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8/7-2

오후에 모월간지와 인터뷰를 했다.의뢰가 왔을 때 주저한 이유가 두가지 있었지만,결국 수락한 이유는 기자가 고발사태 이후 나와 책에 대해 나온 언론보도에 왜곡이 많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기사내용은 물론 제목까지 확인하고 합의된 시점에서 내보내기로 약속.

만나보니 그의 문제의식이 진심인 것 같아 다소 안심했는데,그런 나에게 “기사가 나와봐야 안다”고 견제구를 날린 건 인터뷰에 동석해 주었던 젊은 친구들.
기자를 믿지 못한 건지 나를 믿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한달 전부터 이들이 너무나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34622456564669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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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씨의 작업> 가라타니 고진

최근 들어 한일·중일간 긴장이 높아진 것은 일본정부가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일본)내 제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긴장/대립을 이용해서 일본을 언제든 전쟁가능한 체제로 만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문제든 영토문제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일본국민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그 나라 국민들이 (자국을) 비판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러한 상호간 신뢰를 바탕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되는 일이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발신하려 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한국에서는 친일적이라고 비난 받고 일본에서는 반일적이라고 비난 받을 것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나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다.

(2014 년 8 월)

<원문>

パク・ユーハ氏の仕事 柄谷行人

近年、日韓や日中間の緊張が急激に高まって来たのは、日本の政府があえてそれ を作りだそうとしているからだ。それによって、国内における諸問題を打ち消すた めである。そして、対外的な対立・緊張を利用して、日本をいつでも戦争できる体 制に変えようと図っている。したがって、従軍慰安婦問題であれ領土問題であれ、 それらを解決する気などさらさらない。

私がこのように日本の政府を批判するのは、日本の国民だからだ。外国に関し ては、その国の国民が批判するだろうと思う。実際、韓国にもそのような人達が 大勢いる。私はこうした相互的信頼にもとづいて活動してきたのである。とはい え、それだけではすまないことがある。

その点で、私は、積極的に日本と韓国の間に立って発言しようとしてきたパ ク・ユーハ氏に注目している。彼女の仕事は、韓国では親日的と非難され、日本 では反日的と非難されるだろう。そのことを最初から覚悟して、従軍慰安婦問題 に長年取り組んできた氏に、私は深い敬意を抱いている。

(2014年8月)

와카미야 요시부미,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고 부르라 (동아일보)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역사교과서, 독도, 위안부 다룬 박유하 교수의 ‘화해를’ ‘제국의’
일부 한국인 “日우익 대변” 비난, “위안부 명예 훼손했다” 고소
치밀한 논리, 균형적 시각으로 한일간의 난제 해결 애쓴 朴교수의 용기와 노력 지지

원문: [와카미야의 東京小考]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고 부르라 (동아일보)

조선일보 게재 <제국의 위안부> 서평에 대한 반론

조선일보 게재 <제국의 위안부> 서평에 대한 반론

일전에 조선일보에 실린 서평에 대해 반론을 쓰겠다고 했더니 지면을 내주겠다고 해서 썼는데 결국 실리지 않았다.

원래 서평자와 똑같이  6매만 쓰라는 얘기를 듣고 그에 부응해서 쓴지라 극히 짧은 글이지만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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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2일자 <전봉관의 인문학 서재>에서 나의 책<제국의 위안부>가 다루어졌다. 먼저,”한일 간의 화해를 위한 박유하 교수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하하거나 모독할 의도가 없었던 것도 분명하다”고 써 준 전봉관 교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일본은 사과 않는데 우리보고 반성하라니..조선인 책임론의 함정”이라는 제목에 나타난 것처럼 전교수 역시 나의 책을 오독한 듯 하다.

나는, <일본>에 책임을 묻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조선>업자의 문제에 대해 쓴 것은,일본에 <법적책임>을 지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 온 지원단체나 연구자의 생각이 유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제목에 담으려 했던 것도 “협력을 강요당한 식민지인의 슬픔”이었다.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부제목은, 한일 양국이라기보다 그 양극단—지원단체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의 대립적구조가 오히려 이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전교수는 “지금은 그런 문제를 제기할 시기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상황을 제대로 보지 않는 한 더 심각한 사태가 닥칠 수 있다.

조선인 징병자들은 조선인이었어도 남성에게는 보장된 <법>—근거가 있었기에 적은 보상이나마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위안부들—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에게는 그들을 보호해 줄 <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근대국가시스템의 결함이니 일본이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전쟁>의 문제로만 다루어져 온 위안부문제가 실은 <제국>에 동원된 여성의 문제라고 지적했고, 당연히 “우리가 먼저 반성”해야 한다거나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고 쓰지 않았다. 전교수의 글은 오독을 넘어 명백한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전교수는 그런 왜곡을 전제로 일본이 “사과와 배상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 역시, 지난 20여년에 걸쳐 지원단체가 한국사회에 정착시켜 온 생각일 뿐이다. 지식인들조자 그렇게 믿게 된 상황을 심각하게 여겨,나는 이 책을 썼다.

위안부문제는,국민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한 정보와 인식을 공유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난 6월의 고발사태와 일부언론의 가담은, 지원단체와 언론이 그렇게 생각한 나를 매장하려는 시도였다.

본문:https://www.facebook.com/notes/park-yuha/%EC%A1%B0%EC%84%A0%EC%9D%BC%EB%B3%B4-%EA%B2%8C%EC%9E%AC-%EC%A0%9C%EA%B5%AD%EC%9D%98-%EC%9C%84%EC%95%88%EB%B6%80-%EC%84%9C%ED%8F%89%EC%97%90-%EB%8C%80%ED%95%9C-%EB%B0%98%EB%A1%A0/927164003977181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이권희,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폭력

파시즘적 민족주의의 폭력

일국의 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 문제가 되어 그렇지 않아도 월드컵을 앞두고 서서히 끓어오르던 값싼 민족주의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 불똥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로 튀었다.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고 있는 특정 단체에 의한 ‘정의’의 독점을 우려하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단초로써 우리가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혹은 감히? 언급하려 하지 않았던 종군위안부의 다양한 층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에 박 교수에 의해 비판을 받은 지원단체는 자기들과 음으로 양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며 박 교수를 ‘친일’, ‘반민족주의자’라는 프레임에 가두려 하는 폭력적 여론 몰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박유하 교수는 지금까지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화해를 위해서』 로 대표되는 다양한 저작물과 활발한 학술활동을 통해 우리가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갖고 이를 직시해 왔다. 이는 한일 양국의 특정적이며 부정적인 대결과, 해묵은 갈등 구조의 해소, 나아가서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구축을 위한 학자로서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감에 기인하고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이라 믿어 왔던 기억의 다른 한편에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기에는 일제 식민지배 36년 동안에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민족 자존감의 상처가 너무나도 크고 깊다는 것 또한 안다. 결과적으로 식민통치 기간 동안 앓아야 했던 다양한 정신적 외상은 ‘민족적’ ‘민족주의’적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하며 오랜 세월 역사의 한 쪽 면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절대 담론을 형성해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과 핍박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는 ‘민족주의적’ 담론 형성과정에 파묻혀 버린 할머니들의 또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주장하고, 자기 검증과 내적 성찰보다는 이를 전국민적 저항운동으로 변질시키며 정치권력화되어 가는 특정단체의 ‘정의’의 독점을 우려한다. 나 또한 박 교수의 이러한 우려에 깊이 동감한다. ‘정의’의 독점은 필시 폭력으로 이어지고, 폭력은 자유로운 사고를 질식시키며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박 교수의 글에 대해 ‘문학적 상상력’ 이나 ‘감수성’으로 역사를 파악하려 한다며 이를 폄하한다. 비록 위안부에 참가한 여성들 중에 자발적 참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또한 ‘부당한 제국성’ ‘제국의 숨은 의도’라 하며 박 교수의 역사인식의 결여를 지적한다. 나 또한 미시적 가지들에 집착하는 일문학의 연구방법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역사학자들의 이러한 지적에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역사학이 어떠한 방법론에 의해 지탱되어지고 있는 학문 분야인가. 멸치조차 회를 뜨려 드는, 초 울트라 미시적 연구 방법론에 의해 성립되는 실증주의, 사료 지상주의의 학문 분야가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역사는 지구상 가장 오래된 문학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유하 교수가 문제 삼고 있는 다층적 기억을 거북하다 하여 이를 애써 외면하며 ‘부당한 제국성’이라는 거대 담론만을 고집한다면 일제식민통치 기간 동안 깊어지고, 해방 이후 반복 재생되고 있는 정신적 외상에 대한 치유는 앞으로도 영원히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학자가 어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 있겠는가. 학자로서의 양심과 자유로운 학문 탐구마저 ‘민족’ ‘민족주의’라는 이 땅의 ‘절대선’으로 재단하려 드는 ‘정의’의 독점에서 오는 ‘폭력’을 나는 경계한다. 또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파시즘적 민족주의에 기인하는 인민재판식 마녀사냥을 나는 비판한다. 나는 민족주의라는 감성을 자극하며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일부 단체들의 절대 권력화에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학자의 자유로운 연구를 용인하지 않는 이 사회의 천박함에 절망한다.

 

이권희(단국대학교  연구교수)

진보/보수대립과 일본

예전엔 일본에 대한 ‘다른’시각을 말하면 호응해 주는 사람들은 대개 보수였다. 그래서 아마도 나의 페친들 중엔 보수쪽 분들도 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성격적으로도 어릴 때부터 반체제파였고 (심지어 반장을 하면서도 선생님께 저항했다),일본에서 공부할 무렵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대부분 좌파지식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진보적 사고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의 아카데미즘에서 각분야를 선도하는 들은 모두 진보지식인이었으니(일본에서는 혁신,혹은 좌익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이다)탐욕적으로 공부하던 무렵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백하지만 마르크스도 일본어로 읽었고 그 해석도 일본인의 영향을 받았다. 주변의 친구/연구자들도 대부분 전체주의적 제국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전후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사상이 특별히 좌파적이라기보다는 삶의 방식과 사고가 자연스럽게 좌파적이 된 이들이었다.

그러다가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라는 책을 내면서 내 주변의 진보지식인들은 분열했다. 실제로 내 책의 서평회를 했던 날,반대파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그 때 토론을 맡아 주었던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 선생은 참석하지 않은 이들을 ‘적앞에서의 도망자’라고 비판했다. 이 때 또 한사람의 토론자로 나서 주었던 정대협관계자는 다른 정대협멤버들에 의한 ‘나가지 말라’는 억압을 무릅쓰고 나왔다고 말했다.벌써 7년전 일이다.
이후 나에 대한 격한 비판이 주로 재일교포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언젠가부터 한국에까지 그런 비판이 전해지게 되었다. 내가 책에서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진보지식인과 운동의 문제점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팔리지도 않았고 따라서 영향력도 없었던 책에 대한 비판을 굳이 한국에서 해야 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일부 진보지식인들의 문제점을 이전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생각은 무조건 ‘우익’적인 것으로 몰고 적대시했는데 거기서 나는 ‘사고정지’라는 빈곤과 그 결과를 보았다.
아무튼 이 때부터 나는 일부 ‘진보’의 경직성과 폭력성을 알게 되었고,대화를 거부하는 ‘진보’보다는 비폭력적인 보수가 궁극의 순간에는 세상에 더 이로울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정의의 전쟁’이 존재할 수 없듯이 어떤 정의도 인권이나 생명보다 소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본을 우경화시킨 건 그런 사고정지자세를 유지한 급진좌파적 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90년대 이후의 ‘일본사회를 개혁’하겠다던 일본의 좌파 운동은 적어도 현재의 일본사회를 볼 때 단적으로 실패한 셈이다. 방법에서 미숙했기 때문이다.우파를 설득하기는 커녕 가까이 있던 이들조차 ‘다르’면 처내고 가능한 한 ‘순수’를 유지하려 했던 탓이다.그런 의미에선 행여 유가족을 선동하는 좌파가 끼어있을까 ‘순수유가족’만 상대하려 했던 우파 정부대변인과 닮은 꼴이다.90년대,아직 일본국민들이 대부분 ‘진보적 생활자’들이었을 때조차 일본의 좌파 지식인들은 소수의 우파들만 바라보면서 ‘일본의 우경화’를 말했다.

한일화해에 대한 나의 관심은 실은 남북화해,우리안의 화해와 이어져 있다.지배와 폭력에 대한 첫관심을 키워준 것이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후에, 냉전적 갈등이 식민지시대에 시작된 것임을 알고 나서 더 확고해졌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안의 갈등–제국과 냉전이 야기한 갈등을 언젠가 넘어서야 한다는 입장이고 분열과 폭력을 조장하는 담론은 진보건 보수건 믿지 않는다. 윤리적이고 합리적인지,평화주의적인지,그것만이 담론과 사람을 판단하는 나의 기준이다.

내가 진보쪽 사고를 갖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 실망하셨을 보수 페친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나 역시 여러분들의 사고와 감정에 실망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을 이어가자고. 그리고 필요할 때 대화를 해 나가자고. 나의 가족에도 보수가 있으니 그건 필연이기도 하다. 그러나 메마르고 이기적인 보수들은 물론,정의의 이름으로 세력정치에만 관심있는 진보들도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전을 통해 죽고 죽임을 당한 과거를 가진 우리안의 좌우대립은 깊고도 깊다. 아마도 분단이 지속되는 한,이 대립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최소한 감정적 대립에서만큼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그 대립은,최근 20여년동안의 갈등을 거치면서 진보와 보수가 모두 미워하게 된 일본의 지배에 의해 생긴 것이니까. 그런만큼 그 갈등을 넘어서는 날이 우리의 진정한 ‘독립과 해방’의 날이기도 하니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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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란 무엇인가

`외교`란 무엇인가—조세영 전 외교부국장의 `실현불가능한 차선과 실현불가능한 최선의 사이에서`를 읽고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위안부문제와 처음맞닥뜨린 건 1991년이었다.유학 마지막 무렵이었는데,동경YMCA에서 했던 위안부할머니증언모임에서 동시통역봉사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당시 아르바이트하던 NHK국제국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의 부탁이었던 것 같다. 통역하던 내내 할머니들의 한 맺힌 호소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걸 기억한다.
그렇게 위안부문제를 만나게 되었지만, 다음해 봄 귀국한 이후부터는 `위안부문제`해결 운동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당시 일본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연관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던 참이어서 나는 위안부문제가 민족주의적 담론이 되고 있는데 회의적이었고 돌아온 `문민정부`시대 한국의 민족주의적 담론과 풍경은 메이지 시대 자료를 통해 보았던 광경을 다시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런 민족주의적 풍경의 한가운데에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서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더 정확히는 다가갈 계기가 없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대협은 후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80년대 민주화투쟁에 관여한 사람, 기독교여성단체, 이화여대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어디와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월을 지나 내가 다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2000년대 들어서였다. 위안부문제로 시작된 1990년대의 한일갈등은 독도문제등을 거치면서 심화되고 있었는데2001년에 교과서문제가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고,그런 갈등들이 서로에 의해 중폭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서 갈등의 원점에 있었던 `위안부문제`에 대해 제대로 고찰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처음으로 나눔의 집을 방문했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가까이에서 들었다. 그런데 그 때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눔의 집에서 떨어져 혼자 살면서 일본군과의 연애와 안타까운 이별에 관한 추억을 들려준 할머니의 미소띤 얼굴이었다. 또 `일본군보다 (자신을 팔아넘긴) 아버지가 더 밉다`던 또 다른 한맺힌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의 의미를 생각하며 나는 2005년에『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썼다.
조세영 전 외교부국장(이하, 편의상 조국장으로 사용)이 얼마전 발표한 글을 읽고 나는 먼저 그런 기억들을 먼저 떠올렸던 것 같다. 위치한 장소는 달랐지만 그 역시 이 20년동안 나름대로 `위안부문제`와 만나고 있었고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91년에 그는 스물아홉이었다는데 같은 해에 나는 서른 넷이었다. 내가 몇 살 더 많았지만 위안부문제에 관한 `거리`로 치자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기에 접했고 관심은 있었지만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고 세월이 흘러 그가 국장으로서 다시 위안부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을 때 나는 위안부문제만을 다룬 또다른 책을 쓰고 있었다.
위안부문제가 어려운 건 중심에 있었던 이들이 대부분 20년이상 관여해 온 문제가 되어 대부분사람들에게 이 문제가 이미 그들의 인생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해 온 일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그들의 신념과 정의감을 신뢰하지만, 바로 그런 부분이 위안부문제가 이토록 오래 이어지고 있는 또하나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않는 한 아마도 위안부문제의 해결은 어렵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제3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그때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여성기금`

기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대세인 가운데 조국장의 글은 정대협이 비난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일본의 `선의`였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한국인으로서 그렇게 명확히 이야기 한 또다른 사람은 별로 없다. 하긴 글이 아닌 말이라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많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공식석상이 아닌 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위안부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 또하나의 이유는 그런 `침묵`에도 있다. 어쩌면 그 부분이야말로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언제까지고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대로 `공론`화 해야만 논의가 깊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을터인데 해방 후 70년이 되어 가도록 우리는 `일본`에 관해서만큼은 옳던 그르던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와 `다른 생각`은 무조건 `친일파`로 간주되는 것도 모자라 그런 발언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자는 발상까지 나오는 상황이니 충분히 이해하지만,중요한 건 침묵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국장의 글을 반갑게 읽었다. 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보여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또 최근 페이스북에 위안부문제에 관한 글을 올리고 있는지라 나의 반응을 보고 싶어하는 몇몇 페친들에게 감상문을 올리기로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첫번째 이유는 오랜 고민끝에 작년에 다시 낸 나의 위안부문제론을 `문학자`다운 발상으로 치부하고 일본국가를 `형법몇조..`등에 의해 `법적 책임`을 지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법학자`다운 발상`으로 나의 책을 비난했던 어느 법학자보다는,(비록 나만을 향한 글은 아니지만)훨씬 `대화`의욕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조국장의 글의 주안점은 한국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을 대신해 위안부할머니들에게 `차선의 정책`을 취했고 그것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에 있는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위해 전개된 내용에 몇가지 오류가 보인다.

1,아시아여성국민기금이 한국정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주장

조국장이 당시의 외교부직원으로서 그러한 조치에 자부심을 느낀 건 당연하다. 사실 나 역시 한국정부가 초기에 500만원을 지급했다는 것은 얼마전에 조국장과 만났을 때 처음 알았다. 따라서 그 부분이 나의 책에 빠져 있다는 지적은 겸허히 수용하고 싶다. 그러나1998년에 이루어진 4300만원의 정착금에 관해서는 『화해를 위해서』에 쓴 적이 있다. 다만 비판적으로 썼다. 지급 자체가 아니라 그 이유가 일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한 데 대해서였다. 물론 `도덕적 우위`를 느끼는 것 자체야 크게 문제시 할 것은 없다. 문제는 일본에 그러한 `도덕==모럴`이 없다고 전제한 단정에 대해서였다. 이미 페이스북에 쓴 적이 있지만(2013/2/15) `아시아여성기금`은 우리가 지키라고 요구중인 고노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이 계승된 기금이었다 (무라야마 수상이 이 기금의 2대째 이사장을맡았던 것도 그 증거다).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자민당 정권때 발상된 냉전종식이후 국제사회와의 화해를 지향해 `역사문제를 염두에 두고자`한 정책과 이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자민당은 무조건 사죄의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적대시하지만 `고노담화`를 내놓은 고노전관방장관 역시 자민당 출신이다.
따라서, 당시의 일본이 한국의 `자구조치`를 참고로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자구책이 일본을 `바늘방석`에 앉혔고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건 우월감이 낳은 일방적인 생각 아닐까 싶다.
물론 현장의 일부 외교부 직원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조국장의 자부심이, 김영삼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는 사죄의식이 없다고 하는 근거없는 단정에 따른 우월감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우월감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까지 포함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식의 일방적 선언으로 이어졌는데 그건 위안부여성들의 `개인`의 의지를 무시한 선언이었다. `국가`의, 가부장제적 사고에 의한. 오빠나 아버지가 여동생이나 딸의 권리를 `대신`해서 처리해 온 것처럼.
무엇보다 그 돈은 국민의 세금이었고 그녀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주도의 국가로서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나는 그 일이 한국남성들이 일본에 대해 `도덕적우월감`을 느껴야 할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구조치`로 선택된 그 일은, 오히려 그녀들을 그런 처지로 떨어지게 만든 국가로서 뒤늦게 다소간의 `책임`을 진 일일 뿐이다. 국민을 지키지 못한 국가로서.

2,기금이 `민간기금`이라는 주장

`기금`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쓴 적이 있으므로 자세히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조국장이 쓴 것 처럼 기금은 `속죄금 `200만엔과 의료복지비`300만엔`으로 나뉘어 지급되었는데 처음에 `속죄금`부분을 `국민의 모금`으로 하려 한 것은 책임을 지고싶지 않아서가 아니라,즉 도덕의식—모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1965년에 모든 것이 청산되었다는 `협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그야말로 `자구책`이자 `수단`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숨은의도`의 존재가능성을 굳이 언급하고 `책임인정/보상생각이 없는`이라고 적는 조국장은,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일본에 대한 불신을 안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나는 기금의 내용이 당사자들과의 협의없이 정해진 것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역시 나중일인데 `기금`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고 그들간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금`도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전달자 역할을 맡았던 이들 중 일부는 정대협에 대한 예상 이상의 증오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면서, 정대협과의 갈등의 배경을 다른 측면에서 유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사 성립과 전달과정에서 문제가 있다 해도 기금을 `독선`이라 말하는 것은 기금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았던 정대협의 비판에 가담하는 일이 된다. 무엇보다, 기금에 대한 격한 비난과 거부는 위안부할머니들 당사자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주변에 있던 운동가들과 엘리트연구자들의 생각이었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부를 제외하면 위안부할머니들은 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분들조차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내가 만난 위안부할머니들은 자신이 일본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조차 지금껏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법적책임`에 대해 설명하면 그제서야 `그런 것 필요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지원단체 빼고 해결해 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단체들과 위안부할머니들의 관계가 보여주는 몇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말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그런 `현실`을 조국장은 아마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인용한 위안부 할머니의 `말`을 그는 `전해들은`것이라고 적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바로,조국장의 글의 한계이자 이 땅에서 위안부문제에 대해 발언했거나 해 온 대부분의 남성들의 한계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기금은 그렇게 `수단`을 선택했지만 결국은 `의료복지비`도 한국에는 현금으로 지급되었다.일본의 `국고금`(일본국민들의 세금)이 지급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말하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다. 60명이 기금을 받았다 는 기사가 나와도 `기금은 민간기금`이라는 주장만이 회자되면서 받은 이들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있다. 그들이 아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 받은 7명의 할머니를 정대협이 배척한 일에 이어지는 그런 억압적인 담론 때문이다. 사실 1998년에 한국정부가 위안부들에 대한 `자구조치금`을 4300만원으로 올려 지급한 것은 기금의 지급액을 의식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기금을 받지 말라는 각서까지 쓰게 하면서 지급되었다.
외교부는 기금 발족당시 기금을 높이 평가한다고 발표했었다. 생각이 바뀌었다면 언제 바뀌었는지 왜 바뀌었는지 국민들에게 한번쯤은 설명해야 옳다. 그건 한국국민에 대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일본의 외교관들과 나누었을 대화와 우정과 신뢰를 무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

`법`과 `외교`

기금보다 외교부의 노력을 기억해 달라고 강조하는 듯한 이 글은 헌재판결에 대해 대단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외교부는,외교부를 피고로 제소한 위안부할머니들과 지원자들의 논지에 대해 반박하고 있었고, 조국장의 `자구조치`발언과,`외교를 법으로 판단해도 되는가`하는 말은 헌재와 제소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판에서 졌다는 사실만으로 헌재의 판결을 수용해 `중재위원회`로 가져가야 한다는 주장은 모순이 있어 보인다.
헌재결정은 <제국의 위안부>에도 썼지만 문제가 많은 결정이었다. 무엇보다,1965년에 일본이 다른 어떤 류의 피해자가 나올지 모르니 피해보상은 개인이 할 수 있도록 청구권을 남겨주다고 한 일본의 제안을 물리치고 굳이 국가가 받아 대신 지급하겠다고 나선 것은 한국정부였다. 일본을 비판한다면 그에 대한 반성도 병행되어야 합리적인 처사이자 용기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당시의 회담내용을 보고 한국정부가 최대한 할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 대해 감동하기도 했다. 또 그런 요구들이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아 눈물을 삼켰을 회담출석자들과 배후에서 함께 움직였을 이들에 대해 존경의 념도 갖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한 일이 은폐되어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이 그런 것처럼 국가도,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밝히고 반성하는 일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경과에 대한 고찰 없이 위안부에 대한 그야말로 `돈 몇푼`을 지급했다는 것만으로 `국가의 우월감`이 보장될 수는 없다.
중재위원회로 가지고 가는것은,국가간 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력은 아니지만 그건 `전쟁`을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일당사국이 아닌 제3자에게 그 판단을 묻는 일은 50년이 되어가는 한일외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모든 재판이 그렇듯 중재위원회에 가는 일은 현재의 갈등을 공식화하고 `대화`를 차단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때 한일양국에 남는 것이 식민지배역사에 이어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이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미 이 20여년동안 정착된 오해와 미움을 차세대에게 본격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그 일이 과연 `외교`가 해야 하는 일일까. 외교의 목적을 그저 국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아직껏 있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기도 했던 도고시게노리 전외무장관이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을 막으려 했고 종전때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군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던 정신을 지금 우리는 되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외교의 궁극은 전쟁을 막는 일이고,대화를 지속시키는 일이라고,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생각한다. 조국장은 이미 외교의 현장을 떠난 사람으로서 발언했지만 외교부에 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글이고 아직은 중재위원회에 가지 않을 방법을 신중히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현외교부에 영향을 미칠수도 있을 것 같아 굳이 쓴다.

조국장은 피해자의 `납득`을 말하지만 피해자들의 생각은 하나가 아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진짜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위안부할머니들을 그저 성녀나 투사취급을 하지만,그들 역시 피가 있고 살이 있는,그래서 어제와 오늘 생각이 달라질 수 있고 이런저런 욕망도 갖고 있는 한사람의 `개인`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반목과 갈등의 주체였던 그들이 용서와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는 사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만 달려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갑작스런 정치적 타결은 결코 해결을 갖고 오지 않으리라는 조국장의 예상에 나는 찬성한다.그런데 이 성실한 글이 `피해자가 납득하지 않을 구조`를 오히려 굳건히 하고 만다는 데에 위안부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인도적조치의 돈 몇푼`이라는 말 역시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실은 `도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을 상위의 것으로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근대주의적이자 국가주의적이자 남성주의적인 발상이다. `법`이란 얼마전까지 오로지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위안부문제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남성들에게 보장된 `법`을 그녀들은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위안부문제를 논의하려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notes/park-yuha/%EC%99%B8%EA%B5%90%EB%9E%80-%EB%AC%B4%EC%97%87%EC%9D%B8%EA%B0%80%EC%A1%B0%EC%84%B8%EC%98%81-%EC%A0%84-%EC%99%B8%EA%B5%90%EB%B6%80%EA%B5%AD%EC%9E%A5%EC%9D%98-%EC%8B%A4%ED%98%84%EB%B6%88%EA%B0%80%EB%8A%A5%ED%95%9C-%EC%B0%A8%EC%84%A0%EA%B3%BC-%EC%8B%A4%ED%98%84%EB%B6%88%EA%B0%80%EB%8A%A5%ED%95%9C-%EC%B5%9C%EC%84%A0%EC%9D%98-%EC%82%AC%EC%9D%B4%EC%97%90%EC%84%9C%EB%A5%BC-%EC%9D%BD%EA%B3%A0/840706955956220

 

미움의 연쇄작용

‘한국아이들이 음식에 침을 뱉었다”한국아이들이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위협하듯 소리쳤다” 며 ‘그러니 밖에선 내 이름을 일본어로 부르지 말라’고 부모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위안부소녀상이 들어선 미국 글렌데일에서의 일이다.
그렇게 보고한 이들이 위안부소녀상에 대해 항의하러 갔던 지방의회의원들이니, 그들의 국회에서의 보고가 긍정적인 것일리는 없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여성들을 끌어가 강간하고 노예화했다는’식의 한국의 비난때문에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특히 아이들)의 정신적피해가 크다는 것은 진작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주미일본영사관이 나서서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고 이들은 강조한다.
글렌데일에는 한국계주민이 12000명,일본계주민이 100명정도라고 한다. 전체인구가
20만명 정도라니 한국역시 20분의1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인 셈이지만 그래도 20퍼센트 가까이 된다는 히스패닉계를 제외하면 소수민족중에는 다수라 할 수 있겠고 일본인들은 여기서는 압도적인 ‘소수민족’인 듯 하다.
아이들이란 원래 폭력적이고 때로 야비하기까지 한 존재이니 여기서 아이들을 탓할 필요는 없겠다. 또 100명밖에 안되는 일본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괴롭힐 리도 없으니 이런 사례는 아직 많지는 않을 것이다.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협조하며 살아야 할 소수민족의 아이들끼리,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살도록 만든 건 어른들이다.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에 의하여 납치된 20만 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들을 추모하며”라는,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소녀상의 글귀를 통해서다.
먹기위해 준비된 음식에 침을 뱉은 한국인 아이는 그 사실을 잊거나 ‘과거에 받은 피해에 대한 당연한 응징’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음식을 부정당한 아이는, 아마도 일생동안 그 사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에 대해 단단한 응어리를 지니고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그랬고 현재에 여전히 그런 것처럼.
위안부문제가 설사 해결된다 해도 한일간의 감정갈등이 쉽게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1월초에 올린 ‘사고의 파시즘’이라는 내 글에 대해 반박한 이들중 나의 노력이 ‘약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한 이들이 있었다. 그건 내 생각을 그저 국가간 정치경제 유착을 지향하는 것으로 오독한 결과(혹은 단순히 또다른 정치적유착지향?)일 뿐이다.
‘인권’을 강조하는 이들이 가끔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국적’이나 ‘민족’의 이름만으로 보호받지 못해도 되는 인권은 없다. 과거의 우리,식민지가 되어 그저 ‘조선인’이었다는 것만으로 차별받아야 했던 우리이니 더더욱,똑같은 폭력을(모든 폭력의 저변에는 미움이 있다),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진보’이리라고 나는 믿는다.

http://sankei.jp.msn.com/smp/world/news/140215/amr14021507010000-s.htm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828046540555595

 

남북관계에 대한 미국국회의원의 의견.

남북관계에 대한 미국국회의원의 의견. 무심히 읽어내려가다가 ?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을 만났다. ‘일본이 20만명의 여성을 납치해 위안부로 일하게 했다’고 말한 부분. 이 사람이 주도했다는 미하원의 위안부문제결의는 ’20만명 납치’라는 잘못된 정보가 만든 것이었고 그 결의는 이후 다른 나라의 결의까지 이끌어 ‘세계의 의견’을 만들었다.
물론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물론 지원단체나 지원자들, 그리고 증언자일 것이다( 하원에서 증언한 이의 20년전 증언은 모르는 이가 옷가지등을 보여주며 꾀어서 따라갔다는 내용인데 이후 자다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는 식으로 바뀐다)
지원단체는 최근 업자의 존재를 인정한 듯 한데 그렇게 새롭게 알게 된 정보는 그에게 전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는데 새로운 인식을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한국의 언론에도 공식적으로 알리는 일은 없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잘못된 인식자체보다 그것이 슬프다. 자신의 기존 주장을 바꾸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런 용기를 관계자들이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이들도 사실을 알고 그들을 비난하게 되기 전에. 그들에 대한 비난은 ‘한국’에 대한 비난이 될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 ‘한국의 거짓말’에 대항하는 움직임에 동참하는 이들중엔 한국에 대한 차별의식을 가진이들이나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 그들의 움직임 역시 옳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 기사는, 그들의 움직임이 단순히 책임을 부정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한번 보여준다. 아베의 유엔총회발언보다 더 주목되어야 할 기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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