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5/4/24

오전에 검찰에 다녀왔다. 지난 겨울 나를 범죄자 취급했던 검사는 결국, 판단을 보류한 채로 이동해 버렸었다. 그리고 새 담당검사는 지난번 검사보다 훨씬 젠틀했지만, 기소할 생각을 내비쳤었다.

그런데 그 검사가 이번에는 “형사조정”이라는 것을 권했다. 기소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쌍방의 이야기를 같이 듣고 몇몇 위원들이 조정하는 것이라니, 지난 가을에 했던 언론중재위원회와 비슷한 거 아닐까 싶다.

우연히도, 아침에 나온 뉴스를 보니 지원단체가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 대한그 간의 주장을 바꾼 것 같다. 사실 내 책은 지원단체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말하려 한 책이었다. 생각을 바꿨다면 이제 소취하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아무튼 5월엔 원고측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이 좋은 봄날에 다시 검찰에서.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05758416117738&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4/17

사람이나 언론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앞으로는 진보든 보수든, 나의 논지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이들이면 기꺼이 소통할 생각이다. 나를 상처준 이들은 이른바 진보계열에 속하는 이들이지만 그들은 보수 이상으로 보수적이었다. 오로지 기존주장이나 입장을 “지키려”고만 했다는 점에서.

물론 그들 안에도 지혜롭고 유연한 이들은 당연히 있었고, 그동안 견뎌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들 덕이다.

나에 대한 비판/지지여부를 나누는 건, 좌우이념이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정보량과 사고의 유연성인 듯 하다. 그럼에도 가장 극심한 폭력이 좌우 양극단에서 나왔다는 건 지적 보수의 정서적 빈곤을 보여준 것일 터.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을 만드는 건 언제든, 이념도 이상도 아닌, 인간성이다.

그런 생각으로 응했던 첫번째 글이 나왔다. 일본어판도 영어판도 있는데 정작 한국어판은 못 만들었던 <제국의 위안부>요약이다. 나는 기지를 반대하기 때문에 보수적 입장에 있는 이들도 나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이 좌우 상관없이 읽혀졌으면 좋겠다. 최소한의 공유가능한 부분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기 때문에.

(제목은 내가 붙이지 않았다.ㅠ)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38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01385753221671

渦中日記 2015/4/6

오늘, 새 변호사를 선임했다. 1심에서 승소한다 해도, 혹은 원고측이 취하한다 해도 6천만원 가까이 들어가는 소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2심이나 3심으로 이어지거나 혹 패소까지 하게 되면 비용이 더 추가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이 내겐 진짜로 재판이 시작되는 날이 되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94686587224921&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4/3

어젯밤 귀갓길. 생일파티를 해 준다는 동료들과 개강모임겸 만나 식사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났다. 앞차가 사고난 것도 모르고, 밀리는 건 줄 알고 한참을 얌전히 기다렸을만큼, 비가 퍼부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 앞을 보고 있지만 아무도, 정말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올해는 꽃을 봐도 여느 때처럼 설레지 않는다. 아무래도 감각기관의 어딘가가 상처입었나 싶기도 하다. 나를 향해 겨누어지는 적의와 다가오는 위로의 반복 속에서, 내 마음도 부침을 반복한다. 꼭 병행되는 건 아니지만. 가라앉는 나는 어린아이의 자아이고, 담담하고 당당한 나는 어른의 자아이다. 어린아이의 자아와 어른의 자아는 아직 내 안에서 행복하게 조우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과잉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지나치게 경박하거나 지나치게 냉철하게.
어린아이의 자아가 부끄러워질 때,문득 노인의 자아를 생각한다. 여러가지로, 아이와 노인에겐 공통점이 많다.

하나의 사태에 대해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마도 윤동주는 “쉽게 쓰여진 시”를 부끄러워 했을 것인데, 윤동주를 사랑하는 우리는 “쉽게 말하고 쉽게 단정하고 쉽게 규탄하는” 일에 대한 주저와 부끄러움이 없다. 온나라에 분노와 규탄과 고발이 넘치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터. 분노와 규탄, 그에 대한 무시와 조롱과 경멸이 넘치는 지금의 대한민국상황은, 뒤늦게 온 세기말적 상황처럼도 보인다.

본안재판을 향해,이제 수임료를 지급하고 진행하기로 했다. 최소 수천만원의 소송비용에, 패소할 경우 지급해야 할 수억원의 돈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나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도, 함께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납득가능한 답이 있다면, 내게 보내 주기를.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92172664142980

渦中日記 2015/3/27

생일 전후해서, 나에 대해 언급한 칼럼, 인터뷰가 실린 신문과 잡지등이, 마치 선물처럼 도착했다. 5쇄를 찍었다는 연락도 왔다. 일본의 한 지인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아마존의 독자평까지 보내 주었다. 일본어판이 나오고나서 이어졌던, 과분하리만큼의 호의적인 평가에 반발하는 비판들이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해 내가 우울해 했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했던 건,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이 정말은 나의 적일 수 없는 이들이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 이십여년의 운동과 연구를 부정당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선지,우익의 비판보다 훨씬 집요하고 적극적이다. 타자에 대한 중상과 비방이 아니라도 자신을 지키는 일은 가능한데.

하지만, 그런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의도한대로, 있는 그대로 읽어주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비판자들은 내 책이 일본의 우익을 기쁘게 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은 모두 우익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다.

우파든 좌파든, 마음을 비우고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시민의 힘이 정부와 보수를 흔들 수 있도록.
————————————
(전략)

최대 현안은 위안부 문제이지만 이와 관련해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

일본에서도 발행된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씨가 한국에서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 당국의 조사를 받은 것이다. 이미 저자에게 불리한 출판금지 가처분 결정이 나온 데 놀랐지만 이에 더해 오해와 곡해로 인한 심각한 비방 중상이 난무하고 있어 유감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 책은 한일 양국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주장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해왔다고 지적하며 과감한 문제 타개를 요구한 의욕적인 작품이다. 일본에서 평가가 높은 것은 결코 우익이 기뻐해서가 아니라 해결을 바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내용이어서 이론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는 언론의 장에서 논의하면 좋지 않은가. 만에 하나 공권력이 그녀를 기소하면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선진 제국은 마침내 한국이 ‘언론을 억압하는 나라’라고 낙인을 찍을 것이다. 그래서 기뻐할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도 스스로 공통의 가치관을 버리지 않도록 절실히 바라고 있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2015/3/19,동아일보)

읽는쪽도 시험당한다. <제국의 위안부>에는 그런 평이 있다.

위안부를 데리고 다닌 업자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지적을,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싶은 논객은 환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논지의 한 부분만을 멋대로 가져다 쓴 결과다.박교수는 위안부를 낳은 구조를 명확히 밝히려 한 것이고 누군가를 면죄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아시아여성기금을 높이 평가했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일본의 대응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속단이다. 기금의 존재는 위안부의 고통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지려던 생각이 국회(국민)의 다수생각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마세타츠야 홋카이도 신문 해설 위원, 2015/3/24, 홋카이도 신문)

아사히신문의 오보정정으로 인해 마치 2차대전때 위안부문제는 없었다는 식으로 외치면서 역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려는 이들이 있다.

남경사건에 관해서도 그렇다.(중략)
한국의 저자인만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탓에 다른나라 위안부와는 또다른 가혹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TKo, 아akwhs 아마존 독자평)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87635244596722

渦中日記 2015/3/14

며칠을 오에선생관련 일로 보냈다. 나로선,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잠시 잊고 싶었던 며칠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문학이 정치나 역사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하루하루가 정치(사회구조)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에 선생 역시, 개인의 내면이 어떻게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때로 억압받게 되는지를 일관되게 써 왔다.
그리고 내게 오에선생의 작품은 초기의, 수재작가다운 명료하면서 건조한 작품들보다, 작가자신이 말하는 후기작품들을 통해 다가왔는데, <인생의 친척>,혹은 <새로운 사람아,눈을 떠라>등에서 받았던,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오래도록 선생의 작품을 읽게 만든 힘이기도 했다.

<인생의 친척>에서 선생은, 지적/신체적 장애아였던 두 아들이 자살한 후,슬픔과 절망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종말을 맞이하는 한 여성을 그려내면서 “슬픔”을 “친척”같은 것이라 표현한다.
실제로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란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일 터이고, 설사 순간순간의 기쁨이 있다 해도, 그 기조가 가라앉은 슬픔일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물론 나쁜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슬픔이 아니라, 어떤 부조리와 불균형과 파괴의 의미를 매일처럼 “생각해야 하는” 슬픔.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선생의 자택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아들 히카리(光. 빛)씨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존 엘리엇 가디너가 연주한 바흐 마태수난곡을 선물했다. 2012년 봄의 일이다. 오에 선생님께도 그 전에 에스페리온 20이 연주한, 역시 바흐의 the art of fugue 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근처 프랑스식당으로 식사하러 나갈 때, 선생은 현관에서 몸을 굽혀 아들이 신발을 잘 신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 때 나는 선생의 슬픔을, 목도했다고 느꼈다. 그건 단지 어떤 불편함도 아니고 번거로움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움이나 시혜가 동반하기 쉬운 어떤 감정도 아니고, 그저 인생의 무게, 같은 것이었다. 삶에 대해 경건해질 수 있고 인생에 겸허해 질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그러나 자주 잊어버려 인생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사진은 2008년 1월. 아사히신문사에서 주는 오사라기지로논단상시상식에 오에선생도 와 주셨었다. 함께 찍은 이는 아사히신먼사 와카미야 주필. 작년에 내가 일본우익을 대변한다는 기사에 항의해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 부르라”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썼던 이다. 그는 일본수상 야스쿠니참배를 반대하고 독도를 한국에 양보하라고 써서 일본우익들의 맹렬한 반발을 샀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저 그가 “위안부강제연행에 대한 아사히의 과거기사가 군인의 말만 믿고 좀 많이 나갔다”고 말했다는 것만으로 아사히가 우경화했고 와카미야씨는 보수,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편이 합리적이려고 하는 순간, 그들은 늘 윤리를 독점하려 한다.

실은 오에선생과 함께 보냈던 시공간에서조차 나에 대한 적의를 가진 이가 나타났었다. 그리고 오에선생과 나를 이간질하려 했다. 심지어 내게 오에선생초청을 의뢰했던 김대중도서관측 사람들과도. 그래서 사실은 여전히 편치만은 않았던 며칠이었다.

곳곳이 적의의 지뢰밭,이라고 느낀다. 이 한 달,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견뎌왔지만, 다시 “인생의 친척”을 읽든지..해야 할 것 같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7894879879870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3・9ー응답을 시작하면서

의혹과 소문이 세상을 떠돌며 한사람을 한치의 주저없이 베고 다닐 때, 그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두가지가 있을 것이다. 침묵하거나 항변하거나. 그리고 그동안 나는 다른 이들이 나서준 덕분에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분은 늘, 차라리 침묵하고 싶었다. 10가지 소문은 곧 100가지가 될 것이고, 그 때의 절망감과 도로감이 미리부터 내 기분을 가라앉혔기 때문이다.

`잘` 항변하기 위해서는 저들의 행위를 컴퓨터와 마음에 저장하고 미움으로 논리의 칼날을 가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일에 에너지를 소진하기보다는, 나는 그저 그 시간에 아름다운 멜로디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보다 아름다운 말들에 귀기울이고 싶었다. 사실 나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외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못된다.

그럼에도 이제 최소한도로나마 해명에 나서려는 이유는, 함께 해 주는 이들, 대한민국에서 극소수일 친구들을 위해서기도 하다. 이제 싸움은 나만의 싸움이 아니게 되었다. 2014년 6월과 다른 것은, 이제 내게는 나 이외에도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 모두가, 원고측의 허위섞인 주장과 그 주장을 그대로 믿은 재판부가 만든 일이다.

어차피 나는 법정에서 항변을 해야 하고 원고측 변호사와 학자들—이른바 `지식인`들이 함부로 난도질하며 <공공선에 반한다>고 결론내린 나의 논지를 다시 설명해야 한다. 원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 내게 요구되는 건 ,지치거나 지겨워하지 않고 `법정을 떠올리며 광장을 만들어 가는` 일일 터이다. 그것도 헛소문에서 지적담론까지를 한자리에서 상대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광장을.

우연히도 아침에 관련 뉴스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것부터 시작한다.

응답1.<박유하가 위안부할머니에게 일본정부로부터 20억원을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2003년가을, 사죄와 보상에 관한 나눔의집의 생각을 듣기 위해 내가 방문했을 때, 여성사무국장은 내게 국가배상이 아니라 실질적보상금을 받는 소송을 준비중이라고 말했었다.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조정`에 이르는 재판이고, 우리는 정대협과 달리 당사자중심으로 간다면서 할머니들의 사인이 들어간 서류까지 보여 주었다. 그 이후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정대협과 조금은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나는 이 기사를 보고 그간의 나눔의 집의 행보를 알 수 있었다.

한사람당 `20억원`이라는 보상요구금액은, 바로 유희남할머니가 내게 말한 숫자다. 일본이 어떤 사죄와 보상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사죄고 뭐고)….20억원은 받아야지`라고 말했던 장본인이시다. 그 정황에 관한 증거자료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나눔의 집의 또다른 변호사에게 말했더니, `20억은 많은 금액은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아마도 그는 이미 이런 소송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나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도 해야 하는 것이 슬프다. 유희남할머니가 법정에서 위증을 했다는 걸 듣고도 나는 그에 대해 법정에 따로 해명하지 않았다. 법정의 `상식적인 판단`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처분판결이 났을 때 나는, 어쩌면 그 판결은 책 때문이 아니라 나에 관한 부정적인 소문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어쩌면 가처분 판결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으로 하지 않은, 나의 불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http://kr.christianitydaily.com/…/…/위안부-피해자-미국-법원에-소송-추진.htm

http://www.yonhapnews.co.kr/…/0200000000AKR2015022717480006…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82184/20150227/%EC%9C%84%EC%95%88%EB%B6%80-%ED%94%BC%ED%95%B4%EC%9E%90-%EB%AF%B8%EA%B5%AD-%EB%B2%95%EC%9B%90%EC%97%90-%EC%86%8C%EC%86%A1-%EC%B6%94%EC%A7%84.htm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75557982471115

渦中日記 2015/3/7

삭제판을 위한 작업중.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막상 마주하니 가슴이 좀 쓰라리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74229259270654

渦中日記 2015/2/28

결국 2월 마지막날은 나를 고발에 이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언론사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가 깨지는 날이 되었다. 한겨레에 오늘 기사를 실은 길윤형기자에게 질문을 받고 대답했던 내용을 다시 올려둔다.

나는 이 대화에서 분명히 와다교수와도 의견이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면서, 심지어 결국은 “일본우익의 주장을 수용”한다고 써 버렸다. 더구나 나는 한국이 요구하는 “법적”책임을 지우는 일이 왜 어려운지를 말했을 뿐인데 “책임”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뉴앙스의 기사가 되고 있다.

나는 분명히 일본의 책임을 물었고, 앞서 올린 와다교수의 말처럼, 일본에서 내 책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은 우익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애써 왔던 사람들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등 진보언론이 여러번 관심을 표했고, 우익/보수 성향의 산케이나 요미우리에겐 아직 무시당하고 있다. 그런 상황을 가장 잘 알 “일본특파원”이 그걸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한 것이 다름아닌 한겨레 신문이다.

나는 우익도 아니고 협력자로서의 친일파도 아니다. 아무나 “우익””친일파”딱지를 붙이는 일로 자신들의 목소리와 자리를 유지하려는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나와 먼 곳에 있는 이들이 아니어서 그동안은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유보적 자세를 접으려 한다.

나의 목표는 일본우파까지 주목해 주는 것이다. 보수언론이 움직여야 아베정권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기에. 진보의 생각만으로 좌우가 공존하는 “일본공동체”를 움직일 수는 없다. 내가 90년대에 일본이 만든 아시아여성국민기금을 평가한 건, 그것이 불완전하나마 좌우합작형태의 “사죄와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문제는 끝난 문제라고 일축했던 일본의 보수세력을 내 책이 혹 움직이는 일이 있게 되면, 오로지 자신들과 해결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비난해 온 이들은, 내 논지가 그들을 움직였다고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내가 말했다고, 나는 일본우익의 나팔수였다고, 또다시 앵무새처럼 말할 것이다.

나를 할머니의 이름으로 고발하도록 만든 것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국가를 동원해” 억누르려 한 한국지원단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행위를 뒷받침한 건, 일부 재일교포이고, 내 책이 일본우익의 상찬을 받았다는 거짓말을 쓴 한겨레신문이고, 고발이후에도 좌시했고 가처분판결이 나자 그 판결을 옹호했던 몇몇 지식인들이다. 학문을 국가의 힘을 빌어 단죄하는 일에 지식인마저 동참한 것이 2015년의 한국사회다.
한국사회의 위기와, 이들은 무관하지 않다.
할머니들을 죽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서.

온갖 “해석”들이 나를 죽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와 편견을 넘어 나의 문제제기를 왜곡과 곡해 없이 읽어 준 건 소수의 “열린” 사람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건 “강한”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 열려있고 강한 또다른 이들이 책을 만날 수 있도록, 책을 역시 출판해야 할 것 같다.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8639513162962

渦中日記 2/25

한 언론의 기자가 기사를 쓰겠다면서 질문을 했다. 일본특파원이라 일본사정에 대해서도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가나 일반인들과는 질문의 차원이 달라 성의껏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내가 위안부문제해결과 한일화해를 위해 쓴 건지 혹은 일본에 “법적책임이 없다”는 걸 주장하고 싶었던건지 알고 싶어했다. 나로서는 서글퍼지는 대답이었지만 말했다.
“결론부터 정하고 덤비지는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
한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뭔가 다른 의도를 담아 글을 쓰는 식으로 머리굴리는 부류의 사람을 싫어하고, 누군가의 지시에 쉽게 따를만큼 순종적이지도 않다.

———–
1.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 “보상”의 의미는?

이 책은 여러 “다른”오디엔스(독자/청중)를 대상으로 한 책이에요. 책에도 썼지만 원래는 일본을 향한 글만 쓰여질 예정이었구요. 일본이라 해도 지원자/정부/부정자,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앞에서 하던 얘기와 뒤에서 한 얘기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그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한일협정에 관해서도 한국을 향해선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없애 버렸으니 그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일본을 향해선 “당신들은 보상 끝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관련 보상이었고 식민지배에 따른 억압과 고통에 대해선 보상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모순으로 느껴질 수 있고 어느쪽이 진짜냐! 라고 묻고 싶어지겠지만 이런 식의 논리전개가 된 건 결국 대립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각자 자신의 문제를 보는, 자기비판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커다란 틀에서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썼습니다. 일본의 지배가 문제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대협등 지원단체는 보상과 배상의 의미를 구별해서 쓰고 있어요. 위안부문제는 “법을 어긴 국가범죄이니 입법을 해서 배상하라”라는 의미에서 “배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학자들이 말하는 건
더이상 “강제연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지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저에 대한 고발장에서조차 쓰고 있더군요.
“약취,사기”로 업자들이 데려 왔다 해도 알고도 받아들였으면 범죄이고 일본군이 알고도 받아들였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은 알게 된 경우 업자에게 다른 곳에 취직하게 하도록 시키거나 돌려보낸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계약서를 확인해 업자의 사기나 납치를 방지하려 했구요. 그러니 전부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일본의 공식방침은 위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해야 하구요. 알면서 묵인한 경우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 경우 업자가 이미 돈을 주고 사 왔다던가 하는, 일본군으로서도 관리영역 바깥의 경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수요를 만든 자체–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로 만든 지역의 사람들까지 전쟁터에 동원한 책임, (의도여부를 떠나) 묵인한 책임을 물은 겁니다. 위안소를 공식적으로 만든건 근대일본이 시스템화에 능숙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그리고 모두 획일적인 위안소가 아니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하고요. 일본에서 강연할 때 유곽에 있었던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에, 유곽을 군대용 위안소로 지정한 곳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지정업소가 아닌 곳에 있었던 사람(여기에도 비지정이지만 인가업소-유곽의 위생시설등 체크했던 업소와 인가조차 못받았던 이른바 사창도 있었다는 걸 “우리는”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피해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다른 부분을 소거시키고 싶은 욕망에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 그걸 지적했던 거구요.
“보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한국어판을 쓸 땐 기금과는 달리 “정부국고금”으로, 기금을 받지 못한 분들께 추가 보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런 의미입니다. 국회를 거치지 않는 정부보상금이지요. 다만, 이후 국회결의를 하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본어판에선 그렇게 썼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다시 기회되면 말씀드리지요.

2. 와다교수의 의견(국고금으로 보상금지급)과 같나?

한국어판 내고 나서 다른 자료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와다선생님과 달리 국회결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오히려 보상금을 어떻게 할 건지는 더 첨예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국민동원의 한 형태다)이 받아들여진다면 입법이나 국고금 지급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강제동원을 했으니 배상하라”는 현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 일본한테 보상금을 대신 받은 한국정부가, 할머니들에게 4천만원 이상 지급했고 매달 이런저런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할머니의 체험은 다 다른데 해결은 “하나의 방안”으로 정해야 하는 정치/국가 문제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할머니들의 다른 목소리에 각각 귀를 기울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3. 현실적 타협론인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옳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명분에 무게가 실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년이 걸리더라도” 라는 말로 주장을 관철하는 건 첫째 당사자를 무시(얼마전에 만난 할머니는 사죄조차 요구하지 않고 보상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오히려 제가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는 일이고, 할머니의 의견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인식될 필요가 있습니다. 들리지않을 뿐이지요. 부산정대협회장님을 만나 보세요. 지방에 계셔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문제 해결에 사비털어가며 20년이상 애써 오신 분인데 그분 말씀이 “나도 내 돈 내가며 신문광고를 통해 기금을 반대했다 .하지만 할머니들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 받게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우리 여성지도자들(이 분은 이화전문여고출신의 할머님)이 못 받게 했다”고 하시더군요.

4. 제가 받는 인신공격적 비난이 안타깝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심층취재와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외부의 비난과 우려 속에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외부가 아니라 우리스스로 들여다보고 아프더라도 직시하는 일로 치유해나가기 위해서도요. 저는 제 사태를, 2009년의 서경식교수의 한겨레 칼럼이후에 저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면서 5년후에 지원단체에 의한,아마도 쌍방이 의식못할 “대리고발”을 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의 종류도 다양하고 지식의 폭도 달라서 더 어려운데, 정치나 개인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사람들, 단순오해로 비난하는 이들에게 동조하는 지식인들의 행태가 가장 한탄스럽군요. 저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위해서.
언론에 대해서도 깊이 실망해 왔지만 그래도 제대로 보려하는 분들이 계신 걸 잘 압니다. 기대를 놓지 않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70165993010314

渦中日記 2015/2/27

압도적인 폭력아래 놓이면, 말을 잃게 된다. 마녀사냥식 비난과 추측성 의혹과 그럴듯해 보이는 비판들 속에서, 어느 쪽에 먼저 대답해야 할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웃고 있으면 짓밟아 울리고 싶다는 이들이 있었고 슬퍼하면 순교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이들이 있었다. 씩씩하려 하면 뻔뻔하다 했고, 침묵하고 있으면 반박을 못하는 거라고 했다.

검찰조사가 끝나자마자 지방국립대교수와 성남시장이 공격을 시작했고, 그리고 가처분 판결을 받았었다. 덕분에 주변지인들까지 설연휴를 반납하다시피 했고 나 역시도 견뎌내기만도 버거운 며칠이었다. 진작부터 약속한 두개의 일정을 위한 준비도 해야 했다.
귀국하고 보니 이번엔 그 행사마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었고, 나는 “그 와중에 책을 팔러” 일본까지 다녀온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비난에 대해 “자신은 뒤로 숨고 지지자들을 내보낸” 비겁자가 되어 있었다.

작년 6월에는 했던 해명과 설명을 이번에는 일일이 하지 않았던 건 우선은 경황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두번째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나를 설명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다 나에 대해 말하는 날은 그런 나자신을 넘어서야 할 만한 어떤 계기가 주어진 날이다.

나를 일으켜 세워, 몇가지에 대해선 해명을 해야겠다고 비로소 생각했던 어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인터뷰가 나왔다. 이 역시도 비판적인 부분에만 주목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먼저 걸어둔다. 이 주말엔 페북을 하루종일 열어두어야 할 것 같다.

2월이 가고 있다.

http://www.hankookilbo.com/m/v/86fc1dfb784a4255a92a290849f7d32b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9593019734278

渦中日記 2015/2/26

비판/비난을 넘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이들이 있다.
그동안 나는 그들을 가능한 한 이해하려 해 왔지만 이제 그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9260639767516

渦中日記 2015/2/25

한 언론의 기자가 기사를 쓰겠다면서 질문을 했다. 일본특파원이라 일본사정에 대해서도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가나 일반인들과는 질문의 차원이 달라 성의껏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내가 위안부문제해결과 한일화해를 위해 쓴 건지 혹은 일본에 “법적책임이 없다”는 걸 주장하고 싶었던건지 알고 싶어했다. 나로서는 서글퍼지는 대답이었지만 말했다.
“결론부터 정하고 덤비지는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
한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뭔가 다른 의도를 담아 글을 쓰는 식으로 머리굴리는 부류의 사람을 싫어하고, 누군가의 지시에 쉽게 따를만큼 순종적이지도 않다.

———–
1.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 “보상”의 의미는?

이 책은 여러 “다른”오디엔스(독자/청중)를 대상으로 한 책이에요. 책에도 썼지만 원래는 일본을 향한 글만 쓰여질 예정이었구요. 일본이라 해도 지원자/정부/부정자,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앞에서 하던 얘기와 뒤에서 한 얘기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그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한일협정에 관해서도 한국을 향해선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없애 버렸으니 그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일본을 향해선 “당신들은 보상 끝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관련 보상이었고 식민지배에 따른 억압과 고통에 대해선 보상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모순으로 느껴질 수 있고 어느쪽이 진짜냐! 라고 묻고 싶어지겠지만 이런 식의 논리전개가 된 건 결국 대립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각자 자신의 문제를 보는, 자기비판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커다란 틀에서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썼습니다. 일본의 지배가 문제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대협등 지원단체는 보상과 배상의 의미를 구별해서 쓰고 있어요. 위안부문제는 “법을 어긴 국가범죄이니 입법을 해서 배상하라”라는 의미에서 “배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학자들이 말하는 건
더이상 “강제연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지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저에 대한 고발장에서조차 쓰고 있더군요.
“약취,사기”로 업자들이 데려 왔다 해도 알고도 받아들였으면 범죄이고 일본군이 알고도 받아들였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은 알게 된 경우 업자에게 다른 곳에 취직하게 하도록 시키거나 돌려보낸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계약서를 확인해 업자의 사기나 납치를 방지하려 했구요. 그러니 전부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일본의 공식방침은 위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해야 하구요. 알면서 묵인한 경우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 경우 업자가 이미 돈을 주고 사 왔다던가 하는, 일본군으로서도 관리영역 바깥의 경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수요를 만든 자체–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로 만든 지역의 사람들까지 전쟁터에 동원한 책임, (의도여부를 떠나) 묵인한 책임을 물은 겁니다. 위안소를 공식적으로 만든건 근대일본이 시스템화에 능숙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그리고 모두 획일적인 위안소가 아니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하고요. 일본에서 강연할 때 유곽에 있었던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에, 유곽을 군대용 위안소로 지정한 곳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지정업소가 아닌 곳에 있었던 사람(여기에도 비지정이지만 인가업소-유곽의 위생시설등 체크했던 업소와 인가조차 못받았던 이른바 사창도 있었다는 걸 “우리는”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피해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다른 부분을 소거시키고 싶은 욕망에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 그걸 지적했던 거구요.
“보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한국어판을 쓸 땐 기금과는 달리 “정부국고금”으로, 기금을 받지 못한 분들께 추가 보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런 의미입니다. 국회를 거치지 않는 정부보상금이지요. 다만, 이후 국회결의를 하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본어판에선 그렇게 썼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다시 기회되면 말씀드리지요.

2. 와다교수의 의견(국고금으로 보상금지급)과 같나?

한국어판 내고 나서 다른 자료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와다선생님과 달리 국회결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오히려 보상금을 어떻게 할 건지는 더 첨예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국민동원의 한 형태다)이 받아들여진다면 입법이나 국고금 지급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강제동원을 했으니 배상하라”는 현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 일본한테 보상금을 대신 받은 한국정부가, 할머니들에게 4천만원 이상 지급했고 매달 이런저런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할머니의 체험은 다 다른데 해결은 “하나의 방안”으로 정해야 하는 정치/국가 문제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할머니들의 다른 목소리에 각각 귀를 기울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3. 현실적 타협론인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옳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명분에 무게가 실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년이 걸리더라도” 라는 말로 주장을 관철하는 건 첫째 당사자를 무시(얼마전에 만난 할머니는 사죄조차 요구하지 않고 보상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오히려 제가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는 일이고, 할머니의 의견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인식될 필요가 있습니다. 들리지 않을 뿐이지요. 부산정대협회장님을 만나 보세요. 지방에 계셔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문제 해결에 사비털어가며 20년이상 애써 오신 분인데 그분 말씀이 “나도 내 돈 내가며 신문광고를 통해 기금을 반대했다. 하지만 할머니들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 받게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우리 여성지도자들(이 분은 이화전문여고출신의 할머님)이 못 받게 했다”고 하시더군요.

4. 제가 받는 인신공격적 비난이 안타깝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심층취재와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외부의 비난과 우려 속에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외부가 아니라 우리스스로 들여다보고 아프더라도 직시하는 일로 치유해나가기 위해서도요. 저는 제 사태를, 2009년의 서경식교수의 한겨레 칼럼이후에 저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면서 5년후에 지원단체에 의한,아마도 쌍방이 의식못할 “대리고발”을 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의 종류도 다양하고 지식의 폭도 달라서 더 어려운데, 정치나 개인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사람들, 단순오해로 비난하는 이들에게 동조하는 지식인들의 행태가 가장 한탄스럽군요. 저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위해서.
언론에 대해서도 깊이 실망해 왔지만 그래도 제대로 보려하는 분들이 계신 걸 잘 압니다. 기대를 놓지 않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8639513162962

渦中日記 2015/2/22

“경계를 넘어” 학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어제 교토로 왔다. 테마는 <제국일본을 대하는 방식>. 나로선 주최자가 정확히 나의 문제제기를 이해해 주었다고 느낀다.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나는 “제국”이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인지 물으려 했다. 일본판 서문에서 나는 제국이란 “강자주의적 지배” 이고 그에 따른 서열화, 라고 말했다. 누가 먼저 자기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긍지 혹은 그와 비슷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가. 그 안에서 민족과 계급과 성의 싸움이 있었다.

그런 대화를 공공의 장소에서 학자들, 그리고 들으러 와 줄 시민들과 하게 된 것이 한국아닌 일본이어서 다소 서글픈 아침이다. 허한 속을 채우기 위해, 우선은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66665776693669&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2・18

<위안부를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로 표현>했다는 보도에 관해서

어제저녁부터 나오기 시작한 판매금지가처분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재판부보다도 언론에 더, 절망을 느낀다. 수십개의 보도 중,나에게 연락해 의견을 물은 곳은 단 두 곳밖에 없었다. 다보지 않았지만, 나눔의집 소장의 의견을 실은 곳은 많은 듯 하다.
고발직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이나라의 언론은 편파적이고 불공정하다. 지난가을에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내린 결정은 대립중인 사안은 양쪽의 의견을 공정하게 실어야 하고,그렇지 않았으니 정정하거나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일일이 다 할 수가 없어서, 나에게 확인하지 않고 원고측 보도자료만을 가장 먼저 내보냈던 연합뉴스와, 악의적인 제목을 달아 같은 내용의 기사를 반복적으로 내보냈던 조선닷컴,그리고 내가 일본의 우익을 대변한다고 썼던 한겨레와 한국일보만 중재신청을 냈었다. 그리고 언중위는 내 손을 들어 주었지만 그 내용을 다른언론사에 요청하는 일을 아직 하지 않았었다. 이재명 시장의 뒤늦은 비난은 <나를 말하는 일>에 충분히 부지런하지 못했던 나의 불찰이기도 하다. 재판이란, 지치도록 만들어 포기하게 하는 일이고 집요한 사람이 이긴다던 지인의 말이 다시 생각나는 아침.

사람들의 분노는 <매춘부>라는 단어에 있다. 그런데 미치지 않고야 대한민국에서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소리높여 말할 사람이 있을까. 원고측이야 악의적인 공격과 매장이 목적이니 그렇게 단정할 수 있지만, 정말 그랬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믿는 재판부와 사람들이 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나는 생각하는 바를 가능한 한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비난하기 위해 말하지 않았다.

재판부에 제출했던 답변서중,매춘에 관한 원고측 지적과 답변의 일부를 우선 올려둔다.
파일첨부가 잘 안되는 문제만 해결되면,나머지도 전부 곧 올릴 생각.
나를 보호하려면 공개하지 않았던 자료까지 앞으로는 공개하고 제출해야 하는데, 그 작업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나는 우울하다.

——————
18.조선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른 경제활동이 가능한 문화자본을 갖지 못한 가난한 여성들이 매춘업에 종사하게 되는 것과 같은 구조 속의 일이다.(112쪽)
19.위안부 중에 조선인 여성이 많았던 것은 식민지의 빈곤과 인신매매조직의 활성화 등 전체 사회구조의 결과이다.(112)

원고측지적-
위 표현과 마찬가지로 채무자 박유하는 조선인들이 강제나 기망, 허위 유혹 등에 의하여 위안부가 된 특수성을 무시한 채,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가난하여 자발적으로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과 조선인 위안부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저자는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의 적극적인 개입과 책임을 배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채무자의 시각이라면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의 전쟁범죄피해자가 아니라 가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매춘여성과 동일합니다.
채무자의 표현이 옳다고 하려면 일본의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위안부 동원전에도 조선의 백성들은 가난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조선에서 위안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시설이나 위안부들이 많이 존재했어야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군의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동원이후부터 채권자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양산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답변–
<전체 사회구조의 결과>라는 것은 채권자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오히려 그러한 사회구조를 만든 일본에 가장 크고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문구입니다.
본서의 120쪽에서 채무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위안부’를 필요시하고 위안부의 효과적인 공급을 위해 ‘관리’를 했던 건 분명하다. 그러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한 ‘남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 ‘죄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서술하였습니다.
채무자는 당시 한반도를 점령했던 일본이라는 국가가 어떤 통치를 행했으며, 그 통치에 의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의 피해가 존재했는지를 상세히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의 적극적 개입과 책임을 배제하려 했다>는 기술은 이러한 문맥을 도외시하고 왜곡한 지적입니다.
<조선에서 위안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시설이나 위안부들이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채권자들이 조선에 존재한 위안소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조선에도(일본에도) 군부대가 존재했고 위안소는 존재했습니다. 물론 <대규모적인 동원 이후부터 채권자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맞고 그 사실을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해외로 <이동>한 위안부란 이동당한 군인을 위해 모집된 <국가에 의한 성 노동 동원>으로 보는 것이 바로 채무자의 시각입니다. 채권자들은 지속적으로 일본인 위안부나 가난 때문에 떠난 이들과 조선인 위안부를 구별하려 합니다.
그러나 일반 매춘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위안부>가 되는 경우는 많았습니다. 1970년의 서울신문에서도 <처음에는 화류계 여성들이 갔다>고 분명히 쓰고 있습니다. 나눔의 집에 계시던 배춘희 할머니도 자신이 있던 집이 유곽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일반 매춘과 위안부는 함께 <가난과 남성 우월주의적 가부장제>가 만듭니다. 거기에 <국가주의(본서 33쪽 10줄)>가 개입할 때 <위안부>가 만들어집니다.

20.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을 ‘매춘’으로만 생각했고 우리는 ‘강간’으로만 이해했지만, ‘위안’이란 기본적으로는 그 두 요소를 다 포함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은 가혹한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 실제로 돈을 버는 이들은 적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 혹은 ‘매춘적 강간’이었다. (120)

원고측지적–
채무자 박유하는 조선인 위안부의 행위가 매춘과 강간이 혼재되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강간적 매춘이나 매춘적 강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조선인 위안부들이 기본적으로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에 종사하여 매춘을 동반한 일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는 과정과 위안소에 감금되어 위안부 생활을 했던 동안 경험했던 바와는 다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채권자를 비롯한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하여 수입이 예상되는 매춘을 했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명예훼손이 될 것입니다. 채무자는 성노예 생활을 했던 채권자를 포함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끊임없이 “매춘”의 굴레를 씌우고 있습니다.

답변–
위안부가 임노동이었음은 본서의 증언(본문 89-90쪽)이 말합니다. 또한 이 부분에서 매춘에 대한 기술은 <매춘부>라고만 말하면서 위안부를 부정하는 일본인들을 향해 쓰여 졌던 부분입니다. 즉 위안부를 단순한 <매춘부>라고 말해온 이들을 향해 그것이 강간적인 구조를 가진 것이었다고 말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즉, 성매매를 하였다 하더라도 이것이 국가의 조직적 강간행위였음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채권자의 지적은 그런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자체에만 집착한 지적입니다.
위안소에서의 <감금>은 기본적으로는 업자가 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위안소가 부대 안에 있을 경우에 자유 외출이 불가했던 것은, 군인과 마찬가지로 정보유출등에 대한 우려때문이었고 전투지였기 때문입니다. 군인의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47.그리고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296쪽)

원고측지적–
채무자의 주장처럼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가 일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일반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채무자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자발적 매춘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한다는 취지로 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가해자이면서도 여전히 가해사실을 부정하며 반성과 사과를 꺼리고 있는 현재의 일본정부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입니다.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자발적 매춘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자발적 매춘을 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여 일본군의 필요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동원이 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책임은 전혀 희석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채무자 박유하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이미지에 덧씌우고 있습니다. 채무자 박유하의 주장대로 자발적 매춘부가 존재한다는 것과 일본의 위안부 동원에 대한 법적 책임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마치 자발적 매춘부를 인정하지 않아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답변–
채권자는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가 아니었다고 해 놓고도,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가 일부 있었다고 하더라도>라고도 말합니다. 이는 본인의 주장을 인정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증언은 돈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다구나 채무자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자발적 매춘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한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자발이든 아니든 그러한 구조 속에 놓이도록 만든 것 자체를 일본의 책임으로 환기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자발적 매춘을 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려면 그렇다는 증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자발적 매춘을 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가 <더불어 자발적 매춘을 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여 일본군의 필요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동원이 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책임은 전혀 희석되지 않는다>는 서술은 모순입니다.
채무자의 시도가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이미지에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본서를 정확하게 읽은 기존의 서평이나 기사가 말해 줍니다.
더구나 <자발적 매춘부가 존재한다는 것과 일본의 위안부 동원에 대한 법적 책임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말은 자발적 매춘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채권자와, 주변인들이 인정한 말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을 보는 일이 일본의 책임을 희석하는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채권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의 논지는 매춘여부와 상관없이 일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논지입니다. 지원단체는.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하던 시절의 이미지-12살짜리 소녀까지 강제로 끌고 갔다는 이미지에, 2014년 현재까지도 기대어 활동하고 있고 저는그런 부분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4332183593695

渦中日記 2015/2/18

Jung-hwan Cheon선생의 비판을 받았다. 한권의 책은 세상에 내놓는 순간부터 얼마든지 비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 그의 비판이 놀라웠던 건, 이하에 적는 것처럼 소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보다도, 다른 날도 아닌 오늘, 그러니까 나를 고발한 사람들의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진 직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가 여러모로 결코 먼 거리에 있는 학자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도.

1.우선 심각한 오류부터 지적해 둡니다. 8만부,란 금시초문의 숫자입니다.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2. 일본어판을 직접 확인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영환선생의 서평을 “날카로운 평”으로서 신뢰하시는 근거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3.”고소취하 노력이 있었다”는 것도 들은 바 없고,그것을 거부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4.일본의 지식인을 굳이 언급한 건 내가 우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악의적인 말들을 의식하며 크게 보았을 때 어떤 사상의 장에 있었는지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설사 한계나 오류가 있다 해도 그것이 곧 저의 오류나 한계가 되는 건 아닐 터입니다.
5.NHK가 저를 찍고 있는 건 회장의 변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책이 나왔을 때 주목받은 것에 관심을 가진 기자가 제 책이 한국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추이를 보고 싶다고 해 응한 겁니다. 무엇보다 그는 위안부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NHK라고 해서 모든 직원이 회장과 같은 생각을 할 거라는 생각에서 쓰신 걸까요.

Jung-hwan Cheon

* 메모 :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딜레마 또는 동상이몽

0) 시초
문제가 시작된 최초에 <제국의 위안부>의 논리에는 동조 못하지만 박유하 선생에 대한 마녀사냥에 대해 반대한다 했다. 그런데, <나눔의 집>이 할머니들을 내세워 책을 고소하는 바람에 문제는 전혀 다른 게 돼 버렸다. 고소와 판금 같은 법적 조치야말로 문제를 꼬이게 만들고 오히려 저자와 그 책에 대해 다른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1) 확장
2월 17일에 1심 법원이 ‘명예훼손’을 판단함으로써 이제 문제는 더 크게 확장된다.
이 책은 위태로운 (정치적) 한일관계 사이에서 소위 ‘금서’가 됐고, 앞으로도 한일 사이의 인식 차이나 갈등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박유하 선생이나 책이 애초의 ‘선의’와는 반대로, 한일 ‘화해’나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콘이나 도구가 되기는커녕 더 거리가 멀어졌다는 뜻이다.

2) 입체적 딜레마?
‘위안부 문제’에 대해 내가 문외한이라는 점과 저자와의 인연 때문에 냉정한 평가와 언사가 어렵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사태를 ‘객관적, 입체적으로’ 보고자 조금 노력해왔다.
(다면적인 문제들에 대한 선택적 판단은 각자의 몫이고, 사실관계에 틀린 것이 있다면 지적 바란다.)

결론은 ‘딜레마’다. <제국의 위안부> 및 박선생의 입장과 판금 조치 양자에 대해 다 반대해야 하는 곤혹이다. 양비론을 말하게 될지 모르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반대는 서로 다른 것과 비대칭적인 것을 향한다. 하나는 박유하라는 개인과 비물질적이며 관념적인 것이고, 후자는 법과 집단의 ‘현실’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매우 어렵고 미묘하다. 개인을 비판하거나 단죄하는 일은 더 높은 윤리를 요구하고, ‘법’이 끼어드는 순간 정신이나 ‘현실’조차 모두 찌그러지고 축약된다.(따로 공부가 필요한 대목이다.)

3)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위안부’ 문제 때문에 ‘친일파’의 혐의를 쓴 박유하 선생이나 ‘뉴라이트’에서 신념을 갖고(?) 활동하는 이영훈 선생의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그 논리의 문제는 별도) 그러나 그 ‘자유’는 기실 ‘역사’나 ‘현실’의 맥락에 비하면 허망한 것일지 모른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자유는 되레 큰 빛과 힘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인문학이 기생학문이 되고 ‘현실’과 ‘인간’을 거의 논하지 못하는 오늘날, 나는 오히려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보다는 ‘학문의 책임, 표현의 책임’도 생각해본다. 우리는 ‘학문’과 ‘표현’이라 말할 때 어떤 무한한 가치중립적 시공간과 문자, 텍스트들을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가상일 뿐이다. 심지어 ‘사실’조차 그럴 것이다. 이는 객관성과 가치문제에 기본에 속하는 것이다.
맥락을 사상한 ‘자유’는 공소하다. ‘샤를리앱도’를 포함한 일련의 ‘표현의 자유’ 문제의 교훈이 여기 있다 믿는다.

3-1) <제국의 위안부>의 역설
이는 아슬아슬한 논리적 줄타기를 하는 책이며, 결국 ‘사실’을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고 뵈지 않는다. 이게 <제국의 위안부>의 가장 큰 역설이다.

왜 이미지화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실이 있다는 걸 계몽적으로 밝히는 학술서가
오히려, 식민지 지배의 본질이나 국가 책임이라는 더 큰 ‘사실’을 희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이 점이 저자가 놓치는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용어 선택은 별도로 심각하다. 이 자체에 대한 문제는 이미 논의가 진행됐으므로 생략한다. 법정에서의 논란은 박유하 선생의 페북을 참조.)

그리고 일본어본은 얼마나 내용이 바뀌었는지 모르는데, 믿을만한 지인의 도움으로 그에 대한 다음의 서평을 소개한다. 정영환이라는 재일 소장 학자의 날카로운 평이다.
http://kscykscy.exblog.jp/23960512/
4) 책이 나오고 난 뒤에
<나눔의 집>의 행동(시위 등)과 고소가 무리한 것이며, 결국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에 고소를 취하하게 만드려는 일부 노력이 있었다 들었다. 그리고 법원도 중재를 시도했다고 들었다.
결과적으로 양측은 묵은 감정과 이런저런 이해관계 하에서 자기 주장만을 되풀이했다. <나눔의 집>측에 성찰을 기대하기도 물론 어려운 일이다. 사실 어제 법원의 판단은 이에 비하면 덜 심각할지 모른다. 그것은 단지 ‘법적 결과’일 뿐인 것이다.

5) 제국의 관점과 식민지 서발턴
박유하 선생이 그간 식민지 문제나 위안부 할머니들 등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많다는 점이 환기돼야 한다.
그는 ‘가처분심리최종준비서’에서 자신이 일본(우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가라타니 고진, 오에 겐자브로, 우에노 치즈코 등 일본의 과거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진보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일본의 과거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진보지식인들”이 진정 식민지 서발턴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을까? 박선생이 중대한 오류나 한계를 노정하는 데가 바로 여기인 듯하다. 그가 ‘일본의 논리를 체화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점 또한 여기다.

박선생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단지 서경식 같은 이나 이런저런 민족주의자 뿐 아니라, 허다한 여성주의자와 식민지 연구자, 그리고 자이니치들이 포함돼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기타, 인신비판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박선생이 그간 일본 언론이나 학계에 대해 취한 태도와 할머니들에 대해 취한 태도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6) 동상이몽과 ‘한나 아렌트’
소식통들로부터 일본의 상황을 들으니 현재 일본 사회는 박유하 선생과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 민족주의와 그 역사 왜곡에 맞선, 수난 당하는 ‘양심’이나 ‘영웅’인 것처럼 간주하고 있다 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그런 경향이 커 심각한 면이 있다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오래전부터 NHK는 박유하 선생에 대한 다큐를 만들고 있고, <제국의 위안부> 일역판에 대한 일본의 서평들은 박선생을 ‘한국의 한나 아렌트’라 불렀다. 진보적이라는 <아사히>부터 그랬다.

종전 70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년의 기념과 미래 한일관계의 동상이몽의 일본 측 소재로 박유하 선생과 <제국의 위안부>가 중용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는 올곧게 ‘진실’을 향해 있다기보다, 한일의 서로 다른 맥락과 관계 사이에 힘겹게 ‘낑겨’ 있는 듯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4611746899072

渦中日記 2015/2/17

8개월만에, 판매금지에 관한 가처분결정이 나왔다.
원고측의 두가지 신청중 출판판매금지는 원고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위안부할머니 접근금지신청은 기각되었다.
이렇게 나의 책은 오늘、”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하여” 본안이 이루어지기 전에 판매금지되게 되었다.

이시점에서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재판의 원고는 나눔의 집에 계시는 할머니 아홉분 뿐이다.

그 중 다섯 분의 할머니의 진술이 결정문에 있었다. 그런데 속아서 가거나 한 경우를 인용하면서도, 결정문은 전부 “일본군의 강제연행”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런 식의, 너무나 거친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은, 아마도 , “강제연행”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결과일 것이다. 책에 없는, 원고측이 멋대로 요약한 얘기를 내가 쓴 것처럼 정리해 둔 이 글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명예훼손이 될 수 없고 해결을 위한 방안제시”임을 인정한 부분도 있었다. 사실 그래서 이 결정문이 아직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결론
2014년6월, 100여곳을 허위라며 고발했다가 10월에 53곳으로 줄였던 원고측 삭제요구는 재판부에 의해 34곳으로 줄었다. 삭제하면 출판해도 좋다고 하지만, 물론 나는 단 한곳도 삭제 생각이 없다. 조금씩, 이들의 요구에 어떻게 답변했었는지 자료를 올릴 생각이다. 결정문에도 있는 것처럼, <시민사회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건전하게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3957406964506

渦中日記 2015/2/13

다섯번째 검찰출두. 그리고 이제 검찰조사가 모두 끝났다.
그들은, 일본을 폭력배들의 세계에 비유했고(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자들을 모아 올것, 그러나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라는 지시를 내리는 국가로),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 말한 일본인들과 내 책을 동일시하며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선 것 아니냐고 했다. 또, 내가 하지 않은 말까지 하면서 내가 한 것처럼 다그치기도 했고( 강제연행 안하는 나라가 전쟁을 일으킵니까?!”) ,한일합방에 관한 생각을 묻기까지 했다. 그들이 정말 고소인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싶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사상검증을 하고 싶어했다.

검찰 정문앞에, 이런 입간판이 있었다.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검사, 아직 젊은 나의 담당검사님이 부디 오늘 보여준 태도와 상관없이 “공평한 검사”이기를.
고발날짜에서 8개월. 이제 곧 기소여부가 결정된다.

이제, 밥이든 술이든 먹어야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6143523721672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2015/2/11

네번째 검찰출두. 명예훼손이니 삭제하든지 판매금지하라고 요구된 53개항목중 12번부터 31번까지 질의응답. 지난번보다는 진도가 많이 나갔지만, 아침10시부터 저녁 6:30분까지 꼬박 했어도 아직 3분의1이상이 남았다. 오늘도 그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피의자”로 지목된 이에게 걸맞는 태도였다.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그에 대한 생각.

1.검찰은 독자적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글 세개를 참고자료로 첨부해 두고 있었다(기소되기도 전에,고소인이 제출하지 않은 자료까지 찾아서 첨부하는 건 일반적인 일일까.)

2.내가 제출한 자료들,예를 들면 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동영상이나 스크립트, 그리고 다른 관련 자료들은 거의 읽지 않은 상태였다(그럴 수 있다고 이해 가능하지만,그렇다면 나에 대해 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게 아닐까).

3.검찰이 첨부한 자료 중엔 이재승교수의 글과, 내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것처럼 고발 직후에 썼던 손종업씨라는 이의 글을 인용한 자료까지 있었다(근거 없는 허위. 그들은 자신의 글이 검찰에서 참고자료로 쓰이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0355563991357

渦中日記 2015/2/10

어제 저녁엔 오래된 지인들을 만나 잠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대부분 한국문학자. 내가 아는 한, 한국인문학에서 학문적으로 열려 있고 앞선 이들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국문학자들이다.
그들 중 한사람이 그랬다. “평상시 같으면 그런 소리는 안 할 사람들이 박선생 책에 대해선 이상하게 편협하고 적대적이더라구. 심지어는 고발당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깜짝 놀랐어..박선생 책이 뭔가를 건드려서 그런 것 같은데 그게 뭘까..”

재판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각각의 의견을 말한다. 그 중에 와 닿았던 건 “법적책임은 분명 없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 생각을 법적책임문제로 지우려 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라는 말이다. 말이 안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생각을 바꿔 어떤 각오를 하게 된 건 그 때부터다.

꼭 그런 대화의 여파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왠지 우울해서 예정했던 일을 접고 다른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우울할 땐 집중력이 필요한 일은 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회운동>이라는 일본잡지와 했던 인터뷰원고를 체크했고, 찌그러진 채로 놔 두었던 자동차를 수리했고, 번역상후보로 올라온 원고들을 읽었다. 최근 한국문학을 열심히 읽지 않았는데, 김미월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건 오늘의 수확. 네 편의 소설중 가장 흥미로웠다.

이제부터 설겆이를 하고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음악을 들어야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59823527377894

渦中日記 2015/2/3

낮에, 일본의 한 국회의원과 만났다.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일본의 “국회결의”와 한일협의체 설치가 필요하다고 일본어판에 쓴지라(오늘아침 아사히신문에서도 강조),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기꺼이 요청에 응했다. 그리고 많은 대화.

일본과의 만남을 일본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이들도 많은 듯 하지만, 언젠가는 오해가 풀릴거라고 믿는다. 내용여부와 상관없이 호평자체를 문제시하는 곡해는 이어지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일본의 호평이나 긍정적인 반응은 고마우면서도 늘 쓸쓸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55664761127104&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