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5/2/3

낮에, 일본의 한 국회의원과 만났다.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한 일본의 “국회결의”와 한일협의체 설치가 필요하다고 일본어판에 쓴지라(오늘아침 아사히신문에서도 강조),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기꺼이 요청에 응했다. 그리고 많은 대화.

일본과의 만남을 일본편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이들도 많은 듯 하지만, 언젠가는 오해가 풀릴거라고 믿는다. 내용여부와 상관없이 호평자체를 문제시하는 곡해는 이어지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일본의 호평이나 긍정적인 반응은 고마우면서도 늘 쓸쓸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55664761127104&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31

하루 늦은 일기를 씁니다.어제 토론회개최를 직간접으로 도와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함께 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한국어판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장정일 선생님의 토론문은 공개를 허락해 주셨으니 이 아래에 붙여 두겠습니다. 일본어 판에 대해 말해 주신 Veki Yoshikata 선생님도 괜찮으시면 자료 이하에 공개해주세요.1부에서 두분의 말씀을 듣고, 2부에서 제가 대답하고 참석해주신 또 다른 분들의 질문에 대답하는형식으로 진행했었습니다.내용이 정리되면 나중에 다시 공개하겠습니다.

이런저런 한계도 보였지만 아무런 연고없는 젊은 분들이 2차 모임까지 참여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의 하나가 아니었나 합니다.
참석해주셨던 분들,미처 말씀하지 못하셨던 이야기나 감상 올려주시면 다른 분들이 분위기를 더 잘 아실 수 있을 듯 합니다. 저에겐 페북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절감한 자리였습니다.
<법정에서 광장으로!>운동에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감사드리면서,1차 보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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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원점’을 직시하기, 혹은 ‘복잡성’을 마주하고서(장정일)

이 자리에서 발제를 하게 된 저는『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2013)에 대해 결코 중립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발제자가 아닙니다. 저는 이미 박유하씨가 낸 두 권의 책에 무척 호의적인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리뷰는 지은이의 와세다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인『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2011)를 읽고서입니다. 그 책은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것으로, 소세키는 타계한 바로 그 해(1916)부터 지금까지 부동의 일본 ‘국민작가’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국민작가’는 스스로의 예술혼이나 작품의 힘만으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1933년, 천황제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죽었던 고바야시 다키지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의 저항적인 문학과 실천 모두가 온전히 평가되지 않았던 반면, 천황제나 일본제국주의에 순응적이었던 소세키의 ‘자기 본위주의’는 마치 천황제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나 했던 양 예찬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명백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어느 작가가 국민작가가 되고 말고는, 그를 국민작가로 주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나라의 역사적 맥락 때문입니다. 이 말을 널리 알려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국민작가란 (전례에 따라) 의례히 그렇게 있어왔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국민작가가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결론은 ‘국민작가란 원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들리지만, 국민 작가가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국민작가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태도와는 매우 다릅니다.『제국의 위안부』를 이야기하면서 다시 나오겠지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상(像)은 만들어졌다!’라는 주장과, 일본 우익이 말하는 것처럼 ‘군 위안부 따위는 없었다!’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소세키가 ‘만들어진 국민작가’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지은이는 소세키의 작품 바깥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라는 제목,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로 읽는 근대’라는 부제가 암시하고 있듯이, 소세키라는 국민작가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서 지은이는 문학만 아니라 역사학․사상사․여성학 등을 폭넓게 연구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사정은 오늘의 인문학이 분과 학문이 아니라, 학제 연구라는 것을 새삼 확인해 줍니다. 분과 학문에서 학제 연구로의 이런 변화는, 이제 문학만 연구하는 문학 연구자, 역사만 연구하는 역사 연구자, 사상사만 연구하는 사상사 연구자, 여성학만 연구하는 여성학 연구자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의 말을 여기까지만 듣고도, 제가 다음에 하고자 하는 주장을 미리 눈치 채신 분도 계실 겁니다.『제국의 위안부』에 반감을 가지신 분들 가운데는 ‘당신이 무슨 역사학자냐?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은 비전문인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작금의 문학 연구는 문학 연구에 그치지 않으며, 다른 학문의 사정도 그러합니다.『제국의 위안부』가 지은이의 전공인 일본근대문학과 전혀 상관없지 않다는 것은 다무라 다이지로가 쓴 단편소설「메뚜기」(142~150쪽)에 대한 분석으로도 증명되지만, 그 대목이 없었다하더라도『제국의 위안부』는 오늘의 문학 연구가 ‘문서를 읽는 모든 일’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또한 이 책에는 박완서의 단편소설「그 여자네 집」, 이현세의 장편 만화『남벌』, 텔레비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각시탈>,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에 대한 짤막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뜻에서 저는『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와『제국의 위안부』사이의 거리는 그리 크지 않으며, 두 책이 똑같이 만들어지는 ‘민족 정체성’과 ‘젠더 억압’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리뷰를 쓴 바 있습니다. 발제문을 쓰기 위해 그 리뷰를 다시 보니, 지면의 제약과 계몽적인 절차 때문에, 이 책이 가진 가장 뜨거운 쟁점(문제)을 지은이만큼 날카롭게 드러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발견한, 아니, 저보다 먼저 그 뜨거운 쟁점을 발견해서 그것을 법정으로 가져간 사람들에 따르면, 이 책의 두 가지 문제(쟁점)가 있다고 합니다. ①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당하지 않았다(이런 주장은 27, 33쪽부터 나오다가 “‘위안부’들을 ‘유괴’하고 ‘강제연행’한 것은 최소한 조선 땅에서는, 그리고 공적으로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38쪽에서 명백해 진다. 그러나 방금 인용한 쪽에서도 “군인이나 헌병에 의해 끌려간 경우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라고 썼듯이 ‘강제성이 없었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항상, ‘경찰이나 군인에 의한 강제 연행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이라는 유보 단서를 달고 있다. 42, 50, 51, 110, 111, 152, 291~292쪽이 대표적이다). ②위안부는 일본군과 동지적 의식을 나누었다(67쪽에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고 처음 나오며, 75, 162쪽 등에서 볼 수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두 대목은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했다’는 생존 위안부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 ‘군위안부 따위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일본의 극우의 주장을 닮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했다’는 생존 위안부의 증언을 부인하거나 거짓말이라고 반박한 경우가 없습니다. 지은이는 그것이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51쪽)라고 말할 뿐입니다.
일본 극우는 ‘강제연행은 없었다, 하므로 군위안부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지은이는 이 책의 서두 여러 곳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타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임으로써 [군위안부라는]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은 이 문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5~26쪽),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잇는 것은 분명하다.”(49~50쪽), “그녀들을 만든 것이 식민지지배 구조라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91쪽) 식민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는 일본 우익이 이런 주장을 하겠습니까? 극우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은이의 주장 ①은 식민지 조선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원점(原點)’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일제는 전쟁 말기에 초등학교 선생이 군도를 차고 수업을 할 정도로 엄한 통치를 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치안․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군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습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입니다. 이런 조직을 유지하고, 그들을 하수인으로 부리지 않을 바에는 뭐하러 조선총독부를 세웠겠습니까? 일본은 중국과 남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한 명의 군인도 아까운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 군인을 보내서 마치 ‘보쌈’하듯이 강제연행해본들 얼마나 하겠습니까?
가끔씩 한국 신문을 보면, 한국의 연구자나 외국의 연구자에 의해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라면서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발굴된 자료가 대서특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은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전쟁터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처럼 보인다.”(158쪽)라는 지은이의 주장을 더 잘 뒷받침해 줄 뿐, 조선의 일반적인 상황을 나타내 주지는 않습니다. 조선은 무법이 활개를 치는 전쟁터가 아니었던 데다가, 일본 내지는 물론 일본군을 위한 자원과 식량을 생산하는 중요한 병참입니다. 형식적으로 마나 내선일체를 흉내 내어야 할 일본이 군경을 동원하여(물론 그들만의 법이겠지요), 강제연행을 저지른다면 조선인의 대대적인 저항을 사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일제시대에 각계각층에서 활약한 일선동조론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어쩌자고 그들이 저런 만행을 눈뜨고 보면서도 일선동조를 주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은이가 군위안부를 모집하는 데 일본 군경에 의한 강제연행보다 “마을 내부 사람”(39쪽), “동네 사람”(41쪽), “우리들 자신”(52)이 하수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런 근거에서입니다.
지은이의 주장 ①이 식민지 조선의 성격 혹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전략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원점’ 해석과 연관되어 있다면, ②는 우리를 일본군 위안부의 ‘복잡성’과 대면하게 합니다. ②의 주장은 이 책의 제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책 제목에 나오는 ‘제국의 위안부’는 누구를 주체로 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이 제목은 자칫 위안부를 주체로 ‘위안부들 스스로가 자신을 제국의 위안부로 생각했다’로 해석되기 쉽지만(그렇게 해석되는 대목도 있다), 실제로는 일제가 주체입니다. (방점 필자) “국가가 일본인을 비롯한 ‘제국의 위안부’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역할은 […] 성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군인을 ‘후방의 인간’을 대표하여 ‘전방’에서 ‘위안’까지도 요구되고 있었다.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것은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이었지만, 그러한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 – 자기 존재에 대한 (다소 무리한) 긍지가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61쪽), “가족과 고향을 떠나 머나먼 전쟁터에서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 군인들을 정신적․신체적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 그 기본적인 역할은 수없는 예외를 낳았지만,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요구된 ‘조선인 위안부’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65쪽) 요즘 말로 하자면, 일본군은 군위안부에게 육체적 봉사에 그치지 않고, ‘감정노동(착취)’까지 요구했는데, 이 요구야말로 군은 물론 남성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지금껏 원해 왔던 게 아니었는지요? 그 결과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다는 분석도 나오게 된 바, 그것은 일본군과 남성 일반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감정 노동의 압박을 도외시하고는 옳게 납득될 수 없으며, 그 처지에 놓인 군위안부 여성의 절박한 생존법을 헤아리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뜻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주체는 절대 위안부(여성)로 오독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군위안부들의 (윤색되지 않은)초기 증언, 즉 일본군 군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센다 가코의『목소리 없는 여성 8만 명의 고발, 종군위안부』(1973), 한국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증언집)』(한울,1993~1999), 미국 정부 전쟁정보국이 전시에 포로로 보호한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한 보고서 등을 보면,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한’, ‘나이 어린’ 일본군 위안부상과는 다른 위안부들의 증언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착각을 한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위안부상은 “하나의 이미지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는 다양한 측면”(19쪽)을 없애버리고 “아직 어린 10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노예처럼 성을 유린당한 조선의 소녀”(17쪽)로만 고착되었을까요? 한일 사이의 풀리지 않는 과거사 청산 문제가 한국인의 ‘피해자성’을 부채질하고, 거기에 대한 반동이 일본 우익을 혐한으로 극우로 몰아가는 것일까요?
이 발제문을 쓰기 위해『제국의 위안부』를 재독하면서 저는 이 책의 꼬투리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했고, 실제로 많은 꼬투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잠시 나왔지만, 한국이 위안부의 피해자성을 너무 내세우는 바람에 선량한 일본인들까지 혐한과 우경화로 내몰았다는 주장(203, 314쪽),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온 피해자였다면 일본 군인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머나먼 이국땅으로 ‘강제로 끌려온 존재’였다.”(74쪽)는 주장(이 주장에 대해서는 필자를 대신해서 약간의 변명 섞인 부연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위안부 문제에서 식민지의 구조적 강제성과 “가부장제의 강제성”(26쪽)을 동렬로 놓는 주장 등이 그렇습니다. 이 꼬투리들은 앞으로 좀 더 심화된 연구를 필요로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인 군위안부 문제를 둘러 싼 한일간의 사죄와 보상 문제를 거론한 3부와 냉전 종식과 군위안부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4부에 대해서는 요약과 발제를 생략했습니다. 먼저 저는 현실 정치가 관련된 2․3부는 한일 사이에 ‘하나’가 아닌 ‘여러’ 위안부상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있기 전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속단이겠지만, 이번 세미나에서 위안부의 실체를 놓고 논의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54028347957412

渦中日記 2015/1/30

어제 무리했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안 좋아, 검찰에 전화해서 다음으로 미루어 달라고 했다. 다음주엔 시간을 낼 수 없어서, 그 다음주로 일정을 다시 잡았다.

어제의 형사와 검사는 “조선인 위안부는 매춘부가 아니다”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반대로, 일본인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고 믿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자발”의 이중성과, 일본인여성들 역시 속아 끌려간 이들이 많고 하루에 수십명씩 상대하는 일이 있었다고 설명해도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어제 가장 힘들었던 건, 담당자들의 태도보다도, 비좁은 조사실에서 그런 설명을 하는 아이러니를 견뎌야 했다는 점. 2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거대한 인식에 맞서는 일은, 외로워서 서글프기보다는, 서글퍼서 외로웠다.

문제는 이런 류의 반응을 뒷받침하는 것이 매춘에 대한 차별이라는 사실. “순수한 소녀”에 대한 집착도, “매춘부멸시”도 양쪽다 매춘을 하게 된 이들을 차별한다는 점에서 적대적공범이다.
나는 매춘은 가능한 한 없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들어서게 된 이들에 대한 차별에도 반대한다. “강제로 끌려간 소녀”에 우리사회가 집착하는 한 위안부할머니들에게도 “해방”은 오지 않을 테니까.
(내일, 책에 대한 토론회를 합니다. 아직 추울 것 같지만, 페친 여러분들, 뵐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5280263474665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29

세번째로 검찰에 다녀왔다. 이번엔 수사과가 아닌 형사과.

내용은, 지난번에 다 대답했고 서류까지 작성된 50여개 항목에 대한 반복질문과 약간의 추가질문. 나는 문간에 있는 나이든 계장에게 조사를 받았고 아직 젊은 검사는 안쪽 책상에 앉은채로 간간이 말을 섞었다. 책을 읽었다는데도 모멸감을 느낄만큼 적대적이어서 오랫만에 화들짝 “바깥세상”을 만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사람좋게 생긴 계장도 검사에 맞춰 내 답변에 대한 반박과 부정. 원고들의 질문 이상으로 왜곡된 질문을 잇달아 날렸다. 그들은, 원고측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그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검사는 심지어 “전쟁을 수행했다”는 표현은 “자발적”이었다는 뜻이냐고 추궁했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그림을 출력해서 보여 주면서, 이런데도 일본군이 위안부를 죽이지 않았다는 말이냐고 추궁했다. 올리기는 끔찍한 그림이라 안 올리지만, <… 가 (위안부를) 목을 잘라 국 끓여 먹으라”고 말했다>고 북한출신 위안부할머니가 말한 증언을, 실제로 국끓여 먹은 것처럼 그렸던 그림이다. 원고측자료가 아니니, 검사 자신이 그런 자료의 영향을 받았던 듯 하다.

그들에게 난 “강제로 끌려간 조선소녀”를 “자발적으로 간 일본인위안부”와 똑같이 취급하는 불온한 사람이었다. 가부장제나 업자의 책임을 거론하는 일로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켜 보려 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일제시대때의 “비국민” 취급.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52365901456990

渦中日記 2015/1/28

더이상 머리를 방치하면 안될 것 같아서, 만사 제치고 미장원에 다녀 왔다. 꼭, 내일과 모레, 이틀동안 검찰에 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래도, 내 책을 가열차게 비판했던 몇몇 남성학자들에 따르면 “위험/위태/교묘/모호/집요”해서 “혼돈/착종/몰입/흥분/종교적/연막”속에 있다는 책의 저자, 나라팔아먹을 위험한 여자로 보이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아주 없진 않았다. 다소곳한 “민족의 딸”이기를 거부한 것으로 보였을 여자에 대한 그들의 혐오는, 다시 보니 많이 깊었다.

경리단길에 있는 이 작은 미장원에는, 개같은(사람을 잘 따르는)하얀 고양이가 있다. 그런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신장염으로 수술하고 휴양중이라고 했다.
아직 어린, 아픈 고양이 얘기가, 오늘따라 아픈 사람만큼 아프게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도 날이 추워서였을 것이다. 아픈 이들과 아픈 동물들이, 빨리 나아 따뜻한 봄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51810954845818&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26

고발직후부터,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소송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시고, 저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 주셨던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판매금지가처분판결을 앞두고, 이 책을 공론화해야 한다는 운동을 시작합니다. 함께 해 주시고, 많이 공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게는 판결이 나오는 날 이상으로, 오늘이 의미깊은 날이 될 것 같습니다.

https://www.facebook.com/radicalthird/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50311181662462

渦中日記 2015/1/21

비교문학자 니시마사히코 (西成彦)선생이, 2월에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대학에서 내 책을 대상으로 심포지엄을 연다. 마침 어제 일본신문에 다른 책과 함께 책에 대해 다루어준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토론자로 나서 주기로. 나리타류이치선생(成田龍一)이나 이와사키미노루선생(岩崎稔)등, 가까운 지인학자들도 동경에서 일부러 와 준다고 하니 깊은 논의가 가능할 것 같다.
전체 테마는 <한일경계를 넘어서–제국을 대하는 방식>. 최근에 <제국의 어둠>이라는 책을 낸 김항선생의 책도 같은 테마로 묶어 논의한다고 한다.

우에노선생은 9년 전에 쓴 책<화해를 위해서>일본판해설을 써 주었던 분이다. 그 때는 내 책이 <뜨거운 불 속의 밤을 줍는 행위>(일본어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직역)이라 했는데, 이번엔 <불 속에 직접 뛰어 들었다>고 표현했다. 고발당한 건 그 결과일 수 있겠지만, 나로선 고발이후 비로소 나를 덮쳐오는 <뜨거운 불>을 만났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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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裕河さんの『帝国の慰安婦』日本語版(朝日新聞出版)が刊行されて3か月余りがたち、多くの読者がこの本を手に取り、さまざまな反応を見せ始めている。
戦後70年の年にもあたる今年、私たちは「帝国日本」への向き合いを新たな形で求められており、その点では、東アジアの私たちすべてが、この課題の前で平等だ。
「慰安婦問題」ひとつをとってみても、それは「帝国日本」が招き寄せた問題であった。日韓で平行線をたどっているかに見えるこの問題に対して「共通の視点」をさぐりあてるための意見交換の場としたい。

立命館大学・公開ワークショップ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
2015年2月22日(日)14:00-17:30
〈「帝国の慰安婦」という問いの射程〉
場所:朱雀キャンパス2階203教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朴裕河(世宗大学校)、平井和子(一橋大学)、森岡正博(大阪府立大学)、上野千鶴子(立命館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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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お、同企画は、下記企画と対をなすものであり、合わせて皆様の来場・参加をお待ちしている。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第1回「帝国の擬人法」
2015年2月12日(木)15:00-17:30
場所:衣笠キャンパス末川記念会館第3会議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金杭(延世大学校)、 沈煕燦(立命館大学専門研究員)、原佑介(日本学術振興会特別研究員)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46280138732233&set=a.578003518893233.14637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1/13

멀리 사는 페친이 아름다운 찻잔을 보내 주었다. 황금빛찻잔.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 황금빛이어서 마음에 든다. 귀모양으로 살짝 구부러져 있는 건, “차를 마실 때 귀기울이는 순간을 떠올리며”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페친이 늘어나다 보니 진득하게 “귀기울이는 순간”이 적어진다. 읽었다는 표시로(공감했다는 표시조차)”좋아요”를 누르지만 가볍고 가벼운 소통에 회의가 든다. 아무래도 페친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어제 대통령기자회견은 다 들어 볼 생각이었는데 그만 십분을 못 넘기고 꺼 버렸다. 대통령에게 부족한 건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귀기울이는” 자세였다. 소통은 귀기울여, 정성껏 듣는 일에서 가능해진다. 대통령은 会見을 했지만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보지 않았다.

대통령 뿐 아니라, 나와 다른 이의 말(생각)은 듣지 않고 배제하려는 욕망이 진영과 상관없이 넘쳐난다. 그래서 내겐 경제적 양극화 이상으로 심리적 양분화문제가 심각해 보인다. 프랑스테러사건이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다. 갈등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소리없는 총성을 매일밤 듣는 기분. 대체적으로 따뜻하고 지적이지만, 페북에도 조롱과 냉소와 욕설이 넘친다.

어제 나는 책의 초고를 보여주기까지 했던 가까운 지인에게 아주 약간 비판을 받고, 배신감에 잠시 분노했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건 내가, 책에 대한 모든 비판이 현시점에서는 고발을 지지하는 일이 된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고발취지가 이제 “논지”를 문제시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그건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문제시해 왔던 “강자로서의 피해자”가 된 순간이기도 했다.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어떤 비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자세. 피해자의 오만.

어쩌면 우리의 대통령의 “불통”도 거기서 온 건지도 모르겠다. 압도적 폭력을 만났던 트라우마가 만든 도덕적 우위.

아무튼 분열과 혐오가 넘치는 사회를 차세대에게까지 물려줄 수는 없으니 “귀기울이는” 일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깊고 고요한 밤과 마주하는 것처럼. 우주처럼 이해불가한 안팎의 타자들에게.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40619592631621

渦中日記 2015/1/10

페북에 <받은 메시지함>외에 <기타메시지>함도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고발사태 직후에 받은 메시지들을 반년이 넘도록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반년이나 늦은 답장들을 보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주신 분은 이미 계정이 없었다. 너무 죄송한 마음. 혹 이 분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고 연락이 닿는 분이 계시다면 알려 주시면 좋겠다.
당시 받은 메시지들을 뒤늦게 읽으면서 약간 가슴이 싸아했다.
이제 곧 7개월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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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저는 미국에 30년을 거주하고 있는 ……라고 합니다. 메시지를 보내고자 마음 먹은 이유는,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에 반하는 이슈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책을 저술하신 교수님의 노고와 용기에 감사드리고, 현재 교수님께 가해지는 수많은 비판과 질타에 굴하지 마십사고 응원하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제가 살았던 Pasadena 에서 20여분 거리의 글렌데일에 위안부 동상을 세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부터 였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왜 애정이 없겠으며, 일본의 침략에 왜 분노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글렌데일이 자매도시들을 소개하기 위해 할애한 공원에 한국이 제일 먼저 위안부 소녀동상을 세웠다는 사실은 시의 취지와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는 동상건립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중 제가 가졌던 가장 큰 의문점은 위안부가 차출되었던 다른 나라들은 조용한데, 왜 유독 한국만 이렇게 난리를 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약 한달 전 웹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발췌부분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비로서 많은 부분들이 이해되었습니다. 특히나, 책은 위안부 이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사신 저의 어머님이 말씀하셨던 부분들과도 일치했습니다.

현재 교수님께 비판을 가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교수님이 들춰내신 팩트가 불편한 듯 합니다. 팩트의 일부만 조명했다는 사람들은, 이전에는 알려진 팩트가 거의 없었고 감정만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일부 사람들은 “강제 vs. 자발” 이란 이슈가 칼로 무우쪽 자르듯이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상황임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강제라고만 억지부리며 “매춘”의 측면에는 한점의 고려없이 무조건 비방만하고 나서는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수님이 책에서 기술하신 한국측 실수/조작/통제 등은 아예 무시합니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런 편파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 특히나 그 감정이 적개감일 때, 사실에 근거하고 이성에 입각하여, 이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라 봅니다. 교수님의 저서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는 만드셨지만,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셨다는 점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오는 어려움들을, 책을 저술하셨을 때 가지셨던 동일한 용기로 지혜롭게 극복해 나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눌한 한국말로 두서없는 글을 쓰서 죄송합니다만, 소리없이 교수님을 응원하고, 저서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2014/6/2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38835126143401

渦中日記 2015/1/5

연말에 했던 최종 답변서에 대해서 원고측도 답변서를 제출했다. 여전히, 문서가
제출되었다는 문자가 법원에서 오면 약간 긴장한다.
23쪽 분량. 하지만 내용은 지금까지 주장과대동소이했다.

다시 읽으면서 확인한 것은 이들이 나를 “일본의 나팔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일본인 위안부와 다른 방식으로 모집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일본군의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

책이란 한번 저자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것이기는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읽도록 만드는 건 무엇일까.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33792889980958

渦中日記 2015/1/5-2

일본어판을 만든 편집자가 보내준 어제날짜 마이니치신문사설을 보면 일본인들이 내가 던진 공을 받아 주었다고 느낀다.
이런 자료들을 법원에 제출하면 다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원고측은 일본인들이 내 책에 호응하는 건 내가 일본의 나팔수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겠지. 재판이란 서로 소설을 쓰는 거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우울한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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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70년 담화에 필요한 것은,전후 50년 때 발표된 무라야마담화를 전후일본의 흔들림없는 기반으로 삼고,그에 입각해 미래를 전망하는 자세일 것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과거의 한 시기에 국가정책을 잘못 정하여><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아시아국가들에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끼쳤다>라는 인식이 핵심이다 .
(중략)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의 오보를 계기로 위안부문제 제기자체를 부당하다고 하는 논조가 생겨나고 있다. 사실관계를 수정하는 건 필수적이지만, 위안부를 필요로 했던 사회의 추악함은 어떤 반론으로도 변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최근저서<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설을 비판하면서 <전쟁에 동원된 모든 이들의 비극 안에 위안부의 비참을 위치시켜야 성까지도 동원하는 “국가”의 기괴함이 드러나게 된다>고 쓰고 있다.
(중략)
이제 역사를 배타적인 민족주의로부터 차단할 때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가져야만 그 주장은 받아들여진다. 일본의 정치지도자는 편협한 자기중심역사에 갇혀서는 안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33801089980138&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2/30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을 11월초에 출간했었다. 두 달이 안되는 사이, 예상 이상으로 주목해 주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
일본인 페친들이 태그해 주거나 내가 올린 적도 있지만 오늘 마침 아사히신문의 <2014년 논단회고>에서 다시 다루어져서, 정리겸 이 두 달 사이에 나온 서평/인터뷰를 같이 올려 둔다.

이 중 두개를 한국일보가 번역소개해 주어 많이 고마웠다. 금년의 베스트3에 올려 준 이가 두사람이나 있는 것도 예상밖의 일. 아무튼 나의 문제제기를— <전후70년>이 아니라 <제국후 70년>이라는 발상이 필요하다는–일본인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준 것 같아 기쁘다.

가처분심리용최종답변서에도 썼지만 한 학자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문제제기에 일본이 어떻게 대답해 나갈것인지의 물음이 일존을 향하고 있다>고 했고, 한 논설위원은 <만약 일본이 `위안부 문제는 어디에나 다 있었다`라고 주장하지 않고 제국주의적 팽창을 넘어서는 사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세계사적 의의는 크지 않은가?>라고 나의 말을 정리하면서 <반대할 이유가 나로서는 생각나지 않는다>라고 응답해 주었다.

한국어판의 수난때문에 우울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금년은 괜찮은 해였다고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이 호응이 내년에는 좀 더 구체화 되어 문제해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28422677184646

渦中日記 2014/12/26

정정/반론보도 신청을 했던 네 군데 언론사중 세 곳과는 합의하고 취하했었다. 그런데 연합뉴스가 처음 태도를 바꾸어 합의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오늘 다시 언중위에 와야 했다. 합의가 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소송으로 가는 시스템이어서 다소 고민스러웠는데, 다행히 중재위 위원들의 권고에 따라 본부와 여러번 통화하더니 짧은 반론보도를 내 주기로. 이로써 언론중재위원회 일은 끝났다. 다행히 해가 가기 전에.

7시 약속이 있어서 근처카페에서 레몬티 마시며 시간 보내는 중. 낮부터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는데(마치 연애할 때처럼) 컨디션이 좀 안 좋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25248354168745

渦中日記 2014/12/17–상념

영하10도라는 추운 아침, 다시 검찰에 왔다. 무심하게 파란 하늘을 보면서 문득 “부재”에 대해 생각했다.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해서 가까운 이들을 잃은 사람들은 오늘, 이 추위와 하늘이 얼마나 시릴까.

오전조사를 끝내고 밖에 나와 뜨거운 콩나물국밥을 먹고 카페에 들어왔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조사 받으러 들어가야 한다. 오늘은 늦게까지 걸릴거라고 했다.
수사관이 고소장 내용을 하나씩 질문하면서 대답을 입력하는 방식이니 그럴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낸 세금이 낭비되는 또하나의 현장을 본다. “세금낭비 반대!”라고 1인시위라도 하면 코미디가 될까. 할머니가 한사람 더 추가되었다니 민사손배청구도 3억3천만이 되었을 터. 할머니들은, 일본한테 보상받는 것보다 나한테 보상받는 것이 더 쉽겠다고 생각하신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분들이 추가되지 않았다는 건, 나눔의집 이외의 지원단체는 이 사건에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겠지.

아무튼 구두조사는 답변서 쓰는 것보다 어려웠다. 하나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책을 썼는데, 단순화된 고소인들의 질문은 나에게도 단순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에.
빨강과 초록의 컵을 보니 문득, “노르웨이의 숲”이 생각난다. 두권의 표지를 각각 빨강/초록으로 하고 황금빛 띠지를 둘렀더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책. 눈으로 뒤덮인 숲에서 토나카이를 보고 싶어진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19088544784726

渦中日記 2014/12/16

<노골적불평>을 포스팅하는 건 위로받고 싶어서인 게 내가 봐도 뻔하다. 그런데 실제로 위로를 받으면 많이 민망하다. “나 힘들어요!”를 한정된 관계가 아닌 만천하를 향해 외치는 일이란 옷벗고 거리에 나선 거나 마찬가지일 터. 페북에는 수많은 거리관계가 공존하기 때문에 드는 감정일 것이다.

그럼에도 명색이 <渦中日記>이니 재판의 <과정>뿐 아니라 심경과 상태도 남겨 두어야 맞다는 생각은 한다. 씩씩한 모습, 의연한 모습만 남긴다면 좋은 모습만 남기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역사교과서”와 뭐가 다를까. 역사도 좋아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건, 문학이 모든 악을 포함한 인간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보이기 위한 일기가 아닌 바에야, 역사 아닌 문학을 지향하고 싶다. 해피엔딩이 될런지 <옥중일기>로 이어질런지 알 수 없지만.

“인권”–“나의 본연의 삶을 누릴 권리가 필요해!”라고 외쳤더니 일본인친구가 아마존의 사진을 보내 주었다. 며칠 전부터 내 책이 <일중/태평양전쟁>분야에서 베스트셀러1위를 오르내리고 있다고. 음.책 팔리면 평화운동에 쓰겠다고 공언한 바 있는데. 우선은 나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 주셨던 김관기변호사님과 친구들에게 한턱 쏘아야겠다.

고발당한 날짜, 그 소식을 듣고 “목이 탄다 “는 것이 무언지 처음 알았던 그 날짜에서 꼭 6개월이 지났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18426094850971&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2/15

일본에 가기 전에도, 가서도, 그리고 다녀온 이후에도, <재판자료>라는 걸 여전히 붙들고 있다. 이제 익숙해져서 쓰여 있는 말들을 분노와 답답함보다는 이해로 대할 수 있게 조차 되었지만, 무의미한 심적/신체적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가중중.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일본에서 만난 아들이, “명예훼손”재판을 방청하고 왔다면서 그랬다. “엄마도 명예훼손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필요한 거 아니야?”라고.

아니,아들아. 엄마한텐 지금 “인권”변호사가 필요해.. 이런 일에 시달리느라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아 줄. 책이나 음악이나 사람이나 풍경에 오롯이 빠질 수도 있었던, 인생의 한 때를.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1797854156239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2/7

하루종일, 곡해와 오해, 심지어 하지 않은 말까지 했다고 주장하는 글들과 마주하다 보니 피로가 극에 달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쓴 논문이나 책에 의문을 가진 이가 있다면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하거나,독해 자체에 문제가 있는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심신을 지치게 한다. 심지어 공적인 장이 아니라 수사관이나 재판정에 내기 위한 것이라면. 더구나 다른 할 일도 기다리고 있는 일요일을 그런 작업에 온전히 바쳐야 하는 것이라면. 법의 힘으로 “의무”로 다가온 일이라면.

진 기억이 없는 3억의 채무를 요구하는 서류에 대답하면서,도로감에 심신이 갉아먹혀지는 느낌. 사죄하러 가지 않은 내게 그들이 원한 건 이런 것이었을까. 피로가 아니라 도로감때문에 손드는 일.
12월 첫 일요일. 우울한 오후에.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1300297205995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2/2

“…..단 거 좋아하실지 모르지만 이거 드시고 좀 편안해지시라고 저의 아침겸 점심을 ㅋㅋ저의 양식을 응원과 함께 드립니다.
교수님, 정신적으로 무너지시 마시고 굳건히 서 주세요!! 뒤에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교수님 화이팅!!
저는 교수님 생각을 지지하고 맞다고 생각하고 있고 교수님 응원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필사하듯(내 생전 처음이다) 학생의 글을 옮겨 적는다. 이런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내일 검찰에 조사 받으러 간다고 강의때 말했더니, 한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와 과자와 편지를 건네 주었다.
50년 이상 살았지만 자신의 양식을 선물로 받은 건 처음이다. 이 싸움에서 질 수 없는 이유.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09709099056004&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1/30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해 요구했던 반론기사가 나왔다. 고발에서 꼭 5개월 반. 페북상에서 공개적으로 지지목소리를 내 주신
노혜경 선생님,김규항 선생님, 대책논의팀을 만들라고 조언해 주셨던 Miyong Kim-To선생님, 다시 감사드립니다. 김도언 선생님께도.
박삼헌 선생님, Jongyil Ra 대사님, 김관기 변호사님,그리고 지지해 주셨던 모든 페북친구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보고 드립니다.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4113000439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08427309184183

渦中日記 2014/11/30-2

조선닷컴에 관한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은 고발당일과 다음날 이틀동안 쏟아냈던 9개의 보도를 삭제하고 반론보도를 낸다는 내용이었다. 7월에 올렸던 포스팅링크들를 다시 보니 이미 삭제되어 제목조차 확인할 수 없는데, 거의 같은 내용을 <제국의 위안부, 충격을 넘어 경악><박유하 교수,알고보니 와세다대학 출신>이라는 식으로 제목만 바꾸어 내보낸 기사들이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기록을 위해서다. 조선일보와 조선닷컴은 같은 회사는 아니라지만, <조선>이라는 이름을 단 매체이니 이제 이름에 값하는 품격있는기사를 써 주었으면.

http://m.chosun.com/svc/article.html

http://m.chosun.com/svc/artic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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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chosun.com/svc/article.html

http://m.chosun.com/svc/article.html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08520755841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