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회문 – ‘제국의 위안부’ 대법원 판결에 부쳐

2014년 6월에 명예훼손고발을 당했습니다. 제가 굳이 ’고소‘아닌 ‘고발‘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는 것처럼 이 싸움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저와의 싸움이 아니라 할머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저와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판결이, 그 사실이 보다 명확히 인식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변인들이 저의 책을 문제 삼은 이유는

첫째,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제가 나눔의집에 거주하시던 할머니들을 만나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 관한 그분들의 생각을 직접 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접근 금지를 요구당한 이유입니다)

둘째,
저의 책이 세상에 받아들여 지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출간 이후 개최한 심포지엄에 대한 한일 언론의 비상한 관심 직후에 고발이 이루어진 이유입니다. 또한 이후 나온 일본어판이 두개의 상을 수상한 직후에 기소가 이루어진 이유입니다)

주변인들은, 저의 책이 위안부를 ’매춘부’라 했고 ‘강제연행‘을 부정했다는(물론 이 역시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는 말로 위안부를 둘러싼 ’사실‘을 문제시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들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그들의 해결방식에 대한 저의 이의제기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내내 ’법적해결‘을 부정하지 않았느냐면서 추궁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바꿔 말하면, 강제연행 주장은 자신들의 해결방식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여러해가 지나고 나서야 그런 주장의 실제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북한과 일본이 수교할 경우 ‘법적배상’을 받기 위한 목적이, 그토록 오래 이어진 위안부문제의 배경에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국이 공식적으로 받지 못했던 식민지 배상을 북한이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 위안부 문제 운동의 감추어진 목적이었습니다.

그 목적 자체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런 주변인들의 주장이 어느새 국민상식이 되고 국가의 견해가 되면서, 그에 반하는 의견을 국가가 처벌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국의 위안부>소송사건입니다.

물론 이미 세간에 밝혀진, 개인적 혹은 소속단체의 이익구조 유지를 위한 목적도 주변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저를 고발한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이 횡령죄혐의로 감옥에 구속중이고,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 가 같은 혐의로 징역형 선고를 받은 사실, 그리고 저와 가장 가까웠고 이 두사람에게 비판적이면서도 그 말을 공적으로는 하지 못했던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고발당한 사실 역시, <제국의 위안부>사태의 또하나의 배경을 짐작하게 해 줄 것입니다.

’학문의자유‘를 둘러싼 판결이었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하고 말할 자유, 그러니까 근본적으로는 사상의 자유를 둘러싼 판결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판결은 대한민국에 국민의 사상을 보장하는 자유가 있는지에 관한 판결이었다고 저 자신은 생각합니다.

저는 한번도 <제국의 위안부>사태가 ‘학문의 자유’를 둘러싼 소송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로 보호받아야 할 만큼 위안부 할머니들의 대척점에 있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위안부 할머니들 편에 서서 쓴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책이 나온 직후의 언론반응이 일찌기 말해 준 바 있습니다.

오늘 판결은 아직 끝이 아닙니다. 민사 재판이 남아 있고 어쩔 수 없이 책을 삭제해야 했던 가처분재판을 다시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저의 책과 저의 인생이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국민의 자유로운 생각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급적 고발 10년이 되는 내년 6월 이전에 이루어져, 운동가들과 일부학자, 그리고 국가가 그에 동조해 묶어 두었던 저의 손과 발이 이제는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양극단이 목소리가 큰 가운데, 저는 그 양쪽을 비판하면서 제3의생각을 내놓았습니다. 역사는 단순화하면 할수록 오히려 우리자신을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 복잡한 결을 따라가 보려 했던 저의 시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10년 가까이 되는 긴 세월을 한결같이 지지하고 응원하며 함께 해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오늘의 판결을 제가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들 덕분입니다. 그분들이 제겐 대한민국의 희망이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목소리가 작지만 그런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국내외에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더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제 책이 그런 흐름에 일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한국사회가 바뀔 수 있다면, 이 오랜 기간에 걸친 고통도 의미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2023년10월26일

박유하

판결문

 

원문

 

보충설명

 

2. ‘역사사법화’를 넘어서 – ‘무기’화된 소송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2) ‘무기’화된 소송

징용문제를 두고 일본이 중재위를 설치하자며 강경하게 나오기 전까지, 한국에는 피해자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새로 보상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심지어 이 부분에서는 그동안 이런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정치/외교전문가들도 징용문제관계자들과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양국정부가 양국기업과 함께 재단을 만들자는 ‘새로운 재단 설치’안의 중심에 있는 최봉태변호사는 일찍부터 위안부문제/징용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이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4월, 일본에서 일본기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제안이 옳다는 주장을 하면서 ‘언론의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다.

 

*하나가 아닌 ‘피해자’

그런데 최봉태변호사의 주장에는 모순이 적지 않다. 신일철원고의 변호인들이 신일철의 주식을 압류하고 매각에 나서겠다고 하자 그는 ‘한일관계의 파국을 원하지는 않으니 한일정부가 협의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소송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역사문제를 사법의 장으로 반복적으로 가져와 ‘한일관계의 파국’이 우려되는 상황으로 한일관계를 몰고 온 건 바로 다름 아닌 최변호사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동원에 응해 이주한 노동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신일철 판결이 나오자마자 아베수상이 직접 나서서 해당원고들은 ‘징용령’하에 동원된 이른바‘ 징용공’과는 다르다는 반박을 하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들의 정황을 잘 알고 있었을 관계자들이다.

하긴 최변호사의 입장은 앞서의 판결에서 본 것처럼 어떤 경로로 노동을 하게 되었건 ‘한일합방불법론’에 의거한 ‘불법’동원으로 간주하고 모두 똑같은 ‘피해자’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니 구별을 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노무자들간에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모두를 “강제징용”으로 생각하게 된 데 대한 관계자들의 책임은 작지 않다. 더구나 노무당사자들이 그들 간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모든 문제해결은 사태를 정확하게 아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실제로, 일제시대 ‘피해자’관계 단체는 삼십개 가까이 된다고 한다. 최봉태변호사가 대리인을 맡고 있는 건 그중 미쓰비시중공업소송자들 뿐이니 그의 의견이 모든 노무자들을 대변하는 것일리도 없다.

실제로, 최변호사의 방식–‘소송’을 무기로 일본을 압박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한국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면서 매주 청와대앞에서 시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청와대 역시 이들의 존재를 언급한 적은 없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8-00012078-bunshun-int

이런 움직임들은 최변호사의 해결방식이 모든 피해자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설사 징용자문제가 최변호사 방식대로 진전된다 해도 그것이 곧 갈등해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누구를 위한 재단인가

최변호사는 자신이 주장하는 양국 정부와 기업이 만드는 재단설립에 필요한 금액을 “한·일 협정 당시 추산한 강제동원 피해자 규모는 국내외 103만명으로, 1인당 1억원 기준으로 할 때 103조원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부뿐 아니라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경제협력자금을 사용한 포스코·코레일·도로공사”등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최근에는 일본기자들을 향해 23조라고 말했다. 23만명에게 1억원씩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103조도 그렇지만 23조라면 엄청난 금액이다. ‘새로운 재단 설립’을 주창/지지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최변호사와 비슷한 입장을 취한 정치/외교전문가들은 이런 구체적인 예산산정을 인지했을까.

재단이 ‘장기적으로는 변호사수입이라는 면에서 돈이 된다, 일본에 노무자들의 공탁금이 있는데 재단을 운영하면서 그 공탁금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변호사들이 기여하면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은(https://youtu.be/xlV58lSvf9M), 그가 생각하는 재단설립이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보여준다. 그가 말하는 ‘공탁금’찾기 역시, 정말 시작된다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 1965년 협정을 건드리는 또하나의 사태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소송을 위해 피해자들에게 돈을 거두었다가 반환요구에 따라 돌려주었다는데, 공탁금 소송 역시 비슷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9-00012086-bunshun-int).

그는 이른바 “포괄적 화해’를 하면 필요금액이 삭감된다면서 일본을 향해 재단설립의 효용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은 바로 한일협정때 일본정부 쪽의 주장이었다. 징용자들의 피해를 일일이 따지려면 확인도 필요하고 확인서류가 구비되지 않으면 보상금액도 적어질 수 밖에 없으니 경제협력금이라는 형식으로 해결하자고 했던. 그는 스스로가 부정한 한일협정과 똑같은 방식을 시도중이다.

 

*‘개인청구권’은 누구의 것인가

그는 ‘정부협의’를 해야 한다고 그동안 주장해 왔는데, 그 이유는 협정을 통해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데에 있는 듯 하다. 정부협의에 맞서 개인적으로 소송을 하려는 이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데, ‘재단을 만들기 위한 법을 만들 때 피해자들이 더 이상 소송을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넣으면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징용자의 개인청구권이 1965년협정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다’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소송을 일으키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대법원에서의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그가 목표하는 것이 결국은 ‘정부가 다시한번’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이라면, 그가 그동안 해 온 소송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택한 해결방법에 따르게 하겠다는 것이라면, 그런 최변호사의 방식이 ‘인권’을 존중한 것으로 간주되기는 힘들다. 자신은 수많은 소송을 해 왔으면서도 당사자들의 소송권리는 빼앗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청구권이 정부간 협의로 소멸 가능한 것이라면, 1965년에 정부가 소멸시킨 청구권이 살아있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이상, 2019년4월15일 일본기자클럽에서의 회견). 자신이 주장해 대법원이 남아 있다고 판결한 개인 청구권을, 다시 한번 정부협의로 ‘소멸’시키는 것이 ‘정부간 협의’의 목적이라면, 그가 이제까지 해 온 소송들은 정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압박수단일 수 밖에 없다.

 

*크고 작은 기만들

소송을 무기 삼아 ‘개인 청구권’을 주장한 최변호사의 지론의 근거는 ‘한일합방불법론’이다.

그는 ‘한일합방이 불법’이라는 인정을 ‘국제적으로’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인정’을 해 준 나라는 없다.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면 1919년에 설립된 임시정부역시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실은 없었다.그의 이런 주장은 ‘일본사법부도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는 이야기와 이어지는 얘기인 듯 한데, 일본에서 과거사 관련해 원고측이 승소한 판결은 정신대/위안부할머니들이 함께 소송한 이른바 관부재판에서의 판결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건 1심에서의 판결이었고 고법에서는 뒤집혔다.

또 최변호사는 중국인노무동원에 대한 판결에 언급하며 일본최고재판소(대법원)가 “자율규제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고 주장한다.(2019/6/6.중앙일보).

하지만 최고재판소의 그 판결은 배상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구권 자체가 원천적으로 없는 건 아니지만 ‘조약에 의해 소멸되었으니 소송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 그 재판의 판결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청구권은 법적 유효성을 잃었지만 기업측이 스스로 뭔가를 할 수는 있겠다’는 내용이다.

그런 맥락을 생략하고 그저 일본최고재판소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자율구제를 권고했다’고만 말하면 듣는 이들은 ‘개인청구권 존재‘=’소송권리 인정‘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동안 ‘양국사법부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고 대사회적으로 말해 왔다. 그 양국정부를 압박하고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실제로 한국언론은 대부분 최변호사의 말을 그대로 전해 왔다. 최변호사는 일본언론을 향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전파해 달라고 했지만, 일본언론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는 전하지 않았다.

또 최변호사는 중국인의 노무자소송이 ‘화해’로 이끌어진 예를 들면서 일본이 한국을 증국과 다르게 취급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중국인들의 소송도 많은 경우 1972년에 중국정부가 일본과 수교하면서 전쟁배상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화해로 이끌어진 케이스도, 정부와 노무자간의 화해가 아니라 기업과 노무자간의 화해였다. 따라서 ‘중국인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는 최변호사의 주장도, 이런 배경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또하나의 기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또, 독일정부가 강제동원피해자들에게 보상한 사실을 들어 자신의 제안대로 재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유태인노동동원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말 그대로의 노예적 동원이자 노동이었다. 아무리 조선의 노동자가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해도 인종말살정책과는 구조도 맥락도 다르다. 구조와 맥락이 다르면 다른 판단/해결으로 대응하는 것이 상식이다. 오랫동안 ‘피해자’문제에 관여해 온 법률가가, 그런 ‘차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피해의 존재가, 더 큰 타국민의 피해를 자국민피해와 동일시해도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문제에서도 지원단체는 위안부들의 정황과 홀로코스트를 동일시해 왔다.

 

*한일협정 무화론

법학자 김창록도 최변호사의 거친 논지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런데 김창록 교수 역시 ‘한일협정에는 위자료가 없었으니 위자료청구를 해야 하고 한국정부는 “외교보호권‘을 가동시켜 피해자들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면에서는(<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역할강화를 희망하며>2019513,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주최,국내학술대회) 최변호사와 다르지 않은 한일협정무화론자다. 그는 1965년협정이 “파탄상황”(동)이니 “그 틀을 뛰어넘어 한일 과거청산을 규율할 새로운 법적틀을”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파탄상황”을 만든 건 바로 이런 주장들 자체다. 한일협정에 시대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거기서 얻은 교훈과 지혜를 현재와 미래에 살리려는 시도가, 과거 인물들이 한 일을 전부정하고 ‘새로운 과거’를 만드는 일로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더구나 관계국간의 자발적인 협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인 압박에 의해 그런 틀을 만들자는 것은 현실성도 없거니와 그 시도 자체가 이미 협정이라는 ‘법’의 부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새로운 틀”을 마련하려면 당연히 ‘오래된 틀‘로서의 한일협정은 파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파기수순의 시작점이야말로 한일관계 “파탄”의 순간일 것이다. 우선 한국은 일제시대는 물론 한일협정에 따라 해방이후에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모든 것을 먼저 돌려주어야 한다. 해방직후 조사된 일본인의 자산은 당시금액으로 무려 52억달러였다.(이대근<귀속재산 연구>,2015). 물론 한일협정때 받은 돈과 인력은 물론 그 이후에 전두환대통령이 받은 40억달러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일협정은 물론 시대적 한계를 여러 가지로 안고 있다. 그건 연합국 대부분이 ‘제국’으로서 식민지를 갖고 있던 필연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계를 갖지 않는 역사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란 언제나 그 시대를 고스란히 남긴 유산일 뿐이다. 과거역사를 만든 동시대 사고와 한계에 대해 고찰하는 작업은 언제까지고 유효하고 중요하지만, 그 고찰이 꼭 과거를 뒤집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는 세계의 앞으로의 과제라고 나 역시 생각하지만, 그런 커다란 과제가 자발적인 반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압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일본이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실시해 왔던 조치들–원폭피해자문제, 사할린교포문제, 그리고 위안부문제에 관해 실시해 온 일들은 당연히 ‘식민지지배’에 대한 속죄의 마음을 담은 조치였다.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마음이다.

 

*무기로서의 소송

그럼에도 최변호사는, 역사문제를 둘러싼 소송에서 적지않은 승소결과를 거두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승소했고 이어서 압류수속에도 나섰다(20190325, 뉴시스.“법원, 일제전법기업 상표권등 국내자산 압류결정..강제집행절차 개시) 그 사태를 최변호사는 “한일양국 사법부 판단을 무시한 전범기업의 말로”라고 표현하면서 “지금이라도 법치주의 국가에서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법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하길 바랍니다”(20190325 페이스북)라고 썼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전범’이라는, 국가나 기업에 붙일 수 없는 형용사를 사용하는데서 나타나는 일본에 대한 우위욕망과, 현재의 정황을 “사법부판단을 무시한 전법기업의 말로”로 간주하는 승자–‘법률가’로서의 오만이 가득하다. 실제로 그는 “한일정부협의를 통해 위안부문제와 징용공문제를 동시에 해결”(20190424. 최봉태 페이스북)해야 한다면서 양국 정부가“양국 사법부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해결이 됩니다”라는 말이 보여 주는 것처럼 ‘사법 지상주의’적이다. 그에게는 어떤 문제에서든 사법의 판단이 최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다. 그가 정부를 상대로 한 여러 소송들(외교부를 상대로 한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 위안부위헌소송등)이, 사법부를 통해 행정부를 움직이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것이었음을 보더라도 그의 사고는 명백하다. 그는 소송을 역사문제에서의 최고의 해결책으로 삼고 행동해 왔고, 자신의 생각대로 사태가 진전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저 대상자가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탄핵사유”(2018.11.1.ㅡ오마이뉴스)라면서 대통령마저 겁박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이다.

하지만 최변호사가 주도한 위헌판결에 패소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건 다름아닌 그 정부다. 패소상대가 외교부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박근혜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꽤 오랫동안 일본과 불편한 관계 속에 있었다. 한일합의는 그 결과로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니 한일합의에 찬성하든 아니든,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에서 승소해 한일협정 때 한국정부가 일본에게 보상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도록 했고 이후 한국정부의 피해자보상사업에서 중심에 있었는데도, 피해자들에게 ‘다시 소송을 해서 더 많은 돈을 받자’고 제의했다(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9-00012086-bunshun-int)

링크)고 한다. 현재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는 2018년대법원 판결은 말하자면 그 결과다. 이 과정 역시,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전제로 소송을 일으키고 승소했음에도 다시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겠다는 앞서의 패턴과 비슷하다. ‘피해자’를 위한다는 그의 수많은 소송들은, 언제나 마지막이 아니었다. 이어서 또 다른 협상/소송을 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한국정부를 향해 탄핵을 거론했던 최변호사는 일본기자들 앞에서는 일본정부가 따르지 않으면 국제적 여론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사법부를 움직여 한나라의 정부를 움직이는데 성공해 온 그간의 이력이 만든 자신감 가득한 협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는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을 상대로 피폭자 관련제소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일본도 하지 않았던(하지 않는 것이 꼭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대미원폭소송을 일으키겠다는 이유를 그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캐치프레이즈는, 굳이 ‘소송’을 통해 다시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세계가 공유중이다. 말하자면 더이상 새롭지도 참신하지도 않은 캐치프레이즈, 너무나 정당한 주장이어서 아무도 이의 제기할 수 없는 ‘정의’다. 그는 누구나 아는 정의를 소송이유로 사용해 자신의 소송을 정당화하고 여론을 움직여 왔다.

또 그는 자신이 소송을 하는 이유를 ‘인권침해를 받았는데도 현재까지 구제받지 못했다, 인권구제를 해야 할 상황이어서 소송을 일으켰다’‘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올바르게 만드는 토대다. 해결해야 할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일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일본기자회견) 여기서도 “인권”이라는, 그 누구도 반론할 이유가 없는 상식적인 정의를 내걸지만, 그가 지향하는, 국가가 주도하는 ‘청구권의 최종적 소멸’ 이 피해자들의 인권을 소중히 한 것인지는 피해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재단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로 ‘피해자들이 재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재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그동안 왜 들려오지 않았을까. 이는 언론의 관심이 소송이나 최변호사에게만 몰렸기 때문일 것이다.

(재단설립말고는 다른 해결안이 없다면서) ‘더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는 그의 말은 당연히 아름다운 명제지만, 소송위주의 그의 시도는 한일관계를 치명적으로 훼손했다. 그가 피해자전부를 대표하고 있지 않음에도, 지금 징용문제는 오로지 ‘소송‘을 주도하고 참여한 이들 위주로만 전개중이다. 더구나, 한일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은 징용자만이 아니다. 최변호사 방식을모두가 취한다면, 징병자들을 비롯한 또다른 피해자들이 끊임없이 소송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한일양국은 미래를 소송에 저당잡히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협의와 화해를 할 수 있으니 중재위도 필요없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갈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일본으로 하여금 중제위설치를 요구하도록 만든 것이 다름아닌 그가 일으킨 소송이었음을 은폐한다. ‘인권문제인데 정치외교문제로 접해서 문제가 어려워졌다’는 그의 주장은, 국가가 다시 나서서 ‘개인청구권을 없애’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다름아닌 정치/외교의 장을 필요로 하는 주장이라는 사실도 은폐한다. ‘인권’문제를 오로지 소송에 의존해 심각한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최변호사를 중심으로 하는 법률가들이었다. 그의 주장들은, 역사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법정으로 보내고 그렇게 나온 ‘판결’을 모두가 지켜야 하는 최고의 ‘법’으로 내세워,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조차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왔던 과거를 은폐한다. 작금의 징용관련 갈등은, 그가 선도했던 ‘역사의 사법화’의 결과다.

 

*법지상주의

그럼에도 그의 소송과 승소는 “우리헌법사상 빛나는 승리한 혁명”으로 칭해지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담론을 장악중이다. 승소판결을 ‘법치주의 승리’이자 ‘양국법률가의 승리’로 간주하면서 양측 정부가 판결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한국 외교부도 법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있기 때문”(최봉태<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역할강화를 희망하며>, 2019년5월13일,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주최 국내학술대회 자료집)이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그에게 ‘법치주의’,즉 ‘사법’의 권력이 학계나 정부보다 위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법치주의’라는 깃발을 들고 소송을 무기삼아 역사를 사법공간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유해 왔다. 하지만, 그의 ‘법지상주의’적 담론은, 그가 해 온 소송들 자체가 전부 1965년 협정의 부정에서,즉 국가간 법치주의부정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고 있다.

정부는 스스로 ‘법치주의’의 피해자가 되었으면서도 이런 ‘역사의 사법화’에 적극 가담해 왔다. 문재인대통령이 후쿠시마 수산물수입을 둘러싼 대립에서 한국이 승소하자 “앞으로 생길 다른 분쟁 소송에 참고로 삼기 위해서라도 1심 패소 원인과 상소심에서 달라진 대응 전략등 1,2심을 비교분석한 자료를 남길 필요가 있다”(20190416, 조선일보)고 했다는 사실은, 문대통령 스스로가 (최변호사와 함께 징용재판을 맡은 적이 있는 만큼) 일본과의 갈등을 소송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의문을 갖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대화’라는 외교채널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그 외교부가 만들어낸 화해치유재단을 ‘법적사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 해산시키고, 그 해산을 두고 최변호사가 “피해자들의 의사가 존중되게 된 것”(대구 MBC라디오,여론광장)이니 (일본이 보낸 100억원에 대한)“반환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대화가 아니라 법정에 역사문제에 대한 최종판단을 맡기는 방식, 실상은 학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학문이 선택적으로 이용되어 개인간/국가간 갈등수위를 높이는 ‘역사의 사법화’ 방식은 좀 더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더구나 피해자를 위해 역사문제를 돌아보는 과정이 고작 “승세를 몰아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문제의 해결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20190416, 최봉태 페이스북)라는 식으로 “승세”와 “주도권”을 찾아 상대를 제압하려는 방식인 한, 복잡다단한 역사문제가 생산적으로 풀릴 가능성은 지극히 적다.

소송이 만든 판결과 ,반년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해 온 한국정부에 대한 일본의 불 신은 극에 달했다(한국일보/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물론 최변호사등이 제공하는 정보에만 귀를 기울이며 결과적으로 그와 똑같이 생각하게 된 한국사회 역시 일본에 대한 불신을 한층 더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위안부문제 이후 쌓인 상호 불신을 해소하기는 쉽지 않아졌다.

소송이란 구조상 ‘이기고 제압’해서 자신의 방식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전투적 방식이다. 그런 방식이 결코 역사문제 해결방식으로 효과적이지 않았음은 이미 위안부문제가 증명했다. 일본유학목표가 “친일파가 저지른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것이었다는 최변호사는 자신의 싸움을 ‘독립군’의 싸움에 비견한다.

하지만, ‘해방되지 못한 피해자’의 “해방”은, 꼭 물리적으로 ‘이기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힘겨루기란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제국주의에 나섰던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방식일 뿐이다. 지극히 ‘근대적’인.

그는 그간의 활동이 보람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싶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를 믿고 의지했을 피해자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그는 자신이 주장중인 해결방안이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방식 자체의 모순을 들여다보지 않는 해결책이 성공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2019년 6월19일, 한국정부는 반년 이상의 침묵을 깨고 양국 기업이 재원을 마련해 해결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리고 이 제안은 최변호사의 제안인 양쪽 국가도 참여하는 안은 아니어도 최변호사의 제안과 가까운 안이었지만 곧바로 거부당했다.

오랫동안 실제로 피해자들과 함께 하며 강제동원피해를 연구해 온 연구자들 역시, 재단설립안에는 호의적이 아니다. 그 중 한사람은 재단설립안에 대해 “피해 문제 해결과 거리가 있는 미봉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현재 재단 설립 주장은 징용소송원고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생존자와 적극 ‘저항하는 피해자’만 해당”하고, “사망자 문제나 미수금 등 피해자 사회가 원하는 다양한 기대치나 요구하는 해결 방안과 무관”하다고 지적한다.(정혜경. 비공개세미나자료)

정부와 언론은, 좀 더 다양하게 연구자와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2. ‘역사사법화’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 징용문제를 생각한다

(1) 신일철주금 판결을 읽는다

<1>판결문의 전제—한일합방불법론

한국 대법원의 징용문제 판결에 항의해 중재위 설치를 요구(2019/5/20)한 일본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2018년10월에 나온 신일철징용판결등 조선인징용자문제에 대한 정부간협의를 2019년 1월에 요청했던 일본이 한국정부의 답변을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중재위 요청으로 옮겨간 건,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고 한 이낙연 총리의 발언때문이었다.(2019/5/21, 고노외무상 기자회견). 국내적 대응을 할 수 없으면 중재위 설치에 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노외무상의 지적은, 유감스럽지만 논리적으로는 맞다.

한국정부는 이제라도 일본이 원래 요청했던 정부간협의에 응해야 한다. 제3자를 배석시켜야 하는 중재위를 가동시키게 되면, 한국은 결코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뒤에서 국제법학자의 의견도 소개하겠지만, 한국의 논리나 태도는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성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부가 4개월이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표면적 이유는 ‘사법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법자체가 아니라 판결의 정당성 여부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대통령은 당연히 이 판결을 읽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청와대의 무대응은, 단순한 ‘사법부 존중’을 넘어 ‘판결내용자체에 대한 동의’일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실, 2000년에 부산에서 제기된 미츠비시중공업을 대상으로 한 첫소송에서 원고측 변호인이기도 했다.

신일철이 피고가 된 징용판결에서, 대법원은 신일철이 징용‘피해자’에게 1억씩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 1억원은 세간의 이해와 달리 미지불임금에 대한 배상금액이 아니다. 대법원 판사들이 피해자에게 지급하라고 한 금액은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다.

그러니까 이 판결은, ‘징용자들이 일본기업에서 일하고도 임금을 지불받지 못했으니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본은 조선인을 자국국민에게 했던 것처럼 전쟁수행을 위한 노동에 동원했다, 하지만 한일합방은 ’강제로‘ 이루어졌으니 조선은 ’일본‘이 된 적이 없다, 따라서 동원자체가 불법이니 그에 대한 위자료를 보상하라’는 판결이었다. 당연히 이 판단은 ‘한일합방은 불법’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한일합방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불법이라는 주장은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90년대초부터 주창해 온 생각이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는 일본인 학자들 사이과의 격렬한 논쟁을 치러야 했고, 학계에선 여전히 갑론을박 중이다.

대법원이 그런 합방불법론을 채택했다는 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학계에서 아직 논의중인 주장 중 하나를 정설로서 채택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2018년 판결은, 학계에서 아직 논의중인 사안임에도 일부 학자들의 주장만 채택해 나온 판결이다.

이것만으로도 앞서 언급한 ‘역사의 사법화‘의 문제가 드러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한일합방’을 합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고 시작하는 조약문을 마련해 둔 건 물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영일동맹과 카츠라/태프트 협정을 통해 조선의 지배권을 서구세계에도 인정받는 과정을 빠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한일합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합방불법성을 전제로 한 판결에 따르는 정황은 생각하기 힘들다. 한일합방불법론은,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결정적인 근거로서 사용되었겠지만, 그 설에 기대는 한 오히려 어떤 요구든 일본의 동의를 얻기는 어렵다. 그런 구조를, 원고측은 물론 대법원 판사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하다.

판결문은, 일본이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었고, ‘1942년에 ’조선인 내지 이입 알선 요강‘을 통해 관알선을 통해 인력을’ 모집했으며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만들어 국가가 주도하는 징용대상에 조선인도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설명해 두고 있다. 말하자면, 시기에 따라 동원방식이 달랐고 ‘법’에 의한 동원이었음을 명시해 두고 있다. 그럼에도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그 전부를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규정하는 건 바로, ‘한일합방불법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제시대때 조선인은 (법적으로도) 일본인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2>법관 다수의 생각-개인청구권은 남아있다

이 판결의 주요 초점은 식민지배에 따른 피해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는지 여부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대법관 전원이 찬성한 판결은 아니었다. 그리고 법관들중 다수가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이하와 같다.

당시 한국정부가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해 언급’(강조는 필자)하였고 “12억2000만달러를 요구하면서 그 중 3억6400만달러(약 30퍼센트)를 강제동원피해보상에 대한 것으로 산정”하기는 했지만, 그건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공식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교섭과정에서 교섭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했고, 담당자가)피징용자의 고통을 언급한 것은 “협상에서의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또, 한국이 12억이상을 요구했는데 “정작 청구권 협정은 3억달러로 타결”되었으니“이처럼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일본이 따로 “구체적인 징용/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하거나 양국국교가 회복된 뒤에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대한민국의 요구에 그대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등 반발했으니 일본이 한국의 “피해배상”요구에 응한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일본은 증거를 일일이 찾아서 청구권을 계산하는 건 쉽지 않고 결국 금액이 적어지니, 유상/무상 경제협력의 형태로 금액을 올리는 것으로 청구권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또 청구권이란 “식민지배불법성에 따른 청구권”이었는데, ‘한일조약에 식민지 불법성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니 ‘식민지배가 만든 피해에 대한 배상’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돈은 문안 뿐 아니라 실제로도 경제협력자금일 뿐 식민지배에 관한 배상성격의 돈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법관들 다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다수의 생각대로 판결은 확정되었다.

 

<3>법관 소수의 생각

‘강요된 합방’(불법체제)속에서 기망이나 구타등 폭력적 “불법행위”로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수판사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보상요구(위자료청구)가 1965년협정에는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청구권도 외교적보호권도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반대했던 판사들의 생각도 판결문은 적어두고 있다.

그 중 두사람은,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후의 한국정부는 협정에 따른 의무를 수행했으므로 더 이상 개인청구권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을 위해 정부가 나서는 일, 즉 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도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문제가 ”기본적으로 청구권협정의 해석에 관한 문제“임을 명시하면서, 조약 해석은 “조약의 문언에 부여되는 통상적 의미에 따라 성실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미가 애매할 때는 협정당시의 문맥을 봐야 한다면서 청구권협정에는 명백히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양국국민은 더 이상 청구권 행사 불가능”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약국 사이에서는 물론 구 국민들 사이에서도 완정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언의 통상적 의미에 부합하고 단지 체약국 사이에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지로 않기로 했다는 의미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다수의견에 반대한 법관들의 생각이다.

또, 한국측이 조약협정해설에 “우리가 요구한 건 모두 소멸, 한국인의 대일본 각종청구등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했다고 써 두었고,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무상 3억달러는 피해국민에 대한 배상적인 성격“이라고 발언했으며 이후 실제로 정부는 몇 번에 걸쳐 보상을 실시했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또다른 근거다. 1965년 협정은 모든 걸 일괄해서 처리한 협정이었고, 일괄처리협정은 국제관습법상 일반적이므로, 국가가 보상이나 배상을 받았다면 그 국민은 개인청구권 행사가 불가하며,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청구권자체가 남아 있지 않으니 소송을 제기할 자격도 없다면서, 징용자를 포함한 노무자들에게 1970년대에 91억외에 2005년 이후에 5500억여원이 이들에게 지급되었다는 사실도 반대자들은 덧붙여 두었다.

이 외에도, 식민지배에 대한 위자료성의 청구권은 1965년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남아 있다면서도, 외교보호권은(국가가 나서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 당시 양국의 합의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의견을 남긴 법관도 세사람 있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국가와 국가사이의 청구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방 국민의 상대국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 까지도 협정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명백하고,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1)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의 대상에 피징용 충구권도 포함됨을 분명히 하고 있”고,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도 당연히 청구권협정 의 대상에 포함 시키는 것으로 상호 인식 하고 있었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또, 2005년 민간공동위 역시 1965년 협정으로 받은 3억달러에 피징용 손배청구권이 포함된다고 간주했고, 정부가 “청구권협정 이래 장기간에 그에 따른 보상들의 후속조치를 취하였”다고 강조한다 (28).이들은 한일양국이 당시 ‘보상’과 ‘배상’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가간 합의를 했더라도 개인청구권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소송권리는 아직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판결은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개인청구권은 이미 남아 있지 않거나, 남아 있다 해도 정부가 그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나서야 하는)건 아니라는 의견을 가졌던 법관은, 재판관을 포함한 전체 13인 중 6명이었다.

 

<4>국제법학자의 생각

이번 판결은 2012년에 원고가 패소했던 일본법원과 한국하급심에서 패소했던 소송에 원고승소 판결을 내려 고법으로 보냈다가 재상고된 결과였다. 말하자면 이번 판결과 2012년 판결은 내용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2012년 판결에 대해서는 학계로부터 본격적인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예를 들면 서울대 이근관 교수는 이 때의 판결을 “국내법적 사고를 무비판적으로 국제적인 차원으로 투사“한 판결이라면서 비판한다. “ 부산고법과 서울고법이 징용자들의 항소를 승인한 것은 외국판결의 승인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교수는 앞서의 소수법관들처럼, 개인청구권은 한일협정에 포함되어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회담과정 문서에 “피징용한국인의 보상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양국 및 양국국민간의 청구권(미수금 및 보상금)이 해결“되었다는 생각이, 협정 이후의 정부공식해설서, 1966년 이후의 (징용자등을 위한) 국회입법, 2005년에 한일회담문서가 공개되면서 만들어진 국무총리산하에 만든 민관 공동위의 공식의견에서 확인되고, 2009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불에 개인청구권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청구권 행사가 어렵다고, 외교부도 보도자료를 통해 말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다수법관들은 한국정부가 회담과정에서 “강제동원피해 보상”을 요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공식견해”가 아닌 담당자의 교섭자료였으니 그런 요구가 한일협정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일축했었다. 하지만 이교수는 당시 한국은 “생존자,부상자,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방에 대한 보상 요구“를 했으니 설사 그 자료가 참고자료라 해도 한국이 “개인의 피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권협상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또, 수령금액의 명분을 놓고 양국정부가 치열하게 대립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한국측에서 볼 때 청구권문제는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한일간의 불행한 과거의 청산’이라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명분에 관련 된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며 ”이 협정이 불행한 과거의 청산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고 한국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의 포함은 협정수용의 절대적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바로 그때문에 문안이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으로 절충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끝까지 그 금액이 ‘식민지피해배상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 했는데, 당시 받은 금액을 그저 “경제협력자금으로 치부하는 건 한국정부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입장과 어긋“날 뿐 아니라 식민지배상을 부정한 ”일본의 입장을 추수“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교수는 또, 이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 참고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설사 일본이 ‘한일합방불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도, 그 점은 청구권문제해결여부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의 말대로라면, ‘일본이 합방불법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협정에서 받은 돈에 배상성격의 금액이 들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다수법관들의 전제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이교수는,”국제관계에서 일방 당사국이 국제법상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기초위에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고 타방 당사국과의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는 자주 찾아 볼 수 있다”면서, 국내법에서도 화해라는 이름으로 절충하는 경우를 언급한다. 일본이 합방의 불법성을 인정했든 아니든(즉 한일협정을 통해 받은 돈에 배상금성격이 있든 없든) 한일양국정부는 식민지배문제가 “협정대상이 되어 해결되었다는 점에는 의사합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싸우고 나서 합의에 달하는 경우도 그 합의금의 의미는 각자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가간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 판결 요지는, ‘1910년합방은 불법이었으니 모든 동원이 원천적으로 강제고 불법이다’라는 것 말고도, ‘1965년 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는 아예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문제 등이 해결되었다 해도 동원과 노동과정에서 입은 피해에 대한 ‘위자료’는 청구되지 않았고 보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인청구권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교수는 협정에 식민지배보상임이 문안으로 명시되지 않았어도, 그런 내용이 문안 밖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교수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국가가 처리한 일에 대해 개인의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 자체는 필연적인 현상이라면서 개인청구권제기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국제법이 이 부분에서 국내법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 역시 개인의 이해를 고려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는 설명도 해 두고 있다.하지만 동시에, 국제사회는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와 관련하여 여전히 국가에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권문제는 물론 중요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국제사회의 현실보다 너무 멀리 또한 빨리 앞서 나갈 경우 국가간 분쟁을 빈발시키고 관련 개인에게는 당위적 입법론이 현실적 해석론으로 오인케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당위적 입법론이란, 피해자를 위한 법이 ‘당연히’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영국이나 미국등 인권문제에 예민한 민주국가에서도 외교문제에 대한 “사법자제의 원리”가 천명“되었다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2018년과 비슷한 결론을 내린 2012년 징용문제판결에 대한 이교수의 생각이다. 프랑스등에서도, 특히 외교문제에 관해서는 (최종적인 판단은 사법부가 행하지만) 대체로 행정부의 의견을 전통적으로 조회하고 존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한 국가가 외교문제에서 두 목소리로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국제법학자인 정인섭교수도, “국가가 타국과 자국민의 청구권에 영향을 미치는 합의를 할 수 없다면 국제관계에서 국가간 외교교섭과 타결이란 그 존재의의가 없게 된다. 통상 국가간 합의란 개인권리에 대한 분쟁을 최종적으로 타결하기 위하여 마지막방법으로 시도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5>”한일합방불법론”의 문제

하지만 이런 국제사회정황은 2012년이나 2018년 판결에서는 거의 참조되지 않은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판결은 옳고 그름을 떠나 ‘외국을 상대로 하면서도 지극히 국내적인 시각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런 ‘국내적 시각’의 판결에 기댄 생각이 국제사회와 만나게 되었을 때(일본이 요구중인 중재위나 국제사법재판소), 그들을 설득 가능할 확률도 크지는 않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이견’들이 국민들을 향해 발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승자의 목소리만 전달되는 ‘판결문’의 구조상, 소수(13명 중 6명이니 극소수인 것도 아니다)법관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이들도 없다. 이 판결은, 90년대 이후 목소리를 내 온 일부 법률가/법학자들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했고, 결과적으로 언론이 전하는 승자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은 더 이상 듣지도 참고하지도 않는 전체주의적 사회로의 가속화에 기여했다.

노동이든 징용이든, 일제시대 노동자들의 구술은 참혹하고 안타깝다.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모순을 드러내고 그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법이란 늘 뒤늦게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필요하다면 당연히 새로운 시스템=‘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번 징용판결에서의 요구가 미불임금=재산이 아니라 “위자료”라면, 즉 일제시대 동원(을 포함한 모든 ‘국민’으로서의 의무부과)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한 위자료라면, 그 대상은 노동자만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에 대한 피해요구라면, 일본어와 일본이름을 비롯한 모든 강요에 대해 위자료청구가 가능하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또, 제암리교회사건, 관동대지진에서의 피해자등, 우리에겐 아직 제대로 가시화되지 않은 피해자도 적지 않다. 그런 이들에 대한 역사청산이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를 묻는 일도 아직 남은 과제다.

더구나 사법부는 , ‘일본인의 개인청구권’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징용문제가 불거지면서, ‘개인청구권이 존재한다고 주장해 온 원고측 변호사들의 주장만을 보도해 오던 언론들은, 고노외무상이 “개인청구권은 존재한다”고 말한 걸 두고 “표리부동”(경향)이며, “실토”(한겨레)이자 “궤변”(연합/JTBC)라고 비난했지만, 고노외무상의 발언은 그런 의미였다고 봐야 한다. 원고측 변호사와 한국 언론들이 지적했던 “(일본관료인)야나이의 개인청구권관련 국회 발언”에서 야나이가 실제 언급한 것은 “한일양국의 개인청구권”이었다.

한일정부가 처리한 한국의 개인청구권이 살아 있는 거라면 미국이 처리한 일본인의 개인청구권도 살아 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며 탄광이며 회사들은, 해방 이후 미국의 중개를 거쳐 조선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껏 일본인 명의의 땅들이 여전히 남아 않다는 것은(2019/5/31 기사)식민지배의 후유증이 한국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걸 말해 준다. 한일협정이란, 조선인들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개인청구권을 포기한 협정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도, 정부는 국제사회가 사법의 외교개입이나 정치개입에 신중하다는 국제법학자들의 조언을 경청해야 한다. 한일회담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명백히 논의되지 않았던 건, 대부분 식민지를 보유했던 연합국들이 중심이 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한계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보는 일과, 당시의 보상금에 징용자들의 사망,행방불명, 부상자들에 대한 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는 일은 모순되지 않는다.

다수법관들은 한일회담과정에서 한국이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달러만 받”은 사실을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는 자료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80년대 이후 전두환대통령이 일본에게 100억불을 요구했고 최종적으로 40억불을 다시 지급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법부’의 판결은 물론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사문제가 정치외교문제가 되어 버린 이상, ‘사법부의 판단’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야 하는 필연성은 없다.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게 된 문제인 만큼 국민대다수의 호응도 필요하다.

판결문은 대한민국이 징용자를 포함한 노무자들에게 1970년대에 91억을 지급했고 2000년대에 5500억여원을 지급했다는 사실도 적어두고 있다. 누락된 이들이 있다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일본과 한국정부가 행한 일은 국민모두에게 공유될 필요가 있다.

이 문제가 중재위에 회부되었을 경우 한국정부가 국제사회에 나가 실패했을 경우의 후폭풍의 크기는 작지 않다. 앞장 선 건 소수여도 그 후폭풍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야 일은 명확하다. 모두가 다시 한번 사태를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는 일이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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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1. 역사의 사법화 (3)

1.역사의 사법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그런데 지금, 위안부문제와 똑같은 일이 징용문제에서 벌어지려 하는 중이다. ‘징용’자체에 대한 공통인식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태인데도(도노무라 마사루의 <조선인강제연행>, 이우연의 논문등도 참고될 필요가 있음에도), 사법부는 역사학자의 학문성과는 배제하고 법률가들의 주장에만 호응해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위안부문제의 경우, 지원자들은 사법부의 권위를 빌려 행정부를 움직였고, 국민의 세금과(정부지원/지자체지원) 국민의 기부금을 사용해 국민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최봉태변호사는, 작년 10월말에 나온 대법원징용판결의 흐름을 만드는 데 기여한 핵심인물이자, 2006년에 정대협과 함께 위안부문제에서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일으킨 헌법소원의 주역이기도 하다. 작년 가을 판결이후, 그는 여러 언론에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며 ‘정부가 양국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주장 중이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 4반세기의 ‘법’의 관여가, 역사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검증이다.

‘법’이 갈등해결의 최종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 인류의 오래된 습관이자 약속이다. 법은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룰‘로서 작동하고, 그런 의미에서 때로 인권보호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법‘의 관여는 그 자체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곧 역사문제갈등의 최종판단주체가 꼭 법률가이거나 법정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사실 한일양국은 그 점을 알고 있었고, 역사문제에서 양국인식의 접점을 찾기 위해 함께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만들어 가동시킨 적도 있다.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학자들조차 접점을 찾을 수 없었던 문제를 법정으로 보냈다는 것은, 상대의 주장에 대한 경청과 접점찾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목소리 높여 외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역사공동위원회의 실패는 인선에 있다. 학자들 중에도 상대편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접점을 찾거나 업그레이드된 비판으로 논의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이들은 적지 않다. )

하물며 법정에서도 역사문제를 판단하려면 학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법정은 결국 ‘학술적’ 공방이 된다.그렇다면,역사를 둘러싼 학술적 논쟁의 장이 법정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구나, 역사학자조차도 자신의 생각을 변함없는 정언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학문이란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의 사태에 관한 인식에서 당사자와 주변인들 ‘모두가 완전히’ 일치하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능한 건 그저, 관계자들 최대다수의 ‘합의점’을 찾는 일일 뿐이다. 실제로 법정에서도 ‘합의’라는 이름의 접점 찾기가 곧잘 이루어지는 건 이미 잘 알려진 대로다.

법정이란, 어떤 사태를 두고 예스와 노를 명백히 해야 하는 공간이다. 예스인지 노인지에 대답하는 일이란 문제를 한없이 단순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화시키는 이유는, 법정에서는 오로지 기존의 ‘법’을 어겼는지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법을 위반한 ‘범죄’로 간주되어야만 처벌가능한 ‘법’의 성격상,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이들 역시, 그 때문에 위안부동원과 위안소라는 장소가 ‘불법‘여부인지에 주목하면서 기존의 ’법‘을 어겼다고 강조해왔다.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강제연행’이라고 말해 왔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물론 그들은 처음엔 위안부동원을 군인에 의한 강제동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이 애매해지자, 이번에는 강제성을 위안소에서의 생활로 옮겨 설명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후에 다시 보겠지만 이미 성립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이 말은 위안부문제에서 일본이나 군의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강제성’강조가 위안부문제를 국가와 국가간의(민족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일본인위안부‘가 잊혀진 이유는 거기에도 있다. ‘일본인위안부’란 당연히 ‘일본군(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에 의구심을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안부문제가 ‘인권’문제라면 당연히 ‘일본인위안부’문제도 주목받았어야 했음에도, 일본인위안부는 그렇게 해서 같은 4반세기동안 철저히 잊혀졌다. 다름 아닌 ‘인권’문제를 직접 다루는 이들에 의해서다.

일본인 위안부가 주목받지 못한 건 다른 이유도 있지만 ‘위안부문제의 사법화’에도 있다. 위안부문제가 민족간 문제이기 이전에 남녀문제이자 계급문제라는 인식을 미처 갖지 못했던 ‘법지상주의’는, 많은 이들이 위안부문제를 오로지 <일본군이 ‘타국’여성을 노예처럼 끌어간 국가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역사의 사법화’는 때로 순기능도 한다. 하지만 위안부문제의 경우, 문제자체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정황에서 과거의 ‘전쟁범죄’로만 인식되면서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를 배제했다.

징용문제 판결을 두고 대통령과 외교부가, 사법부가 하는 일이니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이런 과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대통령 자신 변호사로서 ‘역사의 사법화’에 관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의 최봉태 변호사에 따르면 문대통령은 2000년에 부산에서 일으킨 최초의 징용자소송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사반세기에 걸친 ‘역사의 사법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사법화’는 또다른 모순을 만들면서 동시대뿐 아니라 차세대의 평화마저 위협하게 것이다. 그 조짐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의 사태에서의 정의를 판단하는 능력은 법관들에게만 있지 않다. 더구나 사법이 때로 거꾸로 폭력이 되어 온 역사는 멀리 가지 않아도 냉전시대의 인혁당사건이 보여 주었다.

 ‘역사의 사법화’의 세월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지원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당사자주의가 중요하다면 더더욱, ‘역사의 사법화’의 주역이었던 대리인/대변인들이 아니라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목소리를 내 온 ‘당사자’는 실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사법공간은, 대립되는 의견의 한쪽 손을 들어주는 일로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도 ‘법’이란 역사문제를 관장하는 장으로 최적의 도구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역사문제가 정치문제이자 외교문제가 되어 국민모두의 문제가 된 이상, 그 해결은 당사자들은 물론, 해당국민들이 함께 납득 가능한 해결이 되어야 한다. 접점을 찾기 위한 모든 과정은 내외부간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어야 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힘으로 제압하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의 목표는 동시대는 물론 차세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2)

1.역사의 사법화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를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지원자들, 그 중에서도 ‘법’전문가인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이 해야 할 사죄가 ‘법적사죄’라는 주장을 해 온 것도,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온 것도 법학자/법률가들이다.

그런데, 한시대의 역사가 야기한 문제에 대한 사죄가 왜 꼭 ‘법적’사죄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없었다. 자세히는 따로 쓰겠지만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강제연행-국가책임’이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이 왜 ‘법’을 기반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없었다는 얘기다.

일본이 90년대 이후 여러번에 걸쳐 사죄와 보상을 실시하며 위안부할머니들의 목소리와 지원자들의 요구에 대답했음에도, 그런 사죄는 의미가 없다면서 국회에서 ‘배상’법을 만들어서 사죄/보상해야 한다는 게 ‘법적사죄’의 내용이다. 

그런데 일본국회의원들 중 일부는 90년대에서 2000년대초반까지, 그 배상법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이 아닌데 왜 국가범죄인가?’ 라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그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반발이 생겼는지 분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그 반발을 경청하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이후 있었던 건, 자신들의 주장을 돌아보고 일본을 움직이도록 만들 더 날카로운 비판방식모색이나 새로운 접점찾기가 아니라, 실질적 내용을 바꾼 ‘강제연행’주장과, ‘죄의식도 책임의식도 없는’ 일본에 대한 비난, 그리고 소송이었다.

2015년말에 있었던 ‘한일합의’에 지원자들이 반대한 이유도, 실은 그것이 ’법적‘사죄가 아니었다는, 그 단하나의 이유에 있다. 나는 그 주장의 문제점을 이미 논한 바 있지만, 이 글 후반에서 다시한번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한다. 

사실, ‘위안부를 매춘부라 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 역시 나에 대한 고소의 표면적 이유일 뿐, 고발자들이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고소한 이유는 ‘박유하의 활동이 자신들의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이 내용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고소장에 명확히 쓰여 있다. 덧붙여 두자면, 그 터무니 없는 주장을 담은 보고서를 만든건 로스쿨 학생들이고, 그렇게 읽도록 이끈 것도 변호사였다.

위안부지원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고소하고 승소하여 정부를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앞에 썼지만, 문제해결수단으로 사법부나 국제재판소가 쉽게 이용되는 건 한국만이 아닌 듯 하다. 그런 현상을 두고 어떤 이는 “정치의 사법화”“외교의 사법화” 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지금 더 심각한 건 ‘역사의 사법화’ 현상이다.

20세기말에 일어나 21세기로 이어진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건 학자 이상으로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실제로, 위안부문제담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논리를 만든 것도, 역사학자 이상으로 법률가들이다. 그 선두에 섰던 건 도츠카에츠로라는 일본인 변호사였다. 그는 80년대부터 인권문제를 유엔에 어필하는 활동을 해 왔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어필하고 싶어했던 정대협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에 따르면, 지금은 일반화된 ‘성노예’라는 단어도 그가 만든 단어였다.

90년대 이후 정대협 역시 유엔을 향해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나(쿠마라스와미도 법학자다) 맥두걸 보고서가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든 건 이들 일본인변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변호사협회자체가, 단체로서, 조직적으로 일찍부터 이 문제와 마주해 왔다.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등 ‘피해자’문제에 일찍부터 관여해 온 최봉태변호사가, 자신이 피해자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가 일본유학 당시 일본인 변호사들이 열정적으로 이 문제를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본 것에 있다고 한 말은 그런 정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위안부문제가 대두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인 1994년에 국제법률가위원회가 보고서를 내놓은 것도, 이들 일본법률가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현시점에서의 시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끼친 건 역사가나 증언자 이상으로 법학자/법률가들이다.

법률가들을 역사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만든 건 ‘동경재판 혹은‘ 뉴른베르크재판’이었다. 말하자면 과거의 역사에서 일어난 문제가 법정에서 ‘처벌’된 것을 아는 이들이, 새롭게 맞닥뜨리게 된 과거문제 역시 그와 비슷한 문제로 이해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처벌’하려 했던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위안부문제를 ‘전쟁‘중인 적대국가 사이에 일어난 일로만 이해하고, ’전쟁범죄‘로 이해했다. 이들의 보고서는, 동시대에 일어난 아프리카/동유럽의 내전에서의 부족간강간납치등 여성들의 피해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자들이 위안부문제를 그런 문제들과 같은 문제인 것처럼 어필했기 때문이고, 유엔인권위원회나 국제법률가위원회는 그런 의견을 받아들여 동시대비극과 위안부문제를 동일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미 위안부동원은 공창제를 이용한 간접적 동원이었음이 연구되었고 발표되고 있었다(김부자, 송연옥., 야마시타영애등). 하지만 그런 ‘학문’내용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유엔에 제출된 흔적은 없다. 물론, 위안소에 조선인 대만인 뿐 아니라 일본인도 많았고, 오히려 일본인여성들이 위안부제도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도 강조되지 않았다. 

기존학자들은 1932년 상하이에서 처음 위안소가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미 청일전쟁때 한반도에는 군인을 위한 일본여성들이 있었다. 러일 전쟁 직후에 1910년에 만들어진 진해의 일본군기지가 ‘위안’을 의뢰한 여성들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여성들이었다.

일본과 조선은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화’를 매개로 한 관계였다. 좋든 싫든 조선은 이 시기 ‘일본제국’치하에 놓였으니 일본과 국가단위로 적이 되어 싸운 중국과는, 만주국을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관계가 달랐다. 따라서 조선인 위안부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고찰해야 하는 문제였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제목에 굳이 <제국><식민지지배>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상호관계를 정확히 보아야만 정확한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판만이 해결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이다.

<제국의 위안부>이후, 20년 이상 ’전쟁범죄‘ 라는 말만을 사용해 왔던 연구자/활동가들은 ‘전쟁책임’이라는 단어대신 ‘식민지지배책임’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은 나의 책을 법정으로 보낸 이들에게 동조해 <제국의 위안부>를 계속 비난중이다.

90년대이후 한일갈등문제에서 ‘법’관계자들은 분명 선의와 열정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써 왔다. 그리고 그 노력은 충분히 평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활동은 안타깝게도 4반세기가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법률가들에 의해 사법부가 그들의 손을 들어줬고 그에 따라 정부까지 나섰음에도. 선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세상의 오해와 대립을 증폭시키고 ,결과적으로 갈등을 유지시켰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1)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한일관계가 빈사상태다. 1965년에 수교를 회복한 이후 “사상최악”이라는 표현을 쓰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해마다 열어왔다는 한일경제인 회의가 연기되었고, 지금과 같은 정황이 이어지는 한 6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G20 회의에서 한일수뇌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크지 않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대부분 그런 현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건 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칠한 일본의 태도를 적반하장이라고만 여긴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건 일본의 정치가들이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대통령의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틀렸다. 대통령도 이제는 한일관계회복을 바라고 있는 듯 한데, 분석이 옳지 않은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6년전,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책을 통해 현재와 같은 정황이 닥칠 수 있음을 예고한 적이 있다. 나의 문제제기는 자신들의 운동과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 이들에 의해 법정에 갇히는 사태를 맞았지만, 그 책은 오로지 오늘과 같은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쓴 책이었다. 지금의 한일관계는 단적으로, 나의 입을 막으려 한 이들과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만든 것이다.

작년가을에 신일철 징용판결이 나온 이후 한일관계는 이전에 비해 훨씬 자주 삐걱이고 있지만,그런 양국갈등의 연원에는 위안부문제가 있다. 일본이 참을성이 없어지고 때로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곤 하는 것도 모두 위안부문제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국 쪽에도, 위안부문제를 4반세기 겪으면서 ‘사죄하지 않는 일본’관이 정착되어 버린 탓에 불신이 가득하다.

말하자면, 현재 한일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각각의 문제 이전에, 오랜 갈등의 세월을 겪으면서 쌓여온 불신과 체념 쪽이다. G20이 일본에서 열리는데도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과 수뇌회담일정을 일본이 잡지 않고 있는 것도 그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른바 ‘한일관계’ 전문가들과,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 전문가 혹은 지원자들은 사실 접점이 거의 없다. 전자는 대개 ‘국익’을 언급하며 앞으로 나아가자는 제언을 하고, 후자는 ‘국익보다 개인’이라면서 ‘피해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그 양쪽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거의 없고, 그 점 역시, 문제해결을 방해하는 이유중 하나다. 대통령이 취임초기와 달리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는 발언과 행동을 취하게 되었음에도 실질적 변화가 없는 건, 실제정책은 후자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대통령은 그 양쪽이 합쳐져 분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일간 갈등을 빚고 있는 각각의 문제들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하지만, 한쪽은 정치경제문제를 앞세워 생각하느라 문제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른 한쪽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한 발언권을 독점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론 그 그 독점이 옳은지 여부를 따지기 위해 독자적인 조사와 취재로 ‘발언의 독점’양상의 내부를 제대로 들여다 보려는 언론도 없다. 언론들 대부분은 그저 전자와 함께 탄식하거나, 그저 후자와 똑같은 목소리가 되어 ‘운동’에 참여한다. 한일간갈등문제가, 수많은 언론의 참여 덕분에 전국민이 아는 문제가 되면서도 정작 그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은 늘지 않고 인식은 천편일률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최근 들어 전서울대 교수 이영훈 교수가 열정적으로 위안부문제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아마도 진보쪽 사람들은 이교수의 강의를 그저 일본우익과 동일시하며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위안부문제 담론을 관장해 온 이들은 이영훈교수의 강의에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과의 접점을 찾는 일은, 한국내부의 접점을 찾는 일도 되어야 한다.

사실 90년대엔 위안부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했던 김대중시대를 맞아 2000년대 초반은 수교이후 최고조로 한일관계는 좋았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때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에 진 정부가 문서들을 공개하게 되고, 개인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금을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다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국정부는 다시한번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법을 만들어 보상했다. 징병/징용자는 물론, 위안부할머니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일부 위안부할머니들과 지원자들은 같은 무렵에 이번에는 외교부를 상대로 또다른 소송을 일으킨다. ‘정부가 위안부문제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소송이다. 5년이 지나고 2011년 여름에 정부-외교부가 패소했는데, 같은 해 겨울에는 이른바 ‘수요데모’ 1000회를 맞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들어서게 된다.

90년대에 일어났으면서도 국민적인 관심을 받지는 못했던 위안부문제가 국민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운동의 흐름이 바뀐 건 이때부터다. 이 무렵부터 이른바 ‘평화나비’라 불리는 대학생조직의 포스터가 대학마다에 나붙기 시작했고, 서울시후원으로 이런저런 이벤트를 기획하고 수요집회에 참여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교등학생과 초등학생까지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패소한 외교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위헌’이 되지 않도록 위안부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관여방식과 내용은 맥락상 하나부터 열까지 지원단체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위안부문제는 본격적으로 ‘외교’문제이자 ‘정치’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정부대상으로 소송까지 걸어 위안부문제를 외교문제로 만들었던 지원자들이, 이제 와서 위안부문제는 ‘정치/외교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라고 주장한다. 정치경제 중심의 국가간문제 따위가 아니라,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우선적으로 나서야 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 자체로는 옳은 주장이지만 그 주장은, 위안부문제를 앞장서서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이 바로 지원자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4)

1.역사의 사법화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위안부문제 관계자들은 2000년에 있었던 여성국제전범재판을 통해 히로히토천황을 ‘유죄’로 단죄했다. 변호사였던 박원순 시장은 그 판결을 내리도록 종용한 ‘검사’중 한사람이었다.

아키히토전천황을 ‘전범의 자식’이라고 규정한 문희상의장의 인식이 2000년 여성국제전범재판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은 커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역시도 ‘법적판단’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케이스가 된다.

물론, 국제여성전범법정은 위안부문제 발생 이후, 냉전붕괴와 세계화의 영향으로 더 가까워진 세계여성들이 급격히 교류의 장과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그 결과로 국경을 넘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놓은 장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 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인’ 위안부는 이 자리에서도 배제되었고 그런 한 이 ‘여성’법정은 반쪽짜리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법정’의 권위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정체시켰다.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한 연합국조차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으로 판결하지는 않았다. 군부와 천황을 따로 놓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판결이 맞는지 여부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직 위안부문제에 관해 충분한 이해가 없는 채로, 또 왜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는 대신 ‘상징’으로나마 천황으로 남겨두었는지를 모르는 채로 50여년 후 ‘현대’의 법관들이 성급한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처벌’을 강조하는 이들은 곧잘 매춘을 강요한 군인을 사형시킨 스마랑 사건을 강조하지만, 스마랑사건판결은 국가의 수장이나 군대의 수장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황이 ‘처벌’당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국민의 동요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연합국은 일본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황은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 헌법9조와 맞바꾸어져 말 그대로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이후 44년을 살았다.

그런데 과거의 연합국의 판단에 대한 국제여성전범재판의 관심은 오로지 ‘처벌’여부에만 있었던 듯 하다. 그 판결은 시대적 진보의 양상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시대를 정체시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판결은 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의 여론을 급격히 악화시켰다.

일본의 천황은 일본인들에게는 정치가 아니라 문화다. 일본인들에게는 국제여성전범재판의 판결이나 문희상의장의 발언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부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다만, 문의상의장이 천황의 사죄를 요구한 건 다른 한편으로는 지원자들이 주장해 온 ‘법적사죄와는 대치되는 발언이기도 하다. 일본은 그런 맥락도 읽을 필요가 있다. )

더구나 설령 천황이든 상황이든 일본을 상징/대표하는 이의 사죄가 있다고 한들 위안부문제자체와 해결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그것이 곧바로 한일관계우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가능하기엔 오해와 과장과 독주가 만든 상호불신과 혐오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사회는 그저 ‘사죄하지 않던 뻔뻔한 일본이 국제사회 압박에 못이겨 드디어 무릎을 꿇었다’고만 여길 것이다. 

이 4반세기동안, 법률가에 의해 역사문제가 좌지우지되고, 법정은 개인의 입을 틀어막고 정부를 조종하고 타국을 겁박하는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다. 정의롭고 공정해야 할 법의 공간, 책임을 져야 할 주체조차 존경의 념을 가져야 할 공간을 그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복잡다단한 역사를 외교/정치문제화시키고, 단순한 예스 혹은 노로 대답하도록 만든 건 누구인가?

‘재판이 (일본재산의) 가압류판결을 내린 건 당연한 일이다. 일본과 한국정부가 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최봉태)는 주장은 가히 오늘의 사법의 권력화 현장을 보여준다.

물론 그 조치가 옳다면 사법이라는 권력사용은 고귀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지원자들은 정부가 지원자들과의 논의를 거쳐 일본과 협의한 끝에 ‘한일합의’를 내놓자, 이번에는 그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서 반대에 나섰다. 곧바로 수용하겠다는 의견을 낸 위안부할머니도 있었지만 그런 분의 목소리는 곧바로 묻혔고 지금까지도 그 정황엔 변함이 없다. 그 분들을 그저 회유당한 것으로만 보는(보게 만든 이들이 물론 있다)시선은,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는 듣지 않았던 이 4반세기 한국사회를 상징한다. 

한일합의에 대해서는 다시 쓰겠지만, 그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실은 기억되어야 한다. 사법이 역사를 관장하는 주체로 나서 개인과 정부와 타국에 대한 압박의 도구로 쓰여졌으나,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는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대통령과 국회의장께 제안한다. 한일관계를 회복시키고 장기적인 화해평화를 지향한다면 대화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동시에 그 논의과정을 언론이 국민들에게 전달해 모든 국민들이 듣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고. 시급히 접점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는 1년 단위로, 긴 시간이 필요한 프로젝트는 5년 10년 단위로 대화하면서 학자와 관계자들에게 논의를 맡기고 언론이 보도하도록 하면, 국민들은 그 보도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하면서 싸우지 않고 교류할 수 있다. 10년, 30년, 50년,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고 합의된 사항을 각각의 교과서에 반영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한일양국은 역사인식에서 접점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프로세스에는 북한도 참여해도 좋을 것이다. 백년대계란 그런 것이다.

동시에 정부는, 2005년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나온 징용문제는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민관합동위원회의 견해와 이후,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정부가 해 온 일을 제대로 공지할 필요가 있다. 논의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아직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야 밝혀진 것처럼, 역사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도 지원자들과 법정은 자신들만의 이해와 판단만이 옳다고, 그것에 따르라고 무려 4반세기동안 주장해 왔다. 심지어 알게 된 사실을 언론이나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밝히는 일도 없었다. 그 결과가, 현재의 한일관계다.

이 글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사고를 재검증하기 위한 글이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일제시대 조선인포로심문 조서

와세다대학의 Toyomi Asano 교수가 중요한 자료를 발굴했다는 기사가 오늘아침 마이니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국언론도 많이 보도한 듯 한데,아사노교수의 허락을 얻어 원자료를 번역한 내용을 올려둔다.

하나하나 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나로서는 특히 18번 위안부문제 관련발언과 일제시대 종식이후에 대한 동시대인의 인식이 드러나는 25번,26번이 흥미로웠다.

사실,`여성들을 강제로 끌어갔다면 남자들이 앉아서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건 오늘날도 가끔 듣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말을 동시대인의 입으로 듣는 건 묘한 긴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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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주: PW는 Prisoner of War (포로), PsW 는 Prisoners of War (포로들), Allied 는 연합국으로 번역하였으며, conscription 은 경우에 따라 징용 (업무의 경우), 징병 (군의 경우), 또는 징발 (위안부의 경우) 으로 번역함. MOO는 Military Operation Officer (군 운영 장교) 로 번역함)
국립 ARC 로부터 재발급
기밀문서
군 정보국
포로 및 물자부
보고일 : 1945년 4월 24일
(포로)심문일: 1945년 4월 11일
(포로)번호 및 계급: 41J-1150, 민간인, 이복도
14J-185, 민간인, 백송근
41J-393, 민간인, 강기남
WME
한인 해군 민간인 3명에 대한 종합 보고서,
리스트 78번. 45년 3월 28일 “한국인에 관한 특별 문의사항” 에 대한 회신
1538

서두
심문자에 의해 질문받은 약 100 명의 한국인 포로들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반일감정을 공유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기회주의자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 3명은 자신의 증언에 있어 신뢰할 만한 매우 진실한 증언을 보여준다. 한 포로에 대하여 별도 보고서가 만들어질 것이고 다른 두명은 추가의 심문이 필요하지 않다.

설문지
이 보고서는 45년 3월 28일의 “한국인 심문” 리스트 78번에 기초하였다. 단락 번호는 이 리스트의 질문 번호에 상응한다.

2. 지방정부의 한국인:
마을의 우두머리는 항상 한국인이다. 우두머리는 그의 정직함과 리더쉽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선출된 연장자이다. 일본인은 이 선거를 조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 관청의 관리장:
“면” 대부분의 사무소장은 한국인이다. 10개중 2개 정도가 일본인이다.
“군” 사무소의 장은 보통 한국인이다. “전라북도” 에는 14개의 ‘군’ 이 있고, 1942년 기준 9개소의 장은 일본 정부에 의해 임명된 한국인이다. (상세 정보 없음)
“읍” 사무소의 장은 주요 인구 구성에 따라 일본인과 한국인 양쪽 모두가 있다.
“부” (시) 의 장은 언제나 일본인이지만, 이외 직책은 한국인일 수 있다.
“도” 지사는 대개 일본인이다.
1942년, 전라북도, 충청북도, 강원, 황해도의 도지사는 한국인이었으며,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다.
1940년 이래 정부 관리 직책을 가진 한국인 숫자 변경은 알려진 바 없다.

3. 한국 남성은 1942 이래 일본에서 일을 하도록 징용되어 왔다. 그들은 면사무소에 의해 통지되었다. 한번에 300 에서 1,000 명이 징용되어 일본에 이송되기도 했다. 이런 이송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93 가옥이 있는 한 마을에서는 30명의 남성이2년의 기간 (1942-44) 동안 징용되었다. 징용 기간은 2년이지만, 많은이들이 3년 또는 그 이상 기간동안 체류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 포로는 석탄과 철광 광산 및 비행장 건설에서 일하던 한국인들과 여러 개인적 연결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광산의 가장 깊고 뜨거운 곳에서 일하는 등 가장 열악한 노동이 요구되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는 일당 ¥ 3.50 을 받았고 그중 ¥ 0.10 은 우편 적립으로 공제되었다. 그들에게는 음식과 숙소가 제공되었다. 징용자들의 가족을 위한 보조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그들의 집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친나이 카라푸토 (Chinnai, Karafuto) 탄광에서는 현지인과 일본인 노동자는 일당 ¥ 7.00 에서 ¥ 24.00 을 받았으나, 징용자들은 고정 급여만을 받았다. 통신은 허용되었으나 모든 서신은 검열되었다.
이들 한국인들에 대한 처우는 연합국 포로들보다 열악했다. 일본에 살던 포로는 요시마 후쿠시나켄 (Yoshima, Fukushina Ken, 역자주, Fukushima Ken 일수 있음.) 근처의 탄광으로부터 3명의 한국인이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거기엔 500 징용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들 중 한명은 그가 아키라(Akira) 로 데려가 한 탄광에서 일하게 했지만, 그가 가족에게 쓴 편지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요시마 (Yoshima)로 끌려가 15일간 고문을 받고, 타이라 (Taira) 에 수감되었다. 다른 2명은 잡히지 않았다.

4. 한국인은 1942년 이후 중국 북부, 만주 또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한 포로는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일하도록 징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두명은 만주로 보내어진 징용자는 없었다고 한다.

5. 징용을 거부하는 자는 투옥되었고 그의 가족은 식량을 빼았겼다.

6.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사진과 서명이 부착된 신분증을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

7. 농민들에게는 하루 2 합 5국 (*역자주: 2 合5局,2 go, 5 shaku,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15 리터에 해당) 의 쌀이, 그리고, 사무 직원에게는 하루 2 합 4국 (*역자주: 2 合4局,2 go, 4 shaku =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33 리터에 해당)의 쌀이 할당되었다. 추수 전, 정부 관리는 곡식을 검사하고 추수량을 예상하여 그해 농부와 그 가족 할당량을 공제한다. 나머지는 정부 관리에게 판매해야 한다.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많을 경우 농부에게 행운이고 여분의 쌀을 숨길것이지만,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적을 경우,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양에서 빼내 요구조건을 맞춰야만 한다.

8. 한국인들은 일본인 농민들은 그런 배급할당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대단히 분개하고 있다. 농민들이 반쯤 굶주리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냥 열심히 일한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1942년 전라북도의 쌀 농사는 흉년이었다. 같은 이유로 1945년의 쌀농사 결과도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 뿐이었다. 1941년 이후, 상용 비료가 모두 사라져, 모든 농사가 평균 이하의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력 부족이란 이유로 사용되지 않고 내버려진 농토는 없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전쟁 전에 비해 더 많은 농사 일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필요한 곳에 어디든 함께 돕는다.
한국의 남부지방에서는 경작지의 절반은 쌀경작에서 제외되고 면 농사를 하도록 농민들에게 요구된다. 검사원은 수확량을 예상하였다. 농민은 필요할 경우 여유분을 생산한 사람에게 빌려서 이 예상치를 맞추어야 했다.

9. 소작농은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요구되지는 않는다. (다른 계층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개개인의 인적사항은 “면 사무소” 에 보관되었다.

10. 1942년과 1944년에 각각 한국을 떠난, 농민이었던 두명의 포로는 어떤 형태로든 배급표라는 것을 본적이 없다. (다른 한명은 1935년부터 일본에서 살아왔다.) 의류 구매 요청은 직접 “면 사무소” 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음식은 그들 자신의 경작물로부터 할당되었다.

11. 1944년 4월, 한국인의, 경찰의 승인 없이 차량에 승차하여 100 km 이상을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보행자는 통제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부 관리에 의해 그들의 집에서 아무때나 검문될 수 있었다. 검문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일어나는 경우, 집 구성원 전원의 모든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1943년, 한 포로의 집은 위생 상태 점검 목적으로 두번 검사되었다. 2400 (*역자주: 밤 12시) 에는 모두에게 통행금지령이 발령되었다. 이 시간 이후 자신의 집 밖에서 발견된 모든 이들은 체포될 것이다. 가끔씩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청취 가능 거리내의 모든 마을에 사이렌이 경고의 의미로 이용되었다.

12. 전라북도 전주 근방 출신의 포로는 1938년 처음 시작된 이른바 “자원 입대” 하의 군사 훈련을 받은 여러명을 알고 있었다.
1938년부터, 6개월 반 동안의 기본 훈련이 경성 (Keijo) 또는 나남 (Nanam, Ranam) 에서 실시되었다. 훈련은 일본인들과는 별도로 실시되었으나, 일본군 운영장교에 의해 수행되었다. 기본훈련 후 지원병들은 2-3 개월의 휴가기간을 부여받은 후 전투 병과에 배속되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일본부대 속에 각각 분산 되었다. 훈련과정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본어 말하기 능력과 최소 2년의 교육이 요구되었다.

13. 징병 전 일본어 훈련 학교가 각 ‘면’ 마다 설치되었다. 학생들은 매일 3-4시간씩 1년간 출석했을 것이다.

14, 15. 포로들은 징병법 (*역자주: 또는 징용법)이 발효되기 전에 한국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이것과 징용으로부터 도망친 한국인들로 부터 전해 들어왔으나 그들의 이름을 말할수는 없었다. 한국 북부지방 출신들은 그 법에 대해 남부지방 사람들보다 저항하는 경향이 크다.

16. 포로들은 “Tonari Gumi” (*역자주: 일종의 반상회) 를 알고 있었으나, 한국 내의 그런 조직에 대해 들어본 바는 없다.

17. 이 전쟁은 철도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비율 또는 직책에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정거장 감독을 제외한 차장, 철도 엔지니어, 또는 다른 어떤 직책도 한국인이 종사할 수 있다.

18. 포로들이 태평양에서 보아온 한국 매춘여성 모두는 자원자였거나 또는 부모에 의해 매춘업에 팔려온 여성들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직접적인 여성 징발이 있었더라면 노인과 젊은이들이 모두 이것을 감내하지 않고 격분했을 것이기에, 이것은 한국적 관점에서 적절한 것이었다. 남자들은 분노로 궐기하여 이후 그들이 당할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일본인들을 죽였을 것이다.

19. 한국이 독립했던 당시를 살았던 나이든 한국인들은 변함없이 일본인을 미워한다. 몇몇 일본 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친일본성향이더라도, 그들중 여럿은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그들의 기분을 대담하게 말한다.

20. 모든 포로들이 그들이 강제로 징병되었다고 말한다.

21. 한국인들은 그들이 겪어온 이 전쟁의 효과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여럿은 이것이 결국은 그들의 독립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관용이다.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한 포로는 명백히 친 러시아이며, 한국에 공산주의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없고, 한국보다도 훨씬 무능한 나약한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을 그들의 해방자로 기대하고 있다.

22. 태평양 섬들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매우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모든 포로들이, 자신들을 연합군에 넘길까봐 두려워한 일본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 노동자들을 알고 있었다. 티니안 (Tinian) 에서 잡힌 포로는 미군 전선으로 향하는 3명의 여성들을 (그들중 둘은 등에 아기를 업고 있던) 보았다. 포로와 함께 같은 동굴에 숨어있던 한 중위가 그들 모두를 보안의 이유로 죽였다. 그 포로는 자신이 한국인이란것이 알려졌다면 자신도 분명히 죽었을거라고 확신했다.

23. 포로들은 그들이 하와이에 있는 동안, UN 서약에 따른 적정 절차에 의해 “독립 한국” 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두 들었다. 그들이 이 정보를 한국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4. 모든 포로들은 모든 한국인들이 일본과 싸우는데 뛰어들 것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믿고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질것이라는 사실이 전에 알려졌다면 이 명백한 일본에의 충성은 빨리 톤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부 지방 출신의 포로는 남부지방 사람들은 더 수동적이고 일본인들과 싸우는데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적다고 말한다. 독립 운동은 보통 북부지방의 더 활동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원한다. 이 3인의 포로들은 군사 훈련을 받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싸울 기회를 환영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게릴라전에 적합하게 특화되있다고 느낀다.

25. 한국인이 관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분개는 없다. 개개인은 미움을 받을 수 있으나, 미래 한국의 정부를 위해 전체적으로 그들이 관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6. 한 포로는 모든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한다. “일본인은 언제나 심장부터 일본인이다.” 라고 말하고, 일본과의 미래의 문제 때문에 일본인의 잔류는 한국에 손해라고 말한다.
다른 포로는 단지 고위 공직자들만 제거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이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과 역발란스를 맞출수 있을수 있다고 본다.

27. 포로들은 한국이 UN 대표들로부터 임시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있을것이다. 미국의 직접 통치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다른 나라의 경우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

28. 마을 정부 (주: 면, 읍 등) 는 나라가 UN 통치하에 놓이면 별도의 도움 없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각 군에 평균 60 명의 경찰이 있으며, 50% 가 한국인이다. 이 비율은 더 많은 경찰 병력이 훈련될 때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29. 여운형은 한국 독립 운동의 활동적인 멤버로 알려져있다. 그는 1942년 경성 (Jeijo) 에 살았다. 다른 상세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30. 한 포로는 1943년에 일본에서 일했던 한국 공산당의 리더 한명에 대해 들었다. 알려진 유일한 이름은 ‘김’ (가네모토, Kanemoto) 이다.

 

원본 : 「参考資料5」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1088796251178782.1073741825.100001452518600&type=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7576867935890

 

19금 도서 지정 관련 보도

성남도서관에서 나의 책들을 19금 도서로 지정한 배경을 취재해 준 기자분이 있었다. 깊이 감사드린다.

우연히도 오늘, 서울의 한 남자 고등학생 둘이 <제국의 위안부>가 “방과후수업”의 과제도서였다면서 남은 질문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었다. 고등학교 1학년. 책을 읽고 찾아온 학생중에는 최연소다.

책을 너무 좋아한다는 두 학생한테 성남시 조치 얘기를 했더니 학생들도 기막혀 했다.

아이들은 때로, 어른들을 훌쩍 앞서간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6090107263917300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6654784694765

 

渦中日記 2016/5/13

오랫만에 다시 “渦中日記”를 쓰기로 한다.

고발이후 한동안, 재판관련 그리고 책관련 일을 이 제목으로 썼었다. 그러다가, 기소 이후부터 이 제목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渦中日記”라는 제목조차 사치스럽단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1월에 민사패소하고 2월에 가압류를 당하면서,그 외에도 한일합의 이후 부쩍 심해진 공격을 하루가 멀다고 받으면서, 약간의 무기력증이 오기도 했었다. 어차피 일일이 대응할 수도 없고 여론을 살피는 사람을 따로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니 비난글들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월말에 한겨레가 비판글을 올렸기에 반론을 썼지만, 요즘처럼 재판준비에 쫓기고 있는 시기에 시사인,오마이뉴스, 그리고 녹색평론,..이런 식으로 연달아 나오면 반론을 쓰는 일도 부담스럽다.

정말 써야 하는 책을 쓸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다.

앞으로는 책/재판관련 해서 “일어난” 일만 간단히 쓰기로 해 본다. 渦中日記를 쓰는 날이 많지 않기를.

————
아침에 박경신교수의 SNS발언에 항의포스팅. 이런 작업은 늘 우울하다. 비판하는 이들이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짧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하루종일, 법원에 제출할 자료준비를 위한 작업.책에 사용한 자료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굳이 밝혀야 하는 작업의 무의미성에 견뎌야 했던 시간. 명백히 소모적인 시간들에 의미를 부여해보려 하지만, 그 노력자체에도 가끔은 지친다.

1940년 전후의 수양딸제도관련기사와 인사소개업자들의 호적위조관련기사가, 나눔의집 할머니들 중에 수양딸로 갔던 분들이 있었던 걸 생각나게 만들었다. 되돌아 온 딸을 다시 내다 판 아버지 때문에,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소녀들. 그러나, 그런 주변인들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자고 했던 나의 제안은, 여전히 공중에서 부유중이다.

“책임”에 대해 생각하려면 자아가 강해야 한다. 물론 그런 “시대”에 대한 연민도 필요하다.

변호사사무실에서 돌아오면서, 많이 졸렸다. 운전하면서 졸렸던 건 별로 없었던 일이다.
피로가 누적된 탓이거나, 노화현상이거나.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66352310058346

급진의 보수화/정의의 악의

이 며칠 도를 넘어선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뒤늦게 시사인 기사를 보았는데, 자료에도 없는 소리를 내가 지어낸 것처럼 쓰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와카미야 선생 사망 소식을 그 밤에 들었으니 내겐 최악의 날이었다.

비판자들은, 자신이 단 한사람을 향해 집단 공격에 참여중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재판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있을 것이다. 재판내용과 상관없는 비판마저 “박유하의 책은 문제있는 책”이라는 담론이 되어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물론 이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더 할 말은 없다.

정영환 비판조차 잘못 옮긴 것으로 보이는 이 “편집위원”은 알고보니 아직 박사과정 재학중인 학생이라고 한다. 아사히신문출판사에 정정을 요구하는 패기는 좋았지만, 그전에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보인다.

“제국의 변호인-박유하에게 묻다”는 책도 나왔다.
제목을 붙인 이는 페이스북에서도 나를 비난했던 손종업씨라는 걸 알았다. 그는 고발 직후에 내가 일본에 돈을 받은 것처럼 쓰고 금년 들어서는 나를 아이히만에까지 비교하며 비난했던 이다.
비판보다도, 제목의 함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를 데려다 책을 만든 이들의 존재에 더 한숨이 나온다.
이미 여러번 말했지만 “제국의 위안부”란 “제국에 동원된 위안부”라는 뜻이다. 설사 주체적으로 보였거나 행동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책은, 내용의 오용에 이어, 이제 제목마저 오용되고 있는 중이다.

대중선동이 “비평”의 얼굴을 하고 세상에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혹은 정의의 얼굴로.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정의와 악의는 고작 한 글자 차이다.

나뿐 아니라 나를 옹호해 온 이들에 대한 비판도 담았다니 사태는 이제 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일본에서 2007년부터 시작된 갈등이 10년후 한국에서 본격화된 양상.
그때와 다른 것은 그때는 비판자들이 극소수였지만 지금은 수십수백명이(그 뒤엔 수천명이) 한미일 연대망을 이용해 나 하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론 현실적패배감이 부추기는 일일 것이다.

< 제국의 위안부>는 지원단체와 일본의 일부 지원자를 비판한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응답”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의 응답은, 10개월에 걸친 침묵끝의 고발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학자들마저 본격적으로 지원단체에 발 맞추고 있다.
연구와 학문이 운동논리를 사유하지 못했던 건 사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운동이든 이론이든,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면 보수화 될수밖에 없다.

급진의 보수화는 피해자로서의 마이너리티 의식이 만든다. 하지만 마이너리티가 온전히 정의일 수 있는 것은,그들이 적으로 간주한 이에게도 정의로울 수 있을 때다.

나를 두고, 한편에선 “제국의 변호인”(손정업)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국에 대적해 온 “일본 리버럴(진보)의 비겁한 무기”(정영환)라고 한다. 이들에겐 내 책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 같다.
혼란은 선입견이나 목적이 있었을 때 일어난다. 기존인식에 꿰어 맞추려 하는 한, 거기서 일탈하는 기술들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금년들어 이들의 공격이 강해진 건, 일본어판의 수상과, 오에겐자브로/우에노치즈코/고노&무라야마 등의 지식인 성명, 그리고 한일합의에 원인이 있는 듯 하다. (한국은 물론 일본판 위키페디아마저, 정영환을 비롯한 이들의 시각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내겐 남의 일이 아니다)

위기의식은 이해하지만, 사태를 정확히 파악 해야 이길 수 있다. 일본을 20년 이상 비판해 왔으면서 운동이이길 수 없던 건, 정확하게 비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시작된 한일진보시민연대의 문제와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민주”라는 개념이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기능했던 시대에서 30년이 지났다. 군사독재국가를 넘어선 시대의 “민주”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어야 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59084934118417

이미지와 폭력–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한일합방 36년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이 땅에서 본격적인 권력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청일전쟁때 부터였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의 전쟁터는 일본도 아니고 중국전체도 아니고, 중국의 극히 일부와 조선땅이었다. 민비암살이라는 끔찍한 폭력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그런 유린의 연장선상의 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민비가 암살당했을 때、일본언론은 그 사실을 충격이 아니라 당연한 일처럼 보도했다. 심지어 훗날 일본의 문호로 추앙받게 되는 26살청년, 나쓰메 소세키조차 “최근에 가장 고마웠던 일은 왕비 살해…”라고 친구 마사오카 시키에게 감상을 적어 보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일본인들이 원래부터 냉혈한이기 때문일까.

일본언론은 일찍부터 민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질투많고 권력욕 강한 악녀. 그것이 민비에 관한 보도들이 만들어내 일본인 안에 심어놓은 이미지였다.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젊은 엘리트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한건지 모르도록 만든 것은 그런 식의 편향적 보도들이었다. 또 훗날 일본군이 중국 전쟁터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편견을 바탕으로 교육되고 확산된 차별의식이었다.
폭력행사는,타자를 고통을 모르는 물건으로 봐야 가능한 일이다. 미움과 차별은, 때로 그 필수조건이 된다.

어제 한국정부가 구마모토에 뒤늦게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 위안부할머니의 성금을 둘러싸고 찬반이 격렬한 듯 하다. 뒤늦은 대응과 기부에조차 차갑게 닫힌 2016년 대한민국의 심성에 대해서 일부언론이 비판적인 칼럼을 내놓았지만, 그런 신문들조차 “일본에 대한 미움”은 당연한 듯 전제된다.
그리고 미움의 크기는 늘 위안부문제에서 가장 크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하는 파렴치한 태도, 과거의 잘못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뻔뻔스러움”(2016/4/21.국민일보)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90년대 들어 시작된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은, “파렴치한” 일본상, 그리고 이제 악마같은 일본상 구축에 성공했다. 미운 건 일본이 아니라 일본정부라고 뒤늦게 말해본 들, 이대로 가면 일본과 전쟁을 한다 해도 기꺼이 참여할 피끓는 청년들과, 그들을 등두드려 내보낼 국민들이 대다수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현재의 북한이 그런 것처럼.

이 모두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이 20여년의 보도–독자적인 조사도 관계자들에 대한 취재도 없이 그저, 지원단체가 주는보도자료들을 언론이 받아써 온 결과다.
물론 그런 보도들을 추인하거나 리드하기조차 했던 지식인들이나 전문가들의 책임 역시 작지는 않다 . 또 최근 몇 년동안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끔찍하게 형상화할지에 골몰하고 졸속공부에서 경쟁했던, 그림과 영상 제작자들 역시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 국민다수의 생각을 만드는데 일조한 이들이라면, 이미지와 지식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일상속에서의 적대와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더 큰 폭력에 대한 책임의식을 뒤늦게라도 가져봤으면 좋겠다. 물론 수용하고 전달해 왔던 우리 모두도.
악마화 하지 않고도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 악마화는 오히려 본질을 놓친다.
“뻔뻔한 일본””사죄않는 일본”이미지의 재생산 속에서 우리가 해 온 일은 고작,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었다는 이승복 소년을 소녀상으로 대치한 일 뿐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한다.

우려되는 것은 사실 일본에 대한 몰이해가 아니다. 그 몰이해가 만든 미움이, 우리를 조금씩 냉담하게 만들고 있는 정황이다. 또 우리를 그렇게 편협하고 차가운 한국인으로만들어버리고 만 상황이다.
인간의 죽음에조차 쾌재를 부르는.
26 살 나쓰메소세키처럼.

일본인들을 돕는지 여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2016년 봄, 대한민국은 대만과 달리 구마모토에 냉담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정황이, 20여년동안 남의 말에 결코 귀를 기울이는 법 없이, 양극단 사람들의 적대와 과장과 은폐에 휘둘린 결과라는 점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건 바로 그런 적대와 증오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증오를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채 먼저 희생된다. 불화 역시 마찬가지. 적대담론의 폭력성을 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추신)
재해때마다 화제가 되는 “일본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재해가 많아 체념적이 되어서도 아니고, 그저 어릴 때부터 방재훈련을 많이 받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일본어머니들이 자식에게 가장 많이 말한다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배려심이 몸에 밴 결과일 뿐이다.
긴급한 순간에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해야 가능하다. 자아보다 조화, 나의 욕망보다 타자의 평안에 가치를 두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50782178282026

혐오의 방정식

일본의 위안부문제 지원자들도 더이상 하나가 아니다. 한일합의에 관해서도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이 기사에 언급된 이들은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 중인 이들이다.

분명 이들이 말하는 대로, 일본인들 일부가 내 책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얘기에 멋대로 이용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독해력과 무절제한 왜곡욕망의문제. 심지어 영어요약을 멋대로 만들어 내가 한 요약인 것처럼 유포중인 블로그조차 있었다. (일본쪽 출판사에 대응을 의뢰중)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내 책을 멋대로 왜곡하는 건 이들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이 20수년간의 한일갈등은 이 양쪽이 그런 식으로 세간에 제공해 온 정보의 과장과 은폐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책이 평가받은 건 일본의 책임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책임”임을 말했기 때문이고, 이 양쪽 세력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그런 나의 논지에 공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젠가 전여옥이 “일본에는 추녀만 많다”면서 “일본은 없다”고 했던 것처럼, 소수 문제적인 이들에게만 주목하면서 그들을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한 사람들이다.
더 불행한 건 이 양쪽은 똑같이, 자신들이 확산시킨 혐오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의 인권을 말하지만 나의 인권은 개의치 않는다. 이들이 며칠 전, 내가 감옥에 갈 수도 있는 형사재판을 반대하지 않는 자세를 분명히 한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기사 오류를 바로 잡아둔다. 물론 이번 경우 기자가 아니라 발표자가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군관여부정–일본군 조선반도 “공식적 강제연행”부정
*책임부정–“법적” 책임 부정

타자에 대한 적개심과 처벌을 부르려는 행위가,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던 슬픈 봄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8315212&sid1=001


본문:

혐오의 방정식일본의 위안부문제 지원자들도 더이상 하나가 아니다. 한일합의에 관해서도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이 기사에 언급된 이들은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 중인 이들이다. 분명 이들이 말하는 대로,…

게시: 박유하 2016년 4월 7일 목요일

渦中日記 2016/1/15

집에 돌아온 지 36시간 경과.
대부분을 “無為”의 시간으로 보냈다.

고발직후, 가처분판결직후, 기소, 한일합의, 그리고 민사재판 판결. 다섯번째 반복된 “집단비난”의 결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한일합의 이후, 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드러나게 박대통령지지자들인 게 눈에 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를 둘러싼 사태를 나는 어느정도 분석할 수 있고(할머니,지원단체, 대중,학자,언론,일본..), 어쩌면 내가 가장 잘 아는 일이니 내가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일이 쓰기에는 의욕과 힘이 충분치 않다.
언젠가, 일본도 잘 아는 누군가가, 그 일을 해 주기를 바라고 싶다. 내가 페이스북등이나 그 밖의 글/인터뷰를 통해 해 온 얘기는 내가 알고 경험한 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내가 “자발적 매춘부”로 쓴 것은 아니라는 걸 독자들이 알 수 있게 쓴 기사가 눈에 띄었다. 2013년 1월, 꼭 이맘때 평화로웠던 시기의 평화로운 대화의 순간을 올려 준 경향신문 기자의 마음이 고맙다.
어쩌면 모든 것이 “지적태만”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대신 넘쳐나는 “정서과잉”과 “욕망”들이 만든 일.

80년대엔 국가폭력이 국민을 옥죄었다.
“민주”화 된 2010년대엔, “국가화된 국민”이 “개인”을 옥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책에서 “국가에 동원되는 개인”의 아픔에 대해서 썼었다. 그런데 나 역시 그 한사람이 되었다.

“참을 수 없는 아이러니”들을 견디면서,
풀기엔 너무도 많은 층위의 옥죄는 구조들, 얼키고 설켜 이미 보이지 않는 “악의”들을 풀어야 하는 과제가 내 앞에 놓여있다.
2016년도 힘든 한해가 될 것 같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601131905341&code=940100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7987926561452

渦中日記 2016/1/13

인천공항에 4시반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켜니 여기저기서 문자.
2시에 있었던 민사재판 선고에서 판사들이 원고측 손을 들어주었다는 소식들. 뒤이어 법원의 보도자료가 도착했다.

극심한 아이러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어쩌면 이 재판은 아주 오래 갈지도 모르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6956113331300

渦中日記 2016/1/12

워싱턴심포지엄에 대해 한국언론들이 또다시 왜곡기사를 많이 썼다고 들었다.
일본측에서 나온 기사를 올려둔다.

이 기사가 “합의과정이 불투명했다”고 쓴 것처럼, 이날 내가 주안점을 둔 것은 “정부간합의만으로 끝났다고 할 수 없다”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운동가들 편에 서서 한 이야기다.
미국도 이번 합의를 환영한다고만 했으니, 합의에 비판적인 생각을 미국의 한가운데서 말하는 일에 나는 의미를 두었었다.
그리고 일본언론은 그 점을 정확히 짚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번 심포지엄 참석자들의 의견은 다르지 않았다.

한국언론에서도 그런 보도가 있기를 바라고 싶다.
앞서 올린 발표문에도 있는 것처럼, 나는 분명 “업자”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조선인”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일본인을 포함한 지적이었다. 일본인 업자가 더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이니 실제적인 이익도 더 많이 얻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착취가 민족을 넘어 연대했다는 것을 나는 책에서 말하고자 했다.
그런데 지레 조선인 비판으로 간주하고 굳이 하지 않은 “조선인업자”라고 해설을 추가한 보도도 봤다.

(운동가들에게)도움이 될 얘기조차 무시하고, 낯선 얘기에만 촉각을 세우는 태도. 이제 그만 그런 태도를 지양하고 지혜로운 태도를 취해주기를 모든 비판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http://www.jiji.com/jc/zci?g=pol&k=201601%2F2016011200169&pa=f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6363176723927

渦中日記 2016/1/7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아직 여유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이번 워싱턴 행이 “일본의 돈”이라는 악의적인 기사를 봤다. 이번 회의는 윌슨센터와 와세다대학의 공동 프로젝트인 “동아시아에서의 과도기 정의 수립”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학문적 회의다.
갑자기 “한일합의”가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 문제도 언급되겠지만, 그 얘기를 중심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도 아니다. 전에도 썼지만, 이 회의는 반년도 더 이전에 계획된 회의다.

한일합의에 대한 의견을 쓰라고 종용받기도 했는데, 내 의견은 분명하다. 갑작스런 합의는 문제가 있다. 국민적납득과 합의가 가능하도록 논점을 공론화하고 국민이 공유하는 절차와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대립되는 학자들이 접점을 찾는, 당사자도 포함하는 “협의체”를 만들라고 책을 낼 때부터 제안했었다.
그러니 이런 합의에 내가 무조건 찬성하거나 웃을 거라고(나의 힘이 그렇게 클 리도 없다) 생각하는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어렵게 결정된 것이니 순서는 거꾸로 되었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일본지원단체가 이 합의를 “운동의 성과”로 받아들인 식의 긍정마인드를 나는 평가한다.

정부가 내내 지원단체와 논의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마지막에 배제된 모양이다. 지금의 격렬한 반발은 거기서 온 듯 하다.
정부가 배제한 건 위안부할머니일까. 혹은 지원단체의 주장이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언젠가 밝혀지리라고 믿는다.

분명한 건, “또 다른 백억원 모금”의 발상은 이미 1997년에 정대협이 시도했던 일이라는 것.
일본국민의 “속죄금”과 “의료복지비”를 정대협이 거부했고, 받은 일곱 분 할머니들을 정대협이 비난하며 모금을 시작했고, 초라한 모금실적에 한국정부가 나서서 할머니들에게 같은 금액의 지원금을 지급했었다. 그건 한편으로는 “할머니들은 우리가 돌본다”는 발상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요구는 요구대로 이어졌고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성공했지만 일본인들의 마음은 더 닫히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니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15년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할 각오,그리고 시작하기전에 “모든”위안부할머니께 그런 선택에 대한 수락을 받아야 할 거라는 점이다.
엄마부대나 어버이연합도 문제지만, 그들이 문제라고 해서 운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일 수 밖에 없다.

필요 있어 다시 읽었더니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쓰인 이 글이 가슴에 더 와 닿아, 일본 학자의 글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올려둔다. 이들은 진보학자들이고 자신들의 운동을 반성하는 차원에서의 글이다.
전에 한번 전문을 올렸었지만 특히 중요한 부분만 몇 번에 나눠 올리려고 한다. 위안부문제에 관심갖는 사람은 꼭 읽어야할 논문이 될 것이다. 나의 의견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전문은 곧 어떤 잡지에 게재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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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몇 가지 논쟁적인 대립점이 표출되었다. 예를 들면 ‘위안부’ 논쟁의 존재방식을 둘러싸고 메타 차원에서 재귀적(再歸的)인 물음을 던진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내셔널리즘과 젠더』 세이도샤, 1998년)와 박유하(『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사토히사시 번역, 헤이본샤, 2006년)를 둘러싸고 문제의 방법론적 심화와 자기성찰의 계기가 만들어진 측면도 있었으나, 때로는 이에 대해 운동의 분열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주장도 나왔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현재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아사히신문출판, 2014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이토록 비판이 분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 사이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도 이 시기에 운동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성적인 물음과 문제 제기를 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박유하와 마찬가지로 정대협 측에도 문제의 단순화와 일면화(一面化)가 있는 게 아니냐는 자문자답이었다(야마시타 영애『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아카시쇼텐, 2008년). 그러나 분열과 분단 속에서 그러한 문제 제기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문제의 국면이 다양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위안부’ 논쟁은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제기된 것과 같은 보편적인 문제 보다는 민족적 담론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게다가 본래 이 문제와 모순될 수 있는 국제적인 맥락이 덧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면 정대협은 국제적인 반향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한편으로 문제를 국가 단위로 잘라 놓는 것과 같이 단순화해 버리고 말았다. 미국 하원에서는 정대협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태로 의회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가 세밀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에서의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피해자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로 결의가 이루어졌고 문제를 심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취급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소녀상’을 사용하여 피해자의 일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니는 복잡한 정치적 측면(politics)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젠더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에노 치즈코가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모델 피해자론’이라는 형태로 이미 지적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한 일본의 전후(戦後)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오사 시즈에(長 志珠絵)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2738360419742

渦中日記 2016/1/3

이번 주말에 워싱턴에 가기로 되어 있다. 반 년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동북아역사화해에 관심이 많은,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의 이런저런 회의에도 자주 참석하는 일본인교수와 미국교수들이 기획한 회의다. 다른 한국인 교수도 참여한다. 위안부문제에서 지원단체 입장에 가까운 발언을 해 왔던 미국인 교수도 함께 이야기한다. 내가 메인인 것도 아니다.

이 모임이 기사화 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런데 정확하게 쓴 건 경향신문 뿐이었다.
연합뉴스는 “일본 정부와 재미일본인 커뮤니티”의 초청인 것처럼 쓰고 있다.미주 중앙일보 역시 마찬가지다. 명확한 “허위사실유포”에 해당한다.

나에 대한 개인의 비방은 너무나 많다. 따라서 그 안의 왜곡이나 허위를 일일이 지적할 수도 없다. 학자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그런 이들을 모욕죄나 허위사실유포죄로 고발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들도 많다. 트위터에서 반복적으로 “박유하를 파면하라!”면서 자발적인 위안부라 했다”는 고발직후 뉴스를 반복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이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고발한다면 첫번째 대상은 나눔의집 관계자들이다. 허위사실유포를 시작한 건 그들이었다. 그 외에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대상은 한두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이들을, 1년반동안 나는, 그냥 견뎌 왔다.

하다 못해 언론이라도 바로 서 주기를 바란다. 개인이 아닌 집단이니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해주기를 바라고 싶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대응하려 했다면 나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나에 대한 숙청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자체적으로 수정해주기를 바란다. (고발직후 보도가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수정 혹은 삭제된 연합뉴스, 한국일보, 한겨레, 조선일보 기사를 참조해 주기 바란다)

내가 꼿꼿해서 얄밉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의 심리가 서글프다.
나는 내가 지쳐 쓰러지거나 퇴출당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할 뿐이다. 또, 비열한 미움은 때로 나를 강하게 만든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909976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0008537359391

渦中日記 2016/1/2

그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나를 비난하는 글을 여러개 읽게 되어 새해 첫날부터 우울했다. 한일양국 정부가 만든 일이긴 하지만 정초부터 그런 글을 읽을 나에 대한 배려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튼 새로운 움직임을 보면서 새롭게 안 것이 있다.이제 여성들이 나서고 있다는 것. 그들의 분노 역시 “그들안의 소녀”를 내가 훼손시킨 데 대한 분노였다는 것.

얼마전 아이유사태때 썼던 글을 다시 올려 둔다. 이번에 나선 건 “대중”이라기보다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여성들이다. “해석된 인물”이 현존하는 인물인지 소설 속 인물인지의 차이는 있지만. 물론 나는 근거 없이 해석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이들은 내 책에서 느꼈다고 한 “할머니의 아픔”을 인정하지 않는다. “공감의 독점”현상. 우파나 일본이 하는 일은 언제나 위선이고 꼼수로 간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를 스파이로 보고 싶어 하는 이유도.
이들에겐 오로지 우파나 일본과의 “거리두기”만이 “올바른 인간”의 기준이 된다.

모든 사안에서 정치적 입장이 앞서면 판단과 발언과 행동이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학력사회의 단순사고 지향.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경험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대로 가면 정권교체는 언제까지고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 사실 나의 관심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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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의 권력과 억압만 파시즘적인 건 아니다. 대중 역시 권력을 갖고 있고 때로 스스로 파시스트가 된다.

아이유에 대해 음원폐기마저 요구하는 이들은, 체제권력 이상으로 폭력적이다. 더구나 이런 식의 폭력은 “민주””민중”이라는 이름 아래 그 폭력성이 인식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들이 보호하려 하는 건 제제가 아니다(심지어 제제는 현실인물조차 아니다.) 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가져왔던 이미지를 지키려 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 깨진 데 대한 분노를 발산시키고 있을 뿐. “나의”라임오렌지나무가 훼손된 데 대한.

국가도 국민도 불필요한 일에 목소리가 너무 크다.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이 진정으로 걱정된다..
(11/7. 페이스북 포스팅)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59404097419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