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日의 피해 기억은 평화 기원 마음
내 체험도 남 피해 이해할 때 의미
타인 목소리 귀 기울이는 태도가
개인·국가 간 상호이해 가능케 해
내년은 한일협정 60주년 되는 해
정확한 인식으로 교포 권익 보호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日의 피해 기억은 평화 기원 마음
내 체험도 남 피해 이해할 때 의미
타인 목소리 귀 기울이는 태도가
개인·국가 간 상호이해 가능케 해
내년은 한일협정 60주년 되는 해
정확한 인식으로 교포 권익 보호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눈부신 햇살 속 향기로운 시간
음악과 음식이 만드는 힘
인생에서 함께한 이들과의 공간
집이든 밖이든 기억이 담겨 애틋
기억을 부수는 폭력을 막는 건
타인들에 대한 다정과 이해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부친 징병 안 돼 태어난 하루키
“존재란 우연이고 빗방울일 뿐”
전후일본 정의한 오구라 기조
“전후일본은 喪中 세월이었다”
일제 치하와 6·25 겪은 우리
친일척결·멸공 외 애도해 봤나
https://munhwa.com/news/view.html?no=2024091301072911000001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나이 먹는 건 약자 되는 것
약자가 편안해야 좋은 사회
집에서 삶 마감하길 원하는
노년들의 바람과 마주할 때
재택의료·간병휴직 등 필요
요양사 직업 처우 높아져야
https://munhwa.com/news/view.html?no=2024081601072911000003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슬램덩크의 日 소도시 가마쿠라
바다와 산 어우러진 푸근한 공간
불필요한 욕망서 자유로운 모습
작고 오래된 집에서 우리보다 행복
이웃과 세상에 관심 더 가질 때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https://munhwa.com/news/view.html?no=2024071901032911000003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위안부운동, 선의로 시작했지만 방법은 잘못”
문화일보 김선영기자
2022-10-19
https://www.munhwa.com/reporter/reporter_view.html?usr_id=sun2
(2022년 8월 31일, 한국프레스센터)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모여주신 언론사 관계자 여러분들, 그리고 저를 둘러싼 일에 관심 갖고 참석해주신 분들께 먼저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저는 오늘로 저의 직장이었던 세종대를 정년퇴직하게 됩니다. 3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한 사람의 학자로서 연구와 교육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14년 6월 16일에 고소·고발당한 이후, 평온했던 저의 일상은 깨졌고 이후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8년 동안 저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의 강제연행을 부정했다거나 위안부 할머니를 폄훼했다는 등, 제 기억에 없는 일로 비난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정년을 맞게 된 오늘까지도 책은 아직 법정에 갇혀 있고 제가 아직 ‘피고인’ 신분을 벗지 못한 건 그런 비난들 때문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의 책은 발간 당시에는 언론에 오히려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었습니다. 고소·고발당한 건 무려 10개월이나 지난 후입니다. 이 10개월 동안 저를 둘러싼 새로운 변화는 ‘나눔의집’에 거주하시던 한 위안부 할머니와 친해졌다는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런 저를 나눔의집 소장이 경계했고, 책의 검토를 의뢰받은 한 변호사가 위안부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을 시켜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어, 무려 109곳을 삭제해야 한다면서, 형사, 민사, 그리고 판매금지 등 가처분신청, 이 세 가지 소송을 건 것이 이른바 <제국의 위안부> 고소·고발 사태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보다 앞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연)도 고발을 검토했었다는 사실을 저는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정대협 대표였던 윤미향 씨가 상의했다는 전 민변 회장 정연순 변호사는 <제국의 위안부>가 “정대협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정연순 페이스북, 2015년 12월 31일).
이 두 가지 사실은, <제국의 위안부> 소송이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라 주변인들이 일으킨 소송이라는 것을 명확히 말해줍니다.
그리고 징용문제에서 정대협만큼 오래 활동해온 최봉태 변호사가 나눔의집 소송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저는 올해 3월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최 변호사는 이용수 할머니의 변호사이기도 한데,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저의 책을 읽은 적이 없다고 저에게 두 번이나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정대협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가 아닌 지원단체를 비판한 책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관계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삭제를 요구한 109곳 중 3분의 1 이상이 정대협 관련 기술이기도 합니다.
이후의 싸움에서, 저는 형사 1심에선 승소(무죄 판결)했지만 2심에서는 패소(유죄 판결)했습니다. 당시의 판결 요지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박유하가 위안부를 매춘부라 한 건 아니지만, 독자들이 그렇게 읽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자의 독해력에 대한 책임이 저자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당연히 상고했습니다. 2017년 10월의 일입니다. 이후 대법원 계류 세월만도 곧 5년이 됩니다. 만약 무죄(파기환송) 판결이 나온다 해도 2심을 다시 진행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2억 7천만원(원고 1인당 3천만원)의 손해배상이 청구된 민사소송, 그리고 책 일부를 삭제당한 가처분신청 결과에 대한 이의신청 재판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대로 가면 10년을 넘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늘 이 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다못해 정년퇴직 전에는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제 바람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이 어떤 의미와 무게를 갖는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이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8년의 세월 동안 저는 SNS와 홈페이지, 세 권의 책을 통해, 그리고 인터뷰 등의 기회를 얻을 때마다 <제국의 위안부>는 고소·고발자들이 말하는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선 지지자들도 두 번의 항의성명, 세미나, 심포지엄, 책 등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입니다. 제 홈페이지(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광장으로, https://parkyuha.org/)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간 동안, 저도 고령화되었지만 지지자들도 고령화되었습니다. 그중엔 돌아가신 분도 몇 분 계십니다. 그만큼이나 긴 세월이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함께해주신 분들도 지칠 수밖에 없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듯, 저를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것은 이른바 ‘진보’진영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는 문재인 정부 때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야만 정치적 판결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법원에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저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공적으로는’ 강제연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실은 학계에서도 더이상 ‘강제연행’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가 ‘(위안부)운동부터 시작하다 보니 정확하지 않은 사실이 많았다는 것을 연구를 하면서 알게 됐다’고 말하기도 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다 금년 5월에 나온 한 일본인 진보학자의 위안부 논문도 일본 군부에 의한 “직접, 그리고 계획적인”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말합니다(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도쿄대 교수). 이제야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본격 논문이 나온 것입니다. 또한 위안부문제의 1인자로 일컬어져온 일본인 학자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이었는지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한국인 학자의 논문도 역시 금년 3월에 나왔습니다. 두 논문 다 실력 있는 중견학자에 의한 중후한 학술논문입니다.
하지만 위안부문제 주류학자들이 이 논문들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런 목소리는 소수이니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안으로는 논의하면서도 바깥으로는 함구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사회의 위안부 인식이 30년 전 인식과 거의 변함이 없는 것은, 관계자들이 그 이야기를 단 한 번도 언론이나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학자들과 운동가들은 강제연행에서 강제성, ‘동원’ 아닌 ‘위안소에서의 부자유’로 ‘강제’의 내용을 바꿔가며 ‘강제’라는 단어를 유지시켜왔습니다. 심지어 위안부문제에서 제1인자로 거론되는 학자조차 그런 기만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왜 이들은 이토록 ‘강제’라는 단어에 연연했을까요? 강제든 아니든 위안부 피해가 달라지는 일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위안부문제는 1990년대 초에 ‘문제’로서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북한은 일본과 국교정상화 교섭 중이었습니다. 북한은 위안부문제를 일본에 대한 ‘배상’을 받아낼 수 있는 문제로 간주했습니다. 냉전 시기에는 교류하지 못했던 남북은 이 시기에 일본, 중국, 유럽 등지에서 만나면서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북한의 대일배상문제는 어느새 한국의 위안부운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실제로 1992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는 북한이 배상을 받아낼 수 있도록 위안부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배상’을 받으려면 대상 행위가 불법이어야 합니다. 유엔의 위안부 인식을 담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는 위안부의 목을 잘라 국을 끓이라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증언은 북한 출신 위안부의 증언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가장 끔찍한 위안부 이야기들은 북한 출신 위안부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른바 ‘국제사회의 인식’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불법행위’ 가 되어 ‘배상’을 받으려면 위안부 동원이 군인=국가기관에 의한 ‘강제연행’이 되어야만 합니다. 함의를 바꾸어가면서까지 ‘강제’라는 단어가 유지되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안부문제는 유엔 등 국제사회를 향해 동시대의 유럽이며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부족/민족간 강간’인 것처럼 어필되었습니다. 원래 과거문제는 다루지 않았던 유엔이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족간 강간이 ‘불법’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집단간 관계가 ‘교전국’이어야 합니다. 동등한 위치에서 ‘전쟁’을 수행 중인 관계여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북한은 독립투쟁을 바탕으로 국가를 만들었다는 자기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들을 ‘교전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을 당시 활발히 교류했던 한국도 이어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위안부문제에 관여해왔던 법학자 등 다른 관계자들도 ‘북한의 대일배상’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2002년 ‘평양선언’에서 북한은 일본의 경제지원을 받기로 합의합니다. 그때의 평양선언이 이후 현실화되었다면 위안부문제가 그 이후로도 20년 동안이나 갈등을 이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문제와 납치문제가 불거지면서 평양선언은 유명무실화되었고, 이후 20년이 지나도록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갈등도 이어졌습니다.
작년 봄에 나온 위안부 재판 판결문에는 “교전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재판부는 한국을 교전국으로 간주하고,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를 적대시하는 민족 간의 집단강간으로 규정지었습니다. 물론 이런 판결은 원고의 주장에 따른 판결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위안부문제는 식민지범죄 아닌 ‘전쟁범죄’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상당히 회자되게 된 “법적 해결”, “법적 책임”이라는 단어는 사실 위안부문제를 전쟁범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는 전쟁범죄가 성립될 수 있는 교전국이 아니라 엄연히 종주국-식민지 관계입니다. 설령 국지적 전투가 있었다고 해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싫든 좋든 현대 한국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제도가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지고 시행된 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위안부는 식민지지배가 만든 존재입니다. 저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그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 사실이 직시되어야 한국이 시작한 위안부문제 운동의 의미가 온전히 살아날 것이고 올바른 해결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목에 굳이 ‘제국’을 넣은 이유입니다. <제국의 위안부>란, 제국에 동원당한 위안부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오랫동안 말해오지 않았습니다, ‘전쟁범죄’로서의 강조가 훨씬 자극적이고, 무엇보다 ‘강제연행=불법’이라야 이른바 ‘배상’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90년대에 이어 두번째로 사죄와 보상을 시도한 ‘한일합의’에 관계자들이 반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사죄와 반성과 기억은 ‘법’에 의존하지 않고도 가능합니다. 설사 ‘배상’을 받는다 해도 상대가 납득하지 않는 배상이 기억의 계승으로 이어질 리도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지금이라도 사태를 바로잡지 않으면 결국 가장 고통을 받는 건 위안부 할머니들일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입니다.
북한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이른바 ‘종북’ 운운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기를 바라고 있고, 이제라도 그것이 추진되기를 바랍니다. 달리 말하자면 1990년대 초, 혹은 2000년대 초에 북일수교가 가능했다면, 위안부문제가 이토록 오래 지속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징용문제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기업자산의 현금화가 우려되고 있지만, 징용은 국가가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징용은 준(準)징병 같은 것이었고, 조선인도 기업의 노동자를 넘어 ‘신민’으로서 동원되어 ‘국가를 위해’ 일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임금의 일부를 국가가 지급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기업을 대상으로 소송을 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사태입니다. 원래 일본과 미국에서 제기된 소송은 국가가 대상이었습니다. 패소로 끝났기 때문에 대상을 기업으로 바꾼 것이지만, 그런 식의 대응은 징용이라는 사태의 본질을 도외시한 대응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사 기업자산을 현금화해서 얼마간의 보상금이 지급된다 해도, 정작 중요한 일본인들이 징용 피해에 대해 기억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중요한 건 일본인들이 위안부문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징용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일일 터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오늘 날짜로 발간된 이 책 <역사와 마주하기>에 자세히 썼으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일본인들이 이 점을 생각하고 제대로 마주해주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일본어로 먼저 냈습니다.
이 30년 동안 역사문제에 법정이 관여하게 된 것은 위안부를 둘러싼 일본군의 행위를 강제연행, 학살로 이해한 법률가들이 이 문제를 전쟁범죄로 간주하고, 전쟁범죄를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을 참고하며 대응책을 강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태를 ‘역사의 사법화’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정은 학자들의 논의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학자들조차 역사전쟁에서 진영에 따라 사안을 판단하는 ‘학문의 정치화’ 현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위안부문제 등의 역사문제가 30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건 그 결과이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흐름을 바꾸려는 이들이 나타났지만, 이번엔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가져가려는 움직임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그런 정황은 과거 30년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고발을 주도한 최봉태 변호사나 박선아 변호사는 현재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장에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나눔의집 소장은 횡령 혐의로 해임당했고, 기소 중입니다. 원고로서 이름이 올라간 위안부 할머니 열한 분 중 현재 생존해 계신 분은 이미 몇 분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고발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저에게 청구한 1인당 3천만원은 제가 패소할 경우 누구에게 가는 걸까요? 작년에 있었던 위안부 재판에서 당사자 대신 원고로 이름이 올라와 있던 건 전 정대협 대표 윤미향 씨였는데, 저의 재판도 그런 식이 되는 걸까요?
한일관계가 경색된 것이나 제가 여전히 재판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간의 ‘주류’의 목소리가 아직 크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언론이 그동안 그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여왔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소송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런 목소리가 한국사회에서 아직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여론입니다. 우리 사회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한일관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저의 책도, 법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 큰 양극단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더라도 중요한 목소리들에 여러분들이 귀를 기울여주시면 우리 사회도 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국의 위안부>를 쓴 건 한국에 대한 실망과 혐한 감정이 일본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발당했고, 한일관계는 이후 해방 후 최악이라고 얘기되는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행동은 정치가가 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건 여론입니다. 한일관계 개선은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식전환이 있어야만 가능해질 것입니다. 제가 일본을 향해 위안부문제에 관해 “사죄와 보상이 필요하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써왔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국의 위안부> 역시 그런 책입니다
지난 8년 동안, 숫자는 많지 않았어도 저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주는 분들이 계셨기에 그래도 인식은 조금은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많은 분들이 귀기울여주시면 우리 사회도 한일관계도, 그리고 저를 둘러싼 상황도 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오늘 회견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종대 국제학부 교수, 박유하
지원 단체와 문 정부가 주장해 온 법적 책임이란 연구가 아직 불충분했던 시대에 도출된 주장이다. 법적 책임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도 아니다. 1990년대 다수가 사죄하는 마음을 가졌던 일본 국민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 일본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제 위안부 운동의 실패도 돌아봐야 한다. 지원 단체들의 목소리에 가려 당사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
위안부 11명에게서 고소당한 ‘제국의 위안부’ 저자
이용수 할머니 향한 도넘은 비판, “주객 전도…비난 멈춰야”
“일부 할머니 생전 정대협 운동 방식에 의문 품기도”
“2014년 심포지엄에서 할머니 목소리 공개한 것 미움 받았다”
“일본 설득하지 못한 것이 운동 본질적 한계…공과 평가해야”
[인터뷰]박유하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30년, 무엇 이뤘나” 읽기
● 정대협 비판하다 ‘마녀사냥’ 당해…빨갱이보다 무서운 친일파 낙인
● 정대협 운동, ‘돈’ 아닌 ‘인맥 30년’으로 들여다봐야
● 돈 받은 할머니들은 비난하고, 자신들 따르는 할머니들만 대변해
● 할머니들, 정대협 비판한 사실 알려질까 두려워해
● 사죄보다 보상 원한 할머니들 목소리 묻혀
●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배춘희 할머니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져
● 정대협이 日 양심적 지식인과 연대 막아…위안부 운동 이대론 안 된다
누구나 힘든 시기를 사는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뒤숭숭하고 먹고살기가 막막한 이런 때야말로 정신 줄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허문명의 SOUL’은 삶을 뒤흔들어대는 여러 난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영혼과 정신 줄을 꽉 붙잡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제국/식민지시대가 야기한 여러 문제들이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한국과 일본양국정부는 초기에는 비교적 공조하는 듯 했다. 정부간 공조가 엇나가기 시작한 건 90년대 후반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일본정부가 주도해 민간기구형식으로 만든 “아시아여성기금”이 지원단체의 강력한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한국정부가 대신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보상금을 실시하게 된 이후부터다(그래도 이때 60여명 할머니들이 기금과 일본총리의 사과문을 받았다). 그럼에도 2002년에 월드컵축구대회를 한일양국이 공동개최할 수 있었던 건, 당시엔 아직 정부간 공조틀이 기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일본에서도 존경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05년에도 독도문제가 일촉즉발의 사태를 야기하기도 했지만, 당시엔 양국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한 이들이 있어, 사태는 일단락되었었다. 평화로운 해결 뒤에는, 사려깊고 유능한 외교관들이 있었다.
갈등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도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했던 한일관계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한 건 2011년말,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이 세워진 이후부터다. 일본측에서 체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나는 한국을 좋아하는데 한국은 언제까지고 일본을 미워한다.”는 것이 관계개선희망을 버리기 시작한 일본인들의 목소리였고, 그건 노련한 정치가부터 젊은 학생까지 예외가 없었다. 그들은, “이제는 한국과 어떻게 사귀어야 할 지 방도를 모르겠다.”고 슬픔 혹은 분노를 담아 말했다.
하지만 이후, 일본의 그런 생각은 한국사회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어쩌다가 일본의 분노 혹은 체념이 전해져도, 90년대와 2000년대에 ‘피해자’ 지원단체의 주장이었던 “사죄하지 않는 일본/뻔뻔한 일본”의 이미지를 내면화하게 된 대부분 한국인들은 그저 적반하장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거나 일본과의 관계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자존심’ 가득한 태도로 일관했다. 일본은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식민지지배라는 과거가 만든 필연적 ‘감정’을 더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한국은 현대일본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려 하지 않았고, 평가하지도 않았다. 상대를 우선 제대로 보려 하는 사려깊은 태도를 갖는 이들이 양쪽에서 함께 적어진 건 그 결과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건, 지금 양측 국민들이 상대에 대해 갖게 된 인식이 대부분 학자와 지원단체등 ‘당사자 주변인’들, 혹은 일부 역사학자/법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언론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인식을 경쟁하듯 확산시켰는데, 그 경쟁은 좌우싸움, 다시 말해 냉전체제 종식 이후의 아이덴티티 싸움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지금 문제시되고 있는 징용판결은, 전적으로 일부 좌파학자들이 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던 시각에 기반한 판결이다. 다시 말해, 한일합방불법론, 1965년한일협정파기론,그리고 위안부문제등 과거의 ‘국민’동원 해결책으로서의 법적배상/책임론을 이 판결들은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 물론, 지금 병행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과거 사법부와 정부관계자들에 대한 ‘재심’ –조사/수사/처벌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판결들이 철저하게 우파적 시각에 의한 것이었다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은 좌파적 시각에 의한 것이다.
문제는 ‘좌파’의 시각이거나 ‘우파’의 시각 자체가 아니다. 그 시각들이 (1)학문적으로 올바른지, (2)아직 진행중인 학문적논의중 일부를 사법부가 무비판적으로 가져와 판결을 내려도 되는지, (3) 좌파와 우파가 혼재된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그러한 사법부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에 있다. 그리고 나는, 현정부가 지난 정부의 우행을 답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징용판결의 핵심은 배상금 요구가 과거의 학대와 차별에 대한 “위자료”라는 데에 있다. 일본이 이번 판결을 무조건 비난하는 건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판결문의 취지는 스스로 명확히 밝혔듯, 식민지지배가 야기한, 아직껏 일본사회에서 충분히 인식되지는 못했던, 식민지배치하에 놓였던 이들의 정신적/물리적 고통에 대한 배상금 요구였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가 일어난 건 냉전체제때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했을 때 ‘식민지지배’에 대한 배상금요구를 징용자등 일제에 ‘국민’으로서 동원당한 이들이 대표해야 하는지는 별개문제다. ‘식민지 지배’가 만든 차별이 야기한 최대 피해자는, ‘제국국민’으로 간주되어 동원되었던 이들 이상으로, ‘제국’을 위협하는 ‘적’으로 표상되어 길가다 살해당해야 했던 관동대지진 피해자라고 해야 한다. 혹은 물리적인 고통이 없었어도 총체적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아야 했던 모든 피지배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국회가 그러한 과거에 대한 총체적인 사죄의 마음을 담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국회결의라는 형식에 담아 했으면 좋겠다고 최근 몇 년 주장해 왔다. ‘국회’야말로 말 그대로 ‘국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란 주관적인 것이기도 해서, 타자가 그 크기를 단정할 일은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피해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그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말없는 죽은 자들도 떠올려야 한다. 동시에, 개인의 피해가 정치/외교문제가 되어 ‘국민’의 문제로 비화한 이상,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박근혜 정부가 만든 ‘한일합의’는 양국 외교관들이 노력해 만들어낸 성과였지만, 올바른 사태이해에 바탕한 ‘국민적 합의’가 아직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들의 생각을 ‘국민상식’화하는데 성공한 일부 학자/지원단체의 반발이 정부를 움직여 결국 합의를 뒤엎게 한 건 예견된 일이었다.
한일 양국은 과거에 한일역사공동위원회를 만들어 접점찾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그 실패는 상대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자기주장 내세우기에 급급했던 결과였다.
따라서 제안한다. 다시 한번 과거역사가 만든 여러문제들을 논의하는 한일협의체를 만들자고. 그리고 정부와 학자들이 지금의 불화를 슬기롭게 넘어설 방도를 찾아 보자고. 언론은 문제의 논점이 어디에 있는지 그 논의를 경청하고, 각 문제들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고작 몇사람의 주장이 언론을 통해 전국민의 인식이 되고 마는 이제까지의 구조를 깨뜨릴 수 있다.
중요한 건 결과보다 대화 자체다. 대화가 이어지는 한, 과거의 불행한 시간들은 극복가능하다. 더 늦기 전에,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이 4반세기의 갈등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늘 발밑 아래 있는 법이다.
다시, 대화를 위한 한일협의체를 만들기를 제안한다. 양쪽정부와,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는 한일 학자와, 그 외 관계자들이 함께 하는 기구가 시급히 필요하다. 화해치유재단이 남긴 금액과 정부가 새로 마련한 금액을 그 대화에 사용할 수 있다면 바람직하다. 갈등이 남긴 유산으로도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양국정부가 차세대에게 보여 주기를 바란다.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c340e64e4b01e2d51f64da8
얼마전에, 초청받았던 한 세미나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했던 이야기중 일부를 한 언론이 가져다가 나의 취지와는 다르게 보도한 탓에 또다시 세간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미 여러번 반복된 일이기도 하고, 수정요청을 한다 해도 바뀐 적도 별로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사태에 대해 따로 해명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그날 사용했던 발언요지자료를 올리기는 했지만, 아직 문장으로 만들지 않은 채로 방치중이다.
늦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 쓰기로 한 건, 최근에
미국(Why Is the Plight of ‘Comfort Women’ Still So Controversial?),
영국(Vietnamese women raped in wartime seek justice for a lifetime of pain and prejudice),그리고
독일(Debatte Trostfrauen in SüdkoreaZum Nutzen der Nation)의 매체가, 한국의 위안부 운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우려가 섞인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 기사를 한국에 전달해 공론화한 매체도 아직은 없어 보이는 것도,내가 굳이 언급하는 이유중 하나다.
8월10일에 서울에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위안부문제와 한일관계 전망>이라는 세미나에서 내가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표현으로 지적하려 했던 것은, 우리사회에서 위안부가 너무나 `가볍게` 소비되는 현상이었다. 많은 이들이, 악의적으로 보도한 기자의 의도대로, 내 발언을 위안부에 대한 마음을 비판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비난했지만, 내가 비판한 건 위안부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위안부가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표현되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수용과 표현이 나올 법 한 소녀상의 원제작자(조각가 뿐 아니라 운동단체 포함)들의 조선인 위안부 이해와 표현방식이었다.
나는 그 날 세미나에서, 소녀상 자체에 관해서는 오히려 `철거는 역효과`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소녀상`관련 의견을 전하고 싶었다면 가장 우선시되었어야 할 그 부분은 빼놓고 기자는 `아이돌화`만을 헤드라인으로 뽑아 보도한 것이었다. 심지어,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 이라는 소제목 아래 몇가지 `갈등`양상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가져와 기자는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이 위안부의 아이돌화`를 가져왔다고 내가 말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그건 기자의 해석일 뿐, 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런 식의 단선적이고 탈맥락적인 보도에 접한 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런 기사가 보여주는 성급함과 강퍅함에서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위기를 본다.
나는 `소녀상의 피상적인 소비양상에 대한 비판 필요`라고 자료집에 썼다. (기자는 그 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자료집만으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 `피상적인 소비양상`이란, 바로 여고생들이 그렸다는 순정만화풍 스티커등에 대해 한 말이었다. 그 스티커를 페이스북에 올려 두었더니 `위안부의 모에`현상이라고 지적한 이도 있었는데, 타당한 분석으로 보인다. 밝고 활기차고 앙증맞기까지 한 그 그림 속 캐릭터는, 소녀상을 만든 이들이 환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 노란 나비와 함께 놀고 있는, 글자그대로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소녀`였다. 말하자면 그 그림은, 위안부로 동원되기 이전의 천진하고 행복한 시절을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심지어 대사관 앞 소녀처럼 분노나 저항의 눈빛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두말 할 것 없이, 그 그림은, 위안부의 불행했던 과거—현실이 아니라 있을 수 있었던(존재하지 않았던) 행복했던 시절, 즉 위안부 이전의 시간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물론 그림을 그린 여고생들은 위안부 할머니에게
사라지고 만 행복한 소녀시절을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담았겠지만(실제로 많은 이들이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일본을 향해 외쳤다), 그림 속의 시간이 위안부체험 자체와 괴리된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한, 그 그림은 참혹한 위안부생활은 망각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소녀의 의식은, 타자의 위안부 체험을 마주하기보다, 가급적 마주하지 않는 쪽에 서 있다. 본인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리고 아마도, 한 학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지적했듯 자신을 투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실의 위안부란, 이미 모두가 아는 것처럼 끔찍한 신체적 고통을 수반한 체험이었다. 또 그 후유증으로 인해, 돌아와서도 대부분은 `병`과 함께 해야 했으니 위안부란 대부분 훼손된 신체의 주인공들이다. 더구나, 현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대상—노쇠한 신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그림을 그렸다는 여고생에게 그런 할머니를 방문해 목욕 서비스라도 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초등학생을 죽이고 타교학생이나 동급생에 대한 구타/폭행도 마다 하지 않는, `타자의 몸`의 존귀함과 고통에 무감해진 오늘의 한국의 10대들중에, 위안부할머니의 현실의 ` 늙은 `몸–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상처로 가득한 몸` 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보여줄 소녀들은, 없지 않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봉사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든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든, 그들은 할머니를 위한 시위에 참석하고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행위는 일정부분, 위안부할머니의 그 옛날 진짜 체험과 오늘의 현실을 마주하지 않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말하자면 위안부 `동상`이나 `그림`에 대한 `기림`이 현재의 소비방식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그와 마주하는 시간은 오히려 과거의 위안부와 등신대로 마주하는 일에서 “효과적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일 수 있다.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말로 내가 우려했던 건 위안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앞에 서면 설수록 다른 한편으로 진짜 위안부와 멀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나는 나는 우려했다. 달리 말하면 너무나 가볍게 소비하면서, 아무도 그 안의 진실을 제대로 보려고는 하지 않는.
여고생들이 그린 천진난만한 그림에야 죄가 없지만, 위안부들이 겪은 고통을 <여성의 보편체험>으로서 이해하고 `노인`의 고독과 진정으로 마주하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한단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표현들이 공유되고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나는 우려를 표했을 뿐이다. 그저 일본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상으로만 기능하는 한, 소녀상 역시 언젠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동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나는 우려했다. 이승복소년상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말한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얼마전에 군함도 영화에 대해 썼던 글에서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고 썼던 맥락과 다르지 않다. (<군함도〉엔 '피해자'가 없다)
여고생이 그린 그저 `귀여운` 소녀, 한번도 능욕당한 적이 없는 천진한 소녀캐릭터는, 굳이 말하자면 한번도 식민지화되지 않은 우리자신이다. 하지만, 조선이 그랬듯, 위안부로 가야 했던 소녀/처녀들은 대부분 가기 전에도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없지 않지만, 그들은 대부분,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의 집에 양녀로 가야 했거나, 남편이나 오빠, 혹은 아버지의 박대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마음과 존중을 비판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과거를 회피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직면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그 때문에 이제 오히려 외부사람들에 의해 마주하기를 요구받게 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우리 먼저 나서서 생각해 보자고 나는 말하려 했다.
가볍게 소비되든 진심으로 모셔지든, 과다표현은 대부분, 대상자체보다는 자기자신을 위한 것이기 마련이다. 버스 안 플라스틱 소녀상을 향해 “아이고 여기 계시구나“라고 말했다는 서울시장의 한마디가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의 한국인, 특히 남성들은, 그 옛날 소녀에 대한 오늘의 자신의 배려를 확인하는 일로, 오늘에 대한 자기만족은 물론, 과거로 돌아가 `지켜주지 못했던(않았던) 나`까지 무의식 속에 면죄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극복하는 방법은, 실제와는 다른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마주하는 일에 있다. 실재한 과거에 대한 직시와 분석만이,과거와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고향에 돌아와 깨끗하고 아름다운, 독립한 내 나라의 수도를 구경했어야 할 소녀들이 없지는 않다. 전쟁당시, 칠십 몇년전에 위안소와 전쟁터에서 병사, 자살, 폭사, 혹은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자살의 희생양이 된 이들이 그들이다.
따라서, 하얀 저고리/까만 치마모습의 플라스틱 소녀상이 누군가를 상징한다면 그런 이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었어야 한다 . 제작자들은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소녀상은 돌아온 `귀신`이었고. 버스 소녀상을 처음 본 이들이 으스스하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 올바른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산 자로 소환되었기에(대사관 앞 소녀상 뒷면에는, 동상이 (운동에 참여한 노인과 운동단체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조형물이라고 쓰여 있다),그녀들은 모처럼 소환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006.01.09 교수신문 기고
정말은 10년 후에나 가능한 것이었다는 연구를 앞당기기 위해 두어진 황우석 교수의 무리수는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여전히 시간이 성패를 가름하는 사회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근대화’라는 것이 ‘공간의 시간화’임은 이미 지적된 지 오래지만 그렇게 우리는 아직 우리의 공간을 시간적으로 보다 앞선 위치에 두려는 근대화를 시도 중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게임에서 보조를 맞추지 않는 타자를 ‘잔여’(스튜어트 홀)로 규정하고 지배에 나선 것이 다름 아닌 근대였다. ‘월화수목금금금’ 태세라고 황우석 교수가 강조하고 매스컴이 칭송했던 연구태세는 그런 의미에서 최첨단을 가면서도 근대적이라는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그러한 근대주의가 외부와 차단된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권력화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하리라. 연구원들이 개인의 것이어야 할 휴일과 자신의 난자를 제공하기에 이른 이유가, 언젠가 공동연구자로 논문에 이름이 오르는 날을 위한 것이었건 혹은 단순히 ‘난자가 담긴 접시를 엎지른’ 죄 때문이었건, ‘선생님께 대적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난자제공 연구원의 후회는 난치병환자를 위한 박애주의가 – 내부인에게조차 결코 박애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배적인 권력의 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처연하기조차 하다.
그런 지배구조가 드러날 수 없었던 것은 그/그녀들이 어디까지 ‘무명의 희생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무명성은 ‘희생’의 존재를 부풀리면서 동시에 결코 공공의 장으로 끌어내지는 않는다. 그/그녀들의 ‘희생적’ 행위가 한편으로는 칭송되면서도 결코 개인의 목소리를 내서는 안되었던 이유도, 따라서 결코 표창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근대국민국가는 그러한 ’무명’인들을 무수히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그와는 대조적으로 단 하나의 영웅적인 고유명 역시 필요로 한다. 분명 황우석 ‘팀’이라는 다수가 있었음에도 그리고 가끔은 그들의 존재가 부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스컴과 사회가 황우석이라는 단 하나의 고유명을 필요로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고유명’은 그가 보다 좋은 조건으로 타국에서 연구할 것을 제의하는 ‘타국의 유혹’을 거부하는 이임을 강조해 동시대의 ‘애국자이야기’를 완성한다.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견딜수 없게 만들었다는 황우석 교수의 강연에 수퍼맨의 슬라이드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황교수가 민족주의의 속성을 숙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과학은 그곳에서 종교의 양상을 띤다. ‘내가 너를 걷게 해 주리라.’
민족주의적 열망은 늘 패권주의적이지만 그것이 드러나서는 안되기에 수난의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한다. ‘세계생명공학의 고지에 태극기를 꽂고 온 기분’이라거나 ‘과학에는 조국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거나 하는 황우석 교수의 말은 이미 최대급의 민족주의적 수사이지만 그보다도 더 듣는 이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말은 ‘식민지화와 동족상잔이라는 고난’을 겪은 나라 한국에 하느님이 이제 ‘어깨 펴고 살아보라고 이런 천운을 주었다’는 말이리라.
황우석 교수에 대한 그동안의 열광현상은 단순히 그가 세계를 상대로 쾌거를 올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실과 함께, 혹은 그 사실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그가 우리에게 늘 자신의 능력과 함께 애국심을 확인시켜 국민들에게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중적 스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마치 금모으기 운동처럼,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자를 채취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분명 민족주의가 존재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난치병 환자 치료’라는 정의담론이 장애자에 대한 무관심/차별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민족주의가 강하면서도 국민의 70퍼센트가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는 현상과 닮은 꼴이기도 하다. 한국적 민족주의의 문제는 오히려 그런 관념성에 있다.
박유하 / 세종대·일문학
▲프리다 칼로 作, ‘칼로 몇번 가볍게 찌르기’, 1935, 금속에 유채, 29.5×39.5㎝ ©
2005.11.23 교수신문 기고
그들은 ‘국익’이라는 단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문제가 되고 있는 황우석 교수연구팀을 대표하는 줄기세포연구허브센터도, 모든 책임을 혼자 지려 작정한 듯한 병원측도, 또 그들의 윤리성을 고발하는 방송사측도, 그러한 그들을 신중치 못한 보도라며 비난하는 시청자들까지, 자신들의 사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단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국익’이라는 단어다.
줄기세포연구허브센터에서는 현재의 파문이 과장이면서 매도일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국익’에 반하는 일이고, 난자를 채취한 병원측에서는 ‘세계적 성과’를 거둔 연구를 문제 삼는 것은 ‘국익’에 반하는 일이며, 방송사측은 그럼에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국익’이고 시청자들은 황 교수의 연구를 비난하는 일은 ‘국익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방송사에 대해 훈계한다.
그들이 공통으로 꿈꾸고 있는 것이 줄기세포연구의 성공이 가져다 줄 세계로부터의 찬탄과 그에 따를 경제적 이득, 혹은 적어도 ‘도덕적인 한국상’에서 얻어질 긍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국익’이리라.
그러나 그렇게 ‘국익’ 담론이 무성할 때 그 ‘국익’의 성취가 다름아닌 ‘여성’들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은폐된다. 연구의 문제점을 말하기 위해 ‘법’이 이야기되고 윤리가 말해지면서도 그러한 동원에 의해 훼손되는 여성들의 ‘신체’가 겪을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거나 경시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문제는 금품이 난자공여자들에게 제공되었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있지 않다. 문제는, 교통비와 15일간의 ‘생계지장’에 대한 대가로서의 150만원의 수수여부가 아니라, ‘성스러운’(황우석 교수의 발언) 그녀들의 ‘자발적’ ‘희생’을 이끌어낸 것이 실제로는 ‘경제적 이유’임에도 그들이 ‘자발적으로’ ’희생정신’을 발휘해 ’기증’했다고 생각토록 만드는 국익담론의 이데올로기에 있는 것이다. 생명윤리법 시행전인가 아닌가-합법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 역시 ‘국가의 필요’에 의한 규범이 다름아닌 ‘법’인 한, 문제의 핵심을 말한 논의일 수는 없다.
‘성숙하고 싱싱한’ 난자를 찾기 어려웠다는 병원측의 변에 의거해 추정한다면 젊은 여성들이었을 것이 분명한 이 여성들을(난자를) ‘사’서 ‘관리’(연구)한 것이 남성의사/연구자이자 국가라는 가부장제적 시스템이라는 점에 문제의 핵심은 존재한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신체에 고통을 주는 일이 우선은 ‘연구’를 위한 것이며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사회적 설득과 (경제적)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난자를 팔았으리라. 그들은 어쩌면 원조교제처럼 성차이와 계급차이가 빚어내는 사회구조의 결과로 ‘자발적으로’ (성대신) ‘난자’를 매매한 것일터이니, 그들이 ‘동의’를 했는가 아닌가 역시 문제일 수는 없다.
‘국익’의 훼손을 두려워하는 담론으로 국가를 보호하려는 입장에서는 공범일 수밖에 없는 논란의 주인공들에게는,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도덕성에 대한 외국의 비판은 그저 ’시기’이거나 잘나가는 한국을 폄훼하려는 음모일 뿐이다. 매매되는 ‘난자’에 관한, 혹은 실험대상이 되는 난자에 대한 윤리논란은 있어도 그 난자가 제공되기까지의 여성자신의 신체의 보호에 대해서는 말해지지 않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자신의 신체를 보호할 근거가 되는 섹슈얼 아이덴티티보다 국익을 우선할 내셔널아이덴티티가 우선시되게 된 근대의 패러다임을 아직 살아가는 오늘, 그래서 ‘배아의 생명의 존엄성’은 존중되지만(혹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대전제는 살아 있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다 자란’ 성인의 신체는 훼손해도 된다는 사고는 변함없이 그 뿌리를 탄탄히 내려 이 사회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렇게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행위를 당연시하는 사고는 여전히 ‘공’을 위한 행위로 착각되어 위안부와 군인을 생산해내리라.
‘난자’라는 단어가 원래 위치했던 사적이고도 은밀한 공간을 벗어나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이라는 공공의 영역을 활보하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개인의 ‘몸’이 국가를 위한 것이 될 때 어떻게 일상성을 벗어나 왜곡된 ‘공공’의 장을 확보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에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공성’이 존재할 여지는 없다는 점이다.
박유하 / 세종대·일문학
한번쯤은 일본과 대적해 보고 싶었던 조선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 영화.
220억이나 들였다는 영화 〈군함도〉를 이렇게 밖에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건 슬픈 일일 뿐 아니라 거의 재앙이다. 개봉 직후에 영화를 보러 간 적이 거의 없는 내가 이렇게 일찍 보게 된 건, 첫날에만 백만 가까운 사람이 봤다는 얘기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사작가(이상한 명칭이다) 심용환씨가 군함도를 옹호하느라 〈귀향〉을 비판했다가 문제가 되고 있는 듯한데, 군함도에 비하면 귀향이 백 배 낫다. 귀향에선 최소한 피해자에 대한 제작자의 아픈 마음이 느껴지고 공감 가능한 기본정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귀향에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군함도엔 과거 인간들이 행한 일에 대한 아픔, 그래서 일본인조차 감동시킬 수 있는 호소력이 없다. 그리고 그저 과거의 아픔을 성찰 없이 곧바로 오늘의 긍지로 치환시킨 21세기 대한민국의 대리만족만 있다. 제작자와 출연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곳에선 “피해자”란 오로지 관념일 뿐이고, 그렇게 형해화된 “피해자”는 쉽게 소비될 수밖에 없다.
기업위안소가 실은 유곽이었음을 보여 준다거나 우리 안의 친일파를 보여주는 부분은 진일보하려는 시도로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 안의 친일파를 그저 보여주고 응징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자성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 안의 그들을 “그들”로 그리는 한. 군함도는 여전히 일본과 조선을 대립구조로 묘사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기존영화와 다르지 않다.
이하는 눈에 띄는 문제 몇 가지.
1) 강제연행? 여전히 마구잡이식 강제연행이 중심이었던 것처럼 묘사된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납득 가능한 책을 쓴 도쿄대학 도노무라 교수에 의하면, 국민 총동원령에 의해 징용이 가능해진 건 사실이지만 마구잡이로 끌어가는 경우는 (있었을 수 있으나)예외적인 일이었다. 강제성을 과장/강조하지 않아도 피해를 말하는 건 가능하다.
2) 일본인이 조선인을 가혹하게 다루었을 수는 있지만, 쉽게 총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식민지인이란 그들에게 “자원”이었으므로.
3) 징용자들과 함께 가던 여자나 소녀를 갑자기 강압적으로 끌어가 유곽으로 보내는 사태도 있기 힘든 일이다. 탄광 근처에도 기업위안소라 불리게 된 유곽이나 요리점이 있었지만 위안부와 남성징용은 동원루트 자체가 다르다.
4)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성병검사받는 설정은 (감독 말대로) 픽션으로 봐야 한다.
5)위안부 여성을 못이 박힌 판자 위에서 굴리는 장면은 북한 출신 할머니의 증언을 살린 것이겠지만, 전무후무한 이 증언은 사실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케이스다. 아편에 중독된 여성을 업주가 못이 박힌 도구로 처벌했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증언은 그런 체험의 기억이 만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안부 여성에 대한 폭행은 많았지만, 남성들의 향수병을 치유하고 생산능력을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자원”을 굳이 고문해서 훼손할 필요가 지배자에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훼손하는 건 어디까지나 반체제적 대상이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문신 역시 마찬가지.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른바 문신 할머니는 북한 출신 할머니 오로지 한 사람이다. 예외적인 케이스가 상징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픽션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로 믿었을 가장 끔찍한 증언을 위안부 이야기에 넣은 감독의 의도는 바로 그런 의도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6) 징용자와 고용주의 대립을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쟁처럼 표현한 건 징용문제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족하다는 증거.
7) 임금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지급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한 것도 중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8) “군함도의 현실”이 전쟁범죄라는 이해, 그러니 기억하는 이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일본인이 생각했을 거라는 설정이야말로 대표적 픽션. 조선인 징용은 식민지화의 결과였고, 심지어 합법화한 국민동원이었다. 죄를 추궁하고 싶다 해도 구조적으로 전쟁범죄일 수도 없거니와 이런 식의 상상은 오히려 식민지배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9) 조선인의 단합 장면에서 촛불을 사용한 건 아직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촛불집회를 불러내 “민중의 힘”을 보여주려는 의식의 발로. 결국 이 영화는 과거의 영화가 아니라 현재의 생각과 체험을 과거에 투영시킨 현대영화일 뿐이다. 당사자가 철저하게 배제된.
10) 남성성을 과도하게 드러내고 있어 젠더론적으로도 문제다. 체격 좋은 소지섭은 전혀 깡패 같지 않고,키크고 잘생긴 송중기는 태양의 후예의 멋진 군인을 재연할 뿐이다. 배고프고 고달팠을 광복군은 그곳에 없다. (황정민 딸역의 캐릭터가 가장 이해 되지 않았다.)
11)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라는 조선인의 발언은 피해자 지위에 안주하는 발언이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라고 외치는 악덕일본인의 발언은 피상적인 제국주의자의 표상이다. 물론 그렇게 외치는 일본인들은 오늘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일본국민 전체 속에서 분명히 소수인 그들을 끊임없이 소환해서 경계와 불신을 이어가도록 요구해 이익을 보는 건 도대체 누구인가?
12) 픽션이라는 말로 역사고증적인 추궁을 피해갈 장치를 마련해 두면서도, 마지막 엔딩자막엔 세계문화유산 설명에 징용이 설명되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감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어정쩡함에 있다.
13) 각본은 류승완 감독(과 또 다른 한 사람)이었다. 욕망의 거침없는 표출이 상상력(픽션)이라는 말로 혼동된 최악의 경우. 좀 더 섬세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을 가진 작가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상상하고 이해하는 일이란 과거를 산,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의 내면의 심연에 가닿는 일이다. 어두운 땅밑체험을 추체험한들 “오늘의 나”를 벗어나지 않는 한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쉽게 설명된 역사일수록 경계되어야 하는 이유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지만, 영화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
계간 [사람과 사회] 2017년 봄호
인터뷰: 박유하에게 묻다.
계간 [사람과 사회] 2017년 봄호 전체 링크
[박유하를 위해 박유하에게 묻다] 링크
무엇을 지킬 것인가
외교부가 부산 소녀상문제 풀기에 나선 것 같다. 하지만 소녀상 이전요구는 문제의 답이 아니다.
분명, 일시귀국이라고는 하지만 일본대사가 본국귀국후 이렇게 오래 복귀하지 않은 적은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외교부가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지자체가, 시민의 의사를 넘어서 행동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강제이전`은 현재이상으로 사태를 악화시킨다.
사실 나는, 부산소녀상 설치문제를 두고 일본정부가 대사를 복귀시킨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분노를 표명하면 소녀상이 철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일본의 한국이해는 아직 충분치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우선 한국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정치가, 언론, 국민들 대부분이 `한일합의는 잘못된 것이고 소녀상은 그것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니 옳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한일합의의 정당성이나 빈조약을 들어 철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토록 갈등이 깊은데도, 문제의 소녀상이 어떤 의미인지, 한일합의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성한다. 그런 식의 사고정지사태가, 한쪽은 `지키는` 일에 온힘을 다하도록, 다른 한쪽은 이제 물리력을 행사할 지 여부를 재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물론 첫번째로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위안부문제의 경우 오랜 세월에 걸쳐 언론이 적극적으로 보도한 결과, 이미 `온국민의 상식`이 된 구체적인 이해가 존재한다. 작년에 개봉한 `귀향`은, 그런 현대한국의 `집단기억`을 담은 영화다.
그런데, 그런 이해는 과연 옳은 것일까. 나는 작년에 개봉 직후에 이 영화를 봤는데 심경이 복잡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영화에 표현된 `정서`는 옳고, `사실`은 옳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정서에 공감하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한 예로, 불에 태워지는 장면은 한 할머니의 그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데, 이 할머니의 첫 구술에 의하면, 여성들을 불에 태운 건 학살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들어 죽은 여성들을 화장하기 위해서다. 또다른 분의 수기에는, 스스로 다른 위안부여성을 화장해야 했던 이야기도 나온다.
비판을 하려면, 그런 끔찍힌 경험을 하도록 만든 전쟁과 군인/위안부간의 위계질서, 그리고 그런 위계질서를 만들었던 일본의 식민지지배 책임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한다. 비판은, 정확해야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결국 위안부문제는, 조선인위안부란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이 문제발생 이후 4반세기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본이 무엇을 했거나 못했는지를 정확히 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더구나 초기와 달리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국민적인 이해와 합의가 필요해졌다.
따라서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한일정부는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협의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논의를 위해 일본정부는 주한일본대사를 즉각 복귀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협의체는, 위안부문제에 관해 오래 관여해 온, 그러나 대립중인 한일학자들을 주구성원으로 하되, 지원단체와 위안부당사자와 언론이 방청하거나 중계하도록 하고, 의문을 던지고 답하는 일이 가능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 사실 논점은 많지 않다. 그리고 양국민들의 공통의 이해를 이끌어야 한다.
위안부문제는 양국국민이 너무나 잘 아는 문제가 되어 더이상 정부간 합의만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었다. 박근혜정부가 간과한 것은 그 지점이다.
갈등이 2000년대 이후 본격화 된 것은, 민주화와 인터넷 보급의 결과로 시민들이 힘을 갖게 된 21세기적 세계를 반영한다.
소녀상 비판 중에 `당사자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내가 만났던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은 `왜 해결이 안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계셨다.
그런데, 지원단체는 외교부와 무려 십수회의 의견조정을 거쳤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사자를 도외시`한 건 누구일까.
이 모든 물음이 다시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돈을 받았으니 끝났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물음이 없고, `돈따위로 해결하려 하지 말라`는 생각에는 어렵게 합의를 이루어낸 `외교`에 대한 존중이 없다. 무엇보다, `책임이란 무엇으로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없다.
소녀상을 지키려는 이들은 소녀상이 `아픔`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분명 소녀상 자체는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 아닌 영사관이나 대사관 앞에 서 있는 소녀상은 분명 `저항과 항의`를 표상한다. 실제로 소녀상 뒷면에는 `숭고한 정신`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소녀상은 정말은 `그` 위안부 소녀가 아니라, 90년대 이후의 `운동`과, 운동에 담겼던 `끈기있는 항의정신`의 표상이다. 이런 식으로, 4반세기 이어지면서, 위안부문제에는 적지 않은 의식 혹은 무의식의 트릭이 존재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 항의가 옳다면, 얼마나 옳은지,왜 옳은지에 대한 국민적인 물음과 확인이 다시 필요하다.
소녀든 항의정신이든 `지키는`일은 숭고하다. 하지만 사고정지상태로 `지키`거나 반대하는 일은, 결국 누구의 자존심도 지키지 못한다.
더 늦기 전에, 사려깊은 행동이 필요하다. 불화는, 상대뿐 아니라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