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 [중앙시평] 콤플렉스 민족주의와 역사 청산

위안부 관련한 학문적 견해 때문에 정의연과 나눔의집과 갈등을 빚고 마녀사냥을 당했던 박유하 씨에 대해, 그 단체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무너지고도 지식사회의 재평가가 없다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박 씨의 재평가엔 자신들의 오류 인정이 수반되기 때문일 것이다. 논의는 사태의 구조가 아닌 개인 윤리 차원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제 윤미향이 새로운 마녀이며, 옛 마녀 박유하는 침묵으로 배제된다. 그들은 여전히 한나 아렌트에게 민족 배신자 낙인을 선사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원문: https://mnews.joins.com/amparticle/24093297

명예훼손을 이유로『제국의 위안부』34개 문장의 삭제를 인용한 가처분 사건 비판

명예훼손을 이유로『제국의 위안부』34개 문장의 삭제를 인용한 가처분 사건 비판

– 서울동부지방법원 2014카합10095 결정에 대한 반론*

홍승기 –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초록 : 명예권의 배타성을 전제로 침해행위의 금지를 인정하려면 검열금지의 헌법 원칙(제21조 제2항)에 비추어 엄격하고 명확한 실체적 요건을 요구하고, 그 입증책임을 피해자의 부담으로 하여야 한다(대법원 2005. 1. 17.자 2003마1477 결정 등). 박유하 교수의 2013년 작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출판금지가처분 사건에서, 2015년 2월 17일 법원은 일본군 위안부 9인이 명예를 훼손당하였다는 이유로 ‘34개 사항을 삭제하지 않고는 출판 등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하였다(서울동부지방법원 2014카합10095 결정). 이 결정 이후 『제국의 위안부』는 형사사건, 민사사건에 휘말려 아직도 사건이 계속 중이다. 이 사건의 실질적 당사자는 ‘지원단체’이고, 채권자들은 『제국의 위안부』에서 전혀 특정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는 전체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고통을 분석한 『제국의 위안부』가 개별 채권자의 명예를 훼손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한편, 법원이 삭제를 명한 이 사건인용 부분은 『제국의 위안부』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대체로 학자의 의견이거나 ‘허위’가 아닌 사실로서, 학문의 자유·표현의 자유라는 공공의 이해에 직결되는 쟁점이다. 법원은 당사자조차 특정되지 않은사안에서, 단행 가처분에 반드시 필요한 고도의 입증책임을 간과하고 출판금지 가처분을 인용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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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이야기]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저자의 후기까지 깨알 같은 활자로 발간한 324쪽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필자의 소감을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조선인 위안부의 입문서이며 또 하나의 위안부 교과서였다.” 이 책은 그 동안 한.일관계에서 언제나 걸림돌이었던 위안부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각도로 분석한 위안부의 조감도였다.

출처 : 제주투데이(http://www.ijejutoday.com)

 

[김길호의 일본이야기]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읽기

박유하 재판 분석 by 박인식

요 약

○ 저자가 규정한 대로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를 둘러싼 사회현상과 담론을 고찰하기 위해 저술한 ‘메타역사서’로, ‘역사에 대한 해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적시’보다는 ‘의견 표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피해자들은 ‘출판금지 가처분 변경신청’을 통해 “허위사실을 전파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소송의 논리를 스스로 허물었습니다. 재판부에서는 이 책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 름의 방안을 제시한 단순한 의견표명으로서,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보호영역 내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표현 중 34곳의 삭제를 인용했습니다. 재판부의 판단과 일부 삭제 인용은 서로 모순된 것으로 보입니다.

○ 저자는 이 책에서 “당시 실정법에 의하면 ‘강제연행’이 아닐 수 있으나 실제로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니라 ‘제국’이라는 ‘구조적 강제’가 연행했다”고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사2심 재판부는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독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서술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벌금 1천만 원을 선고했습니다. 독자의 오독 책임까지 저자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 대법원 판례에서는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행위일지라도 ‘가치판단’이나 ‘의사표명’에 해당하면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책은 ‘역사에 대한 해석’을 다룬 ‘의견표명’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형사1심에서는 이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반면에 형사2심에서는 “표현 일부가 허위이고 그로 인해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될 것을 저자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 재판부에서는 결정문에서 “학문 연구는 기존 사상이나 가치체계와 상반되거나 저촉된다 해도 용인해야 한다. ‘공적관심사가 된 역사적 사실’에 관한 표현에 대해서는 피해자 명예 못지않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습니다. 이 책은 여기서 특정하고 있는 바로 그 ‘공적관심사가 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삭제요청 표현 중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 누군가 명예훼손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어 출판물에 이의를 제기했다면, 그 결론은 출판금지이거나 출판허용 둘 중 하나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판물 한 문단 한 단어를 떼 내어 이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재단한다면 어떤 저자도 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 책에 대한 제반 소송은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위안부 할머니들 이름으로 제기되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피해 당사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지원단체의 운동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저자를 제재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원단체에서 소송을 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PDF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의견 2020.07.04 박인식 Rev.2

하라구치 요시오(原口由夫), 「정영환-망각을 위한 화해: 『제국의 위안부』와 일본의 책임」비판

 2017-02-12

 〔정영환 『망각을 위한 ‘화해’』에 대해서〕

 

본서에는 확실히 박유하씨가 말하듯, 수많은 ‘오독’, ‘곡해’가 있다. 내가 발견한 그 몇 가지를 제시하고 싶지만, 전체의 3분의 2정도 읽었을 즈음에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무엇도 증명하지 않고 오로지 자의적인 해석으로만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본서에서 더 이상 계속 읽을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투고는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았지만, 나 자신을 위한 비망록도 될 터이니 투고하기로 했다.

 

【일러두기】

1) 최초 페이지 번호는, 본서의 페이지 번호.

2) ≫로 시작되는 부분은 정씨에 의해 본서에 게재된 『제국의 위안부』의 인용.

3) (제, P.135) 등의 ‘제’는 『제국의 위안부』를, (망, P.46) 등의 ‘망’은 『망각을 위한 ‘화해’』를 가리킴.

4) >로 시작되는 부분은 본서의 지문(정영환씨의 문장).

5) ――로 시작되는 부분은 내 문장(코멘트).

6) ‘Soh’는 Sara Soh “The Comfort Women: Sexual Violence and Postcolonial Memory in Korea and Japan, 2008.

7) [ ] 안은 내 보충 주석.

 

P.17 ≫당시에 이미 정신대에 가면 위안부가 된다고 하는 오해가 있었으니 (중략) 경우에 따라서는 당시의 윤교수도 그러한 소문을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실제로 정신대에 간 뒤, 위안부가 되는 케이스도 있었으므로 그 소문이 반드시 거짓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 이러한 혼동이 생긴 것은 실제 케이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문’ 자체로 인한 것일 것이다. (중략) 식민지 특유의 공포가 그러한 거짓말을 유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제, P.135)

>이 짧은 기술 안에는, (a)소문은 ‘오해’다, (b)소문은 ‘꼭 거짓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c)소문은 ‘식민지 특유의 공포’가 유발한 ‘거짓말’이다, 라는 얼핏 보기에 모순되는 세 개의 주장이 병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내용에 대한 찬성 여부 이전에 저자의 ‘소문’에 관한 인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간단한 기술이 정씨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일까? 정씨 스스로 ‘일견 모순되는’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어디까지나 ‘얼핏 보기에’ 그런 것이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a) (b) (c)등으로 새삼스레 나누는 것은 왜일까(억지로 나눠서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내용을 보면, 정신대에 가면 위안부가 된다고 하는 소문은 ‘오해’이며, 진실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거짓말’이지만 그 중에는 실제로 정신대에 간 뒤 위안부가 된 케이스도 있었다. 누구나 이해가 가는 내용이다. ‘일반’과 ‘특수’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자의적으로 ‘모순되는 세 개의 주장’이라고 분석해서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P.24-25 ≫’위안부’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한국에서 위안부란 우선 <일본군에 강제 연행된 무구한 조선인 소녀들>이다. 그러나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문제―소위 ‘위안부 문제’를 없었던 것으로 하려는 부정자들은 <위안부란 스스로 군을 따라다닌 단순한 매춘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20년간, 한국과 일본의 사람들은 그 양쪽 기억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해 왔다. (제, P23)

>박유하가 제시하는 2항대립은 기묘하다. 대립의 한쪽이 ‘한국’인 데에 반해, ‘매춘부’라고 생각하는 쪽은 ‘일본’이 아니라 ‘부정자’로 설정된다. ‘20년간, 한국과 일본의 사람들’이 ‘격렬하게 대립해 왔다’고 한다면 ‘부정자’를 제외한 ‘일본’ 또한 대립의 내부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항대립은 그 존재를 애매하게 만든다. 이 기묘함에 알아차리느냐 마느냐가 본서 평가의 분기점이 된다.

――여기에서도 정씨는 박씨의 문장을 ‘2항대립’이라고 해석하여 이 ‘기묘함’에 알아차리느냐 마느냐가 본서 평가의 분기점이 된다고 하면서, ‘2항대립의 자의성’이라고도 말하고 있지만, 이 해석이야말로 자의적이다. 박씨는 한국에서 일반화된 기억―강제 연행된 무구한 소녀―(20만 명이라는 표현을 덧붙여도 된다)와 일본의 일부 극단적인 부정자―‘자발적 매춘부’파―를 대치시키고 있을 뿐이다. 정씨는 이 해석 후에 강제성과 군의 관여 문제에 대해 약간의 논의를 전개하고 나서 부정자가 논점을 강제성의 문제로 옮기고 있기 때문에 박씨의 주장은 ‘부정자의 쟁점 설정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크게 틀린 말이다. 강제성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부정자뿐만이 아니다. 그 강제성의 문제도 포함하여 한일의 대립이 있다는 말이다. 정씨는 강제성의 문제를 부정자의 견해로 설정함으로써 이 문제를 왜소화시키며, 박씨가 제기한 문제를 쟁점으로 삼지 않고, 박씨 저작의 ‘2항대립’이라는 스스로가 설정한 논리로 문제를 슬쩍 바꿈으로써 이 문제로부터 쟁점을 비켜 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본서에서는 자료에 기초를 둔 강제성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지 않는다. 정씨는 P.28에서 ‘물론 일본군 ‘위안부’ 제도 전체를 바라보면, 군에 의한 직접적/폭력적인 강제 연행도 존재한 것이 밝혀졌’다고 하는데, 일단 ‘전체’라고 쓰고는 있으나 직접적/폭력적인 예가 있는 것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과 관련해서이고 조선과 관련해서는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의 강제성 문제가 크게 의문시되고 있는 현재, 그것을 쟁점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굳이 강제성의 문제를 부정자의 쟁점이라고 하여 스스로 설정한 ‘2항대립’의 도식 안에 넣고 덮어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제국의 위안부』를 문제시하는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강제성, 자발성을 문제시해야 할 터인데, 본서는 박씨의 ‘기묘한’, ‘자의’적인 논리를 시종일관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

 

P.31 >위안소 설치는 병사의 강간 방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지적되고 있다.

――연구 성과의 불충분한 이해다. 집단적 강간은 감소했다는 지적이 있다(Soh, P.142). 또 위안소 설치의 목적에는 성병의 예방도 있었다.

 

P.32 ≫그러한 의미에서 위안부들을 데리고 간(‘강제 연행’이라는 말이 공권력에 의한 물리적 힘의 행사를 의미하는 한, 적어도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는 군의 방침으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것의 ‘법적’ 책임은 직접적으로는 업자들에게 물어져야 한다. 그것도 명백한 ‘사기’나 유괴의 경우에 한한다. 수요를 만들어 낸 일본이라는 국가의 행위는 비판은 할 수 있어도 ‘법적 책임’을 묻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제, P.46)

>결국 일본 국가의 법적 책임은 부정되는 것이다.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도 자의적인 해석이 있다.

 

P.32 >한편 박유하는 ‘군속 취급을 받은 업자’가 여성들을 데리고 간 것을 인정하고 있다. 군속이란 일본 육해군에 근무한 군인 이외의 구성원에 대한 총칭이기 때문에 당연히 ‘군속 취급을 받은 업자’에 의한 징집은 군에 의한 직접적인 연행에 대한 관여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위와 같은 업자=군속이라는 규정이 자신의 설명과 모순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을 증거로 삼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얘기다. 대체로 ‘군속 취급을 받았다’고 박씨가 진술하고 있듯이 업자는 ‘군속’이 아니다. ‘조선인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에도 쓰여 있는 것처럼 군속이 아닌 조선인 관리인은 군속에게만 허용된 장소로의 출입을 거부당하고 있다.

 

P.34 >하지만 요시미의 지적을 지지한다면····.군이 여성의 징집을 명하지 않았다면, 인신 매매도 일어날 리 없었고 그 책임을 군 또한 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유하는 징집 명령이 ‘물리적인 강제 연행을 상상시키’기 때문에 ‘섬세한 규정’이 필요하다고 하며 일본군의 관여 사실에 관한 논의를 이미지의 문제로 살짝 바꾼다.

――이 장에서 정씨는 군의 관여 문제에 대해 박씨를 비판하고 있는데, 나가이씨 논문의 지적도 포함하여 군에 의한 위안소 설치와 관여(병참부로의 귀속, 소모품의 급여 등)는 명확한 사실이다. 단, 모든 위안소가 그렇지 않았던 것은 위안부 문제를 조금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주지의 사실일 터이다. 그 사실을 박씨가 말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요시미씨의 지적을 거론하고 있는데, 요시미씨조차도 정씨가 말하는 것 같이 군에 의한 ‘징집’, ‘징집 명령’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요시미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한가지는 파견군에게 요청을 받고 일본의 내지 부대나 대만군/조선군이 업자를 선정하여 그 업자가 위안부를 모으는 방식이다’(요시미 요시아키 『종군 위안부』 이와나미신쇼, P42). 박씨의 의견 그대로다. ‘연구 성과를 전혀 근거로 하고 있지 않은 틀린 논의’라는 표현은 정씨에게 돌아가야 할 말일 것이다. ‘전혀’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P.35-36 ≫군이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사기 등의 위법 행위를 단속하려고 했다····이러한 권력의 존재야말로 군의 <관리> 사실이나 주체적인 관여를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즉, 설령 군이 모집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실이 곧장 군의 관여가 없었다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법 강제 모집을 ‘단속했다’는 것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한 군의 인지와 권력과 주체성을 나타낸다.

즉, 사기든 납치든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지속적인 수요를 만들어, 업자들이 아무렇게나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여성들을 데리고 가기만 하면 장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식의 시스템을 유지한 것 자체가 문제다.(제, P.224-225)

>····일본군의 역할은 업자의 ‘불법 강제 모집을 ‘단속했다’는 데’에 있다고 하는 이해는, 박유하가 그나마 인정하고 있었던 업자의 불법 행위를 ‘묵인’한 책임이라는 주장 조차도 뒤엎는다. ‘묵인’이란 문자 그대로 침묵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군이 업자의 위법행위를 단속했다면, 이것을 ‘묵인’했다라는 주장은 당연히 성립되지 않게 된다. 업자가 군의 눈을 피해 위법행위를 했다고 한다면 ‘묵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유하가 ‘좋은 관여’론을 채용한 결과, ‘묵인’한 책임조차 부정되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도 ‘기묘한’ 말 바꿔치기, 정씨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면 ‘트릭’이 있다. ‘일본군의 역할은 업자의 불법 강제 모집을 단속하는 데에 있다’라는 식으로 박씨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 군의 주체적인 관여가 있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력이 모자란 것인지,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바꿔 말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묵인’책임론과의 모순이 나오고, ‘‘묵인’책임 조차’ 부정한다고 결론짓는 것인데, 폭론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것은 자의적으로 박씨를 깎아내리기 위한 ‘틀린 논의’이다.

 

P.40-41 >본서는 일본군 ‘위안부’제도가 군에 의한 ‘성노예제’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때 ‘성노예’설 비판도····특이한 용어법으로 이루어진다. ···· ‘노예’ 개념을 변형시킨 뒤에 언명되는 ‘‘노예’였다’라는 주장은 사실상 ‘노예가 아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정씨가 인용하고 있는 박씨의 문장은 인용하지 않겠는데, 위안부가 ‘성노예’인가 아닌가는 논의가 갈라지는 지점이고, 박씨가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든 거부하든 그것은 논의할 문제이며, 그것을 비판한다면 그것을 비판하면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씨는 그 비판에 있어서 여기에서도 또 박씨의 언설을 바꿔치기하고 곡해해서 박씨 주장을 ‘변형’시키고 있다. 박씨가 신체적인 구속을 수반한 ‘노예’ 개념과 구조적으로 강제당하는 존재로서의 ‘노예 상태’를 구별하여 논하고 있는 것을 개념의 ‘변형’이라 하고 그 결론을 전도시키고 있다. 게다가 근거도 없이 ‘국제법학적 논의나 정대협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한다’라든가, ‘‘성노예제’ 개념을 ‘성노예’ 이미지의 문제로 살짝 바꿔···· ‘위안부’ ‘모두를 표현’하고 있지 않다며 요점에서 벗어난 비난을 하는 것이다’라고 박씨를 비난한다. 박씨의 논의가 다양한 ‘위안부’ 증언에 기초한 실태 규명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논의로는 들어가지 않고 개념 이해가 틀렸다며 묵살해 버리는데, 정씨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논점 바꿔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정씨 자신이다. 위안부/위안소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성노예제 개념의 정치적 측면에 관한 Sarah Soh의 연구도 있으니 참조해 본다면, 정씨 자신이야말로 정치적인 언설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연구자로서 실태를 조사해 보면 ‘강제’나 ‘성노예’의 개념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P.44 >일단 박유하의 사실 인식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다. 박유하는 미국의 전시정보국심리작전반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보고서’ 제49호에 있는 버마/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기록을 근거로 평균 연령이 ‘25세’라고 주장한다. ···· 게다가 포로 때의 평균 연령도 23.15세이며 ‘25세’가 아니다. 또, 박유하는 피해자들의 증언으로부터 ‘‘소녀위안부’의 존재가 반드시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니었다’(제, P.64)고 주장하지만, 증언한 조선인 피해자들의 대다수는 징집시의 연령이 20세 이하이며····

――여기에서는 박씨의 원문이 웬일인지 생략되고 있는데, 원문은 ‘····심문을 받은 조선인 위안부들의 ‘평균 연령은 25세’였다(「Japanese Prisoners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 후나하시 요이치 2004로부터 재인용). 그리고 한 전직 조선인 일본병사도 위안부들이 ‘20, 21세’였던 자기들보다도 연상이어서 ‘누나’라고 불렀다고 말한다(『하이난섬에 연행된 조선인 성노예에 대한 진상조사』…2011, P.69·72·120).‘이다.

어디가 사실 인식의 오류라는 말일까? 깎아내리기 위한 과장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25세라고 하는 숫자는 증언 기록에 쓰여져 있는 ‘average Korean girl…is about twenty-five years old’에서 왔을 뿐이다. 즉 계산에 의한 정확한 평균 연령인 것이 아니라 증언 기록자의 인상인 것이다. 그리고 실제 연령도 같은 보고서의 부록 리스트에 있는 기록 번호순으로 적어 보면, 21, 28, 26, 21, 27, 25, 19, 25, 21, 22, 26, 27, 21, 21, 31, 20, 20, 21, 20, 21이며 기록자가 ‘about 25’로 한 것도 수긍이 간다(평균치는 정씨도 쓰고 있지만 23.15이기 때문에 ‘about 25’와 전체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사실을 오인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징집’시(1942년. 심문시는 1944년)의 연령은 19, 26, 24, 19, 25, 23, 17, 23, 19, 20, 24, 25, 19, 19, 29, 18, 18, 19, 18, 19이므로 ‘징집’시의 연령이 20세 이하의 인원수는 20명중 12명이다. 이것을 정씨는 ‘대다수’라고 말하고 있지만 틀린 말이며, 이것이야말로 사실 오인이며 기만이다. 게다가 ‘이름을 밝히고 나온 피해자들 52명 가운데, 징집시의 연령이 20세 이하였던 사람은 46명에 이른다’라든가, ‘정진성씨에 의하면, 1993년 12월 시점에 한국 정부에 신고한 전 ’위안부’ 피해자 175명 가운데, ‘징집’시 연령이 20세 이하였던 사람은 156명이었다’라고 표까지 붙여서 보여주고 있는데, 전후 50여년의 시점에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면 젊었을 때 ‘징집’된 사람이 많다는 것은 당연하다. 고연령자일수록 돌아가신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즉, 정씨가 말한 52명과 175명의 연령은 ‘징집’된 사람이 20만명이든 3만명이든 상관없이 50년 이상 지난 ‘징집’시의 위안부 전체의 연령에 대해서는 미성년자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타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1944년에 있었던 20명의 기록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최근 타이에서 발견된 종전 직후 수백명의 위안부 기록을 정밀히 조사해보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내가 KBS에서 방송된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25명의 연령을 평균하여 본 바, 그것은 26.8세였다.

이상의 위안부 연령 문제에 이어 정씨는 우에노 치즈코의 위안부 패러다임을 소개하고, 박씨가 ‘적지 않은 영향’(망, P.46)을 받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제국의 위안부』가 그 기본적인 모티프를 우에노의 논문에서 차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망, P.47), ‘우에노 치즈코의 레토릭을 본서가 차용하고 있다’(망, P.47)고까지 말하고 있는데, 내재적인 비판은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혀 무의미한 지적이다.

 

P.57 ≫거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모들이 딸들의 행선지가 단순한 ‘정신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그 형태가 <자발>이든 <강제>든 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위안부’ 일이라고 생각해서 느끼는 슬픔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딸들 자신들의 슬픈 <거짓말>――성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고 자신과 부모를 납득시키기 위해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신대’에 간다고 이야기하는 식의――이 있었을 수도 있고, 딸을 가난 때문에 판 부모들의 <거짓말>이 개재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매춘 여성이나 강간당한 여성들이 그 사실을 공적으로는 말할 수 없었던 차별적인 사회구조야말로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을 일으키고,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제, P.62)

>충격적인 해석이다. 만약 박유하가 말하듯이 부모들이 ‘정신대’를 ‘위안부’라고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최대의 요인은 일본군이나 업자가 정신대 명목으로 조선인 ‘위안부’를 모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당사자 여성이나 그 부모들에게 <거짓말>의 책임이 있다고 한다.

――‘충격적인 해석이다’. 본서 P.17에서 이미 다루어진 내용에 나오듯이 ‘정신대에 간 뒤, 위안부가 되는 케이스도 있었다’라는 <소문>이 그 요인이라는 사실을 저자인 정씨가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게다가 ‘당사자 여성이나 그 부모들에게 <거짓말>의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일본군이나 업자를 면책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완전히 문맥에서 벗어난 곡해다. 나아가 정씨는 계속해서 말한다.

>애초에 박유하가 말하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간 여성도 딸을 판 부모도 모두 ‘정신대’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면, 왜 부모들은 정신대 동원을 ‘위안부’로의 징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인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이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인지(그럴 리는 없다), 이해가 가지 않는 척하고 있는 것인지, 앞선 P.17의 저자의 말을 보노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P.59 ≫분명 이러한 혼동을 만들어 낸 것은 우선은 업자의 거짓말에 의한 것이었을 터이다. ‘정신대에 간다’라고 속이고, 실제로는 ‘위안부’로 만들기 위해서 전장으로 보내는 식의 거짓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군이 원하는 압도적인 숫자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정신대’라는 장치가 필요했던 것일 것이다. 합법적인 정신대의 존재가 불법적인 사기나 유괴를 조장했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 개재했던 거짓말은 위안부가 될 운명의 여성들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 그리고 그 가족을 그러한 구조로 들어가기 쉽게 만드는, 무의식 중에 공모한 <거짓말>이기도 했다.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는 마지막 단계에서의 민족적 유린을 직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던, <민족의 거짓말>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즉, 그녀들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지키지 못한 식민지 사람들 모두가 <위안부가 아니라 정신대>라는 <거짓말>에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가담한 결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거짓말을 필요로 하는 사태야말로 ‘식민지 지배’라는 시스템이었다.(제, P.62)

>····용의주도하게 일본군의 거짓말만을 배제한 뒤, <민족의 거짓말>이라는 놀라운 말이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이 ‘공모한 <거짓말>‘이라는 언설이 파탄 나고 있는 것은 위의 인용만 봐도 명확하다. 여성이나 부모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업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업자가 데리고 갈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면 부모나 여성들은 거짓말 같은 것을 할 방법이 없다. 결국 박유하가 말하는 ‘공모한 <거짓말>‘, ‘민족의 <거짓말>‘론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업자마저 면책하고 말단의 민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언설이다. 이 <민족의 거짓말>이라는 언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를 살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 민중의 경험을 부당하게 깎아내리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씨는 이해를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하에 이어지는 결론으로 가져 가기 위해서 박씨의 언설을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성이나 부모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업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는 말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이해일까? 곡해다. 업자가 하는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알면서도 스스로의 마음을 납득시키려는 부모나 여성 자신, 또는 서로를 향해 거짓말을 하는 구조가 식민지 지배의 질곡의 근원이었으며, 그 구조적인 <거짓말>을 박씨는 ‘민족의 <거짓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이나 업자를 면죄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P.63 >2 센다 가코 『종군 위안부』의 오독에 의한 ‘애국’의 조탁

――‘조탁’이라는 말은 ‘보석 등을 쪼아서 다듬는 것. 나아가 시문의 자구를 다듬는 것’(고지엔)이라고 하니 이해 불가능한 표제다. ‘···의 오독에 의한, ‘애국’ 의식의 자의적 조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중에 등장하는 ‘찬탈’이라는 표현도 과장된 말이다. 게다가 오용이다.

 

P.63 >····박유하는 ···· 센다가 ‘위안부’에 대해 취재하는 계기가 된 사진을 언급하며 ···· 일본옷 차림을 한 조선인 ‘위안부’와 그것을 ‘경멸의 눈’으로 보는 중국인의 사진을 상상[하게 만드는 기술을 하고 있지만], ···· 노가와씨가 밝힌 것처럼 그러한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실제로 본서의 P.63에 있는 사진이 그것이다. 강을 건너는 두 사람의 여성 사진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씨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P.64 >실제 『종군』 [센다 가코 『종군 위안부』]을 아무리 찾아봐도 조선인 ‘위안부’의 본질이 ‘애국’적 존재였다는 주장은 보이지 않는다. 놀랍게도 ‘어느 연구보다도’,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냈다’고 칭찬함에도 불구하고 센다가 어디에서 그렇게 지적했는지도 쓰여 있지 않다.

――여기에서도 박씨의 언설을 교묘하게 바꿔 말하고 있다. 박씨가 ‘위안부’ 일반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센다는 위안부를 병사와 똑같이 자신의 신체를 희생하면서 전쟁 수행을 도운 <애국>적 존재라고 이해하고 있다’(제, P.25)), ‘조선인 ‘위안부’’라고 한정함으로써 ‘아무리 찾아도’ 그런 말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센다가 어디에서 그렇게 지적했는지도 쓰여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조선인 ‘위안부’’라는 문구에 한정하는 한 존재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P.66 >애초에 일본인 여성들이 말한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다’라는 증언을 봐도, 전쟁 수행을 돕는 ‘애국’적 존재라고 하는 해석에는 끝까지 납득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여성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모두 모집할 때나 ‘전장에 도착한 당초’ 시점이다. 사이토씨의 증언은 오히려 후방에서는 ‘공동 변소’ 취급을 당하는 현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문장 앞에 정씨가 인용하고 있는 센다의 문장은 박씨도 인용(제, P.73)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혀 지적되고 있지 않다. 그것은 P.64에서 ‘센다가 어디에서 그렇게 지적했는지도 쓰여 있지 않다’라고 박씨의 논거를 비판한 직후라서 그렇게 지적하는 것을 피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오독이다. 마치 ‘당초’에는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인용되고 있는 사이토 기리씨의 증언은 ‘제1선’과 ‘후방’에서의 취급의 차이를 진술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성실하게 쓰고 있는 것이라면 오독이겠지만, 박씨의 ‘애국’적 존재론을 부정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P.66 >박유하는 증언 이전에 센다의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센다의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내보이기 위해서 박씨의 언설에 변형을 가한 것이다.

 

P.66-69 >이 해석의 문제점은 명확하다. 조선인에 관한 증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위안부’=일본인 ‘위안부’>라는 도식에 따라 그대로 조선인도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 박유하는 검증해야 할 가설을 마치 증명된 명제인 것처럼 이용해서 각각의 사례를 연역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목소리에 한결같이 귀를 기울이’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정씨는 박씨가 수없이 많이 들고 있는 『증언집』(정대협 편찬)으로부터의 인용(제, P.80-88)을 완전히 무시한 채, 센다로부터의 인용만을 문제삼으며 박씨의 논거를 ‘이해 불가’, ‘비약’, ‘오류’라고 단정하고 있는데(망, P.68), 『증언집』이나 ‘여성들의 목소리에 한결같이 귀를 기울이’는 박씨의 자세를 무시하고 자신의 명제로 결론짓기 위한 자의적인 논법이다.

 

P.72 >박유하의 해석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다. ‘동족’이라고 하는 말이나 ‘동지의식’은 ‘하루에’나 ‘우메보시’의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소설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안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나’의 모습이다.

――이것도 궤변이다. ‘동족’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일단 병사의 말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식이 위안부들에게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안부가 군인을 자신과 동일시한 ‘하루에’의 말은 여기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된다. ‘동족’이라는 말이 사용된 의미를 무시하고 말로 표현된 ‘동족’만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위안부가 군인을 자신과 동일시한 적은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자의적인 논법이다.

 

P.78 >2 증언의 찬탈

――‘찬탈’이란 ‘제위를 강제로 빼앗는 것’(고지엔)이라고 하니, 이것도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제다. 거창한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오용이다. 하나의 예 밖에 들고 있지 않은데, ‘증언의 약취’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P.80 >····중요한 부분이므로 인용하겠다(【 】는 박유하가 인용한 부분이다).

“나는 말이 능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도 잘 못하고, 나는 생각한대로 밖에 말을 못하는 인간이라. 【일본 사람한테 나가 압박은 많이 받았지. 압박은 많이 받았지마는, 내 운명인디. 내가 세상을 잘못 만나고 내 운명이고, 나를 그렇게 한 일본 사람을 나쁘다는 소리는 안 해.】 그리고 같은 한국 사람이지마는 한국 사람이 주인이 돼갖구는 얼마나 나를 뚜들겨패는지 몰라. 손님을 안 받을라 한다구. 샅이 아파싸서 죽갔는디. 막 눈물이 절로 나오는 기라. 밥도 못 먹지. 밤에는 군인이 안 오니까 내 세상이다 생각해서 괜찮지만, 날이 밝아 군인이 온다고 생각하면, 그냥 그대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지옥에서 사는 것 같아. 군인들이 무서워서. (중략 [원문])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싶어. 나는 개나 다름 없었지. ····아이구, 일본 군인을 생각하니 정말로 원망스럽다. 원망스러운 것은 원망스럽지만 그 군인들도 다 죽었을 거야”.

 

P.80> ‘고통을 만든 상대’란 자신을 총대로 계속 때렸던 군인을 가리키는데, 황씨의 역점은 ‘운명’에 있지, 용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쁘다는 소리는 안 해’라고 하지만, ‘용서한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통을 만든 상대’란 자신을 총대로 계속 때렸던 군인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씨는 언외의 의미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튼 박씨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인용해 두겠다. 박씨는 증언을 인용한 후, ‘자신의 몸에 쏟아진 고통을 만든 상대를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말로 용서하는 듯한 그녀의 말은 갈등을 화해로 인도하는 한 갈래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용서하는 듯한 그녀의 말은’ ‘한 갈래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디가 ‘찬탈’이라는 것일까? 나도 이 황씨의 말에 감동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지만, 거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역시 ‘운명’이라고 하는 말로 ‘용서하는 듯한’ 그녀의 넓고 깊은 마음이다. 박유하씨는 그 마음의 소리를 알아 듣고 거기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려 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Original Link  2016년8월21일

요모타 이누히코, 박유하를 변호하다

박유하를 변호하다

요모타 이누히코

(원문: 2016-08-24, 四方田犬彦, 朴裕河を弁護する)

1

비교문학은 인문학 중에서 굉장히 효율이 나쁜 학문이다.

우선, 자국어 뿐만 아니라 복수의 외국어에 정통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자유롭게 그 텍스트를 읽고, 학회에서 의견교환이 가능해야 한다. 자국어로 쓰여진 텍스트만을 자국 문맥의 안 쪽에서 해석하는 작업에 비하면, 훨씬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정열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비교문학이란 분야에 사람은 매혹되고 이를 연구하려 하는 것일까. 비교문학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이는 사람을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민족주의영역으로부터 해방한다는 효용을 지니고 있다. 「겐지 모노가타리」의 책 이름인 「総角」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미혼 남성을 뜻하는 총각과 똑같은 표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일본에서 때때로 회자되는 문화순수주의란 것이 얼마나 치졸한 신화에 불과한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조선의 이상(李箱)과 대만의 楊熾昌을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옆에 두고 읽는 일은,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동아시아도 세계적인 문학적 전위운동의 권역 안에 있었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한 나라 한 언어의 안 쪽에서 자족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학사가, 실은 타자와의 끊임없는 교류 안에서 성립한 우연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한 나라의 문학만이 민족 고유의 본질을 표상한다는 전세기의 신화의 오류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비교문학은 우리에게 문화와 문학을 둘러싼 나르시즘적인 이야기의 바깥에 펼쳐져있는, 바람부는 황야를 지향하도록 하는 일을 가르쳐준다.

한편, 비교문학자는 때때로 생각치도 못한 편견의 희생자가 되기를 강요받게 된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이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던 에드워드 W 사이드를 엄습한 수난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대학에서 빅토르 위고와 아우에르 바흐를 독실하게 논하고 있었던 사이드는, 어떤 일을 계기로 자신의 고향인 팔레스티나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기 시작했다. 몇 권의 저서가 미국의 협소한 아카데미즘의 테두리를 넘어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엄청난 비방을 겪어야 했다. 사이드를 비난공격하고, 허무맹랑한 소문을 확산시킨 것은, 주로 유대계 미국인의 중동지역 연구자들이다. 그들은 사이드가 중동사의 학문적 연구자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아마추어에게는 팔레스티나에 대하여 논할 자격이 없다는 캠페인을 개시했다. 사이드를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합중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에는 냉정하게 그의 저서를 이해하고 그 과감한 언동에 공감하는 이란 파페(후에 이스라엘을 추방)과 같은 유대인의 중동사 전문가가 있다. 그러나 반 사이드파는, 사이드의 저서가 진실을 왜곡하는 반유대주의자라고 주장하고, 그가 팔레스티나에서 반란에 찬동하고 돌을 던지고 있는 사진을 날조하여 공공연하게 테러리스트라 불렀다. 그들 중 다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적 시오니즘의 찬동자이자, 국가로써의 이스라엘이 이산 유대인의 궁극적인 해결의 땅이란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예전에 텔아비브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 들은 일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한,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자란 유대인들 중 다수는 팔레스티나인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보고, 사태의 참혹성 앞에 말문을 잃으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미국에서 도래한 유대인들은 두 민족의 대립을 극히 관념적으로 파악하고, 팔레스티나인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증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신적인 유대계 미국인 학자들의 사이드를 향한 공격성의 심층에 있는 것에 대해 막연하나마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팔레스티나 출신의 비교문학자를 자신들의 「전문영역」에서 배제하는 작업을 통하여, 합중국에 있어 때때로 희박해지기 쉬운 유대인으로써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의 이스라엘에 거주하지 않고, 헤브라이어도 구사할 수 없기 때문에, 거꾸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순화시켜 꿈꾸는 자에게 있어, 사이드란 자신이 유대인임을 확인시켜주는 귀중한 매개자였던 것이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먼저 한국에서 발행되고, 좀 지나서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적지 않은 일본의 지식인, 특히 일본 내에서 지배적인 우파 미디어에 대해 항상 이의를 제기해오던 지식인들에게 환영받고, 두 개의 상을 수상했다. 이 칭찬 및 수상과 동시에, 한국의 조선사 연구가들이 그녀에 대한 강한 공격을 시작했다. 또 이 책이 위안부를 모욕하고 있다는 이유로 형사소송의 대상이 된 직후부터 재일한국인의 조선사 전문가가 박유하의 저작은 근거없는 기술로 가득하다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나는 이 사태가 전문가로서의 원한이나 질투로부터, 혹은 아이덴티티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이 박유하를 중상모략한 한심한 사태라고는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우파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제국의 위안부」가 집필되었다는 등의 말을 그들이 만약 하였다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행해진 비열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은 그들의 오랜 동안의 연구를 스스로 모욕하는 결과만을 남길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곧바로 상기한 것이 사이드가 체험한 수난이었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박유하와 사이드는 역사가가 아니고 비교문학의 전문적 연구자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또 박유하는 초기의 저작인 나츠메 소세키 론이나 야나기 무네요시 론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에게 이론적으로 시사받았고, 사회 속의 지배적 신화를 비판하기 위한 용기를 받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이드가 「아마추어」라는 호칭 아래 비방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박유하도 또한 위안부 문제의 전문가가 아님에도 발언했다는 이유로 치열한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나는 예전에 겪은 괴롭힘과 협박이 생각났다. 1995년의 일이었는데, 영화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되는 해라 NHK교육 TV가 나에게 12회 연속으로 세계영화사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해 왔다. 나는 그에 응하여 쿠로사와 아키라나 존 포드, 펠리니 등의 이른바 세계의 명작영화를 소개해 나갔다. 다만, 최종회만은 이걸로 마지막이니 작심하고 16밀리 필름의 개인영화를 방영하기로 했다. 선택한 것은 야마타니 테츠오가 1979년에 찍은『오키나와의 할머니』란 작품이었고,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감독 소장 필름을 빌렸다. 그 작품 안에서 위안부였던 여성은, 일본이 전쟁에서 이겨줬으면 했다는 말을 반복하고, 미소라 히바리와 고바야시 아사히가 얼마나 멋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와서 한국으로는 너무 부끄러워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현재의 NHK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방송은 삭제당하는 일 없이 방영되었다.

공영방송에서 16밀리 필름 영화의 일부가 2분정도 방영된 직후부터, NHK 및 당시 내가 재직하고 있었던 대학에 엄청난 항의가 왔다. 편지에는「비국민」, 「매국노」등의 표현과 함께, 한국인과 피차별 부락민을 둘러싼 갖가지 욕이 적혀있었다. 「고향인 소련으로 돌아가라」는 편지도 있었다. 나는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편지에 적힌 표현력의 저급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째서 모두가 균일한 어휘에 호소하는 일 밖에 못하는 것인가. 이 때의 체험이 계기가 되어 5년 후 서울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정대협이 주최하는 수요집회에 참여하고, 화과자를 가방에 가득 넣고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위안부할머니들과 몇차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박유하에 대한 비방은 규모와 그 성격에 있어 나에 대한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훨씬 거대한 것이다.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니지만) 「무식」한 자들에게 의해 행해진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식층의 손에 의해 체계적으로 전략적으로 준비된 것이다. 중상하는 이들은 위안부의 이름 아래 그녀를 형사고발하고 국민차원의 여론을 조작하여 그녀가 「대일본제국」을 변호하고 있다는 악의에 가득찬 허위선동을 이어갔다. 그녀가 한국에 거주하는 한, 고립과 위협을 느끼도록 집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 박해의 과격함은 일본의 어떤 독일문학자로 하여금, 아이히만을 논한 한나 아렌트의 이름을 거론하게끔 만들 만한 것이었다.

분명 그녀는 이제까지 위안분 문제를 생애의 주제로 삼아 연구해 온 역사가는 아니다. 앞에 기술한 바와 같이 일문학연구를 중심으로 한, 일개 비교문학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를 「아마추어」의 이름 아래 단죄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나는 반론하고 싶다. 지식인이란 전문학자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그것은 본래적으로 아마추어일 것을 필요조건으로 한다는 사이드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사이드는『지식인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마추어리즘이란, 전문가와 같이 이익이나 포상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애호정신과 억누를 수 없는 흥미에 의해 움직여서, 보다 큰 조감도를 발견하거나, 경계와 장애를 넘어 다양한 연계를 이루거나, 또는 특정한 전문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전문직이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관념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박유하 사건을 사이드의 수난에 견주는 것이 정당하다면, 지금부터 내가 적어야 할 것은 「제국의 위안부」가 제출하고 있는 「보다 큰 조감도」에 대해서 일 것이다. 그것은 미세한 사실오인이나 자료해석의 상대성의 차원을 넘어 일본과 한국에 있어서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면서도 일본이 과거에 행한 역사적인 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비전을 제출하는 것과 통해 있어야 한다. 내가 이 저서로부터 배운 것을 이하 기술해 두고 싶다.

2

역사적 기억에는 여러 갈래의 계층이 존재한다. 단순한 사실과 통계의 열거가 역사인식과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억과 그것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의 다층성에 대해 알아 두어야 한다. 특히 그것이 전쟁이나 혁명 등의 동란기의 기억일 경우, 어떠한 시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능동적인, 반동적인)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기억의 최정점에는 국가적인 기억, 즉 현정권인 체제가 승인하고 미디어에 있어 지배적일 뿐만 아니라, 교과서의 기재를 통하여 교육제도의 안 쪽에까지 깊이 파고든 스토리가 존재한다. 이 스토리는 「신성하며 범할 수 없는」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국가적 기억에 준하는 것으로, 특권적인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정형적인 언설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회에 있어 충분히 카리스마화된 인물, 신격화된 「당사자」의 증언이거나 미디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저명인의 발언인 경우가 많다. 정형적인 언설은 항상 미디어의 함수다. 그것은 미디어에 의해 전략적으로 연출되고, 기록되고, 이데올로기적 형성물로써 공공의 장에 던져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라기보다는 롤랑 바르트적인 의미의 「신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신화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권능의 힘은, 이 언설을 국가기억과는 별개의 의미로 사회의 지배적인 언설, 공식적이라 할 수 있는 언설로써 기능하게 하고 있다.

세번째로, 기억의 하층에 존재하며 그 시대를 살아간 이름없는 자, 잊혀진 자, 부당하게 천대받고 그 목소리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진 자들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생존 허용된(살려진) 시간」의「생존 가능했던 체험」(민코프스키)에 의한 생생한 증언이지만, 미디어를 경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도 승계도 없이 정형적인 기억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지식인이나 미디어에 관련된 자들을 여과기로써 통과하지 않는 한, 이 목소리는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그나마 곤난을 극복해나가면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층에 존재하고 있는 최후의, 제4의 목소리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제4의 목소리란, 문자그대로 침묵이다. 세계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갈 것을 강요당한 서벌턴이 처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상황이다. 그들은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할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다. 어떠한 계몽적인 계기를 앞에 두고도, 조개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입해 보면, 최정점에 있는 국가의 언설은, 2016년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수상이 체결한 한일합의가 그 최신 버젼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이 10억 엔을 한국에 지불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는 에필로그까지가 곁들여진다.

정형적인 목소리란, 정대협과 그 주위에 있는 동반자적 역사학자들의 손에 의한 한국의 지배적인 언설을 의미한다. 위안부는 항상 민족주의적인 정신에 가득하고, 일본군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고 그들을 주장한다. 그녀들을 위안부로 만든 것은 물론 일본군이고, 모든 한국인은 모든 상황에 있어 피해자였다. 위안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고결하고, 무구하며, 모범적인 한국인이었다. 이러한 주장 아래, 목소리는 특정한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정대협은 자신들이 위안부의 목소리의 유일하고도 정통적인 표상자임을 자인하고 있다.

제3의 목소리는 1990년대에 차례로 나타난 종군위안부 여성들의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목소리이며, 원래는 극히 다양하고 잡다한 요소에 가득찬 것이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쉽게도 제2의 목소리, 즉 정형적인 목소리에 의해 질서가 부여되고 노이즈를 제거한 상태가 아니고선 우리 눈에 비칠 수 없다.

그러면 제4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한국에서 나타나지 않은 위안부들의 기억이다. 또한 한국과는 달리 스스로 나타나는 일이 전무한 일본의 위안부들의 내면에 감춰진 기억이다. 기묘하게도, 위안부 문제를 입에 담는 자들은 주로 한국에 있어서의 문제를 논할 뿐, 방대한 수가 존재했던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를 당연히 무시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녀들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유하는 어째서 비방의 대상이 되었는가. 간단히 말해, 그녀가 정형적이고 지배적인 목소리를 거역하고,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alternative한 또다른 목소리를, 방대한 위안부 증언집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위안부 스토리의 절대성을 고집하는 자들의 분노를 자아낸 것은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었다.

박유하는 그녀가 말하는 「공식적인 기억」이 어떤 식으로 위안부 신화를 인위적으로 구축해 나갔는가를 면밀히 따져, 과감하게도 그 상대화를 시도했다. 이 기억=스토리가 이제까지 은폐하고 배제해 온 위안부들의 여러 목소리에 그 탐구의 눈길을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 참조한 텍스트로 한국인과 일본인이 집필한 소설작품뿐만 아니라 한국의 영화, 만화, 에니메이션에 대해 언급하고, 한국사회의 위안부신화의 형성과정을 분석하는 단서로 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말해두건데, 이러한 작업은 어디까지나 비교문학자의 손에 의한 것이다. 그녀는 하나의 언설을 다룰 때, 그것을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라, 어떠한 시점(이데올로기적인, 문화적인)으로부터 해석된 「사실」로 보고 있다. 여기서 『도덕의 계보학』의 니체를 인용하는 것은, 어쩐지 대학1학년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지만, 어떠한 사실도 그 사실을 둘러싼 해석이라는 인식론적인 전제에 대한 양해 없이는 앞으로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말해두겠다. 박유하란 박유하라는 해석의 의지이다. 그녀는 앞에서 내가 말한 3번째 목소리를 마주했다. 다양성을 가지고, 개인의 생애를 건 체험에 기반한 것이면서, 정형적인 지배원리 하에서는 불순한 것으로 배제당하고 잘려나간 목소리 속에 들어가, 거기서 공식기억과 상반되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무엇이 그녀의 이러한 작업의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위안부 문제를 보다 큰 문맥, 즉 제국주의와 가부장제를 기초로 형성되어온 동아시아의 근대국민국가체계의 문맥 안에서 인식하고, 그것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이 거대한 비젼을 이해하지 않고, 그 저작에서의 자료적 차이를 야단스럽게 언급하고 역사실증주의자를 참칭해 봐야, 무의미한 몸짓에 그칠 뿐 그녀를 비판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역사적이라고 보여져온 「사실」이란 늘, 특정한 이데올로기 아래 위치지어지면서 「사실」로써 정립된다는 고전적인 명제를 재확인하는 일에 불과하다.

3

박유하가 종래의 공식적인 위안부 신화에 내민 의문은 크게 다음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위안부들이 민족의식을 가진 한국인으로써 일본군에 대해 저항하는 주체인 것은 아니었다는 지적이며, 또 하나는 그녀들을 어리고 순진가련한 소녀로 표상하는 것은, 그 비참하고 굴욕적이었던 현실을 교묘히 은폐해버린다는 지적이다.

위안부들은 일본인 병사를 위해 단순히 성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을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잔혹한 전장에서 생명의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을 위해, 문자그대로 위안을 제공해야하는 존재였다. 위안부와 일본인 병사의 차이점은, 전자가 성을 제공한데 대해, 후자는 생명을 제공할 것을 강요당한 점일 뿐, 둘 모두 제국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며, 대체가능한 전력에 불과했다. 박유하는 위안부의 증언 뿐만 아니라, 다양한 텍스트를 동원하면서, 위안부가 일본군에 협력하지 않느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가혹한 상황을 상상할 것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이 한구절만 읽어도, 그녀가 위안부를 매춘부라 부르고 모욕했다는기소장이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며, 명확한 악의 아래 준비된 것임이 판명된다.

박유하의 분석의 뛰어난 점은, 피식민자인 조선인 위안부가 그 내면에 있어 일본인에게 과잉되게 순응해 외지에서 때로 일본인처럼 행동한 점을 지적한 데에 있다. 이는 종래의 공식기억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유하는 그녀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러한 제국의 내면화야말로 보다 용서하지 못할 제국의 죄임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를 강간하는/강간당하는 대립관계로써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제국주의에 강요당한 피해자로 보는 시점은 향후 역사연구에 있어 새로운 윤리적 측면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강제연행이 조선인, 중국인에게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나가노 현이나 야마가타 현의 농민들이 마을을 통째로 만주국 개벽에 동원당한 경우에도 해당된다는 입장과 통하고 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치마저고리 등의 민족의상의 착용을 허가받지 못했다. 그녀들은 조금이라도 일본인에 가깝도록 이름도 일본풍으로 고치고 기모노를 착용할 것을 명령받았다. 이것은 그 모습을 한번이라도 목격한 적이 있는 한국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굴욕일 것이다.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건립되어 현재 한국의 곳곳에 복제가 세워진 소녀상에 대하여, 박유하가 강한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그 상이 현실의 위안부가 체험한 굴욕의 기억을 은폐하고, 이상화된 스테레오 타입의 만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녀상은, 비록 한국이 아무리 일본에게 짓밟히더라도 여전히 처녀라는 신화적 믿음에 대응하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패전 후 미국에 점령당한 일본에서 하라 세츠코가「영원한 처녀」로서 숭배받고 현재도 일본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어째서 소녀상인 것인가. 박유하를 비난공격하는 자들은,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높다는 사실에 의하면 이 조각상이 부자연스럽다는 그녀의 주장에 대하여, 어째서 이토록 눈을 부릅뜨고 반론하는 것인가. 문제는 통계자료를 둘러싼 해석의 차원에 있지 않다. 위안부가 순결한 처녀가 아니면 안 된다고 광신하고 있는 한국인의 신화 측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박유하를 떠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역사적인 희생자를 무구한 처녀로 표상하는 일은 위안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3·1 독립운동에서 학살된 유관순도, 북한에 납치되어 생사불명인 요코타 메구미(일본에서는「짱」이란 호칭을 붙여야 한다)도 오키나와의 동굴에서 대부분이 살해된 「히메유리 부대」의 이들도 모두 소녀였고, 그렇기에 비극의 효율적인 기호로 선전되어왔다. 이는 정치인류학적으로 동아시아 특유의 병이다. 박유하의 소녀상 비판은 전후의 일본인마저도 무의식 하에서 이 스테레오타입의 상징법에 조작되어왔다는 사실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 문제가 전쟁 특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으로써 규탄받아야 할 것은 제국주의이며, 그에 따르는 한 병사도 위안부도 마찬가지로 희생자인 것이다. 이 비젼은 일본과 한국을 영원한 대립관계에 놓고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하는 「위안부의 대변자」의 비생산적인 내셔널리즘을 논리적으로 상대화하게끔 한다. 한국에서의 공식기억이 왜곡하여 은폐해 온 위안부의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박유하가 제출한 그림의 거대함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5

박유하는「제국의 위안부」마지막 부분에서 정창화가 1965년에 감독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라는 영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책 중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있는 유일한 곳이다. 무대는 미얀마의 일본군 주둔지이다. 조선인 위안부 여성이, 그녀가 배치된 「친일파」학도병 장교에게 말을 건다. 자신은 간호사가 된다고 듣고 이 곳에 속아서 왔다. 당신은 아직 일본제국주의가 신사적이라고 믿고 있는가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장면으로부터 판명되는 것은, 영화가 제작된 1960년대에는 한국인은 위안부를 둘러싼 90년대에 확립된 공식적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위안부는 모든 비참함의 근원에 일본제국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강제연행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오늘날, 「예술적 영화」범주 안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의 영화연구가가 이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없지만) 이렇게 강제연행의 신화가 집합적 기억으로서 인위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일반한국인의 역사인식을 알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존재하고 있다.

박유하가 한국의 B급 영화를 언급하였기에, 영화사가인 나는, 그 후의 한국영화가 어떤 식으로 종군위안부를 그려왔는지를 일본영화와 비교하면서 보충적으로 기술해두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80년에 걸쳐, 몇 편의 위안부 영화가 제작되었다. 1974년 시점에서 나봉한 감독(불명)에 의해『여자 정신대』라는 작품이 촬영되었다. 필름은 남아있지 않고, 영화연구가인 최성구 씨가 최근 발굴한 신문광고를 통해서만 간신히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영어 제목을 Bloody sex라 하며「위안부 8만명의 통곡. 영화 역사상 최대의 충격을 가진 문제의 대하 드라마」라는 선전문구가 기재되어있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는 여성의 나체를 포함한 에로틱한 영화표현은 엄격한 검열 대상이였다. 때문에 제작자와 감독은 일본군은 역사적 만행을 규탄한다는 도덕적 구실 아래, 에로틱한 묘사를 듬뿍 담은 필름을 제작한다는 발상을 했다. 한국인에 의한 강간장면은 안 되지만, 일본의 광기의 군대가 강간을 한다면 역사적 사실로써 표상이 용서받는다는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역으로 이용한 제작 자세를 알 수 있다.

내가 실제로 한국의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위안부 영화는 이상언감독의 『종군위안부』다. 1980년대 초반 일이었다. 이 감독은 야구선수 장훈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은 사람으로, 필모그래피를 참고하면, 아마도 소재를 고르지 않고 주문에 따라 감독하는 사람인 듯하다. 『종군위안부』는 호평이었기 때문에 시리즈화 되었다고 들었다. 제작의도는 『여자 정신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선인의 무고한 처녀들이 납치되어 위안소에 갇혀, 밤낮으로 일본군인에게 강간당한다. 그러나 영화 도중부터는 일본인 병사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면서, 단순한 남녀의 성행위만이 몇 번이고 이어진다. 이러한 영화가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규탄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작된 것은, 아마도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는 지식인들이 자국의 영화라는 미디어를 철저히 경시하여, 그 존재를 모르거나, 학문적 대상으로 논할 가치가 없다고 경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식민지화 시대를 포함하여) 자국의 영화를 분석적으로 연구하려는 기운이 높아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논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해방 후의 한국에 공식적인 기억이 존재하고, 위안부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기억이 형성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한국영화사도 공식적 기억을 만들어왔다. 거기서는 다큐멘터리「나눔의 집」이 모범적 작품으로써 선전되는 일은 있어도, 아마도 그보다 훨씬 많은 관객을 동원했을 『여자 정신대』를 비롯한 위안부 영화는 결코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급해서는 안 되는, 치욕의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 한들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에로영화를 한국의 남성 관객들은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들은 남성으로서 일본군 병사 측에 동일화하여, 여성을 강간하는 유사쾌락을 얻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같은 한국인으로서 강간당하는 여성 측에 마조히스틱하게 감정이입하여 보고 있었던 것인가.

어느 쪽이던 간에, 여기서 시각적으로도 스토리적으로도 얻어지는 쾌락은 도착적이다. 예전에 상해의 길거리를 산보하고 있을 때, 짐차 위에 「남경대도살(중국에서는「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에 대한, 선정적인 표지의 책이 쌓아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극히 복잡한 심경이 되었던 일이 떠오른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잔혹행위에 관한 포르노그래피였다. 아마도 이러한 예는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분석하는 것은 역사학이 아니라 미디어의 사회심리학이다. 사람은 어째서 스스로의 민족의 피해자를 주제로 한 포르노그래피에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상품화해 왔는가.

나는 예전에 쿠로사와 아키라부터 스즈키 세이쥰, 그리고 8미리 필름의 야마타니 테츠오가 조선인 종군위안부를 스크린에 표상하려고 어떤 식으로 노력해왔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요모다 이누히코「리코우란과 위안부, 『리코우란과 하라세츠코』). GHQ에 의한 검열 하였음에도, 쿠로사와는 타니구치 센키치와 팀을 짜서 타무라 야스지로의『춘부전』을 영화로 만들려고 기획했고, 매번 각본이 허가를 받지 못해 되돌려 보내졌다. 이 기획은 타니구치가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인 위안단의 여성가수로 치환함으로써 『새벽의 탈주』를 감독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쿠로사와의 정의감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닛카츠의 스즈키세이쥰은 그들의 좌절을 전제로, 1965년 드디어 노가와 유미코 주연으로 『춘부전』의 영화화에 성공한다. 거기에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한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지만, 주인공 남녀가 절망하여 죽은 사실을 알고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일본인은 항상 죽을려고 한다. 밟혀도 차여도 살아가야 한다. 살아가는 것이 훨씬 힘들다. 죽는 건 비겁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중요한 배역이고 중요한 대사다. 세이쥰은 그녀를 어떠한 비참한 상황에 있어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세계를 투철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서 이상을 가진 영화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와 진지하게 맞서려 하고 있었을 때, 한국의 영화인은 이를 단순한 에로 영화의 소재로 밖에 보려하지 않았다. 이 낙차는 크다. 한국의 연구가 중에서 이 문제에 답해줄 사람은 있을까.

6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시대의 일이다. 상해에서는 국민당의 테러가 횡행하고 있었다. 한 때 루쉰의 동생이, 아무리 개가 밉더라도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도 이를 지지하여, 중국인에게는 옛날부터 페어 플레이의 정신이 결여되었다고 논했다. 개와 싸우기 위해서는 개와 대등한 입장에 서서 싸워야 하고, 곤경에 처한 개를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이다.

루쉰은 불같이 화를 냈다. 물에 빠졌더라도 나쁜 개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게 사람을 무는 개라면 육지에 있건 물 속에 있건 상관없다.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중국에는 물에 떨어진 개를 동정해서 용서해줬기 때문에 나중에 그 개한테 잡아 먹힌다는 이야기가 많이 존재하지 않는가. 물에 빠졌을 때가 좋은 기회가 아닌가.

무서운 말이다. 항상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고, 친구와 제자를 차례로 암살당한 지식인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증오에 가득찬 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나는 이 생각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과연 그를 둘러싼 상황은 가혹했다. 그렇다고 적에 대해 치열한 증오를 퍼붓고, 그 멸망을 바라는 것만으로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70년대 신좌익의 각 계파가 서로를 죽여온 것을 비교적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이다. 나는 존경하는 「아큐정전」의 작가에 거스르고 말하고 싶다. 지금이야말로 개를 물에서 건져내어 페어플레이를 실천할 때이다. 적어도 증오의 쇠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1930년대의 상해로부터 2000년대의 서울과 동경까지, 사람들은 무엇을 해 온 것일까.

모두가 물에 떨어진 개를 재빨리 발견하고, 즉시 무서운 정열을 발휘하여 물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개에게 돌을 던져왔다. 그들은 만약 개가 평소처럼 지상을 거닐고 있었더라면 너무나 무서워 결코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맘껏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져도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태도가 돌변했다. 여기에 순수한 증오가 존재한다. 그러나 루쉰의 경우와 달리, 그 증오에는 필연적인 동기가 없다. 그것은 집단 히스테리라 불린다.

박유하가 종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저작을 한국에서 출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냉정히 생각해보자. 엉성하고 자의적인 인용을 근거로 형사소송이 이루어지고, 그녀는 위안부 한사람한사람에게 고액의 위자료를 지불할 것을 명령받았다. 뿐만 아니라, 근무하고 있는 대학의 급료를 압류당하고, 인터넷 상의 비난/협박은 물론이고, 신체안전에서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글자 그대로, 심리적으로 생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바로 그 때이다. 한국인과 재일한국인에 의해 치열한 공격이 개시된 것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개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다.

그들의 일부는, 일본에서 박유하가 높이 평가되고 적지 않은 지식인이 그 저작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을 의문시하고, 야유하며, 그 「섬멸」을 바라며 행동하고 있다. 박유하가 위안부의 증언자료를 자의적으로 해석,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닫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박유하를 지지하는 자들은 그녀가 한국에서 입은 법적 수난과 사회적 제재를 먼저 해결하고, 공평한 의논의 장의 성립을 기다려 대일본제국의 죄와 피식민자의 상황에 대해 토의 탐구를 개시해야 한다고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반해, 지지자를 비난하는 측은 승리/패배의 차원에서 목소리를 높여 선동을 계속하여, 사정에 밝지 못한 일본의 언론에 호소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승리」를 획득했을 때, 그들은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위안부 문제에 성실한 관심을 보여온 일본 지식인의 대다수는 이를 계기로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표명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식민지 지배와 여성의 인권유린의 문제로 보려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후퇴해 버렸을 때, 일본의 여론 속에 남는 것은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찬양하는 우파담론 뿐이다. 현재조차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이 우파의 선동에 의해 「혐한」주의자는 지금 이상으로 암약하고, 더더욱 심한 헤이트 스피치의 폭풍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의 상호양해는, 아무리 양국 정부가 금전적인 보상에 의한 합의에 달했다고 하더라도, 그와는 관계없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곤란하고 뒤죽박죽이 될 뿐이다. 박유하가 과감히 제시를 시도한 「보다 큰 조감도」와 한국의 공식적 기억의 상대화가 배제되었을 때, 발생하는 것이 이러한 사태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박유하의 비판자들에게 연구자로서의 페어 플레이 정신이 있다면, 먼저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법적인 조치에 항의하고, 그 해결을 기다려 진지한 토론에 들어가야 하는게 아닐까. 인간은 집단 히스테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냉정히 사물의 순서를 생각해야 한다.

물에 빠진 개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 (번역-오경헌)

장정일, 또 장정일이다! | 위안부 ‘전문’ 연구자이신 강성현 교수께 (허핑턴포스트)

스스로를 위안부 ‘전문’ 연구자라고 칭하고 싶은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가 <한국일보> 7월9일자에 실린 내 글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을 보고, 자신의 담벼락에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또 장정일인가?” 담벼락의 글은 따로 제목을 달지 않으면 첫 줄이 제목이 된다.

일면식도 없는데다가, 이보다 앞서, 서로 간에 설전이 오간 적도 없는데, “또 장정일인가?”라고 조롱하다니? 그것도 “일본군이 만든 위안소”라는 허두로 시작하고, 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국가 범죄”라고 본문에 분명히 명토 박은 동지(?)에게 이런 조롱조의 말은 여러모로 예의에 어긋난다(나는 저 제목을 보는 순간, 학교에 다닐 때 담임선생이 내게 하는 말처럼 뜨끔하기도 했다).

자기 담벼락에 쓴 같은 글에 “논쟁을 원하면 언제든 와라”고 적기도 한, 자칭 위안부 전문 연구자가 담벼락에 쓴 글을 요약,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인용문 의 숫자와 밑줄은 필자).

장정일이 문제 삼은 한겨레 기사는 곽병찬 대기자의 희망나비의 유럽 활동에 대한 보도이다. 그 기사에서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이것을 두고 장정일은 자극경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겨레가 사실경쟁을 하지 않고 선정적으로 수치를 부풀리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좀 웃겼다. ①한번 한겨레 ‘위안부’ 관계 기사 다 검색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치를 확인해보시라. 조금은 제각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학계에서도 제각각기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연구자들은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추산한다. 여기에서 고려되는 것이 일본군 총병력 수, 그리고 간혹 공문서에서 확인되는 ‘위안부’ 일인당 병사수, 교대율 등이 고려된다. 그 결과 추산 규모가 2만명에서 40만명까지 다양하다. 하타 이쿠히코 같은 일본의 보수적 연구자들이 최소치로 잡고, 중국의 소지량 선생이 가장 최대치로 잡는다.

다시 말해 ②”8만에서 20만으로” 말하던, 30만으로 말하던 간에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현재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물론 통상 조선인 ‘위안부’ 20만을 말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슬로건 처럼 자리잡혀 있다. […]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이라는 표현 자체는 학술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연구자들끼리의 통상의 감각에서 말하면, 좀 오버한 것 아닌가 라고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자체가 틀렸다고 어떤 연구자도 단정할 수 없다. 이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뱀꼬리 1. 장정일은 일본군 병력 300만명이고, ‘위안부’가 20만명이면, ‘위안부’ 1인당 15명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교대율을 2로 상정하면 ‘위안부’ 1인당 30명이 된다. ④바로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그렇게 추산하기도 했다. 참고로 요시미 선생은 일본군 ‘위안부’ 관계 일본 자료들을 방위청 전사도서관 등 조사 발굴해 세상에 내놓은 전문 연구자다. 일본 자료와 관련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그에게 기대고 있는 셈이다.

2. 일본군의 전시 강간과 군 위안소, 단기적 강간센터 등을 통해 사실상 허가된(공인된) 성폭력은 빈번했다. “이 모든게 사실이면… 전쟁을 해야 할 군인들이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패망한거다”는 장정일의 말. 불철주야까진 모르겠고 분명 빈번했다. 근데 그것이 패망의 이유라고 어떤 연구자가 말하나? 이렇게 꼬는 이유… 알겠는데, ⑤그래서 뭘 주장하고 싶은 건가? 위안부 총수 줄이자고 주장하는 건가?

자칭 위안부 전문 연구자가 “솔직히 좀 웃겼다”는 ①은 ⑤와 함께, 나의 글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당최 알아먹지 못한 증거다.

위안부 숫자에 대해 <한겨레>가 그동안 얼마만큼 다양한 숫자들을 나열했는지는 전수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 그 가운데는 소속 신문사의 기자가 쓴 기사도 있고 사외 필자가 쓴 것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을 일일이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각자 꼴리는 대로 쓰면 된다.

예컨대 나로 하여금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이라는 글을 쓰도록 빌미를 준 <한겨레> 곽병찬 대기자는 올해 1월13일치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평화로에 핀 할머니의 도라지꽃」에서 이미 ’30만명’ 설을 내세운 바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글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내 독서일기에만 저장해 놓았지, 공개적인 글감(공론화)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곽 기자가 <한겨레>에 연재 중인 ‘곽병찬의 향원익청’은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에세이며, 기자는 사시(社是)와 다르거나 거기에 준하는 편집 방침과 상반되지 않는 이상 어떤 의견이든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6월22일자 기사「’위안부 할머니 꿈’ 싣고 유럽에 갑니다」는 기자 개인의 의견이 아닌, 사고(社告)나 마찬가지인 글이었다. 즉 그 기사는 조선인 군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는 ‘희망나비’를 <한겨레> 신문이 현장 취재하겠다는 사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한겨레>는 관행으로 채택하고 있는 ’20만’ 설을 고사하고 ’30만’ 설을 택하게 되었는가라고 묻는 것은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누구나의 합리적인 의문이다. 게다가 나는 <한겨레>를 20년 넘게 구독해온 독자다.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 쓰는 글에 제목을 달지 않지만,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만은 내가 지었다. 이 제목 아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과거사 보도에서 언론이 안고 있는 딜레마를 지적하는 것과 함께, 이 문제에서 좀 더 사실보도와 진실추구에 매진해 달라는 것이었다(나는 그게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자칭 위안부 전문 연구자가 ⑤에서 반문한 것처럼, 내 글은 “위안부 총수 줄이자고 주장”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강성현은 ②에서 “8만에서 20만으로” 말하던 “30만으로” 말하던 간에,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다 라고 현재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정이 이러므로 관행으로 채택하고 있는 조선인 위안부 “20만” 설을 언론이 아무런 설명 없이 “30만”으로 올려 추산해도 ③”표현 자체는 학술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분의 실토가 진실이라면, 즉 현재 상황에서는 어느 것이라도 “사실이 아니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위안부의 숫자이며, 그래서 어떤 숫자도 “학술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왜 그 숫자가 오르는 건 괜찮고 내리는 건 안 되는가?

내 글은 <한겨레> 같은 신문으로 하여금 위안부 숫자를 마음대로 올릴 수 있게 만들고, 마음대로 내릴 수 없게 만드는 거수기(擧手機)가 민족주의라고 의심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겨레>가 같은 기사에 통상 20만 설이 아닌, 연구자가 최소치로 잡고 있는 ‘8만’이라고 썼다면 절독을 하겠다는 독자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내 글은 그 딜레마를 말하고 있다.(강성현이 실토한 위안부 연구의 불확실성은 ‘어떤 설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어떤 설도 학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말해지는 위안부의 숫자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 말고, 박유하에게는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건가?)

자칭 위안부 전문 연구자는 ④에서 위안부 ’20만’ 설이나마 지키기 위해 요시미 요시아키를 끌어온다. 위안부 문제의 권위자인 요시아키가 20만 설을 추인했다는 거다. 실제로 요시아키가 1995년에 출간한『일본군 군대위안부』(도서출판 소화,1998)는 여러 가지 추계 방법을 소개하면서, 어느 방법에 따른다면 “약 20만명이 된다”(92쪽)라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책에는 위안부 총 “8만”과 “17만~20만” 설 가운데 “후자는 숫자가 너무 많다”(89~90쪽)는 상반된 말도 나온다. 더욱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2010년에 나온『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역사공간,2013)에 20만명 설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새로 나온 책에서 그는 두 번 씩이나 “아무리 적게 잡아도 5만 이상일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93쪽)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로써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요시아키가 20만명 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을 가능성이다.

요시아키의 두 책에는 위안부의 교대율(교체율)에 대한 맛보기 추정이 나와 있다. 하지만 위안부 수를 추정하는 데 있어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 인구에 대한 연구 없는, 교대율 추정에 의한 위안부 수 산출은 넌센스에 가깝다. 교대율을 받쳐줄 인구가 없다면, 아무리 그럴듯해봐야 탁상공론이다.

나는 한국의 위안부 운동 단체가 중국의 위안부 운동 단체와 연대하지 않는 이유가 늘 궁금했다. 두 나라가 운동 단체가 협공하면 일본은 죽사발이 나는데 말이다. 까닭은 한국의 20만 설과 중국의 ’20만 +α’ 설이 합치면, 문자 그대로 무리수(無理數)가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두 나라가 각기 위안부 숫자를 늘리거나, 늘린 상태로 숫자를 합산하면 위안부 문제의 사실성이 휘발하고 만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두 나라의 위안부 운동 단체는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연유를 알고 싶다.

위안부 연구자와 활동가, 위안부 연구자와 언론, 위안부 연구자와 대중 사이에는 소통되지 않은 차이(gap)가 있다(그걸 여기 모두 적시하고 싶지만, 아껴둔다). 내가 확인한 여러 위안부 문제 연구자의 연구 결과나 초점은 특히 대중에게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을 과거사 보도에서 ‘사실 경쟁’을 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게 된 언론의 딜레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국의 위안부』로 기소된 박유하 교수는 나의 드레퓌스가 아니다. 박 교수의 논리에 모두 동의하지 않음에도 나는 내 입을 막는다. 내가 박유하 비판을 보류해야만 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박유하를 비판하는 모든 언사가 박유하를 유죄로 만들고자 하는 법정의 증거로 채택되기 때문이다(이건 나만의 결정일 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다. 박유하 재판이 끝날 때까지 어떤 연구도 중지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는 박유하 비판자에게도 적용된다. 박유하의 어떤 주장에 타당성이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이 법정에서 박유하를 변호하는 논리로 전용될까봐서 인정하기를 꺼린다. 하므로 학술 논쟁을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위안부 문제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원문: 또 장정일이다! | 위안부 ‘전문’ 연구자이신 강성현 교수께 (허핑턴포스트)

장정일,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 (한국일보)

장정일 소설가

일본군이 만든 위안소의 조선인 위안부 숫자는 어떤 연구를 통해서도 아직 숫자가 확정된 바 없다.

그저 가해국(일본)은 숫자를 줄이려고 하고, 피해국(한국)은 숫자를 늘리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위안부 문제 활동가들과 언론은 관행적으로 ‘20만’설을 채택한다. 2015년 12ㆍ28 합의 이후 신속하게 기획된 ‘시사IN’(제435호 2016.1.16.)의 군위안부 특집이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는 최소 8만명,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쓴 것이 대표적이며, ‘한겨레’ 1월 12일자에 나온 이윤제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칼럼도 “약 20만명의 한국 여성이 성노예가 되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관행적으로 쓰고 있는 20만 설은 앞으로 늘어나든 줄어들든, 활동가와 연구자가 사료와 논리로 뒷받침해야 할 숙제다. 그런데 사고(社告)나 마찬가지였던 ‘한겨레’ 6월 22일자 기사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정부는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식민지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다”라고 썼다. 20만에서 10만이 늘어난 30만 설을 주장하려면, 사료나 근거를 제시하면서 기존의 설을 논박해야 한다. 예컨대 ‘뉴욕타임스’가 600만명이라고 관행적으로 알려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숫자를 700만명으로 조정하고자 할 때는 그만큼의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언론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확인 절차를 ‘찌라시’는 괘의하지 않는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 중국, 남양군도(남태평양제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다. 20만명 설이 맞는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그런데 공인된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일본군은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 두 방에 나가떨어진 게 아니다. 전쟁을 해야 할 군인들이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패망한 거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 인구를 1,500만명으로 잡고 남녀 성비가 같았다고 상정할 때, 20만명이라는 군 위안부 숫자는 37.5명당 한 명의 여자가 끌려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적어도 750만명의 여자 가운데 위안부로 삼기 힘든 10세 아래와 30세 이상의 여자를 빼고 나면 결혼 적령기의 여자 가운데 대부분이 일본군의 마수에 걸려든 게 된다.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위해 찌라시나 같은 언론이 ‘자극 경쟁’을 계속 벌인다면, 슬금슬금 10만명씩 늘어난 끝에 100만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불놀이가 신문을 한 부 더 팔게 해줄지는 몰라도 이런 국내용 선동으로는 결코 일본의 국가 범죄를 추달하지 못한다.

최근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책 세 권이 나왔고, 어떤 책은 ‘한겨레’에 대서특필됐다. 이 기사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극우 ‘산케이신문’의 격찬을 받았다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지은이가 기소되자 “한일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책”이라고 쓴 것이 ‘산케이신문’이 보여준 가장 수위 높은 격찬(?)이었다. ‘한겨레’ 기사는 박유하의 책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한국인 전체를“‘거짓말쟁이’ ‘사기 집단’으로 치부”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는데, 행여 위안부 문제에서 한국인이 거짓말쟁이나 사기 집단이 되었다면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다.

위안부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언론 사이의 자극 경쟁은 비용(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극을 하면 할수록 ‘민족 정론지’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반면, 가령 위안부의 수를 낮추는 것과 같은 ‘사실 경쟁’은 비용이 드는데다가 ‘반민족 언론’이라는 오명마저 각오해야만 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과거사를 다루는 세계의 모든 언론은 이 딜레마에 빠져있다. 언론이 사실보도와 진실추구라는 준칙에 근거한 사실 경쟁을 외면하고 자극 경쟁에 뛰어들 때, 그 나라 국민은 거짓말쟁이나 사기 집단이 된다.

원문: [장정일 칼럼]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 (한국일보)

장정일, 박유하 죽이기 | 정영환·이명원의 오독 (허핑턴포스트)

장정일 소설가

『녹색평론』5~6월호(제148호)를 받았다. 목차에서 이명원 형의「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지식인의 지적 쇠퇴」를 발견하고 그것부터 읽었다.

위의 글에서 이명원은 박유하의 한국어판『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2013)와 일본어판『제국의 위안부』(아사히신문출판,2014)를 가리켜 “두 책은 사실상 동일한 서적이라 보기 어렵다”(65쪽)면서,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의 지식인과 독자들이 격렬한 박유하의 팬덤(fandom)으로 전락하는 마술은 [판본을 달리한 지은이의] 이런 수사학적 책략 탓”(66쪽)이라고 말한다.

『제국의 위안부』의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이 ‘동일한 서적’이 아니며, 바로 거기에 박유하의 간계가 숨어 있다는 식의 이런 음모론은 원래 이명원의 것이 아니라, 일본어판 출간 즉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온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의 것이다. 정영환의 주장은 이타가키 류타와 김부자가 함께 엮은『’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삶창,2016)에「’전후 일본’을 긍정하고픈 욕망과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제목을 실려 있다. 거기서 정영환은 한국어판 262쪽과 그것을 번역한 일본어판 251쪽을 비교하고 나서,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 주장은 일본어판을 읽지 않으면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98쪽)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의 사례보다 더 심각한 사례가 있으면 모르되, 정영환이 먼저 제기하고 이명원이 고스란히 받아쓴 ‘(한국어판)262쪽/(일본어판)251쪽’의 차이는 결코 두 사람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한국어판)262쪽/(일본어판)251쪽’의 차이를 놓고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 주장은 일본어판을 읽지 않으면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라느니, “두 책은 사실상 동일한 서적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좋게 봐서 오독이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인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저 대목이『제국의 위안부』의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의 ‘핵심 주장’을 다르게 하고 있는지, 정영환이『’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에 번역해서 싣고(94~95쪽), 이명원이「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지식인의 지적 쇠퇴」에 고스란히 인용한(64~65쪽) 문제의 대목을 살펴보자(일본어판 인용문에 나오는 밑줄은 정영환·이명원의 것이며,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에 있는 볼드체는 나의 것이다).

(한국어판) 말하자면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식민화 과정에서의 동학군의 진압에 대해서도, 1919년의 독립운동 당시 수감·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살해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밖에 ‘제국 일본’의 정책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가혹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들은 국민동원의 한 형태였다고 볼 수 있지만, 제국의 유지를 위한 동원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배의 희생자다.

(일본어판) 그러한 의미로는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고 이 사실은 한국에 더 알려야 하겠지만, 그것(지금까지의 사죄 – 번역자 주)은 실로 애매한 표현에 불과했다. 1919년의 독립운동 때 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제국 일본’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혹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할 기회가 없는 채로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정영환·이명원은 일본어판에 자신들이 밑줄 친 문장을 들어 박유하가 한국어판에서는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고 해놓고서, 일본어판에서는 그것을 뒤집었다고 말한다.

일본어판의 독자를 위해 바꿔 쓴 부분 중에 주목해야 할 포인트로서, 저자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바뀌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에는 일본 정부는 식민지화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라고만 쓰여 있는데, 일본어판에는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다는 문장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문장이 추가되면 “공식적으로”라는 의미가 사죄를 한 사실은 있으나 “애매한 표현” 때문에 한국에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뜻으로 바뀝니다. (정영환 : 96쪽)

위의 각기 다른 판본을 보면, 삽입된 문장들 때문에 매우 상이한 의미를 띠게 된다. 한국 독자들에게 쓴 글에서는 식민지배 책임에 대해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다가, 일본판에서는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고”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렇게 판본이 다른 두 책은 사실상 동일한 서적이라 보기 어렵다. (이명원 : 65쪽)

어떻게 읽으면 저렇게 될까? 두 사람 다 기가 찬 해석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상한 것인가 싶어, 문과와 전혀 거리가 먼 통계학과를 나온 지인에게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을 읽히고 나서, 일본어판은 한국어판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지인의 대답은 명쾌했다. “일본어판에 정영환·이명원이 밑줄 친 대목은, 바로 그 위에 나오는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에 대한 부연이다.” 맞다!

그러면 한국어판의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에는 부연이 없는데, 왜 이 대목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일본어판의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에는 저런 부연이 필요했을까? 밑줄 친 대목으로 부연하지 않았다면, 일본인들은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라는 박유하의 단정에 의문과 반발심을 느꼈을 것이다. ‘무슨 말이야? 일본 정부가 사과하지 않았다니?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토미이치는 무려 총리였지 않는가?

박유하는 일본인의 의문에 답하고 반발심을 누그러뜨리고자 정영환·이명원이 밑줄 친 대목을 일본어판에 넣은 것이다. ‘일본 정부의 수반이 사과를 해온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공식적이라고 하기에는 늘 애매한 것이었다.’ 정영환·이명원이 일본어판에 밑줄 친 대목의 아래 부분을 보면, 밑줄 친 그 대목이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의 부연 설명이라는 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박유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학문적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박유하 죽이기’를 하고 있다는 의혹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원문: 박유하 죽이기 | 정영환·이명원의 오독 (장정일, 허핑턴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