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7/8/20

잠시 잊고 있었는데, 누가 알려주는 바람에 무려 열흘 전에 나온 기사를 다시 베낀 기사들을 봐야 했다. 험악한 비난으로 도배된 트윗들은, 따라가 보니 역사학자 전우용씨가 광복절 새벽에 올린 트윗이 발단이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이재명시장이 했던 것과 똑같은 수법.
페북에는 올리지 않고 트윗에만 올린 건, 트윗이라면,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30만 팔로워가, 자신에게 던져진 먹잇감에 한치 의심없이 달려들 거라는 걸 알았기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식민지배”를 “옹호”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 그는 좀 실수한 것 같다. 그의 허위사실유포로 인해 나뿐 아니라 재직대학과 학생마저 모욕당한 사태 앞에서(너무 심한 건 올리지 않기로 한다)고발도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잠시 들었다. 멀리 떠나온 곳에서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니, 슬픈 여행이 아닐 수 없다.
사태는 익숙해도, 감정은 늘 새롭다. 나를 그렇게 만든 이번 일은 기자와 학자의 합작품이다.
언론도 학문도,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시대다. 동시에 그 뒤에 엿보이는 무겁고 음습한 폭력성들. 나는 이들이 위안부의 고통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그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올려둔다.
(누구나가 비호감이 될 이 사진은 연합뉴스가 오래전에 찍었다. 나에게 적대적인 매체들은 다들 이 사진을가져다 쓴다. 사진자체보다, 그 게으름과 안이함이 내게는 더 끔찍하다.)

渦中日記 2017/8/16

지금은 “한국인”으로 바뀐 것 같지만, 한국은 공항입국심사대에 오랫동안 “국민”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본은 “일본인”. 물론 나머지는 “외국인” 이다.( 일본 경우는 영주권이 있는 이들을 따로 구분한다.)
“국민”이든 일본인”이든, 입국자들을 공동체내외부로 구분하는 그 단어는, 그런 구분이 얼마나 수많은 “외부자”에게 비통한 경험을 하게 만들고 같은 이름으로 내부자마저 억압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의미에서 그저 “경계”를 말해주는 「Border」는 가벼워서 좋다. 입국이란, 그저 잠시 국경을 넘는 일일 뿐이니까. 그 안에서 내가 외부자라는 걸 이 단어는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대영제국시대 의식의 잔재일 수도 있겠지만, 전세계가 이런저런 네이밍으로 사람들을 구분짓고 갈등을 부추기는 이 시대에, 그나마 멋진 표지로 보인다.

지난 목요일에 참석했던 한 세미나에서 했던 나의 발언중 작심하고 단어하나를 강조했던 기사가 노린대로, 이 며칠 또다시 수많은 걸쭉한 욕들을 들어야 했다.(젊은 여성들 역시 그 대열에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이 아프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제 그런 욕들에 3년전만큼 상처받지 않는다(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작심하고 찾아와 사람들을 선동하는 기사를 쓴 뉴시스 기자와(심지어 그 기자는 시작전에 주최측과 잠시 실랑이한 끝에 세미나장을 나가 버렸으니 다른 기자가 달리 없었다면, 자료집만 보고 쓴 기사가 된다), 그의 의도대로 선동에 가담한 몇몇 언론과, 심지어 공식페이스북에 “그 입 다물라”라는 멘트로 페이스북유저들을 선동한 언론사페북관리자, 그리고 그의 선동에 낚인 페북유저들의 다양한 욕설이 보여주는 노골적인 여성혐오적 정황을 방치하거나 간접적으로 선동해 온 이나라의 “인권”운동가나 페미니스트들의 침묵이, 슬플 뿐이다.

아무튼 그래서, 일부러 일정을 맞춘 건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도피한 형국이 되었다. 이번엔 태양이 뜨는 방향으로.

渦中日記 2017/8/14

박원순 시장은 법률가 출신인데 독일의 전후보상이 “법적책임”이 아닌 “도의적책임”이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걸까. 모르고 있다면 과거사청산에 관심많은 법률가로서 실격이고, 알고 있다면 이 역시 시민을 기만하는 것이 된다.

위안부 문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식의 오류와 오해가 너무 많다는 점, 심지어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사람들조차 그 부분에서 걸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는 데에 있다.
새정부가 들어선 해 광복절즈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마도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다.

참고기사 : http://m.hani.co.kr/arti/society/area/806735.html?_fr=fb#cb

渦中日記 2017/8/13

김문길 소장이라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이런 식의 기만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새로 발견”한 것처럼 보여 주면서 언론과 국민을 기만하고, 일본이 자료를 “은폐” 하거나 위안부문제를 부정하고 있다는 오해를 만들고 있는 이 자료들은, 이미 20년 전, 고노담화 이후 일본이 몇년에 걸쳐 수집/정리해서 5권짜리 자료집으로 발간했고 지금은 무료로 인터넷에 공개되고 있는 자료들이다.
황우석교수나 박기영 교수만 욕할 게 아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이런 기만이 행해지고 방치되고 있는 정황의 책임은 우선 학자들에게 있다. 동시에, 이 모든 일에 따른 손가락질과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돌아올 수 밖에 없다.
한국에 대한 불신은 한국에 대한 불호로 이어지고, 그 덤터기는 차세대가 안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책임은 누가 질 수 있을까. 내가 위안부문제에 대해 쓸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해당 기사 1: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70118120000051&mobile
해당 기사 2: http://m.yna.co.kr/kr/contents/?cid=AKR20170811113100051&mobile

아시아여성 기금 홈페이지. 전에도 올린 적이 있지만 다시 올려둔다.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4반세기역사를, 제대로 깊이 파는 언론이 있기를. 비판을하려면 일단 정확히 알아야 한다.
http://www.awf.or.jp/index.html

기사에 언급된 자료가 게재된 자료집.위 홈피에 있다.
http://www.awf.or.jp/pdf/0051_1.pdf

渦中日記 2017/8/10

어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발제했었다. 몇몇 매체가 보도했는데, 비교적 사실에 가깝게 보도한 기사를 올려둔다. 어제 모임과 상관없는 재판출석때 사진이 사용된 건 서글프지만, 그래도 뉴스1이 다른통신사매체보다 정확한 보도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던 기사다.
굳이 올리는 건, 오늘 아침에 또 다시 협박메시지가 왔기 때문. 그건 물론 악의적으로 보도한 다른 통신사의 기사를 여러 언론이 가져가 보도한 영향일 것이다.
그래서, 기사가 말하지 않고 있는 부분을 추가해둔다.
1)이 세미나에 내가 출석한 건, 발제자중에 일본의 위안부지원단체(정대협과 연계된 단체) 의 이사인 학자가 있었기에 그녀와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연히 “보수”가 아니다. 나역시 보수가 아니다.
중요한 건 주최측이 보수인지 여부가 아니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렀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자세를 높이 평가한다.
2)”아이돌화”란, 군함도에 대해 썼을 때와 같은 맥락이다. 초등학생과 10대 청소년들에게 “위안부”라는 존재가 너무나 “가볍게”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그렇게 표현했고, 그렇게 말하게 된 건 댓글에 첨부하는, 순정만화 주인공 풍으로 표현된 스티커의 영향이 크다.
3)”양국 국민 간의 진정한 화해”와 “지배와 종속”관련 발언은 관계가 없다. 조선인 위안부문제를 전쟁관계가 아니라 종주국/식민지 관계로 이해해야 이 문제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4)나는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말하지 않았다. 비교적 정확한 기사조차 이 부분은 시정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슬프다.

<여고생들이 스티커용으로 그렸다는 그림>

http://news1.kr/articles/?3071729

위안부 “강제연행”을 둘러싼 간단한 메모

위안부 “강제연행”을 둘러싼 간단한 메모

어제 저녁에 카이스트이병태 교수가 쓴 위안부 관련 포스팅에서 내가 언급되었다는 걸 누가 알려주기에 읽었다. 나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읽고 보니 그 포스팅이 “박유하도 위안부를 자발적매춘부라고 했다”는 세간의 오해를 증폭시킬 것 같아 간단히 의견을 써 둔다. 이하는 전부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다.
1) 나는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내가 그렇게 썼다고 왜곡한 보도자료를 내보내고 할머니들에게 말한 것은 나눔의 집이다)
2)이른바 강제연행 관련 문서가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3)국민들의 이해가 “강제연행”과 “인신매매”의 두가지로 갈려 있는 건, 관계자들이(오랜 세월 중심에 있던 연구자와 운동가들이)어린 소녀들을 강제연행했다고 생각했던 초기 이해를 자신들은 바꾸고 나서도 그 부분을 언론에 명확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말하는 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부정한 것은 사기/납치를 포함한 “강제연행”을 일본국가(조선총독부 포함) 가 (비)공식적으로 지시했다고 생각하는, 위안부문제 중심에 있었던 연구자와 운동가에 의해 널리 퍼진 생각이다. (“강제연행” 지시 문서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군인이 데려갔다”고 말하는 소수의(증언집 전체에서 봤을 때 압도적인 소수다) 위안부의 경우, 군인으로 보였던 건 군대에서 군복을 지급받아 입기도 했던 업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는 대개 “낭자군”이나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모집되었고, 1940년대에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신매매가 중심이었던 1930년대와는 정황이 조금 달랐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징용령도 1944년에야 내려졌던 것처럼.
경찰이나 행정관리가 같이 간 경우는 총독부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업자가 사적으로 접대를 한 결과일 것이라는 도노무라 마사루교수의 의견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5)인신매매의 경우( 스스로 간다 해도 전차금을 받고 가는 것이니 인신매매로 봐야 한다. 이 경우 대부분 가족을 위해서 였다) 일본군은 부모의 허가서와 본인의 의지를 확인했다. 허가서나 의지가 없는 경우는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허가서가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허가서 자체가 위조된 경우도 많았고, 특히 업자들은 호적을 속여 어린 소녀를 파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군이 묵인한 경우도 있지만, 댓글에서 언급된 형법 226조 위반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속아서 온 것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이야기)했다는 주장을 적용할 수 없는 자료가 오히려 더 많다.
6)조선의 부모/남편들이 자식/부인들을 판 경우도 많았지만, 수양부모 제도를 이용해서 가난한 집 자식들을 데려다가 일만 시키다가 자라면 업자에게 파는 경우도 많았다. 제도가 문제시 되면서 바뀌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 가부장제 비판도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자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하는 링크글 내용에 대한 간단한 감상.
1)필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이용한 자료들 대부분은 위안부문제를 부정하고 싶거나 한국의 강제연행 주장에 대응하려 했던 일본인들이 찾은 것이다.
2)군데군데 한국인에 대한 조롱의 표현들이 들어 있다. 그런 자료를 그냥 가져다가 쓰는 건 바람직하지는
않다.
3)그럼에도 동시대 신문자료들은 거의 사실이다.
자료 설명이나 주장에 엉터리도 좀 있지만,(일본인 여성이 더 많다고 단정하는데, 일본인 보다는 조선인 여성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특히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그랬다. 일본에서 오려면 바다건너 통행이 폭격 때문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맥락에서는 한번쯤 경청해야 할 지적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지적이 나왔지만 무조건 우익! 역사 수정주의자! 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전부정해왔던 것이 이제까지의 연구자와 지원단체태도였다.
위안부문제 중심에 있던 연구자들이나 지원단체는 더이상 “강제연행”을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몇년전부터 “위안소에서의 부자유/억압”을 “강제성”이라고 주장한다. 폐업을 할 수 없었다는 등의 이유를 대면서. 요시미요시아키 교수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폐업할 수 없었던 것은 인신매매상의 구조적인 문제이고, 군대의 명령이나 억압의 결과로 확인 된 경우는 아직 없다.
그럼에도 관계자들은 그런 변화를 국민들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지는 않는다. 그때문에 국민들의 이해는 혼란상태. 그런데도 그것을 방치해 왔다. 내가 가장 비판하고 싶은건 그런 부분들이다.
이병태 교수 포스팅에 달린 댓글중엔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감할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이영훈 교수의 동영상 강의 역시, 공감 가능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중요한 건 정치적입장을 넘어선 활발한 토론이다. 비판/규탄 받을까 봐 말하지 않고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상황이기에.
연구자도 운동가도, 대부분 20년 이상 이 문제에 관여하며 “국민의 상식”을 만들어 왔다. 오랜 세월 해 온 일인만큼, 의견수정은 쉽지 않은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용기를 그들 안에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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渦中日記 2017/8/6

어제,나에게 이 글을 알려 주려고 전화, 문자, 카톡으로 연락 준 사람들이 여러사람 있었다. 조선일보니까, 라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매체가 어딘지는 내게 의미가 없어진지 오래다. 기사를 읽고 기뻐하면서 연락을 준 사람들의 마음 자체가 기뻤으니 , 그런 순간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 고마운 일.
더구나 조선닷컴은 고발 직후에 하루에 10개 가까이 나를 비난하는 낚시성 기사를 쏟아냈고, 그때문에 언중위까지 갔던 네 곳 언론사 중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비록 논지 전개가 썩 와닿지는 않아도 어찌 반가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세 살 더 나이 들었다. 언제 “끝”이 올 지, 몇살이 되어 있을지 문득 궁금해지는 밤.

[터치! 코리아] 양쪽 날개로 날면, 양쪽 날개가 부러지는 세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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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과거 망각

노유진카페와 기사들에서 나를 반복해 비판했던 심용환씨가(검찰이 나의 “범죄”를 입증하는 증인으로 세우려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군함도 관련 징용자에 관해 “국가건 국민이건 징용에 관해 노력을 하지 않았다” 고 말한 글을 우연히 봤다.
전체 취지는 나쁘지 않지만,한국인의 자기반성 촉구가 목적이라면 좀 더 정확히 알고 발언했으면 좋겠다.(내 책도 좀 더 정확히 읽어 주길 바란다.)
징용문제 연구자 자체가 우리 안에 별로 없다는 점에선 맞는 말이다. 위안부 문제 발생 이후 남성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으로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10년 전에 징병/징용자들에게 보상을 한 적이 있다. 사망자에겐 2천만원, 부상자에겐 그에 준하거나 더 적은금액.
그 금액이 적합한지, 사망자와 부상자를 구별지급하는 게 옳은지, 위안부는 4천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는데 그건 맞는 건지 등등 이 보상에 대해서는 나역시 할 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제기를 하려면, “국민과 국가”가 이런 걸 했다는 것부터 알아야 정확한 자기비판도 가능해진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된 이들에게 지불한 5600억이 넘는 돈은(다른 통계는 5800억이라고 말한다)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이었다. 그러니 인식했든 아니든 정부와 국민이 무관심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이 아닌 한국 정부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한일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한일협정때 정부가 받은 돈이 피해자개인에게 충분히 지급되지 않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도 국민도 무관심했다!”라는 지극히 “올바른” 문제기가 그저 감상적인 탄식이 되고 마는 이유.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상이 또다른 감상을 낳으면서 또다른 문제를 만든다는 점이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311192308585&code=940202

광부/계급/이동

1908년, 그러니까 109년전에 일본의 문호 나츠메소세키가 남긴 <광부>라는 작품이 있다. 자신의 체험을 써 달라는 어떤 이의 부탁을 받고 소세키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는 오로지 그 체험이 말하는 절망성에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애문제로 고민하다 자살하고 싶어 했던, 유복한 집아들 열아홉살 청년이, 우연히 광부가 되었다가 (병을 발견했다는 핑계) 곧바로 그만두게 되지만, 소설 속에서 강조되는 건 글자그대로의 땅밑, 깊은 암흑의 세계다. 자살하고 싶은 생각도 사라질 정도의 죽음의 세계. 혹은 죽을 수 있는 사고 위험이 언제나 함께 하는 세계.
세상에 힘든 노동이 한두가지가 아니겠지만 광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끔찍한 노동중 하나가 아닐까. 소세키는 지극히 관념적으로(지식인의 시각으로 ) 그 세계를 쓰고 있어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 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10 년전 지식인에게 탄광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낯선 공간이었는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기는 하다.
소세키의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조차 못되지만, 일본 작가들은 이후 그런 노동자/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많이 썼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 <게공선>으로 한국에서도 꽤 알려지게 된 고바야시 다키지는, 이 작품으로 판매금지, 불경죄 기소, 수감당한 끝에 당시 공산주의를 불법화했던 이른바 치안유지법 단속 대상으로서 특고경찰에게 벌거벗겨져 몽둥이로 맞은 끝에 사망했다. 1933년 일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근대란, 사회주의자를 사형시키고 노동자문제를 고발한 지식인을 때려 죽이기도 한 시대였다. 자국의 지식인조차 그런 정황에 놓여 있었을 때, 언어마저 미숙했을 “조선인 광부”에 대한 대접이 어땠을지는 체험담을 (보고도 알 수 있지만), 읽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시마에서 일한 사람들의 고통을 오로지 “강제연행당한 조선인”이었기 때문만으로 보는 건, 수십년전엔 다들 알고 있던, 참혹한 노동에 수반되는 계급성을 소거시키는 일이고, 결국 사태를 제대로 보지 않겠다는 얘기 밖에 되지 않는다.
오래전에 “이동”에 대해 공부하면서, 1960년대 독일로 간 광부들이 살아야 했던 것은 일본인 광부들이 살았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적이 있다. 그리고 한국인 광부들이 돌아오고 난 이후 그곳에 살게 된건 베트남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본은 국경을 넘어 싼,혹은 힘들고 위험한 일도 해 줄 노동력을 찾는다.
현재 우리가 동남아시아계 외국인노동자를 차별하는 건 그가 동남아시아 출신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힘든 노동이라도 절실한, 가난하고 언어소통조차 매끄럽지 못한, 그래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이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인가? 혹은 그 두가지가 합쳐진 건가?
성급하게 대답을 결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늘 잠시 멈춰서서 생각하는 자세 쪽이다. 반복을 막는데 도움이 되는 건 그 쪽이기 때문에.

渦中日記 2017/7/19

6월 7월 무렵의 “과거의 오늘 “엔, 대개가 고발직후의 참담한 심경들이 쓰여져 있다. 그때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는 심경도,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편하지 않다.
고작 고발 한달만에, 이제 괜찮다면서 증명이라도 하듯 젊은 날의 당차 보이는 모습까지 내 걸었던 3년 전 어느날의 흔적에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안간힘이 느껴져서, 나의 모습이지만 안쓰럽기까지 하다.
상황이 그 때보다 나아진 건 분명하지만, 정황이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이후 가처분소송에서 졌고, 손해배상소송에서 졌고, 고작 형사1심을 이겼을 뿐이다. 그리고 원고측은 변호사들을 대거 동원해 검사를 통해 여전히 나를 옥죄고 있는 중이다.
이 기간동안 나는 변호사비용등으로 수천만원을 썼고 심신이 훼손되었고, 재판중이라는 이유로 연구년조차 허가받지 못했다. 물론 나를 “국민악녀”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비난도 잊을만 하면 접하곤 한다. 학과 학생들 역시 일부는 나를 “친일파”라고 말한다는 얘기를, 최근에야 들었다. 일부 학자들은 나를 엉터리학자취급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제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들 안의 문제를 지적하고, 바로 보고, 소송을 취하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들 안에서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여전히 그런 사람은 없다. 3년이 지나도록. 오히려 악의적인 칼럼과 인터뷰로 공격에 가담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
나를 둘러싼 거대한 힘들–정치세력, 학회세력, 시민단체세력–을 새삼 다시 인식하게 될 때, 이들의 돈과 힘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은 많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될 때, 그동안의 “말”이며 행동을 오히려 회의하곤 한다.
나는 이 싸움을 이길 수 있을까. 그 이전에, 이 싸움은 유의미한 싸움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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渦中日記 2017/7/17

새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리겠다고 해서 일자리 81만개 공약과 맞물려 의견이 분분하다. 페친들 의견만 해도 양쪽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 같고, 양쪽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일”과 일에 따른 보수인 “임금”에 대해 논하면서 필연적인 질문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을 올리는 건, 당장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수입을 올려 조금이라도 편안한 삶을 찾도록 하자는 것일 터. 크게는 사회 양극화 해소도 겨냥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런 취지자체에는 나역시 당연히 공감하고 지지한다. (이런 담론이 일하는 사람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라는 주장에도.)
그런데, “자영업자들의 반론”에 대해 “임금을 올렸다는 이유로 망할 곳은 망하라”고 말하는 극단론에는 중요한 논의가 빠져 있다. 임금이란 그 일의 “가치(혹은 효과)”에 대해 주어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용자가 “일의 질”이 그 임금에 상응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물음을 고용자가 아니라 피고용자가 묻는 상황이 아닐까. 말하자면, 그 일이 창출하는 효과에 대한 피고용자의 주체성이야 말로 우리가 의식하고 신장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자리자체보다 “자신에게 맞고 잘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물음과 확인이, 지금의 논의에서는 완벽하게 빠져 있다.
그건 다른 말로 하자면 창의력일 것이고, 창의력이야 말로 일과 자신에 대한 최대의 주체성 표현이다.창의력이란 과학자나 예술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일-노동자체와 제대로 마주하고 깊이 들여다보고, 가능하다면 철학을 넣어 그 일을 완수할 때 일에는 아름다움과 깊이가 생긴다. 그리고 그때 바로 “일”에 자연적으로 경제성이 따라 붙는다. 무형의 작업이 되었든(청소, 가게 직원),유형으로 표현된 것이든(수공예품, 상품, 건물..), 요구된 것 이상의 “가치”를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우 자영업자든(편의점 직원 경험을 써서 작가가 된 일본여성 케이스라면 편의점 주인)그가 생산하는 “가치”(손님을 주의깊게 관찰해서 필요한 물건을 잊지 않고 주문해 든다던가 키작은 사람을 위해 알맞은 배열을 해 둔다던가 할 것이므로)가 만드는 생산성과 수익에 따라 임금도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므로. 편의점의 직접적 경제가치와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그 여성은 “편의점 직원”이라는, 결코 훌륭한 직장으로 인식되지 않는 공간 역시 집중(사고)하는 일로 또 다른 가치를 창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사실 문명화다.)
그런데 일률적으로 올리거나 일자리를 마련하는 “이상주의”에는 이러한 “가치” 창출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어 보인다.
동시에, 이른바 효율 중심의 근대적능력사회가 만들어온 “일”이나 “일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가진 능력이 어떤 자리에서 빛날 것인지를 가늠하고 기회를 주고 기다리는 시스템이야 말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른바 정상적인 사회, 능력추구중심의 사회에서 드롭아웃되거나 당한 이들의 폭발(폭력, 살해..)은 타인을 가해하거나 스스로를 가해(자살) 한다. 우리 사회는 그런 이들의 개인적 삶뿐 아니라 사회적 가능성마저 사장시켰다고 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급 얼마”라는 기치는, 그 자체로는 이상적일 수 있지만, 실제로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하기에는 역부족인 정책이자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모던타임즈 “(1936)가 나온지 벌써 80년인데
우리 사회 자체는 여전히 정형화되고 빠른 일에 더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일자체에 대한 집중(때로 스피드 다운)과 창의력 발휘가 아니라.
바꿔 말하면 일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력 발휘(주체성 발휘.개인으로서의 나를 온전히 표현하기)가 일이 되어야만 그 사회의 문화적/경제적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느리게 살기”등 근대 사회에 대한 반성이 생기긴 했어도, 그건 그저 일을 줄이고 휴식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일과 휴식의 이분법을 오히려 강화하고(나는 “노후”에 대한 우리사회의 지향성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일에서의 시간적효율성(질적 효율성이 아니라) 추구를 오히려 강화시켜 온 것 아닌가 싶다.그만큼 뒤처지는 사람은 많게 된다.
개인주의란, 자신의 성향대로 있어도 되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저 국가와 대치되는 개인이 아니라. 그리고 이 일에서는 맞지 않아도 저 일에는 맞다는 것을 스스로 찾게 하고 또 함께 찾아주는 시스템이야 말로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고 “시급얼마”의 논의 이상으로 중요한 거 아닌가 한다. 그래야만, 획일적인 고용(고임금),혹은 획일적인 해고(저임금)라는 딜레마에서 양측이 모두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테니까.
한 사회는 능력자나 천재만으로 구성되지도 않고 운영되지도 않는다. 근대적 효율사회에는 맞지 않아도 또다른 일에서 자기를 표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긴급한 과제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실은 고교생의 초등학생 살인과, 중학교에서의 집단자위 문제와 아이를 개목걸이로 묶어 두었다가 죽게 한 엊그제 사건에
있었다. 교권문제인지 단순한 통과의례문제인지 페북에서도 논의가 갈렸지만, 중요한 건 그 사태가 교육/학급의 붕괴현장이라는 사실 아니었을까.
아이들을 분노하거나 옹호하는 시각만 눈에 띄었지만, 더 필요한 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어른 탓이고 사회탓이라는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와 88올림픽 이후 30년을 숨가쁘게 달려 왔지만,그동안 자란 아이들이 폭발하는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이런 현상이, 그동안 함께 진행된 획일적이고 억압적이고 이제 “학대”라는 인식마저 생기게 된 과잉교육, 동시에 정말 필요한 교육(방식)의 결핍(느리게 공부하기)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은가 나는 생각한다. 기존학교를 없애 버리거나 대안학교를 따로 만들 것이 아니라, 교육내용과 형식의 변화가 오히려 필요하다.
임금을 올리는 건 급료차별을 개선해 안정성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향하는 이유는 쾌적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쾌적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개인이 “생긴대로” 있어도 살아갈 수 있는 자유, 혹은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추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나름대로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일은 잊고 지내 온 것 같다.
사람은 여유로울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고, 여유롭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지향하는 사회에선 오히려 개인을 파편화시켜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답게 존재할 수 있는 일의 스피드와 집중(철학)이 담보될 때 우리는 오히려 서로 손내밀며 연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연계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오히려, 획일적인 정책이 아니라 자유롭고 유연한 정책이 필요하다. “개혁”이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앞에 있는 것을 치우거나 뒤집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맞는 공부(일)의 내용과 스피드가 보장되는 사회. 그로 인한 주체성과 만족이 한 사회의 삶의방식이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지향했으면 한다. 추상적논리나 감정이 견인하는 사회가 놓치는 것들에 주의하지 않는 한, 진보정권이 이끈다 해서 곧 행복한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진보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더더욱 필요한 자각이 아닐까.

渦中日記 2017/7/16

그저께 재판에서 나의 “범죄증거자료”로 제출되었던 “조선인 위안부 당시영상”관련 기사가 페북에서도 많이 공유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주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나를 처벌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되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시간과 발품을 판 끝의 연구팀의 “발견”자체에 대해서는 치하를 보낸다.
또 이 인터뷰 기사에서 연구팀은 나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고 쓰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동시에 <제국의 위안부>가 “학술적으로 틀린 내용을 담고 있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 인터뷰를 읽는 사람들에겐 나와의 공통점보다는(사실은 민족주의 비판이 아니라 진보좌파 비판이다) “틀린 내용의 책을 쓴(그래서 법정에 가 있는) 박유하”가 다시한번 각인되지 않을까.
결국, 이런 식의 언급은 인터뷰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법정재판을 정당화하고 국민재판 역시 강화시키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위안부문제에 대한 언급들이 발언자의 의도와 다르게. 소비되는 현상에 대해 말하면서도 정작 내가 그런 현상의 가장 큰 피해자라는 건 잊게 만들고 있는 것도 치명적인 모순.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위안부문제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일일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런 공격까지 묵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강성현 선생께 묻는다.(페친이 아니라 태그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 공통페친께서 전달해 주시면 좋겠다.)
1)나의 책의 어디가 틀렸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기 바란다.
2)무책임한 고소로 인해 재판정에 서게 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너무나도 가볍게” 언급한 데 대한 사과와 시정을 요청한다.
틀린 부분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식의 언급은 이미 돌을 맞고 있는 사람에게 또다시 돌을 던지는 행위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渦中日記 2017/7/14

형사2심 두번째 재판이 있었다. 무더웠던 하루.

검사는 사흘전에 “공소사실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겉으로는 큰 차이 없어보이지만, 단어를 바꿔 어떻게든 괘씸죄를 물으려는 목적이 뚜렷한 내용. 그리고 며칠전에 보도된 위안부 동영상 관련 기사, 그리고 일본정부가 강제동원관련문서존재를 인정했다고 보도한 기사를 추가 증거로 제출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둘 다, 검사가 증명하고 싶어하는 나의 “범죄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자료다. 나는 위안부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고, 더구나 이 기사에서 언급한 서류는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네덜란드나 인도네시아 여성 관련 서류이고, 나는 조선의 위안부에 대해 말했던 것이니까.
1심에서도 검사가 국민의 세금을 써가며 해 온 일은 대부분 그런 일이었다.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나자신에 대한 누명과 억압이상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무의미함을 참아내는 일이다.
아무튼 오늘, 향후 일정이 정해졌다. 한두번만에 기각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배반당했고, 피고인 심문과 증거설명과정을 다시 반복하게 되었다.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법정에 서게 된다. 다음 재판은 9월6일 오후 4시. 이 가을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형사재판의 가을”이 되게 되었다.

渦中日記 2017/7/13

그리이스 신전기둥같은 멋진 건물형태를 빌어 억지 논리를 세워놓은 이 자료는, 검찰이 1심형사재판때부터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가며 강조해 왔던 논지자료다. 왜 억지왜곡논리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수십번 말해왔는데도, 내일은 다시 이논리와 싸워야 한다.
그런데, 구체적내용은 엉터리지만, 이 논지에 따르면 나는 위안부할머니를 비난한 게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이 기소와 재판이, 실은 “해결 방법을 둘러싼 생각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역력한 자료이기도 하다.
무죄판결문을 왜곡하면서까지 내 책을 “조악한 연구”라 했던 경향신문 기자의 칼럼 역시 검찰은 “범죄증거자료”로 제출했다.
2017년 7월14일 오후 4시.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서관 제403호 법정 (6번 법정출입구)에서 형사재판 검찰항소심 두번째 재판이 있다.

渦中日記 2017/7/13-2

어젯밤에 김도언 작가 담벼락에 들렀던 걸 계기로, 나를 아이히만에 비교하고 “제국의 변호인”이라는 소리를 서슴치 않았던(이 두개의 비유를 하나의 대상에 쓰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걸 그는 모르는 것 같다)손종업교수가 여전히 나를 비난중이라는 걸 알았다.
국가재판뿐 아니라 여론재판도 여전히 내겐 진행중이다.
비난이든 비판이든, 옳은 내용이면 언제든 경청하고 싶다. 그런데 다른 이의 말을 내가 한 소리로 간주하고 비난하거나, 내가 쓴 말은 손정업씨가 쓴 걸로 생각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댓글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실, 내가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일은 처음부터 이런 일들이었다.
내가 그 대상이 되어서가 아니라, 비평가라는 이름을 단 사람조차 저지르는 총체적 경박성이 서글프다. 우리시대 한국을 소모시키고 좀먹고 있는 한장면.
위안부문제에서도 이런 일이 있으니 그런 부분을 지양하자고, 나는 말했을 뿐이다.



渦中日記 2017/7/12

탁현민의 문제는 그의 생각패턴이 변하지 않았다는데에 있다. 자신이 “전쟁광 ” 이라고 판단한 사람이면(라이스 전 미국무총리) 강간해 죽이자는 발언마저 허용하는 식의 인권에 대한 무감각은,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그 옛날 탁현민이 만든 “오늘의” 탁현민이다.
송영무 장관후보의 문제 또한, 3000만원의 자문료자체보다(물론 이 부분은 양극화를 빚는 한국적 시스템 문제)그 정황을 “일반사람, 서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로 말하는 정당화에 있다. 서민들이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를 정당화하는, 내면화된 차별의식과 기존세계에서의 안주욕망을 드러내는 이가 어떻게 개혁을 할 수 있다는 걸까. “개혁”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한다.
이들의 감각은 진보/보수 할 것 없이 공통된 것이겠지만, 이들이 진보쪽 텃밭에서 성장/성공한 사람들이라는 건 “한국적 진보의 모순”을 여과없이 상징한다.
문재인대통령이 이들에 대한 비호를 멈추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페미니스트 이전에 서민대통령이자 인권대통령이고자 한다면. “멋진”대통령이, 연출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혐한을 생각하기

어제 지원단체장의 일갈에 언론들이 나서서 비난한데 대한 비판을 썼지만, 그 내용이 옳기만 하다면 당연히 문제될 것이 없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들의 발언에 곧잘 무/의식적 과장과 독단, 때로 왜곡이 섞이곤 한다는 점에 대해서였다.
2주일 전 학회에서는, 미국거주 일본인학자–최남선을 연구해 왔다는 여성학자가 “솔직히 말해 이제 더이상 한국을 연구하기 싫다”고 말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었다. 일본인의 혐한이 학계에까지 확산된다는 건,
차세대 한국연구자들이 줄어드는 걸 의미한다.
얼마전엔 전주한일본대사가 한국비판 책으로 비난받은 사건이 있었지만(물론 그 자체야 결코 칭찬할 일이 못 되지만), 사실은 비난만 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학자나 외교관—상호이해를 위해 노력해 온 이들조차 혐한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좀더 심각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모든 감정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최근엔 百田尚樹라는 작가가 낸 <이제 한국에 사과하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데, 작가 자신이 쓴 글을 보니, “우리가 당신들의 생각을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지배했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는 있지만, 정말은 ” (문명을 받아들일 능력조차 없는) 당신들을 바꾸려 해서 미안해”하는, 조롱으로 가득한 책으로 보였다.
물론 그런 그들을 비판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우리는 그런 정황자체를 모르고 있거나, 그저 그들한테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에 있다. 그리고 그런 한 현상황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데에 있다.
여전히 잘못된 기사들이 넘치는 (강제연행 증거! 라면서 나오는 보도들이 보여주는 자료는 대부분 일본이거나 중국이거나 혹은 인도네시아등 동남아에서의 일이다) 언론현실과,그런 언론에 기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국민현실을 이시점에서 한번쯤 생각하고 개선하지 않는 한, 사태는 분명 더 심각해진다.
아마도 정부는 당분간 청년들의 일본 기업취직이니 한미동맹이니 한일스와프 협정등 때문에 어느정도 눈치를 볼 것이다. 하지만 불신을 안은 채 그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도대체 뭐가 잘못 되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청년들과 차세대를 위해서라도.
이전에 쓴 글들을 정리하다가, 이하의 글을 만났다. 2년 전 글이지만 상황이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올려둔다.
———–
그러나 “친일”이라는 딱지는, 익숙하지 않은 생각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지적태만을 드러내는 사고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복잡하고 섬세한 문제들을 단순하고 거칠게 뭉뚱그려 결과적으로 폭력을 만드는 사고로 이어집니다. 무엇보다, 그런 딱지를 두려워해 침묵하거나 딱지를 붙이는 쪽으로 돌아서고 마는, 전체주의에 가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대세와 다른 말은 하지 못하는 자폐적 공간이 확장되고 있고, 자유로운 사고의 주인공이어야 할 젊은 학생들조차 자기검열에 급급한상황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입니다.
그런 지적태만은, 일본에 대한 근거없는 비난까지 허용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사회에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습니다. 특히 피해자관련 혹은 영토문제 관련단체들은 위안부문제에 관해 언급할 때마다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라고 비난해왔고 그 결과, 2015년 현재, 한국인의 70퍼센트 이상이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로 생각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나도록 사죄와 반성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타국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갖도록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인식이 불식되지 않는 한 한일간의 화해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 2015년 현재의 언론과 외교와 지원운동이 지극히 자폐적이 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일본에서는 이제, 위안부를 위한 <아시아여성기금> 의 모금에 참여하는 이들의 존재를 더 이상 상상하기힘들만큼 국민감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언론과 외교와 운동은, 그런 현황을 직시하기보다 일본의혐한파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사고와 주장만을 반복중입니다. 위안부문제를 생각하는 일은, 늦었지만 이러한 현상황을 파악하고 일본을 총체적으로 아는 일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

渦中日記 2017/7/10

지원단체의 말 한마디를 언론이 그대로 옮겨 쓰고, 국민이 동참해 누군가를 함부로 비난해도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나자신 비슷한 경험을 했고 여전히 그 자장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일이 더이상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물론 나는 강은희 전장관과 일면식도 없고,
한일합의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다)
비난 댓글로 동참한 사람 중에는 무려 교수도 있다.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
생각해 보면, 정대협은 이미 10년전에, 한국의 한 언론이 나를 “지일파”로 표현한 기사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친일파”로 번역해서 내 보내기도 했던 곳이다.
운동이든 연구든, 지키는 일 자체에 연연하면 자신이 타자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에 둔감해진다.

フェイスブックから、2017年5月11日

今回の大統領選挙で安哲秀候補を支持した私に対して、フェイスブックの友人の多くが失望あるいは憤慨したようです。私のことが革新的に見えていたのは、表面的なものに過ぎなかったと思われたようですね。
日本について意見を述べるというだけで、私のことを、日本との「妥協」支持者あるいは担当者だと考えたがっていた人々の「念願」あるいは「呪文」が表面化したと言え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私にはその現象が、安哲秀は洪準杓と連帯するはずだとしてきた、間違っているだけでなく、悪意に満ちた期待と、とても似ているように見えます。
実際、どこに焦点を置くかによって、革新の基準は異らざるを得ません。私は、私たちの社会の革新、保守という区分が、もはや意味のないものになっていると考えており(最も革新的な男性が最も家父長的でもありますから)、あえて言うなら、私の価値観はむしろ急進(という表現も実は適当ではありませんが)に近いということを長い間の付き合いのフェイスブックの友人たちはご存知でしょう。
それでも、私の志向が、資本と国家の問題をわかっていないことに由来する無邪気なものだという人もいました。疎通が十分でなかったせいでしょうが、そのような断定から、私はフェミニズム論争の頃から考えていた「概念の浅薄化」とでもいうべき状況がもたらした現場を再度発見しました(これについては、いつかまた書きます。今は詳しく書く気力がありません)。
私が葛藤の治癒に関心が高い理由は、憎悪と差別と敵対が、不和と戦争をもたらし、他者の生命を奪う根源にあるものだからです。そして多くの場合反知性主義的な態度が作る偏見と敵対が、いかなる暴力を生み出すのかは、私をめぐって起こったことが十分に説明しています。
私が今回の選挙で悩んだ末に、保守/進歩の既存の構図を打ち破るという安哲秀候補の試みを誰よりも進歩的な試みだと考えた理由も、そこにあります。それは政策ではなく、方向性への支持でした。
そして、失敗はしましたが、その試み自体は、韓国社会に未だ訪れていない、それゆえに「革新的」な価値であると考えます。その到達点は、恐らく統一であり、東アジアの平和でしょう。私の志向性を、単に分裂を「無化」させるものだとか、国家間の政経癒着的な和解とみなそうとする理解は、学問と政治の違いを無化させる大変単純な理解だと言えます。私はいわゆる「政治」に大きな期待はしていないけれど、それでも時に全ての学問を超える価値の実現が可能となるものとして、なおその役割に期待しています。それは、学問的には厳しい批判が可能でも、政治的にはその曖昧さを許すことに繋がります。
今回の選挙では、どんなに革新的な候補であっても、彼らの支持者たちが、口にするのもおぞましい悪態を私に浴びせかけたり、よく知りもせず嘲笑した人々でもあるというアイロニーが、私には存在しました。そのため、私には、代議民主主義を具体化させられる候補自体が存在しませんでした。そのようなアイロニーを抱きながらロウソクデモに参加し、投票に参加したのは、ただ、その多数の隙間のどこかにいたはずの「彼らの中の別の存在」と連帯したかったからです。フェイスブックが私に教えてくれた存在、つまり皆さんです。

選挙は終わりましたが、文在寅大統領を誕生させるための自らの運動を、書きたい小説を書くことに集中したかったからだと述べた作家の言葉を遅ればせながら見つけました。また、新たに始まる文在寅大統領時代を「詩だけを書いて研究にだけ専念できる太平聖代」の始まりだと見做す詩人もいました。
しかし、私にはそのような時間はまだ来ていません。長い苦痛の果てに無罪判決が下されたにもかかわらず、むしろより陰湿な石が私に飛んで来ます。何よりも、私をそのような苦難に陥れ、積極的に加担した人々が保守ではなく、「革新」層だということが、私のジレンマです。彼らと最も近い場所にいた候補が、文在寅候補でありましたが、社会構造に対する問題意識を彼から見出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に、私は彼を支持できませんでした。
私の本は、革新の中の欺瞞について問題提起しているだけです。しかし、待っていたのは公開討論ではなく、長い沈黙と、口封じでした。また、同じような欺瞞と暴力を今回の選挙でも、見せ付けられました。
私にとって、文在寅政権が新しい時代になる日は、<革新>層の中に存在する欺瞞と暴力を、革新層みずからが認識する日です。私への嫌悪や抑圧に対する「主流革新層」の沈黙が破れる日です。その日が来ない限り、私にとって文在寅時代も朴槿恵時代と変わりません。
参考までに申し上げれば、私を非難していた人々も、慰安婦問題をもっと知るようになれば、考えが変わると確信しています。もちろん、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がある人には期待していません。
3年近く、裁判の反論のために止むを得ず多くの資料を見ましたが、私の考えを修正する必要を感じませんでした。さらに大きなアイロニーは、私の苦難が、実は本の問題でさえ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排斥は、知識人の偏見と排斥主義が、告訴は、ロースクールの学生と弁護士の蛮勇さと運動家の策略が作り出したものでした。
このことについてもっと詳しく書かなくてはなりませんが、まだできずにいます。判決後、3ヶ月以上経ちましたが、緊張が解けたのか、気力と体力が回復していないためです。彼らの中からもこの問題を提起する人が出てく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少しフェイスブックをお休みします。その間、フェイスブックの友達を削除したい方はどうぞなさってください。無罪判決の出た日、「いいね」を押してくださった方が2千数百名いました。その方たちだけが残ってくださったとしても、とても多いのです。
選挙結果について、「パルゲンイ(赤)国家」云々する方については、私から削除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
フェイスブックの友人の整理をする余裕がないため、これまで承認を待ってくださった多くの方には、心から申し訳ないと思っています。もう少しで友達承認できるようになると思います。

17年前に最初の日韓関係論を出した時から、私は綱渡りをする心境で書いて来ました。
17年が過ぎた現在、私が立っている空間は、ようやく足がつける程度の面積です。あえてこのような空間に立っているのは、稚気や周りに逆らおうとする情熱があり余っているからではありません。その面積がいつかはもっと広くなるという確信を持っているからであり、その空間が必要な人々がいると思うためです。
狭くて危なっかしく見えるその空間に、共に立ってくださったり、支持してくださる方だけが残ってくだされば嬉しいです。可能なら、私が会いたいと思っていた方々とまた会えると嬉しいです。
(1月に行った「無罪判決を記念する毎月の会合」も継続できず、個人的に会いたい方にも連絡できませんでした。心身の状態があまり良くなかったためです。しかしまたすぐに連絡できるでしょう)
近頃私を非難したツイートを添付しておきます。このすさんだ「言葉」に、改めてやるせない気持ちになります。「和解は加害者が先(許しを請うことから)」だと説教した方が多くいましたが、この言葉もやはり、私の本を理解できていないだけでなく、先に述べた「概念の浅薄化」が生み出した言葉です。

2017・5・11

翻訳: 金良淑

무엇을 지킬 것인가

무엇을 지킬 것인가 <허핑턴 포스트> 바로가기

무엇을 지킬 것인가

외교부가 부산 소녀상문제 풀기에 나선 것 같다. 하지만 소녀상 이전요구는 문제의 답이 아니다.
분명, 일시귀국이라고는 하지만 일본대사가 본국귀국후 이렇게 오래 복귀하지 않은 적은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외교부가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지자체가, 시민의 의사를 넘어서 행동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강제이전`은 현재이상으로 사태를 악화시킨다.

사실 나는, 부산소녀상 설치문제를 두고 일본정부가 대사를 복귀시킨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분노를 표명하면 소녀상이 철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일본의 한국이해는 아직 충분치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우선 한국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정치가, 언론, 국민들 대부분이 `한일합의는 잘못된 것이고 소녀상은 그것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니 옳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한일합의의 정당성이나 빈조약을 들어 철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토록 갈등이 깊은데도, 문제의 소녀상이 어떤 의미인지, 한일합의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성한다. 그런 식의 사고정지사태가, 한쪽은 `지키는` 일에 온힘을 다하도록, 다른 한쪽은 이제 물리력을 행사할 지 여부를 재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물론 첫번째로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위안부문제의 경우 오랜 세월에 걸쳐 언론이 적극적으로 보도한 결과, 이미 `온국민의 상식`이 된 구체적인 이해가 존재한다. 작년에 개봉한 `귀향`은, 그런 현대한국의 `집단기억`을 담은 영화다.

그런데, 그런 이해는 과연 옳은 것일까. 나는 작년에 개봉 직후에 이 영화를 봤는데 심경이 복잡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영화에 표현된 `정서`는 옳고, `사실`은 옳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정서에 공감하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한 예로, 불에 태워지는 장면은 한 할머니의 그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데, 이 할머니의 첫 구술에 의하면, 여성들을 불에 태운 건 학살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들어 죽은 여성들을 화장하기 위해서다. 또다른 분의 수기에는, 스스로 다른 위안부여성을 화장해야 했던 이야기도 나온다.
비판을 하려면, 그런 끔찍힌 경험을 하도록 만든 전쟁과 군인/위안부간의 위계질서, 그리고 그런 위계질서를 만들었던 일본의 식민지지배 책임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한다. 비판은, 정확해야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결국 위안부문제는, 조선인위안부란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이 문제발생 이후 4반세기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본이 무엇을 했거나 못했는지를 정확히 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더구나 초기와 달리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국민적인 이해와 합의가 필요해졌다.

따라서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한일정부는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협의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논의를 위해 일본정부는 주한일본대사를 즉각 복귀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협의체는, 위안부문제에 관해 오래 관여해 온, 그러나 대립중인 한일학자들을 주구성원으로 하되, 지원단체와 위안부당사자와 언론이 방청하거나 중계하도록 하고, 의문을 던지고 답하는 일이 가능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 사실 논점은 많지 않다. 그리고 양국민들의 공통의 이해를 이끌어야 한다.
위안부문제는 양국국민이 너무나 잘 아는 문제가 되어 더이상 정부간 합의만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었다. 박근혜정부가 간과한 것은 그 지점이다.
갈등이 2000년대 이후 본격화 된 것은, 민주화와 인터넷 보급의 결과로 시민들이 힘을 갖게 된 21세기적 세계를 반영한다.

소녀상 비판 중에 `당사자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내가 만났던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은 `왜 해결이 안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계셨다.
그런데, 지원단체는 외교부와 무려 십수회의 의견조정을 거쳤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사자를 도외시`한 건 누구일까.

이 모든 물음이 다시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돈을 받았으니 끝났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물음이 없고, `돈따위로 해결하려 하지 말라`는 생각에는 어렵게 합의를 이루어낸 `외교`에 대한 존중이 없다. 무엇보다, `책임이란 무엇으로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없다.
소녀상을 지키려는 이들은 소녀상이 `아픔`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분명 소녀상 자체는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 아닌 영사관이나 대사관 앞에 서 있는 소녀상은 분명 `저항과 항의`를 표상한다. 실제로 소녀상 뒷면에는 `숭고한 정신`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소녀상은 정말은 `그` 위안부 소녀가 아니라, 90년대 이후의 `운동`과, 운동에 담겼던 `끈기있는 항의정신`의 표상이다. 이런 식으로, 4반세기 이어지면서, 위안부문제에는 적지 않은 의식 혹은 무의식의 트릭이 존재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 항의가 옳다면, 얼마나 옳은지,왜 옳은지에 대한 국민적인 물음과 확인이 다시 필요하다.

소녀든 항의정신이든 `지키는`일은 숭고하다. 하지만 사고정지상태로 `지키`거나 반대하는 일은, 결국 누구의 자존심도 지키지 못한다.
더 늦기 전에, 사려깊은 행동이 필요하다. 불화는, 상대뿐 아니라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