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박유하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30년, 무엇 이뤘나”

위안부 11명에게서 고소당한 ‘제국의 위안부’ 저자
이용수 할머니 향한 도넘은 비판, “주객 전도…비난 멈춰야”
“일부 할머니 생전 정대협 운동 방식에 의문 품기도”
“2014년 심포지엄에서 할머니 목소리 공개한 것 미움 받았다”
“일본 설득하지 못한 것이 운동 본질적 한계…공과 평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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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故배춘희 등 할머니들 정대협 두려워 대놓고 비판 못해”

● 정대협 비판하다 ‘마녀사냥’ 당해…빨갱이보다 무서운 친일파 낙인
● 정대협 운동, ‘돈’ 아닌 ‘인맥 30년’으로 들여다봐야
● 돈 받은 할머니들은 비난하고, 자신들 따르는 할머니들만 대변해
● 할머니들, 정대협 비판한 사실 알려질까 두려워해
● 사죄보다 보상 원한 할머니들 목소리 묻혀
●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배춘희 할머니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져
● 정대협이 日 양심적 지식인과 연대 막아…위안부 운동 이대론 안 된다

누구나 힘든 시기를 사는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뒤숭숭하고 먹고살기가 막막한 이런 때야말로 정신 줄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허문명의 SOUL’은 삶을 뒤흔들어대는 여러 난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영혼과 정신 줄을 꽉 붙잡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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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체념을 넘어서 한일협의체를 만들자

중요한 건 결과보다 대화 자체다.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제국/식민지시대가 야기한 여러 문제들이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한국과 일본양국정부는 초기에는 비교적 공조하는 듯 했다. 정부간 공조가 엇나가기 시작한 건 90년대 후반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일본정부가 주도해 민간기구형식으로 만든 “아시아여성기금”이 지원단체의 강력한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한국정부가 대신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보상금을 실시하게 된 이후부터다(그래도 이때 60여명 할머니들이 기금과 일본총리의 사과문을 받았다). 그럼에도 2002년에 월드컵축구대회를 한일양국이 공동개최할 수 있었던 건, 당시엔 아직 정부간 공조틀이 기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일본에서도 존경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05년에도 독도문제가 일촉즉발의 사태를 야기하기도 했지만, 당시엔 양국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한 이들이 있어, 사태는 일단락되었었다. 평화로운 해결 뒤에는, 사려깊고 유능한 외교관들이 있었다.

갈등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도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했던 한일관계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한 건 2011년말,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이 세워진 이후부터다. 일본측에서 체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나는 한국을 좋아하는데 한국은 언제까지고 일본을 미워한다.”는 것이 관계개선희망을 버리기 시작한 일본인들의 목소리였고, 그건 노련한 정치가부터 젊은 학생까지 예외가 없었다. 그들은, “이제는 한국과 어떻게 사귀어야 할 지 방도를 모르겠다.”고 슬픔 혹은 분노를 담아 말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의 그런 생각은 한국사회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어쩌다가 일본의 분노 혹은 체념이 전해져도, 90년대와 2000년대에 ‘피해자’ 지원단체의 주장이었던 “사죄하지 않는 일본/뻔뻔한 일본”의 이미지를 내면화하게 된 대부분 한국인들은 그저 적반하장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거나 일본과의 관계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자존심’ 가득한 태도로 일관했다. 일본은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식민지지배라는 과거가 만든 필연적 ‘감정’을 더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한국은 현대일본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려 하지 않았고, 평가하지도 않았다. 상대를 우선 제대로 보려 하는 사려깊은 태도를 갖는 이들이 양쪽에서 함께 적어진 건 그 결과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지금 양측 국민들이 상대에 대해 갖게 된 인식이 대부분 학자와 지원단체등 ‘당사자 주변인’들, 혹은 일부 역사학자/법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언론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인식을 경쟁하듯 확산시켰는데, 그 경쟁은 좌우싸움, 다시 말해 냉전체제 종식 이후의 아이덴티티 싸움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지금 문제시되고 있는 징용판결은, 전적으로 일부 좌파학자들이 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던 시각에 기반한 판결이다. 다시 말해, 한일합방불법론, 1965년한일협정파기론,그리고 위안부문제등 과거의 ‘국민’동원 해결책으로서의 법적배상/책임론을 이 판결들은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 물론, 지금 병행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과거 사법부와 정부관계자들에 대한 ‘재심’ –조사/수사/처벌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판결들이 철저하게 우파적 시각에 의한 것이었다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은 좌파적 시각에 의한 것이다.

문제는 ‘좌파’의 시각이거나 ‘우파’의 시각 자체가 아니다. 그 시각들이 (1)학문적으로 올바른지, (2)아직 진행중인 학문적논의중 일부를 사법부가 무비판적으로 가져와 판결을 내려도 되는지, (3) 좌파와 우파가 혼재된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그러한 사법부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에 있다. 그리고 나는, 현정부가 지난 정부의 우행을 답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징용판결의 핵심은 배상금 요구가 과거의 학대와 차별에 대한 “위자료”라는 데에 있다. 일본이 이번 판결을 무조건 비난하는 건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결문의 취지는 스스로 명확히 밝혔듯, 식민지지배가 야기한, 아직껏 일본사회에서 충분히 인식되지는 못했던, 식민지배치하에 놓였던 이들의 정신적/물리적 고통에 대한 배상금 요구였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가 일어난 건 냉전체제때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했을 때 ‘식민지지배’에 대한 배상금요구를 징용자등 일제에 ‘국민’으로서 동원당한 이들이 대표해야 하는지는 별개문제다. ‘식민지 지배’가 만든 차별이 야기한 최대 피해자는, ‘제국국민’으로 간주되어 동원되었던 이들 이상으로, ‘제국’을 위협하는 ‘적’으로 표상되어 길가다 살해당해야 했던 관동대지진 피해자라고 해야 한다. 혹은 물리적인 고통이 없었어도 총체적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아야 했던 모든 피지배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국회가 그러한 과거에 대한 총체적인 사죄의 마음을 담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국회결의라는 형식에 담아 했으면 좋겠다고 최근 몇 년 주장해 왔다. ‘국회’야말로 말 그대로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란 주관적인 것이기도 해서, 타자가 그 크기를 단정할 일은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피해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그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말없는 죽은 자들도 떠올려야 한다. 동시에, 개인의 피해가 정치/외교문제가 되어 ‘국민’의 문제로 비화한 이상,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박근혜 정부가 만든 ‘한일합의’는 양국 외교관들이 노력해 만들어낸 성과였지만, 올바른 사태이해에 바탕한 ‘국민적 합의’가 아직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들의 생각을 ‘국민상식’화하는데 성공한 일부 학자/지원단체의 반발이 정부를 움직여 결국 합의를 뒤엎게 한 건 예견된 일이었다.

한일 양국은 과거에 한일역사공동위원회를 만들어 접점찾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그 실패는 상대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자기주장 내세우기에 급급했던 결과였다.

따라서 제안한다. 다시 한번 과거역사가 만든 여러문제들을 논의하는 한일협의체를 만들자고. 그리고 정부와 학자들이 지금의 불화를 슬기롭게 넘어설 방도를 찾아 보자고. 언론은 문제의 논점이 어디에 있는지 그 논의를 경청하고, 각 문제들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고작 몇사람의 주장이 언론을 통해 전국민의 인식이 되고 마는 이제까지의 구조를 깨뜨릴 수 있다.

중요한 건 결과보다 대화 자체다. 대화가 이어지는 한, 과거의 불행한 시간들은 극복가능하다. 더 늦기 전에,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이 4반세기의 갈등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늘 발밑 아래 있는 법이다.

다시, 대화를 위한 한일협의체를 만들기를 제안한다. 양쪽정부와,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는 한일 학자와, 그 외 관계자들이 함께 하는 기구가 시급히 필요하다. 화해치유재단이 남긴 금액과 정부가 새로 마련한 금액을 그 대화에 사용할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 갈등이 남긴 유산으로도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양국정부가 차세대에게 보여 주기를 바란다.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c340e64e4b01e2d51f64da8

<위안부의 아이돌화>발언에 대해

얼마전에, 초청받았던 한 세미나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했던 이야기중 일부를 한 언론이 가져다가 나의 취지와는 다르게 보도한 탓에 또다시 세간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미 여러번 반복된 일이기도 하고, 수정요청을 한다 해도 바뀐 적도 별로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사태에 대해 따로 해명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그날 사용했던 발언요지자료를 올리기는 했지만, 아직 문장으로 만들지 않은 채로 방치중이다.
늦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 쓰기로 한 건, 최근에
미국(Why Is the Plight of ‘Comfort Women’ Still So Controversial?),
영국(Vietnamese women raped in wartime seek justice for a lifetime of pain and prejudice),그리고
독일(Debatte Trostfrauen in SüdkoreaZum Nutzen der Nation)의 매체가, 한국의 위안부 운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우려가 섞인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 기사를 한국에 전달해 공론화한 매체도 아직은 없어 보이는 것도,내가 굳이 언급하는 이유중 하나다.

8월10일에 서울에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위안부문제와 한일관계 전망>이라는 세미나에서 내가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표현으로 지적하려 했던 것은, 우리사회에서 위안부가 너무나 `가볍게` 소비되는 현상이었다. 많은 이들이, 악의적으로 보도한 기자의 의도대로, 내 발언을 위안부에 대한 마음을 비판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비난했지만, 내가 비판한 건 위안부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위안부가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표현되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수용과 표현이 나올 법 한 소녀상의 원제작자(조각가 뿐 아니라 운동단체 포함)들의 조선인 위안부 이해와 표현방식이었다.
나는 그 날 세미나에서, 소녀상 자체에 관해서는 오히려 `철거는 역효과`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소녀상`관련 의견을 전하고 싶었다면 가장 우선시되었어야 할 그 부분은 빼놓고 기자는 `아이돌화`만을 헤드라인으로 뽑아 보도한 것이었다. 심지어,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 이라는 소제목 아래 몇가지 `갈등`양상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가져와 기자는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이 위안부의 아이돌화`를 가져왔다고 내가 말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그건 기자의 해석일 뿐, 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런 식의 단선적이고 탈맥락적인 보도에 접한 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런 기사가 보여주는 성급함과 강퍅함에서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위기를 본다.

나는 `소녀상의 피상적인 소비양상에 대한 비판 필요`라고 자료집에 썼다. (기자는 그 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자료집만으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 `피상적인 소비양상`이란, 바로 여고생들이 그렸다는 순정만화풍 스티커등에 대해 한 말이었다. 그 스티커를 페이스북에 올려 두었더니 `위안부의 모에`현상이라고 지적한 이도 있었는데, 타당한 분석으로 보인다. 밝고 활기차고 앙증맞기까지 한 그 그림 속 캐릭터는, 소녀상을 만든 이들이 환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 노란 나비와 함께 놀고 있는, 글자그대로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소녀`였다. 말하자면 그 그림은, 위안부로 동원되기 이전의 천진하고 행복한 시절을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심지어 대사관 앞 소녀처럼 분노나 저항의 눈빛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두말 할 것 없이, 그 그림은, 위안부의 불행했던 과거—현실이 아니라 있을 수 있었던(존재하지 않았던) 행복했던 시절, 즉 위안부 이전의 시간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물론 그림을 그린 여고생들은 위안부 할머니에게
사라지고 만 행복한 소녀시절을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담았겠지만(실제로 많은 이들이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일본을 향해 외쳤다), 그림 속의 시간이 위안부체험 자체와 괴리된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한, 그 그림은 참혹한 위안부생활은 망각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소녀의 의식은, 타자의 위안부 체험을 마주하기보다, 가급적 마주하지 않는 쪽에 서 있다. 본인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리고 아마도, 한 학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지적했듯 자신을 투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실의 위안부란, 이미 모두가 아는 것처럼 끔찍한 신체적 고통을 수반한 체험이었다. 또 그 후유증으로 인해, 돌아와서도 대부분은 `병`과 함께 해야 했으니 위안부란 대부분 훼손된 신체의 주인공들이다. 더구나, 현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대상—노쇠한 신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그림을 그렸다는 여고생에게 그런 할머니를 방문해 목욕 서비스라도 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초등학생을 죽이고 타교학생이나 동급생에 대한 구타/폭행도 마다 하지 않는, `타자의 몸`의 존귀함과 고통에 무감해진 오늘의 한국의 10대들중에, 위안부할머니의 현실의 ` 늙은 `몸–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상처로 가득한 몸` 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보여줄 소녀들은, 없지 않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봉사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든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든, 그들은 할머니를 위한 시위에 참석하고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행위는 일정부분, 위안부할머니의 그 옛날 진짜 체험과 오늘의 현실을 마주하지 않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말하자면 위안부 `동상`이나 `그림`에 대한 `기림`이 현재의 소비방식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그와 마주하는 시간은 오히려 과거의 위안부와 등신대로 마주하는 일에서 “효과적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일 수 있다.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말로 내가 우려했던 건 위안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앞에 서면 설수록 다른 한편으로 진짜 위안부와 멀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나는 나는 우려했다. 달리 말하면 너무나 가볍게 소비하면서, 아무도 그 안의 진실을 제대로 보려고는 하지 않는.
여고생들이 그린 천진난만한 그림에야 죄가 없지만, 위안부들이 겪은 고통을 <여성의 보편체험>으로서 이해하고 `노인`의 고독과 진정으로 마주하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한단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표현들이 공유되고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나는 우려를 표했을 뿐이다. 그저 일본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상으로만 기능하는 한, 소녀상 역시 언젠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동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나는 우려했다. 이승복소년상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말한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얼마전에 군함도 영화에 대해 썼던 글에서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고 썼던 맥락과 다르지 않다. (<군함도〉엔 '피해자'가 없다)

여고생이 그린 그저 `귀여운` 소녀, 한번도 능욕당한 적이 없는 천진한 소녀캐릭터는, 굳이 말하자면 한번도 식민지화되지 않은 우리자신이다. 하지만, 조선이 그랬듯, 위안부로 가야 했던 소녀/처녀들은 대부분 가기 전에도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없지 않지만, 그들은 대부분,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의 집에 양녀로 가야 했거나, 남편이나 오빠, 혹은 아버지의 박대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마음과 존중을 비판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과거를 회피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직면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그 때문에 이제 오히려 외부사람들에 의해 마주하기를 요구받게 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우리 먼저 나서서 생각해 보자고 나는 말하려 했다.

가볍게 소비되든 진심으로 모셔지든, 과다표현은 대부분, 대상자체보다는 자기자신을 위한 것이기 마련이다. 버스 안 플라스틱 소녀상을 향해 “아이고 여기 계시구나“라고 말했다는 서울시장의 한마디가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의 한국인, 특히 남성들은, 그 옛날 소녀에 대한 오늘의 자신의 배려를 확인하는 일로, 오늘에 대한 자기만족은 물론, 과거로 돌아가 `지켜주지 못했던(않았던) 나`까지 무의식 속에 면죄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극복하는 방법은, 실제와는 다른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마주하는 일에 있다. 실재한 과거에 대한 직시와 분석만이,과거와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고향에 돌아와 깨끗하고 아름다운, 독립한 내 나라의 수도를 구경했어야 할 소녀들이 없지는 않다. 전쟁당시, 칠십 몇년전에 위안소와 전쟁터에서 병사, 자살, 폭사, 혹은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자살의 희생양이 된 이들이 그들이다.
따라서, 하얀 저고리/까만 치마모습의 플라스틱 소녀상이 누군가를 상징한다면 그런 이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었어야 한다 . 제작자들은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소녀상은 돌아온 `귀신`이었고. 버스 소녀상을 처음 본 이들이 으스스하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 올바른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산 자로 소환되었기에(대사관 앞 소녀상 뒷면에는, 동상이 (운동에 참여한 노인과 운동단체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조형물이라고 쓰여 있다),그녀들은 모처럼 소환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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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스타의 애국심 (교수신문 2006년 1월 9일)

 2006.01.09 교수신문 기고

정말은 10년 후에나 가능한 것이었다는 연구를 앞당기기 위해 두어진 황우석 교수의 무리수는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여전히 시간이 성패를 가름하는 사회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근대화’라는 것이 ‘공간의 시간화’임은 이미 지적된 지 오래지만 그렇게 우리는 아직 우리의 공간을 시간적으로 보다 앞선 위치에 두려는 근대화를 시도 중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게임에서 보조를 맞추지 않는 타자를 ‘잔여’(스튜어트 홀)로 규정하고 지배에 나선 것이 다름 아닌 근대였다. ‘월화수목금금금’ 태세라고 황우석 교수가 강조하고 매스컴이 칭송했던 연구태세는 그런 의미에서 최첨단을 가면서도 근대적이라는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그러한 근대주의가 외부와 차단된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권력화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하리라. 연구원들이 개인의 것이어야 할 휴일과 자신의 난자를 제공하기에 이른 이유가, 언젠가 공동연구자로 논문에 이름이 오르는 날을 위한 것이었건 혹은 단순히 ‘난자가 담긴 접시를 엎지른’ 죄 때문이었건, ‘선생님께 대적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난자제공 연구원의 후회는 난치병환자를 위한 박애주의가 – 내부인에게조차 결코 박애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배적인 권력의 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처연하기조차 하다.

그런 지배구조가 드러날 수 없었던 것은 그/그녀들이 어디까지 ‘무명의 희생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무명성은 ‘희생’의 존재를 부풀리면서 동시에 결코 공공의 장으로 끌어내지는 않는다. 그/그녀들의 ‘희생적’ 행위가 한편으로는 칭송되면서도 결코 개인의 목소리를 내서는 안되었던 이유도, 따라서 결코 표창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근대국민국가는 그러한 ’무명’인들을 무수히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그와는 대조적으로 단 하나의 영웅적인 고유명 역시 필요로 한다. 분명 황우석 ‘팀’이라는 다수가 있었음에도 그리고 가끔은 그들의 존재가 부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스컴과 사회가 황우석이라는 단 하나의 고유명을 필요로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고유명’은 그가 보다 좋은 조건으로 타국에서 연구할 것을 제의하는 ‘타국의 유혹’을 거부하는 이임을 강조해 동시대의 ‘애국자이야기’를 완성한다.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견딜수 없게 만들었다는 황우석 교수의 강연에 수퍼맨의 슬라이드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황교수가 민족주의의 속성을 숙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과학은 그곳에서 종교의 양상을 띤다. ‘내가 너를 걷게 해 주리라.’

민족주의적 열망은 늘 패권주의적이지만 그것이 드러나서는 안되기에 수난의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한다. ‘세계생명공학의 고지에 태극기를 꽂고 온 기분’이라거나 ‘과학에는 조국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거나 하는 황우석 교수의 말은 이미 최대급의 민족주의적 수사이지만 그보다도 더 듣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말은 ‘식민지화와 동족상잔이라는 고난’을 겪은 나라 한국에 하느님이 이제 ‘어깨 펴고 살아보라고 이런 천운을 주었다’는 말이리라.

황우석 교수에 대한 그동안의 열광현상은 단순히 그가 세계를 상대로 쾌거를 올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실과 함께, 혹은 그 사실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그가 우리에게 늘 자신의 능력과 함께 애국심을 확인시켜 국민들에게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중적 스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마치 금모으기 운동처럼,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자를 채취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분명 민족주의가 존재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난치병 환자 치료’라는 정의담론이 장애자에 대한 무관심/차별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민족주의가 강하면서도 국민의 70퍼센트가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는 현상과 닮은 꼴이기도 하다. 한국적 민족주의의 문제는 오히려 그런 관념성에 있다.

박유하 / 세종대·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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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국익’이라는 이데올로기 (교수신문 2005년 11월 23일)

▲프리다 칼로 作, ‘칼로 몇번 가볍게 찌르기’, 1935, 금속에 유채, 29.5×39.5㎝ ©

2005.11.23 교수신문 기고

그들은 ‘국익’이라는 단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문제가 되고 있는 황우석 교수연구팀을 대표하는 줄기세포연구허브센터도, 모든 책임을 혼자 지려 작정한 듯한 병원측도, 또 그들의 윤리성을 고발하는 방송사측도, 그러한 그들을 신중치 못한 보도라며 비난하는 시청자들까지, 자신들의 사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단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국익’이라는 단어다.
줄기세포연구허브센터에서는 현재의 파문이 과장이면서 매도일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국익’에 반하는 일이고, 난자를 채취한 병원측에서는 ‘세계적 성과’를 거둔 연구를 문제 삼는 것은 ‘국익’에 반하는 일이며, 방송사측은 그럼에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국익’이고 시청자들은 황 교수의 연구를 비난하는 일은 ‘국익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방송사에 대해 훈계한다.

그들이 공통으로 꿈꾸고 있는 것이 줄기세포연구의 성공이 가져다 줄 세계로부터의 찬탄과 그에 따를 경제적 이득, 혹은 적어도 ‘도덕적인 한국상’에서 얻어질 긍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국익’이리라.

그러나 그렇게 ‘국익’ 담론이 무성할 때 그 ‘국익’의 성취가 다름아닌 ‘여성’들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은폐된다. 연구의 문제점을 말하기 위해 ‘법’이 이야기되고 윤리가 말해지면서도 그러한 동원에 의해 훼손되는 여성들의 ‘신체’가 겪을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거나 경시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문제는 금품이 난자공여자들에게 제공되었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있지 않다. 문제는, 교통비와 15일간의 ‘생계지장’에 대한 대가로서의 150만원의 수수여부가 아니라, ‘성스러운’(황우석 교수의 발언) 그녀들의 ‘자발적’ ‘희생’을 이끌어낸 것이 실제로는 ‘경제적 이유’임에도 그들이 ‘자발적으로’ ’희생정신’을 발휘해 ’기증’했다고 생각토록 만드는 국익담론의 이데올로기에 있는 것이다. 생명윤리법 시행전인가 아닌가-합법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 역시 ‘국가의 필요’에 의한 규범이 다름아닌 ‘법’인 한, 문제의 핵심을 말한 논의일 수는 없다.

‘성숙하고 싱싱한’ 난자를 찾기 어려웠다는 병원측의 변에 의거해 추정한다면 젊은 여성들이었을 것이 분명한 이 여성들을(난자를) ‘사’서 ‘관리’(연구)한 것이 남성의사/연구자이자 국가라는 가부장제적 시스템이라는 점에 문제의 핵심은 존재한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신체에 고통을 주는 일이 우선은 ‘연구’를 위한 것이며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사회적 설득과 (경제적)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난자를 팔았으리라. 그들은 어쩌면 원조교제처럼 성차이와 계급차이가 빚어내는 사회구조의 결과로 ‘자발적으로’ (성대신) ‘난자’를 매매한 것일터이니, 그들이 ‘동의’를 했는가 아닌가 역시 문제일 수는 없다.

‘국익’의 훼손을 두려워하는 담론으로 국가를 보호하려는 입장에서는 공범일 수밖에 없는 논란의 주인공들에게는,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도덕성에 대한 외국의 비판은 그저 ’시기’이거나 잘나가는 한국을 폄훼하려는 음모일 뿐이다. 매매되는 ‘난자’에 관한, 혹은 실험대상이 되는 난자에 대한 윤리논란은 있어도 그 난자가 제공되기까지의 여성자신의 신체의 보호에 대해서는 말해지지 않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자신의 신체를 보호할 근거가 되는 섹슈얼 아이덴티티보다 국익을 우선할 내셔널아이덴티티가 우선시되게 된 근대의 패러다임을 아직 살아가는 오늘, 그래서 ‘배아의 생명의 존엄성’은 존중되지만(혹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대전제는 살아 있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다 자란’ 성인의 신체는 훼손해도 된다는 사고는 변함없이 그 뿌리를 탄탄히 내려 이 사회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렇게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행위를 당연시하는 사고는 여전히 ‘공’을 위한 행위로 착각되어 위안부와 군인을 생산해내리라.

‘난자’라는 단어가 원래 위치했던 사적이고도 은밀한 공간을 벗어나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이라는 공공의 영역을 활보하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개인의 ‘몸’이 국가를 위한 것이 될 때 어떻게 일상성을 벗어나 왜곡된 ‘공공’의 장을 확보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에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공성’이 존재할 여지는 없다는 점이다.
박유하 / 세종대·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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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엔 ‘피해자’가 없다

한번쯤은 일본과 대적해 보고 싶었던 조선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 영화.

220억이나 들였다는 영화 〈군함도〉를 이렇게 밖에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건 슬픈 일일 뿐 아니라 거의 재앙이다. 개봉 직후에 영화를 보러 간 적이 거의 없는 내가 이렇게 일찍 보게 된 건, 첫날에만 백만 가까운 사람이 봤다는 얘기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사작가(이상한 명칭이다) 심용환씨가 군함도를 옹호하느라 〈귀향〉을 비판했다가 문제가 되고 있는 듯한데, 군함도에 비하면 귀향이 백 배 낫다. 귀향에선 최소한 피해자에 대한 제작자의 아픈 마음이 느껴지고 공감 가능한 기본정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귀향에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군함도엔 과거 인간들이 행한 일에 대한 아픔, 그래서 일본인조차 감동시킬 수 있는 호소력이 없다. 그리고 그저 과거의 아픔을 성찰 없이 곧바로 오늘의 긍지로 치환시킨 21세기 대한민국의 대리만족만 있다. 제작자와 출연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곳에선 “피해자”란 오로지 관념일 뿐이고, 그렇게 형해화된 “피해자”는 쉽게 소비될 수밖에 없다.

기업위안소가 실은 유곽이었음을 보여 준다거나 우리 안의 친일파를 보여주는 부분은 진일보하려는 시도로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 안의 친일파를 그저 보여주고 응징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자성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 안의 그들을 “그들”로 그리는 한. 군함도는 여전히 일본과 조선을 대립구조로 묘사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기존영화와 다르지 않다.

이하는 눈에 띄는 문제 몇 가지.

1) 강제연행? 여전히 마구잡이식 강제연행이 중심이었던 것처럼 묘사된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납득 가능한 책을 쓴 도쿄대학 도노무라 교수에 의하면, 국민 총동원령에 의해 징용이 가능해진 건 사실이지만 마구잡이로 끌어가는 경우는 (있었을 수 있으나)예외적인 일이었다. 강제성을 과장/강조하지 않아도 피해를 말하는 건 가능하다.

2) 일본인이 조선인을 가혹하게 다루었을 수는 있지만, 쉽게 총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식민지인이란 그들에게 “자원”이었으므로.

3) 징용자들과 함께 가던 여자나 소녀를 갑자기 강압적으로 끌어가 유곽으로 보내는 사태도 있기 힘든 일이다. 탄광 근처에도 기업위안소라 불리게 된 유곽이나 요리점이 있었지만 위안부와 남성징용은 동원루트 자체가 다르다.

4)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성병검사받는 설정은 (감독 말대로) 픽션으로 봐야 한다.

5)위안부 여성을 못이 박힌 판자 위에서 굴리는 장면은 북한 출신 할머니의 증언을 살린 것이겠지만, 전무후무한 이 증언은 사실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케이스다. 아편에 중독된 여성을 업주가 못이 박힌 도구로 처벌했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증언은 그런 체험의 기억이 만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안부 여성에 대한 폭행은 많았지만, 남성들의 향수병을 치유하고 생산능력을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자원”을 굳이 고문해서 훼손할 필요가 지배자에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훼손하는 건 어디까지나 반체제적 대상이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문신 역시 마찬가지.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른바 문신 할머니는 북한 출신 할머니 오로지 한 사람이다. 예외적인 케이스가 상징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픽션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로 믿었을 가장 끔찍한 증언을 위안부 이야기에 넣은 감독의 의도는 바로 그런 의도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6) 징용자와 고용주의 대립을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쟁처럼 표현한 건 징용문제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족하다는 증거.

7) 임금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지급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한 것도 중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8) “군함도의 현실”이 전쟁범죄라는 이해, 그러니 기억하는 이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일본인이 생각했을 거라는 설정이야말로 대표적 픽션. 조선인 징용은 식민지화의 결과였고, 심지어 합법화한 국민동원이었다. 죄를 추궁하고 싶다 해도 구조적으로 전쟁범죄일 수도 없거니와 이런 식의 상상은 오히려 식민지배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9) 조선인의 단합 장면에서 촛불을 사용한 건 아직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촛불집회를 불러내 “민중의 힘”을 보여주려는 의식의 발로. 결국 이 영화는 과거의 영화가 아니라 현재의 생각과 체험을 과거에 투영시킨 현대영화일 뿐이다. 당사자가 철저하게 배제된.

10) 남성성을 과도하게 드러내고 있어 젠더론적으로도 문제다. 체격 좋은 소지섭은 전혀 깡패 같지 않고,키크고 잘생긴 송중기는 태양의 후예의 멋진 군인을 재연할 뿐이다. 배고프고 고달팠을 광복군은 그곳에 없다. (황정민 딸역의 캐릭터가 가장 이해 되지 않았다.)

11)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라는 조선인의 발언은 피해자 지위에 안주하는 발언이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라고 외치는 악덕일본인의 발언은 피상적인 제국주의자의 표상이다. 물론 그렇게 외치는 일본인들은 오늘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일본국민 전체 속에서 분명히 소수인 그들을 끊임없이 소환해서 경계와 불신을 이어가도록 요구해 이익을 보는 건 도대체 누구인가?

12) 픽션이라는 말로 역사고증적인 추궁을 피해갈 장치를 마련해 두면서도, 마지막 엔딩자막엔 세계문화유산 설명에 징용이 설명되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감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어정쩡함에 있다.

13) 각본은 류승완 감독(과 또 다른 한 사람)이었다. 욕망의 거침없는 표출이 상상력(픽션)이라는 말로 혼동된 최악의 경우. 좀 더 섬세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을 가진 작가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상상하고 이해하는 일이란 과거를 산,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의 내면의 심연에 가닿는 일이다. 어두운 땅밑체험을 추체험한들 “오늘의 나”를 벗어나지 않는 한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쉽게 설명된 역사일수록 경계되어야 하는 이유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지만, 영화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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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지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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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지킬 것인가

외교부가 부산 소녀상문제 풀기에 나선 것 같다. 하지만 소녀상 이전요구는 문제의 답이 아니다.
분명, 일시귀국이라고는 하지만 일본대사가 본국귀국후 이렇게 오래 복귀하지 않은 적은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외교부가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지자체가, 시민의 의사를 넘어서 행동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강제이전`은 현재이상으로 사태를 악화시킨다.

사실 나는, 부산소녀상 설치문제를 두고 일본정부가 대사를 복귀시킨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분노를 표명하면 소녀상이 철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일본의 한국이해는 아직 충분치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우선 한국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정치가, 언론, 국민들 대부분이 `한일합의는 잘못된 것이고 소녀상은 그것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니 옳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한일합의의 정당성이나 빈조약을 들어 철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토록 갈등이 깊은데도, 문제의 소녀상이 어떤 의미인지, 한일합의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성한다. 그런 식의 사고정지사태가, 한쪽은 `지키는` 일에 온힘을 다하도록, 다른 한쪽은 이제 물리력을 행사할 지 여부를 재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물론 첫번째로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위안부문제의 경우 오랜 세월에 걸쳐 언론이 적극적으로 보도한 결과, 이미 `온국민의 상식`이 된 구체적인 이해가 존재한다. 작년에 개봉한 `귀향`은, 그런 현대한국의 `집단기억`을 담은 영화다.

그런데, 그런 이해는 과연 옳은 것일까. 나는 작년에 개봉 직후에 이 영화를 봤는데 심경이 복잡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영화에 표현된 `정서`는 옳고, `사실`은 옳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정서에 공감하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한 예로, 불에 태워지는 장면은 한 할머니의 그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데, 이 할머니의 첫 구술에 의하면, 여성들을 불에 태운 건 학살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들어 죽은 여성들을 화장하기 위해서다. 또다른 분의 수기에는, 스스로 다른 위안부여성을 화장해야 했던 이야기도 나온다.
비판을 하려면, 그런 끔찍힌 경험을 하도록 만든 전쟁과 군인/위안부간의 위계질서, 그리고 그런 위계질서를 만들었던 일본의 식민지지배 책임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한다. 비판은, 정확해야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결국 위안부문제는, 조선인위안부란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이 문제발생 이후 4반세기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본이 무엇을 했거나 못했는지를 정확히 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더구나 초기와 달리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국민적인 이해와 합의가 필요해졌다.

따라서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한일정부는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협의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논의를 위해 일본정부는 주한일본대사를 즉각 복귀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협의체는, 위안부문제에 관해 오래 관여해 온, 그러나 대립중인 한일학자들을 주구성원으로 하되, 지원단체와 위안부당사자와 언론이 방청하거나 중계하도록 하고, 의문을 던지고 답하는 일이 가능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 사실 논점은 많지 않다. 그리고 양국민들의 공통의 이해를 이끌어야 한다.
위안부문제는 양국국민이 너무나 잘 아는 문제가 되어 더이상 정부간 합의만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었다. 박근혜정부가 간과한 것은 그 지점이다.
갈등이 2000년대 이후 본격화 된 것은, 민주화와 인터넷 보급의 결과로 시민들이 힘을 갖게 된 21세기적 세계를 반영한다.

소녀상 비판 중에 `당사자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내가 만났던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은 `왜 해결이 안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계셨다.
그런데, 지원단체는 외교부와 무려 십수회의 의견조정을 거쳤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사자를 도외시`한 건 누구일까.

이 모든 물음이 다시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돈을 받았으니 끝났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물음이 없고, `돈따위로 해결하려 하지 말라`는 생각에는 어렵게 합의를 이루어낸 `외교`에 대한 존중이 없다. 무엇보다, `책임이란 무엇으로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없다.
소녀상을 지키려는 이들은 소녀상이 `아픔`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분명 소녀상 자체는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 아닌 영사관이나 대사관 앞에 서 있는 소녀상은 분명 `저항과 항의`를 표상한다. 실제로 소녀상 뒷면에는 `숭고한 정신`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소녀상은 정말은 `그` 위안부 소녀가 아니라, 90년대 이후의 `운동`과, 운동에 담겼던 `끈기있는 항의정신`의 표상이다. 이런 식으로, 4반세기 이어지면서, 위안부문제에는 적지 않은 의식 혹은 무의식의 트릭이 존재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 항의가 옳다면, 얼마나 옳은지,왜 옳은지에 대한 국민적인 물음과 확인이 다시 필요하다.

소녀든 항의정신이든 `지키는`일은 숭고하다. 하지만 사고정지상태로 `지키`거나 반대하는 일은, 결국 누구의 자존심도 지키지 못한다.
더 늦기 전에, 사려깊은 행동이 필요하다. 불화는, 상대뿐 아니라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에서 승소한 이유 [허핑턴 포스트]

『제국의 위안부』 형사소송에서 승소한 이유 [허핑턴 포스트] 바로가기

경향신문 이범준 기자님과 타언론 관계자 여러분께,
승소 이유를 알려드립니다. (긴 글입니다)

형사소송에서 승소했지만, 누가 알려 줘서 보게 된 이 기자님 글을 보니, 저의 명예회복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는군요. 아니, 오히려 법원이 말한 “틀린 표현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을 대부분 언론이 앞뒤 맥락 없이 인용한 탓에 오히려 법원이 나의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간주하면서도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한 것처럼 인식한 이들이 더 많아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기자님은 제가 패소한 가처분과 손해배상 판결이 옳다는 전제하에 이번 형사판결문을 읽고 있지만, 가처분 소송과 손해배상 소송에서 제가 진 이유를, 저는 명확하게 압니다. 달리 말하자면 형사소송에서 이긴 이유를 명확하게 압니다.

이하, 참고하십사 하고 간단히 설명 드립니다.

변호사 등 주변인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지만 저는 가처분재판에 한번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도중에 이건 아니지 싶어 출석하려 했지만 결국 그랬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말린 이유는 ‘위안부 할머니’들께 심한 언행을 당할 수 있다는, 저를 생각한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반성도 담아서, 5,6회 이어진 손해배상재판에서는 꼬박꼬박 출석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은 언제나, 10분 이내에 끝났습니다. 제출한 자료들을 앞 좌석에 앉은 양측 변호사들과 재판장이 확인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에서 저는 준비한 진술문을 읽었지만(다 읽었어도 10여분이나 되었을 짧은 글이었는데도), 재판장은 도중에 빨리 끝내라는 말로 제지했고 결국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가처분재판과 손해배상재판에서 나는 판사에게 나의 생각을 충분히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더 나빴던 건, 재판 대응 자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처분과 손해배상에서도 저는 최선을 다했고, A4 150매 되는 답변서를 비롯한 수많은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국의 위안부”자체에 집중했습니다. 책에 대한 원고 측 지적이 악의적인 오독의 결과이자 모함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 재판을 맡은 판사들은 끝까지 제가 제출한 자료와 진술은 무시하고 원고 측이 만든 프레임에 갇혀 이 사건을 바라보았지요.

그래서 형사재판에서는 다르게 대응했습니다. 원고 측과 검찰이 내놓은 모든 자료 자체에 대해 일일이 다 반박했습니다. 제가 높이 평가했던 고노담화마저 내가 그것을 부정했다면서 나를 공격하는 자료로 제출되는 아이러니를 견뎌야 하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대응했습니다. 그중에는 “유엔보고서”도 있고 젊은 학자들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 좌담회도 있었고, “제국의 변호인 – 박유하에게 묻는다”라는 책과 재일교포 정영환씨의 책도 있었습니다. (그의 책이야말로 얼마나 왜곡으로 점철된 책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검찰과 원고 측의 모함과 억측과 아집의 논리 자체에 “논리”로 대처했습니다. 형사재판부가 나의 손을 들어준 것은, 오로지 형사재판부터 참여한 새 변호사의 “법리적 논리”와 그런 나의 “논리”가, 검찰이 앵무새처럼 대변한 기존 논리들의 문제점을 논파한 결과입니다.

이 기자님은 물론 언론관계자들께, 먼저 이 사실을 인식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형사재판부 판사와 내가 맞대면한 기간은 거의 1년이고, 10회 이상 재판을 통해 논박한 시간은 재판 때마다 거의 하루 종일이 걸렸으니, 수십 시간에 이릅니다. 이 기자님은 혹시 이 시간들 중 일부라도 방청하셨나요? 이 기자님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오류와 비난은 , 방청하지 않으셨기에, 혹은 잘 듣지 않았기에 이루어진 일로 생각합니다.

학자는커녕, 인간에 대한 존중 자체가 없는, 적대와 모욕을 대면하고 견뎌온 지 벌써 2년하고도 8개월입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힘겹게 노력했고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신 결과로 승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판결, 판사가 검찰이 대변한 학자들의 말을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말을 재판부가 “인용”했다고만 써서 원글 전체 맥락의 반대로 이해되도록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법원의 판결문이니, 마음에 안 들어도 왜곡은 하지 않아야 기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것 아닌가요.

또, 판사가 저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무엇보다 저의 항변에 시간을 들여 귀 기울여 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기존 상식에 기대어 사태를 판단하지 않는 날카로운 직관과, 그런 직관을 만든, 인간에 대한 존중이 있었습니다.

저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지 않았고, 위안부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원고 측이 멋대로 읽어 저를 밀어 떨어뜨린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그 결과로 승소했습니다. 이 기자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조악한 연구”를 재판부가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지킨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와 납득이 아니라 오히려 적개심을 증폭시키고 그런 감정을 판결 왜곡으로 보여준 이 기자님의 칼럼, 연합뉴스와 뉴시스의 악의적인 사진으로 (연합뉴스는 원고 측의 악의적인 프레임을 정식고발 전에 유포시킨 곳이고, 뉴시스는 법정을 지켜보러 와 있는 저의 가족을 향해 제가 잠깐 미소 짓는 그 순간을 포착해 “웃으면서 법정에 들어서는 박유하”라는 캡션을 달아 유포시켰던 곳이지요) 변함 없이 마녀사냥에 골몰하는 수많은 기사들에 뒤늦게 접하고 보니, 저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는 날이 내 살아 생전에 올는지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악의적인 틀을 씌워서 고발한 나눔의집 관계자들에게 있고 저에 대한 명예훼손과 인권 침해 가해자는 우선은 그들입니다. 더 말씀드리자면 제가 그들의 주장에 반하는 심포지엄을 지인들과 함께 열었던 일과 제가 가까이 지냈던 나눔의집 거주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이 저에 대한 고발의 직접적인 배경이었습니다. 심포지엄이 열린 지 한 달 반 만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일주일 만에 저는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발장에는 〈박유하는 예전에 `화해를 위해서`를 썼다. 그러더니 `제국의 위안부`를 썼다. 또 사람들을 모아 심포지엄까지 열었다, 그대로 놔두면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 방해가 된다〉는 취지의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재판경과 바로가기

또 하나의 고발장에는 서경식 교수 등 일부 재일교포의 저와 일본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마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정말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의 홈페이지 자료들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형사1심] 〈제국의 위안부〉최후진술

정리하자면, 이 고발은 진보 간의 생각 차이가 빚은 고발입니다. 그리고 그에 편승한 지원단체가 자신들의 문제를 덮기 위해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가 조심스러워서 저는 그 사실을 아직 세상에 분명하게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지원단체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한 학자를 함정에 빠뜨린 사건임에도,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려고 한 언론도 유감스럽게도 거의 없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이토록 많은 갈등을 유발 중인 사건임에도 말입니다.

승소를 했음에도, 여전히 기존 틀에 갇혀 사물을 보려 하는 경직된 사고와, 재판을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행간의 의미를 모를 젊은 기자님이 , 판결문마저 곡해하면서 한 학자의 책을 “조악한 연구”라 공공의 장에서 말해 버리는, 그리고 어쩌면 그런 자신의 글을 “정의의 필봉”쯤으로 여길 오만이 빚은 폭력은, 온전히 이 기자님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이 기자님 같은 얄팍한 인식과 태도가, 한국사회 자체를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아서 분노보다 서글픔이 먼저 밀려 옵니다. 한국사회는 병들어 있고, 그 정도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덕분에 다시 깨달았습니다. 피부가 매끈한 골다공증 여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무려 2년여나 국가 기관을 동원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서 책을 쓴 나를 공격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곳이, 다른 곳이 아닌 내 나라여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꽁꽁 뭉친다 해도 미래가 불투명하고, 오히려 우리가 잠시 봤던 자화상이 허울 좋은 신기루일 수 있다는 것이 하루하루 드러나고 있는 이 시대에, 진영논리가 만든 지적 태만에 기대어 오해하고 곡해하고 공격하고 반목하는 일에, 이 기자님 같은 젊은 분들이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슬프군요.

제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경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포기와 체념과 허무에 맞서 이 시대를 견디고 건너갈 수 있는 힘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부디, “정의의 필봉”으로 사람을 하루하루 새롭게 죽이지 마시고, 판결문을 다시 읽어 보시고 사태를 제대로 이해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재판에 정말 관심이 있다면 제가 재판부에 제출한 모든 자료들도 봐주시기 바랍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하십사, 이기자님이 일부를 빼놓고 전달해 반대 의미가 된 판결부분을, 보여 드립니다. 녹색 부분이, 빠진 부분입니다.

<제국의 변호인>에 관한 반론 노트

2016. 10. 5

박유하

이하는 2016년 봄에 발간된 <제국의 변호인>에 대한 미완성 메모.
이탤릭체는 비판자의 지적내용, 인용, 혹은 요약. 전체적으로 근거없는 허위와 논지부재의 인신공격.

1. 서문-근거 없이<제국의 위안부>를 거짓으로 단정.

1)위안부의웃는 사진’’
이 사진 배치한 이유는 정형화된 위안부와 다른 모습의 위안부를 보여주기 위해서. 또 사진을 찍은 동시대 기자의 연민의 시선도 보여주기 위한 것.

2)일본어판이 한국어판과 다르다

이 책은 역사를 다루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가 중요한 “메타역사서”이기 때문. 역사인식이란 ‘사실’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사실을 어떻게 보는 지가 중요. 물론 그것을 위해서 최대한 많은 정보(사실)필요.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책. 일본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동시에, 단순번역이 아니라 초벌번역을 바탕으로 다시 쓴 책이니 표현등이 달라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

3)‘민족의 거짓말지적에 대한 반발
정영환에 대한 반론 (4-10) 참조.

여기서 말하려 한 것은 ‘슬픈’ 거짓말의 구조. 업자의 경우 악의적 거짓말이겠지만 그 거짓말을 믿는 척 했던 부모나, ‘정신대’로 간다고 말하지 않고 간다고 말해야 했던 당사자의 ‘슬픈’ 거짓말을 상정. 그런 구조를 ‘그(업자의 거짓말)구조로 빠지기 쉽게 만드는 무의식’으로 판단한 것.
비판자의 지적은 일본어판에서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마지막단계에서의 (일본에 의한) 민족적인 유린’ 이라고 쓴 부분을, 멋대로‘민족적 차별’로 쓰고 있음. <제국의 변호인>에는 이런 식의 부정확한 인용이 다수. 정영환의 책처럼. 정에 대한 반론 참조할 것.

4)종잡을 없는 화법/거짓말/변검술
박유하 개인에 대한 오해와, 손종업의 곡해가 만든 인신공격.

`없는 증거 만들기`(김부자)?라면서 구체적인 근거는 말하지 못함.증언집 외에도 다수 다른 자료 사용.
`복화술` (이재승)

얼핏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한 것은 <제국의 위안부>가 처음부터 한일 양국의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 똑같은 내용을 두고 논하면서 조금은 다르게, 자기반성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제안한 결과.

`곡예적사고`(마에다 아키라)

<제국의 위안부>가 ‘민간업자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마에다의 지적은 책을 제대로 안 읽었다는 증거. 같은 책 안에서 누군가는 업자의 책임을 물어서 문제라며 비난하고 누군가는 업자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비난.  <제국의 위안부>에 비난과 고발이 오히려 결국은 비판자들의 (주로 기존 위안부문제관계자) `자의적인` 독해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음.

`예외의 일반화`(김창록)

증언집에서 양적으로 소수라 해서 ‘예외’라고 치부할 수는 없음. 드러난 숫자를 두고 예외라고 하려면 증언집 안에서 강제연행이 오히려 극소수인데도 중심인 것처럼 주장해 온 비판자들부터 문제시해야.
또한 구술은 채록과 간행과정에서 정리되고 누락됨. 이에 대해서는 야마시타영애교수의 2016년 발표자료 참조할 것. 검찰이 법정에서 대변하기도 한 김교수의 의견에 대해서는 <형사공판기>참조.

제1회 형사공판기 – 아이러니의 한가운데에서

학술서로서의 기본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정영환반론 참조(링크1 링크2).

정영환은 위안부문제자체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 기존 연구에 의존해 박유하를 비난. 또 다른 이들이 그대로 인용하면서 비난하는구조. 한국의 경우 언론과 지원단체가 20년간 만들어온 `상식`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반발.

비난어법은 근거없는 마녀사냥―‘지능적’, ‘다양한 방식의 화법’,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서’, ‘어이없는 거짓말’, ‘시치미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고 하지 않았다’는 해명은, 비판자들이 말하는 문맥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는 뜻. 그들 자신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반발.

위안부제도가 기본적으로 공창의 틀 안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학자들이 지적한 사실(밥원 제출 참고자료 참조)

5)`식민지근대화론 위안부편`

일본의 책임을 흐리는데 목표’(황진미)

식민지근대화론 위안부편’(김수지)

낯선 이론이면 무조건 기존 개념에 대입시키려 한 결과로서의 비난. 이후, 정영환의 ‘역사수정주의자” 김부자의 “하타교수/ 우에노교수와 같다”는 비난도 마찬가지. 완전히 다른 개념임에도 무리하게 대입시켜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무지가 만든 지적.

특히 “‘오래전부터 친일파’, ‘식민지 근대화론자’, ‘역사수정주의자소리를 들었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나 그런 사실 없음. 일부 극단민족주의자들의 생각일지 모르나 한국에서의 활동과 평가 참조(참고자료 홍진수기자  경향신문 정리뉴스등).

6) 악의적/ 명예훼손적 발언들

제국의 변호인’ (손종업)

경솔’,’비학문적

7)‘가부장 남자들이 못나서 외적을 물리치지 못하고 나라를 뺏긴데서 생긴 고통’,

일본정부에 사죄를 요구하기 전에 대한민국남자들이 할머니들에게 무릎꿇고 사죄할

위안부할머니를  조선인 남자들이 지켜야 했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발상이 한 여성을 `민족의 딸`이라는 틀에 가두고 싶어하는 욕망과 이어지면서  `일본군과의 연애`를 `민족의 일탈`로 생각하고 부정하도록 만드는 것. 그러나 연애는 민족아이덴티티가 아니라 남녀아이덴티티가 만드는 관계.

거짓말을 양치기 소년과도 같다’—명예훼손적 발언

‘수정주의자로 자리잡았다’(이재승)- 자신들과 다르면 무조건 우익 혹은 수정주의자로 모는 냉전적 사고 .정영환 반론 참조

 

  1. 손종업 (비평가)

명백한 결함이 있고 파괴적인 논증효과를 불러 일으킬 논증을 볼테르적 양심으로 옹호할 만큼의 윤리계량주의는 아닙니다’ (손아람 페이스북)

박유하 반론 참조(페이스북 링크)

법정으로 간 ‘주요한 원인이 박유하의 모호하고 이중적인 언술에서 기인’?

문제적인 기술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과 학술적인 논증자체가 가능할까?’

문제적인 기술로 읽게 만든 것은 손종업의 왜곡된 시각일 뿐.

일본군 위안부들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이를 다른 방법으로 회복할 없을 때에 법에 의지하는 것이 보장되어야 헌법적 권리’(백승덕의 발언에 대한 손의 해석)

훼손되었다는 생각은 지원자들의 자의적 독해의 결과. 이 책이 그런 책이라면 발간 직후 긍정적인 서평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 나아가 이 고발은 할머니가 주체가 아니라 주변인들. (배춘희 할머니. 유희남할머니. 우연재할머니 녹취록 제출)

유리한 판결을 위해 학문적 비판마저 중단하라는 주장은 과도

국가가 학문에 개입하는 사태에 지식인들이 가담하는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을 뿐.

지식인의 담론이 사법부—국가에 의해 한 학자의 ‘범죄증거’로 내밀어지는 사태에 대한 탄식. 더구나 비판자들의 비판은 대부분 학문적 비판이 아닌 감정적 비판.  위안부문제연구자는 극히 소수.

삭제판을  ‘살포’—-가처분 판결에 따른 일.

반박을 못하고 있다’ -이미 논문 혹은 그 밖의 형태로 반론.

집단으로 공격하면서 재판중인 사람에게 반박을 못하고 있다는 말로 다시 공격.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수행`수많은 얼굴을 감추고 있는 ’(28)-

다른 의견에 대한 강한 의구심과 일본에 대한 무지가 만든 비판. 학문적 반박은 없고 인격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몰아 감정적 비난을 환기시키려는 의도.

과도한 주장과 변론을 동시에 포함했기 때문에선택적으로 반박할 있게 된다’?

‘과도’함을 결정하는 건 누구인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거듭 말한 것처럼 여러 독자를 상정한 책이기 때문. 남모르는 의도를 확인하려 하는 것도 마녀사냥의 흔한 수법.

새롭게 제시한 자료는 거의 없다’?-

역사수정주의의 관점들로 다시 읽어낼 ’—- 가치폄하를 위한 명예훼손적 발언. .

박유하를 엉터리학자로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레토릭.

그러기 위해서 위안부를 모욕하는 한편 조선청부업자에게 죄를 떠넘김으로써 제국에 면죄부’(29)-”그러기 위해서라는 목적/의도를 근거없이 상상.

면죄여부에 대해서는 정영환에 대한 반론 참조.

`구조적 책임`을  ‘재정지원’ 의 책임만 있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음. 왜곡.
일본의   ‘사과나 반성은 ’다는 진부한 인식.

과장과 왜곡, 심지어는 허위적인 내용 존재’(30)- 왜곡하는 건 이들. 자신들이 몰랐던 사실이 있음에도 허위라 말하는 만용.

군인이 직접 끌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근거가 없다’ -—끌어간 경우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사기나 유괴를 허용했다는 근거도 없음. 오히려 단속한 자료를 제출.

강제연행 인정이 ‘모순’이라는 손의 논지는 파탄. 구조적으로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고 강제연행을 당한 경우가 있다면 개별적 행동이라고 했을 뿐. 자신의 논지 파탄을 전제로 해서 ‘자기모순’이라고 규정하는 난폭한 논지.
이러한 비판에서 벗어나는 방식’(30)을 멋대로 설명. 곡예적인 비난.

대중적인 정치서사’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처럼 지적해서 순수성을 훼손하려는 발언.
김창록의 ‘일반화, 자의적..’(2016/2/19, 한겨레) 등을 인용, ‘학술서로서의 기본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31)-김창록에 대해서는 후술, 공판기 참조. 다른 학자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조차 없는 난폭한 발언.

감정적인(근거 없는) 비판에 치중하다 보니 이하와 같은 완전한 왜곡/오류마저.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있다가 책속에 편입되면서 사라진 다음과 같은 구절’ (32)이라면서 비판하나,

김창록이 언급한 이 논문은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와 관계 없음. 아직 단행본에수록하지 않은  논문. 완전한 오류.
<내셔널아이덴티티와 젠더>는 나츠메소세키를 분석, 일본 근대를 비판한 저서임에도 (박이) ‘근대주의자로서 제국주의를 제대로 비판할 없다’ 는 엉뚱한 비판.

소세키가 식민지지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본인 학자의 주장은 마지못해 시인하면서도 오히려 식민지지배의 정치적 무력적 측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세키는 어디까지나문명 측면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선에서 머문다’?

작품과 사상에 나타나는 은밀한 구조를 지적한 것. 소세키가 민비 살해에 긍정적이었다는 것은 젊었을 때 일이고, 박유하가 일본학계에서 처음 지적한 사실.

그러나 작품과 상관없음.  손의 지적대로 박이 근대주의자였다면 이런 비판서를 쓰지도 않았을 것. 일반적으로는 이 책을 읽었다면 박의 사고를 이해하고 오해를 풀 만 함에도 오히려 왜곡.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가 앞선 결과.

자신의 자의적 해석과 오독이 만드는 일임에도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와 다르게 보인다는 이유로  기존 상식에 근거해 ‘다른 얼굴들을 통해 변명을 늘어놓는’것으로 인지하는 경박성 .

‘대중선동의 방식’으로 일제가 박은 쇠말뚝은 없다고 했다고 선언?

박유하의 과거의 책까지 가져와 대입시키는 사상 검증.
그러나 이 책은 민족주의를 비판한 대중서.

당시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으며  이런 비난은 근거 없는 비난.

일본제국주의에 불리한 증거들은 가능한 기피’(33) ‘가미카제를 특공대원으로 번역?(33)-137

쇠말뚝 담론마저 왜곡, 선택적으로 반박

―곡예수준의  왜곡독해.

착종된 논리’, ‘대중의 시선을 끄는 광대’, ‘집요하게 구조적인 강제성을 지우려 한다

정말 그렇다면 박유하가 일본에 대해  사죄보상이 필요하다고 한 이유가 설명이 안되는 비판.

경박한 언어를 누가 학문이라 하는가(34)라고까지 말하는 경박성.
<제국의 위안부>담론이 학자의 것이 아니라변호인 ?
그녀의 옆에 앉은 자들은 일본의 군대 혹은 제국주의’ ‘그들이 폐기한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며 정황을 유리하게 만들어 가려 한다

새로운 근거는 거의 없다’, ‘빈곤한 사료는 그나마 선택적으로 사용된다’, ‘구술사가로서의 그녀의 태도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바만을 채택’(35)

박유하에 대한 근거없는 선입견이 만든 악의적 비방이자 `위험`이라는 단어로 대중의 혐오를 유발하려는 의도. 위험한 것은 바로 이러한 담론들.
끝에 한일정부의 불가역적인 협정
근거없는 연계. 자신들이 원한 방식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무조건 비난.

한나아렌트와 달리 해결책’을(36)

피해자를 침묵하게 하면서 강자의 논리로 맺은 화해박유하의해결책을 반기는 쪽은 거품경제 이후의 불황 20, 고베대지진, 일본대지진의 위기를 통해 보수화하는 일본
서경식, 정영환등의 논지를 검증없이 빌려온  진부하고 경박한 이해.

그녀가 내민 화해의 손길을 잡은 아베정권’ (37)

자신들이 원하는 해결책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일본 민주당 정권조차 법적배상에는 부정적이었고 한일합의와 거의 같은 제안을 했음.

아베의 강제연행 부정발언이 국제사회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 ‘아사히 신문을 필두로 마이니치신문도 예외없이 박유하를 종종 지면에 등장

박유하의 화해론의 표출이 위안부문제 해결에 혼란을 점은 부인할 없다(니시노)는 말을 인용하며 비판하나 니시노는 지원자. 일본지원자들중 강경파. 박유하의 지원단체 비판에 한 반감. 박유하의 책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를 무조건 우경화의 증거로 단정하는 선동성.

학문적 엄밀성을 얻는데 실패’, `학문은 결코 폭력적인 언사들도 보호되어야 하는소도 없다.”

학문은 해결책이 아니라 진실 또는 사실을 통해 기존의 패러다임과 맞서야 한다’‘해결책에의 조급증’?

오만한 설교. 그들자신이 20년이상 해결하라는 운동을 해 왔음에도. 자신들이 주장한 해결책 이외에는 모두 부정하는 오만.

 

  1. 김요섭 1

이재승.윤해동등  ‘반론에 대한 오랜  침묵’(41)?

윤해동에 대해선 서평회에서 반론. 이재승에 대해서는 2015년 여름에 작성. 완성본이 아니어서 방치. 그렇게 시간적여유를 못가지도록 만든 것이 재판.

윤해동의 경우 일본을 면죄한다고 생각하는, 비판자들에게 공통된 내용이어서 근본으로 돌아가 고찰하는 다른 글에서 논의할 생각.

본인의 반론이 제기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쟁으로 확대될 없었다

2015년 여름과 가을에 두개의 반론, 비판자들의 논지는 대동소이하므로 대충은 대답이 되었을 것. 그에 대한 반론 없음.
학계/지식인의 대부분은 고발이후에도 침묵상태. 정영환등 재일교포 중심으로 일본에서 조금씩 나오던 비판이 2015년 가을의  일본어판 수상과 한일합의 이후 쏟아짐.

법적책임의 문제를 제기했다고 이를 무시’(43) ‘논쟁을 기피’, ‘오랜 침묵의 이유 법적책임문제를 다루었기 때문’ 이라는 것은 악의적 곡해.

상찬은 기소 이후에 발생’한 것이 아님.
한국의 경우 발간직후에도 여러 매체가 주목, 일본도 호의적 서평 다수. 그리고 1년후 이시바시탄잔상, 아시아태평양상등 수상이 발표되자 직후에 기소. 그리고 격한 비난들이 한일 양쪽, 그리고 미국에서까지 본격화.

사태를 반대로 말하고 있는 악의적인 해석.

두 개의 반론을 시도한 것은 그 글이 주요 역사잡지에 실려 영향력이 있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

위안부의 모습을 단일화’(45)
’(정영환 지적대로)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를 동일시’(45)?
지적된 부분이 일본인임은 박유하가 책에서 지적. 그럼에도 이러한 지적이 반복되는 이유는 어떻게든 저항민족의 모습을 보고 싶은 욕망.

지속적인 민족차별 경험’(46)은 박유하도 기술.-—정영환 반론에 본문 발췌. 참조할 것.(링크)

 

<오류>

‘부합하지 않는 증언자들은 용기의 부족과 미성숙으로 비판받는’다?
—-젊은 학자들에 대한 반론 참조할 것. 해방 후 70년을 위안부 할머니의 나이로 착각하고 한국비판을 위안부할머니 비판으로 간주. 웃지 못할 오독.

일본군과의 행복한 시간이 존재했을 것이란 가정’ ‘특정한 증언을 보편적 사례로 설정’-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오히려 월권이자 폭력적.

‘극단적인 고통’을 <제국의 위안부>도 기술. 그런 부분을 무시한 불구적인 독해.

증언의 신빙성에 각기 다른 무게’(48)
피해자들의 증언은 비판대상’(위에 쓴 것처럼 그렇게 쓴 적 없음)

총체적으로 고통에 대해서도, 고통을 견디기 위한 다른 시간도 기술. 다만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증언을 취사선택해서 전달한 건 연구자 혹은 지원단체.

특정한 증언과 사례들이 특권화’, ‘검증의 과정 없이 긍정’?

박유하는 버려진 증언들에 귀를 기울여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 복원.

지원단체의 대외 발언의 편향성 혹은 이중성을 드러내 보였음.

담론전략이후 형성된 사회적 맥락’(49)

위안부논리를 탈구축하기(윤해동)라는 목표를 향해 논의를 정비’?

이를 위해서 정대협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위안부의 증언은 비판’? (49)

근거없는 곡해. 결과를 목적으로 단정. 없는 사실을 전제로 논지전개.

박유하에게는 학계는 중요한 대결의 대상이 아니다’(54)’학계대신 정대협’?

정대협에도 학자 다수. 그러나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사실을 알리기 위해 쓴 책

이재승에 대한 침묵이

엄정한 학문적 검증을 견딜 있을 만큼 견고한 것이 아니기 때문’?-논지가 아닌 추측.비판이 아닌 감정배설.

아이히만은 히틀러에 대한 협력자.  협력자의 책임을 물은 것이 <제국의 위안부>

그런데 이들은 아이히만이 ‘인도에 반한 죄’로 단죄된 것에만 주목.

국제법논리`인도에 반한 ’?(56)

위안부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관계자들이  물리적 강제연행으로 주장했고 그렇게 받아들여졌기  때문. 그에 이어진  강간과  학살로 원래 납치주체에 의해 갇혀 성폭행당한 사람에 대해 쓰여진  `성노예`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한 결과.

이를 의식한 박유하는 홀로코스트에서 유태인들의 협력이 매우 제한적이었다며 양자의 구분을 시도’(56)

홀로코스트는 민족말살을 꾀한 것. 제국주의는 자원으로 이용. 이 차이를 무시한 곡해.

유태인 단체도 최근에 지원단체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비판제기.

조선인과 일본인 업자들의 존재는 학계에 있어서 새로운 사실도 아니며

박유하 역시2005년에 지적. 처음 지적했다고 하지 않았으며 증언집에 나와 있는데도 국민과 언론에 총체적인 사실을 알리지 않고 호도한 데 대한 이의제기일뿐.

결과적으로 반발만 커지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던 상항에  대한 이의제기.

일본제국에 동원된 하위 수행자이기 때문에 위안부문제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다

업자는 위안부에게 고통을 준 주체. 그들 자신의 책임을 묻기보다 그들의 후예로서의 자기반성 촉구.

위안부 배치를 관리하고 이송에 필요한 장비를 동원한 것은 일본군’(요시미) 임을 부정한 적 없음.

(옹호자 김규항/장정일을 비판하며)

위안부연구자나 역사가들이 대략의 합의를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제국의 위안부> 서술’ (57)

<제국의 위안부>는  담론 분석. 증언과 기존 담론(운동과 연구) 을 재해석한 책.
그것을 위한 필요최소한도의 사료를 사용한  메타역사비평서.

‘새로운 자료’라고 강조한 바도 없고 업자문제는 중요하지도 않음. 기존연구가 법적책임에만 구애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업자에게 `먼저`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을 뿐.

기존학자들이 다 알고 있었다면 왜 말하지 않았는가? ‘강제연행’설을 방치한 의도는?
새로운 사료의 발굴 없이 기존학계의 자료에 전적으로 의존

정대협과 정신대연구소에서 발간된 증언집에 수록

증언집사용은 당연. 증언집은 누구나 사용가능한 1차자료.

그들이 무엇을 강조하지 않았는지를 강조했을 뿐.

학계의 연구에서 업자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인지’?(58)했다?

<제국의 위안부>에서업자문제,매춘문제는 중요하지 않음.책내용의 왜소화.

일본어판에서도 “강제연행인지 매춘인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했음.

그들이 드러내지 않은 사료를 일반인에게 보이도록 한 것이고 이유는 제국의 구조를 보기 위한 것.
소송을 통해서 정대협과는 다른 주장이 대중사이로 확산
발간 직후에 이미 어느정도 확산. 다음해 심포지엄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매체를 통해 확산.
소송을 통해서’ 오히려 소수나마 존재했던 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묻혀지고 지원단체가 악의를 담아 만든  자발적 매춘부라고 했다”는 왜곡된 내용이 확산.

박유하에 대한 상찬이란 엄밀하게 연구의 성과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내려진 것이 아니라 논쟁이 발생한 상황적 맥락에서 내려진 ’(58)이라는 인식은  사태에 대한 몰이해.  앞서 말한 것처럼 발간 직후에는 문제없었음.

자신이 개입하는 지점을 학문이 아니라 민족국가의 행위로 파악 ‘(60)

박유하는  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한국인으로서 개입.

자기논리에 부합되지 않는 개별적인 체험들을 배제

위안부의 다른 목소리를 배제한 건 오히려 지원단체.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비판과 왜곡

‘학문적 검증을 견디지 못한 주장이 무비판적으로 확산’(60)

악의적 왜곡담론이 확산.

국민적 관심거리가 되었다 해서 학문적 검증을 유보’하라고 했다?
비판이 있으면  고발사태가 되기 전에 해야 했으나 하지 않았으니  재판종료 이후에 하라는 것.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학자/지식인의 글이 국가/사법부논리에 가담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이 고발은 운동 ,기존 연구, 기존 상식을 지키기 위한 고발. 위안부할머니가 아니라 운동과 기존연구자와 (국가의) 명예와 위신유지를 위한.

 

  1. 김요섭 2

김규항의 옹호비판 -’그리도 애처롭게 떠받드는 제국의 위안부’(64)

`그리도 애처롭게`– 논지없는 감정적공격.

박유하가제국이란 개념을 동원하는 방식은 오직식민 지배가 오래 되었으므로 스스로 일본인이라고 인식했을 이라며 조선인 위안부의 경험을 일치시키려는 초민족적 국민국가를 불러내기 위함이다’(63)

`제국에 포섭되었었다는 사실을 잊고 이루어진 담론들이 오히려 사태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게 하고 해결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문제의식’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구조적으로 억압했다는 김규항

요약자체가 이미 왜곡.

‘위안부문제`가 아니라 정대협이 주도한 위안부담론을 지적.

`박유하의 주장과는 달리 위안부문제의 공론화 이전까지 한국에서 이들은 완벽히 배제되어 왔다’(66)

사태는 반대. 정대협 담론이 일부 위안부를 배제. 의도여부와 상관 없이.

구조적 책임이란 모호한 영역으로 배치’(67) ‘일본에는 어떤 법적책임도 없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작업일 ’(67)

학문적 고찰의 결과일 뿐. 전도된 상상.

홀로코스트는 위안부문제와 달리 협력자문제가 없다는 왜곡에 매달리면서까지’(67)
-앞서의 반론 참조.

평화집회에 참여하는 위안부 목소리를 배제하려는 시도’(68)’여성피해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 기반을 공격하고 이들이 가졌던 주체성을 부정’(68)

`여성피해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 ` 공적을 무시하려는 의도는 없음. 그러나 공적이 있는 것이  곧 문제가 없다는 증거는  되지는 않음.

평화집회에 참여하는 위안부’들에게 지원단체의 일방적인 생각이 전달되고 강요된 정황에 대한 문제제기.

 

  1. 마에다 아키라

제국의 위안부의 허위기술이나 사실오류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지적이 있었다’(72)

<제국의 위안부>를 허위이거나 오류라고 한 정영환등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반론, 참조 바람.(링크1링크2)

일본남성 작가의 소설을 근거로 삼고 있다. ‘-—정영환 반론 참조

박유하를 옹호하면 일본페미니즘의 선구학자도 ‘성차별주의 페미니스트에 불과’(73)하다고 폄하하는 심리의 자기분석필요.

민간업자의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지만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같은 책에서 누구는 업자의 책임을 묻는다고 비난하고 누구는 비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모순.

법적책임을 지워야 하는 대상이라고 기술했음.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식민지에 협력한애국적 노력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타이틀은 식민지책임을 묻고자 하는 제목.

부인하는 본서는인도에 반하는 죄로서의 성노예제 대한 법적 고찰을 방기하고 식민지 해장투쟁의 이론과 실천이나, 유엔국제법위원회에서 심의된식민지범죄론이나

인종차별반대 더반 세계회의에서 논의된식민지책임론도 탈색해 버린다.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묻는 법논리가 나오지 않는다. (73)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법논리’란 이른바 `강제연행`이라는 인식에 바탕한 논리. 전제자체가 문제.

예전부터 한국내에서는 박유하의 저술이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이자 모욕이라는 지적이 있어 왔다’(73)’일본에서도 명예훼손과 모욕 혐의는 예부터 거듭 지적되었다’(74)

근거없는 단정. 서경식, 윤건차, 김부자등  재일교포가 비판한 적 있으나 명예훼손이라는 문맥이 아니라  학문적 비판>

피해자의 고소와 고발이 있고 일정한 협의가 있으면 기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74)—`피해자`중심주의적 발상이자, 이 사태에서 피해자는 박유하.

1) 피해자들은 판단을 강요당했다

2) 피해자에게 왜곡된 독해가 주어졌다

3)일본지식인의 박에 대한 옹호는 일본 학계등에서의 박유하의 활동에 대한 높은 평가와 (본인의 전공인 문학분야등) 신뢰가 만든 것. 즉 위안부를 폄하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리가 없다는 총체적 신뢰와 책자체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명확하고 정확한 판단이 만든 것.(지명도, 사회적 신뢰도에서 일본의 대표급 정치가와 지식인.  노벨상 작가 오에겐자브로, 고노담화의 주인공 고노 전관방장관,무라야마담화의 무라야마 수상,일본 여성학의 선구자인 우에노치즈코등이 참여)

그런 지식인들을 두고, 자신들의 생각을 지지하지 않고 <제국의 위안부>를 지지했다는 것만으로 오만하다는 주장.

성노예제의 피해자가 아니라 일본군인과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든지 매춘부라고 비난하는 것은인간의 사회적 평가를 내리는

자신들이 구축해 온 성노예이미지만 주장하면서 그에 맞는 피해자만 피해자로 주장하는 격.

존엄의 회복을 추구하며 싸웠다’?

그 자체를 부정한 적 없음. 이미지의 단일화를 비판했을 뿐.

인간의 존엄은 국제인권법의 기본개념’?

(일본 지식인들이) ’인간의 존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75)

일본지식인들은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 주변인들에 대해 비판. 그런  박유하를 지지했을 뿐,  위안부할머니를  부정한 것이 아닌데 바꿔치기해서 비난 .

허위사실을 통해서 명예를 훼손하고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행위

멋대로 규정하고 그 규정을 전제한 비판.
인간의 존엄을 폄하하는 학문’(76)

나치의 우생학도 과거일본의 식민학도 학문의 자유가 된다

아이누, 식민학, 이슬람차별, 히틀러의 폭력과 동일시.

허위사실에 의거하여 위안부가 여성들의 명예를 훼손

헤이트스피치 처벌은 유럽국가에서는 상식
제국의 위안부를 읽기 위해서는 아우슈비츠의 거짓말에 대한 올바른 인식 필요

–<제국의 변호인>이야말로 헤이트 스피치.

일본지식인의 ‘항의 성명이 할머니피해를 부정

서울지검이 박유하를 체포하지 않고 자택에서 절차를 밟은 것에 침묵’(81)

형사조정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합의에 실패했기 때문에 소추에 이른 ’?’항의성명이이런 중요한 사실을 은폐

형사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일본어판을 삭제하라고 요구했기 때문.

어떤 학자는 일본어판을 절판하라고 요구.

국제문제의 논의에 위안부피해를 입은 할머니들도 동참

할머니들의 투쟁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투쟁이 폭넓은 지지를 얻을 있었다’(82)

그런데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국제적인 식민지해방투쟁을 폄하했다

고모리나 우에노의 항의성명을 두고

잇달아 허위사실을 늘어놓으며 식민지 해방투쟁에 대해 냉담함을 드러냈다

지배한 상대에게 (일본지식인이) 근거없는 비방’(82)

피해자의 인간의 존엄회복추구를 정면으로 부정

근대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날조하고 개찬’(89)

아우슈비츠의 거짓말에 해당하는 위안부의 거짓말
학문을 가장한 위안부에 관한 거짓말’(90)

민중선동’`반인도적행위

<제국의 위안부>를 제노사이드를 정당화하고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책으로 간주하는 근거없는 헤이트스피치.

 

  1. 편집부

자발적 매춘부”라고 했다. (92-94)

신운용 ` 역사왜곡을 넘어 일본극우세력의 논리를 퍼뜨리는

증언과 자료를 짜깁기(정영환,94)-정영환 반론참조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중대한) 해석’-
—형식(틀)을 지적했을 뿐.

고노담화는 피해자의 증언 아니라 일본군의 강제연행을 뒷받침할 확실한 사건을 전제로 작성’(<그들은 위안부문제를 공격하는가?> 32쪽)

(95)

고노담화를 잘못 알고 있음.  지원단체조차 오랫동안 고노담화를 부정해 왔는데 그 이유는  이른바 `강제연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음.

위안부들은 50퍼센트가 일본군과 군이 직접 관여했다고 인식하고 는데이것을 무시’(최우석)

일본군의 관여는 박유하도 지적. 잘못된 오독의 예.

미군에 포로로 잡혔을 때는평균 23’ 2년전에 조선에서 징집연행되었을 때는평균 21

‘20명가운데 미성년이 과반’(김부자)

박유하가  비판한 건 소녀상이 상징하는 14,5세 소녀 (98)
그런데도 마치 20세이하  `미성년`자까지  부정한 것처럼 왜곡해서 비판.

소녀상을 철거하라 국민의 마음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
국민자존심을 묵살’(99)

철거하라고 한적 없음. 정부의 생각을 박유하의 생각으로 바꿔치기 해 비난 유도.

일본이 제대로 사과하고 반성한다고 하면 소녀상을 일본에 세우겠다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

사태를 제대로 표현한  소녀상이라면 문제 없음. 그렇지 않은 것을 비판한 것. 나아가 사죄보상 하지 않았다는 상식적 전제를 비판하고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려 한 것.

나눔의 집에서 활동하고 증언하는 생존자들을 배제’? (백승덕, 99)

같이 활동했다 해도 배춘희할머니처럼 다른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음. 박유하는 지원단체에게  배제당한 할머니의 목소리에 귀기울였음.

다수의 일본인 포주를 배제’?

어느 쪽 포주가 많은지는 아직 연구되어 있지 않음. 배할머니는

조선인 뿐이었다고 구술.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3회 참조). 폭력적인 일본인 포주에 대해서도 책에 기술.

정대협을 좋아하는 다수의 위안부 할머니를 배제

정대협과 함께 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할머니는 극소수

다수의 폭력적이었던 일본인 군인들을 배제’?(100, 김헌주)

강간하고 차별하는 군인들을 분명히  기술. 책의 반을 무시한 비난.

식민주의 비판이 소거된 민족주의 비판’?(김헌주)

“강제연행”이라는 인식은 식민주의의 폭력을 정확히 말하지 못함. <제국의위안부>가  일본에서 평가받은 것은 바로 식민주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을 지적했기 때문(수상평 등 참조—-정영환 반론 수록)

박유하교수가 그려내고자 했던 위안부의 모습은’’평균연령 25세의 못배우고 못살아단독으로 찾아가 `대부분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수천명의 직업여성’?(101,최형익)

25세 여성이란,  하나의 자료를 언급했을 뿐. 마음대로 전체기술인 것처럼 왜곡.
나머지 요약부분도 자신이 본 (부정하고 싶은 심리 때문에 그것만 주목하게 만드는)독해에 의한 것.

박유하교수의 욕망을 위안부에 투사’ ‘제국의 위안부는 그래서 소설

박유하의 의도는 여러 번 설명.  위안부문제에 대해 잘 모르면서 다른 이의 저작을 `소설`이라 말해 버리는 오만.

피해자가 직접 아픔과 명예훼손을 호소하며 고소’(박선아)

국가는 소극적 공공장치로 소환된 것일 ’(김한상, 103)

박선아등 나눔의 집 관계자가 이 책을 왜곡전달.
억압적 국가기구의 탄압이라 규정하는 것은 과장

국가를 동원해 자신들을 비판한 학문을 억압중.

허위사실을 기술하고 도저히 묵과할 없을 정도의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박선아,103-4)

‘매춘’등을 허위로 고발한 것은 학생들과 고문변호사의 무지의결과. 학자중에 위안부제도가 공창틀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없음.

성노예문제라는 것이 여러가지로 보고서에 의해 확인이 되고 국제사회의 연대를 얻어놓은 입장인데 과연 부분에 있어서 중에서 지금 일본이 강제성을 부인하는 논거로 사용되는 부분을 전체적인 것인 하고 책을 작성’(박선아, 104)

박유하에 대한 고발이 지원단체의 운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

중국이나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 역사적인 화해가 필요하다는 (일본 리버럴의)주장’(정영환)

박유하는 그렇게 쓴 적이 없음. 일부 일본인들 말을 가져와 박유하의 의견인 것처럼 전달하는 비열한  왜곡.

일본 현지에선 영웅대접’’일본의 역사왜곡에 책이 논리적 근거를 주었으니까요’(유희남), 105)여성신문

위안부할머니의 말로 전달되고 있지만 내용은  지원자들의 생각. 고발 또한 마찬가지 구조.
그리고 이들의 생각일 뿐.   `역사왜곡`하는 일본인들이 좋아했다면  아베정부가 한일합의에 나서는 일도 없었을 것.

삭제판 발간이사법적 판결을 외면한 비도덕적인 행동’(안신권) –여성신문

삭제판 발간은 가처분판결에 따른 것

강제연행은 거짓말이라고 없음.

화해는 베트남 사람들이 먼저 제안하는 ’(한홍구)

화해를 할 지 여부는 당사자가 정할 문제. 당사자의 생각도 여러가지.

 

  1. 김부자

참신함을 가장’(130)

종래의 위안부 이미지를 전면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저작

한국에서는 출판당시 화제가 되지 않았지만`
조선일보. 한국일보. 주간동아 인터뷰. 다수 서평(이상 130)

박유하씨는 일본문학연구자인데 위안부문제나 역사학 연구자도 아니며위안부문제 해결운동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다’(131)

<제국의 위안부>는 학제간연구.

그럼에도 이른바 `전문가`의 편협한 시각으로 불신유발 시도.
참신함을 가장’—근거없는 비난.

한국에서의 반응에 대한 설명도 왜곡—노지현기자 글 참조. 발간직후에도 관심을 많이 받았음을 기술 (링크)

화해를 위해서가오인이 많아서’’이러한 것들을 지적’?

2009년에 반론 썼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90년대의 운동과 사상에 대해>.2009. 일본어)

수정하기는 커녕, 이제까지 축적되어 위안부제도 연구와 증언들을 경시/ 무시하고, 참신함을 가장하여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사실 오인을 전면적으로 전개?’(131)-정영환을 무비판적으로 수렴. 10년전에  윤건차등이 김부자의 글을 가져와 박유하를 비판한 것과 같은 현상. )

소녀는 예외.

강제 5 9명의 연행당시의 연령은 모두 ‘20 이하’, 미성년이었다’(133)

‘78명중 73명이 미성년이었다는 사실을 박유하씨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133)

자기 설에 유리한 증언만을 인용

‘20 가운데 미성년이 12명으로 과반수가 소녀’(133)

반도로부터 이는 (매춘의)전력도 없고 연령도 18,9 젊은 () 많았다 말했다

그러나 위안부는 14,5세가 아니었음을 김부자자신이 증명.김부자의 분석에 따르면 오히려 버마 미치키나의 위안부는 평균 23세이고  징집 당시도 21. 성년. 스스로 성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

박이 비판한 것은 소녀상이 대표하는  14,5세가 중심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이미지. 더구나 그런  `소녀`를 강조할 수록 조선인의 책임을 봐야 하는 모순적 구조를 지적했을 뿐.

`성노예`

역사학과 국제법에 의한위안부제도의 실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논점을 슬쩍 바꿔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20년의 운동성과는  “강제연행된 소녀”를 강조해 얻은 성과.

국제적 기만 요소 있음.  추후  설명.

공창출신 일본인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다’(136)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인식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적반하장적인 왜곡. 이미 <화해를 위해서> 와 오사라기지로수상 직후 글에서 일본인위안부에 대한 인식 표명.

<제국의 위안부>는 공창출신을 배제했던  정대협 비판

식민지 여성이 타깃’이라는 김부자의 인식은 잘못된 것. 숫자적으로 많을 수 있으나 타깃이어서가 아니라 식민지조선의 가난과 그것을  이용한  유괴와 사기, 인신매매가 횡행한 결과.

식민지에서의 징집이 국제법을 빠져나갈 구멍으로 여겨졌다

식민지인 대만과 조선에서 대량으로 징집해서위안부 삼고자 했다

‘성병대책을 위해 식민지의 성경험이 없는 미혼의 소녀가 표적이 되었다’

근거 없는 추론 .

아소의 의견서화류병 의혹이 있는 자는 극히 소수’’젊은 연령에다가 초심자가 많음’은 의도에 의한 것 (조선의 소녀들이 공동체의 보호를 받지 못한 결과. (138-9)이라거나 ‘일본군 스스로가 성병이 없는 아주 젊은 위안부 필요로 ‘다는 식의 단정은 추정일 뿐. 식민지를 처음부터 타깃으로 삼았다는 생각은 (139), 식민지를 여성으로 표상하고 종주국을 남성으로 표상했던 동시대  이미지의 현대판 버전.

위안부는 군속취급을 받았지만 정식으로(나쁜 의미에서의 `합법`으로 동원된 것이 아니기에)‘징집’이라는 단어는  사태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함.

비도덕적 업자의 돈벌이에 이용당한 부분(상대한 숫자가 많을수록 업자도 돈이 벌리는 구조)크고  따라서 이용인원이 많은 곳으로 자발 혹은 타의에 의한 이동(혹은 배치).  조선인군인 모집등을 고려할 필요도 있음.

부녀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이 4. 일본은 조약에 가입(1904,1910,1921)

여기서 조선과 대만은 적용하지 `(그러면 불법이 아니게 됨)았는데

일본영토로 간주되는 일본의 선박을 사용하거나 일본군 중앙이 이송을 지시하면 적용제외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최근의 사고방식’(138)

이라고 김부자 자신이 설명하는 것처럼  비판자들의 논지는 오로지‘강제성”을 증명하기 위한 논지. 이는  오로지 강제성을 증명해야 자신들이 말해온 법적책임과 국가배상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

대부분의 여성은 조혼이었으므로 결혼 10대에 징집하려고 했다’ ‘결혼전이라면 성경험이 없다`김부자가  생각하는 이유는  `유린당한 식민지` 인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  그러나 바로 그러한 생각이 그동안 위안부제도의 공창적 성격을 부정하게 만들고 매춘부출신 여성을 세상의 시선에서 묻어 버린 .

물론 조선인 위안부 중에는 연행당시에 성인이었거나, 공창출신 여성도 있었다’(139)

물론 조선인 소녀 여성이위안부 최대이유는 당시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139)

이 지적은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강조한 내용. 인용없이 박유하의 논지로 박유하를 비판.

국제법의 식민지적용 제외나 일본군 장병의 성병대책이라는 측면에서 조선인 여성, 특히 경험이 없는 미혼의 소녀들이 타깃이 되었다’(139)

일본인 여성의 징집은 지장이 있지만 식민지조선의 여성이라면 미성년을 포함시켜서 어느정도 대량으로위안부로 삼아도 상관없다는 민족차별의식’ 이라고 김부자는 말하지만 식민지적 차별이란 그런 식으로 눈에 띄는 차별이 아니라  동화시켜 ‘자발적 동원`을 하도록 만들고 동시에 차별하는 제국의 성격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

조선의 위안부의 대부분이  김부자가 말하는 14,5세의 이른바 미성년=소녀가 아니었다는 것은 1965년에 학도병 출신이 만든  영화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에도 나타남.

박유하씨의 군위안소에 대한 인식은 오로지 하타이쿠히코씨의 위안소=전지공창시설론에 의거’(141)

하타씨와 같은 수정파’―

하타씨의 위안부 이해에 대해서는 경원하는데 하카씨 스스로가 비슷한 이해라고 높이 평가한 박유하씨의 위안부 이해를 입을 모아 칭찬하는 일본의 진보파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타와의 단순비교. 하타가 칭찬하면 하타와 같은 의견인가?

박은 10년전 <화해를 위해서>에서도, 이미 <제국의 위안부>와 다르지 않은 인식을 내놓았고, 하타를 비판. <제국의 위안부>요약문에서도. (링크)

강제연행설과 성노예설을 부정’?-

그들이 말하는 물리적 강제연행만 부정. 14, 5세 소녀 성노예가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는 인식만 부정.  기본적으로는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위안부의 비참성을 썼음.

우에노치즈코와 비슷?-피해자상의 해석에서?’양쪽 이론의 유사성’(142)

영향을 받은 것은 박유하 ?’’계급의 관점이 없다?

늘 누군가를 가져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식의  거친 범주화/유형화. 박유하는  우에노와 비슷한 입장에 있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전적으로 증언집에 의거해 고찰한 결과.

조선에서는 여자정신 근로령이 공포실행되지 않았다고 오인

박유하는 매일신보 기사에 의거해서 기술.  추후 재확인 할 것임.

정대협은 우에노씨가 말하는 불순한 피해자를 배제하지 않고 숨기지도 않았다’? ‘문옥주증언을 넣었다?’

그러나 책은 오랫동안  절판된 상태였고, 2014년에야 재판발간. 여성과인권박물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았음.
언론과  외부를 향한  주장에서는  이들의 삶은 늘 배제 . 운동의 성공에 방해된다는 판단 때문이었겠지만 사죄보상문제에서 위안부와 갈등을 일으킨 것처럼 위안부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양쪽 다 억압.

2014년 시점에도  언론, 해외, 시민, 국가지원등을 향해서는 늘 “20만명이 끌려가 200여명이 돌아왔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음. 내부와 학회, 외부와 일반인에 대해  결이 `다른`담론.

불순한 피해자상을 전면적으로 전개`

증거를 만들어 내면서 까지 소녀상 부정으로 들어갔다’(145)

박유하씨의 주장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 —정영환의 왜곡을 검증없이 수용한 명예훼손적 비판.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을 매춘지적에만 주목한 반발.

자타에 의한 정신적 억압에서 풀어주고자 한 일. 매춘인지 여부는 전체논지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음.

일본인 위안부를 매춘 패러다임으로 포착해서 성노예가 아니라는 인식’(145)

오히려 반대. 소녀를 강조하는 일을 통해 일본인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직간접으로 말해 온 건 비판자들.

일본의 책임을 가볍게 하고 싶다는 정치적 욕망’(146)

—근거없는 망상.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투사한 발언.

한국정대협의 운동은’’자기개혁을 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2010년대에도 거짓말로 사울시등 지원금을 신청하는  이유는?

(박유하 책의 )’내실은 하카이쿠히코씨와 우에노를합체시켜일본군의 책임과 식민지지배책임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위안부담론’. 그것이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제국의 위안부>가 평가받은 것은 식민지배를 지적했기 때문.

작가나 문학연구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정확히 읽었기 때문.

식민지지배의 실상에 대한 얕은 이해’(147)

피해자의 아픔을 무시’’

`일본측에게  유리한 위안부 담론’?

피해자의 감정과 생각을 무시한 건 누구인가?
피해자는 하나가 아님.

식민지배 실상에 대한 일원적 이해에가 만드는 비난들.

 

  1. 김수지역사평설가

근거없는 폭언들.

가해자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논리’(199)

제국의 위안부를 썼을까’?’삭제판결로 원본에서 사라졌던 34곳을 찾아 의도를 짐작’-추정으로 논지 전개하겠다는 선언.

센다의책을 인용하여 위안부의 본질은매춘 같다고 말한다

-공판기등 재판 답변서 참조할 것.

애국관련 부분을 인용하면서 매춘이라 했다고 단정.

상동.

조선이 일본에 침략을 받아서 발생했던 사건이라는 특수성을 약화’(202)

근거없는 단정. <제국의 위안부>는 운동의 세계화와 함께 사라지고 만 `식민지지배책임`을 다시 말한 책.

조선인 위안부문제에 대한 책임은 민간업자 포주들에게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주기 위한 ’ (204)—상상에 의한 단정.

일본군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을 말해주는 증언 제시

그들에 의해 버려져 있던 증언을 복원. 전체체험을 이해하기 위해.더이상 일부관계자들의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아주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다’(206)

위안부 개인들의 일상을 계속 강조한다. 이것은 마치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은의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식민지근대화론 위안부편

개인들이 나름 행복했다고 강조’, ‘근본적인 제도적 폭력을 은폐’(206)

강제로 끌고 갔다는 것을 부인’(208)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를뜻을 같이 하는 사람’, ‘동지 표현(210)

모든 일은 조선인, 일본인 포주 했다는 점을 반복 강조하기 위해 동지라는 표현도 거침없이 것으로 보인다’(210)

`아주 당연`하다고 말하려면 국민인식이 되어 있어야, 그 작업을 하지 않은 채 이들에게는  `당연`했다고 강조하는 모순.

계속해서 `의도`를 근거없이 강조. 식민지근대화론자나 엄마부대봉사단 사진(210)을 같이 놓아 보수파로 몰아 비판을 부르려 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비판.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과거를 반성하면서 다시는 한국을 침략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이 과거의 츠라우마에 갇혀 배타적민족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일본을 알려고 하지않고 배척하려고만 하는 편협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같다’(213)—근거없는 단정.

애초에 일본의 지식인들이 조선에 들어올 매우양심적 태도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하는 것인지 궁금’(213)-본주제가 아닌 이야기.

식민지초기 일반인은 양심적도 아니고 살기 위해 들어 왔고,후쿠자와, 이토히로부미등 언급하며 현대 일본도 같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범주화의 오류.

일제 식민지시절의 본질을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나침략과 저항의 구도로 보지 않는다’(215)—근거없는 단정.

가해자의 시선으로 위안부문제를 해설’—근거없는 오독.

소녀상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217)—존재하지 않는 거짓말을 쓰는 폭거.

범죄자들이 자신의 기록을 남겨 놓았겠는가’(217)—일본에 대해 모르는 이들의 흔한 단정.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는 서로에게 좋은 것이다. 쓸데없이 억울하다고 증오심과 적개심만 키우면 뭐하나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이것이 박유하가 주장하는 위안부 해법’(217)—허위.

강자에게 대들어 봤자 약자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실현 가능한 것을 추구하라

—근거없는 단정. 이들은 도대체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나?

(‘일본은 1894 조선에 상륙해서 대략 5만명 이상의 농민을 학살’(220))

관계없는 이야기. 다른 폭력을 가져와 말하는 분노유발법 구사.

용서하고 싶은 욕망’(221)

용서에는 그에 맞는 의식과 절차가 필요

화해는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 행위’(222)

한일이 화해해서 군사동맹을 강화’(223)

입만 열면 한일양국이 화해해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는 박유하

근거없는 비약과 추론. 무책임한 발언들.  군사반대주의자인 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만용.

 

  1. 최진섭

반민족행위와 친일의 경계에 제국의 위안부

반민족행위로 단정, 독자의 분노 유발. 무책임한 추론으로 일관.

은밀한 속마음’(225)’은근슬쩍 다른 이유를 댄다’- 마녀사냥적 추정.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될 가능성’(226)—이미 반민족행위자로 호명.

독도공유론에 대해 일본지식인들은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고 <화해를 위해서> 아사히신문사의 오사라기지로상을 수상’(228)

식민사관에 경도된사상활동을 벌이는 식민지근대화론자친일파 지식인’(신운용,228)
—박유하는 이전의 저서에서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전쟁범죄를 진정성 있게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분노하는 것이 정의감 아닌 증오심이란 말인가’(230)—`반성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피상적 이해.

책에 깔려 있는 기본정서가반좌파민족주의’(231)

—`반좌파`로 단정하는 일로 좌파들의 분노를 유발.

군국주의, 제국주의 일본을 편드는 식으로 전개’’일본군국주의에 대해서는 관대하기 그지없다’(232)

자신과 다른 생각은 무조건 일본편으로 생각. 한국인이면  모든 사안에서 한국을 편들어야 한다는 강박.

강자의 화해를 중시’
‘근거없는 단정.

반민족행위자로 처벌
다른생각은 처벌하고자 하는 욕망. 민족주의인 것 같지만 정확히는 가부장주의적 욕망. 유순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처벌욕망.

사실이 아님에도 사실인 것처럼 표현을 하여 할머니들에게 고통’(나눔의집), 233

1차자료를 보지 않은 이가 1차자료를 본 이에 대한 오만한 단정.

1948 법이 살아 있었다면

일제식민지배 옹호행위자 처벌’(235)—처벌 욕망. 국가보안법과 동질의  인식.

‘소녀상을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추정.

철두철미 일본의 편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237)
-일본에 대한 비판 무시. 설사 일본편이라 해도 중요한 건 어떤 일에 편드는 일인지일 것.한국에 일본을 올바로 전하는 건 일본전문가의 의무.

위안부할머니를 희롱하고 폄훼하면서까지 일본정부의 입장을 대변’(237)

희롱,폄훼—정말 그렇게 하는 일본우익과 같은 취급.

자발적 친일파’(238)—명예훼손적 발언.

일본우익의 눈으로’’일본외교관의 입장에서

일본의 주장에 장단을 맞추는지 물가사의’(239)

전체적으로 논지가 부재하는 감정적 발언.

이것이 협력과 순종의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박유하의 속마음일 것이라고 추정’(240)

혹시라도 일본이 굴복할까봐 노심초사’(240)

서기석등 다른 이의 주장을 가져와  동일시.자신의 기존인식에 비추어 사고하는 지적 태만.

당신은 누구편인가?’

친구가 일본인’(241)

일본을 향한 애틋한 그의 마음’(242)

근대적 내셔널 아이덴티티의식을 내면화한 폭력적인 질문.

자발적으로 일본과 동지적 관계를 맺기로 작심했는지도 모른다’(243)

근거없는 단정.

일본인 작가의 작품 이상으로 일본정부의 이해와 역사수정주의 노선을 대변

제목자체가 일본군의 전쟁 법죄를 덮을 목적으로 고안된 같다’(243)

“제국에 동원된 위안부”라는 이중적 함의를 이해못한 결과

전략적 의도

범죄주체인 일본군이 빠져 나갈 틈을 만든다’(244)

일본군국주의 책임문제가 제국이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이름으로 흐려진다

일본의 책임을 축소

일본군의 책임을 면죄’’서양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초점을 흐린다’?

식민지지배책임을 희석화, 추상화, 축소

독해력 문제.

저자의 속뜻을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245)이라고 말하는 이유.

하지만 일본, 특히 우익이나 역사수정주의자의 입장에서 읽으면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텍스트자체가 아니라 전제를 기반으로 읽은 결과.

오카모토 인용하며위안부는 매춘부라는 주장
—일부우익이 이용한다고 해서 책임을 돌리는 집단공격. 그러나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주장의 목소리가 높아진 건 이를 전면부정하고 거짓말까지 동원해 전세계를 향해 비방했기 때문.

화해를 위해 줄타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민족보다는 제국을, 소녀상보다는 일본군을, 정대협 대신 군국주의 아베정권을, 민족단결보다는 한일화해를,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를, 약자보다는 권력화된 강자를 편애하는 것처럼 보이는 박유하 교수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는 무엇일까일본과 정신적동지 관계로 보이는 제국의 위안부저자에게 어울리는 말은 무엇일까. 그가 세상에 퍼뜨린 말을 그대로 돌려 보낸다(245) 제국의 위안부!

자발적으로 제국의 동지, 제국의 변호인이 박유하(246)

양심수, 순교자행세,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영광의 상처, 펜대라는 권력,247-248

(위안부를) ‘인격모독/ 성적희롱

제국의 가미가제’’제국의 정신적 동지

가해자의 목소리로 짜여진 모든 언어

논지 없는 욕설들.

 

  1. 양징자

성적혹사 이외의 경험도 성노예 피해의 단면’(264)—부정한 적 없음.

성노예의 뜻을 잘못 이해’(264)

국제법에서 노예개념은

..

노예제도란 소유권 생사에 부속되는 권한의 일부 또는 전부의 지배를 받은 사람의 지위 또는 상황

성노예제노예 개념에 성적인 요소가 가미된 ’(아베코키) ‘ 또는 업자가위안부의 노동능력을 아무제한도 없이 전면적으로 사용할 권한인 위안부의 노동의 과실을 아무런 상응한 보수도 없이 수탈할 권한을 행사소유권에 따르는 권한이 행사된 상태’(265)

국제법 상의 노예제 요건에 합치’(아베)

연애를 해도 노예는 노예

박은 업자의 노예라고 했음. 그러나 정신적 신체적 노예상태임을 부정하지 않았

음. 지원단체가 말하는 의미, 국민들이 이해하는 의미의 성노예개념을 비판했을 뿐.

군인은 구매자일 뿐 주인이 아님.

원래는 무보수 구금강간의 뜻. 90년대 세계 여러나라에서 일어난 내전에서 일어난 부족간 강간을 위안부와 동일시. 처음에 위안부문제를 잘못 이해한 결과.

감금되어 무상으로 성을 착취당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누가 그런 규정을 정한 것인지 전혀 설명이 없다
—90년대 유엔에서의 보편개념

보수를 받아도 노예’—박유하도 같은 의미를 기술.

업자의 노예.’ ‘노동에 상응한 보수가 아닌 이상

보수를 받은 경우도 있고 무보수였던 경우도 있다?’
—업자와의 관계일 뿐. 군표일 경우도 패전이 원인일 뿐. 오랫동안 무보수인것처럼 이미지 강화.

정대협이감금되어…’라고규정한 기록은 찾아 없다

유엔에서는 그렇게 운동.

감금요시미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것으로 파악.

외출과 폐업의 자유를 잘못 이해’-잘못 이해한 건 지원단체.

군인과 함께 갸야 외출할 있다는 것은자유로운 외출이 금지되었음 징표.그렇다면 일반인에게도 그렇게 알렸어야. 일반인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해석의 논지를 자꾸 옮겨 가는 문제.

군인도 노예?

허락이 필요한 외출이나 폐업을 사람들은 자유라고 하지 않는다’?(267)

-해석의 문제. 위안부의 자유가 없다는 것을 그렇게 이해할 사람은 얼마나 있을 까.

지원단체는 그런 외출조차 없었던 것처럼 표상.

허락은 관리차원.―주재민. 정부로서. 경찰대신.군인과 같이 행동하는 경우는 위험방지차원.

`가슴아픈 미소`압도적인 슬픔

박유하가 강조한 것이기도.

노래하는 위안부.

좋은 기억들을 문제될까 말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
박유하의 말처럼 인용하고 있지만 이 부분은 위안부 자신의 말.

(일본어판 83쪽)

`자신에게 중요하고 핵심적인 증언들을 먼저’ 말해야 한다?

핵심/중요도를 정하는 건 누구인가?-20년이상 지원자. 관념적인 운동. 당사자와 유리.

어린 김복동이 기다린 것은 지옥에서의해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안소에 갇힌 김복동은불쌍하다고 봐주는 군인 기다렸다. 이것이 위안소의 실태이자 성노예가 여자들이 빠지게 되는 함정인 것이다.

박유하가 한 이야기.

“위안소란 설사 행복이 있어도 지옥 같은 곳.”

 그러나 동시에 군인을 기다리는 위안부의 감정을 `성노예가 여자들이 빠지게 되는 함정`이라고 말하는 양징자의  발언은 비당사자의 오만.   일찌기 <화해를 위해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위안부의 연애는 진짜 연애가 아니다`라고 말한 안연선의 지적과 동질의 . 기다리는 감정, 애틋한 감정을 무시. 지원자들이 정말은 위안부를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고 있는 시선을 여실히 나타낸 발언.

 박이처음으로나눔의 방문?
근거없는 단정. 2003년에 처음 방문.

직접 들은 증언이 아니라서’ ‘전혀 다른 해석 한다?

직간접의 문제가 해석의 정당성을 답보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확신. 올바른 해석에 필요한 건 얼마나 자료를 보았는지. 다른 이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들었는지, 해석주체의 직관력,판단력등 여러 능력을 요하는 문제.

문학작품 읽듯이 증인들의 증언을 해석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270)

문학작품과 텍스트 해석에 대한 무지한 발언.

 생존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했다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당사자들이버렸다 단정지을 수는 없다

현재 일반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고 잇는지가 20년운동의 결과. 당사자들이 버리기도 했지만 주변인들이 무시/누락시킨 부분도.

할머니의 인용.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몇번이고 강조

위안부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을 당사자가 알기 때문이다

본질/핵심의 독점. 위안부할머니를 무시한 것은 누구인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만 발췌해서 외부에 알려 온 건 누구인가?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에 맞는 부분만을정성껏 모아서만든 책이 바로 제국의 위안부’(271)
지원단체에 해당되는 말.  증언집을 발간했으나 공식적발언은 취사선택.
누락된 부분에 대한 주목은 텍스트 읽기의 기본. 영화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한 부분을 읽어내는 것이 해석자/학자의 역할.  혹은 역사학자와 문학자의 차이.`사이“공백`을  읽는 것이 텍스트 해석.

정영환의 저서나 <제국의 변호인>등 비판서와 고발이야말로, 책의 반을 누락시키고 나머지 반을 왜곡전달.

제국의 위안부가 제시한 담론과 같은 시각 때문에 생존자들이 말하지 않게 이야기들도 있기는 하다’—사태는 반대. 지원자들은 이용당할 까 봐 감추려고 애썼을 뿐/ 제국의 위안부는 같은 사실을  다르게 말해 지원자들이 두려워한 이들을 설득하려 한 책.

그러나 경청이나  논의가 아니라  일본우익의  ‘매춘부비난’과 같은 것으로 취급,고발로 대응한  폭력성은 이들의 운동의 취약성과 논리부족을 드러낸 일.

책의 부제목이 <위안부문제와 식민지지배책임>임을 완전히 무시.

장기간 감금된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의존심이 깊어진다’(273)

가해자와의외상적인 유대이지 결코동지적인 관계 아니다?

의존심을 심화시키는 관계

스톡홀름 증후군과 같을 수가 없음. 처음부터 적과 동지의 관계가 아니므로. 적의 관계라고 생각한 건 식민지의 실상을 가르치지 않은 교육의  결과. 반발은 할지언정 표면적으로는 같은 공동체 구성원.반도인과 내지인으로서의.

생존자 증언을 들을 갖추어야 마음가짐

도저히 이해할 없다는 겸허함’?(275)

그런 마음가짐이 박유하에겐 없을 거라는 근거없는 단정으로 오만한 인물로 표상.

국가를 위해 함께 싸우고 잇다는 교육과 세뇌를 받으면서 수많은 남자한테 성폭력을 당하며 가해자에게 의존하고 집착하기까지 이른 피해자가 지닌 어둠’?

없다는 것을 알았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우리 지원운동은 시발점에 있었다’?

어둠의 깊이를 인식하면서 알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생존자 지원운동’(276)

생존자에게서 배우고생존자들과 함께 변화해 운동이 정대협운동’ (277)

올바른 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의 틀에 가두는 레토릭. 결코 해방시키지 않겠다는.

인간이해 부족의 결과.

이러한 한국의 지원운동에 대한 왜곡’?(277)

이들의 분노의 연원.

 

  1. 김창록

범죄에 대한 것이어서 법적책임? 국가책임?

사반세기동안 거듭 확인되어 상식

운동의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모든 것이 옳다는 근거없는 주장.

상식의 타파야말로 진보의 조건임에도 고수하겠다는 보수성.

각종 보고서등 운동의 문제는 다른 공간에서 다시 논의할 예정.

고노담화가 법적책임을 인정’?(376)하고 있다는 근거없는

단정.

일본의진정성 없는 태도’—`일본`이란 누구인가?

법적책임이 아니면 진정성이 없다는 법지상주의.

반인도적 불법행위 대상으로 아니다

청구권협정 문제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378)

1965년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애당초 논리적으로 성립될 없는 주장’?

위안부문제에 대한 고발은 필요하나 그것이 `반인도적 불법행위`였는지에 대한 재고 필요.

그럼에도 기존연구자와 운동가는 그러한 전제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음.

부분의 전체화, 예외의 일반화, 저의적인 해석과 인용, 극단적인 납삽함, 근거없는 가정에서 출발한 과도한 주장’?

‘과도’란 누가 판단?  법학자의 오만. 부분운운은 앞서의 반론 참조할 것.

`법=규율은 내가 관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

 수많은 문제점으로 가득찬 제국의 위안부’?

학술서로서의 기본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기본적인 존중도 없는 오만한 단정. 중요한 건 내용.

뒤틀린 법도그마’ (379)—한겨레 신문이 붙인 제목. 확인없이 비난하는 경솔.

조약이 강박에 의해 체결된 것이기 때문에 애당초 무효라는 한국정부의 공식입장을 오불관언
—한국정부아니라 세계정부라도 한 사람의 학자로서 의견을 말할 수 있음.

남성중심의 `한국정부`의견을 여성이 비판한 데 대한 분노.

문제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한국정부가 일본군 위안부의 권리를 소멸시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380)?

박유하가 지적한 논점을 무시하고 문제자체가 없었다는, 일방적이고 비생산적인 주장.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공식입장은 일본정부에 법적책임이 남아 있다는 ’?

헌재와 대법원이 정하면 무조건 진리?

명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은 ’?

박유하가 사용한 수많은 근거를 무시.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의 모든 주장은 업자에게로

업자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업자의 책임에 매달린다

`매달린다“강조한다“모든주장`이라고 하는 왜곡요약. 박유하의 논지는 그토록 법적책임이 중요하다면 먼저 당시에도 법적단속을 받았던 업자부터 비판하는 것이 순리라는 내용.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왜곡.

누가 업자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는가!’?

책임의 본질은 일본의 국가책임이라고 하는

업자책임을 누가 지적했나? 아무도 말하지 않다가 이제서야 이렇게 말하는 비겁함. 박유하는 업자존재를 지적했다는 이유로 전국민적 비난을 받고 있음에도.
`업자의 책임이 알파요 오메가라고 주장’했다는 왜곡!

`매달린다애써서``외치며우긴다`

박유하의 인성에 불신을 품도록 만드는 표현들. 마녀사냥 수법. 논지 부족시의 수법.

일제의 불법에는 눈감고 말단의 실행행위에 가담한 업자의 작은 불법에 매달린다’(381)’

박유하의 문제의식은 국가의 나쁜 정책은 협력자가 있을 때 기능.바로 그 때문에 지적한 것. 이들은 실제 움직인 이들이 일본인도 많다거나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거나 하면서 조선의 책임을 부정. 가부장제의 희생양임을 부정하기 위한 무의식적 태도.

책임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만 물어야 한다고 우긴다’?

국가책임을 분명히 묻고 있음에도 이렇게 말해 책을 읽지 않은 이들의 분노를 유발.

위안부문제의 본질이 일본의 국가책임임을 도무지 이해못한 , 애써 부인하려고 결과’?

문학자일 법학자가 아니다’ ‘법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381)

인문학자에 대한 사회학자의 근거없는 오만. 법에 대한 이해가  위안부의 인생이나 역사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심화시켜 준다는 보장은 없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이해에 터잡은 과도한 주장이 면책될 있는 것은 아니다

법지상주의적 발언.

역사를 법으로 판정하는 일에 대한 의구심 부재.

일본정부 스스로 보상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보상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우기니 일본정부보다 한걸음 나아간 ’(381)

`배신자`취급을 위한 전형적 레토릭.

법적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면서’(381)

하지 않은 이야기를 확인없이 가져 올 뿐 아니라 `외친다`는 식의 표현으로 부정적 인상 만들기.

성노예피해자에게무의식적인 제국주의자라는 지위를 강요?(381)

강요가 아닌 분석. 또한 일부를 지적했을 뿐.

`일제가 식민지법에 따라 일이니 문제삼을 없다고 주장

거친 엉터리 왜곡. 책 전체가 그런 표현들로 범람.

식민지배. 국가주의, 남성중심주의, 근대자본주의, 가부장제가 문제라는, 이미 많은 학자가 제시한, 그 자체로서는 타당한 주장’(381)

누가 지적했나? 박유하의 오리지날리티를 부정하려는 무리수.

줄기를 부정하다 보니 잎사귀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자신이 중요시하는 것만 `줄기`라고 생각하는 오만.
문제 해법의 독점.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박유하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2016. 6. 17 (1092호) 37쪽~39쪽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세종대 교수) X 나카지마 다케시 (도쿄공업대학 교수, 본지 편집위원)

서발턴의 목소리는 전달되었나?

“이 책은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 나카지마다케시

“’국가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 박유하

한국의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저술한 <제국의 위안부>가 한일 학자들 사이에서 장기적인 논쟁을 부르고 있다. 전 ‘위안부’ 9명에 의한 명예훼손 형사 고소로 작년 11월에 박교수는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이에 미국과 일본의 학자들 54명이 항의성명을 냈다. 한편, 성명에 대한 반론도 일어났다. 성명에 참여한 나카지마 다케시본지편집위원의 요청으로 올해 2월 일본을 방문한 박교수와 대담을 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싸고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카지마: 저는 <화해를 위해서>의 일본어판이 2006년에 나왔을 때, 선생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어판이 나왔을 때 곧바로 읽어 봤습니다.

이 책의 중요한 틀의 배경에는 서발턴 연구가 제기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서발턴연구란 1980년대에 인도를 중심으로 나온 문제인데,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주체성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의 다원적인 주체성을 다루면서,  그녀들을 여러 고통스러운 정황 속으로 내몬 제국의 폭력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박: 저도 바로 그 문제를 생각했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표현도 비판을 받는데, ‘제국에 동원되었다’라는 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협력을 강요당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국의 일원으로서의 협력도 말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중심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런 질문을 만드는 것은, 기존에 존재해온 개념으로만 이해하려 하는  사고입니다. ‘위안부’라는 다면적인 주체를 한가지 모습으로 규정하는 일을 유보하고 애매한 상태로 놔 두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일로 느끼는 것은 그러한 사고때문이 아닐까요?

‘애국’은 과잉 적응의 결과

나카지마: 박유하선생이  쓰신 중요한 문제중 하나는 ‘위안부’를 알선한 조선인 업자 문제입니다. 그들은 여성을 데려가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생활이 있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의 뜻에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편, 일부 ‘위안부’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리면서도 제국 육군을 지탱하고 있다는 긍지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과잉 적응입니다. 일본의 우파 쪽 사람들이 말하는, ‘거 봐라. 잘 지내고 있지 않았는가’라는 식의 주장과는 정반대 이야기지요. 그런데 잘못 이해되어 우파논의와 같은 레벨로 취급 받고 말았습니다.

저는 인류학을 공부한 후 역사를 연구했습니다만, 우파와 좌파의 담론 사이에서 모두가 잘라내버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나카무라야의 보오스>를 쓰게 된 커다란 계기입니다. 보오스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일본의 군사력을 사용하여 아시아, 인도를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우파, 좌파 각개의 역사이야기만으로는 파악해 내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똑같은 문제가 한국에서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들의 평가에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광수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저 일본에 아부하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 매우 엄중한 비판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30년대에 들어와서 바뀌었습니다.  ‘일군만민’ 등의 일본의 국체론을 전용해서  “황국신민은 천황폐하 아래에서 평등하다. ‘내선일체’라고 할 거면 평등하게 대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반격을 하기 위해서 일본의 국체를 (자기 방식으로) 전용해 나갑니다. 이런 식의 주체성을 주의 깊게 읽어내는 작업이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동시에,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 한국에서 2013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관리인 남성은 ‘황국신민’이라고 할 만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책 후반에 나오는 1944년 설날일기에는 ‘천황의 위광을 온 천하에 떨쳐야 한다’,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했다’(321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는 1905년생이니 정확히 일본에 의한 병합시대를 산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내면에 ‘애국’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마음이 생겨난 정황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총력전 체제 이후에는 위안부도 그런 틀 안에서 동원되었다는 것을 제 책에서는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우파의 사고나 논의가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도 썼습니다.

우파에 대한 서포트작업이 아니다.

나카지마: ‘위안부’가 된 여성들과 병사의 이른바 의사(擬似)가족화라는 문제를 우파 사람들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석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상황이 보여주는 슬픔만큼 가혹한 일은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쓰여 있는 것은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일본인 병사가 ‘위안부’에게 의사가족이 되기를 요구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전선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습니다.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상대가 ‘위안부’였습니다. ‘위안부’들은 그 슬픔과 고통을 받아주려고 합니다. 일부 병사는 ‘위안부’처럼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징병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의 행위는 ‘제국’에 의해 구성된 가해구조 바깥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박: 시기와 공간에 따라 다른 체험을 했으니,  한 사람의 ‘위안부’ 안에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는 사실, 같은 시기와 공간 안에 있었어도 연령이나 일본어 능력 등에 따라 경험이나 감정이 달랐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 속에서 제가 쓰고 싶었던 것은 ‘국가 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입니다. 진심에서건 표면적에서건, 인간은 국가 이야기에 자신을 아이덴티파이(동일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바람직한) ‘이야기’와 맞지 않는 체험이나 감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표면화됐을 때, 국가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은폐하거나 반대로 징벌하거나 합니다. 그런 일에 젠더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나카지마: 이를 두고 일본의 우파를 서포트하는 논의라고 말하거나, 일본에 대한 면죄론이라고 인식해 버리는 것은 정말로 말이 안 됩니다. 일본의 특공대에서 죽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는 우파가 일원화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와 부합하지 않는 특공대원은 많이 있습니다. 너무 싫어서 도망친 사람 등,,여러 주체성이 있지요. 특공대를 하나의 이야기로 환원하는 것은 주체의 다양성이나 복잡성을 말살시키는 일입니다. 똑같은 방식의 ‘이야기의 폭력’을 좌파가 행해서는 안 됩니다.

박: ‘위안부’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온 사람은 소수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위안부’ 문제에 강하게 공감하면서 국민을 개입시켜 논의가 두 쪽으로 갈려 있습니다. 이 분열은 한일 문제처럼 보이지만 저는 좌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사태를 곧잘 정치적 입장에 입각해서 바라보기 쉬운데, 그런 입장과 상관없이 사태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설 공간은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고, 제3의 공간을 넓히는 시도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제국’이라는 말에 담은 것은 민족뿐만 아니라 성이나 계급의 지배, 배제/차별의 문제입니다. 즉,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 일본이라는 국가 주체의 문제로 여겨져 정치 문제로만 이해되어 왔지만, ‘이동’을 유발하는 경제 문제가 주목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경제적 욕망을 내면화하는 형태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 갔습니다만, 그런 문제에의 주목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착취하는 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거기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기반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업자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고, 그 사실도 썼습니다.

이분법 바깥의 사태를 그려냈다

나카지마: 일본인 병사와 협조한 ‘위안부’라는 것은 지원단체가 그리는 피해자상과는 다릅니다. 한편으로 일본의 우파가 그려내는 ‘매춘부’라는 상과도 다릅니다. 그런 식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를 드러내는 일로  ‘제국’의 폭력구조를 밝혀내려고 한 것이 박유하선생의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저를 비난한 사람은 한국의 경우 남성학자가 많았습니다. 일본을 면죄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 무엇을 면죄하고 억압하며 은폐하고 있는지 거꾸로 묻고 싶었습니다.

일본인, 일본 국가에 의해 조선 민족이 지배 당하고, 피해자가 되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보는 동안) 민족 레벨 이외의 구조적 문제가 사라져 버렸지요.

나카지마: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논의되었던 서발턴의 목소리의 대변/ 표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피박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해 온 것은 특정 서발턴을 만들어 대변/표상하는 일의 권력성과 폭력성입니다.

박: 맞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아니면서’라든지 ‘운동가도 아니면서’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화해를 말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뿌리 깊은, 당사자를 일원화하는 사고가 또다른 당사자를 배제하는 권력으로서 기능해 왔습니다. 동시에 ‘대변자(후예)의 당사자성’이 빠진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돌아 보지 않아서 생긴 권력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카지마: 저도 작년에 박유하선생님의 불구속 기소에 항의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후,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저는 사상사와 쇼와(昭和)사도 연구하고 있고 넓은 의미에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조선어 문헌을 읽을 수 있을 것, ‘위안부’ 연구자일 것 등이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전문가’의 요건이 된다면 대부분의 논자들은 의논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말의 억압 때문에 문제를 다각적으로 논할 수 없게 되지요.

지워져 버린 ‘주체성’

나카지마: ‘나눔의 집’의 방침에 거리감을 느끼던 전 ‘위안부’분의 존재가 책에 쓰여 있습니다. 특정 ‘위안부’상이 확립되어 버리면 그 자신의 생각은 그 공간에서는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나눔의 집에 거주하면서 일본고발에 참여하는존재도 중요합니다. 어느 쪽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면이 있으면서도 정치에 휩쓸려 온 전 ‘위안부’의 전체상을 보지 않으면 문제는 한 발짝도 진전되지 않을 것입니다.

박: 그 분은  운동의 방식과 ‘위안부’를 둘러싼 이해에 관해 (지원단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가족이 없기도 해서 자주 저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일본을 비판하지 않으면 주변으로부터 ‘일본을 좋아하는 거지?’라든가, ‘가짜 위안부’라고 비판 받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먼저 이쪽이 ‘용서하겠다’고 하면 일본이 그에 맞는 대응을 하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목소리를 저는 고소 당하기 직전, 14년 4월 한국에서 개최했던심포지엄을 통해 알렸습니다. 지원 단체를 거치지 않고 보상금을 직접 받고 싶다는 또다른 목소리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반 후에 고소를 당했습니다.

나카지마: 그런 식의 차이나 (어느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규정성이 중요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에서는 그런 부분이 완전히 도외시 되어 버립니다. 박유하선생님은 여기에 메스를 가해 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서발턴 연구의 성과에 바탕한 중요한 문제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2월 5일, 오사카 시내에서

일본어원문(日本語): 対談原文 – 『週刊金曜日』2016年 6月 17日号より

<기자간담회 요약> – 2016년 7월 11일

기자간담회 자료 전문 다운로드

[요약]

1) “일본군/국가의 책임을 극소화했다”

국가책임을 말했고 그에 따른 사죄보상을 요구했음
당사자 포함한 협의체 제안
“대화로써 일본과 마주해야 한다”(제국,311)
“정부는 일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제국,312)

 

2) “일본어판과 다르다”

일본어판은 단순번역이 아니라 일본인독자를 향해 다시 쓴 책. 다시 쓴 책이 표현이 다른 건 당연.

 

3)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시했다”

차이/차별 구조와 고통 지적

 

4) 업자가 주범이라 했다

“법적책임’에 고집한다면 업자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했을 뿐

 

5) 위안부의증언을 찬탈했다

위위안부의 증언은 다양. 한 사람의 체험과 생각이 균일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 기존 연구자와 지원단체가 대변하지 않았던 부분을 보여 주었을 뿐.

 

6) “부정론자들의 담론을 기본적인 수준에서 계승”

근거없는 단정. 그랬다면 일본진보지식인이나 매체가 평가할 수가 없음

 

7) 센다 책에 조선인/애국은 없다

일본인의 증언임을 처음부터 지적. 애국을 읽은 건 박유하의 해석.

 

8) ”동족”이란 위안부 아닌  일본군의 목소리다”

일본군의 목소리임은 처음부터 지적.

 

9) “위안부의 평균나이가 25세”라고 했다”

전체평균이 25세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 중 하나로 제시

 

10) “위안부문제를 한국정부가 포기했다고 했다”

박유하가 지적한 건 위안부문제가 아니라 개인청구권

 

11) “조선인을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식민지의 거짓말”의 방점은  식민지. 해당부분은 제대로 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들의 슬픔을 강조한 부분(일본판에만 있는 이유) – 초보적 오독

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의 오류

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의 거짓말                                          (2016/7/11기자간담회자료중발췌)
(이탤릭체는 박유하의 주장이나 책 인용)

1.<정영환저서를 둘러싼 언론보도> (2016/6/30-7/7)

정영환의 주장과 출판사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

우경화로 인해 일본인들은 식민지지배에 대해 사과는 할 만치 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딱 부합하는 책이 제국의 위안부. 더욱이 한국인 저자가 썼으니 일본언론이 대대적으로 다루고 예찬을 했죠. 여기에 피해자에 대한 배려는 없었습니다.”(정영환 인터뷰. 한겨레)

“<제국>은 극우 <산케이신문>이나 우파 <요미우리신문> 말할 것도 없고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 같은 리버럴 매체들도 격찬하는 가운데 1만부 이상 팔려나갔다”(한겨레,)

“한미일 주류이익에 부합”(한겨레)
“위안부의 평균나이가 25세”라고 했다”

“피징용자 미수금을 위안부문제로 오인” (116ㅡ125, 한겨레,)

한국어판에 없는 주장/인용.뉴앙스를 달리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한국인의 비판을 피하려는 차원” (연합,한국)
“1965년 국교정상화 당시 일본이 위안부배상을 추진했고 한국이 거부했다는 박교수의 주장이 허구라는 사실도 사료검증으로 밝혔다”(한국.7/1)

“일본어판은 양국관계가 정체된 책임이 전후 일본의 보상과 사죄를 기억하지 못하는 한국측에 있다고 적는 등 일본인의 입맛에 맞도록 가필”(연합,7/1)

“동족이나 애국을 운운한 것은 위안부의 말이 아니라 일본군의 말”(국민)
“박교수가 들려주고자 했다는 위안부의 다른 목소리란 일본군들이 말하는 위안부이야기이고 일본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위안부 이야기

“법적책임은 없다는 견해는 일본우익의 입장과 맥이 닿는다”

“사료오독/취사선택/잘못된 이해”(연합,7/1)

우익만이 아니라 좌파와 자유주의자에게도 환영” (연합,7.1)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도 비판이 없는 것은 사회전반으로 퍼진 은근한 우경화 영향”(연합,7.1)

“환영받는이유는 전쟁과 식민지배책임을 부정하려는 일본내역사수정주의의 흐름에 들어맞기 때문””역사수정주의에 리버럴까지 동조”” ‘리버럴이 보수파에 합류” (연합,7/3)

일본극우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

“일본지식인사회의 “지적퇴락” (연합,한겨레)

(한일합의에는)” 피해자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

“센다가코의 책에는 동지의식이 없다” (국민.7/1))

 

2.<제국의 위안부>는 어떤 책인가

피해자면서 협력자가 되도록 만든 제국주의와 동족을 가해자로 만든 식민통치 비판.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한 책.
한국/일본/정부/민간/부정자등 “다수에게 말 걸기- 다수의 청자-다이얼로그 지향
당시를 산 이들에 대해 단정/규탄하기 전에 생각하기- 역사인식에서는 동시대인물들의 정황및/심중에 대한 상상력 필요
“변명적기술”(36)이라는 정의 생각은 이 책의 형식에 대한 몰이해. 단죄적/법정주의적/징벌적 사고

—역사인식이란 대화. 자신을 알리고 이해받고 상대를 이해하는 일

“반역사성”이라는 단어는 정해진 (국정/민정)역사관을 지향하는 사고를 증명.
“피해자가 부재하는 화해”라는 인식은 피해자상을 단일화한 것.
<제국의 위안부>는 결과적으로 당사자의 일부를 배제해 온 운동과 연구에 대한 이의제기.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당사자–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적대의식을 키워가는 차세대를 위해

*식민지체험의 간접트라우마를 갖게 된 후예, 또 다른 당사자인 우리자신,한국인들을 위해

 

 

 

  1. 정영환 저서의 근본적 문제


-근거없는 단정과 비틀어 읽기로 독자들의 분노/불신유발

1)도덕적 의구심을 유발하는 레토릭
“(쟁점을) 살짝 바꾸기 때문에” (37)
“사실에 관한 논의를 이미지문제로 살짝 바꾼다”(57)
“애매하게””기묘하게”
“논점을 살짝 바꿔 버리기까지 한다”(57)
“속임수”(58) “애매하게 처리’(59)”레토릭”
“성노예제의 개념을 성노예의 이미지의 문제로 살짝 바꾸는 것”(65)”불성실한 수법”(65)
”바꿔치기”

 

2)근거없는 추측과 비틀어 읽기로 독자를 오독으로 유인
“위안부연행에 일본군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듯이 읽히는 부분이 있다”(60)<“두가지 기술은 국가의 책임에 대해 모순되는 지적을 한 것인데 아마도 박유하의 실제주장은 후자일 것이다
”’위안부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면 모집자체를 중단해야 했을 것’ 이라는 기술은 공급이 따라갈 정도라면 군위안소제도에 문제는 없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56)

올바르게 읽기 위해 “논지의 재구성”을 해야 한다거나 ”터무니없는 부담”을 지우고 있다는 비판은 터무니없는 왜곡 혹은 선입견(서경식./윤건차등 재일교포지식인의 <화해를 위해서>비판의 문제의식 답습)에 의한 곡해

 

3)우경화 콤플렉스 / 냉전적사고-
(하타이쿠히코의) “일본군무죄론과 기본적으로는 동일”(66)

,“부정론자들의 담론을 기본적인 수준에서 계승”
“박유하가 전개한 논리는 고바야시 요시노리나 산케이신문으로 대표되는 명확한 역사수정주의 뿐 만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정면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1990년대이래로 일본의 지식인들이 생산해 온 담론에 적지 않게 의거”(40)

 

<우익>에 연결시키는 일로 독자의 적개심 유발 .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오른쪽에 세워 비난.
결과적으로 ”양심적” 일본지식인마저 의심하도록 만드는 선동성.

역사에 대한 재고찰을 “역사수정주의”로 간주 (박노자.한겨레.2016/7/3) 혹은 우파로 모는 담론의 빈곤.
폭력의 사고/지식인의 대중화?/ 학문이라는 이름의 테러

 

4) 기존연구/사고에 무조건 대입시켜 왜소화.

학제적 연구에 대한 몰이해. 제국의 위안부는 메타역사서.

  1. 치명적 오류 혹은 거짓말
  • ”식민지지배책임에 관한 인식에 다대한 혼란 초래”(39)
    ”전후사의 긍정을 바라는 내셔널리즘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이러한 주장 때문에 일본우파뿐 아니라 이른바 ”리버럴”에게도 높은 평가”“<제국의 위안부사태란, “일본군무죄론에 의한 대일본긍정소망과 전후일본의 긍정소망이라는 두개의 역사수정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욕망이 낳은산물” (167,) “제국의 위안부는 피해자들의 소리를 마주하는 것을 거부하는 구실을 일본사회에 부여”(174) “책임부정론자 담론을 계승”(정,40)”식민지주의 이데올로기에 친화적”(141,이상 정영환)일본지식인들의 평가를 모두 거짓이나 포즈로 생각하는 편견과 왜곡.일본에서의 평가를 거꾸로,혹은 자의적으로 선택해 전달, 박유하와 현대 일본지식인에 대한 불신 야기.

 이하는 박유하의 저작들에 대한 평가. 산케이나 요미우리의 평가는 없었음.

박유하의 저작은 학문적인 수준도 높고, 시사문제 해설서로서도 균형이 잡혀있다. 그런데다 읽기 쉬운 문체로 쓰인 보기 힘든 우수작이다. 한국과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오해,무지, 혹은 감정적 대립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역사문헌이나 여론조사등의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책이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는 것은 양국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기뻐해야 할 일일 뿐 아니라 세계각지에서의 국가 혹은  민족간 화해를 가져오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이리에 아키라, 하바드 대 명예교수,2007. 오사라기지로 논단상 평)

위안부문제에 관한 전면적, 실증적, 동시에 윤리적인 분석이다”” 이책만큼 이 문제의 모든 측면을 이성적으로 검토한 책은 없다, 역사적인 위안부발생구조와 그 실태해명부터 위안부문제의 발생, 이에 대한 한국과 일본에서의 정치과정 각기의 기억의 생산과 재생산의 분석, 나아가 앞으로의 문제해결을 향한 제언까지”” 경청할 가치가 있는 문장으로 적혀져 있어”” 성노예냐 매춘부냐 하는 인식에서도 그리고 강제성 문제에서도 안이한 단순화를 허용하지 않는 다면적인 측면을 밝히고 있다. 여성을 수단화 물건화 도구화하는 구조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표한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축이다.”(다나카아키히코, 도쿄대 명예교수,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심사평)

“위안부와 군대라는 관계로부터가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틀 안에서 인간 정신이 어떤 양상이었는지의 문제를 파헤친 작품” (가마타사토시, 저널리스트,이시바시탄잔 기념 와세다저널리즘 대상 평 )

단순한 전시하의 인권침해로 보는 견해보다도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로까지 시야를 넓혀 문제를 파악하는 날카로움이 있다. 그것은 전시하의 인권침해적 범죄라는 이해보다도 엄중한 물음을 품고 있다. 박유하는 과거를 미화하고 긍정하려고 하는 역사수정주의자의 시점과는 정반대의 시선을 위안부피해자에게 쏟고 있는 것이다”(나카자와 게이)

이 책의 평가해야 할 점은 제국, 즉 식민지지배의 죄를 전면에 끌어낸 데있다”(우에노)“거시적인 규정성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의 상황을 꼼꼼하게 봐 가는 것이 식민지지배를 생각하는 시각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지배의 폭력성의 진지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는 잇고 있다고 생각한다”(아라라기 신조 조치대 교수)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선입견을 빼고 전체를 읽어 보기만 한다면 생길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일본의 면죄에 이용하는 것이라는 일부사람의 독해는 명백히 오독이며 이 책을 악용하는 것””이러한 측면의 강조는 식민지지배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길을 열어 줄지언정,일본의 면죄를 끌어내거나 하는 일은 없다”(니시마사히코 리츠메이칸 대 교수)”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가노 미키요 게이와대학 교수)””이러한 구조 야말로 식민지지배와 전쟁의 커다란 죄악,그리고 여성의 비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박유하씨가 동지적관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해석”(와카미야 요시후미 주필)”

이제 물음은 일본을 향하고 있다””일찍이 구미에 추종했고 강자로서 아시아를 지배한 일본은, 타자를지배하는 서양기원의 사상을 넘어서서 국제사회를 평화공존으로 가져갈 가치관을 보여 줄 수 있을것인가? 한국의 이해를 얻으며 도전하고 싶다” (야마다다카오 마이니치신문 칼럼니스트)

 

대부분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으로 읽고 있고 그러한 문제제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
오독하는 자는 누구인가?

 

2)”일본군무죄론”” 업자주범론” / 일본군과 국가의 책임을 극소화했다

업자가 주범이다 (53)

“일본군무죄론의 여섯가지 주장과 정확히 일치”(49) “일본군책임부정” (51)“군의 성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63)“위안부가 국가의 노예였다는 것을 사실상 부정한다”(54)“위안부의 모집을 지시한 것”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57)일본군의 책임을 “발상.수요.묵인 한정적 책임만 인정” “일본군무죄론과 기본적으로는 동일”(66)

 

<제국의 위안부>에 기술된 일본/군/부정자비판 (142-164)을 없는 것처럼 왜곡.
“법적책임’에 고집하려면 업자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했을 뿐
업자에는 일본인도 존재. 여성들을 돈벌이 도구로 삼아 착취한,”계급”책임을 물으려 한 시도

이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발췌.

 

일본군이 장기간 동안 전쟁이라는 ‘비일상’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병사 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라는 존재를 발상하고 모집한 것은 사 실이다. 그리고 군에서의 그런 수요증가가 사기나 유괴까지 횡행하게 된 이 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타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임으로써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은 이 문 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 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군의 수요를 자신들의 돈벌이에 이용하고 자국의 여성들을 지배자의 요구에 호응해 머나먼 타국으로 데려다놓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에 이런 일을 단속하고 처벌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행위야말로 ‘범죄’이고 따라서 그들에게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를 ‘범죄행위’로 규탄하는 이들의 표현에 따른다면, 업자들이야말로 ‘범죄’를 저지른 자들로서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20만 명이 아니라 2만 명, 아니 2000명 이라 해도,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을 직접 ‘동원’한 것이 업자들이었다고 해도, 또 그들이 ‘가라유키상’처럼 유괴되거나 자발적으로 팔려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50쪽)

업자들이 과도한 착취를 하지 않도록 관리했다는 것도, 군이 위안소의 ‘올바른 경영’을 지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위안소에서 폭행 등이 없도록 노력했다는 것이 위안소 설치와 이용의 책임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72쪽)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위안부’를 필요시하고 위안부의 효과적인 공급을 위해 ‘관리’를 했던 건 분명하다. 그런 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한 ‘남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 ‘죄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136쪽)

물론 보수를 받았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설령 보수를 받았더라도 그 보수는 그녀들의 정신적•신체적 고통에 대한 대가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위안부’들이 ‘비싼 요금’을 받았다고 강조하는 이들도 있지만, ‘위안’이었건 ‘매춘’이었건 보수가 혹 높은 경우가 있었다면 그건 그만큼 그일이 모두가 꺼리는 차별적이면서 가혹한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싼 요금’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 장소가 목숨을 저당잡혀 있던 전선이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대부분의 위안부들은 자신들의 몸값을 저당잡혀 있는 신세였다. 또 그 착취의 주체가 설령 포주들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착취구조를 묵인하고 허용한(간혹 그 구조를 바로잡으려 한 군인도 있었지만 그건 예외적인 일로 보아야 한다) 군의 상부에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145-146쪽)

물론 이 소설 속의 장면은 위안소의 규율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니 예외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일 뿐 ‘조선인 위안부’에게 원래 요구된 역할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벌어진 ‘개인적’인 일 역시, 군인들의 대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공적’인 사회인식과 구조가 만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식과 구조를 만든 일본의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148쪽)

하지만 위안부를 모집한 중심 주체가 민간인이라 해도, 또 모집하는 데에 사기나 납치 등의 수법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병사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상부 역시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이 불법적인 행위를 막으려 했다 해도 불법적인 수단이 자행되는 시스템 자체를 방기했다면 시스템을 유지시킨 책임이 군에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군이 위안부 모집에서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분명히 군이 ‘직접’ 모집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그것은 밀수품을 막으려는 국가의 태도에 비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군은 이때 소비자가 밀수품을 사지 않도록 밀수품을 막으려 했던 것이지만 정식 관세를 내면 통과시키는 식으로 수입 자체는 허가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은 상품의 품질에 대해 감시하고 불만을 제기할 수는 있어도 직접 관리와 개선에 나설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군이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는 사실도, 일본군이 상품과 그것이 유통되는 시스템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안부’가 임신했을 때 낙태시키는 일을 맡았던 한 군의가 ‘나는 검사관이라는 무기〓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http://www.ne.jp/asahi/tyuukiren/web-site/backnumber/05/yuasa_ianhu.htm). 그런 식의 일방적 권력의 존재는 군이 시스템을 ‘관리’한 관리자라는 사실, 다시 말해 ‘관여’했을 뿐 아니라 주체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군이 모집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군의 관여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군이 물리적으로 행사한 ‘강제연행’을 글자 그대로 ‘강제’ ‘연행’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강제연행’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행해진 경우는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사기든 납치든 업자와 포주들이 ‘강제’적으로 데려가는 일이 빈번했던 위안소를 유지한다는 것은 계속적인 수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공범자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살인교사와 비슷한 구조일 수밖에 없고, 그런 시스템을 필요로 한 것이 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군인에 의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 ‘강제’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식민지에서는 오히려 당연하다. 전쟁터가 아닌 식민지는 아직은 ‘일상’이 유지된 공간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법’이 작동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징병이든 징용이든 구성원의 의지에 반한 ‘강제적’ 모집 행위조차 ‘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것을 보여준다. 식민지에서 무차별적 ‘강제연행’은 없었던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행위를 ‘유법有法’화해도 문제가되지 않는 비일상적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뿐이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온건했고 좋은 통치였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온건하고 좋은 통치란 어디까지나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 이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의 통치가 총체적인 ‘온건통치’였던 것은 일본 국가에 대한 복종이 전제된 공간에서의 일이었다. 정신대 모집은 ‘법’을 적용시켜 합법화하면서 위안부 모집을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식민지에서의 ‘온건통치’의 임계선이 무너지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 앞에 본 소설과 같은 일이 일어나거나 인도네시아나 중국 등지에서의 납치(수용)강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전쟁터’이자 ‘국가’ 바깥의 공간이어서 더 이상 ‘일상’을 유지하는 ‘법’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모집에서 업자와 포주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바로 그래서라고 이해해야 한다. ‘온건통치’의 범주에 ‘자발적으로’ 편입된 이들이 ‘개인적’으로 불법을 자행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온건통치를 유지하면서) 식민지인들에게 불법행위를 전담시켜 그들을 동족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식민지에 살았던 일본인들은 조선을 지배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건, ‘지배’라는 것이 구조적으로 언제나 저항과 반발을 내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체제 ‘사상범’을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유지법’이라는 ‘법’을 작동시키는 일로 ‘법’망 안에서 가능했지만, 식민지인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하는 것은 ‘온건통치’를 표방하는 한 불가능하다. 그러니,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군의 관여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제21군 사령부가 위안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여, 내무성에 400명, 대만 총독부에 300명의 여성을 모집해주기를 요청한 경위를 나타내는 자료’(요시미 요시아키, 2007. 5.) 외에도 위안부의 증언과 군인이 남긴 다수의 기록에서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군의 관여는 명백히 드러난다. 모든 위안소가 ‘군이 설치한, 군인•군속 전용 제도’(위의 글)라고 할 수는 없는 경우도 있지만, 군이 위안소를 필요로 하고 이용한 이상 위안소에 대한 군의 관여를 부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군이 주체가 되는 ‘강제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해야 한다. ‘위안부’ 이동에 군이 관여했다는 점을 두고 전쟁터이기 때문에 군이 보호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메뚜기」는 그 이동이 단순한 ‘보호’가 아니었다는 것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일본 본토와 한반도 사이의 이동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서 국가의 관리를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여권과 유사한 국가의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일본인에 대해서는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출국을 ‘21세 이상의 경험자’로 정해놓았지만, 조선이나 대만의 경우에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요시미 요시아키, 2009년 여름). 이것은, 이미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식민지 여성들에 대해서는 국가의 보호의식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51-154쪽)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것은, 조선이 받았던 고통에 대해, 당한 당신한테 잘못이 있다고 가해자가 말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책임’은 어디까지나 ‘자기 책임’의 주체가 생각해야 할 문제다. 조선은 멸망 직전’이었는데 일본이 구해준 것이라며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은 강한 자의 논리일 뿐이다.

설사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갈등 해소는 자신의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데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는 이들은 식민지배를 하게 된 ‘이유’만 강조하고 싶어하지만, 상대방의 문제만을 지적하는 한 대화는 결국 닫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화에는 상대방의 긍지를 생각하는 상상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죄와 보상은, 이제까지 부정해왔던 이들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도 필요하다.

(163쪽)

‘조선인 위안부’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강간이나 가혹한 노동의 원인은 식민지배와 국가와 남성중심주의와 근대자본주의가 빚은 가난과 차별에 있다. 나아가 그들을 그런 장소로 내몬 가부장제에 있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만들고 이용한 것은 ‘일본군’이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그런 시스템을 묵인한 국가에 있다.

(191쪽)

 

3) 피해자나 지원단체가 양보하라고 했다

당사자 포함한 협의체 제안

 

대화로써 일본과 마주해야 한다”(제국의 위안부,311)
“정부는 일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제국의 위안부,312)

 

4)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이 다르다

일본어판은 한국어판의 단순번역이 아니라 일본인독자를 향해 다시 쓴 책. 취지/표현이 “기본적으로”다르지 않다 했을 뿐, 다시 쓴 책에서 표현이 달라지는 건 당연.

장정일’ 박유하죽이기-이명원/정영환의 오독” 참조

http://www.huffingtonpost.kr/jeongil-jang-/story_b_9899800.html
5)일본인위안부와 조선인위안부를 동일시했다”

 
표면적인 “동족”의 틀 아래 존재한 차이/차별 구조, 고통 지적

물론 이런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기억일 수밖에 없다. 설사 보살핌을 받고 사랑하고 마음을 허한 존재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부들에게 위안소란 벗어나고 싶은 곳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녀들에게는 소중했을 기억의 흔적들을 그녀들 자신이 “다 내삐렀”다는 점이다. “그거 놔두면 문제될까봐”라는 말은, 그런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 그녀들 자신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 이후 내내 그렇게 ‘기억’을 소거시키며 살아왔다.

(67쪽)

물론 거듭 말하지만, 사랑과 평화와 동지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소’가 지옥 같은 체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명예와 칭송이 따른다 해도 전쟁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지옥을 살아내는 힘이 되었을 연민과 공감, 그리고 분노보다 운명으로 돌리는 자세 역시 기억되어야 한다.

(76쪽)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일본인•조선인•대만인 ‘위안부’의 경우 ‘노예’적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군인과 ‘동지’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같은 ‘제국 일본’의 여성으로서 군인을 ‘위안’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부여된 공적인 역할이었다. 그들의 성의 제공은 기본적으로는 일본 제국에 대한 ‘애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남성과 국가의 여성 착취를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했지만, ‘일본’ 군인만을 위안부의 가해자로 특수화하는 일은 그런 부분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페미니즘 정신을 바탕에 둔 운동이었음에도 ‘일본’ 비판에 더 무게가 실리면서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남성과 국가와 제국’의 문제로 다루는 일을 어렵게 하고 말았다. 다른 나라 역시 이 문제에서 무죄일 수 없음에도 그들의 문제를 보지 못하도록 만든 셈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중국이나 네덜란드 등 전쟁 상대였던 ‘적국의 여성’과 본국•식민지•점령지의 여성들이 처했던 위치는 다르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해주거나 ‘간호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박유하, 2009; 하야시 히로후미, 2010).

한 군의는 “내가 ‘위안부’를 처음으로 본 것은 거류민 여성에게 위생/응급처치 교육을 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든지, ‘너는 천황 폐하를 일본인과 똑같이 섬길 수 있어서 기쁘지?’ 하는 식으로 깔보았습니다”라고 고백한다(http://www.ne.jp/asahi/tyuukiren/web-site/backnumber/05/yuasa_ianhu.htm). 일본의 지원운동 방식은 이런 상황과 심리가 보여주는 ‘식민지인의 이용과 차별’의 교묘한 구조 역시 보지 못하도록 했다. ‘위안부’가 ‘간호사’를 겸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두고 그저 “‘간호사’로 만들어 당국이 연합국에게 위안부의 존재를 은폐하려”(『교도통신』, 2008. 7. 31.) 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정식 군속으로 임명해서 위안소의 존재도 감추는 동시에 함께 돌아갈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같은 기사)이었다고 해석하는 것 역시, 위안부의 ‘동지’성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그녀들은 전시에 이미 간호부로 일하고 있었다.

‘성노예’라는 단어는 ‘조선인 위안부’가 처한 그런 복잡한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한다. 동지’적 관계를 직시하는 것이 꼭 ‘일본군’을 면책하는 일은 아닌데도 이 부분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은, 일본의 지원자들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보지 못했거나 한국의 정대협과 마찬가지로 ‘운동’에 불리한 사실로만 판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표면상으로는 ‘동지’적 관계였어도,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별감정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추어진 차별감정을 보기 위해서도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의 다면성은 오히려 직시되어야 했다. 명확하게 보는 일만이 책임을 져야 할 책임 주체와 피해자의 관계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동지’적 관계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을 고집했던 이들을 무조건 규탄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응답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했다. 위안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내면에 존재했던 차별의식을 지적하기 위해서도, ‘동지적 관계’는 우선 인정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 지원자 측의 운동가나 연구자들 역시 그런 사실은 눈감았거나 보지 못했고, 조선인 위안부에게서 그저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만을 보려 했다. 그것은, 명확한 ‘굴종’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자발적’인 협력을 강요당한 ‘식민지’의 복잡한 구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국가와 제국’ 비판이 앞선 나머지 식민지의 미묘한 심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동지적’ 상황을 그저 예외적인 것으로서 배제해버린 일은 ‘동지적’ 측면에만 혹은 ‘매춘부’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려 했던 이들의 반발을 불렀고, 대립을 심화시켰다. 말하자면 위안부의 증언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은 일, 다시 말해 위안부의 ‘피해’에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외면했던 일은 일본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다.

(137-139쪽)

 

조선인 위안부들은 이렇게 살아 있는 군인을 위안했을 뿐 아니라 죽은 군인들을 위로하는 역할도 했다. ‘피묻은 군복’을 빨아 다음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여차하면 함께 싸울 수 있는 훈련까지도 한 이들이 조선인 위안부였다. 그렇게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162쪽)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저항했으나 굴복하고 협력했던 식민지의 슬픔과 굴욕을 한 몸에 경험한 존재다.일본’이 주체가 된 전쟁에 ‘끌려’갔을 뿐 아니라 군이 가는 곳마다 ‘끌려’다녀야 했던 ‘노예’임에 분명했지만, 동시에 성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복’을 입은 댕기머리 조선인이기도 했지만, 일본옷을 입고 일본머리를 한 청초한 ‘야마토 나데시코’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처절하게 살아낸 존재였다.

(207쪽)

 

네덜란드’ 여성과 인도네시아 여성과 조선인 여성은 일본군과의 기본적 인 관계가 다르다. 일본군에게 네덜란드 여성은 ‘적의 여자’였지만, 인도네시아의 여성은 점령지의 여성이었고, 조선인 위안부는 같은 일본인 여성으로서의 동지적 관계였다. 그녀들이 입은 피해의 형태는 기본적인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그런 기본관계를 벗어난 관계도 얼마든지 있었다.

(265-267쪽)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약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었을 뿐,위안’이라는 이름의 노동이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성과 신체를 혹사당하는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여전히 ‘위안부’ 생활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84쪽)일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에게 ‘적의 여자’와는 다른 관계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조선인 위안부라도 그녀들이 놓인 정황은 다양했다.조선인 위안부’란 식민지의 가난과 성적/민족적 차별의식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숫자의 군인을 감당해야 했다는 점에서도 ‘위안부’가 ‘군인’과의 관계에서 희생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양쪽 다, 국민동원이라는 국가 시스템 속에서 함께 움직여진 장기말이었다. 그들은 둘 다 성과 생명을, 그것을 담는 신체를 ‘국가를 위해’ 바쳐야 했던 한 마리 ‘개미’들이었다. 포악한 군인이었건 온순한 군인이었건, 그들의 운명은 다르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남녀 간의 불평등, 민족적 불평등이라는 관계 속에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당신도 헤이타이(주-군인)나도 헤이따이상, 나도 이리 산 것도, 고향을 떠나서 이리 산 것도, 천황을 위하여”(『강제 3』, 107쪽)라는 노래를 했다는 증언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들은 함께 국가에 의해 고향을 멀리 떠나 타지로 ‘이동’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79쪽)

물론 역으로 강제성 속에 자발성이 있었고 성노예의 이면에 매춘부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국적에 따라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랐다.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 해결은 그 모든 상황의 차이를 보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분명한 것은 보수가 주어졌건 아니건 ‘위안부’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윤간이 국가에 의해 허용된 존재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한 의식은 여성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 대할 수 있게 만드는 차별의식이었다. 특히 ‘조선인 위안부’는 그런 인식이 명확히 드러난 경우다.

(143쪽)

병사들의 강간은 위안소라는 공공장소에서 ‘몇백 명이나 되는 줄을 서’는 일에 대한 염증이 만들고 있다. 말하자면 강간을 피하기 위해 위안소를 만들었다는 군 상부의 의도는 군대의 숫자를 생각하면 처음부터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될 수 없는 시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서의 강간 욕망은 그녀들이 ‘고작 조센삐’였기 때문에 생긴 욕망이었다. 말하자면 단순한 여성 경시뿐만 아니라 민족 경시가 그들에게 강간을 허용한 것이다. ‘저 여자들하고 한 번 하’는 데에 ‘몇 시간이고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일’로 생각한 것은 상대에게 그럴 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조선인 위안부’란 그렇게, 여성을 도구화하는 성차별뿐 아니라 조선인임을 경시하는 민족차별이 만든 존재이기도 했다. 그 점이 일본인 위안부와 다른 점이다.

(147쪽)

‘점령지의 여성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은 ‘피해를 끼’쳐도 상관없는 여성이 있다는 사고를 전제로 한다.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위안소를 타국 군인에 의한 점령지에서의 강간과 비교하면서 일본은 ‘러시아같은 야만국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야만’과 대조되는 위안소, 잘 관리되면서 지극히 ‘문명’적으로 보이는 그곳은 가난이나 그 밖의 이유로 차별해도 되는 것으로 간주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식적으로’ 용인한 장소일 뿐이다. 공창을 합법화하는 발상 자체가 인간에 의한 인간(여성)의 상품화라는 ‘야만’을 정당화하는 장치인 것이다.

(149쪽)

 

그것은 남성이고 군대이고 국가였다. 그리고 ‘일본 제국’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부’란 어디까지나 국가와 남성, 그리고 격리된 남성 집단을 만드는 전쟁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생긴 존재다. 위안부의 자발성이란, 본인이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국가와 남성과 가부장제의 차별(선별)이 만든 자발성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폭탄이 터지는 최전방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며 병사들의 욕구를 받아주어야 했다.

(159쪽)

그에 반해, 예외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인 위안부들은 대개 도회지의 좋은 시설에서 장교들을 중심으로 상대하며 상대적으로 편한 환경을 누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조선인 위안부들이 더 많이 가혹한 환경으로 가게 된 이유는, 그들이 식민지의 여성이라는 계급적이고 민족적인 이중차별의 결과로 일본 여성들보다 가난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군인들이 그녀들에게서 본 적극성이란 그런 상황이 만든 적극성이었다.

(161쪽)

 

한국의 기생집을 위안소와 똑같이 치부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위안소는 전쟁과 군인들을 위한 장소였다. 군인들이 쉽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군인’이라는 존재가 폭력에 길들여진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러 증언들은 그런 폭력 역시 차별의식이 기반에 깔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계질서에 길들여진 군인들에게 조선인 위안부란 권력을 갖지 못한 졸병이라도 권력을 시험할 수 있는 대상일 수 있었다.

(163쪽)

일본인 위안부가 아닌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다는 것은 ‘조선’에 상대적으로 가난한 여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민지의 상황은 식민지배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한다면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성차별과 계급차별 이상으로 ‘식민지배’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었고, 고노 담화는 그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응답한 담화였다. 다시 말해 ‘고노 담화’란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응답한,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의 결과로 받아들여 사죄한 담화였다. 이후 다른 나라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문제가 복잡해지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고노 담화에서 인정된 ‘강제성’은 네덜란드나 중국에 대한 강제성과는 다른 차원의 강제성이었다.

(176쪽)

‘조선인 위안부’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강간이나 가혹한 노동의 원인은 식민지배와 국가와 남성중심주의와 근대자본주의가 빚은 가난과 차별에 있다. 나아가 그들을 그런 장소로 내몬 가부장제에 있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만들고 이용한 것은 ‘일본군’이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그런 시스템을 묵인한 국가에 있다.

(191쪽)

 

6) 일본인 위안부의 애국을 조선인위안부 것인 것처럼 썼다


일본인임은 명시. 센다의 책에서 애국을 읽은 것은 박유하의 해석이며 조선인위안부도 등장.
애국의 틀하에 놓여 있던 것은 조선인위안부증언집에 존재하는 기술에 근거한 지적.

 


센다의 책에서도 한 군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깜짝 놀란 건 지난濟南에 들어간 지 이틀 후에 어느새 작부가 들어온 일이었습니다. 작전을 수행하면서 전진하는 부대 뒤를 땀을 흘리며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숫자는 세 명인가 네 명이었는데, 거의 모두가 조선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약삭빠른 매춘업자가 전쟁수당을 받고 있는 군인들의 수당을 노리고 여자들을 모아 돈 벌러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들은 각기 일본식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옷도 입고 오비를 둘렀는데,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약삭빠른 업자의 지혜였겠지요. 군이 여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요구하거나 바란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업자였겠지요. 남자는 주둔지 한쪽 구석에 판자를 박고 돗자리를 둘러쳤는데,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엉성하나마 집을 지어냈습니다. 거지들의 오두막집 같은 거지요. 밖에서 돗자리를 들추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엉성한 집이었습니다. 부대에 영업허가를 받지도 않았겠지요. 형태로 봐서는 민간인이 마음대로 와서 제멋대로 장사를 하는 식이었을 겁니다.( 82쪽)

 

———————-

그런데 센다는 “속아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 이렇게도 쓴다.

그녀들이 부대를 따라 행동할 때는 양복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양복이라고 해봐야 면원피스나 투피스였다고 한다. 그런 복장으로 특별한 날에 입는 옷이나 자신의 일상용품들을 넣은 트렁크를 들고 군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습지대 같은 곳을 걸을 때 혹은 강을 건널 때는 훈도시(남성용 속옷-인용자)만 걸친 군인 옆에서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조건은 군인들과 똑같았던 것이다.(89쪽)

센다가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러한 광경에 근거한 것이리라. 센다가 말하는 정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사진도 실제로 남아 있다(33쪽의 <사진 2> 참조).

 

일본어판 (71-75), 한국어판 57-59 에 애국 사례 존재

간호원도 배운다고 배왔지. 미국 사람이 뭐시가(비행기가) 오는 거 같으면 총도 맞추면 이것 배우고. 이것저것 배우고 호다이(붕대)를 갖다가 어디 맞으면 어떻게 감으라 카는 거 그거 연신 배와주고 놀 여개가 없어요.(『강제 5』, 139쪽)

 

거기가 일선이라도 군인들 큰 전쟁 나가서 돌아오면 기모노 입고 에프론 하고 고로사마데시타(‘수고하셨습니다’) 인사하고 보통 때는 몸뻬 입고 안 그러면 스카트 같은 거 입고. 기모노는 겨울거 여름거 봄거. 도시 가서 돈 주고 사야지. 인기까이(원문에는 괄호 안에 ‘송별회’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연예회’[여흥을 곁들인 술자리]의 잘못된 일본어발음일 가능성이 크다인용자) 같은 거 하거든요.(같은 책, 140쪽)

 

조선인 위안부가 한 일은 성적 욕구를 받아주는 일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호도 붕대감기도 배웠고 심지어는 총쏘기(총조립하기?)까지 배워 군인들 과 함께 전쟁을 지탱했다.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면 ‘기모노에 에프론’ 차림 으로 맞아들이고 축하연에 참석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대동아전쟁 나고 거기 있는 여자들이 다 훈련받았지. 아침이면 다 나와서 모두 체조하고, 군대식으로 똑같이 훈련받았지. 신작로 운동장에서 훈련을 달 반은 받 았어. 수류탄 던지는 거 그거는 거 부대서. 부대서 거기서 훈련시키는 사람 있어. 훈련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군인이지.(같은 책, 140쪽)

 

이것은 전쟁 발생 이후의 상황인데, 후에 다시 보겠지만 위안부들이 처했던 상황은 장소와 시기에 따라 달랐고 전선인지 후방인지에 따라서도 달랐 다. 또한 어떤 군인을 만났는지에 따라서도 달랐다. 물론 그 어떤 경우도 그들이 처한 상황이 불행한 상황이었다는 본질적인 구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안부의 그런 다양한 모습을 보지 않고는 결코 위안부의 총체적인 면모를 포착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일본인위안부의 경우다. 그러나 조선인위안부가 “제국의 위안부”였던 이상 기본적인관계는 같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패전 전후에 위안부들이 부상병을 간호하기도 하고 빨래와 바느질을 하기도 했던 배경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사유리,스즈란,모모코와 같은 일본이름으로 불렸다(후루야마고마오, 하얀논밭,12쪽)는 것도. 식민지인이 ‘위안부”가 되는 일이란 대체일본인이 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제국,62-63).

 

한 일본인 위안부의 이야기는위안부’와 군인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 고 있다.

 

위안부가 될 때, 전쟁터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이런 몸이 된 나도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전선의 위안소에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후방 병참기지에 있게 되면 점차 생활에 익숙해진다고 할까 지쳐버리거든요. 왜냐하면 전방에서는 군인들과 먹는 것도 같이 먹고 본인들은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우리도 그런 그들을 진짜로 위로해주려고 생각했지요. 군인들도 우리를 보면 ‘수고가 많네’라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후방으로 가면 정말로 공동변소 취급인 거예요. 장교나 하사관들 중엔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요.(센다 가코, 81~82쪽)

 

즐거웠던 일은, 글쎄요. 내 경우에는 역시 시코쿠 사람을 만났을 때였어요. 그것도 아이치愛知라든가 마쓰야마松山라든가, 고향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기뻤지요. 군인들도 마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성관계를 빼고 고향의 축제나 산이 나 강 얘기를 같이 하곤 했어요. 군인들도 그걸로 만족했지요.(같은 책, 82쪽)

 

이렇게 ‘위안부’를 둘러싼 상황은 전방인지 후방인지에 따라 달랐을 뿐 아니라 상대에 따라서도 달랐다. 자원한 ‘위안부’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이 군인의 ‘위안’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것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몸’이 되었다고 자기 자신을 비하해야 할 만큼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받아온 그녀들에게는, 군인을 상대하는 ‘위안부’란 처음으로 자신의 앉을 자리를 ‘양지’에 내받은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약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었을 뿐,위안’이라는 이름의 노동이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성과 신체를 혹사 당하는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여전히 ‘위안부’ 생활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84쪽)일 수 밖에 없었다.

 (59쪽)

 

..이웃한 장소에 위안소의 비참은 존재했다. 위안부들과의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군인의 말을 인용했던 센다 또한 이렇게 말한다.

하긴 이런 일은 전쟁에 어느 정도 인간적인 마음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장교가 있는 부대나 주둔지뿐이고, 그 숫자가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부대나 주둔지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닌 듯하다. 보통은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공동변소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런 위안소에서는 여자들은 하루종일 팬티를 벗은 채로 “자, 다음!”, “다음!” 하는 식으로 무표정하게 숫자를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군인들 역시 거칠었다고 한다.(81쪽)

 

7) 동지적 관계는 없다/’동족’이란 일본병사의 시각이다

 

 “동지적 관계”의 1차적 의미는 식민지화되어 <일본인>이 되어야 했던 구조를 지칭한 개념

 군인체험을 한 일본인작가의 소설은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일부 일본인 들에게 :”그들의 조상도 이렇게 썼다” 는 의미로 사용. 후루야마의 소설들은 실체험에 바탕한 이야기.
자료집 참조

”동족”이라는 단어가 일본군인의 말임은 명기. “일본인범주에 들어가게 된 조선인”/국가에 의해 전쟁터에 끌려 온 개인이라는 의미. 동시에, 참혹한 정황도 기술(142-166)

 

후루야마는 “우리가 네이판 마을에 니퍼 하우스(니퍼야자 잎으로 지붕을 얹고 벽을 두른 집-인용자)를 만들고 3주 정도 지나자 조선인 위안부가 열 명쯤 왔다. 그녀들은 모두 사유리니 스즈란이니 하는 꽃이름을 딴 유곽식 일본이름을 갖고 있었다”면서 그가 만난 ‘조선인 위안부’의 말을 이렇게 기록한다.

징용이라고 했어. 나 경상남도에서 밭에 있었거든. 그런데 징용이라고 그러면서 데려가는 거야. 기차를 탔고 배를 탔지. 나, 위안부가 된다는 거 몰랐어.”

여유롭고 느긋한 성품이란 이런 걸 말하는군. 하루에한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었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운이야. 위안부가 된 것도 운이지.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도 운이고. 모두가 다 운이라고.”(「개미의 자유」, 84쪽)

여기에는 속아서 왔다면서도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과 “위안부가 된 것”을 그저 운이 나빴다는 식으로 간주하고 군인을 원망하지 않는 위안부가 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미 식민지가 된 지 오래인 땅에서 자라나 자신을 ‘일본’의 일원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성은 어디까지나 동족으로서의 ‘군인’일 뿐 적국으로서의 ‘일본군’이 아니다. 그녀가 일본군을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불행한 ‘운’을 가진 ‘피해자’로 보면서 공감과 연민을 표할 수 있는 것도 그녀에게 그런 동지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한테 나가 압박은 많이 받았지. 압박은 많이 받았지마는, 내 운명인디. 내가 세상을 잘못 만나고 내 운명이고, 나를 그렇게 한 일본 사람을 나쁘다는 소리는 안 해. 그리고 같은 한국 사람이지마는 한국 사람이 주인이 돼갖구는 얼마나 나를 뚜들겨패는지 몰라. 손님을 안 받을라 한다구. 샅이 아파싸서 죽갔는디. 막 눈물이 절로 나오는 기라. 밥도 못 먹지.(『강제 3』, 225쪽)

위안부 체험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이는 우리 앞에도 있다. 말하자면 똑같은 가혹한 ‘운명’을 겪고도 그 운명에 대한 ‘태도’는 위안부마다 달랐고, 지금도 다르다. 그런 그녀는 일본군이 아닌 업자를 ‘폭행’의 주체로 기억한다.

(75쪽)

조선인 위안부들은 이렇게 살아 있는 군인을 위안했을 뿐 아니라 죽은 군인들을 위로하는 역할도 했다. ‘피묻은 군복’을 빨아 다음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여차하면 함께 싸울 수 있는 훈련까지도 한 이들이 조선인 위안부였다. 그렇게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

(162쪽)

‘조선인 군인’들에게는 ‘조선인 위안부’는 ‘비싸’서 이용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현지 여자는 주로 병정들이 상대”했다는 것은 ‘위안’이라는 행위가 ‘인간의 상품화이자 계급화’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조선인 위안부’가 제국 내에서 놓여 있었던 위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인들에게 차별받는 대상이면서도, 그들은 말이 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비슷하며 같은 ‘동족’으로서 기밀을 지킬 수 있는 존재로서 ‘일본인 위안부’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였다.

(294쪽)
8)위안부의 평균연령을 25세라 했다/미성년자 존재를 경시했다

“ 박유하의 사실인식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다. 박유하는 미국의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이 작성한 <일본인포로심문보고>제49호에 있는,버마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기록을 근거로 평균연령이 25세라고 주장한다…..20명의 징집당시 평균연령은 21.15세이며…..(중략)더욱이 포로가 되었던 당시의 평균 연령도 23.15세며 ‘25세’가 아니다.”

“박유하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정, 67-68)

 

전체평균이 25세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 중 하나로 제시
<미성년-20세 이하>가 아니라 대사관 앞 소녀로 상징되는 소녀. 14-5세?

동시에 소녀존재도 지적

 

실제로는 위안부들은, “내가 나이가 제일 적었지. 거 간 중에. 다른 여자들은 다 스무 살 넘었어”(『강제 5』, 35쪽)라거나 “우리 있는 데는 한 스무 명 남더라구. 그 사람들은 나이가 조금 많고 스무 살 다 넘고 전라도서도 오고 경상도서도 왔더만”(87쪽)이라고 말한다. 증언한 본인 말고는 “스무 살 다 넘” 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우리 앞에 있는 위안부들의 당시 나이는 오히려 ‘예외’였다.

 

거기 위안죠(위안소)가 많아. 많으니께 공치는 사람도 있더라구. 거기 가면 다 남자 상대만 한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이 아니더라구. 거기 여자들하고 다 얘기 해봤지. (중략) 나이가 다 고만고만해. 한 스무 살, 스물한 살, 최고 많은 게 스물다 섯 살. 서른 살 최고 많더라고.(『강제 3』, 96쪽)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8월에, 미얀마(버마) 미트키나 함락 이후의 소탕작전에서 미군의 포로로 수용되어 전쟁정보국OWI의 심문을 받은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004, 296쪽에서 재인용)였다. 어느 조 선인 출신 일본군도 위안부들이 ‘스무 살, 스물한 살’이었던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아 ‘누님’으로 부르며 지냈다고 증언하면서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정신대가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2011).

 

(조선에서의 모집이 시작된 것은 1942년 5월 초, 업자들은 전방의 병원에서 부상당한 병사의 붕대를 감아주고 사기를 북돋아주자는 등의 말로 여성 한 사람당 200~300엔의 돈을 건네주고 데려갔다. 이런 방식으로 300명 가까운 여성이 1942년 8월 20일, 랑군에 도착, 그곳에서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전방으로 보내졌다. 포로가 된 여성은 중국 국경에 가까운 미트키나에 있었던 ‘마루야마 클럽’이라고 불렸던 위안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세. 자신들의 직업이 싫다고 말했고, 일이나 자신의 가족에 관해서는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96쪽에서 재인용)

(83쪽)

 

소녀관련부분 기술

물론 어린 소녀가 위안부가 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어린 소녀가 위안소에 가게 되었을 때는 “어떤 군인이 몇 살이냐고 해서 열 네 살이라고 대답했더니 ‘젖이나 더 먹고 오지, 부모형제 보고 싶어서 어떻 게 왔느냐’”(『강제 2』, 51쪽)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나이가 결코 평균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위안부상이 소녀로 정착된 것(위안부를 다룬 한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소녀 이야기>인 것도 그런 의식을 반영한다)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탓도 있지만 앞서의 20만 명 설과 마찬가지로 그런 상상이 우리의 피해의식을 키워주고 유지하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증언한 ‘위안부’들의 대부분이 십대에 강간당하거나 위안부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니 일본군이 ‘어린 소녀까지도’ 상대했다는 것은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녀 위안부’가 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위안부들 중에 어린 소녀가 있게 된 것은 ‘일본군’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강제로 끌어간’ 유괴범들, 혹은 한 동네에 살면서 소녀들이 있는 집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우리 안의 협력자들 때문이었다. 위안부가 된 소녀들을 가족이나 이웃으로서 보호하기 보다는 공부라는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해서 공동체 바깥으로 내친 우리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50-52쪽)

일제 시대에 어린 여성들을 꼬여 팔아넘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신문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1월 11일자 『매일신보』의 기사.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최재현(37)과 그의 처 이성녀(24)는 수일 전 서로 공모하여 동면 동리에 있는 김인섭의 둘째딸 양근(12)을 유인해다가 군산부 개복정 2정목 지나支那 요리업자 장우경에게 몸값 50원을 받고 작부로 팔고자 계약서를 작성하던 중 경찰에 발각되어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55쪽에서 재인용)

첫 번째 증언에서 짐차에 태워 간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동네 이장이었다. 세 번째 증언을 한 소녀가 여기저기 전전하다 공장으로 가는 줄 알고 ‘위안부’가 된 나이는 열다섯 살이다. 이처럼, 어린 소녀들이 ‘위안부’가 된 경우는 대부분 주변 사람이 속여 데려가거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보호공간이 되지 못한 경우다.

(53쪽)

 

소녀상은 분명 성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대사관 앞에 서 있는 것은 위안부가 된 이후의 실제 ‘위안부’가 아니라 위안부가 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혹은 앞에서 살펴본 위안부의 평균 연령이 25세였다는 자료를 참고한다면, 실제로 존재한 대다수의 성인 위안부가 아니라 예외적인 존재였던 위안부만을 대표하는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대사관 앞 소녀상이 실제 위안부를 상징하는 상일 수는 없다.( 정창화감독<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참조)

(204쪽)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이 직접 ‘강제로 끌어간’ 존재이고 그들을 ‘감금’한 것도 일본군이고 모든 군인은 포악하고 모든 위안부는 ‘순진한 어린 소녀’로만 간주하는 일은 그런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위안부(이른바 ‘매춘부’를 포함)들을 배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피해자성을 희석시키고 싶지 않은 피해자로서의 욕망이 시키는 일이지만, 표면적인 모습이 ‘완벽한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들 역시 피해자이고 희생자였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자란 한 사람의 조선인 위안부가 그 두 얼굴을 갖는 것은 ‘식민지화’된 순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식민지화되었던 우리 자신, 우리의 과거와 화해할 수가 없다

(295쪽)

 

9) 위안부문제를 한국정부가 포기했다

박유하가 지적한 것은 위안부문제가 아니라 개인청구권

 

 

10)조선인을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민족의 거짓말론은 일본군뿐 아니라 업자도 면책하며 말단의 민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담론인 것이다”(85)

식민지의 거짓말”의 방점은  식민지. 해당부분은 제대로 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들의 슬픔을 강조한 부분(일본판에만 있는 이유) –초보적 오독

 

11)위안부가 “성노예”임을 부정했다/일본이 바라는 위안부이미지를 써서 일본에 받아들여졌다

 

‘조선인 위안부’는 분명, 식민지가 된 나라의 백성으로서 일본의 국민동원과 모집을 구조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노예였다. 조선인으로서의 국가 주권을 가졌다면 누릴 수 있었을 정신적인 ‘자유’와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에서도 분명 ‘노예’였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노예’가 ‘감금해놓고 언제든 군인들이 무상으로 성을 착취했다’는 식의 것인 한 ‘조선인 위안부’는 그런 성노예와는 다른 존재다. 그런 상황에 노출된 이들이 설사 있었다 해도, 그것이 처음부터 ‘위안부’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성노예’란 성적인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말이다. 그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런 측면에만 주목하고 ‘피해자’의 틀에서 벗어나는 기억을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全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위안부들이 자신의 기억의주인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기억에 의해서만 존재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우리 또한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주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117쪽)

 

2012년에 ‘위안부’ 대신 ‘성노예’라는 단어를 공식적인 명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당사자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자신의 위안부 생활이 ‘성노예’로 말해지는 데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해왔 으면서도 정작 그 명칭이 정착되는 데에는 반대한 것은 의식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이름이 자신들의 ‘과거’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노예’라는 호칭은 분명 ‘위안부’를 나타내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위안부’의 전부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성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그네들이 애써 가지려 했던 인간으로서의 긍지의 한 자락까지도 부정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131쪽)

 

그동안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지원자들은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해왔다. 물론 위안부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거부할 수 없고 도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종속적이었다. 또 그녀들의 선택이 설사 표면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였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구조적 강제’ 속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녀들의 처지는 노예적이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노예’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위안부’의 ‘자유’를 억압한 주체는 ‘일본’이나 ‘군’만은 아니다. 그녀들을 인신 매매 등의 수단을 통해 모집하고 이동시키고 군에 넘겼으며 ‘위안부’들의 노동의 대가인 군표를 가로채는 형태로 관리했던 업자와 포주들이야말로 그녀들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구속한 주체였다. ‘군인’ 이상으로 오히려 더 빈번하게, 더 가혹하게 ‘위안부’의 자유를 구속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업주와 포주들이었다. 임금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상황을 ‘노예’적인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녀들의 ‘주인’은 군인이 아니라 ‘업자’이고 포주였다. 설사 그들에게 군인 이상의 권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위안부’의 주인이 ‘업자’인 건 분명하다.

(135-136쪽)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는 우선 출신지가 ‘본국’인지 ‘식민지’인지 ‘적국’인지 ‘점령지’인지에 따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발성’ 속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강제’가 존재했고, ‘매춘부’라는 외견 속에 ‘성노예’라는 측면이 존재했다.

물론 역으로 강제성 속에 자발성이 있었고 성노예의 이면에 매춘부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국적에 따라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랐다.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 해결은 그 모든 상황의 차이를 보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143쪽)

 

 

 

 

 

참고자료

서문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2013/7)

 

위안부 문제는 왜 1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나는 8년 전 에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뿌리와이파리, 2005)라는 책에서의 일이다. 나는 또 “일본이 주변국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있다면, 혹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면, 거기에는 이제까지의 비판의 형식과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데에도 원인이 없지 않다”라고도 썼다. 그리고 한일간의 문제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복잡”한 문제이고 그런 “복잡함”을 보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문제들을 조금 깊이 볼 수 있다면 분노와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어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면 “그때 비로소 화해를 위한 논의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나도록, 그때 바랐던 “생산적인 논의”는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한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일관계를 둘러싼 상황은 그동안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안의 견고한 기억들”에 “화해를 지향하는 균열”을 내보려 했던 8년 전의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그 책이나 또 다른 한일관계 관련 책들(『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 공편저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등)에서 내가 중점을 두었던 것은 민족주의 비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민족주의’ 비판만으로는 한일 간의 갈등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 책의 시도가 실패한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일 간의 갈등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책은, 세월이 흘러 이제는 ‘왜 2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는지’ 를 물어야 하게 된, 그런 ‘복잡한 구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 책이다.

무엇보다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상황은 당시보다 훨씬 나빠졌다. 그리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위안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위안부’는 실은 결코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우리는 ‘위안부’에 관해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려왔다.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문제가 있을 때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야만 상황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정보에는 때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20년은 그중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취사 선택해서 들어왔고 그에 바탕해 위안부에 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온 세월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 편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아프기까지 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편함과 아픔을 공유하려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그런 불편함과 아픔을 거치지 않고서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도 완전한 군인이지”(『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 246쪽)라고 말하는 위안부의 목소리를 듣고, 그 말이 상징하는 ‘식민지의 모순’을 직시해야 하는, 아프기까지 한 불편함.

 

불편한 일을 굳이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그 모습을 외면하는 사이에, ‘식민지배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그 모습들을 왜곡해서 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나선 이들의 대부분은 극도의 ‘혐한’감정을 갖고 있는데, 그들의 혐한감정은 특히 이 10여 년 동안 서서히 커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혐한은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 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분이 크다. 그리고 문제는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런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이 일본 사회에 급격히 늘어나는 중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혐한파뿐 아니라 한국을 잘 알고 좋아했던 이들조차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한국과 소통하기 가 힘들다고 느낀다.”(지한파 교수) 그동안 일본에게 한국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의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알고 보니 짝사랑을 한 셈이다. 이제 그만 그런 감정을 버리고 한국을 보통 나라로 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외교관) 나는 한국을 좋아하는데, 한국인들은 거짓말까지 하면서 일본을 욕하고 언제까지고 일본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이젠 한국이 싫어지려고 하는데, 어쩌면 좋은가?”(대학생)

 

말하자면 한일 양국은 20여 년의 역사 문제 갈등을 거치면서 심각한 소통부재 상황에 빠져버렸다. 외교채널조차 가동되지 못한 지 일년이 넘었고, 현재 두 나라 국민은 상대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갈등의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고, 그들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위안부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미 8년 전의 책에서 나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나름대로 ‘사죄와 보상’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일부 위안부들이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지원단체는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 우리가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 판단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위안부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국가 문제가 된 이상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지원단체나 소수의 연구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제까지의 20년 동안에는 오로지 소수의 관계자들의 생각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태도를 결정지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소수’라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들의 판단이 전부 옳거나 진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안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지원단체의 의견에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현재의 방식으로는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마도 한국의 교과서는 ‘결국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아무런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고 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일 수가 없다. 그런 이상, 나는 다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저 좋은 한일관계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동안 양국의 이해를 위해, 나아가 동아시아의 상호 신뢰회복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 온 이들이 쌓아올린 신뢰의 탑이 적대와 대립의 언어만이 난무 하는 가운데 무너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갈등을 조장하는 담론들이 마음 여린 이들을 상처 입히고, 마음을 닫도록 만드는 것을 팔짱만 끼고 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쓰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문제가 단지 ‘해결’을 기다리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한국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일본’만의 특수한 일로 생각하는 사고는 그런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평화’를 지향하는 현재의 운동이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체제 ― 정영환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에 답한다 #2

역사비평 2015 봄호(통권 제112호) 반론 본문 다운로드

1. 오독과 곡해―정영환의 “방법”

재일교포 학자 정영환이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 대한 비판을 『역사비평』 111호에 실었다. 우선 이 비판의 당위성 여부에 대해 말하기 전에 비판 자체에 유감을 표한다. 왜냐하면, 나는 현재 이 책의 저자로서 고발당한 상태이고, 그런 한 모든 비판은 집필자의 의사 여부 를 떠나 직간접으로 고발에 가담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5년 8월에 제출된 원고 측 문서에는 정영환의 비판논지가 차용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재승의 서평도 통째로 근거자료로 제출되어 있었다. 가처분재판 기간 동안 법원에 제출된 원고 측 문서에는 윤명숙과 한혜인의 논지가 구체적으로 인용되어 있었다. 2014년 6월에 제출된 최초의 고발장에는 내가 10년 전에 낸 책인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비판논지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나에 대한 비판에 참여한 학자/지식인들이 이러한 정황을 아는지 모르는 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비판을 하고 싶다면 소송을 기각하라는 목소리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법정으로 보내진 학술서’에 대해 취해야 했던, ‘학자’로서의 할 일이 아니었을까.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심지어 『한겨레신문』에 인용되어 나에 대한 여론 의 비판에 기여했음에도(002) 정영환의 비판에 그동안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비판이 오독과 곡해로 가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가 나의 것이라고 말했던 “자의적 인용”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결론이 앞서는 적대를 기반에 깔고 있어, 사실 읽는 일 자체가 우울했다. 따라서, 구체적인 반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나의 입장과 논지를 확인해두도록 하겠다.

1)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국가의 책임에 대한 입장

정영환은 내가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482~483쪽, 이하 ‘쪽’은 생략)한다면서 “식민주의 비판이 없”(492)기에 “식민지배 책임을 묻는 소리를 부정하려고하는 ‘욕망’에 이 책은 잘 호응”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역사수정주의자들과의 은밀한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491)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나는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부정한 것은 ‘법적’ 책임일 뿐이고, 당연히 일본국가의 책임을 물었다. 일본어판에는 “국회결의”가필요하다고 쓰기도 했다. 그런데도 정영환은 그런 부분에는 침묵할 뿐 아니라 “역사수정주의자”라는, 한국에서 비판받고 있는 존재를 호명해 그들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식의 ‘왜곡’을 자신의 비판 “방법”으로 사용한 다.(003)

정영환의 말대로라면 이 책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들―“이 문제제기에 일본 측이 어떻게 대답해 나갈 것인지의 물음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스기타 아츠시, 서평, 『아사히신문』 2014. 12. 7), “어디서나 다 있었던 일이라고 일본이 강변하지 않고 제국주의 팽창을 넘어서는 사상을 새롭게 제기할 수 있다면 세계사적 의의는 크지 않은가? [라는 박유하의 물음에] 나는 반대할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다”(야마다 다카오, 칼럼, 『마이니치신문』 2014. 12. 21), “나는 이 책을 읽고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아픈 마음이 한층 깊어졌을 뿐이다”(와카미야 요시후미, 칼럼, 『동아일보』 2014. 7. 31)은 다 잘못 읽은 서평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심지어 어떤 우파는 나 의 책이 전쟁책임의 틀에서만 다루어졌던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책임으로 물으려 한다면서 “일본 좌파보다 무서운 책”이라거나 “고루한 지배책임론을 들고 나왔다”며 비난하기까지 했다.

정영환은 같은 방식으로 내가 “한일합방을 긍정”했다고 쓴다. 그러나 나 는 한일합방 무효론에 회의를 표하면서도 “물론 현재의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지배에 대한 책임을 정말로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을 패전이후국가가정식으로표현한일이없었다는인식이혹일본정부에생 긴다면, ‘법적’으로는 끝난 한일협정이라 할지라도 재고의 여지는 있을 것이 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국내외적 혼란은 그 재고가 원천적 으로 배제된 결과이기도 하다”(『화해를 위해서』, 235)라고 썼다. 말하자면 나는 한 일합방도 한일협정도 “긍정”하지 않았다.

나는 위안부를 만든 것은 근대국민국가의 남성주의, 가부장주의, 제국주 의의 여성/민족/계급/매춘차별의식이므로 일본은 그런 근대국가의 시스템 문제였음을 인식하고 위안부에 대해 사죄/보상을 하는 것이 옳다고 썼다. 그런데도 정영환은 ‘박유하는 한일합방을 긍정하고 1965년체재를 수호하고 있 으며 위안부 할머니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학자’에 의한 이러한 왜곡을 범죄수준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영환의 비판 “방법”은 서경식이나 김부자 등 다른 재일교포들의 나에 대한 비판방식과 지극히 닮아 있다. 그들 역시 『화해를 위해서』의 반은 일본 비판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고, 나를 ‘우익에 친화적인 역사수정주의자’라는 식으로 말해왔다.

2) 한일협정에 대한 입장

정영환은 내가 “1965년체제의 수호를 주장”(492)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재협상은무리라는 생각이 곧 ‘수호’가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일본을 향해서 쓴 부분에서 한일협정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고 썼다. 정영환이 말하는 것 같은 “수호”는 커녕 그 체제에 문제가 있었다고 분 명히 지적했다. 한국 정부가 청구권을 없애버린 것을 지적한 것은, 1965체제 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의식은 수반되 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방법에 대해

정영환과 달리, 비판하고 싶을수록 자신도 돌이켜보자는 것이 나의 “방 법”이다. 역사학자나 법학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일 수 있지만, 문제 자체 이상으로 양국 ‘갈등’의 원인과 해소에 관심이 큰 연구자로서 필연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정영환은 이 책의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이 다른 것이 무언가 음험한 “의도”가 있어서인 것처럼 말하지만, 이 책이 대립하는 양국 국민들을 향해 가능한 한 사실에 근접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에 중심을 둔 책인 이상, 일본어판이 일본어 독자를 의식하며 ‘다시’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 시시각각 악화되는 한일관계를 바라보며 가능한 한 빨리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던 한국어판에는 당연히 거친 곳이 많았다. 따라서 일본어판을 쓰게 되었을 때 그런 곳들이 수정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문제’, ‘일본의 문제’를 따로 볼 수 있도록 구성을 바꾼 것도 그런 맥락에서의 일일 뿐이다.

2. “방법” 비판에 대해서

1) 빗나간 잣대

정영환은 내 책이 개념을 “정의”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이 책을 학술서 형태로 내지 않은 것은 일반독자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고, 일반 독자들은 아무도 그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 책이 정영환에게 “읽기 쉬운 책이 아니”(474)게 된 것은 개념을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의 방법과 내용이 정영환에게 낯선 것이 기 때문일 것이다.

2) 폄하

정영환은 내가 위안부의 차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문제시하면서 “차이가 있었다는 주장 자체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474)고 “수많은 연구가 일본군이 점한 각 지역의 위안부 징집이나 성폭력 문제에 나타나는 특징을 논한 바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포지션의 유사성(물론 그들 간의 차별에 대해서도 이미 오래 전에 지적했다)을 지적하면서 대일 본제국에 포섭된 여성들과 그 이외의 지역 여성들의 “차이”를 지적한 연구를 알지 못한다. 정영환의 “방법”은, 나의 책이 ‘매춘’에 언급한 점을 들어 실은 우익이 일찍이 한 이야기라고 폄훼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하지만 나의 시도는 그저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향해 “매춘”의 의미를 재규정하는 데 있었다

3) “방법” 이해의 미숙

정영환은 조선인 위안부의 “정신적 위안자” 역할에 대한 나의 지적이 “비약”이자 “추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우선 증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마음 여부 이전에 조선인 위안부가 그런 틀 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국방부인회’의 띠를 두르고 환영/환송회에 참가한 이들이 설사 내심 그 역할을 부정하고 싶어했다 하더라도 그런 표면적 상황에 대한 해석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근거 없는 “추측”은 물론 배제되어야 하지만, 모든 학문은 주어진 자료를 통해 ‘상상’한 ‘가설’을 구축하는 작업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나는 모든 것을 증언과 자료에 기초했다. 책에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들도 곧 따로 정리해 발표할 생각이다. “동지”라는 단어를 쓴 것도 우선은 제국일본에 동원되어 ‘일본’인으로 존재해야 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정영환은 군인에 관한 위안부의 “추억”을 논한 부분을 들어 “추억”에 대한 ‘해석’을 “먼 거리가 있다”(475)며 비판한다. 그러나 학자의 작업은 ‘개별적인 예’들을 분석하고 총체적인 구조를 보는 일이다. 내가 시도한 작업은 “증언의 고유성이 경시”되기는 커녕 그동안 묻혔던 한 사람 한 사람 증언의 “고유성을 중시”하며 결과를 도출해내는 일이었다. ‘대상의 의미’를 묻는 작업에 자신이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다른 이의 작업을 폄훼해서는 안 될 것이 다.

같은 문맥에서 정영환은 “일본인 남성”의, 그것도 “소설” 사용은 “방법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475)고도 말한다. 이러한 비판은 일본인 남성의 소설은 그 존재 자체가 일본에 유리한 존재일 것처럼 생각하는 편견이 만드는 것이지만, 나는 일본이 위안부를 어떻게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에서 소설을 사용했다. 위안부들의 참혹한 생활이, 다름 아닌 위안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군인들, 후에 작가가 된 이들의 작품 속에 많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인들을 향해 자신들의 조상이 쓴 이야기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증언에 힘을 실리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사용했을 뿐이다. 정영환은 역사 연구자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설” 경시 태도를 드러내고 있지만, 소설이, 허구의 형태를 빌려 때로 진실 이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다는 것은 상식이기도 하다.

정영환은 자신의 정황을 “운명”이라 말한 위안부를 내가 평가한 것을 비판하지만, 위안부의 증언에 대한 평가 역시 “고유성을 중시”하는 일이다. “운명”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정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내가 평가한 것은, 세 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에서 긍정적인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가치관이 시키는 그러한 “평가”가 부정되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와 반대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 위안부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행위와 정반대”(476) 가 되는 건 아니다. 학자라면 오히려, 증언에 대한 공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여러 정황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004) 더구나 거짓증언까지도 묵인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005) 그런 상황에 대한 묵인은 오히려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무엇보다, 내가 “운명”이라 말하는 선택을 평가한 것은 그저, 그렇게 말하는 위안부도 존재한다는 사실, 그러나 그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한 이의 목소리를 전한 것도 같은 이유다.(006) 나는 ‘다른’ 목소리를 절대화하지 않았고, 정영환의 말처럼 그저 “귀 기울였을” 뿐이다. 그런 목소리가 그동안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 억압이 이들에게도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영환이 말하는 바 “증언의 찬탈”은 오히려, 정영환과 같은 태도와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에게서 일어난다는 것이 내가 이 책에서 지적한 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방법”이 “윤리와 대상과의 긴장관계를 놓친 방법”이며 “역 사를 쓰는 방식으로는 적절하지 않다”(476)는 비판은 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비판일뿐이다.

3. 『화해를 위해서』 비판에 대해서

정영환은 10년전의 나의 책 『화해를 위해서』도 비판하는데, 『제국의 위안부』가 “당시 거론된 문제점을 기본적으로 계승”(477)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도 앞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1) 도덕성 공격의 문제

정영환은 김부자를 인용하면서 내가 기존 연구자들의 글을 두고 “정반대의 인용”(477)을 했다고 말한다. 이는 정영환이 나에게 논지뿐 아니라 도덕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그런데 정영환이 모르는 것이 있다. 모든 텍스트는 꼭 그 글을 쓴 저자의 의도에 준해 인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글은 저자의 전체 의도와는 다른 부분도 얼마든지 인용될 수 있다. 정영환 자신이 나의 책 을 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읽고 있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왜곡이 없어야 한다는 점인데 나는 왜곡하지 않았다.

나는 요시미 요시아키와 같은 학자가 “‘강제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책임을 추궁하는 이른바 ‘양심적인’ 학자조차 ‘물리적 강제성은 부정하니 그 부분은 신뢰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이후 군인이 끌고 갔다는 식의 강제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지면서 논의가 ‘인신매매’로 옮겨 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는 ‘구조적 강제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은데 ‘구조적 강제성’이라는 개념은 바로 내가 『화해를 위해서』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었다.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당시의 일본이 군대를 위한 조직을 발상했다는 점에서는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개정판, 69)라고 나는 말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책을 결코 인용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이 문제를 식민지지배 문제로 봐야 한다는 나의 제기까지 인용 없이 사용하는 이들까지 생기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시 쓸 생각이다.

2015년 5월 미국 역사학자들의 성명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제 ‘군인이 끌고 간 강제연행’은 세계는 물론 지원단체조차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강제연행’으로만 믿었던 시점에서 강제연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강제성’ 여부로 부정적인 이들이 이 문제에서의 책임을 희석하는 것을 막고자 10년 전에 ‘구조적 강제성’을 말했다. 또 『제국의 위안부』에서 ‘강제성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썼다.

2) 오독과 왜곡

정영환은 내가 위안부가 “일반여성을 위한 희생양”(『화해를 위해서』, 87)이었다고 쓴 부분을 지목해 마치 내가 “일반여성의 보호를 목적”(김부자)으로 하는 것처럼 비난한다(478). 그러나 ‘일본군을 위한 제도’라는 사실과 ‘위안부가 일반여성을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인식은 대치되지 않는다.

역사 연구자인 정영환이 텍스트 분석에 대해 문학 연구자만큼의 긴장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비판’의 문맥이라면, 더구나 소송을 당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비판이라면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해야 했다. 심지어 정영환은 일반여성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나의 반박마저 비난하면서 ‘적국의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냐는(김부자) 오독에 더해 “일본군의 폭력 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전제”(478)한, “전쟁터의 일반여성이 자기대신 강간당한 위안부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라고까지 말한다.

내가 일반여성의 문제를 말한 것은 ‘계급’의 시점에서다. 즉 “주인댁 배운 여자”(『화해를 위해서』, 88) 대신 위안부로 나갔던 위안부의 존재에 주목했던 것이고, 그녀들을 내보내고 후방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한/일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후예들에게도 책임의식을 촉구하기 위한 문맥이었다. 물론 그 기반에는 나 자신의 책임의식이 존재한다.

3) 총체적 몰이해

정영환은 서경식의 비판에 의존하면서 아시아여성기금과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을 비판하지만, 서경식의 비판은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구식민지종 주국들의 “공동방어선”(007)을 일본 리버럴지식인들의 심성으로 등치시키려면 구체적인 준거를 대야 했다.

그리고 나는 한일갈등을 정대협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일본 측도 분명히 비판했다. 그럼에도 정영환을 비롯한 비판자들은 내가 ‘가해자를 비판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규정했고 이후 그 인식은 확산되었다.

정영환은 내가 사용한 “배상”이라는 단어를 문제시하지만 정대협은 “배상”에 국가의 법적책임의 의미를, “보상”에 의무가 아닌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정영환이 지적하는 “쓰구나이금”이란 책에도 썼듯이 “속죄금”에 가까운 뉘앙스의 단어다. 물론 일본은 이 단어에 “배상”이라는 의미를 담지 않았고, 나 역시 정대협이 사용하는 의미에 준해 “배상”이라는 의미를 피해 “보상”이라고 말했다. 이는 기금을 그저 “위로금”으로 간주한 이들에 대한 비판의 문맥에서였다. “쓰구나이금이 일본의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한 보상이 아니”(479)라는데는 나 역시 이견이 없다. 그런데도 정영환 은 잘못된 전제로 접근하면서 내가 사용한 “보상”이라는 단어가 “쟁점을 해소”(480)한다고 비난한다.

참고로 언급해두자면, 일본 정부는 국고금을 직접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처음엔 간접지원하기로 했던 300만엔마저 결국 현금으로 지급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6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은 실상은 ‘일본국가의 국고금’도 받은 것이 된다. 여전히 “배상”은 아니지만 기금이 그저 “민간기금”이라는 이해도 수정되어야 한다.

4. 정영환의 ‘한일협정’ 이해의 오류

1) 위안부문제에 관한 책임에 대해

정영환은 내가 위안부 문제의 “그 책임을 일본국가에 물을 수 없다”(480)고 한 것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나는 “법적 책임을 물으려면 먼저 업자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을 뿐, 일본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정황을 감안해 판단하면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한 배상 요구는 무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업자’등 중간자들의 존재에 주목하는 이유는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야말로 가혹한 폭력과 강제노동의 주체이고 그로 인한 이득을 취했기 때문이다. 유괴나 사기 등은 당시에도 처벌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안부의 ‘미 움’이 이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공식적인 지휘명령계통을 통해 위안소 설치를 지시’하였다는 요시미의 주장을 대체적으로 지지하지만, 여성의 ‘징집을 명령한 것이었다’는 규정이 물리적 강제연행을 상상케 하고 업자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인 이상 좀 더 섬세한 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병참 부속시설”이라는 나가이의 지적 역시 지지하지만, 기존 유곽을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보는 이유는 일본의 책임을 희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원자들이 말하는 “진실규명”을 위해서다.

정영환의 나에 대한 비판이 순수한 의문을 벗어난 곡해임은, 수요를 만든것자체, 즉 전쟁을한 것 자체를 비판하는 나의 글을 인용하면서 “위의 인용은 어떻게 보면 공급이 따라갈 정도였다면 군위안소제도엔 문제가 없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481)다고 하는 지적에 나타난다. 심지어 “업자의 일탈만 문제 삼는다면 군위안소라는 제도 자체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것”(481)이라고 쓰는 정영환의 “비약”에는 그저 놀랄 뿐이다.

나는 “군에 의한 위안소 설치와 여성의 징집, 공권력을 통한 연행”(482)을 같이 놓고 “예외적인 일”로 기술하지 않았다. 내가 예외적인 일로 기술한 것 은 한반도에서의 “공권력을 통한 연행”뿐이다. 그럼에도 정영환은 이런 식으로 요약해 내가 ‘군의 위안소 설치’마저 예외적인 일로 간주한 것처럼 보이도록 시도한다.

2) 헌재판결에 관해

헌재 판결에 대해서, 나는 분명 ‘청구인들의 배상청구권’에 대해 회의적이다. 하지만 이는 그러한 형식―재판에 의거한 청구권 요구라는 방식과 그 효과에 대한 회의였을 뿐 보상 자체를 반대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정영환은 “청구권 자체를 부인하는 입장”이라고 오해하도록 만드는 정리를 한다.

또 나는 지원단체가 의거해온 ‘부인 및 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을 기반으로 해서는 “위안부제도를 위법으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손해배상을 물릴 수 없다는 아이타니의 지적에 공감했을 뿐,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 아니다. 아이타니의 의도가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부정’한 것은 아니어도, 그러한 방법의 틀로는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 논문임은 분명하고, 나는 그 부분에 주목했을 뿐이다. “개인의 청구권을 부정한 연구인 것처럼 인용”했다는 지적 역시 단순한 오독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일 뿐 이다. 정영환은 늘 형식부정을 내용부정으로 등치시킨다. 심지어 이제 지원 단체 스스로가 “법적 책임” 주장을 변경했다는 것도 정영환은 참고해야 할 것이다.(008)

3) 한일회담에 대해

정영환은 내가 김창록의 논문도 “반대로 인용”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김창록이 인용한 여러 회담문안을 정영환의 지적과는 다른 문맥에서 사용했다. 그러니 이 역시 근거없는 비난이다.

김창록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에 논의된 것은 ‘피징용자의 미수금’이었고, 정영환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의 위안부에 관한 논의는 오로지 ‘미수금’만이 문제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위안부는 “군속”이었다고 말하는 자료도 나왔으니(009) 나의 논지에 의거한다면 일본이 위안부를 “군속”으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인 일본군조차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이 존 재했지만 위안부들에게는 그런 ‘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인식은 위안부에 관한 ‘보상’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정영환은 내가 한일협정에서 일본이 지급한 금액을 ‘전후보상’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나는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의거한 회담이니 연합국과의 틀 안에서 정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제국후처리’가 아닌 ‘전후처리’에 해당한다고 했을 뿐이다.

정영환은 487쪽에서 488쪽의 부분에서 나의 책을 길게 인용하면서도, 미국이 일본인들의 한반도 재산을 접수해 한국에 불하하고, 그것으로 외지에서 일본인을 귀환시켜준 비용을 상쇄시켰다는 부분을 빼고 인용한다. 그러나 이 부분이야말로 내가 일본에 청구권을 청구하는 것이 어렵겠다고 이해 하게 된 부분이다. 국가가 상쇄시켜버린 ‘개인의 청구권’을 다시 허용한다면 일본인들 역시 한반도에 남긴 자산의 청구가 가능해진다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때의 보상이 ‘전쟁’후처리일 뿐 ‘식민지배’후처리가 아니라고 말해 65년 보상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했다. 그럼에도 정영환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내가 1965년체제를 “수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한일협정금액을 “전쟁에 대한 배상금”이라 하지 않았다. ‘전후처리에 따른 보상’이라 했다. 또한 장박진의 연구를 인용한 것은 냉전체제가 영 향을 끼쳤다는 부분에서다. “맥락과 전혀 다르게 문헌을 인용”하지 않았고, 장박진이 “한국 정부에 추궁할 의사가 없었다고 비판”한 문맥을 무시하지 않았다.

정영환이 아직 모르는 것은 한국 정부가 이때 식민지배에 관한 ‘정치적 청산’마저 해버렸다는 점이다.(010) 아사노 논문은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에 나왔다. 나는 책에서 일본을 향해서 ‘식민지배보상’이 아니었으니 보상이 남아 있다고 썼는데, 아사노 논문을 읽고 오히려 충격을 받았다. 한일협정을 둘러싼 논의는 앞으로 이제 아사노 논문을 도외시하고는 이야기될 수 없을 것이다.

5. 생산적인 담론을 위해

정영환은 이제 서경식이나 다카하시 데츠야조차 비판한다. 다카하시는 리버럴 지식인 중에도 드러나게 ‘반성적인’ 시각과 태도를 견지해온 인물이고 서경식과 공동작업을 많이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이들까지 비판하는 정영환에게 첫 답변에서 물었던 말을 다시 묻고 싶다.

정영환의 비판은 어디를 지향하는가?

분명한 건 정영환의 “방법”은 일본사회를 변화시키기는 커녕 사죄하는 마음을 가졌던 이들마저 등돌리게 만들어 재일교포사회를 더 힘들게 만들 것 이라는 점이다. 물론 일본사회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정영환의 비판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나에 대한 비판방식이 증명하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의도를 찾아내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소모 하기보다 생산적인 담론 생산에 힘을 써주기를 바란다.

  1. 001  매수가 충분치 않아 이 글에서는 나의 책 인용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 글의 논지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은 『제국의 위안부』 (2015년 6월에 일부삭제판이 간행되었다) 와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2005 초판, 2015 개정판)를 참조 해주기 바란다. (도서 다운로드 페이지로 이동)
    이에 앞서는 서론격 글을 2015년 8월 말경에 박유하의 페이스북 <노트>등에 게재할 예정이다 www.facebook.com/parkyuha
  2. 002  이 반론을 집필 중이던 2015년 8월 13일에 『한겨레신문』이 정영환/박노자의 대담을 싣고 다시 한 번 나를 비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영환의 나에 대한 비판의 문맥 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판전사(前史)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주1의 글을 참조바란다.
  3. 003  정영환이 블로그에 연재한 나에 대한 비판의 제목은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이다. “방법”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내게 내용 이전의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 학자로 서의 자격과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 하는 전략이 뚜렷하다.
  4. 004  朴裕河, 「あいだに立つとはどういうことかー慰安婦問題をめぐる90年代の思想と運動を問い直 す」, 『インパクション』 171호, 2009. 11.
  5. 005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이 20여 년간 여러 번 변했다. 최근 과거 증언집에 대한 불 만을 토로했는데 이는 증언의 불일치를 지적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http://www. 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466
  6. 006  박유하, 「위안부 문제,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심포지엄 『위안부 문제, 제3의 목 소리』 자료집, 2014. 4. 29. 『제국의 위안부』 삭제판에 수록.
  7. 007  徐京植, 『植民地主義の暴力』, 高文研, 2010, 70쪽.
  8. 008  『한겨레신문』 2015. 4. 23.
  9. 009  波止場清, 「慰安婦は軍属ー辻政信が明言」, 『허핑톤 포스트』 2015. 8. 3. 일본육군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가 『潜行三千里』라는 책에서 위안부는 “신분도 군속”이라고 쓴사실이 지적된 바 있다.
  10. 010  아사노 도요미, 「‘국민감정’과 ‘국민사’의 충돌. 봉인, 해제의 궤적―보편적 정의의모색과 뒷받침되어야 할 공통의 기억을 둘러싸고」, 근간 수록 예정.
출처: 역사비평 2015 봄호(통권 112호)

비판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정영환의 <제국의 위안부>비판에 답한다 #1

정영환이 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다 읽진 않았어도 그가 일본어블로그에 연재한 비판이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읽기도 했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았던 건 첫째로는 시간적여유가 없었고, 두 번 째로는 그의 비판이 악의적인 예단이 앞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월에 나의 책에 대한 가처분 판결이 났을 때 한겨레신문이 정영환의 글을 나에 대한 비판에 사용했고 이제 <역사비평>이라는 한국의 주요잡지에 게재되기에 이르렀기에 뒤늦게나마 반론을 쓰기로 한다.

그런데 지면을 30매 밖에 받지 못했다. 불과 30매에 그의 비판에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또 다른 젊은 학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역사문제연구>33호에 <집담회>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했는데, 이에 대한 반론은 100매가 허용되었으므로 논지에 관한 구체적인 반론은 그 지면을 활용하기로 하겠다.


민족과 젠더

나는 그를, 내가 가장 관심 두었고 또 발제도 했던 일본의 한 연구모임에서 2000년대 초반에 만났다. 그 모임은 일본의 재일교포문제 오키나와 문제등 제국일본이 낳은 여러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은 곳이었고, 무엇보다 지적수준이 아주 높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기회 되면 참석했던 곳이다. 문부식, 정근식, 김동춘등이 그 연구회가 관심을 갖고 초청하기도 했던 인사였다.

서경식도 그 연구모임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인 걸 곧 알 수 있었고 나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책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재일교포사회의 가부장제문제를 발표하면서 이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서경식은 <젠더보다 민족문제가 우선>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당시 연구회 멤버들 중에는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그런 서경식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사석에서는 서경식을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말하자면 서경식, 윤건차, 그리고 이제  정영환으로 대표되는 나에 대한 재일교포들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젠더와 민족>문제를  둘러싼 포지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나에 대해 공식적이고 본격적으로 비판을 행한 건 모두가 남성학자들이다. 여성인 경우는 김부자나 윤명숙 등 위안부문제연구자에 한한다.  이 구도를 어떻게 이해할지가 나와 이들의 대립을 이해하는 첫 번째 힌트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서경식으로부터 시작된 나에 대한 비판에 가세한 학자들—이재승, 박노자, 윤해동등-도 모두 남성학자였다. (물론, 여성학자,혹은  여성학 전공자들 중에도 소송에 반대하거나 나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후에 다시 쓰겠지만 이들의 비판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의 논지가 <일본을 면죄>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정영환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전후/현대일본과 재일교포지식인

정영환도 언급한 것처럼 나에 대한 비판은 10년전에 쓴  <화해를 위해서>발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비판한 건 정대협에 관여했던 재일교포여성학자 김부자였다. 좀 지나서 윤건차, 서경식이 “자세한 건 김부자에게 맡기고…”라면서 지극히 추상적인 비판을 시작했다. 하지만, 김부자에게도 나는 서경식이 앞에서 언급한  연구모임에서 알게 된 사이라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고,시간이 지나고 내 책을 더 읽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기대하며 같은 시기에 나온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를 보냈다.

훗날 반론을 쓰게 된 계기는, 서경식 선생이 어느날 한겨레신문에 실었던 칼럼이다. 나를 높이 평가해 준 일본의 진보지식인들이 나를 이용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는 썼고 (<타협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2008/9/13 한겨레신문), 다음해에 나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윤건차의 책이 한겨레에 크게 소개되었을 때였다.

당시 김부자등의 비판에 동조해 비판한 건 몇 명되지 않는 극소수의 일본인이었고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한국에서 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일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화해를 위해서>는 그가 발간에서  3년이나 지난 시기에 굳이 비판해야 할 만큼 한국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책을 이들이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갑자기 비판한 이유를 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문제는 서경식이 지향한 것이 현대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진보지식인)뿐 아니라 이들이 만들어온 전후일본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점이다. 일본 리버럴지식인들은 정말은 식민지지배에 대해 법적책임을 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근거없는 추측은 ,이후 한국진보의 일본불신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반론을 일본어로 썼고 일본매체에 발표했다. 김부자의 논문이 실린 건 일본매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후인 2009년 여름과 겨울에, 한겨레신문 한승동기자가 윤건차교수의 책소개에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은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한 책>이라고 쓰는 일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나는 이 왜곡보도를 접하고 경악했다. (이에 관한 경위는 제국의 위안부 후기에도 썼다)


지식인의 사고와 폭력

서경석의 생각(전후일본과 현대일본지식인과에 대한 비판)이 그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증거는, 2014년 6월,나에 대한 고발장에  서경식의 생각(내가 말한 “화해”와 용서를 마치 국가야합주의적 사고인 것처럼 치부하는 사고)이 쓰여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 때, 언론중재위에 가지 않았던 나의 5년전 선택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말하자면, 나에 대한 고발은, 직접적으로는 나눔의 집이라는 지원단체의 오독과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은 그들을 그렇게 시킨 건 이면에 있던 나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그런 경계심을 만들고 또 보이지 않게 지원했던 건 지식인들이었다. 나에 대한 첫 고발은 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허위>라는 내용이었지만 내가 반박문을 쓰자 원고측은 중간에 고발취지를 바꾸어 나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았다. 일련의 과정에서, 낯설거나 자신들과 다른 생각은 무조건 배척하고 손쉬운 배척수단으로 <일본우익>을 호명했다는 점에서 지식인도, 지원단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주로 진보계층에서 유통된 서경식과 윤건차등의 책이 나에 대한 인식을 <일본을 면죄하려는 위험한 여성>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확산시킨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위안부문제를 부정하고 <일본의 법적책임을 부정>한다는 이유다.

서경식이나 윤건차는 내 책이 일본우익의 사고를 “구체적으로”비판하기도 한 책이라는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저 <친일파의 책>으로 부각시키고 싶어 했다.

그들 외에도, 내가 아는 한 나의 책 이전엔 위안부문제에 대한 부정파들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비판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한국이나 일본의 지원자들은 위안부문제에 부정적인 이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우익!”이라는 단어로 손가락질했고 김부자가 나에 대해 “우파에 친화적”이라는 말로 비난한 것은 그 연장선상의 일이다.

그에 비하면 정영환은 그나마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고 그 부분은 진일보한 재일교포의 모습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영환은 나의 “방법”이 무언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책의 전체 의도와  결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문맥을 무시한 인용과 함께 프레임을  씌워 <위험하고 부도덕한 여성>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책이 결론적으로 <일본의 책임>을 묻는 책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일본에 책임을 묻는 방식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아마, 정영환이 소개한 대로, 그들이 20여년 지켜온 사고의 막강한 영향력이 흔들리는 사태를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러한 정황이 마치 일본이 책임을 무화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는 처럼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최근 몇 년동안 위안부문제에 지극히 무관심했던 일본인들이, 그리고 소녀상이 세워진 2011년 이후 반발하기 시작했던 일본인들이, 나의 책을 본 이후 위안부문제를 다시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얼마 전에 나는 우연히, 서승/서경식형제에 대한 구명운동을 20년이상 해 왔다는 일본인 목사의 부인이, 위안부문제 해결운동모임의 전 대표라는 사실을 알았다.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어보였던 서경식도 실상은 위안부문제관계자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셈이다. 내가 굳이 이 글에서 서경식에 언급하는 이유는 정영환이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하면서 서경식의 비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비판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왔던 이들이었는데 서경식 역시 그런 <관계>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않았던 셈이다.  나에 대한 서경식의 비판논지가 고발장에 그대로 원용되어 있었던 것을 지적했던 것은 “지식인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의 논지자체가, “무모한” 지원단체 이상으로, 현실적 포지션과 인적관계의 영향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이들의 논지는 적대와 “숙청”을 요구한다. 지원단체가 국가권력을 앞세워 나를 고발했던 건 그 결과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규탄을 통해 드러난 그런 그들의 방식과 사고의 결함이 어디에 있는지, 이후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나갈 생각이다. 이들의 방식이 20년이상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불화를 빚어왔던 이유가 바로 그런  사고의 결함에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평화도 만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포지션

이들은 “전후일본”을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한국에 정착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 2015년현재의 한국의 대일인식은 이들 재일교포가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들과 연대하며 20년 이상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라고 강조하고  “변하지 않는일본/사죄하지 않는 일본/뻔뻔한 일본”관을 심었고, 2015년 현재 한국인의 70퍼센트가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라고 믿게 만든, 정대협을 비롯한 운동단체들의 “운동”과 그들의 목소리를 그저 받아쓰기만 해온 언론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박유하는 “일본(가해자)이 잘못했는데 한국(피해자)이 잘못했다고 말한다”라면서 내가 일본을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는데, 내가 그들의 일본관을 비판하며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식의 부정확하고 비윤리적인 “태도”였다.

나는 이들 재일교포가 일본을 비판하려면 자신들을 차별없이 교수로 채용한 일본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김석범선생같은 작가가 20년이상 <화산도>를 하나의 문예지에 연재하면서 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전후/현대일본이었다.

결코 빠르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지만 일본사회는 변했고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결코 보지 않으려 했던 짧지 않은 갈등의 시간 끝에, 현재의 일본의 일부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회귀중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관계란 대체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화해를 위해서>에서 말하려 했던 건 그런 부분이었다. 그 책은 2001년 교과서문제가 있고서야 일본에 이른바 <양심적지식인과 시민>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될 만큼 전후일본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던 10년전, 한국을 향해 우선은 전후일본이 어떤 출발을 했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알리려 했던 책이다. 우리의 일본인식은 실은 전도된 부분이 적지 않다고.

상대를 비판하려면 일단은 총체적인 일본을 알고 나서 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정확한 비판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러 이유에서 우리에겐  총체적인 일본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나는 정영환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리버럴 지식인들이 말하고 싶어 한 것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총체적인 일본에 대해 우선 알리고자 했을 뿐이다. 부정적인 부분을 포함해서. 그건 그런 일에 태만했던 한국의 일본학연구자의 한사람으로서의 반성을 담은 작업이었다. 서경식의 비판은 나는 물론 일본의 진보지식인에 대한 모욕일 수 밖에 없다.

서경식의 비판은 우리에게 겨우 그 존재가 알려진 일본의 진보지식인을 비판부터 하는 일로 전후/현대일본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의 비판이 결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더구나  일본이 더 바뀌려면 진보지식인과의 연대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을 적으로 돌리고 나서 정영환은 누구와 손잡고 일본을 변화시키려 하는가? 서경식이나  정영환의 비판은,지극히 모놀로그적이다. 모놀로그로는,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

나는 정치와 학문, 일반인과 지식인에 대한 비판에서  <차이>를 의식하면서 쓰고 말한다. 정영환등 나를 비판하는 학자들과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아마도 이 점에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츠메소세키를 비판했고 그를 리버럴 지식인으로 떠받든 일본의 전후지식인과 현대지식인을 비판했지만, 그건 그만큼 지식인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사고는 때로 정치를 움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보통생활을 영위할 뿐인 일반인에 대한 비판은 그 결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이 나의 <방법>이다. 모놀르그보다는 다이얼로그가, 논문에서든 실천에서든 생산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사죄>를 우리는 어디에서 확인할 것인가?

수상이나 천황이 아무리 사죄한 들 국민들이 같은 심정을 가지지 않으면 한일일반인들은 끝내 소통할 수 없을 것이고 불화할 수 밖에 없다.우리는 천황이나 수상과 대화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90년대는 분명 애매하긴 해도 일본정부와 국민이 사죄하는 마음이 압도적인 다수였던 시대였다. 내가 아시아여성기금을 평가한 건 그런 정부와 국민의 마음이 담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그런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애매>하다고 비난했지만, 선명함 자체가 목적인 추궁은, 정의실현이라는 자기만족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숙청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생산적인 담론도 되지 못한다. 실제로 나에 대한 고발이 그것을 증명했다.

<고발에는 반대하지만..,>이라고 전제하면서 나를 비판했던 이들 중, 아무도 실제로 소송을 기각하라고 행동한  이는 없었다. 그들은 한국정부와 지원단체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말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나를 억압하는 걸 당연시했고 비판에 나섬으로써 나에 대한 억압에 가담했다. 학문적 견해를 사법부가 도구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나서서 제출했다.

그런데, 역사문제에 대한 판단을 국가와 사법부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학자들의 치욕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참담한 심경이다.


1)<역사비평>에 처음 이 글을 먼저 보냈으나 구체적인 반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게재되지 못했다. 다른 글로 대체했으나 이 글이 더 중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역사비평>112호에 게재한 글과 다소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그 글에서 내가 언급한 정영환의  문제는, 다른 남성학자들의 글에서도 대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발족 기념  심포지엄 글(<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에서도 그 일단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도 다시 쓸 생각이다.

출전 : 박유하 페이스북 노트

못다한 식민지책임 – 기시도시미츠 岸俊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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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식민지책임

<전후일본의 반전사상이 국민들에게 뿌리내린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식민지지배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오지 않았던 거 아닐까요>

금년 6월, 동경의 호세이대학에서 열린 일본사회문학회 30주년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한 한국/세종대 박유하교수는 그렇게 물었다.

부부이야기로 읽히는 경우가 많은 나츠메소세키 <명암>에는 가난 때문에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 근대소설을 바탕으로 박교수는 제국이 국민의 이동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 이주가 전쟁을 염두에 둔 국책이었다는 점,일본에서의 기민(棄民) 들이 식민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적했다.

그리고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요한 건 누구나가 기피하는 일을 가장 가난한 이들이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강제인지 매춘인지 하는 논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
그의 전문인 일본근대문학에 그려진 식민지의문제는, 역사문제논의에도 반영되었다.

2006년,아시아여성기금이 연 국제심포지엄에 패널로 참석했던 박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더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발언했었다.
금년 5월에 서울에서 식민지에 대한 관심에 대해 다시 물었을 때도 <개인적으로 차별당한 경험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인여성이라는 사실은 관계가 있습니다. 좋아해서 시작한 소세키연구가 진보지식인으로 불리는 것에도 의문을 가졌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저술한 것이 화제작 <제국의 위안부>이다. 교토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금년 2월에 열린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워크샵에서는 왜 썼는지,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위안부가 목소리를 낸 1991년, 누구나가 식민지지배문제로 이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 위안부문제논의에서 제국의 문제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본남성의 문제로만 축소되었습니다 >

<조선의 여성은 “애국”을 당했고 일본인이 되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 조선인 위안부상을 통해 식민지지배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 겁니다. 일본이외의 다른 제국국가의 문제도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서구일본학자들에 의한 금년 5월성명에는 <제국에 관련된 인종차별, 식민지주의와 전쟁,그리고 그것이 (중략)시민들에게 끼친 고통과 충분히 마주해 온 나라는 아직 어디도 없습니다> 라는 말이 이오진다. 그리고 일본정부에 대해 <과거의 식민지배와 전쟁당시 침략문제와 마주하라>고 요구했다.

박교수의 화해방안은 책임을 무화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한국판을 둘러싼 형사/민사쟁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책임은 과거의 제국 전체를 향한 난제가 아닐까.(기시도시미츠. 岸俊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