의 남부지방에서는 경작지의 절반은 쌀경작에서 제외되고 면 농사를 하도록 농민들에게 요구된다. 검사원은 수확량을 예상하였다. 농민은 필요할 경우 여유분을 생산한 사람에게 빌려서 이 예상치를 맞추어야 했다.

9. 소작농은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요구되지는 않는다. (다른 계층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개개인의 인적사항은 “면 사무소” 에 보관되었다.

10. 1942년과 1944년에 각각 한국을 떠난, 농민이었던 두명의 포로는 어떤 형태로든 배급표라는 것을 본적이 없다. (다른 한명은 1935년부터 일본에서 살아왔다.) 의류 구매 요청은 직접 “면 사무소” 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음식은 그들 자신의 경작물로부터 할당되었다.

11. 1944년 4월, 한국인의, 경찰의 승인 없이 차량에 승차하여 100 km 이상을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보행자는 통제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부 관리에 의해 그들의 집에서 아무때나 검문될 수 있었다. 검문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일어나는 경우, 집 구성원 전원의 모든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1943년, 한 포로의 집은 위생 상태 점검 목적으로 두번 검사되었다. 2400 (*역자주: 밤 12시) 에는 모두에게 통행금지령이 발령되었다. 이 시간 이후 자신의 집 밖에서 발견된 모든 이들은 체포될 것이다. 가끔씩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청취 가능 거리내의 모든 마을에 사이렌이 경고의 의미로 이용되었다.

12. 전라북도 전주 근방 출신의 포로는 1938년 처음 시작된 이른바 “자원 입대” 하의 군사 훈련을 받은 여러명을 알고 있었다.
1938년부터, 6개월 반 동안의 기본 훈련이 경성 (Keijo) 또는 나남 (Nanam, Ranam) 에서 실시되었다. 훈련은 일본인들과는 별도로 실시되었으나, 일본군 운영장교에 의해 수행되었다. 기본훈련 후 지원병들은 2-3 개월의 휴가기간을 부여받은 후 전투 병과에 배속되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일본부대 속에 각각 분산 되었다. 훈련과정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본어 말하기 능력과 최소 2년의 교육이 요구되었다.

13. 징병 전 일본어 훈련 학교가 각 ‘면’ 마다 설치되었다. 학생들은 매일 3-4시간씩 1년간 출석했을 것이다.

14, 15. 포로들은 징병법 (*역자주: 또는 징용법)이 발효되기 전에 한국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이것과 징용으로부터 도망친 한국인들로 부터 전해 들어왔으나 그들의 이름을 말할수는 없었다. 한국 북부지방 출신들은 그 법에 대해 남부지방 사람들보다 저항하는 경향이 크다.

16. 포로들은 “Tonari Gumi” (*역자주: 일종의 반상회) 를 알고 있었으나, 한국 내의 그런 조직에 대해 들어본 바는 없다.

17. 이 전쟁은 철도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비율 또는 직책에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정거장 감독을 제외한 차장, 철도 엔지니어, 또는 다른 어떤 직책도 한국인이 종사할 수 있다.

18. 포로들이 태평양에서 보아온 한국 매춘여성 모두는 자원자였거나 또는 부모에 의해 매춘업에 팔려온 여성들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직접적인 여성 징발이 있었더라면 노인과 젊은이들이 모두 이것을 감내하지 않고 격분했을 것이기에, 이것은 한국적 관점에서 적절한 것이었다. 남자들은 분노로 궐기하여 이후 그들이 당할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일본인들을 죽였을 것이다.

19. 한국이 독립했던 당시를 살았던 나이든 한국인들은 변함없이 일본인을 미워한다. 몇몇 일본 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친일본성향이더라도, 그들중 여럿은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그들의 기분을 대담하게 말한다.

20. 모든 포로들이 그들이 강제로 징병되었다고 말한다.

21. 한국인들은 그들이 겪어온 이 전쟁의 효과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여럿은 이것이 결국은 그들의 독립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관용이다.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한 포로는 명백히 친 러시아이며, 한국에 공산주의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없고, 한국보다도 훨씬 무능한 나약한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을 그들의 해방자로 기대하고 있다.

22. 태평양 섬들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매우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모든 포로들이, 자신들을 연합군에 넘길까봐 두려워한 일본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 노동자들을 알고 있었다. 티니안 (Tinian) 에서 잡힌 포로는 미군 전선으로 향하는 3명의 여성들을 (그들중 둘은 등에 아기를 업고 있던) 보았다. 포로와 함께 같은 동굴에 숨어있던 한 중위가 그들 모두를 보안의 이유로 죽였다. 그 포로는 자신이 한국인이란것이 알려졌다면 자신도 분명히 죽었을거라고 확신했다.

23. 포로들은 그들이 하와이에 있는 동안, UN 서약에 따른 적정 절차에 의해 “독립 한국” 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두 들었다. 그들이 이 정보를 한국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4. 모든 포로들은 모든 한국인들이 일본과 싸우는데 뛰어들 것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믿고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질것이라는 사실이 전에 알려졌다면 이 명백한 일본에의 충성은 빨리 톤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부 지방 출신의 포로는 남부지방 사람들은 더 수동적이고 일본인들과 싸우는데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적다고 말한다. 독립 운동은 보통 북부지방의 더 활동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원한다. 이 3인의 포로들은 군사 훈련을 받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싸울 기회를 환영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게릴라전에 적합하게 특화되있다고 느낀다.

25. 한국인이 관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분개는 없다. 개개인은 미움을 받을 수 있으나, 미래 한국의 정부를 위해 전체적으로 그들이 관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6. 한 포로는 모든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한다. “일본인은 언제나 심장부터 일본인이다.” 라고 말하고, 일본과의 미래의 문제 때문에 일본인의 잔류는 한국에 손해라고 말한다.
다른 포로는 단지 고위 공직자들만 제거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이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과 역발란스를 맞출수 있을수 있다고 본다.

27. 포로들은 한국이 UN 대표들로부터 임시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있을것이다. 미국의 직접 통치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다른 나라의 경우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

28. 마을 정부 (주: 면, 읍 등) 는 나라가 UN 통치하에 놓이면 별도의 도움 없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각 군에 평균 60 명의 경찰이 있으며, 50% 가 한국인이다. 이 비율은 더 많은 경찰 병력이 훈련될 때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29. 여운형은 한국 독립 운동의 활동적인 멤버로 알려져있다. 그는 1942년 경성 (Jeijo) 에 살았다. 다른 상세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30. 한 포로는 1943년에 일본에서 일했던 한국 공산당의 리더 한명에 대해 들었다. 알려진 유일한 이름은 ‘김’ (가네모토, Kanemoto) 이다.

 

원본 : 「参考資料5」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1088796251178782.1073741825.100001452518600&type=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7576867935890

 

19금 도서 지정 관련 보도

성남도서관에서 나의 책들을 19금 도서로 지정한 배경을 취재해 준 기자분이 있었다. 깊이 감사드린다.

우연히도 오늘, 서울의 한 남자 고등학생 둘이 <제국의 위안부>가 “방과후수업”의 과제도서였다면서 남은 질문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었다. 고등학교 1학년. 책을 읽고 찾아온 학생중에는 최연소다.

책을 너무 좋아한다는 두 학생한테 성남시 조치 얘기를 했더니 학생들도 기막혀 했다.

아이들은 때로, 어른들을 훌쩍 앞서간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6090107263917300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6654784694765

 

渦中日記 2016/5/13

오랫만에 다시 “渦中日記”를 쓰기로 한다.

고발이후 한동안, 재판관련 그리고 책관련 일을 이 제목으로 썼었다. 그러다가, 기소 이후부터 이 제목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渦中日記”라는 제목조차 사치스럽단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1월에 민사패소하고 2월에 가압류를 당하면서,그 외에도 한일합의 이후 부쩍 심해진 공격을 하루가 멀다고 받으면서, 약간의 무기력증이 오기도 했었다. 어차피 일일이 대응할 수도 없고 여론을 살피는 사람을 따로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니 비난글들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월말에 한겨레가 비판글을 올렸기에 반론을 썼지만, 요즘처럼 재판준비에 쫓기고 있는 시기에 시사인,오마이뉴스, 그리고 녹색평론,..이런 식으로 연달아 나오면 반론을 쓰는 일도 부담스럽다.

정말 써야 하는 책을 쓸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다.

앞으로는 책/재판관련 해서 “일어난” 일만 간단히 쓰기로 해 본다. 渦中日記를 쓰는 날이 많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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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박경신교수의 SNS발언에 항의포스팅. 이런 작업은 늘 우울하다. 비판하는 이들이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짧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하루종일, 법원에 제출할 자료준비를 위한 작업.책에 사용한 자료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굳이 밝혀야 하는 작업의 무의미성에 견뎌야 했던 시간. 명백히 소모적인 시간들에 의미를 부여해보려 하지만, 그 노력자체에도 가끔은 지친다.

1940년 전후의 수양딸제도관련기사와 인사소개업자들의 호적위조관련기사가, 나눔의집 할머니들 중에 수양딸로 갔던 분들이 있었던 걸 생각나게 만들었다. 되돌아 온 딸을 다시 내다 판 아버지 때문에,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소녀들. 그러나, 그런 주변인들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자고 했던 나의 제안은, 여전히 공중에서 부유중이다.

“책임”에 대해 생각하려면 자아가 강해야 한다. 물론 그런 “시대”에 대한 연민도 필요하다.

변호사사무실에서 돌아오면서, 많이 졸렸다. 운전하면서 졸렸던 건 별로 없었던 일이다.
피로가 누적된 탓이거나, 노화현상이거나.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66352310058346

급진의 보수화/정의의 악의

이 며칠 도를 넘어선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뒤늦게 시사인 기사를 보았는데, 자료에도 없는 소리를 내가 지어낸 것처럼 쓰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와카미야 선생 사망 소식을 그 밤에 들었으니 내겐 최악의 날이었다.

비판자들은, 자신이 단 한사람을 향해 집단 공격에 참여중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재판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있을 것이다. 재판내용과 상관없는 비판마저 “박유하의 책은 문제있는 책”이라는 담론이 되어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물론 이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더 할 말은 없다.

정영환 비판조차 잘못 옮긴 것으로 보이는 이 “편집위원”은 알고보니 아직 박사과정 재학중인 학생이라고 한다. 아사히신문출판사에 정정을 요구하는 패기는 좋았지만, 그전에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보인다.

“제국의 변호인-박유하에게 묻다”는 책도 나왔다.
제목을 붙인 이는 페이스북에서도 나를 비난했던 손종업씨라는 걸 알았다. 그는 고발 직후에 내가 일본에 돈을 받은 것처럼 쓰고 금년 들어서는 나를 아이히만에까지 비교하며 비난했던 이다.
비판보다도, 제목의 함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를 데려다 책을 만든 이들의 존재에 더 한숨이 나온다.
이미 여러번 말했지만 “제국의 위안부”란 “제국에 동원된 위안부”라는 뜻이다. 설사 주체적으로 보였거나 행동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책은, 내용의 오용에 이어, 이제 제목마저 오용되고 있는 중이다.

대중선동이 “비평”의 얼굴을 하고 세상에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혹은 정의의 얼굴로.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정의와 악의는 고작 한 글자 차이다.

나뿐 아니라 나를 옹호해 온 이들에 대한 비판도 담았다니 사태는 이제 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일본에서 2007년부터 시작된 갈등이 10년후 한국에서 본격화된 양상.
그때와 다른 것은 그때는 비판자들이 극소수였지만 지금은 수십수백명이(그 뒤엔 수천명이) 한미일 연대망을 이용해 나 하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론 현실적패배감이 부추기는 일일 것이다.

< 제국의 위안부>는 지원단체와 일본의 일부 지원자를 비판한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응답”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의 응답은, 10개월에 걸친 침묵끝의 고발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학자들마저 본격적으로 지원단체에 발 맞추고 있다.
연구와 학문이 운동논리를 사유하지 못했던 건 사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운동이든 이론이든,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면 보수화 될수밖에 없다.

급진의 보수화는 피해자로서의 마이너리티 의식이 만든다. 하지만 마이너리티가 온전히 정의일 수 있는 것은,그들이 적으로 간주한 이에게도 정의로울 수 있을 때다.

나를 두고, 한편에선 “제국의 변호인”(손정업)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국에 대적해 온 “일본 리버럴(진보)의 비겁한 무기”(정영환)라고 한다. 이들에겐 내 책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 같다.
혼란은 선입견이나 목적이 있었을 때 일어난다. 기존인식에 꿰어 맞추려 하는 한, 거기서 일탈하는 기술들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금년들어 이들의 공격이 강해진 건, 일본어판의 수상과, 오에겐자브로/우에노치즈코/고노&무라야마 등의 지식인 성명, 그리고 한일합의에 원인이 있는 듯 하다. (한국은 물론 일본판 위키페디아마저, 정영환을 비롯한 이들의 시각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내겐 남의 일이 아니다)

위기의식은 이해하지만, 사태를 정확히 파악 해야 이길 수 있다. 일본을 20년 이상 비판해 왔으면서 운동이이길 수 없던 건, 정확하게 비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시작된 한일진보시민연대의 문제와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민주”라는 개념이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기능했던 시대에서 30년이 지났다. 군사독재국가를 넘어선 시대의 “민주”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어야 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59084934118417

이미지와 폭력–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한일합방 36년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이 땅에서 본격적인 권력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청일전쟁때 부터였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의 전쟁터는 일본도 아니고 중국전체도 아니고, 중국의 극히 일부와 조선땅이었다. 민비암살이라는 끔찍한 폭력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그런 유린의 연장선상의 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민비가 암살당했을 때、일본언론은 그 사실을 충격이 아니라 당연한 일처럼 보도했다. 심지어 훗날 일본의 문호로 추앙받게 되는 26살청년, 나쓰메 소세키조차 “최근에 가장 고마웠던 일은 왕비 살해…”라고 친구 마사오카 시키에게 감상을 적어 보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일본인들이 원래부터 냉혈한이기 때문일까.

일본언론은 일찍부터 민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질투많고 권력욕 강한 악녀. 그것이 민비에 관한 보도들이 만들어내 일본인 안에 심어놓은 이미지였다.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젊은 엘리트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한건지 모르도록 만든 것은 그런 식의 편향적 보도들이었다. 또 훗날 일본군이 중국 전쟁터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편견을 바탕으로 교육되고 확산된 차별의식이었다.
폭력행사는,타자를 고통을 모르는 물건으로 봐야 가능한 일이다. 미움과 차별은, 때로 그 필수조건이 된다.

어제 한국정부가 구마모토에 뒤늦게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 위안부할머니의 성금을 둘러싸고 찬반이 격렬한 듯 하다. 뒤늦은 대응과 기부에조차 차갑게 닫힌 2016년 대한민국의 심성에 대해서 일부언론이 비판적인 칼럼을 내놓았지만, 그런 신문들조차 “일본에 대한 미움”은 당연한 듯 전제된다.
그리고 미움의 크기는 늘 위안부문제에서 가장 크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하는 파렴치한 태도, 과거의 잘못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뻔뻔스러움”(2016/4/21.국민일보)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90년대 들어 시작된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은, “파렴치한” 일본상, 그리고 이제 악마같은 일본상 구축에 성공했다. 미운 건 일본이 아니라 일본정부라고 뒤늦게 말해본 들, 이대로 가면 일본과 전쟁을 한다 해도 기꺼이 참여할 피끓는 청년들과, 그들을 등두드려 내보낼 국민들이 대다수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현재의 북한이 그런 것처럼.

이 모두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이 20여년의 보도–독자적인 조사도 관계자들에 대한 취재도 없이 그저, 지원단체가 주는보도자료들을 언론이 받아써 온 결과다.
물론 그런 보도들을 추인하거나 리드하기조차 했던 지식인들이나 전문가들의 책임 역시 작지는 않다 . 또 최근 몇 년동안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끔찍하게 형상화할지에 골몰하고 졸속공부에서 경쟁했던, 그림과 영상 제작자들 역시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 국민다수의 생각을 만드는데 일조한 이들이라면, 이미지와 지식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일상속에서의 적대와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더 큰 폭력에 대한 책임의식을 뒤늦게라도 가져봤으면 좋겠다. 물론 수용하고 전달해 왔던 우리 모두도.
악마화 하지 않고도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 악마화는 오히려 본질을 놓친다.
“뻔뻔한 일본””사죄않는 일본”이미지의 재생산 속에서 우리가 해 온 일은 고작,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었다는 이승복 소년을 소녀상으로 대치한 일 뿐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한다.

우려되는 것은 사실 일본에 대한 몰이해가 아니다. 그 몰이해가 만든 미움이, 우리를 조금씩 냉담하게 만들고 있는 정황이다. 또 우리를 그렇게 편협하고 차가운 한국인으로만들어버리고 만 상황이다.
인간의 죽음에조차 쾌재를 부르는.
26 살 나쓰메소세키처럼.

일본인들을 돕는지 여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2016년 봄, 대한민국은 대만과 달리 구마모토에 냉담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정황이, 20여년동안 남의 말에 결코 귀를 기울이는 법 없이, 양극단 사람들의 적대와 과장과 은폐에 휘둘린 결과라는 점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건 바로 그런 적대와 증오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증오를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채 먼저 희생된다. 불화 역시 마찬가지. 적대담론의 폭력성을 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추신)
재해때마다 화제가 되는 “일본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재해가 많아 체념적이 되어서도 아니고, 그저 어릴 때부터 방재훈련을 많이 받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일본어머니들이 자식에게 가장 많이 말한다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배려심이 몸에 밴 결과일 뿐이다.
긴급한 순간에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해야 가능하다. 자아보다 조화, 나의 욕망보다 타자의 평안에 가치를 두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50782178282026

혐오의 방정식

일본의 위안부문제 지원자들도 더이상 하나가 아니다. 한일합의에 관해서도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이 기사에 언급된 이들은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 중인 이들이다.

분명 이들이 말하는 대로, 일본인들 일부가 내 책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얘기에 멋대로 이용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독해력과 무절제한 왜곡욕망의문제. 심지어 영어요약을 멋대로 만들어 내가 한 요약인 것처럼 유포중인 블로그조차 있었다. (일본쪽 출판사에 대응을 의뢰중)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내 책을 멋대로 왜곡하는 건 이들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이 20수년간의 한일갈등은 이 양쪽이 그런 식으로 세간에 제공해 온 정보의 과장과 은폐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책이 평가받은 건 일본의 책임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책임”임을 말했기 때문이고, 이 양쪽 세력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그런 나의 논지에 공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젠가 전여옥이 “일본에는 추녀만 많다”면서 “일본은 없다”고 했던 것처럼, 소수 문제적인 이들에게만 주목하면서 그들을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한 사람들이다.
더 불행한 건 이 양쪽은 똑같이, 자신들이 확산시킨 혐오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의 인권을 말하지만 나의 인권은 개의치 않는다. 이들이 며칠 전, 내가 감옥에 갈 수도 있는 형사재판을 반대하지 않는 자세를 분명히 한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기사 오류를 바로 잡아둔다. 물론 이번 경우 기자가 아니라 발표자가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군관여부정–일본군 조선반도 “공식적 강제연행”부정
*책임부정–“법적” 책임 부정

타자에 대한 적개심과 처벌을 부르려는 행위가,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던 슬픈 봄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8315212&sid1=001


본문:

혐오의 방정식일본의 위안부문제 지원자들도 더이상 하나가 아니다. 한일합의에 관해서도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이 기사에 언급된 이들은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 중인 이들이다. 분명 이들이 말하는 대로,…

게시: 박유하 2016년 4월 7일 목요일

渦中日記 2016/1/15

집에 돌아온 지 36시간 경과.
대부분을 “無為”의 시간으로 보냈다.

고발직후, 가처분판결직후, 기소, 한일합의, 그리고 민사재판 판결. 다섯번째 반복된 “집단비난”의 결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한일합의 이후, 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드러나게 박대통령지지자들인 게 눈에 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를 둘러싼 사태를 나는 어느정도 분석할 수 있고(할머니,지원단체, 대중,학자,언론,일본..), 어쩌면 내가 가장 잘 아는 일이니 내가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일이 쓰기에는 의욕과 힘이 충분치 않다.
언젠가, 일본도 잘 아는 누군가가, 그 일을 해 주기를 바라고 싶다. 내가 페이스북등이나 그 밖의 글/인터뷰를 통해 해 온 얘기는 내가 알고 경험한 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내가 “자발적 매춘부”로 쓴 것은 아니라는 걸 독자들이 알 수 있게 쓴 기사가 눈에 띄었다. 2013년 1월, 꼭 이맘때 평화로웠던 시기의 평화로운 대화의 순간을 올려 준 경향신문 기자의 마음이 고맙다.
어쩌면 모든 것이 “지적태만”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대신 넘쳐나는 “정서과잉”과 “욕망”들이 만든 일.

80년대엔 국가폭력이 국민을 옥죄었다.
“민주”화 된 2010년대엔, “국가화된 국민”이 “개인”을 옥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책에서 “국가에 동원되는 개인”의 아픔에 대해서 썼었다. 그런데 나 역시 그 한사람이 되었다.

“참을 수 없는 아이러니”들을 견디면서,
풀기엔 너무도 많은 층위의 옥죄는 구조들, 얼키고 설켜 이미 보이지 않는 “악의”들을 풀어야 하는 과제가 내 앞에 놓여있다.
2016년도 힘든 한해가 될 것 같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601131905341&code=940100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7987926561452

渦中日記 2016/1/13

인천공항에 4시반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켜니 여기저기서 문자.
2시에 있었던 민사재판 선고에서 판사들이 원고측 손을 들어주었다는 소식들. 뒤이어 법원의 보도자료가 도착했다.

극심한 아이러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어쩌면 이 재판은 아주 오래 갈지도 모르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6956113331300

渦中日記 2016/1/12

워싱턴심포지엄에 대해 한국언론들이 또다시 왜곡기사를 많이 썼다고 들었다.
일본측에서 나온 기사를 올려둔다.

이 기사가 “합의과정이 불투명했다”고 쓴 것처럼, 이날 내가 주안점을 둔 것은 “정부간합의만으로 끝났다고 할 수 없다”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운동가들 편에 서서 한 이야기다.
미국도 이번 합의를 환영한다고만 했으니, 합의에 비판적인 생각을 미국의 한가운데서 말하는 일에 나는 의미를 두었었다.
그리고 일본언론은 그 점을 정확히 짚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번 심포지엄 참석자들의 의견은 다르지 않았다.

한국언론에서도 그런 보도가 있기를 바라고 싶다.
앞서 올린 발표문에도 있는 것처럼, 나는 분명 “업자”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조선인”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일본인을 포함한 지적이었다. 일본인 업자가 더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이니 실제적인 이익도 더 많이 얻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착취가 민족을 넘어 연대했다는 것을 나는 책에서 말하고자 했다.
그런데 지레 조선인 비판으로 간주하고 굳이 하지 않은 “조선인업자”라고 해설을 추가한 보도도 봤다.

(운동가들에게)도움이 될 얘기조차 무시하고, 낯선 얘기에만 촉각을 세우는 태도. 이제 그만 그런 태도를 지양하고 지혜로운 태도를 취해주기를 모든 비판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http://www.jiji.com/jc/zci?g=pol&k=201601%2F2016011200169&pa=f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6363176723927

渦中日記 2016/1/7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아직 여유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이번 워싱턴 행이 “일본의 돈”이라는 악의적인 기사를 봤다. 이번 회의는 윌슨센터와 와세다대학의 공동 프로젝트인 “동아시아에서의 과도기 정의 수립”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학문적 회의다.
갑자기 “한일합의”가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 문제도 언급되겠지만, 그 얘기를 중심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도 아니다. 전에도 썼지만, 이 회의는 반년도 더 이전에 계획된 회의다.

한일합의에 대한 의견을 쓰라고 종용받기도 했는데, 내 의견은 분명하다. 갑작스런 합의는 문제가 있다. 국민적납득과 합의가 가능하도록 논점을 공론화하고 국민이 공유하는 절차와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대립되는 학자들이 접점을 찾는, 당사자도 포함하는 “협의체”를 만들라고 책을 낼 때부터 제안했었다.
그러니 이런 합의에 내가 무조건 찬성하거나 웃을 거라고(나의 힘이 그렇게 클 리도 없다) 생각하는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어렵게 결정된 것이니 순서는 거꾸로 되었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일본지원단체가 이 합의를 “운동의 성과”로 받아들인 식의 긍정마인드를 나는 평가한다.

정부가 내내 지원단체와 논의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마지막에 배제된 모양이다. 지금의 격렬한 반발은 거기서 온 듯 하다.
정부가 배제한 건 위안부할머니일까. 혹은 지원단체의 주장이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언젠가 밝혀지리라고 믿는다.

분명한 건, “또 다른 백억원 모금”의 발상은 이미 1997년에 정대협이 시도했던 일이라는 것.
일본국민의 “속죄금”과 “의료복지비”를 정대협이 거부했고, 받은 일곱 분 할머니들을 정대협이 비난하며 모금을 시작했고, 초라한 모금실적에 한국정부가 나서서 할머니들에게 같은 금액의 지원금을 지급했었다. 그건 한편으로는 “할머니들은 우리가 돌본다”는 발상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요구는 요구대로 이어졌고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성공했지만 일본인들의 마음은 더 닫히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니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15년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할 각오,그리고 시작하기전에 “모든”위안부할머니께 그런 선택에 대한 수락을 받아야 할 거라는 점이다.
엄마부대나 어버이연합도 문제지만, 그들이 문제라고 해서 운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일 수 밖에 없다.

필요 있어 다시 읽었더니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쓰인 이 글이 가슴에 더 와 닿아, 일본 학자의 글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올려둔다. 이들은 진보학자들이고 자신들의 운동을 반성하는 차원에서의 글이다.
전에 한번 전문을 올렸었지만 특히 중요한 부분만 몇 번에 나눠 올리려고 한다. 위안부문제에 관심갖는 사람은 꼭 읽어야할 논문이 될 것이다. 나의 의견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전문은 곧 어떤 잡지에 게재될 것이라고.

——–
“한편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몇 가지 논쟁적인 대립점이 표출되었다. 예를 들면 ‘위안부’ 논쟁의 존재방식을 둘러싸고 메타 차원에서 재귀적(再歸的)인 물음을 던진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내셔널리즘과 젠더』 세이도샤, 1998년)와 박유하(『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사토히사시 번역, 헤이본샤, 2006년)를 둘러싸고 문제의 방법론적 심화와 자기성찰의 계기가 만들어진 측면도 있었으나, 때로는 이에 대해 운동의 분열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주장도 나왔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현재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아사히신문출판, 2014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이토록 비판이 분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 사이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도 이 시기에 운동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성적인 물음과 문제 제기를 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박유하와 마찬가지로 정대협 측에도 문제의 단순화와 일면화(一面化)가 있는 게 아니냐는 자문자답이었다(야마시타 영애『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아카시쇼텐, 2008년). 그러나 분열과 분단 속에서 그러한 문제 제기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문제의 국면이 다양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위안부’ 논쟁은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제기된 것과 같은 보편적인 문제 보다는 민족적 담론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게다가 본래 이 문제와 모순될 수 있는 국제적인 맥락이 덧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면 정대협은 국제적인 반향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한편으로 문제를 국가 단위로 잘라 놓는 것과 같이 단순화해 버리고 말았다. 미국 하원에서는 정대협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태로 의회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가 세밀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에서의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피해자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로 결의가 이루어졌고 문제를 심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취급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소녀상’을 사용하여 피해자의 일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니는 복잡한 정치적 측면(politics)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젠더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에노 치즈코가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모델 피해자론’이라는 형태로 이미 지적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한 일본의 전후(戦後)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오사 시즈에(長 志珠絵)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2738360419742

渦中日記 2016/1/3

이번 주말에 워싱턴에 가기로 되어 있다. 반 년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동북아역사화해에 관심이 많은,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의 이런저런 회의에도 자주 참석하는 일본인교수와 미국교수들이 기획한 회의다. 다른 한국인 교수도 참여한다. 위안부문제에서 지원단체 입장에 가까운 발언을 해 왔던 미국인 교수도 함께 이야기한다. 내가 메인인 것도 아니다.

이 모임이 기사화 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런데 정확하게 쓴 건 경향신문 뿐이었다.
연합뉴스는 “일본 정부와 재미일본인 커뮤니티”의 초청인 것처럼 쓰고 있다.미주 중앙일보 역시 마찬가지다. 명확한 “허위사실유포”에 해당한다.

나에 대한 개인의 비방은 너무나 많다. 따라서 그 안의 왜곡이나 허위를 일일이 지적할 수도 없다. 학자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그런 이들을 모욕죄나 허위사실유포죄로 고발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들도 많다. 트위터에서 반복적으로 “박유하를 파면하라!”면서 자발적인 위안부라 했다”는 고발직후 뉴스를 반복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이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고발한다면 첫번째 대상은 나눔의집 관계자들이다. 허위사실유포를 시작한 건 그들이었다. 그 외에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대상은 한두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이들을, 1년반동안 나는, 그냥 견뎌 왔다.

하다 못해 언론이라도 바로 서 주기를 바란다. 개인이 아닌 집단이니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해주기를 바라고 싶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대응하려 했다면 나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나에 대한 숙청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자체적으로 수정해주기를 바란다. (고발직후 보도가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수정 혹은 삭제된 연합뉴스, 한국일보, 한겨레, 조선일보 기사를 참조해 주기 바란다)

내가 꼿꼿해서 얄밉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의 심리가 서글프다.
나는 내가 지쳐 쓰러지거나 퇴출당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할 뿐이다. 또, 비열한 미움은 때로 나를 강하게 만든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909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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渦中日記 2016/1/2

그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나를 비난하는 글을 여러개 읽게 되어 새해 첫날부터 우울했다. 한일양국 정부가 만든 일이긴 하지만 정초부터 그런 글을 읽을 나에 대한 배려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튼 새로운 움직임을 보면서 새롭게 안 것이 있다.이제 여성들이 나서고 있다는 것. 그들의 분노 역시 “그들안의 소녀”를 내가 훼손시킨 데 대한 분노였다는 것.

얼마전 아이유사태때 썼던 글을 다시 올려 둔다. 이번에 나선 건 “대중”이라기보다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여성들이다. “해석된 인물”이 현존하는 인물인지 소설 속 인물인지의 차이는 있지만. 물론 나는 근거 없이 해석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이들은 내 책에서 느꼈다고 한 “할머니의 아픔”을 인정하지 않는다. “공감의 독점”현상. 우파나 일본이 하는 일은 언제나 위선이고 꼼수로 간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를 스파이로 보고 싶어 하는 이유도.
이들에겐 오로지 우파나 일본과의 “거리두기”만이 “올바른 인간”의 기준이 된다.

모든 사안에서 정치적 입장이 앞서면 판단과 발언과 행동이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학력사회의 단순사고 지향.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경험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대로 가면 정권교체는 언제까지고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 사실 나의 관심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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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의 권력과 억압만 파시즘적인 건 아니다. 대중 역시 권력을 갖고 있고 때로 스스로 파시스트가 된다.

아이유에 대해 음원폐기마저 요구하는 이들은, 체제권력 이상으로 폭력적이다. 더구나 이런 식의 폭력은 “민주””민중”이라는 이름 아래 그 폭력성이 인식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들이 보호하려 하는 건 제제가 아니다(심지어 제제는 현실인물조차 아니다.) 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가져왔던 이미지를 지키려 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 깨진 데 대한 분노를 발산시키고 있을 뿐. “나의”라임오렌지나무가 훼손된 데 대한.

국가도 국민도 불필요한 일에 목소리가 너무 크다.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이 진정으로 걱정된다..
(11/7. 페이스북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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