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역사의 거울 앞에서 (경향신문)

‘제국의 위안부’ 토론과 논쟁 사이
맥락 생략된 텍스트 읽기 애석
상징체계가 주입한 습관 깼으면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토론과 논쟁에서 ‘텍스트는 컨텍스트(맥락)와 함께 읽어야 한다’는 텍스트 읽기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건 애석한 일이다. 맥락이 생략된 텍스트 읽기는 오독이나 악의적 왜곡에 이용된다. 특히 이 책처럼 민감한 사회적 주제를 담은 텍스트인 경우, 논쟁은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문화적 상징체계에 포획되어 버린다. 다들 진지하고 열띤 얼굴로 견해를 말하지만 실은 그 상징체계가 주입한 이런저런 주문을 암송할 뿐이다.

눈곱만큼이라도 유의미한 논쟁이 되려면 상징체계를 박차고 나가, 비로소 내 견해를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즉각적이고 단순명료한 반응과 판단을 의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가장 문제가 된 ‘매춘부’ ‘동지적 관계’ 등 텍스트 조각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책의 적확한 요약이 되기도 하고, 책에 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보수 세력은 오랜 권위주의 독재 시절을 통해 반일 정책을 표방하며 일본 극우세력과 야합하는 이중 전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름을 개탄하는 데 그치는 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문제는 ‘반일’이라는 개념 자체의 기만성에 있다. 일제 식민지 경험은 한국 민족과 일본 민족이 아니라 일본 지배계급과 한국 민중 사이의 일이었다. 일본 민중 역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했으며,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이해를 같이했다. 해방 후 지배계급으로 남은 그들은 모든 것을 민족 간의 문제로 은폐하고 기만했다.

그런 기만은 진보 세력에게도 답습된다. 한국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미 제국주의의 지배와 영향을 받게 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진보 세력 안에서 한국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사회’라 해석되곤 했다. 진보 운동은 ‘민족주의+진보(계급)’라는 모순적 상태를 지속해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계급이라는 ‘체’로 제대로 걸러내지 못함으로써 진보(계급)의 괴멸도 지속되었다. 조직노동(민주노총)이 비정규 불안정 노동이라는 노동자 계급의 보편적 현실을 외면하고, 진보정당이 분당과 합당을 반복하면서 지리멸렬해진 내적 원인도 결국 그것이다.

‘민족주의+진보’의 폐해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가는 ‘디아스포라’에 천착하는 재일 지식인 서경식이 박유하 비판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과, 한국의 진보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단호한 계급적 관점을 고수해온 박노자가 이 논쟁에서만은 ‘탈계급적’ 태도로 일관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박유하의 견해가 일본 우익에 봉사한다는 식의 비난과도 선을 긋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견해가 사회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우려하는 건 필요한 일이나, 반대와 금지의 근거로 삼는 건 파시스트의 방식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공극우 세력의 주요한 탄압 논리는 ‘북한에 봉사한다’였다.

<제국의 위안부>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위안부 문제 활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정대협의 활동은 ‘위안부 소녀상’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소녀상이 담은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은 사실관계와 문제의 본질을 동시에 거스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정녀든 창녀든 예수의 어머니이듯, 모든 생존 위안부는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에 부합하든 안 하든 위안부 문제의 피해자다. 일본의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에 대한 정대협의 부당한 태도는 위안부 운동이 생존 위안부를 위해 존재하는지, 생존 위안부들이 위안부 운동을 위해 존재하는지 되묻게 한다.

‘민족주의+진보’의 수렁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의 진보적 인텔리들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 당시, ‘민족 배신자’로 매도되면서도 ‘악의 평범성’을 설파하던 한나 아렌트를 상찬하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상찬이 지적 허세가 아니려면 온전하게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이 되어 봐야 한다. 아렌트는 일생의 벗들에게까지 절교당해야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아렌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박유하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지난 역사, 남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역사에선 쉽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거울 앞에서 성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친일 문제에 대해 단순명료한 태도를 보이는 나는, 독립이나 해방을 좇는 사람은 이미 ‘비현실적’이라 치부되던 일제강점기 후반부에 살았어도 같은 태도를 보였을까. 그것은 현재의 지배체제,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내 태도로 추정될 수 있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아이를 밤늦도록 학원을 돌게 한다면, 신자유주의의 다른 분파인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유일한 사회적 희망이라 생각한다면 그 태도는 허상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태도가 아니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문화적 상징체계가 만들어낸 습관일 뿐이다. 우리는 그 습관을 직시하고 해체해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가 처음으로 우리의 습관을 적확하게 비판하거나 해체하려 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즉 해체했어야 한다며 고마워할까, 아니면 아렌트 앞의 유대인들처럼 격렬하고 집단적인 반감을 보일까. 박유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 답을 보여준다.

원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역사의 거울 앞에서 (경향신문)

渦中日記 2015/3/7

삭제판을 위한 작업중.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막상 마주하니 가슴이 좀 쓰라리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74229259270654

渦中日記 2015/2/28

결국 2월 마지막날은 나를 고발에 이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언론사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가 깨지는 날이 되었다. 한겨레에 오늘 기사를 실은 길윤형기자에게 질문을 받고 대답했던 내용을 다시 올려둔다.

나는 이 대화에서 분명히 와다교수와도 의견이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면서, 심지어 결국은 “일본우익의 주장을 수용”한다고 써 버렸다. 더구나 나는 한국이 요구하는 “법적”책임을 지우는 일이 왜 어려운지를 말했을 뿐인데 “책임”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뉴앙스의 기사가 되고 있다.

나는 분명히 일본의 책임을 물었고, 앞서 올린 와다교수의 말처럼, 일본에서 내 책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은 우익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애써 왔던 사람들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등 진보언론이 여러번 관심을 표했고, 우익/보수 성향의 산케이나 요미우리에겐 아직 무시당하고 있다. 그런 상황을 가장 잘 알 “일본특파원”이 그걸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한 것이 다름아닌 한겨레 신문이다.

나는 우익도 아니고 협력자로서의 친일파도 아니다. 아무나 “우익””친일파”딱지를 붙이는 일로 자신들의 목소리와 자리를 유지하려는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나와 먼 곳에 있는 이들이 아니어서 그동안은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유보적 자세를 접으려 한다.

나의 목표는 일본우파까지 주목해 주는 것이다. 보수언론이 움직여야 아베정권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기에. 진보의 생각만으로 좌우가 공존하는 “일본공동체”를 움직일 수는 없다. 내가 90년대에 일본이 만든 아시아여성국민기금을 평가한 건, 그것이 불완전하나마 좌우합작형태의 “사죄와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문제는 끝난 문제라고 일축했던 일본의 보수세력을 내 책이 혹 움직이는 일이 있게 되면, 오로지 자신들과 해결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비난해 온 이들은, 내 논지가 그들을 움직였다고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내가 말했다고, 나는 일본우익의 나팔수였다고, 또다시 앵무새처럼 말할 것이다.

나를 할머니의 이름으로 고발하도록 만든 것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국가를 동원해” 억누르려 한 한국지원단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행위를 뒷받침한 건, 일부 재일교포이고, 내 책이 일본우익의 상찬을 받았다는 거짓말을 쓴 한겨레신문이고, 고발이후에도 좌시했고 가처분판결이 나자 그 판결을 옹호했던 몇몇 지식인들이다. 학문을 국가의 힘을 빌어 단죄하는 일에 지식인마저 동참한 것이 2015년의 한국사회다.
한국사회의 위기와, 이들은 무관하지 않다.
할머니들을 죽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서.

온갖 “해석”들이 나를 죽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와 편견을 넘어 나의 문제제기를 왜곡과 곡해 없이 읽어 준 건 소수의 “열린” 사람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건 “강한”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 열려있고 강한 또다른 이들이 책을 만날 수 있도록, 책을 역시 출판해야 할 것 같다.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8639513162962

渦中日記 2/25

한 언론의 기자가 기사를 쓰겠다면서 질문을 했다. 일본특파원이라 일본사정에 대해서도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가나 일반인들과는 질문의 차원이 달라 성의껏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내가 위안부문제해결과 한일화해를 위해 쓴 건지 혹은 일본에 “법적책임이 없다”는 걸 주장하고 싶었던건지 알고 싶어했다. 나로서는 서글퍼지는 대답이었지만 말했다.
“결론부터 정하고 덤비지는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
한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뭔가 다른 의도를 담아 글을 쓰는 식으로 머리굴리는 부류의 사람을 싫어하고, 누군가의 지시에 쉽게 따를만큼 순종적이지도 않다.

———–
1.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 “보상”의 의미는?

이 책은 여러 “다른”오디엔스(독자/청중)를 대상으로 한 책이에요. 책에도 썼지만 원래는 일본을 향한 글만 쓰여질 예정이었구요. 일본이라 해도 지원자/정부/부정자,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앞에서 하던 얘기와 뒤에서 한 얘기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그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한일협정에 관해서도 한국을 향해선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없애 버렸으니 그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일본을 향해선 “당신들은 보상 끝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관련 보상이었고 식민지배에 따른 억압과 고통에 대해선 보상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모순으로 느껴질 수 있고 어느쪽이 진짜냐! 라고 묻고 싶어지겠지만 이런 식의 논리전개가 된 건 결국 대립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각자 자신의 문제를 보는, 자기비판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커다란 틀에서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썼습니다. 일본의 지배가 문제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대협등 지원단체는 보상과 배상의 의미를 구별해서 쓰고 있어요. 위안부문제는 “법을 어긴 국가범죄이니 입법을 해서 배상하라”라는 의미에서 “배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학자들이 말하는 건
더이상 “강제연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지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저에 대한 고발장에서조차 쓰고 있더군요.
“약취,사기”로 업자들이 데려 왔다 해도 알고도 받아들였으면 범죄이고 일본군이 알고도 받아들였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은 알게 된 경우 업자에게 다른 곳에 취직하게 하도록 시키거나 돌려보낸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계약서를 확인해 업자의 사기나 납치를 방지하려 했구요. 그러니 전부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일본의 공식방침은 위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해야 하구요. 알면서 묵인한 경우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 경우 업자가 이미 돈을 주고 사 왔다던가 하는, 일본군으로서도 관리영역 바깥의 경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수요를 만든 자체–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로 만든 지역의 사람들까지 전쟁터에 동원한 책임, (의도여부를 떠나) 묵인한 책임을 물은 겁니다. 위안소를 공식적으로 만든건 근대일본이 시스템화에 능숙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그리고 모두 획일적인 위안소가 아니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하고요. 일본에서 강연할 때 유곽에 있었던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에, 유곽을 군대용 위안소로 지정한 곳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지정업소가 아닌 곳에 있었던 사람(여기에도 비지정이지만 인가업소-유곽의 위생시설등 체크했던 업소와 인가조차 못받았던 이른바 사창도 있었다는 걸 “우리는”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피해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다른 부분을 소거시키고 싶은 욕망에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 그걸 지적했던 거구요.
“보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한국어판을 쓸 땐 기금과는 달리 “정부국고금”으로, 기금을 받지 못한 분들께 추가 보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런 의미입니다. 국회를 거치지 않는 정부보상금이지요. 다만, 이후 국회결의를 하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본어판에선 그렇게 썼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다시 기회되면 말씀드리지요.

2. 와다교수의 의견(국고금으로 보상금지급)과 같나?

한국어판 내고 나서 다른 자료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와다선생님과 달리 국회결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오히려 보상금을 어떻게 할 건지는 더 첨예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국민동원의 한 형태다)이 받아들여진다면 입법이나 국고금 지급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강제동원을 했으니 배상하라”는 현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 일본한테 보상금을 대신 받은 한국정부가, 할머니들에게 4천만원 이상 지급했고 매달 이런저런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할머니의 체험은 다 다른데 해결은 “하나의 방안”으로 정해야 하는 정치/국가 문제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할머니들의 다른 목소리에 각각 귀를 기울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3. 현실적 타협론인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옳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명분에 무게가 실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년이 걸리더라도” 라는 말로 주장을 관철하는 건 첫째 당사자를 무시(얼마전에 만난 할머니는 사죄조차 요구하지 않고 보상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오히려 제가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는 일이고, 할머니의 의견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인식될 필요가 있습니다. 들리지않을 뿐이지요. 부산정대협회장님을 만나 보세요. 지방에 계셔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문제 해결에 사비털어가며 20년이상 애써 오신 분인데 그분 말씀이 “나도 내 돈 내가며 신문광고를 통해 기금을 반대했다 .하지만 할머니들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 받게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우리 여성지도자들(이 분은 이화전문여고출신의 할머님)이 못 받게 했다”고 하시더군요.

4. 제가 받는 인신공격적 비난이 안타깝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심층취재와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외부의 비난과 우려 속에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외부가 아니라 우리스스로 들여다보고 아프더라도 직시하는 일로 치유해나가기 위해서도요. 저는 제 사태를, 2009년의 서경식교수의 한겨레 칼럼이후에 저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면서 5년후에 지원단체에 의한,아마도 쌍방이 의식못할 “대리고발”을 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의 종류도 다양하고 지식의 폭도 달라서 더 어려운데, 정치나 개인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사람들, 단순오해로 비난하는 이들에게 동조하는 지식인들의 행태가 가장 한탄스럽군요. 저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위해서.
언론에 대해서도 깊이 실망해 왔지만 그래도 제대로 보려하는 분들이 계신 걸 잘 압니다. 기대를 놓지 않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70165993010314

渦中日記 2015/2/27

압도적인 폭력아래 놓이면, 말을 잃게 된다. 마녀사냥식 비난과 추측성 의혹과 그럴듯해 보이는 비판들 속에서, 어느 쪽에 먼저 대답해야 할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웃고 있으면 짓밟아 울리고 싶다는 이들이 있었고 슬퍼하면 순교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이들이 있었다. 씩씩하려 하면 뻔뻔하다 했고, 침묵하고 있으면 반박을 못하는 거라고 했다.

검찰조사가 끝나자마자 지방국립대교수와 성남시장이 공격을 시작했고, 그리고 가처분 판결을 받았었다. 덕분에 주변지인들까지 설연휴를 반납하다시피 했고 나 역시도 견뎌내기만도 버거운 며칠이었다. 진작부터 약속한 두개의 일정을 위한 준비도 해야 했다.
귀국하고 보니 이번엔 그 행사마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었고, 나는 “그 와중에 책을 팔러” 일본까지 다녀온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비난에 대해 “자신은 뒤로 숨고 지지자들을 내보낸” 비겁자가 되어 있었다.

작년 6월에는 했던 해명과 설명을 이번에는 일일이 하지 않았던 건 우선은 경황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두번째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나를 설명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다 나에 대해 말하는 날은 그런 나자신을 넘어서야 할 만한 어떤 계기가 주어진 날이다.

나를 일으켜 세워, 몇가지에 대해선 해명을 해야겠다고 비로소 생각했던 어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인터뷰가 나왔다. 이 역시도 비판적인 부분에만 주목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먼저 걸어둔다. 이 주말엔 페북을 하루종일 열어두어야 할 것 같다.

2월이 가고 있다.

http://www.hankookilbo.com/m/v/86fc1dfb784a4255a92a290849f7d32b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9593019734278

渦中日記 2015/2/26

비판/비난을 넘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이들이 있다.
그동안 나는 그들을 가능한 한 이해하려 해 왔지만 이제 그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9260639767516

渦中日記 2015/2/25

한 언론의 기자가 기사를 쓰겠다면서 질문을 했다. 일본특파원이라 일본사정에 대해서도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가나 일반인들과는 질문의 차원이 달라 성의껏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내가 위안부문제해결과 한일화해를 위해 쓴 건지 혹은 일본에 “법적책임이 없다”는 걸 주장하고 싶었던건지 알고 싶어했다. 나로서는 서글퍼지는 대답이었지만 말했다.
“결론부터 정하고 덤비지는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
한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뭔가 다른 의도를 담아 글을 쓰는 식으로 머리굴리는 부류의 사람을 싫어하고, 누군가의 지시에 쉽게 따를만큼 순종적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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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 “보상”의 의미는?

이 책은 여러 “다른”오디엔스(독자/청중)를 대상으로 한 책이에요. 책에도 썼지만 원래는 일본을 향한 글만 쓰여질 예정이었구요. 일본이라 해도 지원자/정부/부정자,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앞에서 하던 얘기와 뒤에서 한 얘기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그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한일협정에 관해서도 한국을 향해선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없애 버렸으니 그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일본을 향해선 “당신들은 보상 끝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관련 보상이었고 식민지배에 따른 억압과 고통에 대해선 보상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모순으로 느껴질 수 있고 어느쪽이 진짜냐! 라고 묻고 싶어지겠지만 이런 식의 논리전개가 된 건 결국 대립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각자 자신의 문제를 보는, 자기비판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커다란 틀에서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썼습니다. 일본의 지배가 문제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대협등 지원단체는 보상과 배상의 의미를 구별해서 쓰고 있어요. 위안부문제는 “법을 어긴 국가범죄이니 입법을 해서 배상하라”라는 의미에서 “배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학자들이 말하는 건
더이상 “강제연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지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저에 대한 고발장에서조차 쓰고 있더군요.
“약취,사기”로 업자들이 데려 왔다 해도 알고도 받아들였으면 범죄이고 일본군이 알고도 받아들였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은 알게 된 경우 업자에게 다른 곳에 취직하게 하도록 시키거나 돌려보낸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계약서를 확인해 업자의 사기나 납치를 방지하려 했구요. 그러니 전부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일본의 공식방침은 위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해야 하구요. 알면서 묵인한 경우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 경우 업자가 이미 돈을 주고 사 왔다던가 하는, 일본군으로서도 관리영역 바깥의 경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수요를 만든 자체–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로 만든 지역의 사람들까지 전쟁터에 동원한 책임, (의도여부를 떠나) 묵인한 책임을 물은 겁니다. 위안소를 공식적으로 만든건 근대일본이 시스템화에 능숙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그리고 모두 획일적인 위안소가 아니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하고요. 일본에서 강연할 때 유곽에 있었던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에, 유곽을 군대용 위안소로 지정한 곳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지정업소가 아닌 곳에 있었던 사람(여기에도 비지정이지만 인가업소-유곽의 위생시설등 체크했던 업소와 인가조차 못받았던 이른바 사창도 있었다는 걸 “우리는”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피해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다른 부분을 소거시키고 싶은 욕망에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 그걸 지적했던 거구요.
“보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한국어판을 쓸 땐 기금과는 달리 “정부국고금”으로, 기금을 받지 못한 분들께 추가 보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런 의미입니다. 국회를 거치지 않는 정부보상금이지요. 다만, 이후 국회결의를 하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본어판에선 그렇게 썼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다시 기회되면 말씀드리지요.

2. 와다교수의 의견(국고금으로 보상금지급)과 같나?

한국어판 내고 나서 다른 자료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와다선생님과 달리 국회결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오히려 보상금을 어떻게 할 건지는 더 첨예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국민동원의 한 형태다)이 받아들여진다면 입법이나 국고금 지급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강제동원을 했으니 배상하라”는 현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 일본한테 보상금을 대신 받은 한국정부가, 할머니들에게 4천만원 이상 지급했고 매달 이런저런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할머니의 체험은 다 다른데 해결은 “하나의 방안”으로 정해야 하는 정치/국가 문제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할머니들의 다른 목소리에 각각 귀를 기울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3. 현실적 타협론인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옳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명분에 무게가 실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년이 걸리더라도” 라는 말로 주장을 관철하는 건 첫째 당사자를 무시(얼마전에 만난 할머니는 사죄조차 요구하지 않고 보상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오히려 제가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는 일이고, 할머니의 의견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인식될 필요가 있습니다. 들리지 않을 뿐이지요. 부산정대협회장님을 만나 보세요. 지방에 계셔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문제 해결에 사비털어가며 20년이상 애써 오신 분인데 그분 말씀이 “나도 내 돈 내가며 신문광고를 통해 기금을 반대했다. 하지만 할머니들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 받게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우리 여성지도자들(이 분은 이화전문여고출신의 할머님)이 못 받게 했다”고 하시더군요.

4. 제가 받는 인신공격적 비난이 안타깝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심층취재와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외부의 비난과 우려 속에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외부가 아니라 우리스스로 들여다보고 아프더라도 직시하는 일로 치유해나가기 위해서도요. 저는 제 사태를, 2009년의 서경식교수의 한겨레 칼럼이후에 저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면서 5년후에 지원단체에 의한,아마도 쌍방이 의식못할 “대리고발”을 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의 종류도 다양하고 지식의 폭도 달라서 더 어려운데, 정치나 개인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사람들, 단순오해로 비난하는 이들에게 동조하는 지식인들의 행태가 가장 한탄스럽군요. 저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위해서.
언론에 대해서도 깊이 실망해 왔지만 그래도 제대로 보려하는 분들이 계신 걸 잘 압니다. 기대를 놓지 않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8639513162962

渦中日記 2015/2/22

“경계를 넘어” 학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어제 교토로 왔다. 테마는 <제국일본을 대하는 방식>. 나로선 주최자가 정확히 나의 문제제기를 이해해 주었다고 느낀다.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나는 “제국”이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인지 물으려 했다. 일본판 서문에서 나는 제국이란 “강자주의적 지배” 이고 그에 따른 서열화, 라고 말했다. 누가 먼저 자기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긍지 혹은 그와 비슷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가. 그 안에서 민족과 계급과 성의 싸움이 있었다.

그런 대화를 공공의 장소에서 학자들, 그리고 들으러 와 줄 시민들과 하게 된 것이 한국아닌 일본이어서 다소 서글픈 아침이다. 허한 속을 채우기 위해, 우선은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66665776693669&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2・18

<위안부를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로 표현>했다는 보도에 관해서

어제저녁부터 나오기 시작한 판매금지가처분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재판부보다도 언론에 더, 절망을 느낀다. 수십개의 보도 중,나에게 연락해 의견을 물은 곳은 단 두 곳밖에 없었다. 다보지 않았지만, 나눔의집 소장의 의견을 실은 곳은 많은 듯 하다.
고발직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이나라의 언론은 편파적이고 불공정하다. 지난가을에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내린 결정은 대립중인 사안은 양쪽의 의견을 공정하게 실어야 하고,그렇지 않았으니 정정하거나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일일이 다 할 수가 없어서, 나에게 확인하지 않고 원고측 보도자료만을 가장 먼저 내보냈던 연합뉴스와, 악의적인 제목을 달아 같은 내용의 기사를 반복적으로 내보냈던 조선닷컴,그리고 내가 일본의 우익을 대변한다고 썼던 한겨레와 한국일보만 중재신청을 냈었다. 그리고 언중위는 내 손을 들어 주었지만 그 내용을 다른언론사에 요청하는 일을 아직 하지 않았었다. 이재명 시장의 뒤늦은 비난은 <나를 말하는 일>에 충분히 부지런하지 못했던 나의 불찰이기도 하다. 재판이란, 지치도록 만들어 포기하게 하는 일이고 집요한 사람이 이긴다던 지인의 말이 다시 생각나는 아침.

사람들의 분노는 <매춘부>라는 단어에 있다. 그런데 미치지 않고야 대한민국에서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소리높여 말할 사람이 있을까. 원고측이야 악의적인 공격과 매장이 목적이니 그렇게 단정할 수 있지만, 정말 그랬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믿는 재판부와 사람들이 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나는 생각하는 바를 가능한 한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비난하기 위해 말하지 않았다.

재판부에 제출했던 답변서중,매춘에 관한 원고측 지적과 답변의 일부를 우선 올려둔다.
파일첨부가 잘 안되는 문제만 해결되면,나머지도 전부 곧 올릴 생각.
나를 보호하려면 공개하지 않았던 자료까지 앞으로는 공개하고 제출해야 하는데, 그 작업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나는 우울하다.

——————
18.조선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른 경제활동이 가능한 문화자본을 갖지 못한 가난한 여성들이 매춘업에 종사하게 되는 것과 같은 구조 속의 일이다.(112쪽)
19.위안부 중에 조선인 여성이 많았던 것은 식민지의 빈곤과 인신매매조직의 활성화 등 전체 사회구조의 결과이다.(112)

원고측지적-
위 표현과 마찬가지로 채무자 박유하는 조선인들이 강제나 기망, 허위 유혹 등에 의하여 위안부가 된 특수성을 무시한 채,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가난하여 자발적으로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과 조선인 위안부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저자는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의 적극적인 개입과 책임을 배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채무자의 시각이라면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의 전쟁범죄피해자가 아니라 가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매춘여성과 동일합니다.
채무자의 표현이 옳다고 하려면 일본의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위안부 동원전에도 조선의 백성들은 가난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조선에서 위안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시설이나 위안부들이 많이 존재했어야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군의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동원이후부터 채권자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양산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답변–
<전체 사회구조의 결과>라는 것은 채권자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오히려 그러한 사회구조를 만든 일본에 가장 크고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문구입니다.
본서의 120쪽에서 채무자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위안부’를 필요시하고 위안부의 효과적인 공급을 위해 ‘관리’를 했던 건 분명하다. 그러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한 ‘남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 ‘죄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서술하였습니다.
채무자는 당시 한반도를 점령했던 일본이라는 국가가 어떤 통치를 행했으며, 그 통치에 의해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의 피해가 존재했는지를 상세히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 및 일본군의 적극적 개입과 책임을 배제하려 했다>는 기술은 이러한 문맥을 도외시하고 왜곡한 지적입니다.
<조선에서 위안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시설이나 위안부들이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채권자들이 조선에 존재한 위안소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조선에도(일본에도) 군부대가 존재했고 위안소는 존재했습니다. 물론 <대규모적인 동원 이후부터 채권자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맞고 그 사실을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해외로 <이동>한 위안부란 이동당한 군인을 위해 모집된 <국가에 의한 성 노동 동원>으로 보는 것이 바로 채무자의 시각입니다. 채권자들은 지속적으로 일본인 위안부나 가난 때문에 떠난 이들과 조선인 위안부를 구별하려 합니다.
그러나 일반 매춘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위안부>가 되는 경우는 많았습니다. 1970년의 서울신문에서도 <처음에는 화류계 여성들이 갔다>고 분명히 쓰고 있습니다. 나눔의 집에 계시던 배춘희 할머니도 자신이 있던 집이 유곽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일반 매춘과 위안부는 함께 <가난과 남성 우월주의적 가부장제>가 만듭니다. 거기에 <국가주의(본서 33쪽 10줄)>가 개입할 때 <위안부>가 만들어집니다.

20.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을 ‘매춘’으로만 생각했고 우리는 ‘강간’으로만 이해했지만, ‘위안’이란 기본적으로는 그 두 요소를 다 포함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은 가혹한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 실제로 돈을 버는 이들은 적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 혹은 ‘매춘적 강간’이었다. (120)

원고측지적–
채무자 박유하는 조선인 위안부의 행위가 매춘과 강간이 혼재되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강간적 매춘이나 매춘적 강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조선인 위안부들이 기본적으로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에 종사하여 매춘을 동반한 일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는 과정과 위안소에 감금되어 위안부 생활을 했던 동안 경험했던 바와는 다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채권자를 비롯한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하여 수입이 예상되는 매춘을 했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명예훼손이 될 것입니다. 채무자는 성노예 생활을 했던 채권자를 포함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끊임없이 “매춘”의 굴레를 씌우고 있습니다.

답변–
위안부가 임노동이었음은 본서의 증언(본문 89-90쪽)이 말합니다. 또한 이 부분에서 매춘에 대한 기술은 <매춘부>라고만 말하면서 위안부를 부정하는 일본인들을 향해 쓰여 졌던 부분입니다. 즉 위안부를 단순한 <매춘부>라고 말해온 이들을 향해 그것이 강간적인 구조를 가진 것이었다고 말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즉, 성매매를 하였다 하더라도 이것이 국가의 조직적 강간행위였음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채권자의 지적은 그런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자체에만 집착한 지적입니다.
위안소에서의 <감금>은 기본적으로는 업자가 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위안소가 부대 안에 있을 경우에 자유 외출이 불가했던 것은, 군인과 마찬가지로 정보유출등에 대한 우려때문이었고 전투지였기 때문입니다. 군인의 외출이 자유롭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47.그리고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296쪽)

원고측지적–
채무자의 주장처럼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가 일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일반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채무자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자발적 매춘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한다는 취지로 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나 이는 가해자이면서도 여전히 가해사실을 부정하며 반성과 사과를 꺼리고 있는 현재의 일본정부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입니다.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자발적 매춘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자발적 매춘을 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여 일본군의 필요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동원이 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책임은 전혀 희석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채무자 박유하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이미지에 덧씌우고 있습니다. 채무자 박유하의 주장대로 자발적 매춘부가 존재한다는 것과 일본의 위안부 동원에 대한 법적 책임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마치 자발적 매춘부를 인정하지 않아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답변–
채권자는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가 아니었다고 해 놓고도,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가 일부 있었다고 하더라도>라고도 말합니다. 이는 본인의 주장을 인정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증언은 돈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다구나 채무자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자발적 매춘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한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자발이든 아니든 그러한 구조 속에 놓이도록 만든 것 자체를 일본의 책임으로 환기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자발적 매춘을 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려면 그렇다는 증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대다수는 자발적 매춘을 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가 <더불어 자발적 매춘을 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여 일본군의 필요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동원이 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와 일본군의 책임은 전혀 희석되지 않는다>는 서술은 모순입니다.
채무자의 시도가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채권자를 포함한 조선인 위안부의 이미지에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본서를 정확하게 읽은 기존의 서평이나 기사가 말해 줍니다.
더구나 <자발적 매춘부가 존재한다는 것과 일본의 위안부 동원에 대한 법적 책임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말은 자발적 매춘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채권자와, 주변인들이 인정한 말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을 보는 일이 일본의 책임을 희석하는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채권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의 논지는 매춘여부와 상관없이 일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논지입니다. 지원단체는.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하던 시절의 이미지-12살짜리 소녀까지 강제로 끌고 갔다는 이미지에, 2014년 현재까지도 기대어 활동하고 있고 저는그런 부분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4332183593695

渦中日記 2015/2/18

Jung-hwan Cheon선생의 비판을 받았다. 한권의 책은 세상에 내놓는 순간부터 얼마든지 비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 그의 비판이 놀라웠던 건, 이하에 적는 것처럼 소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보다도, 다른 날도 아닌 오늘, 그러니까 나를 고발한 사람들의 주장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진 직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가 여러모로 결코 먼 거리에 있는 학자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도.

1.우선 심각한 오류부터 지적해 둡니다. 8만부,란 금시초문의 숫자입니다. 출처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2. 일본어판을 직접 확인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영환선생의 서평을 “날카로운 평”으로서 신뢰하시는 근거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3.”고소취하 노력이 있었다”는 것도 들은 바 없고,그것을 거부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4.일본의 지식인을 굳이 언급한 건 내가 우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악의적인 말들을 의식하며 크게 보았을 때 어떤 사상의 장에 있었는지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설사 한계나 오류가 있다 해도 그것이 곧 저의 오류나 한계가 되는 건 아닐 터입니다.
5.NHK가 저를 찍고 있는 건 회장의 변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한국에서 책이 나왔을 때 주목받은 것에 관심을 가진 기자가 제 책이 한국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추이를 보고 싶다고 해 응한 겁니다. 무엇보다 그는 위안부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NHK라고 해서 모든 직원이 회장과 같은 생각을 할 거라는 생각에서 쓰신 걸까요.

Jung-hwan Cheon

* 메모 :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딜레마 또는 동상이몽

0) 시초
문제가 시작된 최초에 <제국의 위안부>의 논리에는 동조 못하지만 박유하 선생에 대한 마녀사냥에 대해 반대한다 했다. 그런데, <나눔의 집>이 할머니들을 내세워 책을 고소하는 바람에 문제는 전혀 다른 게 돼 버렸다. 고소와 판금 같은 법적 조치야말로 문제를 꼬이게 만들고 오히려 저자와 그 책에 대해 다른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1) 확장
2월 17일에 1심 법원이 ‘명예훼손’을 판단함으로써 이제 문제는 더 크게 확장된다.
이 책은 위태로운 (정치적) 한일관계 사이에서 소위 ‘금서’가 됐고, 앞으로도 한일 사이의 인식 차이나 갈등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박유하 선생이나 책이 애초의 ‘선의’와는 반대로, 한일 ‘화해’나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콘이나 도구가 되기는커녕 더 거리가 멀어졌다는 뜻이다.

2) 입체적 딜레마?
‘위안부 문제’에 대해 내가 문외한이라는 점과 저자와의 인연 때문에 냉정한 평가와 언사가 어렵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사태를 ‘객관적, 입체적으로’ 보고자 조금 노력해왔다.
(다면적인 문제들에 대한 선택적 판단은 각자의 몫이고, 사실관계에 틀린 것이 있다면 지적 바란다.)

결론은 ‘딜레마’다. <제국의 위안부> 및 박선생의 입장과 판금 조치 양자에 대해 다 반대해야 하는 곤혹이다. 양비론을 말하게 될지 모르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반대는 서로 다른 것과 비대칭적인 것을 향한다. 하나는 박유하라는 개인과 비물질적이며 관념적인 것이고, 후자는 법과 집단의 ‘현실’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매우 어렵고 미묘하다. 개인을 비판하거나 단죄하는 일은 더 높은 윤리를 요구하고, ‘법’이 끼어드는 순간 정신이나 ‘현실’조차 모두 찌그러지고 축약된다.(따로 공부가 필요한 대목이다.)

3)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위안부’ 문제 때문에 ‘친일파’의 혐의를 쓴 박유하 선생이나 ‘뉴라이트’에서 신념을 갖고(?) 활동하는 이영훈 선생의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그 논리의 문제는 별도) 그러나 그 ‘자유’는 기실 ‘역사’나 ‘현실’의 맥락에 비하면 허망한 것일지 모른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자유는 되레 큰 빛과 힘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인문학이 기생학문이 되고 ‘현실’과 ‘인간’을 거의 논하지 못하는 오늘날, 나는 오히려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보다는 ‘학문의 책임, 표현의 책임’도 생각해본다. 우리는 ‘학문’과 ‘표현’이라 말할 때 어떤 무한한 가치중립적 시공간과 문자, 텍스트들을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가상일 뿐이다. 심지어 ‘사실’조차 그럴 것이다. 이는 객관성과 가치문제에 기본에 속하는 것이다.
맥락을 사상한 ‘자유’는 공소하다. ‘샤를리앱도’를 포함한 일련의 ‘표현의 자유’ 문제의 교훈이 여기 있다 믿는다.

3-1) <제국의 위안부>의 역설
이는 아슬아슬한 논리적 줄타기를 하는 책이며, 결국 ‘사실’을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고 뵈지 않는다. 이게 <제국의 위안부>의 가장 큰 역설이다.

왜 이미지화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실이 있다는 걸 계몽적으로 밝히는 학술서가
오히려, 식민지 지배의 본질이나 국가 책임이라는 더 큰 ‘사실’을 희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이 점이 저자가 놓치는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용어 선택은 별도로 심각하다. 이 자체에 대한 문제는 이미 논의가 진행됐으므로 생략한다. 법정에서의 논란은 박유하 선생의 페북을 참조.)

그리고 일본어본은 얼마나 내용이 바뀌었는지 모르는데, 믿을만한 지인의 도움으로 그에 대한 다음의 서평을 소개한다. 정영환이라는 재일 소장 학자의 날카로운 평이다.
http://kscykscy.exblog.jp/23960512/
4) 책이 나오고 난 뒤에
<나눔의 집>의 행동(시위 등)과 고소가 무리한 것이며, 결국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에 고소를 취하하게 만드려는 일부 노력이 있었다 들었다. 그리고 법원도 중재를 시도했다고 들었다.
결과적으로 양측은 묵은 감정과 이런저런 이해관계 하에서 자기 주장만을 되풀이했다. <나눔의 집>측에 성찰을 기대하기도 물론 어려운 일이다. 사실 어제 법원의 판단은 이에 비하면 덜 심각할지 모른다. 그것은 단지 ‘법적 결과’일 뿐인 것이다.

5) 제국의 관점과 식민지 서발턴
박유하 선생이 그간 식민지 문제나 위안부 할머니들 등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많다는 점이 환기돼야 한다.
그는 ‘가처분심리최종준비서’에서 자신이 일본(우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가라타니 고진, 오에 겐자브로, 우에노 치즈코 등 일본의 과거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진보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일본의 과거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진보지식인들”이 진정 식민지 서발턴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을까? 박선생이 중대한 오류나 한계를 노정하는 데가 바로 여기인 듯하다. 그가 ‘일본의 논리를 체화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점 또한 여기다.

박선생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단지 서경식 같은 이나 이런저런 민족주의자 뿐 아니라, 허다한 여성주의자와 식민지 연구자, 그리고 자이니치들이 포함돼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기타, 인신비판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박선생이 그간 일본 언론이나 학계에 대해 취한 태도와 할머니들에 대해 취한 태도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6) 동상이몽과 ‘한나 아렌트’
소식통들로부터 일본의 상황을 들으니 현재 일본 사회는 박유하 선생과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 민족주의와 그 역사 왜곡에 맞선, 수난 당하는 ‘양심’이나 ‘영웅’인 것처럼 간주하고 있다 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그런 경향이 커 심각한 면이 있다 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오래전부터 NHK는 박유하 선생에 대한 다큐를 만들고 있고, <제국의 위안부> 일역판에 대한 일본의 서평들은 박선생을 ‘한국의 한나 아렌트’라 불렀다. 진보적이라는 <아사히>부터 그랬다.

종전 70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년의 기념과 미래 한일관계의 동상이몽의 일본 측 소재로 박유하 선생과 <제국의 위안부>가 중용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는 올곧게 ‘진실’을 향해 있다기보다, 한일의 서로 다른 맥락과 관계 사이에 힘겹게 ‘낑겨’ 있는 듯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4611746899072

渦中日記 2015/2/17

8개월만에, 판매금지에 관한 가처분결정이 나왔다.
원고측의 두가지 신청중 출판판매금지는 원고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위안부할머니 접근금지신청은 기각되었다.
이렇게 나의 책은 오늘、”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하여” 본안이 이루어지기 전에 판매금지되게 되었다.

이시점에서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재판의 원고는 나눔의 집에 계시는 할머니 아홉분 뿐이다.

그 중 다섯 분의 할머니의 진술이 결정문에 있었다. 그런데 속아서 가거나 한 경우를 인용하면서도, 결정문은 전부 “일본군의 강제연행”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런 식의, 너무나 거친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은, 아마도 , “강제연행”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결과일 것이다. 책에 없는, 원고측이 멋대로 요약한 얘기를 내가 쓴 것처럼 정리해 둔 이 글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래도 “명예훼손이 될 수 없고 해결을 위한 방안제시”임을 인정한 부분도 있었다. 사실 그래서 이 결정문이 아직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결론
2014년6월, 100여곳을 허위라며 고발했다가 10월에 53곳으로 줄였던 원고측 삭제요구는 재판부에 의해 34곳으로 줄었다. 삭제하면 출판해도 좋다고 하지만, 물론 나는 단 한곳도 삭제 생각이 없다. 조금씩, 이들의 요구에 어떻게 답변했었는지 자료를 올릴 생각이다. 결정문에도 있는 것처럼, <시민사회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건전하게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3957406964506

渦中日記 2015/2/13

다섯번째 검찰출두. 그리고 이제 검찰조사가 모두 끝났다.
그들은, 일본을 폭력배들의 세계에 비유했고(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자들을 모아 올것, 그러나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라는 지시를 내리는 국가로),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 말한 일본인들과 내 책을 동일시하며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선 것 아니냐고 했다. 또, 내가 하지 않은 말까지 하면서 내가 한 것처럼 다그치기도 했고( 강제연행 안하는 나라가 전쟁을 일으킵니까?!”) ,한일합방에 관한 생각을 묻기까지 했다. 그들이 정말 고소인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싶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사상검증을 하고 싶어했다.

검찰 정문앞에, 이런 입간판이 있었다.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검사, 아직 젊은 나의 담당검사님이 부디 오늘 보여준 태도와 상관없이 “공평한 검사”이기를.
고발날짜에서 8개월. 이제 곧 기소여부가 결정된다.

이제, 밥이든 술이든 먹어야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6143523721672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2015/2/11

네번째 검찰출두. 명예훼손이니 삭제하든지 판매금지하라고 요구된 53개항목중 12번부터 31번까지 질의응답. 지난번보다는 진도가 많이 나갔지만, 아침10시부터 저녁 6:30분까지 꼬박 했어도 아직 3분의1이상이 남았다. 오늘도 그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피의자”로 지목된 이에게 걸맞는 태도였다.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그에 대한 생각.

1.검찰은 독자적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글 세개를 참고자료로 첨부해 두고 있었다(기소되기도 전에,고소인이 제출하지 않은 자료까지 찾아서 첨부하는 건 일반적인 일일까.)

2.내가 제출한 자료들,예를 들면 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동영상이나 스크립트, 그리고 다른 관련 자료들은 거의 읽지 않은 상태였다(그럴 수 있다고 이해 가능하지만,그렇다면 나에 대해 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게 아닐까).

3.검찰이 첨부한 자료 중엔 이재승교수의 글과, 내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것처럼 고발 직후에 썼던 손종업씨라는 이의 글을 인용한 자료까지 있었다(근거 없는 허위. 그들은 자신의 글이 검찰에서 참고자료로 쓰이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0355563991357

渦中日記 2015/2/10

어제 저녁엔 오래된 지인들을 만나 잠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대부분 한국문학자. 내가 아는 한, 한국인문학에서 학문적으로 열려 있고 앞선 이들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국문학자들이다.
그들 중 한사람이 그랬다. “평상시 같으면 그런 소리는 안 할 사람들이 박선생 책에 대해선 이상하게 편협하고 적대적이더라구. 심지어는 고발당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깜짝 놀랐어..박선생 책이 뭔가를 건드려서 그런 것 같은데 그게 뭘까..”

재판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각각의 의견을 말한다. 그 중에 와 닿았던 건 “법적책임은 분명 없다. 그러나 정치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 생각을 법적책임문제로 지우려 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라는 말이다. 말이 안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생각을 바꿔 어떤 각오를 하게 된 건 그 때부터다.

꼭 그런 대화의 여파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왠지 우울해서 예정했던 일을 접고 다른 일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우울할 땐 집중력이 필요한 일은 하기 어렵다.
그래서, <사회운동>이라는 일본잡지와 했던 인터뷰원고를 체크했고, 찌그러진 채로 놔 두었던 자동차를 수리했고, 번역상후보로 올라온 원고들을 읽었다. 최근 한국문학을 열심히 읽지 않았는데, 김미월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건 오늘의 수확. 네 편의 소설중 가장 흥미로웠다.

이제부터 설겆이를 하고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음악을 들어야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59823527377894

渦中日記 2015/2/3

낮에, 일본의 한 국회의원과 만났다.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일본의 “국회결의”와 한일협의체 설치가 필요하다고 일본어판에 쓴지라(오늘아침 아사히신문에서도 강조),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기꺼이 요청에 응했다. 그리고 많은 대화.

일본과의 만남을 일본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이들도 많은 듯 하지만, 언젠가는 오해가 풀릴거라고 믿는다. 내용여부와 상관없이 호평자체를 문제시하는 곡해는 이어지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일본의 호평이나 긍정적인 반응은 고마우면서도 늘 쓸쓸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55664761127104&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31

하루 늦은 일기를 씁니다.어제 토론회개최를 직간접으로 도와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함께 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한국어판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장정일 선생님의 토론문은 공개를 허락해 주셨으니 이 아래에 붙여 두겠습니다. 일본어 판에 대해 말해 주신 Veki Yoshikata 선생님도 괜찮으시면 자료 이하에 공개해주세요.1부에서 두분의 말씀을 듣고, 2부에서 제가 대답하고 참석해주신 또 다른 분들의 질문에 대답하는형식으로 진행했었습니다.내용이 정리되면 나중에 다시 공개하겠습니다.

이런저런 한계도 보였지만 아무런 연고없는 젊은 분들이 2차 모임까지 참여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의 하나가 아니었나 합니다.
참석해주셨던 분들,미처 말씀하지 못하셨던 이야기나 감상 올려주시면 다른 분들이 분위기를 더 잘 아실 수 있을 듯 합니다. 저에겐 페북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절감한 자리였습니다.
<법정에서 광장으로!>운동에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감사드리면서,1차 보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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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원점’을 직시하기, 혹은 ‘복잡성’을 마주하고서(장정일)

이 자리에서 발제를 하게 된 저는『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2013)에 대해 결코 중립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발제자가 아닙니다. 저는 이미 박유하씨가 낸 두 권의 책에 무척 호의적인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리뷰는 지은이의 와세다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인『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2011)를 읽고서입니다. 그 책은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것으로, 소세키는 타계한 바로 그 해(1916)부터 지금까지 부동의 일본 ‘국민작가’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국민작가’는 스스로의 예술혼이나 작품의 힘만으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1933년, 천황제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죽었던 고바야시 다키지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의 저항적인 문학과 실천 모두가 온전히 평가되지 않았던 반면, 천황제나 일본제국주의에 순응적이었던 소세키의 ‘자기 본위주의’는 마치 천황제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나 했던 양 예찬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명백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어느 작가가 국민작가가 되고 말고는, 그를 국민작가로 주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나라의 역사적 맥락 때문입니다. 이 말을 널리 알려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국민작가란 (전례에 따라) 의례히 그렇게 있어왔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국민작가가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결론은 ‘국민작가란 원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들리지만, 국민 작가가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국민작가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태도와는 매우 다릅니다.『제국의 위안부』를 이야기하면서 다시 나오겠지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상(像)은 만들어졌다!’라는 주장과, 일본 우익이 말하는 것처럼 ‘군 위안부 따위는 없었다!’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소세키가 ‘만들어진 국민작가’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지은이는 소세키의 작품 바깥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라는 제목,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로 읽는 근대’라는 부제가 암시하고 있듯이, 소세키라는 국민작가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서 지은이는 문학만 아니라 역사학․사상사․여성학 등을 폭넓게 연구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사정은 오늘의 인문학이 분과 학문이 아니라, 학제 연구라는 것을 새삼 확인해 줍니다. 분과 학문에서 학제 연구로의 이런 변화는, 이제 문학만 연구하는 문학 연구자, 역사만 연구하는 역사 연구자, 사상사만 연구하는 사상사 연구자, 여성학만 연구하는 여성학 연구자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의 말을 여기까지만 듣고도, 제가 다음에 하고자 하는 주장을 미리 눈치 채신 분도 계실 겁니다.『제국의 위안부』에 반감을 가지신 분들 가운데는 ‘당신이 무슨 역사학자냐?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은 비전문인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작금의 문학 연구는 문학 연구에 그치지 않으며, 다른 학문의 사정도 그러합니다.『제국의 위안부』가 지은이의 전공인 일본근대문학과 전혀 상관없지 않다는 것은 다무라 다이지로가 쓴 단편소설「메뚜기」(142~150쪽)에 대한 분석으로도 증명되지만, 그 대목이 없었다하더라도『제국의 위안부』는 오늘의 문학 연구가 ‘문서를 읽는 모든 일’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또한 이 책에는 박완서의 단편소설「그 여자네 집」, 이현세의 장편 만화『남벌』, 텔레비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각시탈>,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에 대한 짤막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뜻에서 저는『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와『제국의 위안부』사이의 거리는 그리 크지 않으며, 두 책이 똑같이 만들어지는 ‘민족 정체성’과 ‘젠더 억압’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리뷰를 쓴 바 있습니다. 발제문을 쓰기 위해 그 리뷰를 다시 보니, 지면의 제약과 계몽적인 절차 때문에, 이 책이 가진 가장 뜨거운 쟁점(문제)을 지은이만큼 날카롭게 드러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발견한, 아니, 저보다 먼저 그 뜨거운 쟁점을 발견해서 그것을 법정으로 가져간 사람들에 따르면, 이 책의 두 가지 문제(쟁점)가 있다고 합니다. ①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당하지 않았다(이런 주장은 27, 33쪽부터 나오다가 “‘위안부’들을 ‘유괴’하고 ‘강제연행’한 것은 최소한 조선 땅에서는, 그리고 공적으로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38쪽에서 명백해 진다. 그러나 방금 인용한 쪽에서도 “군인이나 헌병에 의해 끌려간 경우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라고 썼듯이 ‘강제성이 없었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항상, ‘경찰이나 군인에 의한 강제 연행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이라는 유보 단서를 달고 있다. 42, 50, 51, 110, 111, 152, 291~292쪽이 대표적이다). ②위안부는 일본군과 동지적 의식을 나누었다(67쪽에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고 처음 나오며, 75, 162쪽 등에서 볼 수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두 대목은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했다’는 생존 위안부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 ‘군위안부 따위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일본의 극우의 주장을 닮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했다’는 생존 위안부의 증언을 부인하거나 거짓말이라고 반박한 경우가 없습니다. 지은이는 그것이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51쪽)라고 말할 뿐입니다.
일본 극우는 ‘강제연행은 없었다, 하므로 군위안부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지은이는 이 책의 서두 여러 곳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타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임으로써 [군위안부라는]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은 이 문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5~26쪽),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잇는 것은 분명하다.”(49~50쪽), “그녀들을 만든 것이 식민지지배 구조라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91쪽) 식민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는 일본 우익이 이런 주장을 하겠습니까? 극우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은이의 주장 ①은 식민지 조선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원점(原點)’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일제는 전쟁 말기에 초등학교 선생이 군도를 차고 수업을 할 정도로 엄한 통치를 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치안․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군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습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입니다. 이런 조직을 유지하고, 그들을 하수인으로 부리지 않을 바에는 뭐하러 조선총독부를 세웠겠습니까? 일본은 중국과 남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한 명의 군인도 아까운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 군인을 보내서 마치 ‘보쌈’하듯이 강제연행해본들 얼마나 하겠습니까?
가끔씩 한국 신문을 보면, 한국의 연구자나 외국의 연구자에 의해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라면서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발굴된 자료가 대서특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은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전쟁터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처럼 보인다.”(158쪽)라는 지은이의 주장을 더 잘 뒷받침해 줄 뿐, 조선의 일반적인 상황을 나타내 주지는 않습니다. 조선은 무법이 활개를 치는 전쟁터가 아니었던 데다가, 일본 내지는 물론 일본군을 위한 자원과 식량을 생산하는 중요한 병참입니다. 형식적으로 마나 내선일체를 흉내 내어야 할 일본이 군경을 동원하여(물론 그들만의 법이겠지요), 강제연행을 저지른다면 조선인의 대대적인 저항을 사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일제시대에 각계각층에서 활약한 일선동조론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어쩌자고 그들이 저런 만행을 눈뜨고 보면서도 일선동조를 주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은이가 군위안부를 모집하는 데 일본 군경에 의한 강제연행보다 “마을 내부 사람”(39쪽), “동네 사람”(41쪽), “우리들 자신”(52)이 하수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런 근거에서입니다.
지은이의 주장 ①이 식민지 조선의 성격 혹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전략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원점’ 해석과 연관되어 있다면, ②는 우리를 일본군 위안부의 ‘복잡성’과 대면하게 합니다. ②의 주장은 이 책의 제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책 제목에 나오는 ‘제국의 위안부’는 누구를 주체로 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이 제목은 자칫 위안부를 주체로 ‘위안부들 스스로가 자신을 제국의 위안부로 생각했다’로 해석되기 쉽지만(그렇게 해석되는 대목도 있다), 실제로는 일제가 주체입니다. (방점 필자) “국가가 일본인을 비롯한 ‘제국의 위안부’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역할은 […] 성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군인을 ‘후방의 인간’을 대표하여 ‘전방’에서 ‘위안’까지도 요구되고 있었다.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것은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이었지만, 그러한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 – 자기 존재에 대한 (다소 무리한) 긍지가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61쪽), “가족과 고향을 떠나 머나먼 전쟁터에서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 군인들을 정신적․신체적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 그 기본적인 역할은 수없는 예외를 낳았지만,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요구된 ‘조선인 위안부’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65쪽) 요즘 말로 하자면, 일본군은 군위안부에게 육체적 봉사에 그치지 않고, ‘감정노동(착취)’까지 요구했는데, 이 요구야말로 군은 물론 남성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지금껏 원해 왔던 게 아니었는지요? 그 결과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다는 분석도 나오게 된 바, 그것은 일본군과 남성 일반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감정 노동의 압박을 도외시하고는 옳게 납득될 수 없으며, 그 처지에 놓인 군위안부 여성의 절박한 생존법을 헤아리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뜻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주체는 절대 위안부(여성)로 오독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군위안부들의 (윤색되지 않은)초기 증언, 즉 일본군 군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센다 가코의『목소리 없는 여성 8만 명의 고발, 종군위안부』(1973), 한국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증언집)』(한울,1993~1999), 미국 정부 전쟁정보국이 전시에 포로로 보호한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한 보고서 등을 보면,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한’, ‘나이 어린’ 일본군 위안부상과는 다른 위안부들의 증언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착각을 한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위안부상은 “하나의 이미지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는 다양한 측면”(19쪽)을 없애버리고 “아직 어린 10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노예처럼 성을 유린당한 조선의 소녀”(17쪽)로만 고착되었을까요? 한일 사이의 풀리지 않는 과거사 청산 문제가 한국인의 ‘피해자성’을 부채질하고, 거기에 대한 반동이 일본 우익을 혐한으로 극우로 몰아가는 것일까요?
이 발제문을 쓰기 위해『제국의 위안부』를 재독하면서 저는 이 책의 꼬투리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했고, 실제로 많은 꼬투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잠시 나왔지만, 한국이 위안부의 피해자성을 너무 내세우는 바람에 선량한 일본인들까지 혐한과 우경화로 내몰았다는 주장(203, 314쪽),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온 피해자였다면 일본 군인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머나먼 이국땅으로 ‘강제로 끌려온 존재’였다.”(74쪽)는 주장(이 주장에 대해서는 필자를 대신해서 약간의 변명 섞인 부연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위안부 문제에서 식민지의 구조적 강제성과 “가부장제의 강제성”(26쪽)을 동렬로 놓는 주장 등이 그렇습니다. 이 꼬투리들은 앞으로 좀 더 심화된 연구를 필요로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인 군위안부 문제를 둘러 싼 한일간의 사죄와 보상 문제를 거론한 3부와 냉전 종식과 군위안부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4부에 대해서는 요약과 발제를 생략했습니다. 먼저 저는 현실 정치가 관련된 2․3부는 한일 사이에 ‘하나’가 아닌 ‘여러’ 위안부상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있기 전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속단이겠지만, 이번 세미나에서 위안부의 실체를 놓고 논의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54028347957412

渦中日記 2015/1/30

어제 무리했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안 좋아, 검찰에 전화해서 다음으로 미루어 달라고 했다. 다음주엔 시간을 낼 수 없어서, 그 다음주로 일정을 다시 잡았다.

어제의 형사와 검사는 “조선인 위안부는 매춘부가 아니다”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반대로, 일본인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고 믿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발”의 이중성과, 일본인여성들 역시 속아 끌려간 이들이 많고 하루에 수십명씩 상대하는 일이 있었다고 설명해도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어제 가장 힘들었던 건, 담당자들의 태도보다도, 비좁은 조사실에서 그런 설명을 하는 아이러니를 견뎌야 했다는 점. 2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거대한 인식에 맞서는 일은, 외로워서 서글프기보다는, 서글퍼서 외로웠다.

문제는 이런 류의 반응을 뒷받침하는 것이 매춘에 대한 차별이라는 사실. “순수한 소녀”에 대한 집착도, “매춘부멸시”도 양쪽다 매춘을 하게 된 이들을 차별한다는 점에서 적대적공범이다.
나는 매춘은 가능한 한 없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들어서게 된 이들에 대한 차별에도 반대한다. “강제로 끌려간 소녀”에 우리사회가 집착하는 한 위안부할머니들에게도 “해방”은 오지 않을 테니까.
(내일, 책에 대한 토론회를 합니다. 아직 추울 것 같지만, 페친 여러분들, 뵐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5280263474665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29

세번째로 검찰에 다녀왔다. 이번엔 수사과가 아닌 형사과.

내용은, 지난번에 다 대답했고 서류까지 작성된 50여개 항목에 대한 반복질문과 약간의 추가질문. 나는 문간에 있는 나이든 계장에게 조사를 받았고 아직 젊은 검사는 안쪽 책상에 앉은채로 간간이 말을 섞었다. 책을 읽었다는데도 모멸감을 느낄만큼 적대적이어서 오랫만에 화들짝 “바깥세상”을 만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사람좋게 생긴 계장도 검사에 맞춰 내 답변에 대한 반박과 부정. 원고들의 질문 이상으로 왜곡된 질문을 잇달아 날렸다. 그들은, 원고측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그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검사는 심지어 “전쟁을 수행했다”는 표현은 “자발적”이었다는 뜻이냐고 추궁했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그림을 출력해서 보여 주면서, 이런데도 일본군이 위안부를 죽이지 않았다는 말이냐고 추궁했다. 올리기는 끔찍한 그림이라 안 올리지만, <… 가 (위안부를) 목을 잘라 국 끓여 먹으라”고 말했다>고 북한출신 위안부할머니가 말한 증언을, 실제로 국끓여 먹은 것처럼 그렸던 그림이다. 원고측자료가 아니니, 검사 자신이 그런 자료의 영향을 받았던 듯 하다.

그들에게 난 “강제로 끌려간 조선소녀”를 “자발적으로 간 일본인위안부”와 똑같이 취급하는 불온한 사람이었다. 가부장제나 업자의 책임을 거론하는 일로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켜 보려 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일제시대때의 “비국민” 취급.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52365901456990

渦中日記 2015/1/28

더이상 머리를 방치하면 안될 것 같아서, 만사 제치고 미장원에 다녀 왔다. 꼭, 내일과 모레, 이틀동안 검찰에 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래도, 내 책을 가열차게 비판했던 몇몇 남성학자들에 따르면 “위험/위태/교묘/모호/집요”해서 “혼돈/착종/몰입/흥분/종교적/연막”속에 있다는 책의 저자, 나라팔아먹을 위험한 여자로 보이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아주 없진 않았다. 다소곳한 “민족의 딸”이기를 거부한 것으로 보였을 여자에 대한 그들의 혐오는, 다시 보니 많이 깊었다.

경리단길에 있는 이 작은 미장원에는, 개같은(사람을 잘 따르는)하얀 고양이가 있다. 그런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신장염으로 수술하고 휴양중이라고 했다.
아직 어린, 아픈 고양이 얘기가, 오늘따라 아픈 사람만큼 아프게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도 날이 추워서였을 것이다. 아픈 이들과 아픈 동물들이, 빨리 나아 따뜻한 봄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51810954845818&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26

고발직후부터,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소송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시고, 저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 주셨던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판매금지가처분판결을 앞두고, 이 책을 공론화해야 한다는 운동을 시작합니다. 함께 해 주시고, 많이 공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게는 판결이 나오는 날 이상으로, 오늘이 의미깊은 날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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渦中日記 2015/1/21

비교문학자 니시마사히코 (西成彦)선생이, 2월에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대학에서 내 책을 대상으로 심포지엄을 연다. 마침 어제 일본신문에 다른 책과 함께 책에 대해 다루어준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토론자로 나서 주기로. 나리타류이치선생(成田龍一)이나 이와사키미노루선생(岩崎稔)등, 가까운 지인학자들도 동경에서 일부러 와 준다고 하니 깊은 논의가 가능할 것 같다.
전체 테마는 <한일경계를 넘어서–제국을 대하는 방식>. 최근에 <제국의 어둠>이라는 책을 낸 김항선생의 책도 같은 테마로 묶어 논의한다고 한다.

우에노선생은 9년 전에 쓴 책<화해를 위해서>일본판해설을 써 주었던 분이다. 그 때는 내 책이 <뜨거운 불 속의 밤을 줍는 행위>(일본어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직역)이라 했는데, 이번엔 <불 속에 직접 뛰어 들었다>고 표현했다. 고발당한 건 그 결과일 수 있겠지만, 나로선 고발이후 비로소 나를 덮쳐오는 <뜨거운 불>을 만났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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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裕河さんの『帝国の慰安婦』日本語版(朝日新聞出版)が刊行されて3か月余りがたち、多くの読者がこの本を手に取り、さまざまな反応を見せ始めている。
戦後70年の年にもあたる今年、私たちは「帝国日本」への向き合いを新たな形で求められており、その点では、東アジアの私たちすべてが、この課題の前で平等だ。
「慰安婦問題」ひとつをとってみても、それは「帝国日本」が招き寄せた問題であった。日韓で平行線をたどっているかに見えるこの問題に対して「共通の視点」をさぐりあてるための意見交換の場としたい。

立命館大学・公開ワークショップ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
2015年2月22日(日)14:00-17:30
〈「帝国の慰安婦」という問いの射程〉
場所:朱雀キャンパス2階203教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朴裕河(世宗大学校)、平井和子(一橋大学)、森岡正博(大阪府立大学)、上野千鶴子(立命館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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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お、同企画は、下記企画と対をなすものであり、合わせて皆様の来場・参加をお待ちしている。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第1回「帝国の擬人法」
2015年2月12日(木)15:00-17:30
場所:衣笠キャンパス末川記念会館第3会議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金杭(延世大学校)、 沈煕燦(立命館大学専門研究員)、原佑介(日本学術振興会特別研究員)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46280138732233&set=a.578003518893233.146371.100000507702504&typ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