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4/11/7-3 – 언론중재위원회 후기

언론중재위원회 후기

언중위 끝나고 곧바로 송현상&류근 콘서트에 갔다가 밤늦게 귀가했고 토요일에도 오전에 인터뷰, 오후에 회의와 모임이 이어져 언중위 결과를 쓸 틈이 없었다. 밀린 방학숙제 하는 기분.

심리실에 들어가 중재위원 다섯사람과 마주앉으니 네 곳의 언론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내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고발직후의 보도와 한달 후 쯤에 나온 <화해를 위해서>관련 보도에 대한 신청이었는데 결국 같은 문제로 중재부는 판단한 듯. 이미 합의가 된 연합뉴스는 합의사항을 확인 후 먼저 퇴장. 조선닷컴도 내 주장을 전면적으로 인정했다. 9개나 되는 반복기사를 삭제 후 연합뉴스가 작성할 반론기사를 실어주기로 하고 퇴장.

그런데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데스크가 180도 바꾸어 <화해를 위해서>가 “일편향”이었다고 실었던 한국일보는 의외로 강경했다. “기자가 책을 읽은 이후의 판단”이라는 것.
하지만 위원들은 객관적이어야 할 언론의 본분을 벗어난 것이고 “일편향 논란”이라는 말은 이미 부정적가치판단이 들어간 것이라고 질책했다. 그리고 결국 한국일보도 본부와의 통화후 승복. 큰 틀에서 연합뉴스의 조치대로 하겠다고 했다. 한겨레는 해당뉴스가 연합뉴스를 전재한 것일 뿐이라며 연합뉴스의 조치에 따르겠다고 했다.

사실은 “일편향”이니 “일본우익대변”이라는 식으로 원고측 주장을 그대로 실었던 언론에 대해서는 공식사과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에 없는 사과를 강요할 수는 없다 해서 양보. 결국 반론기사 말미에 해당기사가 언중위의 중재를 거쳐 나오게 되는 것이라는 문구를 넣는 선에서 합의했고 합의내용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신청을 취하하기로 했다.

아주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중재부 위원들이 전면적으로 나의 항의에 귀기울이고 동의하고 나대신 언론들을 질책해 준 것만으로 언론중재신청은 의미가 있었다.
끝나고 나서 중재위 한분이 말했다
“언론사 네곳을 초토화시키셨군요.”
그랬다고 한다면 오로지 합리적인 판단으로 나를 응원해 준 중재위 덕분이다. 언중위 위원들은 판사,변호사,전 언론인,언론학교수등으로 구성. 이 나라의 상식과 양식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기뻤던 날.

http://www.hankookilbo.com/m/v/0b72c2b43ac04f47889767571fbd1930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93993710627543

渦中日記 2014/11/7-2

언론중재위원회 심리에 참석하러 다시 왔다. 그 전에 연합뉴스와 인터뷰.

이번에 신청한 곳은 네 군데다. 연합뉴스는 왜곡된 원고측 자료를 내게 확인 없이 처음으로 내보내 온갖 매체들이 받아쓰기 하도록 만든 곳이긴 하지만, 악의는 없어 보여 많이 양보했다. 원래의 6월 15일 기사에 내 의견을 추가하고 따로 반론보도성격의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합의.

기자와의 인터뷰가 끝나면 다시 연합뉴스, 조선닷컴, 한국일보,한겨레와 함께 심리를 받게 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92766940750220

渦中日記 2014/11/3

<제국의 위안부>일본어판이 도착했다. 장정이 마음에 든다. 아마도 단순한 번역이었으면 재판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고발사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번역이 아니라 일본어로 다시 쓴 건 잘한 일이었다.

원래 이 책은 일본정부와 부정파들(한국에선 정부도 부정파와 똑같이 취급되지만)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어로 쓰이기 시작한 책이었다. 그러다가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의 두번째 제안이, 지원단체를 의식한 청와대에 의해 거부되는 사태를 보면서, 한국어책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해 한국어로 이어 쓰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어 책이 먼저 나오게 된 거였다.

돌고 돌아,이 책의 첫부분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서 3년이 흘렀다.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일본인들이 보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 띠지에 쓰여 있는 것처럼, 이 책에 나는, 매춘부니 성노예니 하는 논란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이 문제는 식민지지배가 만든 문제이니 그에 대한 사죄를 담은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썼다.
지원단체와는 주장의 내용도 논리도 방법도 다르지만,더 많은 일본인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였다. 이 책은 어떤 여행을 하게 될까.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90207631006151&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0/31 – 언론중재

꼭 십년 전, <한일,연대 21>이라는 한일 지식인 모임을 조직해서 열었던 첫 심포지엄도, 금년에 <동아시아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멤버와 함께 열었던 모임도, 프레스센터에서 했었다. 이런저런 학술모임이 많아 가끔 가는 곳이지만, 이곳에 언론중재위원회가 있는 줄은 몰랐었다. 금년엔 여러가지로 첫 체험이 많다..

오늘 이곳에서 열렸던 1차 정정보도 중재는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첫번째로 의견을 말한 나이드신 분이 “책을 다 읽고 왔다” 해서 시작부터 감격.

대체적으로 합의를 본 건
1.  처음으로 내보내 다른 매체들이 인용하도록 만들었던 문제의 기사에, 나의 의견을 추가
2. 이와 별개로 반론보도 게재
3. 추후 재판보도때 내 쪽 의견도 공정하게 반영

정도의 내용. 반론 기사가 나간 후에 최종합의를 하기로 했다.
함께 참석해 방청했던 정종주대표님이 메모를 작성해 주셨다. 다음주엔 연합뉴스/조선닷컴과의 2차 중재와 다른 언론사와의 1차 중재 예정.

아직, 페북을 어떻게 자아아아아알 쓸 수 있는지 모른다. 오늘은 그냥, 난생(그렇다, 인간은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 같은 존재(이고싶)다)처음 가본 언론중재위에서 오고간 얘기를 남겨두고 싶다. 한때 3류기자였던 자의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다만 뱀다리: 이거, 내가 방청석에서 한 메모의 정리다. 법적 효력 없고, 자의적 해석 환영하지 않는다. 그저 내 나름으로, 지금 가능한 선에서 남겨두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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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제국의 위안부> 판매금지등 가처분신청, 민형사소송 제기 관련 언론 기사에 대한 정정(반론)보도 등 조정신청 건

2010. 10. 31. 16:00 프레스센터 15층 언론중재위원회 심리실,
제3조정부 1차 조정기일

-디지털조선일보 불출석
-연합뉴스 전국부장 출석

중재부장: 아침까지는 합의가 됐다니 취하되나 생각했는데요…

신청인 박유하: 월요일에 통화를 하고, 어제도 통화를 했는데, 연합뉴스의 전화한 분은 윗선과 상의해서 연락한다고 한 상태….

중재위원-(1 *숫자는 그냥, 앉은 순서대로 왼쪽부터): 마침 주변에 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읽어봤는데… 학문적으로 컨퍼런스에서 디베이트할 성질의 것이지, 매도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연합뉴스) 기자가… 시각차가 있는 문제인데…
(*아무래도 신청인 쪽 인간의 메모인지라 소홀한 점, 양해 바람.
솔직히 말해 그리 건질 말씀도 없었지만.)

중재부장(중재위원-3): .. 명확하게 잘못했다는, 그러니까 정정보도에 그렇게
‘사과’를 넣으면 어떻겠어요..

신청인: 원고 쪽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긴 거고,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이…

중재위원-(2): 언론인은 ‘언론의 자유’를 아주 중요한 문제로 민감하게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관해서는 콤플렉스(?.. *정확하지 않음)를 갖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비슷한)
학문적 소견을 낼 수 있는데…
과장된 보도로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를 막아버리는 행태는…

(신문사에 뉴스를 송신하는 통신사인) 연합뉴스는 특히, 객관적으로 팩트를
보도해야 하고,
소송 관련 보도라면 책도 읽고 저자 인터뷰도 하고 해서 써야지..
(항상 부풀려지더라…)

중재위원-(4): 그럴 목적, 의도는 아니었다고 믿지만,
기사라는 것이 어떤 아이템의 선정, 팩트의 선택-나열-순서, 어디에 강조를
두느냐 하는 액센트라는 측면에서…
오보라 나올 수 있다. 객관성과 공정성, …이 결여된…

뭘 근거로 기사를 이렇게 강하게 써서 분란을 일으킨 것이냐,
(소송 취지와 기사를 보면–*정리자 보충) 부분적으로 왜곡된 거고,
일부 팩트는 오류가 있는 것 같고…
(…)
명백하게 잘못한 건, 정정하는 게 맞고,
주장 차이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의견을 실어주는 게 맞다.

중재부장: 연혁으로 보면, (헌법에-*정리자 보충) ‘언론의 자유’보다 ‘학문의 자유’가
먼저 규정되었다.(…)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학자의 주장을 매도하는 건(…)

(… *피신청인 쪽의 발언,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정-수정-반론보도를 할 것인지,
그리고 신청인의 요구들을 둘러싼 중재위원들과 신청인/피신청인들의 실무적인 논의…)

중재부장: 원래의 기사 밑에 ‘정정보도문’을 붙이는 게 전형적이지만,
피신청인이 원래 기사(6월 15일자, 소송 제기 보도기사)에서 신청인(저자)이
이의제기를 하는 부분을 삭제해 기사를 대체하고,
신청인의 반론 보도자료를 가지고 반론 기사를 싣는다고 하니,
양자가 문장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합의를 하도록 하라.
일단 다음 기일은 1주일 뒤, 인터넷한국일보 건 논의하는 시각으로 잡겠다.

신청인: 반론 기사가 분량도 취지도 아주 축소되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중재부장: 양자가 구체적인 문안까지 합의하고
(*중재위에서? 중재위원들이?–명확하게 듣지 못함)
서명을 하면, 그대로 실어야 한다. 1주일 뒤로 기일을 잡아둘 테니,
두 분이 문안을 잘 만들어보라.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8422787851302

渦中日記 2014/10/30

원고측이 고발하면서 언론에 보냈던, 반은 거짓인 보도자료를 나에게 확인 없이 보도해 전국민의 분노를 사도록 만들었던 언론들에 대해 정정보도를 요청했었다.
어제, 그중 일부가 내 요구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합의안을 제시해 왔다.(언론 중재위라는 곳, 일처리가 신속하고 아주 친절했다. 신선한 발견.) 오늘 생각해 보고,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를 알려 주어야 한다.

강의도 세과목이 있고 성적도 내야 하고 저녁엔 오랫만에 보고 싶은 얼굴 보러 방배동에도 가야 한다. 오늘도 몸과 마음이 바쁜 날.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7486677944913

渦中日記 2014/10/29

<총체적 우울>
87세의 일본인목사님이 만나자 하셔서, 종로YMCA에서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왔다.
오야마레이지 목사님. 제암리교회사건에 대한 사죄운동을 펼쳐 재건되도록 힘쓰신 분이다. 2012년여름, 와세다대학에서 강연했을 때 아드님 며느님을 대동하시고 와 주셔서 처음 만났는데, 이후 해마다 사진이 들어 있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 주신다.
이제 고작 두번째 만남인데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만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그 분이 자신이 겪었던 고충을 얘기하시면서 “당신이 옳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알게 될 거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단지 옳다는 것이 증명되기 위해서라면 너무 힘들다…고 순간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분이 나보다 삼십년이나 위이시고 목사님이라는 것이 나를 방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겐 지금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의 배경과 구조가 명료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걸 전부 말하지는 못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고작 고발장에 대한 반박이나 그 고발장의 생각을 지지하고 실제로 지원하는 이들의 사고의 문제를 지적하는 일일 뿐이다. 그나마도 충분하진 않고, 나머지 부분은 내 안에 쌓인다. 내 손과 체력이, 혹은 이런저런 배려들이 그걸 다 말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요일에 느긋한 내용의 포스팅을 했더니 한 페친이 가끔은 그런 글을 올리라 하셨다. 그러겠다고는 했지만 최소한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나는 근본적으로는 “총체적 우울”의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설사 변호사님 말씀대로 “즐겁게, 유쾌하게”싸운다 해도.

사태 이후 내가 페북에 쓴, 일상으로 돌아왔다던가하는 식의 글들, 다른 이의 포스팅에 다는 댓글을 포함해서, 밝다 못해 경박해 보일 수도 있는 글들은 어떤 의미에서 내겐 우울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 부분도 있다. 평온을 유지하기 위한. 내 몸을 그곳에 두고 싶은, 밝고 고요하고 깨끗한 영혼들에 대한 화답. 내가 변함없이,늘, 씩씩하기를 바라는 그들에게 전하는 안부.

그러나 나는 때로 씩씩하고 때로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건, 교보문고에 내 책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고 페친이 알려줘도, 기쁘기보다 그 책을 향한 적의를 동시에 느껴 버리는 식으로 내 영혼이 총체적 우울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정권, 세월호사태, 이웃과 사회의 이런저런 소식들. 2014년의 한국은 나에 대한 고발사태가 아니어도 우울할 수 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러니 우울에 짓눌리지 않고 또다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건 거의 의무일 지경이다.
누군들 그런 우울에 빠져 보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학대, 이웃과 상사의 경멸, 선생님과 친구와 애인의 무관심등, 태어난 이후로 우리는 수많은 노골적이거나 눈에 띄지 않는 폭력을 견디며 살아왔고 살아간다. 언젠가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

” 총체적우울” 속에서도 우울증에 빠지지는 않도록, 그럼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해 주는 건 사람이고 자연이고 문화-표현들이다. 과거와 현재의 또다른 삶들을 보여주는.
그 중에서도 사람들–생각하고 유보하고 사태를 밝은 눈으로 보려 하는 동시대의 그들을 나는 “지성”이라 부르고 싶다. 인류역사–폭력적인 사회에서 언제고 작지만 꺼지지 않는 빛이 되었던. 그래서 주변사람들에게 언제고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살아갈 힘을 주었던.

악의와 적의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재판에 이기는 것보다 그게 내겐 더 중요하다. 세상의 폭력은, 인간이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걸 모르는데서 일어난다.

오야마목사님이 당신이 30년 걸려 번역하셨다는 성경을 주셨다. 고발사태에 대해 모르고 오셨는데 이 시기에 성서를 받았다는 것이 우연같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오야마 목사님이 말을 잇지 못하는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해 주셨다. 신자는 아니지만 나도 눈을 감고 빌었다.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이 아름다운 가을날, 부끄러운 이야기를 고백하는 이유는, 내일이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이 그런 날.)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8696407466384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0/24

어제는 성균관대학에서 작은 세미나를 하고 왔다. <제국의 위안부>를 테마로 한 모임으로는, 출간 이후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한번 서평회를 열어준 것에 이어 두번째, 고발사태 이후로는 첫번째인, 내게는 역사적(!)인 초청이었다. 같은 성균관대에서 열린 다른 연구회에서는 작년에 내 책을 대상으로 논의했다는데 나를 부르진 않았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내겐 아주 중요해 보인다.

그저께, 두번째 재판이 있었다. 출석을 심각하게 고려했는데 변호사님을 비롯한 주변친지들의 만류도 있어 결국 나가지 않았다.
꼭 할머니들의 고성을 듣고 멱살을 잡히는 장면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다(원고측은 그걸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가능한 한 보지 않은 채로 있고 싶은 심경. 그게 강했다. 그리고 참석한 이들의 참관기를 들어보니, 그날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책을 출판한 탓에 졸지에 “피고”이자 “채무자”라는 호칭을 얻게 된 정종주대표가 이번심리에 맞춰 멋진 답변서를 제출해 주었다.
몇년전 어느날, 나는 그가 내 친구와 논전을 펴는 장면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과연 굴지의 법대출신답게 치밀한 논리력의 소유자라는 걸 알았다. (그 때 그와 논전을 펼쳤던 초등학교 동창과, 고발사태이후 페이스북에서 만났다는 아이러니.)

그의 글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때의 논전이 다시 생각나는, 섹시한 글. 태그되었지만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해서 다시 올린다.
정대표와 만난지 어느새 14년. 그리고 그와 나는 지금 함께 “피고”의 신분이 되었다..

<제국의 위안부> ‘사태’와 관련된 이런저런 일 때문에 그동안 알맹이 없음을 핑계로 안 하던 페이스북에 가입했으나 여전히 알맹이 없어 아무것도 없는 맹탕이었던 이곳에, 오늘 열린 ‘도서출판등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신청’ 2차 심리를 앞두고 재판부에 냈던 ‘채무자 정종주’의 진술서를 올린다. 원래는 초안이었으나, 제대로 채울 틈이 없었던.
어쨌든, 소박하나마, (‘단순가담자’^^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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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비 서 면

사 건 2014카합10095 도서출판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

채권자 이옥선 외 8

채무자 박유하 외 1

위 사건에 관하여 채무자 정종주는 다음과 같이 심문을 준비합니다.

다 음

1. 채권자 측의 ‘신청 취지’ 및 ‘신청 이유’에 대하여

(1) 채무자들의 대리인이 2014년 7월 8일자로 제출한 「답변서」 및 답변서와 함께 채무자 박유하가 제출한 참고자료 「도서출판 금지 가처분신청에 대해서」, 그리고 2014년 9월 3일자로 대리인이 제출한 「준비서면」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 답변을 원용합니다.

(2) 그중에서도 특히 채권자들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의 근거로 들고 있는 대표적인 표현, 즉 ‘매춘으로 매도’하고, ‘일본군/일본제국의 동지이자 협력자로 매도’하고, ‘성적 착취와 학대를 당한 피해자임을 부정’했으며, ‘허위사실’로써 채권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장은, 채무자 박유하의 진술과 준비서면을 통해 명백히 사실 무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320쪽인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108개소를 명예훼손의 근거로 적시하는 채권자들(의 대리인 혹은 지원자)의 주장은 심각한 오독이거나 어떤 특정한 정치적 의도 또는 이해관계가 개입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 백보천보 양보해서, 설사 채권자들이 이 도서의 내용에서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이 책이 법학 원론과 판례를 통해 확립된 ‘위법성 조각 사유’인 ‘진실한 사실’을 담고 있고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책이라는 점 또한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채권자들의 신청은 기각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출판의 경위에 대하여

본 채무자는 출판인입니다. 따라서 먼저 이 도서를 출판하게 된 경위, 그리고 채무자 박유하 교수의 문제의식에 대한 본 채무자의 이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본 채무자가 저자인 채무자 박유하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5월경의 일입니다. 2년 동안의 일본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 외국인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출판사 (주)사회평론의 편집주간 직을 맡은 본인에게 처음 주어진 원고가 박유하 교수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초고였습니다. 저자는 게이오(慶應) 대학과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했고, 귀국 후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웅진출판)를 기획-번역하고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같은 일본의 지성을 소개하는 작업을 해온 저명한 일본/일본문학 전문가였습니다. 그 책은 본 채무자가 편집을 맡아 2000년 8월 1일자로 출간되었고,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일본은 없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들의 허실에 대해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한 책으로서 언론의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사직한 이후인 2004년 4월에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역시 같은 (주)사회평론에서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2) 본 채무자는 2001년 말에 출판사 ‘뿌리와이파리’를 창립했고, 2005년 9월 30일자로 박유하 교수의 전작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의 출간은 본 채무자에게는 뿌리와이파리의 ‘동아시아(한․중․일) 민중의 진정한 상호이해와 공동의 미래를 향한 우호협력’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관심들은 『공자의 식탁―중화요리 4,000년의 문화사』,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향하여』(2002), 『민족은 없다』(2003), 『한시와 일화로 보는 꽃의 중국문화사』,『해삼의 눈』,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옥황상제에서 서왕모까지, 도교의 신과 신선 이야기』, 『미녀란 무엇인가―중․일 미인의 비교문화사』(2004), 『일본불교사』(2005), 『돈가스의 탄생―튀김옷을 입은 일본근대사』, 『자이니치(在日),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요시카와 고지로의 공자와 논어』(2006), 『한일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히스토리』(2008),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요시카와 고지로의 두보 강의』(2009), 『일본국헌법의 탄생』(2010), 『근대 도시공간의 문화경험―도시공간으로 본 일본근대사』(2011) 등등의 책을 관통하며 ‘뿌리와이파리’에서 출간된 도서 130여 종의 중요한 한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자 박유하 교수는 『한일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히스토리』의 지은이인 한일 지식인들의 모임 ‘한일, 연대 21’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3)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는 한일 간의 ‘화해’를 가로막고 해묵은 갈등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가장 첨예한 현안 네 가지에 대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비판적인 제언을 한 책입니다. 이 책의 출간 ‘경위’는 간단합니다. 출판인인 본 채무자가 친분이 있는 저자에게 좋은 책을 한 권 써달라고 부탁했고, 그 부탁이 마침 저자가 관심을 가진 주제, 즉 한일 간의 ‘화해’를 위해 한국/일본의 시민과 지식인이 한국/일본 사회의 일반화된 ‘이미지’와 인식틀을 깨고 함께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 싶다는 의지와 만나 원고를 쓰고 편집해서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대단히 논쟁적인 주장을 편 까닭인지 이 책은 한국에서는 3,000부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다음해인 2006년의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었고, 일본어판(헤이본샤平凡社 발행)은 아사히(朝日) 신문사에서 수여하는 권위 있는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논단상’을 한국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최초로 수상하는 등 그 문제의식과 ‘용기’를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4) 다만,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가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가 워낙 민감하고 의견 대립이 첨예한 데다가, 저자의 주장 또한 대단히 근본적이고 (한일 양국의 기존의 인식과 주장들에 대해) 비판적인 까닭에, 한국의 이른바 진보와 보수 진영에서도, 일본의 진보와 보수 진영에서도, 다양한 찬성과 반대의 주장들이 나오고 비판-반비판과 논쟁이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5) 그런 가운데, 저자 박유하 교수가 연구년 등으로 미국과 일본에서 체류하며 연구하고 있었던 2011~12년 사이에도, 교과서 문제,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문제, 독도 문제(바로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가 다루고 있는 현안들입니다.) 등을 둘러싸고 한일 관계는 더욱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동안에도 일본 아사히 신문사의 웹논단 ‘론자(論座)’에 일본인 독자들을 향해 ‘위안부 문제’ 관련 글(이 내용도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 약간 수정되어 실려 있습니다.)을 연재하는 등 한일관계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오던 저자는 ‘위안부 문제’를 다시 한번 총체적이고 구조적으로 조명하고 그 해결책을 한일 양국의 독자들과 함께 모색하는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본 채무자에게 연락을 해왔고, 본 채무자는 원고를 보내달라고 응답했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5~9쪽의 ‘서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6) 2012년 11월경에 초고를 받은 본인은 민감한 사안을 다룬 책이기에 본 채무자가 직접 편집작업을 맡기로 했고, 저자가 서너 차례에 걸쳐 원고의 구성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보충하는 과정에서 긴밀하게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2013년 7월 22일자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출간했고, 8월 초순에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국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에 큼직하게 소개되었습니다. [이하, 경향-동아-한국일보 서평기사 링크: 여기선 삭제함]

(7) 이 책의 문제의식은 책 뒤표지의 글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하여!

위안부 문제는 왜 20년이 되도록 풀리지 않는가
이 책은 그 원인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그 ‘복잡한 구조’를 해부한다

● ‘강제로 끌려간 20만 명의 소녀’라는 인식은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업자의 소거, 예외적인 사례의 일반화된 수용에 의해 만들어진 상이다.
● ‘위안부’의 불행을 낳은 것은 식민지배와 가난과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고,
그들의 체험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 위안부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의식되지 않았던 ‘죄’와
이미 존재하는 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구별해서 물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국가의 세력확장)의 문제로 다루었다. 근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생각해본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며, 구체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든 것은 ‘냉전’적 ‘좌우갈등’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의 또 하나의 결론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모두가 함께 보는 일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풀고 제국과 냉전이 남긴 문제들을 함께 넘어설 수 있는 ‘동아시아’를 상상하고 기대하면서 이 책을 썼다.”

본 채무자는 저자 박유하 교수의 문제의식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며, 저자의 학자적 양심과 식견, 한일 간의 진정한 상호이해와 ‘우애와 평화의 동아시아’라는 공동의 미래를 향한 열정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책이 ‘위안부 문제’라는 민감한 사안을 다루고 있으며, 20년 동안 쌓여온 한일 두 나라의 다양한 인식 및 이해관계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논쟁적인 글이라는 사실 또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앞장서서 많은 성과를 거둔 한편으로, 현재의 우리 사회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주도적으로 만들어왔고 지금의 운동을 잘못 이끌고 있(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이 책이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대협을 중심으로 한 반발이 있으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의 온갖 문제들이 그렇듯이 ‘위안부 문제’ 또한 비판과 반비판, 토론을 통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제대로 이해하고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에 관한 공론장의 생산적인 논쟁을 통해서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생산적인 토론과 논쟁을 위한 한 학자의 충정과 거기에 대한 본 출판인의 공감의 산물입니다.

3.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그리고 공론장에서 더욱 심층적이고 폭넓게 이루어져야 할 토론에 대하여

(1)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채무자 박유하 교수와 도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은 결코 채권자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할머니들이 이미 아흔 살 안팎의 고령에 이르렀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도 많은 터에 20년이 되도록 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과 반목이 이어지고 심지어 더 악화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의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구조를 규명하고 한일 양국과 두 나라 국민들이 어떻게 미래지향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고찰한 대단히 귀중한 연구-출판물입니다.

(2)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되짚고 진정한 해결의 길을 모색하면서,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사이’에 서서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운동과 움직임들을 평가하고 비판해가며 공통의 인식틀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고착화된 ‘주류의 인식과 이미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또한 피하지 않습니다. 학계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론장의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 도서의 출간 이후에 나온 여러 신문 및 논객, 독자들의 큼직한 기사와 서평들은, 저자의 주장이 우리 사회/독자들의 일반적인 인식에 비추어볼 때 ‘불편’할 수 있고 ‘자극적’일 수 있지만 공론장에서 토론되어야 할 ‘의미있는 문제제기’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류’의 비판과 감성적 반발이 쏟아지기는 했지만, 이 ‘가처분신청’ 사태 이후에도 저자의 견해와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의미있는 문제제기’라는 평가는 적지 않았습니다.

(4) 이 ‘가처분신청’이 이루어진 직후인 2014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 간의 공방의 경위’라는 제목의 ‘고노(河野) 담화 검증 보고서’ 결과를 발표했고, 8월 5일자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전쟁 때 제주도에 가서 여성을 강제로 끌고 왔다’는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된 사실과 관련하여 그 증언과 관련된 이전의 기사들을 취소했습니다. 식민지지배와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전반적인 사안에서 진보적인 아사히 신문은 이후 우익 세력과 산케이 신문, 요미우리 신문 같은 우익 신문의 공격을 받아 존폐가 거론될 정도로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열려왔던 정례 한일 국장급 논의 또한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됩니다. 이런 작금의 상황을 단순히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는’ 일본의 우경화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70년, 한일 국교정상화 50년을 맞는 2015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지향적인 공동의 우호협력관계를 구축해나가야 할 두 나라의 정부와 국민들이 ‘위안부 문제’를 더욱 폭넓게, 더욱 깊이 있게 고찰하고 두 나라 안에서, 그리고 두 나라가 함께 더욱 활발하게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할 것입니다.

(5) 거듭 말씀드리지만, 채무자 박유하 교수와 도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은 결코 채권자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지 않습니다. 형법 제309조 1항의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신문, 잡지 또는 라디오 기타 출판물에 의하여 제307조 1항의 죄를 범한 자’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방할 의사도 목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307조 1항과 2항의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 채권자들(의 대리인)이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느꼈다고 하더라도, 제310조에 규정된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 해당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 그러므로, 본 도서와 저자인 채무자 박유하 교수는 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을 이루는 헌법상의 학문의 자유(제22조 1항), 언론-출판의 자유(제21조 1항), 표현의 자유를 보호받아 마땅합니다. 제21조 3항에서 규정하는 바와 같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이 ‘가처분신청’, 그리고 채무자들의 반박 혹은 입장 표명조차도 거의 없이 쏟아진 관련 언론 보도들이야말로 위 헌법상의 자유들을 위축시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7) 결론적으로 본 도서의 내용과 주장은, 사실과 해석, 주장과 비판 모두 학계와 국민/독자들의 공론장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맡겨져야 할 사안이지, 결코 법정에서 다툴 바가 아닙니다.

2014. 10. 21.
채무자 정종주

서울동부지방법원 제21민사부 귀중

작성일: 2014.10.24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3395771687337

渦中日記 2014/10/21

일제시대때, 나카노시게하루라는 일본작가가 쓴 <비오는 시나가와 역>이라는 시는, 활자화되면서 일부가 ***** 로 지워져 발표되었었다. 천황에 관한 표현이 당국의 검열에 걸렸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2014년 가을, 비슷한 일이 내게도 일어나려 하고 있다.

오늘, 원고측이 “고발취지”를 바꾸어 다시 신청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새로운 고발취지는, 나의 책이 “공동선”에 반하므로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칠 것이라는 내용. 그러므로 판금해야 하지만, 안된다면 책의 일부를 삭제하도록 해 달라고 쓰여 있었다.
원래는 9월이었던 재판날짜를 원고측이 연기한 이유는 바로 그런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결국, 여름내내 준비했던 나의 반박자료는 무효화되었다.
“전쟁범죄를 찬양”했다고까지 쓰인, 법무법인 세곳의 8명의 변호사이름이 열거된 소장을 보면서 오늘 나는 다시한번 4개월전의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비판했던 내용과 각종자료까지 나열된 수십장의 준비서면은 분명 학자들이 깊숙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내용이었다.

이제 이 싸움은 위안부지원단체와의 싸움을 넘어 “국민정서””국민감정””국민상식”을 등에 업고 나를 친일파/매국노로 몰아 처벌하려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될 것 같다. 싸움은 두렵지 않지만, 역사를 획일화하고 전유하려는 그들의 투지가 두렵다.

2014년 대한민국은, 자신과 다른 생각은 “불온” “불경”으로 간주하고 검열해 처벌하려 한다. 대통령은 국가체제를,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은 국민을 앞세우면서.
그러나 양쪽 다 국가권력에 기대고 있으니 분명 대한민국은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오늘, 비오는 가을저녁이 슬픈 이유.

작성일: 2014.10.2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1782835181964

渦中日記 2014/10/20

오늘도 재판관련 작업으로 하루를 보냈다. 언론에 보내기 위한 보도자료를 만들었고, 언론중재위에 올렸던 신청서를 보완했고, 재판진행상황을 보기 위해 <전자소송>사이트에 가입했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언론에 보도자료를 보냈지만 얼마나 보도해 줄런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가장 빠르고(), 어쩌면 유일한 보도매체가 될지도 모르는 이곳–페이스북에 노트로 올려둔다.

오랫만에 비가 왔는데 너무 일찍 그쳐 아쉽다. 내일도 비가 왔으면 좋겠다.

<My favorite musics>
ryuichi sakamoto – rain(live)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1324815227766

渦中日記 2014/10/19

어제는 오래 미루어 왔던 일을 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요청하기 위한 작업.
그런데 언론 중에도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문제가 심각했던 건, 양극단의 “적대적공존”이라는 우리사회의 현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만 것이 아니었을까.

과거에 쓴 내 책이 “일본우익을 대변”했다고 쓴 한겨레는 벌써 5년 전에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았다고 쓴 적이 있다. 그 때도 난 언론중재위에 정정보도를 요청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 때 하지 않았던 선택이 5년 후에 이런 사태를 불러왔는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나를 일본우익의 대변자로 몰고 싶어하는 한겨레의 인식은 사실 재일교포학자가 퍼뜨린 인식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인식이, 고발장에도 차용되어 고발이라는 폭력을 뒷받침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사상은 때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원고측 요청으로 미루어졌던 2차심리가 이번주 수요일로 다가왔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이제 중반.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0578661969048

渦中日記 10/3

멀리서 페친 정나란님이 오신 걸 계기로 야심차게 만남의 기획을 했는데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가을햇살”과 청명한 하늘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다 어제부터 컨디션이 좀 이상하더니 감기기운. 따끔거리는 목과 묵지근한 근육통을 핑계로 머리맡에 책 몇권을 쌓아두고 게으름을 피울 특권을 누리고 있다.(하여 어제 올린 포스팅은 혼자보기로 돌려 두었다. 술을 마시긴 글렀고 오랜시간 앉아있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아, 정나란님과 호젓하고도 조용한 대화의 시간을 가질 예정. 개별적으로 연락 드렸지만 참석해 주시겠다 한 분들과는 다음 기회에 만나기로 했다.)

페친들이 언급하기에 봐 봤던 한 드라마가 정신(마음)을 앓는 사람들을 다룬 건 소재만으로도 탁월해 보였다. 사실 마음의 병을 앓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우울증”이니 “스트레스”니 하는 단어들이 생기면서 관리가능한 정도의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회 속을 활보하지만, 실은 누구나에게나 그 활보가 버거운 순간은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관리할지 타인에게 관리를 부탁할지의 차이일 뿐.
“일”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거나,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이야기나 대상으로 도피하는 건, 아마도 그런 “자기관리”의 시간들일 것이다.

어제는 반론을 쓰기 위해 이재승교수의 비판을 다시 읽었는데 비판자체보다 비판에 담긴 적의와 마주하는 일이 또다시 나를 우울하게 했다.
나의 싸움은 재판이나 폭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오에겐자브로의 소설에서처럼 슬픔이 내 얼굴에 곰보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수많은 적의들이 나를 망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 분노도 경멸도 오만도 아닌, 다른 자세로 마주하는 일. 적의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는 일. 그럴 수 있도록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 경험의 흔적을 다른 형태로 남기는 일.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날. 나라보다 먼저, 자신을 꼿꼿하게 세우는 일들이 도처에 필요해 보인다. 오늘저녁엔, 미움과 폭력과 적의에 의해 ‘찌그러진’영혼들을 위해 건배해야겠다. 의심과 증오와 욕망에 의해 일그러진 영혼들을 위해서도 무언가 해야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68931486467099

渦中日記 9/28

9월 마지막 일요일, 집안정리를 하면서 보냈다. 석달 이상 쌓인 마음의 먼지까지 털어 내면서. 이제 이 가을을 제대로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유학의 최대효용은 마이너리티가 되는 체험,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아들 역시 그 체험이 효과가 있었는지 훌쩍 자라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의 마이너리티체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 될 텐데.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65627720130809&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9/19

어제는 기쁜 일이 있었다. 원래 7월출간 예정이었던 <제국의 위안부>일본어판이 소송사태때문에 중지상태였는데, 출간을 위한 작업에 다시 들어가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위안부>는 많은 한국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나역시 책을 쓰면서 내내 불편했다. 그리고 결국 누구보다 불편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실은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주안점인 책이다. 한국에서 문제시된 내용들도,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의 부정파들이 이미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회피하거나 그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에서 받아들여 “재의미화”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내 책이 일본을 정말 설득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최근에 일본어로 내보낸 (4월심포지엄에서의 글과 아사히신문의 위안부문제보도기사검증에 관한 인터뷰) 글에 대한 반응은 나쁘지 않다.
사실 나의 목적은 아베수상과 그의 추종자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하루빨리 해결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그 주체는 아베정권일 테니까. 이 책이 원래 일본어로 쓰여지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2011년 겨울, 일본에서 한국의 정황을 지켜보며 일본인을 향해 연재했던 글이, 우여곡절끝에 원래대로 아사히신문출판사에서 나오는 것으로 결정된 날.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60175527342695

渦中日記 2014/9/17

어제는 고소당한지 3개월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의 흐름을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게 되었으니, 소송사태도 이제 제게 “일상”이 된 듯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신 분들, 이 석달 동안 이런저런 형태로 함께 해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올립니다. 기력을 충전했으니, 이제 저도 필요할 때 그분들께 방패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압도적인 상황에 노출되면 알러지현상이 생깁니다. 전 유학때 애키우고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한 탓에 이후 스스로 “피로알러지”라 이름붙인 현상이 생겼습니다. 피로에 유달리 금방 반응하는 거지요.

소송직후에 한꺼번에 몰려온 공격에 노출되었던 탓에 다소 공격에 민감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공격알러지”같은 것. 그때문에 페친들께 때로 보였던 까칠하거나 거친 모습이 그대로 저자신이 되지 않도록, 부드럽게 감싸 주셨던 한마디 한마디들이 새삼 고마운 마음입니다.
누구나가 누구나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원래는 내일 있을 예정이었던 재판에 제출될 자료를 하나 올려 둡니다.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고진선생이라는 분이,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면서 보내준 메시지입니다. 7월에 받았는데 8월도 넘기고 9월도 결국 넘겨버렸군요. 가을장마에 곰팡이 필 것 같아 빛 좋을 때 널어 말리는 심정으로 올립니다.

가라타니선생 말처럼, “사이”에 서서 한일양국을 봐 오려 했습니다. 소송사태는, 위태위태 걸어가던 가느다란 줄이 어느날 툭 끊겨 속절없이 굴러떨어진 격이지만, 이제 줄을 이어붙였으니,다시 걸어갈 생각입니다.
왜 굳이 줄타기를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생각을 말하고 행동하는 일 아니면 “나의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렇게 만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 인생이란 어떤 의미에서건 그런 줄타기라는 생각도 합니다.

오늘, 하늘은 흐리지만 모두가 조금 덜 힘들게 느끼고, 살아있음을 행복하게 느끼고, 아무도 자살하는 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일: 2014.09.17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5913427744682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9/6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달 전부터. 하지만 해야 할 일들이 좀처럼 끝나지 않았고 멀리 떠날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제주. 마침 지인이 과수원 딸린 집을 빌려 준다고 해서 바로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저 책 읽고 음악 들으며 비우고 채우는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어제까진 그렇게 하지 못했다.해야 할 일들을 이제 대충 끝냈으니 오늘부터 진짜 휴식의 시간.

어제 제주(의 개)사진을 올렸더니 제주 사시는 페친이 연락을 주셨다. 나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이번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렌터카도 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페북에 글 올리는 한, 진정한 “혼자”는 아니겠지. 문득, 죽을 때도 외롭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갈비뼈에 금이 간 김도언샘이 그 와중에 글을 올린 것처럼, 나도 아마 올리게 될 것 같으니까. 그 때 내 옆에 누가 있건 없건. 죽을 때 필요한 건 내면의 목소리일 터이니.

실제 만남이나 전화는 분명 친밀감을 더해 주지만, 페북에서의 대화는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만큼 “내면의 목소리”적인 부분이 있다. 술이 취해야 자기를 내보이는 실제 만남보다 때로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수많은 비난을 들은 곳도 페북이지만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으니 페북은 분명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될 것 같다.

아무튼 며칠 전에 의도치 않게 반감을 산 끝이기도 해서 이 곳에서의 자가유폐는 지금의 나에게 아주 적절한 것 같다. 그리고 보니 제주도는 유배지였던가.

하여 한 몇일 정치/사회 얘기는 쓰지 않을 생각. (답변 기다릴 김헌주 선생님, 미안합니다. 페북은 공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사적인 공간이 없으면 숨쉬기가 힘드니까요… )

누군가가, 며칠 전 내 글을 읽고 “가슴이 서늘”해졌다고 쓴 걸 봤다. 그 서늘함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오늘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날씨도 안성맞춤.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52813801412201

渦中日記겸 감사일기 2014/8/25~8/28

며칠 포스팅을 못했더니 숙제가 날아왔다. 이우연님으로부터 감사일기 릴레이 요청. 하여, 오늘은 개학 앞두고 밀린 방학일기 쓰게 된 초등학생 모드.

1.
이 며칠간의 교류에 감사한다.

1)월요일. 책 나온 직후 인터뷰를 해 주었지만 결국 내 보내지 못했던 한 신문사 국제부 기자와 점심. 한국에는 여전히 훌륭한 기자가 많다.

2)화요일. 고발사태이후 여러가지로 도와 주시고 계신 분들과의 만남. 이 분들 덕분에 이 두 달 반도 고독하지 않았다.

3)수요일. 젊은 페친과의 만남. 만난 적 없는 페친을 일부러 약속잡아 만난 건 처음 일이다. 일본으로 근무나간다 해서 만든 자리인데 떠나는 남성에게 선물을 받았다. 다큐를 찍고싶다는 참한 젊은여성도 함께 만났다. 슬기로운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환해진다.

4)목요일. 모신문사 국제부에서 기자들 상대로 강연. <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서평을 써 주었던 기자의 기획. 끝나고 둘이 티타임을 가졌다. 학술부에 있었기도 해서 많은 책을 읽은 그가 그 곳에 있다는 것에 희망을 보았던 시간. 사진은 강연메모.
저녁엔 일본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정치학자와 일본사를 전공한 젊은 학자와 만나 이야기. 두 분 다 나이로는 후배지만 사람을 보는 눈이 깊어서 나의 장단점을 꿰고 있었다.지혜롭고 따뜻한 이들을 만난 밤이면 잠이 잘 온다.

2.
고발사태 이후 두 달 반동안 이루어진 새로운 만남과 이전부터의 만남에 감사한다.
실제 만남 여부를 떠나,이 분들의 지지와 응원이 있었기에 뜨겁고도 추웠던 여름을 건너 올 수 있었다.

3.
오늘,여전히 살아 있어 이우연님의 릴레이 지명에 응답할 수 있고,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만나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이 아직 훨씬 더 많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래서 살아갈 이유와 의욕이 내 안에 충만하다는 사실에.

이우연님을 돕는 이 릴레이의 다음주자를,고발 사태이후 내게 쏟아진 비난의 집중 포화 속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방패 역할을 해주신
김도언김규항노혜경 선생님께 부탁드리고 싶다. 이 분들의 사려와 지성에 경의를 표하며. (이우연 님에 의하면 두 사람을 지명해야 한다지만,이 경우는 허용되겠지..)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47296075297307

 

渦中日記 2014/8/24

어젯밤에 재판자료작성이 일차적으로 끝나 오랫만에 느긋했던 일요일. 바쁠 땐 온 집안이 엉망이 되는지라 정리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지만. 그래도 정리하는 시간은 하나의 나를 과거로 보내고 또다른 나를 맞는 시간이기도 해서 즐겁다. 이를테면 정화의 시간.

빌리 홀리데이 노래 중 “summertime”을 제일 좋아한다. “I’m a fool to want you”를 처음 들려 주었던 건 학부 때 만났던 남자친구였던가. 가무가 안되는 나조차 춤추게 만드는 곡.

세상은 “단식과 고뇌”로 가득하고(그 다른 한편에서 조롱과 비난이), 여름이 간다.
Billie Holliday – Summertime.

작성일:2014.08.24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44720008888247

渦中日記 2014/8/18

얼마전에 일본 아사히신문이 내놓은 위안부문제특집에 관한 전화인터뷰를, 일본의 한 월간지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결방책에 대해 묻기에, 일본의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간의 지원자나 운동가가 말해온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할 “법적의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국가에 의한 여성동원에 대한 “법적보호”를 방기한 근대국가시스템의 문제이니, 일본이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1년 전에 한국에서 책을 낼 땐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생명의 헌납을 요구당한)남성에게는 보장되었던 “법의 보호”가, (성의 헌납을 요구당한 )여성에게는 보장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 금년 봄 이후다. 그리고, 아사히가 강조한 “구조적강제”에 불만이 있는 듯 했던 기자는 내 말에 공감하는 눈치였다.

<제국의 위안부>일본어판에서도 사실 나는 그 점을 강조했었다. 문제는 한국에서 소송사태가 나는 바람에 일본측 출판사가 출간을 미루고 있다는 점.
그러니 이번 소송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해결을 위한 또하나의 노력을, 지원자들과 할머니들자신이 막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41628459197402

渦中日記 2014/8/16

지난 주말에 끝낼 예정이었던 재판소제출용 자료준비를 아직도 못끝내고 있다..

이번주엔 두개의 공식모임이 있었는데 하나는 참석했다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십분만에 나왔고, 또 하나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젠, 세월호집회에 잠시라도 갈 생각을 했는데(지난번에 갔을 때 집회 진행방식에 회의하긴 했지만), 특별히 많은 이들이 오는 만큼, 어쩌면 나를 비난했던 이들과 만날 수도 있단 생각이 들면서 의욕을 잃고 말았다.
고발사태에서 오늘로 두 달. 아직도(나를 알 수도 있는)불특정다수가 모이는 공간이 불편하니 고발이전의 나로 돌아가기까진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사진은, 뒤늦게 전달되어 열어본 편지에서 나온 글. 나에게 보내는 응원편지와 함께 들어 있었다. 탄원서 서명은 많이 받았지만, 직접 판사에게 보내는 탄원서는 이번이 처음. 고마운 마음과 함께, “무죄”라는 단어를 보고, “혐의자”로서의 자의식이 꼭 과대망상만도 아니었단 걸 알 수 있었다. 26세. 전남 광양시의 청년으로부터의 편지.

어젠 일하는 사이사이,그동안 지지하고 응원해 준 페친의 글들을 비로소 다시 보았다. 서평조차도. 그런 두 달이었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40005559359692&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