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4/8/16

지난 주말에 끝낼 예정이었던 재판소제출용 자료준비를 아직도 못끝내고 있다..

이번주엔 두개의 공식모임이 있었는데 하나는 참석했다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십분만에 나왔고, 또 하나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젠, 세월호집회에 잠시라도 갈 생각을 했는데(지난번에 갔을 때 집회 진행방식에 회의하긴 했지만), 특별히 많은 이들이 오는 만큼, 어쩌면 나를 비난했던 이들과 만날 수도 있단 생각이 들면서 의욕을 잃고 말았다.
고발사태에서 오늘로 두 달. 아직도(나를 알 수도 있는)불특정다수가 모이는 공간이 불편하니 고발이전의 나로 돌아가기까진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사진은, 뒤늦게 전달되어 열어본 편지에서 나온 글. 나에게 보내는 응원편지와 함께 들어 있었다. 탄원서 서명은 많이 받았지만, 직접 판사에게 보내는 탄원서는 이번이 처음. 고마운 마음과 함께, “무죄”라는 단어를 보고, “혐의자”로서의 자의식이 꼭 과대망상만도 아니었단 걸 알 수 있었다. 26세. 전남 광양시의 청년으로부터의 편지.

어젠 일하는 사이사이,그동안 지지하고 응원해 준 페친의 글들을 비로소 다시 보았다. 서평조차도. 그런 두 달이었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40005559359692&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8/7

소장에 있었던 <문제>시 된 부분에 대한 반론을 쓰는 중. 한번 공개된 글은 특별한 경우 아니고는 거의 다시 안 보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여름,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民事裁判用の資料を作っている。100箇所以上の「問題」とされたところにすべて、いちいち反駁しなければならない。人生で、もっとも暑かったと記憶されることになるだろう夏の日々。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4231029937145&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8/12

재판자료 준비로 일주일 이상 이어졌던 근신상태에서 잠시 벗어나 가졌던 보양식&술자리는 즐거웠다. 사진가와 시인과 피아니스트. 그들은 웬만한 학자들보다 훨씬 명민한 사고의 소유자들이었는데, 아마도 그들의 예술과 책의 힘일 것이다.
최근에 그런 경우를 자주 본다. 어떤 분야든 자신의 일에서의 경지가 그대로 세상을 보는 눈의 깊이가 되어 있는 것을. 그런 이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갈 수 있으니 행복한 일이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38202442873337

渦中日記 2014/8/12-2

며칠전에 했던 모월간지 인터뷰가 결국 게재되지 않게 되었다고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 그런 결정을 내린 건 데스크가 아니었다고. 기자는 죄송하다 말했지만 그의 선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섭섭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언론왜곡”을 문제시한 그의 노력을 짓밟은 해당언론이 안타까울 뿐.

나에 대한 고발사태가 안타까운 건, 혐한주의자들이 “한국엔 언론의 자유조차 없다”면서 한국때리기의 또하나의 근거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이 개인적인 일을 넘어서 한국의 위상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38207342872847

渦中日記 2014/8/13

낮에 잠깐 올렸던 <실리지 못한 인터뷰>를 몇시간 후에 내렸다. 한번 수락했던 기자가 그래 주기를 다시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진지함과 선의로 기사를 만든 그가 불이익을 당하는 건 원치 않았기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다른 곳과 인터뷰. 마지막에 말했다.
“내가 한일관계에 대해 말하는 건 냉전을 넘어서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는 제국과 냉전을 경험했고 유일한 분단국이기도 합니다. 강대국의 세력다툼에 말려들어 제국과 냉전을 경험한 우리에겐, 그런 역사성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만드는 주체가 될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 책을 써야 했던 이유입니다.”

며칠전에 70세 넘으신 지인이 후원하고 싶으니 계좌번호 알려달라 해서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는데, 오늘은 새로 페친이 된 16세 중학생이 느닷없이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우선은 마음만 받겠다 했지만,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경험을 또하나 했던 날.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840404951984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8/10

비바람이 친다. 보통때 같으면 그 풍경에 그냥 자신을 내맡겼을텐데 오늘은 감상에 빠질 수도 없다. 광화문에서 단식투쟁할 이들의 곤혹스러움도 함께 떠오른다.

재판자료준비를 하면서 우울한 건, 책을 쓰면서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들까지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쓴 얘기가 부정, 혹은 곡해당하니, 소송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굳이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자료까지 사용해야 한다. 그런 아이러니 앞에 놓이게 된 것이 많이 우울하다.

사진은, 위안부에게 의뢰받아 모르핀 외 군용약품을 반출하려다가 “영창20일”의 처분을 받았다는 자료. 1941년, 일본 육군군인/군속들의 <非行표>.
수많은 일탈행위들 속에서, 수많은 드라마를 본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635571639134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와중일기(渦中日記)를 시작하면서

“와중일기”를 쓰기로 했다. 존경하는 지인이 보내준 “난중일기를 써 보라”는 메시지를 받고 든 생각이다.

위안부할머니들에게 고발당한지 한달 하고도 스무날. 이제 고발사태에 관한 해명이나 심경이 아닌 다른 글을 올릴 수 있을 만큼은 마음의 안정을 찾은 기념이기도 하다. 이 사태가 종결되는 시점까지가 될터인데,5년이 될지,혹은 한 달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사태”추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앞으로 <와중일기>만 봐 주셔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일본이니 미국에까지 알려지는 바람에 사태를 알고 걱정해 주고 있는 일본인 지인들을 위해 가능한 한 일본어로도 쓰기로 한다.

사태에 관련된 일들은 가능한 한 기록할 생각이지만,모든 일기가 그렇듯 누락되는 일도 있을 것이고
공개일기인 만큼 쓰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한 한 빠짐없이, 공개가능한 범위의 일은 기록할 생각.
독백으로서의 “일기”인 만큼 어쩌면 댓글을 써주셔도 답글을 다는 “대화”는 생략할지도 모르겠다. 혹 그렇게 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를. 물론 감상을 남겨 주시면 어떤 의미에서건 “우리시대의 한 기록”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日本語ユーザーのみなさまへ

もと慰安婦の方々から告訴されてから一ヶ月と20日が経ちました。日本語ポスティングは基本的にはFacebookページとツイッターに限ってましたが、それさえもあまりできない状態でした。
ようやく少し落ち着いてきたので、訴訟に関係する日々の出来事や思いを<渦中日記>とのタイトルで書いていこうと思います。全部では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できるだけ日本語でも書いていくつもりです。
ただ、対話ができるかどうかはまだわかりません。それでも感想を残してくださるなら、それもひとつの時代の記録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작성일:2014.08.07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34226483270933

渦中日記 8/7-2

오후에 모월간지와 인터뷰를 했다.의뢰가 왔을 때 주저한 이유가 두가지 있었지만,결국 수락한 이유는 기자가 고발사태 이후 나와 책에 대해 나온 언론보도에 왜곡이 많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기사내용은 물론 제목까지 확인하고 합의된 시점에서 내보내기로 약속.

만나보니 그의 문제의식이 진심인 것 같아 다소 안심했는데,그런 나에게 “기사가 나와봐야 안다”고 견제구를 날린 건 인터뷰에 동석해 주었던 젊은 친구들.
기자를 믿지 못한 건지 나를 믿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한달 전부터 이들이 너무나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34622456564669

조선일보 게재 <제국의 위안부> 서평에 대한 반론

조선일보 게재 <제국의 위안부> 서평에 대한 반론

일전에 조선일보에 실린 서평에 대해 반론을 쓰겠다고 했더니 지면을 내주겠다고 해서 썼는데 결국 실리지 않았다.

원래 서평자와 똑같이  6매만 쓰라는 얘기를 듣고 그에 부응해서 쓴지라 극히 짧은 글이지만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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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2일자 <전봉관의 인문학 서재>에서 나의 책<제국의 위안부>가 다루어졌다. 먼저,”한일 간의 화해를 위한 박유하 교수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하하거나 모독할 의도가 없었던 것도 분명하다”고 써 준 전봉관 교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일본은 사과 않는데 우리보고 반성하라니..조선인 책임론의 함정”이라는 제목에 나타난 것처럼 전교수 역시 나의 책을 오독한 듯 하다.

나는, <일본>에 책임을 묻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조선>업자의 문제에 대해 쓴 것은,일본에 <법적책임>을 지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 온 지원단체나 연구자의 생각이 유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제목에 담으려 했던 것도 “협력을 강요당한 식민지인의 슬픔”이었다.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부제목은, 한일 양국이라기보다 그 양극단—지원단체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의 대립적구조가 오히려 이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전교수는 “지금은 그런 문제를 제기할 시기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상황을 제대로 보지 않는 한 더 심각한 사태가 닥칠 수 있다.

조선인 징병자들은 조선인이었어도 남성에게는 보장된 <법>—근거가 있었기에 적은 보상이나마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위안부들—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에게는 그들을 보호해 줄 <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근대국가시스템의 결함이니 일본이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전쟁>의 문제로만 다루어져 온 위안부문제가 실은 <제국>에 동원된 여성의 문제라고 지적했고, 당연히 “우리가 먼저 반성”해야 한다거나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고 쓰지 않았다. 전교수의 글은 오독을 넘어 명백한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전교수는 그런 왜곡을 전제로 일본이 “사과와 배상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 역시, 지난 20여년에 걸쳐 지원단체가 한국사회에 정착시켜 온 생각일 뿐이다. 지식인들조자 그렇게 믿게 된 상황을 심각하게 여겨,나는 이 책을 썼다.

위안부문제는,국민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한 정보와 인식을 공유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난 6월의 고발사태와 일부언론의 가담은, 지원단체와 언론이 그렇게 생각한 나를 매장하려는 시도였다.

본문:https://www.facebook.com/notes/park-yuha/%EC%A1%B0%EC%84%A0%EC%9D%BC%EB%B3%B4-%EA%B2%8C%EC%9E%AC-%EC%A0%9C%EA%B5%AD%EC%9D%98-%EC%9C%84%EC%95%88%EB%B6%80-%EC%84%9C%ED%8F%89%EC%97%90-%EB%8C%80%ED%95%9C-%EB%B0%98%EB%A1%A0/927164003977181

진보/보수대립과 일본

예전엔 일본에 대한 ‘다른’시각을 말하면 호응해 주는 사람들은 대개 보수였다. 그래서 아마도 나의 페친들 중엔 보수쪽 분들도 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성격적으로도 어릴 때부터 반체제파였고 (심지어 반장을 하면서도 선생님께 저항했다),일본에서 공부할 무렵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대부분 좌파지식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진보적 사고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의 아카데미즘에서 각분야를 선도하는 들은 모두 진보지식인이었으니(일본에서는 혁신,혹은 좌익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이다)탐욕적으로 공부하던 무렵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백하지만 마르크스도 일본어로 읽었고 그 해석도 일본인의 영향을 받았다. 주변의 친구/연구자들도 대부분 전체주의적 제국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한 ‘전후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사상이 특별히 좌파적이라기보다는 삶의 방식과 사고가 자연스럽게 좌파적이 된 이들이었다.

그러다가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라는 책을 내면서 내 주변의 진보지식인들은 분열했다. 실제로 내 책의 서평회를 했던 날,반대파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그 때 토론을 맡아 주었던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 선생은 참석하지 않은 이들을 ‘적앞에서의 도망자’라고 비판했다. 이 때 또 한사람의 토론자로 나서 주었던 정대협관계자는 다른 정대협멤버들에 의한 ‘나가지 말라’는 억압을 무릅쓰고 나왔다고 말했다.벌써 7년전 일이다.
이후 나에 대한 격한 비판이 주로 재일교포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언젠가부터 한국에까지 그런 비판이 전해지게 되었다. 내가 책에서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진보지식인과 운동의 문제점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팔리지도 않았고 따라서 영향력도 없었던 책에 대한 비판을 굳이 한국에서 해야 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일부 진보지식인들의 문제점을 이전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생각은 무조건 ‘우익’적인 것으로 몰고 적대시했는데 거기서 나는 ‘사고정지’라는 빈곤과 그 결과를 보았다.
아무튼 이 때부터 나는 일부 ‘진보’의 경직성과 폭력성을 알게 되었고,대화를 거부하는 ‘진보’보다는 비폭력적인 보수가 궁극의 순간에는 세상에 더 이로울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정의의 전쟁’이 존재할 수 없듯이 어떤 정의도 인권이나 생명보다 소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본을 우경화시킨 건 그런 사고정지자세를 유지한 급진좌파적 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90년대 이후의 ‘일본사회를 개혁’하겠다던 일본의 좌파 운동은 적어도 현재의 일본사회를 볼 때 단적으로 실패한 셈이다. 방법에서 미숙했기 때문이다.우파를 설득하기는 커녕 가까이 있던 이들조차 ‘다르’면 처내고 가능한 한 ‘순수’를 유지하려 했던 탓이다.그런 의미에선 행여 유가족을 선동하는 좌파가 끼어있을까 ‘순수유가족’만 상대하려 했던 우파 정부대변인과 닮은 꼴이다.90년대,아직 일본국민들이 대부분 ‘진보적 생활자’들이었을 때조차 일본의 좌파 지식인들은 소수의 우파들만 바라보면서 ‘일본의 우경화’를 말했다.

한일화해에 대한 나의 관심은 실은 남북화해,우리안의 화해와 이어져 있다.지배와 폭력에 대한 첫관심을 키워준 것이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들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후에, 냉전적 갈등이 식민지시대에 시작된 것임을 알고 나서 더 확고해졌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안의 갈등–제국과 냉전이 야기한 갈등을 언젠가 넘어서야 한다는 입장이고 분열과 폭력을 조장하는 담론은 진보건 보수건 믿지 않는다. 윤리적이고 합리적인지,평화주의적인지,그것만이 담론과 사람을 판단하는 나의 기준이다.

내가 진보쪽 사고를 갖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 실망하셨을 보수 페친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나 역시 여러분들의 사고와 감정에 실망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을 이어가자고. 그리고 필요할 때 대화를 해 나가자고. 나의 가족에도 보수가 있으니 그건 필연이기도 하다. 그러나 메마르고 이기적인 보수들은 물론,정의의 이름으로 세력정치에만 관심있는 진보들도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전을 통해 죽고 죽임을 당한 과거를 가진 우리안의 좌우대립은 깊고도 깊다. 아마도 분단이 지속되는 한,이 대립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최소한 감정적 대립에서만큼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그 대립은,최근 20여년동안의 갈등을 거치면서 진보와 보수가 모두 미워하게 된 일본의 지배에 의해 생긴 것이니까. 그런만큼 그 갈등을 넘어서는 날이 우리의 진정한 ‘독립과 해방’의 날이기도 하니까.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87962275539797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theater

 

‘외교’란 무엇인가

`외교`란 무엇인가—조세영 전 외교부국장의 `실현불가능한 차선과 실현불가능한 최선의 사이에서`를 읽고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위안부문제와 처음맞닥뜨린 건 1991년이었다.유학 마지막 무렵이었는데,동경YMCA에서 했던 위안부할머니증언모임에서 동시통역봉사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당시 아르바이트하던 NHK국제국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의 부탁이었던 것 같다. 통역하던 내내 할머니들의 한 맺힌 호소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걸 기억한다.
그렇게 위안부문제를 만나게 되었지만, 다음해 봄 귀국한 이후부터는 `위안부문제`해결 운동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당시 일본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연관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던 참이어서 나는 위안부문제가 민족주의적 담론이 되고 있는데 회의적이었고 돌아온 `문민정부`시대 한국의 민족주의적 담론과 풍경은 메이지 시대 자료를 통해 보았던 광경을 다시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런 민족주의적 풍경의 한가운데에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서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더 정확히는 다가갈 계기가 없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대협은 후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80년대 민주화투쟁에 관여한 사람, 기독교여성단체, 이화여대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어디와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월을 지나 내가 다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2000년대 들어서였다. 위안부문제로 시작된 1990년대의 한일갈등은 독도문제등을 거치면서 심화되고 있었는데2001년에 교과서문제가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고,그런 갈등들이 서로에 의해 중폭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서 갈등의 원점에 있었던 `위안부문제`에 대해 제대로 고찰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처음으로 나눔의 집을 방문했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가까이에서 들었다. 그런데 그 때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눔의 집에서 떨어져 혼자 살면서 일본군과의 연애와 안타까운 이별에 관한 추억을 들려준 할머니의 미소띤 얼굴이었다. 또 `일본군보다 (자신을 팔아넘긴) 아버지가 더 밉다`던 또 다른 한맺힌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의 의미를 생각하며 나는 2005년에『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썼다.
조세영 전 외교부국장(이하, 편의상 조국장으로 사용)이 얼마전 발표한 글을 읽고 나는 먼저 그런 기억들을 먼저 떠올렸던 것 같다. 위치한 장소는 달랐지만 그 역시 이 20년동안 나름대로 `위안부문제`와 만나고 있었고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91년에 그는 스물아홉이었다는데 같은 해에 나는 서른 넷이었다. 내가 몇 살 더 많았지만 위안부문제에 관한 `거리`로 치자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기에 접했고 관심은 있었지만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고 세월이 흘러 그가 국장으로서 다시 위안부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을 때 나는 위안부문제만을 다룬 또다른 책을 쓰고 있었다.
위안부문제가 어려운 건 중심에 있었던 이들이 대부분 20년이상 관여해 온 문제가 되어 대부분사람들에게 이 문제가 이미 그들의 인생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해 온 일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그들의 신념과 정의감을 신뢰하지만, 바로 그런 부분이 위안부문제가 이토록 오래 이어지고 있는 또하나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않는 한 아마도 위안부문제의 해결은 어렵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제3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그때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여성기금`

기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대세인 가운데 조국장의 글은 정대협이 비난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일본의 `선의`였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한국인으로서 그렇게 명확히 이야기 한 또다른 사람은 별로 없다. 하긴 글이 아닌 말이라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많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공식석상이 아닌 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위안부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 또하나의 이유는 그런 `침묵`에도 있다. 어쩌면 그 부분이야말로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언제까지고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대로 `공론`화 해야만 논의가 깊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을터인데 해방 후 70년이 되어 가도록 우리는 `일본`에 관해서만큼은 옳던 그르던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와 `다른 생각`은 무조건 `친일파`로 간주되는 것도 모자라 그런 발언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자는 발상까지 나오는 상황이니 충분히 이해하지만,중요한 건 침묵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국장의 글을 반갑게 읽었다. 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보여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또 최근 페이스북에 위안부문제에 관한 글을 올리고 있는지라 나의 반응을 보고 싶어하는 몇몇 페친들에게 감상문을 올리기로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첫번째 이유는 오랜 고민끝에 작년에 다시 낸 나의 위안부문제론을 `문학자`다운 발상으로 치부하고 일본국가를 `형법몇조..`등에 의해 `법적 책임`을 지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법학자`다운 발상`으로 나의 책을 비난했던 어느 법학자보다는,(비록 나만을 향한 글은 아니지만)훨씬 `대화`의욕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조국장의 글의 주안점은 한국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을 대신해 위안부할머니들에게 `차선의 정책`을 취했고 그것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에 있는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위해 전개된 내용에 몇가지 오류가 보인다.

1,아시아여성국민기금이 한국정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주장

조국장이 당시의 외교부직원으로서 그러한 조치에 자부심을 느낀 건 당연하다. 사실 나 역시 한국정부가 초기에 500만원을 지급했다는 것은 얼마전에 조국장과 만났을 때 처음 알았다. 따라서 그 부분이 나의 책에 빠져 있다는 지적은 겸허히 수용하고 싶다. 그러나1998년에 이루어진 4300만원의 정착금에 관해서는 『화해를 위해서』에 쓴 적이 있다. 다만 비판적으로 썼다. 지급 자체가 아니라 그 이유가 일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한 데 대해서였다. 물론 `도덕적 우위`를 느끼는 것 자체야 크게 문제시 할 것은 없다. 문제는 일본에 그러한 `도덕==모럴`이 없다고 전제한 단정에 대해서였다. 이미 페이스북에 쓴 적이 있지만(2013/2/15) `아시아여성기금`은 우리가 지키라고 요구중인 고노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이 계승된 기금이었다 (무라야마 수상이 이 기금의 2대째 이사장을맡았던 것도 그 증거다).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자민당 정권때 발상된 냉전종식이후 국제사회와의 화해를 지향해 `역사문제를 염두에 두고자`한 정책과 이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자민당은 무조건 사죄의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적대시하지만 `고노담화`를 내놓은 고노전관방장관 역시 자민당 출신이다.
따라서, 당시의 일본이 한국의 `자구조치`를 참고로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자구책이 일본을 `바늘방석`에 앉혔고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건 우월감이 낳은 일방적인 생각 아닐까 싶다.
물론 현장의 일부 외교부 직원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조국장의 자부심이, 김영삼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는 사죄의식이 없다고 하는 근거없는 단정에 따른 우월감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우월감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까지 포함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식의 일방적 선언으로 이어졌는데 그건 위안부여성들의 `개인`의 의지를 무시한 선언이었다. `국가`의, 가부장제적 사고에 의한. 오빠나 아버지가 여동생이나 딸의 권리를 `대신`해서 처리해 온 것처럼.
무엇보다 그 돈은 국민의 세금이었고 그녀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주도의 국가로서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나는 그 일이 한국남성들이 일본에 대해 `도덕적우월감`을 느껴야 할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구조치`로 선택된 그 일은, 오히려 그녀들을 그런 처지로 떨어지게 만든 국가로서 뒤늦게 다소간의 `책임`을 진 일일 뿐이다. 국민을 지키지 못한 국가로서.

2,기금이 `민간기금`이라는 주장

`기금`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쓴 적이 있으므로 자세히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조국장이 쓴 것 처럼 기금은 `속죄금 `200만엔과 의료복지비`300만엔`으로 나뉘어 지급되었는데 처음에 `속죄금`부분을 `국민의 모금`으로 하려 한 것은 책임을 지고싶지 않아서가 아니라,즉 도덕의식—모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1965년에 모든 것이 청산되었다는 `협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그야말로 `자구책`이자 `수단`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숨은의도`의 존재가능성을 굳이 언급하고 `책임인정/보상생각이 없는`이라고 적는 조국장은,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일본에 대한 불신을 안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나는 기금의 내용이 당사자들과의 협의없이 정해진 것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역시 나중일인데 `기금`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고 그들간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금`도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전달자 역할을 맡았던 이들 중 일부는 정대협에 대한 예상 이상의 증오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면서, 정대협과의 갈등의 배경을 다른 측면에서 유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사 성립과 전달과정에서 문제가 있다 해도 기금을 `독선`이라 말하는 것은 기금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았던 정대협의 비판에 가담하는 일이 된다. 무엇보다, 기금에 대한 격한 비난과 거부는 위안부할머니들 당사자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주변에 있던 운동가들과 엘리트연구자들의 생각이었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부를 제외하면 위안부할머니들은 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분들조차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내가 만난 위안부할머니들은 자신이 일본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조차 지금껏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법적책임`에 대해 설명하면 그제서야 `그런 것 필요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지원단체 빼고 해결해 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단체들과 위안부할머니들의 관계가 보여주는 몇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말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그런 `현실`을 조국장은 아마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인용한 위안부 할머니의 `말`을 그는 `전해들은`것이라고 적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바로,조국장의 글의 한계이자 이 땅에서 위안부문제에 대해 발언했거나 해 온 대부분의 남성들의 한계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기금은 그렇게 `수단`을 선택했지만 결국은 `의료복지비`도 한국에는 현금으로 지급되었다.일본의 `국고금`(일본국민들의 세금)이 지급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말하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다. 60명이 기금을 받았다 는 기사가 나와도 `기금은 민간기금`이라는 주장만이 회자되면서 받은 이들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있다. 그들이 아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 받은 7명의 할머니를 정대협이 배척한 일에 이어지는 그런 억압적인 담론 때문이다. 사실 1998년에 한국정부가 위안부들에 대한 `자구조치금`을 4300만원으로 올려 지급한 것은 기금의 지급액을 의식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기금을 받지 말라는 각서까지 쓰게 하면서 지급되었다.
외교부는 기금 발족당시 기금을 높이 평가한다고 발표했었다. 생각이 바뀌었다면 언제 바뀌었는지 왜 바뀌었는지 국민들에게 한번쯤은 설명해야 옳다. 그건 한국국민에 대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일본의 외교관들과 나누었을 대화와 우정과 신뢰를 무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

`법`과 `외교`

기금보다 외교부의 노력을 기억해 달라고 강조하는 듯한 이 글은 헌재판결에 대해 대단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외교부는,외교부를 피고로 제소한 위안부할머니들과 지원자들의 논지에 대해 반박하고 있었고, 조국장의 `자구조치`발언과,`외교를 법으로 판단해도 되는가`하는 말은 헌재와 제소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판에서 졌다는 사실만으로 헌재의 판결을 수용해 `중재위원회`로 가져가야 한다는 주장은 모순이 있어 보인다.
헌재결정은 <제국의 위안부>에도 썼지만 문제가 많은 결정이었다. 무엇보다,1965년에 일본이 다른 어떤 류의 피해자가 나올지 모르니 피해보상은 개인이 할 수 있도록 청구권을 남겨주다고 한 일본의 제안을 물리치고 굳이 국가가 받아 대신 지급하겠다고 나선 것은 한국정부였다. 일본을 비판한다면 그에 대한 반성도 병행되어야 합리적인 처사이자 용기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당시의 회담내용을 보고 한국정부가 최대한 할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 대해 감동하기도 했다. 또 그런 요구들이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아 눈물을 삼켰을 회담출석자들과 배후에서 함께 움직였을 이들에 대해 존경의 념도 갖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한 일이 은폐되어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이 그런 것처럼 국가도,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밝히고 반성하는 일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경과에 대한 고찰 없이 위안부에 대한 그야말로 `돈 몇푼`을 지급했다는 것만으로 `국가의 우월감`이 보장될 수는 없다.
중재위원회로 가지고 가는것은,국가간 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력은 아니지만 그건 `전쟁`을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일당사국이 아닌 제3자에게 그 판단을 묻는 일은 50년이 되어가는 한일외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모든 재판이 그렇듯 중재위원회에 가는 일은 현재의 갈등을 공식화하고 `대화`를 차단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때 한일양국에 남는 것이 식민지배역사에 이어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이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미 이 20여년동안 정착된 오해와 미움을 차세대에게 본격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그 일이 과연 `외교`가 해야 하는 일일까. 외교의 목적을 그저 국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아직껏 있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기도 했던 도고시게노리 전외무장관이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을 막으려 했고 종전때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군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던 정신을 지금 우리는 되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외교의 궁극은 전쟁을 막는 일이고,대화를 지속시키는 일이라고,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생각한다. 조국장은 이미 외교의 현장을 떠난 사람으로서 발언했지만 외교부에 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글이고 아직은 중재위원회에 가지 않을 방법을 신중히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현외교부에 영향을 미칠수도 있을 것 같아 굳이 쓴다.

조국장은 피해자의 `납득`을 말하지만 피해자들의 생각은 하나가 아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진짜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위안부할머니들을 그저 성녀나 투사취급을 하지만,그들 역시 피가 있고 살이 있는,그래서 어제와 오늘 생각이 달라질 수 있고 이런저런 욕망도 갖고 있는 한사람의 `개인`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반목과 갈등의 주체였던 그들이 용서와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는 사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만 달려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갑작스런 정치적 타결은 결코 해결을 갖고 오지 않으리라는 조국장의 예상에 나는 찬성한다.그런데 이 성실한 글이 `피해자가 납득하지 않을 구조`를 오히려 굳건히 하고 만다는 데에 위안부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인도적조치의 돈 몇푼`이라는 말 역시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실은 `도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을 상위의 것으로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근대주의적이자 국가주의적이자 남성주의적인 발상이다. `법`이란 얼마전까지 오로지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위안부문제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남성들에게 보장된 `법`을 그녀들은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위안부문제를 논의하려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notes/park-yuha/%EC%99%B8%EA%B5%90%EB%9E%80-%EB%AC%B4%EC%97%87%EC%9D%B8%EA%B0%80%EC%A1%B0%EC%84%B8%EC%98%81-%EC%A0%84-%EC%99%B8%EA%B5%90%EB%B6%80%EA%B5%AD%EC%9E%A5%EC%9D%98-%EC%8B%A4%ED%98%84%EB%B6%88%EA%B0%80%EB%8A%A5%ED%95%9C-%EC%B0%A8%EC%84%A0%EA%B3%BC-%EC%8B%A4%ED%98%84%EB%B6%88%EA%B0%80%EB%8A%A5%ED%95%9C-%EC%B5%9C%EC%84%A0%EC%9D%98-%EC%82%AC%EC%9D%B4%EC%97%90%EC%84%9C%EB%A5%BC-%EC%9D%BD%EA%B3%A0/840706955956220

 

미움의 연쇄작용

‘한국아이들이 음식에 침을 뱉었다”한국아이들이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위협하듯 소리쳤다” 며 ‘그러니 밖에선 내 이름을 일본어로 부르지 말라’고 부모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위안부소녀상이 들어선 미국 글렌데일에서의 일이다.
그렇게 보고한 이들이 위안부소녀상에 대해 항의하러 갔던 지방의회의원들이니, 그들의 국회에서의 보고가 긍정적인 것일리는 없다.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여성들을 끌어가 강간하고 노예화했다는’식의 한국의 비난때문에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특히 아이들)의 정신적피해가 크다는 것은 진작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주미일본영사관이 나서서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고 이들은 강조한다.
글렌데일에는 한국계주민이 12000명,일본계주민이 100명정도라고 한다. 전체인구가
20만명 정도라니 한국역시 20분의1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인 셈이지만 그래도 20퍼센트 가까이 된다는 히스패닉계를 제외하면 소수민족중에는 다수라 할 수 있겠고 일본인들은 여기서는 압도적인 ‘소수민족’인 듯 하다.
아이들이란 원래 폭력적이고 때로 야비하기까지 한 존재이니 여기서 아이들을 탓할 필요는 없겠다. 또 100명밖에 안되는 일본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괴롭힐 리도 없으니 이런 사례는 아직 많지는 않을 것이다.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협조하며 살아야 할 소수민족의 아이들끼리,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살도록 만든 건 어른들이다.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에 의하여 납치된 20만 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들을 추모하며”라는,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소녀상의 글귀를 통해서다.
먹기위해 준비된 음식에 침을 뱉은 한국인 아이는 그 사실을 잊거나 ‘과거에 받은 피해에 대한 당연한 응징’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음식을 부정당한 아이는, 아마도 일생동안 그 사실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에 대해 단단한 응어리를 지니고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그랬고 현재에 여전히 그런 것처럼.
위안부문제가 설사 해결된다 해도 한일간의 감정갈등이 쉽게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1월초에 올린 ‘사고의 파시즘’이라는 내 글에 대해 반박한 이들중 나의 노력이 ‘약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한 이들이 있었다. 그건 내 생각을 그저 국가간 정치경제 유착을 지향하는 것으로 오독한 결과(혹은 단순히 또다른 정치적유착지향?)일 뿐이다.
‘인권’을 강조하는 이들이 가끔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국적’이나 ‘민족’의 이름만으로 보호받지 못해도 되는 인권은 없다. 과거의 우리,식민지가 되어 그저 ‘조선인’이었다는 것만으로 차별받아야 했던 우리이니 더더욱,똑같은 폭력을(모든 폭력의 저변에는 미움이 있다),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진보’이리라고 나는 믿는다.

http://sankei.jp.msn.com/smp/world/news/140215/amr14021507010000-s.htm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828046540555595

 

남북관계에 대한 미국국회의원의 의견.

남북관계에 대한 미국국회의원의 의견. 무심히 읽어내려가다가 ?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을 만났다. ‘일본이 20만명의 여성을 납치해 위안부로 일하게 했다’고 말한 부분. 이 사람이 주도했다는 미하원의 위안부문제결의는 ’20만명 납치’라는 잘못된 정보가 만든 것이었고 그 결의는 이후 다른 나라의 결의까지 이끌어 ‘세계의 의견’을 만들었다.
물론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물론 지원단체나 지원자들, 그리고 증언자일 것이다( 하원에서 증언한 이의 20년전 증언은 모르는 이가 옷가지등을 보여주며 꾀어서 따라갔다는 내용인데 이후 자다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는 식으로 바뀐다)
지원단체는 최근 업자의 존재를 인정한 듯 한데 그렇게 새롭게 알게 된 정보는 그에게 전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는데 새로운 인식을 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한국의 언론에도 공식적으로 알리는 일은 없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잘못된 인식자체보다 그것이 슬프다. 자신의 기존 주장을 바꾸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런 용기를 관계자들이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이들도 사실을 알고 그들을 비난하게 되기 전에. 그들에 대한 비난은 ‘한국’에 대한 비난이 될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 ‘한국의 거짓말’에 대항하는 움직임에 동참하는 이들중엔 한국에 대한 차별의식을 가진이들이나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 그들의 움직임 역시 옳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 기사는, 그들의 움직임이 단순히 책임을 부정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한번 보여준다. 아베의 유엔총회발언보다 더 주목되어야 할 기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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