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동참 호소문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에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10월 27일 서울 고등법원 재판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박유하 교수에게 벌금 천만원의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한민국이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나라라고 믿어온 국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1심 재판부는 약 일 년 동안 학술 토론장을 방불케 하는 재판을 무려 열 번 이상이나 거친 끝에, 박 교수에게 무죄를 선고한 바 있습니다. 이 판결을 간단히 뒤집은 2심의 유죄 선고에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1심 재판부의 판단은, 『제국의 위안부』 중 명예 훼손의 증거라고 검찰이 적시한 문구들은 모두 증거로서 유효하지 않으며, 저자에게 명예 훼손의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위안부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공적 관심사인 만큼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국가기관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이 오가는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무죄로 판결했던 것입니다. 한국 사법부의 합리성과 공정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그 무죄 판결은 2심에서 완전히 전도되었습니다.

유죄 판결의 근거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저자가 “허위 사실”을 적시했으며, 둘째, 명예 훼손의 “고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재판부에서 저자의 위안부 인식을 “허위”라고 보는 근거는 그것이 우리 사회와 국제 사회의 “올바른” 인식과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의”란, 저자가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효과가 있는 주장임을 스스로 알면서,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적 저술을 대하는 태도로서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올바른” 인식과 “허위” 인식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활발한 연구와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만들고, 아울러 그것을 한-일 갈등의 원인으로 계속 남아 있게 하는 발상입니다. 또한 박 교수의 책이 명예 훼손의 ‘효과’가 있다고 보는 것은, 그 책의 여러 효과 가운데 하나, 그나마도 독자 쪽의 특수한 이해 관계 때문에 생기기 쉬운 효과를 과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2심 재판부가 보편적인 학문의 자유에 대한 관심보다는 특정한 의도를 지닌 학문 활동이나 독서 행위를 장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찬반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저자에 대한 2심 재판부의 판결이 우리 학계와 문화계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죄 선고를 통해 재판부가 시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앞으로 신변의 위해를 입지 않으려면 국내외의 주류 집단에서 “올바르다”고 인정하는 역사 인식만을 따라야 합니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한 대한민국 헌법 조문은 듣기 좋은 수식일 뿐이고, 주류 집단의 이익이나 견해와 상치되는 모든 연구는 처벌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2심 재판부의 판결 앞에서, 군사 독재 정권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사상적 통제가 다시금 부활하는 듯한 느낌, 획일적인 역사 해석이 또다시 강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유죄 판결을 받은 박유하 교수의 앞 길은 험난합니다. ‘올바르다고 인정된 견해’와 다른,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한국인의 앞 길 또한 험난합니다. 박 교수가 처음 형사 기소되었을 때, 학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많은 분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하는 탄원에 나섰으며, 1심의 무죄 판결로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2심의 시대착오적 유죄 판결은,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국가 및 사회 권력의 존재와 그 억압성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는 시민 의지의 표출이 다시 필요한 때입니다.

이에 우리는 박유하 교수의 소송을 지원하고, 이를 위한 모금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역사와 정치의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할지라도, 그 생각을 말할 권리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모금을 시작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박 교수를 비롯한 한국의 학자와 문화인들이, ‘다른 의견을 말한다’는 이유로 범죄자의 사슬에 묶이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부디 많은 분들께서 관심 가져주시고 참여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입니다.

2017년 12월7일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

동참인

강신표 (인제대 명예교수)
강운구 (사진가)
경순 (영화감독)
고영범 (극작가)
고종석 (작가 언어학자)
김경옥 (연극평론가)
김성희 (계원예술대 교수)
김영규 (인하대 명예교수)
김영용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
김용균 (이화여대 교수)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김원우 (작가)
김택수 (도서출판 디 오리진 대표)
김철 (연세대 명예교수)
남기정 (서울대 교수)
라종일 (전 주영・주일대사)
박경수 (강릉원주대 교수)
박삼헌 (건국대 교수)
배수아 (작가)
서현석 (연세대 교수)
신형기 (연세대 교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유 준 (연세대 교수)
윤성호 (동서대 교수)
윤해동 (한양대 교수)
이강민 (한양대 교수)
이경훈 (연세대 교수)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순재 (세종대 교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이제하 (작가)
정종주 (도서출판 뿌리와 이파리 대표)
조관자 (서울대 교수)
조석주 (성균관대 교수)
조용래 (국민일보 편집인)
최규승 (시인)
최범 (디자인 평론가)
황영식 (한국일보 주필)
황종연 (동국대 교수)
황호찬 (세종대 교수)
김학성 (다벗합동법률사무소 대표)
김향훈 (법무법인 센트로 대표)
이성문 (법무법인 명도)
이동직 (법무법인 신원 대표)
이민석 (이민석 법률사무소 대표)
최명규 (최명규 법률사무소 대표)
허중혁 (허중혁 법률사무소 대표)
홍세욱 (법무법인 에치스 대표)
한정호 (충북대 교수)
50명

浅野豊美 Asano Toyomi (와세다대학)
天江喜七郎 Amae Kishichiro (전 외교관)
岩崎稔 Iawasaki Minoru (동경외국어대학)
池田香代子 Ikeda Kayoko (번역가)
上野千鶴子 Ueno Chizuko (동경대학 명예교수)
大江健三郎 Oe Kenzaburo (작가)
小倉紀蔵 Ogura Kizo (교토대학 교수)
尾山令仁 Oyama Reiji (목사)
加納実紀代 Kano Mikiyo (전 게이와가쿠엔대학 교수)
清眞人 Kiyoshi Mahito (전 긴키대학 교수)
金枓哲 Kim Doo-Chul (오카야마대학 교수)
熊木勉 Kumaki Tsutomu (텐리대학 교수)
古城佳子 Kojo Yoshiko (동경대학 교수)
小森陽一 Komori Yoichi (동경대학 교수)
佐藤時啓 Sato Tokihiro (동경예술대학・사진가)
篠崎美生子 Shiozaki Mioko (게이센여자대학 교수)
竹内栄美子 Takeuchi Emiko (메이지대학 교수)
東郷和彦 Togo Kazuhiko (교토산교대학 교수・전 외교관)
東郷克美 Togo Katsumi (와세다대학 명예교수)
成田龍一 Narita Ryuichi (일본여대 교수)
中川成美 Nakagawa Shigemi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中沢けい Nakazawa Kei (호세이대학・작가)
西成彦 Nishi Masahiko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西田勝 Nishida Masaru (문학평론가)
朴貞蘭 Park Jeongran (Oita Prefectural College of Arts and Culture)
朴晋暎 Area Park (Photographer)
深川由起子 Fukagawa Yukiko (와세다대학 교수)
藤井貞和 Fujii Sadakazu (동경대학 명예교수)
和田春樹 Wada haruki (동경대학 명예교수)
Gregory Clark (IUJ 명예교수)
四方田犬彦 Yomota Inuhiko (영화사, 비교문학연구자)
千田有紀 Senda Yuki (무사시대학 교수)
榎本隆司 Enomoto Takashi (와세다 대학 명예교수)
33명

Andrew Gordon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
Brett de Bary (미국 코넬대학 교수)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
Chizuko Allen (미국 하와이대학 교수)
Daqing Yang (미국 조지 워싱턴대학 교수)
Jin-Kyung Lee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고 교수)
John Treat (미국 예일대학 명예교수)
Mark Selden (미국 코넬대학 교수)
Michael K. Bourdaghs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
Miyong KIM (미국 텍사스대학 교수)
Noam Chomsky (미국 MIT대학 교수)
Sakai Naoki (미국 코넬대학 교수)
Sheldon Garon (미국 프린스턴대학 교수)
Tomi Suzuki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
Thomas Berger (미국 보스턴 대학 교수)
William W. Grimes (미국 보스턴대학 교수)
Sejin Park (호주 전 애들레이드 대학 교수)
Alexander Bukh (뉴질랜드 웰링턴 빅토리아대학 교수)
Reiko Abe Auestad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
Amae Yoshihisa(대만 長榮대학 교수)
20명

총 10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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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

‘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 (허핑턴 포스트 바로가기)

1. 자의적인 판결

2017년10월27일, 서울고등법원은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위안부에 대한 명예훼손을 한 책으로 판단하고 벌금 1000만원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2017년 1월 1심에서의 무죄 판결이후 나를 유죄로 판결할 만한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것이 아님에도 무죄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말하자면, 2심은 같은 책에 대한 판단을 증거가 아니라, 책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만으로 뒤집었다. 당연히 승복할 수 없었고 나와 변호사는 곧바로(10월30일) 상고했다. 법원에 제출할 상고이유서는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쓰게 되겠지만, 아래는 재판부뿐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이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선 간단히 써보는 글이다.

2심 판결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조선인위안부’와는 다른 위안부상을 보여 주고 있다. 또 저자는 ‘조선인위안부의 고통’에 관해서도 이 책에 쓰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을 책에서의 기술 전부에 쓰고 있지는 않다. 그 때문에 ‘자발적 매춘부였던 일본인위안부와는 다른, 성노예 조선인위안부’라는, 우리사회와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인식과는 다른 인식을 독자가 갖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다. 즉 ‘조선인 위안부=자발적 매춘부’라는 인식이다. 또한 유엔보고서등 국제사회와 일본의 고노담화등이 제시하는 인식에 따르면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인식은 명백한 허위이다. 저자의 인식을 허위로 단정하는 이유는 국제사회의 인식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인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제사회의 인식을 저자는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와 다른 인식을 말했다. 말하자면 ‘허위’를 말했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하면 대상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될 것인지를 인식했는지 여부도 명예훼손 여부 판정에서는 중요한데, 저자는 오래 위안부문제를 연구했으므로 그 파생효과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허위사실 적시와 집필목적에서 ‘고의(범의)’가 인정되므로 유죄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2심 판결은 ‘독자의 독해에 저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나에게 내려진 ‘벌금 1,000만원’을 검찰이 구형한 3년 징역형보다 가벼워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혹은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1,000만원이라는 액수는 징역이라면 5년에 해당하는, 명예훼손 관련 벌금형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금액이다. 재판부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처럼 강조했지만 징역형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3년 이상의 징역 형에 해당하는 처벌이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마치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명예훼손법률상 유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해당내용이 ‘사실’이어야 할 것이 첫번째 조건이 된다. 나에게 무죄를 내린 1심은 검찰이 지적한 35곳 중 30곳을 ‘의견표명’으로 규정하고 처음부터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5곳은 ‘사실’에 관한 기술로 규정하면서도 위안부의 사회적평가를 저하시키는 표현이 아니라거나, 개개인을 특정한 것이 아니므로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저자에게 명예훼손을 하려는 목적(고의)이 있었다고 볼 수 없고 “위안부문제는 국민들이 알아야 할 공공성/사회성을 갖는 공적관심사항이므로 활발한 공개토론과 여론형성을 위해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 해야 한다면서 무죄를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기까지 1심재판부는 무려 1년에 걸쳐 10회 넘게 재판을 진행했고, 본재판 이후에는 매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긴 시간을 들여 재판을 진행했다. 검사는 나를 비판한 학자들의 논리를 들고 와 나의 ‘범죄’를 주장했고, 결국 법정에서의 공방은 학술세미나와 다름없는 내용이 되었다. 그에 비해 2심은 고작 4번 진행되었고, 매번 한두시간만에 끝났다. 그렇다면 1심에서 제출된 방대한 자료를 세심하게 봐야만 이 사건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을 터인데 2심 판결은 결코 그랬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 왜곡과 소송의 본질

이 판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검사가 제출한 왜곡된 책 요약(악의적인 독해)을 그대로 차용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래에 인용해 두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책의 취지를 충분히 살펴 요약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가장 신경을 써서 독자의 오해가 없도록 쓴 부분에 관해 재판부는 검사가 멋대로 왜곡한 요약을 가져와 내가 한 말처럼 왜곡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위안부는 강제 연행되지 않았다’고 쓰지 않았다. 일본군의 모집과 관여/관리도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관여했는지 자세히 썼다.

“조선인 위안부가 해야 할 일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면서 본인 혹은 부모의 선택에 의해 자발적으로 갔다” 고 요약된 부분도 엉터리 요약이고,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도 내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위안부 비판자들의 말이다. “1996년 시점에서 위안부란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던 여성들” (42)이라는 표현 역시 재판부가 인용한 유엔보고서의 내용이다. 이런 논리라면 박유하가 `위안부는 자발적매춘부`라고 했다고 보도해 온 모든 언론과 개인도 명예훼손으로 고소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나는 “법률상 배상책임이나 공식사죄를 받을 수도 없다” (2)고 한 적이 없다. 나는 그런 방식만을 지고지선의 해결방법으로 생각해 온 지원단체의 운동방식과 논리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다. “공식사죄를 받을 수 없다”가 아니라 20년 이상 법적책임만을 주장해온 지원단체 생각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니 한일협의체를 만들어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 내가 책에 쓴 내용이다. 한국판 간행 이후 나온 일본판에서는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썼다.

내가 “피고인이 주장하는 해결방식을 제시” (39)했다는 말은 검사의 주장인데, 앞에서 쓴 것처럼 나는 한국어판에서는 구체적인 해결방식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고측도, 검사도 재판과정에서 내내 이런 말로 비난했는데 실은 이 주장에 ‘제국의 위안부’ 소송의 본질이 있다. 원고측(지원단체)이 소송을 시작한 건 사실, `위안부의 명예`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운동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책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이라는 부제목에서 나타낸 것처럼 90년대 이후 위안부문제지원운동의 문제를 비판한 책이기도 한데, 그것이 고발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해 온 `법적책임`에 대해 아는 분들은 최소한 내가 만난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는 안 계셨다.

3. ‘사실적시’라는 전제에 대해

이 판결은 나의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에서 모든 조선인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니고 직접적인 폭행·협박 또는 기망·유혹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가 있으며, 일본국이나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한 증거가 없으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하여 강제력이 행사되었으며,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도 착취당했고, 일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등 내용을 함께 서술하고 있다.”(32)
“피고인은 이 사건 도서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을 모집한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모집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위안부들은 가난, 가부장제, 국가주의에 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위안소 내에서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해 강제력이 행사되었고,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 착취당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식민지인으로서 애국이 강제되었고,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동지적관계에 있었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37)
“피고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존재하고 조선인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매우 다양하며, 이 사건 도서는 피고인이 기존 자료를 토대로 현재 우리사회 주류적인 시각과는 다른 입장에서 위안부문제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내용이고, 이 사건 도서 곳곳에서 여러 예외적인 경우와 다양한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서술되어 있다.”(41)

“예외적”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쓴 사람의 견해가 드러나 있어 꼭 전부가 완전한 건 아니지만 나의 책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한 요약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유죄가 내려졌을까?

사실 나는 명예훼손 소송에서는 ‘의견’인지 ‘사실’인지가 중요하다고 듣고 학술적인 책에서의 모든 기술은 기본적으로 의견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학문이란 `진실`을 찾는 과정이지만, 아무리 내가 알게 된 사항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내가 믿었던 `사실` 역시 언제고 새로운 탐구와 학설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학문은 `의견`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헤이든 화이트의 ‘메타역사'(1973)이후,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한 것처럼 보이는 역사서조차, 입수된 자료를 두고 학자가 문학적상상력으로 엮은 `문학`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은 점차 상식이 되고 있는 중이다. 다수의 지지와 검증을 거친 가설들이 세월과 공간을 넘어 ‘진리’, ‘사실’로 정착되어 오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은 문학적 플롯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플롯을 만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라는 인식은 과거의 역사에 겸허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말하자면 모든 역사서/학술서는 ‘진실=사실’을 추구하는 것이되 하나의 사항을 최종적 ‘사실’로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논리적으로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 시점에서의 ‘인식’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나의 문맥이나 표현자체도 ‘의견’으로서 표현한 곳이 많다.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자체보다 증언을 포함해 역사를 둘러싼 담론을 분석한 학술적 비평서이기 때문이다.

4. ‘사회적 평가 저하’라는 인식에 대해

재판부는 결과적으로 나의 책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 시킨다고 말한다. 재판부가 말하는 ‘사회적 평가 저하’란 위안부 할머니들이 ‘강제연행을 주장’ 하고 있는데 그와 반대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은 그런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내 책을 읽은 이들 중에는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더 생각하게 보게 되었고, 이전에 못 느꼈던 슬픔을 느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적지 않다. 오로지 그들의 독해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이 판결은 그렇게 읽은 모든 이들을 무시한 판결이다. 대신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이들의 존재와 그렇게 유인한 이들의 오독의 ‘가능성’을 편파적으로 우선시했다. 나에 대한 유죄판결은 그렇게 내려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서라기보다는 역사를 둘러싼 담론을 분석한 메타역사서다. 한국과 일본의 여러 층위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썼고, 하나의 ‘진실’ 자체보다 눈앞에 있는 진실(대상/정황)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를 모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필요한 만큼 ‘사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 ‘사실’을 둘러싸고 대립중인 이들이 서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지향하면서 쓴 책이다. 접점을 찾기 위해 양국 정부와 지원단체를 비판했지만, 위안부에 대해서는 부정도 비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시도한 건 오히려 그동안 지원단체가 묵과하거나 은폐했던 목소리를 살려내는 일이었다. 그동안 의식/ 무의식적으로 묻혀 왔던 그 모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야 말로 과거와의 대면에서 성실한 방식– 바람직한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판부는 나의 그런 시도를 인정하면서도, 나의 책에 반발한 지원단체(와 검찰)의 나의 책에 대한 왜곡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조차 제대로 읽고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면서도, 이 판결은 결국 재판부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독자를 무시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판결문에 일부 요약된 것처럼, 나는 ‘위안부의 자발성’을 강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구조를 만든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비판했다. 설사 자발적으로 간 위안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 경우라고도 썼다. ‘(관리) 매춘’이라는 단어는 재판부가 인용한 유엔보고서와 여러 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치평가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하나의 정황설명일 뿐이다. 문맥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의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가 되어야 한다면, 1996년에 보고서를 작성한 유엔보고관, 그리고 일본군위안소를 국가가 관리한 공창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는 다른 모든 학자들도 기소되고 유죄가 내려져야 한다.

5. ‘허위’라는 인식에 대해

재판부가 나의 책을 허위라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자료는 90년대 중반, 즉 20년도 더 전에 나온 자료들이다. 그나마 고노담화는 일본정부가 직접 조사해 내놓은 견해지만, 다른 유엔보고서나 국제사법위원회의 자료는 위안부문제가 문제로서 발생되기 시작한 초기에 지원단체들이 유엔등 국제사회에 제출한 자료등을 비전문가들이 검토해 나온 자료다.

물론 유엔의 쿠마라스와미보고서는 일본이나 한국, 그리고 북한에서 학자나 위안부의 증언을 듣고 종합한 보고서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공정하게 취합하려 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보고서는 지금은 부정되고 있는 (이 문제해결을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온 와다 하루키 교수조차 작년에 낸 책에서 요시다증언을 부정했다)요시다 증언등을 근거로 나온 보고서다. 그리고 동시대에 벌어졌던 유럽등 내전에서의 강간/학살과 똑같은 것으로 이해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학계는 이후 20년이상 연구를 진행했고 지금은 학계에서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위안부의 물리적 강제연행’을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강제동원을 주장했던 이들은 지금은 동원에서의 강제가 아니라 위안소에서 부자유했다는 식으로 내용을 바꿔서 여전히 똑같은 ‘강제성’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연구자나 지원단체관계자들이 그런 정황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변함없이 ‘강제연행’에 집착하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장해 온 ‘법적책임’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 방식만이 정의로운 사죄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책을 ‘허위’라면서 고발한 이유는, 위안부할머니를 모욕하거나 일본의 책임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법적책임’의 가능성에 내가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원단체의 사고에 의문을 제기한 나를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라며 목청높여 비난하고 급기야 고발/기소에 이른 원고측과 검찰의 주장을 2심 재판부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재판부의 판결문은 1심에서 제출한 방대한 나의 자료를 완벽하게 무시했음을 보여준다.

재판부는 나의 책을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댓가를 받고 성매매를 했다`(31)”,”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 고 했다고 요약한다. 그러면서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일본국가나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동원되어 일본군 위안소에서 성적 학대를 당하며 성노예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했다`” (31)는 것이야말로 “사실” 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모집은 했지만 일본군이 납치나 속임수를 허용한 정황이 없고 “공적으로는” (즉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지시한 흔적이 없고 오히려 그에 반하는 정황이 증언/수기등에서 보인다) 오히려 그런 정황을 단속한 정황이 보인다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할머니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당사자의 증언은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다만, 경찰과 같이 혹은 혼자 나타난 ‘군인’처럼 보였던 이들은 군속대우를 받고 군복을 지급받은 업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재판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곳을 나의 글로 착각하고, 그 부분에 내가 일일이 그에 반하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분을 ‘범죄’로 단정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대부분, 말한 이들을 비판하는 문맥, 혹은 전체를 정리하는 부분에서 쓰인 내용들이다. 오히려 지적된 대부분 앞뒤에 반박/비판이 들어가 있는데도. 그런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에만 반응한 셈이다.

재판부는 유엔보고서에 나오는 “일본정부가 강간수용소의 설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군부는 물리적 폭력, 유괴 강요와 속임수를 동원했다” (34)는 말, 일본군이 여성이나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업자에게 적극적 지원을 부여했다” 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 인식이 “위안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 이라고 주장한다(36). 나의 책은 이런 “중요한 부분이 사실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에 “허위” 라는 것이다.

재판부가 유엔보고서쪽이 진실일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국제사회’라는 단어를 무조건 권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원고측과 검찰이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원고측은 그동안 나온 국제보고서들과 고노담화를 나의 ‘범죄’를 증명하는 자료로 검찰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들의 고소/기소 취지는 말하자면 ‘국제사회는 물론 일본까지 공유하는 인식을 박유하가 혼자 부정하고 있다’였다.

하지만 나는 고노담화를 부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높이 평가했다. 다만 해석을 달리 했을 뿐이다. 지원단체는 예전에는 고노담화가 강제성을 부정한 것이라면서 미봉책으로 치부하고 비판했었다. 그러다가 아베정권에서 고노담화가 재검증대상이 되자 갑자기 고노담화가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라면서 지키기에 나섰을 뿐이다.
그런데, 고노담화를 만든 전 관방장관은 나의 기소반대성명에 서명하기도 했다(2015/11,http://www.ptkks.net/approval/). 나의 해석이 그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다면 그가 참여했을 리가 없다.

재판부는 국제보고서의 ‘성노예’인식이 옳고, 나의 책은 그에 반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지원단체의 성노예인식에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동시에 위안부가 분명히 `성노예적`존재라고 썼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하지만 피고인은 처음에는 일부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거나 여러가지 경우가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다가 이 사건 표현들에서는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서술하거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위 표현을 접하는 독자들은 ‘전체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또는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였고, 애국적으로 일본군과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서술되어 있고, 이러한 내용이 객관적인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사건 표현들은 허위사실에 해당한다”(37)고 말한다.

이런 재판부의 인식은 ‘자발적 매춘부’라면 피해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만든 것이기도 한데, 원래는 지원단체의 인식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 있던 이들이 오히려 ‘매춘’에 대해 차별적인 생각을 스스로 가졌거나(그들이 오로지 ‘순결한 소녀상’에 집착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20년 이상 여성인권운동을 하면서, 사회가 필요시하고 차별해 온 문제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시도한 나를 죄인으로 치부하고 고발한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한 상황을 모르는 채로, ‘사회가 위안부를 차별(사회적 평가 저하) 할 수 있으니 (저자의 의도가 그게 아니더라도) 처벌한다’ 고 한 셈이다.

6. 인물특정 여부에 대해

재판부는 나의 책이 특정 위안부를 지칭해 명예훼손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2심 재판부의 말이 맞다면 오히려 원고로 이름이 올라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 개별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누구의 이름도 의식하지 않고 책을 썼다. 그런데 원고측이(검찰이) 나의 ‘허위’ 를 증명하기 위해 재판부에 제출한 나눔의 집 거주 다섯분의 구술서에 따르면 오히려 아무도 그런 경험을 한 분은 없다. 심지어 그 중에는 ‘보국대’로 갔다고 말한 분조차 있다.

그런데 재판부는 내가 집필목적에 대해 쓴 서문중에서

“말하자면 한일양국은 20여년의 역사문제갈등을 거치면서 심각한 소통부재 상황에 빠져 버렸다. (중략) 그 갈등의 중심에 위안부문제가 있고, 그들(일본의 부정자)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위안부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38-39)라는 서문일부와, 이하 인용한 부분을 가져와 내가 구체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는 위안부를 특정했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과 일본사이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다. 피고인도 이 사건 도서에서 [한국의 위안부들과 지원단체는 그 후에도 일본정부와 세계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사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로 간주되고 있지만, 다른 나라는 사죄를 받아들였으므로 현재의 위안부 문제란 실은 이 몇십명의 위안부와 위안부지원단체가 주체가 된 한국인 위안부문제이기도 하다(171)] 라고 썼다” 면서 “스스로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나타내고 있는 사람에게만 명예훼손 문제가 생길 뿐” 이므로 “제3자가 일본군 위안부를 생각할 때는 전체 ‘조선인 위안부’보다는 우선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힌 ‘위안부피해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위안부를 “특정” 했다고 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 인용된 부분에서 내가 강조한 건 ‘한일갈등의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일 뿐, ‘갈등을 빚고 있는 그 위안부’가 아니다. 이 부분에서도, 책 전체에서도 나는 위안부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사죄요구가 옳지 않다고 쓴 적이 없다. 일부 할머니들에게 주어진 정보가 과연 정확했는지, 그렇게 생각하도록 이끈 지원단체의 사고가 과연 절대선인지를 의문시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300쪽이 넘는 나의 책을 읽으면서 위안부의 슬픔을 느꼈다는 이들은 대부분 재판부나 원고가 말하는 ‘특정한 그 위안부’가 아니라 ‘이름모를 위안부’, ‘전쟁터에서 동원된 위안부’를 떠올린 이들일 것이다. 그런 독자들이 실재하는 한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만일 내가 위안부문제를 그저 ‘사죄보상을 요구하는 그 위안부들의 문제’로 생각했다면 애써 ‘위안부의 슬픔과 고통’을 전하려는 책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기존지원단체과 같은 규탄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귀를 기울이면서, 문제적인 생각을 비판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위안부’의 실상을 보여주는 추상적인 ‘위안부’가 있고, 현재의 한일갈등의 중심인 구체적인 ‘위안부’ 할머니가 있다. 나의 책은 후자에도 주목했지만, 고찰 대상은 어디까지나 전자였다. 검찰이 매춘/강제성/동지적관계, 이 세 부분을 문제삼았다는 것은 전자를 문제삼아 기소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이름모를 위안부’를 포함해 모든 (추상적) 위안부에 관해 쓴 부분에 주목하면서 내가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현재의 구체적인) 위안부’를 특정했다는 말은 그들의 기소취지에 비추어 봐도 비논리적이다. 설사 오로지 나의 책을 읽고 현재의 위안부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의도하지 않은 한 그건 저자의 책임일 수 없다. 나의 고찰 대상이 어디까지나 전쟁터에서 사망한 ‘그녀들 모두’였다는 건 위안부에 대해 설명한 책의 1부를 이렇게 끝맺었다는 만으로도 분명하다. (2부와 3부는 90년대 이후의 갈등양상에 대해 썼고 4부는 현대가 과거를 반복하고 있는 구조에 대해 썼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들이 아닐까.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다 생명을 잃은 이들—말없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일본이 사죄해야 하는 대상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름을 잃은채로 성과 생명을 ‘국가를 위해’바쳐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제국의 위안부’들에게.” (104)

7. 목적 (“고의”)에 대해- ‘사회적 평가저하’를 한 건 누구인가?

재판부는 나의 책이 다양한 위안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피고인은 이 사건 표현들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서술하지 않거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를 접하는 독자들은 마치 대부분 또는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였고 애국적으로 일본군에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피고인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서 이 사건 표현들을 서술하였다고 보인다”고 했다 (41).

그러면서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를 집필한 목적, 이 사건 도서의 성격 및 전체내용을 감안하더라도 피고인은 이 사건 표현들에서 적시한 사실이 허위인 점과 그 사실이 피해자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 시킬 만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였다고 보인다. 피고인에게 명예훼손 고의가 인정된다” 는 것이다. (41-41)

말하자면 재판부는 그저 ‘가능성’을 처벌하고자 했고, 그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책의 모든 부분에서 재판부 스스로가 옳게 요약하기도 한 나의 책의 취지를 반복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책이라는 매체가 한 개인의 표현이기도 한 이상, 이런 생각은 개인의 표현방식에까지 국가가 관여해야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과 한국의 독자를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책을 썼고 각각의 부분에서 그 독자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나갔다. 같은 소재를 두고 약간 다른 뉘앙스로 기술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진실을 가능한 한 보되 더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어떻게 생각할 지’ 여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고와 검찰과 재판부는 나의 책이 정작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한 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부분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단어에만 집착했다. 하지만 단어자체가 문제라면, 나를 고발한 이후 언론이 나를 비난하면서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고 한 박유하”라고 반복해 온 시간들, 이 3년반의 시간들이야말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모욕적인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위안부를 비방할 의도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웬만한 독해력을 가진 독자라면 반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썼다. 책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악의적’으로 읽는 독자가 설사 있다 해도 그건 저자의 책임이 아니다.

내가 이 책에서 강조한 건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소녀’만 피해자로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인식이 오히려 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상황이었다. 설사 자발적으로 갔다 해도 그 사실이 은폐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50년 가까이 위안부 체험을 한 이들이 침묵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로 하여금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운 지원자들조차, 그러한 구조를 오히려 공고히 해 버린 건 단순한 오해나 시대적인 문제가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운동의 확산을 위해 전략적인 것으로 바뀌어 간 측면이 있다. 나는 그 전략을 이해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전략이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명백히 적어둔 나의 집필목적을 왜곡해가면서까지 지원단체들이 주장하는 대로 고의/범의를 보려 했다.

물론, 우리사회의 매춘에 대한 인식—‘사회적 평가 저하’를 재판부가 우려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책이 나온 후 나의 책을 근거로 그저 ‘위안부는 매춘부’로 생각하고 위안부에 대해 비판적이 된 이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렇게 읽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저 나의 책을 멋대로 왜곡해 자신들이 이미 해 왔던 말을 보완하기 위해 이용한 이들일 뿐이다. 중요한 건 매춘여부가 아니라 그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해여부다. 나는 오로지 그 옛날 소녀/여성들의 신산한 삶을 더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를 지향하며 자료와 글쓰기 방식을 골랐다. 그런 나의 책을 왜곡한 건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렇게 대립해 온 이들의 접점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썼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책을 있는 대로 받아들여 준 건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반독자들이었다. 이번 판결은 그렇게 ‘오독하는 독자들 ‘,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독자들’을 우선시한, 사회적 성숙을 오히려 퇴보시키는 판결이다.

8. 식민지 트라우마

원고측과 검찰과 재판부의 생각과 판단의 저변에는 우리의 식민지 트라우마가 있다.

예를 들면 재판부는 내가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과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한 부분을 들어 문제시했다. 물론 나는 완전히 같지 않다고 분명히 썼고, 조선인은 기본적으로 차별구조 속에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에 동원되어 다수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생활이 가져다 준 ‘여성’으로서의 고통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전대표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위안부속에서 굳이 한일차이를 보고 싶어 하는 건 그들이 인간의 아이덴티티를 성보다 민족에서 보고 싶어한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아이덴티티는 다양하고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것이 ‘여성’이기 때문이었는지, ‘조선인’이기 때문이었는지는 한마디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양쪽에 다 이유가 있었다고 썼다. 하지만 기존학자 대부분은 ‘여성의 인권’을 앞세워 운동과 연구를 해 왔으면서도, ‘일본’국적을 갖고 태어난 ‘여성’의 인권은 애써 무시 혹은 간과해 왔다. 그건 세계연대를 위해 ‘여성문제’임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조선인 위안부의 ‘여성’으로서의 고난 역시 도외시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여성’이면서도 공적으로는 ‘남성’을 비판할 수 없었고, 자신들을 착취한 ‘계급’의 문제를 말하지도 못했다. 물론 증언에서는 그런 구조를 충분히 말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묻혔던 말들을 살려내 언어화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만 여기서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지원단체와 일부 학자는 자신들의 인식만이 절대 옳은 것으로 간주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입을 막으려 했다. 혹은 재판 중에 나를 비판하는 일로 직간접으로 고발에 가담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서’를 지향한 것이 아닌 이 책을 두고 ‘역사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더구나 그들은 나의 책이 이른바 일본우익의 책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일본우익과 같다고 외치는 일로 나에 대한 국민비난을 조장하고, 대중에 의한 끔찍한 여성혐오적 비난과 협박을 방치했다. 이것이 대한민국과 재일교포 ‘페미니스트’와 위안부관련 학자와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3년 반 동안 보여준 모습이었다. 그런데 2심 재판부는 결국 그들의 손을 든 것이다.

재판부는 ‘동지적 관계’도 ‘허위’로 판단했지만, 나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라고 분명히 적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나의 책이 ‘애국을 강제했다’고 쓰고 있다고 적고 있으니 내가 강조한 메시지는 분명히 받아든 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원고측과 검찰의 왜곡요약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가 애국적 자긍적으로 협력하였다’고 썼다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물론 실제로 ‘애국적/자긍적’이었다고 스스로 말한 자료들도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목소리까지 포함해 위안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어야 한다. 한사람의 인간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싶다면.)

원고측 고발, 검찰기소, 그리고 이번 형사 2심 판결까지, 이들이 나의 책을 왜곡해 언급할 때마다, 그리고 이들의 말을 그대로 언론이 보도하고 SNS가 확신시킬 때마다, 나는 이들의 ‘허위’사실 유포에 의해 학자로서의 명예에 상처를 입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로 인해 실제로 ‘사회적평가가 저하’된 건 다름아닌 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원고측-고발자들의 목적이었다. 나에게 이 3년반동안 쏟아진 수많은 비난과 협박들은 그들의 의도가 성공했음을 증명한다.

공정하게 평가해야 할 사법부가 스스로 국가의 얼굴을 한 민간인의 손을 들어 한사람의 학자에게 형사처벌을 내린, 2017년 대한민국의 공간이 내게는 아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에서 승소한 이유 [허핑턴 포스트]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에서 승소한 이유 [허핑턴 포스트] 바로가기

경향신문 이범준 기자님과 타언론 관계자 여러분께,
승소 이유를 알려드립니다. (긴 글입니다)

형사소송에서 승소했지만, 누가 알려 줘서 보게 된 이 기자님 글을 보니, 저의 명예회복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는군요. 아니, 오히려 법원이 말한 “틀린 표현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을 대부분 언론이 앞뒤 맥락 없이 인용한 탓에 오히려 법원이 나의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간주하면서도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한 것처럼 인식한 이들이 더 많아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기자님은 제가 패소한 가처분과 손해배상 판결이 옳다는 전제하에 이번 형사판결문을 읽고 있지만, 가처분 소송과 손해배상 소송에서 제가 진 이유를, 저는 명확하게 압니다. 달리 말하자면 형사소송에서 이긴 이유를 명확하게 압니다.

이하, 참고하십사 하고 간단히 설명 드립니다.

변호사 등 주변인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저는 가처분재판에 한번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도중에 이건 아니지 싶어 출석하려 했지만 결국 그랬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말린 이유는 ‘위안부 할머니’들께 심한 언행을 당할 수 있다는, 저를 생각한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반성도 담아서, 5,6회 이어진 손해배상재판에서는 꼬박꼬박 출석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은 언제나, 10분 이내에 끝났습니다. 제출한 자료들을 앞 좌석에 앉은 양측 변호사들과 재판장이 확인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에서 저는 준비한 진술문을 읽었지만(다 읽었어도 10여분이나 되었을 짧은 글이었는데도), 재판장은 도중에 빨리 끝내라는 말로 제지했고 결국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가처분재판과 손해배상재판에서 나는 판사에게 나의 생각을 충분히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더 나빴던 건, 재판 대응 자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처분과 손해배상에서도 저는 최선을 다했고, A4 150매 되는 답변서를 비롯한 수많은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국의 위안부”자체에 집중했습니다. 책에 대한 원고 측 지적이 악의적인 오독의 결과이자 모함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 재판을 맡은 판사들은 끝까지 제가 제출한 자료와 진술은 무시하고 원고 측이 만든 프레임에 갇혀 이 사건을 바라보았지요.

그래서 형사재판에서는 다르게 대응했습니다. 원고 측과 검찰이 내놓은 모든 자료 자체에 대해 일일이 다 반박했습니다. 제가 높이 평가했던 고노담화마저 내가 그것을 부정했다면서 나를 공격하는 자료로 제출되는 아이러니를 견뎌야 하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대응했습니다. 그중에는 “유엔보고서”도 있고 젊은 학자들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 좌담회도 있었고, “제국의 변호인 – 박유하에게 묻는다”라는 책과 재일교포 정영환씨의 책도 있었습니다. (그의 책이야말로 얼마나 왜곡으로 점철된 책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검찰과 원고 측의 모함과 억측과 아집의 논리 자체에 “논리”로 대처했습니다. 형사재판부가 나의 손을 들어준 것은, 오로지 형사재판부터 참여한 새 변호사의 “법리적 논리”와 그런 나의 “논리”가, 검찰이 앵무새처럼 대변한 기존 논리들의 문제점을 논파한 결과입니다.

이 기자님은 물론 언론관계자들께, 먼저 이 사실을 인식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형사재판부 판사와 내가 맞대면한 기간은 거의 1년이고, 10회 이상 재판을 통해 논박한 시간은 재판 때마다 거의 하루 종일이 걸렸으니, 수십 시간에 이릅니다. 이 기자님은 혹시 이 시간들 중 일부라도 방청하셨나요? 이 기자님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오류와 비난은 , 방청하지 않으셨기에, 혹은 잘 듣지 않았기에 이루어진 일로 생각합니다.

학자는커녕, 인간에 대한 존중 자체가 없는, 적대와 모욕을 대면하고 견뎌온 지 벌써 2년하고도 8개월입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힘겹게 노력했고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신 결과로 승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판결, 판사가 검찰이 대변한 학자들의 말을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말을 재판부가 “인용”했다고만 써서 원글 전체 맥락의 반대로 이해되도록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법원의 판결문이니, 마음에 안 들어도 왜곡은 하지 않아야 기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것 아닌가요.

또, 판사가 저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무엇보다 저의 항변에 시간을 들여 귀 기울여 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기존 상식에 기대어 사태를 판단하지 않는 날카로운 직관과, 그런 직관을 만든, 인간에 대한 존중이 있었습니다.

저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지 않았고, 위안부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원고 측이 멋대로 읽어 저를 밀어 떨어뜨린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그 결과로 승소했습니다. 이 기자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조악한 연구”를 재판부가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지킨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와 납득이 아니라 오히려 적개심을 증폭시키고 그런 감정을 판결 왜곡으로 보여준 이 기자님의 칼럼, 연합뉴스와 뉴시스의 악의적인 사진으로 (연합뉴스는 원고 측의 악의적인 프레임을 정식고발 전에 유포시킨 곳이고, 뉴시스는 법정을 지켜보러 와 있는 저의 가족을 향해 제가 잠깐 미소 짓는 그 순간을 포착해 “웃으면서 법정에 들어서는 박유하”라는 캡션을 달아 유포시켰던 곳이지요) 변함 없이 마녀사냥에 골몰하는 수많은 기사들에 뒤늦게 접하고 보니, 저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는 날이 내 살아 생전에 올는지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악의적인 틀을 씌워서 고발한 나눔의집 관계자들에게 있고 저에 대한 명예훼손과 인권 침해 가해자는 우선은 그들입니다. 더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들의 주장에 반하는 심포지엄을 지인들과 함께 열었던 일과 제가 가까이 지냈던 나눔의집 거주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이 저에 대한 고발의 직접적인 배경이었습니다. 심포지엄이 열린 지 한 달 반 만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일주일 만에 저는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발장에는 〈박유하는 예전에 `화해를 위해서`를 썼다. 그러더니 `제국의 위안부`를 썼다. 또 사람들을 모아 심포지엄까지 열었다, 그대로 놔두면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 방해가 된다〉는 취지의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재판경과 바로가기

또 하나의 고발장에는 서경식 교수 등 일부 재일교포의 저와 일본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마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정말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의 홈페이지 자료들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형사1심] 〈제국의 위안부〉최후진술

정리하자면, 이 고발은 진보 간의 생각 차이가 빚은 고발입니다. 그리고 그에 편승한 지원단체가 자신들의 문제를 덮기 위해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가 조심스러워서 저는 그 사실을 아직 세상에 분명하게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지원단체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한 학자를 함정에 빠뜨린 사건임에도,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려고 한 언론도 유감스럽게도 거의 없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이토록 많은 갈등을 유발 중인 사건임에도 말입니다.

승소를 했음에도, 여전히 기존 틀에 갇혀 사물을 보려 하는 경직된 사고와, 재판을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행간의 의미를 모를 젊은 기자님이 , 판결문마저 곡해하면서 한 학자의 책을 “조악한 연구”라 공공의 장에서 말해 버리는, 그리고 어쩌면 그런 자신의 글을 “정의의 필봉”쯤으로 여길 오만이 빚은 폭력은, 온전히 이 기자님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이 기자님 같은 얄팍한 인식과 태도가, 한국사회 자체를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서 분노보다 서글픔이 먼저 밀려 옵니다. 한국사회는 병들어 있고, 그 정도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덕분에 다시 깨달았습니다. 피부가 매끈한 골다공증 여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무려 2년여나 국가 기관을 동원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서 책을 쓴 나를 공격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곳이, 다른 곳이 아닌 내 나라여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꽁꽁 뭉친다 해도 미래가 불투명하고, 오히려 우리가 잠시 봤던 자화상이 허울 좋은 신기루일 수 있다는 것이 하루하루 드러나고 있는 이 시대에, 진영논리가 만든 지적 태만에 기대어 오해하고 곡해하고 공격하고 반목하는 일에, 이 기자님 같은 젊은 분들이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슬프군요.

제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경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포기와 체념과 허무에 맞서 이 시대를 견디고 건너갈 수 있는 힘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부디, “정의의 필봉”으로 사람을 하루하루 새롭게 죽이지 마시고, 판결문을 다시 읽어 보시고 사태를 제대로 이해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재판에 정말 관심이 있다면 제가 재판부에 제출한 모든 자료들도 봐주시기 바랍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하십사, 이기자님이 일부를 빼놓고 전달해 반대 의미가 된 판결부분을, 보여 드립니다. 녹색 부분이, 빠진 부분입니다.

[형사1심] 시민·독자의 탄원서

 

존경하는 재판관님께.

 

우리는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형사상의 제재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로서 우리들은 <제국의 위안부>의 어디에서도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비방 및 명예훼손의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기술한 “자발적 매춘부”라는 표현은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그들의 표현을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귀향>을 보면 일본군이 직접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부분 강제연행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실제 위안부 피해자들이 위안소에 이르게 된 과정은 그보다 더 다양하다는 사실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해당 저서는 다수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제국의 관헌이 아닌 일본인과 조선인 민간업자들에 의한 사기와 협박 및 회유에 의해 위안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위안소에 이르게 된 과정을 불문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위안소에서 일본군에 의해 원치 않은 윤간을 당하고 업자에 의한 강제노동과 폭행 및 갈취 등의 부당한 대우를 당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최소 수만에서 최대 수십만의 여성을 동원한 위안부 제도가 일본 우익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어느 국가에나 존재했던 군대 주변의 공창제와 다르며 그 규모상에서도 잔인성에서도 상이하다는 사실을 실체적으로 조명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국가와 군대에 의해 조직화되고 제도화된 범죄였다는 것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155p, 157p 참조)

 

이상이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인식입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의 피해의 유형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습니다. 피해자 중에서 자신의 상황에 격렬한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개인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그만 세뇌되고 만 경우도 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가 이 사항을 굳이 조명하는 이유는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제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제국의 강제연행설을 부정함으로써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애써 외면하려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한 책입니다. 민간업자가 주체가 되어 위안부를 모집하고 가혹행위를 저지른 ‘경우’에도 일본제국이 위안부 정책을 입안함으로써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한 “구조적 강제성”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인 책임과 별개로 일본국에 대해 정치적/역사적 책임을 철저히 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에 법적 책임을 지우기 곤란한 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법적인 배상책임에 관한 한 일본 내의 사법적 판단은 이미 끝났으며 법적책임을 인정하는 별도의 입법도 의회 내에서 난망한 상황입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한편으로 이런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책입니다. 박유하 교수는 법적 책임이 불가하다면 일본이 그 이상으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 263p 참조) 그런 의미에서 박유하 교수는 저서의 후반부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고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포괄적인 보상을 약속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계승하고 확대시킬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무라야마 담화마저도 우익의 술수로 폄하합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방식으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 시민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무엇보다 한국 내에서 일본의 양심적 지성이라고 평가받는 와다 하루키 역시 무라야마 담화에 호응하고 행동에 나선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우리 독자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견해가 특정단체와 특정이념에만 맡겨지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합니다. 확실히 <제국의 위안부>는 그 동안 언론에 조명되어온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접근과 궤를 달리합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전후 일본의 시민사회에서 전쟁책임에 대한 나름의 인식과 논의의 발전이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하며 한일양국 시민사회의 인식지평과 공감대를 넓혀야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정부와 사법부 입법부를 향한 법적책임에 대한 인정투쟁에 경사되어 왔던 지원단체의 운동적 접근이 과연 문제해결에 있어서 유효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한 일부 지원단체가 강제연행을 당한 일부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만 초점을 맞춰 취사선택함으로써 그 반대로 위안부 제도에서의 강제연행 부정설에 초점을 맞춘 일본 우익세력의 물타기를 허용하고 만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또한 보통의 일본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에 대해 우익이라 싸잡아 매도하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제국의 위안부>는 논쟁적인 저작입니다. 또한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할 것을 촉구하는 저작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공론장에서 제대로 된 논쟁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나 최근 해당 저작과 저자에 대한 민형사상의 제재로 인해 제대로 된 논쟁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옹호자와 비판자 사이의 감정적인 비난이 초래되었습니다. 이처럼 <제국의 위안부>에 법적 낙인이 찍힘으로써 다시 한 번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 시민의 이해의 엇갈림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가로막히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반성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러한 교착상태가 하루라도 빨리 타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는 한일양국에서 온전한 형태로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혀야 합니다.

 

이처럼 박유하 교수의 저서에 대한 독자들의 논의를 고려하시어 존경하는 재판관님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12월

380명

(법원에 제출한 탄원인 명부는 홈페이지에 별도 공개하지 않습니다.)

[형사1심] ‘다른 목소리’는 처벌받아야 하는가 〈제국의 위안부〉 최후진술

허핑턴 포스트 링크 바로가기

<들어가며>

2016년12월20일, 1년 동안 끌어온 형사재판의 결심(結審)이 있었다. 이하는 그날 법정에서 읽은 최후진술 전문이다. 형사 재판에서 나는, 아직 준비공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 5월 반박증거자료로 1000여매의 자료를 제출했다. 위안부에 관해 알 수 있는 증언, 수기, 기사 등이다. 위안부문제 전체를 아는데 도움이 되도록 시대순으로, 그리고 당사자/주변인/학자 순으로 배열했다.(나온 시기가 늦다 해도 저자나 발언자가 본 시대. 즉 동시대를 산사람들이 본 정황부터 배열했다. 자료 링크)

그리고 이후에,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 위안부를 명예훼손하는 책일 수 없음을 증명해 줄 다른 여러 자료들을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본문에서 ‘증거자료’ ‘참고자료’라고 쓰고 있는 것은 그렇게 구별한 두 종류 자료들을 말한다. 하지만, 참고자료들 중에도 증거자료 이상으로 중요한 자료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할머니와의 대화록이나 영상 등이다.

참고자료는 결심 이전에 160개 이상 제출했고, 이 글을 쓰면서 몇 가지 더 언급한 자료들을 ‘추가자료’라고 썼다. 본문과 함께 재판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아직 미완성인 부분이 있지만 양해해 주시면 좋겠다.

검찰은 이날, 나에게 징역 3년을 구형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점, 뉘우치지 않고 있는 점, 피해자들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깨달았는데 이들은 나의 ‘반성’을 끌어내려 한 것 같다. 나는 형사의 모든 심문에 반박할 수 있었는데, 반성의 태도를 표하지 않아 불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검찰과 관계자들은, 기소 이전에 조정을 권유하며 ‘사과, 한국어삭제판 절판, 일본어판 삭제’를 요구했고, 나를 비난해 오던 어떤 교수는 최근에 ‘일본어판 절판’을 요구해 왔다. 그리고 내가 끝까지 응하기 어렵다고 한 건 일본어판 삭제/절판뿐이다.

그런데도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말하지 않은 채, 내가 조정에서 사과를 요구했다면서 마치 할머니에게 요구한 것처럼 비난했다. 내가 요구한 건 나의 책을 왜곡해서 고소해, 전국민의 비난을 받게 만든 주변인들의 사과였다. 나는 한 번도 위안부할머니들을 비난하거나 무얼 요구한 적이 없다.

내가 이 구형에 실망하는 것은, 구형 자체가 아니다. 나의 모든 반박자료들을 봤으면서도 못 본 척하고 중죄를 내려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검사의 몰양심이다. 물론 그 배후에 있는 것은 할머니들이 아니라 주변인이다.

이 구형은 사실, 왜곡과 무지로 점철된 논리를 검사에게 제공해 앵무새처럼 대변하도록 만든 일부 ‘학자’들의 것이다.

<형사재판 최후진술>

존경하는 재판장님,
형사재판이 시작된 지 벌써 일 년이 되어 갑니다. 그동안, 저에게도 가능한 한 발언권을 주시고, 저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주시면서 공정하게 진행해 주신 데 대해 먼저 깊은 감사말씀 드립니다.

1. 고의성(犯意)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 〈제국의 위안부〉를 쓰기까지

먼저, 제가 〈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저는 25년 전 유학 막바지 무렵에, 도쿄에 증언을 하러 오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통역을 자원봉사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울부짖는 할머니의 증언을 들으며 눈물 흘린 경험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위안부 문제는 이 25년 동안 저의 머리 속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귀국 후에는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운동방식에서 모순을 보거나, 운동에 다가갈 특별한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켜보기만 했지만, 10년 전에 위안부문제에 관한 첫 책을 쓰게 될 때까지, 수요집회에 참여하거나, 나눔의집에 찾아가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2) 세월이 지나 2004년에, 민족주의를 넘어 한일문제를 논의하는 한일지식인 모임을 만들게 되었는데, 제가 이 모임을 만들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도 사실 위안부문제에 있었습니다. 일본의 문제적 교과서를 반대하는 모임 대표이기도 했던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교수와 의기투합해 모임을 만들면서, 제일 먼저 함께해 주기를 부탁했던 이가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 교수였던 것도 그래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오랜 세월 역시 위안부 해결을 위해 앞장서 활동해 왔던 와다 하루키 교수와 우에노 교수를 같이 초청해 서울에서 심포지엄을 했습니다.이때 저는 이 분들의 발제에 대한 토론을 위안부 지원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윤미향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대협이 와다 교수가 중심적으로 활동한 아시아여성기금을 비난해 왔기 때문에, 이들 간의 접점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2008년에 나온 〈한일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윤미향씨는 기존의 주장만을 되풀이했고 결국 접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3) 실은 저는 그 심포지엄을 열기 직전에 〈화해를 위해서 | 교과서 /위안부/야스쿠니/독도〉라는 책을 냈었습니다. (위안부문제 관련은 2장. 재판부 기제출 참고자료 98. 이하 ‘참고자료’로 표기) 정대협의 운동방식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강조한 것은, ‘대립 중인 문제를 풀려면 우선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지원단체가 언론과 국민에게 내보내는 정보가 정확하지 않고 일관성이 없으니 우선 정확히 알자. 그리고 나서 다시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저의 책을 별 거부반응 없이 받아 주었습니다. 몇몇 언론의 리뷰를 얻을 수 있었고, 다음해에는 문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참고자료 86,87)

4) 〈화해를 위해서〉가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일본에서의 발언기회도 많아졌는데, 그때마다 저는 위안부문제 해결에 일본이 다시 나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97년에 만들어진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은, 2003년에 여러나라의 전 위안부들에게 일본수상의 편지와 함께 보상금을 지급한 후 2007년에 해산했고, 그 이후로 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급격히 식어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2010년, 한일합방 100주년이 되던 해, 일본정부는 물론 한국정부조차 위안부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던 때입니다만, 저는 일본 언론을 향해 그 해에 ‘일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위안부문제’라고 썼습니다(참고자료 59. 교도통신 칼럼. 2010)

5) 그리고, 다음 해인 2011년 겨울, 역시 일본매체에, 위안부문제에 대한 글, 일본의 우익과 정부와 지원단체를 각각 비판하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web Ronza. 2011/12~2012/6) 2년 후에 한국에서 먼저 책으로 나오게 된 〈제국의 위안부〉에는 이때 연재한 글도 한국어로 번역해 실었습니다.

다시 말해,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문제에 무관심했던 일본을 향해, 위안부문제를 다시 환기시키고,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 책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서, 책으로 먼저 나오게 된 건 한국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원래는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위안부문제를 위해 오래 애써온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가 제가 고발당하자 ‘일본에서 위안부문제를 환기시키는 순기능’이 있다고 언급한 것은 저의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기사 링크)

6) 아직 글을 연재 중이던 2012년 봄, 이번에는 일본에서 제가 2005년에 시도한 것과 같은, 똑같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방법에서 의견이 다른 이들을 불러 접점을 찾아 보고자 하는 취지의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저도 와다 교수와 나란히 초청받아 와다 교수와 비슷한 입장에서 의견을 말했습니다. (참고자료 162)

이 심포지엄의 타이틀이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서〉였고, 주최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정대협활동을 했거나 일찍부터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 한국 정대협 첫 대표인 윤정옥 교수와도 친분이 있던 여성학자였다는 것은, 그들이 저의 입장을 와다 교수와 비슷한, 다시 말해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온 인물로 이해해 주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7) 2012년 봄, 일본이 시도한 사죄보상 움직임을 청와대 인사가 지원단체에의 반대를 미리 신경 쓰면서 위안부당사자는 물론 지원단체에게 말하는 일조차 없이 거부한 기사를 보고, 저는 이대로 가면 위안부문제 해결은 영원히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향한 글을 더 쓰기 시작했고 이미 쓴 일본어 글도 번역해 넣었습니다. 그것이 1년 뒤, 2013년에 발간된 〈제국의 위안부〉입니다.

이 무렵 저는 연구년을 맞아 일본에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오래 교류해 온 여러 학자들과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자주 했고, 돌아오기 직전에는 도쿄대학에서 또 다시 접점을 찾기 위한 세미나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발 직후 기고와 다른 글들에 쓴 것처럼(참고 45-50), 〈제국의 위안부〉에서의 저의 관심은 기존 ‘상식’을 재검토하고, 그에 기반해 ‘또 다른 해법’이 있는지 고민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 고민을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한국인들의 진정한 관심과 이해가 깊어져서, 더 많은 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 위안부할머니들을 하루라도 빨리 편안하게 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의 구체적인 제안은, 그저 ‘위안부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위안부담론과 해결을 위한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으니 당사자를 포함한 한일협의체를 만들고 일본과 대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재판장님.
위안부문제에 대해 알게 된 이후, 이 문제에 관한 저의 관심과 행동과 집필은 전부 위안부할머니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기존 상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학자의 당연한 본분이자, 한국에 거주하면서 일본을 가르치는 일본학 전문가로서, 의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태를 정확히 알아야만, 생산적인 대화가 시작되고 올바른 비판도 가능하다는 것이, 한일관계 관련 첫 책을 내놓을 때부터 저의 일관된 생각이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생각에서 쓴 책입니다.

2. ‘위안부 할머니를 비난하는 일본의 우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에 대해 | 일본의 평가

그런데 원고 측 대리인과 검찰은, 저의 책에 일본의 책임을 무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비난합니다. 저의 책이 일본우익을 대변했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미화했다는 거짓말에 더해, 위안부문제해결에 ‘해악’이 되는 책이라고까지 합니다. 〈제국의 위안부〉 분석을 학생들을 동원해 시켰던 나눔의 집 고문 변호사는, 오래 전 책인 〈화해를 위해서〉가 청소년 유해도서라면서 당시의 〈우수 교양도서〉 지정을 취소시키려는 운동에까지 나섰습니다.

하지만 지원단체가 고발하기 전까지는, 〈제국의 위안부〉역시,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참고자료 5-12, 신문서평 등)

중요한 건, 제가 일본의 책임을 무화시키려 한다고 원고 측으로부터 비난당한 그 일본에서, 저의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일 것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의 책을 높이 평가해 준 것은, 원고 측이 말하는 것처럼 책임을 부정하는 일본우익이 아니라, 일본의 책임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해 온, 이른바 양심적지식인과 시민들입니다.

그건 우선, 2014년 가을에 일본어판이 나온 이후 가장 먼저 서평을 써 준 곳이 이 문제에 오랫동안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아사히신문이고, 아사히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평을 받는 도쿄신문, 그리고 중도적인 마이니치 신문 등이 서평, 칼럼, 사설 등을 통해 긍정적으로 언급해 주었다는 사실이 보여 줍니다.

그런 글들이 저의 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원고 측의 거짓말을 밝히기 위해 심사평, 학자와 작가 등의 말을 일부 읽어 보겠습니다.

“군으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의해 납치되어 성적봉사를 강요당한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의 뒤에는 단순한 전시하의 인권침해로 보는 견해보다도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로까지 시야를 넓혀 문제를 파악하는 날카로움이 있다. 그것은 전시하의 인권침해적 범죄라는 이해보다도 엄중한 물음을 품고 있다. 박유하는 과거를 미화하고 긍정하려고 하는 역사수정주의자의 시점과는 정반대의 시선을 위안부피해자에게 쏟고 있는 것이다”(나카자와 게이, 작가, 호세이대 교수, 웹론자 2016년 1월 18일)

”여성을 수단화 물건화 도구화하는 구조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표한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축이다.”(다나카 아키히코, 도쿄대 명예교수,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심사평, 2015) (참고자료 71,72)

“이 책의 평가해야 할 점은 제국, 즉 식민지지배의 죄를 전면에 끌어낸 데 있다”(우에노 치즈코, 도쿄대 명예교수,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거시적인 규정성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의 상황을 꼼꼼하게 보아 가는 것이 식민지지배를 생각하는 시각이 아닐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식민지지배 폭력성의 진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는 잇고 있다고 생각한다”(아라라기 신조 조치대학 교수,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일찍이 구미를 추종했고 강자로서 아시아를 지배한 일본은, 타자를 지배하는 서양기원의 사상을 넘어서서 국제사회를 평화공존으로 가져갈 가치관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이해를 얻으며 도전하고 싶다”
“이제 물음은 일본을 향하고 있다” (야마다 다카오 마이니치신문 특별편집위원, 마이니치 신문 2015년 7월 27일)

이상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일본평의 일부입니다.

그런데도 검찰과 원고대리인은, 아니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은, 그동안 한국이 일본사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 완전히 사태를 반대로 왜곡해 전달해 왔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일부 우익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저의 책을 이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입니다. 그 어떤 보수 신문도 이 책의 서평을 게재하지 않았고, 물론 상을 주겠다는 곳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두 개의 상을 수상하자 뒤이어 기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기소반대 성명을 내자, 이미 〈화해를 위해서〉 일본어판이 나왔던 2007년 무렵부터 저를 비난해 온 재일교포연구자와 일본인들을 포함한 연구자와 운동가들이 저의 책을 왜곡해 가며 격하게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보다 못한 일본의 지식인들은 다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가노 미키요 게이와가쿠인대학 교수,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이러한 구조 야말로 식민지지배와 전쟁의 커다란 죄악, 그리고 여성의 비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박유하씨가 동지적관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해석”(와카미야 요시후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선입견을 빼고 전체를 읽어 보기만 한다면 생길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일본의 면죄에 이용하는 것이라는 일부사람의 독해는 명백히 오독이며 이 책을 악용하는 것”
“이러한 측면의 강조는 식민지지배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길을 열어 줄지언정, 일본의 면죄를 끌어내거나 하는 일은 없다”(니시 마사히코 리츠메이칸대 교수,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한결같이 제국의 위안부 안에 있는 일본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읽어 주었고 바로 그 부분이 저의 책이 일본에서 평가받은 이유입니다.

그리고 위안부문제 해결 역사에서 저의 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논문으로 써 주거나 저와 대담을 나눈 학자도 있습니다(참고자료: [위안부 문제가 조명하는 일본의 전후] -이와사키 미노루, 오사 시즈에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박유하). 또 이들 이외에도 비슷한 시각으로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는 글모임집인 책이 내년 봄에 나온다고 듣고 있습니다.

저의 책이 위안부할머니를 ‘명예훼손하는 책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일본지식인들의 기소반대 성명에, 고노담화를 발표한 고노 전 관방장관, 무라야마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전 수상, 그리고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노벨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등이 동참해 준 것(참고자료 73-1,2)은 그들의 저의 책을 올바르게 평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고발 직후, 아직 책이 일본어로 번역되기 전에도, 자국을 비판해 온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 선생이 저에 관한 메시지를 가처분 재판부에 보내 준 것도(참고자료 140), 저의 그간의 작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공감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원고 측 대리인과 검찰은, 제가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면죄하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들이, 본 사건 논점과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제가 일본 돈을 받고 위안부 할머니를 회유하는 인물이라는 거짓말을 퍼뜨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나쁘게 만들어, 제가 위안부할머니를 명예훼손하는 ‘고의’가 있는 인물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3. 위안부를 폄훼하는 책이라는 주장에 대해 | 한국의 평가

재판장님, 하지만 저의 책이 결코 위안부할머니를 명예훼손하는 책일 수 없다는 것은, 책을 쓰기까지의 경과와, 그리고 2013년 책 발간 직후의 한국사회의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발 이후에도, 일일이 다 찾아보지 못할 만큼 쏟아져 나온 시민/지식인들의 탄원서, 성명, 서평, 페이스북, 유력잡지 특집 등에서의 발언/글과, 진실을 전하고자 한 기자들의 서평과 기사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4-34,36-44,66-2, 73-1,2, 75, 76-1-10, 79-85,91-95, 124-139, 142-155.)

고발을 문제시하는 시민들이 페이스북에서 모여 지지하고 응원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페이스북에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광장으로〉라는 페이지를 개설하여 저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해 주었습니다. 이 페이지에, 현재까지 2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호응해 주었습니다. 또한 어제, 저를 위한 탄원서가 한 젊은 평론가에 의해 새로 작성되어 동참자들의 서명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숫자는 결코 많지 않겠지만, 저는 그런 분들이 있기에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 없이 견뎌왔습니다.

재판장님,
저를 위한 탄원이나 언론에 글을 써 준 분들이 주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고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한국문학자, 평론가, 작가 등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읽어 주기를 바라 일반서로 쓰기는 했지만, 사실 저의 책은 내용도 문체도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건 사실 여부 이전에, 책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파악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독해력이라고 합니다. 그 독해력에서 한국에서도 손꼽힐 만한 뛰어난 분들이, 저의 책을 정확히 읽어 주시고 옹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원고 측 대리인과 검찰은 저의 ‘의도’까지 의심하며 책을 왜곡했지만, 저의 책이 그들이 말하는 것 같은 책이었다면, 발간 직후에 그냥 무시당하거나, 언론이 이들보다 먼저 앞장서서 비난했을 것입니다.

고발 이후는 물론 고발 이전에 나온 비판들에 대해 저는 이미 대부분 대답했습니다. (이재승, 젊은 학자들, 정영환에 대한 답변. 참고자료 62-1-4,102-105. 106, 110, 링크) 지원단체뿐 아니라 학자들마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다독가로도 유명한 한 작가와 제가 반박한 자료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110, 132) 아직 완전한 형태가 아닌 글도 있지만, 그들이 어떤 왜곡을 했는지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 다른 목소리의 억압 | 고발 이유

그런데 원고측 대리인들은 왜, 발간 이후에 10개월 동안이나 침묵하다가 갑자기 고발을 한 걸까요?

그 직접적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유지들과 함께 연 2014년 봄 심포지엄입니다. 그리고 고발을 앞당긴 것은 책을 낸 이후 제가 나눔의 집에 거주하시는 분을 비롯한 할머니들 중 가장 가까웠던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들의 고발장에는, 〈 화해를 위해서〉와 심포지엄에 대해 언급하면서, 박유하의 향후 활동을 막아야 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링크)

이들은 제가 할머니들과 만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책의 가처분과 함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접근금지 가처분까지 신청한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와의 만남을 독점했으면서도, 이들은 저의 책에 생존 할머니의 목소리가 없으니 알맹이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제가 책을 쓸 때 할머니를 만나지 않은 것은, 할머니들의 증언이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와 달라진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에 나온 증언집 등이 현재의 증언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일관계가 나날이 험악해져가고 위안부할머니들이 세상을 뜨는 가운데 하루라도 빨리 책을 세상에 내보내 다시 논의해야만, 위안부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이전, 오래 전에 만난 분들의 기억은 제 안에 오롯이 남아있었습니다.

책을 내고 나서 위안부할머니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사죄 및 보상에 관해서 할머니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락처를 쉽게 알 수도 없었고, 정대협의 수요시위에 나오는 분들은 접근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제한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건 결국 몇 분 되지 않지만, 만난 분들은 저 자신이 놀랄 만큼, 제가 책에 쓴 지원단체 비판이 다름 아닌 할머니들 본인들의 생각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한 할머니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서 진짜 하려면, 할머니한테 직접 사죄하고 할머니한테 직접 돈을 손에 쥐어줘야지, 왜 정대협을 끼고’ 진행하느냐면서, ‘입법 하겠소 무슨 법 하겠소…… 그런 거 다 소용없으니까. 할머니들하고 이렇게 직접, 우리 주소 있고 전화번호 있고 계좌번호 있지 않아요, 그거 불러달라’고 하면서 상대를 하면서, 할머니들이 ‘이 방식으로 우리가 준비했으니까 할머니들이 받으시고 싶으신 분이 받아가세요.’ 하면, ‘이제 우리 둘 다한테 안 받는 사람은 이걸로 끝난다. 하면 다 받을 거예요. 그렇게 꼭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고자료 65, 위안부 할머니 영상)

또다른 분은 제가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서는 아시는지, 일본의 어떤 사죄와 보상을 원하시는지, 법적책임에 대해서는 아시는지 묻자, ‘법적이고 뭐고 그런 건 우리는 모르고, 다 떠나서 우선은 보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점연 할머니. 2014년 심포지엄 영상, 참고자료 166)

말하자면, 20년 이상 지원단체들이 ‘할머니의 생각’이라면서 주장해 왔던, 또 검찰이 본사건의 쟁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제가 부정한다고 비난해 온, 일본의 ‘법적책임’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20억을 받아주겠다 했다고 위증하신 유희남 할머니조차, 정말은 저에게, 정대협을 비판하면서 보상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목소리를 세상으로 내보내기로 했던 것입니다. 책을 낸 다음 해 봄인 2014년 4월 말에 연 ‘위안부문제 제3의 목소리’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입니다.(참고자료 35, 영상자료 추가)

일본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 부산에 계신 지원단체장, 그리고 제가 발제한 이 심포지엄은 실은 제가 비용을 부담한 심포지엄이었습니다.

물론 결코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개인적으로는 큰 부담이었지만 묻혔던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전해지고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논의를 새로 시작해 준다면, 그만큼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처음으로 공적인 장에 나타난 ‘다른’목소리들에, 한일 양국언론은 크게 주목해 주었습니다. (링크)

그런데 이때의 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에 나오는 위안부할머님들은 전부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목소리도 변조되어 있습니다. 그건 물론 이분들 자신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던 걸까요? 왜 그분들은 자신의 생각을, 시위에 나오시는 다른 분들처럼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말하지 못했던 걸까요?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압니다. 그런 발언들이, 지원단체에 의해 금기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들의 두려움이, 직접적으로는 금기를 깼을 경우의 불이익에 있다는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재판장님,
6개월간에 걸친 통화기록이어서 길지만, 참고자료로 제출한 배춘희 할머니의 녹취록을 읽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참고자료 77) 저와 통화하면서 할머니가 자주, 직원 등이 몰래 듣고 있는지 여부에 늘 신경을 쓰고 계시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게 할머니를 비난하려는 고의 같은 것이 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지만, 나중에 말씀 드리는 것처럼, 할머니들 역시 이 문제에 관한 담론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야말로 이 사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외부유출을 막으려 했던 건 할머니들의 사죄와 보상 관련 생각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언론과 국민을 향해 말해 온 이야기, 이미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진, ‘군인에게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는 이미지에 균열을 낼 이야기야 말로, 이들이 저를 고발까지 해 가면서 막으려 했던 내용입니다.(정대협도 고발을 검토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공판에서 이미 보신 것처럼, 배춘희 할머니는, 동원정황과 위안소에서의 생활과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위안부는 군인을 돌보는 사람이었다. 에프론(국방부인회 제복) 두르고 군인을 위한 천인침(하얀 천에 천명의 여성이 놓은 바늘땀을 받는 일. 군인의 무운장구를 비는 부적 같은 것) 을 받았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은데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증거자료 4 외)

그리고 당신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살다가 스스로 직업소개소에 가셨다고 했습니다.(참고 77). 그러면서 ‘일본정부에서 절대로 그런 짓 안 했다.’, ‘일본사람이 잡아가고 그런 건 없다'(증거자료 77, 90쪽)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무 단정적이셔서, 오히려 제가 다른 여러 케이스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을 정도입니다.

위안부 동원에 사기적 수법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속인 것은 일본군이아니라, 업자뿐 아니라 직업소개소이기도 하다는 것이 기제출 증거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경찰도 문제시하고, 여성들이 속아 팔려가는 일이 없도록 단속했던 것입니다. (증거 3-1)

제가 만난 몇몇 분의 목소리를 통해, 저는 오로지 증언집에 의거해서 쓴 저의 책이, 생존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나름대로 대변한 것이었다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이들이 말하는 생존해 계신 할머니 나눔의 집의 다른 분들 구술록을 보면, 원고 측이 제출한 자료입니다만, 이른바 ‘군인이 강제연행’한 분은 단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모르는 조선인에 의한 납치, 김군자 할머니는 수양아버지에 의한 인신매매, 김순옥 할머니는 아버지가 종용한 인신매매, 강일출 할머니는 형부에 의해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가게 된 케이스, 박옥선 할머니는 스스로 갔는데 속은 케이스입니다.(증거 자료 50) 강일출 할머니가 ‘보국대’에 갔다고 말씀하신 건, 이분들이 모집 당시부터 ‘애국’의 틀에서 동원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재판장님, 제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시도한 일은 오로지, 그런 분들,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말했으나 잊혔던 목소리를 그저 복원하고, 세상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내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목소리만이 진짜 진실이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위안부할머니들을 둘러싼 일임에도 위안부문제가 당사자의 일부를 점점 제쳐놓고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침묵하게 된 분들의 목소리도 일단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들 간의 생각이 다르다면, 주변사람들도 함께 다시 생각해 보자, 오로지 그것뿐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심포지엄에서도 그런 내용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진심이 어떤 곳에 있었는지, 배춘희 할머니는 정확히 간파해 주셨습니다. 저는 결국 할머니를 세상으로 당당하게 불러내 드리지 못했지만, 그런 제게 “선생님 마음은 내가 알고 있다.”(자료 77, 55쪽) “신세만 지고 있다.”(같은 자료 68쪽)고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지금도 제겐 위안과 함께 죄송한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참고자료 113-118, 링크)

하지만 그 이후, 저는 더이상 그런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와 가장 긴밀한 대화를 나누었고 심포지엄에도 영상으로 목소리를 내보내 주셨던 배춘희 할머니가 심포지엄 후 한 달여 만에 돌아가셨고, 저 또한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에 고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5. 검찰/원고 측의 오독

재판장님,
〈제국의 위안부〉가 허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는 이미 지나칠 만큼 충분히 제출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을 조금만 더 보충해 보겠습니다. 먼저 검찰이 문제 삼는 ‘긍지’와 ‘동지적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1) ‘긍지’의 대상

우선 이들의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오독에 관해서입니다.

검찰은 저의 책이 ‘자긍적 애국심’을 말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책에 그렇게 쓴 적이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긍지’, ‘자긍’이라는 단어는 전부, ‘애국’ 자체라기보다 그 어떤 역할이건 자신이 필요시되는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것은 분명 부조리한 국가의 책략이었지만, 외국에서 서러운 음지생활을 하던 그들에게는 그 역할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런 사회적인 인정은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잊고 삶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싱가포르 근처에는 거의 6000명의 가라유키상이 있었고 1년에 1000달러를 벌었는데, 그 돈을 일본인들이 빌려 상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해외의 가라유키상들이 일본 국가의 국민으로 당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라유키의 경우이지만 이 글에서 중요한 건 긍지라는 감정자체일 뿐, 그 내용이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긍지가 되는 건 그 ‘역할’이라고 말했고, ‘사회적인 인정’이라고 고쳐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으로서 당당할 수 있었다고 썼습니다. 다시 말해, 가난과, 딸을 파는 가부장제와, 혹은 ‘매춘녀’로 사회의 지탄과 차별을 받던 위치를 떠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동등하게 취급받는 일에 따른 감정자체가 제가 말한 ‘긍지’입니다. 하는 일의 내용이 무엇이건 , ‘자기존재를 긍정하는 감정’, 저는 그것을 긍지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긍지의 대상은 애국심이 아니라 자기자신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 이라고 분명히 강조했고, 이어서 그런 행위가 담고 있던 누군가를 위로하는 역할에 대해 ‘자기 존재에 대한 (다소 무리한) 긍지’라고 분명히 기술했으며,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쓴 것처럼, ‘긍지는 어디까지나 자기존재에 대한 긍지일 뿐입니다.

자기존재에 대한 의미부여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라는 것은 굳이 첨언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 내용이 어떤 일이건 상관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고발자와 대리인과 검찰이 이 부분을 위안부가 ‘애국자체에 자긍심을 가졌다’고 읽은 것은 문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오독입니다.

설사 애국심자체에 대한 긍지로 판단한다 해도, 그것은 구조적으로 강요된 애국일 뿐, 검찰이 주장하는 자발적/자긍적 애국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도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2) ‘동지적 관계’ 개념의 의도

검찰은 저의 책이 일본군과의 차이, 일본인 위안부와의 차이를 소거시켰다면서 ‘동지적관계”라는 단어가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를 들면,

표면상으로는 ‘동지’적 관계였어도,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별감정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추어진 차별감정을 보기 위해서도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의 다면성은 오히려 직시되어야 했다. 명확하게 보는 일만이 책임을 져야 할 책임 주체와 피해자의 관계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라고 쓴 데서 저의 의도를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또 ‘무엇보다, ‘동지’적 관계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을 고집했던 이들을 무조건 규탄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응답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했다. 위안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내면에 존재했던 차별의식을 지적하기 위해서도, ‘동지적 관계’는 우선 인정될 필요가 있었다.’고, ‘동지적관계’라는 말을 굳이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도 명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검찰의 말처럼 조선과 일본을 똑같이 취급해 일본의 책임을 면죄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차이를 보기 위해 ‘제국일본의 구성원’이라는 범주 – 동질성을 보고자 했던 것이고, 그런 논지가 일본의 사죄의식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을 기대했던 것 입니다.

바로 그래서, 일본을 향해 쓴 부분에서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고 쓰면서 이어서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162쪽)’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6. 지원단체/검찰/학자의 기만과 망각

재판장님,
이제 이들이 ‘허위’라고 주장하는 세가지 논점에 대해 조금 더 보충해 보겠습니다.

1) 매춘/강제 | 일본인 위안부의 차이화

저는 위안소의 틀이 ‘관리매춘’이자 ‘강요된 매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도 원고 측 대리인도 더 이상은 반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대표였던 윤정옥 교수도, 한겨레에 연재되어 유명한 글에서 ‘매춘을 강요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90년, 1월 4일. 일본군위안부 신문기사 자료집, 정대협 연구 보고서, 2004, 45,46쪽. 추가)

그리고 이 자료를 포함한 신문기사들을 정리한 정대협의 보고서는, ‘경성지법 일본군 위안부 관련 판결문’이라는 제목으로 1930년대 후반 재판자료들을 정리해 놓고 있는데, 여기에는 호적등본이나 인감증명등을 위조해서 데려간 ‘사문서위조행사사기’, ‘만주로 시집을 가는 것으로 속이고 작부계약’한 ‘사기’, ‘인사소개업자에게 큰 딸의 창기 주선을 의뢰’한 ‘사기’, ‘내연의 처를 작부로 넘기고 그 이득을 챙기'(41쪽)려 한 ‘영리유괴사기’, ‘자신의 첩을 창기로 만들어 그 이득을 챙기려 시도’한 ‘영리유괴사기’, ‘영리유괴사문서위조사기’ 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들과, 보고서 머리말에 있는 ‘조선사회의 빈곤화와 그에 따른 여성에 대한 심각한 인신매매를 볼 수 있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만주로 팔린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는 말은, 지원단체가 일찍부터 위안소형태가 관리매춘이었고 군인에 의한 강제연행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004년, 무려 12년 전 일입니다.

그럼에도 지원단체와 관련연구자들은 오랫동안 언론이나 국민에게는 이런 사실을 숨기고 ‘강제연행’과 만 ‘총독부 명령을 받은 총칼 찬 순사’만을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금년 초에 300만 이상이 보았다는 〈귀향〉에서의 강제연행 장면입니다. 그리고 검찰의 기소는 그렇게 만들어진 ‘국민의 상식’에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갖지 않았던 결과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2009년에발간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행한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를 보면 송복섭이라는 조선인 군속의 수첩을 근거로 한, ‘광주에서 종군위안부 61명의 명단이 확인돼 일제가 한국인 위안부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까지 끌고 가 매춘을 강요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신문기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992/1/16, 광주매일)이 기사는 위안부 중에 ‘세 유부녀까지 포함됐다고 송옹은 증언’했다고 쓰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우리의 기억은, 위안부문제 발생 초기의 기억의 망각과 함께 만들어진 것입니다.

얼마만큼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원고측 대리인들과 검찰은 자신들의 무지 혹은 기만을 숨기고, 일본인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이고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이나 총독부관계자에게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고만 강조합니다. 그리고 저의 책이 그런 생각을 부정한다면서 저를 엄벌에 처해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여성 중에도, 위안소인 줄 모르고 속아서 간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도 최근 간행된 일본의 연구서에서도 밝혀 진 바 있습니다(『日本人慰安婦ー愛国心と人身売買と』, 22-23쪽).

또 일본의 연구서뿐 아니라, 한국의 보고서 역시, ‘위안부나 유흥업 등으로의 충원과정에서 유괴유인, 취업사기, 인신매매등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각종 수법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지적을 하면서 ‘일본여성들조차 일본 내무성, 외무성이 제시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71쪽, 추가참고자료)

즉 ‘일본인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는 검찰의 단정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원고 대리인 또한, 센다 가코의 〈속 종군위안부〉를 제시하면서, 마찬가지로 조선인 위안부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였다고 강조했지만, 같은 책에 ’29세의 조선인 창녀'(118쪽)도 등장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들은 조선인위안부를 비하해서 ‘조센삐’라고 불렀는데, 일본인 위안부에게도 비하의 말인 ‘삐’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다름 아닌 같은 책에 나옵니다(148쪽).

앞서의 나눔의집 할머니의 경우를 본 것처럼 이른바 강제연행과는 다른 정황이 보이는데도 원고측은 이 분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옥선 할머니는 납치, 김군자 할머니는 군복을 입은 사람에게 끌려갔다, 김순옥 할머니는 속아서, 강일출 할머니는 집에서 군인과 순사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고만 쓴 바 있습니다. (추가자료) 다시 말해 형부가 보냈다는 사실은 은폐하고, 박옥선 할머니에 대해서도 그저 ‘돈을 버는 줄 알고 갔다’고만 기술할 뿐, 어떻게 갔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원고대리인은, 국민을 향해 행해 온 오랜 기만을, 재판부를 향해서도 행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 가처분 및 손해배상 1심재판부는 이러한 자료들을 면밀히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제복을 입은 업자/조선의 ‘낭자군’

재판장님,
앞서의 공판에서 군복을 입은 업자에 관련한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그 자료에 대해 보충설명하겠습니다.

위안부 모집은 시기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30년대에는 주로 업자의 자율적인 모집이었던 데 반해, 중일전쟁 이후에는 전쟁으로의 국민총동원시대를 맞아 ‘애국’의 틀이 강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제출한 증거자료 45호 중에 있는 조선거주 일본인의 회상에는 ‘金原始彦’이라는 군속이 만주에서 ‘황군위안부로서 인솔 활약, 요원을 모집하기 위해 후창읍으로 귀국`해 와 있다면서 ‘한사람이라도 낭자군을 모아 전력증강에 기여해야 한다면서 패기만만'(증거 45)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낭자군’ 이란, 여성들의 전력화를 칭송하며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단어가 업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이른바 한국인들 대다수가 상상하는 ‘강제연행’과는 다른 모습으로 위안부모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또한 당시 군속에게는 군복을 닮은 제복이 지급되었으니, 평상시에도 군속제복을 입고 다니던 업자들을 소녀들이 ‘군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에 따라서는 ‘군인이 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언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서의 공판에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실제 군인의 강제연행 가능성도 저는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강제연행이 아니라도 소녀와 여성들의 위안소 생활은 충분히 참혹합니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지원단체는 모집정황의 국민과 여론, 그리고 국제사회를 향해 강제연행이라고만 주장해 왔고, 초기의 잘못된 인식을 수정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책은 오로지, 그것을 전하고 ‘다시 논의’하기를 바랬던 책일 뿐입니다.

3) 군속으로서의 위안부

4회 공판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지정 위안소에 있던 위안부들은 ‘군속’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 정황을 보여 주는 자료는 이 밖에도 존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부들이 애국의 틀 안에 있었다고 한 저의 책이 허위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저 말고도, 이런 정황에 대해 간파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최근에 알았습니다.

예를 들면, ‘위안부를 간호노동에 종사시키는 일은 빈번히 일어난 일’이었다면서,이들이 ‘문서에 등재’된 이유를 ‘간호부일을 하면 정식으로 유수(부재)명부에 기록하여 군속대우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제7방면 군 수뇌부 판단의 결과’라면서, ‘유수명부에 등재하였다는 것은’ ‘원호와 관련된 각종조치도 함께 받을 수 있어서’이고, ‘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있다’고, 앞서의 정부연구용역보고서는(〈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조사〉, 2009) 말합니다. ‘식민지여성들을 여전히 일본제국의 한 단위로 인식하고 현지에 있던 일본인 여성들을 편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여성을 편입하였다라고 보여지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의 공판에서 제출한 것처럼, 실제로 일본 국회에서 위안부를 원호(지원)대상으로 하기 위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이들의 추정이 옳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증거자료 44)

또, 한 일본군인이 쓴 책은, 중국에 위안부가 8만명 있었다고 들었다면서 ‘현지사인 오석경씨가 앉아 있고 그 오른 쪽에 내가 있고 10명의 위안부에 둘러싸여 있는데 여성들은 기모노를 입고 있지만 전부 조선인'(長嶺秀雄〈戦場〉, 私家版, 昭和62年, 94쪽)인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필리핀 세부도에서 ‘위안부 약 100명이 특수간호부의 이름으로 군의 야전병원과 행동을 같이 했으며 우리 제1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다면서, 미군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부대가 진지 안을 우왕좌왕할때 이 간호부 부대는 의연한 태도로 동요되지 않았다(98쪽)’고 말합니다.

제4회공판에서 제출한, 자신이 군속이라고 말한 문옥주할머니의 수기에는 위안부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스짱’이라고 했다면서, 문할머니가 ‘우리들은 대체로 스짱이 한 사람씩 있었다'(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87쪽)고 했다는 기술이 나옵니다. 이 역시, 바로 이러한 관계속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이용수 할머니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저에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추가자료)

그럼에도 이러한 정황을 알지 못한 채, 원고측과 검찰과 일부학자들은, 저의 책을 두고 그저 ‘예외의 일반화’라면서 비난해 왔던 것입니다.

4) 소설 사용에 대해

서울대 김윤식 교수가 위안부 관련 한국소설에 언급하며 소설을 증언이라 했다는 말씀을 앞서의 공판에서 이미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 의한 교과서 검정은 위헌이라고 제소했던 이른바 교과서 재판사건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도, 그의 저서 <태평양전쟁>에서 제가 사용한 다무라 타이치로의 작품 <메뚜기> 등에 언급하면서 소설도 역사적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추가참고자료) 그럼에도 소설을 일부 사용했다는 이유로, 저의 책이 ‘허위’라고 말했던 검찰의 발언은, 문학에 대한 무지와 함께 경박성이 시킨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를 위해서

재판장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 역시 오래전부터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에 구체적으로 이름을 들어 기술한 것은 딱 한 분입니다. 피를 토하듯 한 유서를 써서 인터넷에 올려 두었던 심미자 할머니입니다. 그것도 그 분의 위안부체험이 아니라 지원단체 비판이었고, 아무도 이분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문맥에서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설사 저의 책이 위안부할머니를 비난한 책이었다 해도, 저의 책을 읽으면서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안부 체험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 저의 책의 주요논지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많은 분들이 가명을 쓰고 계시니, 설사 어떤 분을 특정하고 싶었다 해도 가능한 구조가 아닙니다.

재판장님.
위안부의 전쟁터 생활과 귀환 혹은 미귀환에 대해서 쓴 제 1 장 마지막에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귀기울여야 하는것은 누구보다도 이들이 아닐까.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다 생명을 잃은 이들-말없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일본이 사죄해야 하는 대상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름을 잃은 채로, 성과 생명을 ‘국가를 위해’바쳐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제국의 위안부’들에게. (〈제국의 위안부〉 104쪽)

제가 책을 쓰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누구보다도 전쟁터에서 죽어간 위안부들입니다. 당시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죽어서도 다른 군속처럼 유족들이 지원금을 받는 일도 없었던, 그런 위안부들입니다. 또, 차별받을까 무서워 돌아오지 못했던 위안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의 책이, 살아 돌아온 생존 할머니들을 특정한 책이 된다는 것일까요. 제가 이 책에서 생각해 본 것은, 일본인여성을 포함해, 국가의 무모한 지배욕과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모든 개인이었습니다.

8.’할머니의 아픔’은 누가 만들었는가

1) 당사자가 배제된 대리고발

재판장님,
그런데 고발과 기소는 부당하다는 이들에게 원고 측 대리인과 검찰은 말합니다. 할머니가 아파하셨다, ‘할머니가 ‘아픔’을 느끼는 한 고발과 기소는 당연하다고. 학자들조차 일부는 그렇게 말합니다. 최근에도 원고 측 대리인은 제가 ‘그럴싸한 언변’으로 ‘할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들께 ‘대못’을 박은 건 도대체 누구일까요?

저의 책을 왜곡해 전달해서 할머니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이어서 분노하게 만든 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는 고발 직후에 두 분의 할머니와 통화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은 나눔의 집에 계셨던 분이고 원고로 이름이 올라가 있던 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나눔의 집 할머니 중 일부 분들과 가깝게 교류했고, 그중 한 분인 배춘희 할머니와는 반년에 걸쳐 전화통화도 자주 했습니다. 만난 횟수보다 전화횟수가 많았던 이유는 나눔의 집에서 저를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역시 그래서 만남을 조심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웠던 배 할머니는 고발 일주일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폭풍우와도 같았던 고발의 충격이 좀 가신 후에, 나눔의 집에 거주하시는 유희남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분 역시, 저와 대화를 나누어 왔고 제가 주최하는 심포지엄에도 나올 예정이었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쭈었더니 할머니는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눈이) 안 보이잖아, 그래서 (직원이)와서 읽어 주었는데 강제동원이 아니고 뭐야.. 그냥 갔다던가.. 하여간, 그렇게 읽어 줬는데도, 들었는데도 잊어 버렸네.’ ‘책에다가 뭐하러 그런 말을 썼어’라고요. (참고자료 156)

이 분은 눈이 불편하셔서 저의 얼굴조차 또렷이 안 보인다고 말씀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할머니 자신이 읽은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모아 놓고 직원이 읽어 주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또한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올해 1월 일본에서의 강연에서, 할머니들은 고령으로 책을 읽을 수 없기에 일부분을 발췌해서 반복해서 들려드렸다고 했습니다. 즉 할머니는 전체를 읽으신 것이 아니라 지원단체에 의해 앞뒤 문맥이 잘린, 편집된 문장만을 ‘들었’던 것입니다.

듣는 행위가 책에 있어 간접적인 행위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자세히 읽어도 독자의 숫자만큼 독해가 가능한 것이 한 권의 책입니다. 저 때문에 아파하셨다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아픔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나눔의 집 고문변호사 주도로 이루어진 한양대 로스쿨 학생들의 거친 독해와 그것을 그대로 전달한 나눔의 집 관계자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유할머니께 그런 의도로 쓴 책이 아니라고 하자, ‘의도는 그렇지만은……’이라고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그건, 유할머니가 제가 나쁜 의도로 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흘 뒤, 이번에는 혼자 사시는 어떤 분께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이분은 유희남 할머니께 들었다면서 노여워하셨고, 그런 책이 아니라는 설명을 드리려 하자, ‘서울대 교수 다섯 명이 당신책을 나쁘다고 했다’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고자료 157)

재판장님,
저에 대한 고발에서 할머니들은 당사자가 아닙니다.
이미 보신 것처럼, 책 읽기는 물론, 고발서류작성, 논리구성, 저를 고발한 모든 주체는 주변인들입니다. 고발장에 찍혀 있는 할머니들의 도장, 똑같은 모양의 도장들을 살펴 봐 주시기 바랍니다.(링크) 저는, 할머니들 중에 2014년 6월, 고발 이전에 저의 책에 대해 알고 있던 분은 안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배춘희 할머니조차, 돌아가실 때까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저와의 친밀한 교류를 몰랐기 때문일 텐데, 나눔의 집 소장은 배할머니도 생존해 계셨다면 고발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와의 대화록을 보시면, 그런 징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할머니들은 검찰이 진행한 조정과정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저에게 일본어판을 절판하라는 요구를 포함한 조정안이 왔을 때,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제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형사고발에서 원고로 이름이 올라 있던 두 분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고발 후 1년이나 지난 가을 시점이었는데, 그중 한 분인 유희남 할머니는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제 얘기를 들으시고, 조정문제는 안신권 소장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 분,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이 원고로 이름이 올라 있는 것조차 모르고 계셨습니다.

나눔의 집 안신권소장은 최근에 제출한 탄원서에서도 변함없는 거짓말과 엉터리 기사로 저를 비난했지만, 할머니들과의 통화내용과 영상을 확인하시면 왜 그가 거짓말까지 해 가며 저를 비난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늦었지만, 고발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쓰기 시작한 저의 글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지금도 돌아다니는 ’20억 회유설’이 유희남 할머니의 위증이라는 것도 배할머니와의 통화기록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신권 소장이 반복적으로 비난해 온, 사전 허락 없이 할머니들을 찾아오고 찍으려 했다는 NHK문제 역시, 그의 거짓말임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안소장과 나누었던 문자를 제출할 수 있습니다. 배할머니는 일본인들과의 대화를 기다리셨던 분이고, 그 기자들은 해결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2) 피를 토하는 목소리

재판장님, 본 재판과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길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법’이란 정의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할머니들을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할머니들 일부는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를 갖고 있고, 그럼에도 세상에 내보내지 못하는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배춘희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저는 그것을 여실히 알았습니다.

배할머니는, 자신의 경험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고, 저와 대화할 때도 누가 엿들을까 조심하곤 했습니다.

동시에, 지원단체의 운동방식과 돌봄방식에 비판적이면서도 그런 생각을 마음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반은 거짓말'(참고자료 77, 16쪽)이라고 했고, 할머니들의 강연료가 지원단체의 건물에 사용되는 일에 불만이면서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만나지 못하게 하느라 상태가 안 좋으신데도 병원에서 나눔의 집으로 강제로 이송당하신 후,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는 피를 토하듯 그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셨습니다.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 되잖아’, ‘ 어떤 사람이든 살려놓고 봐야되잖아..’라고.

그 배경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대화록을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론과 검찰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배할머니는, ‘적은 100만 나는 혼자’라고 생각하며 고독한 생활 끝에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미 이와 비슷하게 지원단체를 비난한 분이 일찍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것이 제가 〈화해를 위헤서〉에서 위안부론을 쓰게 된 계기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2004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나도록 정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위안부할머니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마음으로부터의 목소리를 우리는 과연 들었을까요.

더 늦기 전에, 생존해 계신 분만이라도, 진짜 목소리를 들어 드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재판장님,
원고측 대리인은 최근 제출한 서류에서 ‘박유하의 해결책이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말에, 이 고발과 기소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원고 측은, 이미 고발장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저 ‘다른 목소리’의 확산을 막고자 했던 것이고, 이후의 공방을 통해서도 그들이 구애하는 것은 오로지 이 부분입니다. 일본의 ‘법적책임’을 반복적으로 주장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만난 할머니들 대부분은, 왜 해결이 지연되고 있는지 모르셨습니다. 그저 일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라고만 알고 계십니다.

물론 그건 관계자들이 할머니들께 정보를 전하지 않고, 당사자를 배제한 채 자신들이 모든 것을 주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방식을 비판했을 뿐, 그들의 활동 전부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저를, 그들은 국가의 힘을 빌려 억압하고, 20년 이상 정보를 공유해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게 된 언론과 국민을 동원해 저에게 돌을 던지도록 만들었습니다.

3)공격을 만드는 의식

재판장님,
이들의 태도는, 여러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중 하나만 말씀 드리자면, 검사와 대리인의 공격, 위안부는 자긍심을 느끼면 안된다고 억압하는 생각은, 여성차별, 매춘차별적인 생각이 만든 것입니다.

그건, 원고대리인이 ‘피해자 목소리’라면서 그의 서면에서 반복해 기술하는 표현들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는 끊임없이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 ‘창녀’, ‘몸을 팔았다.’, ‘갈봇집’ 등등의 단어를 인용·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자발적인 매춘부인 일본인 위안부를, 강제로, 혹은 속아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와 동일시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말이야 말로 일본인 위안부들이 명예훼손을 걸 수 있는 발언은 아닐까요? 그의 단어 사용에는 명백히 매춘부에 대한 차별이 있고, 명예훼손의 조건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인식이 존재합니다.

이른바 ‘여공’이나 ‘매춘녀’들이, 죽지 못해 사는 고통 속에서 한 푼, 두 푼 모아 고향에 보낸 돈으로 상급학교에 가고 사업할 수 있었던 오빠가, 여동생의 연애에 간섭하고 윽박지르고 때로 폭력과 살인을 마다 하지 않았던 심성들이, 바로 오랫동안 우리사회에서 위안부의 ‘다른’ 목소리를 죽여 왔습니다. 그런 생각을 내면화한 여성들 또한, 우리사회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를 죄인취급하며 윽박질러온 원고대리인과 검사, 그리고 그들에게 그런 생각을 불어 넣은 운동가와 일부학자들 역시, 그러한 인식의 주인공들입니다. 위안부를 억압하고, 때로 자기존재에 아무런 의미를 느낄 수 없도록 차별하고 소외시켜, 자살에 몰아넣기도 했던 생각의 주범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저를 억압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런 존재들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재판장님,
자신들의 고발과 기소로 인해, 또 아무런 확인 없이 보도된 기사들로 인해, 제가 지금도 일본에서 돈을 받아 위안부를 회유하려 한 매국노이고, 그래서 머플러로 목을 졸라 죽이고 싶어지는 인물로서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데도, 저에 대한 비난을 멈추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들 중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은 바로 그래서입니다.

고발에 이르는 또 하나의 배경은,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일본지식인들의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참고자료와 홈페이지에 올린 고발까지의 경과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46)

그런데 지식인 간의 생각 차이의 싸움이 법정에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심지어 그들 자신은 나타나지 않는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대리해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4) 공격의 목적

그런데 그들이 이토록 일관되게 ‘지원자와 강제연행’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떻게 갔든 모두 비참한 정황이었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 터임에도 차이를 주장하며 저를 비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건, ‘강제연행’이라고 해야만 그들이 초기에 잘못 알고 요구해 왔던 ‘법적책임’을 계속해서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인식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을 덮기 위해서입니다.

재판장님,
이들은, 국민과 언론이 부여한 시민권력, 학계와 언론권력, 그리고 유엔과 세계여성과 시민연대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지원단체 대표 중 한사람은, 유수학회 전 회장이자 유수 언론사 전 주필의 사모님이자, 참고자료 65의 위안부 할머니가 언급했던 ‘서울대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오랜 세월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끈끈한 유대관계뿐 아니라, 장관과 국회의원을 배출한 인맥이 있습니다. 나아가 정부, 기업과, 국민이 모아준 자금이 있으며, 무엇보다 일할 인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로지 혼자, 이들이 집단으로 내놓는 모든 공격 글들을 분석하고 반론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 작업 이상으로 힘들었던 것은, 그 안에 담긴 왜곡과 적대와 조롱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그동안 국민들을 향해 저지른 수많은 모순들을 그저 덮기 위해서, 운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동안 지켜온 권력과 명예를 흠결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 저를 매국노, 친일파로 몰아 배척해 왔습니다. 대중들의 오해와 지나친 비난을 변함 없이 모른 척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이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아무런 근거 없이 저의 책이 위안부를 ‘왜곡’하기 위해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철저하게’, ‘반복사용하였다’면서 저에게 ‘악랄’ ‘잔인’ ‘이기적’ ‘악의적’이라는 단어마저 서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와 표현이 전형적인 마녀사냥의 수법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재판장님,
그동안 수많은 자료와 설명으로 저의 책이 허위가 아니라고 변론해 왔지만, 정말은 이 문제는 책문제조차 아닙니다.

제가 고발당하게 된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제가 가까워지는 것, 그에 따라 나눔의 집의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과 그에 동조한 나눔의 집고문 변호사, 그리고 위안부문제에 대해 잘 모르면서 교수가 지시하는 대로 엉터리 독해를 바탕으로 책을 100군데 넘게 난도질한 리포트를 작성한 한양대 로스쿨생들의, 비지성적인 행위이자, 모함이고 음해입니다.

재판장님,
‘다른’ 목소리에 대한 폭력적인 억압과 그에 따른 끔찍한 고통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

대리인은 저를 비난하면서 저를 방치하면 ‘제2, 제3의 박유하’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박유하를, 제2 제3의 고통받는 박유하를, 더 이상은 만들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엄하게 처벌받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된다고 재판부를 협박마저 합니다. 이들이 저를 처벌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잘 이해해 주셨을 줄 믿습니다.

재판장님,
이들의 공격과 고발로 인해 저의 학자 생활 25년의 명예가 한순간에 깨졌고 이 2년 반 동안 고통받아 왔습니다.

저는 이들의 거짓말과 왜곡을 범죄적 수준이라 생각했지만, 가처분과 손해배상재판부는 그러한 이들의 선동을 검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한국 법정을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아주 극소수만이 저의 책을 올바로 받아들여 주었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견뎌 왔습니다. 고발 사태로 입은 명예훼손과 상처는 설사 이 재판에서 제가 승소한다고 해도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가치가 저하’되는 것이 명예훼손의 정의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명철한 판단을 내리시어 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대한민국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016년 12월20일

박유하

[형사1심] 제4회 공판기

제4회 공판기 (2016/11/8)

박유하

11월 8일에 네번째 공판이 있었다. 이번에는 나와 변호인이 제출한 서증(주장의 근거자료)을 검증하는 순서였다.하지만 시간이 충분치 않아 지난 5월에 제출했던 증거자료 43개 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문서 안에서 여러개 자료를 제시한 경우도 하나로 묶었으므로 실제로는 휠씬 더 많다. 결국 참고자료로 제출한 160개 정도 문서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수 없었다. 배춘희 할머니와 나눈 대화의 녹취록도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나의 책이 허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협력이나 자발성 자체를 강조해야 했기에 이번 공판은 특별히 마음이 무거운 자리였다. 나의 책은 그런 것을 강조하는 일 자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정에서의 공방이란 책의 취지를 협애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였다. 물론 그것은 내가 시작한 사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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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가난한 여성이 매춘업에 종사했다는 사실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ICJ 보고서에도 나온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는 마을 이장이 공장 일자리 구해주겠다 약속했고 집이 가난해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ICJ 보고서에도 위안부의 대부분이 ‘가난한 소작농 가족 출신’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원고측 고소보충서에는 센다 가코의 책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보여주는 식민지 지배나 문제, 가부장제 문제를 정확하게 볼 수 없다고 쓰여 있는데, 이런 문제를 지적한 것이 바로 피고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고소보충서 내용과 피고인의 제국의위안부 내용이 큰 차이가 없다. 근대 공창제 하에서 형성된 여성 인신매매 매커니즘과 농촌경제 파탄에서 비롯된 빈곤한 사회경제적 생활이 ‘위안부’ 동원의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간 것’이라고 피고인이 말했다고 주장할 수가 있는가? 검사의 논리라면 위안부와 ‘매춘’을 연계시켜 언급한 쿠마라스와미는 물론, 정부위원회 보고서 작성자들, 원고측 대리인조차 이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검사: 그렇게 씌어 있다.

변호인: 공소사실 12번에 있는 ‘강간적 매춘, 매춘적 강간’의 의미는 ‘위안’이란 매춘과 강간 둘 다 포함한다는 뜻이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도 “대가로 돈을 받았고 돈 대신 전표를 받기도 했다. 전쟁이 갑자기 끝나서 자신이나 가족 먹여 살리겠다던 희망도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는 위안부의 증언이 인용되어 있다. 맥두걸 보고서에는 “성노예는 강제매춘의 거의 모든 행태를 포함한다.”고 쓰여 있다. 그러면서 강제매춘에 대해서도 ‘명예와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한 행위’로 인정했다. ‘전쟁법을 위반한 강제 매춘, 강제 강간’ 등의 표현이 나온다.
또한 검찰이 증거자료로 제출한 정부간행 증언집 <들리나요 열 두 소녀>이야기에도 수익에 대한 부분이 명확히 나온다. ICJ 보고서에는 아예 요금표까지도 나온다.

판사: 정리하면, 변호인의 주장은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매춘, 강간의 혼용 표현이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쿠마라스와미, 맥두걸 등 여러 국제 보고서에서도 나온다는 주장이다.

검사: 이 책에 기재된 문구는 “위안부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부를 매춘으로만 생각했고 우리는 강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고 되어 있다. 위안은 매춘과 강간 두 요소를 포함한 것이라는 거다. ‘위안’에 어떤 매춘적 요소가 포함 되어 있었다는 것인가?

변호인: 일본군은 위안부를 관리매춘의 형태로 운영했다. 그 지적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인가?

검사: 일본군이 체계적인 요금 노동시간 등 책정해서 위안부 제도를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하고 관리했다. 변호인이 말한 보고서의 취지는 오히려 그만큼 체계적으로 관리해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보고서는 매춘으로 인지했다는 취지의 것이 아니다.

판사: 어쨌든 맥두걸 보고서에도 강제매춘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거 아닌가?

검사: 위안부가 된 건 자발적인 게 아니라 본인 의사에 반해서, 사기나 유인의 방법에 의해서였다. 이게 중심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매춘도 위안의 두 요소 중 하나라고 쓴 뜻은, 위안은 매춘이고 자발성에 기초했다는 거다. 이게 문제라는 거다.

변호인: 피고인이 위안부의 성노예성을 부정했다는 것인가? 하지만 피고인은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물론 위안부들은 자신의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성노예임에 틀림없다. 식민지가 된 나라 백성으로서 일본 국민동원과 모집을 구조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정신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에서 분명 노예였다. 그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였음은 틀림없다.” 피고인은 성노예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검사: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가지 않았다.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간거다. 그런데 피고인이 말하는 성노예라는 건 위안소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성노예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강제로 끌려 왔다는 말이 이 책에 어디 있나? 296쪽 보자. ‘자발적 매춘부라는 기억을 부정’. 그건 우리가 애써 부정해왔다는 말 아닌가?

변호인: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부분도 기소대상이 되었지만 이 부분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여성들이 기만당해 성노예가 된 것이다.
성노예성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라면 검찰의 주장과 결국 다르지 않다.
기소된 30번을 보자. “조선인 위안부란 이렇게 해서 조선이나 중국 여성들이 일본 공창제도에 편입됐다.”이 부분도 다른 학자의 말을 인용한 부분인데 기소되었다. 한국정부산하위원회 보고서 발간서 등도, 공창제에 편입됐다는 식으로, 같은 취지로 설명하고 있다.

검사: 그러면 위안부제도가 합법인가? 아니다, 불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똑같이 취급해놓았기 때문에 명예를 훼손한 거라고 주장하는 거다.

판사: 당시 일본 제국 하에서 공창은 합법인 것으로 안다. 위안부의 경우는 어떤가?

검사: 당시 국제법상 불법이다. (판사: 그럼 일본법상으로는? )
다수 학자들이 일본에서 미성년자매춘은 법률로 금하고 있다. 그런데 위안부에는 미성년자가 많았으므로 불법으로 보고 있다.

판사: 위안부가 불법제도라는 건 피고와 검사 다 인정하는 부분. 그런데 검찰은 지금 위안부가 합법제도가 아닌데 그 제도에 위안부를 편입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변호인: 합법인지 불법인지가 왜 문제되는 지 이해되지 않는다.
책에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쿠마라와스미 보고서에 보면, (1)이미 매춘부였으며 자발적으로 일하고자 하는 여성과 소녀, (2)식당이나 군인을 위해 요리하고 빨래하는 보수 좋은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속임수에 속아서 온 여성들, (3)대규모의 강제적 폭력적인 여성 납치, 이렇게 다양한 경우가 있다고 쓰고 있다.
위안부의 이미지를 부정해왔다는 문장은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다. 무엇보다 이 부분은 분명한 인용이다. (일본우익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 라는 이미지.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부정해왔다는 건 명시적 사실일 수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을 오로지 “피고인이 자발적 매춘부라고 주장했다.”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자의적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쿠마라스와미, 맥두걸, 고소보충서, 더 나아가 각종 위원회가 발간한 책자들, 위안부 할머니 증언서, 이런 것들을 전부 부분 발췌해서 당신의 취지는 매춘 강조에 있지 않느냐면서 명예훼손 걸 수 있다.

검사: 이게 인용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각주도 없다. 인용했으면 어디서 인용했다고 써야 한다. 그리고 이 책에 그렇게 안 쓰였지만 다른 인용은 괄호 안에 문헌 이름과 쪽수가 쓰여 있다. 검찰 혼자 이 책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게 아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많은 역사학자와 연구자들이 머리 맞대고 토론해서 나온 책이 있는데 보았나?

박유하: 이 부분은 총정리하는 부분이다. 즉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되짚은 것이고 앞 부분에 나오는 ‘자발성의 구조’ 라는 절의 내용을 반추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그 부분내용을 총체적으로 가져온 부분이기 때문에 따옴표를 친 것이다. 문헌 인용은 앞부분에 있다.
명예훼손이 되려면 대상이 특정되어야 하는데 검찰은 목소리를 낸 사람들 숫자가 적어서 특정된다면서 여가부에 올려져 있는 자료에 생존위안부할머니들 이름이 나와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분들 중에는 가명을 사용한 분들도 계시다. 지원단체가 낸 증언집도 마찬가지다. 즉 특정되지 않는다.
정대협이 재작년인가에 서울시에 위안부문제관련 대학생이벤트를 신청하면서 만든 포스터에는 <20만명의 조선 소녀들 끌려가서 2만여명이 학살당하고 2백수십명만 돌아왔다>고 쓰여 있다. 나는 위안부경험을 한 조선인 전체를 대상으로 책을 썼다. 특히 가장 감정적으로 이입한 건 전쟁터에서 죽어간 분들이었다. 생존해서 목소리 낸 사람만 피해자일 수 없고, 지원단체의 주장에 따르면 20만명이나 되는데, 책에 나오는 케이스를 어떻게 누군가의 것으로 특정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작년에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라는 책이 나왔다. 부제목은 <애국심과 인신매매>다. 지은이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지원단체다. 일본인위안부문제는 그동안 묻혀져 있었는데 뒤늦게 문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제목에 있는 것처럼 위안부란 ‘인신매매와 애국’의 틀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표지에는 ‘매춘부는 피해자가 아닌가’라고도 쓰여 있다. 바로 이것이 나의 문제의식이기도 했다. 검찰은 ‘매춘부’라는 말에 비난을 담아 말한다. 나의 책에서 그 단어는 인용일 뿐이지만, 무엇보다 검찰이 말하는 그런 의미로는 ‘매춘부’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강제성에 관해서도, ‘공적으로는’ 없었다고 쓴 취지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고 관리하기도 했지만 납치나 속임수까지 써서 데려오라는 것이 일본의 공식방침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너무 어린 사람은 업자를 다그쳐 돌려 보냈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다른 곳에 취직시키기도 했다는 자료도 있다. 그 경우 업자를 처벌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지만, 업자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지도 않고, 위안부의 실질적 주인은 돈을 주고 사 온 업자였으니 제재에도 한계가 있었을 수 있다. 식민지나 본토의 유괴현장을 단속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묵인도 포함해 책임을 물었다. 내가 강조한 것은 ‘일본군에 의한 물리적 강제연행’이 결코 위안부동원의 중심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검사: 21세 이하는 중국 등지로의 이동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단속을 일본 본토에서만 적용했고 식민지에선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을 비판했다.

박유하: 통첩문이 식민지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 식민지 경찰도 유괴 등을 단속했다. 그런 자료는 강제성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25년 전에 위안부 할머니를 만났고 10년 전에 위안부문제에 대해 책을 썼다. 검사는 짧은 시간에 많은 공부를 한 것 같지만 모르는 일이 여전히 많다. 그런데도 기존 연구와 지원단체 말만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을 비판했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위안부연구자가 아니다. 즉 실제 자료에 접한 이들이 아니다. 나를 위해 증인으로 나오겠다는 역사학자도 없지 않지만 서로 증인을 채택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부탁하지 않았을 뿐이다.

검사: 피고인은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 따옴표가 인용 표시라고 했지만, 그 부분의 따옴표는 작은 따옴표다. 피고인은 다른 인용은 큰 따옴표를 썼다. 그러니 인용이 아니라 강조다.

판사: 작은 따옴표는 인용할 때도 쓰고 강조할 때도 쓴다. 검찰은 인용이 아니라고 하고 피고는 인용이라고 한다. 서로 견해차이가 있으니 판단에 맡길 문제인 것 같다.

변호인: 그러면 증거자료에 대해 설명하겠다. 우선 증거 1호, <마리아의 찬가>. 일본인 위안부가 쓴 수기다. 일본인도 인신매매 틀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제출했다. “2500엔 빌려주어 그걸로 가구라자카의 빚을 갚고 700엔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쓰여 있다.
또 하나의 자료는 같은 책에서 발췌한 것인데, 일본인 여성도 하루에 수많은 군인을 상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피고인이 ‘위안부의 고통이 일본인 창기와 다르지 않다’고 쓴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자료다. “한 여자에게 10명이고 15명이고 달려드는 모습이란 마치 짐승과 짐승간의 싸움 같았다.”고 쓰여 있다.

검사: 증거 1호는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내용이니 이 사건 공소사실과 무관하다. 마리아 찬가 발간일이 1971년도다. 91년 8월 김학순할머니 진술 이후에 대해 쓰여진 것이 제국의 위안부다. 공소사실과 무관하다.

판사: ‘일본인창기’라는 말에 관계되는 부분이니 무방하다.

변호인: 증거 2.<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인 여성이야기다. 식민지에서 배로 떠날 때 일본인 여성이 2명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 여성도 위안부로 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출했다. 식민지라고 해도 <일본제국>의 국민이 되어 있는 이상 군인이 강제로 끌어갈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검사: 일본 매춘부는 성병 감염자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인 여성이 많이 끌려갔다. 일본 창기 일부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갔다. 그걸 나타내기 위한 책이다.

박유하: (일본인 여성도 가난한 집 소녀들이 조선으로 팔려 오기도 했다. 그들도 위안부로 갔다. 그런 이들의 존재가 간과되고 있다. 조선인 소녀들도 물론 많았지만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여성도 있었다. 식민지는 순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만든 생각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성병이 만연해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 위안부는 대우에 차이가 있었고 직접 차별받기도 했지만, 가부장제 하의 가난한 여성으로서 동원된 구조는 다르지 않다.

판사: 피고인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 변론은 원칙적으로 변호인이 해야 한다.

변호인: 증거3호 1, 2, 3은 위안부동원이 주로 인신매매로 이루어졌고 후반에는 14세이상 40세까지 400만명이 국가를 위한 근로봉사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총동원체제에 동원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이때 유곽의 창기까지 애국청년단등의 이름으로 애국을 강요당했다.
직업소개소가 속여서 보낸 정황, 그런 직업소개소를 경찰이 단속한 상황, 허가를 강화하려는 상황 등을 볼 수 있다. 식민지의 일본인 여성도 함께 했고, ‘병원선’에서 일해야 했던 정황도 나온다.
3-3은, 당시 사람들이 ‘만주’를 꿈의 땅으로 생각하고 이주하려 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그런 틀 속에서 업자들이 인신매매등으로 여성들을 모아 데려간 것이었다. 물론 의뢰를 받은 경우도 있지만, 받기 전부터 움직인 사람들은 있다.
당시도 사기 등으로 이루어진 인신매매는 처벌받았다. 피고인은 그러한 정황도 전쟁을 일으켜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들이 전쟁터로 동원된 것을 식민지화의 결과로 보고 구조적강제성이라고 말했다. 업자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당시도 사기에 의한 인신매매는 불법이었고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군의 개입 자체는 충분히 서술했다.
4호증은 배춘희할머니의 영상 녹취록이다. 에프런을 두르고 군인들을 위해 천인침을 받았으며 위안부는 ‘군인을 돌보는 존재’라고 했다.
5호증 <들리나요>에도, 마찬가지로 물리적 납치 주체가 일본군이 아니고 유괴범들이라는 사실이 다수 적혀 있다. 부모를 위해 몰래 가거나 소개업자를 통해서 간 케이스도 많다. 소개소가 세탁을 한다고 거짓말을 한 경우도 나와 있다.

검사: 인신매매로 와도 묵인하고 넘어간 경우가 많았다.

판사: 일본군이 인신매매임을 알면서 묵인했다는 건지, 아니면 몰랐는데 아무튼 위안부가 필요했기에 받았다는 건지?

변호인: <제국의 위안부>에는 일본군이 묵인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판사: 결국 헌병이 와서 직접 잡아간 게 아니니까 물리적 강제가 없었다는 것이고, 묵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면 되나? (피고인을 바라봄)

박유하: 그렇다. 하지만 부대마다 어떻게 처우했는지는 다를 수 있고 다양한 케이스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군이 관리했다는 것은 업자를 통해 부대로 왔을 때 업자가 계약서를 부모에게 받았는지 확인하는 게 원칙이었다는 이야기다. 속았다면서 우는 경우에 다른 곳에 취직시킨 경우가 있고, 나이가 너무 어리면 돌려 보낸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부 돌려 보냈을거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공식적인 규율은 업자로 하여금 계약서를 확인토록 했다는 사실이다.

판사: 20만명의 위안부가 있다. 8만인지 20만인지 몰라도 그 경우는 원칙대로 안 된 경우인데, 원칙이 안 지켜진 경우가 더 많은지 확인되는가?

박유하: 그건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안 지켜진 경우가 많다 해도 그 이유는 대부분 업자들이나 다른 주변인들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호인: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이라는 증언집에는 “3~40대 가량 보이는 남자가 오더니 배불리 먹을 것을 주고 좋은 신발도 주는 곳을 알아봐 준다고 따라오라 했다.”고 쓰여 있다. 가 봤더니 여관에 농민의 딸들 14~15명 있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고. 자물쇠로 잠겨있어 도망도 못해. 현장에 도착했더니 카키색 군복입고 각반을 찬 일본군 3명이 기다렸고 중국 상해역으로 갔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농민의 딸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위안부 모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검사: 이 이야기는 오히려 강제로 위안부가 모집이 됐고, 군인이 모집 과정에 가담했다고 봐야 한다. 강제동원, 강제연행의 주체는 일본군이다. 그게 역사적 사실이다. 근데 이 사건 도서에서는 강제동원, 연행의 주체가 결코 일본군이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변호인: 물리적 주체가 일본군이라는 건가?

검사: 물리적, 구조적 주체 모두 일본군이다.

판사: 공소사실보면 일본군이나 국가가 강제연행을 지시했다고 볼 증거는 없다는 입장이다. 업자가 어떻게 데려왔든 이걸 묵인한 것에 대한 책임은 있을지라도… 일본국이 강제 연행이라고 끌고 갔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했으니.

변호인: 증 7호-1-3. 이하는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이라고 하는 정대협이 만든 증언집이다. 위안부가 국방부인회에 가입해서 협력을 강요당한 정황이 나온다. 어깨띠를 걸고 모자 쓰고 병사를 배웅하기도 하고 훈련을 받기도 했다. 황국신민서사를 외워야 했고 기미가요를 부르고 방공연습도 했고 간호활동도 했다. “안에 들어가 계급 높은 사람 만났다. 조선에 가고 싶다 말했다. 간호원이 부족하니 가겠냐고 물었다. 간호원은 3층에서 잤다.” 성노동 이외에 전쟁 협력을 강요받았다는 이야기이고, 강요된 애국, 강요된 협력에 대한 증언자료다.

검사: 이 증언집에 조선으로 보내줬다는 게 나온다. 그런데 떠나기 전 새로운 조선인 여자가 보충돼 왔다는 내용이 있다.
동원양상에는 일본인이 데려간 경우도 많다. 9-3에는 총검을 들이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을 외쳤고 강제로 트럭에 실려 끌려갔다고 나온다. 이는 직접적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는 걸 말한다. (여복실의 경우)

변호인: 피고인은 책에 “군인이나 헌병에게 끌려간 경우도 있다.”고 명시했다. 다만 그 경우는 개인적 일탈로 봐야한다고 했을 뿐이다.

박유하: 현재 학계의 이해는, 점령지에선 강제연행도 있을 수 있으나 식민지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 중심적이다. 학계나 관계자라면 다 아는 이야기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한 이야기는 일본군이 모집과 관리는 했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려오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물론 군인이 강제로 데려갔을 경우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그 경우는 개인적 일탈이라고 해야 한다. 식민지라 하더라도 표면적으로는 국민의 한사람이니 강제로 끌어가는 건 불법이기 때문이다. 군인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고 그 경우도 군복을 입은 업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보충-물론 진짜 군인이 함께 왔을 수 있으나 그 경우 오히려 더 형식적으로는 자원의 형태를 띈 듯한 정황이 <여자의 병기>에 보인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통치 방식이다.)

판사: 업자가 군복을 입었을 수도 있다. 개인의 일탈일수도 있다. 업자가 군복을 입었다는 사료가 있나?

박유하: 업자가 군복을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료들이 있다. 추후 제출하겠다.

(하단에 재판정에서 말하지 못한 추가 내용을 덧붙인다 이하에서는 “박유하 보충”으로 표시: 7-4에는 위문단에 참가해서 간 여성의 증언이 나온다. 그런데 그 위문단 중에는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고 나온다. 이 역시 한반도에서 강제연행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었다는 증거다
8호증은 요금표 등 위안소규칙들이다. 부상병을 돌보고 빨래하고 전쟁터로 배웅한 이야기가 나오고 병원에 입원한 위안부를 군인이 문병 온 이야기도 있다. 9-1에는 위안부생활이후 군수공장을 한 여성 이야기도 나오고, 그 행위를 이적행위로 인식해 그런 경험은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9-2에는 조선에서 떠난 일본인 여성 이야기가 나오고, 9-3/4에도 위안소의 또다른 정황들이 나타난다.)

변호인: 10호증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에는 “나라를 위해서 나갔다.”는 증언이 나온다. 그러니까 보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이 가난에 빠져서 돈벌러’가야 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검사: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은 일본제국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다. 당시는 나라를 못 세워놨으니까 ..

변호인: 11호증도 같은 증언집 5권이다. 위안소의 정황을 알 수 있다.

검사: 증언집에 오히려 명쾌하게 정리 돼 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군위안소 유형으로는 군직영위안소, 군전용위안소 및 일반위안소 중 군도 이용하는 위안소 세 가지다. 군 직영,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위안소, 셋째는 군이 지정한 위안소. 이 요시미 교수의 정의는 아주 적절하다.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였다.

(박유하 보충: 12호는 <해남도로 연행된 조선인 성노예에 대한 진상조사> 는 정부산하 위원회가 만든 것이고 조선인 일본군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인 위안부 나이가 군인들보다 많아서 누님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 일본여성이었다거나 일본여성이 조선인보다 젊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부분의 이야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무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장소와 시간에 따라 수많은 다른 경우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13호증은 <일본군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다. 위안소경영에 위안부의 ‘작부허가서’, ‘취업허가서’, ‘폐업허가서’등이 필요했고 그 서류를 군대에 보고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안소 업자들은 같이 조합을 만들기도 했고 업자가 위안부를 대신해서 조선에 송금했다.
이동의 자유가 있었고, ’여자청년대’로서 응급처치법을 배우는 등 협력강요정황도 나온다.)

변호인: 14호증은 조선인 일본군이 쓴 책이다. 위안소에 대한 내용인데, 번역한 부분을 보면 위안소이름이 ‘애국봉사관’이었다. 일본군이 위안소의기능을 군인 전투력 향상을 돕는 것으로 ‘애국’하는 곳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다.
15호증은 일제시대 작가 최명익이 쓴 <장삼이사>라는 단편이다. 소설이지만 조선인 업자가 주체적으로 일본군인을 따라다니면서 위안소를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자발적인 것은 업자였다.

검사: ‘애국’은 공소사실 중 하나다. 위안부가 애국적 동지적 관계였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했다, 띠를 둘렀다… 이런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건 모두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위안부의 내면에 대한 기술이다. 아무런 근거없이, 이 사건 도서에서는 조선인과 계속 등치시키고 있다. 유곽여자들이 하찮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했는데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자긍심을 갖게 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 도서에서는 아무런 근거없이 등치시키면서 위안부가 위안부와 동지적 관계였다고 적시하고 있다.

변호인: 그 부분이 일본인 위안부 경우라는 것은 피고인 자신이 책에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조선인위안부가 빨래하고 간호했다는 증언을 인용했고, 그래서 “조선인 위안부도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패전 전후 위안부가 부상병 간호하고 빨래, 바느질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없다. 조선인 위안부들도 사유리 등으로 불렸다. 대체 ‘일본인’이 되는 일…” 이 부분은 조선인 위안부에 부여된 역할이 일본 위안부와 같다는 걸 말하고 있다. “‘거짓 애국’ 과 ‘위안’에 몰두하는 게 그녀들에게 하나의 선택일 수 있었다.”고 쓴 것이다.
구조적으로는 일본인위안부와 같은 처지에 놓였지만 일본인 위안부와 다르다는 것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박유하 보충: 16호는 국방부인회에 대한 책이다. 위안부들이 왜 에프론을 입고 띠를 두르고 ‘애국’적인 행동을 해야 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다. 이른바 창기들도 ‘우리도 일본여자’, ‘나라를 위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동원에 적극 나서도록 만든 것은, 사회의 매춘에 대한 차별이었다. 조선인 위안부도 그 틀에 포섭된 것이다.
17호는 동시대 위안부모집광고다. 소개소가 18-30세 여성을 모집한 것을 알 수 있다. 신문에 이런 광고가 났다는 것은 위안부라는 존재가 공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하는 일을 명시하지 않고 있고 이러한 점이 사기모집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변호인: 증 18호는. 위안소 입구 사진인데, <몸과 마음을 바치는 일본 여성의 서비스>라고 입구에 씌여 있다. 다른 하나는 위안소 이름이 <고향>이거나 <애국 식당>이다. 이는 위안소에게 요구된 역할이 신체적/정신적 위안이었음을 말한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한.

검사: 조선인위안부는 동지적 관계가 아닌데 동지적 관계로 허위사실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두고 기소한 것이다.

변호인: 피고인은 조선인위안부를 자발적인 동지적 관계라고 하지 않았다.
19호증은 당시 일본군인이 위안부는 ‘군속’이었다고 쓴 자료다.

검사: 그건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것 아닌가. 공소사실과는 관련이 없다.

변호인: 20호증이다.
<여자의 병기>라는 조선인 위안부의 수기다. 모집되어 강간당하고 울지만 나중에는 국방부인회에 가입하여 기뻤다고 하고 애국봉사단이 되어 일반창기와는 다르다고 자신을 인식한다. 그런 식으로 변해갔던 경우도 있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21호증은 일본인 위안부 경우지만, 많은 군인을 상대한 데 따른 고통이 나타나 있다.
22호증은 일본군군의가 쓴 <한구위안소>. 게이코(조선인 위안부)에게 사령관이 표창했다는 내용도 있다. 군인이 업자의 착취에서 보호하려 했던 내용도 나온다. 이 책에 나오는 위안소 이름도 ‘평화관’이다. 위안부가 사모님 취급을 받은 이야기도 나온다.
앞서 말한, 사기를 당해서 왔는데 다른 곳에 취직시킨 정황은 이 자료에 나온다.
23호는 금년 6월에 마이니치신문에 발표된 자료다. 미군의 포로를 심문한 자료이고 조선인이(군속일 가능성이 높다) 증언한 부분이다. 포로들에게 일본의 식민지통치 전반에 대한 생각을 물어 본 자료인데, 이 중에 위안부관련 언급이 나온다. 이들이 “한국 매춘여성 모두는 자원자였거나 또는 부모에 의해 매춘업에 팔려온 여성들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강제적 징발이 있었다면 남자들이 격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쓰여 있다.

검사: 이 보고서에 군속이라고 나온다. 민간인 이박도, 백승규, 강기남 이렇게. 위안소를 경영한 업자들로 추정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 에 끌고 온, 협조한 사람들은 처벌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원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강제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온 것이라고 말하려고 이렇게 증언을 한 거다. 따라서 이 증언은 신빙성이 낮아 위안부 자발성을 뒷받침하는 진술로는 보기 어렵다

변호인: 검사의 추측만으로 이 자료가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판사: 이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한 내용이 신빙성 있느냐. 이건 좀 봐야 할 문제다.

변호인: 24호증은 70년 8월14일자 서울신문 기사다. ‘화류계 여성을 동원하던 일제는 점차 인원이 달리자 일반처녀들까지 소집’이라고 서술했다.
25호는 센다가코 인터뷰 내용이다. “일종의 매춘부였다.”고 하면서 “그녀들 스스로가 그것은 나라를 위해서라고 믿고 있었다.”고 말한다. <종군위안부>라는 책에도 같은 인식이 나타나 있다.

검사: <종군위안부>라는 책에는, 일본인 위안부에게는 ‘조국을 위하여’,’군인을 위하여’ 라는 의식이 있었고 자신의 행위를 애국심이라는 설탕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조선인은 강제연행되서 위안부로 일했던 여성들이다. 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를 다르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 도서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등치시켜서 같다고 말해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판사: 강제연행이란 구조적 강제성이라는 얘기가 없을 때 아닌가. 물리적 강제성을 말하는 것일텐데.

변호인: 강제라고 해도 업자에 의한건지, 군에 의한 건지를 구별해야 한다. (동의함)
27호는 한국정부보고서다. 외교부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이 1992년 7월에 낸 것이다.
여기서도 군이 위안소 직접 경영하기 보다는 경영은 매춘업자에게 맡기고 군은 위탁 관리 등을 한 게 일반적이라는 인식이다. 모집 방법도 38년까지는 도시지역 여공모집, 식당종업원 등 인신매매 수법이고 38년~40년까진 빈곤 농부의 딸들을 모집했다고 쓰여 있다.
위안부에게 수입이 있었고 업자와 나누었다는 것 등 관리매춘형태임을 알고 있었다.

검사: 이 보고서는 일본군이 목적을 위해 군대를 위한 매춘업을 했고 군대가 직접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군대에 종속된 집단이었다. 매춘업이라는 단어를 보고, 한국 정부도 매춘업이라고 인식했다고 입증취지로 제시했지만 한국 정부가 위안부를 매춘업으로 인식한 게 아니다. 보고서를 보면 일본군 시각에서 볼때 군대에 의한 강간 예방하고 성병 예방하는 등. 이를 위해 매춘업에 군대가 개입해서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위안부 연구 초기 시점이고 그래서 제목도 중간보고서다. 한국정부는 위안부를 매춘으로 인식한 적이 없다.

변호인: 이 당시 한국정부는 위안부를 관리매춘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 고노담화가 작성되었다.
28호 증4에는 각 대장에게 내리는 지시가 있다. 이 부분에는 ‘정신적 위안’에 대해 쓰여 있다. “현재 특수위안소는 위안부 수가 적어 단지 정욕 채우는데 불과하니 좀더 수를 늘려서 정신적 위안도 주도록 지도해라.”고. 신체적 성욕 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위안부의 역할이었다는, 강요된 역할이라는 증거자료로 제출한다.

검사: 오히려, 계획적으로 위안부가 운영됐다는 걸 보여준다. 자료 29에서 33은(<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은 아시아여성기금에서 펴낸 자료이다.

(박유하 보충: 이 자료들에는 계약서,영업허가서,취직허가서등이 나와 있다. 허가제라는 것은,미성년을 고용하거나 사기 등으로 데려온 사람이 없도록 하는 취지였다.
군인이 폭행도 많이 했지만 헌병이 단속했다. 말하자면 폭행은 있었지만 공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유곽을 위안소로 지정한 정황도 나온다. 군속에게 제복을 착용하도록 한 정황도 보인다. 군속취급을 받은 업자에게도 군복이 지급되었으니 위안부가 군인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위안부는 처음엔 동향사람이 모집되었다. 그 쪽이 더 정신적위안에 안성맞춤일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위안단중에 일본인이 90명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변호인: 다음은 위안부 문제해결 방안 연구 ‘여가부 용역 보고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낸 보고서. 연구책임자는 민디 코틀러(아시아정책연구소) 다. 이 사람은 미국하원결의를 이끌어내는데 공헌한 사람인데도, 위안부모집은 인신매매를 통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사: 인신매매에서 매매주체는, 대상자가 아니고 ‘대상자를 강제 또는 기망에 의해 취득한 사람과 그 사람으로부터 대상자를 사려는 사람’이다. 대상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팔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변호인: 이것은 단순강제연행이 아니라 부모등에 의해 팔려가는 등 형태였다는 말을 하기 위한 자료다

검사: 그럼 부모들이 아이가 위안부 일 한다는 걸 알고 팔았겠느냐. 인신매매 대상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팔았다는 거냐?

변호인: <제국의 위안부>는 속아서 간 경우도 스스로 간 경우도 모두 있다고 한다.
36호증은 2015년에 미국의 일본(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성명서다. 2015년 위안부 할머님들을 위하는 입장에서 나온 보고서다. 성폭력과 인신매매 없는 세계 만들기 위해, 아시아의 평화와 우호를 촉진시키기 위해 과거 잘못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위안부 문제는 인신매매라고 인식하고 있다.

검사: 위안부는 군대에 의한 조직적 관리가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본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가난하고 약한 여성들을 착취했다는 점에서 문제다. 여성의 이송과 위안소 관리에 대한 일본군 관여를 밝히는 자료가 상당수 발굴됐다. 피해자들 증언에도 중요한 증거가 포함되어 있다. 증언들 차이가 나는 점이 있을지라도 전체로서 호소력 있고 공문서로 입증되고 있다. 증거도 존재하지 않고 증언은 일관성 없어 보이지만 전체적 증언은 분명 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

변호인: (피고인은 그 부분에 대해 의견이 다르지않다.) 위안부와 공창제도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도 많다. 일부를 읽겠다. “폐업신고는 폐업신고서를 내야 하는데 그 서류에는 주인업자들이 연명날인을 하도록 돼 있었다. 업자들이 자신들 이익에 반해 창기의 자발적 폐업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군인의 성욕 처리와 성병 예방을 위해 공창을 설치했다.”…등

검사: 증거 38~41호가 공소사실과 무슨 관계가 있나. 위안부가 공창제와의 관계가 무슨 관계가 있나?

변호인: 위안부는 공창제도에 편입된 것이라고 여기에 기재되어 있다. 그러니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증거제출이다.

검사: 모집 장소는 일본 내지다. 차마 군에서 직접 손 댈 수 없는 일이어서 생각해 낸 것이 위안소다. 군속으로 되어 있지만 정식 군 소속이 아니며 내부에서 ‘어용 상인’으로 여겨지는 이시바시 도꾸다로오 같은 존재를 이용했다.

변호인: 인용한 부분은 필요성에 의해 인용했을 뿐이다. 동지적 관계라는 틀 안에서 물건 취급을 받는 것으로 명시적으로 말했고, 말 그대로의 네덜란드, 중국인 위안부 등 전쟁상대국 여성들과 비교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검사: 연합뉴스 자료 보겠다. 정대협 조치 제안이 2015년 4월23일 나왔다. 군 위안부문제 해결 시민단체와 김복동이 23일 도쿄에서 제시한 방안이다….(생략) 피고인은 책임을 인정한다고 하는데 법적책임이 아닌 무슨 책임을 인정한다는 말인가.

변호인: 그런 것을 왜 문제삼아야 하는가. 하지만 정대협도 법적 책임에 관한 허들을 낮췄다고 표현한 바 있다. 법적 책임을 요구사항에 명시적으로 포함하지 않았던 것이다.

판사: 일본국에 법적 책임이 있느냐 아니냐는 쟁점과 상관이 없다.

박유하 :간단히 보충하겠다.
1)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를 동일시한다고 하는데 차이에 관해서도 썼다. 장교를 상대하면 인원이적으니 환경과 입장이 더 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조선인 위안부도 장교를 상대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들 중에 일본인처럼 행동한 이들이 있는 건 오히려 이중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 창부조차, 일반여성처럼 ‘동등한 일본여성’ 취급을 받기 위해 국방부인회에 적극 가입하고 군인을 전송한다든지 하면서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행동을 했다.

2) 한반도에서도 일본인 여성들이 위안부로 나갔다. 위안단에도 섞여 있었다. 한반도에서 일본인여성이 나가는데 조선인만 따로 강제연행하는 일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당시에 갑자기 연행된 것은 주로 반체제 사상범들이었다. 전쟁터와 식민지의 차이를 봐야 한다.
검사는 안병직교수가 ‘위안단’ 모집을 강제라고 말했다고 했지만, 그 안에 일본인 여성도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인식이다. 그들도 하루에 수십명 상대하기도 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었겠지만 여성으로서 동원되어 당한 고통의 질은 같다.

3) 군복지급에 관한 지적이 위안소출입뿐이라고 검사가 말했는데, 한반도로 업자가 모집하러 왔을 때 군복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있다. 추가로 제출하겠다.

4) 위안소로 가는 걸 알고도 딸을 일부러 판 부모가 있겠느냐 했는데 그런 부모도 적지 않았다. 단 수양딸인 경우도 많았다. 가난에 따른 제도의 희생양이 된 케이스가 많은 것으로 본다.

<중국으로 끌려간 위안부 2>의 일부를 읽어 보겠다

“ 그때가 뭐 열몇살인지 몇인지. 아, 열여섯살 났을 거요. 술집에도 한 2년 있었으니까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도장 받아오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도장을 찍어 주겠나.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내 말이라면 또 믿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데리고 손을 잡고 도랑카에 나가서 사정을 했지요. “아바이 나, 누가 색시 사러 왔는데, 얼마얼마 주겠다는데, 내가 먼 데로 가서 돈 벌러 가갔소.” “여, 그럭하면 어떠카갔니? 내가 너 하나 보고 사는데 안된다.” “안될 일 없다구. 아버지 잘 사는 걸 보구 죽어야지.우리 아버지 돈 쓰고 그저 잡숫고 싶은 거 잡숫구, 나 하나 없는줄 알고 아버지, 나 소개해 주소. 어떡하갔어. 술집에 빠져서 2년동안 돌아 먹었는데 나 촌에 안 있갔시오.” “정 그렇다면 내가 소개해주지.” “그래 어머니 아버지 이름 다 쓰고 도장 다 찍고” “근데 할머니 할아버지 도장 다 찍으랍니다. 어카갔나? 아버지” “그럼 내가 쓰지” 아버지가 써가지구 할머니 도장 할아버지 도장 찍어서 그 다음에 다 동의를 받았수다. 그래가지구 박천으로 올라갔죠 올라가니까네 보더니 우리 아버지 하는 말이 “당신에게 내 딸을 팔았으니까는 다른 데 못넘긴다.” 그렇게 약속을 했단 말요.”

이런 이들은 적지 않았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다.

판사: 중요한 자료같다. 왜 제출하지 않았는가? 제출하라.

박유하: 검사의 질책을 들으면서 제출필요성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자료는 너무나 많다.

5)허가 신청서를 업주 측 서류라고 검사는 말하지만 ‘작부’(당시는 위안부를 작부라고 부르기도 했다)로 본인들의 허가원도 필요했다. 또 센다가코를 인용한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는데, 센다를 책에서 앞부분에 인용한 건 ‘애국’ 의 틀에서 이 문제를 본 저자가 내가 아는 한 센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10년전에 같은 인식을 가졌지만 그 때는 읽지 않았었고 나중에 봤기 때문에 앞선 인식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인용한 것이다.

6) 검사는 위안부가 군속이어도 성노예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본 국회에서 논의된 자료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일본 위안부들이 전투자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수류탄 나르거나 빨래 하거나 한 것에 대해서다. 보상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추후 제출하겠다.

7) 18번 연합군 자료를 신빙성이 없다고 하는데, 그 발언의 앞뒤는 일제의 가혹함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러니 그 부분만 검사가 원하는 뉘앙스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신빙성이 없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세 발언자 중 한사람에 대한 개인조서가 있는데 탄광부였던 사람이다. 검사가 추측하는 ‘책임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업자’가 아니다. 일제의 가혹함에 대한 비판을 전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이 위안부 관련 사항만 다르게 말할 이유는 없다. 추후 제출하겠다.

8) 미국역사학자들도 위안부문제에 관해 나와 비슷한 인식을 내놓았다. 2015년 5월의 일이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에 이들의 성명을 수록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대해 가장 양심적으로 보도해 온 아사히신문이 2014년 8월에 노예사냥을 했다던 요시다세이지 증언을 검증하고 허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런 취지가 잘 보도되지 않았다.

9) ’동지적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드린다. 우선은 형태적인 의미다. 그저 한국이 일본제국에 포섭되었으니 ‘일본’인으로서 동원되었다는 의미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위안부를 전쟁터에서 처녀들을 끌고 가 군인들이 강간한 것으로만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식민지 통치 하에서의 국민동원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그랬을 때 실제로 얼마나 마음으로부터의 행위였는지 여부의 판단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다.
그런 속에서 군인과 위안부가 사회 가장 최하층의 인간으로서 고향을 멀리 떠나온 사람들로서 감정적 교감을 할 수 있다. 형식적 틀은 민족적 관계지만, 실제관계는 남녀관계거나 계급적 관계다. 민족 관계로서의 동지적 관계일까봐 겁내고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정황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를 하나 더 읽어 보겠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라는 책이다. 작고한 분이다.

“ 나는 군인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게, 즐거워하도록 할 수 있는 한 노력했다. 병사들의 가족이나 고향 얘기를 들어주었고, 같이 일본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정이 있는 병사들도 불쌍했다. 그 사람들은 늘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 중에는 울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전장에 있는 군인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마음은 결국 같았던 셈이다. 전쟁터에 온 이상은 아내도 아이들도 목숨도 버리고 천황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열심히 위로하고 그런 생각을 잊어 버릴 수 있도록 얘기해주곤 했다.”

이 분은 좋아하던 군인도 있었는데 그가 전쟁 끝나면 일본에 가자고 해서 자신은 조선으로 가야 한다고 했더니 그 군인이 “그렇다면 내가 조선으로 가지. 요시코가 일본인이 되어도 좋고, 내가 조선인이 되어도 좋아.”라고 했다고도 말한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 야마다이치로가 찾아오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기며 나는 위안부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또,

“ 그 칼은 천황 폐하로부터 받은 거잖아. 적에게 향할 것을, 왜 이렇게 험하고 먼 곳까지 당신들을 위안하러 온 나를 향해 겨누는 거야. 조센삐, 조센삐 하며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우리들 조선인도 일본인이고, 일본인이 되었다고 그랬잖아.”
“ 세상이란 것이 정말 뒤집히는 경우가 실제로 있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입장이 바뀌면 인간관계도 변해 버린다. 그것이 또 다르게 나의 슬픔을 자아냈다. 그때까지 “일본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다. 일본인은 가장 우수한 인간이다.” 라고 했던 군인들이 나라가 전쟁에서 지자 순식간에 작아 져버렸다. 그건 너무 비참하지 않나 생각하자 또 눈물이 났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일본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타테8400부대의 군속이었다.”

판사: 그 두권의 책을 증거로 제출하라. 다음에는 피고인 심문 진행을 2~3시간 진행하겠다. 다음 기일에 피고인심문까지 하고 자료를 다음기일까지 받겠다. 최종변론은 3주후쯤 최종변론하고 결심하면 어떨까. 11월29일 오후 2시로 바꾸면 어떻겠느냐. 3주 후인 12월20일 화요일에 결심공판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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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1심] 제3회 공판기

박유하

지난 두번의 공판에서는 <제국의 위안부> 자체를 검증했다. 말하자면 양측이 책만을 놓고, 명예훼손이라고 지적된 34개 항목을 순서대로 짚어가며 검사와 변호인이 각자의 주장을 펼친 자리였다. 이미 쓴 것처럼 검사가 책에 대한 주장을 말할 때 근거로 가져온 자료는 대부분은 학자 혹은 지원단체 등 관계자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고발 이후 자료가 많았다.

하지만 검찰이 낸 자료중에는 UN보고서를 비롯한 과거의 자료들도 있었다. 그 자료들은 대부분 민사재판에 제출된 자료들이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원용하면서 가처분재판부도 손해배상재판부도 ‘세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박유하만 위안부문제에 대해 딴 소리를 한다’는 원고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물론 나는 한 사람의 학자로서 내가 본 위안부문제인식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 인식이 옳은지 여부는, 당연히 학계에서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의 책에 대한 검증은 학계가 아니라 법정에 맡겨지고 말았고 이 날은 검사에 의해 그런 자료들의 주장이 다시 대변되는 날이기도 했다.

세번째 공판에서는 그런 ‘범죄증거자료’와 함께,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는 나의 ‘증거자료’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검찰의 주장과 우리측 반박에 시간이 많이 걸려, 우리쪽 증거자료에 대한 설명은 다음번 공판으로 미루어졌다.

검사의 자료는 60여개였다. 크게는 고소장과 고소보충서, 고소인의 의견서, 나의 책을 검토한 로스쿨 학생들의 보고서등 주변인들의 생각을 담은 자료.

그리고, 나눔의집 거주 위안부 할머니 5인의 구술, 다른 위안부할머니들의 구술기록집 <들리나요>, 증언다큐영상, ’55인의 할미꽃 소녀들’이라는 제목의 위안부의 체험자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자료 등 다른 위안부 할머니 구술, 그리고 나눔의 집 거주 위안부 중 한분인 유희남 할머니의 수사관진술조서가 원고측 자료로 제출되었다. 거기에 신문조서, 수사보고서, 범죄경력 등 조회회보서 등 나에 대한 검찰의 자료와 그 외 자료들이, 말하자면 당사자들의 자료였다.

주변 자료중 검찰이 독자적으로 제출한 자료는 ‘수사보고’라는 이름으로 제출된, 일반인 블로그에 있던 책에 대한 감상(여기에 문학평론가 손종업 씨의 페이스북 글 첨부, 그는 나를 아이히만에 빗대면서 비난한 사람이다) 뿐이었다.

보다 공적인 문서로는,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해 외교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문, 고노담화문, 쿠마라스와미 96년 보고서, 맥두걸보고서, 국제앰네스티 보고서, 국제법률가회의, ILO 등 국제기구의 위안부문제 관련 자료집, 미국연방하원결의안 등의 위안부문제에 관한 제3자의 기존인식등, 위안부문제해결 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과거 20여 년의 자료, 그리고 고발 이후 나의 책에 대해 나온 판단인 가처분 결정서와 손해배상 판결문이 있었다. 여기에 <제국의 위안부를 말하다>라는 제목의 ‘젊은’ 역사연구자들의 좌담회 자료, 김부자 교수 논문, 나에 대한 비판서 <제국의 변호인-박유하에게 묻는다>에 실린 몇몇 글 (학자 중엔 이재승, 김창록, 김부자, 이나영 교수 등. 평론가 김요섭, 역사평설가 김수지 등의 글과 일본인 마에다 아키라의 글도 포함)들이 추가되었다.

나는 여전히, 이들이 자신의 글이 제출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다. 아무튼 나에 대한 고발과 처벌 요구에 힘을 보태게 된 자료들은 이런 자료들이었다.

그 이외엔 모두, 고발 이후에 나온 나에 대한 비난 신문칼럼이나 기사들이었다.

신문기사 중에 ‘위안부강제동원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맥아더가 작성한 기밀문서에 들어 있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이 국제법률가회의의 권고문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오히려 좁은 의미에서의 강제동원과는 다른 정황이었다. 아마도 검사는 수많은 보고서들을 내용까지 일일이 검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국제사회도 위안부문제를 강제연행으로 인정’했다고 자주 말해 왔지만, 기존 재판부나 관계자들 역시, 대부분은 그 내용까지 읽은 적이 없지 않을까.

이하에 이 날 공판에서의 검찰의 주장, 그리고 나와 변호인의 답변을 써둔다. 양쪽 다 파워포인트나 OHP를 사용하며 진행했기 때문에, 나와 변호인은 증인석에 함께 앉아 검사가 제시하는 자료를 보면서 발언했다. 판사는 이 재판에 충분히 시간을 들여 판단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고, 이번 공판에서는 나도 충분히 발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날 공판도 아침 10시에 시작해, 점심시간을 사이에 두고 저녁 7시 가까이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이번 공판기 역시 오고 간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메모 가능했던 것만, 또한 메모에서 내용을 충분히 유추/기억 가능한 것만 쓰기로 한다.


<오전>

검사
지난 손해배상민사판결은 박유하의 주장을 ‘사실적시’로 판단했다. 따라서 박의 주장은 의견표명이 아닌 ‘사실적시’로 보아야 한다. 위안부할머니를 매춘부로 쓴 일에 비난하려는 ‘고의’가 있었음을 입증하겠다. 일본의 책임을 무화하기 위해 한일합방을 법적으로 유효하다고까지 말한다. 자신의 해결방법을 관철하기 위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비난하려는 고의를 담아) 이 책을 썼다.

판사
오늘의 공판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가지 확인하기로 한다.

1) 검찰의 의견서에 따르면 피고는 ‘위안부의 본질은 매춘’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의'(의도)가 있어서 매춘을 강조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매춘’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매춘’ 사실에 관해서는 쌍방에 의견차이가 없는 것으로 전제하겠다.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책의 앞뒤 부분—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2) ‘동지적관계’에 대해서도 맥락을 살펴야 하며, 검찰은 동지적 관계가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을 논증으로 밝혀야 한다. 말하자면 매춘이 사실이 아니고, 동지적관계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3) 강제성 부정을 두고 검찰은 피고가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재판에서는 일본에 책임이 있는지 여부는 다루지 않는다.

답변
일본의 책임을 무화시키는 ‘고의’를 주장하는 것은 사상검증이다.

본서는 일본에 의한 이른바 물리적 강제성이 없었다 해도 일본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펼친 책이다. 그동안 지원단체 등은 물리적 강제성, 즉 좁은 의미에서의 강제성만을 주장했고, 그에 따라 일본에서 반발이 일어났기 때문에 피고는 넓은 의미의 강제성을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한 것이다. 더구나 피고가 일본에 법적책임을 지우기는 어렵다고 한 것을 두고 일본에 책임이 없다고 했다고 주장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더구나 일본의 책임에 관한 논의는 판사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명예훼손과 상관없는 이야기다.

검사
박선아 한양대 교수가 학생들과 이 책을 검토한 보고서를 두고 피고는 ‘학생의 리포트’로 폄훼하지만, 학생들의 감상은 일반인들이 이 책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명예훼손이 된다.

답변
박선아 교수는 나눔의집의 고문변호사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나눔의집의 의뢰를 받아 학생들을 시켜 분석한 내용이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일반인’적 감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책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검토했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지원단체가 유포한 지식 외엔 위안부문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학생들이다. 똑같은 책을 두고 익숙하지 않았던 인식제기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이 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할머니의 아픔’을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한 일반인은 적지 않다. 발간직후 신문등의 서평, 인터뷰 기사들은 대부분 호의적이었고, 언론 반응이야 말로 ‘일반인’의 대표적 반응으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오마이뉴스는 이 책이 ‘군대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구조’를 ‘보편적인 여성문제로 제기’한 책이며 ‘제국의 가장 무서운 점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는 점’을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제자리 걸음인 위안부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책수다] <제국의 위안부>… ‘위안부=피해자’ 구도 거부한 도발적 문제제기

검찰 (이 부분은 주로 원고측이 민사재판에 제출한 고소장을 중심으로 발언)
이 책은 자신의 해결방법을 위해 위안부에 관해 허위를 쓴 책이다. 그런데 국제사회도 위안부제도는 성노예제도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피고는 일본의 책임을 면죄하기 위해 일부 사실을 가져와 전체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 식민지화했는데 합방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의 주장에 비추어 봐도 피고는 공동선과 정의를 배반했다. 다른 학자들도 피고를 비판한다. 홀로코스트를 부인한 외국작가는 처벌당했다.

답변
피고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주장하지 않았고, 법적해결에 고집하지 말고 당사자도 포함하는 협의체를 만들어 다시 논의하자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어판에서는 국회결의를 하면 좋겠다고 썼다. 결론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증언집 등과 각종 자료, 그리고 위안부문제에 관한 연구와 운동을 검토한 결과로서 한 말이다. 국제사회의 결론에도 의문을 가졌다. 일부를 가져와서 주장한다고 말하지만, 지난 번에 답한 것처럼 적지도 않으며 적다고 해도, 기록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결과일 수 있다.

운동이 오래되었음에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정황이 안타까워 10년 전에 책을 썼지만 지원단체 등 관계자들은 무시했다. 최근 몇년 한일관계가 경색되고 국민간 오해와 반목상태가 커지는 상황이 안타까워 다시 한 번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식민지책임과 기억의 투쟁’이다. 한일합방이 불평등한 종주국/식민지관계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제목이 된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다른 사안에 빗대 호소하는 것은 좋지만 홀로코스트와 위안부문제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홀로코스트는 민족말살을 시도한 것이지만, 제국은 식민지인을 자원으로 이용한다.

이 책은 위안부가 아니라 지원단체를 비판한 책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고발된 이유다. 실제로 100곳 이상 지적된 곳 중 반 가까이가 정대협을 비판한 부분이다. 실제로, 가처분 재판에서 지적된 곳 중 3분의 1만 받아들여졌다는 것도 그 사실을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해결방식을 20년 이상 주장해왔고 다른 방식도 있지 않을까라고 문제제기한 책을 고발한 것이다.

검사
피고는 위안부가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으니 일본인군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피고가 말하는 보상이란 그런 것이다.

답변
위안부가 일본군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여 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 동원되면서 남성들에게는 법으로 보상이 보장되었는데 여성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으니 징병과 같은 범주의 피해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피고의 주장이다. 보상에 관해 일본군과 비교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 일본군과 비교했다. 조선인 일본군조차 법적인 보장이 있었고 그것은 그들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패전으로 인해 일본군 조선인은 보상을 곧바로 받지는 못했지만, 한일조약이후 적은 금액이나마 보상받았고, 2006년 이후 다시 한번 받았다. (사망한 경우 2000만원)

위안부 할머니 중에는 ‘나라를 위해서 나가라 했으니 우리도 보상해 주어야 한다’고 발언한 할머니도 계시다. 피고가 말한 동지적 관계란 그러한 맥락에서의 이야기다.

판사
변호인측은 집단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지에 관해 보완해 주기 바란다.

<오후>

답변
검사는 피고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맥두걸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맥두걸 보고서는 위안부문제에 대해 ‘강요된 매춘’이라고 언급하고 있고 그에 대해 일본이 보상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기할 것은, 이 보고서는 업자에 언급하면서 관련된 민간인도 처벌 받아야 한다고 쓰고 있다는 점이다.

검사
맥두걸보고서에서는 법적책임을 인정하고 있고 피고는 일본의 법적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도서에서 피고가 강제연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답변
맥두걸은 일본군이 직접 유괴해 와서 강요된 매춘을 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피고는 유괴/납치를 한 주체의 대부분은 업자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고, 강제연행주체가 일본군이라는 소수 증언마저 부정한 것은 아니다. 쿠마라스와미보고서 등 유엔보고서도 위안소가 매춘시설이었음을 말한다. 점령지에서는 군이 직접 납치강간을 했지만 있었어도 식민지 여성에 대해서는 달랐다. 보고서들도 점령지와 식민지를 구별하고 있다. 네덜란드 위안부의 경우는 점령지의 경우다.

검사
유희남 할머니의 진술서에 따르면 박유하가 일본 정부로부터 20억을 받아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답변
피고가 20억을 받아주겠다거나 고발을 취하하면 20억을 주겠다는 등, 악의적인 허위가 보도되어 피고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검찰이 이런 자료까지 사용하지 않았다면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미 고인이 된 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안타깝다. 안타깝지만 유희남할머니는 민사재판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위증이다.

피고가 20억 발언을 처음 들은 것은 책을 낸 이후 알게 된 배춘희 할머니와의 대화에서였고 그 금액을 말한 것은 유희남 할머니 자신이다. 미국에서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일으킨 소송에서 1인당 청구금액으로 제기한 금액이라고 들었는데 그 얘기를 들은 피고는 일본이 보상한다 해도 그런 금액은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이 대화에서 말하고 있다. 배춘희 할머니 역시 그런 생각이었고 그래선지 그 얘기를 여러번 언급했다. 해당 대화가 들어 있는 녹취록을 전부 제출하도록 하겠다.

검사
피고는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을 다르게 쓰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어판에서는 일본이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쓰고 일본을 향해서는 사죄를 했다고 썼다.

답변
그 얘기는 재일교포연구자 정영환씨가 자신의 책에서 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인 대부분이 원문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서 한 거짓말이다. 정영환의 그 지적이 실은 의도적인 ‘오독 혹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작가 장정일씨가 일본어 가능한 이의 도움을 받아가며 확인 후 지적한 글이 있다. 검사의 지적 역시 근거 없는 중상일 뿐이다.
박유하 죽이기 | 정영환·이명원의 오독

검사
피고는 한국어판 발간 후 행한 인터뷰에서 ‘욕먹을 각오로 쓴 책’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은 피고가 위안부를 매춘부라 칭한 사실에 대해 욕먹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에 쓴 말이다. 즉 피고에게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고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답변
그 말은 피고의 말이 아니라 인터뷰 제목이다. 인터뷰 제목은 인터뷰이가 정하지 않는다. 기자가 그렇게 해석했을 뿐이고 그 기사도 이 책이 위안부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서 욕먹을 각오를 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피고가 책 서문에 쓴 두려움이란 할머니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지원단체 비판에 대한 지원단체의 반발, 그리고 오랜 세월 지원단체의 인식을 공유해 온 언론과 일반인들의 반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정신대연구소 링크
검사(박유하가 제출한 배춘희 할머니 영상을 보여주고 녹취록을 읽고 나서 배할머니가 정신대로 갔었다는 기사를 보여주며)
박유하는 자발적으로 간 사람도 있다고 말하지만 배춘희 할머니의 경우는 정신대로 간 분이다.

답변
배 할머니는 스스로 직업소개소에 가셨다고 말씀하셨다. 사후에 나온 기자의 기사와 생전에 직접 말씀하신 본인의 목소리 중 어느 쪽을 신뢰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녹취록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검사
김부자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미성년자가 대부분인데 피고는 그 사실을 부정한다

답변
피고는 ‘미성년자가 적다’고 하지 않았다. 영화 귀향에 나오는 14,5세 소녀, 대사관 앞 소녀상이 대표하게 된 ‘어린 소녀’가 위안부의 중심은 아니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검사
젊은 역사학자들의 지적에 따르면 소설을 사용하는등 문제가 많다

답변
그 좌담회야 말로 문제가 많다. 예를 들면 ‘해방 70년’에 대해 자성적인 부분을 쓴 부분을 가져와 위안부할머니를 비판한것으로 오인하고 비난하는 식이다.

기초적인 오류와 곡해가 너무 많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을 썼으니 참고바란다: “젊은 역사학자들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에 답한다”

역사연구자이다 보니 이른 바 소설을 허구로만 생각하는 것이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소설이란 오랫동안, 말로 하지 못하는 ‘진실’을 담은, 고백의 매체이기도 했다.

위안부들이 ‘수천번의 성교’를 해야 했다고 쓴 것도 군인으로서 위안부를 옆에서 지켜본 일본인의 소설이었다. 검사는 일본인의 소설이면 무조건 일본중심주의일 것이라고 단정하지만,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르다. 피고가 굳이 일본인의 소설을 사용한 것은,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외치는 일본인을 향해 당신들의 선조도 이렇게 쓰고 있다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검사
고노 전 관방장관이 피고를 위한 성명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가 한국어판을 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은 사죄했다고 일본어판에 쓴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일 것이다.

고노담화는 강제성을 인정한 담화다.

답변
피고는 책에서 고노담화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고노 전 관방장관이, 피고의 책에 대해 잘 모르는 채로 피고에 대한 기소반대성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노 전 관방장관은 같은 자민당이지만 아베 수상의 발언도 비판해 온 사람이다.

검사
피고는 웃는 얼굴이 찍힌 위안부의 사진을 사용했다. 이 사진이 조선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답변
피고가 이 사진을 사용한 이유는 웃는 얼굴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얼굴을 찍은 기자의 심중이 사진에 붙은 설명에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는 위안부들의 웃는 얼굴에서 ‘망향의 념’을 읽어내고 있었다. 피고는 한일양국국민들의 상호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기자의 그런 감정 역시 당시의 일본인 역시 악마같은 일본인만 있었던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사용이었다. 또한 여러 정황상 조선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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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1심] 제2회 공판기

박유하

2016 / 9/ 20

두번째 형사공판이 열렸다.

지난 번에 마치지 못한 25개 항목을 둘러싼 공방. 그런데 사실 원고측이 문제삼는 ‘동지적관계’라는 단어는 지적된 곳 이외에도 여러번 나온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학자의 글을 인용한 부분마저 마치 내가 말한 것처럼 지적된 부분이 있다. 웃지 못할 아이러니. 고발자체도 그렇지만 이러한 부정확, 그에 따른 소모를, 나는 2016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현상으로 생각한다. 나눔의 집의 고발, 검찰기소, 그리고 학자들의 침묵과 가담이 보여준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1월에 나온 민사재판판결문은 여러 항목에 관해 ‘의견표명’이므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하고 있었다. ‘의견표명’이란 ‘사실적시’가 아니라는 뜻이고, 형법상 명예훼손은 ‘사실을 적시’해야만 해당된다. 그런 기준에 따라 민사판결은, 원고측이 지적한 항목 중 많은 부분에 대해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의견표명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사실이 나는 착잡했다.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저 도망치려는 변명으로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모든 학문은 사실 늘 가설일 뿐이다.

가설(고찰)이 옳은 지 여부(진실인지 여부)를 판단하려면 시간-세월이 필요하다. 물론 동시대/공간 안에서도 날카롭게 판단할 수 있는 이들은 늘 존재한다.

나의 책은 과거 20년 이상 한국사회에서 정착된 ‘상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다. 따라서 나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에서 생각한 ‘나의 진실’일 뿐이다. 공감해 주는 이들이 있을 경우 그 진실 공간이 넓어질 뿐.

검찰은 ‘가설’로서의 학술서에 대해  ‘사실’을 적시했다는 전제를 들이대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설정한 사실’과 다른 ‘사실’을 내가 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 이 역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근본적인 모순, 근본적인 뒤틀림. 학술서를 둘러싼 법정이란 그런 공간이었다.

판사가 제시한 다섯 개의 규칙에 기준해 봤을 때 나의 책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검사가 애써 내가 ‘사실’을 말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할 터이다. 동시에, 정해진 규정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무죄’라는 법정논리자체가,  내겐 또 하나의 근본적인 모순으로 느껴진다. 법은, 국가를 닮았다.

이하의 공방 역시 실제 이루어진 내용 뿐 아니라 미처 발화될 기회를 얻지  않은 생각도 포함되어 있다. 추가로 서면제출될 내용이기도 하니 실제공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속기록이 공개되겠으나 당일 메모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라 순서 등이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제1회 공판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제기된 검찰의 목소리는 대부분 이미 제기된, 학자를 비롯한 비판자들의 의견이었음을 밝혀 둔다.  그러니까 이 글은, 비판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응답에 앞선, 간략버전 글이기도 하다.

——

검사
박유하의 책은 위안부할머니를 매춘부로 취급했다. 그러니 ‘사실 적시’다. ‘사실’을 쓴 책이다

답변
나는 위안부를 ‘그냥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그들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 그건 말하자면 위안부의 ‘재의미화’ 작업이다. 그리고 그건 기존 지원단체가 주장한 ‘성노예’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똑같지 않다. 원래 ‘성노예’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운동과정에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말하겠다.
검사는 가라유키나 일본인위안부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가라유키 역시 대부분 속거나 팔려서 ‘매춘부’가 되었다. 1970년대초에 거장 이마무라쇼헤이 감독은 가라유키에 관한 다큐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https://youtu.be/NQgBqzuRU3k

조선과 일본인 위안부사이에 차이와 차별은 있었다. 오히려 그 차이를 보기 위해서, 나는 이들이 ‘여성’으로서 겪은 체험은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임을 말하려 했다. 그 차이를 부정하고 단순화시키는 것은 사태를 정확히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욕망이 시키는 일이다.

한반도에 살다가 나간 일본인 여성들도 많았다. 그것만 참조해도, 물리적 강제연행주장의 문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일부 학자 주장대로 식민지에서만 사기모집이 쉽게 가능하도록 했던 법체계가 존재했다면, 조선에서 떠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검사
박유하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매춘의 틀’ 에 있었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라는 말을 다수 사용했다. 박유하의 기술이 의견표명이 아니라 ‘사실’, ‘본질’을 말한 것이라는 증거다.

답변
내가 말한 ‘매춘의 틀’이란 본질이 아니라 형식을 지적한 말이다. ‘틀’ 혹은 ‘기본적으로’라는 단어 역시 본질이 아니라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검사
아편사용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는 ‘동지적관계’임을 지적한 것이고 사실이 아니다.

답변
아편사용문제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위안부문제를 다루는 애니메이션이 창작과정에서 사실과 다르게 왜곡했기 때문에 그러한 왜곡욕망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아편을 사용하면 ‘세상이 내 세상’이라고는 말 한 위안부의 증언을 인용했을 뿐이고, 그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방편임을 나는 강조했다. 그런데도 그러한 사실이나 느낌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은, 성과는 관계없는 ‘순수한 소녀’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소녀의 틀을 넘어선 위안부일경우 내치도록 만들 폭력적인 발상이다.이는 글자그대로의 매춘부는 배제하고 위안부담론을 구성해온 20여년의 세월이 만드는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인식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위안부의 감정을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위안부 차별이다. 검찰의 생각은, 자신들의 주장을 지키기 위해 나의 ‘생각’을 처벌하고자 하는 원고측 생각만을 신뢰한 결과로 만들어진 생각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관계는 설사 동등하지 않다 해도 남녀관계일 뿐 조선과 일본이 동지라는 의미의 “동지적관계”와 무관하다.

검사
‘창녀’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사실적시이고 명예훼손이다. 심지어 소설(따위)를 사용한다. (그러니 허위의 책이다)

답변
위안부가 공창제의 연장선상의 제도였음은 야마시타영애, 송연옥 등 여성학자는 물론 그 이외에도 이미 여러 학자가 지적했다. 증거자료로도 제출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창녀’란 본문 안에 ‘조센삐’라고 말한 일본군인이 사용한 단어를 알기쉬운 말로 바꾸어 인용한 것이고 일본군에게 ‘조센삐’란 ‘창녀’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그 부분을 들어 박유하자신이 그렇게 비난한 것처럼 말하는 일은 기초적 독해력 부족의 결과다.

검사
일본이 불법행위를 했음에도 박유하는 법적배상을 인정하지않는다. 자신의 해결방법을 주장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답변
나는 이 문제를 우선 여성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 식민지지배가 야기한 문제로 보았다. 그 때문에 1910년, 1965년, 그리고 1990년대를 고찰하고 이 문제에서 한일양국이 어떤 점을 봐야 접접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나의 생각을 말했다. 그건 나의 생각일 뿐이고 설사 문제가 있다 하더라고 명예훼손과는 무관하다.
또한 이른바 불법이라는 주장은 1990년대에 북한의 법학자가 말한 주장에 의존한 것이다. 그런 판단은 ‘국가가 강제로 끌고 갔다’, ‘학살 했다’는 이해에 근거한다. 그러한 전제자체가 옳지만은 않다는 것이 판명되었음에도 20년이 지나도록 위안부문제에서 기존 담론의 주축이 된 학자들이 여전히 이 주장에 의거하고 있다. 그것은 태만이자 커다란 기만이 아닐까.

검사
강제연행이 없었다고 하는데, 문서가 없다고 해서 납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가? 북한으로 납치된 일본인의 경우 문서가 없으니 강제연행이 아닌가?

답변
(당연한 일이지만 검사는 위안부문제 관련 기존 담론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었다. 동시에 너무나도 피상적인 담론을 원용하고 있었다. 정확히 보면 다른 이야기를 가져오고, 박유하가 옳지 못한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강조해 듣는 이들이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도록 유도했다.)

나는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강제연행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 더구나 식민지화된 조선반도에서는 ‘공식적으로’ 없었다고 했을 뿐이다. ‘공식적으로’의 의미는 동원을 요청했다해도 그것이 곧 납치나 유괴나 속임수를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본군은 업자의 계약서를 확인했고, 너무 어린 소녀가 왔을 때 되돌려 보낸 이야기가 위안부의 증언에 존재하고, 속아서 끌려 왔을 때 다른 직장에 취직시키도록 조치한 일도 있다. 처음에는 국가의 물리적 강제동원인것처럼 주장한 이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는 모집의뢰가 곧 강제동원인 것처럼 주장한다. 위선이자 기만이다. 결국 위안부에 관한 진실(역사)보다 ‘법적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 자신들의 생각(현재)을 더 우위에 둔 주장일 뿐이다.

검사
동지적관계라는 말은 모욕이다.

답변
책의 소제목에 ‘군수품으로서의 동지’라고 붙인 곳이 있다. 이 제목이 나의 의도를 말해 줄 것이다. 나는 ‘동지적 관계’라고 하는 말에 아주 낮은 차원의 의미만 부여했다, 다시 말해 당시 국적이 일본인이었다는 것을 환기시키려 한 단어이다. 전쟁상대국가였던 ‘적’의 위치가 아니었고 오히려 전쟁을 도울 것을 요구받은 존재였다는 말을 하기 위한 표현이다. 굳이 그 작업을 한 것은 ‘동지'(식민지화, 일선동조론, 내선일체)라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은밀한 차별과 국가의 국민동원에 따른 개인의 희생이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검사
위안부는 애국하지 않았다. 증거가 없다. 협력자가 아니다.

답변
당사자의 체험은 하나하나 귀중한 역사지만, 그것이 꼭 자신이 당한 일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학자가 하는 일은 수많은 사례를 보면서 말하자면 퍼즐을 맞춰가는 일이고, 그 퍼즐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을 때 보이는 것을 ‘구조’로서 설명한다. 따라서 위안부가 마음으로건 형식으로건 그것이 ‘애국’구조속의 일이었는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분석자의 의견일 뿐이다. 실제로 긍정적으로 내면화했다고 한 사람이 있다고 한 들 그것이 삶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연애도 마찬가지, 실제로 장교와의 관계는 위안부로 하여금 ‘지옥보다 나은’ 공간으로의 진입을 말해 주는 것이었고 실제로 부하들에게 정중한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을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나눔의 집 할머니중에도 ‘보국대’로 동원되었다고 말하거나 황국신민서사를 잘 외워 배급을 받았다고 말한 할머니가 있고 나는 그런 시대상과 정황을 ‘애국의 틀’로 표현했을 뿐이다. 또한 위안부를 ‘낭자군’으로 부르거나 위안소 이름을 ‘애국봉사관’이라고 붙여 당연시한 국가를 비판하기 위해 그런 단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것이 ‘강요된 애국’임을 말했다.

검사의 비난은 이러한 정황에 대한 무지 혹은 부정하고 싶은 의식이 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부정은 매춘에 대한 부정과 마찬가지로 위안부를 이중으로 배제하는 일이 된다. 나는 위안부할머니들이 당당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책을 썼다. 그런 구조 속에 있던 이들이 설사 단 한사람이라 할지라도.

검사
박유하는 소설을 사실처럼 사용한다.

답변
동시대 경험자의 소설에서의 역사적 기술은 때로 이른바 사료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문학연구자로서 이른바 사료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 텍스트를 사용했고, 실제로 작가의 실제체험과 가깝다는 사실이 확인된 이들의 작품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일본인들을 향해, 당신들의 조상도 이렇게 위안부문제의 비참을 기술했다고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다.

그런데도 검찰은 그런문맥은 완전히 무시하고 단어만 가져와 박유하 자신이 그렇게 비난의 뜻을 섞어 말한 것처럼 말한다. 서울대 김윤식 교수도 소설은 ‘증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때로 소설은 입으로 말하지못하는 일(증언)을 말한다.
http://m.hani.co.kr/arti/culture/book/298376.html#cb

검사
소녀상을 모독했다

답변
소녀상에 대한 언급 부분은 위안부가 아니라 지원단체에 대한 비판부분이다. 그들의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왜곡되었는지 말하려 한 것이다. 따라서 명예훼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검사
박유하는 사죄보상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박유하가 ‘동지적 관계’를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답변
(이부분은 검사가 공부가 부족했던 것 같다. 민사재판에서 원고측은 이렇게 말했었다. ‘박유하는 자신의 해결방법을 관철하기 위해 (법적책임 부정, 징병자와 같은 피해자로 인정하라는 요구), 동지적관계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지원단체는 정말은 명예훼손인지 여부에 큰 관심이 없다. 그저 박유하가 생각한 위안부문제 이해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점, 그에 따라 해결방식이 다르다는 점, 그 방식에 대한 사회적관심에의 경계심을 억압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는 고발장과 이후의 의견서에 명확히 나타난다. 언젠가 가처분재판과 민사재판에서 어떤 공방이 오갔는지를 연구해 주는 이들이 나타난다면 밝혀질 것이다. 이 소송이 무엇을 위한 소송이었는지.

——————————
준비공판을 포함하면 벌써 여덟번이나 형사법정에 섰다. 내겐 이 사태가,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사태”로 보인다. 우리는 아직 해방을 맞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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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1심] 제1회 공판기 – 아이러니의 한가운데에서

박유하

반 년 이상을 끈 준비기간이 끝나고, 첫 형사재판이 시작되었다. 예정했던 일은 아니지만, 어제 공판에 대해 간단히 써서 남겨두기로 한다.

아침 9시 반. 법정에 들어서니 언제나처럼 많은 기자들이 포진중이었다. 감상을 말해 달라고 했지만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압도적인 폭력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런 체험을, 나는 이 2년 2개월 동안 반복적으로 경험해왔다.

검찰은 모두진술에서 민사재판을 통해 익숙해진 원고측 주장을 반복했다. ‘박유하의 책이 위안부할머니들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렸다. 그러므로 처벌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 그리고 내가 그 내용을 ‘간접적으로 암시’했으므로 기소에 이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 고노담화, 유엔보고서, 미하원결의등을 들면서 (이 20년동안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 만들어낸 대부분의 문서가, 이제 나의 ‘범죄’를 중명하는 증거자료로서 법원에 제출되어 있다), 이미 ‘국제법을 위반’한 것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한 위안부문제에 대해 박유하는 ‘성노예’를 매춘부라고 말했고, 강제연행을 부정했으며 일본군과 동지적관계로서 자긍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고 했다. 나아가 일본어판이 한국어판과 다르다면서 나의 ‘감추어진 의도’를 향후 일본어판에 입각해 설명하겠다고까지 말했다.

검사는 얼마 전에 출간된 나에 대한 몇 권의 비판서들을 지참했었고, 실제로 공방 중에 자주 ‘제국의 변호인’등을 뒤적이며 책에 쓰여 있는 주장을 읽었다.

검찰주장이 끝난 후 판사가 쟁점을 정리한 파워포인트를 띄웠다.

이 재판은,
1. 사실적시인지, 의견표명인지
2. 사실 적시라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명예훼손이 되는지,
3. 고소인개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인지
4. 적시된 사실이 허위인지
5. 위법성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결론을 낼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나의 변호인도 모두진술을 했고,나도 발언권을 얻어 검찰의 기소장에 있는 ‘기초사실’에 대한 반박문서를 일부 읽었다. 이어서 검찰이 명예훼손으로 지적한 35개항목을 위 세 개의 카테고리별로 나누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나서 변호인이 35개 항목에 대한 반박에 들어갔다. 오후에도 네 시간을 더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0개항목까지 밖에 하지 못했다. 어쩌면 재판이 예정보다 길어질 지도 모르겠다.

이하는 검사의 주장을 들으며 생각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실제로 말할 수 있었던 건 극히 일부분이다. 내게는 발언권이 쉽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발언권이 주어졌다면 하고 싶었던 답변을 적어 둔다. 이하에 쓴 것처럼, 검찰의 주장이란 대부분 이미 나를 향해 쏟아진 비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검찰: 검찰은 원고측과의 화해를 이끌기 위해 조정절차를 밟았으나 피고인이 거부하여 기소에 이르게 되었다.
답변: 조정에서는 1)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 2) 2015년6월에 발간된 삭제판의 절판, 3) 일본어판의 삭제를 요구해 왔다. 삭제판은 원고측 손을 들어준 가처분판결에 따라 지적된 일부 표현을 삭제하고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될 것이 없고 특히 일본어판은 번역판이 아니라 독자적인 발간이므로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할 권리도 없다.

검찰: 조선인 위안부를 미군기지여성과 동일시 하고 있다

답변: 미군기지 여성도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을 요구중이다. 미군기지의 여성의 경우 아파트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애국’하는 댓가로서의 ‘국가’의 사기적 정황이 오히려 강해 보인다.

검찰: 자발적 매춘부라고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책에 쓰여 있지 않느냐, 더구나 앞뒤에 근거가 없다.

답변: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에 따옴표가 쳐져 있는 이유는 이 인식이 인용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위안부를 매춘부라고만 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자발성의 구조’라는 소제목을 붙여 논하고, 그들의 생각을 비판했다. 그리고 뒤에서 앞의 내용을 종합정리하는 부분에서 그 개념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는 책을 처음부터 문맥을 놓치지 않고 읽은 사람이라면 무리없이 연결해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이 부분은 원래는 2011년에 일본에서 연재하면서 일본어로 먼저 쓰인 부분이다. 그러한 맥락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이 말 앞에 ‘일본의 부정자들이 말하는’이라고 넣었으면 오해의 여지가 적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알기 쉽게’ 쓰지 않았다고 해서 고발의 이유가 되는가.

검찰: 박유하의 책은 피상적으로 보면 문제없어 보인다. 아주 면밀하게 ‘반박하지 못하는 구조’를 만들어 두었다. 수많은 역접표현으로 대립되는 의견을 써 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은폐된 범죄의 책’이다.

답변: 이 주장은 비판자들이 한 얘기다. 하지만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이 나란히 있는 것은,
첫째로 이 책이 하나의 독자를 위한 책이 아니며,
두번째로 그런 다양한 체험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세번째로 이 책이 하나의 팩트를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역사서의 방법이 아니라 과거의 여러 ‘사실’과 그 후예들이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모순이 아니라, 주어진 사실 중 하나만을 강조해 온 기존 ‘역사’기술 방식과 그 이데올로기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당시를 살아간 이들과 어떤 방식으로 마주하면서 이해하며 받아들일 것인지를 모색한 책인 결과인 것이다. 그런 방식에 반발하며 모순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쪽인지를 성급하게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시키는 일이다. 하나의 사실만을 말해야 하는 곳이 법정이라면, 바로 그 때문에 이 책을 법정으로 가져와서는 안되었다.

검찰: 그러나 경북대 법학자인 김창록 교수등은 2016년 2월 한겨레신문에서 이 책이 ‘예외의 일반화, 자의적인 해석, 과도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답변: 내가 채택한 내용이 비록 전체 구술에서 숫자가 적을 지언정 예외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과거에 관한 구술이 오히려 현재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구술사연구의 첨단인식이기도 하다. 실제로, 김교수가 말하는 ‘예외’가 뒤로 갈수록 적어졌다는 것도 그것을 방증한다.

더구나 증언집 전부를 통털어 보았을 때 강제연행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다. 그런데도 그런 이들의 담론을 가져와 ‘강제연행’이라고 주장해 온 것이야말로 ‘예외의 일반화’아닌가?

또한 설혹 소수였다 해도 그것을 이유로 부정되어야 한다면, 실제로는 증언자 중 소수인 강제연행설을 일반화해서 주장해 온 근거는 무엇인가? ‘자의적인 해석’ 이란 원고와 검찰과 비판자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이며, ‘과도함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타인의 주장에 대한 과도한 월권행위다.

검찰: 또한 젊은 역사학자들의 비판에서 한 연구자는 박유하가 비난받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런 안전장치가 이 책에는 다수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도 그렇지 않다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답변: 내가 위안부할머니를 모욕할 생각이었다면 왜 직설적으로 쓰지 않았겠는가? 원고와 검찰은 보이는대로, 쓰여 있는대로 읽지 않고, 의도를 의심하면서 상상을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 왜 쓰여있지 않은 내용을 굳이 읽으려 하는가? 비판자들이 말하는 ‘정치적 의도’를 먼저 읽어내면서 그것을 위한 기술이라는 의심을 한 결과일 터인데, 그건 과거에 사상범을 잡아내면서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자백하도록 만든 태도와 똑같지 않은가?

검찰: <제국의 변호인>이라는 책에 글을 실은 역사평설가에 따르면 ‘박유하는 펜대가 두 개다, 일본을 향한 펜대는 뭉툭하고, 할머니나 조선을 향한 펜대는 뾰족하기 그지없다.’

답변: 역사가도 아닌 역사평설가의 난삽한 의견이 범죄증거로 주장되는 정황에 슬픔을 느낀다. 일본을 향한 나의 비판이 너그러운지 여부는 일본인들이 판단할 일이다. 오히려, 엄중한 비판이라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았고, 위안부문제를 식민지문제로 가져왔다는 이유로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한국에 대한 비판이 한국인에게 불편할 수 있으나 그것은 개인관계가 그렇듯 국가관계도 자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가치관이 만든 일이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시간이 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설사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법정에서 문책될 일인가.

검찰: 일본에 법적책임을 물어야하는데 박유하의 논법은 주어를 생략하는 등 기술을 교묘하게 해서 어떤 책임인지를 불분명하게 만들면서 쟁점을 흐리고 일본의 책임을 부정한다.

답변: 그렇게 보이는 건 오로지 ‘법적책임’만이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이 만드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동안 나를 비난했던 사람들이야 말로 내가 ‘일본의 책임을 부정했다’는 말을 퍼뜨려 한국인들의 비난을 야기시켰다. 이것이야 말로 나의 말을 왜곡해 ‘쟁점을 흐린’일일 뿐 아니라 아주 비겁한 일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데서 오는 결론인데, 그것은 법정에서 문책될 일인가.

검찰: 위안부를, 가난을 이유로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여성으로 취급했다. 부정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실로는 옳을 수도 있다’고 했다. 반인륜적전쟁범죄로 인정된 위안부문제를 그렇지 않은 것처럼 왜곡했다. 오카모토 유카에 의하면 일본우익이 이 책을 인용하면서 위안부는 동지적 관계였다고 말한다.

답변: 내가 책에서 비판한 양극단 사람들은, 책을 출간한 이후에도 각각 왜곡했다. 한 쪽은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말과 똑같은 것처럼 이용하고, 또 다른 쪽은 내가 한 말이 자신들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왜곡하면서 내쳤다. 내가 보기엔 그 양쪽 다 기존 생각을 지키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나의 책이 검사가 말하는 그런 책이었다면, 발간 직후 긍정적으로 다루어 준 한국신문들의 서평들은 잘못 읽었다는 것인가. 위안부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나의 책을 있는 그대로 읽어 주었다.

검찰: 위안부문제를 홀로코스트와 비견한 것을 비판한 것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한 것과 마찬가지다

답변: 유태인과 독일인의 관계는 조선인/일본인과의 관계와 같지 않다.

검찰: ‘창기’, ‘매춘부’란 돈받고 몸파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과 위안부를 동일시하고 자발성을 강조했다. 가라유키상의 후예라는 말로 자발적으로 몸팔러 가는 이와 동일시했다. 가라유키는 부모가 팔았다는데 수락서도 있었다 한다. 조선인은 그렇지 않았다.

답변: ‘일본인 창기’와 고통이 같았다는 이야기는 ‘창기’보다 ‘일본인’에 방점이 있는 표현이다. 위안부는 일본인이라는 점, 기본적으로 신체를 착취하는 행위는 자발이든 아니든 고통스럽다는 의미다. 조선인도 기본적으로는 수락서가 필요했다. 업자가 위조하거나 호적을 속이거나 한 경우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가라유키라는 말을 쓴 건 첫째 일본군위안부의 첫번째 대상은 일본인이라는 점, 국가의 세력확장에 따라 이동당한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굳이 일본어인 가라유키를 가져 온 건 그래서다.

검찰: <제국의 변호인—박유하에게 묻는다>에 글을 쓴 김수지도 제국의 위안부가 궤변이라고 한다. 모순적표현을 사용한다고. ‘안전장치’를 사용해 독자를 우롱했다.

답변: 우롱한다고 생각하는 건 비난의 대상으로 읽고 싶은데 이 책이 그렇게만 읽을 수 없는 책인데서 오는 짜증이 만드는 일일 것이다.

검찰: 동지적 관계로서 애국적 자긍심이 있었다는 말에 할머니들이 가장 분노한다

답변: 동지적 관계란 가장 얕은 수준의 구조를 말한 것으로 제국의 일원으로 포섭된 상황을 말한다. 그 틀에서 전쟁수행을 돕는 것으로 의미화된 정황을 말한 것이다. 그 안에서 어쩌다 존재한 남녀의 친밀한 관계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 즉 민족아이덴티티로 만난 것이 아니라 남녀로서, 즉 성적 아이덴티티를 중심으로 한 만남이다. 또한, 멀리 이동 당해 외로웠던 이들끼리의 환경적 혹은 계급적 의식이 만든 일이기도 했다. 애국을 강요당했지만, 죽을 때 천황폐하만세를 부르는 것보다 정말은 어머니를 부르고 싶었다는 일본인병사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국가가 강요한 애국의 틀안에 있었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물론 실제로 얼마나 내면화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안이하게 추정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나는 눈에 보이는 텍스트의 존재를 지적하고 분석했을 뿐이다.

검찰: 애국적 자긍심이 있었다는 근거가 없다

답변: 예를 들면 국방부인회 띠를 두르면 기뻤다는 기술이 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원고나 검사의 시각같은 이 사회의 매춘차별이다.) 애국의 틀 안에 놓일 때 비로소 한사람의 국민으로 인정받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 것이고, 국가는 그것을 이용했음을 말했다.

검찰: 일본어판에서 다른 말을 한다. 박유하의 의도를 다음에 증명해 보이겠다.

답변: 다른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건 첫째, 처음부터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둘째, 독자가 다른 이상 그 독자를 위해 표현이나 내용을 조금 정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일본에 더 필요한 말을, 동시에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표현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규탄의 언어가 타자에 대한 설득에서 효과적인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의 가치관이 만든 일이다. 그런데 왜 일본어판이 여기서 거론되어야 하는가?

검찰: 박유하의 책을 옹호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지적한 35개 항목에 대해 반론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답변: 그건 첫째 그저 어처구니 없는 오독이거나 거짓말인 경우가 많아 대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은 나 하나로 충분하고, 이미 2년 이상 해 온 일이다.

둘째, 실제로 옹호자들이 반론하지 않은 부분은 비판서에서의 비판이다. 이 역시 그 작업이 굳이 그럴 만한 생산적 담론이 못된다는 것을 옹호자들이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 명예훼손과는 관계없는 지적이고, 나아가 일일이 대조검증하지 않으면 나조차 그 왜곡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한 곡예적인 왜곡과 거짓말이 많다. 누가 일부러 시간들여 그 작업을 하겠는가?

나조차도 여지껏 의욕과 여유가 없어 못했지만 이런 식으로 검찰이 그들의 말을 검찰의 주장으로서 사용하고 있으니 이제 해야 할 것 같다.

검찰은 명예훼손과 상관이 없는 부분을 가져와 나를 어떤 의도가 있는 마녀로 몰고 있다. 이는 민사재판부가 그랬던 것처럼 재판부와 국민을 향해 (검사는 내내 기자들의 얼굴을 보며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에서 하는 일이다. 명예훼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장에도 이렇게 대답해 나가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법정에서 이야기되는 일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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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검사도 변호사도, 학자와 기존 보고서들의 견해를 ‘대변’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 논문이나 보고서를 만든 이들은 법정에 없다. 완벽한 대리싸움임에도 학자들은 법정에 아무도 없다. 그저 그들과 다르게 생각한 내가, ‘피고인’으로서 법정에 불려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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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1심] 박유하, 검찰기소장 반박문

1. 서론

(1) 검찰은, ‘피고인이 이 사건 서적을 통하여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① 위안부를 일본국에 애국적 자긍적 협력자로 표현하였고, ②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 표현하였으며, ③ 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을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을 부정)함으로써 고소인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기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먼저, 뒤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첫째, 피고인은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적도 없고,
둘째, 피고인은 이 사건 서적을 통하여 검찰이 말하는 의미로는
① 위안부를 일본국에 애국적 자긍적 협력자로 표현한 바도 없고,
②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 표현한 적도 없으며,
③ 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을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을 부정)한 바도 전혀 없습니다.

(2) 피고인을 기소한 검찰의 공소장은, <기초사실>과 <범죄사실>, 그리고 고소인측이 지목하고 민사재판부가 2015. 2.에 그 일부를 인정한 34개 항목에 1항목을 추가한 <범죄일람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기소는, 책의 전체적인 그리고 부분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고소인측의 웃지 못할 오독(예를 들면 “해방 70년“이나 지났으니 일제시대를 다시한번 돌아보자는 제언부분을 위안부할머니에 대해 말한 부분으로 오독, 위안부할머니를 비난한것처럼 간주)에 더해 곡해로 가득한, 악의적인 고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 어이없는 기소입니다.

(3) 피고인은 이 서면을 통하여, <범죄일람표> 각 항목을 구체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재판부의 공판 준비명령, 즉 ‘위법성 조각사유와 관련하여 피고인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무엇인지, 즉 피고인이 어떠한 자료를 참조하고, 어떠한 취재와 조사 등을 실시하였으며, 어떠한 연구과정을 거쳐서 이 사건 서적을 서술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것’이라는 명령에 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자료집’은 그 ‘증거설명서’와 함께 따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4) 이하에서는 <범죄일람표> 각 항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이전에, 우선, 공소장 본문의 <기초사실>, <범죄사실> 부분을 반박합니다.

2. 공소장의 <기초 사실>에 대하여

(1) 우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검찰이 <기초사실>에 설시한 내용을 보더라도, 이러한 자료가 어떻게 활용되어, 피고인이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였다는 것인지, 그리고 피고인의 서술부분(즉, <범죄일람표>기재 각 항목의 서술부분)이 범죄일람표 <비고>란의 내용, 즉, 피고인이 이 사건 서적을 통하여 ① 위안부가 일본국에 애국적 자긍적 협력자로 표현하였고, ②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 표현하였으며, ③ 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을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였다는 것인지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 검찰은 피고인의 <범죄>의 근거로 먼저 <기초사실>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기초사실이 있는데 박유하가 엉뚱한 거짓말을 하였으니 명예훼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검찰이 말하는 <기초사실>로는, 피고인이 이 사건 서적을 통하여 ① 위안부가 일본국에 애국적 자긍적 협력자로 표현하였고, ②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 표현하였으며, ③ 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을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였다는 점을 뒷받침할 수 없습니다.

(3) 한편, 검찰은 학계에서 어떤 논의가 있는지도 전혀 조사하지 않고, 고소인측의 왜곡된 의견을 그대로 베꼈을 뿐입니다

(4) 이하 검찰이 언급한 자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가) 고노담화

1) 검찰은 ‘피고인이 고노담화를 부정한 것’처럼 고노담화를 기초자료로 제시합니다.

① 그러나 피고인은 고노담화를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높이 평가했습니다.(책 173면-176면 참조)

② 그리고 피고인은,
“고노담화가 인정한 것은 우리의 이미지-`총칼로 무장한 군인이 강제로 끌어갔다`는 `강제성`은 아니다. 요청은 군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업자들이 한 감언이나 강압이라는 제3의 강제성만을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고 요청을 한 주체가 군이니,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일의 간접적 강제성에 대해서도 총체적 책임을 지겠다고 한 것이 고노담화다”라고 전제한 후(175면 7줄-12줄), “일본은 조선의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욕을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 것이 ‘조선반도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던’ 결과. 즉 식민지배라는, 정신적 강제체제하의 일이었다고 인정했던 것이다”라고 서술하였습니다.(175면 14줄-17줄)

`또한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성차별과 계급차별 이상으로 ‘식민지배’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었고, 고노담화는 그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응답한 담화였다”고 평가하였던 것입니다.(176면 3줄-6줄)

2) 그럼에도 검찰이 ‘피고인이 고노담화를 부정한 것’처럼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첫째, 피고인이 ‘일본의 양심으로 여겨져 온 고노담화(그나마 고노담화가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위안부 문제 책임을 부정하는 일부 일본인들이 고노담화를 폐기하라고 요구한 최근 몇 년 전입니다)를 박유하가 부정한 것 같은 인상을 재판부 및 일반인에게 심어, 책을 읽지 않은 이들을 향해 피고인에 대한 나쁜 인상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 (책을 읽었을 경우입니다만) 피고인의 정확한 고노담화해석을 완전히 무시하고, ‘고노담화가 물리적 강제성을 인정한 것’처럼 말해 온 지원단체 등 관계자들의 그간의 주장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검찰이 책을 읽지 않았거나, 아니면 20여년의 기존 인식에 갇혀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성이 결여되고 만 결과라 하겠습니다. 참고로, 기소 이후 고노전관방장관이 기소에 반대하는 일본지식인의 성명에 서명한바 있다는 사실도, 피고인의 해석이 정확했다는 사실과 피고인의 책이 검찰이 말하는 식의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합니다.

3) 고소인측이나 검찰은 이런 부분을 무시하고, ‘피고인이 한국을 향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움을 표했던 우리 안의 책임자(대부분의 업자와 유괴범, 그리고 여성들을 보호하지 못했던 가족과 이웃)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고 했던 서술 부분’만을 떼어내어, 그 서술 부분에서 ‘피고인이 일본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해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피고인은 ‘이 책 중 일본을 향해 일본의 책임을 서술한 부분’에서 이를 충분히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향해 한국의 문제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 일본에 대한 비판이 없다고 억지를 부린 셈입니다.

(나) 유엔 등 해외에서의 인식

검찰은 ‘피고인의 인식이 해외의 인식에 반하는 것’처럼 말하기 위해, 유엔보고서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증거자료로 고소인측이 제출한 자료를 그대로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유엔 등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좀 더 면밀히 검토하여, ① 이 자료들 대부분이 지원단체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 ② 그러나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서문에 ‘세계의 상식에 이의제기를 하는 셈’이라고 썼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역시 피고인이 ‘지원단체 등이 한국에 유리한 부분만 전달한 결과, 그동안 한국에서는 한국의 인식이 전부 맞는 것으로만 인식된 유엔보고서’에 반하는 인상을 만들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쿠마라스와미 보고서(1996/1998)

검찰은 1996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일본에 대해 행한 권고만 쓰고 있고, 이후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의 권고는 이후 대부분 실현되었습니다. 즉, 정부 차원의 손해배상(1997년 일본 정부가 주도한 아시아여성기금발족, 보상금 지급), 일본 정부의 문서 및 자료 공개(종군위안부 자료 집성 5권으로 출판하고, 인터넷 공개), 서면에 의한 공적인 사죄(기금 전달시 총리의 편지로 표현), 역사적 사실의 교과서 게재 등입니다.

1991년에 문제로서 발생한 위안부문제에 대답해 1997년 시점에서 일본 교과서의 대부분에 위안부 문제가 실렸었습니다. 다시 교과서에서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사라지거나 수정되기 시작한 것은, 그 기술이 <강제연행>에 치중되어 있어 그러한 기술에 반발한 이들이 반대 운동을 펼치게 된 이후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을 지원단체와 고소인측이 인식하지 못했거나 말하지 않은 탓에, 여론과 국민이 오랜 세월 사실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민사재판부나 검찰은 이러한 부분을 충분히 검토했어야 마땅함에도, 피고인의 반박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입니다.

일본이 이행하지 못한 것은, <범행자 확인 및 처벌>부분입니다. 그러나 누구의 어떤 죄목을 범행자로 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하려면 사태를 우선 정확히 봐야 합니다.

피고인이 시도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음에도, 고소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방식만을 옳다고 주장하고,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에 대한 국가권력을 동원한 입막음’에 나섰습니다.

또한 검찰 역시, 고소인측과 똑같이 책을 왜곡하여 발표함으로써 전국민의 비난을 야기하도록 하였습니다.

2) 맥두걸 보고서

맥두걸 보고서는 지원 단체의 법적책임 요구 주장에 손을 들어 준 보고서입니다. 이 맥두걸 보고서는 ‘지원단체가 주장한 <강제연행> 주장’에 기반을 둔 보고입니다. 이에 대하여 피고인은 이 책을 통하여 그런 인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서술하였던 것입니다.(제1부1장 `강제연행과 국민동원 사이`)

3) 미하원의 결의/유럽 등 타국 의회의 결의

2007년에 나온 미하원의 결의는, 시간이 흘러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 결과 위안부 문제의 기반이 강제연행이 아니라 인신매매임을 인식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강제낙태 등을 일본군의 소행으로 말하고 강조해 보수의원들까지 설득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여성의 증언에 자극을 받은 유럽이나 캐나다 의회 등도 이 결정을 그대로 이어갔던 것입니다.

이에 피고인은, 이러한 결정이 ‘네덜란드인에 대하여 행해진 일과 조선의 위안부를 대상으로 행해진 일의 차이’를 보지 못해 일어난 일임을 서술한 것입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인에 대한 주동자는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도 서술하였습니다. 동시에 미하원의 결의가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을 높이 평가한 사실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원단체는 이러한 사실을 한국 사회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4) 유엔인권이사회

검찰은 이 외에도 유엔인권이사회의 보고서나 권고를 <기초사실>로 언급합니다.

그러나 유엔인권이사회나 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정대협의 전 대표들(정진성 서울대 교수, 신혜수 이화여대 교수)이 각각 이사나 위원으로 활동해 왔다는 사실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여성들의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은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지원단체의 목소리가 이러한 보고서들에 검증 없이 반영된 배경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5) 검찰이 제시하는 <기초사실>은, 검찰이 결국 일부 학자나 지원단체의 기존 인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피고인의 책이 그러한 기존 인식에 대한 재검증을 시도한 책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하여 기소에 이른 것입니다. 새로운 학설이 기존학설과 다르다는 이유로,또한 국가가 기존학설만 믿었다는이유로 새로운 학설을 입막음하는 사태를 개탄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언론이 공식적으로 인신매매 사실을 인정하고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일입니다.

피고인은 이런 사태가 일어난 원인을 해명해 보려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피고인의 책은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갈등의 원인과 배경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 위안부라는 대상에 대해서도 연구하게 된, 학제간 연구, 융합학문서입니다. 일부 역사학자나 법학자들이 피고인의 책을 폄하하는 것은, 이 책이 자신들의 학문체계나 이론을 넘어선 이론과 체계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시도는,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실을 제대로 알고 그에 기반한 비판과 요구를 하여,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평안을 바라는 피고인의 마음이 만든 집필인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인식으로 오해가 깊어져 한일관계가 날로 험악해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또헌 그러한 사태가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 데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일본전문가/학자로서의 양심과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이 시킨 일이기도 합니다.

3. 공소장의 <범죄 사실>에 대하여

(1) 검찰이 피고인에게 <범죄>라 하는 것은, <일본군에 애국적 협력자였음을 표현><위안부 동원의 비강제성 강조(강제동원 또는 강제연행 부정)><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임을 표현>했다고 하는 3개 사항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허위사실을 적시>했으니 명예훼손이라는 것입니다.

(2) 검찰의 이러한 기소(고소인측의 고소)는 ‘잘못된 독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라유키상의 후예. 위안부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라는 문장을, 검찰은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임을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앞뒤를 보면, 피고인은 가라유키를 매춘부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피고인은 가라유키를 <가난해서 팔려간 소녀><국가의 세력확장에 따라 이동/당한 여성들><일본인 여성>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매춘이 아니라도 그런 식으로 <가난해서 이동당한 일본인여성들>은 부지기수였으며, 조선인 위안부란 식민지화로 인해 그러한 틀 안에 들어가게 된 존재라는 것이, 피고인이 `가라유키상의 후예`라는 말에 담은 뜻입니다. 그녀들은 매춘이 아니고도 여러 직종에 있었으며, 매춘업은 어디까지나 그 일부일 뿐이므로 `가라유키=매춘`이 되지도 않습니다.

피고인은 <가라유키의 본질은 매춘>이라고 쓰지 않았고, 따라서 <위안부의 본질이 매춘>이라고도 쓰지 않았습니다. `가라유키의 후예`라는 표현으로 박유하가 무엇보다 강조하고자 한 것은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입니다. 일본군의 의뢰가 먼저 있었고 실제로 동원대상이 되었던 건 일본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한 위안부 제도에서 국가가 자국민을 <강제연행>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있을 수 없었고, 식민지화되어 <일본제국>의 일부가 된 식민지에서도, <연행>이란 <공식적으로> 지시될 수 는 없는 일이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검찰의 이 지적은 지극히 자의적인 오독일 뿐 아니라 악의적 허위라 하겠습니다.

(3) 그럼에도 조선인 위안부에게 <물리적 강제>를 가한 것은 군대이기 이전에 업자들이며,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차별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폭행을 금지했다는 점, 업자들에게 계약서를 확인해 본인 혹은 부모의 의사를 확인하도록 했다는 점 등을 따로 상세하게 밝히겠습니다. 이는 기존 연구자들이 지적하지 않았음은 물론, <제국의 위안부>에도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에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해 피고인이 이 책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시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특히 후반에는 <애국을 종용>하는 시대를 살았고, 따라서 <강제>하지 않고도 모집이 가능했으며 여성들을 속이거나 강제한 주체는 주로 업자였음을 설명할 것입니다.

(4) 피고인이 <애국>을 말한 것은, ‘위안부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당시 식민지의 정황을 아는 일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입니다.
식민지에 대해서도 일본이 애국을 강요하는 과정이 있었고, <일선동조론>이니 <내선일체>결혼 등은 그런 시대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 시대의 한 가운데에 위안부도 놓여 있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본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여성들이 그런 슬픈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요한 일본에 대해 반성과 책임을 촉구하기 위함입니다.

위안소와 공창제와의 관계 등에 대한 언급은 다른 학자들, 특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적지 않습니다. 자료로 제출하겠습니다.

피고인의 인식은 주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집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고, 그 골자는 이미 10년 전에 <화해를 위해서>라는 책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문화관광부의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도 발간 직후에 여러 매체들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인터뷰와 서평을 게재한 바 있습니다. 검찰이 말하는 것 같은 책이었다면 고발이전에 언론에 의해 비난받았을 것입니다.

(5) 이하 각항목에 관해 앞뒤 맥락을 살펴봄으로써 피고인의 책은, 검찰이 말하는 것과 달리,

(가)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는커녕 반복적으로 성노예적 측면이 있음을 기술했다는 점, 따라서 <위안부의 본질은 매춘>이라고 쓰기는커녕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향해 비판한 책이라는 점,

(나) 원고로 기명된 위안부할머니들이 직접 수류탄을 나르거나 일본군의 빨래를 한 적이 없다 하더라도, 당시의 위안소가 <애국><고향><평화>라는 이름을 달았던 데서 위안부제도가 <애국>의 틀에 편입된 제도였다는 점, 당사자들이 그러한 구도를 알았거나 믿었는지 여부를 떠나, 위안부에게 요구된 역할이 그런 것이었다는 것이며, 피고인이 그런 정황을 굳이 설명한 것은,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정책과 사고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희생구도에 들어가기 쉽게 만든 국가시스템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 따라서 일본에 대한 책임을 기존의 한국의 주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묻기 위한 것이라는 점, 결론적으로 원고나 검찰이 말하는 것처럼 <위안부가 일본에 애국적 협력자>라고 비난한 것일 수 없다는 점,

(다) 결국 피고인이 기존 <강제성>인식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강제성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눈에 띄는 강제성’ 이상으로 ‘교묘한 강제성—<구조적 강제성>’이라고 이미 피고인이 10년 전에 자신의 저서에서도 기술한 개념을 더욱 명확히 강조해 일본의 책임을 정확히 물으려 한 책이라는 점

등을 밝힐 것입니다.

(6) 피고인의 책은 기존 연구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일본에 책임을 물은 책이며, 그를 위해 한국/일본 사회에 이 문제에 관한 공통인식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임을 밝힐 것입니다.

4.

전국민의 지지와 후원을 받아온 지원단체가 한 학자의 책을 고발한다는, 결코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면, 검찰은 중립적 입장에 서서 고소인측 주장도 충분히 재검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아무런 재검증 없이 기존 인식에 얽매여 기소에 나섰을 뿐 아니라, 피고인이 `자발적 매춘부`라고 썼다고 보도 자료에 써서 배포한 일은,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피고인을 전국민의 지탄을 받도록 한 일은,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검찰이 국민의 명예와 인권을 심각하게 훼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형사1심] 제1회 공판기일 제출 의견서 (박유하 변호인)

전문 다운로드 : 형사소송 제1회 공판기일 제출 의견서 (박유하 변호인)

검찰은 범죄일람표 1번 내지 35번을 피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의 증거로 제시하였는 바, 피고인은 이하에서 위 각 범죄일람표의 기재내용이 ① 피고인 개인의 ‘단순한 의견표명’에 불과하며 ② 설령 위 내용이 의견표명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위 부분에 대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해석을 통해서도 구체적 사실을 표현한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피고인은 이 사건 도서에서 위안부는 성노예였으며, 일본군의 강제연행이 있었으며, 일본국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책임이 있다는 점 등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바,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가 성립하지 아니하거나,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여 피고인은 무죄임에 대하여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인포로심문 조서

와세다대학의 Toyomi Asano 교수가 중요한 자료를 발굴했다는 기사가 오늘아침 마이니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국언론도 많이 보도한 듯 한데,아사노교수의 허락을 얻어 원자료를 번역한 내용을 올려둔다.

하나하나 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나로서는 특히 18번 위안부문제 관련발언과 일제시대 종식이후에 대한 동시대인의 인식이 드러나는 25번,26번이 흥미로웠다.

사실,`여성들을 강제로 끌어갔다면 남자들이 앉아서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건 오늘날도 가끔 듣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말을 동시대인의 입으로 듣는 건 묘한 긴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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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주: PW는 Prisoner of War (포로), PsW 는 Prisoners of War (포로들), Allied 는 연합국으로 번역하였으며, conscription 은 경우에 따라 징용 (업무의 경우), 징병 (군의 경우), 또는 징발 (위안부의 경우) 으로 번역함. MOO는 Military Operation Officer (군 운영 장교) 로 번역함)
국립 ARC 로부터 재발급
기밀문서
군 정보국
포로 및 물자부
보고일 : 1945년 4월 24일
(포로)심문일: 1945년 4월 11일
(포로)번호 및 계급: 41J-1150, 민간인, 이복도
14J-185, 민간인, 백송근
41J-393, 민간인, 강기남
WME
한인 해군 민간인 3명에 대한 종합 보고서,
리스트 78번. 45년 3월 28일 “한국인에 관한 특별 문의사항” 에 대한 회신
1538

서두
심문자에 의해 질문받은 약 100 명의 한국인 포로들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반일감정을 공유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기회주의자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 3명은 자신의 증언에 있어 신뢰할 만한 매우 진실한 증언을 보여준다. 한 포로에 대하여 별도 보고서가 만들어질 것이고 다른 두명은 추가의 심문이 필요하지 않다.

설문지
이 보고서는 45년 3월 28일의 “한국인 심문” 리스트 78번에 기초하였다. 단락 번호는 이 리스트의 질문 번호에 상응한다.

2. 지방정부의 한국인:
마을의 우두머리는 항상 한국인이다. 우두머리는 그의 정직함과 리더쉽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선출된 연장자이다. 일본인은 이 선거를 조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 관청의 관리장:
“면” 대부분의 사무소장은 한국인이다. 10개중 2개 정도가 일본인이다.
“군” 사무소의 장은 보통 한국인이다. “전라북도” 에는 14개의 ‘군’ 이 있고, 1942년 기준 9개소의 장은 일본 정부에 의해 임명된 한국인이다. (상세 정보 없음)
“읍” 사무소의 장은 주요 인구 구성에 따라 일본인과 한국인 양쪽 모두가 있다.
“부” (시) 의 장은 언제나 일본인이지만, 이외 직책은 한국인일 수 있다.
“도” 지사는 대개 일본인이다.
1942년, 전라북도, 충청북도, 강원, 황해도의 도지사는 한국인이었으며,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다.
1940년 이래 정부 관리 직책을 가진 한국인 숫자 변경은 알려진 바 없다.

3. 한국 남성은 1942 이래 일본에서 일을 하도록 징용되어 왔다. 그들은 면사무소에 의해 통지되었다. 한번에 300 에서 1,000 명이 징용되어 일본에 이송되기도 했다. 이런 이송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93 가옥이 있는 한 마을에서는 30명의 남성이2년의 기간 (1942-44) 동안 징용되었다. 징용 기간은 2년이지만, 많은이들이 3년 또는 그 이상 기간동안 체류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 포로는 석탄과 철광 광산 및 비행장 건설에서 일하던 한국인들과 여러 개인적 연결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광산의 가장 깊고 뜨거운 곳에서 일하는 등 가장 열악한 노동이 요구되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는 일당 ¥ 3.50 을 받았고 그중 ¥ 0.10 은 우편 적립으로 공제되었다. 그들에게는 음식과 숙소가 제공되었다. 징용자들의 가족을 위한 보조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그들의 집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친나이 카라푸토 (Chinnai, Karafuto) 탄광에서는 현지인과 일본인 노동자는 일당 ¥ 7.00 에서 ¥ 24.00 을 받았으나, 징용자들은 고정 급여만을 받았다. 통신은 허용되었으나 모든 서신은 검열되었다.
이들 한국인들에 대한 처우는 연합국 포로들보다 열악했다. 일본에 살던 포로는 요시마 후쿠시나켄 (Yoshima, Fukushina Ken, 역자주, Fukushima Ken 일수 있음.) 근처의 탄광으로부터 3명의 한국인이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거기엔 500 징용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들 중 한명은 그가 아키라(Akira) 로 데려가 한 탄광에서 일하게 했지만, 그가 가족에게 쓴 편지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요시마 (Yoshima)로 끌려가 15일간 고문을 받고, 타이라 (Taira) 에 수감되었다. 다른 2명은 잡히지 않았다.

4. 한국인은 1942년 이후 중국 북부, 만주 또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한 포로는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일하도록 징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두명은 만주로 보내어진 징용자는 없었다고 한다.

5. 징용을 거부하는 자는 투옥되었고 그의 가족은 식량을 빼았겼다.

6.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사진과 서명이 부착된 신분증을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

7. 농민들에게는 하루 2 합 5국 (*역자주: 2 合5局,2 go, 5 shaku,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15 리터에 해당) 의 쌀이, 그리고, 사무 직원에게는 하루 2 합 4국 (*역자주: 2 合4局,2 go, 4 shaku =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33 리터에 해당)의 쌀이 할당되었다. 추수 전, 정부 관리는 곡식을 검사하고 추수량을 예상하여 그해 농부와 그 가족 할당량을 공제한다. 나머지는 정부 관리에게 판매해야 한다.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많을 경우 농부에게 행운이고 여분의 쌀을 숨길것이지만,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적을 경우,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양에서 빼내 요구조건을 맞춰야만 한다.

8. 한국인들은 일본인 농민들은 그런 배급할당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대단히 분개하고 있다. 농민들이 반쯤 굶주리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냥 열심히 일한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1942년 전라북도의 쌀 농사는 흉년이었다. 같은 이유로 1945년의 쌀농사 결과도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 뿐이었다. 1941년 이후, 상용 비료가 모두 사라져, 모든 농사가 평균 이하의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력 부족이란 이유로 사용되지 않고 내버려진 농토는 없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전쟁 전에 비해 더 많은 농사 일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필요한 곳에 어디든 함께 돕는다.
한국의 남부지방에서는 경작지의 절반은 쌀경작에서 제외되고 면 농사를 하도록 농민들에게 요구된다. 검사원은 수확량을 예상하였다. 농민은 필요할 경우 여유분을 생산한 사람에게 빌려서 이 예상치를 맞추어야 했다.

9. 소작농은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요구되지는 않는다. (다른 계층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개개인의 인적사항은 “면 사무소” 에 보관되었다.

10. 1942년과 1944년에 각각 한국을 떠난, 농민이었던 두명의 포로는 어떤 형태로든 배급표라는 것을 본적이 없다. (다른 한명은 1935년부터 일본에서 살아왔다.) 의류 구매 요청은 직접 “면 사무소” 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음식은 그들 자신의 경작물로부터 할당되었다.

11. 1944년 4월, 한국인의, 경찰의 승인 없이 차량에 승차하여 100 km 이상을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보행자는 통제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부 관리에 의해 그들의 집에서 아무때나 검문될 수 있었다. 검문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일어나는 경우, 집 구성원 전원의 모든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1943년, 한 포로의 집은 위생 상태 점검 목적으로 두번 검사되었다. 2400 (*역자주: 밤 12시) 에는 모두에게 통행금지령이 발령되었다. 이 시간 이후 자신의 집 밖에서 발견된 모든 이들은 체포될 것이다. 가끔씩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청취 가능 거리내의 모든 마을에 사이렌이 경고의 의미로 이용되었다.

12. 전라북도 전주 근방 출신의 포로는 1938년 처음 시작된 이른바 “자원 입대” 하의 군사 훈련을 받은 여러명을 알고 있었다.
1938년부터, 6개월 반 동안의 기본 훈련이 경성 (Keijo) 또는 나남 (Nanam, Ranam) 에서 실시되었다. 훈련은 일본인들과는 별도로 실시되었으나, 일본군 운영장교에 의해 수행되었다. 기본훈련 후 지원병들은 2-3 개월의 휴가기간을 부여받은 후 전투 병과에 배속되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일본부대 속에 각각 분산 되었다. 훈련과정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본어 말하기 능력과 최소 2년의 교육이 요구되었다.

13. 징병 전 일본어 훈련 학교가 각 ‘면’ 마다 설치되었다. 학생들은 매일 3-4시간씩 1년간 출석했을 것이다.

14, 15. 포로들은 징병법 (*역자주: 또는 징용법)이 발효되기 전에 한국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이것과 징용으로부터 도망친 한국인들로 부터 전해 들어왔으나 그들의 이름을 말할수는 없었다. 한국 북부지방 출신들은 그 법에 대해 남부지방 사람들보다 저항하는 경향이 크다.

16. 포로들은 “Tonari Gumi” (*역자주: 일종의 반상회) 를 알고 있었으나, 한국 내의 그런 조직에 대해 들어본 바는 없다.

17. 이 전쟁은 철도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비율 또는 직책에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정거장 감독을 제외한 차장, 철도 엔지니어, 또는 다른 어떤 직책도 한국인이 종사할 수 있다.

18. 포로들이 태평양에서 보아온 한국 매춘여성 모두는 자원자였거나 또는 부모에 의해 매춘업에 팔려온 여성들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직접적인 여성 징발이 있었더라면 노인과 젊은이들이 모두 이것을 감내하지 않고 격분했을 것이기에, 이것은 한국적 관점에서 적절한 것이었다. 남자들은 분노로 궐기하여 이후 그들이 당할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일본인들을 죽였을 것이다.

19. 한국이 독립했던 당시를 살았던 나이든 한국인들은 변함없이 일본인을 미워한다. 몇몇 일본 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친일본성향이더라도, 그들중 여럿은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그들의 기분을 대담하게 말한다.

20. 모든 포로들이 그들이 강제로 징병되었다고 말한다.

21. 한국인들은 그들이 겪어온 이 전쟁의 효과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여럿은 이것이 결국은 그들의 독립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관용이다.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한 포로는 명백히 친 러시아이며, 한국에 공산주의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없고, 한국보다도 훨씬 무능한 나약한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을 그들의 해방자로 기대하고 있다.

22. 태평양 섬들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매우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모든 포로들이, 자신들을 연합군에 넘길까봐 두려워한 일본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 노동자들을 알고 있었다. 티니안 (Tinian) 에서 잡힌 포로는 미군 전선으로 향하는 3명의 여성들을 (그들중 둘은 등에 아기를 업고 있던) 보았다. 포로와 함께 같은 동굴에 숨어있던 한 중위가 그들 모두를 보안의 이유로 죽였다. 그 포로는 자신이 한국인이란것이 알려졌다면 자신도 분명히 죽었을거라고 확신했다.

23. 포로들은 그들이 하와이에 있는 동안, UN 서약에 따른 적정 절차에 의해 “독립 한국” 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두 들었다. 그들이 이 정보를 한국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4. 모든 포로들은 모든 한국인들이 일본과 싸우는데 뛰어들 것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믿고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질것이라는 사실이 전에 알려졌다면 이 명백한 일본에의 충성은 빨리 톤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부 지방 출신의 포로는 남부지방 사람들은 더 수동적이고 일본인들과 싸우는데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적다고 말한다. 독립 운동은 보통 북부지방의 더 활동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원한다. 이 3인의 포로들은 군사 훈련을 받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싸울 기회를 환영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게릴라전에 적합하게 특화되있다고 느낀다.

25. 한국인이 관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분개는 없다. 개개인은 미움을 받을 수 있으나, 미래 한국의 정부를 위해 전체적으로 그들이 관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6. 한 포로는 모든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한다. “일본인은 언제나 심장부터 일본인이다.” 라고 말하고, 일본과의 미래의 문제 때문에 일본인의 잔류는 한국에 손해라고 말한다.
다른 포로는 단지 고위 공직자들만 제거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이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과 역발란스를 맞출수 있을수 있다고 본다.

27. 포로들은 한국이 UN 대표들로부터 임시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있을것이다. 미국의 직접 통치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다른 나라의 경우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

28. 마을 정부 (주: 면, 읍 등) 는 나라가 UN 통치하에 놓이면 별도의 도움 없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각 군에 평균 60 명의 경찰이 있으며, 50% 가 한국인이다. 이 비율은 더 많은 경찰 병력이 훈련될 때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29. 여운형은 한국 독립 운동의 활동적인 멤버로 알려져있다. 그는 1942년 경성 (Jeijo) 에 살았다. 다른 상세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30. 한 포로는 1943년에 일본에서 일했던 한국 공산당의 리더 한명에 대해 들었다. 알려진 유일한 이름은 ‘김’ (가네모토, Kanemoto) 이다.

 

원본 : 「参考資料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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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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