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5/4/17

사람이나 언론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앞으로는 진보든 보수든, 나의 논지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이들이면 기꺼이 소통할 생각이다. 나를 상처준 이들은 이른바 진보계열에 속하는 이들이지만 그들은 보수 이상으로 보수적이었다. 오로지 기존주장이나 입장을 “지키려”고만 했다는 점에서.

물론 그들 안에도 지혜롭고 유연한 이들은 당연히 있었고, 그동안 견뎌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들 덕이다.

나에 대한 비판/지지여부를 나누는 건, 좌우이념이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정보량과 사고의 유연성인 듯 하다. 그럼에도 가장 극심한 폭력이 좌우 양극단에서 나왔다는 건 지적 보수의 정서적 빈곤을 보여준 것일 터.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을 만드는 건 언제든, 이념도 이상도 아닌, 인간성이다.

그런 생각으로 응했던 첫번째 글이 나왔다. 일본어판도 영어판도 있는데 정작 한국어판은 못 만들었던 <제국의 위안부>요약이다. 나는 기지를 반대하기 때문에 보수적 입장에 있는 이들도 나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이 좌우 상관없이 읽혀졌으면 좋겠다. 최소한의 공유가능한 부분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기 때문에.

(제목은 내가 붙이지 않았다.ㅠ)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38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01385753221671

설안재, ‘친일파’ 와 민족주의에 관해

 

4월 6일 포스트

‘친일파’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모호하고, 포괄적이며 때론 오해의 여지가 있으며, 한편 식민지 상황에서 자기배반의 매국적 변절의 길을 걸었던 일부 지식인들을 지칭하는 한정된 것이라면 적절한 것도 같고.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 하루밤 간호 당번서느라 왔는데, 별로 할일도 없고 잠도 안올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며, 혹시 사실과 다른, 또는 논리적인 문제가 있어 지적하시면 받아들일 거임) 親曰이라면 나도 한때 친일파였는데, 이유는 IMF이후 계열사 분리로 남쪽 섬의 어느 대형조선소로 발령이 났고, 한 10여 년 근무하며 ‘일본인 Inspector(감독관)’들과 친하게 지냈다. 저녁에는 BAR에 가서 맥주도 같이 마시고.

친일은 원래 1880년대부터 일본 공사관을 들락거리며 일자리라도 하나 얻을까 하던 조선인을 지칭하던 말로써 당시에는 그리 부정적이진 않았다. 그러다가 을사조약, 한일합병을 거치며 반민족 매국 행위자를 이르는 표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좀 더 본격적으로는 독립협회 소속이었던 인사들이 만든 일진회, 동학에서 떨어져 나온 진보회가 합쳐 만든 ‘일진회’와 보수 유학자-대개 과거 위정척사파-중심의 ‘의병’들의 대립과정에서 민족/친일이 본격화 됨)

최근 <민족/식민>과 관련된 책들을 저녁마다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20세기 초반의 10년이란 기간이 꽤 중요하고 이 시기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 이 시기의 역사만 잘 알아도,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과거의 어느 한 시기를 ‘소실점’ 삼아 원근법적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편이다. 그 소실점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민족의 역사와 동질성을 말하지만, 너무도 먼 시간대의 성서 창세기를 바라보듯 하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

일연스님도 분명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서 신화를 괴력난신怪力亂神(이상하고 괴이한 신들의 이야기)이라고 하며, 역사를 꽤 합리적/이성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대몽 항쟁이 끝날 무렵에 쓰여졌고 민족의 뿌리를 밝힌 저술이지만, 그 해석에는 신중해야 한다. 삼국의 역사를 마치 첨부터 민족공동체로서 출발했고, 분열/통일의 과정으로만 본다면 고대사를 너무 쉽게 바라보는 것이다.

몽고의 침입에 맞선 대몽항쟁 시기에 민족 공동체 의식이 시작되었다는 얘기가 많지만 이건 사실이면서도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시각이다. 당시 고려인들이 과연 민족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식이 존재해서 대몽투쟁에 나섰을까,하는 것인데 당시의 역사적 정황은 농민들이 향촌사회의 자위적 측면에서 반외세 항쟁을 했고, 민족의식에 기초한 항쟁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농촌 사회를 지키기 위한 항쟁이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고려인들이 몽고에 투항(투몽, 전쟁에 의한 항복과는 다름)하는 사례도 많았다. (여기엔 계급 모순/대립의 문제도 있었는데, 유럽은 혁명을 통하여 민족주의가 형성되었으며 부르조아가 등장하여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상하계급의 완충역할을 하면서 계급모순을 해결했다)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보니까 고려 대몽항쟁시기와 20세기초 한일병합까지의 시기가 겹쳐보이며, 한국의 민족주의에 관해서는 너무나 할말이 많이 쌓여가는 것 같다.

대중사학자 이덕일 선생이 아무런 배경 설명없이 손병희에게 쫓겨난 이용구가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설립했고 매국경쟁에 뛰어들었다, 라는 얘기를 자신의 책에 썼는데, 맞는 얘기이지만 당시의 정확한 상황도 함께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난 지금 일진회나 이용구를 변호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이덕일의 ‘우리안의 식민사관’이 극단과 배제의 논리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마찬가지로 ‘우리안의 민족사관’도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부정적 측면도 함께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역사는 긍정적 역사에서 자부심도 느낄 수 있지만, 부정적인 역사에서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함께 엮여져야 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주의 사관은 급박한 시대상황에서 당연한 것이었지만, 세계 민족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계도 있었다 )

이인직, 이광수의 민족배반은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유지하기에는 인격적 결함과 함께 식민상황에서 강요된 저항과 비굴의 양립할 수 없는 선택의 길목에서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인데, 이런 모습은 한국 정치사에 그대로 유전되어 내려오는 전통이며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진보든 보수든 자기 자신이 어떤 영웅적 환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기만적 오류를 저지르며 자가당착에 빠진 정치인은 얼마든지 있다.

민족주의적 진보정치 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모두 과거 친일파들에게 원인을 돌린다는 것은 곧 우리가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인데, 같은 논리구조에서는 친일파뿐만 아니라 당시 ‘망국’에 내몰리게 된 역사적 상황과 관련 세력들 전체에 대한 비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역사로부터 진지한 성찰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사’의 경우 대개 지식인들 위주였으며 과거 위정척사파의 유학자 집단도 많다는 것과 동학을 탄압하고 수십만 명의 농민을 죽이며 계급대립을 해소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우당 이회영 선생께서 압록강을 건너며 지으신 詩에서 자신의 恨은 이 강물이 다 마르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난 이분의 말씀을 ‘참회’ 즉, 나라를 지키지 못한 지식인이자 전통적 지배층으로서의 죄책감과 더불어 참회의 눈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독립운동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그 ‘정당한/위대한’ 가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민족 문제에 좀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이유가 있는데,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그리고 이 땅의 남성 지배계층의 책임까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에서 ‘왜’ 피해 당사자인 할머님들과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풀어보려는 ‘여성’학자가 소송의 당사자로 법정에 서야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대협에서 발간한 증언집1을 보았는데, 증언집이야말로 박유하 교수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내가 변호사라면 공동 변호인단을 구성해서 할머님들의 의사와는 사실상 무관한 이 소송의 부당함을 강변하고 싶을 정도다!) 이 소송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든, 결국 ‘민족공동체’ 구성원의 공동패배의식과 분열만 깊어질 것이란 개인적 자각에서 앞으로 ‘민족’과 관련된 얘기를 좀 지속적으로 페북에 쓸 생각이다.

 

渦中日記 2015/4/6

오늘, 새 변호사를 선임했다. 1심에서 승소한다 해도, 혹은 원고측이 취하한다 해도 6천만원 가까이 들어가는 소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2심이나 3심으로 이어지거나 혹 패소까지 하게 되면 비용이 더 추가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늘이 내겐 진짜로 재판이 시작되는 날이 되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94686587224921&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4/3

어젯밤 귀갓길. 생일파티를 해 준다는 동료들과 개강모임겸 만나 식사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났다. 앞차가 사고난 것도 모르고, 밀리는 건 줄 알고 한참을 얌전히 기다렸을만큼, 비가 퍼부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 앞을 보고 있지만 아무도, 정말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올해는 꽃을 봐도 여느 때처럼 설레지 않는다. 아무래도 감각기관의 어딘가가 상처입었나 싶기도 하다. 나를 향해 겨누어지는 적의와 다가오는 위로의 반복 속에서, 내 마음도 부침을 반복한다. 꼭 병행되는 건 아니지만. 가라앉는 나는 어린아이의 자아이고, 담담하고 당당한 나는 어른의 자아이다. 어린아이의 자아와 어른의 자아는 아직 내 안에서 행복하게 조우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과잉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지나치게 경박하거나 지나치게 냉철하게.
어린아이의 자아가 부끄러워질 때,문득 노인의 자아를 생각한다. 여러가지로, 아이와 노인에겐 공통점이 많다.

하나의 사태에 대해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마도 윤동주는 “쉽게 쓰여진 시”를 부끄러워 했을 것인데, 윤동주를 사랑하는 우리는 “쉽게 말하고 쉽게 단정하고 쉽게 규탄하는” 일에 대한 주저와 부끄러움이 없다. 온나라에 분노와 규탄과 고발이 넘치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터. 분노와 규탄, 그에 대한 무시와 조롱과 경멸이 넘치는 지금의 대한민국상황은, 뒤늦게 온 세기말적 상황처럼도 보인다.

본안재판을 향해,이제 수임료를 지급하고 진행하기로 했다. 최소 수천만원의 소송비용에, 패소할 경우 지급해야 할 수억원의 돈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나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도, 함께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납득가능한 답이 있다면, 내게 보내 주기를.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92172664142980

渦中日記 2015/3/27

생일 전후해서, 나에 대해 언급한 칼럼, 인터뷰가 실린 신문과 잡지등이, 마치 선물처럼 도착했다. 5쇄를 찍었다는 연락도 왔다. 일본의 한 지인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아마존의 독자평까지 보내 주었다. 일본어판이 나오고나서 이어졌던, 과분하리만큼의 호의적인 평가에 반발하는 비판들이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해 내가 우울해 했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했던 건,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이 정말은 나의 적일 수 없는 이들이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 이십여년의 운동과 연구를 부정당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선지,우익의 비판보다 훨씬 집요하고 적극적이다. 타자에 대한 중상과 비방이 아니라도 자신을 지키는 일은 가능한데.

하지만, 그런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의도한대로, 있는 그대로 읽어주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비판자들은 내 책이 일본의 우익을 기쁘게 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은 모두 우익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다.

우파든 좌파든, 마음을 비우고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시민의 힘이 정부와 보수를 흔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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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최대 현안은 위안부 문제이지만 이와 관련해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

일본에서도 발행된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씨가 한국에서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 당국의 조사를 받은 것이다. 이미 저자에게 불리한 출판금지 가처분 결정이 나온 데 놀랐지만 이에 더해 오해와 곡해로 인한 심각한 비방 중상이 난무하고 있어 유감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 책은 한일 양국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주장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해왔다고 지적하며 과감한 문제 타개를 요구한 의욕적인 작품이다. 일본에서 평가가 높은 것은 결코 우익이 기뻐해서가 아니라 해결을 바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내용이어서 이론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는 언론의 장에서 논의하면 좋지 않은가. 만에 하나 공권력이 그녀를 기소하면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선진 제국은 마침내 한국이 ‘언론을 억압하는 나라’라고 낙인을 찍을 것이다. 그래서 기뻐할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도 스스로 공통의 가치관을 버리지 않도록 절실히 바라고 있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2015/3/19,동아일보)

읽는쪽도 시험당한다. <제국의 위안부>에는 그런 평이 있다.

위안부를 데리고 다닌 업자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지적을,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싶은 논객은 환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논지의 한 부분만을 멋대로 가져다 쓴 결과다.박교수는 위안부를 낳은 구조를 명확히 밝히려 한 것이고 누군가를 면죄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아시아여성기금을 높이 평가했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일본의 대응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속단이다. 기금의 존재는 위안부의 고통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지려던 생각이 국회(국민)의 다수생각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마세타츠야 홋카이도 신문 해설 위원, 2015/3/24, 홋카이도 신문)

아사히신문의 오보정정으로 인해 마치 2차대전때 위안부문제는 없었다는 식으로 외치면서 역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려는 이들이 있다.

남경사건에 관해서도 그렇다.(중략)
한국의 저자인만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탓에 다른나라 위안부와는 또다른 가혹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TKo, 아akwhs 아마존 독자평)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87635244596722

서윤,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서윤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서 윤 (대중예술인/자유기고가)

 

진보가 정치적 의제로 자리한 것은 87년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부정권의 몰락과 함께 보통선거제가 수십 년 만에 다시 실시되고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시민들의 힘으로 다시금 세워진 민주적 정치체가 형식을 갖추어 가며 진보는 사회운동에서 정치운동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2014년 현재 우리사회에선 진보정치의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선 교육감을 제외한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장에서 진보정당의 후보들은 당선사례가 별로 없습니다. 원외정당인 노동당과 녹색당은 2% 미만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저널리스트 한윤형은 지방선거 이후 쓴 칼럼(미디어스)에서 “민주노동당이 확보하고 있던 의석수가 가장 많았을 때보다도 현재 진보정당의 원내 의석수는 많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이 민주노동당이 활동하던 시절보다 진보적 가치의 실현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사회의 진보정치가 87년 본격화된 이후 가장 힘겨운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이것은 진보정치의 문제인 것입니까? 혹시 우리는 진보를 잊은 채 진보정치의 실현만을 위해 애써온 것은 아닙니까? ‘진보’에 방점이 찍히지 않은 ‘정치’를 해온 것은 아니었습니까?

이 질문은 정치와 사회의 변화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정치를 통한 사회의 변혁을 위해 그 바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그것이 잊히거나 간과되었던 것은 아닌지를 묻는 것입니다. 서민 교수는 8월 3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야당의 실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능과 부패의 극치를 보이는 여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는 국민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는 언급을 하였습니다. 이 글의 논지를 선거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싶지만, 나는 서민 교수의 기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전혀 민주적이거나 진보적이지 못한 언행을 너무나 쉽게 보며 삽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그런 현실을 개선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체념해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불합리하고 모순에 가득한 일들 전부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생각건대 우리가 접하게 되는 모든 일들이 정말 체념 외에 답이 없을지는 의문입니다.

90년대 직장인들에게 불문율처럼 각인되어 있던 것들 중 하나는 ‘까라면 까야지’였습니다. 많은 다른 단어와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뜻은 매일반이었습니다. 20년 가까이 지난 요즘은 어떻습니까?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당시 ‘까라면 까야만 했던’ 자기 경험을 진로그룹 매상 올려주며 육두문자와 함께 내뱉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그들이 바로 지금도 변치 않는, ‘까라면 까야’ 하는 말단직원들의 관리자들입니다. 반복하여 묻겠습니다. 우리의 진보정치는 무엇을 잊고 있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진보를 정치적 용어가 아닌 태도를 가리키는 속성의 형용사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진보적 생각과 행동, 이것은 바로 진보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보적 태도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형용사이겠습니까?

추상적으로 말하여서 진보란 개선과 동의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선이란 어떠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초로 할 것입니다. 기존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체제나 조건들이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느낌과 그 느낌을 구체적으로 정돈한 것이 바로 문제의식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형성된 문제의식이 공유될 때 진보는 연대를 구성합니다.

다시 말해 진보는 태생적으로 분열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행위는 가장 개인적인 행위로 말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발 물러선다 하더라도, 진보의 출발은 언제나 개인의 태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연대 속에서 공유된 문제의식은, 그것을 이끌어 낸 개인의 모든 맥락을 포함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문제의식에 이르는 각각의 맥락과 문제의식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가 발생합니다. 모든 개인의 맥락을 고려할 수 있는 연대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발생한 위계가 견고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진보적 문제의식은 더욱 강화된 권위를 얻고 연대는 내부적 보수화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연대’의 필연성-내부적 보수화의 과도한 진행이 바로 현재 비판받고 있는 진보세력의 내부 민주주의 확립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허용하고 최대한으로 그것을 수용하여 의제를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의 결여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진보적 태도는 언제나 개별적으로 창발한다는 것, 그리고 모종의 문제의식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는 연대가 필연적으로 보수화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숙지하지 않는 한 어떤 조직도 경직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조직의 내부적 보수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면 내부적 자기비판의 원천차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외부의 자기비판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자기비판에 대한 원천차단의 가장 좋은 예시가 우리나라의 진보정치운동 내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한 간과 내지는 묵살이겠습니다. 즉 내부적 자기비판의 원천차단은 자기반성을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가해오는 비판에 대한 반응은 필요 이상으로 격한 것이 대체적인 모양으로 보입니다. 이 격함은 때로 탄압이 되기도 합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소송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로 정대협의 정치세력화를 언급했습니다. 정대협을 정면으로 비판한 셈입니다.

물론 비판의 여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맥락을 살피건대 저자는 정대협과 일본 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가들(이후 ‘위안부 활동가들’)이 정치적 실리주의 노선을 선택한 것에 대한 비판을 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의도가 쉬 파악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그들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흐르며 사회변혁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이런 서술이 ‘권력쟁투로서의 정치’와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를 구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분리되기 어려울 것이며 거의 언제나 한데 뒤채여 갈마드는 사안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변혁을 위한 권력의 쟁취’와 ‘권력을 위한 권력의 쟁취’는 또한 다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자가 비판을 하기 위해선 ‘권력을 위한 권력의 쟁취’를 분명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저자는 정치적 정당성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뒤섞어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구분되어야 할 이유는, 현재 소송에서 문제시되는 ‘동지적 관계’라는 논리적 장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장치가 지금까지 국가 대 국가의 프레임으로 나뉘어 진행된 위안부 문제, 나아가선 식민지시대의 문제를 바라보는 역사관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며 이점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박유하 교수는 전쟁수행을 위해 동원된 집단이란 점에서 위안부와 군을 ‘같은 목적에 복무하는 집단’으로 상정하고 이를 줄여 ‘동지적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군위안부라는 기관이 제국 일본의 통치체계 내에서의 한 부분이었음을 뜻하는 말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동지애적 의미가 결여된 건조한 표현입니다. 박유하 교수가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으로 드러내려 했던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 식민지 백성으로서 근본적으로는 노예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 여성들의 애환과 삶의 모순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무리 형식적으로 동일한 일본인이었으며 군과 함께 전쟁에 동원된 ‘전쟁수행을 위한’ 같은 처지였다 하더라도, 위안부에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점령한 일본의 지배를 받는 노예 신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실제적인 사실과 형식적인 사실 사이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의 삶의 첫 번째 외연적 모순이 드러납니다. 즉 식민지 백성으로서 노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점령국 백성으로서 형식상 일본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 사이에 발생하는 형식적 충돌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 외연적 모순은 그들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위안부들과 다르게 받았던 차별대우입니다. 전쟁 중 일본이 설치하고 관리했던 위안소의 요금표만 보아도 내지인(일본인)과 반도인(조선인) 위안부 간의 차별은 아예 형식적으로 굳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속에서도 그런 내용이 적잖이 나옵니다. 그들은 ‘대동아 공영’이라는 기치를 내건 “제국 일본”의 통치를 받는 같은 일본인이면서도 민족적 이유로 인해 차별을 받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것은, 비록 동지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군인(남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여성)였다는 점입니다. 군인들이 제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 선봉을 섰다면, 위안부들은 그들의 노곤함을 달래는 역할을 함으로써 군인들의 사기진작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성 차별의 역사는 고대시대 승리한 장수가 시침을 받던 것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뿌리가 깊습니다만, 위안부와 관련하여 보다 직접적인 연원을 찾으면 “제국 일본”의 시대 이전에 공창이었던 가라유키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이러한 삶의 외연적 조건들 때문에 위안부로서 살았던 조선인 여성들의 생활이 피폐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일본군이 국가적으로 관리, 통제하며 위안부들에 대한 처우를 보장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야만으로 불리는 홀로코스트 가운데서조차 감금되어 있던 유태인들이 낭만을 찾으려 몸부림쳤듯, 위안부들도 그처럼 피폐한 삶속에서 인간으로 살고자 몸부림쳤던 사례가 있습니다. 조선 여성이지만 위안부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역할에 적극적이었거나 혹은 그 안에서 일본 군인과의 로맨스가 있었다는 것 등이 그러한 사례입니다. 박유하 교수가 제시하는 사례들이 이러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사례들은 조선인 위안부 전체의 모습일 리 없습니다. 저자 역시 이점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부분적이든 대개의 경우였건 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부분적인 사례라 한들 묻히거나 삭제되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역사란 늘 실재했던 당대의 복잡다단한 양태를 완전하게 기술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위와 같은 사례들은 분명 삶의 지독한 모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순점 때문에 그에 관해 “본질적으로는 노예이며 여성에 대한 국가의 폭력이었으므로 그러한 낭만 자체가 평가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섣부른 예단이며 타자의 삶에 대한 이념적 오만입니다. 역사가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대상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한 예단보다는 명백히 있었던 모습을 토대로 하여 평가가 출발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점들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삭제될 수도 있고 혹은 보태어질 수도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서술은 서술자의 시점이 품은 이념적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식 때문입니다. 만일 역사를 되돌아보는 모종의 논리적 장치-시점-가 그 같은 구조 내 개인들의 모순된 모습을 조명할 수 없다면 새로운 논리 모델을 계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시점이 될 것입니다. 심지어 서술의 형식에 따라서도 그러한 모순점들이 표현되는 양식이 다른데, 그것을 기본적으로 구성하는 시점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결국 기록이란 이러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박유하 교수가 ‘동지적 관계’라는 논리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은, 그것이 설령 부분적인 기억이었다 하더라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모순과 그 다양한 양태들을 선연히 드러내고자 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일본이 지금껏 잘못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제국주의 기조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유린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일본의 새로운 국가적 조치를 요구하는 설득의 초석을 마련코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1965년의 한일 양국 간의 협정은 일본이 벌였던 전쟁에 관한 것으로서, 일본 측에서도 현재 위안부 문제에 관한 사죄 및 보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내세우는 논리는 “이미 당시에 전후처리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묻고자 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책임이 아닌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입니다. 한반도를 점령하고 통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삶의 균열과 모순이 존재했는지를 밝힘으로써 타국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다스리는 행위 자체가 잘못임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는 3부의 마지막과 4부에 또렷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종국적으로 이런 논지가 향하는 곳은 제국주의 일반에 대한 반성일 것입니다. 그리고 박유하 교수는 그로 향하는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합니다.

 

일본은 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은 졌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후 처리’였고 ‘식민지지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일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생각하고 보완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사죄’를 한 적이 없는 다른 전前‘제국’ 국가들보다 일본이 한 발 앞서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전쟁뿐 아니라 강대국에 의한 타국의 지배는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앞장서서 표명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 표명은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263쪽)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언뜻 저자가 3장에서 정대협과 일본 내 위안부 활동가들을 비판하는 대목은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그들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흐르고 사회변혁을 위한 활동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제국주의 기조 자체가 그릇되었음을 지적한 대로라면, 정대협과 일본 내 위안부 활동가들의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활동은 장려되어야 마땅합니다. 국가적 폭력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국가 체제를 경영하는 입법체계의 재정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형식적으로 온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박유하 교수의 논지는 국가라는 외연 자체에 회의적이지 않은 이들 혹은 국가의 주체성을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인정하는 이른바 “국가주의자”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국제관계에서 그 외연을 필요 이상으로 간과하는 낭만적 논지를 펼치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재승 교수가 서평에서 (평가의 타당성이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취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을 비판할 수 있다면, 그 활동의 목적이나 진행상황 속에서 정치적 정당성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골몰하는 부분을 명확하게 분리하여 짚어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박유하 교수가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선을 긋는, 다시 말해 좀 더 닫힌 문장을 사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실 박유하 교수는 정대협 측에서 형성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 구도”를 강하게 비판함으로써 정대협 측의 정치적 태도를 우회적으로 짚어내고는 있습니다. 즉 정대협 측의 논리는 일본이 형언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가해자이고 우리는 오로지 피해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박유하 교수가 이런 이분법 구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국에 위안부>에도 명확히 적혀있듯, 조선인 위안부들의 삶이 그러한 모순을 품고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 하여 일본이 가해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판하는 지점은, 비록 부분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았을지언정 엄연히 존재했던 삶의 모습을 삭제하는 이분법 구도의 효과, 더 정확히는 그러한 이분법 구도를 통해 엄연히 존재했던 삶의 모습을 소거하려는 정대협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치적 필요에 의한 기억의 소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정대협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취하였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는 경직된 이분법 구도가, 위안부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은폐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그리고 현재 세계 곳곳에 세우려 하는 소녀상입니다.

식민통치 당시 조선인 위안부들의 평균 연령을 감안할 때(『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전5권)에서의 증언들은 위안부들의 평균 연령이 20세 어름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10대 후반의 여성들이 있기는 하였어도 대개의 증언에서는 그 정도의 연령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녀상은 사실적 타당성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순진하고 가난한 조선 처녀들을 강제로 끌어갔다’는 의미로 해석되면서 일본의 범죄행위만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위안부 제도에 적극적으로 응하고자 조선 여성들을 꾀어 위안부에 밀어 넣은 ‘통치구조 내에서 방기된 범죄자들’은 은폐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지적하는 “식민지의 분열증”을 세밀히 살필 수 있는 시각은 쉽게 기각되고 맙니다.

소녀상이 문제시되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남성본위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나라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근대 이후 남성본위의 이데올로기가 두드러진 국가적 정책 속에서 억압받고 희생을 강요당한 여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정대협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와중에 2000년대 들어 여성 보편의 인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피력해온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녀’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데 대해 저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결주의적 사고의 결과로써,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을 만들어냈던 빅토리아 시대의 야만적인 남성중심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이율배반은 비단 그들의 남성중심주의적 태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정대협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지지를 받아온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방식은, 불행하게도, 일본을 비롯한 과거 제국주의적 기조를 천명하고 나섰던 국가들이 채택했던 것과 꼭 닮아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제국주의적 기조란 무력을 앞세워 영토를 침탈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힘의 논리를 의미하였음은 이미 상식입니다. 현재 정대협의 활동방식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국제적 연대를 이끌어낸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업적입니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제적 연대로써 그들이 일본에 대해 하는 일은 “설득”이 아닌 “압박”입니다. 다시 말해 “초국적 연대”라는 힘으로 “일본”이라는 국가를 압박하는 형식입니다. 이것은 힘으로 한반도를 병합하고 수탈했던 일본의 방식과 닮은꼴입니다.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여성들을 데려다 착취했던 책임을 물으면서 꼭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것이 보복성이라는 측면에서 정당성이 약화될 것이요, 둘째로는 힘을 앞세운 국가주의의 극단인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의 역사 일반에 상존했던 위안부 문제를 “일본만의 것으로” 특수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입니다. 이 둘째 문제는 결국 “보편적 여성 인권”이라는 정대협 활동의 명분을 약화시킵니다. 마지막 하나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힘의 논리를 앞세워 단일 슬로건 아래 동원된 개인들의 피폐함을 제대로 볼 수 없거나 혹은 억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력을 앞세워 타국을 점령하는 행위는 개인의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군인으로 징병되어 가족이나 고향과 떨어져 지내는 일도 그러하지만, 전쟁을 위한 물자동원으로 인해 갖은 부역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을 배분하는 데서도 문제는 발생합니다. 아직도 ‘영광의 시대’라며 적잖은 사람들이 야만적인 평가를 서슴지 않는 빅토리아 시대에도 노동자 계급은 미성년인 이들까지 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식민지 수탈의 전리품을 나눠 갖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타국을 점령하고 수탈하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는 식민지든 본국이든 일부 계급을 제외한 개인들의 삶이, 비록 외적 조건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그와 같은 양상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난 20년간 애써온 정대협에서도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자도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듯 하는 정대협의 활동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인용한 바 있는 심미자 할머니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심미자 할머니는 유언장에서, 정대협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하여 출세하였으며, 정대협 출신의 국회의원이 허위 의정보고를 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또한 정대협이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해외에서 데려와 수요집회에 참석시킴으로써 ‘앵벌이’를 시켰다고도 하였습니다. 저자가 말하듯, 이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유언장에 이런 비난을 적을 정도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꼭 부당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 정대협은 진정으로 위안부 할머니들 개인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 그들은 일본과 한국을 나눈 이분법 구도를 강화함으로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의 민족적 피해정서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어떻습니까? 터무니없는 의구심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골몰하는 탓인지 아니면 투쟁의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추측일 뿐이니까요. 다만 그들이 20년이 되도록 해왔어도 요지부동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 이제는 투쟁의 방식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유하 교수의 이 책은 그런 인식의 산물이라고 함직합니다. 다시 말해 정대협에 대한 비판을 담고는 있지만, 박유하 교수 역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되찾아주고 그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어루만져주려는 의도로 쓴 책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지금까지의 정대협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살피고 있는 나눔의집과도 그 뜻을 함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같은 길에서 다른 방안을 제기하는 것이 아무리 의미가 있더라도, 어떤 식의 접근법이든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박유하 교수의 논지는 그 의도와 관계없이 일본의 부정파들에게 모종의 프레임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통치술의 일환 속에서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다중적 억압과 수탈”로 파악하는 박유하 교수의 시점은 당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통치했던 “제국 일본”의 통치구조를 면밀히 살피는 일이 됩니다. 문제는 이를 통해 박유하 교수가 “제국 일본”의 모순을 드러내려 했던 반면, 부정파들에게는 그것이 “제국 일본의 점령지로서의 조선”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이 바로 박노자 교수가 그토록 우려하고 경계하는 포스트주의 담론의 한계와 약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포스트주의 담론이 일궈왔던 성과 또한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포스트주의 담론을 간단히 말해 “역지사지” 담론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타자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취해야 하는 관점이라면 나보다는 타자의 관점에 가장 근접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함은 당연지사입니다. 물론 인식론적 장애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모릅니다만, 현상학적 진공-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불렀던, 이성의 바로 그러한 움직임을 신뢰할 수 있다면, 타자의 관점에로 육박하는 시점의 전환은 그 자체로 거리두기를 통한 관조적 이성의 열림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나 국가가 주체적으로 이념을 생산하고 재구성하며 스스로 섭생하는 유기체라고 볼 수 있다면, 거기에도 무심한 관조 속에서 피어나는 열림과 공감이라는 자율적 이성의 정묘한 이치를 대입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이러한 대입에서의 세밀한 논변의 필요성 때문에 (혹은 개별적 이성과 국가이성의 본질적 차이 때문에) 국가이성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국가나 사회와 같은 거대한 주체의 윤리적 입장을 관조할 수 있는 이성의 힘이 개인의 자율성 속에 있음은 분명합니다. 공동체의 이념성이 아무리 개인의 몸을 통해 발현된다 하더라도 개인이 고스란히 그에 따라 실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단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박유하 교수의 시점과 논변을 말하자면 그것은 “피해자의 이념성을 지닌 공동체 속에서 가해자와의 교착상태를 돌파하려는 개인의 자율적 사유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이념성에서 어떤 갈등양상이 야기되거나 혹은 그것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자율적 개인의 움직임은 돌파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개인의 부질없는 무력함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사실은 많은 경우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율적 개인의 움직임이 평가할 만 한 점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이 쉬 기각되거나 억압받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념을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소송이 그 모습을 닮았다고 보입니다.

소송을 건 나눔의집 고문변호사 박선아 교수는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 번 할머니들 앞에서 책에 썼던 단어의 뜻을 해명한다면 오해는 풀릴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이라면 비록 소송을 건 후라 해도(이 인터뷰는 소송을 건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박유하 교수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여 나눔의집에 기거 중인 위안부 할머니들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박유하 교수를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계속해서 차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 하며 도움이 되고자 쓴 책에 대해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을 내고, 동지적 관계라는 말이 ‘맥락과 관계없이’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가 있다며(이 문구는 박선아 교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처벌 및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서이든 학술서이든, 연구의 결과물에서 ‘맥락’을 제외한 부분적인 것만을 떼어 그것을 재해석한 것은 정당한 행위입니까? 소송대리인이 “다시 한 번 해명해준다면 오해는 풀릴 것”이라 말하는데도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는커녕 어떤 접촉도 금지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입니까?

박선아 교수는 박유하 교수가 9년 전에 쓴 『화해를 위해서』를 공격하고도 있습니다.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되었던 것을 취소할 방안을 검토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엔 『화해를 위해서』에서 다루는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영토분쟁에 관한 것은 더욱 그러합니다. 비록 박유하 교수가 코즈모폴리터니즘 내지는 아나키즘적인 인상을 풍긴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이들의 생각을 희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박유하 교수의 생각은 이런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 문학연구를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너무 낭만적으로만 본다. 국제정세는 낭만이 아니다. 논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국제적인 학술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양국의 분쟁에 대해 연구해온 학자의 논지에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일종의 폄훼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폄훼가 아니라면, 박유하 교수와 함께 해당 학술모임에 참여해 온 학자들은 지속적으로 공염불만 해온 셈이 됩니다. 진정으로 그들이 어처구니없는 말만을 되풀이하여 왔다고 만인이 공인하지 않은 한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설령 허튼 활동으로 공인된다 하더라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도태될 테니까요.

학술적인 부분에서 살펴보아도 이러할진대, 『제국의 위안부』에서 몇 부분만을 떼어 윤리적 판단과 처벌(형사고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박유하 교수가 근무하는 세종대학교로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찾아가 교수직 파면을 요구하였습니다. 전체적인 논지의 맥락과 관계없는 ‘자신의 재해석’이 누군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그 논지를 편 사람이 직업을 잃어도 좋은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만일 나눔의집 측에서 취하는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사회가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지길 원한다면, 이러한 문제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앞선 부분에서, 진보란 그 태생이 개인적인 차원으로부터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진보란 명백히 그릇된 일을 개선하는 것임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보입니다. 그러하다면 나눔의집 측에서 취하는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다 여길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진보적인 행동이겠는지요?

여기에 일률적인 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눔의집 측에서 취하는 행동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겐 박유하 교수가 직업을 잃고, 연구결과물이 시중에 나오지 못하며, 나눔의집 할머니들에게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해외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받았던 보상금의 총액보다도 많은 거액을 배상하는 것이 오히려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보일 것입니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삶을 온전히 되돌아보고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길을 찾는 시도가 하등 쓸모없는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위일 것입니다. 그 논리적 결함이 있든 없든 전체 맥락과 관계가 있든 없든 표현 자체가 참혹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들을 언짢게 했으므로, 그것을 윤리적으로 판단하여 처벌하는 것이 진보적인 길일 것입니다. 그들에겐 위안부 문제의 교착상태를 풀 다른 논리의 계발이 필요 없으며, 이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진보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반면 그와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진보적인 태도는 어떤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온당하겠는지요?

이 글의 앞부분에서는 우리사회 진보정치의 위기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작금의 위기를 초래한 진보정치운동이 간과한 것은 무엇이었을지 질문하였습니다. 넌지시 논급하였지만 여기서 잠정적인 답을 내리자면 진보적 태도의 보급에 실패한 까닭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즉, 서민 교수의 취지처럼 정치 차원에서의 진보적 의제 수립과 추진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진보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설득하는 일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빼어난 지성과 글솜씨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하지 않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칙과 신념을 외치면서도 당내 민주적 절차를 확립하지 못한 진보정당의 모습에 실망하여 등 돌린 시민들이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말입니다. 자신의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그릇된 일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어떤 식으로든, 어느 정도로든 행동을 취하는 사람을 볼 때 사람들은 비로소 조금씩 변화해 갑니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韓日은 ‘공통의 가치관’을 버리지 말라 (동아일보)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과거사 엄중한 정리는 않고 기본 가치관 공유國서 한국 제외
어른스럽지 못한 아베 총리
산케이 지국장 출국 금지… 아베 총리 美의회 연설 방해
관용없는 한국도 훌륭하지 않아
극단주의 비판 책 낸 박유하 교수… 한국서 고발당한 일도 아쉬워

원문: [와카미야의 東京小考]韓日은 ‘공통의 가치관’을 버리지 말라 (동아일보)

渦中日記 2015/3/14

며칠을 오에선생관련 일로 보냈다. 나로선,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잠시 잊고 싶었던 며칠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문학이 정치나 역사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하루하루가 정치(사회구조)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에 선생 역시, 개인의 내면이 어떻게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때로 억압받게 되는지를 일관되게 써 왔다.
그리고 내게 오에선생의 작품은 초기의, 수재작가다운 명료하면서 건조한 작품들보다, 작가자신이 말하는 후기작품들을 통해 다가왔는데, <인생의 친척>,혹은 <새로운 사람아,눈을 떠라>등에서 받았던,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오래도록 선생의 작품을 읽게 만든 힘이기도 했다.

<인생의 친척>에서 선생은, 지적/신체적 장애아였던 두 아들이 자살한 후,슬픔과 절망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종말을 맞이하는 한 여성을 그려내면서 “슬픔”을 “친척”같은 것이라 표현한다.
실제로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란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일 터이고, 설사 순간순간의 기쁨이 있다 해도, 그 기조가 가라앉은 슬픔일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물론 나쁜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슬픔이 아니라, 어떤 부조리와 불균형과 파괴의 의미를 매일처럼 “생각해야 하는” 슬픔.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선생의 자택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아들 히카리(光. 빛)씨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존 엘리엇 가디너가 연주한 바흐 마태수난곡을 선물했다. 2012년 봄의 일이다. 오에 선생님께도 그 전에 에스페리온 20이 연주한, 역시 바흐의 the art of fugue 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근처 프랑스식당으로 식사하러 나갈 때, 선생은 현관에서 몸을 굽혀 아들이 신발을 잘 신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 때 나는 선생의 슬픔을, 목도했다고 느꼈다. 그건 단지 어떤 불편함도 아니고 번거로움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움이나 시혜가 동반하기 쉬운 어떤 감정도 아니고, 그저 인생의 무게, 같은 것이었다. 삶에 대해 경건해질 수 있고 인생에 겸허해 질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그러나 자주 잊어버려 인생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사진은 2008년 1월. 아사히신문사에서 주는 오사라기지로논단상시상식에 오에선생도 와 주셨었다. 함께 찍은 이는 아사히신먼사 와카미야 주필. 작년에 내가 일본우익을 대변한다는 기사에 항의해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 부르라”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썼던 이다. 그는 일본수상 야스쿠니참배를 반대하고 독도를 한국에 양보하라고 써서 일본우익들의 맹렬한 반발을 샀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저 그가 “위안부강제연행에 대한 아사히의 과거기사가 군인의 말만 믿고 좀 많이 나갔다”고 말했다는 것만으로 아사히가 우경화했고 와카미야씨는 보수,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편이 합리적이려고 하는 순간, 그들은 늘 윤리를 독점하려 한다.

실은 오에선생과 함께 보냈던 시공간에서조차 나에 대한 적의를 가진 이가 나타났었다. 그리고 오에선생과 나를 이간질하려 했다. 심지어 내게 오에선생초청을 의뢰했던 김대중도서관측 사람들과도. 그래서 사실은 여전히 편치만은 않았던 며칠이었다.

곳곳이 적의의 지뢰밭,이라고 느낀다. 이 한 달,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견뎌왔지만, 다시 “인생의 친척”을 읽든지..해야 할 것 같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7894879879870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장정일, 박유하 논란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 (한겨레신문)

장정일 소설가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지음/뿌리와이파리 펴냄(2013)

지난 2월17일,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출판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그러자 이재명 성남 시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트위터에 “어쩌다 이런 사람과 하나의 하늘 아래서 숨 쉬게 되었을까”라면서, 지은이를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로 몰아 세웠다. 그러면서 책을 읽어 보았느냐는 누리꾼에게 “똥은 안 먹고 냄새만으로 압니다”라고 일갈한다. 여러 우익 단체들이 아무 근거 없이, 단지 ‘냄새’가 난다는 직감만으로 그를 ‘빨갱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더 슬픈 것은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학과 교수가 <한겨레> 2월26일치에 쓴 칼럼이다. 그는 그 글에서 박유하가 “조선인 위안부가 군수품이었다면, 강간당한 네덜란드 여성이나 중국 여성은 전리품”이었다는 논지를 폈다고 주장하는데, 이 책 219쪽에 있는 저 대목은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던 일본군의 기본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지 지은이의 것이 아니다. 또 조한욱은 지은이가 위안부 형성 과정을 기술하면서 전적으로 “제국주의 일본 정부의 사료”에 의지했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위안부 형성 과정을 다루고 있는 대목에서는 제국주의 일본 정부의 사료가 단 한건도 나오지 않는다.

지은이가 <제국의 위안부>를 쓰면서 기본으로 삼은 사료는 1993~2001년 사이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출간한 군위안부들의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다섯권이다. 현재 강제납치와 매춘 여부를 둘러싸고 지은이가 ‘나눔의 집’ 할머니들에게 명예훼손으로 피소된 사항들은 모두 이 책을 근거로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나보고 배급을 타가라던 이장 아들이 계집애가 있는 집을 다 가르쳐 준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이 주인이 돼갖구는 얼마나 나를 뚜들겨패는지 몰라. 손님을 안 받을라 한다구.”, “주인은 한국 사람이었어.”, “한국 사람들이 더 나뻤어요. 우리를 팔어묵었으니께.” 등등.

<증언집>에서 출몰하는 이런 증언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출판금지 조처가, 강제납치 되어 성노예가 되었던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는 다른 무수한 할머니들의 기억과 목소리를 빼앗는 일이라고 말해준다. 지은이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강제납치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군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할 뿐이며, 이 주장은 딱히 지은이의 것만이 아닌 이 분야의 상식이 된 지 오래다.

2003년, 일본에서 출간되고 이제야 번역된 윤명숙의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이학사, 2015)는 “조선인 군위안부의 징모(국가에서 특별한 일에 필요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 형태는 군인·헌병·경찰의 납치로 이루어지는 형태보다 징모업자의 취업 사기로 이루어지는 형태가 압도적”이었다고 말한다. 군인에 의한 강제납치가 일반적이 아니었다는 사정은 그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징모에 협조했다는 뜻이며, 윤명숙의 말에 따르면 그 일을 직시하는 것은 “친일 세력(도지나사 경찰 등)”에 대한 책임 추궁과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제국의 위안부>는 우리가 외면하려고 하는 일제 36년의 성격을 마주보게 한다. 위안부 논쟁에서 일본을 이기는 방법은 그들보다 우리가 더 많이 아는 것이고, 백전백패하는 방법은 일본이 아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원문: 박유하 논란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 (장정일의 독서일기, 한겨레신문)

渦中日記 2015/3・9ー응답을 시작하면서

의혹과 소문이 세상을 떠돌며 한사람을 한치의 주저없이 베고 다닐 때, 그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두가지가 있을 것이다. 침묵하거나 항변하거나. 그리고 그동안 나는 다른 이들이 나서준 덕분에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분은 늘, 차라리 침묵하고 싶었다. 10가지 소문은 곧 100가지가 될 것이고, 그 때의 절망감과 도로감이 미리부터 내 기분을 가라앉혔기 때문이다.

`잘` 항변하기 위해서는 저들의 행위를 컴퓨터와 마음에 저장하고 미움으로 논리의 칼날을 가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일에 에너지를 소진하기보다는, 나는 그저 그 시간에 아름다운 멜로디에 몸을 내맡기고 싶었다. 보다 아름다운 말들에 귀기울이고 싶었다. 사실 나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외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못된다.

그럼에도 이제 최소한도로나마 해명에 나서려는 이유는, 함께 해 주는 이들, 대한민국에서 극소수일 친구들을 위해서기도 하다. 이제 싸움은 나만의 싸움이 아니게 되었다. 2014년 6월과 다른 것은, 이제 내게는 나 이외에도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생겼다는 점이다. 이 모두가, 원고측의 허위섞인 주장과 그 주장을 그대로 믿은 재판부가 만든 일이다.

어차피 나는 법정에서 항변을 해야 하고 원고측 변호사와 학자들—이른바 `지식인`들이 함부로 난도질하며 <공공선에 반한다>고 결론내린 나의 논지를 다시 설명해야 한다. 원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 내게 요구되는 건 ,지치거나 지겨워하지 않고 `법정을 떠올리며 광장을 만들어 가는` 일일 터이다. 그것도 헛소문에서 지적담론까지를 한자리에서 상대해야 하는 아주 어려운 광장을.

우연히도 아침에 관련 뉴스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그것부터 시작한다.

응답1.<박유하가 위안부할머니에게 일본정부로부터 20억원을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2003년가을, 사죄와 보상에 관한 나눔의집의 생각을 듣기 위해 내가 방문했을 때, 여성사무국장은 내게 국가배상이 아니라 실질적보상금을 받는 소송을 준비중이라고 말했었다.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조정`에 이르는 재판이고, 우리는 정대협과 달리 당사자중심으로 간다면서 할머니들의 사인이 들어간 서류까지 보여 주었다. 그 이후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정대협과 조금은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나는 이 기사를 보고 그간의 나눔의 집의 행보를 알 수 있었다.

한사람당 `20억원`이라는 보상요구금액은, 바로 유희남할머니가 내게 말한 숫자다. 일본이 어떤 사죄와 보상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사죄고 뭐고)….20억원은 받아야지`라고 말했던 장본인이시다. 그 정황에 관한 증거자료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나눔의 집의 또다른 변호사에게 말했더니, `20억은 많은 금액은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아마도 그는 이미 이런 소송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나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도 해야 하는 것이 슬프다. 유희남할머니가 법정에서 위증을 했다는 걸 듣고도 나는 그에 대해 법정에 따로 해명하지 않았다. 법정의 `상식적인 판단`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처분판결이 났을 때 나는, 어쩌면 그 판결은 책 때문이 아니라 나에 관한 부정적인 소문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어쩌면 가처분 판결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으로 하지 않은, 나의 불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http://kr.christianitydaily.com/…/…/위안부-피해자-미국-법원에-소송-추진.htm

http://www.yonhapnews.co.kr/…/0200000000AKR2015022717480006…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82184/20150227/%EC%9C%84%EC%95%88%EB%B6%80-%ED%94%BC%ED%95%B4%EC%9E%90-%EB%AF%B8%EA%B5%AD-%EB%B2%95%EC%9B%90%EC%97%90-%EC%86%8C%EC%86%A1-%EC%B6%94%EC%A7%84.htm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75557982471115

김규항, 역사의 거울 앞에서 (경향신문)

‘제국의 위안부’ 토론과 논쟁 사이
맥락 생략된 텍스트 읽기 애석
상징체계가 주입한 습관 깼으면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토론과 논쟁에서 ‘텍스트는 컨텍스트(맥락)와 함께 읽어야 한다’는 텍스트 읽기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건 애석한 일이다. 맥락이 생략된 텍스트 읽기는 오독이나 악의적 왜곡에 이용된다. 특히 이 책처럼 민감한 사회적 주제를 담은 텍스트인 경우, 논쟁은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문화적 상징체계에 포획되어 버린다. 다들 진지하고 열띤 얼굴로 견해를 말하지만 실은 그 상징체계가 주입한 이런저런 주문을 암송할 뿐이다.

눈곱만큼이라도 유의미한 논쟁이 되려면 상징체계를 박차고 나가, 비로소 내 견해를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즉각적이고 단순명료한 반응과 판단을 의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가장 문제가 된 ‘매춘부’ ‘동지적 관계’ 등 텍스트 조각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책의 적확한 요약이 되기도 하고, 책에 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보수 세력은 오랜 권위주의 독재 시절을 통해 반일 정책을 표방하며 일본 극우세력과 야합하는 이중 전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름을 개탄하는 데 그치는 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문제는 ‘반일’이라는 개념 자체의 기만성에 있다. 일제 식민지 경험은 한국 민족과 일본 민족이 아니라 일본 지배계급과 한국 민중 사이의 일이었다. 일본 민중 역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했으며,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이해를 같이했다. 해방 후 지배계급으로 남은 그들은 모든 것을 민족 간의 문제로 은폐하고 기만했다.

그런 기만은 진보 세력에게도 답습된다. 한국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미 제국주의의 지배와 영향을 받게 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진보 세력 안에서 한국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사회’라 해석되곤 했다. 진보 운동은 ‘민족주의+진보(계급)’라는 모순적 상태를 지속해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계급이라는 ‘체’로 제대로 걸러내지 못함으로써 진보(계급)의 괴멸도 지속되었다. 조직노동(민주노총)이 비정규 불안정 노동이라는 노동자 계급의 보편적 현실을 외면하고, 진보정당이 분당과 합당을 반복하면서 지리멸렬해진 내적 원인도 결국 그것이다.

‘민족주의+진보’의 폐해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가는 ‘디아스포라’에 천착하는 재일 지식인 서경식이 박유하 비판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과, 한국의 진보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단호한 계급적 관점을 고수해온 박노자가 이 논쟁에서만은 ‘탈계급적’ 태도로 일관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박유하의 견해가 일본 우익에 봉사한다는 식의 비난과도 선을 긋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견해가 사회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우려하는 건 필요한 일이나, 반대와 금지의 근거로 삼는 건 파시스트의 방식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공극우 세력의 주요한 탄압 논리는 ‘북한에 봉사한다’였다.

<제국의 위안부>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위안부 문제 활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정대협의 활동은 ‘위안부 소녀상’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소녀상이 담은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은 사실관계와 문제의 본질을 동시에 거스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정녀든 창녀든 예수의 어머니이듯, 모든 생존 위안부는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에 부합하든 안 하든 위안부 문제의 피해자다. 일본의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에 대한 정대협의 부당한 태도는 위안부 운동이 생존 위안부를 위해 존재하는지, 생존 위안부들이 위안부 운동을 위해 존재하는지 되묻게 한다.

‘민족주의+진보’의 수렁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의 진보적 인텔리들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 당시, ‘민족 배신자’로 매도되면서도 ‘악의 평범성’을 설파하던 한나 아렌트를 상찬하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상찬이 지적 허세가 아니려면 온전하게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이 되어 봐야 한다. 아렌트는 일생의 벗들에게까지 절교당해야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아렌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박유하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지난 역사, 남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역사에선 쉽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거울 앞에서 성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친일 문제에 대해 단순명료한 태도를 보이는 나는, 독립이나 해방을 좇는 사람은 이미 ‘비현실적’이라 치부되던 일제강점기 후반부에 살았어도 같은 태도를 보였을까. 그것은 현재의 지배체제,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내 태도로 추정될 수 있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아이를 밤늦도록 학원을 돌게 한다면, 신자유주의의 다른 분파인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유일한 사회적 희망이라 생각한다면 그 태도는 허상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태도가 아니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문화적 상징체계가 만들어낸 습관일 뿐이다. 우리는 그 습관을 직시하고 해체해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가 처음으로 우리의 습관을 적확하게 비판하거나 해체하려 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즉 해체했어야 한다며 고마워할까, 아니면 아렌트 앞의 유대인들처럼 격렬하고 집단적인 반감을 보일까. 박유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 답을 보여준다.

원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역사의 거울 앞에서 (경향신문)

渦中日記 2015/3/7

삭제판을 위한 작업중.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막상 마주하니 가슴이 좀 쓰라리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74229259270654

Anna Roh, 우리는 정말 ‘해방’ 된 것이 맞는걸까?

 

Anna Roh

2015년 3월 2일 ·

Park Yuha 선생님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요즘 유럽에서 대세인 학문 중에 <memory studies> <memory policy>라는 것이 있다. 넓게 보아 메타 역사학이라 할 수도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집단과 개인의 역사는 선택적으로만 수용된다는 전제 아래 어떤 내러티브들이 어떤 집단에 의해 역사와 문화로 수용되고 거부되었는지 분석하는 학문이다. 똑같은 시공간을 관통하며 똑같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기억하는 바는 개인의 정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심지어 경제적(계급적)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만 보아도, 남한과 북한의 분단 이전 역사인식에 차이가 있고, 같은 남한 안에서도 박정희 시대에 대해 서로 다르게 추억하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역사의 선택적 수용은 역사 왜곡과 다른 문제이다. 자연스럽게 수용된 문화와 역사가 있지만 각자의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로 인해 의도적으로 정책적으로 걸러지는 역사가 있다. 역사 안에 A와 B라는 사건이 모두 터졌는데, 누군가는 A만 기억하고, 누군가는 B만 유달리 강조한다. 이럴때 누구는 틀리고 누구는 맞다고 할 수 없다. 그보다는, 그들이 왜 유독 A혹은 B만 강조하고 기억하는지 현재의 관점을 분석하는 것이 더 현명한 시도이다. 다만, 나의 관점은 더 넓은 스펙트럼을 포괄하며 기억되는 역사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이익만을 염두에 둔 역사보다 더 인류에 대한 포용력이 있다고 본다. 강자 뿐 아니라 약자의 역사를 포괄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에게 치욕스럽고 도덕적으로 불쾌한 기억 또한 포괄한 역사가 더 설득력 있다는 소리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일제 식민지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 뿐 아니라 한민족의 골치아픈 숙제라고 생각한다. 일제의 패망덕분에 한민족은 당당하게 ‘제국주의에 저항한 희생자’로 일반화되었지만 실제로 그러했을까. 친일명부에 오른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하고 모두 그렇게들 저항만 했을까. 제국주의의 시스템 아래서 한반도에서 그들에게 세금을 내고, 그들이 제공하는 직업을 가지고, 그들이 제공하는 교육을 받으며 묵묵히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한 이들이 과연 나는 ‘반일’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땅을 떠나 망명 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친일’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모 역사학자의 일침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는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해 강압적인 폭압뿐 아니라 문화적 교란과 동질화 정책도 한민족에게 해를 미쳤다는 것을 설득시켜야 한다.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한 그들의 문화정책도 실은 불공정한 식민지 폭압의 일부였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한데, 해방되고 나니 그렇게 일제에 설득당하고 동조한 사람들이 싹 사라지고 불굴의 애국투사들만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제의 문화 정책에 대한 책임을 거론하는 것은 물건너 갈 수밖에 없다.

36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쨌든 일본인들과 한데 어울려 그럭저럭 살던 사람들이 해방이 되고 나니 갑자기 모두 사라지고 저항하거나 강제 폭압에 시달리던 희생자들만 이 땅에 남았다. 소수의 친일파들에게 자신들의 제국에 대한 복종의 죄과를 모두 미뤄버리고, 이런 Victimisation은 해방 후 반식민지 역사교육을 통해 한층 더 한민족의 뇌리에 뿌리박혔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식민 통치에 대해 보상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인 일본은 다른 기억을 한다는 것이다.

한쪽은 억압의 기억만을 고집하고, 한쪽은 ‘그래도 동조한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이 한-일 양쪽 상황에서, 누구의 기억이 맞다고만 말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서 계속 강제동원의 근거를 발굴해내더라도 다른 한쪽이 자발적 참여의 근거를 계속 들고 나오는 한 이 보상 협상은 평행선을 이룰 수밖에 없다. 왜냐. 양쪽 다 실제 존재했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읽은 <제국의 위안부>는 이 양쪽의 역사를 모두 인정하고 문화적 동질화 정책도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동질화되어 자발적으로 일제 정책에 참여한 한민족 또한 희생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은 일본 정부가 계속 끌어내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위안부에 대한 주장을 무색하게 만드는 제안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이에 반기를 드는 이유는 기억하기 싫은 역사를 끄집어냈다고, 그 끄집어낸 역사가 – 엄연한 사실임에도 – 한민족의 희생자적 입장에 불리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가 휩쓸고 간 뒤에도 살아남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불의에 저항한 희생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촉발된 논쟁이, 그리고 내가 존경하던 학자들마저 양쪽으로 대립하는 이 모양새가 남탓을 하기 위해 나의 약점을 숨기는 것처럼 보여 못내 씁쓸하다. 반세기도 한참 지난 식민의 역사에서 우리는 정말 ‘해방’된 것이 맞는 걸까.

 출처 : https://www.facebook.com/anna.roh.94/posts/10203832833372490

Meesun Min, 같은 문제의식임에도 불구하고..

 

Meesun Min

2015년 3월 2일 ·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우리 조상들에 대해서 한 학자가 쓴 글들이다. 이제 이 학자를 물어뜯자!!!

“하지만 현실의 콰이강의 다리에 대한 앞에서 언급한 르포 기사는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충격을 전해준다. 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버마전투의 당사자로 ‘지금까지도’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태국인들의 착각이라고 가벼이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부를 더 하면 할수록 조선인 강제 동원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서 연합군 포로를 교량 공사에 동원하고 학대하던 일본군 포로 감시병 속에 조선인이 섞여 있었던 점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 등장하는 일본군 포로 감시병 가운데 조선인이 포함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렇다면 태국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아직도 한국을 전쟁 당사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까? 태국의 박물관으로부터 태극기를 끌어 내린다고 해서 조선인들이 제국주의 일본의 태국 침략전에 참여했던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등 국민을 꿈꾸는 새끼 제국주의자: ‘대영제국’을 제압하는 ‘대일본제국’의 힘에 압도될 때 조선의 피지배 식민지민들은 제국 속의 ‘이등국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리콴유가 증언하는 싱가포르에 있던 조선인들의 모습은 바로 이런 이등국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침략전에 나섰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요컨데 앞의 두 삽화는 모두 ‘식민지’로서의 조선이 그냥 ‘식민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은 식민지이기도 했지만, 제국 일본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조선이 식민지일 ‘뿐’이었다고 생각하는 데 비해, 일본의 침략을 당했던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조선이 제국 일본의 일부분이자 침략의 당사자라고 믿고 증오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조선인을 제국 일본의 식민지 피지배민이 아니라 오히려 거칠고 고압적인 일본군의 형태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새끼’ ㅈ국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 일본 속에서 이등국민의 가능성을 엿보던 조선인들은 제국주의자로서의 욕망을 가슴속에 감춘 ‘새끼’ 제국주의자였다.”

“이미 이 시기에 조선인들은 ‘강제된’ 한 손에 ‘피’를 묻히고 있었다. 강제로 침략전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리하여 한손에 이미 피를 묻혀 버린 사람이 바로 식민지하의 조선인들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국 일본의 침략 전쟁에 가제로 동원된 조선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분열현상을 극복해야만 했다. 요컨데 식민지는 바로 식민지민에게 분열증을 강요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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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동 교수의 책에서 인용한 이 글들의 내용은 보다시피 철저하게 박유하교수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근데 정말 이상한 것은 지금 윤해동 교수의 비판이 비판자들의 글들에 인용된다. 비겁한건가 분열적인건가 아님 둘다 인가!

 

최범, 친일과 반일

3월 1일 포스트

친일과 반일

한국은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여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우리 삶을 크게 변화시켰고 그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에 협력했다. 그들을 가리켜 친일파 또는 민족반역자 또는 매판세력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계속된 불행은 일본으로부터 자주적으로 해방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친일파 또는 민족반역자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지배되고 있다는 점이다.

친일파를 제거하기는커녕 거꾸로 친일파들이 민족주의자들을 처단한 것이 숨길 수 없는 우리의 흑역사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한편으로는 친일파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증오와 함께 반일에의 정념에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욱 비극적인 것은 바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이 뒤집어진 혀로 반일을 부르짖으며 대중을 오도해왔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그랬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친일에 대한 증오와 함께 맹목적인 반일이라는 덫에 빠지게 된 것이다. 반일은 친일의 단순 안티테제(반명제)일 뿐 결코 식민주의를 극복할 진테제(합)가 되지 못한다. 친일과 반일은 개화와 척사, 찬탁과 반탁, 종북과 반공, 친미와 반미라는 잔인한 이분법으로 우리 민족의 삶을 옥죄어 온 쇠우리의 하나이다. 한 마디로 무간지옥이다.

친일파의 지배에 대한 증오에 비례하여 반일에 대한 어떠한 이의제기나 수정도 허용되지 않는다. 최근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존의 정식화된 반일에 대한 어떤 수정주의나 재해석도 친일로 매도되고 공격당하는 것을 보면서 친일 못지않게 반일도 또 하나의 야만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역시 얼마 전 페이스북에, 식민지배 당한 것에는 우리 자신의 책임도 크다라는 글을 올렸고 직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집중공격을 당했다. 내가 정식화된 반일 도그마에 수정을 가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나를 친일파로 몰고 가려고 했다. 나의 주장을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입하면서 친일파임을 자백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반드시 상대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것이 되는가. 그것은 제로섬 게임인가. 윈윈이 될 수는 없는가.

그렇다. 나는 친일파도 아니지만 반일파도 아니다. 나는 친일과 반일이라는 무간지옥을 벗어나고 싶다.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밖에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토끼가 설 자리는 없다. 나는 우리에게 친일의 폐해 못지않게 일본을 무조건 악마시하면서 민족주의의 숭고함을 확보하려는 그릇된 충동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크게 우려하는 바이다. 나는 친일도 아니고 반일도 아니다. 나는 친미도 아니고 반미도 아니다. 나는 이 이분법이 지배하는 무간지옥을 벗어나고 싶은 하나의 중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