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회 참관기_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배춘희,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306쪽
할머니들 사후에 과연
위안부 운동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진영 논리로 할머니들 규정 안 돼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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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회 참관기_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배춘희,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306쪽
할머니들 사후에 과연
위안부 운동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진영 논리로 할머니들 규정 안 돼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 정대협 비판하다 ‘마녀사냥’ 당해…빨갱이보다 무서운 친일파 낙인
● 정대협 운동, ‘돈’ 아닌 ‘인맥 30년’으로 들여다봐야
● 돈 받은 할머니들은 비난하고, 자신들 따르는 할머니들만 대변해
● 할머니들, 정대협 비판한 사실 알려질까 두려워해
● 사죄보다 보상 원한 할머니들 목소리 묻혀
●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배춘희 할머니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져
● 정대협이 日 양심적 지식인과 연대 막아…위안부 운동 이대론 안 된다
누구나 힘든 시기를 사는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뒤숭숭하고 먹고살기가 막막한 이런 때야말로 정신 줄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허문명의 SOUL’은 삶을 뒤흔들어대는 여러 난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영혼과 정신 줄을 꽉 붙잡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장정일 소설가
일본군이 만든 위안소의 조선인 위안부 숫자는 어떤 연구를 통해서도 아직 숫자가 확정된 바 없다.
그저 가해국(일본)은 숫자를 줄이려고 하고, 피해국(한국)은 숫자를 늘리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위안부 문제 활동가들과 언론은 관행적으로 ‘20만’설을 채택한다. 2015년 12ㆍ28 합의 이후 신속하게 기획된 ‘시사IN’(제435호 2016.1.16.)의 군위안부 특집이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는 최소 8만명,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쓴 것이 대표적이며, ‘한겨레’ 1월 12일자에 나온 이윤제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칼럼도 “약 20만명의 한국 여성이 성노예가 되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관행적으로 쓰고 있는 20만 설은 앞으로 늘어나든 줄어들든, 활동가와 연구자가 사료와 논리로 뒷받침해야 할 숙제다. 그런데 사고(社告)나 마찬가지였던 ‘한겨레’ 6월 22일자 기사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정부는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식민지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다”라고 썼다. 20만에서 10만이 늘어난 30만 설을 주장하려면, 사료나 근거를 제시하면서 기존의 설을 논박해야 한다. 예컨대 ‘뉴욕타임스’가 600만명이라고 관행적으로 알려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숫자를 700만명으로 조정하고자 할 때는 그만큼의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언론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확인 절차를 ‘찌라시’는 괘의하지 않는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 중국, 남양군도(남태평양제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다. 20만명 설이 맞는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그런데 공인된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일본군은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 두 방에 나가떨어진 게 아니다. 전쟁을 해야 할 군인들이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패망한 거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 인구를 1,500만명으로 잡고 남녀 성비가 같았다고 상정할 때, 20만명이라는 군 위안부 숫자는 37.5명당 한 명의 여자가 끌려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적어도 750만명의 여자 가운데 위안부로 삼기 힘든 10세 아래와 30세 이상의 여자를 빼고 나면 결혼 적령기의 여자 가운데 대부분이 일본군의 마수에 걸려든 게 된다.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위해 찌라시나 같은 언론이 ‘자극 경쟁’을 계속 벌인다면, 슬금슬금 10만명씩 늘어난 끝에 100만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불놀이가 신문을 한 부 더 팔게 해줄지는 몰라도 이런 국내용 선동으로는 결코 일본의 국가 범죄를 추달하지 못한다.
최근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책 세 권이 나왔고, 어떤 책은 ‘한겨레’에 대서특필됐다. 이 기사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극우 ‘산케이신문’의 격찬을 받았다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지은이가 기소되자 “한일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책”이라고 쓴 것이 ‘산케이신문’이 보여준 가장 수위 높은 격찬(?)이었다. ‘한겨레’ 기사는 박유하의 책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한국인 전체를“‘거짓말쟁이’ ‘사기 집단’으로 치부”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는데, 행여 위안부 문제에서 한국인이 거짓말쟁이나 사기 집단이 되었다면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다.
위안부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언론 사이의 자극 경쟁은 비용(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극을 하면 할수록 ‘민족 정론지’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반면, 가령 위안부의 수를 낮추는 것과 같은 ‘사실 경쟁’은 비용이 드는데다가 ‘반민족 언론’이라는 오명마저 각오해야만 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과거사를 다루는 세계의 모든 언론은 이 딜레마에 빠져있다. 언론이 사실보도와 진실추구라는 준칙에 근거한 사실 경쟁을 외면하고 자극 경쟁에 뛰어들 때, 그 나라 국민은 거짓말쟁이나 사기 집단이 된다.
장정일 소설가
『녹색평론』5~6월호(제148호)를 받았다. 목차에서 이명원 형의「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지식인의 지적 쇠퇴」를 발견하고 그것부터 읽었다.
위의 글에서 이명원은 박유하의 한국어판『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2013)와 일본어판『제국의 위안부』(아사히신문출판,2014)를 가리켜 “두 책은 사실상 동일한 서적이라 보기 어렵다”(65쪽)면서,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의 지식인과 독자들이 격렬한 박유하의 팬덤(fandom)으로 전락하는 마술은 [판본을 달리한 지은이의] 이런 수사학적 책략 탓”(66쪽)이라고 말한다.
『제국의 위안부』의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이 ‘동일한 서적’이 아니며, 바로 거기에 박유하의 간계가 숨어 있다는 식의 이런 음모론은 원래 이명원의 것이 아니라, 일본어판 출간 즉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온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의 것이다. 정영환의 주장은 이타가키 류타와 김부자가 함께 엮은『’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삶창,2016)에「’전후 일본’을 긍정하고픈 욕망과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제목을 실려 있다. 거기서 정영환은 한국어판 262쪽과 그것을 번역한 일본어판 251쪽을 비교하고 나서,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 주장은 일본어판을 읽지 않으면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98쪽)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의 사례보다 더 심각한 사례가 있으면 모르되, 정영환이 먼저 제기하고 이명원이 고스란히 받아쓴 ‘(한국어판)262쪽/(일본어판)251쪽’의 차이는 결코 두 사람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한국어판)262쪽/(일본어판)251쪽’의 차이를 놓고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 주장은 일본어판을 읽지 않으면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라느니, “두 책은 사실상 동일한 서적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좋게 봐서 오독이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인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저 대목이『제국의 위안부』의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의 ‘핵심 주장’을 다르게 하고 있는지, 정영환이『’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에 번역해서 싣고(94~95쪽), 이명원이「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지식인의 지적 쇠퇴」에 고스란히 인용한(64~65쪽) 문제의 대목을 살펴보자(일본어판 인용문에 나오는 밑줄은 정영환·이명원의 것이며,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에 있는 볼드체는 나의 것이다).
(한국어판) 말하자면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식민화 과정에서의 동학군의 진압에 대해서도, 1919년의 독립운동 당시 수감·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살해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밖에 ‘제국 일본’의 정책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가혹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들은 국민동원의 한 형태였다고 볼 수 있지만, 제국의 유지를 위한 동원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배의 희생자다.
(일본어판) 그러한 의미로는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고 이 사실은 한국에 더 알려야 하겠지만, 그것(지금까지의 사죄 – 번역자 주)은 실로 애매한 표현에 불과했다. 1919년의 독립운동 때 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제국 일본’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혹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할 기회가 없는 채로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정영환·이명원은 일본어판에 자신들이 밑줄 친 문장을 들어 박유하가 한국어판에서는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고 해놓고서, 일본어판에서는 그것을 뒤집었다고 말한다.
일본어판의 독자를 위해 바꿔 쓴 부분 중에 주목해야 할 포인트로서, 저자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바뀌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에는 일본 정부는 식민지화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라고만 쓰여 있는데, 일본어판에는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다는 문장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문장이 추가되면 “공식적으로”라는 의미가 사죄를 한 사실은 있으나 “애매한 표현” 때문에 한국에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뜻으로 바뀝니다. (정영환 : 96쪽)
위의 각기 다른 판본을 보면, 삽입된 문장들 때문에 매우 상이한 의미를 띠게 된다. 한국 독자들에게 쓴 글에서는 식민지배 책임에 대해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다가, 일본판에서는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고”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렇게 판본이 다른 두 책은 사실상 동일한 서적이라 보기 어렵다. (이명원 : 65쪽)
어떻게 읽으면 저렇게 될까? 두 사람 다 기가 찬 해석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상한 것인가 싶어, 문과와 전혀 거리가 먼 통계학과를 나온 지인에게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을 읽히고 나서, 일본어판은 한국어판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지인의 대답은 명쾌했다. “일본어판에 정영환·이명원이 밑줄 친 대목은, 바로 그 위에 나오는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에 대한 부연이다.” 맞다!
그러면 한국어판의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에는 부연이 없는데, 왜 이 대목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일본어판의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에는 저런 부연이 필요했을까? 밑줄 친 대목으로 부연하지 않았다면, 일본인들은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라는 박유하의 단정에 의문과 반발심을 느꼈을 것이다. ‘무슨 말이야? 일본 정부가 사과하지 않았다니?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토미이치는 무려 총리였지 않는가?
박유하는 일본인의 의문에 답하고 반발심을 누그러뜨리고자 정영환·이명원이 밑줄 친 대목을 일본어판에 넣은 것이다. ‘일본 정부의 수반이 사과를 해온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공식적이라고 하기에는 늘 애매한 것이었다.’ 정영환·이명원이 일본어판에 밑줄 친 대목의 아래 부분을 보면, 밑줄 친 그 대목이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의 부연 설명이라는 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박유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학문적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박유하 죽이기’를 하고 있다는 의혹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한 건 1991년 김학순 할머니(1924~1997)의 증언부터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의 첫 증언자는 김 할머니가 아니라 오키나와에 살던 배봉기 할머니(1914~1991)다. 배 할머니는 김 할머니보다 16년 먼저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언론에 밝힌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7살 때 식모로 팔려간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떠돌던 그는 29살이 되던 1943년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어도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위안부가 된다.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말마저 잊은 채 살아가던 그가 증언을 결심한 이유는 일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였다(1972년 오키나와를 되찾은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조선인들에게 신고를 거쳐 특별 영주권을 준다).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인 그가 한국에서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독재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 했다는 것, 증언이 조총련계를 통해서였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위안부 운동이 본격화한 후에도, 파국적 한·일 위안부 협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현재까지도 그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는 데는 다른 정서적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배 할머니를 취재한 기사(한겨레 2015년 8월7일자)에 따르면 그는 위안부였음을 털어놓을 때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라고 거듭 말하곤 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고,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다양한 사연과 삶의 배경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중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위안부상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좀 더 집중한다. ‘순결한 조선처녀’라 여겨지면 존중심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아예 눈감아 버린다.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그런 위선적 태도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 사회에서 폭넓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위안부는 모두 강제로 끌려간 소녀였다’는 우리의 강변은 ‘위안부는 모두 자발적 매춘부였다’는 일본 우익의 강변과 쌍을 이루어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미군을 상대로 같은 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일본놈들의 만행’이 아니라, 가부장제 국가에서 언제나 여성에게 존재하는 폭력 구조의 일부다. 폭력 구조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도 남성 수용자를 위한 위안부가 존재했을 만큼 일반적이며 뿌리 깊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그러한 본질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2014년 6월 미군 위안부 122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이 위안부가 된 경로 역시 다양했다. 인신매매로 끌려온 소녀도 있고 가족에 의해 팔려온 사람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온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애국교육’을 하고 미군의 건강을 위해 성병관리를 하고 도망치면 경찰을 통해 잡아오기까지 했던 한국 정부는 그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우리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와 그들을 동등하게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순결한 처녀들이 아니라 ‘양갈보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저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연대 요청을 거부하고 위안부 소녀상에 온전히 자신을 일치시키는 걸 비판하거나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드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소녀상으로 단일화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알량한 역사의식과 지배체제로부터 주입된 민족의식과 전근대적 여성관을 위안부 소녀상을 내세워 은폐하려 드는 건 말이다.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은 자유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일 같아 보여도,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여성이 국가와 남성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는 가부장제 구조 속의 일이다. 위안소가 ‘인정된’ 장소였고 ‘합법적’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법’이 국가와 군이 만든, 남성을 위한 ‘법’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자원’한 처녀들이었건,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들’이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는 박유하의 말이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을 더러운 여자들로 모욕하는 건 누구인가. 더러운 여자는 없다. 더러운 게 있다면 여성을 깨끗한 여자와 더러운 여자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폭력, 그에 기반을 둔 우리의 싸구려 정의일 것이다.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는 전문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https://parkyuha.org/)
혹시 일본 극우세력의 앞잡이는 아닐까, 한국 내에서는 ‘극우의 애완견’으로 조롱당하지만 매년 일본 입맛에 맞는 책을 출간하는 ‘오선화(일본명 고젠카)’ 같은 인물은 아닐까. 의심이 갔다.
2013년 8월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란 책을 일부러 나오자마자 샀던 이유는 흠을 잡기 위해서였다.
장정일 소설가
표현의 자유는 악용마저 포용하는 면죄부나 방어막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진실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나라는 OECD 가운데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앞으로 화두는 명예훼손죄여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무조건 옹호해야 하는 절대 가치인가? ①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②마호메트를 풍자한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 ③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④아이유의 <챗셔> 앨범 표지와 ‘제제’의 가사 ⑤광주민주화항쟁을 북한 특수군이 사주한 것이라는 넷 우익의 발언은 모두 보호받아야 할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일까? ①~④는 보호받아야 하는 표현의 자유라면서 ⑤에 대해서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범죄로 규탄한다면, 그것은 절대 가치(표현의 자유)의 변덕을 폭로하는 것일까?
열거한 다섯 가지 가운데 옹호할 표현의 자유를 고른다고 해서, 이 가치가 원천적인 모순이나 한계를 지녔다고 말하면 안 된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①~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법정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나섰던 자유주의자는 나머지 네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똑같은 대우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조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원칙(여기서는 ‘표현의 자유’)이 모든 사례에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람은 원칙을 물신화한 교조주의자이지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자유주의자는 하나의 원칙에 모든 사례를 복속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개별 사례마다 자신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교조주의자들만이 ‘세트 메뉴’를 받아먹는다.
<즐거운 사라>(청하, 1992)의 지은이가 기소되었을 때, 나는 이 사안에 표현의 자유가 요청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한국 문학은 성을 이야기할 때조차 죄의식을 버리지 못하며, 죄의식을 한 자락 깔고 있어야만 문학성 있는 작품으로 대접받는다. 반면 마광수의 성문학은 한 점의 죄의식도 찾기 어려울 만큼 낙천적이고 유토피아적이다. 그의 성적 유토피아가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는 있지만, 나는 그의 소설이 음란으로 처벌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땅콩을 애인의 질 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고 싶다는 기행은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방중술을 베낀 것이다. 전래의 비기(秘技)에서는 땅콩이 아니라 대추였지만 말이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나는 <샤를리 에브도>를 표현의 자유로 옹호했다. 중학교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나는, 현재도 여호와의 증인이 어떤 기독교보다 나은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괜찮은 종교는 괜찮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종교보다 인간을 더욱 억압한다. 그런 경험을 했던 나는 모든 종교에서 크고 작은 억압을 본다. 인류 역사는 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로 이주한 무슬림이 약자인 것은 맞지만, 마호메트는 약자가 아니다. 내가 옹호한 것은 약한 무슬림을 조롱하는 <샤를리 에브도>가 아니라,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풍자하는 <샤를리 에브도>였다.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가 출간되었을 때부터 검찰에 기소된 지금까지 나는 이 책과 지은이에 대한 일관된 지지자다. 이 책은 지은이를 기소한 검찰이나 비판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위안부를 ‘자발적인 매춘부’로 규정한 적이 없다. 이 책은 일제의 총칼에 ‘강제 납치된 어린 소녀’라는 고정된 위안부 상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 성격’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자발적 매춘은커녕, 이 책은 시종일관 조선인 위안부가 인신매매에 넘어간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제 딴에는 ‘정치적 올바름’의 화신인 양하는 어느 진보적 문학평론가가 지은이를 향해 “제국의 편인가? 위안부의 편인가?”라고 묻는 것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천안함 폭침’의 진실을 밝히려는 과학자들을 향해 “북한 편이냐? 전사한 애국자 편이냐?”라고 윽박지르는 보수 언론과 저 문학평론가의 포악은 같다. 박유하의 책을 비난하면서 자칭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원한다는 사람들의 뇌세포는 어떠할까? 학문의 윤리는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틈’을 고민하는 것이며, 진실이 생겨나는 자리도 거기다.
<챗셔> 앨범 표지와 그 앨범에 실린 ‘제제’의 노랫말도 표현의 자유로 옹호되지 못할 게 없다. 앨범 표지는 그동안 ‘롤리타’로 소비되었던 아이유가 관음증적 삼촌·오빠들에게 보내는 반격(당신들 이런 것 좋아하잖아?)이자, 여태까지 그 역할을 즐겨 맡았던 아이유의 자기 자신에 대한 풍자(내가 이러면서 인기를 얻어왔지!)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낸 출판사는 ‘우리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펄쩍 뛰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달아준 마르셀 뒤샹의 는 루브르 박물관의 항의를 받은 바 없다. <제제>의 노랫말이 소아성애와 연관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상상하는 것도 자유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배후에 북한 특수군이 있다고 주장하는 우익 칼럼니스트와 넷 우익은 처벌받아야 한다. 우선 이런 주장은 아무런 증거 없는 날조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체였던 광주 시민의 평판을 고의적으로 해치려는 이런 날조는 당사자들을 북한군의 선동에 놀아난 폭도로 만든다. 또 이런 날조는 5·18을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제정하고 그 가치를 기려온 민주 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이처럼 개별적으로 검토되고 추인되어야 하는 것이지 악용마저 포용하는 면죄부나 방어막이 아니다.
박유하가 기소된 것은 현 정권의 국정교과서 사업이나, 국가의 탄압과 별 연관이 없다. 그가 기소된 것은 이 책으로 인해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생존 위안부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법은 공적 관심사와 공적 토론을 제공하는 학술 연구를 폭넓게 보호하려고 하지만, 학술 연구 가운데 특히 역사 연구는 사건이나 인물 해석을 놓고 당사자(혹은 후손)의 이익이나 명예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지은이가 법정으로 불려가야 한다면, 학자는 안전한 연구만 하려 할 것이고, 그들이 낸 책은 암호문이 될 것이다. 게다가 법학자 박경신이 <진실유포죄>(다산초당, 2012)에서 강도 높게 비판했듯이, 한국에 엄존하는 여러 종류의 명예훼손죄는 진실과 허위를 따지지 않고 처벌한다. 이 법에 따르면 학자들은 진실을 말하고도, 타인이 듣기 싫은 말을 했다는 명목으로 유죄를 받을 수 있다. 진실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나라는 OECD 국가 가운데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고 통탄하는 이 책을 보면, 앞으로의 화두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명예훼손죄여야 한다.
허문명 동아일보 국제부장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알게 된 것은 본보에 칼럼을 연재 중인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의 칼럼을 통해서였다.
그는 2014년 7월 31일 자 본보 칼럼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고 부르라’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글에서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되고 우수 도서로 지정됐던 박 교수의 또 다른 책 ‘화해를 위해서’의 지정을 취소하라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박 교수를 우익으로 부른다면 나도 우익으로 부르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2007년 아사히신문사가 박 교수에게 상(오사라기 지로 논단상)을 줄 때 논설주간 자격으로 심사위원을 맡았었다며 “일본에서 상을 주면 박 교수가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하면서 심사숙고했다”고 했다.
와카미야 선생에 따르면 박 교수 책은 일류 지식인들로 통하는 심사위원 4명이 모두 호평을 했다고 한다. 일본인 출신으로 처음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일본의 과거사 침략을 질책해온 이리에 아키라 하버드대 명예교수 평은 이랬다고 한다.
‘학문적 수준도 높고 시사문제 해설서로도 균형이 잡혀 있다. 게다가 읽기 쉬운 문장으로 쓰인 보기 드문 수작이다. … 이런 책이 한국과 일본에서 출판됐다는 것은 양국 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기뻐해야 할 것이다.’
평소 와카미야 선생 칼럼의 애독자로서, 또 그의 균형 잡힌 한일관에 신뢰를 갖고 있던 기자는 일본인의 글을 통해 한국인의 책과 존재를 알게 된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랑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당장 책을 사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바쁜 일상에서 곧 잊혀져 갔다.
그렇게 1년여가 흘렀고 박 교수를 다시 떠올린 것은 2일 “나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폄훼할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서둘러 책을 구하러 교보문고에 갔지만 재고가 없었다. 관련 기사를 모두 검색하면서 책이 나왔을 당시 호평했던 국내 언론이 많았음에 우선 놀랐고 정작 박 교수와 책이 곤경에 처하자 변호하는 기사가 확 줄었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기자는 저자를 직접 만나 학자적 진정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혹여 극단적 편향을 담고 있거나 인기(?)를 노린 욕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오로지 남과 다른 생각 자체만을 강조하며 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한둘인가. 두 시간여에 걸친 대화를 통해 그의 학자적 양심과 진지함, 한일관계를 보는 진정성에 공감을 느끼게 됐고 그로부터 얻은 책 두 권도 꼼꼼하게 읽고 난 뒤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기사가 나가고 난 뒤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로부터 칭찬과 격려도 많이 받았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함께 ‘친일 기자’ ‘위안부 할머니에게 상처를 준 기자’에서부터 ‘고발하겠다’는 내용의 메일도 많이 받았다. 법과 공동체의 질서를 훼손하면서까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공익과 선의의 관점에서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이성과 논리를 앞세우자는 목소리가 이렇게 매도되는가 싶어 착잡했다. 새삼 박 교수가 처한 상황이 이해되면서 연민의 감정까지 느껴졌다.
거듭 말하지만 박 교수 책 어디에도 할머니들에게 상처를 주려거나 폄훼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기자의 견해이다. 오히려 기자는 책을 읽으며 그동안 잊고 지내던 할머니들을 더 깊게 이해하고 해결책을 위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제국의 위안부’ 재판이 한일관계의 미래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거듭 말하지만 학자의 양심에 법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일이다.
소설가 장정일
지난 12월 2일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로 검찰의 기소를 당한 박유하씨의 기자 회견과 기소에 반대하는 지식인 성명이 함께 발표되었다.
기자 회견에 나선 저자는 정작 “표현의 자유를 침해 당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표현의 자유를 말한 적이 없다. ‘표현 자유’라고 말하면 아무 얘기나 다 써도 되는 거냐? 라는 질문이 돌아오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나 역시 ‘제국의 위안부’와 통합진보당 내란 사건에 대해 여러 번이나 쓴 적이 있지만, 한 번도 표현이나 사상의 자유를 내세워 이들을 옹호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결코 내세울 게 아니다. 그보다 윗길은 그들이 옹호되어야만 하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똥은 개가 물어가지만, 표현과 사상의 자유는 개도 물어가지 않는다. 원래 저 자유는 도로나 다리 같이 국가를 지탱하는 공적 기반이어야 하지만, 한국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기반이 있다면 법이 쉽사리 나서는 일도 없겠지만, 걸리더라도 저 권리를 내세우거나 거기에 의지할 수 있다. 그게 없기 때문에 걸렸다 하면,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한다. 사회안전망이 없는 나라의 실직자가 스스로를 구제해야 하는 이치다. 이처럼 막상 경험하게 되는 현실은 정반대인데도,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표현의 자유가 절대화 되었다’고 목청을 높이는 머저리들이 있다. 슬프게도 저런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진보 ‘먹물’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박유하씨의 기소에 반대하는 지식인 성명 발표 때,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194명의 서명자 명단도 아울러 공개되었다. 저자를 형사 기소로부터 구하려는 저런 노력이 과연 박유하를 검찰의 기소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까? 지식인의 서명을 진짜 귀중하게 여기는 사회라면 194명이 아니라 19명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검찰은 1만 9,400명의 지식인이 서명을 했다하더라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절판된 나의 에세이집 ‘생각’(행복한책읽기, 2005)에 이런 글이 있다.
“가야산에 골프장을 만드는 일을 반대하기 위해 100만인 서명 운동이 필요할까? 혹은 시인 이상화의 생가를 보존하기 위해 그게 필요할까?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필요악일까? 열 명 혹은 다섯 명으로는 안 될까? 진정 단 한 명의 의견이라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고심하는 사회에서라면 100만인 서명 운동 따위는 우스갯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명 운동의 규모와 목표가 걸핏하면 100만인이 넘는 진풍경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100만인 서명 운동은 그것이 어떤 선의에서 행해지든지 간에 우리 사회가 물량과 물리적인 세(勢)가 득세하는 사회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처럼 머릿수가 말하기 시작할수록 소수 의견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박유하씨의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지식인 성명과 서명자가 공개된 날, 저자의 검찰 기소에는 반대하지만 그의 책은 엄정한 비판이 필요하다는 반대편 지식인들의 성명과 서명자 명단도 공개 되었다. 비판자들은 저자의 형사 책임을 묻는 것이 적절치 않다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형사 기소를 승인하는 모순을 범했다. 비판자들은 박유하씨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했지만, 토론장에서 피고 신분의 박유하씨가 고르거나 누릴 수 있는 말과 자유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반대자들이 자신들의 성명서를 학술장으로 이 논란을 불러들이기 위한 노력으로 자평한다면, 기만이다. 이들의 의도는 법정의 판결에 앞서 인민재판을 하겠다는 것이다. 죽창을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학제 연구가 모색된 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저자가 역사가가 아니기 때문에 역사학계는 지금까지 박유하씨를 상대하지 않았다. 올해 벌어진 국정교과서 파동 때, 전국 대학교의 역사학과 교수들이 보여준 일치단결은 위안부 문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박유하씨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첫 책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 2011)는 제목 그대로 학제 연구를 수행한 책이자, 같은 문제의식이 ‘제국의 위안부’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므로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원문: [와카미야의 東京小考]할머니의 명예는 훼손됐을까 (동아일보)
와세다 저널리즘 대상 받는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무겁고 복잡한 마음의 상처 절절히 느껴져
미묘한 이야기를 예각적 표현을 섞어 집필
의도 오해받을 수 있었겠지만 모독했다는 생각은 안들어
장정일 소설가
지난 11월 2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위안부 소녀상의 철거를 요청했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간의 정상회담에서도 노다 전 총리가 똑같은 요구를 한 적이 있다. 한국 언론은 대사관 앞의 소녀상이 일본의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고 대사관을 설치하기로 했을 때, 두 나라는 대사관 지위와 주변 관리에 대한 각서를 교환했을 것이다. 대사관 주위는 대사관을 설치한 나라에 대한 공격이나 혐오가 금지된 공간이다. 그렇지 않다면 전 세계의 대사관 주위는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이 될 것이다. 알다시피 지구상에는 한일 두 나라와 버금가는 앙숙이 많은데, 모든 나라가 한국을 모범 삼는다고 생각해보라. 선전 포고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서로에 대한 우호가 가정(假定)되어야 하는 상징적인 공간이 대사관이다. 일본 총리의 요구는 외교 각서와 국제 외교 관례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베 총리가 일본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해 달라고 요청한 의도도 깊이 따져봐야 한다. 아베 총리의 요청이 진심이고자 했다면, 정상회의에 앞서 한국 정부와 한국민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선물을 가져 와야 했다. 하지만 그는 올 한 해 동안 일본 정부가 군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했던 ‘고노 담화’를 뒤집으려고 애썼던 장본인이다. 그랬던 만큼 자신의 요구가 어처구니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 ‘쇼’를 한 것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넓게 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은 일본 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이 일본의 목에 걸린 ‘가시’라고 여기지만, 아베와 같은 우익 세력에게는 ‘알박기’처럼 흥감한 일이다. 자국의 대사관 앞에 설치된 ‘혐오ㆍ적대’ 시설은 평범한 일본인마저 혐한으로 돌아서게 해주니 말이다.
여기에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했던 어떤 충고를 대입해 보자.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백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은 이루기 힘든 희망 사항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시한 차선책이 백성들로 하여금 군주를 ‘두렵게(공포)’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군주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최악은 백성들이 군주를 ‘경멸’하게 되는 사태라고 했다. 일본 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한국을 경멸하게 만든다. 위안부 문제의 진실과 상관없이 일본인은 한국을 ‘제 멋대로’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본인들로 하여금 한국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방법은 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하는 대신, 전국의 마을마다 하나씩의 위안부 소녀상을 세우는 것이다. 아마도 식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이래 친일파가 득세해온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갈등은 민족주의를 동원할 수 있게 해주는 자산이다. 현재의 한일 정부에게는 소녀상이 필요하다.
2011년 12월 14일 처음 세워진 일본 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위안부 소녀상)은 커다란 일을 했다. 이 동상이 있었기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탄력을 받았고, 해외로까지 동상 건립이 이어졌다. 하지만 적당한 계기에 이 동상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나도 이제부터 친일파가 되는 것일까? 제대로 된 사회라면 더 많은 이견을 환대해야 한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는 올해 2월 법원으로부터 34곳을 삭제하라는 판결을 받고, 6월에 복자(伏字) 처리가 된 삭제판을 냈다. 그런데 처음에 지은이를 고소했던 위안부 관련 단체는 ‘복자 처리’가 자신들을 농락한 것이라며, 출판 중지를 요구했다. 일제 강점기에 복자 처리된 책이 꽤 나왔으나, 일제 경찰도 그것마저 트집 잡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찰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저자를 기소했다. ‘제국의 위안부’가 민족ㆍ국가ㆍ남성이 독차지해 온 공식 역사와 다른 목소리를 내다보니, 위안부에 대한 고정된 상식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이견이 없으면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사상이 생겨날 수 없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과거사 엄중한 정리는 않고 기본 가치관 공유國서 한국 제외
어른스럽지 못한 아베 총리
산케이 지국장 출국 금지… 아베 총리 美의회 연설 방해
관용없는 한국도 훌륭하지 않아
극단주의 비판 책 낸 박유하 교수… 한국서 고발당한 일도 아쉬워
장정일 소설가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지음/뿌리와이파리 펴냄(2013)
지난 2월17일,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출판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그러자 이재명 성남 시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트위터에 “어쩌다 이런 사람과 하나의 하늘 아래서 숨 쉬게 되었을까”라면서, 지은이를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로 몰아 세웠다. 그러면서 책을 읽어 보았느냐는 누리꾼에게 “똥은 안 먹고 냄새만으로 압니다”라고 일갈한다. 여러 우익 단체들이 아무 근거 없이, 단지 ‘냄새’가 난다는 직감만으로 그를 ‘빨갱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더 슬픈 것은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학과 교수가 <한겨레> 2월26일치에 쓴 칼럼이다. 그는 그 글에서 박유하가 “조선인 위안부가 군수품이었다면, 강간당한 네덜란드 여성이나 중국 여성은 전리품”이었다는 논지를 폈다고 주장하는데, 이 책 219쪽에 있는 저 대목은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던 일본군의 기본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지 지은이의 것이 아니다. 또 조한욱은 지은이가 위안부 형성 과정을 기술하면서 전적으로 “제국주의 일본 정부의 사료”에 의지했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위안부 형성 과정을 다루고 있는 대목에서는 제국주의 일본 정부의 사료가 단 한건도 나오지 않는다.
지은이가 <제국의 위안부>를 쓰면서 기본으로 삼은 사료는 1993~2001년 사이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출간한 군위안부들의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다섯권이다. 현재 강제납치와 매춘 여부를 둘러싸고 지은이가 ‘나눔의 집’ 할머니들에게 명예훼손으로 피소된 사항들은 모두 이 책을 근거로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나보고 배급을 타가라던 이장 아들이 계집애가 있는 집을 다 가르쳐 준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이 주인이 돼갖구는 얼마나 나를 뚜들겨패는지 몰라. 손님을 안 받을라 한다구.”, “주인은 한국 사람이었어.”, “한국 사람들이 더 나뻤어요. 우리를 팔어묵었으니께.” 등등.
<증언집>에서 출몰하는 이런 증언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출판금지 조처가, 강제납치 되어 성노예가 되었던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는 다른 무수한 할머니들의 기억과 목소리를 빼앗는 일이라고 말해준다. 지은이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강제납치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군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할 뿐이며, 이 주장은 딱히 지은이의 것만이 아닌 이 분야의 상식이 된 지 오래다.
2003년, 일본에서 출간되고 이제야 번역된 윤명숙의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이학사, 2015)는 “조선인 군위안부의 징모(국가에서 특별한 일에 필요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 형태는 군인·헌병·경찰의 납치로 이루어지는 형태보다 징모업자의 취업 사기로 이루어지는 형태가 압도적”이었다고 말한다. 군인에 의한 강제납치가 일반적이 아니었다는 사정은 그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징모에 협조했다는 뜻이며, 윤명숙의 말에 따르면 그 일을 직시하는 것은 “친일 세력(도지나사 경찰 등)”에 대한 책임 추궁과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제국의 위안부>는 우리가 외면하려고 하는 일제 36년의 성격을 마주보게 한다. 위안부 논쟁에서 일본을 이기는 방법은 그들보다 우리가 더 많이 아는 것이고, 백전백패하는 방법은 일본이 아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역사교과서, 독도, 위안부 다룬 박유하 교수의 ‘화해를’ ‘제국의’
일부 한국인 “日우익 대변” 비난, “위안부 명예 훼손했다” 고소
치밀한 논리, 균형적 시각으로 한일간의 난제 해결 애쓴 朴교수의 용기와 노력 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