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7/10/5

渦中日記 20171005
“박유하교수님이 그동안 운영하셨던 학회의 운영자금은 어디에서 지원받으셨나요?
이것은 공개대상 질문입니다.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호사카드림”
(10/5 pm 2:25)
더이상 소모당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오늘 다시 이런 메일까지 받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쓴다. 2017년 가을 한국 사회의, 너무나도 얄팍하고 천박한 풍경.
다른 날도 아닌 어제–추석날에 페북에서 호사카유지 교수와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내가 답했던 댓글들이 삭제되었기에, 그것도 여기에 올려둔다.
심지어 밤 10시 반 넘은 시각에 다시 문자. 그때부터 나눈 대화는 차마 여기에 적지 않겠다. 오랜만에 순수한 분노가 치미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문자 차단. 
이후 호사카 교수는 내가 재판 때문에 토론에 응하지 못한다고 했다면서(물론 이것도 왜곡이다) 미루기로 했다고 포스팅에서 썼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 다시 메일이 온 것.
이메일을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얼마전부터 호사카교수가 “한국내에 일본 돈 받아 연구하는 신친일파가 있다, 조만간 명단도 밝히겠다”는 글을 뿌리기 시작했었는데 그가 사냥하려는 첫 번째 대상은 바로 나였다는 것을. 그는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하는 P교수”라는 식의 얘기도 해 왔었고, 내가 그를 페친으로 받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쪽에 있었는데.
물론 나는 당장이라도 답할 수 있다. 그가 말한 “학회”란 아마도 여기서도 가끔 모임을 공지했던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얘기인 듯 하고, 그가 의심하는 일본돈 따위는 한푼도 들어있지 않으니까. 더구나 투명하게 운영했기 때문에 모임 멤버들이 내용을 다 알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거부한다. 알고 싶으면 직접 조사하시기 바란다. 의심할만한 중요 기밀이라면 호사카교수께서 직접 발품을 팔아도 판 만큼의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오만하고 해괴한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모두가 국가화하고 있다. 최근에도 이상호사태가(김광석이나 서해순이 아니라 이상호 사태로 불러야 맞다) 보여준 것처럼, 이른바 “민주화”된 우리사회는, 이제 모두가 스스로 국가의 얼굴을 하고, 누군가를 기소하고 처단하고 싶어한다. 연휴든 뭐든、누군가의 평온한 일상이 깨지든 말든, 그들은 자신이 만든 “신념”을 완수하려 한다. 아주 부드러운 얼굴로.
사실 나는 이런 “말”들이 슬프다. 물론 나의 말을 포함해서.
————-
호사카 교수가 지운 나의 댓글과 문자내용 일부 올려 둔다 . 그리고 호사카 교수의 글에 대한 그의 페친과 정대협 이나영 교수의 반응캡처.
“차단이 아니라 페삭했습니다. 저를 직간접으로 많이 비난하시면서 페친이 되자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제가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했다는 왜곡주장에 깊이 실망했습니다. 이어지고 싶지 않습니다.”(7:05 pm 10/4)
“그런 말을 한 기억도 없지만 했다 해도 ‘설사 위안부가 매춘부 였다고 해도’ 겠지요. 한국어 잘 아시니 그 차이는 아실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저의 책도 아직 안 읽고 발언만 가지고 비난하셨다는 건가요. 제 책을 이제부터라도 읽어 주신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비판을 위해서 읽겠다는 거네요. 과거의 비슷한 사례를 보면, 그런 책 중에 귀기울일 만한 지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비판 할 수밖에 없는 얘기를 하셔서 비판했지만 저는 선생님하고까지 논의할 시간이 없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저를 공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우선순위를 둔다면 위안부 문제를 잘 아는 사람이어야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할 테니까요. 무엇보다, 제가 재판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페북이 아니라 공식적인 장이 있다면 생각해 보겠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저를 비판한 사람들의 비열함이 실망스러워서 얼굴 맞대고 싶지 않은 감정도 강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왜 연구하기 시작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결론이 앞서는 연구중에 훌륭한 연구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우연선생과 저는 같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페북 봤는데 ‘대학에서 쉽게 그만두거나 하게 할 수가 없었다’라니, 상상도 못했던, 오만하고 난폭한 말이네요.
선생님이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아무튼 이만 하겠습니다.
나의 책을 정확하게 읽고 사과하실게 아니라면, 연락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9:32 pm 10/4)
“선생님이 왜 이렇게 되셨는지 슬프군요. 비판은 자유지만 다들 비난하니 나도 비난해야겠다는 건가요. 일본사람들은 그런 거 몰라서 제 책을 높이 평가 했다는 건가요.
유학시절에 돈 아껴서 샀던 우리 아이 그림 책들, 그많은 그림책들을 선생님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드렸다는 것도 부끄러워지네요. 일본인 선생님들을 학교에서 자르려고 할 때 제가 선생님을 위해 뛰어다녔던 일을 기억하신다면, 제가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재판중일 때 이러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10:34 pm 10/4)
“다시 한번 깊이 실망합니다. 두번 다시 연락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판이 문제가 아니라, 대학에서 그만두게 하지 못한다는 발언만으로 얼굴 마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동)

渦中日記 2017/10/4 (2)

추석날 아침인데 우울한 포스팅을 한데 대한 반성을 담아 다시.
“화해하면 희망이 남는다.”
화해나 용서에 대해, 가해자가 멋대로 하는 게 아니라는 둥 그럴듯해 보이는 얘기들이 언젠가부터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할 수 있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힘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비판의 대상일 수 있는 화해나 용서가 피상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좀 더 깊이 있는 화해와 용서를 지향해야겠지요. 그리고 그 두가지는 다른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고요.
물론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또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은 관계도 있고요.
하지만, 의미있는 화해는 내일 혹은 차세대에 대한 희망을 줍니다. 당장 마음이 편해지니(마음의 평화) 상대를 위한 것이기라기보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 성서관련 책을 읽다가(저는 신자가 아닙니다), 그런 시도를 방해하는 마음을 사탄이라고 표현한 글을 봤습니다. 크게 마음에 와 닿더군요.
혈연이든 비혈연이든, 따뜻한 관계인 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추석날 되기를 빕니다. 맺혔던 응어리가 있었다면 풀고, 새로운 응어리는 만들지 않는 따뜻한 시간 되기를.

渦中日記 2017/10/4

카탈루냐라는 곳은, 내게는 카잘스의 “새의 노래”로 다가온 곳. 그라나도스니 알베니스의 멜랑꼬리한 멜로디들을 좋아했던 것도 아마도 이 곡에 대한 사랑의 영향일 것이다.
카탈루냐 역사를 보면 지금의 독립갈망이 충분히 이해된다.
새소리를 평화의 노래로 듣는 귀를 가졌으면서도 수십수백년이 지나도
록 평화를 만들지 못했으니 역시 인간은 어리석다.
카탈루냐 사람들이 더이상 억압받지 않기를. 더불어 라스베이거스 희생자들과 그들을 사랑했던 이들에게도 이 곡을 보내고 싶다. 바다 건너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일도 우리와 상관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젯밤 박은하기자가 올린 글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내겐 그런 의미에서도 “쉬어가는” 명절이 없다.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미묘한 시기에, 직접상관도 없는 테마를 책의 논지를 왜곡해가면서까지 나와 엮어서 일본과 일본의 진보지식인과 나를 비난하는, 심지어 대중매체에 확산시키려는 이들의 심리가 서글프고 역겹다.
하지만 학자들의 그럴 듯 보이는 “진단” 에 대한 젊은 기자의 열광에 무슨 죄가 있으랴. 아니 어쩌면 주최측에조차 죄는 없다. 일부지식인/운동가의 지적퇴행이 우리모두의 실질적 위기를 부르지 않기를 바랄 뿐.
집단적 공격들의 왜곡과 논리적문제를 일일이 지적하다가 그걸로 인생이 끝나고 말 것 같다는 생각에 우울한 아침이다. 그래서 최근에 시사인에 나왔던 서경식교수의 나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도 별 언급하지 않았건만. 심지어 이나영교수의 노골적 (근거없는)비방에 대해서도.

새의 노래 유튜브 링크

渦中日記 2017/10/3 (2)

동물을 중심으로 사고하면, 말 못하는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는 참을성이 생기고,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인종)에게서도 오히려 공통점이 보여 그와의 소통이 즐거울 것이며, 가진 것 없이도 행복한 삶의 비결을 배울 수 있다.

渦中日記 2017/10/3

페북에서 마음에 드는 기능중 하나는 과거의 오늘을 보여 주는 기능이다. 싫든좋든 과거의 나와 직면하게 되는 순간.
사실 매일 챙겨보지도 않지만, 어쩌다가 보게 되면 그 때 대화나눈 이들은 물론, 2년 혹은 3년 젊었던 나에게도 애틋한 감정이 생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이기도 하지만, 같지 않기 때문에 드는 감정일 것이다.
아무튼, 입을 찢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가운데, 용케 입다물지 않고 버텼구나 싶다. 아직 기소되기 전인데도 이렇게 험악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오늘은 “우아한 독서일”로 정하고, 응구기와 시옹오&살만 루시디를 읽기로 한다.
(오래 앉아 있어도 피곤해지지 않는 의자, 아시면 알려주세요. 가죽으로 된 “중역의자” 같은 거 말고요.)

渦中日記 2017/9/28

어제 공판은 한시간도 안 걸리고 끝났다. 검사는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검사가 나타나 원심 파기 주장. 원심과 같은 “징역3년” 구형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언제나처럼, 오류없는 기사는 거의 없었지만, 그 중 정확한 기사를 올려 둔다.
그런데, 뉴시스는, 어제 법원에 와서 사진을 찍은 유일한 매체다. 어떻게 아는가 하면, 마치 잠복하듯, 예기치 않았던 않았던 곳에서 나를 여러장 찍더니 바로 등돌려 가 버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온 기사 중 어제의 내 사진을 올린 곳은 뉴시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같이 간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중이었으니, 어떤 사진들이 올려졌을지는 여러분들 상상에 맡긴다.
하지만 그 직후, 검색대 앞에 앉아 변호사를 기다리면서 나는 여전히 긴장되는 걸 느꼈고, 진술서를 읽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울컥하기도 했다.
그렇다. 씩씩한 척도 하고 실제로 편안한 시간도 없지 않지만, 그게 아직, 고발 당해 3년이상 지난 나의 현재이자 진실이다.
이런 말을 굳이 쓰는 건, 동정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는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도 다시 확인시키고, 그와는 반대로 가는 한국 일부 언론의 행태를 기록해 두기 위해서다. 물론 회사에서 시킨 것이겠지만, 누군가의 무방비한 순간을 찍기 위해서 기다리는 이의 카메라란 얼마나 서글픈가.
가장 정확해 보이는 이 기사에, 같은 언론사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도 이전 사진이 사용되는 이유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기사도 쓰지 않은 얘기가 있다. 내가 어제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서 강조한 얘기, 즉 첫 고발장에서 삭제요구된 109곳 중 상당수가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라 정대협 관련 부분이었다는 점, 그리고 “지금까지 정대협이 이룩한 성과는 무시하면서, 정대협 활동 전체를 폄훼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삭제요구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고발은 할머니가 아니라 지원단체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려 했던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야기를 쓴 기사가 전혀 없다는 건, 정대협의 권력의 힘을 보여 주는 것일까. 나는 이 기사를 조선일보 일본어판에서 보고 알았는데, 한국어판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판결일은 꼭 한 달 후, 10월27일(금)로 잡혔다.
축배가 될 지 쓴 한잔이 될 지 모르겠지만, 오랫만에 불금의 밤이 될 것 같다.
뉴시스 기사 바로가기

渦中日記 2017/9/26

손석희씨가 가수 김광석의 부인을 30분씩이나 할애해 인터뷰한 건 평일 골든타임 보도 프로그램을 일요주간지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 아니었나 한다. 현재사건도 아니고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공인의 문제도 아닌 사건을 그런 시간에 그렇게 길게 다룰 필요가 있었을까.
서해순씨보다, 남편과 자식을 살해한 살인범일 수도 있다고 (남몰래) 생각하면서 그녀를 공중 앞에 노출시키는 언론의 심리가 나는 오히려 궁금하다. 무서운 것을 대면하고 싶은 심리인가. 아니면 (그 심성과 죄악을) 낱낱이 밝혀 사랑했던 가수의 억울함을 팬으로서 풀어 주고 싶은 심리인가. 아니면 말고, 식의 접근임이 명백한 이번 시도가, 등사판으로 만들어 공유했던 학급신문 레벨의 문제의식 같아서 오히려 바라보기가 부끄럽다.
세계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심층보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차라리, 지난 일요일에 광화문 한복판에서 대립했다는 개고기 식용화요구자들과 식용반대자들을 심층취재해 주는 것이, 우리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선 훨씬 시급하다.

<위안부의 아이돌화>발언에 대해

얼마전에, 초청받았던 한 세미나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했던 이야기중 일부를 한 언론이 가져다가 나의 취지와는 다르게 보도한 탓에 또다시 세간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미 여러번 반복된 일이기도 하고, 수정요청을 한다 해도 바뀐 적도 별로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사태에 대해 따로 해명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그날 사용했던 발언요지자료를 올리기는 했지만, 아직 문장으로 만들지 않은 채로 방치중이다.
늦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 쓰기로 한 건, 최근에
미국(Why Is the Plight of ‘Comfort Women’ Still So Controversial?),
영국(Vietnamese women raped in wartime seek justice for a lifetime of pain and prejudice),그리고
독일(Debatte Trostfrauen in SüdkoreaZum Nutzen der Nation)의 매체가, 한국의 위안부 운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우려가 섞인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 기사를 한국에 전달해 공론화한 매체도 아직은 없어 보이는 것도,내가 굳이 언급하는 이유중 하나다.

8월10일에 서울에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위안부문제와 한일관계 전망>이라는 세미나에서 내가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표현으로 지적하려 했던 것은, 우리사회에서 위안부가 너무나 `가볍게` 소비되는 현상이었다. 많은 이들이, 악의적으로 보도한 기자의 의도대로, 내 발언을 위안부에 대한 마음을 비판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비난했지만, 내가 비판한 건 위안부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위안부가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표현되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수용과 표현이 나올 법 한 소녀상의 원제작자(조각가 뿐 아니라 운동단체 포함)들의 조선인 위안부 이해와 표현방식이었다.
나는 그 날 세미나에서, 소녀상 자체에 관해서는 오히려 `철거는 역효과`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소녀상`관련 의견을 전하고 싶었다면 가장 우선시되었어야 할 그 부분은 빼놓고 기자는 `아이돌화`만을 헤드라인으로 뽑아 보도한 것이었다. 심지어,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 이라는 소제목 아래 몇가지 `갈등`양상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가져와 기자는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이 위안부의 아이돌화`를 가져왔다고 내가 말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그건 기자의 해석일 뿐, 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런 식의 단선적이고 탈맥락적인 보도에 접한 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런 기사가 보여주는 성급함과 강퍅함에서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위기를 본다.

나는 `소녀상의 피상적인 소비양상에 대한 비판 필요`라고 자료집에 썼다. (기자는 그 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자료집만으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 `피상적인 소비양상`이란, 바로 여고생들이 그렸다는 순정만화풍 스티커등에 대해 한 말이었다. 그 스티커를 페이스북에 올려 두었더니 `위안부의 모에`현상이라고 지적한 이도 있었는데, 타당한 분석으로 보인다. 밝고 활기차고 앙증맞기까지 한 그 그림 속 캐릭터는, 소녀상을 만든 이들이 환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 노란 나비와 함께 놀고 있는, 글자그대로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소녀`였다. 말하자면 그 그림은, 위안부로 동원되기 이전의 천진하고 행복한 시절을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심지어 대사관 앞 소녀처럼 분노나 저항의 눈빛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두말 할 것 없이, 그 그림은, 위안부의 불행했던 과거—현실이 아니라 있을 수 있었던(존재하지 않았던) 행복했던 시절, 즉 위안부 이전의 시간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물론 그림을 그린 여고생들은 위안부 할머니에게
사라지고 만 행복한 소녀시절을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담았겠지만(실제로 많은 이들이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일본을 향해 외쳤다), 그림 속의 시간이 위안부체험 자체와 괴리된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한, 그 그림은 참혹한 위안부생활은 망각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소녀의 의식은, 타자의 위안부 체험을 마주하기보다, 가급적 마주하지 않는 쪽에 서 있다. 본인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리고 아마도, 한 학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지적했듯 자신을 투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실의 위안부란, 이미 모두가 아는 것처럼 끔찍한 신체적 고통을 수반한 체험이었다. 또 그 후유증으로 인해, 돌아와서도 대부분은 `병`과 함께 해야 했으니 위안부란 대부분 훼손된 신체의 주인공들이다. 더구나, 현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대상—노쇠한 신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그림을 그렸다는 여고생에게 그런 할머니를 방문해 목욕 서비스라도 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초등학생을 죽이고 타교학생이나 동급생에 대한 구타/폭행도 마다 하지 않는, `타자의 몸`의 존귀함과 고통에 무감해진 오늘의 한국의 10대들중에, 위안부할머니의 현실의 ` 늙은 `몸–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상처로 가득한 몸` 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보여줄 소녀들은, 없지 않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봉사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든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든, 그들은 할머니를 위한 시위에 참석하고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행위는 일정부분, 위안부할머니의 그 옛날 진짜 체험과 오늘의 현실을 마주하지 않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말하자면 위안부 `동상`이나 `그림`에 대한 `기림`이 현재의 소비방식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그와 마주하는 시간은 오히려 과거의 위안부와 등신대로 마주하는 일에서 “효과적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일 수 있다.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말로 내가 우려했던 건 위안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앞에 서면 설수록 다른 한편으로 진짜 위안부와 멀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나는 나는 우려했다. 달리 말하면 너무나 가볍게 소비하면서, 아무도 그 안의 진실을 제대로 보려고는 하지 않는.
여고생들이 그린 천진난만한 그림에야 죄가 없지만, 위안부들이 겪은 고통을 <여성의 보편체험>으로서 이해하고 `노인`의 고독과 진정으로 마주하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한단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표현들이 공유되고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나는 우려를 표했을 뿐이다. 그저 일본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상으로만 기능하는 한, 소녀상 역시 언젠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동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나는 우려했다. 이승복소년상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말한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얼마전에 군함도 영화에 대해 썼던 글에서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고 썼던 맥락과 다르지 않다. (<군함도〉엔 '피해자'가 없다)

여고생이 그린 그저 `귀여운` 소녀, 한번도 능욕당한 적이 없는 천진한 소녀캐릭터는, 굳이 말하자면 한번도 식민지화되지 않은 우리자신이다. 하지만, 조선이 그랬듯, 위안부로 가야 했던 소녀/처녀들은 대부분 가기 전에도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없지 않지만, 그들은 대부분,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의 집에 양녀로 가야 했거나, 남편이나 오빠, 혹은 아버지의 박대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마음과 존중을 비판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과거를 회피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직면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그 때문에 이제 오히려 외부사람들에 의해 마주하기를 요구받게 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우리 먼저 나서서 생각해 보자고 나는 말하려 했다.

가볍게 소비되든 진심으로 모셔지든, 과다표현은 대부분, 대상자체보다는 자기자신을 위한 것이기 마련이다. 버스 안 플라스틱 소녀상을 향해 “아이고 여기 계시구나“라고 말했다는 서울시장의 한마디가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의 한국인, 특히 남성들은, 그 옛날 소녀에 대한 오늘의 자신의 배려를 확인하는 일로, 오늘에 대한 자기만족은 물론, 과거로 돌아가 `지켜주지 못했던(않았던) 나`까지 무의식 속에 면죄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극복하는 방법은, 실제와는 다른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마주하는 일에 있다. 실재한 과거에 대한 직시와 분석만이,과거와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고향에 돌아와 깨끗하고 아름다운, 독립한 내 나라의 수도를 구경했어야 할 소녀들이 없지는 않다. 전쟁당시, 칠십 몇년전에 위안소와 전쟁터에서 병사, 자살, 폭사, 혹은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자살의 희생양이 된 이들이 그들이다.
따라서, 하얀 저고리/까만 치마모습의 플라스틱 소녀상이 누군가를 상징한다면 그런 이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었어야 한다 . 제작자들은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소녀상은 돌아온 `귀신`이었고. 버스 소녀상을 처음 본 이들이 으스스하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 올바른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산 자로 소환되었기에(대사관 앞 소녀상 뒷면에는, 동상이 (운동에 참여한 노인과 운동단체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조형물이라고 쓰여 있다),그녀들은 모처럼 소환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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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사회

2년전에 이렇게 쓸 때는 보수에겐 윤리성이, 진보에겐 합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데, 그동안 우리사회 “윤리”는 그저 더 도구화 되고 만 것 같다.
모두가 “정의”를 장착하고 안심하는 사회. “개념녀”라는 단어로만 개념(본질)이 소비되는 사회. 민족주의가 강하지만 기회만 되면 모두가 떠나고 싶어하는 사회.
본질과 진실에 가 닿지 못하면서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 그렇게 만드는 얄팍한 피상성이, 우리사회를 좀먹고 있다는 생각.

Park Yuha
September 25, 2015 ·
보수인지 진보인지 구별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윤리적인지 합리적인지가 중요할 뿐.

渦中日記 2017/9/21 (2)

코미디언 출신들이 소설이나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분명 일본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전문학에서도 일본엔 “노(能)라는 심각한 무대문학이 있는가 하면 교겐(狂言)이라는 코미디 무대문학이 늘 나란히 존재했고, 와카(和歌)라는 “정통시”가 있으면 俳諧(하이쿠로 변천)라는 유희성을 담뿍 넣은 문학이 생기곤 했다. 말하자면 일본인들은 무겁고 진지한 대상을 마주하게 되면 꼭 그걸 한번쯤 비틀어 보는 걸 좋아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실 웃음이나 유모어야 말로 고도의 지적작업 이다. 세상은 물론 자기자신마저 상대화하는 시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면서도 새로운 영역에 기타노가 도전하는 건 그저 인생이 지루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감각이야 말로 실은 독창적인 창의성으로 이어지는 거 아닐까 한다.욕망에서 자유로운 자에게만 가능한.
여기서 언급된 다자이오사무의 “심사위원 청탁”이란, 자신을 높이 평가해 주었던 사토 하루오라는 시인 겸 작가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작품에 꼭 아쿠타가와상을 주십사고 간절한 편지를 보냈던 사건이다. 다자이 26세때 일이었다. 그 얘길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죽은 다자이로선 얼굴 뜨뜻해지는일이겠지만, 기타노의 유머감각이 시킨 일일 것이다.
다자이가 상 하나 못 받았어도 “문학의 원점”처럼 여겨지는 작가가 된 것도, 인간실격에서처럼 주인공을 어릿광대 수준으로까지 격하시키는 유모어와 세상에 대한 비애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욕망과도 자기연민과도 관계가 없는. 역사/사회소설이라는 거대담론에 관심이 많았던 한국작가와의 차이도 거기에 있는 듯.
우리에겐 어깨에서 힘뺀 유머감각이 더 필요해 보인다. 진지함이 관념성을 만들고 관념성이 텅빈 “정의”를
만들고, 정의관철에 대한 욕망이 때로 폭력까지 행사하니까.

기타노 다케시, 순애보 소설 발표 “나오키상 노린다”

渦中日記 2017/9/21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영국에서 라이따이한 문제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는 민간단체가 생겼고 이렇게 캠페인을 하고 있다. 이미 동상까지 만들었고,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 앞에 세울지도 모른다고.
영국기사를 산케이 신문이 어제 가져다 쓴 것 같은데, 한국 기사는 없어 보인다. 최소한 주일특파원은 몰랐을 리가 없는데. 언론의 이런 행태도, 한국을 선진화된 우물안 개구리로 만들었다.
라이따이한도 이미 다 성인에서 중년에 접어 들었을 것이다. 대사관 앞에 세우는 건 원칙적으로는 비인 조약 위반이니 정말로 세워질 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정대협은 이런 날을 예상했을까. 나는, 이럴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되기 전에 일본이 한 일 못한 일 잘 따져서 관계회복이 되길 바랐다.
물론 대충 덮자는 얘기가 아니었다. 타자의 잘못을 추궁하는 “방식”의 문제를 지적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들이대는 방식이 아니어도, 상대를 설득하는 건 가능하다. 라이따이한을 위한 운동이, 바깥에는 편을 늘리면서, 정작 대화해야 할 상대의 말과 행동은 무시하고 묵살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기를 바란다.
정대협이 시작했다는 사죄운동이 지극히 “가볍게” 여겨지는 이유는, 일본의 국민들 마음을 그토록 간단히 무시했으면서(아시아 여성 기금 부정), “한국국민으로서” 사죄한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일본과 한국을 동일시하는 것도 한국이 한 일의 “물타기”(비판자들이 좋아하는 용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에 “법적배상”도 요구하겠다는데, 한국은 일본과 달리 식민지범죄가 아니라 명백한 “전쟁범죄”이니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동시에, 라이따이한이라는 “흔적”을 대량으로 남긴 이상, 오히려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생각해야 한다. 법적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당사자의 마음의 치료이고 국민들 전체의 심리적 우애다.
어제 오랜만에 읽은 원고측 변호사의 논지는 한마디로 “(박유하는 법적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 박유하의 책은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으며, 오랫동안 해 온 운동에 방해가 된다”였다. 독재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아무나 잡아들여 탄압했던 유신시대 박정희의 생각과 도대체 뭐가 다른가.
(병원 다녀 왔더니 많이 좋아졌다. 역시 병원을 가까이 해야.^^ 걱정해 주신 분들,감사합니다.)

Justice for Lai Dai Han 바로가기

산케이 신문 기사. 라이따이한 상이 보인다. 물론 산케이는 한국비판이 목적이겠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정보인 건 분명하다.
산케이 신문 바로가기

渦中日記 2017/9/20

지난주말부터 몸이 안 좋았는데, 결국 병원에 왔다. 닷새동안이나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는데도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링겔이 들어가는 손과 머리와 몸에 둔중한 통증을 느끼면서 다음주 재판에 대비하기 위해 검사와 원고측 변호인들이 제출한 서류를 읽고 있는 중. 신체적인 건지 정신적인 건지 모르겠지만, 읽다 보니 구토 증세까지 나려 한다.
자신들이 잘 모르는 사태에 아마도 “정의감”만으로 달려 들었을 용감한 변호사들이, 이번엔 법무법인 9곳, 10명의 변호사다. 나는 한 곳.
그런데다 이들이 열심히 대변하는 “피해자” 중엔 이미 2년전에 돌아가신 분까지 이름이 올라 있다. 지난 7월에 돌아가신 분도. 또,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자제분의 이름이 올라 있는 분도 있다.
나머지 분 들 중에도 내가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건 세 분 뿐이다. 그리고 형사기소때 새로 참여한 이용수 할머니.
말하자면 누가 부추겼든 본인의 의사든, 현재 자신이 박유하라는 사람을 고소했다고 알고 계시는 건,많아야 네 분. 달리 말하자면, 위안부로 등록된 이백 몇십 분들 중에 형식이든 실질이든 나와 대적하는 모양새가 되고 있는 건 오로지 몇사람 뿐이다. 나눔의집 혹은 정대협과 함께 하는 분들.
지원단체, 그리고 검사와 원고측 변호사는, 그렇게 일부 분들을 놓고, 그 분들의 의사가 마치 전체 위안부인 것처럼 말한다.
물론, 자신들이 주장하는 논지에 반대하는 분들도 많았고 지금도 있다는 건 말하지 않는다.그리고 “정교한” 자신들의 논리를 위안부 당사자의 것인 것처럼 말한다.
내가 견디기 힘든 건 이런 위선이다. 차리리 지원단체가 직접 고소했다면 그런 위선과 마주할 일은 없었을테니.
자신들이 “위안부할머니의 생각”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지원단체와 일부 학자들의 생각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이들의 말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일이, 다른 생각을 가졌던 위안부 분들, 침묵(당)했던 그 분들의 생각을 무시하고 묵살하는 일이라는 것을, 언론과 나를 비난하는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 분들을 대변하고자 했을 뿐이다.

학자의 기만과 태만

얼마전에는 김문길교수가, 일본정부가 이미 이십여년전에 발간한 자료를 마치 자신이 처음 발견한 것처럼 발표하기에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호사키 교수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다. 호사카교수는 자신이 자료를 발견했다고는 말하지 않은 듯 하지만, 호사카 교수가 말한 내용은 이미 오래전에 일본 학자들이 한 이야기다. 20년 전에 일본 정부가 발간한 자료집을 일본 학자들이 연구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 거라고 호사카 교수는 생각했을까. 나조차도 이 자료집은 4년전에 <제국의 위안부>에서 사용했다.
(이 기사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709192205025&code=940100) 는 그나마 이 자료집이 일본에서 나온 거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호사가 교수가 발견한 것처럼 쓰고 있는 언론도 많다.)
위안부문제 연구는 수십년 축적이 있어서 독창적인 의견을 말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호사카교수가 위안부문제 연구에까지 뛰어든 거야 이해되지만, 그럴려면 기존 연구를 다는 읽지 못한다 해도, 중심적 연구 정도는 읽고 발언했어야 했다. 그건 석사과정생도 아는 얘기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내가 재직하는 학교에서 이런 내용을 대대적으로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발표했다니 부끄럽고 참담하다. 일본이 알아도 웃을 것이고, 이정도 자료 존재는 알고 있을 전세계 연구자들도 당연히 웃을 것이다(일본 정부가 한 일과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해서 관심이 너무 없어서 아는 이가 적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호사카 교수자신이 말하는 대로, 위안부 동원은 기본적으로 호주의 동의서를 포함,본인이 국가에 도항(이동)을 요청하는 서류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요건을 갖춘 사람에 한해 “합법적”으로 허가하고 이동하도록 했다. 이 기사에서 말하고 있는 건 말하자면 오늘의 여권 같은 것이다. 설사 서류부족을 묵인( 호사카 교수가 지적한 맥락인지는 다시 확인해봐야겠지만)했다 해도, 중요한 건 기본방침이 어땠는지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합법이었으니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
이 기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위안부문제에 대해 일본이 부정하고 있는 책임은 책임 자체가 아니라 “법적”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아 일본이 모든 책임을 부정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이 사실만이라도 제대로 공유되면 좋겠다.
또하나, 일본군 위안부의 중심은 일본인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훗날 위안부숫자는 조선인이 더 많아진 것 같지만, 위안부 중에는 늘 일본인이 있었고, 최후에 일본군과 함께 전쟁터에서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자살로 희생된 여성 중에는 일본인 여성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남의 해석을 빌린 거지만(일본의 배를 탔으니 강제연행, 이라는 해석도 이미 다른 학자가 내놓은 해석이다)., 호사카 교수의 발표가 말해 주는 건,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학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무리한 해석까지 내놓으면서 “강제성”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 학계의 현황이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1991년 문제제기 시점에서 학계가 조선인위안부문제도 글자 그대로의 “강제연행”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고, 그런 이해에 기반해 주장했던 “법적책임”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오늘의 혼란은, 연구가 진전되었는데도 무시하거나 스스로 해석을 달리 하면서, 초기의 “운동적 주장”을 고수하려는 태도가 만든 결과다.
조선에서는 더 강압적 동원이 이루어졌을 거라고 호사카교수는 말하는데, 그 부분도 이미 연구들이 있으니 참고하시라. 물론 그것을 비판하는 연구도 또 있다.
또하나, 호사카교수는 일본이 무슨 목적으로 이 자료집을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는데, 당연히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자료를 공개하라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정보를 먼저 독점한 학자의 기만이다. 목적은,
이 자료집을 발간한 아시아 여성 기금 홈페이지에 가면 다 나와 있다.
호사카교수의 “목적”은 고노담화 부정인 듯 한데, 그건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 학자들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뒤늦게 위안부 문제를 흔들려면, 제대로 흔들어 주기를 바란다.
사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별로 쓰고 싶지 않은 기분이 강하다. 이 며칠 몸도 안 좋아 포스팅을 쉬고 있었지만, 이런 기만을 방치하는 건 또다른 태만일 수 밖에 없어서 쓴다.
어제도 다른 분이 언급한 다른 문제에 대해 대한 댓글에서 썼지만, 우리 사회는 소모가 너무 많다.

–> 전에도 올린 적이 있지만, 다시 올려 둔다. 이 자료집이 호사카 교수가 언급한 자료집이다.

–> 이렇게 내용을 전면 공개도 하고 있다.
http://www.awf.or.jp/k6/document.html (위안부 역사 관련 자료)

渦中日記 2017/9/16

어제 핸드폰이 고장 났는데, 웬일인지 인터넷 전화도 불통. 오늘 인터넷 전화는 해결했지만 핸드폰은 월요일에 수리하러 가야 할 것 같다. 그러면 거의 만 사흘, 라인이며 카톡, 전화와 메세지들이 불통상태가 되는 셈이다.
이 며칠 Facebook 포스팅도 못 했는데, 무슨 일인지 걱정하실 분도 계실 지 몰라 포스팅.
감기가 왔는지 머리가 좀 띵하지만…저 별일 없습니다. 😊
작년 삼월에 후쿠오카에서 했던 심포지엄이 책이 되어 나왔다. 제목이 <한일 기억 전쟁--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었던 것일까>.
띠에는 “엇갈림과 비틀림의 근원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인식의 갭” 이라고 쓰여 있다. 편집부에서 붙인 걸 텐데, 내용을 잘 파악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인간사도 역사도, 엇갈림과 비틀림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갈등이 생기고, 이별 혹은 죽음, 전쟁이 일어난다. 엇갈림과 비틀림을 만드는 건, 대개는 아집, 편견, 오만, 불관용.

渦中日記 2017/9/11

주말에, 남대문꽃시장에 갔었다. 늘 가던 집근처 꽃집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집근처 꽃집은 자른 꽃들은 물론 철마다 작은묘종을 꽃피운 화분들을 팔던 곳이라, 자주 들렀었다. 경리단 길에 있었던 곳이라, 아마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여파이지 싶다.
이태원동에 이사 온지 9년. 가끔 강남터미널, 아주 가끔 양재 꽃시장으로 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9년동안 꾸준히 나무며 화분들을 샀던 곳이 없어져서 아쉽다. 남산에 매일 가서 종국에는 사슴처럼 뛰어다녀보리라던 내 야심찬 계획은 여전히 “계획중”단계인데, 9년 세월을 없어진 꽃집에서 느끼는 건 오늘아침 비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국화를 옆에 두었으니 가을을 맞을 준비는 끝났다. 이 비가 그치면 가을이 오겠지.
세상과 모든 분들께 평안이 함께 하는 가을 되기를.

渦中日記 2017/9/7

형사 2심 세번째 공판 피고인 신문은 1심때와 대동소이했다. 검사는 내가 응했던 신문인터뷰등을 들고 와 “강제연행을 부정하는(괘씸한) 박유하” 의 이미지를 만들려 노력하고 있었고, 정영환이 나의 책에 대해 말한 내용들 –일본어판에선 일본이 사죄했다고 썼다( 일본어판 역시,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으니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썼는데도), 일본인위안부의 애국을 조선인 위안부의 애국이라고 했다등–을 가져와 나의 “범죄”를 추궁하려 했다. 심지어 일본지원단체장을 맡고 있는 재일교포 양징자씨가 나의 책에 대해 엉터리로 말한 부분까지 가져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을 땐 오히려 맥이 빠졌다.

검사의 마지막 질문은, 12년전 책 <화해를 위해서>를 가져와 ” 이 책에서 ‘생명을 훼손시켜 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영토는 없다’고 썼지요?” 였다. 그의 관심은,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할머니 명예를 훼손했는지 여부보다, 나의 생각이 얼마나 반국가적인지를 증명해 보이려는 사상검증에 있었던 셈이다.

재판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었는데도, 귀가후엔 피로가 몰려와 곧바로 쓰러져서 잤다. 아마도 몸이 힘들어서 그랬을텐데, 밤새 내내 험한 꿈들을 꿨다.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어제는 검사가 질문내용을 보여 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 올 때마다 유독 고통스러웠다. 심리적인 것이었을까.

마광수 교수의 발인이 오늘이라는 것을 아침신문에서 보고 잠시 빈소에 다녀왔다. 뒤늦게나마 모인 꽃과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넋을 위로했기를 .
다시 하루가 갔다.

渦中日記 2017/9/6

(또 깁니다..)
어제는, 마광수교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나를 떠올려 주신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분명, 여러 기사들에서 드러나는 마교수의 우울과 고독은, 많은 분들이 염려와 함께 유추해 준 것처럼 나의 것이기도 하다. 마교수가 이십수년 전 사태의 그림자를 세월이 지나도 못 지웠던 것처럼, 나 역시 아마, 3년 전에 일어난 사태의 여파를 남은 인생동안, 피하지 못할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행히 내 경우 아직 직장은 유지되고 있지만, 마교수에게 일어났던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아직 없다.
구속이나 해임사태 이상으로, 그가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가슴에 아프게 와 닿는다. 직장과 문단에서 “왕따” 당했다고 그는 얘기한 듯 하지만, 정말은 왕따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억압–한번 세상의 비난을 받았던 사람은 찌그러져 있으라는 식의 억압이, 마교수를 짓눌러 “스스로 왕따” 시킨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 세상이라는 공간자체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빼앗아 버렸다.
나에게 쏟아진 것도 사실,”찌그러져 있으라”는 억압이었다. 고발이란 사실 그 방아쇠. 처벌 이전에, 다수의 비난자들을 국민 속에 만들어 공격과 혐오를 반복적으로 쏟아 놓도록 만든 방아쇠였다.
그런 의미에선, 고발자들이 원했던 “처벌”을 나는 이 3년동안 이미 충분히,지나치리만큼 받았다고 생각한다.
얼마전에, 나에 대한 적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바로, 문제시 되었던 “위안부의 아이돌화” 발언을 했던 장소에서.
비공개 세미나로 알고 갔던 나로서는, 세미나장에 들어가자 마자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는 사태 앞에서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주최측에 확인했더니, 주최측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인 듯, 기자를 향해 나를 찍지 말라고 말했다. 그건 내가 예상치 않았던 대처방식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기자는 곧바로 얼굴이 험악해지면서 내게 항의했다. 그러면서 한 말은, “사진에 찍히기 싫으면 이런 자리에 나오시면 안되지요!” 였다.
사실,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사람은 오프에선 처음 만났다. 방청석의 원고측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적대적인 사람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말했다. “외부인들이 들으면 안되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언론보도를 피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사전에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된 건지 주최측에 확인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화부터 내는가? (뉴시스기자라고 하기에 “뉴시스는 언제나 나에 관해 나쁜 기사를 쓴 곳인데.” 라고 말했던 것이 그의 적대의식을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
그런데, 나는 그의 태도나 세미나 참석 없이 쓰였던 적대적 편향기사 이상으로, “이런 자리에 나와선 안된다” 고 했던 그의 말이 더 머릿속에 남았다. 그의 말은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왜 이런 번듯한 자리에 뻔뻔하게 나오는가?” 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그 사태에 대해 내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면서 호의적이었던 한 TV진행자도, “말로 한번 화를 입었으면 좀 조심할 것이지” 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들었다. 그 역시, 내가 “문제적 발언”을 했다고 믿고 있었고, 그런 이상 “자숙”이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억압도 원인이 되지만,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여겨지면 말을 잃게 된다. 그런 의미에선 말을 잃는 상태,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는 일 자체가, 사회적/정신적 생명이 조금씩 죽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굳이 나쁜 일을 한 사람까지 가지 않아도, 아이나 노인등 약자들에게 “찌그러져 있으라” 는 식으로 말과 행동을 통제하려는 욕망은 우리 사회에 아주 강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계속 말하고 쓰려고 한다. 누군가의 억압이 존재하는 이상. 아니, 존재하기에 더욱.
나의 입을 틀어막고,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 감옥에 넣어달라는 식의 압박을 당연시하는 이들의 욕망이,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억압과 지배와 파괴의 근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내가 “찌그러져” 있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는 이상, 나는 나자신의 그런 목소리에조차 이겨 볼 생각이다. 물론 재판정에서도.
그런 나의 선택이, 마교수에 대한 작은 공양이 되었으면 좋겠다.

渦中日記 2017/9/5

내일, 형사 2심 세번째 공판이 있다. 내일은 피고인신문. 1심 본재판 진행 때 공판기를 다 쓰면서도 피고인신문만은 쓰지 못했었다. 검사와 변호사가 주로 공방하는 다른 공판과 달리 피고인 신문은 전부 나자신이 대답해야 했던 탓에 검사의 질문을 메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원에서 만든 신문내용 녹취록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70쪽이 넘는 긴 글이지만, 관심 있으신 분들께선 읽어 봐 주시면 좋겠다. 사악한 매국노 취급 속에 내가 무의미함을 견뎌내고 있는 장면을 아마 볼 수 있으실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무의미할 뿐 아니라 악의적인 질문들이, 내가 낸 세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에 우울했던 시간을.
내일도 그렇게, “피고인” 석에 앉아야 한다. 오후 4시 부터.
(이 글을 막 올리려는데 마광수 교수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두 배로 우울해지는 저녁이다..
이 글 같은 건 안 읽으셔도 좋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피고인(박유하) 신문 녹취서.pdf 바로가기
(* 편집주: 추후 가독성/다운로드 속도 문제로 별도 타이핑하여 재 게재 예정입니다.)

渦中日記 2017/9/4

10년 전부터 들은 얘기를 다시 맞닥뜨리고 보니, 지적퇴행의 주체는 오히려 서경식 교수쪽이 아닌가 싶다.
서교수의 이런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이미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 듯 한데, 북한의 핵실험을 다시 만나게 된 다음날 다시 이런 기사를 접하게 되니, 실망을 넘어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본격적인 비판은 조만간 긴 글로 할 생각이지만, 한겨레를 위시한 한국의 진보층이 이런 식의 주장에 간단히 귀기울이는 현실 또한 우리 안의 지적퇴행현상으로 보인다.
이 기사의 문제를 두가지만 지적해 둔다.
1) “리버럴”이라는 단어를 번역이나 주석없이 사용한 탓에,” 강남좌파” 혹은 요즘 곧잘 지적되고 있는 “처음부터 보수인 진보”와 혼동하게 만든다. 일본에서의 “리버럴”이란 어디까지나 진보좌파를 말한다. 물론 일본 역시 “무늬만 진보” 인사가 없지 않겠으나 서교수의 비판대상이 된 이들은 대부분, 일본 진보담론을 선두에 서서 생산해 왔던 이들이다.
2)2008년 가을부터, 서경식선생은 한국의 독자를 향해 “일본 리버럴”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책이 일본에서 평가받은 것이 서교수와 주변인들을 실망시킨 것이 이유라는데, 그 근원에는 1990년대 후반부터, 그러니까 이미 20년전부터 시작된 일본내 진보지식인간의 생각차이가 만든 갈등이 있다.
애초에 그 갈등은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갈등이었다. 동시에 급진진보와 온건진보의 갈등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사상싸움. 그런데 일본진보가 “신자유주의의 도래에 투항”했다고 이리도 쉽게 말하고 있으니 당사자들이 들으면 실소할 것이다.
냉전붕괴이후 일본의 진보좌파들은, 곧바로 갈등하기 시작했다.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40년전 학생운동시절의 급진/온건파의 싸움이 있다. 90년대 이후에도, 급진파는 오래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해 왔고, 온건파는 눈앞에 놓인 새로운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필요하면 그때까지의 생각을 수정했다. 와다선생이나 우에노선생과 서경식교수의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고, 그런 식의 태도의 차이를 만든 건 내가 보기엔 사고의 유연성이다.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혁명”이 목적이다 보니,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천박한” 것으로 취급하고, “우경화”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퇴행”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짧은 기사조차, 그 연장선상에서 일본이 위안부문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고 불신을 조장하니, 위험한 선동이 아닐 수 없다.그런데도 이런 생각이 이제 대통령도 언급하는 “국민정서”로 자리잡았으니, 한국의 보수정권 10년은 일부재일교포들한테는 결코 잃어버린 세월이 아니다.
나는 위안부문제를 “제국의 부수적 피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서교수나 정영환교수등 재일교포들의 말을 언급된 자료의 확인없이 옮겨 쓰는 전통, 멀쩡한 사람에 관해 사실과 다른 왜곡된 정보를 흘리는 일은 이미 10년전에 한겨레 한승동 기자가 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똑같은 논조가 전혀 의심받고 있지 않다는 건, 한국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우려는 나 한사람을 이들의 공격에서 피하게 하려는데에 있지 않다. 이들의 담론이 구조적으로 폭력을 용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고, 그런 “사고의 결함”이 나에 대한 물리적 폭력으로 “실제로”나타났다는 체험에 있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폭력이 국가단위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는데에 있다.
내가 이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그들이 뿌린 불신의 그물에 걸려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했던 정세판단미스를 또다시 행해 끔찍한 재앙을 만나지 않기 위해 말해두고 싶다.
일본의 진보지식인들에 대한 불신을 끊임없이 한국사회에 유포시켜온 재일교포들의 언설을, 이제부터라도 조금은 의심하고, 검토해 주었으면 좋겠다. 단언컨대, 이들은 서경식교수 정도나 그 주변 인물들에게 이런 식으로 가볍게 다루어져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북한의 행태가 보여 준 것처럼, 지금 평화를 위협중인 건 우파가 아니라 좌파쪽이다. 물론 북한은 이제 공산주의국가조차 넘어선, 그저 군국주의국가로 봐야 하겠지만.
배척하고 싶은 상대를 비난하는 최대수사가 고작 “우파”라는 말이라는 건, 그 자체로 우리가 여전히 냉전구도의 한가운데 있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진보인지 보수인지의 구별보다 중요한 건, 어디에 서 있건, 이질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또 그럴 만한 유연성과 인내심이 있는지의 여부다. 그래야만 상대를 지배하거나 제거하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제거욕망은, 아주 다른 차원의 것이다.
와다 교수의 선택이 가장 옳았는지 여부는 얼마든지 검토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와다교수는 늘 생각이 다른 이들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위안부할머니와 모두를 위한 최선이 뭔지 늘 고민해 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와다교수를 비난했던 이들은 이질적인 의견에는 귀를 닫았고,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지금의 북한처럼.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는 이들, 폭력을 가하거나 무기로 삼는 이들은, 더이상 진보일 수 없다.

渦中日記 2017/8/31

“스타” 철학자라는 이진경교수까지 나를 이런 식으로비난하는 걸 보니, 대한민국의 지성계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듣보잡 여자로 보이도록 하면서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효심을 앞다투어 드러내려는 이 심리는, 분명 연구대상이다.
사실, 일찍부터 이유 있어 그에 대한 관심을 끊었던 터라, 더더구나 이런 식으로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타자의 생각을 읽는 일에서 출발하는 “철학”을 하는 그의 비판이, 다름아닌 독해력의 빈곤이 만든 것이라는 것, 이렇게도 가벼운 그의 글이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비싸게 소비되고 있는 곳이 다름아닌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이 아침에 다시, 슬프다.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제국의 위안부”라는 제목에는 “제국에 동원당한 위안부”라는 뜻도 있다. 표지에 있는 위안부의 기모노 모습이 반으로 쪼개져 있는 것도, 그런 뜻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으로서 동원당했지만 그 “일본인”이란 허울 뿐이었다는.
무려 “철학”을 하는 이가, 최소한의 독해력만 있어도 알 수 있는 부분을 간과하고 타인의 책을 “정신없는 책” 으로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본어 회화와 일본남자”에 관한 성과만 있을 거라는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걸 보면, 이 사태는 어쩌면 지성의 문제조차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의 책은 그렇게 양식부재사태마저 드러내고 말 만큼, 어떤 부류의 남성지식인들의 자존심을 단단히 건드리고 만 것 같다.
그는 “위안부강의”까지 했다는데,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 주자면 “논평할 가치”는 없을 것 같다.(그 강의를 들은 이에 의하면 너무나 감상적인 강의였다고 하니) 그가 “분노의 칼질”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 나는 그런 글들에 반론하느라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틀 전에 여성학회를 탈퇴했다. 나를 향한 여성혐오적 공격에 대한, 주류페미니스트들의 침묵이 3년이나 되는 긴세월동안 변함없이 이어진 이상, 더이상 그들에게 기대를 걸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의 책이 옳아서라기보다 그들이 옳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떠난다.
다음 재판이 이제 일주일 남았다.
(내 얼굴 사진을 자꾸 올리게 되어 많이 민망하다. 심지어 대개는 악마화된 사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