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8일 연구 집회를 끝내고 – 도노무라 마사루(도쿄대 교수)

 

 

박유하의 논저를 둘러싸고 열린 이번 집회에 대해서는 ‘의의가 깊은 모임이었다’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 자신은 단상에서 발화된 말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발언을 기록으로 남기고 공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다. 통상의 집회나 각종 연구회 이상으로 신경이 쓰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발표자/코멘테이터/지정토론자 부탁을 들어주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실행위원회 멤버들은 상호 인식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일단은 집회를 의의 있는 것으로 실현시키겠다는 점에서 일치하여 준비에 임했다. 여러 어려운 조건을 넘어서서 간신히 집회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이외의 실행위원 4명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는 것을 감히 써 두고 감사 드리고 싶다.

그리고 역시 운영 상의 실수가 있었던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여러 가지 반성은 있지만, 박유하 비판측, 옹호측이라는 식으로 나눠 참가등록을 실시해서, 접수를 분리한 것처럼 여겨지게 한 것은 실수였다. 이것은 나의 실수다. 실제로는 ‘니시/모토하시 관계자’, ‘김/나카노 관계자’ 이외에도 실행위원회에서 협의/확인 후 도노무라가 연락을 한 ‘기타/미디어 관계자’의 등록도 있었고,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니시/모토하시 관계자’ 중에 ‘박유하씨의 논저와 관련하여 평가가 나뉘는 것에 대해서 자기도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에 공부할 생각으로 왔다’고 하는 사람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다.

나 자신은 당일 말한 것처럼 ‘회색파’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비판의 형태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박유하의 언설은 새로운 역사수정주의라고 하며, 그녀의 저작을 완전히 부정하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서 내쳐버려도 될까, 비판한다 하더라도 박유하의 논리를 바탕으로 식민지주의 비판의 논의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 니시 마사히코씨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다만, 니시쪽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2015년 11월 26일의 박유하 기소에 대한 항의성명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과 박유하를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니, 전자는 ‘위안부’ 피해자나 그녀들을 지원하는 운동과의 접점을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반면, 후자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느껴졌고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얼마 전에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피해자와 관계를 맺고 활동해 온 사람들이 박유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이번 연구 집회를 발안한 이유 중 하나다(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경위는 있지만 생략한다).

회장에 있었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 집회에서는 박유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발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우세’한 분위기가 있었다. 분명히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하여, 사료를 원점에서 찾아보고 문제점을 밝힌 작업은 의의가 있고, 그것을 위해 들인 노력에도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오랜 세월 ‘위안부’ 피해자들 옆에서 그녀들과 함께 운동을 전개해 온 양징자의 코멘트에는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느끼고 있던, 박유하에 대한 비판의 형태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역사 연구자니까, 역사 연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아래에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확인 차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역사 연구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위의 입장,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오히려 역사학이 잘 못하는 영역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내가 역사 연구 분야에서 만큼은 어느 정도 전문가 그룹으로 인정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위안부’를 둘러싼 역사 연구는 그것이 커다란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1990년대 초반부터 생각해 보면, 상당히 진전됐다. 당시 중요한 논점 중 하나가 된 것은 일본 국가의 관여였고(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이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리고 다녔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고, 김학순씨가 피해자라고 밝히고 나서면서 ‘위안부 문제’가 쟁점화된다. 이러한 경위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실증이 정교하고 치밀하게 쌓아 올려졌다. 그리고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우파의 허위 선전에 대항하는 형태로 폭력성, 자유의 박탈도 다시금 강조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위안부’ 연구에 돌입하고자 하는 역사 연구자도 없었고, 애초에 그것이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현재까지 많은 사료의 발굴에 노력하고 사실을 해명해 온 연구자들, 시민운동 관계자들은 정말로 훌륭한 일을 해냈으며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에 의한 강제가 있었다는 것, 알기 쉬운 물리적 피해가 강조되어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면 그것만 문제인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되고 만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 역사 연구자가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며, 직접적인 국가에 의한 폭력의 배경에 있는 모든 사실과 현상도 시야에 넣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조선사 연구회나 역사학 연구회 등의 모든 단체에 의한 2015년 5월 25일자 성명에서는 ‘최근의 역사 연구는 …… ‘위안부’ 제도와 일상적인 식민지 지배/차별 구조와의 관련도 지적’해 왔다고 하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역사 연구의 성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충분한 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널리 시민들에게 알려져 있을까? 여전히 ‘위안부’ 피해는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나 물리적인 폭력을 언급하여, 이렇게 끔찍한 사실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오지 않았는가?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반론도 그런 식의 것이었거나, 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긍정적 평가 중 하나는 그런 이야기 방식을 넘어서서 식민지 지배의 심각성을 논하려고 한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 책에 대해, 구조적 강제성을 논하고 있다(아사노씨), 식민지의 문제 전체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우에노씨)라는 평가나,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폭력의 심각성을 지적한 발언(센다씨)도 그러한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위안부’ 문제나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온 역사학자라면 이러한 상황을 앞에 두고 일단은 자신들의 ‘협량’, ‘역부족’을 자각(고통를 동반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역사학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즉, 문학연구자인 박유하가 할 수 없었던 형태로, 국가가 직접 관여하지 않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일상적으로 존재한 식민지 사회의 실태,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위안부’들의 피해를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 이외의 시민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지혜를 짜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한 논저를 다수 세상에 내보내는 일, 이 일이야말로 ‘위안부’ 문제, 식민지 지배 문제를 연구 테마로 하는 역사 연구자들에게 요구되는 임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식민지 지배 중 일본의 가해에 대해 자주 우파 쪽은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는 없었다, 민간에 의한 임의의 행위였다, 자발적 활동이었다라는 것을 들어 국가의 책임을 면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식민지 지배의 반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민운동가들이나 역사 연구자들의 반론은 많은 경우, 실태로서 현저한 인권침해가 있었고 그렇기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 실태로서 국가가 관여했다는 식의 사실 제시다. 예를 들어, 노무 동원과 관련하여 우파에서 ‘징용’과는 다르다, 따라서 나라에 책임은 없다라는 말을 하면, 이에 대한 반론은, 모집이나 관의 알선으로 온 노동자도 똑같이 노예 노동에 종사시켰다, 요원 확보에는 경찰이나 말단 행정 공무원이 관계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는 창씨개명과 관련해서도, 우파에서 신고제였으며 강제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그에 대한 반론은 다양한 압력이 가해진 결과로서 많은 신고가 있었던 것이라는 식이다(엄밀히 말하면, 법정창씨라는 제도가 있어서 법적으로도 강제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미즈노 나오키씨나 고 김영달씨의 연구를 참조하길 바란다).

이러한 반론은 필요하고 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으로 일관할 경우,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강제가 아닌’ 것이 가지는 의미와 그로부터 발생된, 지배 당하는 민중의 고통은 시야 밖에 놓이게 된다. 위의 예에서 말하자면, 국가의 행정 명령으로 어떤 사업소에서 일할 것을 강제=징용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가능해지는, 노예적인 노동의 간과나 국민 보호의 부재 같은 국가의 ‘책임 회피’는 문제에서 빠지게 될지도 모르고, 창씨를 신고할지 말지를 두고 생기는 조선 민족 내부의 균열이나 자신이 직접 신고하여 이름을 바꿈으로써 느꼈을 자책감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위안부’와 관련하여 생각해도, 국가가 행정 명령을 내서 군인에 대한 성적 위안을 명령한 것은 아니다(징용 명령서로 그것을 명령한 것도 아니고, 국가총동원법의 조문을 통해서도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더러운 일에는 국가가 관여하지 않으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는 국가의 비열함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피지배 민족 내부에 복잡한 고통을 발생시켰다. 이렇게 생각하며 ‘국가에 의한 강제는 아닌’ 것의 문제성을, 물론 ‘실태로서의 국가에 의한 강제’를 지적함과 동시에, 이야기해 가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상,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고, 식민지주의의 문제를 보다 깊게 생각할 때 참고가 되길 바라며 이야기해 보았다. 집회 운영상의 문제도 포함하여 기탄 없는 비판을 부탁 드린다.

 ‘서발턴(subaltern)의 말’이란 무엇인가?, 3.28집회를 돌아보며 – 모토하시 데쓰야(도쿄게이자이대 교수)

 

모토하시 데쓰야

 

3.28연구 집회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집회의 마무리 발언으로 당일 대강 다음과 같은 감상을 말했다–

“일단 첫 번째 감상은 ‘서발턴’에 대해서입니다. 이번 문제를 생각하면서 알게 된 것은 왜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형으로 제의하고,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발턴에게 말하지 못 하게 하는’ 것도, ‘서발턴에게 말하게 하는’ 것도 둘 다 똑같이 폭력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더 생각해 보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말하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것일까요? ‘발화된 말’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나, 발화되어 버림으로 인해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듣는 사람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말하는 사람 본인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건 ‘없었던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지만, 그 ‘알 수는 없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헤아림이나 조심스러움이 없으면, 서발턴의 목소리는 더욱더 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 대변표상(代弁表象)이라는 문제는 말을 통해 살아가는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아포리아이고, 그것에 대해 계속 자각적이고자 하는 것이 이번 문제에서 무언가 결실을 맺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전 양징자씨가 소개해 주신 김복동 할머니의 ‘미소’(역자주 : 개중에는 좋은 군인들도 있어서 기다려졌다고 증언하며 띄운 미소)가 마음에 와 꽂혔습니다. 그것을 들은 것만으로도 오늘 여기에 온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감상은 ‘후미에(역자주 : 그림 밟기. 에도시대 때, 기독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예수나 마리아의 그림을 밟게 한 것. 또는 그 그림.)’에 대해서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른바 ‘후미에적인 상황’을 만든 것이 박유하씨의 저서 출판인지, 그것에 대한 고소인지, 박유하씨의 저서에 대한 비판인지, 몇 개의 성명인지, 그것을 물어봐야 별 의미는 없겠지요. 오히려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후미에’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처럼 넓은 의미로 ‘인문학’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텍스트를 읽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거나 자신의 말로 생각하는 것은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말을 재료로 하여 생각하는 행위인 이상,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즉 ‘인문학’이란 ‘후미에’에 다름 아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후미에’를 밟아야만 하는 사람들을 어떠한 동기로 한 쪽 진영에 속해 있다고 공격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확장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더 좋지 않은 일은 ‘후미에’를 앞에 두고 사고정지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후미에’란 사고를 유도하는 것이므로 ‘후미에’는 계속 만들어야 할 것이며, 때로는 용기 있게 밟아야 할 테지만, 그걸 가지고 타자를 판단하는 데에는 한없이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 번째는 ‘항의 성명’에 대해서입니다. 어떤 형태이건 간에, 피해자/생존자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형태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그분들의 힘을 키우는 일에 이번 집회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를 각각의 현장에서 이제부터 우리들 각자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건 서로의 입장을 비판하는 일, 서로의 의견에서 배우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논의를 듣다가 마지막에 개인적으로 저도 이 곳에서 실제로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저는 ‘박유하씨의 기소에 대한 항의 성명’에 서명한 한 사람입니다만, 그 안에 ‘무엇보다도, 이 책으로 인해 전 위안부 분들의 명예가 손상됐다고 생각되지 않고’라는 한 문장이 들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여기에서 반성하고자 합니다. 반성의 이유는 무엇보다 나눔의 집의 생존자 분들이 대체 어떤 상황에서, 재판에 의한 고소라는 수단을 단행했는지 저 자신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 모든 행동이 옳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건에 대해서 생존자 분들이 그러한 수단을 취하신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적어도 저처럼 그 곳에 없었던 사람이 ‘손상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망설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내 발언의 주안점은 서발턴의 생각은 어떻게 표상 가능할까라는 물음에 있으며, 그 답은 어떤 사람에게도(본인이나 당사자도 포함해서)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당일 집회에 나오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발언을 통해 내가 던진 공은 완전히 목표를 빗나갔고, 결국 내가 말한 이 ‘마무리 발언’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었다. 그 일과 관련하여 여기에서 집회를 끝낸 후의 나 나름대로의 반성과 감상을 기록해 두고 싶다.

먼저, 위와 같은 ‘마무리 발언’을 함에 있어서, 내 쪽에서 몇 가지 큰 전망의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제국의 위안부』 라는 저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집회에서 나온 논의로부터 무언가 결실을 평가하면서 그 성과를 토대로 이후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임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발턴’과 ‘후미에’에 주목하는 것이 이론적인 핵심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인문학 연구자로서 이러한 ‘연구 집회’의 마무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런 문맥에서 ‘항의 성명’에 대한 자신의 반성도 표명했다. 나 한 사람의 행동이나 결의 자체는 문제의 크기에 비추어 볼 때, 전혀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집회의 의의를 재확인하고, 앞으로의 운동이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 나름의 ‘연구 집회’에 대한 생각은 참가자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름을 말해 죄송하지만 내 발언 다음에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측에서 ‘마무리’로 발언한 나카노 시게오씨는, ‘마무리’란 어떤 ‘접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와는 인식이 완전히 달랐고, 그 점에서 나의 마무리는 ‘헛스윙’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의 두 번째 ‘오해’는 ‘미디어’ 참가자들의 취급과 속내에 대해서다. 나는 이번 ‘연구 집회’라는 성격과 의의를 생각해서, 설령 미디어나 저널리즘에 적을 둔 사람들이 참가하더라도 각자가 『제국의 위안부』라는 저서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듣고 개인적으로 새로운 지식과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 내가 한 상정이 안이했던 듯 하다. 이미 집회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 등에 투고된 기사 중 몇 개가(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보여주는 것처럼 기자나 저널리스트 중에는 집회에서 무언가를 겸허히 배우겠다는 자세보다는, 자기나 자기가 소속된 미디어를 통해 이미 나온 이 문제에 관한 판단을 추인하고 강화할 방편으로 이번 집회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여겨지는 기사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런 기사를 쓰는 사람들이 ‘서발턴’이나 ‘후미에’를 둘러싼 원리적 고찰 같은 ‘귀찮은’ 부분을 무시하고, ‘항의 성명’의 서명인 중 한 명의 ‘반성’에 달려들어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안이한 말로 결론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나의 ‘마무리 발언’에 대한 견해가, 대립을 부추기는 일이 보도의 책무인 양 기사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별 상관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상정하지 못한 나의 판단 미스에 기인한 것이고, 나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반성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연구 집회의 목적은 『제국의 위안부』라는 저서에 관해서 의견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말을 나눔으로써 타협이나 경계의 확인을 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피해자의 의향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해결되기를 목표로,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각자가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에 있었다. 과연 집회는 그러한 목적에 조금이라도 다가갔을까? 만약 이 집회가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의 ‘옳음’을 확인하는 데에만 그쳤다고 한다면, 그것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 무슨 공헌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진지하게 임하는 한, ‘종군위안부’로 삼아진 사람들 같은 피해자의 마음은 그 누구도 대변할 수 없다. 이 냉엄한 사실은 ‘연구자’, ‘운동가’, ‘지원자’, 나아가 ‘당사자’와 ‘비당사자’라는 구별 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를 토대로 생각하면, 『제국의 위안부』관련 문제 중 하나인 ‘할머니들 자신에 의한 고소’라는 사태의 재고가 필요해진다. 구체적으로는 집회 중에도 나온 ‘할머니들 자신이 고소한 것이니까……’라는 변명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바로 이 ‘할머니들 자신에 의한 고소’라는 ‘사실’을 ‘후미에’ 삼아 사고정지돼서 ‘서발턴의 목소리’에 관한 신중한 고찰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사태는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의 ‘대립’이라는 저널리스틱한 이슈가 되기만 할 것이며, 그것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미디어의 ‘유통기한’이 지나면 폐기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서발턴’을 눈앞에 두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사고정지’나 ‘복화술’도 이에 포함된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정답이 없는 물음을 쉼 없이 던지며 ‘후미에’라는 사고의 유도에 응답하기 위한 길은 한없이 어렵지만, 길은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만들어지는 법이다. 이번 집회에 참가한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앞으로도 그런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3/28 연구집회를 끝내고 – 니시 마사히코(리츠메이칸 교수)

『제국의 위안부』가 서울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미성년 여자에 대한 지속적인 성적 능욕’이라는 ‘위안부상’의 ‘정형’을 재심에 부치려고 한 책이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확한데, 그 책이 ‘일본의 면죄’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선입관을 빼고 전체를 읽어 보기만 한다면 오해가 생길 리가 없다. 그것을 ‘일본의 면죄’에 길을 트는 타협적인 책이라고 이해하는 일부의 독해는 명백히 ‘오독’이며, 이 책을 ‘악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3월 28일 집회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은, 극히 일부의 우파적인 ‘오독=악용’을 과잉 의식하여 이 책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분들이 좌파 안에 적지 않다는 현실이었다. 『제국의 위안부』의 평가를 둘러싸고 일부의 우파와 일부의 좌파 사이에 ‘적대적 공존관계’가 성립되어 버린 듯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3월 28일 집회에서는 적어도 ‘일본의 면죄’를 부르짖으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집회 중반에 내가 확인한 바다. ‘우리들’이 꼭 ‘적대’해야 할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본 집회는 일단 성공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책임’을 물을 때, 설령 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한다는 대의명분이 있다고는 해도,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미성년 여자에 대한 지속적인 성적 능욕’이라는 ‘위안부상’에 구애되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문제시되고 있었다.

애초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실태는 그러한 ‘물리적인 폭력성’이나 ‘위법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식민자들 안에서 다종다양한 ‘협력자’를 동원한 데다가, 그들과 그녀들에게 ‘자발성’마저 심어 놓는 교묘한 지배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위안부 문제’란 ‘협력자성’이나 ‘자발성’까지를 포함하여 ‘식민지 지배’의 ‘폭력’을 ‘구조적’인 것으로 파악할 단서를 제공해 주는, 어떤 의미로는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3월 28일, ‘지정토론자’로서 발언한 센다 유키씨는 가부장제적인 ‘지배’ 구조를 생각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폭력(가정 폭력 등)에만 주목해서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신체적인 폭력은 ‘저항’을 낳을 뿐이며 ‘지배’를 견고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 오히려 피해자에 대해 ‘협력자성’이나 ‘자발성’을 심는 것이 ‘가부장제’라는 것의 지배 형태다. 그렇다면 바로 그러한 ‘구조’ 그 자체를 비판 대상으로 설정하는 『제국의 위안부』는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정면으로 마주한 ‘위안부론’으로서 읽혀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요시미 요시아키씨는 박유하씨가 《오노다 히로오씨의 증언을 근거로 여성이 장사를 열심히 하기 위해 군인에게 ‘교태를 부리’거나 ‘밝게’ 보이고 ‘즐거운 듯’ 행동했다면 ‘그것은 여성들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애쓰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면서 《제국 육군의 장교와 같은 시선으로 논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당일 배포 자료, p.71)라고 박유하씨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렇다면 요시미씨는 이 인용에 이어지는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읽었을까?–《업자들의 엄격한 구속과 감시 속에서, 자신의 의지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녀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의 당혹감과 분노, 슬픔을 억누르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래하는 위안부가 비참한 위안부와 대치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교태를 부리’는 웃음도 위안부들의 비참함과 대치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아사히신문출판, p.231)

위안부의 양면성은 ‘가정 폭력 피해 여성’의 그것과 연결지어도 생각할 수 있다는 사고법을 시도한 것이 박유하씨였다고 한다면, 《여성들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 남으려고 악전고투했는지 하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며 박유하씨의 작업을 내쳐버려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박유하씨와 요시미씨는 같은 것을 다른 입장에서 말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두 사람이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위안부 문제’의 배경에 있는 ‘구조적인 문제’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일차원적인 피해’에 초점을 맞춰 문제의 해결을 서두르고자 하는 역사 연구나 지원 운동의 전술에야말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노래하는 위안부’ 등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위안부’에 대한 이해를 어느샌가 일면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지원 운동 속에조차 뿌리 깊을지도 모르는 ‘매춘부’ 차별이 그러한 것처럼.

어찌 됐든 앞으로의 ‘위안부 연구’는 박유하씨가 끈질기게 파헤친 ‘양면성’을 균형감 있게 시야에 넣고, ‘가해자/피해자’의 전체상을 확인하는 일이 주류가 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땐 『제국의 위안부』를 그냥 폄하하기만 하는 ‘위안부 연구’ 따위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등 짚고 넘기’를 비유로 든 것은 바로 그러한 미래를 전망해서이고, 멀리 내다보면 ‘등 짚고 넘기’는 이미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예를 들어, Fight for Justice(편)의 『Q&A 조선인 ‘위안부’와 식민지 지배 책임』(오차노미즈쇼보, 2015)은 『제국의 위안부』 비판을 여러 곳에 집어넣은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병사와의 연애나 심정적 교류가 있었을 수 있다고 해도 트라우마 연구에 의하면 가혹한 현실을 살아남기 위한 반사적 행동,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판단됩니다》(p.55)라는 김부자씨의 서술 하나만 봐도 『제국의 위안부』의 문제 제기와 함께 읽음으로써 한층 더 생생해지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단, 김부자씨는 《일부분을 전체화해서 ‘같은 일본인으로서의 <동지적 관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라고 못을 박아 모처럼 열린 회로를 닫아 버린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란 지금 와서 보면 지극히 취약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동지적 관계>를 광범위에 펼침으로써 견고한 실효 지배를 가능케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박유하씨가 조선 반도나 대만의 위안부를 생각할 때에 중시한 ‘동지’적 관계성은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효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러한 측면의 강조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길은 열어 줘도, ‘일본의 면죄’를 도출하거나 하는 이야기는 되지 않는다. 이 책에 대한 ‘오독’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일본의 면죄’를 꾀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어울리는 일이고, ‘일본의 책임’을 깊이 숙고하려는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조심성 없이 추종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식민지 지배’란 안팎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협력자’를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다고 생각한다(‘글로벌화’도 그러하다). ‘식민지 지배’를 억지로 추진한 ‘제국 일본’의 폭력성을 빠짐없이 들추어내는 것은 필수다. 그러나 ‘식민자=가해자’, ‘피식민자=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은 역사의 세세한 부분을 잘 안 보이게 만든다. 이 사실을 재차 강조해 두고 싶다.


지면에 다소 여유가 있어서 마지막으로 나카노 도시오씨가 ‘총정리’에서 발언한 《일본 군인과 ‘위안부’를 공통으로 ‘피해자’로 묶는 인식》에 대해서 약간만 보충을 해 두고자 한다.

나는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전쟁 수행에 있어서의 ‘가해성’, 특히 그 ‘가학성’에 대해서 눈을 감고자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위안부 제도’는 전장에서의 보다 광범한 ‘전시 폭력’의 일부로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와 관련해서는 3.1 독립운동의 ‘진압’이나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등, ‘민족 정화’와 연결된 폭력의 기억을 어떻게 계승할 것이냐 하는 커다란 문제가 눈앞에 있다(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의견 교환의 장이 조직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설령 그런 문제들과 ‘이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가해의 중층성’이 더해져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이 문제에서는 ‘피해자’측에서 할 수 있었던 대응에도 개별 사례마다 차이가 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과거에 마주할 때, ‘식민자=가해자’, ‘피식민자=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에 의거해서만은 진상 규명조차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 복잡한 문제를,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식민지주의’, 또는 ‘인종주의’ 문제와 연결지어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서두른 나머지, 해당 문제가 안고 있는 고유의 어려움을 외면해야만 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바로 이 사태를 따져 묻고 있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인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인과 한국인은 각각 ‘가해자성’과 ‘피해자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정도나 양태는 다르며, 그 차이는 위에서 말한 ‘민족 정화’적인 사고(=인종주의)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일 양국민이 서로 짊어지게 된 ‘가해자성’을 외면하지 않고, 전 위안부 분들 앞에서 함께 자세를 바로 하는 일. 타자의 ‘가해자성’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가해자성’을 탕감하려고 하는 심성에서 자유로워지는 일. ‘자기 면책’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자는 요청에 한일 양국민이 각각의 입장에서 응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둘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가해자성’만을 떠맡는 일이 고통스럽다면, ‘피해자’였을지도 모르는 우리들 자신의 다른 한 측면과 묶는 형태로라도 그 부담을 견뎌낼 것. ‘피해자 의식’을 통한 ‘연대’의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나 나름의 주장에 담긴 속뜻이란 그런 것이다.

니시 마사히코

渦中日記 2016/1/12

워싱턴심포지엄에 대해 한국언론들이 또다시 왜곡기사를 많이 썼다고 들었다.
일본측에서 나온 기사를 올려둔다.

이 기사가 “합의과정이 불투명했다”고 쓴 것처럼, 이날 내가 주안점을 둔 것은 “정부간합의만으로 끝났다고 할 수 없다”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운동가들 편에 서서 한 이야기다.
미국도 이번 합의를 환영한다고만 했으니, 합의에 비판적인 생각을 미국의 한가운데서 말하는 일에 나는 의미를 두었었다.
그리고 일본언론은 그 점을 정확히 짚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번 심포지엄 참석자들의 의견은 다르지 않았다.

한국언론에서도 그런 보도가 있기를 바라고 싶다.
앞서 올린 발표문에도 있는 것처럼, 나는 분명 “업자”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조선인”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일본인을 포함한 지적이었다. 일본인 업자가 더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이니 실제적인 이익도 더 많이 얻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착취가 민족을 넘어 연대했다는 것을 나는 책에서 말하고자 했다.
그런데 지레 조선인 비판으로 간주하고 굳이 하지 않은 “조선인업자”라고 해설을 추가한 보도도 봤다.

(운동가들에게)도움이 될 얘기조차 무시하고, 낯선 얘기에만 촉각을 세우는 태도. 이제 그만 그런 태도를 지양하고 지혜로운 태도를 취해주기를 모든 비판자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http://www.jiji.com/jc/zci?g=pol&k=201601%2F2016011200169&pa=f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6363176723927

渦中日記 2016/1/7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아직 여유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이번 워싱턴 행이 “일본의 돈”이라는 악의적인 기사를 봤다. 이번 회의는 윌슨센터와 와세다대학의 공동 프로젝트인 “동아시아에서의 과도기 정의 수립”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학문적 회의다.
갑자기 “한일합의”가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 문제도 언급되겠지만, 그 얘기를 중심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도 아니다. 전에도 썼지만, 이 회의는 반년도 더 이전에 계획된 회의다.

한일합의에 대한 의견을 쓰라고 종용받기도 했는데, 내 의견은 분명하다. 갑작스런 합의는 문제가 있다. 국민적납득과 합의가 가능하도록 논점을 공론화하고 국민이 공유하는 절차와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대립되는 학자들이 접점을 찾는, 당사자도 포함하는 “협의체”를 만들라고 책을 낼 때부터 제안했었다.
그러니 이런 합의에 내가 무조건 찬성하거나 웃을 거라고(나의 힘이 그렇게 클 리도 없다) 생각하는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어렵게 결정된 것이니 순서는 거꾸로 되었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일본지원단체가 이 합의를 “운동의 성과”로 받아들인 식의 긍정마인드를 나는 평가한다.

정부가 내내 지원단체와 논의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마지막에 배제된 모양이다. 지금의 격렬한 반발은 거기서 온 듯 하다.
정부가 배제한 건 위안부할머니일까. 혹은 지원단체의 주장이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언젠가 밝혀지리라고 믿는다.

분명한 건, “또 다른 백억원 모금”의 발상은 이미 1997년에 정대협이 시도했던 일이라는 것.
일본국민의 “속죄금”과 “의료복지비”를 정대협이 거부했고, 받은 일곱 분 할머니들을 정대협이 비난하며 모금을 시작했고, 초라한 모금실적에 한국정부가 나서서 할머니들에게 같은 금액의 지원금을 지급했었다. 그건 한편으로는 “할머니들은 우리가 돌본다”는 발상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요구는 요구대로 이어졌고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성공했지만 일본인들의 마음은 더 닫히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니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15년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할 각오,그리고 시작하기전에 “모든”위안부할머니께 그런 선택에 대한 수락을 받아야 할 거라는 점이다.
엄마부대나 어버이연합도 문제지만, 그들이 문제라고 해서 운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일 수 밖에 없다.

필요 있어 다시 읽었더니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쓰인 이 글이 가슴에 더 와 닿아, 일본 학자의 글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올려둔다. 이들은 진보학자들이고 자신들의 운동을 반성하는 차원에서의 글이다.
전에 한번 전문을 올렸었지만 특히 중요한 부분만 몇 번에 나눠 올리려고 한다. 위안부문제에 관심갖는 사람은 꼭 읽어야할 논문이 될 것이다. 나의 의견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전문은 곧 어떤 잡지에 게재될 것이라고.

——–
“한편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몇 가지 논쟁적인 대립점이 표출되었다. 예를 들면 ‘위안부’ 논쟁의 존재방식을 둘러싸고 메타 차원에서 재귀적(再歸的)인 물음을 던진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내셔널리즘과 젠더』 세이도샤, 1998년)와 박유하(『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사토히사시 번역, 헤이본샤, 2006년)를 둘러싸고 문제의 방법론적 심화와 자기성찰의 계기가 만들어진 측면도 있었으나, 때로는 이에 대해 운동의 분열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주장도 나왔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현재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아사히신문출판, 2014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이토록 비판이 분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 사이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도 이 시기에 운동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성적인 물음과 문제 제기를 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박유하와 마찬가지로 정대협 측에도 문제의 단순화와 일면화(一面化)가 있는 게 아니냐는 자문자답이었다(야마시타 영애『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아카시쇼텐, 2008년). 그러나 분열과 분단 속에서 그러한 문제 제기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문제의 국면이 다양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위안부’ 논쟁은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제기된 것과 같은 보편적인 문제 보다는 민족적 담론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게다가 본래 이 문제와 모순될 수 있는 국제적인 맥락이 덧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면 정대협은 국제적인 반향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한편으로 문제를 국가 단위로 잘라 놓는 것과 같이 단순화해 버리고 말았다. 미국 하원에서는 정대협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태로 의회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가 세밀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에서의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피해자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로 결의가 이루어졌고 문제를 심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취급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소녀상’을 사용하여 피해자의 일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니는 복잡한 정치적 측면(politics)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젠더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에노 치즈코가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모델 피해자론’이라는 형태로 이미 지적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한 일본의 전후(戦後)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오사 시즈에(長 志珠絵)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2738360419742

渦中日記 2016/1/3

이번 주말에 워싱턴에 가기로 되어 있다. 반 년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동북아역사화해에 관심이 많은,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의 이런저런 회의에도 자주 참석하는 일본인교수와 미국교수들이 기획한 회의다. 다른 한국인 교수도 참여한다. 위안부문제에서 지원단체 입장에 가까운 발언을 해 왔던 미국인 교수도 함께 이야기한다. 내가 메인인 것도 아니다.

이 모임이 기사화 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런데 정확하게 쓴 건 경향신문 뿐이었다.
연합뉴스는 “일본 정부와 재미일본인 커뮤니티”의 초청인 것처럼 쓰고 있다.미주 중앙일보 역시 마찬가지다. 명확한 “허위사실유포”에 해당한다.

나에 대한 개인의 비방은 너무나 많다. 따라서 그 안의 왜곡이나 허위를 일일이 지적할 수도 없다. 학자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그런 이들을 모욕죄나 허위사실유포죄로 고발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들도 많다. 트위터에서 반복적으로 “박유하를 파면하라!”면서 자발적인 위안부라 했다”는 고발직후 뉴스를 반복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이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고발한다면 첫번째 대상은 나눔의집 관계자들이다. 허위사실유포를 시작한 건 그들이었다. 그 외에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대상은 한두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이들을, 1년반동안 나는, 그냥 견뎌 왔다.

하다 못해 언론이라도 바로 서 주기를 바란다. 개인이 아닌 집단이니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해주기를 바라고 싶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대응하려 했다면 나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나에 대한 숙청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자체적으로 수정해주기를 바란다. (고발직후 보도가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수정 혹은 삭제된 연합뉴스, 한국일보, 한겨레, 조선일보 기사를 참조해 주기 바란다)

내가 꼿꼿해서 얄밉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의 심리가 서글프다.
나는 내가 지쳐 쓰러지거나 퇴출당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할 뿐이다. 또, 비열한 미움은 때로 나를 강하게 만든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909976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0008537359391

渦中日記 2016/1/2

그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나를 비난하는 글을 여러개 읽게 되어 새해 첫날부터 우울했다. 한일양국 정부가 만든 일이긴 하지만 정초부터 그런 글을 읽을 나에 대한 배려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튼 새로운 움직임을 보면서 새롭게 안 것이 있다.이제 여성들이 나서고 있다는 것. 그들의 분노 역시 “그들안의 소녀”를 내가 훼손시킨 데 대한 분노였다는 것.

얼마전 아이유사태때 썼던 글을 다시 올려 둔다. 이번에 나선 건 “대중”이라기보다는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여성들이다. “해석된 인물”이 현존하는 인물인지 소설 속 인물인지의 차이는 있지만. 물론 나는 근거 없이 해석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이들은 내 책에서 느꼈다고 한 “할머니의 아픔”을 인정하지 않는다. “공감의 독점”현상. 우파나 일본이 하는 일은 언제나 위선이고 꼼수로 간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를 스파이로 보고 싶어 하는 이유도.
이들에겐 오로지 우파나 일본과의 “거리두기”만이 “올바른 인간”의 기준이 된다.

모든 사안에서 정치적 입장이 앞서면 판단과 발언과 행동이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학력사회의 단순사고 지향.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경험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대로 가면 정권교체는 언제까지고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 사실 나의 관심은 거기에 있다.

————-

정치가의 권력과 억압만 파시즘적인 건 아니다. 대중 역시 권력을 갖고 있고 때로 스스로 파시스트가 된다.

아이유에 대해 음원폐기마저 요구하는 이들은, 체제권력 이상으로 폭력적이다. 더구나 이런 식의 폭력은 “민주””민중”이라는 이름 아래 그 폭력성이 인식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들이 보호하려 하는 건 제제가 아니다(심지어 제제는 현실인물조차 아니다.) 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가져왔던 이미지를 지키려 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 깨진 데 대한 분노를 발산시키고 있을 뿐. “나의”라임오렌지나무가 훼손된 데 대한.

국가도 국민도 불필요한 일에 목소리가 너무 크다. 대한민국의 오늘과 내일이 진정으로 걱정된다..
(11/7. 페이스북 포스팅)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59404097419835

渦中日記 2015/12/22

원거리 민족주의(long distance nationalism)라는
개념이 있다. 몸은 바깥에 있지만,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민족주의적 감성에 빠지기 쉽다는 개념이다.

뉴욕의 한국인 학부모들이 뉴욕타임즈 기사에 자극을 받은 것 같다. 내 책의 반은 일본비판이라는 걸 이 기사가 썼었는지 잊어 버렸다. 2007년에 보스톤의 학부모들은 반전(反戦)수기인 “요코이야기”를 결국 출판사가 자체회수하도록 만든 적이 있다.

“제국의 위안부”는 전자책도 있다. 우선은 읽고 나서 행동에 나서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http://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51222_0010492092&cID=10100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51256344901277

渦中日記 2015/12/21 – 왜곡욕망

왜곡욕망

내일 나를 규탄하는 모임이 “학술토론”의 이름으로 열린다고 한다. 이들은 장문의 보도자료를 써서 이 모임을 알렸는데 보도된 곳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들은 얼마전에 일본에서 나온 성명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조차 양비론이라며 비난한다. 기소사태를 우려하는 그 성명이 불만이라는 건, 고발과 기소에 찬성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아가 이들의 포스터와 메일은 내가 구속 당한 것처럼 쓰고 있다. 구속을 원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잘못 기술한 것인지 의도적 왜곡인지 모르겠지만, “구속”당할 만큼 박유하는 악인이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고 싶은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왜곡욕망은 나를 비난하는 모든 이들한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일이다. 고발한 나눔의집은 물론이고, 논문이니 집담회라는 이름의 아카데미즘공간에서조차 그런 일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어제 아침에 나온 뉴욕타임즈 기사를 처음 소개한 뉴시스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원기사에도 약간의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댓글이 비판 일색”이라는 헤드라인과 오역섞인 번역은 읽는 사람이 나에게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뉴시스는 이전부터 일관되게 나에게 비판적이었던 매체다.
내가 본 세 종류 보도 중에는 뉴스원 기자의 보도가 가장 정확했다.

누가 봐도 나쁜 사람들과 싸우는 일은 우울하지 않다.
그런데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의 도덕적타락을 마주하는 일은 정말이지 우울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우울하다.

http://m.news1.kr/news/category/?detail&2521252&96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5069028495788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2/15

기소 이후 한달이 되어가는데 아직 원래의 일상을 못 찾고 있다. 원래의 일상이란, 재판과 그에 관련된 일들이 생활과 감정의 중심이 되지 않는 상태다.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은 기본적으로 내게 “비일상”일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많이 지난 탓에 기소 이전에는 조금은 평정심을 찾았었다. 그런데 기소 이후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일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아직 살아나지 않는다. 그저, 필요 최소한도의 말과 글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한일 양쪽 성명을 비롯해 이런 글들, 그리고 페북에서 여러 글들을 써 주는 분들을 위해서 기운을 차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장정일 작가의 말은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나는 이 1년동안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저 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해왔을 뿐이다.
얼마 전에 인터뷰를 해 주었던 기자가 이번에는 칼럼을 써 주었다. 욕 먹을 걸 알면서도 이렇게 쓴 기자가 여성이라서 더 기쁘다.

http://www.hankookilbo.com/m/v.aspx…

http://news.donga.com/3/00/20151215/75364063/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6940285332883

渦中日記 2015/12/9

<제국의 위안부>에 비판적인 학자들이 오늘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답변–“토론을 요청하기 전에 고소를 취하하도록 노력하는 게 수순일 것”이라고 한 얘기에는 긍정적인 대답을 얻지 못했다. 정대협 전 회장이 두 사람이나 있는데도, 그들에겐 그런 노력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들이 “할머니의 아픔”에는 더할 수 없이 민감하면서, 같은 학자인 나의 정황에는 둔감한 이유가 궁금하다.
나는 요즘, 끊임없이, 새롭게, 할머니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어제 퇴근길에 어떤 할머니가 전화하셨기에, 대화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말하지만 할머니를 아프게 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할머니는 “서울대교수가 다섯 명이나 당신 책이 나쁜 책이라고 했다더라.”는, 고발직후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누가시켰다고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피해자의 아픔”을 강조하는 이들이 가장 “피해자를 배제”하고 있는 구조가 점점 더 명확히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순적 구조.

교수신문이 그나마 사태를 제대로 보려고 해서 다행스럽다. 언론때문에 피해 본 것도 많지만, 부정적인 부분만을 보는 것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을 보는 편이 인생에는 도움이 된다.

일본의 한 언론인이 “이 사태에 대해서 해설해야 하는데 나쁘게만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 주세요. 나쁜 부분만 보는 것 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려는 노력을 같이 하는 것만이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길일테니까요.”

나역시 아직은 그런 심경을 버리지 않고 있고, 생각해보면 그게 이제까지의 나의 방식이었다.

http://m.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845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3408772352701

渦中日記 2015/12/7-2

기소이후, 한국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다른 곳의 의뢰도 받았고 일부는 이미 인터뷰를 했지만 동아일보가 먼저 나오게 되었다.

호의적인 내용이지만 “매듭지어야”한다던가 “한일 양심적 지식인들이”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 책은 해결을 위해 힌트가 되었으면 해서 쓴 책이지만 해결에만 방점이 찍힌 책은 아니다.

또 위안부문제는 해결을 두고 늘 누군가를 배제해 온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틀 자체가 수정되어야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http://news.donga.com/3/all/20151207/75216867/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1962239164021

渦中日記 2015/12/5

기자회견이 끝나고 사흘. 기소 이후 이주일 여, 내내 경황이 없어 답하지 못했던 전화, 문자, 메일, 메시지등에 답하기 시작했다.
이 주말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원고도 써야 한다.

경향신문 기자가 이번사태에 대해 정리한 기사를 써 주었다. 생각해보면 <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전면기사로 서평을 써주었던 매체다. 그럼에도 얼마전엔 나를 “친일교수”로 모는 기사를 쓰기도 했던.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의 매체가 결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책을 간행한 이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이 내 이름과 함께 돌아 다닌다. 어떤 이는 “설사 직접 쓰지 않았어도 그렇다고 알 수 있는 내용을 쓰지 않았느냐”고 한다.
위안부문제 해결은 어쩌면, 뿌리깊은 매춘차별의식에서 벗어날 때에야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당사자든 주변인이든.

“논박”이란 때로 필요하지만, 때로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논지도 아니고, 지식도 아닐 수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건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태도, 그리고 타자와 마주하는 자세일 뿐이다.

http://h2.khan.co.kr/20151203163105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1018259258419

渦中日記 2015/12/2-2

며칠간 경황이 없어 어젯밤 늦게야 오늘 기자회견에서 발표할 글을 썼다. 허핑톤포스트가 게재해 주었는데, 다시 보니 중요한 말을 빠뜨렸다.

나를 비판하는 이들은, 내가 “당사자/피해자를 배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의도했던 건, 또다른 “당사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문제발생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공존했던,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정부보고서에조차 등장할 수 있었던 “당사자”들. 세월이 가면서 지원자와 국가의 목소리에 묻혀 “삭제”당했던 목소리들.
나는 그렇게 해서 우리시야에서 사라졌거나 혹은 여전히 존재함에도 들리지 않는,”언로”를 갖고 있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위안부 할머니의 목소리를 나는 아직 세상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도하자마자, 고발당했다. “당사자”란 하나가 아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yuha-park/story_b_8695314.html…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9404569419788

渦中日記 2015/12/2

기자회견과 지식인 성명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한국언론 일본언론은 물론 미국 스페인 언론까지 와 주어 장내가 가득 찼을 정도였습니다. 관심 가져주신 기자,언론인 여러분들, 특히 Facebook 친구 언론인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위한 성명에 참여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어떤 국면이 될지 모르지만 선생님들이 함께 해주셨으니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려주신 분 중 한 분인 김원우 선생님께서 내내 뒤에 앉아 계시다가 가셨는데 저와 함께 찍힌 사진이 있기에 올려 둡니다. 우연히도 옆에는 역시 오래 함께 해준 친구들이 있군요

우선 간단히 보고 드립니다. 먼저, 오래오래 소중하게 기억될 이름들, 191분의 성함을 옮겨 둡니다.

————

학계

강남순 (교수)
구인모 (교수)
권보드래 (교수)
권순엽 (교수)
권영돈 (교수)
권정희 (연구자)
권창규 (학자)
권희주 (교수)
김경옥 (교수)
김규현 (교수)
김두철 (교수)
김미영 (교수)
김석희 (교수)
김성보 (교수)
김승구 (교수)
김예림 (교수)
김용균 (교수)
김용찬 (교수)
김우재 (교수)
김유수 (학자)
김 철 (교수)
김현석 (교수)
김현주 (교수)
나병철 (교수)
나일경 (교수)
남기정 (교수)
남상욱 (교수)
문정인 (교수)
박경수 (교수)
박노현 (교수)
박삼헌 (교수)
박성현 (연구자)
박세진 (교수)
박슬기 (교수)

박정란 (교수)
박재석 (학자)
박진영 (교수)
박진용 (학자)
박현선 (교수)
박혜란 (교수)
박혜성 (교수)
배승주 (강사)
배아란 (연구자)
백규석 (연구자)
백문임 (교수)
서동진 (학자)
서현석 (교수)
소문수 (교수)
송기문 (교수)
송은영 (학자)
신경숙 (교수)
신인섭 (교수)
신형기 (교수)
심준섭 (교육가)
오경환(교수)
오김숙이 (연구원)
오덕재 (교수)
오석태 (학자)
오정환 (연구자)
유승경 (연구자)
유승진 (학자)
윤성호 (교수)
윤태진 (교수)
이강민(교수)
이경분 (교수)
이경원 (교수)
이경훈 (교수)
이권희 (교수)
이기연 (강사)
이순재 (교수)
이승은 (학자)
이승희 (학자)
이영준 (교수)
이우연 (학자)
이윤석 (교수)
이윤영 (교수)
이종일 (교수)
이진경 (교수)
이창남 (교수)
이한정 (교수)
이혜령 (교수)
이효석 (과학자)
임정화 (연구원)
임진영 (학자)
장세진 (교수)
장영철 (교수)
정규영 (교수)
정병호 (교수)
정승원 (연구원)
정영희 (교수)
정의태 (교수)
정종현 (교수)
정혜선 (교수)
정희모 (교수)
조관자 (교수)
조문영 (교수)
조석주 (연구자)
조세영 (교수)
진영복 (교수)
차승기 (교수)
최건영 (교수)
최길성 (교수)
최순애 (학자)
표세만 (교수)
한승욱 (연구자)
허병식 (학자)
홍윤표 (교수)

*작가・문인

고영범 (극작가)
고종석 (작가)
김경옥 (공연평론가)
김곰치 (소설가)
김도언 (작가)
김병익 (평론가)
김원우 (작가)
김현호 (사진비평가)
류 근 (시인)
문강형준(문화평론가)
문부식 (시인)
박일환 (시인)
배수아 (소설가)
배홍진 (작가)
변정수 (평론가)
서준환 (소설가)
손이상 (문화평론가)
송태욱 (번역가)
신은실 (영화비평가)
양한승 (문인)
양혜진 (번역가)
유시민 (작가)
이광호 (평론가)
이문재 (시인)
이원석 (문화비평가)
이제하 (작가)
장윤선 (번역가)
장정일 (소설가)
정과리 (평론가)
정숙희 (극작가)
정찬용 (작가)
조영일(평론가)
최규승 (시인)
최 범 (평론가)
함성호 (시인)
홍미화 (번역가)
홍세화 (작가)

*문화・예술인

강운구 (사진작가)
경 순 (다큐감독)
고성용 (건축사)
김인범 (예술가)
박진영 (사진작가)
안악희 (독립음악가)
유성준 (예술가)
임옥상 (화가)
장현우 (사진작가)
정경록 (독립영화감독)
조미영 (예술가)
조민숙 (예술가)
조세영 (독립영화감독)
최정우 (작곡가)
태준식 (독립영화감독)

*언론・출판인

김규항 (칼럼니스트)
김다미 (출판인)
김용범 (프로듀서)
김종영 (언론인)
김지현 (언론인)
노재현(출판인)
박성태 (언론인)
안보영 (프로듀서)
오태규 (언론인)
이강택 (프로듀서)
이수경 (언론, 예술인)
임현규 (광고인)
장혜경 (언론인)
정종주 (출판인)
조기조 (출판인)
조동신 (출판인)
조용래 (언론인)
주연선 (출판인)
최성욱 (언론인)
황성기 (언론인)
황영식 (언론인)
*법조인

금태섭 (변호사)
김용찬 (변호사)
김향훈 (변호사)
박도준 (변호사)
정우성 (변리사)
최명규 (변호사)

*의료계

김택수 (의학박사)
박성환 (의사)
윤종완 (의사)
윤준호 (치과의사)
정 부 (의료인)
최명환 (의사)

*종교계

이정우 (목사)

총 서명인 194명

『제국의위안부』의 형사 기소에 대한 지식인 성명

2015년 11월 19일, 서울 동부지방 검찰청은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 종군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묘사하고 일본군과 종군위안부를 “동지적 관계”로 표현하였다는 이유로 저자를 형법상의 명예훼손죄로 기소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 17일, 서울 동부지방 법원은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학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취지로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 가운데 서른네 곳의 삭제를 명하는 “가처분 신청 일부인용”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 일련의 조치에 대해 우리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선, 검찰 측에서 제시한 기소 사유는 책의 실제 내용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습니다.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은 저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인사들을 비판하기 위해 저자가 그들의 발언 중에서 인용한 것이며, “동지적 관계”라는 말은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조선인의 사정을 그 전쟁의 객관적 상황에 의거해서 기술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입니다. 검찰이 과연 문제의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기소 결정이 과연 공정한 검토와 숙의의 결과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공론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책입니다. 특히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집단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이 주관하는 아시아태평양상, 와세다 대학이 주관하는 이시바시 단잔 기념 저널리즘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국내 출판사 마흔일곱 곳이 참여하는 모임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 책의 삭제판 출간이라는 오늘의 출판현실에 주목하여 이 책을 올해의 책 중 한 권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에 논란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학술적으로 보다 철저한 조사와 정교한 분석을 요하는 대목이 있을 수 있고, 국내외의 이런저런 정치사회단체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군위안부는 당초부터 갈등을 유발할 요소를 가지고 있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까다로운 사안입니다. 이 사안을 다루는 합리적인 방법은 어느 특정 정치사회집단이 발언의 권위를 독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표출되고 경합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검찰의 기소 조치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사법부가 나서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론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와 발언의 자유가 당연히 제한을 받을 것이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주장들이 진리의 자리를 배타적으로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군위안부 문제의 범위를 넘어 역사 문제 일반과 관련해서도, 국가가 원한다면 시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도 무방하다는 반민주적 관례를 낳을 것입니다.

한 학자가 내놓은 주장의 옳고 그름을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발상은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입니다. 우리 사회는 1987년 권위주의 정권을 퇴출한 이후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민주적 관례와 제도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으며 사법부를 포함한 국가 기구 또한 그러한 사회적 진보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습니다. 검찰이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를 형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한 것은 그러한 민주화의 대세에 역행하는 조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시민들과 함께 박유하 교수에 대한 기소 사태를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부디 검찰의 기소가 취하되기를 바라며,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2015년 12월 2일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39315759428669&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theater

渦中日記 2015/12/1 – 기자회견 전야

그저께는 마이니치신문 인터뷰를 했고, 어제는 뉴욕타임즈 인터뷰를 했다. 한 일본인기자는 나에게 전화해서 한국언론의 반응을 물었다. 한국언론에서는 아직 인터뷰신청이 없고 기소를 직접 비판하는 기사나 칼럼은 내가 아는 한 아직 없다고 했더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이유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응원을 보내 주는 분들은 계시다.

내일 기자회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1년반 동안 재판소와 세상을 향해 “내 책은 위안부할머니를 비난하는 책이 아니다” 라고 외쳐왔지만 그 외침은 철저하게 묵살당했다. 읽은 이든 안 읽은 이든 나를 비판하는 이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책임을 부인하는 일본””피해를 호소하는 할머니”라는 두가지 대비되는 이미지인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그들에게 내 책은 그러한 “정황”에 대한 인식이 없는, 그러한 “정황과 싸우고 있는 할머니의 인권”을 짓밟고 있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 읽은 이들조차 “똥을 먹어봐야 아느냐”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전제”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문하지 않는다. 조금 사려깊은 이들은 “책이 설사 그런 의도를 담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상처입었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검사는 내게 책의 문맥을 보면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구절”이 문제제기되는 한 그건 “법적”으로는 문제삼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1년 반동안 알게 된 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검찰과 법정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사태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방면으로 생각하려 한 인문서적에 대해 “판단”이 맡겨져서는 안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법학자의 발상이 인문학자의 발상과 얼마나 다른지도 알았다.

가처분재판부와 검찰이 나의 책을 성실하게 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의 답변서를 읽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했다고 쓴 원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데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검사는 “내가 한국에서 이 문제를 세번째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아마도 검사는 원고측이 제출한 방대한 자료들–유엔보고서니 그외 자료들을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출한 또다른 자료, 1992년에 한국정부가 만든 자료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료는 나의 견해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은 나의 책을 판단할 때 단순히 “할머니의 명예”침해 여부로만 묻지 않는다. 그들이 갖고 있는 현대일본에 대한 이해, 식민지시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 책에 대해 말한다. 나눔의집 측이 내 답변서를 읽고 “허위!”라고 주장했던 처음 주장을 바꾸어 나의 “역사인식”이 “공공선”에 반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전쟁범죄를 찬양”하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런 생각이 잘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그런 그들의 전략은 유효했고 “삭제하라”는 명령과 “기소”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내 책은 바로 그런 그들의 “전제”와 “사고”에 대해 물으려 한 책이었다. 그러니 나는 어쩌면 그동안 접점자체가 없는 싸움을 해 온 셈이다.
수십번 한 이야기지만 이 싸움은 할머니와의 싸움이 아니다. 지원단체와의 싸움조차 아니다. 그저, 20년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했이들, 그들이 이 사회에 심어놓은 “인식”과의 싸움일 뿐이다. 그 인식의 뒤에는 때로 이런저런 권력도 보이지만.
나를 지지해 준 이들 중에 외국등 “바깥”에 있는 이들이 많았던 건, 이 사회를 지배하는 통념과 힘에서 자유로운 이들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혹은 “안”에 있을지라도 우연한 인연이나 통념을 존재와 생각과 행동의 근거로 삼지 않고, 그래서 생각이 자유로운.

나를 위한 “지식인성명”에 서명을 받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내일 나의 기자회견에 이어 발표된다. 주로 학계, 문인을 포함한 문화예술계, 출판계, 언론계, 그리고 법조계 분들이 참여해 주었다.
오래 교류해 온 학문적동지이기도 한 분과, 고발이후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셨던 명망가가 나서주고 계신데 나는 늘 교류하는 페이스북 친구들에게조차 미처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유명진보논객들이 동참해 주었지만, 발표되는 첫성명에 늘 지지해 주었던 페북친구들의 이름이 없으면 그간의 상황이 반영되지 않은 성명서라는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었습니다.

혹 이제부터라도 참여해 주실 “해당분야” 분들은 아래 댓글에 있는 백승환군에게(이미 저에게 보내신 분은 괜찮습니다) 페이스북메시지로 이메일주소와 함께 성함(신분)을 적어 알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예:박유하(연구자), 홍길동(언론인)등. )
오늘밤 10시까지입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8473506179561

渦中日記 2015/11/27

아침에 나를 기소한 검사가 전화를 했다. 검찰에 오라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전자 지문날인”을 위해서라고 했다. 처음으로 “범죄 혐의자”가 되었음을 절감했다.

만인의 비난을 받는 사태는 이번이 세 번째다. 하지만 조금씩 그 양상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작년 6월에는 내 담벼락에 쏟아지는 댓글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지만, 이제 그런 일은 없다.
어떤이는 내가 친구만 댓글을 달 수 있도록 한 건 다른 의견은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힐난하지만 나는 들을 만한 의견은 듣는다. 두번의 경험에 의해 그런 비난의 대부분은 들을 만한 의견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어떤 비난들이 있는지는 내가 원하면 트위터로 쉽게 볼 수 있다. 해명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부분들은 메모 중이다. 사태가 안정되면 쓸 생각이다.

김규항 선생님이 올려주신 정철승씨의 글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나는 그런 이들의 글에 더이상 상처받지 않는다. 가부장제의식으로 똘똘뭉친 남성들의 비난이 내포한 폭력성에 대해서도 조만간 쓸 예정이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대한민국의 문제점은 그런 이들이 인기가 있다는 점이다.

고발 이후 모든 비난은 고발을 지탱했다. 특히 “박유하의 책은 문제 있는 책”이라는 암시를 흘려 대중을 호도했던 지식인들의 비판이야말로 기소를 이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지식인의 권위”는 때로 우아하게 폭력을 유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고발에는 반대한다”는 말은 지극히 자가당착적이다. 정말 비판하고 싶었으면 고발부터 비판했어야 했다. 그런 아이러니한 정황을 만든 것이 고발이라는 사태였다.

다음 주 수요일에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다. 서구 언론들이 관심을 보여 오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서글프다. 위안부 문제를 미국에 호소하지 말고 직접 일본에 이야기하자고 나는 말해 왔는데, 정부와 지원단체가 기댔던 매체들이 이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찾아오는 아이러니라니. 나는 이런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아사히신문칼럼은, 어제 성명에 언급하면서 “하지만 정말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한국인들”이라고 쓰고 있었다.

가능한 일이라면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싶다.

————–

기자회견 안내 記者会見案内

<제국의위안부>검찰 기소관련 박유하교수측 회견

언론매체 각위

일시 : 2015년 12월2일(수) 오전 10시
장소 :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쓴 박유하 교수가 검찰기소와 2014년6월의 고발사태 전후, 그리고 그 이후의 정황에 대해 말합니다.

기소 이후 대부분의 언론들이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할머니들을 “자발적 매춘부” 로 썼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안부들을 그렇게만 보아온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그들이 한 말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고발당시 원고측이 보도자료를 통해 내보내고 법원제출서류에도 사용했던 이러한 오해는 박유하교수가 법원제출서류와 그밖의 매체를 사용하여 반복적으로 설명했음에도 1년반 가까이 지나도록 시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소라는 사태를 맞아 반복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는 원고측 주장을 전혀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법원과 검찰에 특히 중대한 책임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동안 박유하교수는 여러 정황을 감안하여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수단을 충분히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가처분재판부와 검찰에서 상식에 바탕한 결론을 내려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음이 판명되었으므로 이제 언론을 향해 이 고발과 기소,그리고 책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2015년11월26일 무라야마담화의 무라야마 전수상, 고노담화의 고노전관방장관, 그리고 작가 오에겐자부로선생까지 동참한 일본에서의 성명을 받아 한 언론인은 박유하의 책이 “오독되었을 가능성” 을 제기했습니다.
위안부문제는 너무나 여러갈래로 착종되어 있어, 짧은 시간에 책과 고발사태에 대해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언론/학문의 자유가 없는 것으로 비치게 되어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마저 땅에 떨어지게 된 지금, 우선 시급하게 해명과 항의가 필요하다고 간주했습니다. 언론관계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2015년 11월 27일

세종대 박유하
뿌리와 이파리 대표 정종주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3667615302596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1/26

오늘 오후에, 나에 대한 기소를 비판하는 성명이 나왔다.

이번에 중심에 있어준 건 와카미야 아사히신문 전주필이고, Masahiko Nishi 교수, 우에노치즈코 교수, 고모리요이치교수, 작가 나카자와 게이선생등이 각각 발벗고 나서 주었는데, 오에겐자부로 선생에 더해 무라야마담화의 무라야마전수상, 고노담화의 고노전관방장관까지 동참해 주었다.

일본 최고의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내 책은 세간에서 말하는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얼마전에 통화했던, 원고가 된 한 할머님도, “당신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었다.

기사에 서명자 이름이 빠져 있어 첨부해 둔다. 오래오래 잊을 수 없을 이름들.

浅野豊美(Asano Toyomi, 아사노 토요미)、蘭信三(Araragi Shinzo, 아라라기 신조)、石川好(Ishikawa Yoshimi, 이시카와 요시미)、入江昭(Irie Akira, 이리에 아키라)、岩崎稔(Iwasaki Minoru, 이와사키 미노루)、上野千鶴子(Ueno Chizuko, 우에노 치즈코)、大江健三郎(Oe Kenzaburo, 오에 겐자부로)、大河原昭夫(Okawara Akio, 오카와라 아키오)、大沼保昭(Onuma Yasuaki, 오누마 야스아키)、小倉紀蔵(Ogura Kizo, 오구라 키조)、小此木政夫(Okonogi Masao, 오코노기 마사오)、加藤千香子(Kato Chikako, 가토 치카코)、加納実紀代(Kano Mikiyo, 가노 미키요)、川村湊(Kawamura Minato, 가와무라 미나토)、木宮正史(Kimiya Tadashi, 기미야 타다시)、グレゴリー・クラーク(Gregory Clark, 그레고리 클러크)、ウィリアム・グライムス(William Grimes, 윌리엄 그라임스)、栗栖薫子(Kurusu Kaoru, 쿠루수 카오루)、河野洋平(Kono Yohei, 고노 요헤이)、アンドルー・ゴードン(Andrew Gordon, 앤드류 고든)、古城佳子(Kojo Yoshiko, 코죠 요시코)、小針進(Kohari Susumu, 고하리 스스무)、小森陽一(Komori Yoichi, 고모리 요이치)、酒井直樹(Sakai Naoki, 사카이 나오키)、島田雅彦(Shimada Masahiko, 시마다 마사히코)、千田有紀(Senda Yuki, 센다 유키)、添谷芳秀(Soeya Yoshihide, 소에야 요시히데)、高橋源一郎(Takahashi Genichiro, 다카하시 겐이치로)、竹内栄美子(Takeuchi Emiko, 다케우치 에미코)、田中明彦(Tanaka Akihiko, 다나카 아키히코)、茅野裕城子(Chino Yukiko, 치노 유키코)、津島佑子(Tsushima Yuko, 쓰시마 유코)、東郷和彦(Togo Kazuhiko, 도고 가즈히코)、中川成美(Nakagawa Shigemi, 나카가와 시게미)、中沢けい(Nakazawa Kei, 나카자와 케이)、中島岳志(Nakajima Takeshi, 나카지마 다케시)、成田龍一(Narita Ryuichi, 나리타 류이치)、西成彦(Nishi Masahiko, 니시 마사히코)、西川祐子(Nishikawa Yuko, 니시카와 유코)、トマス・バーガー(Thomas Berger, 토마스 버거)、波多野澄雄(Hatano Sumio, 하타노 수미오)、馬場公彦(Baba Kimihiko, 바바 기미히코)、平井久志(Hirai Hisashi, 히라이 히사시)、藤井貞和(Fujii Sadakazu, 후지이 사다카즈)、藤原帰一(Fujiwara Kiichi, 후지와라 키이치)、星野智幸(Hoshino Tomoyuki, 호시노 도모유키)、村山富市(Murayama Tomiichi, 무라야마 도미이치)、マイク・モチズキ(Mike Mochizuki, 마이크 모치즈키)、本橋哲也(Motohashi Tetsuya, 모토하시 데츠야)、安尾芳典(Yasuo Yoshinori, 야스오 요시노리)、山田孝男(Yamada Takao, 야마다 다카오)、四方田犬彦(Yomota Inuhiko, 요모타 이누히코)、李相哲(Lee Sangchul, 리상철, Li Sotetsu, 리 소테츠)、若宮啓文(Wakamiya Yoshibumi, 와카미야 요시부미)  (54명)

사무국:西成彦( 니시 마사히코) [email protected]

http://news.donga.com/Inter/3/02/20151126/75041382/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6093969750848

渦中日記 2015/11/25 강의가 없었던 날.

강의가 없었던 날.

하루종일, 제 시간에 식사조차 못할 정도로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중인 성명작업을 지켜보는 일과, 전화와 메일과 이런 저런 연락에 시달렸다.
일본에서의 성명은 내일 오후에 동경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다고 한다. 회견에 나서 줄 이들은 와카미야 아사히신문 전 주필, 여성학자 우에노치즈코 교수, 일본근대문학자이자 “헌법9조를 지키는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아온 고모리요이치 교수가 될 듯 하다.

처음으로, 일본언론 중 아사히신문의 인터뷰에 응했다. 다른 언론들에는 다음주 기자회견(12월 2일 오전 10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을 기다려 달라 했지만, 아사히신문은 책을 낸 곳이기도 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발 후 받았던 형사조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 때 느꼈던 수모의 기억이 떠올라 잠시 고통스러웠다.

뉴욕타임즈 한국인기자에게서 인터뷰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내 사태가 “인권문제”로 보이고 그래서 관심이 있다 해서 응할 생각이 들었다.
고발 이후 짓밟히고 실제로 명예를 훼손당한 건 위안부할머니가 아니라 나다. 내 책을 읽고 할머니들한테 “매춘부!”라고 손가락질했을 이는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말해온 이들과 그런 차별의식에 동조한 이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언급했을 뿐이다.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다 해서.

저녁 무렵에, 비로소 기소장을 받았다. 내용을 읽고 그만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고측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안부문제 연구자가 아닌 그들이 어떻게 내 책이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일까.
결국 그들은 누군가의 주장을 믿고 대리싸움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박유하라는 개인보다는, 지원단체라는 오랜 권력, 힘을 가진 “기존”연구, 여론과 국가라는, “다수의 주장”을 선택한 셈이다.

기소장에 대해 썼던 메일 일부를 옮겨 둔다.
이제 저녁식사를 해야겠다. 다행히 구토증세는 없어졌다..(걱정해 주신 분들,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이 문제에 대한 과거의 이해를 그냥 적고, <박유하의 책은 그런 기존인식을 부정하고 있으니 범죄>,라는 논리입니다.
그런 논리가 성립한다면 학자는 누구나 기존인식만을 말해야 하고 국가를 대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저로서는 물리적강제연행을 부정했으나 구조적 강제성을 강조했고 실제로는 위안부연구자들도 그점에서 일치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고
제가 업자의 책임을 강조한 것을 두고 <국가책임 없다>(이것을 법적책임주장을 비판한 것과 연계시켜 <박유하는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고 하는 거지요)
고 말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왜곡하고 있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지적된 내용 대부분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이처럼 이중삼중의 비틀림들에 의한 억압이 제가 처한 상황입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5603783133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