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1. 역사의 사법화 (3)

1.역사의 사법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그런데 지금, 위안부문제와 똑같은 일이 징용문제에서 벌어지려 하는 중이다. ‘징용’자체에 대한 공통인식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태인데도(도노무라 마사루의 <조선인강제연행>, 이우연의 논문등도 참고될 필요가 있음에도), 사법부는 역사학자의 학문성과는 배제하고 법률가들의 주장에만 호응해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위안부문제의 경우, 지원자들은 사법부의 권위를 빌려 행정부를 움직였고, 국민의 세금과(정부지원/지자체지원) 국민의 기부금을 사용해 국민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최봉태변호사는, 작년 10월말에 나온 대법원징용판결의 흐름을 만드는 데 기여한 핵심인물이자, 2006년에 정대협과 함께 위안부문제에서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일으킨 헌법소원의 주역이기도 하다. 작년 가을 판결이후, 그는 여러 언론에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며 ‘정부가 양국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주장 중이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 4반세기의 ‘법’의 관여가, 역사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검증이다.

‘법’이 갈등해결의 최종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 인류의 오래된 습관이자 약속이다. 법은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룰‘로서 작동하고, 그런 의미에서 때로 인권보호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법‘의 관여는 그 자체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곧 역사문제갈등의 최종판단주체가 꼭 법률가이거나 법정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사실 한일양국은 그 점을 알고 있었고, 역사문제에서 양국인식의 접점을 찾기 위해 함께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만들어 가동시킨 적도 있다.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학자들조차 접점을 찾을 수 없었던 문제를 법정으로 보냈다는 것은, 상대의 주장에 대한 경청과 접점찾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목소리 높여 외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역사공동위원회의 실패는 인선에 있다. 학자들 중에도 상대편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접점을 찾거나 업그레이드된 비판으로 논의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이들은 적지 않다. )

하물며 법정에서도 역사문제를 판단하려면 학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법정은 결국 ‘학술적’ 공방이 된다.그렇다면,역사를 둘러싼 학술적 논쟁의 장이 법정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구나, 역사학자조차도 자신의 생각을 변함없는 정언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학문이란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의 사태에 관한 인식에서 당사자와 주변인들 ‘모두가 완전히’ 일치하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능한 건 그저, 관계자들 최대다수의 ‘합의점’을 찾는 일일 뿐이다. 실제로 법정에서도 ‘합의’라는 이름의 접점 찾기가 곧잘 이루어지는 건 이미 잘 알려진 대로다.

법정이란, 어떤 사태를 두고 예스와 노를 명백히 해야 하는 공간이다. 예스인지 노인지에 대답하는 일이란 문제를 한없이 단순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화시키는 이유는, 법정에서는 오로지 기존의 ‘법’을 어겼는지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법을 위반한 ‘범죄’로 간주되어야만 처벌가능한 ‘법’의 성격상,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이들 역시, 그 때문에 위안부동원과 위안소라는 장소가 ‘불법‘여부인지에 주목하면서 기존의 ’법‘을 어겼다고 강조해왔다.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강제연행’이라고 말해 왔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물론 그들은 처음엔 위안부동원을 군인에 의한 강제동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이 애매해지자, 이번에는 강제성을 위안소에서의 생활로 옮겨 설명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후에 다시 보겠지만 이미 성립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이 말은 위안부문제에서 일본이나 군의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강제성’강조가 위안부문제를 국가와 국가간의(민족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일본인위안부‘가 잊혀진 이유는 거기에도 있다. ‘일본인위안부’란 당연히 ‘일본군(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에 의구심을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안부문제가 ‘인권’문제라면 당연히 ‘일본인위안부’문제도 주목받았어야 했음에도, 일본인위안부는 그렇게 해서 같은 4반세기동안 철저히 잊혀졌다. 다름 아닌 ‘인권’문제를 직접 다루는 이들에 의해서다.

일본인 위안부가 주목받지 못한 건 다른 이유도 있지만 ‘위안부문제의 사법화’에도 있다. 위안부문제가 민족간 문제이기 이전에 남녀문제이자 계급문제라는 인식을 미처 갖지 못했던 ‘법지상주의’는, 많은 이들이 위안부문제를 오로지 <일본군이 ‘타국’여성을 노예처럼 끌어간 국가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역사의 사법화’는 때로 순기능도 한다. 하지만 위안부문제의 경우, 문제자체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정황에서 과거의 ‘전쟁범죄’로만 인식되면서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를 배제했다.

징용문제 판결을 두고 대통령과 외교부가, 사법부가 하는 일이니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이런 과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대통령 자신 변호사로서 ‘역사의 사법화’에 관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의 최봉태 변호사에 따르면 문대통령은 2000년에 부산에서 일으킨 최초의 징용자소송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사반세기에 걸친 ‘역사의 사법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사법화’는 또다른 모순을 만들면서 동시대뿐 아니라 차세대의 평화마저 위협하게 것이다. 그 조짐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의 사태에서의 정의를 판단하는 능력은 법관들에게만 있지 않다. 더구나 사법이 때로 거꾸로 폭력이 되어 온 역사는 멀리 가지 않아도 냉전시대의 인혁당사건이 보여 주었다.

 ‘역사의 사법화’의 세월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지원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당사자주의가 중요하다면 더더욱, ‘역사의 사법화’의 주역이었던 대리인/대변인들이 아니라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목소리를 내 온 ‘당사자’는 실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사법공간은, 대립되는 의견의 한쪽 손을 들어주는 일로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도 ‘법’이란 역사문제를 관장하는 장으로 최적의 도구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역사문제가 정치문제이자 외교문제가 되어 국민모두의 문제가 된 이상, 그 해결은 당사자들은 물론, 해당국민들이 함께 납득 가능한 해결이 되어야 한다. 접점을 찾기 위한 모든 과정은 내외부간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어야 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힘으로 제압하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의 목표는 동시대는 물론 차세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2)

1.역사의 사법화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를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지원자들, 그 중에서도 ‘법’전문가인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이 해야 할 사죄가 ‘법적사죄’라는 주장을 해 온 것도,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온 것도 법학자/법률가들이다.

그런데, 한시대의 역사가 야기한 문제에 대한 사죄가 왜 꼭 ‘법적’사죄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없었다. 자세히는 따로 쓰겠지만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강제연행-국가책임’이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이 왜 ‘법’을 기반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없었다는 얘기다.

일본이 90년대 이후 여러번에 걸쳐 사죄와 보상을 실시하며 위안부할머니들의 목소리와 지원자들의 요구에 대답했음에도, 그런 사죄는 의미가 없다면서 국회에서 ‘배상’법을 만들어서 사죄/보상해야 한다는 게 ‘법적사죄’의 내용이다. 

그런데 일본국회의원들 중 일부는 90년대에서 2000년대초반까지, 그 배상법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이 아닌데 왜 국가범죄인가?’ 라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그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반발이 생겼는지 분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그 반발을 경청하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이후 있었던 건, 자신들의 주장을 돌아보고 일본을 움직이도록 만들 더 날카로운 비판방식모색이나 새로운 접점찾기가 아니라, 실질적 내용을 바꾼 ‘강제연행’주장과, ‘죄의식도 책임의식도 없는’ 일본에 대한 비난, 그리고 소송이었다.

2015년말에 있었던 ‘한일합의’에 지원자들이 반대한 이유도, 실은 그것이 ’법적‘사죄가 아니었다는, 그 단하나의 이유에 있다. 나는 그 주장의 문제점을 이미 논한 바 있지만, 이 글 후반에서 다시한번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한다. 

사실, ‘위안부를 매춘부라 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 역시 나에 대한 고소의 표면적 이유일 뿐, 고발자들이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고소한 이유는 ‘박유하의 활동이 자신들의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이 내용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고소장에 명확히 쓰여 있다. 덧붙여 두자면, 그 터무니 없는 주장을 담은 보고서를 만든건 로스쿨 학생들이고, 그렇게 읽도록 이끈 것도 변호사였다.

위안부지원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고소하고 승소하여 정부를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앞에 썼지만, 문제해결수단으로 사법부나 국제재판소가 쉽게 이용되는 건 한국만이 아닌 듯 하다. 그런 현상을 두고 어떤 이는 “정치의 사법화”“외교의 사법화” 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지금 더 심각한 건 ‘역사의 사법화’ 현상이다.

20세기말에 일어나 21세기로 이어진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건 학자 이상으로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실제로, 위안부문제담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논리를 만든 것도, 역사학자 이상으로 법률가들이다. 그 선두에 섰던 건 도츠카에츠로라는 일본인 변호사였다. 그는 80년대부터 인권문제를 유엔에 어필하는 활동을 해 왔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어필하고 싶어했던 정대협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에 따르면, 지금은 일반화된 ‘성노예’라는 단어도 그가 만든 단어였다.

90년대 이후 정대협 역시 유엔을 향해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나(쿠마라스와미도 법학자다) 맥두걸 보고서가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든 건 이들 일본인변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변호사협회자체가, 단체로서, 조직적으로 일찍부터 이 문제와 마주해 왔다.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등 ‘피해자’문제에 일찍부터 관여해 온 최봉태변호사가, 자신이 피해자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가 일본유학 당시 일본인 변호사들이 열정적으로 이 문제를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본 것에 있다고 한 말은 그런 정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위안부문제가 대두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인 1994년에 국제법률가위원회가 보고서를 내놓은 것도, 이들 일본법률가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현시점에서의 시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끼친 건 역사가나 증언자 이상으로 법학자/법률가들이다.

법률가들을 역사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만든 건 ‘동경재판 혹은‘ 뉴른베르크재판’이었다. 말하자면 과거의 역사에서 일어난 문제가 법정에서 ‘처벌’된 것을 아는 이들이, 새롭게 맞닥뜨리게 된 과거문제 역시 그와 비슷한 문제로 이해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처벌’하려 했던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위안부문제를 ‘전쟁‘중인 적대국가 사이에 일어난 일로만 이해하고, ’전쟁범죄‘로 이해했다. 이들의 보고서는, 동시대에 일어난 아프리카/동유럽의 내전에서의 부족간강간납치등 여성들의 피해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자들이 위안부문제를 그런 문제들과 같은 문제인 것처럼 어필했기 때문이고, 유엔인권위원회나 국제법률가위원회는 그런 의견을 받아들여 동시대비극과 위안부문제를 동일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미 위안부동원은 공창제를 이용한 간접적 동원이었음이 연구되었고 발표되고 있었다(김부자, 송연옥., 야마시타영애등). 하지만 그런 ‘학문’내용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유엔에 제출된 흔적은 없다. 물론, 위안소에 조선인 대만인 뿐 아니라 일본인도 많았고, 오히려 일본인여성들이 위안부제도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도 강조되지 않았다. 

기존학자들은 1932년 상하이에서 처음 위안소가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미 청일전쟁때 한반도에는 군인을 위한 일본여성들이 있었다. 러일 전쟁 직후에 1910년에 만들어진 진해의 일본군기지가 ‘위안’을 의뢰한 여성들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여성들이었다.

일본과 조선은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화’를 매개로 한 관계였다. 좋든 싫든 조선은 이 시기 ‘일본제국’치하에 놓였으니 일본과 국가단위로 적이 되어 싸운 중국과는, 만주국을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관계가 달랐다. 따라서 조선인 위안부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고찰해야 하는 문제였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제목에 굳이 <제국><식민지지배>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상호관계를 정확히 보아야만 정확한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판만이 해결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이다.

<제국의 위안부>이후, 20년 이상 ’전쟁범죄‘ 라는 말만을 사용해 왔던 연구자/활동가들은 ‘전쟁책임’이라는 단어대신 ‘식민지지배책임’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은 나의 책을 법정으로 보낸 이들에게 동조해 <제국의 위안부>를 계속 비난중이다.

90년대이후 한일갈등문제에서 ‘법’관계자들은 분명 선의와 열정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써 왔다. 그리고 그 노력은 충분히 평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활동은 안타깝게도 4반세기가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법률가들에 의해 사법부가 그들의 손을 들어줬고 그에 따라 정부까지 나섰음에도. 선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세상의 오해와 대립을 증폭시키고 ,결과적으로 갈등을 유지시켰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1)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한일관계가 빈사상태다. 1965년에 수교를 회복한 이후 “사상최악”이라는 표현을 쓰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해마다 열어왔다는 한일경제인 회의가 연기되었고, 지금과 같은 정황이 이어지는 한 6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G20 회의에서 한일수뇌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크지 않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대부분 그런 현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건 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칠한 일본의 태도를 적반하장이라고만 여긴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건 일본의 정치가들이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대통령의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틀렸다. 대통령도 이제는 한일관계회복을 바라고 있는 듯 한데, 분석이 옳지 않은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6년전,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책을 통해 현재와 같은 정황이 닥칠 수 있음을 예고한 적이 있다. 나의 문제제기는 자신들의 운동과 연구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 이들에 의해 법정에 갇히는 사태를 맞았지만, 그 책은 오로지 오늘과 같은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쓴 책이었다. 지금의 한일관계는 단적으로, 나의 입을 막으려 한 이들과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만든 것이다.

작년가을에 신일철 징용판결이 나온 이후 한일관계는 이전에 비해 훨씬 자주 삐걱이고 있지만,그런 양국갈등의 연원에는 위안부문제가 있다. 일본이 참을성이 없어지고 때로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곤 하는 것도 모두 위안부문제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국 쪽에도, 위안부문제를 4반세기 겪으면서 ‘사죄하지 않는 일본’관이 정착되어 버린 탓에 불신이 가득하다.

말하자면, 현재 한일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각각의 문제 이전에, 오랜 갈등의 세월을 겪으면서 쌓여온 불신과 체념 쪽이다. G20이 일본에서 열리는데도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과 수뇌회담일정을 일본이 잡지 않고 있는 것도 그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른바 ‘한일관계’ 전문가들과,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 전문가 혹은 지원자들은 사실 접점이 거의 없다. 전자는 대개 ‘국익’을 언급하며 앞으로 나아가자는 제언을 하고, 후자는 ‘국익보다 개인’이라면서 ‘피해자’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그 양쪽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거의 없고, 그 점 역시, 문제해결을 방해하는 이유중 하나다. 대통령이 취임초기와 달리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는 발언과 행동을 취하게 되었음에도 실질적 변화가 없는 건, 실제정책은 후자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대통령은 그 양쪽이 합쳐져 분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일간 갈등을 빚고 있는 각각의 문제들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하지만, 한쪽은 정치경제문제를 앞세워 생각하느라 문제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른 한쪽으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한 발언권을 독점하도록 만들고 있다. 물론 그 그 독점이 옳은지 여부를 따지기 위해 독자적인 조사와 취재로 ‘발언의 독점’양상의 내부를 제대로 들여다 보려는 언론도 없다. 언론들 대부분은 그저 전자와 함께 탄식하거나, 그저 후자와 똑같은 목소리가 되어 ‘운동’에 참여한다. 한일간갈등문제가, 수많은 언론의 참여 덕분에 전국민이 아는 문제가 되면서도 정작 그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은 늘지 않고 인식은 천편일률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최근 들어 전서울대 교수 이영훈 교수가 열정적으로 위안부문제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아마도 진보쪽 사람들은 이교수의 강의를 그저 일본우익과 동일시하며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위안부문제 담론을 관장해 온 이들은 이영훈교수의 강의에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과의 접점을 찾는 일은, 한국내부의 접점을 찾는 일도 되어야 한다.

사실 90년대엔 위안부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했던 김대중시대를 맞아 2000년대 초반은 수교이후 최고조로 한일관계는 좋았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때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에 진 정부가 문서들을 공개하게 되고, 개인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금을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다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한국정부는 다시한번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법을 만들어 보상했다. 징병/징용자는 물론, 위안부할머니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일부 위안부할머니들과 지원자들은 같은 무렵에 이번에는 외교부를 상대로 또다른 소송을 일으킨다. ‘정부가 위안부문제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소송이다. 5년이 지나고 2011년 여름에 정부-외교부가 패소했는데, 같은 해 겨울에는 이른바 ‘수요데모’ 1000회를 맞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이 들어서게 된다.

90년대에 일어났으면서도 국민적인 관심을 받지는 못했던 위안부문제가 국민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운동의 흐름이 바뀐 건 이때부터다. 이 무렵부터 이른바 ‘평화나비’라 불리는 대학생조직의 포스터가 대학마다에 나붙기 시작했고, 서울시후원으로 이런저런 이벤트를 기획하고 수요집회에 참여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고교등학생과 초등학생까지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패소한 외교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위헌’이 되지 않도록 위안부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관여방식과 내용은 맥락상 하나부터 열까지 지원단체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위안부문제는 본격적으로 ‘외교’문제이자 ‘정치’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정부대상으로 소송까지 걸어 위안부문제를 외교문제로 만들었던 지원자들이, 이제 와서 위안부문제는 ‘정치/외교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라고 주장한다. 정치경제 중심의 국가간문제 따위가 아니라,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인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우선적으로 나서야 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 자체로는 옳은 주장이지만 그 주장은, 위안부문제를 앞장서서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이 바로 지원자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4)

1.역사의 사법화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위안부문제 관계자들은 2000년에 있었던 여성국제전범재판을 통해 히로히토천황을 ‘유죄’로 단죄했다. 변호사였던 박원순 시장은 그 판결을 내리도록 종용한 ‘검사’중 한사람이었다.

아키히토전천황을 ‘전범의 자식’이라고 규정한 문희상의장의 인식이 2000년 여성국제전범재판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은 커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역시도 ‘법적판단’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케이스가 된다.

물론, 국제여성전범법정은 위안부문제 발생 이후, 냉전붕괴와 세계화의 영향으로 더 가까워진 세계여성들이 급격히 교류의 장과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그 결과로 국경을 넘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놓은 장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 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인’ 위안부는 이 자리에서도 배제되었고 그런 한 이 ‘여성’법정은 반쪽짜리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법정’의 권위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정체시켰다.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한 연합국조차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으로 판결하지는 않았다. 군부와 천황을 따로 놓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판결이 맞는지 여부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직 위안부문제에 관해 충분한 이해가 없는 채로, 또 왜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는 대신 ‘상징’으로나마 천황으로 남겨두었는지를 모르는 채로 50여년 후 ‘현대’의 법관들이 성급한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처벌’을 강조하는 이들은 곧잘 매춘을 강요한 군인을 사형시킨 스마랑 사건을 강조하지만, 스마랑사건판결은 국가의 수장이나 군대의 수장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황이 ‘처벌’당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국민의 동요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연합국은 일본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황은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 헌법9조와 맞바꾸어져 말 그대로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이후 44년을 살았다.

그런데 과거의 연합국의 판단에 대한 국제여성전범재판의 관심은 오로지 ‘처벌’여부에만 있었던 듯 하다. 그 판결은 시대적 진보의 양상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시대를 정체시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판결은 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의 여론을 급격히 악화시켰다.

일본의 천황은 일본인들에게는 정치가 아니라 문화다. 일본인들에게는 국제여성전범재판의 판결이나 문희상의장의 발언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부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다만, 문의상의장이 천황의 사죄를 요구한 건 다른 한편으로는 지원자들이 주장해 온 ‘법적사죄와는 대치되는 발언이기도 하다. 일본은 그런 맥락도 읽을 필요가 있다. )

더구나 설령 천황이든 상황이든 일본을 상징/대표하는 이의 사죄가 있다고 한들 위안부문제자체와 해결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그것이 곧바로 한일관계우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가능하기엔 오해와 과장과 독주가 만든 상호불신과 혐오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사회는 그저 ‘사죄하지 않던 뻔뻔한 일본이 국제사회 압박에 못이겨 드디어 무릎을 꿇었다’고만 여길 것이다. 

이 4반세기동안, 법률가에 의해 역사문제가 좌지우지되고, 법정은 개인의 입을 틀어막고 정부를 조종하고 타국을 겁박하는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다. 정의롭고 공정해야 할 법의 공간, 책임을 져야 할 주체조차 존경의 념을 가져야 할 공간을 그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복잡다단한 역사를 외교/정치문제화시키고, 단순한 예스 혹은 노로 대답하도록 만든 건 누구인가?

‘재판이 (일본재산의) 가압류판결을 내린 건 당연한 일이다. 일본과 한국정부가 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최봉태)는 주장은 가히 오늘의 사법의 권력화 현장을 보여준다.

물론 그 조치가 옳다면 사법이라는 권력사용은 고귀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지원자들은 정부가 지원자들과의 논의를 거쳐 일본과 협의한 끝에 ‘한일합의’를 내놓자, 이번에는 그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서 반대에 나섰다. 곧바로 수용하겠다는 의견을 낸 위안부할머니도 있었지만 그런 분의 목소리는 곧바로 묻혔고 지금까지도 그 정황엔 변함이 없다. 그 분들을 그저 회유당한 것으로만 보는(보게 만든 이들이 물론 있다)시선은,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는 듣지 않았던 이 4반세기 한국사회를 상징한다. 

한일합의에 대해서는 다시 쓰겠지만, 그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실은 기억되어야 한다. 사법이 역사를 관장하는 주체로 나서 개인과 정부와 타국에 대한 압박의 도구로 쓰여졌으나,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는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대통령과 국회의장께 제안한다. 한일관계를 회복시키고 장기적인 화해평화를 지향한다면 대화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동시에 그 논의과정을 언론이 국민들에게 전달해 모든 국민들이 듣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고. 시급히 접점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는 1년 단위로, 긴 시간이 필요한 프로젝트는 5년 10년 단위로 대화하면서 학자와 관계자들에게 논의를 맡기고 언론이 보도하도록 하면, 국민들은 그 보도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하면서 싸우지 않고 교류할 수 있다. 10년, 30년, 50년,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고 합의된 사항을 각각의 교과서에 반영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한일양국은 역사인식에서 접점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프로세스에는 북한도 참여해도 좋을 것이다. 백년대계란 그런 것이다.

동시에 정부는, 2005년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나온 징용문제는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민관합동위원회의 견해와 이후,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정부가 해 온 일을 제대로 공지할 필요가 있다. 논의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아직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야 밝혀진 것처럼, 역사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도 지원자들과 법정은 자신들만의 이해와 판단만이 옳다고, 그것에 따르라고 무려 4반세기동안 주장해 왔다. 심지어 알게 된 사실을 언론이나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밝히는 일도 없었다. 그 결과가, 현재의 한일관계다.

이 글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사고를 재검증하기 위한 글이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일제시대 조선인포로심문 조서

와세다대학의 Toyomi Asano 교수가 중요한 자료를 발굴했다는 기사가 오늘아침 마이니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국언론도 많이 보도한 듯 한데,아사노교수의 허락을 얻어 원자료를 번역한 내용을 올려둔다.

하나하나 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나로서는 특히 18번 위안부문제 관련발언과 일제시대 종식이후에 대한 동시대인의 인식이 드러나는 25번,26번이 흥미로웠다.

사실,`여성들을 강제로 끌어갔다면 남자들이 앉아서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건 오늘날도 가끔 듣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말을 동시대인의 입으로 듣는 건 묘한 긴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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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주: PW는 Prisoner of War (포로), PsW 는 Prisoners of War (포로들), Allied 는 연합국으로 번역하였으며, conscription 은 경우에 따라 징용 (업무의 경우), 징병 (군의 경우), 또는 징발 (위안부의 경우) 으로 번역함. MOO는 Military Operation Officer (군 운영 장교) 로 번역함)
국립 ARC 로부터 재발급
기밀문서
군 정보국
포로 및 물자부
보고일 : 1945년 4월 24일
(포로)심문일: 1945년 4월 11일
(포로)번호 및 계급: 41J-1150, 민간인, 이복도
14J-185, 민간인, 백송근
41J-393, 민간인, 강기남
WME
한인 해군 민간인 3명에 대한 종합 보고서,
리스트 78번. 45년 3월 28일 “한국인에 관한 특별 문의사항” 에 대한 회신
1538

서두
심문자에 의해 질문받은 약 100 명의 한국인 포로들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반일감정을 공유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기회주의자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 3명은 자신의 증언에 있어 신뢰할 만한 매우 진실한 증언을 보여준다. 한 포로에 대하여 별도 보고서가 만들어질 것이고 다른 두명은 추가의 심문이 필요하지 않다.

설문지
이 보고서는 45년 3월 28일의 “한국인 심문” 리스트 78번에 기초하였다. 단락 번호는 이 리스트의 질문 번호에 상응한다.

2. 지방정부의 한국인:
마을의 우두머리는 항상 한국인이다. 우두머리는 그의 정직함과 리더쉽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선출된 연장자이다. 일본인은 이 선거를 조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 관청의 관리장:
“면” 대부분의 사무소장은 한국인이다. 10개중 2개 정도가 일본인이다.
“군” 사무소의 장은 보통 한국인이다. “전라북도” 에는 14개의 ‘군’ 이 있고, 1942년 기준 9개소의 장은 일본 정부에 의해 임명된 한국인이다. (상세 정보 없음)
“읍” 사무소의 장은 주요 인구 구성에 따라 일본인과 한국인 양쪽 모두가 있다.
“부” (시) 의 장은 언제나 일본인이지만, 이외 직책은 한국인일 수 있다.
“도” 지사는 대개 일본인이다.
1942년, 전라북도, 충청북도, 강원, 황해도의 도지사는 한국인이었으며,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다.
1940년 이래 정부 관리 직책을 가진 한국인 숫자 변경은 알려진 바 없다.

3. 한국 남성은 1942 이래 일본에서 일을 하도록 징용되어 왔다. 그들은 면사무소에 의해 통지되었다. 한번에 300 에서 1,000 명이 징용되어 일본에 이송되기도 했다. 이런 이송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93 가옥이 있는 한 마을에서는 30명의 남성이2년의 기간 (1942-44) 동안 징용되었다. 징용 기간은 2년이지만, 많은이들이 3년 또는 그 이상 기간동안 체류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 포로는 석탄과 철광 광산 및 비행장 건설에서 일하던 한국인들과 여러 개인적 연결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광산의 가장 깊고 뜨거운 곳에서 일하는 등 가장 열악한 노동이 요구되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는 일당 ¥ 3.50 을 받았고 그중 ¥ 0.10 은 우편 적립으로 공제되었다. 그들에게는 음식과 숙소가 제공되었다. 징용자들의 가족을 위한 보조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그들의 집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친나이 카라푸토 (Chinnai, Karafuto) 탄광에서는 현지인과 일본인 노동자는 일당 ¥ 7.00 에서 ¥ 24.00 을 받았으나, 징용자들은 고정 급여만을 받았다. 통신은 허용되었으나 모든 서신은 검열되었다.
이들 한국인들에 대한 처우는 연합국 포로들보다 열악했다. 일본에 살던 포로는 요시마 후쿠시나켄 (Yoshima, Fukushina Ken, 역자주, Fukushima Ken 일수 있음.) 근처의 탄광으로부터 3명의 한국인이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거기엔 500 징용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들 중 한명은 그가 아키라(Akira) 로 데려가 한 탄광에서 일하게 했지만, 그가 가족에게 쓴 편지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요시마 (Yoshima)로 끌려가 15일간 고문을 받고, 타이라 (Taira) 에 수감되었다. 다른 2명은 잡히지 않았다.

4. 한국인은 1942년 이후 중국 북부, 만주 또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한 포로는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일하도록 징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두명은 만주로 보내어진 징용자는 없었다고 한다.

5. 징용을 거부하는 자는 투옥되었고 그의 가족은 식량을 빼았겼다.

6.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사진과 서명이 부착된 신분증을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

7. 농민들에게는 하루 2 합 5국 (*역자주: 2 合5局,2 go, 5 shaku,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15 리터에 해당) 의 쌀이, 그리고, 사무 직원에게는 하루 2 합 4국 (*역자주: 2 合4局,2 go, 4 shaku =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33 리터에 해당)의 쌀이 할당되었다. 추수 전, 정부 관리는 곡식을 검사하고 추수량을 예상하여 그해 농부와 그 가족 할당량을 공제한다. 나머지는 정부 관리에게 판매해야 한다.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많을 경우 농부에게 행운이고 여분의 쌀을 숨길것이지만,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적을 경우,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양에서 빼내 요구조건을 맞춰야만 한다.

8. 한국인들은 일본인 농민들은 그런 배급할당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대단히 분개하고 있다. 농민들이 반쯤 굶주리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냥 열심히 일한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1942년 전라북도의 쌀 농사는 흉년이었다. 같은 이유로 1945년의 쌀농사 결과도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 뿐이었다. 1941년 이후, 상용 비료가 모두 사라져, 모든 농사가 평균 이하의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력 부족이란 이유로 사용되지 않고 내버려진 농토는 없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전쟁 전에 비해 더 많은 농사 일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필요한 곳에 어디든 함께 돕는다.
한국의 남부지방에서는 경작지의 절반은 쌀경작에서 제외되고 면 농사를 하도록 농민들에게 요구된다. 검사원은 수확량을 예상하였다. 농민은 필요할 경우 여유분을 생산한 사람에게 빌려서 이 예상치를 맞추어야 했다.

9. 소작농은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요구되지는 않는다. (다른 계층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개개인의 인적사항은 “면 사무소” 에 보관되었다.

10. 1942년과 1944년에 각각 한국을 떠난, 농민이었던 두명의 포로는 어떤 형태로든 배급표라는 것을 본적이 없다. (다른 한명은 1935년부터 일본에서 살아왔다.) 의류 구매 요청은 직접 “면 사무소” 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음식은 그들 자신의 경작물로부터 할당되었다.

11. 1944년 4월, 한국인의, 경찰의 승인 없이 차량에 승차하여 100 km 이상을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보행자는 통제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부 관리에 의해 그들의 집에서 아무때나 검문될 수 있었다. 검문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일어나는 경우, 집 구성원 전원의 모든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1943년, 한 포로의 집은 위생 상태 점검 목적으로 두번 검사되었다. 2400 (*역자주: 밤 12시) 에는 모두에게 통행금지령이 발령되었다. 이 시간 이후 자신의 집 밖에서 발견된 모든 이들은 체포될 것이다. 가끔씩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청취 가능 거리내의 모든 마을에 사이렌이 경고의 의미로 이용되었다.

12. 전라북도 전주 근방 출신의 포로는 1938년 처음 시작된 이른바 “자원 입대” 하의 군사 훈련을 받은 여러명을 알고 있었다.
1938년부터, 6개월 반 동안의 기본 훈련이 경성 (Keijo) 또는 나남 (Nanam, Ranam) 에서 실시되었다. 훈련은 일본인들과는 별도로 실시되었으나, 일본군 운영장교에 의해 수행되었다. 기본훈련 후 지원병들은 2-3 개월의 휴가기간을 부여받은 후 전투 병과에 배속되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일본부대 속에 각각 분산 되었다. 훈련과정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본어 말하기 능력과 최소 2년의 교육이 요구되었다.

13. 징병 전 일본어 훈련 학교가 각 ‘면’ 마다 설치되었다. 학생들은 매일 3-4시간씩 1년간 출석했을 것이다.

14, 15. 포로들은 징병법 (*역자주: 또는 징용법)이 발효되기 전에 한국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이것과 징용으로부터 도망친 한국인들로 부터 전해 들어왔으나 그들의 이름을 말할수는 없었다. 한국 북부지방 출신들은 그 법에 대해 남부지방 사람들보다 저항하는 경향이 크다.

16. 포로들은 “Tonari Gumi” (*역자주: 일종의 반상회) 를 알고 있었으나, 한국 내의 그런 조직에 대해 들어본 바는 없다.

17. 이 전쟁은 철도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비율 또는 직책에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정거장 감독을 제외한 차장, 철도 엔지니어, 또는 다른 어떤 직책도 한국인이 종사할 수 있다.

18. 포로들이 태평양에서 보아온 한국 매춘여성 모두는 자원자였거나 또는 부모에 의해 매춘업에 팔려온 여성들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직접적인 여성 징발이 있었더라면 노인과 젊은이들이 모두 이것을 감내하지 않고 격분했을 것이기에, 이것은 한국적 관점에서 적절한 것이었다. 남자들은 분노로 궐기하여 이후 그들이 당할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일본인들을 죽였을 것이다.

19. 한국이 독립했던 당시를 살았던 나이든 한국인들은 변함없이 일본인을 미워한다. 몇몇 일본 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친일본성향이더라도, 그들중 여럿은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그들의 기분을 대담하게 말한다.

20. 모든 포로들이 그들이 강제로 징병되었다고 말한다.

21. 한국인들은 그들이 겪어온 이 전쟁의 효과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여럿은 이것이 결국은 그들의 독립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관용이다.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한 포로는 명백히 친 러시아이며, 한국에 공산주의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없고, 한국보다도 훨씬 무능한 나약한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을 그들의 해방자로 기대하고 있다.

22. 태평양 섬들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매우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모든 포로들이, 자신들을 연합군에 넘길까봐 두려워한 일본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 노동자들을 알고 있었다. 티니안 (Tinian) 에서 잡힌 포로는 미군 전선으로 향하는 3명의 여성들을 (그들중 둘은 등에 아기를 업고 있던) 보았다. 포로와 함께 같은 동굴에 숨어있던 한 중위가 그들 모두를 보안의 이유로 죽였다. 그 포로는 자신이 한국인이란것이 알려졌다면 자신도 분명히 죽었을거라고 확신했다.

23. 포로들은 그들이 하와이에 있는 동안, UN 서약에 따른 적정 절차에 의해 “독립 한국” 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두 들었다. 그들이 이 정보를 한국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4. 모든 포로들은 모든 한국인들이 일본과 싸우는데 뛰어들 것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믿고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질것이라는 사실이 전에 알려졌다면 이 명백한 일본에의 충성은 빨리 톤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부 지방 출신의 포로는 남부지방 사람들은 더 수동적이고 일본인들과 싸우는데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적다고 말한다. 독립 운동은 보통 북부지방의 더 활동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원한다. 이 3인의 포로들은 군사 훈련을 받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싸울 기회를 환영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게릴라전에 적합하게 특화되있다고 느낀다.

25. 한국인이 관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분개는 없다. 개개인은 미움을 받을 수 있으나, 미래 한국의 정부를 위해 전체적으로 그들이 관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6. 한 포로는 모든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한다. “일본인은 언제나 심장부터 일본인이다.” 라고 말하고, 일본과의 미래의 문제 때문에 일본인의 잔류는 한국에 손해라고 말한다.
다른 포로는 단지 고위 공직자들만 제거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이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과 역발란스를 맞출수 있을수 있다고 본다.

27. 포로들은 한국이 UN 대표들로부터 임시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있을것이다. 미국의 직접 통치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다른 나라의 경우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

28. 마을 정부 (주: 면, 읍 등) 는 나라가 UN 통치하에 놓이면 별도의 도움 없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각 군에 평균 60 명의 경찰이 있으며, 50% 가 한국인이다. 이 비율은 더 많은 경찰 병력이 훈련될 때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29. 여운형은 한국 독립 운동의 활동적인 멤버로 알려져있다. 그는 1942년 경성 (Jeijo) 에 살았다. 다른 상세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30. 한 포로는 1943년에 일본에서 일했던 한국 공산당의 리더 한명에 대해 들었다. 알려진 유일한 이름은 ‘김’ (가네모토, Kanemoto) 이다.

 

원본 : 「参考資料5」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1088796251178782.1073741825.100001452518600&type=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7576867935890

 

19금 도서 지정 관련 보도

성남도서관에서 나의 책들을 19금 도서로 지정한 배경을 취재해 준 기자분이 있었다. 깊이 감사드린다.

우연히도 오늘, 서울의 한 남자 고등학생 둘이 <제국의 위안부>가 “방과후수업”의 과제도서였다면서 남은 질문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었다. 고등학교 1학년. 책을 읽고 찾아온 학생중에는 최연소다.

책을 너무 좋아한다는 두 학생한테 성남시 조치 얘기를 했더니 학생들도 기막혀 했다.

아이들은 때로, 어른들을 훌쩍 앞서간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6090107263917300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6654784694765

 

급진의 보수화/정의의 악의

이 며칠 도를 넘어선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뒤늦게 시사인 기사를 보았는데, 자료에도 없는 소리를 내가 지어낸 것처럼 쓰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와카미야 선생 사망 소식을 그 밤에 들었으니 내겐 최악의 날이었다.

비판자들은, 자신이 단 한사람을 향해 집단 공격에 참여중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재판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있을 것이다. 재판내용과 상관없는 비판마저 “박유하의 책은 문제있는 책”이라는 담론이 되어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물론 이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더 할 말은 없다.

정영환 비판조차 잘못 옮긴 것으로 보이는 이 “편집위원”은 알고보니 아직 박사과정 재학중인 학생이라고 한다. 아사히신문출판사에 정정을 요구하는 패기는 좋았지만, 그전에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보인다.

“제국의 변호인-박유하에게 묻다”는 책도 나왔다.
제목을 붙인 이는 페이스북에서도 나를 비난했던 손종업씨라는 걸 알았다. 그는 고발 직후에 내가 일본에 돈을 받은 것처럼 쓰고 금년 들어서는 나를 아이히만에까지 비교하며 비난했던 이다.
비판보다도, 제목의 함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를 데려다 책을 만든 이들의 존재에 더 한숨이 나온다.
이미 여러번 말했지만 “제국의 위안부”란 “제국에 동원된 위안부”라는 뜻이다. 설사 주체적으로 보였거나 행동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책은, 내용의 오용에 이어, 이제 제목마저 오용되고 있는 중이다.

대중선동이 “비평”의 얼굴을 하고 세상에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혹은 정의의 얼굴로.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정의와 악의는 고작 한 글자 차이다.

나뿐 아니라 나를 옹호해 온 이들에 대한 비판도 담았다니 사태는 이제 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일본에서 2007년부터 시작된 갈등이 10년후 한국에서 본격화된 양상.
그때와 다른 것은 그때는 비판자들이 극소수였지만 지금은 수십수백명이(그 뒤엔 수천명이) 한미일 연대망을 이용해 나 하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론 현실적패배감이 부추기는 일일 것이다.

< 제국의 위안부>는 지원단체와 일본의 일부 지원자를 비판한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응답”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의 응답은, 10개월에 걸친 침묵끝의 고발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학자들마저 본격적으로 지원단체에 발 맞추고 있다.
연구와 학문이 운동논리를 사유하지 못했던 건 사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운동이든 이론이든,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면 보수화 될수밖에 없다.

급진의 보수화는 피해자로서의 마이너리티 의식이 만든다. 하지만 마이너리티가 온전히 정의일 수 있는 것은,그들이 적으로 간주한 이에게도 정의로울 수 있을 때다.

나를 두고, 한편에선 “제국의 변호인”(손정업)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국에 대적해 온 “일본 리버럴(진보)의 비겁한 무기”(정영환)라고 한다. 이들에겐 내 책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 같다.
혼란은 선입견이나 목적이 있었을 때 일어난다. 기존인식에 꿰어 맞추려 하는 한, 거기서 일탈하는 기술들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금년들어 이들의 공격이 강해진 건, 일본어판의 수상과, 오에겐자브로/우에노치즈코/고노&무라야마 등의 지식인 성명, 그리고 한일합의에 원인이 있는 듯 하다. (한국은 물론 일본판 위키페디아마저, 정영환을 비롯한 이들의 시각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내겐 남의 일이 아니다)

위기의식은 이해하지만, 사태를 정확히 파악 해야 이길 수 있다. 일본을 20년 이상 비판해 왔으면서 운동이이길 수 없던 건, 정확하게 비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시작된 한일진보시민연대의 문제와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민주”라는 개념이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기능했던 시대에서 30년이 지났다. 군사독재국가를 넘어선 시대의 “민주”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어야 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59084934118417

이미지와 폭력–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한일합방 36년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이 땅에서 본격적인 권력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청일전쟁때 부터였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의 전쟁터는 일본도 아니고 중국전체도 아니고, 중국의 극히 일부와 조선땅이었다. 민비암살이라는 끔찍한 폭력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그런 유린의 연장선상의 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민비가 암살당했을 때、일본언론은 그 사실을 충격이 아니라 당연한 일처럼 보도했다. 심지어 훗날 일본의 문호로 추앙받게 되는 26살청년, 나쓰메 소세키조차 “최근에 가장 고마웠던 일은 왕비 살해…”라고 친구 마사오카 시키에게 감상을 적어 보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일본인들이 원래부터 냉혈한이기 때문일까.

일본언론은 일찍부터 민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질투많고 권력욕 강한 악녀. 그것이 민비에 관한 보도들이 만들어내 일본인 안에 심어놓은 이미지였다.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젊은 엘리트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한건지 모르도록 만든 것은 그런 식의 편향적 보도들이었다. 또 훗날 일본군이 중국 전쟁터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편견을 바탕으로 교육되고 확산된 차별의식이었다.
폭력행사는,타자를 고통을 모르는 물건으로 봐야 가능한 일이다. 미움과 차별은, 때로 그 필수조건이 된다.

어제 한국정부가 구마모토에 뒤늦게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 위안부할머니의 성금을 둘러싸고 찬반이 격렬한 듯 하다. 뒤늦은 대응과 기부에조차 차갑게 닫힌 2016년 대한민국의 심성에 대해서 일부언론이 비판적인 칼럼을 내놓았지만, 그런 신문들조차 “일본에 대한 미움”은 당연한 듯 전제된다.
그리고 미움의 크기는 늘 위안부문제에서 가장 크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하는 파렴치한 태도, 과거의 잘못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뻔뻔스러움”(2016/4/21.국민일보)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90년대 들어 시작된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은, “파렴치한” 일본상, 그리고 이제 악마같은 일본상 구축에 성공했다. 미운 건 일본이 아니라 일본정부라고 뒤늦게 말해본 들, 이대로 가면 일본과 전쟁을 한다 해도 기꺼이 참여할 피끓는 청년들과, 그들을 등두드려 내보낼 국민들이 대다수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현재의 북한이 그런 것처럼.

이 모두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이 20여년의 보도–독자적인 조사도 관계자들에 대한 취재도 없이 그저, 지원단체가 주는보도자료들을 언론이 받아써 온 결과다.
물론 그런 보도들을 추인하거나 리드하기조차 했던 지식인들이나 전문가들의 책임 역시 작지는 않다 . 또 최근 몇 년동안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끔찍하게 형상화할지에 골몰하고 졸속공부에서 경쟁했던, 그림과 영상 제작자들 역시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 국민다수의 생각을 만드는데 일조한 이들이라면, 이미지와 지식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일상속에서의 적대와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더 큰 폭력에 대한 책임의식을 뒤늦게라도 가져봤으면 좋겠다. 물론 수용하고 전달해 왔던 우리 모두도.
악마화 하지 않고도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 악마화는 오히려 본질을 놓친다.
“뻔뻔한 일본””사죄않는 일본”이미지의 재생산 속에서 우리가 해 온 일은 고작,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었다는 이승복 소년을 소녀상으로 대치한 일 뿐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한다.

우려되는 것은 사실 일본에 대한 몰이해가 아니다. 그 몰이해가 만든 미움이, 우리를 조금씩 냉담하게 만들고 있는 정황이다. 또 우리를 그렇게 편협하고 차가운 한국인으로만들어버리고 만 상황이다.
인간의 죽음에조차 쾌재를 부르는.
26 살 나쓰메소세키처럼.

일본인들을 돕는지 여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2016년 봄, 대한민국은 대만과 달리 구마모토에 냉담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정황이, 20여년동안 남의 말에 결코 귀를 기울이는 법 없이, 양극단 사람들의 적대와 과장과 은폐에 휘둘린 결과라는 점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건 바로 그런 적대와 증오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증오를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채 먼저 희생된다. 불화 역시 마찬가지. 적대담론의 폭력성을 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추신)
재해때마다 화제가 되는 “일본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재해가 많아 체념적이 되어서도 아니고, 그저 어릴 때부터 방재훈련을 많이 받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일본어머니들이 자식에게 가장 많이 말한다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배려심이 몸에 밴 결과일 뿐이다.
긴급한 순간에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해야 가능하다. 자아보다 조화, 나의 욕망보다 타자의 평안에 가치를 두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50782178282026

혐오의 방정식

일본의 위안부문제 지원자들도 더이상 하나가 아니다. 한일합의에 관해서도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이 기사에 언급된 이들은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 중인 이들이다.

분명 이들이 말하는 대로, 일본인들 일부가 내 책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얘기에 멋대로 이용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독해력과 무절제한 왜곡욕망의문제. 심지어 영어요약을 멋대로 만들어 내가 한 요약인 것처럼 유포중인 블로그조차 있었다. (일본쪽 출판사에 대응을 의뢰중)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내 책을 멋대로 왜곡하는 건 이들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이 20수년간의 한일갈등은 이 양쪽이 그런 식으로 세간에 제공해 온 정보의 과장과 은폐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책이 평가받은 건 일본의 책임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책임”임을 말했기 때문이고, 이 양쪽 세력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그런 나의 논지에 공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젠가 전여옥이 “일본에는 추녀만 많다”면서 “일본은 없다”고 했던 것처럼, 소수 문제적인 이들에게만 주목하면서 그들을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한 사람들이다.
더 불행한 건 이 양쪽은 똑같이, 자신들이 확산시킨 혐오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의 인권을 말하지만 나의 인권은 개의치 않는다. 이들이 며칠 전, 내가 감옥에 갈 수도 있는 형사재판을 반대하지 않는 자세를 분명히 한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기사 오류를 바로 잡아둔다. 물론 이번 경우 기자가 아니라 발표자가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군관여부정–일본군 조선반도 “공식적 강제연행”부정
*책임부정–“법적” 책임 부정

타자에 대한 적개심과 처벌을 부르려는 행위가,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던 슬픈 봄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8315212&sid1=00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38957019464542

일본의 인터넷뉴스에 언급되었기에…

일본의 인터넷뉴스에 언급되었기에 이런 글을 “칼럼”이라는 이름으로 유통시키는 매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본에도 혐한이 있지만 이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인식과 감성을 가진 이들이 한국에서는 결코 소수가 아니라는 점.

하지만 문제는 이사람보다도, 이런식의 인식을 확산시키고 만, 이 이십여년에 걸친,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의 편향적인 정보제공에 있다.

“만약 기회가 오면, 우리도 일본왕실의 가코 공주를 위안부로 보낼 수밖에 없다.”

http://m.ggdaily.kr/a.html?uid=68784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19654438061469

조선일보 게재 <제국의 위안부> 서평에 대한 반론

조선일보 게재 <제국의 위안부> 서평에 대한 반론

일전에 조선일보에 실린 서평에 대해 반론을 쓰겠다고 했더니 지면을 내주겠다고 해서 썼는데 결국 실리지 않았다.

원래 서평자와 똑같이  6매만 쓰라는 얘기를 듣고 그에 부응해서 쓴지라 극히 짧은 글이지만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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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2일자 <전봉관의 인문학 서재>에서 나의 책<제국의 위안부>가 다루어졌다. 먼저,”한일 간의 화해를 위한 박유하 교수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하하거나 모독할 의도가 없었던 것도 분명하다”고 써 준 전봉관 교수께 감사드린다.

그런데 “일본은 사과 않는데 우리보고 반성하라니..조선인 책임론의 함정”이라는 제목에 나타난 것처럼 전교수 역시 나의 책을 오독한 듯 하다.

나는, <일본>에 책임을 묻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조선>업자의 문제에 대해 쓴 것은,일본에 <법적책임>을 지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 온 지원단체나 연구자의 생각이 유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제목에 담으려 했던 것도 “협력을 강요당한 식민지인의 슬픔”이었다.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부제목은, 한일 양국이라기보다 그 양극단—지원단체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의 대립적구조가 오히려 이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전교수는 “지금은 그런 문제를 제기할 시기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상황을 제대로 보지 않는 한 더 심각한 사태가 닥칠 수 있다.

조선인 징병자들은 조선인이었어도 남성에게는 보장된 <법>—근거가 있었기에 적은 보상이나마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위안부들—사회에서 소외된 여성들에게는 그들을 보호해 줄 <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근대국가시스템의 결함이니 일본이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전쟁>의 문제로만 다루어져 온 위안부문제가 실은 <제국>에 동원된 여성의 문제라고 지적했고, 당연히 “우리가 먼저 반성”해야 한다거나 “공동책임”을 져야 한다고 쓰지 않았다. 전교수의 글은 오독을 넘어 명백한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전교수는 그런 왜곡을 전제로 일본이 “사과와 배상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 역시, 지난 20여년에 걸쳐 지원단체가 한국사회에 정착시켜 온 생각일 뿐이다. 지식인들조자 그렇게 믿게 된 상황을 심각하게 여겨,나는 이 책을 썼다.

위안부문제는,국민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정보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한 정보와 인식을 공유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난 6월의 고발사태와 일부언론의 가담은, 지원단체와 언론이 그렇게 생각한 나를 매장하려는 시도였다.

본문:https://www.facebook.com/notes/park-yuha/%EC%A1%B0%EC%84%A0%EC%9D%BC%EB%B3%B4-%EA%B2%8C%EC%9E%AC-%EC%A0%9C%EA%B5%AD%EC%9D%98-%EC%9C%84%EC%95%88%EB%B6%80-%EC%84%9C%ED%8F%89%EC%97%90-%EB%8C%80%ED%95%9C-%EB%B0%98%EB%A1%A0/927164003977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