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일철주금 판결을 읽는다
<1>판결문의 전제—한일합방불법론
한국 대법원의 징용문제 판결에 항의해 중재위 설치를 요구(2019/5/20)한 일본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2018년10월에 나온 신일철징용판결등 조선인징용자문제에 대한 정부간협의를 2019년 1월에 요청했던 일본이 한국정부의 답변을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중재위 요청으로 옮겨간 건,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고 한 이낙연 총리의 발언때문이었다.(2019/5/21, 고노외무상 기자회견). 국내적 대응을 할 수 없으면 중재위 설치에 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노외무상의 지적은, 유감스럽지만 논리적으로는 맞다.
한국정부는 이제라도 일본이 원래 요청했던 정부간협의에 응해야 한다. 제3자를 배석시켜야 하는 중재위를 가동시키게 되면, 한국은 결코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뒤에서 국제법학자의 의견도 소개하겠지만, 한국의 논리나 태도는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성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부가 4개월이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표면적 이유는 ‘사법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법자체가 아니라 판결의 정당성 여부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대통령은 당연히 이 판결을 읽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청와대의 무대응은, 단순한 ‘사법부 존중’을 넘어 ‘판결내용자체에 대한 동의’일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실, 2000년에 부산에서 제기된 미츠비시중공업을 대상으로 한 첫소송에서 원고측 변호인이기도 했다.
신일철이 피고가 된 징용판결에서, 대법원은 신일철이 징용‘피해자’에게 1억씩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 1억원은 세간의 이해와 달리 미지불임금에 대한 배상금액이 아니다. 대법원 판사들이 피해자에게 지급하라고 한 금액은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다.
그러니까 이 판결은, ‘징용자들이 일본기업에서 일하고도 임금을 지불받지 못했으니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본은 조선인을 자국국민에게 했던 것처럼 전쟁수행을 위한 노동에 동원했다, 하지만 한일합방은 ’강제로‘ 이루어졌으니 조선은 ’일본‘이 된 적이 없다, 따라서 동원자체가 불법이니 그에 대한 위자료를 보상하라’는 판결이었다. 당연히 이 판단은 ‘한일합방은 불법’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한일합방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불법이라는 주장은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90년대초부터 주창해 온 생각이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는 일본인 학자들 사이과의 격렬한 논쟁을 치러야 했고, 학계에선 여전히 갑론을박 중이다.
대법원이 그런 합방불법론을 채택했다는 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학계에서 아직 논의중인 주장 중 하나를 정설로서 채택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2018년 판결은, 학계에서 아직 논의중인 사안임에도 일부 학자들의 주장만 채택해 나온 판결이다.
이것만으로도 앞서 언급한 ‘역사의 사법화‘의 문제가 드러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한일합방’을 합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고 시작하는 조약문을 마련해 둔 건 물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영일동맹과 카츠라/태프트 협정을 통해 조선의 지배권을 서구세계에도 인정받는 과정을 빠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한일합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합방불법성을 전제로 한 판결에 따르는 정황은 생각하기 힘들다. 한일합방불법론은,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결정적인 근거로서 사용되었겠지만, 그 설에 기대는 한 오히려 어떤 요구든 일본의 동의를 얻기는 어렵다. 그런 구조를, 원고측은 물론 대법원 판사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하다.
판결문은, 일본이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었고, ‘1942년에 ’조선인 내지 이입 알선 요강‘을 통해 관알선을 통해 인력을’ 모집했으며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만들어 국가가 주도하는 징용대상에 조선인도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설명해 두고 있다. 말하자면, 시기에 따라 동원방식이 달랐고 ‘법’에 의한 동원이었음을 명시해 두고 있다. 그럼에도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그 전부를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규정하는 건 바로, ‘한일합방불법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제시대때 조선인은 (법적으로도) 일본인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2>법관 다수의 생각-개인청구권은 남아있다
이 판결의 주요 초점은 식민지배에 따른 피해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는지 여부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대법관 전원이 찬성한 판결은 아니었다. 그리고 법관들중 다수가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이하와 같다.
당시 한국정부가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해 언급’(강조는 필자)하였고 “12억2000만달러를 요구하면서 그 중 3억6400만달러(약 30퍼센트)를 강제동원피해보상에 대한 것으로 산정”하기는 했지만, 그건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공식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교섭과정에서 교섭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했고, 담당자가)피징용자의 고통을 언급한 것은 “협상에서의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또, 한국이 12억이상을 요구했는데 “정작 청구권 협정은 3억달러로 타결”되었으니“이처럼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일본이 따로 “구체적인 징용/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하거나 양국국교가 회복된 뒤에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대한민국의 요구에 그대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등 반발했으니 일본이 한국의 “피해배상”요구에 응한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일본은 증거를 일일이 찾아서 청구권을 계산하는 건 쉽지 않고 결국 금액이 적어지니, 유상/무상 경제협력의 형태로 금액을 올리는 것으로 청구권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또 청구권이란 “식민지배불법성에 따른 청구권”이었는데, ‘한일조약에 식민지 불법성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니 ‘식민지배가 만든 피해에 대한 배상’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돈은 문안 뿐 아니라 실제로도 경제협력자금일 뿐 식민지배에 관한 배상성격의 돈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법관들 다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다수의 생각대로 판결은 확정되었다.
<3>법관 소수의 생각
‘강요된 합방’(불법체제)속에서 기망이나 구타등 폭력적 “불법행위”로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수판사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보상요구(위자료청구)가 1965년협정에는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청구권도 외교적보호권도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반대했던 판사들의 생각도 판결문은 적어두고 있다.
그 중 두사람은,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후의 한국정부는 협정에 따른 의무를 수행했으므로 더 이상 개인청구권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을 위해 정부가 나서는 일, 즉 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도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문제가 ”기본적으로 청구권협정의 해석에 관한 문제“임을 명시하면서, 조약 해석은 “조약의 문언에 부여되는 통상적 의미에 따라 성실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미가 애매할 때는 협정당시의 문맥을 봐야 한다면서 청구권협정에는 명백히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양국국민은 더 이상 청구권 행사 불가능”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약국 사이에서는 물론 구 국민들 사이에서도 완정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언의 통상적 의미에 부합하고 단지 체약국 사이에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지로 않기로 했다는 의미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다수의견에 반대한 법관들의 생각이다.
또, 한국측이 조약협정해설에 “우리가 요구한 건 모두 소멸, 한국인의 대일본 각종청구등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했다고 써 두었고,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무상 3억달러는 피해국민에 대한 배상적인 성격“이라고 발언했으며 이후 실제로 정부는 몇 번에 걸쳐 보상을 실시했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또다른 근거다. 1965년 협정은 모든 걸 일괄해서 처리한 협정이었고, 일괄처리협정은 국제관습법상 일반적이므로, 국가가 보상이나 배상을 받았다면 그 국민은 개인청구권 행사가 불가하며,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청구권자체가 남아 있지 않으니 소송을 제기할 자격도 없다면서, 징용자를 포함한 노무자들에게 1970년대에 91억외에 2005년 이후에 5500억여원이 이들에게 지급되었다는 사실도 반대자들은 덧붙여 두었다.
이 외에도, 식민지배에 대한 위자료성의 청구권은 1965년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남아 있다면서도, 외교보호권은(국가가 나서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 당시 양국의 합의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의견을 남긴 법관도 세사람 있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국가와 국가사이의 청구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방 국민의 상대국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 까지도 협정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명백하고,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1)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의 대상에 피징용 충구권도 포함됨을 분명히 하고 있”고,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도 당연히 청구권협정 의 대상에 포함 시키는 것으로 상호 인식 하고 있었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또, 2005년 민간공동위 역시 1965년 협정으로 받은 3억달러에 피징용 손배청구권이 포함된다고 간주했고, 정부가 “청구권협정 이래 장기간에 그에 따른 보상들의 후속조치를 취하였”다고 강조한다 (28).이들은 한일양국이 당시 ‘보상’과 ‘배상’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가간 합의를 했더라도 개인청구권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소송권리는 아직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판결은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개인청구권은 이미 남아 있지 않거나, 남아 있다 해도 정부가 그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나서야 하는)건 아니라는 의견을 가졌던 법관은, 재판관을 포함한 전체 13인 중 6명이었다.
<4>국제법학자의 생각
이번 판결은 2012년에 원고가 패소했던 일본법원과 한국하급심에서 패소했던 소송에 원고승소 판결을 내려 고법으로 보냈다가 재상고된 결과였다. 말하자면 이번 판결과 2012년 판결은 내용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2012년 판결에 대해서는 학계로부터 본격적인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예를 들면 서울대 이근관 교수는 이 때의 판결을 “국내법적 사고를 무비판적으로 국제적인 차원으로 투사“한 판결이라면서 비판한다. “ 부산고법과 서울고법이 징용자들의 항소를 승인한 것은 외국판결의 승인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교수는 앞서의 소수법관들처럼, 개인청구권은 한일협정에 포함되어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회담과정 문서에 “피징용한국인의 보상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양국 및 양국국민간의 청구권(미수금 및 보상금)이 해결“되었다는 생각이, 협정 이후의 정부공식해설서, 1966년 이후의 (징용자등을 위한) 국회입법, 2005년에 한일회담문서가 공개되면서 만들어진 국무총리산하에 만든 민관 공동위의 공식의견에서 확인되고, 2009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불에 개인청구권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청구권 행사가 어렵다고, 외교부도 보도자료를 통해 말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다수법관들은 한국정부가 회담과정에서 “강제동원피해 보상”을 요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공식견해”가 아닌 담당자의 교섭자료였으니 그런 요구가 한일협정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일축했었다. 하지만 이교수는 당시 한국은 “생존자,부상자,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방에 대한 보상 요구“를 했으니 설사 그 자료가 참고자료라 해도 한국이 “개인의 피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권협상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또, 수령금액의 명분을 놓고 양국정부가 치열하게 대립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한국측에서 볼 때 청구권문제는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한일간의 불행한 과거의 청산’이라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명분에 관련 된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며 ”이 협정이 불행한 과거의 청산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고 한국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의 포함은 협정수용의 절대적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바로 그때문에 문안이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으로 절충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끝까지 그 금액이 ‘식민지피해배상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 했는데, 당시 받은 금액을 그저 “경제협력자금으로 치부하는 건 한국정부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입장과 어긋“날 뿐 아니라 식민지배상을 부정한 ”일본의 입장을 추수“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교수는 또, 이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 참고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설사 일본이 ‘한일합방불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도, 그 점은 청구권문제해결여부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의 말대로라면, ‘일본이 합방불법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협정에서 받은 돈에 배상성격의 금액이 들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다수법관들의 전제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이교수는,”국제관계에서 일방 당사국이 국제법상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기초위에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고 타방 당사국과의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는 자주 찾아 볼 수 있다”면서, 국내법에서도 화해라는 이름으로 절충하는 경우를 언급한다. 일본이 합방의 불법성을 인정했든 아니든(즉 한일협정을 통해 받은 돈에 배상금성격이 있든 없든) 한일양국정부는 식민지배문제가 “협정대상이 되어 해결되었다는 점에는 의사합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싸우고 나서 합의에 달하는 경우도 그 합의금의 의미는 각자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가간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 판결 요지는, ‘1910년합방은 불법이었으니 모든 동원이 원천적으로 강제고 불법이다’라는 것 말고도, ‘1965년 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는 아예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문제 등이 해결되었다 해도 동원과 노동과정에서 입은 피해에 대한 ‘위자료’는 청구되지 않았고 보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인청구권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교수는 협정에 식민지배보상임이 문안으로 명시되지 않았어도, 그런 내용이 문안 밖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교수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국가가 처리한 일에 대해 개인의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 자체는 필연적인 현상이라면서 개인청구권제기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국제법이 이 부분에서 국내법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 역시 개인의 이해를 고려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는 설명도 해 두고 있다.하지만 동시에, 국제사회는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와 관련하여 여전히 국가에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권문제는 물론 중요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국제사회의 현실보다 너무 멀리 또한 빨리 앞서 나갈 경우 국가간 분쟁을 빈발시키고 관련 개인에게는 당위적 입법론이 현실적 해석론으로 오인케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당위적 입법론이란, 피해자를 위한 법이 ‘당연히’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영국이나 미국등 인권문제에 예민한 민주국가에서도 외교문제에 대한 “사법자제의 원리”가 천명“되었다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2018년과 비슷한 결론을 내린 2012년 징용문제판결에 대한 이교수의 생각이다. 프랑스등에서도, 특히 외교문제에 관해서는 (최종적인 판단은 사법부가 행하지만) 대체로 행정부의 의견을 전통적으로 조회하고 존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한 국가가 외교문제에서 두 목소리로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국제법학자인 정인섭교수도, “국가가 타국과 자국민의 청구권에 영향을 미치는 합의를 할 수 없다면 국제관계에서 국가간 외교교섭과 타결이란 그 존재의의가 없게 된다. 통상 국가간 합의란 개인권리에 대한 분쟁을 최종적으로 타결하기 위하여 마지막방법으로 시도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5>”한일합방불법론”의 문제
하지만 이런 국제사회정황은 2012년이나 2018년 판결에서는 거의 참조되지 않은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판결은 옳고 그름을 떠나 ‘외국을 상대로 하면서도 지극히 국내적인 시각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런 ‘국내적 시각’의 판결에 기댄 생각이 국제사회와 만나게 되었을 때(일본이 요구중인 중재위나 국제사법재판소), 그들을 설득 가능할 확률도 크지는 않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이견’들이 국민들을 향해 발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승자의 목소리만 전달되는 ‘판결문’의 구조상, 소수(13명 중 6명이니 극소수인 것도 아니다)법관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이들도 없다. 이 판결은, 90년대 이후 목소리를 내 온 일부 법률가/법학자들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했고, 결과적으로 언론이 전하는 승자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은 더 이상 듣지도 참고하지도 않는 전체주의적 사회로의 가속화에 기여했다.
노동이든 징용이든, 일제시대 노동자들의 구술은 참혹하고 안타깝다.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모순을 드러내고 그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법이란 늘 뒤늦게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필요하다면 당연히 새로운 시스템=‘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번 징용판결에서의 요구가 미불임금=재산이 아니라 “위자료”라면, 즉 일제시대 동원(을 포함한 모든 ‘국민’으로서의 의무부과)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한 위자료라면, 그 대상은 노동자만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에 대한 피해요구라면, 일본어와 일본이름을 비롯한 모든 강요에 대해 위자료청구가 가능하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또, 제암리교회사건, 관동대지진에서의 피해자등, 우리에겐 아직 제대로 가시화되지 않은 피해자도 적지 않다. 그런 이들에 대한 역사청산이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를 묻는 일도 아직 남은 과제다.
더구나 사법부는 , ‘일본인의 개인청구권’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징용문제가 불거지면서, ‘개인청구권이 존재한다고 주장해 온 원고측 변호사들의 주장만을 보도해 오던 언론들은, 고노외무상이 “개인청구권은 존재한다”고 말한 걸 두고 “표리부동”(경향)이며, “실토”(한겨레)이자 “궤변”(연합/JTBC)라고 비난했지만, 고노외무상의 발언은 그런 의미였다고 봐야 한다. 원고측 변호사와 한국 언론들이 지적했던 “(일본관료인)야나이의 개인청구권관련 국회 발언”에서 야나이가 실제 언급한 것은 “한일양국의 개인청구권”이었다.
한일정부가 처리한 한국의 개인청구권이 살아 있는 거라면 미국이 처리한 일본인의 개인청구권도 살아 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며 탄광이며 회사들은, 해방 이후 미국의 중개를 거쳐 조선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껏 일본인 명의의 땅들이 여전히 남아 않다는 것은(2019/5/31 기사)식민지배의 후유증이 한국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걸 말해 준다. 한일협정이란, 조선인들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개인청구권을 포기한 협정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도, 정부는 국제사회가 사법의 외교개입이나 정치개입에 신중하다는 국제법학자들의 조언을 경청해야 한다. 한일회담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명백히 논의되지 않았던 건, 대부분 식민지를 보유했던 연합국들이 중심이 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한계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보는 일과, 당시의 보상금에 징용자들의 사망,행방불명, 부상자들에 대한 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는 일은 모순되지 않는다.
다수법관들은 한일회담과정에서 한국이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달러만 받”은 사실을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는 자료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80년대 이후 전두환대통령이 일본에게 100억불을 요구했고 최종적으로 40억불을 다시 지급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법부’의 판결은 물론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사문제가 정치외교문제가 되어 버린 이상, ‘사법부의 판단’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야 하는 필연성은 없다.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게 된 문제인 만큼 국민대다수의 호응도 필요하다.
판결문은 대한민국이 징용자를 포함한 노무자들에게 1970년대에 91억을 지급했고 2000년대에 5500억여원을 지급했다는 사실도 적어두고 있다. 누락된 이들이 있다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일본과 한국정부가 행한 일은 국민모두에게 공유될 필요가 있다.
이 문제가 중재위에 회부되었을 경우 한국정부가 국제사회에 나가 실패했을 경우의 후폭풍의 크기는 작지 않다. 앞장 선 건 소수여도 그 후폭풍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야 일은 명확하다. 모두가 다시 한번 사태를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는 일이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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