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부에서는 처음으로 한일회담이 열린다

이번 정부에서는 처음으로 한일회담이 열린다. 나는 외교전문이 아니지만, 최근 3년간 대일외교는 내가 보기엔 빵점이다. 심지어 오늘도 그 수준을 유지중이다. 손님을 불러 대화를 하는데 식사대접을 안 한다는 건 어느나라 풍속인가. 우리의 대통령은 영어나 불어는 가능한 것 같지만 외교나 인간심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대통령은 위안부문제 해결이 먼저라면서 그동안 대화를 거부해 왔다. 하지만 해결을 하려면 진작 만나 대화해야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도 회담을 하는 건 아마도 미국에 등떠밀린 결과일텐데, 이제, 한일 FTA에도 부정적이었던 입장을 바꾸어, TPP참여문제를 일본에 부탁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자존심은 좋지만,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자존심은 오히려 자신을 비굴하게 만든다. 오늘, 위안부문제에서도 기대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게 분명하다.

덧붙여 말해 두자면, 대부분의 언론이 “일본이 1965년에 (보상은)끝났다면서 위안부문제해결을 거부하다”는 식으로 보도했지만, 그건 정확하지 않다. 일본이 “원칙”을 말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해결할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최근 국장협의에서 주로 논의된 건 소녀상문제인 듯 하다.

상대의 생각과 주장을 정확히 알아야 대응도 제대로 할 수 있다. 거부하든 받아들이든. 오늘 대통령은 그 이야기를 들을 지 모르지만,아마도 대답을 못할 것이다. 소녀상은 정대협이 만들었지만 이미 “국민 소녀”가 되었기 때문에.

http://m.ichannela.com/news.do?mode=viewsec&cid=11&nid=374948&news_date=20151028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23558134337765

渦中日記 10/31 – 젊은 역사학자들에게 답한다 1

지난 봄에 <역사문제연구>에 게재되었던 젊은 역사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답한 글입니다. 긴 글이라 조금씩 나누어 올려 둘 생각입니다. 이 짧은 연재가 끝나면, 한꺼번에 읽을 수 있도록 노트에 링크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재승 교수에 대한 반론도 올릴 생각입니다.

지난번에 올린 재일교포 정영환교수에 대한 반론도 그렇지만, 이런 모든 논쟁들이 고발 이전에 이루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고, 이제 올해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군요.

———-
<1>
1. 비판 방식에 대해

1) 허위 적시

『역사문제연구』33호에 집담회 「젊은 역사학자들, 『제국의 위안부』를 말하다」(
『역사문제연구』33호, 2015.)가 게재되었다. 이들의 비판 역시 재일교포학자 정영환과 마찬가지로 오독과 곡해 그리고 적의로 가득한 내용이었던 것과,( 정영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 체제의 재심판」, <역사비평>111, 2015.) 한 학자의 고민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거친 말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로 학술지에 게재된 데 대해 먼저 깊은 유감을 표한다.
비판은 전체 문맥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각 기술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며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내가 책에서 비판했던 정대협에 대해서는 “맥락까지”(앞의 집담회, 561쪽. 이하 쪽수만 표시) 살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의 책에 대해서는 맥락은커녕 쓰여 있는 내용조차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이들의 비판이 논지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이 아니라 인상비평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위안부 문제 연구자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겸허해야 했다. 그러한 성급함과 은폐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정영환에 대한 반론도 참조해 주기 바란다.( 박유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체제」, <역사비평>112, 2015.)

이들의 비판이 얼마나 성급한 오독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먼저 제시해 둔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 2부 3장, 즉 위안부의 재현의 문제를 다룬 부분에서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의 문제와, 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해 간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소녀 이야기』의 경우 할머니의 증언이 애니메이션에서 어떤 식으로 변형되었는지를 지적한 것이니 이 부분이 할머니들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또 후자에 관해서도, 나는 “그런 변화는 의식적인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듣는 이들의 기대가 그렇게 만든 측면이 크다”라고 썼다. 이어서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의 증언에 차이가 난다고 해서 위안부들만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또 그런 증언을 듣고 싶어 했던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이라고 해야 한다. (…) 피해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민족 담론은 표면적인 피해 인식 외의 모든 기억을 말살시키려 한다”( 박유하,『제국의 위안부』, 뿌리와이파리, 2015, 133-134쪽.)라고 썼다.

그렇게, 이 부분의 비판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 피해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민족 담론임을 분명히 하면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영원히 안 볼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는 우리 안의 욕구에 대한 언급에 이어 이렇게 썼다. “그러나 70세가 되어가도록 그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없다면, 그건 과거의 상처가 깊어서라기보다 상처를 직시하고 넘어서는 용기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혹은 우리가 아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보듬는 자신에 대한 사랑 대신 타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더 큰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제국의 위안부, 뿌리와이파리, 2015, 134)라고.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대상이 위안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자 해방 후 한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젊은 학자들은 “위안부경험을 했던 사람들한테 이런 반성과 비판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는데도 저자는 이 비판을 그녀들에게 집중하죠. 예를 들어 <70세가 되어가도록 과거의,(중략)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표현처럼요. 용기의 부족, 미성숙 등으로 몰아세우고 있어요.”(550)라면서 비난한다.
사실 이 부분은 『제국의 위안부』를 고발한 이들이 첫 번째 고발장에서 적시한 109곳 중의 하나였다. 지원단체는 이후 내가 반박문을 제출하자 지적 내용을 반으로 줄이고 고발 취지를 바꾸기까지 했는데, 이 부분은 그때 사라진 지적부분이다. 젊은 학자들 중에 소송문서작성에 직접 관여한 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기서 문제 삼은 내용 역시 이들의 주장과 같았다.
해방 후 70년이라는 시기에 할머니가 70세라면, 해방 무렵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연히 위안부 체험을 했을 리도 없다. 이 집담회는 이런 식의 웃지 못할 오독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은 『제국의 위안부』 33쪽에 나오는 웃고 있는 이미지의 사용을 문제 삼으며 사진 위치가 의도적(554)인 것이 명백하다면서 비겁하다는 식의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는데, 33쪽은 물론 32쪽에도 34쪽에도, 이들이 지적한, 위안부의 숫자가 20만명보다 적고 상대한 숫자도 적고 연애도 하는 존재였다는 대목은 이 사진이 실린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미지 사용 위치는 출판사가 정한다. 명백히, 나를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로 몰아가기 위한 허위이자 근거 없는 비방이다. 이들의 비판은 유감스럽게도 정영환에 못지않게 악의적이고 그 왜곡 수준이 범죄적이다. 또한 『소녀 이야기』에 대한 나의 지적을 두고, 내가 없는 얘기를 한 것처럼 말하면서 비웃지만,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보았을 때는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근거 없는 비판은 하지 않는다. 또 나는 『제국의 위안부』의 비판에 대한 반박에 “표현의 자유”(543) “학문의 자유”(543, 572, 575)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옹호해야 하는 문제적인 기술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이들은 하지도 않은 행위를 한 것처럼 말하면서 허위에 입각한 비방에 치중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22584924435086

국민세뇌는 국정교과서만 하는 건 아니다.

국민세뇌는 국정교과서만 하는 건 아니다. 전시관도 기념비도, 대개는 “하나의 기억”을 주입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하나의 기억”인지 여부가 아니라, “어떤” 기억인지, 배경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기억인지 여부에 있다.

1970년대 이후, 전국곳곳에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9살짜리 이승복의 동상이 세워졌었다. 이제는 80퍼센트 이상이 철거되었다는데, 그로부터 40년후, 2010년대에는 위안부”소녀”상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그 상들은 어떤 운명을 걷게 될까.

문제는 상 자체가 아니라, 당사자를 넘어선 “생각과 욕망”들이 상에 담기면서 영웅화되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고요한 추모와 슬픔이 자리할 공간이 사라진다는 데에 있다. 그곳에 있는 건, 희생된 소년/소녀들의 아픔이 아니라 형해화된 어른들의 욕망일 뿐이다. 교과서든 기념비든. 국가든 민간이든.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20516641308581

渦中日記 2015/10/22

그저께저녁, 감기로 골골거리고 있는데 와세다대학에서 연락이 왔었다. 와세다에서 주관하는 “이시바시탄잔 기념 저널리즘 대상”수상자로 결정되었다고.

얼마전에 쓴 것처럼 지난번 마이니치신문사의 수상소식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이번 소식은 순수하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소감을 써 보내라기에 그 이유를 썼다.

실은 마이니치의 경우 수상식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밝고 화려한 장소에 나가 웃는 얼굴을 할 기분은 아직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지인의 의견에 힘을 얻었고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결코 위안부할머니를 모욕하지 않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점 부끄럼이 없다. 그래서 수상에 대해서도 당당해지기로 했다.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오해를 풀어 주시리라 믿는다. 수상 덕분에 이 책을 읽는 일본인들이 한사람이라도 더 늘어난다면 위안부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면 되었지 결코 방해가 되는 일은 아니라는 확신에도 변함이 없다.

감기가 나으면 그동안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셨던 페친여러분들과의 만남도 가져야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들께 감사 전하면서 보고드립니다.

<소감>

“대학원에서 배웠던 와세다대학이 주관하는, 그것도 이시바시탄잔을 기념하는 상을 수상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시바시탄잔은, 반전, 반군대, 식민지 포기, 소일본 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국가/제국의 욕망에 개인이 어떤식으로 동원되고 착취당하는지를 생각해 본 책이니, 의도하지 않았으나 이시바시의 사상과 접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계를 넘어, 이시바시와 같은 사상을 계승하고 공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작금의 동아시아가 불안정한 만큼 간절히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집필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大学院で学んだ早稲田大学からの、しかも石橋湛山の名を冠する賞を受賞することになってとても嬉しく思います。石橋湛山は、反戦、反軍、植民地放棄、小日本主義を目指しました。「帝国の慰安婦」は、国家/帝国の欲望に個人がどのように動員され、搾取されるのかを考えてみた本ですから、石橋湛山の思想に図らずも接し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境界を越えて、石橋のような思想を受け継ぎ共有することが本当に必要と、現在の東アジアが不安定なだけに切に思います。そうした賞をいただいたことは、今後の仕事の上でも大きな励みになり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17801724913406

渦中日記 2015/10/22-2

하루에 渦中日記를 두 번 쓴 적은 거의 없다.

이 제목으로 쓰는 내용은 <제국의 위안부>, 혹은 재판에 관한 얘기들이다. 낮에 <제국의 위안부>가 높이 평가받았단 얘기를 썼는데 저녁에는 반대되는 상황을 써야 하니 아이러니다.

오늘, 그동안 진행해 왔던 “조정”이 중단되었다. 따라서 이제, 형사고발에 관한 결정은 검사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제시된 원고측 요구는,
1.사과,
2.삭제요구부분을 000표시한 한국어삭제판을 다른 형태로 낼 것(000표시가 삭제된 내용을 “간접적으로”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3. 제3국에서 내는 책도 한국에서 삭제한 부분을 삭제할 것,
이 세가지였다. 그러면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했다.

나로서는 2번도 일종의 검열이었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다. 대신 3번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일본어판은 번역도 아니고 독자적으로 낸 책이어서 권리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런 요구를 내가 수용해 일본측 출판사에 요구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받은 연락은, 원고측은 일본어판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조정에 부응하기 어렵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2번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 모든 게 아마도 나눔의집 소장의 생각일 것이다. 내가 얼마전에 통화했던 할머니는, 자신이 형사고발인 명단에 오른 줄도 모르고 계셨다.

두통/근육통에서 해방되었나 했더니 오늘은 기침이 심하다. 문득 겁먹으면 기침을 심하게 하던 영화속 러시아의 공주가 생각난다. 잉그리드 버드만이었을 것이다.
겁을 먹은 건 아니지만 긴장되기는 한다. 아무튼 이 달 안에 형사고발에 관한 결정이 날 것 같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17953421564903

渦中日記 2015/10/19

어제 유달리 건조하다고 느꼈던 건 감기가 오는 전조였던 것 같다. 바쁜 일정들 대충 끝내고 좀 여유롭게 지낼 수 있겠다 생각했던 첫날,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결정해야 하는 몇가지 일이 있어서 머리를 아주 쉬어 주지는 못한다.

2주일 전엔 오랫만에 검찰에 갔었다. 이제 곧 결정해야 할 “조정”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여름부터 3회의 가처분재판, 5회의 검찰조사, 3회의 민사재판을 받으며 느낀 것은,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나의 책에 관해 논하는 일의 무의미함이다. “법”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일이란 “이미 존재” 하는 규범에 근거해 사고하는 일이어서, 나와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자체가 다르다는 걸 나는 법학자들의 사고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위안부문제가 학계에서는 어떻게 이해되어 왔고 운동은 어떠했으며 나의 주장은 이러한 것이라는 주장을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말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동안 원고측 주장에 최대한 답변해 왔지만, 검찰은 “정말 나쁜”일을 한 수많은 사람들을 조사하고 구속하는 일만으로도 바쁠테니 국력을 소모하는 일에 나역시 가담해 온 셈이다.

최근 등장한 “고소사회”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 소모가 많은 사회에 살고 있다. 결코 그럴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하긴 늘 그랬는데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만큼 에너지가 넘쳐난다는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고발은, 할머니가 아니라 내가 비판했던 주변인들이 제기했고 주변인들의 의사만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최근에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재판에 대한 나의 회의의 첫번째 이유였다.
법의 억압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답변을 해 왔지만 그런 의미에선 나역시 나를 엉뚱한 방식으로 소모해 온 건지도 모른다. 1년하고도 4개월동안.

날이 흐리다. 비가 온다면 어젯밤 포스팅은 “기우제 포스팅”이 되는 걸텐데. 그랬으면 좋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1641782171846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미국이 한국이 한 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이 한 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안으로는 미군기지촌위안부문제, 밖으로는 베트남에서의 성폭행과 위안소이용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도,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 그런 자신을 돌아보며 대처하기를 바랐었다. 언젠가 그 외침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전에.
물론 문제가 알려지는 것 자체야 문제될 것 없지만, 한국이 가장 열심히 일본을 규탄했을 무렵, 이 문제는 전혀 자각되지 않았었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시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10년전에 쓴 <화해를 위해서>에서 나는 한일간 네가지 문제를 다루었지만,가장 알리고 싶었던 건 그런 뒤틀린 모순구조였다. 하지만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나는 여전히 그들의 억압아래 있다.

미국은 이미 한국전쟁때 UN을 위한 한국인 위안부를 이용했고, 강간도 했다. 따라서 미국역시 한국문제를 거론할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우선은 이 문제를 세계에 알려온 한국의 대처가 주목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문제를 보도한 곳이 경향밖에 없는 듯 하다. 그조차, 다음날엔 일본의 로비를 의심하는 기자의 글이 실렸다.

손가락이 나를 향했을 때 필요한 건, 의도에 대한 의구심이 아니다. 다른 이의 책임을 묻는 일로 “물타기”하는 일도 아니다. 개인도 국가도,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깊이 타자를 볼 수 있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10160053461

http://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51018_0010356275&cID=10100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15735585120020

渦中日記 2015/10/16

예전에 극렬한 말로 나를 비판했던 이가 내 아들과 나이가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발직후였는데 나를 향한 비난의 태도와 말이 너무나 무례해서 페삭했던 친구다. 아직 젊다는 건 프로필사진으로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젊은 줄은 몰랐다. 얼마 전에 돌아다니던, 다른 한 사람을 포함한 “젊은 역사학자”들의 집담회에 대한 반론도 해당잡지에 보낸 참이다. 잡지가 나온 후에 페북에 올릴 생각이다.

이들은 좌담에서 나를 “이사람”이라 호칭하면서 시정잡배(이 단어에 해당하는 여성명사가 있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취급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선배학자도 마찬가지였으니 특별히 이들을 겨냥해 비판할 필요도 없지만, 반론을 쓰기 위해 이들의 잡담을 제대로 마주 하면서 나는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학자”(學者)란 배우는 사람들이기도 한데,이들에게선 배우는 자의 겸손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키운 건 나를 포함한 50대이상의 부모들이기도 하니,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https://www.facebook.com/choi.hyunsook.52/posts/1056598247704611

최현숙

이 글을 여기에 싣는 것이, 보다 논의를 진전하고 싶어하시는 제 페친 한 분에게 기분나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저의 글에 관한 그 분의 글에 달았던 저의 댓글을 여기에도 나눕니다.

그 분은 오늘 아침에 올린 남성노인 구술생애사 관련 제 글에, 박유하 교수와 제가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고’의 댓글들을 붙인 것을 읽으시고, 제가 “수요집회에 나가는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에게 “권력화한 할머니들”이라고 부른 박유하 선생에게 지지하며 응원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며, “‘보수 할배’는 구진보의 말이고, ‘권력화한 할머니들’은 새진보의 말일까.(사실 이 부분은 어떤 의미의 말씀이신지 제가 이해가 잘 안됩니다..ㅜ.ㅜ) 선생께서 내게 비판하신 말씀을 더욱 살리고자 이렇게 공개적으로 여쭙고자 한다.”라는 글을 자신의 페북에 올리셨어요.

이에 제가 아래의 댓글을 올렸고, 박유하교수를 포함한 페친들과 함께 이 고민을 나누고 싶어 여기에도 올립니다. 그 페친 분과 박유하교수에게 공연한 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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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댓글

아, 이제 봤네요…^^ 글을 쓰면서 제 생각을 정리해 볼게요.

1. ‘보수할배’ 관련 제 글은 000 님의 글을 보면서 쓴 게 아니에요. 저는 지금도 000님의 그 글을 보지 못했어요. 그 이전 ‘천박함’ 관련 제 글에 대한 000 님의 ‘지하철에서의 이야기’ 댓글은 제가 읽어서 알고 있고요. 제가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고 있는 남성노인이 월남전을 참여하신 분이고, 일부 진보인들은 ‘월남전참전’ 이야기만 나오면 ‘보수할배’와 직결시키는 경향이 있어, 그 전형화와 규정에 대한 제 문제의식을 글로 쓴 거였어요. 생애사 작업 중에 제가 보게 되는 그 분의 정치적 성향은 비교적 보수적이지만, 나름대로의 기준과 판단으로 김대중과 노무현과 정동영에게 표를 주었고 그 다음에는 박근혜에게 표를 주었고요. ‘진보’라는 단어가 그렇듯 ‘보수’라는 단어 역시 삶과 선택의 세세한 맥락들을 무시한 채 너무 상대를 규정하고 전형화하며 쓰여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2. 박유하 교수와 정대협 간의 논란은 제가 자세하게 추적하지는 않은 상황이고, 심지어 그녀의 책 “제국의 위안부”도 아직 읽지 못했으며, 그녀의 구체적 입장과 판단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몇몇 문구나 어떤 행위들만으로 그녀(의 학문적 추구)가 논란과 매도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1) 정대협이라는 단체의 많은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양한 욕구와 상황들이 정대협 안에서 충분히 배려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어요. 많은 사회단체 활동들을 통해, ‘단체’라는 것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정대협과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2) 박 교수의 글이나 생각이 학문적이고 개인적인 많은 맥락과 고민 속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지나치게 흑백논리로 분류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여져요. 그 흑과 백 사이의 ‘위험하지만 절실하고 요긴한 경계들’에서 박 교수가 학자로서 갖고 있는 다양하고 섬세한 고민들과 차이들은 온통 삭제당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욕보였다’느니 ‘친일적’이라느니 규정당하고 있지요. 사실 박 교수는 ‘경계에 서는 위험’과 논란과 비난과 매도를 아마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많은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학자로서의 자신의 학문과 싸움을 성실하고 당당하게 하고 있다고 저는 보아요. 어떤 판결이 나느냐, 어떤 보도자료들이 나오느냐, 위안부 문제 관련 그녀와 나의 생각이 얼마나 같고 다르느냐와 상관없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추구를 진행하고, 나아가 오해와 매도로 인해 발생해서 자신에게 닥쳐온 법적 시비를 “자신의 싸움‘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그녀가 감수하는 위험과 자신에게 온 싸움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 대해, 저는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14859168540995

연구자의 윤리

이미 페친이 아니지만 “젊은 학자”김헌주는 학술지<역사문제연구> 에서, 내가 웃는 얼굴의 조선인 위안부 이미지를 사용한 곳이 “위안부는 20만명이 아니고 상대한 일본군의 숫자도 적으며 연애도 했다”는 내용을 말한 곳이라면서 “명백”히 “의도적”이고 “비겁”하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33쪽은 물론 사진에 대해 언급한 31쪽에도, 32쪽과 34쪽에도 그런 내용은 적혀 있지 않다. 설사 내가 그런 의도로 사진을 사용했다 해도 사진을 어디에 넣을지 정한 건 출판사지 내가 아니다.

내가 이 사진을 사용한 건 “강제로 끌려간 소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사진을 찍은 일본인 기자가 조선인 위안부의 웃음을 “망향의 념을 떨치버리기 위한” 모습으로 읽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년전에 <화해를 위해서>를 쓸 때는 나는 이 사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강제로 끌려간 소녀”의 이미지에 균열을 만드는 자료로서 언급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를 쓸 때 사진이 실린 원본을 찾아보니 그동안 이 사진이 기자의 설명이 빠진 채 유통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굳이 사진을 사용한 이유는 표면적인 것만 보지말고 빠진 설명까지 참고해서 보자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헌주는 이 설명은 빼고 게재할 뿐 아니라, 표면적인 내용에만 언급해 나에 대한 적대를 유도한다.

그의 “불편”함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을 벗어나는 이미지를 벗어나는 여성들을, 바로 그자신이 부정하고 배제하고 혐오하기 때문에 생긴 불편함이다. 다시 말해 그 사진에서 오로지 표면적 “자발성”만을 읽어낸 건 내가 아니라 오히려 김헌주다. 일본인기자조차 갖고 있었던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우리의 “젊은 학자”들에겐 없다.
물론 나눔의집 관계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가 제시한 또다른 이미지를 오로지 부정해야 하는 무엇인가로 여겼다. “박유하는 위안부를 자발적인 매춘부라 했다”고 보도자료에 써서 배포했지만 그렇게 본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이미 수십번 쓴 얘기지만, 내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이 그렇게 사용했기에 인용하며 비판한 문맥에서였다. 서경식선생조차 “구조적강제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나를 비판했고 이후 같은 비판을 반복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개념은 바로 내가 십년전에 제시한 개념이다. 이들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명백한 표절에 해당한다.

자신들이 기대하고 희망하는 여성상을 벗어난 여성에 대한 혐오는 여성자신도 공유한다. 지원단체관계자들이 내 책이 할머니들을 비난한 책인 것처럼 간주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매춘이라는 주장도, 아니라는 주장도, 매춘을 혐오하고 차별한다는 점에서는 닮은 꼴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만든 왜곡된 보도자료와 고발때문에 나는 일년 3개월동안 전국민적 비난에 시달려 왔다.

내가 제국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인 위안부와의 위계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들의 비난은 일본을 비판한 부분을 완전히 도외시한 비난이다. 다시한번 읽고 사과해 주기 바란다. 책을 편파적으로 읽고 비난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발이 당연하다고 말한 것을, 부끄러워 해 주길 바란다. 물론 다른 “젊은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김헌주의 발언이야말로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나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한 학자의 고민에 대해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니면 말고”로 끝내기엔 내가 받은 고통이 너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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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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渦中日記 2015/9/23

<머니투데이>의 김사무엘기자와 오래 얘기했는데,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음성입력을 했더니 핸드폰이 뭐니(!)투데이라고 받아적기에 잠깐 웃었다.)
그래서 오늘은 <머니투데이>의 다른관계자와 통화하고 “동지적관계”라는 단어가 사용된 전후맥락을 참고해 달라고 했다.

이하는 책 몇쪽을 사진찍어 보내면서 덧붙인 글.
——–

“동지적 관계”라는 개념이 사용된 부분을 보냅니다.
보시다시피 우선은 다른 나라의 위안부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다는 점, 일종의 국민동원이었다는 점, 그리고 중국등, “적”이 아닌 “동일한 일본인”으로서 나가게 된 건 우리가 식민지 지배를 당했기 때문이고 그러나 그 안에 차별과 폭행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시 말해 식민지배의 본질은 눈에 띄는 폭력보다 눈에 띄지 않는 통치기술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입니다. 군인과의 의외의 관계도 그런 구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그것을 말하는 이유도, 일본에 책임을 묻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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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02736589753253

渦中日記 2015/9/22

오늘 또다른 기사를 봤다. 제3차 공격이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검찰이 1년 이상 기소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이 부담되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면 내가 검찰조사도 안 받았고 내 쪽에서 조정을 신청한 것처럼 되어 있다. 또다른 오해를 유발시킬 수 있는 기사다.

나눔의 집은 삭제판도 내지 말라고 한다. 조정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질문했더니, 김향훈변호사님이 “해설”을 써 주셨다.

https://www.facebook.com/kimhh.lawyer/posts/960997897275385

http://www.diodeo.com/news/view/119712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01869916506587

渦中日記 2015/9/13

문예춘추사에 보낼 짧은 원고를 쓰는 중.
해마다 그해의 중요문제에 관한 해설과 해법을 정리해서 발간한다고 하는데, 참고용으로 보내 온 작년도 목차를 보니 작년에 위안부문제를 담당한 건 산케이신문기자다. 이 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부정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대체적으로 보수인사들이 많아 보이지만, 국가의 여성정책에 대한 우에노치즈코선생의 비판글을 게재한 걸 보니 균형을 잡으려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지난번에 <월간문예춘추>인터뷰에 응한 건 강제연행이라는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중인 아사히신문의 우에무라기자의 글을 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우파일본인기자가 아니라 한국인인 나에게 의뢰했으니 조금은 일본보수층이 변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다른 글도 완성해야 해서, 오늘은 아름다운 가을날을 집안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가학적 하루가 될 예정. ㅠ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94277560599156&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9/11

김곰치작가님이 재판에 대해 궁금해 해주셔서 간단히 씁니다.(관심,고맙습니다.😊)

1.가처분 소송
지난 2월에 원고가 지적한 53곳 중 34곳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출판, 판매 등등을 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났고 이에 따라 지난 6월말에 지적된 부분을 000 처리한 삭제판을 발간했습니다. 현재 서점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출판사와 함께, 판매수익은 전부 동아시아 평화운동에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판결에 대한 이의신청을 준비중입니다.

2.민사소송
지난 5월과 8월에 서울 동부지원에서 두 번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세번째 재판이 10월7일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3.형사소송
검찰이 조정을 권해 조정위원회가 작성한 두번째 조정안을 받은 참입니다. 고발날짜에서 벌써 1년 3개월이나 지난 상태라 조만간 결정해야 하고,만약 성립되지 않으면 기소여부가 결정됩니다.

문안 중에는 “(가처분)결정 주문 1항에서 금지한 행위를 한국 및 제 3국에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하지 아니한다”는 구절이 있어 원고측이 의미하는 바를 확인 중입니다.
결정주문 1항이란 “(인용목록의)밑줄친 부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서는 위 도서를 출판, 발행,인쇄,복제,판매,배포및 광고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내용입니다.
최종 확인이 필요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원고측의 요구는 “일본어판등 해외판과 함께 한국어삭제판도 판매금지” 인 듯 합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93119434048302&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9/6

한 달 전에 나온 책을 이제야 읽을 수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관해 학계의 첨단을 가는 학자들이 출간해 온 시리즈중의 한권. 이 책에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이 4반세기의 연구와 운동의 궤적에 대해 정리한 논문이 실려 있었다.

일본역사학계의 주류는 아직 진보학자들인데, 이 글은 자신들을 향한 내부비판적 글이기도 했다.
시기별로 오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로 국민기금, 강제연행기사 취소후의 아사히신문에 대한 공격과 함께 나의 문제제기까지 포함한 세가지를 들고 있었다.

작년 11월에 일본어판을 낸 이후 예상밖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위안부문제전체 흐름 속에서 나의 문제제기를 분석하고 또 정확히 읽어낸 글은 이 논문이 처음이다. 저자는 현대사상학자와 일본역사학자.
10개월만에,아니 한국어판을 내고 2년만에, 나의 문제제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여준 학자들의 글을 만나 기쁘다.

일부를 우선 번역해 둔다. 이 책을 편집한 역사학자는 내게 “앞으로 위안부문제를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이 논문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겁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

국민기금을 둘러싼 시도가 <적>의 공격으로 단순화된 방식으로 이해된 것은 이 시기의 하나의 불행이었다.(234)

비판자들 안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오지 않았다.(중략)

어떤 소녀상을 사용해 피해자의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일이 갖는 복잡한 정치학에 관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젠더문제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선 안되는 문제일 터였다.(237)

(90년대초에는)피해자의 아픔에 반응하는 자세나 내용도 결코 아사히신문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를들면 산케이신문의 오사카판이나 요미우리신문에서도…(238)

산케이신문의 1993/8/31 기사는 <인권고찰>특집에서 <인생을 걸고 실명재판>이라는 제목으로 김학순할머니 의 증언을 게재했었다(239)

1991년 이후 언론이 일본군성폭력피해자문제를 얼마나 열심히 사회에 전달하려 했었는지는 TV보도나 다큐멘타리까지 포함하면 한층 더 명확해질 것이다.(239)

위안부문제가 이렇게까지 혼돈에 빠져버린 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국내에 존재하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조류의 현실부정에 대해, 그것을 극복할 만큼의 여론형성도 정치적 결단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40)

박유하가 문제제기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 역사인식의 정체에 대한 책임이 일본 정부와 역사수정주의적인 우파 정치가에게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사태경직에 대한 책임의 일단이 정대협에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유하는 그러한 정대협의 문제가 불문에 붙여지고 오히려 권위가 주어진 것에는 일본에서의 지원운동의 자세에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244).

문제는 박유하의 논의에 그대로 찬동하는지 아닌지가 아니다. 비판의 논점을 변경하거나, 명확히 언어화하지 않고 박유하의 논지를 추측만으로 규정하고 는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있다.(244)

박유하의 문제제기는 식민지주의 피해자가 안고있는 집합적기억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244).

박유하의 지적이 옳다고 일본인인 본고의 저자가 말하는 이 배치자체가, 일찍이 식민지 지배를 받은 사람들한테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정치적으로 문제를 움직여 나가는 일이 가능한 국면을 스스로 포기하는 정황으로 이어질 것이고, 대립은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246)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시도나 주장을 운동을 분단하는 <적>으로서만 상정하고 그 주장과의 차별화나 결연한 거부자세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안심을 얻는 내적회로가 (운동가와 연구자들에게)생긴다.(249)

….한국의 운동은 그러한 오해와 (문제의)왜소화를 한편으로는 인식하면서도 운동의 역동성속에서 그러한 정황을 바로잡거나 (문제를)심화시켜 나가는 일에는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25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89922024368043

渦中日記 2015/7/29

정우성대표님이 올려 주신 마이니치 신문 칼럼을 번역해 보았다.
군인과 위안부관계를 강조하는 부분등 한두군데 불편한 곳이 있지만( 그리고 검찰에선 “사정을 들은”것이 아니다. “범죄리스트 53개항목”에 대해 아침부터 저녁늦게까지 “조사”를 받았다.) 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제국”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이만큼이나 제대로 읽어내고 또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준 이는 많지 않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해 두자면 책의 인세는 변호사비용 착수금도 되지 않는다. 물론 세금을 내고 나면 한참 미치지 못할 것이다. 조정이 성립하거나 이길 경우엔 성공보수를, 질 경우엔 2억7천만원을 또 지불해야 한다. 2심,3심 갈 지도 모른다.
아무튼 착잡한 건, 일부나마, 일본에서 책 판 돈으로 한국의 재판비용을 대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팔리는 책은 앞으로 공적비용으로 쓰기로 한지라 더욱 그렇다.

나는 위안부할머니와 한일갈등해소를 위해 책을 썼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한 건 결국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 된다는 얘기가 된다. 나를 비난하는 이들이 곧잘 하는 소리인 “일본이 듣고 싶어하는 소리”가 아니라 별로 듣고 싶지 않았을 소리에 귀기울이는 일로. 그리고 그 상황이야말로 재판을 일으키고 지지하는 이들이 원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지독한 아이러니를 알까.

아무튼, 기존 운동이나 연구와 별 관계없는 사람들은 이 편집위원처럼 허심탄회하게 읽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주었다는 걸 이 9개월동안 느껴왔다. 물론 소수지만 관계자들 중에도 감동했다고 말해 준 이들이 있어 고마웠다.

야마다위원은 아베수상의 70년 담화를 위한 지식인모임의 멤버라고 한다. 영향이 있을지 여부는 더 지켜봐야겠다.

——–

<제국의위안부> 다시 읽기 야마다 다카오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교수가 고군분투를 이어가는 중이다.<일본군의 위안부-성노예>설을 부정한 노작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 한국에서 판매금지처분을 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본 칼럼에서 전에도 한번 이 책에 대해 언급했는데, 제2차대전종료후 70년, 한일국교정상화 50년이 되는 지금이야말로 <제국의 전쟁>을 분석한 이 저서의 깊은 통찰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의 키워드는 <위안부>지만,그 이상으로 <제국>이다.
제국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나라가 강대해지면서 다른 여라나라들을 합쳐 더 큰 나라가 된 것>( 신명해국어사전)이다. 제국주의란 <다른 소국의 권익/존립을 희생시키더라도, 자국의 영토/권익의 확대나 신장을 꾀하려는 침력적경향>(앞의 사전)이다

제국의 역사는 길지만, 근대사의 제국은 19세기의 유럽열강이다. 일본은 열강의 아시아 진출에 대항해서 제국이 되었다. 제국은 새로운 영토나 자원을 찾아 먼나라로 군인이나 상인을 보냈다. 그 지점에 위안부의 수요가 있었다. 가난한 집 딸들이 돈으로 팔려갔고 알선업자가 있었다. 인권같은 건 돌아보지 않았던 시대였다.
위안부는 그런 경제사회구조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이해는 과격하기는커녕, 국제사회가 본다 해도 이견은 적을 것이다.

저자는 위안부 증언집이나 일본의 전쟁문학을 꼼꼼하게 읽고 위안부와 일본군사이에는 사랑도 우정도 있었다고 썼다. 그것이 본질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노예적인 지배/복종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논했다.
이 책은 한국어판이 4000부, 일본어판이 15000부 팔렸다.

작년 6월, 전 위안부 9인이 한사람당 3000만원의 손해배상에 더해 출판/광고를 금지하는 가처분을 청구. 금년 2월에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34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도 광고도 할 수 없다는 가처분이 나왔다.
박교수는 지난 달말에, 복자를 많이 사용한 삭제판을 1000부 간행하는한편, 본소 준비에 들어갔다.
그 동안, 도합 5회 검찰이 사정을 들었고 명예훼손죄에 의한 기소는 불가피한 정세인 듯 하다.
제소 배경에는 <일본은 천황제와 사무라이전통에 근거한 툭수한 군국주의국가다>라고 하는 위안부지원단체의 생각이 존재한다.

박유하는 일본의 선의를 논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과거를 제국주의 세계사를 기반으로 분석하려 하고 있다.
자본과 군의 이동은 필연적으로 <여성의 상품화>를 초래한다. 지금도 전세계군사기지 주변에 <위안부>가 보인다. 박교수의 문제의식은 그 지점에 있다.

박교수는이렇게 썼다.

< 위안부지원운동은 비판대상을 일본이라는 고유명으로 한정시킨 결과,위안부문제를 “남성과 국가와 제국”의 보편적 문제로 취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국이나 미국을 비롯한 일본이외의 나라도 이 문제에서 무죄일 수 없다는 점을 오래도록 못 보게 만든 것도 그 결과일 것이다..>

한일의 불화는 양국에 고유한 의심과 미성숙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역사가 만든 것이다. 일찌기 서구에 추종하며 강자로서 아시아를 지배한 일본은 타자를 지배하는 서양기원의 사상을 넘어 국제사회를 평화공존으로 이끄는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이해를 얻어 가며 도전하고 싶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65405096819736

渦中日記 2015/7/28

우연히도, 어제와 오늘,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에서 나에 대해 언급한 기사가 났다. 어제 칼럼은 정우성대표님이 태그해 주셨으니 오늘기사만 우선 번역해서 올려 둔다.
마이니치신문은 얼마전부터 90년대에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실시했던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심층취재한 기사를 연재중이다. 그 공과(功罪)를 마주하려는 기사인데, 이렇게 말하는 기금에 대해 사죄의식이 없는 “꼼수”였다고 말한 것이 지원단체들이었다. 나는 책에서 그 부분을 비판했는데, 할머니들을 비판한 것처럼 왜곡유포된 것이 고발이라는 사태였다.

이달말로 닥친 형사고발조정과 다음달에 있는 민사재판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변호사사무실로 향하는 오후.
——

못다한 식민지책임

<전후일본의 반전사상이 국민들에게 뿌리내린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식민지지배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오지 않았던 거 아닐까요>

금년 6월, 동경의 호세이대학에서 열린 일본사회문학회 30주년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한 한국/세종대 박유하교수는 그렇게 물었다.

부부이야기로 읽히는 경우가 많은 나츠메소세키 <명암>에는 가난 때문에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 근대소설을 바탕으로 박교수는 제국이 국민의 이동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 이주가 전쟁을 염두에 둔 국책이었다는 점,일본에서의 기민(棄民) 들이 식민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적했다.

그리고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요한 건 누구나가 기피하는 일을 가장 가난한 이들이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강제인지 매춘인지 하는 논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
그의 전문인 일본근대문학에 그려진 식민지의문제는, 역사문제논의에도 반영되었다.

2006년,아시아여성기금이 연 국제심포지엄에 패널로 참석했던 박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더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발언했었다.
금년 5월에 서울에서 식민지에 대한 관심에 대해 다시 물었을 때도 <개인적으로 차별당한 경험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인여성이라는 사실은 관계가 있습니다. 좋아해서 시작한 소세키연구가 진보지식인으로 불리는 것에도 의문을 가졌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저술한 것이 화제작 <제국의 위안부>이다. 교토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금년 2월에 열린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워크샵에서는 왜 썼느지,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햇다.
<위안부가 목소리를 낸 1991년, 누구나가 식민지지배문제로 이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 위안부문제논의에서 제국의 문제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본남성의 문제로만 축소되었습니다 >

<조선의 여성은 “애국”을 당했고 일본인이 되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 조선인 위안부상을 통해 식민지지배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 겁니다. 일본이외의 다른 제국국가의 문제도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서구일본학자들에 의한 금년 5월성명에는 <제국에 관련된 인종차별, 식민지주의와 전쟁,그리고 그것이 (중략)시민들에게 끼친 고통과 충분히 마주해 온 나라는 아직 어디도 없습니다> 라는 말이 이오진다. 그리고 일본정부에 대해 <과거의 식민지배와 전쟁당시 침략문제와 마주하라>고 요구했다.

박교수의 화해방안은 책임을 무화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한국판을 둘러싼 형사/민사쟁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책임은 과거의 제국 전체를 향한 난제가 아닐까.(기시도시미츠. 岸俊光)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64918446868401&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일본단상

일본에 관해 쓴다 해 놓고 한동안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얘기만 올렸다. 이제 가끔 본론을 쓰기로 한다.,

——–
1. 망각된 “전후일본”

아베정권의 집단자위권에 반대하는 일본인이 60퍼센트가 넘는다는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중 어디도, 놀랍다는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늘 생각해왔던 “군국주의국가”라면 국민들이 나서서 찬성해야 하는데, 그런 국민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편”이 되어 준 듯한 일본을 어여삐 여기는 보도들만 넘쳐날 뿐이다.

하지만 정말은 그런 일본이, 일반적인 일본인 다수의 모습이다. (집단적자위권 문제에 관해선 더 섬세하게 논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다시 쓸 생각이다.)
심지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무라야마수상의 여러정책도, 그저 악의 화신인 것처럼 얘기되는 자민당의 국제정책을 이어받은 것이었다(아사노토요미). 그리고 내가, 십년전에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에서 중점적으로 쓴 건, 그런, 전후일본과 그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였다.

물론 전후일본의 한계나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다. 하지만 한계를 말하려면 우선 대상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충분히 알아야 한계를, 그리고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전에 쓴 적이 있지만 한일협정을 맺고 국교정상화를 했어도, 우리가 일본의 맨얼굴(문화/일반인)을 보기 시작한 건 아직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내가 썼던 얘기는, 일본전후는 기본적으로 이전과의 단절을 결심하며 시작된 시대였고, 그러다 보니 국민들에게 반전사상/평화주의가 정착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애국심이 없어진 국민들을 우려하거나 미국으로부터의 자립등을 생각하는 우파들의 목소리가 그에 반발해 커진 시기가 가끔 있었고, 그걸 일본의 “본질”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의(주로 일본좌파가 견인. 기본적으로는 정치적위기의식과 자성에서 비롯된) 목소리만 보도되면서 그것이 “전후일본”인 것처럼 간주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전후일본”에 대해 아직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전후사상”의 핵심에 있었던 지식인으로 꼽히는 가토슈이치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물론 그렇게 된 건 나를 비롯한 일본학연구자들의 책임이다. 나역시도,가라타니고진등 현대지식인은 소개했지만( 일본에 이른바 “양심적지식인”이 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을 때 얘기다), 마루야마마사오, 가토슈이치, 요시모토다카아키등의 존재를 소개하는 일엔 태만했다(마루야마는 많이 번역되었지만).
문학조차도, 우리 앞에 놓인 건 소세키니 미시마등 근대작가에서 갑자기 현대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중심이고, 그 사이에 놓인 노마히로시나 오오카쇼헤이(그에 관해선 문학시리즈에 넣었지만)에 대해선 알려지지도 읽히지도 않는 것이 현황이다.

물론 타국의 문학과 사상을 꼭 체계적으로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현대일본을 알기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전후일본”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은 우리의 일본이해를 결정적으로 왜곡시켰다. 그러는 사이에 “전전일본=전후일본”이라는 지극히 단선적인 이해만 팽배하게 되었다.
일본과 다시 마주하려면,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아는 건 아주 적거나 왜곡되었었다는 자각부터 필요하다.

지난 주말심포지엄은, 일본에서조차 포스트모던이후 비판에 급급해 그런 전후사상을 잊거나 폐기하려하는 현대일본정치에 대한 위기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다시한번 “전후일본”의 근간을 만든 “전후사상”을 재검토해 보자는 취지의 심포였다. “빛과 그림자”에 대한 열띤 토론이 있었고 11살때 패전을 맞은 81세 노학자와 “영속패전론”을 쓴 37세 학자가 한자리에 모여 선배들의 “지의 양상”에 대해 검토하고 고민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조차 했다.

깊이 알아야, 폐기든 망각이든 계승이든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를 마주하는 방식”은, 잘 알지 못하는 채로 그저 폐기하려 하거나 옹호할 뿐이다.
하지만 후대가 할 일은 전부 버리거나 전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죽은자를 둘러싸고 그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빛과 그림자”를 냉철히 들여다 보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후대이기에 가능한, 특권이기도 하다.

주말심포에서 만난 역사학자 나리타 류이치 선생은
1919년에 태어나 7년전에 작고한,”9조의 모임”의 발기인이기도 했던 가토슈이치에 대해 쓴 책<
가토슈이치를 기억한다–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은 일본의 “패전후”에 어떤 물음을 던져왔는가>는 제목의 책을 건네 주었다.
이 모임을 주최한 70세 불문학자 미우라선생은, 가토의 생일인 9월19일에 가토에 관한 강연회를 연다고 했다. 금년 강연자는 우에노치즈코선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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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이런 일이 반복된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이런 일이 반복된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들은 일본이 꼼수를 부리려는 것으로만 보도하지만, 이번 대상은 어디까지나 “메이지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다. 1868-1912,즉 메이지 천황이 통치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시설들이다. 말하자면 정확히는 일제시대 이전의 설비들이니 한국이 꼭 직접적인 관계를 주장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그리고, 1925년에 나온 “女工哀史”라는 책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의 노동자 착취는,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곳에 조선인노동자의 땀과 피와 눈물이 존재했다면 , 비록 시기가 다르더라도 기억되고 보존되는 일의 의미는 크다. 그랬기에, 시설들 어딘가에 그런 설명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나도 생각했다. 그래서 6월말 한일 외교당국자들이 “주석”을 다는 형태에 합의했다기에 안심했었다. (최근 기사들을 보면 설비가 아니라 등재 신청서에 적는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그런데 직전에 한국당국자들이 생각을 바꾼듯 하다.
민족문제연구소등이 본까지 가서 반대시위를 했으니 그런 영향을 받은 걸까. 민디코틀러씨가 등장한 걸 보면 위안부문제 관련자들도 가세한 듯 하다.
코틀러씨는, 2007 년미하원에서 위안부문제 결의안이 통과되도록 힘쓴 사람이다.

하지만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사안사안에 따라서 신중하게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결과로, 이 문제는 더 이상 역사문제도 아니고 정치문제도 아닌 “신뢰문제”가 되고 말았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간 협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중 하나는, 뭔가 조치를 취해도 최종적인 해결이 되지 않고 또다시 사죄요구를 해오지 않을까 하는 불신에 있다. 이번 일로, 한국과는 어떤 약속을 해도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 더 확산될 것이다. 8월 이전에 어떤 조치가 취해질 가능성도 한걸음 더 멀어졌다.

물론 옳기만 하다면 한번 정해진 일이라도 번복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일본에 관한 한국의 생각은, 충분치 않은 정보와 인식과 적대의식이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점.

몇 년 전에 미국에 있었을 때 느꼈던 일 중 하나는 한국도 일본도 아주 작은 나라라는 거였다. 중국만 약간 존재감이 있었을 뿐.
불행한 일이다.

http://m.mk.co.kr/news/headline/2015/638250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

http://sp.mainichi.jp/select/news/20150705k0000m040048000c.html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50534851640094

渦中日記 2015/6/30

6월 마지막날, 오늘은 검찰에서 두번째 조정위원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담당변호사가 혼자 가겠다 해서 나는 집에서 오늘이 마감인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늦은 오후. 받아든 조정안을 보니 짓누르듯 내려오던 하늘처럼, 가슴이 막혀 온다.

도처에 폭력과 불합리와 거짓과 무책임이 만연해 있다.
오늘은 고작 10살짜리 아이들이 친구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했고, 피해자임에도 피해가 묻혀지려 한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봤다. 그 아이들을 만든 어른들,사회와 나의 사건은 무관하지 않다.

비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파란 하늘을 보고 싶다.
맑은 하늘은, 언제 볼 수 있을까.

작성일: 2015.06.30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47597528600493

渦中日記 2015/6/25

삭제판 <제국의 위안부>가 나왔다.
가처분 결정이 난 지 4개월 만의 일이다.

참담한 심경이지만, 어쩌면 그저,
전염병, 가뭄, 자살, 빈곤사, 부패, 유명작가의 표절…등등으로 혼란스러운, “표류하는 대한민국”의 또하나의 얼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국가의 얼굴”로 삿대질했던 목소리들의 결과물.

이 책의 수익도 평화를 만드는 담론의 생산과 확산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불행한 책이지만, 내용을 이해하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읽어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43896005637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