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위안부문제와 처음맞닥뜨린 건 1991년이었다.유학 마지막 무렵이었는데,동경YMCA에서 했던 위안부할머니증언모임에서 동시통역봉사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당시 아르바이트하던 NHK국제국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의 부탁이었던 것 같다. 통역하던 내내 할머니들의 한 맺힌 호소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던 걸 기억한다.
그렇게 위안부문제를 만나게 되었지만, 다음해 봄 귀국한 이후부터는 `위안부문제`해결 운동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당시 일본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연관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던 참이어서 나는 위안부문제가 민족주의적 담론이 되고 있는데 회의적이었고 돌아온 `문민정부`시대 한국의 민족주의적 담론과 풍경은 메이지 시대 자료를 통해 보았던 광경을 다시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런 민족주의적 풍경의 한가운데에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서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더 정확히는 다가갈 계기가 없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대협은 후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80년대 민주화투쟁에 관여한 사람, 기독교여성단체, 이화여대사람들이 중심이 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어디와도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월을 지나 내가 다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2000년대 들어서였다. 위안부문제로 시작된 1990년대의 한일갈등은 독도문제등을 거치면서 심화되고 있었는데2001년에 교과서문제가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고,그런 갈등들이 서로에 의해 중폭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서 갈등의 원점에 있었던 `위안부문제`에 대해 제대로 고찰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처음으로 나눔의 집을 방문했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가까이에서 들었다. 그런데 그 때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눔의 집에서 떨어져 혼자 살면서 일본군과의 연애와 안타까운 이별에 관한 추억을 들려준 할머니의 미소띤 얼굴이었다. 또 `일본군보다 (자신을 팔아넘긴) 아버지가 더 밉다`던 또 다른 한맺힌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의 의미를 생각하며 나는 2005년에『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썼다.
조세영 전 외교부국장(이하, 편의상 조국장으로 사용)이 얼마전 발표한 글을 읽고 나는 먼저 그런 기억들을 먼저 떠올렸던 것 같다. 위치한 장소는 달랐지만 그 역시 이 20년동안 나름대로 `위안부문제`와 만나고 있었고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91년에 그는 스물아홉이었다는데 같은 해에 나는 서른 넷이었다. 내가 몇 살 더 많았지만 위안부문제에 관한 `거리`로 치자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기에 접했고 관심은 있었지만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고 세월이 흘러 그가 국장으로서 다시 위안부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을 때 나는 위안부문제만을 다룬 또다른 책을 쓰고 있었다.
위안부문제가 어려운 건 중심에 있었던 이들이 대부분 20년이상 관여해 온 문제가 되어 대부분사람들에게 이 문제가 이미 그들의 인생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해 온 일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그들의 신념과 정의감을 신뢰하지만, 바로 그런 부분이 위안부문제가 이토록 오래 이어지고 있는 또하나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않는 한 아마도 위안부문제의 해결은 어렵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제3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그때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여성기금`
기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대세인 가운데 조국장의 글은 정대협이 비난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일본의 `선의`였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한국인으로서 그렇게 명확히 이야기 한 또다른 사람은 별로 없다. 하긴 글이 아닌 말이라면 그렇게 말한 사람은 많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공식석상이 아닌 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위안부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 또하나의 이유는 그런 `침묵`에도 있다. 어쩌면 그 부분이야말로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가 언제까지고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대로 `공론`화 해야만 논의가 깊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을터인데 해방 후 70년이 되어 가도록 우리는 `일본`에 관해서만큼은 옳던 그르던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와 `다른 생각`은 무조건 `친일파`로 간주되는 것도 모자라 그런 발언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자는 발상까지 나오는 상황이니 충분히 이해하지만,중요한 건 침묵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국장의 글을 반갑게 읽었다. 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보여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또 최근 페이스북에 위안부문제에 관한 글을 올리고 있는지라 나의 반응을 보고 싶어하는 몇몇 페친들에게 감상문을 올리기로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첫번째 이유는 오랜 고민끝에 작년에 다시 낸 나의 위안부문제론을 `문학자`다운 발상으로 치부하고 일본국가를 `형법몇조..`등에 의해 `법적 책임`을 지우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법학자`다운 발상`으로 나의 책을 비난했던 어느 법학자보다는,(비록 나만을 향한 글은 아니지만)훨씬 `대화`의욕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조국장의 글의 주안점은 한국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을 대신해 위안부할머니들에게 `차선의 정책`을 취했고 그것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에 있는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위해 전개된 내용에 몇가지 오류가 보인다.
1,아시아여성국민기금이 한국정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주장
조국장이 당시의 외교부직원으로서 그러한 조치에 자부심을 느낀 건 당연하다. 사실 나 역시 한국정부가 초기에 500만원을 지급했다는 것은 얼마전에 조국장과 만났을 때 처음 알았다. 따라서 그 부분이 나의 책에 빠져 있다는 지적은 겸허히 수용하고 싶다. 그러나1998년에 이루어진 4300만원의 정착금에 관해서는 『화해를 위해서』에 쓴 적이 있다. 다만 비판적으로 썼다. 지급 자체가 아니라 그 이유가 일본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한 데 대해서였다. 물론 `도덕적 우위`를 느끼는 것 자체야 크게 문제시 할 것은 없다. 문제는 일본에 그러한 `도덕==모럴`이 없다고 전제한 단정에 대해서였다. 이미 페이스북에 쓴 적이 있지만(2013/2/15) `아시아여성기금`은 우리가 지키라고 요구중인 고노담화와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이 계승된 기금이었다 (무라야마 수상이 이 기금의 2대째 이사장을맡았던 것도 그 증거다).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자민당 정권때 발상된 냉전종식이후 국제사회와의 화해를 지향해 `역사문제를 염두에 두고자`한 정책과 이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자민당은 무조건 사죄의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적대시하지만 `고노담화`를 내놓은 고노전관방장관 역시 자민당 출신이다.
따라서, 당시의 일본이 한국의 `자구조치`를 참고로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의 자구책이 일본을 `바늘방석`에 앉혔고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건 우월감이 낳은 일방적인 생각 아닐까 싶다.
물론 현장의 일부 외교부 직원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수는 있지만, 문제는,조국장의 자부심이, 김영삼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는 사죄의식이 없다고 하는 근거없는 단정에 따른 우월감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우월감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까지 포함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식의 일방적 선언으로 이어졌는데 그건 위안부여성들의 `개인`의 의지를 무시한 선언이었다. `국가`의, 가부장제적 사고에 의한. 오빠나 아버지가 여동생이나 딸의 권리를 `대신`해서 처리해 온 것처럼.
무엇보다 그 돈은 국민의 세금이었고 그녀들을 지키지 못했던 남성주도의 국가로서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나는 그 일이 한국남성들이 일본에 대해 `도덕적우월감`을 느껴야 할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구조치`로 선택된 그 일은, 오히려 그녀들을 그런 처지로 떨어지게 만든 국가로서 뒤늦게 다소간의 `책임`을 진 일일 뿐이다. 국민을 지키지 못한 국가로서.
2,기금이 `민간기금`이라는 주장
`기금`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쓴 적이 있으므로 자세히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조국장이 쓴 것 처럼 기금은 `속죄금 `200만엔과 의료복지비`300만엔`으로 나뉘어 지급되었는데 처음에 `속죄금`부분을 `국민의 모금`으로 하려 한 것은 책임을 지고싶지 않아서가 아니라,즉 도덕의식—모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1965년에 모든 것이 청산되었다는 `협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그야말로 `자구책`이자 `수단`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숨은의도`의 존재가능성을 굳이 언급하고 `책임인정/보상생각이 없는`이라고 적는 조국장은,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일본에 대한 불신을 안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나는 기금의 내용이 당사자들과의 협의없이 정해진 것은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역시 나중일인데 `기금`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고 그들간에도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금`도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전달자 역할을 맡았던 이들 중 일부는 정대협에 대한 예상 이상의 증오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면서, 정대협과의 갈등의 배경을 다른 측면에서 유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설사 성립과 전달과정에서 문제가 있다 해도 기금을 `독선`이라 말하는 것은 기금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았던 정대협의 비판에 가담하는 일이 된다. 무엇보다, 기금에 대한 격한 비난과 거부는 위안부할머니들 당사자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주변에 있던 운동가들과 엘리트연구자들의 생각이었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부를 제외하면 위안부할머니들은 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분들조차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내가 만난 위안부할머니들은 자신이 일본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조차 지금껏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법적책임`에 대해 설명하면 그제서야 `그런 것 필요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지원단체 빼고 해결해 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단체들과 위안부할머니들의 관계가 보여주는 몇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말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그런 `현실`을 조국장은 아마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인용한 위안부 할머니의 `말`을 그는 `전해들은`것이라고 적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바로,조국장의 글의 한계이자 이 땅에서 위안부문제에 대해 발언했거나 해 온 대부분의 남성들의 한계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기금은 그렇게 `수단`을 선택했지만 결국은 `의료복지비`도 한국에는 현금으로 지급되었다.일본의 `국고금`(일본국민들의 세금)이 지급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말하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다. 60명이 기금을 받았다 는 기사가 나와도 `기금은 민간기금`이라는 주장만이 회자되면서 받은 이들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있다. 그들이 아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처음 받은 7명의 할머니를 정대협이 배척한 일에 이어지는 그런 억압적인 담론 때문이다. 사실 1998년에 한국정부가 위안부들에 대한 `자구조치금`을 4300만원으로 올려 지급한 것은 기금의 지급액을 의식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기금을 받지 말라는 각서까지 쓰게 하면서 지급되었다.
외교부는 기금 발족당시 기금을 높이 평가한다고 발표했었다. 생각이 바뀌었다면 언제 바뀌었는지 왜 바뀌었는지 국민들에게 한번쯤은 설명해야 옳다. 그건 한국국민에 대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일본의 외교관들과 나누었을 대화와 우정과 신뢰를 무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
`법`과 `외교`
기금보다 외교부의 노력을 기억해 달라고 강조하는 듯한 이 글은 헌재판결에 대해 대단히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외교부는,외교부를 피고로 제소한 위안부할머니들과 지원자들의 논지에 대해 반박하고 있었고, 조국장의 `자구조치`발언과,`외교를 법으로 판단해도 되는가`하는 말은 헌재와 제소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판에서 졌다는 사실만으로 헌재의 판결을 수용해 `중재위원회`로 가져가야 한다는 주장은 모순이 있어 보인다.
헌재결정은 <제국의 위안부>에도 썼지만 문제가 많은 결정이었다. 무엇보다,1965년에 일본이 다른 어떤 류의 피해자가 나올지 모르니 피해보상은 개인이 할 수 있도록 청구권을 남겨주다고 한 일본의 제안을 물리치고 굳이 국가가 받아 대신 지급하겠다고 나선 것은 한국정부였다. 일본을 비판한다면 그에 대한 반성도 병행되어야 합리적인 처사이자 용기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당시의 회담내용을 보고 한국정부가 최대한 할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 대해 감동하기도 했다. 또 그런 요구들이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아 눈물을 삼켰을 회담출석자들과 배후에서 함께 움직였을 이들에 대해 존경의 념도 갖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한 일이 은폐되어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이 그런 것처럼 국가도,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밝히고 반성하는 일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경과에 대한 고찰 없이 위안부에 대한 그야말로 `돈 몇푼`을 지급했다는 것만으로 `국가의 우월감`이 보장될 수는 없다.
중재위원회로 가지고 가는것은,국가간 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력은 아니지만 그건 `전쟁`을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일당사국이 아닌 제3자에게 그 판단을 묻는 일은 50년이 되어가는 한일외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모든 재판이 그렇듯 중재위원회에 가는 일은 현재의 갈등을 공식화하고 `대화`를 차단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때 한일양국에 남는 것이 식민지배역사에 이어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이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미 이 20여년동안 정착된 오해와 미움을 차세대에게 본격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그 일이 과연 `외교`가 해야 하는 일일까. 외교의 목적을 그저 국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아직껏 있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기도 했던 도고시게노리 전외무장관이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을 막으려 했고 종전때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군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웠던 정신을 지금 우리는 되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외교의 궁극은 전쟁을 막는 일이고,대화를 지속시키는 일이라고,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생각한다. 조국장은 이미 외교의 현장을 떠난 사람으로서 발언했지만 외교부에 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글이고 아직은 중재위원회에 가지 않을 방법을 신중히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현외교부에 영향을 미칠수도 있을 것 같아 굳이 쓴다.
조국장은 피해자의 `납득`을 말하지만 피해자들의 생각은 하나가 아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피해자의 목소리가 진짜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위안부할머니들을 그저 성녀나 투사취급을 하지만,그들 역시 피가 있고 살이 있는,그래서 어제와 오늘 생각이 달라질 수 있고 이런저런 욕망도 갖고 있는 한사람의 `개인`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반목과 갈등의 주체였던 그들이 용서와 화해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는 사실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만 달려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갑작스런 정치적 타결은 결코 해결을 갖고 오지 않으리라는 조국장의 예상에 나는 찬성한다.그런데 이 성실한 글이 `피해자가 납득하지 않을 구조`를 오히려 굳건히 하고 만다는 데에 위안부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인도적조치의 돈 몇푼`이라는 말 역시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실은 `도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을 상위의 것으로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근대주의적이자 국가주의적이자 남성주의적인 발상이다. `법`이란 얼마전까지 오로지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위안부문제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남성들에게 보장된 `법`을 그녀들은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위안부문제를 논의하려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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