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간담회 요약> – 2016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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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일본군/국가의 책임을 극소화했다”

국가책임을 말했고 그에 따른 사죄보상을 요구했음
당사자 포함한 협의체 제안
“대화로써 일본과 마주해야 한다”(제국,311)
“정부는 일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제국,312)

 

2) “일본어판과 다르다”

일본어판은 단순번역이 아니라 일본인독자를 향해 다시 쓴 책. 다시 쓴 책이 표현이 다른 건 당연.

 

3)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시했다”

차이/차별 구조와 고통 지적

 

4) 업자가 주범이라 했다

“법적책임’에 고집한다면 업자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했을 뿐

 

5) 위안부의증언을 찬탈했다

위위안부의 증언은 다양. 한 사람의 체험과 생각이 균일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 기존 연구자와 지원단체가 대변하지 않았던 부분을 보여 주었을 뿐.

 

6) “부정론자들의 담론을 기본적인 수준에서 계승”

근거없는 단정. 그랬다면 일본진보지식인이나 매체가 평가할 수가 없음

 

7) 센다 책에 조선인/애국은 없다

일본인의 증언임을 처음부터 지적. 애국을 읽은 건 박유하의 해석.

 

8) ”동족”이란 위안부 아닌  일본군의 목소리다”

일본군의 목소리임은 처음부터 지적.

 

9) “위안부의 평균나이가 25세”라고 했다”

전체평균이 25세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 중 하나로 제시

 

10) “위안부문제를 한국정부가 포기했다고 했다”

박유하가 지적한 건 위안부문제가 아니라 개인청구권

 

11) “조선인을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식민지의 거짓말”의 방점은  식민지. 해당부분은 제대로 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들의 슬픔을 강조한 부분(일본판에만 있는 이유) – 초보적 오독

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의 오류

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의 거짓말                                          (2016/7/11기자간담회자료중발췌)
(이탤릭체는 박유하의 주장이나 책 인용)

1.<정영환저서를 둘러싼 언론보도> (2016/6/30-7/7)

정영환의 주장과 출판사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

우경화로 인해 일본인들은 식민지지배에 대해 사과는 할 만치 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딱 부합하는 책이 제국의 위안부. 더욱이 한국인 저자가 썼으니 일본언론이 대대적으로 다루고 예찬을 했죠. 여기에 피해자에 대한 배려는 없었습니다.”(정영환 인터뷰. 한겨레)

“<제국>은 극우 <산케이신문>이나 우파 <요미우리신문> 말할 것도 없고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 같은 리버럴 매체들도 격찬하는 가운데 1만부 이상 팔려나갔다”(한겨레,)

“한미일 주류이익에 부합”(한겨레)
“위안부의 평균나이가 25세”라고 했다”

“피징용자 미수금을 위안부문제로 오인” (116ㅡ125, 한겨레,)

한국어판에 없는 주장/인용.뉴앙스를 달리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한국인의 비판을 피하려는 차원” (연합,한국)
“1965년 국교정상화 당시 일본이 위안부배상을 추진했고 한국이 거부했다는 박교수의 주장이 허구라는 사실도 사료검증으로 밝혔다”(한국.7/1)

“일본어판은 양국관계가 정체된 책임이 전후 일본의 보상과 사죄를 기억하지 못하는 한국측에 있다고 적는 등 일본인의 입맛에 맞도록 가필”(연합,7/1)

“동족이나 애국을 운운한 것은 위안부의 말이 아니라 일본군의 말”(국민)
“박교수가 들려주고자 했다는 위안부의 다른 목소리란 일본군들이 말하는 위안부이야기이고 일본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위안부 이야기

“법적책임은 없다는 견해는 일본우익의 입장과 맥이 닿는다”

“사료오독/취사선택/잘못된 이해”(연합,7/1)

우익만이 아니라 좌파와 자유주의자에게도 환영” (연합,7.1)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도 비판이 없는 것은 사회전반으로 퍼진 은근한 우경화 영향”(연합,7.1)

“환영받는이유는 전쟁과 식민지배책임을 부정하려는 일본내역사수정주의의 흐름에 들어맞기 때문””역사수정주의에 리버럴까지 동조”” ‘리버럴이 보수파에 합류” (연합,7/3)

일본극우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

“일본지식인사회의 “지적퇴락” (연합,한겨레)

(한일합의에는)” 피해자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

“센다가코의 책에는 동지의식이 없다” (국민.7/1))

 

2.<제국의 위안부>는 어떤 책인가

피해자면서 협력자가 되도록 만든 제국주의와 동족을 가해자로 만든 식민통치 비판.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한 책.
한국/일본/정부/민간/부정자등 “다수에게 말 걸기- 다수의 청자-다이얼로그 지향
당시를 산 이들에 대해 단정/규탄하기 전에 생각하기- 역사인식에서는 동시대인물들의 정황및/심중에 대한 상상력 필요
“변명적기술”(36)이라는 정의 생각은 이 책의 형식에 대한 몰이해. 단죄적/법정주의적/징벌적 사고

—역사인식이란 대화. 자신을 알리고 이해받고 상대를 이해하는 일

“반역사성”이라는 단어는 정해진 (국정/민정)역사관을 지향하는 사고를 증명.
“피해자가 부재하는 화해”라는 인식은 피해자상을 단일화한 것.
<제국의 위안부>는 결과적으로 당사자의 일부를 배제해 온 운동과 연구에 대한 이의제기.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당사자–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적대의식을 키워가는 차세대를 위해

*식민지체험의 간접트라우마를 갖게 된 후예, 또 다른 당사자인 우리자신,한국인들을 위해

 

 

 

  1. 정영환 저서의 근본적 문제


-근거없는 단정과 비틀어 읽기로 독자들의 분노/불신유발

1)도덕적 의구심을 유발하는 레토릭
“(쟁점을) 살짝 바꾸기 때문에” (37)
“사실에 관한 논의를 이미지문제로 살짝 바꾼다”(57)
“애매하게””기묘하게”
“논점을 살짝 바꿔 버리기까지 한다”(57)
“속임수”(58) “애매하게 처리’(59)”레토릭”
“성노예제의 개념을 성노예의 이미지의 문제로 살짝 바꾸는 것”(65)”불성실한 수법”(65)
”바꿔치기”

 

2)근거없는 추측과 비틀어 읽기로 독자를 오독으로 유인
“위안부연행에 일본군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듯이 읽히는 부분이 있다”(60)<“두가지 기술은 국가의 책임에 대해 모순되는 지적을 한 것인데 아마도 박유하의 실제주장은 후자일 것이다
”’위안부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면 모집자체를 중단해야 했을 것’ 이라는 기술은 공급이 따라갈 정도라면 군위안소제도에 문제는 없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56)

올바르게 읽기 위해 “논지의 재구성”을 해야 한다거나 ”터무니없는 부담”을 지우고 있다는 비판은 터무니없는 왜곡 혹은 선입견(서경식./윤건차등 재일교포지식인의 <화해를 위해서>비판의 문제의식 답습)에 의한 곡해

 

3)우경화 콤플렉스 / 냉전적사고-
(하타이쿠히코의) “일본군무죄론과 기본적으로는 동일”(66)

,“부정론자들의 담론을 기본적인 수준에서 계승”
“박유하가 전개한 논리는 고바야시 요시노리나 산케이신문으로 대표되는 명확한 역사수정주의 뿐 만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정면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1990년대이래로 일본의 지식인들이 생산해 온 담론에 적지 않게 의거”(40)

 

<우익>에 연결시키는 일로 독자의 적개심 유발 .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오른쪽에 세워 비난.
결과적으로 ”양심적” 일본지식인마저 의심하도록 만드는 선동성.

역사에 대한 재고찰을 “역사수정주의”로 간주 (박노자.한겨레.2016/7/3) 혹은 우파로 모는 담론의 빈곤.
폭력의 사고/지식인의 대중화?/ 학문이라는 이름의 테러

 

4) 기존연구/사고에 무조건 대입시켜 왜소화.

학제적 연구에 대한 몰이해. 제국의 위안부는 메타역사서.

  1. 치명적 오류 혹은 거짓말
  • ”식민지지배책임에 관한 인식에 다대한 혼란 초래”(39)
    ”전후사의 긍정을 바라는 내셔널리즘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이러한 주장 때문에 일본우파뿐 아니라 이른바 ”리버럴”에게도 높은 평가”“<제국의 위안부사태란, “일본군무죄론에 의한 대일본긍정소망과 전후일본의 긍정소망이라는 두개의 역사수정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욕망이 낳은산물” (167,) “제국의 위안부는 피해자들의 소리를 마주하는 것을 거부하는 구실을 일본사회에 부여”(174) “책임부정론자 담론을 계승”(정,40)”식민지주의 이데올로기에 친화적”(141,이상 정영환)일본지식인들의 평가를 모두 거짓이나 포즈로 생각하는 편견과 왜곡.일본에서의 평가를 거꾸로,혹은 자의적으로 선택해 전달, 박유하와 현대 일본지식인에 대한 불신 야기.

 이하는 박유하의 저작들에 대한 평가. 산케이나 요미우리의 평가는 없었음.

박유하의 저작은 학문적인 수준도 높고, 시사문제 해설서로서도 균형이 잡혀있다. 그런데다 읽기 쉬운 문체로 쓰인 보기 힘든 우수작이다. 한국과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오해,무지, 혹은 감정적 대립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역사문헌이나 여론조사등의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책이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는 것은 양국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기뻐해야 할 일일 뿐 아니라 세계각지에서의 국가 혹은  민족간 화해를 가져오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이리에 아키라, 하바드 대 명예교수,2007. 오사라기지로 논단상 평)

위안부문제에 관한 전면적, 실증적, 동시에 윤리적인 분석이다”” 이책만큼 이 문제의 모든 측면을 이성적으로 검토한 책은 없다, 역사적인 위안부발생구조와 그 실태해명부터 위안부문제의 발생, 이에 대한 한국과 일본에서의 정치과정 각기의 기억의 생산과 재생산의 분석, 나아가 앞으로의 문제해결을 향한 제언까지”” 경청할 가치가 있는 문장으로 적혀져 있어”” 성노예냐 매춘부냐 하는 인식에서도 그리고 강제성 문제에서도 안이한 단순화를 허용하지 않는 다면적인 측면을 밝히고 있다. 여성을 수단화 물건화 도구화하는 구조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표한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축이다.”(다나카아키히코, 도쿄대 명예교수,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심사평)

“위안부와 군대라는 관계로부터가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틀 안에서 인간 정신이 어떤 양상이었는지의 문제를 파헤친 작품” (가마타사토시, 저널리스트,이시바시탄잔 기념 와세다저널리즘 대상 평 )

단순한 전시하의 인권침해로 보는 견해보다도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로까지 시야를 넓혀 문제를 파악하는 날카로움이 있다. 그것은 전시하의 인권침해적 범죄라는 이해보다도 엄중한 물음을 품고 있다. 박유하는 과거를 미화하고 긍정하려고 하는 역사수정주의자의 시점과는 정반대의 시선을 위안부피해자에게 쏟고 있는 것이다”(나카자와 게이)

이 책의 평가해야 할 점은 제국, 즉 식민지지배의 죄를 전면에 끌어낸 데있다”(우에노)“거시적인 규정성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의 상황을 꼼꼼하게 봐 가는 것이 식민지지배를 생각하는 시각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지배의 폭력성의 진지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는 잇고 있다고 생각한다”(아라라기 신조 조치대 교수)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선입견을 빼고 전체를 읽어 보기만 한다면 생길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일본의 면죄에 이용하는 것이라는 일부사람의 독해는 명백히 오독이며 이 책을 악용하는 것””이러한 측면의 강조는 식민지지배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길을 열어 줄지언정,일본의 면죄를 끌어내거나 하는 일은 없다”(니시마사히코 리츠메이칸 대 교수)”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가노 미키요 게이와대학 교수)””이러한 구조 야말로 식민지지배와 전쟁의 커다란 죄악,그리고 여성의 비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박유하씨가 동지적관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해석”(와카미야 요시후미 주필)”

이제 물음은 일본을 향하고 있다””일찍이 구미에 추종했고 강자로서 아시아를 지배한 일본은, 타자를지배하는 서양기원의 사상을 넘어서서 국제사회를 평화공존으로 가져갈 가치관을 보여 줄 수 있을것인가? 한국의 이해를 얻으며 도전하고 싶다” (야마다다카오 마이니치신문 칼럼니스트)

 

대부분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으로 읽고 있고 그러한 문제제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
오독하는 자는 누구인가?

 

2)”일본군무죄론”” 업자주범론” / 일본군과 국가의 책임을 극소화했다

업자가 주범이다 (53)

“일본군무죄론의 여섯가지 주장과 정확히 일치”(49) “일본군책임부정” (51)“군의 성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63)“위안부가 국가의 노예였다는 것을 사실상 부정한다”(54)“위안부의 모집을 지시한 것”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57)일본군의 책임을 “발상.수요.묵인 한정적 책임만 인정” “일본군무죄론과 기본적으로는 동일”(66)

 

<제국의 위안부>에 기술된 일본/군/부정자비판 (142-164)을 없는 것처럼 왜곡.
“법적책임’에 고집하려면 업자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했을 뿐
업자에는 일본인도 존재. 여성들을 돈벌이 도구로 삼아 착취한,”계급”책임을 물으려 한 시도

이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발췌.

 

일본군이 장기간 동안 전쟁이라는 ‘비일상’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병사 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라는 존재를 발상하고 모집한 것은 사 실이다. 그리고 군에서의 그런 수요증가가 사기나 유괴까지 횡행하게 된 이 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타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임으로써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은 이 문 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 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군의 수요를 자신들의 돈벌이에 이용하고 자국의 여성들을 지배자의 요구에 호응해 머나먼 타국으로 데려다놓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에 이런 일을 단속하고 처벌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행위야말로 ‘범죄’이고 따라서 그들에게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를 ‘범죄행위’로 규탄하는 이들의 표현에 따른다면, 업자들이야말로 ‘범죄’를 저지른 자들로서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20만 명이 아니라 2만 명, 아니 2000명 이라 해도,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을 직접 ‘동원’한 것이 업자들이었다고 해도, 또 그들이 ‘가라유키상’처럼 유괴되거나 자발적으로 팔려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50쪽)

업자들이 과도한 착취를 하지 않도록 관리했다는 것도, 군이 위안소의 ‘올바른 경영’을 지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위안소에서 폭행 등이 없도록 노력했다는 것이 위안소 설치와 이용의 책임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72쪽)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위안부’를 필요시하고 위안부의 효과적인 공급을 위해 ‘관리’를 했던 건 분명하다. 그런 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한 ‘남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 ‘죄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136쪽)

물론 보수를 받았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설령 보수를 받았더라도 그 보수는 그녀들의 정신적•신체적 고통에 대한 대가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위안부’들이 ‘비싼 요금’을 받았다고 강조하는 이들도 있지만, ‘위안’이었건 ‘매춘’이었건 보수가 혹 높은 경우가 있었다면 그건 그만큼 그일이 모두가 꺼리는 차별적이면서 가혹한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싼 요금’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 장소가 목숨을 저당잡혀 있던 전선이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대부분의 위안부들은 자신들의 몸값을 저당잡혀 있는 신세였다. 또 그 착취의 주체가 설령 포주들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착취구조를 묵인하고 허용한(간혹 그 구조를 바로잡으려 한 군인도 있었지만 그건 예외적인 일로 보아야 한다) 군의 상부에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145-146쪽)

물론 이 소설 속의 장면은 위안소의 규율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니 예외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일 뿐 ‘조선인 위안부’에게 원래 요구된 역할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벌어진 ‘개인적’인 일 역시, 군인들의 대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공적’인 사회인식과 구조가 만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식과 구조를 만든 일본의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148쪽)

하지만 위안부를 모집한 중심 주체가 민간인이라 해도, 또 모집하는 데에 사기나 납치 등의 수법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병사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상부 역시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이 불법적인 행위를 막으려 했다 해도 불법적인 수단이 자행되는 시스템 자체를 방기했다면 시스템을 유지시킨 책임이 군에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군이 위안부 모집에서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분명히 군이 ‘직접’ 모집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그것은 밀수품을 막으려는 국가의 태도에 비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군은 이때 소비자가 밀수품을 사지 않도록 밀수품을 막으려 했던 것이지만 정식 관세를 내면 통과시키는 식으로 수입 자체는 허가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은 상품의 품질에 대해 감시하고 불만을 제기할 수는 있어도 직접 관리와 개선에 나설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군이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는 사실도, 일본군이 상품과 그것이 유통되는 시스템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안부’가 임신했을 때 낙태시키는 일을 맡았던 한 군의가 ‘나는 검사관이라는 무기〓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http://www.ne.jp/asahi/tyuukiren/web-site/backnumber/05/yuasa_ianhu.htm). 그런 식의 일방적 권력의 존재는 군이 시스템을 ‘관리’한 관리자라는 사실, 다시 말해 ‘관여’했을 뿐 아니라 주체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군이 모집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군의 관여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군이 물리적으로 행사한 ‘강제연행’을 글자 그대로 ‘강제’ ‘연행’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강제연행’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행해진 경우는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사기든 납치든 업자와 포주들이 ‘강제’적으로 데려가는 일이 빈번했던 위안소를 유지한다는 것은 계속적인 수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공범자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살인교사와 비슷한 구조일 수밖에 없고, 그런 시스템을 필요로 한 것이 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군인에 의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 ‘강제’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식민지에서는 오히려 당연하다. 전쟁터가 아닌 식민지는 아직은 ‘일상’이 유지된 공간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법’이 작동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징병이든 징용이든 구성원의 의지에 반한 ‘강제적’ 모집 행위조차 ‘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것을 보여준다. 식민지에서 무차별적 ‘강제연행’은 없었던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행위를 ‘유법有法’화해도 문제가되지 않는 비일상적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뿐이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온건했고 좋은 통치였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온건하고 좋은 통치란 어디까지나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 이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의 통치가 총체적인 ‘온건통치’였던 것은 일본 국가에 대한 복종이 전제된 공간에서의 일이었다. 정신대 모집은 ‘법’을 적용시켜 합법화하면서 위안부 모집을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식민지에서의 ‘온건통치’의 임계선이 무너지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 앞에 본 소설과 같은 일이 일어나거나 인도네시아나 중국 등지에서의 납치(수용)강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전쟁터’이자 ‘국가’ 바깥의 공간이어서 더 이상 ‘일상’을 유지하는 ‘법’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모집에서 업자와 포주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바로 그래서라고 이해해야 한다. ‘온건통치’의 범주에 ‘자발적으로’ 편입된 이들이 ‘개인적’으로 불법을 자행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온건통치를 유지하면서) 식민지인들에게 불법행위를 전담시켜 그들을 동족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식민지에 살았던 일본인들은 조선을 지배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건, ‘지배’라는 것이 구조적으로 언제나 저항과 반발을 내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체제 ‘사상범’을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유지법’이라는 ‘법’을 작동시키는 일로 ‘법’망 안에서 가능했지만, 식민지인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하는 것은 ‘온건통치’를 표방하는 한 불가능하다. 그러니,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군의 관여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제21군 사령부가 위안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여, 내무성에 400명, 대만 총독부에 300명의 여성을 모집해주기를 요청한 경위를 나타내는 자료’(요시미 요시아키, 2007. 5.) 외에도 위안부의 증언과 군인이 남긴 다수의 기록에서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군의 관여는 명백히 드러난다. 모든 위안소가 ‘군이 설치한, 군인•군속 전용 제도’(위의 글)라고 할 수는 없는 경우도 있지만, 군이 위안소를 필요로 하고 이용한 이상 위안소에 대한 군의 관여를 부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군이 주체가 되는 ‘강제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해야 한다. ‘위안부’ 이동에 군이 관여했다는 점을 두고 전쟁터이기 때문에 군이 보호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메뚜기」는 그 이동이 단순한 ‘보호’가 아니었다는 것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일본 본토와 한반도 사이의 이동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서 국가의 관리를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여권과 유사한 국가의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일본인에 대해서는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출국을 ‘21세 이상의 경험자’로 정해놓았지만, 조선이나 대만의 경우에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요시미 요시아키, 2009년 여름). 이것은, 이미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식민지 여성들에 대해서는 국가의 보호의식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51-154쪽)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것은, 조선이 받았던 고통에 대해, 당한 당신한테 잘못이 있다고 가해자가 말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책임’은 어디까지나 ‘자기 책임’의 주체가 생각해야 할 문제다. 조선은 멸망 직전’이었는데 일본이 구해준 것이라며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은 강한 자의 논리일 뿐이다.

설사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갈등 해소는 자신의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데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는 이들은 식민지배를 하게 된 ‘이유’만 강조하고 싶어하지만, 상대방의 문제만을 지적하는 한 대화는 결국 닫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화에는 상대방의 긍지를 생각하는 상상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죄와 보상은, 이제까지 부정해왔던 이들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도 필요하다.

(163쪽)

‘조선인 위안부’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강간이나 가혹한 노동의 원인은 식민지배와 국가와 남성중심주의와 근대자본주의가 빚은 가난과 차별에 있다. 나아가 그들을 그런 장소로 내몬 가부장제에 있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만들고 이용한 것은 ‘일본군’이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그런 시스템을 묵인한 국가에 있다.

(191쪽)

 

3) 피해자나 지원단체가 양보하라고 했다

당사자 포함한 협의체 제안

 

대화로써 일본과 마주해야 한다”(제국의 위안부,311)
“정부는 일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제국의 위안부,312)

 

4)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이 다르다

일본어판은 한국어판의 단순번역이 아니라 일본인독자를 향해 다시 쓴 책. 취지/표현이 “기본적으로”다르지 않다 했을 뿐, 다시 쓴 책에서 표현이 달라지는 건 당연.

장정일’ 박유하죽이기-이명원/정영환의 오독” 참조

http://www.huffingtonpost.kr/jeongil-jang-/story_b_9899800.html
5)일본인위안부와 조선인위안부를 동일시했다”

 
표면적인 “동족”의 틀 아래 존재한 차이/차별 구조, 고통 지적

물론 이런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기억일 수밖에 없다. 설사 보살핌을 받고 사랑하고 마음을 허한 존재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부들에게 위안소란 벗어나고 싶은 곳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녀들에게는 소중했을 기억의 흔적들을 그녀들 자신이 “다 내삐렀”다는 점이다. “그거 놔두면 문제될까봐”라는 말은, 그런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 그녀들 자신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 이후 내내 그렇게 ‘기억’을 소거시키며 살아왔다.

(67쪽)

물론 거듭 말하지만, 사랑과 평화와 동지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소’가 지옥 같은 체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명예와 칭송이 따른다 해도 전쟁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지옥을 살아내는 힘이 되었을 연민과 공감, 그리고 분노보다 운명으로 돌리는 자세 역시 기억되어야 한다.

(76쪽)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일본인•조선인•대만인 ‘위안부’의 경우 ‘노예’적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군인과 ‘동지’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같은 ‘제국 일본’의 여성으로서 군인을 ‘위안’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부여된 공적인 역할이었다. 그들의 성의 제공은 기본적으로는 일본 제국에 대한 ‘애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남성과 국가의 여성 착취를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했지만, ‘일본’ 군인만을 위안부의 가해자로 특수화하는 일은 그런 부분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페미니즘 정신을 바탕에 둔 운동이었음에도 ‘일본’ 비판에 더 무게가 실리면서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남성과 국가와 제국’의 문제로 다루는 일을 어렵게 하고 말았다. 다른 나라 역시 이 문제에서 무죄일 수 없음에도 그들의 문제를 보지 못하도록 만든 셈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중국이나 네덜란드 등 전쟁 상대였던 ‘적국의 여성’과 본국•식민지•점령지의 여성들이 처했던 위치는 다르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해주거나 ‘간호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박유하, 2009; 하야시 히로후미, 2010).

한 군의는 “내가 ‘위안부’를 처음으로 본 것은 거류민 여성에게 위생/응급처치 교육을 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든지, ‘너는 천황 폐하를 일본인과 똑같이 섬길 수 있어서 기쁘지?’ 하는 식으로 깔보았습니다”라고 고백한다(http://www.ne.jp/asahi/tyuukiren/web-site/backnumber/05/yuasa_ianhu.htm). 일본의 지원운동 방식은 이런 상황과 심리가 보여주는 ‘식민지인의 이용과 차별’의 교묘한 구조 역시 보지 못하도록 했다. ‘위안부’가 ‘간호사’를 겸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두고 그저 “‘간호사’로 만들어 당국이 연합국에게 위안부의 존재를 은폐하려”(『교도통신』, 2008. 7. 31.) 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정식 군속으로 임명해서 위안소의 존재도 감추는 동시에 함께 돌아갈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같은 기사)이었다고 해석하는 것 역시, 위안부의 ‘동지’성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그녀들은 전시에 이미 간호부로 일하고 있었다.

‘성노예’라는 단어는 ‘조선인 위안부’가 처한 그런 복잡한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한다. 동지’적 관계를 직시하는 것이 꼭 ‘일본군’을 면책하는 일은 아닌데도 이 부분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은, 일본의 지원자들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보지 못했거나 한국의 정대협과 마찬가지로 ‘운동’에 불리한 사실로만 판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표면상으로는 ‘동지’적 관계였어도,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별감정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추어진 차별감정을 보기 위해서도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의 다면성은 오히려 직시되어야 했다. 명확하게 보는 일만이 책임을 져야 할 책임 주체와 피해자의 관계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동지’적 관계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을 고집했던 이들을 무조건 규탄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응답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했다. 위안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내면에 존재했던 차별의식을 지적하기 위해서도, ‘동지적 관계’는 우선 인정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 지원자 측의 운동가나 연구자들 역시 그런 사실은 눈감았거나 보지 못했고, 조선인 위안부에게서 그저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만을 보려 했다. 그것은, 명확한 ‘굴종’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자발적’인 협력을 강요당한 ‘식민지’의 복잡한 구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국가와 제국’ 비판이 앞선 나머지 식민지의 미묘한 심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동지적’ 상황을 그저 예외적인 것으로서 배제해버린 일은 ‘동지적’ 측면에만 혹은 ‘매춘부’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려 했던 이들의 반발을 불렀고, 대립을 심화시켰다. 말하자면 위안부의 증언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은 일, 다시 말해 위안부의 ‘피해’에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외면했던 일은 일본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다.

(137-139쪽)

 

조선인 위안부들은 이렇게 살아 있는 군인을 위안했을 뿐 아니라 죽은 군인들을 위로하는 역할도 했다. ‘피묻은 군복’을 빨아 다음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여차하면 함께 싸울 수 있는 훈련까지도 한 이들이 조선인 위안부였다. 그렇게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162쪽)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저항했으나 굴복하고 협력했던 식민지의 슬픔과 굴욕을 한 몸에 경험한 존재다.일본’이 주체가 된 전쟁에 ‘끌려’갔을 뿐 아니라 군이 가는 곳마다 ‘끌려’다녀야 했던 ‘노예’임에 분명했지만, 동시에 성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복’을 입은 댕기머리 조선인이기도 했지만, 일본옷을 입고 일본머리를 한 청초한 ‘야마토 나데시코’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처절하게 살아낸 존재였다.

(207쪽)

 

네덜란드’ 여성과 인도네시아 여성과 조선인 여성은 일본군과의 기본적 인 관계가 다르다. 일본군에게 네덜란드 여성은 ‘적의 여자’였지만, 인도네시아의 여성은 점령지의 여성이었고, 조선인 위안부는 같은 일본인 여성으로서의 동지적 관계였다. 그녀들이 입은 피해의 형태는 기본적인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그런 기본관계를 벗어난 관계도 얼마든지 있었다.

(265-267쪽)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약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었을 뿐,위안’이라는 이름의 노동이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성과 신체를 혹사당하는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여전히 ‘위안부’ 생활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84쪽)일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에게 ‘적의 여자’와는 다른 관계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조선인 위안부라도 그녀들이 놓인 정황은 다양했다.조선인 위안부’란 식민지의 가난과 성적/민족적 차별의식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숫자의 군인을 감당해야 했다는 점에서도 ‘위안부’가 ‘군인’과의 관계에서 희생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양쪽 다, 국민동원이라는 국가 시스템 속에서 함께 움직여진 장기말이었다. 그들은 둘 다 성과 생명을, 그것을 담는 신체를 ‘국가를 위해’ 바쳐야 했던 한 마리 ‘개미’들이었다. 포악한 군인이었건 온순한 군인이었건, 그들의 운명은 다르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남녀 간의 불평등, 민족적 불평등이라는 관계 속에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당신도 헤이타이(주-군인)나도 헤이따이상, 나도 이리 산 것도, 고향을 떠나서 이리 산 것도, 천황을 위하여”(『강제 3』, 107쪽)라는 노래를 했다는 증언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들은 함께 국가에 의해 고향을 멀리 떠나 타지로 ‘이동’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79쪽)

물론 역으로 강제성 속에 자발성이 있었고 성노예의 이면에 매춘부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국적에 따라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랐다.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 해결은 그 모든 상황의 차이를 보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분명한 것은 보수가 주어졌건 아니건 ‘위안부’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윤간이 국가에 의해 허용된 존재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한 의식은 여성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 대할 수 있게 만드는 차별의식이었다. 특히 ‘조선인 위안부’는 그런 인식이 명확히 드러난 경우다.

(143쪽)

병사들의 강간은 위안소라는 공공장소에서 ‘몇백 명이나 되는 줄을 서’는 일에 대한 염증이 만들고 있다. 말하자면 강간을 피하기 위해 위안소를 만들었다는 군 상부의 의도는 군대의 숫자를 생각하면 처음부터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될 수 없는 시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서의 강간 욕망은 그녀들이 ‘고작 조센삐’였기 때문에 생긴 욕망이었다. 말하자면 단순한 여성 경시뿐만 아니라 민족 경시가 그들에게 강간을 허용한 것이다. ‘저 여자들하고 한 번 하’는 데에 ‘몇 시간이고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일’로 생각한 것은 상대에게 그럴 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조선인 위안부’란 그렇게, 여성을 도구화하는 성차별뿐 아니라 조선인임을 경시하는 민족차별이 만든 존재이기도 했다. 그 점이 일본인 위안부와 다른 점이다.

(147쪽)

‘점령지의 여성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은 ‘피해를 끼’쳐도 상관없는 여성이 있다는 사고를 전제로 한다.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위안소를 타국 군인에 의한 점령지에서의 강간과 비교하면서 일본은 ‘러시아같은 야만국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야만’과 대조되는 위안소, 잘 관리되면서 지극히 ‘문명’적으로 보이는 그곳은 가난이나 그 밖의 이유로 차별해도 되는 것으로 간주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식적으로’ 용인한 장소일 뿐이다. 공창을 합법화하는 발상 자체가 인간에 의한 인간(여성)의 상품화라는 ‘야만’을 정당화하는 장치인 것이다.

(149쪽)

 

그것은 남성이고 군대이고 국가였다. 그리고 ‘일본 제국’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부’란 어디까지나 국가와 남성, 그리고 격리된 남성 집단을 만드는 전쟁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생긴 존재다. 위안부의 자발성이란, 본인이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국가와 남성과 가부장제의 차별(선별)이 만든 자발성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폭탄이 터지는 최전방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며 병사들의 욕구를 받아주어야 했다.

(159쪽)

그에 반해, 예외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인 위안부들은 대개 도회지의 좋은 시설에서 장교들을 중심으로 상대하며 상대적으로 편한 환경을 누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조선인 위안부들이 더 많이 가혹한 환경으로 가게 된 이유는, 그들이 식민지의 여성이라는 계급적이고 민족적인 이중차별의 결과로 일본 여성들보다 가난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군인들이 그녀들에게서 본 적극성이란 그런 상황이 만든 적극성이었다.

(161쪽)

 

한국의 기생집을 위안소와 똑같이 치부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위안소는 전쟁과 군인들을 위한 장소였다. 군인들이 쉽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군인’이라는 존재가 폭력에 길들여진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러 증언들은 그런 폭력 역시 차별의식이 기반에 깔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계질서에 길들여진 군인들에게 조선인 위안부란 권력을 갖지 못한 졸병이라도 권력을 시험할 수 있는 대상일 수 있었다.

(163쪽)

일본인 위안부가 아닌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다는 것은 ‘조선’에 상대적으로 가난한 여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민지의 상황은 식민지배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한다면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성차별과 계급차별 이상으로 ‘식민지배’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었고, 고노 담화는 그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응답한 담화였다. 다시 말해 ‘고노 담화’란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응답한,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의 결과로 받아들여 사죄한 담화였다. 이후 다른 나라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문제가 복잡해지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고노 담화에서 인정된 ‘강제성’은 네덜란드나 중국에 대한 강제성과는 다른 차원의 강제성이었다.

(176쪽)

‘조선인 위안부’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강간이나 가혹한 노동의 원인은 식민지배와 국가와 남성중심주의와 근대자본주의가 빚은 가난과 차별에 있다. 나아가 그들을 그런 장소로 내몬 가부장제에 있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만들고 이용한 것은 ‘일본군’이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그런 시스템을 묵인한 국가에 있다.

(191쪽)

 

6) 일본인 위안부의 애국을 조선인위안부 것인 것처럼 썼다


일본인임은 명시. 센다의 책에서 애국을 읽은 것은 박유하의 해석이며 조선인위안부도 등장.
애국의 틀하에 놓여 있던 것은 조선인위안부증언집에 존재하는 기술에 근거한 지적.

 


센다의 책에서도 한 군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깜짝 놀란 건 지난濟南에 들어간 지 이틀 후에 어느새 작부가 들어온 일이었습니다. 작전을 수행하면서 전진하는 부대 뒤를 땀을 흘리며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숫자는 세 명인가 네 명이었는데, 거의 모두가 조선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약삭빠른 매춘업자가 전쟁수당을 받고 있는 군인들의 수당을 노리고 여자들을 모아 돈 벌러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들은 각기 일본식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옷도 입고 오비를 둘렀는데,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약삭빠른 업자의 지혜였겠지요. 군이 여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요구하거나 바란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업자였겠지요. 남자는 주둔지 한쪽 구석에 판자를 박고 돗자리를 둘러쳤는데,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엉성하나마 집을 지어냈습니다. 거지들의 오두막집 같은 거지요. 밖에서 돗자리를 들추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엉성한 집이었습니다. 부대에 영업허가를 받지도 않았겠지요. 형태로 봐서는 민간인이 마음대로 와서 제멋대로 장사를 하는 식이었을 겁니다.( 82쪽)

 

———————-

그런데 센다는 “속아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 이렇게도 쓴다.

그녀들이 부대를 따라 행동할 때는 양복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양복이라고 해봐야 면원피스나 투피스였다고 한다. 그런 복장으로 특별한 날에 입는 옷이나 자신의 일상용품들을 넣은 트렁크를 들고 군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습지대 같은 곳을 걸을 때 혹은 강을 건널 때는 훈도시(남성용 속옷-인용자)만 걸친 군인 옆에서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조건은 군인들과 똑같았던 것이다.(89쪽)

센다가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러한 광경에 근거한 것이리라. 센다가 말하는 정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사진도 실제로 남아 있다(33쪽의 <사진 2> 참조).

 

일본어판 (71-75), 한국어판 57-59 에 애국 사례 존재

간호원도 배운다고 배왔지. 미국 사람이 뭐시가(비행기가) 오는 거 같으면 총도 맞추면 이것 배우고. 이것저것 배우고 호다이(붕대)를 갖다가 어디 맞으면 어떻게 감으라 카는 거 그거 연신 배와주고 놀 여개가 없어요.(『강제 5』, 139쪽)

 

거기가 일선이라도 군인들 큰 전쟁 나가서 돌아오면 기모노 입고 에프론 하고 고로사마데시타(‘수고하셨습니다’) 인사하고 보통 때는 몸뻬 입고 안 그러면 스카트 같은 거 입고. 기모노는 겨울거 여름거 봄거. 도시 가서 돈 주고 사야지. 인기까이(원문에는 괄호 안에 ‘송별회’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연예회’[여흥을 곁들인 술자리]의 잘못된 일본어발음일 가능성이 크다인용자) 같은 거 하거든요.(같은 책, 140쪽)

 

조선인 위안부가 한 일은 성적 욕구를 받아주는 일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호도 붕대감기도 배웠고 심지어는 총쏘기(총조립하기?)까지 배워 군인들 과 함께 전쟁을 지탱했다.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면 ‘기모노에 에프론’ 차림 으로 맞아들이고 축하연에 참석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대동아전쟁 나고 거기 있는 여자들이 다 훈련받았지. 아침이면 다 나와서 모두 체조하고, 군대식으로 똑같이 훈련받았지. 신작로 운동장에서 훈련을 달 반은 받 았어. 수류탄 던지는 거 그거는 거 부대서. 부대서 거기서 훈련시키는 사람 있어. 훈련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군인이지.(같은 책, 140쪽)

 

이것은 전쟁 발생 이후의 상황인데, 후에 다시 보겠지만 위안부들이 처했던 상황은 장소와 시기에 따라 달랐고 전선인지 후방인지에 따라서도 달랐 다. 또한 어떤 군인을 만났는지에 따라서도 달랐다. 물론 그 어떤 경우도 그들이 처한 상황이 불행한 상황이었다는 본질적인 구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안부의 그런 다양한 모습을 보지 않고는 결코 위안부의 총체적인 면모를 포착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일본인위안부의 경우다. 그러나 조선인위안부가 “제국의 위안부”였던 이상 기본적인관계는 같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패전 전후에 위안부들이 부상병을 간호하기도 하고 빨래와 바느질을 하기도 했던 배경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사유리,스즈란,모모코와 같은 일본이름으로 불렸다(후루야마고마오, 하얀논밭,12쪽)는 것도. 식민지인이 ‘위안부”가 되는 일이란 대체일본인이 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제국,62-63).

 

한 일본인 위안부의 이야기는위안부’와 군인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 고 있다.

 

위안부가 될 때, 전쟁터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이런 몸이 된 나도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전선의 위안소에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후방 병참기지에 있게 되면 점차 생활에 익숙해진다고 할까 지쳐버리거든요. 왜냐하면 전방에서는 군인들과 먹는 것도 같이 먹고 본인들은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우리도 그런 그들을 진짜로 위로해주려고 생각했지요. 군인들도 우리를 보면 ‘수고가 많네’라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후방으로 가면 정말로 공동변소 취급인 거예요. 장교나 하사관들 중엔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요.(센다 가코, 81~82쪽)

 

즐거웠던 일은, 글쎄요. 내 경우에는 역시 시코쿠 사람을 만났을 때였어요. 그것도 아이치愛知라든가 마쓰야마松山라든가, 고향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기뻤지요. 군인들도 마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성관계를 빼고 고향의 축제나 산이 나 강 얘기를 같이 하곤 했어요. 군인들도 그걸로 만족했지요.(같은 책, 82쪽)

 

이렇게 ‘위안부’를 둘러싼 상황은 전방인지 후방인지에 따라 달랐을 뿐 아니라 상대에 따라서도 달랐다. 자원한 ‘위안부’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이 군인의 ‘위안’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것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몸’이 되었다고 자기 자신을 비하해야 할 만큼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받아온 그녀들에게는, 군인을 상대하는 ‘위안부’란 처음으로 자신의 앉을 자리를 ‘양지’에 내받은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약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었을 뿐,위안’이라는 이름의 노동이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성과 신체를 혹사 당하는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여전히 ‘위안부’ 생활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84쪽)일 수 밖에 없었다.

 (59쪽)

 

..이웃한 장소에 위안소의 비참은 존재했다. 위안부들과의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군인의 말을 인용했던 센다 또한 이렇게 말한다.

하긴 이런 일은 전쟁에 어느 정도 인간적인 마음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장교가 있는 부대나 주둔지뿐이고, 그 숫자가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부대나 주둔지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닌 듯하다. 보통은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공동변소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런 위안소에서는 여자들은 하루종일 팬티를 벗은 채로 “자, 다음!”, “다음!” 하는 식으로 무표정하게 숫자를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군인들 역시 거칠었다고 한다.(81쪽)

 

7) 동지적 관계는 없다/’동족’이란 일본병사의 시각이다

 

 “동지적 관계”의 1차적 의미는 식민지화되어 <일본인>이 되어야 했던 구조를 지칭한 개념

 군인체험을 한 일본인작가의 소설은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일부 일본인 들에게 :”그들의 조상도 이렇게 썼다” 는 의미로 사용. 후루야마의 소설들은 실체험에 바탕한 이야기.
자료집 참조

”동족”이라는 단어가 일본군인의 말임은 명기. “일본인범주에 들어가게 된 조선인”/국가에 의해 전쟁터에 끌려 온 개인이라는 의미. 동시에, 참혹한 정황도 기술(142-166)

 

후루야마는 “우리가 네이판 마을에 니퍼 하우스(니퍼야자 잎으로 지붕을 얹고 벽을 두른 집-인용자)를 만들고 3주 정도 지나자 조선인 위안부가 열 명쯤 왔다. 그녀들은 모두 사유리니 스즈란이니 하는 꽃이름을 딴 유곽식 일본이름을 갖고 있었다”면서 그가 만난 ‘조선인 위안부’의 말을 이렇게 기록한다.

징용이라고 했어. 나 경상남도에서 밭에 있었거든. 그런데 징용이라고 그러면서 데려가는 거야. 기차를 탔고 배를 탔지. 나, 위안부가 된다는 거 몰랐어.”

여유롭고 느긋한 성품이란 이런 걸 말하는군. 하루에한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었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운이야. 위안부가 된 것도 운이지.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도 운이고. 모두가 다 운이라고.”(「개미의 자유」, 84쪽)

여기에는 속아서 왔다면서도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과 “위안부가 된 것”을 그저 운이 나빴다는 식으로 간주하고 군인을 원망하지 않는 위안부가 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미 식민지가 된 지 오래인 땅에서 자라나 자신을 ‘일본’의 일원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성은 어디까지나 동족으로서의 ‘군인’일 뿐 적국으로서의 ‘일본군’이 아니다. 그녀가 일본군을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불행한 ‘운’을 가진 ‘피해자’로 보면서 공감과 연민을 표할 수 있는 것도 그녀에게 그런 동지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한테 나가 압박은 많이 받았지. 압박은 많이 받았지마는, 내 운명인디. 내가 세상을 잘못 만나고 내 운명이고, 나를 그렇게 한 일본 사람을 나쁘다는 소리는 안 해. 그리고 같은 한국 사람이지마는 한국 사람이 주인이 돼갖구는 얼마나 나를 뚜들겨패는지 몰라. 손님을 안 받을라 한다구. 샅이 아파싸서 죽갔는디. 막 눈물이 절로 나오는 기라. 밥도 못 먹지.(『강제 3』, 225쪽)

위안부 체험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이는 우리 앞에도 있다. 말하자면 똑같은 가혹한 ‘운명’을 겪고도 그 운명에 대한 ‘태도’는 위안부마다 달랐고, 지금도 다르다. 그런 그녀는 일본군이 아닌 업자를 ‘폭행’의 주체로 기억한다.

(75쪽)

조선인 위안부들은 이렇게 살아 있는 군인을 위안했을 뿐 아니라 죽은 군인들을 위로하는 역할도 했다. ‘피묻은 군복’을 빨아 다음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여차하면 함께 싸울 수 있는 훈련까지도 한 이들이 조선인 위안부였다. 그렇게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

(162쪽)

‘조선인 군인’들에게는 ‘조선인 위안부’는 ‘비싸’서 이용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현지 여자는 주로 병정들이 상대”했다는 것은 ‘위안’이라는 행위가 ‘인간의 상품화이자 계급화’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조선인 위안부’가 제국 내에서 놓여 있었던 위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인들에게 차별받는 대상이면서도, 그들은 말이 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비슷하며 같은 ‘동족’으로서 기밀을 지킬 수 있는 존재로서 ‘일본인 위안부’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였다.

(294쪽)
8)위안부의 평균연령을 25세라 했다/미성년자 존재를 경시했다

“ 박유하의 사실인식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다. 박유하는 미국의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이 작성한 <일본인포로심문보고>제49호에 있는,버마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기록을 근거로 평균연령이 25세라고 주장한다…..20명의 징집당시 평균연령은 21.15세이며…..(중략)더욱이 포로가 되었던 당시의 평균 연령도 23.15세며 ‘25세’가 아니다.”

“박유하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정, 67-68)

 

전체평균이 25세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 중 하나로 제시
<미성년-20세 이하>가 아니라 대사관 앞 소녀로 상징되는 소녀. 14-5세?

동시에 소녀존재도 지적

 

실제로는 위안부들은, “내가 나이가 제일 적었지. 거 간 중에. 다른 여자들은 다 스무 살 넘었어”(『강제 5』, 35쪽)라거나 “우리 있는 데는 한 스무 명 남더라구. 그 사람들은 나이가 조금 많고 스무 살 다 넘고 전라도서도 오고 경상도서도 왔더만”(87쪽)이라고 말한다. 증언한 본인 말고는 “스무 살 다 넘” 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우리 앞에 있는 위안부들의 당시 나이는 오히려 ‘예외’였다.

 

거기 위안죠(위안소)가 많아. 많으니께 공치는 사람도 있더라구. 거기 가면 다 남자 상대만 한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이 아니더라구. 거기 여자들하고 다 얘기 해봤지. (중략) 나이가 다 고만고만해. 한 스무 살, 스물한 살, 최고 많은 게 스물다 섯 살. 서른 살 최고 많더라고.(『강제 3』, 96쪽)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8월에, 미얀마(버마) 미트키나 함락 이후의 소탕작전에서 미군의 포로로 수용되어 전쟁정보국OWI의 심문을 받은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004, 296쪽에서 재인용)였다. 어느 조 선인 출신 일본군도 위안부들이 ‘스무 살, 스물한 살’이었던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아 ‘누님’으로 부르며 지냈다고 증언하면서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정신대가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2011).

 

(조선에서의 모집이 시작된 것은 1942년 5월 초, 업자들은 전방의 병원에서 부상당한 병사의 붕대를 감아주고 사기를 북돋아주자는 등의 말로 여성 한 사람당 200~300엔의 돈을 건네주고 데려갔다. 이런 방식으로 300명 가까운 여성이 1942년 8월 20일, 랑군에 도착, 그곳에서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전방으로 보내졌다. 포로가 된 여성은 중국 국경에 가까운 미트키나에 있었던 ‘마루야마 클럽’이라고 불렸던 위안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세. 자신들의 직업이 싫다고 말했고, 일이나 자신의 가족에 관해서는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96쪽에서 재인용)

(83쪽)

 

소녀관련부분 기술

물론 어린 소녀가 위안부가 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어린 소녀가 위안소에 가게 되었을 때는 “어떤 군인이 몇 살이냐고 해서 열 네 살이라고 대답했더니 ‘젖이나 더 먹고 오지, 부모형제 보고 싶어서 어떻 게 왔느냐’”(『강제 2』, 51쪽)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나이가 결코 평균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위안부상이 소녀로 정착된 것(위안부를 다룬 한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소녀 이야기>인 것도 그런 의식을 반영한다)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탓도 있지만 앞서의 20만 명 설과 마찬가지로 그런 상상이 우리의 피해의식을 키워주고 유지하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증언한 ‘위안부’들의 대부분이 십대에 강간당하거나 위안부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니 일본군이 ‘어린 소녀까지도’ 상대했다는 것은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녀 위안부’가 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위안부들 중에 어린 소녀가 있게 된 것은 ‘일본군’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강제로 끌어간’ 유괴범들, 혹은 한 동네에 살면서 소녀들이 있는 집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우리 안의 협력자들 때문이었다. 위안부가 된 소녀들을 가족이나 이웃으로서 보호하기 보다는 공부라는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해서 공동체 바깥으로 내친 우리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50-52쪽)

일제 시대에 어린 여성들을 꼬여 팔아넘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신문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1월 11일자 『매일신보』의 기사.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최재현(37)과 그의 처 이성녀(24)는 수일 전 서로 공모하여 동면 동리에 있는 김인섭의 둘째딸 양근(12)을 유인해다가 군산부 개복정 2정목 지나支那 요리업자 장우경에게 몸값 50원을 받고 작부로 팔고자 계약서를 작성하던 중 경찰에 발각되어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55쪽에서 재인용)

첫 번째 증언에서 짐차에 태워 간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동네 이장이었다. 세 번째 증언을 한 소녀가 여기저기 전전하다 공장으로 가는 줄 알고 ‘위안부’가 된 나이는 열다섯 살이다. 이처럼, 어린 소녀들이 ‘위안부’가 된 경우는 대부분 주변 사람이 속여 데려가거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보호공간이 되지 못한 경우다.

(53쪽)

 

소녀상은 분명 성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대사관 앞에 서 있는 것은 위안부가 된 이후의 실제 ‘위안부’가 아니라 위안부가 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혹은 앞에서 살펴본 위안부의 평균 연령이 25세였다는 자료를 참고한다면, 실제로 존재한 대다수의 성인 위안부가 아니라 예외적인 존재였던 위안부만을 대표하는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대사관 앞 소녀상이 실제 위안부를 상징하는 상일 수는 없다.( 정창화감독<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참조)

(204쪽)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이 직접 ‘강제로 끌어간’ 존재이고 그들을 ‘감금’한 것도 일본군이고 모든 군인은 포악하고 모든 위안부는 ‘순진한 어린 소녀’로만 간주하는 일은 그런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위안부(이른바 ‘매춘부’를 포함)들을 배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피해자성을 희석시키고 싶지 않은 피해자로서의 욕망이 시키는 일이지만, 표면적인 모습이 ‘완벽한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들 역시 피해자이고 희생자였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자란 한 사람의 조선인 위안부가 그 두 얼굴을 갖는 것은 ‘식민지화’된 순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식민지화되었던 우리 자신, 우리의 과거와 화해할 수가 없다

(295쪽)

 

9) 위안부문제를 한국정부가 포기했다

박유하가 지적한 것은 위안부문제가 아니라 개인청구권

 

 

10)조선인을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민족의 거짓말론은 일본군뿐 아니라 업자도 면책하며 말단의 민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담론인 것이다”(85)

식민지의 거짓말”의 방점은  식민지. 해당부분은 제대로 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들의 슬픔을 강조한 부분(일본판에만 있는 이유) –초보적 오독

 

11)위안부가 “성노예”임을 부정했다/일본이 바라는 위안부이미지를 써서 일본에 받아들여졌다

 

‘조선인 위안부’는 분명, 식민지가 된 나라의 백성으로서 일본의 국민동원과 모집을 구조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노예였다. 조선인으로서의 국가 주권을 가졌다면 누릴 수 있었을 정신적인 ‘자유’와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에서도 분명 ‘노예’였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노예’가 ‘감금해놓고 언제든 군인들이 무상으로 성을 착취했다’는 식의 것인 한 ‘조선인 위안부’는 그런 성노예와는 다른 존재다. 그런 상황에 노출된 이들이 설사 있었다 해도, 그것이 처음부터 ‘위안부’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성노예’란 성적인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말이다. 그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런 측면에만 주목하고 ‘피해자’의 틀에서 벗어나는 기억을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全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위안부들이 자신의 기억의주인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기억에 의해서만 존재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우리 또한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주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117쪽)

 

2012년에 ‘위안부’ 대신 ‘성노예’라는 단어를 공식적인 명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당사자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자신의 위안부 생활이 ‘성노예’로 말해지는 데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해왔 으면서도 정작 그 명칭이 정착되는 데에는 반대한 것은 의식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이름이 자신들의 ‘과거’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노예’라는 호칭은 분명 ‘위안부’를 나타내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위안부’의 전부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성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그네들이 애써 가지려 했던 인간으로서의 긍지의 한 자락까지도 부정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131쪽)

 

그동안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지원자들은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해왔다. 물론 위안부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거부할 수 없고 도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종속적이었다. 또 그녀들의 선택이 설사 표면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였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구조적 강제’ 속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녀들의 처지는 노예적이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노예’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위안부’의 ‘자유’를 억압한 주체는 ‘일본’이나 ‘군’만은 아니다. 그녀들을 인신 매매 등의 수단을 통해 모집하고 이동시키고 군에 넘겼으며 ‘위안부’들의 노동의 대가인 군표를 가로채는 형태로 관리했던 업자와 포주들이야말로 그녀들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구속한 주체였다. ‘군인’ 이상으로 오히려 더 빈번하게, 더 가혹하게 ‘위안부’의 자유를 구속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업주와 포주들이었다. 임금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상황을 ‘노예’적인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녀들의 ‘주인’은 군인이 아니라 ‘업자’이고 포주였다. 설사 그들에게 군인 이상의 권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위안부’의 주인이 ‘업자’인 건 분명하다.

(135-136쪽)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는 우선 출신지가 ‘본국’인지 ‘식민지’인지 ‘적국’인지 ‘점령지’인지에 따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발성’ 속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강제’가 존재했고, ‘매춘부’라는 외견 속에 ‘성노예’라는 측면이 존재했다.

물론 역으로 강제성 속에 자발성이 있었고 성노예의 이면에 매춘부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국적에 따라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랐다.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 해결은 그 모든 상황의 차이를 보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143쪽)

 

 

 

 

 

참고자료

서문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2013/7)

 

위안부 문제는 왜 1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나는 8년 전 에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뿌리와이파리, 2005)라는 책에서의 일이다. 나는 또 “일본이 주변국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있다면, 혹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면, 거기에는 이제까지의 비판의 형식과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데에도 원인이 없지 않다”라고도 썼다. 그리고 한일간의 문제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복잡”한 문제이고 그런 “복잡함”을 보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문제들을 조금 깊이 볼 수 있다면 분노와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어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면 “그때 비로소 화해를 위한 논의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나도록, 그때 바랐던 “생산적인 논의”는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한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일관계를 둘러싼 상황은 그동안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안의 견고한 기억들”에 “화해를 지향하는 균열”을 내보려 했던 8년 전의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그 책이나 또 다른 한일관계 관련 책들(『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 공편저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등)에서 내가 중점을 두었던 것은 민족주의 비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민족주의’ 비판만으로는 한일 간의 갈등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 책의 시도가 실패한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일 간의 갈등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책은, 세월이 흘러 이제는 ‘왜 2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는지’ 를 물어야 하게 된, 그런 ‘복잡한 구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 책이다.

무엇보다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상황은 당시보다 훨씬 나빠졌다. 그리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위안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위안부’는 실은 결코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우리는 ‘위안부’에 관해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려왔다.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문제가 있을 때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야만 상황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정보에는 때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20년은 그중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취사 선택해서 들어왔고 그에 바탕해 위안부에 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온 세월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 편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아프기까지 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편함과 아픔을 공유하려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그런 불편함과 아픔을 거치지 않고서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도 완전한 군인이지”(『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 246쪽)라고 말하는 위안부의 목소리를 듣고, 그 말이 상징하는 ‘식민지의 모순’을 직시해야 하는, 아프기까지 한 불편함.

 

불편한 일을 굳이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그 모습을 외면하는 사이에, ‘식민지배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그 모습들을 왜곡해서 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나선 이들의 대부분은 극도의 ‘혐한’감정을 갖고 있는데, 그들의 혐한감정은 특히 이 10여 년 동안 서서히 커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혐한은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 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분이 크다. 그리고 문제는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런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이 일본 사회에 급격히 늘어나는 중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혐한파뿐 아니라 한국을 잘 알고 좋아했던 이들조차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한국과 소통하기 가 힘들다고 느낀다.”(지한파 교수) 그동안 일본에게 한국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의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알고 보니 짝사랑을 한 셈이다. 이제 그만 그런 감정을 버리고 한국을 보통 나라로 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외교관) 나는 한국을 좋아하는데, 한국인들은 거짓말까지 하면서 일본을 욕하고 언제까지고 일본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이젠 한국이 싫어지려고 하는데, 어쩌면 좋은가?”(대학생)

 

말하자면 한일 양국은 20여 년의 역사 문제 갈등을 거치면서 심각한 소통부재 상황에 빠져버렸다. 외교채널조차 가동되지 못한 지 일년이 넘었고, 현재 두 나라 국민은 상대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갈등의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고, 그들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위안부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미 8년 전의 책에서 나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나름대로 ‘사죄와 보상’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일부 위안부들이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지원단체는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 우리가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 판단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위안부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국가 문제가 된 이상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지원단체나 소수의 연구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제까지의 20년 동안에는 오로지 소수의 관계자들의 생각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태도를 결정지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소수’라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들의 판단이 전부 옳거나 진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안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지원단체의 의견에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현재의 방식으로는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마도 한국의 교과서는 ‘결국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아무런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고 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일 수가 없다. 그런 이상, 나는 다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저 좋은 한일관계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동안 양국의 이해를 위해, 나아가 동아시아의 상호 신뢰회복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 온 이들이 쌓아올린 신뢰의 탑이 적대와 대립의 언어만이 난무 하는 가운데 무너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갈등을 조장하는 담론들이 마음 여린 이들을 상처 입히고, 마음을 닫도록 만드는 것을 팔짱만 끼고 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쓰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문제가 단지 ‘해결’을 기다리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한국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일본’만의 특수한 일로 생각하는 사고는 그런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평화’를 지향하는 현재의 운동이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체제 ― 정영환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에 답한다 #2

역사비평 2015 봄호(통권 제112호) 반론 본문 다운로드

1. 오독과 곡해―정영환의 “방법”

재일교포 학자 정영환이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 대한 비판을 『역사비평』 111호에 실었다. 우선 이 비판의 당위성 여부에 대해 말하기 전에 비판 자체에 유감을 표한다. 왜냐하면, 나는 현재 이 책의 저자로서 고발당한 상태이고, 그런 한 모든 비판은 집필자의 의사 여부 를 떠나 직간접으로 고발에 가담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5년 8월에 제출된 원고 측 문서에는 정영환의 비판논지가 차용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재승의 서평도 통째로 근거자료로 제출되어 있었다. 가처분재판 기간 동안 법원에 제출된 원고 측 문서에는 윤명숙과 한혜인의 논지가 구체적으로 인용되어 있었다. 2014년 6월에 제출된 최초의 고발장에는 내가 10년 전에 낸 책인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비판논지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나에 대한 비판에 참여한 학자/지식인들이 이러한 정황을 아는지 모르는 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비판을 하고 싶다면 소송을 기각하라는 목소리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법정으로 보내진 학술서’에 대해 취해야 했던, ‘학자’로서의 할 일이 아니었을까.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심지어 『한겨레신문』에 인용되어 나에 대한 여론 의 비판에 기여했음에도(002) 정영환의 비판에 그동안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비판이 오독과 곡해로 가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가 나의 것이라고 말했던 “자의적 인용”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결론이 앞서는 적대를 기반에 깔고 있어, 사실 읽는 일 자체가 우울했다. 따라서, 구체적인 반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나의 입장과 논지를 확인해두도록 하겠다.

1)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국가의 책임에 대한 입장

정영환은 내가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482~483쪽, 이하 ‘쪽’은 생략)한다면서 “식민주의 비판이 없”(492)기에 “식민지배 책임을 묻는 소리를 부정하려고하는 ‘욕망’에 이 책은 잘 호응”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역사수정주의자들과의 은밀한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491)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나는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부정한 것은 ‘법적’ 책임일 뿐이고, 당연히 일본국가의 책임을 물었다. 일본어판에는 “국회결의”가필요하다고 쓰기도 했다. 그런데도 정영환은 그런 부분에는 침묵할 뿐 아니라 “역사수정주의자”라는, 한국에서 비판받고 있는 존재를 호명해 그들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식의 ‘왜곡’을 자신의 비판 “방법”으로 사용한 다.(003)

정영환의 말대로라면 이 책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들―“이 문제제기에 일본 측이 어떻게 대답해 나갈 것인지의 물음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스기타 아츠시, 서평, 『아사히신문』 2014. 12. 7), “어디서나 다 있었던 일이라고 일본이 강변하지 않고 제국주의 팽창을 넘어서는 사상을 새롭게 제기할 수 있다면 세계사적 의의는 크지 않은가? [라는 박유하의 물음에] 나는 반대할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다”(야마다 다카오, 칼럼, 『마이니치신문』 2014. 12. 21), “나는 이 책을 읽고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아픈 마음이 한층 깊어졌을 뿐이다”(와카미야 요시후미, 칼럼, 『동아일보』 2014. 7. 31)은 다 잘못 읽은 서평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심지어 어떤 우파는 나 의 책이 전쟁책임의 틀에서만 다루어졌던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책임으로 물으려 한다면서 “일본 좌파보다 무서운 책”이라거나 “고루한 지배책임론을 들고 나왔다”며 비난하기까지 했다.

정영환은 같은 방식으로 내가 “한일합방을 긍정”했다고 쓴다. 그러나 나 는 한일합방 무효론에 회의를 표하면서도 “물론 현재의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지배에 대한 책임을 정말로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을 패전이후국가가정식으로표현한일이없었다는인식이혹일본정부에생 긴다면, ‘법적’으로는 끝난 한일협정이라 할지라도 재고의 여지는 있을 것이 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국내외적 혼란은 그 재고가 원천적 으로 배제된 결과이기도 하다”(『화해를 위해서』, 235)라고 썼다. 말하자면 나는 한 일합방도 한일협정도 “긍정”하지 않았다.

나는 위안부를 만든 것은 근대국민국가의 남성주의, 가부장주의, 제국주 의의 여성/민족/계급/매춘차별의식이므로 일본은 그런 근대국가의 시스템 문제였음을 인식하고 위안부에 대해 사죄/보상을 하는 것이 옳다고 썼다. 그런데도 정영환은 ‘박유하는 한일합방을 긍정하고 1965년체재를 수호하고 있 으며 위안부 할머니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학자’에 의한 이러한 왜곡을 범죄수준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영환의 비판 “방법”은 서경식이나 김부자 등 다른 재일교포들의 나에 대한 비판방식과 지극히 닮아 있다. 그들 역시 『화해를 위해서』의 반은 일본 비판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고, 나를 ‘우익에 친화적인 역사수정주의자’라는 식으로 말해왔다.

2) 한일협정에 대한 입장

정영환은 내가 “1965년체제의 수호를 주장”(492)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재협상은무리라는 생각이 곧 ‘수호’가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일본을 향해서 쓴 부분에서 한일협정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고 썼다. 정영환이 말하는 것 같은 “수호”는 커녕 그 체제에 문제가 있었다고 분 명히 지적했다. 한국 정부가 청구권을 없애버린 것을 지적한 것은, 1965체제 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의식은 수반되 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방법에 대해

정영환과 달리, 비판하고 싶을수록 자신도 돌이켜보자는 것이 나의 “방 법”이다. 역사학자나 법학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일 수 있지만, 문제 자체 이상으로 양국 ‘갈등’의 원인과 해소에 관심이 큰 연구자로서 필연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정영환은 이 책의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이 다른 것이 무언가 음험한 “의도”가 있어서인 것처럼 말하지만, 이 책이 대립하는 양국 국민들을 향해 가능한 한 사실에 근접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에 중심을 둔 책인 이상, 일본어판이 일본어 독자를 의식하며 ‘다시’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 시시각각 악화되는 한일관계를 바라보며 가능한 한 빨리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던 한국어판에는 당연히 거친 곳이 많았다. 따라서 일본어판을 쓰게 되었을 때 그런 곳들이 수정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문제’, ‘일본의 문제’를 따로 볼 수 있도록 구성을 바꾼 것도 그런 맥락에서의 일일 뿐이다.

2. “방법” 비판에 대해서

1) 빗나간 잣대

정영환은 내 책이 개념을 “정의”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이 책을 학술서 형태로 내지 않은 것은 일반독자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고, 일반 독자들은 아무도 그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 책이 정영환에게 “읽기 쉬운 책이 아니”(474)게 된 것은 개념을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의 방법과 내용이 정영환에게 낯선 것이 기 때문일 것이다.

2) 폄하

정영환은 내가 위안부의 차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문제시하면서 “차이가 있었다는 주장 자체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474)고 “수많은 연구가 일본군이 점한 각 지역의 위안부 징집이나 성폭력 문제에 나타나는 특징을 논한 바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포지션의 유사성(물론 그들 간의 차별에 대해서도 이미 오래 전에 지적했다)을 지적하면서 대일 본제국에 포섭된 여성들과 그 이외의 지역 여성들의 “차이”를 지적한 연구를 알지 못한다. 정영환의 “방법”은, 나의 책이 ‘매춘’에 언급한 점을 들어 실은 우익이 일찍이 한 이야기라고 폄훼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하지만 나의 시도는 그저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향해 “매춘”의 의미를 재규정하는 데 있었다

3) “방법” 이해의 미숙

정영환은 조선인 위안부의 “정신적 위안자” 역할에 대한 나의 지적이 “비약”이자 “추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우선 증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마음 여부 이전에 조선인 위안부가 그런 틀 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국방부인회’의 띠를 두르고 환영/환송회에 참가한 이들이 설사 내심 그 역할을 부정하고 싶어했다 하더라도 그런 표면적 상황에 대한 해석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근거 없는 “추측”은 물론 배제되어야 하지만, 모든 학문은 주어진 자료를 통해 ‘상상’한 ‘가설’을 구축하는 작업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나는 모든 것을 증언과 자료에 기초했다. 책에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들도 곧 따로 정리해 발표할 생각이다. “동지”라는 단어를 쓴 것도 우선은 제국일본에 동원되어 ‘일본’인으로 존재해야 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정영환은 군인에 관한 위안부의 “추억”을 논한 부분을 들어 “추억”에 대한 ‘해석’을 “먼 거리가 있다”(475)며 비판한다. 그러나 학자의 작업은 ‘개별적인 예’들을 분석하고 총체적인 구조를 보는 일이다. 내가 시도한 작업은 “증언의 고유성이 경시”되기는 커녕 그동안 묻혔던 한 사람 한 사람 증언의 “고유성을 중시”하며 결과를 도출해내는 일이었다. ‘대상의 의미’를 묻는 작업에 자신이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다른 이의 작업을 폄훼해서는 안 될 것이 다.

같은 문맥에서 정영환은 “일본인 남성”의, 그것도 “소설” 사용은 “방법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475)고도 말한다. 이러한 비판은 일본인 남성의 소설은 그 존재 자체가 일본에 유리한 존재일 것처럼 생각하는 편견이 만드는 것이지만, 나는 일본이 위안부를 어떻게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에서 소설을 사용했다. 위안부들의 참혹한 생활이, 다름 아닌 위안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군인들, 후에 작가가 된 이들의 작품 속에 많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인들을 향해 자신들의 조상이 쓴 이야기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증언에 힘을 실리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사용했을 뿐이다. 정영환은 역사 연구자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설” 경시 태도를 드러내고 있지만, 소설이, 허구의 형태를 빌려 때로 진실 이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다는 것은 상식이기도 하다.

정영환은 자신의 정황을 “운명”이라 말한 위안부를 내가 평가한 것을 비판하지만, 위안부의 증언에 대한 평가 역시 “고유성을 중시”하는 일이다. “운명”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정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내가 평가한 것은, 세 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에서 긍정적인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가치관이 시키는 그러한 “평가”가 부정되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와 반대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 위안부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행위와 정반대”(476) 가 되는 건 아니다. 학자라면 오히려, 증언에 대한 공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여러 정황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004) 더구나 거짓증언까지도 묵인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005) 그런 상황에 대한 묵인은 오히려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무엇보다, 내가 “운명”이라 말하는 선택을 평가한 것은 그저, 그렇게 말하는 위안부도 존재한다는 사실, 그러나 그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한 이의 목소리를 전한 것도 같은 이유다.(006) 나는 ‘다른’ 목소리를 절대화하지 않았고, 정영환의 말처럼 그저 “귀 기울였을” 뿐이다. 그런 목소리가 그동안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 억압이 이들에게도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영환이 말하는 바 “증언의 찬탈”은 오히려, 정영환과 같은 태도와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에게서 일어난다는 것이 내가 이 책에서 지적한 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방법”이 “윤리와 대상과의 긴장관계를 놓친 방법”이며 “역 사를 쓰는 방식으로는 적절하지 않다”(476)는 비판은 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비판일뿐이다.

3. 『화해를 위해서』 비판에 대해서

정영환은 10년전의 나의 책 『화해를 위해서』도 비판하는데, 『제국의 위안부』가 “당시 거론된 문제점을 기본적으로 계승”(477)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도 앞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1) 도덕성 공격의 문제

정영환은 김부자를 인용하면서 내가 기존 연구자들의 글을 두고 “정반대의 인용”(477)을 했다고 말한다. 이는 정영환이 나에게 논지뿐 아니라 도덕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그런데 정영환이 모르는 것이 있다. 모든 텍스트는 꼭 그 글을 쓴 저자의 의도에 준해 인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글은 저자의 전체 의도와는 다른 부분도 얼마든지 인용될 수 있다. 정영환 자신이 나의 책 을 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읽고 있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왜곡이 없어야 한다는 점인데 나는 왜곡하지 않았다.

나는 요시미 요시아키와 같은 학자가 “‘강제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책임을 추궁하는 이른바 ‘양심적인’ 학자조차 ‘물리적 강제성은 부정하니 그 부분은 신뢰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이후 군인이 끌고 갔다는 식의 강제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지면서 논의가 ‘인신매매’로 옮겨 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는 ‘구조적 강제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은데 ‘구조적 강제성’이라는 개념은 바로 내가 『화해를 위해서』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었다.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당시의 일본이 군대를 위한 조직을 발상했다는 점에서는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개정판, 69)라고 나는 말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책을 결코 인용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이 문제를 식민지지배 문제로 봐야 한다는 나의 제기까지 인용 없이 사용하는 이들까지 생기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시 쓸 생각이다.

2015년 5월 미국 역사학자들의 성명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제 ‘군인이 끌고 간 강제연행’은 세계는 물론 지원단체조차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강제연행’으로만 믿었던 시점에서 강제연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강제성’ 여부로 부정적인 이들이 이 문제에서의 책임을 희석하는 것을 막고자 10년 전에 ‘구조적 강제성’을 말했다. 또 『제국의 위안부』에서 ‘강제성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썼다.

2) 오독과 왜곡

정영환은 내가 위안부가 “일반여성을 위한 희생양”(『화해를 위해서』, 87)이었다고 쓴 부분을 지목해 마치 내가 “일반여성의 보호를 목적”(김부자)으로 하는 것처럼 비난한다(478). 그러나 ‘일본군을 위한 제도’라는 사실과 ‘위안부가 일반여성을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인식은 대치되지 않는다.

역사 연구자인 정영환이 텍스트 분석에 대해 문학 연구자만큼의 긴장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비판’의 문맥이라면, 더구나 소송을 당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비판이라면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해야 했다. 심지어 정영환은 일반여성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나의 반박마저 비난하면서 ‘적국의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냐는(김부자) 오독에 더해 “일본군의 폭력 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전제”(478)한, “전쟁터의 일반여성이 자기대신 강간당한 위안부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라고까지 말한다.

내가 일반여성의 문제를 말한 것은 ‘계급’의 시점에서다. 즉 “주인댁 배운 여자”(『화해를 위해서』, 88) 대신 위안부로 나갔던 위안부의 존재에 주목했던 것이고, 그녀들을 내보내고 후방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한/일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후예들에게도 책임의식을 촉구하기 위한 문맥이었다. 물론 그 기반에는 나 자신의 책임의식이 존재한다.

3) 총체적 몰이해

정영환은 서경식의 비판에 의존하면서 아시아여성기금과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을 비판하지만, 서경식의 비판은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구식민지종 주국들의 “공동방어선”(007)을 일본 리버럴지식인들의 심성으로 등치시키려면 구체적인 준거를 대야 했다.

그리고 나는 한일갈등을 정대협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일본 측도 분명히 비판했다. 그럼에도 정영환을 비롯한 비판자들은 내가 ‘가해자를 비판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규정했고 이후 그 인식은 확산되었다.

정영환은 내가 사용한 “배상”이라는 단어를 문제시하지만 정대협은 “배상”에 국가의 법적책임의 의미를, “보상”에 의무가 아닌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정영환이 지적하는 “쓰구나이금”이란 책에도 썼듯이 “속죄금”에 가까운 뉘앙스의 단어다. 물론 일본은 이 단어에 “배상”이라는 의미를 담지 않았고, 나 역시 정대협이 사용하는 의미에 준해 “배상”이라는 의미를 피해 “보상”이라고 말했다. 이는 기금을 그저 “위로금”으로 간주한 이들에 대한 비판의 문맥에서였다. “쓰구나이금이 일본의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한 보상이 아니”(479)라는데는 나 역시 이견이 없다. 그런데도 정영환 은 잘못된 전제로 접근하면서 내가 사용한 “보상”이라는 단어가 “쟁점을 해소”(480)한다고 비난한다.

참고로 언급해두자면, 일본 정부는 국고금을 직접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처음엔 간접지원하기로 했던 300만엔마저 결국 현금으로 지급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6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은 실상은 ‘일본국가의 국고금’도 받은 것이 된다. 여전히 “배상”은 아니지만 기금이 그저 “민간기금”이라는 이해도 수정되어야 한다.

4. 정영환의 ‘한일협정’ 이해의 오류

1) 위안부문제에 관한 책임에 대해

정영환은 내가 위안부 문제의 “그 책임을 일본국가에 물을 수 없다”(480)고 한 것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나는 “법적 책임을 물으려면 먼저 업자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을 뿐, 일본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정황을 감안해 판단하면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한 배상 요구는 무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업자’등 중간자들의 존재에 주목하는 이유는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야말로 가혹한 폭력과 강제노동의 주체이고 그로 인한 이득을 취했기 때문이다. 유괴나 사기 등은 당시에도 처벌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안부의 ‘미 움’이 이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공식적인 지휘명령계통을 통해 위안소 설치를 지시’하였다는 요시미의 주장을 대체적으로 지지하지만, 여성의 ‘징집을 명령한 것이었다’는 규정이 물리적 강제연행을 상상케 하고 업자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인 이상 좀 더 섬세한 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병참 부속시설”이라는 나가이의 지적 역시 지지하지만, 기존 유곽을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보는 이유는 일본의 책임을 희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원자들이 말하는 “진실규명”을 위해서다.

정영환의 나에 대한 비판이 순수한 의문을 벗어난 곡해임은, 수요를 만든것자체, 즉 전쟁을한 것 자체를 비판하는 나의 글을 인용하면서 “위의 인용은 어떻게 보면 공급이 따라갈 정도였다면 군위안소제도엔 문제가 없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481)다고 하는 지적에 나타난다. 심지어 “업자의 일탈만 문제 삼는다면 군위안소라는 제도 자체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것”(481)이라고 쓰는 정영환의 “비약”에는 그저 놀랄 뿐이다.

나는 “군에 의한 위안소 설치와 여성의 징집, 공권력을 통한 연행”(482)을 같이 놓고 “예외적인 일”로 기술하지 않았다. 내가 예외적인 일로 기술한 것 은 한반도에서의 “공권력을 통한 연행”뿐이다. 그럼에도 정영환은 이런 식으로 요약해 내가 ‘군의 위안소 설치’마저 예외적인 일로 간주한 것처럼 보이도록 시도한다.

2) 헌재판결에 관해

헌재 판결에 대해서, 나는 분명 ‘청구인들의 배상청구권’에 대해 회의적이다. 하지만 이는 그러한 형식―재판에 의거한 청구권 요구라는 방식과 그 효과에 대한 회의였을 뿐 보상 자체를 반대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정영환은 “청구권 자체를 부인하는 입장”이라고 오해하도록 만드는 정리를 한다.

또 나는 지원단체가 의거해온 ‘부인 및 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을 기반으로 해서는 “위안부제도를 위법으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손해배상을 물릴 수 없다는 아이타니의 지적에 공감했을 뿐,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 아니다. 아이타니의 의도가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부정’한 것은 아니어도, 그러한 방법의 틀로는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 논문임은 분명하고, 나는 그 부분에 주목했을 뿐이다. “개인의 청구권을 부정한 연구인 것처럼 인용”했다는 지적 역시 단순한 오독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일 뿐 이다. 정영환은 늘 형식부정을 내용부정으로 등치시킨다. 심지어 이제 지원 단체 스스로가 “법적 책임” 주장을 변경했다는 것도 정영환은 참고해야 할 것이다.(008)

3) 한일회담에 대해

정영환은 내가 김창록의 논문도 “반대로 인용”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김창록이 인용한 여러 회담문안을 정영환의 지적과는 다른 문맥에서 사용했다. 그러니 이 역시 근거없는 비난이다.

김창록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에 논의된 것은 ‘피징용자의 미수금’이었고, 정영환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의 위안부에 관한 논의는 오로지 ‘미수금’만이 문제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위안부는 “군속”이었다고 말하는 자료도 나왔으니(009) 나의 논지에 의거한다면 일본이 위안부를 “군속”으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인 일본군조차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이 존 재했지만 위안부들에게는 그런 ‘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인식은 위안부에 관한 ‘보상’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정영환은 내가 한일협정에서 일본이 지급한 금액을 ‘전후보상’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나는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의거한 회담이니 연합국과의 틀 안에서 정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제국후처리’가 아닌 ‘전후처리’에 해당한다고 했을 뿐이다.

정영환은 487쪽에서 488쪽의 부분에서 나의 책을 길게 인용하면서도, 미국이 일본인들의 한반도 재산을 접수해 한국에 불하하고, 그것으로 외지에서 일본인을 귀환시켜준 비용을 상쇄시켰다는 부분을 빼고 인용한다. 그러나 이 부분이야말로 내가 일본에 청구권을 청구하는 것이 어렵겠다고 이해 하게 된 부분이다. 국가가 상쇄시켜버린 ‘개인의 청구권’을 다시 허용한다면 일본인들 역시 한반도에 남긴 자산의 청구가 가능해진다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때의 보상이 ‘전쟁’후처리일 뿐 ‘식민지배’후처리가 아니라고 말해 65년 보상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했다. 그럼에도 정영환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내가 1965년체제를 “수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한일협정금액을 “전쟁에 대한 배상금”이라 하지 않았다. ‘전후처리에 따른 보상’이라 했다. 또한 장박진의 연구를 인용한 것은 냉전체제가 영 향을 끼쳤다는 부분에서다. “맥락과 전혀 다르게 문헌을 인용”하지 않았고, 장박진이 “한국 정부에 추궁할 의사가 없었다고 비판”한 문맥을 무시하지 않았다.

정영환이 아직 모르는 것은 한국 정부가 이때 식민지배에 관한 ‘정치적 청산’마저 해버렸다는 점이다.(010) 아사노 논문은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에 나왔다. 나는 책에서 일본을 향해서 ‘식민지배보상’이 아니었으니 보상이 남아 있다고 썼는데, 아사노 논문을 읽고 오히려 충격을 받았다. 한일협정을 둘러싼 논의는 앞으로 이제 아사노 논문을 도외시하고는 이야기될 수 없을 것이다.

5. 생산적인 담론을 위해

정영환은 이제 서경식이나 다카하시 데츠야조차 비판한다. 다카하시는 리버럴 지식인 중에도 드러나게 ‘반성적인’ 시각과 태도를 견지해온 인물이고 서경식과 공동작업을 많이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이들까지 비판하는 정영환에게 첫 답변에서 물었던 말을 다시 묻고 싶다.

정영환의 비판은 어디를 지향하는가?

분명한 건 정영환의 “방법”은 일본사회를 변화시키기는 커녕 사죄하는 마음을 가졌던 이들마저 등돌리게 만들어 재일교포사회를 더 힘들게 만들 것 이라는 점이다. 물론 일본사회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정영환의 비판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나에 대한 비판방식이 증명하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의도를 찾아내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소모 하기보다 생산적인 담론 생산에 힘을 써주기를 바란다.

  1. 001  매수가 충분치 않아 이 글에서는 나의 책 인용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 글의 논지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은 『제국의 위안부』 (2015년 6월에 일부삭제판이 간행되었다) 와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2005 초판, 2015 개정판)를 참조 해주기 바란다. (도서 다운로드 페이지로 이동)
    이에 앞서는 서론격 글을 2015년 8월 말경에 박유하의 페이스북 <노트>등에 게재할 예정이다 www.facebook.com/parkyuha
  2. 002  이 반론을 집필 중이던 2015년 8월 13일에 『한겨레신문』이 정영환/박노자의 대담을 싣고 다시 한 번 나를 비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영환의 나에 대한 비판의 문맥 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판전사(前史)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주1의 글을 참조바란다.
  3. 003  정영환이 블로그에 연재한 나에 대한 비판의 제목은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이다. “방법”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내게 내용 이전의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 학자로 서의 자격과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 하는 전략이 뚜렷하다.
  4. 004  朴裕河, 「あいだに立つとはどういうことかー慰安婦問題をめぐる90年代の思想と運動を問い直 す」, 『インパクション』 171호, 2009. 11.
  5. 005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이 20여 년간 여러 번 변했다. 최근 과거 증언집에 대한 불 만을 토로했는데 이는 증언의 불일치를 지적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http://www. 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466
  6. 006  박유하, 「위안부 문제,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심포지엄 『위안부 문제, 제3의 목 소리』 자료집, 2014. 4. 29. 『제국의 위안부』 삭제판에 수록.
  7. 007  徐京植, 『植民地主義の暴力』, 高文研, 2010, 70쪽.
  8. 008  『한겨레신문』 2015. 4. 23.
  9. 009  波止場清, 「慰安婦は軍属ー辻政信が明言」, 『허핑톤 포스트』 2015. 8. 3. 일본육군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가 『潜行三千里』라는 책에서 위안부는 “신분도 군속”이라고 쓴사실이 지적된 바 있다.
  10. 010  아사노 도요미, 「‘국민감정’과 ‘국민사’의 충돌. 봉인, 해제의 궤적―보편적 정의의모색과 뒷받침되어야 할 공통의 기억을 둘러싸고」, 근간 수록 예정.
출처: 역사비평 2015 봄호(통권 112호)

비판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정영환의 <제국의 위안부>비판에 답한다 #1

정영환이 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다 읽진 않았어도 그가 일본어블로그에 연재한 비판이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읽기도 했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았던 건 첫째로는 시간적여유가 없었고, 두 번 째로는 그의 비판이 악의적인 예단이 앞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월에 나의 책에 대한 가처분 판결이 났을 때 한겨레신문이 정영환의 글을 나에 대한 비판에 사용했고 이제 <역사비평>이라는 한국의 주요잡지에 게재되기에 이르렀기에 뒤늦게나마 반론을 쓰기로 한다.

그런데 지면을 30매 밖에 받지 못했다. 불과 30매에 그의 비판에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또 다른 젊은 학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역사문제연구>33호에 <집담회>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했는데, 이에 대한 반론은 100매가 허용되었으므로 논지에 관한 구체적인 반론은 그 지면을 활용하기로 하겠다.


민족과 젠더

나는 그를, 내가 가장 관심 두었고 또 발제도 했던 일본의 한 연구모임에서 2000년대 초반에 만났다. 그 모임은 일본의 재일교포문제 오키나와 문제등 제국일본이 낳은 여러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은 곳이었고, 무엇보다 지적수준이 아주 높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기회 되면 참석했던 곳이다. 문부식, 정근식, 김동춘등이 그 연구회가 관심을 갖고 초청하기도 했던 인사였다.

서경식도 그 연구모임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인 걸 곧 알 수 있었고 나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책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재일교포사회의 가부장제문제를 발표하면서 이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서경식은 <젠더보다 민족문제가 우선>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당시 연구회 멤버들 중에는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그런 서경식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사석에서는 서경식을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말하자면 서경식, 윤건차, 그리고 이제  정영환으로 대표되는 나에 대한 재일교포들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젠더와 민족>문제를  둘러싼 포지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나에 대해 공식적이고 본격적으로 비판을 행한 건 모두가 남성학자들이다. 여성인 경우는 김부자나 윤명숙 등 위안부문제연구자에 한한다.  이 구도를 어떻게 이해할지가 나와 이들의 대립을 이해하는 첫 번째 힌트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서경식으로부터 시작된 나에 대한 비판에 가세한 학자들—이재승, 박노자, 윤해동등-도 모두 남성학자였다. (물론, 여성학자,혹은  여성학 전공자들 중에도 소송에 반대하거나 나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후에 다시 쓰겠지만 이들의 비판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의 논지가 <일본을 면죄>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정영환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전후/현대일본과 재일교포지식인

정영환도 언급한 것처럼 나에 대한 비판은 10년전에 쓴  <화해를 위해서>발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비판한 건 정대협에 관여했던 재일교포여성학자 김부자였다. 좀 지나서 윤건차, 서경식이 “자세한 건 김부자에게 맡기고…”라면서 지극히 추상적인 비판을 시작했다. 하지만, 김부자에게도 나는 서경식이 앞에서 언급한  연구모임에서 알게 된 사이라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고,시간이 지나고 내 책을 더 읽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기대하며 같은 시기에 나온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를 보냈다.

훗날 반론을 쓰게 된 계기는, 서경식 선생이 어느날 한겨레신문에 실었던 칼럼이다. 나를 높이 평가해 준 일본의 진보지식인들이 나를 이용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는 썼고 (<타협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2008/9/13 한겨레신문), 다음해에 나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윤건차의 책이 한겨레에 크게 소개되었을 때였다.

당시 김부자등의 비판에 동조해 비판한 건 몇 명되지 않는 극소수의 일본인이었고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한국에서 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일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화해를 위해서>는 그가 발간에서  3년이나 지난 시기에 굳이 비판해야 할 만큼 한국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책을 이들이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갑자기 비판한 이유를 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문제는 서경식이 지향한 것이 현대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진보지식인)뿐 아니라 이들이 만들어온 전후일본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점이다. 일본 리버럴지식인들은 정말은 식민지지배에 대해 법적책임을 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근거없는 추측은 ,이후 한국진보의 일본불신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반론을 일본어로 썼고 일본매체에 발표했다. 김부자의 논문이 실린 건 일본매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후인 2009년 여름과 겨울에, 한겨레신문 한승동기자가 윤건차교수의 책소개에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은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한 책>이라고 쓰는 일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나는 이 왜곡보도를 접하고 경악했다. (이에 관한 경위는 제국의 위안부 후기에도 썼다)


지식인의 사고와 폭력

서경석의 생각(전후일본과 현대일본지식인과에 대한 비판)이 그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증거는, 2014년 6월,나에 대한 고발장에  서경식의 생각(내가 말한 “화해”와 용서를 마치 국가야합주의적 사고인 것처럼 치부하는 사고)이 쓰여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 때, 언론중재위에 가지 않았던 나의 5년전 선택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말하자면, 나에 대한 고발은, 직접적으로는 나눔의 집이라는 지원단체의 오독과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은 그들을 그렇게 시킨 건 이면에 있던 나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그런 경계심을 만들고 또 보이지 않게 지원했던 건 지식인들이었다. 나에 대한 첫 고발은 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허위>라는 내용이었지만 내가 반박문을 쓰자 원고측은 중간에 고발취지를 바꾸어 나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았다. 일련의 과정에서, 낯설거나 자신들과 다른 생각은 무조건 배척하고 손쉬운 배척수단으로 <일본우익>을 호명했다는 점에서 지식인도, 지원단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주로 진보계층에서 유통된 서경식과 윤건차등의 책이 나에 대한 인식을 <일본을 면죄하려는 위험한 여성>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확산시킨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위안부문제를 부정하고 <일본의 법적책임을 부정>한다는 이유다.

서경식이나 윤건차는 내 책이 일본우익의 사고를 “구체적으로”비판하기도 한 책이라는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저 <친일파의 책>으로 부각시키고 싶어 했다.

그들 외에도, 내가 아는 한 나의 책 이전엔 위안부문제에 대한 부정파들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비판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한국이나 일본의 지원자들은 위안부문제에 부정적인 이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우익!”이라는 단어로 손가락질했고 김부자가 나에 대해 “우파에 친화적”이라는 말로 비난한 것은 그 연장선상의 일이다.

그에 비하면 정영환은 그나마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고 그 부분은 진일보한 재일교포의 모습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영환은 나의 “방법”이 무언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책의 전체 의도와  결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문맥을 무시한 인용과 함께 프레임을  씌워 <위험하고 부도덕한 여성>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책이 결론적으로 <일본의 책임>을 묻는 책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일본에 책임을 묻는 방식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아마, 정영환이 소개한 대로, 그들이 20여년 지켜온 사고의 막강한 영향력이 흔들리는 사태를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러한 정황이 마치 일본이 책임을 무화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는 처럼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최근 몇 년동안 위안부문제에 지극히 무관심했던 일본인들이, 그리고 소녀상이 세워진 2011년 이후 반발하기 시작했던 일본인들이, 나의 책을 본 이후 위안부문제를 다시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얼마 전에 나는 우연히, 서승/서경식형제에 대한 구명운동을 20년이상 해 왔다는 일본인 목사의 부인이, 위안부문제 해결운동모임의 전 대표라는 사실을 알았다.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어보였던 서경식도 실상은 위안부문제관계자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셈이다. 내가 굳이 이 글에서 서경식에 언급하는 이유는 정영환이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하면서 서경식의 비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비판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왔던 이들이었는데 서경식 역시 그런 <관계>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않았던 셈이다.  나에 대한 서경식의 비판논지가 고발장에 그대로 원용되어 있었던 것을 지적했던 것은 “지식인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의 논지자체가, “무모한” 지원단체 이상으로, 현실적 포지션과 인적관계의 영향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이들의 논지는 적대와 “숙청”을 요구한다. 지원단체가 국가권력을 앞세워 나를 고발했던 건 그 결과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규탄을 통해 드러난 그런 그들의 방식과 사고의 결함이 어디에 있는지, 이후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나갈 생각이다. 이들의 방식이 20년이상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불화를 빚어왔던 이유가 바로 그런  사고의 결함에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평화도 만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포지션

이들은 “전후일본”을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한국에 정착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 2015년현재의 한국의 대일인식은 이들 재일교포가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들과 연대하며 20년 이상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라고 강조하고  “변하지 않는일본/사죄하지 않는 일본/뻔뻔한 일본”관을 심었고, 2015년 현재 한국인의 70퍼센트가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라고 믿게 만든, 정대협을 비롯한 운동단체들의 “운동”과 그들의 목소리를 그저 받아쓰기만 해온 언론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박유하는 “일본(가해자)이 잘못했는데 한국(피해자)이 잘못했다고 말한다”라면서 내가 일본을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는데, 내가 그들의 일본관을 비판하며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식의 부정확하고 비윤리적인 “태도”였다.

나는 이들 재일교포가 일본을 비판하려면 자신들을 차별없이 교수로 채용한 일본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김석범선생같은 작가가 20년이상 <화산도>를 하나의 문예지에 연재하면서 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전후/현대일본이었다.

결코 빠르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지만 일본사회는 변했고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결코 보지 않으려 했던 짧지 않은 갈등의 시간 끝에, 현재의 일본의 일부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회귀중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관계란 대체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화해를 위해서>에서 말하려 했던 건 그런 부분이었다. 그 책은 2001년 교과서문제가 있고서야 일본에 이른바 <양심적지식인과 시민>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될 만큼 전후일본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던 10년전, 한국을 향해 우선은 전후일본이 어떤 출발을 했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알리려 했던 책이다. 우리의 일본인식은 실은 전도된 부분이 적지 않다고.

상대를 비판하려면 일단은 총체적인 일본을 알고 나서 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정확한 비판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러 이유에서 우리에겐  총체적인 일본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나는 정영환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리버럴 지식인들이 말하고 싶어 한 것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총체적인 일본에 대해 우선 알리고자 했을 뿐이다. 부정적인 부분을 포함해서. 그건 그런 일에 태만했던 한국의 일본학연구자의 한사람으로서의 반성을 담은 작업이었다. 서경식의 비판은 나는 물론 일본의 진보지식인에 대한 모욕일 수 밖에 없다.

서경식의 비판은 우리에게 겨우 그 존재가 알려진 일본의 진보지식인을 비판부터 하는 일로 전후/현대일본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의 비판이 결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더구나  일본이 더 바뀌려면 진보지식인과의 연대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을 적으로 돌리고 나서 정영환은 누구와 손잡고 일본을 변화시키려 하는가? 서경식이나  정영환의 비판은,지극히 모놀로그적이다. 모놀로그로는,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

나는 정치와 학문, 일반인과 지식인에 대한 비판에서  <차이>를 의식하면서 쓰고 말한다. 정영환등 나를 비판하는 학자들과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아마도 이 점에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츠메소세키를 비판했고 그를 리버럴 지식인으로 떠받든 일본의 전후지식인과 현대지식인을 비판했지만, 그건 그만큼 지식인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사고는 때로 정치를 움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보통생활을 영위할 뿐인 일반인에 대한 비판은 그 결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이 나의 <방법>이다. 모놀르그보다는 다이얼로그가, 논문에서든 실천에서든 생산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사죄>를 우리는 어디에서 확인할 것인가?

수상이나 천황이 아무리 사죄한 들 국민들이 같은 심정을 가지지 않으면 한일일반인들은 끝내 소통할 수 없을 것이고 불화할 수 밖에 없다.우리는 천황이나 수상과 대화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90년대는 분명 애매하긴 해도 일본정부와 국민이 사죄하는 마음이 압도적인 다수였던 시대였다. 내가 아시아여성기금을 평가한 건 그런 정부와 국민의 마음이 담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그런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애매>하다고 비난했지만, 선명함 자체가 목적인 추궁은, 정의실현이라는 자기만족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숙청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생산적인 담론도 되지 못한다. 실제로 나에 대한 고발이 그것을 증명했다.

<고발에는 반대하지만..,>이라고 전제하면서 나를 비판했던 이들 중, 아무도 실제로 소송을 기각하라고 행동한  이는 없었다. 그들은 한국정부와 지원단체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말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나를 억압하는 걸 당연시했고 비판에 나섬으로써 나에 대한 억압에 가담했다. 학문적 견해를 사법부가 도구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나서서 제출했다.

그런데, 역사문제에 대한 판단을 국가와 사법부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학자들의 치욕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참담한 심경이다.


1)<역사비평>에 처음 이 글을 먼저 보냈으나 구체적인 반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게재되지 못했다. 다른 글로 대체했으나 이 글이 더 중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역사비평>112호에 게재한 글과 다소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그 글에서 내가 언급한 정영환의  문제는, 다른 남성학자들의 글에서도 대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발족 기념  심포지엄 글(<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에서도 그 일단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도 다시 쓸 생각이다.

출전 : 박유하 페이스북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