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위안부, 또 하나의 생각: ‘적은 100만, 우리편은 나 한명’

할머니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경상도 출신이고,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직업소개소에 친구와 같이 갔다고 했다.

여성의 초등학교 졸업은, 무학이 많았던 당시로서는 상당한 학력이 된다. 실제로 할머니는 당신이 있었던 곳 등 필요할 때 종이에 한자를 써서 보여주기도 했는데 놀라울 만큼 달필이었다.

이후 시작된 나와 배 할머니와의 대화가 주로 전화로 이루어진 것은, 이 날의 나눔의 집의 경계의 결과다. 가족이 없는 할머니는 자주 전화를 걸어 오셨고 그렇게 할머니가 마음을 열어 주신 것이 나는 감사했다. 배춘희 할머니는 일본어를 가끔 섞으며 말씀 하셨다. 내가 일본어를 안다는 사실이,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을 배할머니의 마음을 열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후 반년 여동안, 할머니는 자주 내게 전화하셨다. 그래서 나는 허락을 받아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이하는 그 녹취록을 정리한 일부내용이다. 첫 녹음은 12월 18일 저녁. 할머니가 전화하셨고, 우리는 한시간 이상 대화했다.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대화를 좀 정리해 보았다. 맥락을 알 수 있도록 나의 말을 살려둔 부분도 있다. 이 날 할머니는, 강제연행을 포함한 위안부문제에 대한 생각, 우리사회의 대응에 대한 생각,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의 갈등, 나눔의 집 사무소와 할머니와의 관계 등에 대해 말씀 하셨다.

모든 이야기에서 할머니의 그간의 고독이 묻어났다. 물론 여기서 발화된 할머니의 생각이나 의견만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날도 할머니는 다시 ‘적은 백만, 우리편은 나 한명’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고독을 호소했지만, 나는 그런 할머니의 고독을 결국 덜어드리지 못했다.

(대화에 나오는 개인명은 복자 처리했다. 녹음이 좋지 않아 내용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도 일부 있다. 괄호 처리부분은 내가 할머니께 한 말이거나 이 글을 쓰면서 추가한 나의 생각이다.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말 중 유추 가능한 부분은 보완했고, 어미 등 말을 다듬은 부분도 다소 있다. 생략 처리한 부분은, 공개할 의미가 크게 없거나 다른 할머니들과의 심리적 갈등부분이다.)

(녹취일 2013/12/18 18:19:24)

<불신>

할머니는 자주,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자신의 주변상황에 대해 비판하셨다.

이 날은, 위안부가 군대를 따라 다녔다고 쓴 교학사 교과서가 문제가 되었던 날이었다. 나눔의 집에 기자들이 취재하러 왔던 모양이었는데 그 때 대응에 대한 불만을 말씀하셨다.

정리하자면, 교학사 교과서를 부정하려고 내놓은 자료는 “테레비에서 밤낮 그거 하나만 십 몇년… 내가 온게 18년 되어가는데 밤낮 고거 한장만 내놓는” 자료였다.

“그 장면은 중국이 아니다.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일 것이다.” 라면서 “동양의 군인들이 웃통 벗고 서 가지고..” 나오는 사진에 대해 “큰일나지 그거. 헌병들이 막 따라 댕기는데.”라고 하셨다. 이어서

“옛날에도 우리도 봤지만, 일부 사람들이 한국에서 무슨… 해가지고 그런 장사 한 사람 한국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고…

전부,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전부 한국사람… 또 중국엔 중국사람들이 주인노릇하고, 이제 한국사람들이 중국어 잘 해 가지고.. 전라도 사람? 태안(?)사람들이 장사했지,

일본사람들은 한국에서 옛날에 캬바레.. 캬바레 하고 노미야(술집)같은 그런건 좀 했는지 몰라도, 여기서 뭐 손님들 상대해가지고 몸팔고 하는 그런 장사는 한 적이 없거든 일본사람은. 중국에도 없고.”

(근데 할머니들은 일본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얘기들 하세요.)

일본인이 경영하지는 않았다는 건 할머니가 잘 못 아신 걸로 보인다. 할머니는 하얼빈에 계셨는데 하얼빈에 일본인 경영자가 적었을 수도 있겠다.

“그거는 메챠쿠챠(엉터리로)하는 소리야. 그거 뭐… 함 내놓으라고. 주소 어데고 어디서 그런거 하는지. 그런 사람들… 위치(주-있던 장소) 한번 물어봐야지. 그런 것도 내 생각에는 너무 참 사람이 그야말로 또 하는 소리지만 이승에서는 とおるか知らないけど、저승에서는 通らないよ(이승에서는 통할 지 모르지만 저승에선 안 통한다고)”

(그런 얘기 딴 사람한테는 하신 적 없으시지요?)

할머니의 생각이 어디까지 맞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할머니는, 다른 분들 중 일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배춘희할머니가 나눔의 집에서 고독했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어떨때는… 딴 일에… 뭐 이것도 그렇지만, 아이고 뭐 이승에는 그런 일이 통할란지 모르겠지만 저승에는 안 통할껄~ 하고 말하면 삐쳐 가지고…”

(아, 직접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중략)

<나눔의 집과 위안부할머니>

“***가… 아름다운 재단에 일본 정부에서 비밀로, 정부의 돈이 아니라 민간의 돈을 써서(?) 오천만원 받고, 또 지 돈 5천만원 하고.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도 성격은 또 뭐냐하면. 여기 사무실에 그 때 ?님 있을때 500만원 하고 1000만원 하고… 말로는 그래 2500만원을 사무실에 줬다. 사무실에도 기부금으로 주는건가보다 고맙다 하고 사무실에서는 받았거든. 받았는데, 이게 막 또 할매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면…
(중략)”

(할머니들이 사무실에 돈을 드리는 적도 있군요, 몰랐어요.)

여기서 언급된 할머니는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으신 분이다. 하지만 배할머니조차 ` 5천만원이 일본정부의 돈이 아니라 민간의 돈을 써서` 지급된 금액이라고 이해하고 계셨다. 그 금액이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재단은 그 돈이 `일본국민의 돈`이라는 걸 알고 받았을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에 나설 때 그에게 표를 던진 사람이지만, 박시장은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재판에 `검사`로서 참여한 사람이다. 서울시장 당선후, 정대협에 대한 여러 지원이 이루어 진 것도 그런 관계의 연장선 상의 일로 보인다.

<회의>

(중략)

“아이고 여러가지고 全然 여기 わけがない (사람이, 뭐 지가 사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어디 학교 나온 사람들이 있나,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저 말로는 2학년 댕기다가 어쩌고 저쩌고. 여기 가면 딸이 있다 누구집 가면 딸이 있다 누구집 가면 딸이 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다 알아. 그게 이상하잖아.”

(아.. 아는 게 이상하다구요?)

“여기 사람들한테… 잡혀갔다 이러니까는, 밖에 있는데 잡혀갔다…”

(아 어느 집에 누구 딸이 있는지, 마을사람들이 아니면 어떻게 아냐는 얘기시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찌 알아서 그렇게 했는지, ??~~~론적인 얘기하려면 이상하잖아.

(중략)”

할머니는 일관되게 지원단체와 일부 위안부할머니들의 이른바 `강제연행`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말씀을 했다.

나를 비판하는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정리한 증언집에 그런 이야기가 다 있으니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막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왜 전달과정에서 `다른 목소리`가 배제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혹은 국내언론과 일본과 국제사회를 향한 운동에서 왜 그와 반대되는 목소리만 강조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추후에 다시 쓰기로 한다.

 

<연민/고독>

할머니는 자신이 스님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는데 그 `반대`의 길을 살게 되었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고 싶어 하셨는데, 돕자하던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고 `우리가 더 불쌍하다`고 했다던 다른 할머니께 섭섭함을 내비치기도 했는데 그런 동정심과 연민은 그런 자의식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중국에서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 전후에 일본으로 가셔서 오래 살았고, 56세때 몸이 아파 한국으로 나오셨다고 했다. 귀국을 위해 조카를 한국에서 불러들이셨고 영주권을 반환하고 한국으로 들어 오신 듯 하다.

“일본을 떠날 때 고향에 가봤자 아무도 없는데, 내가 어째서 이런 운명이 됐는가… 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그래 가지고 고향에 또 와가지고, 사촌 형제간도 아홉이 있었는데 다 죽고 한 애 남아있더라고. 그리고 배다른 동생 하나가 부천(?)에 있었는데, (?) 하고 난 뒤에 배다른 동생이 하나 생겼는 모양이지. 옛날에. 그래가지고…. 이걸 小説 아니라 뭐에라도 적을라 하면 참 ..”

처음엔 왜관에 계시다가, 92년도, 김영삼 대통령 때 위안부를 찾는 방송을 보았다고 했다.

“그 때, 배다른 남동생도 있고, 이걸 알면 안되는데 하면서 내가 모른체 하고 있다가…”

“김영삼이 그분이, 그런거 있는 사람은 일체 전부 글 써서 바치라고, 신고하라고, 그런 경험 있는 사람은 바쳐가지고 하라고, (해서). 正直に(솔직히) 나는 대구사람이니, 붙들려가 가지고 한게 아니라… 대구 가서 人事紹介所.. 거기 가서 (네 지난번에 말씀해주셨죠) 그런 얘기 했던게 그게..”

“그때는 민사무소 군청, 그런데서 찌라시, 광고, 광고해가지고 여기에 수원서 어디로 어디로 해가지고 들어오면 된다 하는, 그런.. 찌라시(전단을) 뿌렸으니까 그걸 보고 왔던 거지.”

할머니의 인생 역시 `소설`처럼 기구하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랐다가 직업소개소를 찾은 어린 소녀. 친구도 친척도 없는 없는 일본에서 오래 살다가 노년이 되어 귀국한 한 여성.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천애고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배춘희 할머니가 초기에 목소리를 낸 건, 그런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침묵/소신>

(제가 궁금했던게, 왜 할머니 얘기를 듣는 사람이 없었나예요. 다른 할머니 얘기들은 다 책이 되어 나와 있거든요. 그런데 왜 할머니 얘기는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나 싶었어요.)

“아니 여기도 대강대강은 하지만, 그 사람들이 뭐 써놓은거 보면, 아이고.. どこまで 뭔지 どこまで (어디까지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잖아요. 그치만 소설 쓰는 사람들이야 잘 쓰겠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에도 못 담을 거라고 했던 배 할머니는, 이번에는 ‘소설’이라는 단어로 다른 분의 증언에 대해 강한 위화감을 표하셨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소설`에 대한 두가지 이해 (일반인이 겪거나 느끼지 못하는 파란만장한 ‘경험’. 혹은 그 반대 의미로서의 ‘허구’)를 배할머니 역시 갖고 계셨다.

사실 할머니들의 경험은 무거운 경험이지만 자신과 주변인의 체험에 한정된다. 그러니 배할머니가 보지 못한 사실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배할머니의 위화감을 이해했다. 위안부 문제와 거의 같은 세월 함께 했던 배할머니의 의문에, 오랜 세월 함께 하고 운동에 관여해 온 분들이 언젠가 그 위화감에 대해 ‘응답’해 주기를 바라고 싶다.

(중략)

(할머니 말씀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 얘기를 안들었나 싶어서 그래요. 할머니가 얘기하기 싫었던 거예요? )

(중략)

“연구자들은 오면, 또 나한테 특별히 와서 묻는 사람은 없지만은, 여기 윗사람, 또 그리고 다시 오는 할매들도 와가지고 노망든 할매들도 있고, 아파 누운 할매들도 있고, 뭘 조금 알다가 말다가 하는 머리가 좀 치매끼가 있는 이런 할머니들도 있고.. 조금 안다 하는 젊은애한테는 뭐, わけ고(말이고) 지랄이고 하기가 싫어. 全然 저거부터 저거.. 막 또 엉터리겠지 또 勝手に(멋대로) 얘기를? 는데, 내가 뭐 싫어도 니 그거 역사를 알아야지 알아야지… 말 할 것도 없고..

배할머니가 말하는 `조금 안다 하는 젊은 애`란 누구였을까. 아무튼 배할머니는 그를 향해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여기셨던 듯 하다. 구술 채록자가 `정해진 대답`을 기대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배할머니의 이야기가 정리된 형태로 남겨지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듯 했다.
다른 할머니들의 건강강태에 대한 배할머니의 말씀은 자신의 건강과 엘리트의식이 만든 것일 수 있다. 진실은 나눔의 집 사람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꼭 반년 후 나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아홉분의 이름으로 된 고발장을 받게 된다.

(중략)

“군대한테 붙들려갔다 해놓고 또 나중에 보면 뭐, 군인이 막 뭐 열세살 먹은 앨 죽였다 안죽였다 뭐. 그러면 난 뭐 내가 안 들은 얘긴 들을 필요도 없고. 뭐든지 이건 確かだ(분명하다)하는 그런 얘기같으면 몰라, 그런 얘기같으면(?)残すか知らんけど、(남겨질 지 모르지만) 이런 얘기 들으면, 말이 안되는데 싶으면, 난 말 안한다고.”

(아 그래서 말을 안하셨구나. 다른 할머님들 얘기가 좀 할머니 얘기하고 다른것 같아요.)

할머니의 소신을 엿볼 수 잇는 대목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는 일 자체보다, 할머니에겐 진실이 중요했다.

“아 뭐 그 사람들도 개인(대인?)으로는 말 안하지. 딴 사람들이 오면 말 할런지는 몰라도, 할매들… 뭐 그런것도 잘…”

(그러셨구나.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주셔서.)

“거긴 뭐 偶然に(우연히) 일본말도 알고, 내가 할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偶然に 참 이래 말 하고 싶다 하는 그런…”

(저번에도 우연히 테이블에 앉았는데 할머님이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주셔서 정말 놀라고 기쁘고 그랬어요.)

“내가 일본하고 親戚でもないし(친척도 아니고), 일본에 뭐 特別な(특별한), 뭐 날 따라 와 가지고 이리해 주고 저리해 주고 한 것도 없고, 난 돈 받은 일도 없고..

난 정당하니, 난 그야말로 부처님을 믿어서 그런지, 정정당당하게, 지 속만 알고 있지. 여기있는 사람은 가끔 물어보면 직접은 안들었지만, OOO는 뭐, 말만 하면 막 전부 ~부터 죽였다 ~부터 죽였다, 뭐 죽여도 소문은 언제든지 그 후에 뭐 몇달 후에라도 소문 나는게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더라 하면 소문나는데, 나는 뭐 소문 들은 일이 없는데 뭐,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가지고 해야 돼? 뭐 어째. 사람은, 短い命(짦은 인생) 아니가, 산다 해도. 잠깐 이 세상에 왔다가 가야 될 사람들인데 뭐할라고 거짓말을 하고 없는 말을 만들고 뭐 하고. 그런 일 절대로없다고. (중략)”

배 할머니의 소신은 불교도인데서 온 듯 하다. 배할머니는 다른 누구보다 자신에게 솔직하려 했고 그 상태를 `정정당당`하다고 표혔했다. `짧은 인생` `잠깐 왔다가 가는 `인생. 내가 배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실제로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좋아하게 된 건 이런 그 분의 성정과 가치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말하는 이유가 일본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하고 싶어하셨다. 물론 다른 할머니들에 대한 배할머니의 시각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는 제 3자가 섣불리 판단할 일은 아니다. 배할머니는 다른 분들은 원하는 `비싼 주사`를 마다 하고 덜 비싼 주사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 분들이 더 몸이 아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배할머니는, 건강과 생명에 대한 욕심이 적었다.

<일본인 방문자>

(중략)

( 어떤 할머니들은 증언하실 때, ‘일본 수상은 우리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어 그 사람들이… 그, 수상이 오면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우리 죽었나 안죽었나 보러왔나’ 막 이카는데 뭐.

그러니까 막 학생들이 나중에 보면 그걸 알고 막 울고간다고.

아이고 내가 막, 그러니까 (생략) 할머니들이 막 본대로 말하고 나온대로 … 나온대로 일본사람한테, 뭐 속이야 어찌됐든지 말았든지 오면은 그저 ようこそいらっしゃいました (잘 오셨습니다) 하고 인사나 하고, 일본도 참, 이런 일 저런 일 고생이 많죠 하고 빈 말이라도 그런 말은 안하고, ‘너그들 뭐하러 왔는데, 여기 뭐 할머니들 다 죽었나 안죽었나 망 보러왔나’ OOO이 그카면서 달려든다니까 손님한테.”

(학생들한테도요?)

“어어, 그렇게 막 한국말로 그렇게 눈깔을 부릅뜨니까는, 학생들이 이유를 모르니까 울고 있거든.”

(그래도 느낌으로 알겠죠.. 뭔가 싫어하고 그렇다는거를..)

“어, いいこと言わないね(좋은 소리 아니라는 건) 알지.”

(참 마음이 여린 아이들이 많은데 왜 그러셨을까…)

이상이 길었던 어느날의 통화를 간추려 본 내용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할머니의 ‘태도’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그저 ‘예의’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태도는 대상에 대한 감정과 이해, 그에 더해 성격과 가치관이 만든다. 사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할머니의 ‘태도’를 전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 대한 태도를 넘어 `세상`에 대한 태도와 평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 3장에서 쓸 예정이다.

(4) NHK問題について

二度目にハルモニに会いに行った時は、NHKソウル支局の記者たちと一緒だった。NHKの記者とは、韓国語版が発刊された時インタビューに応じたのがきっかけとなって知り合った。『帝国の慰安婦』に対する韓国メディアの反応が悪くなかった((盧 志炫) 朴裕河『帝国の慰安婦 植民地支配と記憶の闘い』)ことに対して興味を持つたようで、この本が韓国社会にどのように受け入れられるのかを記録しておきたいと言い、私の学生たちにもインタビューを行った。

そして、慰安婦問題をめぐる私の足取りを追いたいので、関係ある日程などあれば教えてほしいと頼まれた。

私は彼に協力した。『帝国の慰安婦』は日本を向けて書いた本でもあり、アジア女性基金解散以降、慰安婦問題にあまり興味を示さなくなっていた日本のが慰安婦問題に興味を示してくれているのだから、拒む理由はなかった。

また、その記者は、偶然にも私が留学中に在学していた大学の後輩でもあった。そのため、何回か会ううちに打ち解けた話もできるようになった。慰安婦問題解決にも役立ちたい、と言っていたので私は彼を信頼した。ぺ春姫さんと電話で二度目の訪問の約束をした時、記者にその日程を教えたのはそのためである。

 

そして前日、ナヌムの家の所長にも明日訪問する旨のメールを送った。返事がなかったので、翌日の朝に再度電話文字を送った。やはり返事はなかったが、いざ訪ねてみると安所長は事務所にいた。事務所を通してはじめて会えるシステムなので、ぺさんに会う約束をしたと告げたが、所長はNHK記者とともに訪ねてきた私を露骨に警戒した。そして、映像撮影はだめだと言った。

この日の訪問目的は、食堂で始めて会って少ししか話せなかったぺさんにあって時間をかけて話を聞くことにあった。なので所長の拒否は納得もいかず残念だったが、仕方がなかった。私たちは録画をあきらめ、ぺさんの部屋で話を聞いた。

 

私たちがぺさんの話を聞いている間、ナヌムの家の職員が何度も様子を見に来た。話の内容が気になったのだろうか。ともかくその日わかったのは、ナヌムの家の元慰安婦の方々には自分の意志とおりに外部の人に会える自由がないという事実だった。そうした状況はその後もっと繰り返し確認できた。

 

私を訴えた直後に、ナヌムの家の所長はこの日の訪問について、記者が 「朴さんがボランティアをやっているところを撮りたかった」と話したと、悪意のある嘘をフェイスブックに書いて私を非難した。また、関係者たちに同じ話メールで送りつけた。さらに、2015年12月、 起訴抗議んの記者会見を私が開いた直後にも、この話をメールでいろんな人に送りつけていた。しかも、その後、日本の支援者たちの集会でも同じことを話したと聞く。日本の北原みのりさんなどは所長の言葉を信じ、その話を SNSで拡散させた。

 

これまで私はこの件に関して積極的には解明しなかった。そうした話は一笑に付されるものと考えたし、時間も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しかし、日韓合意の後、これまで運動を担ってきた人たちによる攻撃はさらに強まり、いまや学者による曲解や非難までも周辺の人が確認せずに信じて拡散させるにいたっている。

私がこの文を書くことにしたのは、そうした内容のものが「証拠資料」という名前で刑事裁判部に出されているためである。自分を守るためでもあるが、友人たちの名誉を守るためでもある。

それにしても、こうしたことを書かないといけない状況を心から悲しく思う。あるいは、喜劇というべきだろうか。

 

以下の下線の引用は、ナヌムの家の所長が関係者たちに送ったメールからの抜粋である。

パクユハ氏、ナヌムの家の所長に電話し、挺対協反対行動に参加することを強要

 

2014年2月頃、なんの面識もないパクユハ教授がナヌムの家の所長に電話をかけ、所長もそろそろ挺対協に反対の声をあげる活動に参加せよと強制し、電話を切るときは親切に応答してくださってありがとうと言いました。そしてパクユハ氏が一度会おうというので、所長は毎週月曜と木曜以外は週末もナヌムの家で勤務しているので、そこで会おうと言いました。これに対してパクユハ氏は、外交部で発表をするため時間がないので、セジョン大学で会おうと言いました。しかし、所長の日程上、セジョン大学で会うことはなかった(以上、安信権利、2015年12月はじめのメール)

 

私の携帯に残っている文字テキストによると、ナヌムの家の所長に電話したのは2013年11月15日だった。 慰安婦関連の外交部の会議に呼ばれていたが(学者としての意見を述べただけで、「発表」ではなかった)、出席者名簿に所長の名前もあったので、彼がソウルに来る機会を使って会って、慰安婦問題をめぐる謝罪と補償についての考えを聞いてみたかった。そこで彼に電話したのである。そして、会議の前にでもソウルに来ることがあれば、会いたいと言った。私は世宗大学で会おうとも、挺対協に反対しようとも言っていない。もちろん 、「強制」したこともない。

 

最初の出会いの翌日、私はともかくも当惑させたことへの誤りの言葉とともに、「私も解決方法を模索しているので出来れば本を読んでほしい。その後、また会いましょう。必要であれば本を送ります」と電話メールを送った。彼はこのとき私に「忙しい中、ナヌムの家を訪ねてくれたことに感謝します。本は自分で買います」との返事をくれた。

 

ということは、彼が私を敵対視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必ずしもこの訪問では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既に書いたこともあるが、安所長が私を訴えた背景には、ぺさんと親しく交流したこと、そしてそのぺさんを含む元慰安婦の方々数人の声をシンポジウムを通して世に送り出したことがある。

さらに所長は、多くの人にばらまいたメールで次のようにも書いていた。

 

パクユハ氏、ナヌムの家の訪問申請やハルモニたちの許可もなくNHK-TVの撮影を試みる

 

パクユハ氏がナヌムの家に訪問し所長と初めて会った時、事前に「ナヌムの家」やハルモニたちに知らせたり許可を得ることなく、一方的に日本NHKの記者を連れてきました。そしてNHK-TVの記者は、ハルモニたちとパクユハ氏が交流している姿を撮影したいと言いました。所長が、ハルモニたちに事前に同意をしてもら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何事だ、と問いただすと、パクユハ氏は謝りもせずに「ナヌムの家」は誰もが撮影するところではないかと言いました。 NHK-TVの記者は、所長に、パクユハ氏がボランティア活動をしている姿を撮りたいと言ってきました。そこで所長が「日本軍慰安婦被害者」ハルモニたちのためにパクユハ氏がボランティアをしたことなどないのに一体何を撮るのか、と聞き返しました。そして撮影は不許可となりました。


すでに書いたように、私はこのときぺさんと前もって約束をしている。元慰安婦の方に会いたがっているNHK記者がいるのでよかったら一緒に行く、と事前に了解をとってもいる。撮影するとすれば対象は私ではなくぺさんだったし、日本に向けての撮影なのだから当然のことだ。 「朴裕河さんがボランティア活動をする姿を撮りたい」と記者が言ったというのは、所長の嘘でしかない 。

ともあれ、わたしたちはその日、一時間ほどぺさんの話を聞いた。


ハフィントン・ポストのリンク

(4) NHK문제에 대해

할머니를 두번째 만나러 갔을 때 나는 NHK 서울지국 기자들과 같이 갔다. NHK기자는, 책이 나온 이후 어느 날 연락이 와서 인터뷰에 응한 것이 인연이 되어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한국언론이 긍정적인 것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이 어떤 식으로 한국사회에 받아들여지는지 기록해 두고 싶다고 하면서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관련된 일에 관한 나의 행적을 가능한 한 기록하고 싶으니 관련된 행보를 알려 달라고 했었다. 나는 그에게 협조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을 향해 쓴 책이기도 했고, 아시아여성기금 해산 이후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일본의 국영방송이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갖는 일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 기자는 마침 내가 다닌 대학을 나온 후배이기도 해서 여러번 만나는 사이에 친밀감도 생겼다. 위안부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의 그런 마음을 신뢰했다. 그래서 어느날, 배춘희 할머니와 전화 후, 찾아가기로 약속이 잡혔을 때, 그에게 나의 일정을 알렸다.

그리고 전 날, 나눔의집 소장에게도 내일 방문하겠노라고 문자를 보냈다. 대답이 없어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그는 그 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NHK기자와 함께 찾아온 나를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그리고 영상촬영은 안된다고 못박았다. 그 날의 방문 목적은 식당에서 잠시 대화 나누었던 배춘희 할머니를 개인적으로 만나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는 일이어서 많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배춘희 할머니 영상녹화를 단념하고 할머니 방에서 그냥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했는지, 나눔의 집 직원이 여러 번 동정을 살피러 왔다. 할머니에게는 당신의 뜻대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없어 보였다.

고발 직후 나눔의 집 소장은 이 날의 방문에 대해 내가 마치 ‘봉사활동을 하는 장면’을 찍고 싶어 했다는 식의 악의적인 거짓말을 페이스북에 썼다. 이후에도 관계자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메일로 보냈다고 들었다. 2015년 12월, 내가 기소당하고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퍼뜨렸다. 급기야는 더 나중에 일본인 지원자들을 상대로 한 모임에서까지 같은 말을 했다. 일본의 지원자들 중에는 그 말을 믿고 소장의 말을 SNS를 통해 확산시킨 이들도 있다.

그동안 소극적인 해명 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제 다시 명확히 해명해 둔다. 이탤릭체는 나눔의 집 소장의 메일이 살포한 메일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박유하 씨 나눔의 집 OOO 소장에게 전화를 하여 정대협 반대 행동에 동참 강요

2014년 2월경 일면식도 없는 박유하 교수가 나눔의집 OOO 소장에게 전화를 하여, 소장님도 이제는 정대협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활동에 동참하자고 강요하였고, 전화를 끝내면서,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 주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유하씨가 한번 만나자고 이야기 하기에, OOO 소장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만 제외하고 주말에도 나눔의 집에서 근무를 하니, 나눔의 집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이에 박유하씨는 외교부에서 발표를 하는데, 시간상 나눔의 집을 갈수 없어, 세종대학교에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OOO 소장의 일정상 세종대학교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이상, 안신권. 2015년 12월 메일)

남아 있는 핸드폰 문자에 의거하자면 내가 나눔의 집 소장에게 처음 전화한 건 2013년 11월 15일이었다. 나는 위안부관련 외교부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고(나는 한 학자로서 의견을 말했을 뿐 `발표`하지 않았다), 참석자 명단에 소장의 이름이 보이기에 서울에 올 때 만날 수 있으면 만나서 사죄와 보상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것이 그에게 전화한 이유다. 그리고 회의 이전에 서울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 했다. 나는 세종대에서 만나자고 한 적도, 정대협에 반대하자는 말도 한 적이 없다. 당연히 `강요`한 적도 없다.

11월30일, 첫 방문 날에도 미리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사무국장을 만나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말, 12월 7일에 ‘오후에 방문하겠다’고 보낸 문자가 내겐 아직 남아있다. 이 날이, 위에 적은 나눔의 집 두 번째 방문이자 배춘희 할머니와의 두 번째 만남 날이기도 했다. 그 이외 이야기는 일체 한 적이 없다.

다음날 나는, 불편하게 만든 데 대한 사과 말과, ‘나도 해결방법을 모색중이니 가능하면 책을 읽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만나자, 필요하면 책을 보내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는 내게 ‘바쁘신데도 나눔의 집을 방문해 주어 감사하다, 책은 직접 구입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니 그가 나에게 적대적으로 변한 원인이 꼭 이 방문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미 여러 번 쓴 적이 있지만 그가 나를 고발한 이유는 배춘희할머니와 긴밀하게 교류하게 된 일, 그리고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심포지엄을 통해 세상에 내보낸 일에 있다. 나눔의 집 소장은 이후 NHK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다.

박유하 씨 나눔의 집 방문 신청이나 할머님들 허락도 없이 NHK-TV 촬영 시도

박유하씨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OOO 소장을 처음 만났을 때, 사전에 <나눔의 집 >이나 할머님들에게 통보나 허락 없이, 일방적으로 일본 NHK-TV 방송을 대동했습니다. 그리고, NHK-TV 기자는 할머님들과 박유하씨가 만나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OOO 소장이 할머님들한테 사전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라고 했더니. 박유하씨가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나눔의 집 >은 누구나 촬영하는 곳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후 NHK-TV 기자가 OOO 소장에게 박유하씨 자원봉사활동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OOO 소장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 위해 박유하씨가 봉사를 한 적이 없는데, 뭐를 촬영하죠.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촬영은 불허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배춘희 할머니와 약속을 하고 갔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NHK기자가 있으니 함께 갈 거라는 이야기도 할머니께 미리 말씀 드렸다. 촬영대상은 내가 아니라 할머니였고, 내가 ‘자원봉사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NHK기자가 말했다는 것은 소장의 거짓말이다.

우리는 그날 한시간 여 동안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Park Yuha and Takeshi Nakajima talk on ‘Comfort Women’ issue

Park Yuha (Professor of Sejong University; Author of The Empire’s Comfort Women) x Takeshi Nakajima (Editorial Board Member)

The Empire’s Comfort Women, authored by Professor Park Yuha of Sejong University, South Korea, has been at the epicenter of a long-running controversy among scholars in Japan and South Korea. Nine former Korean comfort women filed a libel suit against Professor Park. Last November, Professor Park was indicted without detention.  Fifty-four scholars based i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issued a public protest against this legal action by the South Korean authorities. In the meantime, some scholars reacted against this public protest. Professor Takeshi Nakajima, a member of this journal’s editorial board, was among the fifty-four who voiced their objection to Professor Park’s indictment. He interviewed Professor Park last February during her visit to Japan. What is at the core of the public debate over The Empire’s Comfort Women?

Nakajima: I first became familiar with Professor Park’s work when your 2006 book, ­Towards Reconciliation, came out. I then heard that your subsequent book, The Empire’s Comfort Women, was sparking an acrimonious debate in South Korea. I made a point of reading the book’s Japanese translation as soon as it became available.

I see this book and its analytical framework to be driven by a series of questions formulated by Subaltern Studies. This scholarly framework emerged mainly in India in the 1980s. It interrogates the subjectivities of the oppressed individuals and groups. The Empire’s Comfort Women foregrounds the multifaceted subjectivities of Korean comfort women and lays bare the violence inherent in the “Empire” that condemned these women to these horrendous historical circumstances. Some have charged that the book is an apologia for Japanese imperialism, but nothing can be further from the truth. The book, as I see it, is a piercing indictment of Japanese imperialism.

Park: That’s exactly the way I problematized things. Some critics took issue with the title of the book itself.  What I meant by The Empire’s Comfort Women is that these were the women forcibly mobilized for the empire. Secondarily, the title also refers to the ways in which these women were forced to cooperate with the empire. I’ve been often asked: “which is your more central point?” I think that such a question – or a way of positing such a binary upon which the question is premised – resulted from the fact that the person who asks it remains captivated by a conventional conceptual framework: he or she can not abide the ambivalence and impermanence of comfort women’s positionalities and subjectivities.

Patriotism as a Fallout of Over-adaptation

Nakajima: One of the most important problems you raised in the book is the question as to how to define the positionality of Korean colonial subjects who acted as brokers of the comfort women system. They were complicit in the forcible transport of these women. At the same time, though, they had their own livelihood to worry about. They found it necessary to do what their Japanese colonial masters dictated. On the other hand, some of the comfort women began to hold a sense of pride as handmaidens of the Japanese Imperial Army, condemned as they were to the most hopeless of life circumstances. What you are arguing here is the polar opposite of those Japanese right-wing pundits who argue that these Korean comfort women somehow benefited from their lot. Your critics got this totally wrong: they are falsely accusing you of agreeing with those Japanese right-wingers. Far from it.

I studied anthropology and went into history later. In that process I became aware of the existence of myriad individuals whose stories fell through the cracks between the ideological extremes. This awareness informed my book、Nakamurayano Bosu (Subhas Chandra Bose and the Nakamura Company). Bose sought to use Japanese military might as a way to liberate Asia and India at the same time he was extremely critical of Japanese imperialism.  As such, he can not be defined in the conventional rightist-leftist binary.

The same thing can be said about the so-called Korean collaborationists of Japanese imperialism. For example, Lee Kwang-su did not pander to Japan.  He was a very harsh critic of Japan. In the 1930s, his position began to shift. What changed? Well, the Japanese state articulated the theory of universal subjecthood under Japanese imperial rule. Lee’s rhetorical strategy was to turn this theory on its head to argue that if all subjects were equal under Japanese imperial rule, then Korean should be treated equally as Japanese. His was a shrewd rhetorical acrobat using the Japanese imperial theory for his own end. I believe it’s important to unpack Lee’s complex subjectivity by taking stock of his ideological strategy.

Park: A book entitled The Diary of A Manager of the Japanese Comfort Station was published in South Korean in 2013. This book portrays a Korean manager of a comfort station who internalized the mindset of a Japanese imperial subject. On page 321 of the book, the man’s diary entry for New Year’s Day, 1944, reads: “the majestic power of the emperor should emanate to all directions” and “I prayed for the unending valor of the Japanese Imperial Army.” This man was born in 1905.  As such, he lived through Korea’s colonial period. To me, it’s not surprising for Koreans in this generation to harbor what may ironically be called “patriotism” under the Japanese imperial regime. These people were mobilized under the system of total war mobilization that began in the late 1930s. My intent was to emphasize the complexities of their subjectivities. I also pointed out in my book what was wrong with the thinking and argument of Japanese right-wing pundits.

Not supporting the Right Wing

Nakajima: Japanese right-wingers take your argument about the semi-familial sense of bonding some Korean comfort women shared with Japanese soldiers to mean that these Korean women benefited from their circumstances. Nothing is more brutal than the despair these women must have lived in.

Your book also talks about how Japanese soldiers, torn apart from their own families back home, began  to identify with Korean comfort women as their virtual family. These men lived next to death. They were not allowed to cry. Korean comfort women were the only ones they were free to expose their vulnerabilities to. The Korean women, on their part, tried to embrace these soldiers’ despair and hardship. Some of these soldiers were drafted against their will – just as the Korean comfort women were recruited against theirs. And yet, what these Japanese imperial soldiers did vis-à-vis the Korean comfort women remained within the structure of imperial violence against its victims.

Park:  I believe it is important to remind ourselves that complex and multiple emotions coexisted within an individual Korean comfort woman, and this multiplicity comes from the multiplicity of the experiences she had in terms of time and space. Even within the same location and timeframe, Korean comfort women’s experiences were diverse because their ages and Japanese language proficiencies were diverse.

What I wanted to portray in this book was “people who do not fit comfortably into the vessel of a national story.” Whether heartfelt or superficial, we identify with a national story. In reality, however, there are a whole range of experiences and emotions that can’t be neatly contained within such a national story. Facing that fact, those situated in the center of a national story try to hide it or penalize it.  Needless to say, the question of gender surfaces in that process too.

Nakajima: I think it is an ultimate travesty to interpret your argument as an apologia for the Japanese right-wingers or giving a pass for Japanese imperialism. Many Japanese young men died in kamikaze missions. Their story is centrally controlled by the Japanese right wing. They say these young men sacrificed their lives for the nation and the emperor. However, there were many former kamikaze pilots whose experience didn’t comport with this orthodoxy. Some deserted because they did not want to die. There were many different subjectivities. Bracketing these diverse subjectivities into a single story is tantamount to erasing the diversity and complexity of their experiences. The Left should not make the same mistake of violent erasure.

Park: Only a few people were actively engaged in the problem of comfort women, but the Korean mass media became deeply invested in the question and polarized national opinion about this question. On the surface of it, it may appear that the fault line runs along national boundaries (Japan vs. South Korea), but I think it is actually divided between the Left and the Right. We all tend to form our opinions according to our ideological positions.  As a result, people who seek to think free from such ideological shackles have tended to have only limited room to maneuver. That’s why I wanted to listen to the voices of these unsung people and stake out an alternative space for such historical voices.

What I meant by “Empire” goes beyond nation or ethnicity. It subsumes within itself the problems of subjugation, exclusion and discrimination perpetrated around the categories of gender and class. In other words, the problem of comfort women has been generally defined as a problem regarding Japan as a nation, and in that sense, it was understood as a political problem. In this way of thinking, one misses the problems of economy, the factor that compelled people to move in the first place. Many people migrated within and outside the empire as they internalized the economic aspirations of the state. The conventional framework failed to heed these people.

Who actually reaped economic benefits from exploiting other people? I also wanted to be self-reflective by acknowledging the fact that some Koreans were also complicit in that exploitation. Of course, many of the managers of the comfort stations were Japanese and I did write about them in my book also.

Writing in spite of binary

Nakajima:  Activists supporting the former Korean comfort women are hard put to reconcile their idea of what the victims should be like with your portrayal of the Korean comfort women, some of whom even bonded with Japanese soldiers. On the other hand, your portrayal does not comport with the image of prostitutes, one bandied about by the Japanese Right wingers either. I think that your book tried to get to the core of the structure of violence inherent in the Empire by exposing these multiple fissures emanating from the false binary.

Park: Initially, many of my critics in South Korea were male scholars. Their position was that one should never, ever, foreground things that might end up exonerating Japan. But I wanted to ask and ask again what they were exonerating, suppressing and obscuring.  There is no gainsaying that the Korean people were ruled and victimized by the Japanese and the Japanese state. But just acknowledging that fact erases from view structures of violence not reducible to nation and ethnicity.

Nakajima: I think that’s exactly the question of representation that Subaltern Studies problematized at the tail end of the 1980s and in the 1990s. What many Subaltern scholars, such as Gayatri Spivak, have criticized is the power and violence of attempts to create and represent “the right” Subaltern subjectivity as orthodoxy.

Park: You are right. I was often criticized for “not being an expert” or “not being an activist.” Some held that since I was not the victim myself I had no business proposing reconciliation. This idea of anointing only one “stakeholder” – the idea that dies hard – has ended up excluding parties that do not fit the anointed model. At the same time, this kind of argument has tended to obscure the fact that people who deign to speak for the victims are similarly stakeholders. The violence I see in the situation lies in the fact that these multiple elisions have not been heeded.

Nakajima: I, too, was criticized as a “non-expert” after I signed on to the public protest against your indictment without detention. I consider myself a historian, broadly speaking – one who studies the history of ideas and the history of the Showa period. If we should argue that, in order to be an “expert” in the Korean comfort women question, one must be able to read Korean sources or be scholars specializing in comfort women, then many of us are even barred from participating in the discussion about comfort women. Once you begin suppressing discussion among “non-experts,” it becomes impossible to explore a question from multiple angles.

Subjectivity elided

Nakajima: Your book also highlights former Korean comfort women who felt alienated from the House of Sharing set up by supporters. I think they felt that way because once the orthodoxy about Korean comfort women becomes entrenched, their emotions that don’t quite fit into that mold will be inevitably displaced.

Of course it is important to value the work of those women who criticized from inside the House of Sharing what Japan did to them. It’s not a question of whose position is more valid.  We must acknowledge the diversity of opinions and positions among former comfort women.  At the same time, we must capture the entirety of the historical experiences of former comfort women who have all too often been tossed around in the politics and polemics of the entire problem. Unless we can do that, we can’t even begin to make a first step towards the problem’s resolution.

Park: This former comfort woman was not comfortable with the general direction of the relief movement and the understanding about comfort women. Partly because she was bereft of family, she often gave me a call to chat. She shared with me her predicament, such as, if she fails to criticize Japan, she gets accused of being a Japanophile or a “hypocritic” comfort woman. She also wondered if she took the initiative by forgiving Japan, Japan might respond in kind, whatever that may be. I talked about this woman’s views at a symposium held in South Korea in April 2014 (before I was indicted). At this forum I also talked about former comfort women who expressed a wish to receive Japanese atonement money without going through the Korean supporters’ group. A month and a half later, I was sued.

Nakajima: At the core of the problem is these discords and ambivalence of views. But when it comes to the problem of comfort women, these factors go out the window, unfortunately. You shined a light on this reality and called for an honest public discussion. I believe that what you have problematized is an important question informed by Subaltern Studies.

February 5, 2016  at Osaka

Translated by Sayuri Shimizu

Japanese Original Link 対談片面

[형사1심] 제2회 공판기

박유하

2016 / 9/ 20

두번째 형사공판이 열렸다.

지난 번에 마치지 못한 25개 항목을 둘러싼 공방. 그런데 사실 원고측이 문제삼는 ‘동지적관계’라는 단어는 지적된 곳 이외에도 여러번 나온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학자의 글을 인용한 부분마저 마치 내가 말한 것처럼 지적된 부분이 있다. 웃지 못할 아이러니. 고발자체도 그렇지만 이러한 부정확, 그에 따른 소모를, 나는 2016년 현재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현상으로 생각한다. 나눔의 집의 고발, 검찰기소, 그리고 학자들의 침묵과 가담이 보여준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1월에 나온 민사재판판결문은 여러 항목에 관해 ‘의견표명’이므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하고 있었다. ‘의견표명’이란 ‘사실적시’가 아니라는 뜻이고, 형법상 명예훼손은 ‘사실을 적시’해야만 해당된다. 그런 기준에 따라 민사판결은, 원고측이 지적한 항목 중 많은 부분에 대해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의견표명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사실이 나는 착잡했다.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그저 도망치려는 변명으로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모든 학문은 사실 늘 가설일 뿐이다.

가설(고찰)이 옳은 지 여부(진실인지 여부)를 판단하려면 시간-세월이 필요하다. 물론 동시대/공간 안에서도 날카롭게 판단할 수 있는 이들은 늘 존재한다.

나의 책은 과거 20년 이상 한국사회에서 정착된 ‘상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책이다. 따라서 나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에서 생각한 ‘나의 진실’일 뿐이다. 공감해 주는 이들이 있을 경우 그 진실 공간이 넓어질 뿐.

검찰은 ‘가설’로서의 학술서에 대해  ‘사실’을 적시했다는 전제를 들이대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설정한 사실’과 다른 ‘사실’을 내가 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 이 역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근본적인 모순, 근본적인 뒤틀림. 학술서를 둘러싼 법정이란 그런 공간이었다.

판사가 제시한 다섯 개의 규칙에 기준해 봤을 때 나의 책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검사가 애써 내가 ‘사실’을 말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할 터이다. 동시에, 정해진 규정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무죄’라는 법정논리자체가,  내겐 또 하나의 근본적인 모순으로 느껴진다. 법은, 국가를 닮았다.

이하의 공방 역시 실제 이루어진 내용 뿐 아니라 미처 발화될 기회를 얻지  않은 생각도 포함되어 있다. 추가로 서면제출될 내용이기도 하니 실제공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속기록이 공개되겠으나 당일 메모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라 순서 등이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제1회 공판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제기된 검찰의 목소리는 대부분 이미 제기된, 학자를 비롯한 비판자들의 의견이었음을 밝혀 둔다.  그러니까 이 글은, 비판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응답에 앞선, 간략버전 글이기도 하다.

——

검사
박유하의 책은 위안부할머니를 매춘부로 취급했다. 그러니 ‘사실 적시’다. ‘사실’을 쓴 책이다

답변
나는 위안부를 ‘그냥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그들의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했다. 그건 말하자면 위안부의 ‘재의미화’ 작업이다. 그리고 그건 기존 지원단체가 주장한 ‘성노예’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똑같지 않다. 원래 ‘성노예’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운동과정에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말하겠다.
검사는 가라유키나 일본인위안부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가라유키 역시 대부분 속거나 팔려서 ‘매춘부’가 되었다. 1970년대초에 거장 이마무라쇼헤이 감독은 가라유키에 관한 다큐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https://youtu.be/NQgBqzuRU3k

조선과 일본인 위안부사이에 차이와 차별은 있었다. 오히려 그 차이를 보기 위해서, 나는 이들이 ‘여성’으로서 겪은 체험은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임을 말하려 했다. 그 차이를 부정하고 단순화시키는 것은 사태를 정확히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욕망이 시키는 일이다.

한반도에 살다가 나간 일본인 여성들도 많았다. 그것만 참조해도, 물리적 강제연행주장의 문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일부 학자 주장대로 식민지에서만 사기모집이 쉽게 가능하도록 했던 법체계가 존재했다면, 조선에서 떠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검사
박유하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매춘의 틀’ 에 있었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라는 말을 다수 사용했다. 박유하의 기술이 의견표명이 아니라 ‘사실’, ‘본질’을 말한 것이라는 증거다.

답변
내가 말한 ‘매춘의 틀’이란 본질이 아니라 형식을 지적한 말이다. ‘틀’ 혹은 ‘기본적으로’라는 단어 역시 본질이 아니라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검사
아편사용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는 ‘동지적관계’임을 지적한 것이고 사실이 아니다.

답변
아편사용문제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위안부문제를 다루는 애니메이션이 창작과정에서 사실과 다르게 왜곡했기 때문에 그러한 왜곡욕망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아편을 사용하면 ‘세상이 내 세상’이라고는 말 한 위안부의 증언을 인용했을 뿐이고, 그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방편임을 나는 강조했다. 그런데도 그러한 사실이나 느낌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것은, 성과는 관계없는 ‘순수한 소녀’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소녀의 틀을 넘어선 위안부일경우 내치도록 만들 폭력적인 발상이다.이는 글자그대로의 매춘부는 배제하고 위안부담론을 구성해온 20여년의 세월이 만드는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인식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위안부의 감정을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위안부 차별이다. 검찰의 생각은, 자신들의 주장을 지키기 위해 나의 ‘생각’을 처벌하고자 하는 원고측 생각만을 신뢰한 결과로 만들어진 생각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관계는 설사 동등하지 않다 해도 남녀관계일 뿐 조선과 일본이 동지라는 의미의 “동지적관계”와 무관하다.

검사
‘창녀’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사실적시이고 명예훼손이다. 심지어 소설(따위)를 사용한다. (그러니 허위의 책이다)

답변
위안부가 공창제의 연장선상의 제도였음은 야마시타영애, 송연옥 등 여성학자는 물론 그 이외에도 이미 여러 학자가 지적했다. 증거자료로도 제출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창녀’란 본문 안에 ‘조센삐’라고 말한 일본군인이 사용한 단어를 알기쉬운 말로 바꾸어 인용한 것이고 일본군에게 ‘조센삐’란 ‘창녀’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그 부분을 들어 박유하자신이 그렇게 비난한 것처럼 말하는 일은 기초적 독해력 부족의 결과다.

검사
일본이 불법행위를 했음에도 박유하는 법적배상을 인정하지않는다. 자신의 해결방법을 주장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답변
나는 이 문제를 우선 여성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 식민지지배가 야기한 문제로 보았다. 그 때문에 1910년, 1965년, 그리고 1990년대를 고찰하고 이 문제에서 한일양국이 어떤 점을 봐야 접접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나의 생각을 말했다. 그건 나의 생각일 뿐이고 설사 문제가 있다 하더라고 명예훼손과는 무관하다.
또한 이른바 불법이라는 주장은 1990년대에 북한의 법학자가 말한 주장에 의존한 것이다. 그런 판단은 ‘국가가 강제로 끌고 갔다’, ‘학살 했다’는 이해에 근거한다. 그러한 전제자체가 옳지만은 않다는 것이 판명되었음에도 20년이 지나도록 위안부문제에서 기존 담론의 주축이 된 학자들이 여전히 이 주장에 의거하고 있다. 그것은 태만이자 커다란 기만이 아닐까.

검사
강제연행이 없었다고 하는데, 문서가 없다고 해서 납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는가? 북한으로 납치된 일본인의 경우 문서가 없으니 강제연행이 아닌가?

답변
(당연한 일이지만 검사는 위안부문제 관련 기존 담론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었다. 동시에 너무나도 피상적인 담론을 원용하고 있었다. 정확히 보면 다른 이야기를 가져오고, 박유하가 옳지 못한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강조해 듣는 이들이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도록 유도했다.)

나는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강제연행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 더구나 식민지화된 조선반도에서는 ‘공식적으로’ 없었다고 했을 뿐이다. ‘공식적으로’의 의미는 동원을 요청했다해도 그것이 곧 납치나 유괴나 속임수를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본군은 업자의 계약서를 확인했고, 너무 어린 소녀가 왔을 때 되돌려 보낸 이야기가 위안부의 증언에 존재하고, 속아서 끌려 왔을 때 다른 직장에 취직시키도록 조치한 일도 있다. 처음에는 국가의 물리적 강제동원인것처럼 주장한 이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는 모집의뢰가 곧 강제동원인 것처럼 주장한다. 위선이자 기만이다. 결국 위안부에 관한 진실(역사)보다 ‘법적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 자신들의 생각(현재)을 더 우위에 둔 주장일 뿐이다.

검사
동지적관계라는 말은 모욕이다.

답변
책의 소제목에 ‘군수품으로서의 동지’라고 붙인 곳이 있다. 이 제목이 나의 의도를 말해 줄 것이다. 나는 ‘동지적 관계’라고 하는 말에 아주 낮은 차원의 의미만 부여했다, 다시 말해 당시 국적이 일본인이었다는 것을 환기시키려 한 단어이다. 전쟁상대국가였던 ‘적’의 위치가 아니었고 오히려 전쟁을 도울 것을 요구받은 존재였다는 말을 하기 위한 표현이다. 굳이 그 작업을 한 것은 ‘동지'(식민지화, 일선동조론, 내선일체)라는 관계 속에 존재하는 은밀한 차별과 국가의 국민동원에 따른 개인의 희생이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검사
위안부는 애국하지 않았다. 증거가 없다. 협력자가 아니다.

답변
당사자의 체험은 하나하나 귀중한 역사지만, 그것이 꼭 자신이 당한 일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학자가 하는 일은 수많은 사례를 보면서 말하자면 퍼즐을 맞춰가는 일이고, 그 퍼즐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을 때 보이는 것을 ‘구조’로서 설명한다. 따라서 위안부가 마음으로건 형식으로건 그것이 ‘애국’구조속의 일이었는지 여부는 어디까지나 분석자의 의견일 뿐이다. 실제로 긍정적으로 내면화했다고 한 사람이 있다고 한 들 그것이 삶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연애도 마찬가지, 실제로 장교와의 관계는 위안부로 하여금 ‘지옥보다 나은’ 공간으로의 진입을 말해 주는 것이었고 실제로 부하들에게 정중한 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을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나눔의 집 할머니중에도 ‘보국대’로 동원되었다고 말하거나 황국신민서사를 잘 외워 배급을 받았다고 말한 할머니가 있고 나는 그런 시대상과 정황을 ‘애국의 틀’로 표현했을 뿐이다. 또한 위안부를 ‘낭자군’으로 부르거나 위안소 이름을 ‘애국봉사관’이라고 붙여 당연시한 국가를 비판하기 위해 그런 단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것이 ‘강요된 애국’임을 말했다.

검사의 비난은 이러한 정황에 대한 무지 혹은 부정하고 싶은 의식이 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부정은 매춘에 대한 부정과 마찬가지로 위안부를 이중으로 배제하는 일이 된다. 나는 위안부할머니들이 당당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책을 썼다. 그런 구조 속에 있던 이들이 설사 단 한사람이라 할지라도.

검사
박유하는 소설을 사실처럼 사용한다.

답변
동시대 경험자의 소설에서의 역사적 기술은 때로 이른바 사료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문학연구자로서 이른바 사료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 텍스트를 사용했고, 실제로 작가의 실제체험과 가깝다는 사실이 확인된 이들의 작품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일본인들을 향해, 당신들의 조상도 이렇게 위안부문제의 비참을 기술했다고 말하기 위해 사용했다.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다.

그런데도 검찰은 그런문맥은 완전히 무시하고 단어만 가져와 박유하 자신이 그렇게 비난의 뜻을 섞어 말한 것처럼 말한다. 서울대 김윤식 교수도 소설은 ‘증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때로 소설은 입으로 말하지못하는 일(증언)을 말한다.
http://m.hani.co.kr/arti/culture/book/298376.html#cb

검사
소녀상을 모독했다

답변
소녀상에 대한 언급 부분은 위안부가 아니라 지원단체에 대한 비판부분이다. 그들의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왜곡되었는지 말하려 한 것이다. 따라서 명예훼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검사
박유하는 사죄보상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박유하가 ‘동지적 관계’를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답변
(이부분은 검사가 공부가 부족했던 것 같다. 민사재판에서 원고측은 이렇게 말했었다. ‘박유하는 자신의 해결방법을 관철하기 위해 (법적책임 부정, 징병자와 같은 피해자로 인정하라는 요구), 동지적관계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지원단체는 정말은 명예훼손인지 여부에 큰 관심이 없다. 그저 박유하가 생각한 위안부문제 이해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점, 그에 따라 해결방식이 다르다는 점, 그 방식에 대한 사회적관심에의 경계심을 억압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는 고발장과 이후의 의견서에 명확히 나타난다. 언젠가 가처분재판과 민사재판에서 어떤 공방이 오갔는지를 연구해 주는 이들이 나타난다면 밝혀질 것이다. 이 소송이 무엇을 위한 소송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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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공판을 포함하면 벌써 여덟번이나 형사법정에 섰다. 내겐 이 사태가,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사태”로 보인다. 우리는 아직 해방을 맞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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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fort women issue: A message to students in Western society

Comfort women issue: A message to students in Western society

Yuha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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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ng Japan, Korea, China, and other countries in Asia, there exists a big divergence in their understanding of the unfortunate history of the past. Therefore, there exists a deep rooted animosity among them as a consequence.

Between the people of (South) Korea and Japan especially, there exist a big difference in the perception of and the opinion on how to resolve the issue of the “comfort women” that existed during the time of the Asia Pacific War. Underlying the differences of the opinion are the exclusionist nationalism and the conflict between the left and the right.

The issue of the “comfort women” in the 1930s is commonly regarded as a problem created by the Japan of the 1930’s, but such an approach is overly simple because there are many other related issues that cannot be ignored. If the responsibility for an issue is over-simplified, it prevents us from seeing the responsibility of other actors. The consequence of this is that we cannot prevent the violence toward women that continues in other forms. The problem of comfort women should be seen as the problem of the women who were moved in accordance with the desire of the state to expand its power, and mobilised to serve men who were segregated.

What made the migration of women in such a large scale possible was the expansion of imperialism in the modern period when the big powers began to take advantage of the development of transportation. And the women who were mobilised as comfort women were the ones who, due to poverty, could not be protected by the community they belonged to.

Furthermore, there were numerous middle agents who worked to fill the demand created by the desire of the state and men. In other words, there existed private businesses that were benefitting economically by making use of the political and economic desire of the state as well as the sexual desire for domination among men. In addition to the men who visited the comfort stations (as customers), these business men used human body for economic interest. They betrayed Emanuel Kant’s principle that human beings should be treated as ends and not as means.

I could see that the tragic happenings that occurred nearly seventy years ago repeating again to the poor women in Korea today as well as many women in the less affluent countries. Nevertheless, the majority of Korean people continues to hold the view this problem as that of Japanese, thus foreign, men raping our, Korean, women.

However, this problem is more fundamentally that of the women who were sacrificed by the patriarchy as well as that of class exploitation of the lower class. Thus, the problem of Korean comfort women is that of mobilization of poor women in the colonized area. In order to resolve and prevent the problem of comfort women, we need to see the full picture of this kind of structure.

In this sense, the problem of the comfort women is not only that of Japan, but also that of all ex-imperialist states, such as Britain, France, Netherlands, which had exploited local women by making colonies in order to expand the state power. The USA that even today has constructed military bases in many locations around the world, and maintains a setup in which local women serve American soldiers is also implicated in this problem. In other words, the comfort women problem is not simply about what happened due to the war, but an issue of the expansion of state power which includes the presence of military bases before the war.

The comfort women for the Japanese military were originally Japanese women. It was the colonisation that led to the recruitment of the Korean women. Therefor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mfort women and the soldiers in the system of the Empire where the role of the comfort women was to “comfort” the soldiers of the same country, strictly speaking, was not the same as that of the victims of rape in the context of wartime violence in the “conquered” area.

I saw the reason why the issue of the comfort women had not been resolved over 20 years as being due to the lack of clear understanding of this structure. And it was for this reason that I wrote the book, “the Comfort Women of the Empire: the Colonial Domination and the Battle for Memory”. This book was favourably received in both Korea and Japan when it first came out. However, some Koreans and Japanese reacted negatively. (Ironically) those who reacted most negatively were the activists and researcher of the comfort women issue who have worked long toward the resolution of the problem.
To them, my presentation of the problem seemed as dilution of the responsibility of Japan. Under this situation, one of the movement groups to support the comfort women conveyed their distorted interpretation of my book to the still remaining comfort women. They suggested incorrectly that my book defamed the comfort women and sued me for it, demanding a very large amount of compensation.

However, the issue of the comfort women is one in which sexual discrimination is mixed with class discrimination as well as ethnic one. Among these, the focus so far was only on the state responsibility. What I attempted to bring out (in my book) was the responsibility of those actors hidden behind the proper name “Japan”, i.e., the responsibility of the middle agents and the reminder of the responsibility of men who under the patriarchal system pushed the women out as sacrificial lamb and also treated them as means to release male (sexual) desire.

However, this way of seeing the comfort women issue is still not sufficiently understood in Korea. And as a result my book being incorrectly known as criticising the comfort women, I am being criticised nationwide after I was legally accused. Not only Korean nationalism, but also the Cold War framework that solidified after the collapse of the Empire also played a role in shaping the researchers and activists of the comfort women issue.

The reason why this issue was regarded for long as Japan’s problem was that the period for which Japan was engaged in war was long and the area covered was wide, and most of all, Japan had systematised the system of the comfort stations.

Because when the comfort women issue first surfaced, it was known only as being an issue of the “innocent girls forcefully taken”, the main steam researchers and activists just insisted on the forceful nature of the comfort women. However, the obsession with forcefulness or young girl excludes those women who “voluntarily” went to sacrifice themselves in the context of parental persuasion, or the those who were already involved in prostitution before they became comfort women. The effect of this position, by discriminating and excluding those who had the experience of prostitution is to join those who have argued that comfort women were simply prostitutes, thus there is no comfort women problem. However, the responsibility for the terrible experience can be pursued without emphasising the forcefulness of recruitment.

In spite of this, the fact they find my academic approach foreign is the reason also for my hardship. They have reacted negatively to the point that the main agent that did not protect the Korean women was the community that was Korea, also to the fact that someone raised an objection to the (their) mainstream approach to research and activism.

These negative reactions have led to strong personal criticism toward me. Their “academic” criticism moved on to “criminalisation” of my writing activity. At a time when my academic view was regarded as a “crime”, even the academics joined the accusation.

Nevertheless, rather than denigrating the comfort women, my book was written on their side. My book tried to stand on the side of the comfort women by guarding against the instrumentalization of women which continues even today. With the resolve that their honour must be kept, it tried to recreate the voice of the comfort women who had been ignored. However, neither the prosecutor nor the court in Korea was willing to listen to my counter argument.

In 2015, there was a court order to remove certain part of the book. To follow the court order, in the new edition of the book, the designated section removed. But there was an objection to the republication of the book even in the censured form. There was also a ruling of a civil case to pay compensation (to a number of the comfort women) to which I made an appeal. The criminal court case has also been in progress already fifth time.

The power block consisting of the activists and researchers who inherit the Korean nationalist movement blocked the sides of class-based and gender-based discriminations to be seen. For this reason, the extremists from both Korea and Japan stand in confrontation, and even other people from both countries stand in disharmony due to the exposure to partial information from two opposite sides.

Not only does this kind of attitude that buries the fact that the comfort women issue is in reality also very much that of social class and gender sustains the conflict in East Asia. The conflict is also acute enough realistically to lead to a crisis.
Therefore, there is a need for more people to be interested in this issue. I hope to see expression of interest especially from people who are interested in gender and colonialism issues. That is because only this kind of approach will lead the comfort women issue as well as other issue of conflict to harmony and reconciliation – and make the friendship and peace in East Asia 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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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ould like to thank Professor Chakrabati for allowing me this opportunity to offer my message. I hope our conversation continues in another opportunity.
Thank you.

 

  • Original transcript was written and sent to Professor Chakrabati in April 7th, 2016.
  • English translation by Sejin Park, September 24th, 2016

(3) ペ・チュンヒさんとの出会い

多くの学者が関係している挺対協も、私を告訴するつもりでいた。その考えが、本に対する反感によるものなのは確かだ。とはいえ、本そのものだけを原因として告訴を検討したという点では、ある意味で純粋だったと言えるかもしれない。

挺対協ではなくナヌムの家が、そして発刊直後ではなく10ヶ月も経ってから告訴に至った背景には、私とハルモニたちとの交流がある。そうした意味において、私が再びナヌムの家に行かなければ、告訴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だろう。また、その間に出会ったハルモニたちの声を社会に伝えるためのシンポジウムを翌年の春に開催しなければ、そしてそのシンポジウムについて日韓両国のメディアが好意的に注目することがなければ、告訴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はずだ。

この告訴は、そうした意味において、本そのものが問題となった告訴ではない。私に対する警戒心が、私を告訴させた 。

つまり、支援団体の考えと異なる考えを有するハルモニと私が出会ったことが、告訴の遠因となった。原告側が私を警戒し危険視したということは、告訴状のあらゆる箇所に現れている。支援団体は、彼らの主張と運動を私が妨害していると考えた。それだけではなく、ナヌムの家や挺対協に対する、一部のハルモニたちの不満を私が知ったことも、彼らが私を警戒したもう一つの理由だったのだろう。

だから、私はまず関係者たちに言いたい。私には関係者たちの長年にわたる苦労を貶めたい気持ちはない。長年続いた活動に 、ましてや多くの人が集まって決めていく行動に、間違いがないはずはない。だが、一つの方針を決めるために数多くの議論と悩みが存在したはずであり、(2016年9月4日に一橋大学で発表された山下英愛さんの発表資料、「日本軍「慰安婦」問題とオーラルヒストリー研究の・への挑戦」を読んで、私は活動家たちが証言集を作りながら、私が思った以上に思い悩んだことを知った )そうした苦悩と議論の時間に敬意を表したい。また、運動を成功させるのための、私のあずかり知らぬ努力と涙にも。

しかし、同時に、私を告訴したナヌムの家の嘘と暴力を、学者や運動家など関係者たちが2年以上放置してきたことに対して深く失望せざるをえない。検察が主導した調停委員会の調停過程において、私は、ナヌムの家に言われた、元慰安婦の方々への謝罪も念頭においていた。しかし同時に支援団体も私に謝罪してほしいと私は要請した。それは、こうした思いからである。告訴自体も納得できなかったが、告訴以上に、原告側による、「朴は、`慰安婦は自発的売春婦`と主張した」との枠組みのせいで私に浴びせられた、全国民的な非難と性暴力の欲望までも示していた罵倒を、女性の人権団体を標榜する支援団体が傍観し長い間沈黙してきたことが、私は長い間信じられなかった。

20年以上慰安婦問題に関わってきた人たちのうち誰も、私に対する告訴を取り下げるようにと声をあげた人はいない。そのことは、私自身のためにも悲しいが、こうした状況が昨今の韓国の非倫理的状況と無関係とは言えないことこそが私には悲しい。関係者たちはともすると政治家や経済人たちを非難するが、倫理的でないのは彼らだけではない。

ナヌムの家には、日本政府が90年代に謝罪と補償のために設立したアジア女性基金関係者でもあった日本人たちとともに赴いた。彼らは、日本政府の予算でハルモニたちを温泉に連れて行ったり、料理をご馳走したり、お小遣いを差し上げていた。そのために年に何回か韓国を訪問しているということだった。彼らと知り合ったのは日本で「和解のために」の日本語翻訳本が出てからである。

訪問の前日、ナヌムの家の所長に連絡すると、自分は所用で不在だが事務局長に会えばいいと言われた。そのため、私は初めて訪ねた日、謝罪と補償に関するナヌムの家の考えを事務局長に聞いた。そしてナヌムの家が挺対協とは異なる考えを持っていることを知った。彼らは、自分たちは当事者を中心に解決するつもりであり、「法的賠償」ではない、調停を引き出せる裁判をアメリカで始めると言った。そして、この裁判に賛成するという意味でハルモニたちの印鑑が押印された書類も見せてくれた。

そしてハルモニたちがいる建物に移動し、ホテルで出会ったユ・ヒナム ハルモニやほかの数人の方たちとしばらく話しあった。ハルモニたちが10人暮らしているということだったが、その場には全員はいなかった。体調が優れないため、と事務局員が説明した。

そして車に乗って食事の場へ移動した。ハルモニたちは寿司が好きだというので、わたしたちは日本料理店に向かった。そしてそれぞれいすに着いた時、偶然向かいに座った方が、後に深い交流をすることになるぺ・チュンヒさんだった。ペさんとは、食堂に行くまえにナヌムの家の居間で顔は合わせたが、話はしていなかった。

ぺさんが私たちと一緒に座ったのは偶然だったのだろうか。この頃は知らなかったが、ペさんは日本が好きだったので、最初から日本人のいる席に座ろうとしたのかもしれない。ともあれ 、ぺさんの彼女の隣に日本人が座ることになり、私たちは自然に日本語で話した。映像からもその姿を確認できるが、ぺ さんは時々周りの人たちを意識していた。

ぺさんは開口一番、興味深い話をされた。そこで、日本を許したいと仰った時、私は許可を得て携帯電話のカメラで録画を始めた。

私はこの日の映像を、翌年ぺさんが亡くなった直後に「ぺさんも国家賠償を求めていた」とナヌムの家の所長が話している 報道を見て、 フェイスブックに公開した。2014年6月10日のことだ。ぺさんに不利益があるかもと考えて、それまで公開しなかった映像である。

この映像の中でぺさんが語った話を、そのフェイスブックから転載しておく。

`この話が入ったら。。。だが、この話が入ったら、それこそ敵は百万、こっちは一人、そういうことになるわけ。`

ぺさんは、具体的な話の前に、自分の話がナヌムの家の他の人らに知られることを恐れた。長い年月を共にしてきた人たちを「敵」と言わせた心理は何だったのだろうか。それは必ずしも敵愾心から来た表現ではないはずだ。それはただ、自分の考えをあるがままに表現できなかったことに対する絶対的な孤独を表したかった言葉であろう。

ぺさんは続けて、日本を許したいと話した。 私はなぜそう思うようになったのかと聞いた。

`いや、思うって、うちは仏教で、あの世の事、この世の事、ずっと聞くでしょう。ひとがこの世に来て、何か一ついい事しないで、そのまますっと帰るというのはあれだし。うちが一人だったら、許せば、許して、うちがこっちでこういうこと、あういうことあまりしないとかね、それで黙っていたら、むこうは何かが他の、何かほかのお礼を返すかも知らん。`

ぺさんは、初対面の私に、韓国の運動方法に対する批判を始めた。それはなぜだったろうか。ぺさんは、他の人たちにもこうした話をしたことがあるのだろうか。もしかすると、それは「日本語」だったからこそ声になった話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ぺさんの、ただならぬ話が「日本語」で話されたことの意味を、第3章で改めて考えたいと思っている。

`こういう相談する人もおらんし、ひとりでテレビを見ながら、ひとりで考えるわけ。だから、一生一代ね、この世に産まれてきてね、いいことするのね、一人だったらできるけど、`

ぺさんは90年代からナヌムの家にいらっしゃると聞いた。ぺさんがこうした話をあまりしなかったとすると、長い年月の間、「ひとりで」心に抱いて過ごしたということになる。重要なポイントは、ぺさんが、容赦という未だ一度たりとも実現されていない日本と向かい合う自分のやり方を「良いこと」だと認識していたことだ。

`だから、こっちも言ったのね。それもらってあの世に持っていくのかって、冗談で言うわけやん。
にこにこ笑いながら、あの世に持っていくの?ってね。すると自分の子供らにやるってね。親だからね。
その欲まで持ってくのかと思って黙っていたの。何も言わないで。`

他の慰安婦の方たちを批判しているようだが、それは「親」ゆえのことと、ぺさんは理解していた。ぺさんが語る、元慰安婦の方の考えと態度の差異は、その方たちが、世間から見られようなただ透明な存在にとどまる存在ではないことを示している。それは、当たり前のことでもある。私が「帝国の慰安婦」の中で(無垢で透き通った)「少女」や「闘士」としての慰安婦像を批判したのも、こうした理由からだった。1990年代に試みられた日本の補償以降に起こった元慰安婦たちの分裂と支援団体の葛藤を知っていたからでもある(<和解のために>2章)。

日本人支援者たちの中には、元慰安婦の方たちをただ無色透明な存在とみなす方たちがおおいようだ。その分、強い感情移入のあることも見受けられる。支援者の態度がどうあるべきかについての考えは、2009年に執筆した論文で述べた 。(「あいだに立つ」とはどういうことかー「慰安婦」問題をめぐる90年代の思想と運動を問い直す)、インパクション)例えば、少し前に北原みのりさんが、ナヌムの家の所長の話を信じて私を非難したのも、そうした心理の結果であろう。

補償に対する元慰安婦たちの考えをただ欲深いとのみ言うことはできない 。ぺさんがそうした考えに距離を置くことが出来たのは、仏教徒としての心得の結果だったようだが、家族がいなかったからかもしれない。

こうして、私は、「帝国の慰安婦」を出した後の2013年の秋に、世の中に知られているのとは必ずしも一致しない考えを持つ元慰安婦の方に出会った。

 

`なんで、あれ送れないのかといって、もうしゃべるでしょう。しゃべったらうちは黙っているでしょう。あなたは日本人がそんなに好きなのかって言うわけ。日本人のお客さんが来たら好きでしょう!って。それで言い返すわけ。
うちは何も言わないで、黙ってテレビだけ見るー
いや、黙ってテレビだけ見て、自分たちは(日本人の)ワルグチいって、うちも一緒になって言ったらいいけど、
言わないでしょう。言わないから、みんなうち一人を注目するわけ。

いやっていうのは、テレビ見ても、お金のこととか、そういう、あの、首相が出て来てもうちは黙っておるでしょう。
だから、一緒になってワルグチ(いわないのが行けないの。)
悪口言ったらいいのに、黙っているの見ていたらね、わたしとかね、自分の、、に言ってるわけ。`

ぺさんは日本のことが好きだった。独立以降も日本に赴き、30年ほど暮らし、80年代に帰ってこられたようだった。言うまでもなく、長く住んだからといってその地域に必ずしも愛着を持つことになるわけではない。
この時の対話の後、ぺさんは時々私に電話をかけてきた。話が進むにつれ、私はぺさんが北朝鮮や中国を嫌っていることを知り、中国から帰ってこられた別のもと慰安婦の方を嫌っている理由も、それ故ではないかと考えた。
ぺさんは、独立以降の冷戦体制を生きてきたほとんどの韓国人と同じように、冷戦後遺症を深く内面化させていた。

ナヌムの家は日本に対する好感を公けに表してはならない場所だった。しかし、ナヌムの家建設には多くの日本人が寄付を行い、常住するボランティアたちの多くは日本人だった。にもかかわらず、そこでは表面的な敵対と実質的な好感が共存することはなかった。表面的な敵対が、感情配置において優位に置かれる構造の中で、ぺさんは孤独だった。

`そう、うちは仏教。家の中でも、他の人は仏教って、あの、何か、、、したから、
、、、だけで仏教じゃないの、他の人たちは。
その、クリスチャンが四人おるわけ。心から徹底して、「うちはなんでもないです」っていって、
でもうちら、お寺に寄付やったことでわかったわけ。あ、あのおばは仏教だなってそういうことわかったけど、
その金をうちがね、ちょっとだけ服やらあったらね、たくさん要らないし、まぁ、他の人は親がなくなっていないけど、
うちはその金を仏様にあれしたほうがいいなと思って、お寺に寄付したほうがいいなと思って、他のところより。お寺に寄付した。それで、気がさっぱりするもん。お寺の仏様に、何かあれに使ってくださいっていって寄付したわけ。`

ナヌムの家のさんたちの間には、冷戦体制の後遺症だけではなく、宗教差もあったようだ。世間ではよくあるそうした差も、ぺさんをより孤独にしたのかもしれない。しかし、ナヌムの家は仏教財団が設立した場所である。ナヌムの家に暮らしている尼さんとも仲がいいようだった。

ぺさんの孤独は、冷戦体制50年の後遺症が作り出したものだ。同時に、「日本」という名前から自由でなかった、独立以降70年間の韓国社会が作り出したものでもある。無論、その構造は韓国人が置かれている構造そのものでもある。

ぺさんは、「元慰安婦」という無色透明な抽象名詞を、それぞれ異なる顔を持つ、具体的な名前を持つ固有名詞に変えてくれた。同時に、そうした構造を今一度認識させてくれた。ぺさんの孤独はわたしたちみんなが作ったものでもある。

ぺさんとの交流は、そのようにして始まった。


ハフィントン・ポストのリンク

(3) 배춘희 할머니와의 만남

박유하

학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정대협도, 나를 고발할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책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책 자체를 두고 고발을 검토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정대협이 아니라 나눔의 집이, 그리고 발간 직후가 아니라 10개월이나 지나서 고발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내가 할머니들과 교류를 시작한 일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다시 나눔의 집에 가는 일이 없었더라면 고발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 기간에 만난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이 사회에 전하기 위한 심포지엄을 다음해 봄에 여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심포지엄을 한일 양국 언론이 호의적으로 주목하는 일이 없었다면 고발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고발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 책자체가 문제된 고발이 아니다. 나에 대한 경계심이 나를 고발하도록 만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지원단체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갖는 할머니와 내가 만나게 된 일이 고발의 먼 원인이 되었다. 그들이 나를 경계하고 위험시했다는 것은 고발장 도처에서 나타난다. 지원단체는, 그들의 주장과 운동을 내가 방해한다고 여겼었다. 그에 더해 나눔의 집이나 정대협에 대한 일부 할머니들의 불만을 내가 알게 된 것도 그들이 나를 경계한 또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먼저 말하고 싶다. 나는 그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노고를 폄훼할 생각이 없다. 인간이 하는 일에, 하물며 여러사람들이 모여 하는 일에 어떻게 시행착오가 없을 수 있을까. 더구나 하나의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토론과 고민이 존재했을 것이고, (2016년 9월 4일에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발표된 야마시타영애선생의 발표자료ー日本軍「慰安婦」問題とオーラルヒストリー研究の/への挑戦ー를 보고 나는 그들이 증언집을 만들면서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고민과 논의과정에 존경을 표한다. 또한 운동의 성공을 위한, 내가 알지 못하는 노력과 눈물에.

그렇지만, 동시에, 나를 고발한 또다른 지원단체의 거짓말과 폭력을 그들이 2년 이상 방관해 온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검찰이 주도한 조정위원회의 조정과정에서 나도 할머니들께 사과하겠지만 지원단체도 나에게 사과해 달라고 말했던 건 그래서기도 했다. 고발자체도 납득할 수 없었지만 고발이상으로, 고발과정에서 이루어진 경솔과 무지와 그에 따른 세간의 비난에 대해 ,인권운동을 표방하는 지원단체가 오래 침묵해 온 이유를 나는 사실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20년 이상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이들 중 아직 누구도 나에 대한 고발을 취하하라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아직 없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슬프지만, 이러한 정황이 작금의 대한민국의 비윤리적 상항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더 슬프다. 이들이 쉽게 비난하는 정치가나 경제인들에게만 비윤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눔의 집에는 일본정부가 90년대에 사죄와 보상을 위해 만든 아시아여성기금관계자이기도 했던 일본인들과 함께 갔다. 그들은 일본정부의 예산으로 할머니들을 온천에 모시고 가거나 음식을 대접하고 용돈을 드리기 위해 1년에 수 회 한국을 방문한다고 했다. 이들을 알게 된 건 2006년에 일본에서 <화해를 위해서> 일본어 번역본이 나온 이후다. 방문 전날 나눔의집 소장에게 연락했더니 자신은 다른 일이 있어 없지만 사무국장을 만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들을 만나기 전에 사죄와 보상에 관한 나눔의집의 생각을 사무국장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눔의 집이 정대협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은 당사자중심으로 해결할 생각이며 ‘법적배상’이 아닌 조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재판을 미국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이 재판에 찬성한다는 의미로 할머니들의 도장이 찍힌 서류까지 사무국장은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이 계시는 건물로 이동해 호텔에서 만났던 유희남 할머니 외 몇몇 할머니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들이 열 분 계시다고 했지만 다 나와 계시지는 않았다. 몸이 불편해서 못 나오시는 거라고 사무직원이 말했다. (이하에선 위안부할머니들에 대해 극존칭은 쓰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의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서 봉고차를 타고 식사장소로 이동했다. 할머니들이 초밥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우리는 일식집으로 갔다. 그리고 적당히 자리를 잡았는데 그 때 우연히 맞은편에 앉은 분이 후에 깊은 교류를 이어가게 된 배춘희 할머니였다. 이 분은 이미 나눔의 집에서도 뵈었지만 그 때는 이 분과 따로 대화하지 않았었다.

배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앉은 것은 우연이었을까. 이때는 아직 몰랐지만 일본을 좋아하셨으니 처음부터 일본인이 있는 자리에 앉을 생각이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분 옆에 일본인이 앉았고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대화했다. 영상에서도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배할머니는 가끔 주변사람들을 의식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 허락을 얻어 핸드폰카메라로 할머니를 녹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 날의 영상을 다음해 배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배할머니도 국가배상을 원했다’고 나눔의 집 소장이 말한 보도를 보고 처음으로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2014년 6월 10일이었다. 할머니께 불이익이 갈지도 몰라 그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영상이기도 했다.

이하에, 이 첫 만남에서 배할머니가 했던 이야기를 페이스북에서 옮겨 둔다.


(この話が入ったら。。。だが、この話が入ったら、それこそ敵は百万、こっちは一人、そういうことになるわけ。)하지만, 이 이야기가 들어가면..그야말로 적은 100만, 나는 혼자. 그렇게 된다고.

배할머니는 구체적으로 대답하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가 나눔의 집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표했다. ‘적은 백만, 나는 혼자’. 나는 뜻밖의 단어와 표현에 놀랐다.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이들을 ‘적’ 이라고 말하도록 만든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그건 꼭 진짜 적대감에서 온 표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그냥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온 데 대한 절대고독을 표현한 단어였을 것이다.

이어서 나는 할머니가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いや、思うって、うちは仏教で、あの世の事、この世の事、ずっと聞くでしょう。ひとがこの世に来て、何か一ついい事しないで、そのまますっと帰るというのはあれだし。うちが一人だったら、許せば、許して、うちがこっちでこういうこと、あういうことあまりしないとかね、それで黙っていたら、むこうは何かが他の、何かほかのお礼を返すかも知らん。) 뭐, 생각한다기보다… 나는 불교도이고, 이 세상에 대해 또 저 세상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잖어.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뭔가 좋은 일 하나 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린다는 건 좀 그렇잖아. 나 혼자라면, 용서하고.. 용서해서 우리가 여기서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하지 않는다거나.. 그렇게 아무말 않고 있으면 그들은 뭔가 다른, 뭔가 다른 보답을 할지도 모르잖어.

할머니는 처음 만난 나에게 곧바로 한국의 운동방식을 비판했다. 그건 왜였을까. 배할머니는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일이 있었을까. 어쩌면 그건 ‘일본어’로 발화되어야 할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특별한 이야기가 ‘일본어’로 발화된 일의 의미를 나는 제3장에서 다시 생각해 볼 예정이다.

(こういう相談する人もおらんし、一人でテレビを見ながら、一人で考えるわけ。だから、一生一代ね、この世に産まれてきてね、いいことするのね、一人だったらできるけど、)이런 식으로 상의할 사람도 없으니까, 혼자서 테레비를 보면서 생각하지.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딱 한번,좋은 일을 하는거야. 혼자라면 가능한데..

배할머니는 90년대부터 나눔의 집에 계시다고 들었었다. 배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면, 그 긴 세월을 ‘혼자’ 가슴에 품고 지냈다는 얘기가 된다. 중요한 건 할머니가 용서라는, 아직 한번도 발화되지도 실현되지도 못한, 일본과 마주하는 자신의 방식을, ‘좋은 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だから、こっちも言ったのね。それもらってあの世に持っていくのかって、冗談で言うわけやん。にこにこ笑いながら、あの世に持っていくの?ってね。すると自分の子供らにやるってね。親だからね。その欲まで持ってくのかと思って黙っていたの。何も言わないで。)그래서 나도 말했지. 그 돈 받아서 저세상에 가져 갈꺼야? 농담처럼 말하지. 웃으면서. 저 세상에 가져갈 거냐고. 그러면 자식들 준다고 하지. 부모니까. 그런 욕심까지 가져갈 건가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었어. 아무말 않고.

배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이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걸 못마땅해 하셨다. 하지만 다른 할머니들의 그런 태도가 ‘부모’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비판을 “농담처럼” 말하는 배할머니의 태도에서 나는 할머니의 고독을 읽는다.
할머니들간의 생각과 태도의 차이는, 세간에 보이는 것처럼 할머니들이 그저 투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무구하고 맑은) ‘소녀’나 ‘투사’로서의 위안부상을 비판한 것은 그래서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시도된 일본의 보상 이후 벌어진 할머니들의 분열, 지원단체와의 갈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화해를 위해서 2장). 일본인 지원자들 중 일부는 할머니들을 그저 무색투명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그럴수록 강한 감정이입상태가 되는 것도 볼 수 있다. 주변인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나의 생각은 2009년에 쓴 한 논문에서 밝힌 바 있다. 「あいだに立つ」とはどういうことかー「慰安婦」問題をめぐる九十年代の思想と運動を問い直す) 예를 들면 기타하라 미노리씨가 나를 격하게 비난한 것도 그런 심리적 결과가 아닐까 한다.

보상에 대한 다른 할머니들의 생각을 그저 욕심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배할머니가 그러한 생각에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건 불교신자로서의 덕목이기도 하겠지만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 날, <제국의 위안부>를 내고 난 후, 2013년 늦가을에 내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생각을 갖는 할머니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なんで、あれ送れないのかといって、もうしゃべるでしょう。しゃべったらうちは黙っているでしょう。あなたは日本人がそんなに好きなのかって言うわけ。日本人のお客さんが来たら好きでしょう!って。それで言い返すわけ。うちは何も言わないで、黙ってテレビだけ見るー いや、黙ってテレビだけ見て、自分たちは(日本人の)ワルグチいって、うちも一緒になって言ったらいいけど、言わないでしょう。言わないから、みんなうち一人を注目するわけ。いやっていうのは、テレビ見ても、お金のこととか、そういう、あの、首相が出て来てもうちは黙っておるでしょう。だから、一緒になってワルグチ(いわないのが行けないの。)悪口言ったらいいのに、黙っているの見ていたらね、わたしとかね、自分の、、に言ってるわけ。)왜 그거 안 보내느냐면서 뭐라 그러거든.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잖어. 그러면 당신은 일본인이 그렇게 좋아? 그런다고. 일본사람 손님이 오면 좋지? 그러는 거야. 그렇게 말하지 그러면 나는 아무말 않고 테레비만 봐. 아무 말 않고 테레비만 보고 있으면 자기들은 (일본사람) 욕을 하면서, 나도 같이 해야 하는데 안 하잖어, 같이 비난하지 않으니까 모두 나를 주목하는 거야. 테레비를 봐도, 돈 얘기나…그 왜, 수상이 나와도 난 가만히 있거든. 그렇게 같이 비난을 하면 좋은데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내 얘기를.. 자기의.. 에게 말하지..

분명 배할머니는 일본을 좋아하셨다. 해방이후에도 일본으로 들어가 30년 정도 사시다가 80년대에 들어오셨다고 했다. 물론 오래 산다고 해서 그 지역에 꼭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대화를 한 이후 할머니는 종종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대화가 거듭되면서 나는 할머니가 북한이나 중국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고, 중국에서 들어오신 할머니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배할머니는 해방 이후 냉전체제를 살아온 한국인 대부분처럼, 냉전 후유증을 깊숙이 내면화하고 있었다.

나눔의 집은 일본에 대한 호감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눔의집 건설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기부했고, 상주하는 봉사자들은 많은 경우 일본인이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표면적인 적대와 실질적인 호감이 공존할 수는 없었던 셈이다. 표면적인 적대가 감정배치에서 우위에 놓이는 구조 속에서, 배할머니는 고독했다.

(そう、うちは仏教。家の中でも、他の人は仏教って、あの、何か、、、したから、、、だけで仏教じゃないの、他の人たちは。その、クリスチャンが四人おるわけ。心から徹底して、「うちはなんでもないです」っていって、でもうちら、お寺に寄付やったことでわかったわけ。あ、あのおばは仏教だなってそういうことわかったけど、その金をうちがね、ちょっとだけ服やらあったらね、たくさん要らないし、まぁ、他の人は親がなくなっていないけど、うちはその金を仏様にあれしたほうがいいなと思って、お寺に寄付したほうがいいなと思って、他のところより。お寺に寄付した。それで、気がさっぱりするもん。お寺の仏様に、何かあれに使ってくださいっていって寄付したわけ。) 그래. 나는 불교도야 . 나눔의 집에는… 크리스챤이 4명 있지. 아주 철저한. 그래서 나는 종교없다고 말하지. 그런데 내가 절에 기부한 일이 알려졌어. 아 저 할머니는 불교구나 라고. 그 돈을, 내가 말이지, 옷 조금 있으면 많이 필요하지 않거든. 글쎄 다른 사람이야 부모가 있지만(?). 나는 그 돈을 부처님께 드리는게 좋겠다 싶어서 절에 기부하는 게 좋겠다 싶어 다른 곳보다. 그래서 절에 기부했지. 그러면 마음이 비워지지. 절에 계신 부처님께 뭔가 (좋은) 일에 사용해 주세요 하면서 기부했지.

나눔의집 할머니들 사이에는 냉전체제 후유증 뿐 아니라 종교차이도 존재했던 것 같다. 세간에도 흔히 있는 그런 차이도 배춘희할머니를 더 고독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눔의집은 불교재단이 만든 곳이다. 나눔의 집에 상주하는 여승과도 가까운 듯 했다.

배할머니의 고독은 냉전체제 50년의 후유증이 만든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을 호명하는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해방 이후 70년 동안의 한국사회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배할머니의 고독은 우리 모두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우리역시 그 구조 속에 함께 놓여 있다는 점이 우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자신 혹은 타자를 검열하는 일로 누군가를 억압하는.

배할머니와의 교류는 그런 고독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요모타 이누히코, 박유하를 변호하다

박유하를 변호하다

요모타 이누히코

(원문: 2016-08-24, 四方田犬彦, 朴裕河を弁護する)

1

비교문학은 인문학 중에서 굉장히 효율이 나쁜 학문이다.

우선, 자국어 뿐만 아니라 복수의 외국어에 정통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자유롭게 그 텍스트를 읽고, 학회에서 의견교환이 가능해야 한다. 자국어로 쓰여진 텍스트만을 자국 문맥의 안 쪽에서 해석하는 작업에 비하면, 훨씬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정열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비교문학이란 분야에 사람은 매혹되고 이를 연구하려 하는 것일까. 비교문학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이는 사람을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민족주의영역으로부터 해방한다는 효용을 지니고 있다. 「겐지 모노가타리」의 책 이름인 「総角」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미혼 남성을 뜻하는 총각과 똑같은 표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일본에서 때때로 회자되는 문화순수주의란 것이 얼마나 치졸한 신화에 불과한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조선의 이상(李箱)과 대만의 楊熾昌을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옆에 두고 읽는 일은,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동아시아도 세계적인 문학적 전위운동의 권역 안에 있었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한 나라 한 언어의 안 쪽에서 자족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학사가, 실은 타자와의 끊임없는 교류 안에서 성립한 우연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한 나라의 문학만이 민족 고유의 본질을 표상한다는 전세기의 신화의 오류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비교문학은 우리에게 문화와 문학을 둘러싼 나르시즘적인 이야기의 바깥에 펼쳐져있는, 바람부는 황야를 지향하도록 하는 일을 가르쳐준다.

한편, 비교문학자는 때때로 생각치도 못한 편견의 희생자가 되기를 강요받게 된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이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던 에드워드 W 사이드를 엄습한 수난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대학에서 빅토르 위고와 아우에르 바흐를 독실하게 논하고 있었던 사이드는, 어떤 일을 계기로 자신의 고향인 팔레스티나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기 시작했다. 몇 권의 저서가 미국의 협소한 아카데미즘의 테두리를 넘어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엄청난 비방을 겪어야 했다. 사이드를 비난공격하고, 허무맹랑한 소문을 확산시킨 것은, 주로 유대계 미국인의 중동지역 연구자들이다. 그들은 사이드가 중동사의 학문적 연구자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아마추어에게는 팔레스티나에 대하여 논할 자격이 없다는 캠페인을 개시했다. 사이드를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합중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에는 냉정하게 그의 저서를 이해하고 그 과감한 언동에 공감하는 이란 파페(후에 이스라엘을 추방)과 같은 유대인의 중동사 전문가가 있다. 그러나 반 사이드파는, 사이드의 저서가 진실을 왜곡하는 반유대주의자라고 주장하고, 그가 팔레스티나에서 반란에 찬동하고 돌을 던지고 있는 사진을 날조하여 공공연하게 테러리스트라 불렀다. 그들 중 다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적 시오니즘의 찬동자이자, 국가로써의 이스라엘이 이산 유대인의 궁극적인 해결의 땅이란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예전에 텔아비브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 들은 일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한,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자란 유대인들 중 다수는 팔레스티나인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보고, 사태의 참혹성 앞에 말문을 잃으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미국에서 도래한 유대인들은 두 민족의 대립을 극히 관념적으로 파악하고, 팔레스티나인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증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신적인 유대계 미국인 학자들의 사이드를 향한 공격성의 심층에 있는 것에 대해 막연하나마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팔레스티나 출신의 비교문학자를 자신들의 「전문영역」에서 배제하는 작업을 통하여, 합중국에 있어 때때로 희박해지기 쉬운 유대인으로써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의 이스라엘에 거주하지 않고, 헤브라이어도 구사할 수 없기 때문에, 거꾸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순화시켜 꿈꾸는 자에게 있어, 사이드란 자신이 유대인임을 확인시켜주는 귀중한 매개자였던 것이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먼저 한국에서 발행되고, 좀 지나서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적지 않은 일본의 지식인, 특히 일본 내에서 지배적인 우파 미디어에 대해 항상 이의를 제기해오던 지식인들에게 환영받고, 두 개의 상을 수상했다. 이 칭찬 및 수상과 동시에, 한국의 조선사 연구가들이 그녀에 대한 강한 공격을 시작했다. 또 이 책이 위안부를 모욕하고 있다는 이유로 형사소송의 대상이 된 직후부터 재일한국인의 조선사 전문가가 박유하의 저작은 근거없는 기술로 가득하다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나는 이 사태가 전문가로서의 원한이나 질투로부터, 혹은 아이덴티티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이 박유하를 중상모략한 한심한 사태라고는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우파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제국의 위안부」가 집필되었다는 등의 말을 그들이 만약 하였다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행해진 비열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은 그들의 오랜 동안의 연구를 스스로 모욕하는 결과만을 남길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곧바로 상기한 것이 사이드가 체험한 수난이었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박유하와 사이드는 역사가가 아니고 비교문학의 전문적 연구자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또 박유하는 초기의 저작인 나츠메 소세키 론이나 야나기 무네요시 론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에게 이론적으로 시사받았고, 사회 속의 지배적 신화를 비판하기 위한 용기를 받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이드가 「아마추어」라는 호칭 아래 비방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박유하도 또한 위안부 문제의 전문가가 아님에도 발언했다는 이유로 치열한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나는 예전에 겪은 괴롭힘과 협박이 생각났다. 1995년의 일이었는데, 영화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되는 해라 NHK교육 TV가 나에게 12회 연속으로 세계영화사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해 왔다. 나는 그에 응하여 쿠로사와 아키라나 존 포드, 펠리니 등의 이른바 세계의 명작영화를 소개해 나갔다. 다만, 최종회만은 이걸로 마지막이니 작심하고 16밀리 필름의 개인영화를 방영하기로 했다. 선택한 것은 야마타니 테츠오가 1979년에 찍은『오키나와의 할머니』란 작품이었고,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감독 소장 필름을 빌렸다. 그 작품 안에서 위안부였던 여성은, 일본이 전쟁에서 이겨줬으면 했다는 말을 반복하고, 미소라 히바리와 고바야시 아사히가 얼마나 멋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와서 한국으로는 너무 부끄러워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현재의 NHK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방송은 삭제당하는 일 없이 방영되었다.

공영방송에서 16밀리 필름 영화의 일부가 2분정도 방영된 직후부터, NHK 및 당시 내가 재직하고 있었던 대학에 엄청난 항의가 왔다. 편지에는「비국민」, 「매국노」등의 표현과 함께, 한국인과 피차별 부락민을 둘러싼 갖가지 욕이 적혀있었다. 「고향인 소련으로 돌아가라」는 편지도 있었다. 나는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편지에 적힌 표현력의 저급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째서 모두가 균일한 어휘에 호소하는 일 밖에 못하는 것인가. 이 때의 체험이 계기가 되어 5년 후 서울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정대협이 주최하는 수요집회에 참여하고, 화과자를 가방에 가득 넣고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위안부할머니들과 몇차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박유하에 대한 비방은 규모와 그 성격에 있어 나에 대한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훨씬 거대한 것이다.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니지만) 「무식」한 자들에게 의해 행해진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식층의 손에 의해 체계적으로 전략적으로 준비된 것이다. 중상하는 이들은 위안부의 이름 아래 그녀를 형사고발하고 국민차원의 여론을 조작하여 그녀가 「대일본제국」을 변호하고 있다는 악의에 가득찬 허위선동을 이어갔다. 그녀가 한국에 거주하는 한, 고립과 위협을 느끼도록 집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 박해의 과격함은 일본의 어떤 독일문학자로 하여금, 아이히만을 논한 한나 아렌트의 이름을 거론하게끔 만들 만한 것이었다.

분명 그녀는 이제까지 위안분 문제를 생애의 주제로 삼아 연구해 온 역사가는 아니다. 앞에 기술한 바와 같이 일문학연구를 중심으로 한, 일개 비교문학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를 「아마추어」의 이름 아래 단죄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나는 반론하고 싶다. 지식인이란 전문학자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그것은 본래적으로 아마추어일 것을 필요조건으로 한다는 사이드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사이드는『지식인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마추어리즘이란, 전문가와 같이 이익이나 포상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애호정신과 억누를 수 없는 흥미에 의해 움직여서, 보다 큰 조감도를 발견하거나, 경계와 장애를 넘어 다양한 연계를 이루거나, 또는 특정한 전문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전문직이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관념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박유하 사건을 사이드의 수난에 견주는 것이 정당하다면, 지금부터 내가 적어야 할 것은 「제국의 위안부」가 제출하고 있는 「보다 큰 조감도」에 대해서 일 것이다. 그것은 미세한 사실오인이나 자료해석의 상대성의 차원을 넘어 일본과 한국에 있어서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면서도 일본이 과거에 행한 역사적인 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비전을 제출하는 것과 통해 있어야 한다. 내가 이 저서로부터 배운 것을 이하 기술해 두고 싶다.

2

역사적 기억에는 여러 갈래의 계층이 존재한다. 단순한 사실과 통계의 열거가 역사인식과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억과 그것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의 다층성에 대해 알아 두어야 한다. 특히 그것이 전쟁이나 혁명 등의 동란기의 기억일 경우, 어떠한 시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능동적인, 반동적인)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기억의 최정점에는 국가적인 기억, 즉 현정권인 체제가 승인하고 미디어에 있어 지배적일 뿐만 아니라, 교과서의 기재를 통하여 교육제도의 안 쪽에까지 깊이 파고든 스토리가 존재한다. 이 스토리는 「신성하며 범할 수 없는」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국가적 기억에 준하는 것으로, 특권적인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정형적인 언설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회에 있어 충분히 카리스마화된 인물, 신격화된 「당사자」의 증언이거나 미디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저명인의 발언인 경우가 많다. 정형적인 언설은 항상 미디어의 함수다. 그것은 미디어에 의해 전략적으로 연출되고, 기록되고, 이데올로기적 형성물로써 공공의 장에 던져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라기보다는 롤랑 바르트적인 의미의 「신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신화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권능의 힘은, 이 언설을 국가기억과는 별개의 의미로 사회의 지배적인 언설, 공식적이라 할 수 있는 언설로써 기능하게 하고 있다.

세번째로, 기억의 하층에 존재하며 그 시대를 살아간 이름없는 자, 잊혀진 자, 부당하게 천대받고 그 목소리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진 자들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생존 허용된(살려진) 시간」의「생존 가능했던 체험」(민코프스키)에 의한 생생한 증언이지만, 미디어를 경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도 승계도 없이 정형적인 기억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지식인이나 미디어에 관련된 자들을 여과기로써 통과하지 않는 한, 이 목소리는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그나마 곤난을 극복해나가면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층에 존재하고 있는 최후의, 제4의 목소리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제4의 목소리란, 문자그대로 침묵이다. 세계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갈 것을 강요당한 서벌턴이 처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상황이다. 그들은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할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다. 어떠한 계몽적인 계기를 앞에 두고도, 조개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입해 보면, 최정점에 있는 국가의 언설은, 2016년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수상이 체결한 한일합의가 그 최신 버젼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이 10억 엔을 한국에 지불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는 에필로그까지가 곁들여진다.

정형적인 목소리란, 정대협과 그 주위에 있는 동반자적 역사학자들의 손에 의한 한국의 지배적인 언설을 의미한다. 위안부는 항상 민족주의적인 정신에 가득하고, 일본군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고 그들을 주장한다. 그녀들을 위안부로 만든 것은 물론 일본군이고, 모든 한국인은 모든 상황에 있어 피해자였다. 위안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고결하고, 무구하며, 모범적인 한국인이었다. 이러한 주장 아래, 목소리는 특정한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정대협은 자신들이 위안부의 목소리의 유일하고도 정통적인 표상자임을 자인하고 있다.

제3의 목소리는 1990년대에 차례로 나타난 종군위안부 여성들의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목소리이며, 원래는 극히 다양하고 잡다한 요소에 가득찬 것이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쉽게도 제2의 목소리, 즉 정형적인 목소리에 의해 질서가 부여되고 노이즈를 제거한 상태가 아니고선 우리 눈에 비칠 수 없다.

그러면 제4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한국에서 나타나지 않은 위안부들의 기억이다. 또한 한국과는 달리 스스로 나타나는 일이 전무한 일본의 위안부들의 내면에 감춰진 기억이다. 기묘하게도, 위안부 문제를 입에 담는 자들은 주로 한국에 있어서의 문제를 논할 뿐, 방대한 수가 존재했던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를 당연히 무시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녀들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유하는 어째서 비방의 대상이 되었는가. 간단히 말해, 그녀가 정형적이고 지배적인 목소리를 거역하고,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alternative한 또다른 목소리를, 방대한 위안부 증언집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위안부 스토리의 절대성을 고집하는 자들의 분노를 자아낸 것은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었다.

박유하는 그녀가 말하는 「공식적인 기억」이 어떤 식으로 위안부 신화를 인위적으로 구축해 나갔는가를 면밀히 따져, 과감하게도 그 상대화를 시도했다. 이 기억=스토리가 이제까지 은폐하고 배제해 온 위안부들의 여러 목소리에 그 탐구의 눈길을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 참조한 텍스트로 한국인과 일본인이 집필한 소설작품뿐만 아니라 한국의 영화, 만화, 에니메이션에 대해 언급하고, 한국사회의 위안부신화의 형성과정을 분석하는 단서로 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말해두건데, 이러한 작업은 어디까지나 비교문학자의 손에 의한 것이다. 그녀는 하나의 언설을 다룰 때, 그것을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라, 어떠한 시점(이데올로기적인, 문화적인)으로부터 해석된 「사실」로 보고 있다. 여기서 『도덕의 계보학』의 니체를 인용하는 것은, 어쩐지 대학1학년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지만, 어떠한 사실도 그 사실을 둘러싼 해석이라는 인식론적인 전제에 대한 양해 없이는 앞으로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말해두겠다. 박유하란 박유하라는 해석의 의지이다. 그녀는 앞에서 내가 말한 3번째 목소리를 마주했다. 다양성을 가지고, 개인의 생애를 건 체험에 기반한 것이면서, 정형적인 지배원리 하에서는 불순한 것으로 배제당하고 잘려나간 목소리 속에 들어가, 거기서 공식기억과 상반되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무엇이 그녀의 이러한 작업의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위안부 문제를 보다 큰 문맥, 즉 제국주의와 가부장제를 기초로 형성되어온 동아시아의 근대국민국가체계의 문맥 안에서 인식하고, 그것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이 거대한 비젼을 이해하지 않고, 그 저작에서의 자료적 차이를 야단스럽게 언급하고 역사실증주의자를 참칭해 봐야, 무의미한 몸짓에 그칠 뿐 그녀를 비판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역사적이라고 보여져온 「사실」이란 늘, 특정한 이데올로기 아래 위치지어지면서 「사실」로써 정립된다는 고전적인 명제를 재확인하는 일에 불과하다.

3

박유하가 종래의 공식적인 위안부 신화에 내민 의문은 크게 다음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위안부들이 민족의식을 가진 한국인으로써 일본군에 대해 저항하는 주체인 것은 아니었다는 지적이며, 또 하나는 그녀들을 어리고 순진가련한 소녀로 표상하는 것은, 그 비참하고 굴욕적이었던 현실을 교묘히 은폐해버린다는 지적이다.

위안부들은 일본인 병사를 위해 단순히 성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을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잔혹한 전장에서 생명의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을 위해, 문자그대로 위안을 제공해야하는 존재였다. 위안부와 일본인 병사의 차이점은, 전자가 성을 제공한데 대해, 후자는 생명을 제공할 것을 강요당한 점일 뿐, 둘 모두 제국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며, 대체가능한 전력에 불과했다. 박유하는 위안부의 증언 뿐만 아니라, 다양한 텍스트를 동원하면서, 위안부가 일본군에 협력하지 않느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가혹한 상황을 상상할 것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이 한구절만 읽어도, 그녀가 위안부를 매춘부라 부르고 모욕했다는기소장이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며, 명확한 악의 아래 준비된 것임이 판명된다.

박유하의 분석의 뛰어난 점은, 피식민자인 조선인 위안부가 그 내면에 있어 일본인에게 과잉되게 순응해 외지에서 때로 일본인처럼 행동한 점을 지적한 데에 있다. 이는 종래의 공식기억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유하는 그녀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러한 제국의 내면화야말로 보다 용서하지 못할 제국의 죄임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를 강간하는/강간당하는 대립관계로써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제국주의에 강요당한 피해자로 보는 시점은 향후 역사연구에 있어 새로운 윤리적 측면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강제연행이 조선인, 중국인에게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나가노 현이나 야마가타 현의 농민들이 마을을 통째로 만주국 개벽에 동원당한 경우에도 해당된다는 입장과 통하고 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치마저고리 등의 민족의상의 착용을 허가받지 못했다. 그녀들은 조금이라도 일본인에 가깝도록 이름도 일본풍으로 고치고 기모노를 착용할 것을 명령받았다. 이것은 그 모습을 한번이라도 목격한 적이 있는 한국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굴욕일 것이다.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건립되어 현재 한국의 곳곳에 복제가 세워진 소녀상에 대하여, 박유하가 강한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그 상이 현실의 위안부가 체험한 굴욕의 기억을 은폐하고, 이상화된 스테레오 타입의 만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녀상은, 비록 한국이 아무리 일본에게 짓밟히더라도 여전히 처녀라는 신화적 믿음에 대응하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패전 후 미국에 점령당한 일본에서 하라 세츠코가「영원한 처녀」로서 숭배받고 현재도 일본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어째서 소녀상인 것인가. 박유하를 비난공격하는 자들은,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높다는 사실에 의하면 이 조각상이 부자연스럽다는 그녀의 주장에 대하여, 어째서 이토록 눈을 부릅뜨고 반론하는 것인가. 문제는 통계자료를 둘러싼 해석의 차원에 있지 않다. 위안부가 순결한 처녀가 아니면 안 된다고 광신하고 있는 한국인의 신화 측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박유하를 떠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역사적인 희생자를 무구한 처녀로 표상하는 일은 위안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3·1 독립운동에서 학살된 유관순도, 북한에 납치되어 생사불명인 요코타 메구미(일본에서는「짱」이란 호칭을 붙여야 한다)도 오키나와의 동굴에서 대부분이 살해된 「히메유리 부대」의 이들도 모두 소녀였고, 그렇기에 비극의 효율적인 기호로 선전되어왔다. 이는 정치인류학적으로 동아시아 특유의 병이다. 박유하의 소녀상 비판은 전후의 일본인마저도 무의식 하에서 이 스테레오타입의 상징법에 조작되어왔다는 사실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 문제가 전쟁 특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으로써 규탄받아야 할 것은 제국주의이며, 그에 따르는 한 병사도 위안부도 마찬가지로 희생자인 것이다. 이 비젼은 일본과 한국을 영원한 대립관계에 놓고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하는 「위안부의 대변자」의 비생산적인 내셔널리즘을 논리적으로 상대화하게끔 한다. 한국에서의 공식기억이 왜곡하여 은폐해 온 위안부의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박유하가 제출한 그림의 거대함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5

박유하는「제국의 위안부」마지막 부분에서 정창화가 1965년에 감독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라는 영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책 중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있는 유일한 곳이다. 무대는 미얀마의 일본군 주둔지이다. 조선인 위안부 여성이, 그녀가 배치된 「친일파」학도병 장교에게 말을 건다. 자신은 간호사가 된다고 듣고 이 곳에 속아서 왔다. 당신은 아직 일본제국주의가 신사적이라고 믿고 있는가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장면으로부터 판명되는 것은, 영화가 제작된 1960년대에는 한국인은 위안부를 둘러싼 90년대에 확립된 공식적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위안부는 모든 비참함의 근원에 일본제국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강제연행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오늘날, 「예술적 영화」범주 안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의 영화연구가가 이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없지만) 이렇게 강제연행의 신화가 집합적 기억으로서 인위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일반한국인의 역사인식을 알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존재하고 있다.

박유하가 한국의 B급 영화를 언급하였기에, 영화사가인 나는, 그 후의 한국영화가 어떤 식으로 종군위안부를 그려왔는지를 일본영화와 비교하면서 보충적으로 기술해두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80년에 걸쳐, 몇 편의 위안부 영화가 제작되었다. 1974년 시점에서 나봉한 감독(불명)에 의해『여자 정신대』라는 작품이 촬영되었다. 필름은 남아있지 않고, 영화연구가인 최성구 씨가 최근 발굴한 신문광고를 통해서만 간신히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영어 제목을 Bloody sex라 하며「위안부 8만명의 통곡. 영화 역사상 최대의 충격을 가진 문제의 대하 드라마」라는 선전문구가 기재되어있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는 여성의 나체를 포함한 에로틱한 영화표현은 엄격한 검열 대상이였다. 때문에 제작자와 감독은 일본군은 역사적 만행을 규탄한다는 도덕적 구실 아래, 에로틱한 묘사를 듬뿍 담은 필름을 제작한다는 발상을 했다. 한국인에 의한 강간장면은 안 되지만, 일본의 광기의 군대가 강간을 한다면 역사적 사실로써 표상이 용서받는다는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역으로 이용한 제작 자세를 알 수 있다.

내가 실제로 한국의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위안부 영화는 이상언감독의 『종군위안부』다. 1980년대 초반 일이었다. 이 감독은 야구선수 장훈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은 사람으로, 필모그래피를 참고하면, 아마도 소재를 고르지 않고 주문에 따라 감독하는 사람인 듯하다. 『종군위안부』는 호평이었기 때문에 시리즈화 되었다고 들었다. 제작의도는 『여자 정신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선인의 무고한 처녀들이 납치되어 위안소에 갇혀, 밤낮으로 일본군인에게 강간당한다. 그러나 영화 도중부터는 일본인 병사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면서, 단순한 남녀의 성행위만이 몇 번이고 이어진다. 이러한 영화가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규탄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작된 것은, 아마도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는 지식인들이 자국의 영화라는 미디어를 철저히 경시하여, 그 존재를 모르거나, 학문적 대상으로 논할 가치가 없다고 경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식민지화 시대를 포함하여) 자국의 영화를 분석적으로 연구하려는 기운이 높아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논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해방 후의 한국에 공식적인 기억이 존재하고, 위안부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기억이 형성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한국영화사도 공식적 기억을 만들어왔다. 거기서는 다큐멘터리「나눔의 집」이 모범적 작품으로써 선전되는 일은 있어도, 아마도 그보다 훨씬 많은 관객을 동원했을 『여자 정신대』를 비롯한 위안부 영화는 결코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급해서는 안 되는, 치욕의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 한들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에로영화를 한국의 남성 관객들은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들은 남성으로서 일본군 병사 측에 동일화하여, 여성을 강간하는 유사쾌락을 얻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같은 한국인으로서 강간당하는 여성 측에 마조히스틱하게 감정이입하여 보고 있었던 것인가.

어느 쪽이던 간에, 여기서 시각적으로도 스토리적으로도 얻어지는 쾌락은 도착적이다. 예전에 상해의 길거리를 산보하고 있을 때, 짐차 위에 「남경대도살(중국에서는「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에 대한, 선정적인 표지의 책이 쌓아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극히 복잡한 심경이 되었던 일이 떠오른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잔혹행위에 관한 포르노그래피였다. 아마도 이러한 예는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분석하는 것은 역사학이 아니라 미디어의 사회심리학이다. 사람은 어째서 스스로의 민족의 피해자를 주제로 한 포르노그래피에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상품화해 왔는가.

나는 예전에 쿠로사와 아키라부터 스즈키 세이쥰, 그리고 8미리 필름의 야마타니 테츠오가 조선인 종군위안부를 스크린에 표상하려고 어떤 식으로 노력해왔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요모다 이누히코「리코우란과 위안부, 『리코우란과 하라세츠코』). GHQ에 의한 검열 하였음에도, 쿠로사와는 타니구치 센키치와 팀을 짜서 타무라 야스지로의『춘부전』을 영화로 만들려고 기획했고, 매번 각본이 허가를 받지 못해 되돌려 보내졌다. 이 기획은 타니구치가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인 위안단의 여성가수로 치환함으로써 『새벽의 탈주』를 감독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쿠로사와의 정의감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닛카츠의 스즈키세이쥰은 그들의 좌절을 전제로, 1965년 드디어 노가와 유미코 주연으로 『춘부전』의 영화화에 성공한다. 거기에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한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지만, 주인공 남녀가 절망하여 죽은 사실을 알고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일본인은 항상 죽을려고 한다. 밟혀도 차여도 살아가야 한다. 살아가는 것이 훨씬 힘들다. 죽는 건 비겁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중요한 배역이고 중요한 대사다. 세이쥰은 그녀를 어떠한 비참한 상황에 있어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세계를 투철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서 이상을 가진 영화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와 진지하게 맞서려 하고 있었을 때, 한국의 영화인은 이를 단순한 에로 영화의 소재로 밖에 보려하지 않았다. 이 낙차는 크다. 한국의 연구가 중에서 이 문제에 답해줄 사람은 있을까.

6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시대의 일이다. 상해에서는 국민당의 테러가 횡행하고 있었다. 한 때 루쉰의 동생이, 아무리 개가 밉더라도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도 이를 지지하여, 중국인에게는 옛날부터 페어 플레이의 정신이 결여되었다고 논했다. 개와 싸우기 위해서는 개와 대등한 입장에 서서 싸워야 하고, 곤경에 처한 개를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이다.

루쉰은 불같이 화를 냈다. 물에 빠졌더라도 나쁜 개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게 사람을 무는 개라면 육지에 있건 물 속에 있건 상관없다.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중국에는 물에 떨어진 개를 동정해서 용서해줬기 때문에 나중에 그 개한테 잡아 먹힌다는 이야기가 많이 존재하지 않는가. 물에 빠졌을 때가 좋은 기회가 아닌가.

무서운 말이다. 항상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고, 친구와 제자를 차례로 암살당한 지식인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증오에 가득찬 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나는 이 생각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과연 그를 둘러싼 상황은 가혹했다. 그렇다고 적에 대해 치열한 증오를 퍼붓고, 그 멸망을 바라는 것만으로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70년대 신좌익의 각 계파가 서로를 죽여온 것을 비교적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이다. 나는 존경하는 「아큐정전」의 작가에 거스르고 말하고 싶다. 지금이야말로 개를 물에서 건져내어 페어플레이를 실천할 때이다. 적어도 증오의 쇠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1930년대의 상해로부터 2000년대의 서울과 동경까지, 사람들은 무엇을 해 온 것일까.

모두가 물에 떨어진 개를 재빨리 발견하고, 즉시 무서운 정열을 발휘하여 물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개에게 돌을 던져왔다. 그들은 만약 개가 평소처럼 지상을 거닐고 있었더라면 너무나 무서워 결코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맘껏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져도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태도가 돌변했다. 여기에 순수한 증오가 존재한다. 그러나 루쉰의 경우와 달리, 그 증오에는 필연적인 동기가 없다. 그것은 집단 히스테리라 불린다.

박유하가 종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저작을 한국에서 출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냉정히 생각해보자. 엉성하고 자의적인 인용을 근거로 형사소송이 이루어지고, 그녀는 위안부 한사람한사람에게 고액의 위자료를 지불할 것을 명령받았다. 뿐만 아니라, 근무하고 있는 대학의 급료를 압류당하고, 인터넷 상의 비난/협박은 물론이고, 신체안전에서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글자 그대로, 심리적으로 생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바로 그 때이다. 한국인과 재일한국인에 의해 치열한 공격이 개시된 것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개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다.

그들의 일부는, 일본에서 박유하가 높이 평가되고 적지 않은 지식인이 그 저작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을 의문시하고, 야유하며, 그 「섬멸」을 바라며 행동하고 있다. 박유하가 위안부의 증언자료를 자의적으로 해석,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닫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박유하를 지지하는 자들은 그녀가 한국에서 입은 법적 수난과 사회적 제재를 먼저 해결하고, 공평한 의논의 장의 성립을 기다려 대일본제국의 죄와 피식민자의 상황에 대해 토의 탐구를 개시해야 한다고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반해, 지지자를 비난하는 측은 승리/패배의 차원에서 목소리를 높여 선동을 계속하여, 사정에 밝지 못한 일본의 언론에 호소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승리」를 획득했을 때, 그들은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위안부 문제에 성실한 관심을 보여온 일본 지식인의 대다수는 이를 계기로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표명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식민지 지배와 여성의 인권유린의 문제로 보려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후퇴해 버렸을 때, 일본의 여론 속에 남는 것은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찬양하는 우파담론 뿐이다. 현재조차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이 우파의 선동에 의해 「혐한」주의자는 지금 이상으로 암약하고, 더더욱 심한 헤이트 스피치의 폭풍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의 상호양해는, 아무리 양국 정부가 금전적인 보상에 의한 합의에 달했다고 하더라도, 그와는 관계없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곤란하고 뒤죽박죽이 될 뿐이다. 박유하가 과감히 제시를 시도한 「보다 큰 조감도」와 한국의 공식적 기억의 상대화가 배제되었을 때, 발생하는 것이 이러한 사태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박유하의 비판자들에게 연구자로서의 페어 플레이 정신이 있다면, 먼저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법적인 조치에 항의하고, 그 해결을 기다려 진지한 토론에 들어가야 하는게 아닐까. 인간은 집단 히스테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냉정히 사물의 순서를 생각해야 한다.

물에 빠진 개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 (번역-오경헌)

[裁判関連] 刑事訴訟 公判記1-アイロニのるつぼ

朴裕河

2016年8月30日

半年以上を費やした準備期間が終わり、第1回刑事裁判が始まった。予定していたことではないが、昨日の公判について簡単に書いておくことにする。

朝9時半。法廷に入ると、いつものように多くの記者たちが待っていた。感想を述べてほしいと言われたが、言いたいことはなかった。圧倒的な暴力の前では言葉を失う。そうした瞬間を、私はこの2年2カ月間繰り返し体験してきた。

検察は、冒頭陳述で、民事裁判での原告側の主張を繰り返した。「朴裕河の本が慰安婦ハルモニたちの社会的評価を貶めた。よって、処罰すべきである」と。私 がそのためのことを「間接的に暗示」したので起訴に至ったというものである。(私は私を「日帝の娼婦」と「明示的に」侮辱したナヌムの家の所長やその他の 人々に対し、いまのところ何の対応もしていない)

検察は、河野談話、国連報告書、アメリカ下院決議などを挙げながら(この20年間、慰安婦 問題を解決するための運動と研究の成果として蓄積された多くの文書が、いまや私の「犯罪」を証明する「証拠資料」として裁判所に提出されている)、既に 「国際法を違反した」ことと国際社会が認めた慰安婦問題について、朴裕河は「性奴隷」を売春婦とみなし、強制連行を否定し、日本軍と同志的関係にあって誇 りを感じたとした、と述べた。そして日本語版は韓国語版と異なるとしながら、私の「隠された意図」を今後日本語版に基づいて説明するとまで述べた。(これ は告訴のあとずっと私を批判し続けてきた鄭栄桓氏の主張でもある)。

検事は最近出版された私に対する何冊かの批判書を持参していた。そして、応酬の最中に何度も「帝国の弁護人–朴裕河に問う」などを覗きながら本の主張を読み上げた。

検事が主張を述べおわった後、判事が裁判の争点をまとめたパワーポイントを画面に映した。

この裁判は、

1 事実の摘示か、意見の表明か
2 事実の摘示である場合、客観的に名誉毀損に該当するのか
3 告訴人個々人に対する名誉毀損なのか
4 摘示された事実が虚偽なのか
5 違法性があるか

を基準に結論が下されるとの説明だった。

私の弁護人も冒頭陳述を行い、私も発言権を得て検事の起訴状に対する反論を読み上げた。

続いて、検事が名誉毀損だと指摘した35カ所を三つ のカテゴリーに分け、処罰すべき理由を述べた。そして弁護人が、指摘された35カ所についての反論を始めた。もともと、35カ所を一つ一つ見ていくことに していたのである。しかし、午前に続いて午後の4時間をかけたが、結局10までしかできなかった。元々はこの日、判事が「最も重要な証拠」と述べた、本に ついての検証を全て行う予定だった。

検事が法廷で述べた主張と、それを聞きながら思ったことを「答弁」の形で書いてみた。弁護士もある程度答えたが、私に発言権が与えられたとしても、こうい うことをすべて述べるように許されたかどうかはわからない。判事が述べた「判断」のための材料になるものとは認められない内容も多かったろう。

検事の主張は名誉棄損かどうかの域を超えている。しかし答えないと、そうした主張も私を判断する間接的な材料となるだろう。少なくとも傍聴席を埋めた記者たちを通して世論には影響を与えるはずだ。そうである限り名誉棄損とは関係ないと考えながら答えなければならない。

しかも答えるべき発言権がその都度与えられるわけではない。私は法廷で、当事者でありながら当事者ではなかった。

———-

検察:検察は、原告側と和解させるための調停を行ったが、被告人が拒否したがために起訴に至った。

答弁:調 停では、①ハルモニ(元慰安婦の女性)たちに対する謝罪、②2015年6月に出した削除版の絶版、③日本語版の削除を求めてきた。削除版は原告側の言い分 を一部認めた仮処分判決に従い、削除すべきとされたところを削除して出したものである。したがってなんの問題はなく、特に日本語版は翻訳版ではなく独自の 出版なのでそうする理由もなく、そうする権利が私にあるわけでもない。

検察:朝鮮人慰安婦を米軍基地の女性と同一視した。

答弁:
米軍基地の女性も韓国政府を相手に損害賠償を求めている。彼女たちも、「愛国」の枠組みで働かされた。

検察:「自発的売春婦」と書いていないと主張しているが、このように本に書かれているではないか。それに前後にその根拠がない。

答弁:「自 発的に行った売春婦」に引用記号がついている理由は、この認識が引用だからである。本の前半、慰安婦は売春婦と主張する人たちを批判するパートで、「自発 性の構造」という小見出しを付けて論じ、彼らの考えを批判した。そして、後ろで、前半の内容を整理するパートで、その概念をもってきて使ったのである。本 を最初から文脈を逃さず読んだ人であれば、無理なく繋げて読めるはずだ。

なにより、この部分はもともと2011年に日本で連載しながら日本 語で先に書かれたものである。そうした経過や文脈を完全に無視している。このフレーズの前に「日本の否定者たちの言うところの」と書いていれば誤解の余地 が少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そのように「わかりやすく」書かなかったからといって、それが告発の理由になるのだろうか。

検察:朴裕河の本は表面的には問題なさそうにみえる。実に緻密な「反論できない構造」なのだ。多くの逆接表現を使って対立する意見を並行させて記している。この本は「隠蔽された犯罪の本」だ。

答弁:そ うした主張は批判者たちのものである。しかし、矛盾するようにみえる事柄が並んでいるのは、第1にこの本が一人の読者のためのものではないこと、第2に体 験が実際多様な形で存在していること、第3にこの本が一つの事実を規定する歴史書の方法ではなく、過去のあらゆる「事実」に対してその後裔たちがどのよう に向き合うべきかを考えるような方法の本だからである。残された様々な「事実」のうちひとつだけを強調しがちだったこれまでの「歴史」の記述方式とそのイ デオロギー性に私は批判的なので、当時を生きた人たちとどのように向き合い、理解し受け入れるべきかを模索した本である結果であろう。そのような方法論に 反発し矛盾とみなすのは、どっちなのかを性急に聞こうとする気持ちによるものである。一つの事実のみを語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が法廷だとすれば、そうした 意味でもこの本を法廷に持ち込むべきではなかった。

検察:しかし慶北大学の法学者キム・チャンロク教授などは、2016年2月のハンギョレ新聞においてこの本が「例外の一般化、恣意的な解釈、過度な主張」をしていると指摘している。

答弁:私 が選んだ内容が、たとえ全体の口述の中での数が少ないものだとしても、それが「例外」だと誰にいえるのだろう。過去に関する口述も、むしろ現在に依拠して 行われることが多いというのは、口述史研究の先端認識でもある。キム教授のいう「例外」が、後になればなるほど少なくなったということもそれを傍証してい る。

また、証言集全てをみれば、強制連行があったと言っている人はむしろ少数だ。にもかかわらずその話をもって「強制連行」を主張してきたことこそ「例外の一般化」ではないのか。

また、もし少数だったとして、それを理由に否定すべきとするのなら、証言者の中で少数の「強制連行」を一般化して主張してきた根拠を示すべきだろう。

検察:また、若い歴史学者の批判によると、朴裕河は非難されないために「安全装置」を使ったという。そうした「安全装置」がこの本では多数使われている。なのに、そうでないという弁明に終始している。

答弁:私 が慰安婦ハルモニを侮辱するつもりだったのなら、直接的に書いたはずだ。原告側と検察は、見えるままに、書かれたままに読まず、意図を疑いながら想像を事 実であるかのように主張している。どうして、書かれていないものをあえて読み取ろうするのか。批判者たちの言う「政治的意図」を先に読み取り、そのための 記述と疑ってかかった結果なのだろうが、それは過去において、思想犯に対して存在しない事実を自白させようとした態度と同じではないのか。

検察:『帝国の弁護人』という本に掲載された歴史評論家によると、「朴裕河のペンは二つだ。日本に向けたペンは丸く、ハルモニや朝鮮に向けたペンはあまりにも尖っている」。

答弁:歴 史家でもない、歴史評論家の意見が犯罪証拠として主張されることを悲しく思う。日本に向けた私の批判がどのようなものかは、日本人が判断すべきことであろ う。むしろ、厳しい批判だとの意見も少なくなく、慰安婦問題を植民地支配問題として問うたことに反発する人たちもいた。朝鮮・韓国に対する批判は、韓国人 にとって居心地の悪いものかもしれないが、それは個人関係がそうであるように、国家関係でも自省が必要と考える私の価値観ゆえのものである。これに関する 私の考えは、機会があるときにもう少し詳しく説明したい。たとえ私の考えに問題があったとして、それは法廷で責められるべきことなのだろうか。

検察:日本に法的責任を問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朴裕河の論法は主語を省略するなど、記述を巧妙にしてどのような責任であるかを不明確にし、争点をぼやかして日本の責任を否定する。

答弁:そ のように見えるのは、「法的責任」のみが責任だとする考えが作り出した疑いによるものだろう。原告側や批判者たちこそ、私が「日本の責任を否定した」とす る話を広めて、国民的な非難を率いた。これこそが、私の言葉を歪曲し「争点をぼやか」したことであり、卑怯なことではないのか。この問題を見る視点が異な るが故の結論だが、それは法廷で責められるべきことなのか。

検察:慰安婦を、貧困を理由に自発的に性売買を行う女性扱いした。否定者たちの言葉を引用しながら、「事実としては正 しいかもしれない」とした。倫理にもとる戦争犯罪と認められた慰安婦問題を、そうでないかのように歪曲した。岡本ゆかによれば、日本の右翼がこの本を引用 しながら慰安婦は日本軍と同志的関係だとした。

答弁:私が本の中で批判した両極端の人たちは、本の出版 後はそれぞれ歪曲を続けた。一方は、自分たちが言いたかったことと全く同じであるかのように利用し、もう一方は私の言葉が自分たちとまったく異なるもので あるかのように歪曲して攻撃した。思うに、その両者は、それまでの考えを守ることにしか興味がない。私の本が、検察が主張するような本だったなら、出版直 後に好意的に取りあげてくれた韓国の新聞の書評らは全て過ちだというのだろうか。慰安婦問題に深く関与しなかった人たちは、心を開いて私の本をありのまま に読んでくれた。

検察:慰安婦問題をホロコーストと比較したことを批判したことは、ホロコーストを否定したも同然である。

答弁:ユダヤ人とドイツ人の関係は、朝鮮人と日本人の関係と同じではない。

検察:「娼妓」「売春婦」とは、金をもらい体を売る人を意味する。そうした人たちと慰安婦を同一視し、自発性を強調し た。「からゆきさんの末裔」という言葉で、自発的に体を売りに行く者たちと同一視した。からゆきは親が売ったと言われているが、受諾書もあったという。朝 鮮人はそうではなかった。

答弁:「日本人娼妓」と苦痛が同じだったという話は「娼妓」よりも「日本人」 を強調したかった表現である。日本軍慰安婦はもともと日本人であったこと、身体を搾取されるのは自発であるかどうか関係なく苦痛だという意味だ。朝鮮人の 場合も、基本的に受諾書が必要だった。業者が偽造したり、戸籍を偽った場合も多いと見ている。

「からゆき」という言葉を使ったのは、第1に 日本軍慰安婦の最初の対象は日本人だったという点、第2に国家の勢力拡張に伴い移動させられた人であるという点、第3に貧困な人たちであったという点を主 張するためのものだ。あえて日本語の「からゆき」をそのまま使ったのは、そのためである。

検察:同志的関係であって愛国的誇りがあったという表現に、ハルモニたちは一番憤慨している。

答弁:同 志的関係とは、一次的レベルを指摘したもので、帝国の一員として包摂された状況を意味する。その枠の中で慰安が戦争を助けるものと意味付けられた状況を示 している。その中で、たまたまありえた男女の親密な関係は、正確にいえば、朝鮮人と日本人の関係、すなわち民族アイデンティティとして出会ったというよ り、男女として、性的アンデンティティを中心にした関係だ。また、遠くに移動させられ孤独だった人同士の環境的、階級的なポジションが作ったものでもあっ た。

愛国を強制されたが、死ぬときには「天皇陛下万歳」よりも「お母さん!」と叫びたかったという日本人兵士の場合も同じである。私は国家 が強制した愛国の枠の中にあったと説明しただけだ。もちろん、実際にどれだけ内面化したのかは誰にもわからない。私はそこまで書いておらず、目に見えるテ キストの存在を指摘し、分析しただけである。

検察:愛国的誇りがあったという根拠がない。

答弁:例えば、国防婦人会のタスキを付けると嬉しかったという記述がある。それは、愛国の枠の中に置かれるとき、ようやく一人の人間として認められたかのような錯覚がおきたのであり、国家がそれを利用したことを語っている。

検察:日本語版では、異なることを言っている。次回に、朴裕河の隠れた意図を証明してみせる。

答弁:異なることを言っていると考えるのは、第1に最初からそのように見ているからだ。第2に読者が異なる以上、表現や内容を多少整理するのは当然のことだろう。

日本に対し、より必要な言葉を、同時に日本人を説得できる言葉を探そうと努力した。それは、糾弾の言葉は他者への説得において効果的でないと考える私の価値観ゆえのことである。それにしてもなぜ日本語版のことをここで話さねばならないのだろうか。

検察:朴裕河の本を擁護する人も多数いる。しかし、我々が指摘した35カ所について反論した人はひとりもいない。

答弁:擁 護者たちが反論しなかったのは、批判書の中の批判だ。あえてそうするだけの生産的な議論にならないと認識したからだろう。そのほとんどが名誉毀損とは関係 のない指摘である上に、また、一々対照して検証しないと、私さえも批判の歪曲に気づけないほどの巧妙な歪曲と嘘の多い批判が多い。

私ですら、そうした批判に向き合う時間的余裕と意欲が最近までなかった。しかし彼らの批判が検察の主張の根拠として使われているので、今後答えることにする。基礎的なレベルの誤読や嘘に答えるのは私一人で十分だ。すでに2年もやっている。

同時に、指摘された部分を含めて、全体として私の本が名誉棄損をするような本でないことを、多くの人たちが指摘している。

検 察は名誉毀損と関係ない部分を持ちだし、私をある意図を持った魔女扱いしている。民事裁判がそうだったように、裁判部と国民に向けて(検事は常に記者たち の顔を見ながら主張していた)影響を与えようとしてのことだろう。名誉毀損とは関係のない、学問的見解に関しても答えるほかないが、こういう話が法廷で行 われることが悲し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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裁判所でのことなので徹底した反論になるほかない。本当の批判者たちに向けての言葉は、また別のものになるだろう。

この裁判の最大のアイロ ニーは、検事も弁護士も、学者若しくは既存の報告書の意見を「代弁」している点にある。そうした論文や報告書を作成した当事者たちは法廷にいない。疑いよ うのない代理戦でありながら、議論の当事者たちは法廷に姿を表さないのである。そして彼らと異なる考え方をした私だけが、「被告」として法廷に呼び出され ている。耐えられないアイロニーの坩堝の中に。

Link: 「帝国の慰安婦」刑事訴訟 公判記1――”被告人”としてひとり法廷へ

[형사1심] 제1회 공판기 – 아이러니의 한가운데에서

박유하

반 년 이상을 끈 준비기간이 끝나고, 첫 형사재판이 시작되었다. 예정했던 일은 아니지만, 어제 공판에 대해 간단히 써서 남겨두기로 한다.

아침 9시 반. 법정에 들어서니 언제나처럼 많은 기자들이 포진중이었다. 감상을 말해 달라고 했지만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압도적인 폭력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런 체험을, 나는 이 2년 2개월 동안 반복적으로 경험해왔다.

검찰은 모두진술에서 민사재판을 통해 익숙해진 원고측 주장을 반복했다. ‘박유하의 책이 위안부할머니들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렸다. 그러므로 처벌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 그리고 내가 그 내용을 ‘간접적으로 암시’했으므로 기소에 이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 고노담화, 유엔보고서, 미하원결의등을 들면서 (이 20년동안 위안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 만들어낸 대부분의 문서가, 이제 나의 ‘범죄’를 중명하는 증거자료로서 법원에 제출되어 있다), 이미 ‘국제법을 위반’한 것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한 위안부문제에 대해 박유하는 ‘성노예’를 매춘부라고 말했고, 강제연행을 부정했으며 일본군과 동지적관계로서 자긍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고 했다. 나아가 일본어판이 한국어판과 다르다면서 나의 ‘감추어진 의도’를 향후 일본어판에 입각해 설명하겠다고까지 말했다.

검사는 얼마 전에 출간된 나에 대한 몇 권의 비판서들을 지참했었고, 실제로 공방 중에 자주 ‘제국의 변호인’등을 뒤적이며 책에 쓰여 있는 주장을 읽었다.

검찰주장이 끝난 후 판사가 쟁점을 정리한 파워포인트를 띄웠다.

이 재판은,
1. 사실적시인지, 의견표명인지
2. 사실 적시라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명예훼손이 되는지,
3. 고소인개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인지
4. 적시된 사실이 허위인지
5. 위법성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결론을 낼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나의 변호인도 모두진술을 했고,나도 발언권을 얻어 검찰의 기소장에 있는 ‘기초사실’에 대한 반박문서를 일부 읽었다. 이어서 검찰이 명예훼손으로 지적한 35개항목을 위 세 개의 카테고리별로 나누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나서 변호인이 35개 항목에 대한 반박에 들어갔다. 오후에도 네 시간을 더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0개항목까지 밖에 하지 못했다. 어쩌면 재판이 예정보다 길어질 지도 모르겠다.

이하는 검사의 주장을 들으며 생각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실제로 말할 수 있었던 건 극히 일부분이다. 내게는 발언권이 쉽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발언권이 주어졌다면 하고 싶었던 답변을 적어 둔다. 이하에 쓴 것처럼, 검찰의 주장이란 대부분 이미 나를 향해 쏟아진 비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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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검찰은 원고측과의 화해를 이끌기 위해 조정절차를 밟았으나 피고인이 거부하여 기소에 이르게 되었다.
답변: 조정에서는 1)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 2) 2015년6월에 발간된 삭제판의 절판, 3) 일본어판의 삭제를 요구해 왔다. 삭제판은 원고측 손을 들어준 가처분판결에 따라 지적된 일부 표현을 삭제하고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될 것이 없고 특히 일본어판은 번역판이 아니라 독자적인 발간이므로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할 권리도 없다.

검찰: 조선인 위안부를 미군기지여성과 동일시 하고 있다

답변: 미군기지 여성도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을 요구중이다. 미군기지의 여성의 경우 아파트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애국’하는 댓가로서의 ‘국가’의 사기적 정황이 오히려 강해 보인다.

검찰: 자발적 매춘부라고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책에 쓰여 있지 않느냐, 더구나 앞뒤에 근거가 없다.

답변: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에 따옴표가 쳐져 있는 이유는 이 인식이 인용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위안부를 매춘부라고만 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부분에서 ‘자발성의 구조’라는 소제목을 붙여 논하고, 그들의 생각을 비판했다. 그리고 뒤에서 앞의 내용을 종합정리하는 부분에서 그 개념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는 책을 처음부터 문맥을 놓치지 않고 읽은 사람이라면 무리없이 연결해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이 부분은 원래는 2011년에 일본에서 연재하면서 일본어로 먼저 쓰인 부분이다. 그러한 맥락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이 말 앞에 ‘일본의 부정자들이 말하는’이라고 넣었으면 오해의 여지가 적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알기 쉽게’ 쓰지 않았다고 해서 고발의 이유가 되는가.

검찰: 박유하의 책은 피상적으로 보면 문제없어 보인다. 아주 면밀하게 ‘반박하지 못하는 구조’를 만들어 두었다. 수많은 역접표현으로 대립되는 의견을 써 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은폐된 범죄의 책’이다.

답변: 이 주장은 비판자들이 한 얘기다. 하지만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이 나란히 있는 것은,
첫째로 이 책이 하나의 독자를 위한 책이 아니며,
두번째로 그런 다양한 체험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세번째로 이 책이 하나의 팩트를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역사서의 방법이 아니라 과거의 여러 ‘사실’과 그 후예들이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모순이 아니라, 주어진 사실 중 하나만을 강조해 온 기존 ‘역사’기술 방식과 그 이데올로기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당시를 살아간 이들과 어떤 방식으로 마주하면서 이해하며 받아들일 것인지를 모색한 책인 결과인 것이다. 그런 방식에 반발하며 모순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느 쪽인지를 성급하게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시키는 일이다. 하나의 사실만을 말해야 하는 곳이 법정이라면, 바로 그 때문에 이 책을 법정으로 가져와서는 안되었다.

검찰: 그러나 경북대 법학자인 김창록 교수등은 2016년 2월 한겨레신문에서 이 책이 ‘예외의 일반화, 자의적인 해석, 과도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답변: 내가 채택한 내용이 비록 전체 구술에서 숫자가 적을 지언정 예외라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과거에 관한 구술이 오히려 현재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구술사연구의 첨단인식이기도 하다. 실제로, 김교수가 말하는 ‘예외’가 뒤로 갈수록 적어졌다는 것도 그것을 방증한다.

더구나 증언집 전부를 통털어 보았을 때 강제연행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다. 그런데도 그런 이들의 담론을 가져와 ‘강제연행’이라고 주장해 온 것이야말로 ‘예외의 일반화’아닌가?

또한 설혹 소수였다 해도 그것을 이유로 부정되어야 한다면, 실제로는 증언자 중 소수인 강제연행설을 일반화해서 주장해 온 근거는 무엇인가? ‘자의적인 해석’ 이란 원고와 검찰과 비판자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이며, ‘과도함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타인의 주장에 대한 과도한 월권행위다.

검찰: 또한 젊은 역사학자들의 비판에서 한 연구자는 박유하가 비난받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런 안전장치가 이 책에는 다수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도 그렇지 않다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답변: 내가 위안부할머니를 모욕할 생각이었다면 왜 직설적으로 쓰지 않았겠는가? 원고와 검찰은 보이는대로, 쓰여 있는대로 읽지 않고, 의도를 의심하면서 상상을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 왜 쓰여있지 않은 내용을 굳이 읽으려 하는가? 비판자들이 말하는 ‘정치적 의도’를 먼저 읽어내면서 그것을 위한 기술이라는 의심을 한 결과일 터인데, 그건 과거에 사상범을 잡아내면서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자백하도록 만든 태도와 똑같지 않은가?

검찰: <제국의 변호인>이라는 책에 글을 실은 역사평설가에 따르면 ‘박유하는 펜대가 두 개다, 일본을 향한 펜대는 뭉툭하고, 할머니나 조선을 향한 펜대는 뾰족하기 그지없다.’

답변: 역사가도 아닌 역사평설가의 난삽한 의견이 범죄증거로 주장되는 정황에 슬픔을 느낀다. 일본을 향한 나의 비판이 너그러운지 여부는 일본인들이 판단할 일이다. 오히려, 엄중한 비판이라고 말하는 이도 적지 않았고, 위안부문제를 식민지문제로 가져왔다는 이유로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한국에 대한 비판이 한국인에게 불편할 수 있으나 그것은 개인관계가 그렇듯 국가관계도 자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가치관이 만든 일이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시간이 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설사 나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법정에서 문책될 일인가.

검찰: 일본에 법적책임을 물어야하는데 박유하의 논법은 주어를 생략하는 등 기술을 교묘하게 해서 어떤 책임인지를 불분명하게 만들면서 쟁점을 흐리고 일본의 책임을 부정한다.

답변: 그렇게 보이는 건 오로지 ‘법적책임’만이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이 만드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동안 나를 비난했던 사람들이야 말로 내가 ‘일본의 책임을 부정했다’는 말을 퍼뜨려 한국인들의 비난을 야기시켰다. 이것이야 말로 나의 말을 왜곡해 ‘쟁점을 흐린’일일 뿐 아니라 아주 비겁한 일이 아닌가.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데서 오는 결론인데, 그것은 법정에서 문책될 일인가.

검찰: 위안부를, 가난을 이유로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여성으로 취급했다. 부정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실로는 옳을 수도 있다’고 했다. 반인륜적전쟁범죄로 인정된 위안부문제를 그렇지 않은 것처럼 왜곡했다. 오카모토 유카에 의하면 일본우익이 이 책을 인용하면서 위안부는 동지적 관계였다고 말한다.

답변: 내가 책에서 비판한 양극단 사람들은, 책을 출간한 이후에도 각각 왜곡했다. 한 쪽은 자신들이 하고 싶었던 말과 똑같은 것처럼 이용하고, 또 다른 쪽은 내가 한 말이 자신들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왜곡하면서 내쳤다. 내가 보기엔 그 양쪽 다 기존 생각을 지키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나의 책이 검사가 말하는 그런 책이었다면, 발간 직후 긍정적으로 다루어 준 한국신문들의 서평들은 잘못 읽었다는 것인가. 위안부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나의 책을 있는 그대로 읽어 주었다.

검찰: 위안부문제를 홀로코스트와 비견한 것을 비판한 것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한 것과 마찬가지다

답변: 유태인과 독일인의 관계는 조선인/일본인과의 관계와 같지 않다.

검찰: ‘창기’, ‘매춘부’란 돈받고 몸파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과 위안부를 동일시하고 자발성을 강조했다. 가라유키상의 후예라는 말로 자발적으로 몸팔러 가는 이와 동일시했다. 가라유키는 부모가 팔았다는데 수락서도 있었다 한다. 조선인은 그렇지 않았다.

답변: ‘일본인 창기’와 고통이 같았다는 이야기는 ‘창기’보다 ‘일본인’에 방점이 있는 표현이다. 위안부는 일본인이라는 점, 기본적으로 신체를 착취하는 행위는 자발이든 아니든 고통스럽다는 의미다. 조선인도 기본적으로는 수락서가 필요했다. 업자가 위조하거나 호적을 속이거나 한 경우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가라유키라는 말을 쓴 건 첫째 일본군위안부의 첫번째 대상은 일본인이라는 점, 국가의 세력확장에 따라 이동당한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굳이 일본어인 가라유키를 가져 온 건 그래서다.

검찰: <제국의 변호인—박유하에게 묻는다>에 글을 쓴 김수지도 제국의 위안부가 궤변이라고 한다. 모순적표현을 사용한다고. ‘안전장치’를 사용해 독자를 우롱했다.

답변: 우롱한다고 생각하는 건 비난의 대상으로 읽고 싶은데 이 책이 그렇게만 읽을 수 없는 책인데서 오는 짜증이 만드는 일일 것이다.

검찰: 동지적 관계로서 애국적 자긍심이 있었다는 말에 할머니들이 가장 분노한다

답변: 동지적 관계란 가장 얕은 수준의 구조를 말한 것으로 제국의 일원으로 포섭된 상황을 말한다. 그 틀에서 전쟁수행을 돕는 것으로 의미화된 정황을 말한 것이다. 그 안에서 어쩌다 존재한 남녀의 친밀한 관계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 즉 민족아이덴티티로 만난 것이 아니라 남녀로서, 즉 성적 아이덴티티를 중심으로 한 만남이다. 또한, 멀리 이동 당해 외로웠던 이들끼리의 환경적 혹은 계급적 의식이 만든 일이기도 했다. 애국을 강요당했지만, 죽을 때 천황폐하만세를 부르는 것보다 정말은 어머니를 부르고 싶었다는 일본인병사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국가가 강요한 애국의 틀안에 있었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물론 실제로 얼마나 내면화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안이하게 추정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나는 눈에 보이는 텍스트의 존재를 지적하고 분석했을 뿐이다.

검찰: 애국적 자긍심이 있었다는 근거가 없다

답변: 예를 들면 국방부인회 띠를 두르면 기뻤다는 기술이 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원고나 검사의 시각같은 이 사회의 매춘차별이다.) 애국의 틀 안에 놓일 때 비로소 한사람의 국민으로 인정받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 것이고, 국가는 그것을 이용했음을 말했다.

검찰: 일본어판에서 다른 말을 한다. 박유하의 의도를 다음에 증명해 보이겠다.

답변: 다른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건 첫째, 처음부터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둘째, 독자가 다른 이상 그 독자를 위해 표현이나 내용을 조금 정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일본에 더 필요한 말을, 동시에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표현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규탄의 언어가 타자에 대한 설득에서 효과적인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의 가치관이 만든 일이다. 그런데 왜 일본어판이 여기서 거론되어야 하는가?

검찰: 박유하의 책을 옹호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지적한 35개 항목에 대해 반론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답변: 그건 첫째 그저 어처구니 없는 오독이거나 거짓말인 경우가 많아 대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은 나 하나로 충분하고, 이미 2년 이상 해 온 일이다.

둘째, 실제로 옹호자들이 반론하지 않은 부분은 비판서에서의 비판이다. 이 역시 그 작업이 굳이 그럴 만한 생산적 담론이 못된다는 것을 옹호자들이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 명예훼손과는 관계없는 지적이고, 나아가 일일이 대조검증하지 않으면 나조차 그 왜곡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한 곡예적인 왜곡과 거짓말이 많다. 누가 일부러 시간들여 그 작업을 하겠는가?

나조차도 여지껏 의욕과 여유가 없어 못했지만 이런 식으로 검찰이 그들의 말을 검찰의 주장으로서 사용하고 있으니 이제 해야 할 것 같다.

검찰은 명예훼손과 상관이 없는 부분을 가져와 나를 어떤 의도가 있는 마녀로 몰고 있다. 이는 민사재판부가 그랬던 것처럼 재판부와 국민을 향해 (검사는 내내 기자들의 얼굴을 보며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에서 하는 일이다. 명예훼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장에도 이렇게 대답해 나가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법정에서 이야기되는 일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

—————

이 재판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검사도 변호사도, 학자와 기존 보고서들의 견해를 ‘대변’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 논문이나 보고서를 만든 이들은 법정에 없다. 완벽한 대리싸움임에도 학자들은 법정에 아무도 없다. 그저 그들과 다르게 생각한 내가, ‘피고인’으로서 법정에 불려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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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との向き合い方–誰のための不和なのか

朴 裕河

私が執筆した本、そして私を巡って起きたことについて書き綴ってみようと思う。本来であれば、とっくの昔に書くべきであったのだろう。しかし、時間的・精神的な余裕がなかった。そして8月30日には、2013年に発刊した私の本『帝国の慰安婦――植民地支配と記憶の闘い』を「犯罪」として処罰しようとする裁判が開かれる。これまでフェイスブックにその都度起きたことや考えを書いてきたので、その過程の「記録」ならある程度残してきた。また、いくつかのインタビューや公式的な文章にもこれまでの私の考えは書いている。

しかし、本当に必要なことは書けなかった。2007年、『和解のために』の日本語版がある在日韓国人の女性研究者とその周りの人々から批判されたとき以来、私は日韓知識人たちの「歴史との向き合い方」について書こうとしてきた。しかし、他のことに関わっている間、時間が過ぎていった。もうこれ以上引伸ばすのはよくないと考え、書き始めることにした。裁判を目前にしてはいるが。いや、裁判を目前にしているからこそ。

過去を振り返るこの文は、これからの裁判と共に進み、事態に対する私の整理と分析と反省を込めたものになるだろう。もちろん、これまで私に向けられた多くの批判と非難と疑惑に答えるものになることを願っている。そうした意味で、遅きに失したが、特に批判者の方々に読んでいただきたい。

『帝国の慰安婦』は三つの訴訟の対象となった。名誉毀損なので処罰してほしいと国家(検察)に訴える刑事裁判、この本によって損害を被ったから賠償してほしいとの民事訴訟、そしてこの二つの裁判の結論が出る前に、速やかにこの本の問題部分を削除してほしいとする仮処分訴訟(後述するが、原告側は最初は全面的な出版禁止を求めていた。そして途中から請求の趣旨が変更された)、の三つである。

そして、2015年2月の仮処分訴訟と2016年1月の民事訴訟で、私は敗訴した。二つの裁判に対し直ちに控訴したが、これらの控訴審は刑事裁判第1審判決後にしてくれと要請したので、現在は刑事裁判のみが進行中である。そして半年近く「裁判の準備」だけをし、今まさに刑事裁判が始まろうとしている。予定通りであれば、10月10日に刑事裁判1審が終わる。

それなりの使命感をもって執筆した本が「審判」の対象になるのもそうだが、私がこの裁判において最も残念に思っているのは、私を罰してほしいと国家に訴えた主体が「慰安婦」ハルモニ(おばあさん)たちになっているという点だ。これから詳細に語ることになるだろうが、この告訴と起訴は、慰安婦問題をめぐる知識人(運動家を含む)同士の考え方の違いが作り出したものと私は考えている。

もちろん、ハルモニの主体性を否定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少数であっても、ハルモニたちの中にはこの事態を主体的に判断し、行動することができる方々が確かにおられる。である限り、告訴の主体がハルモニたちとする考えは間違ってはいない。

しかし、学者でさえ、この本を「どのように」読んだかによって評価が異なってくる。さらに、裁判所にはこれまで慰安婦問題解決のために支援団体などが行ってきた活動関連資料と、研究者たちの論文や書評が数多く引用されたり、直接提出されたりしている。ハルモニたちが告訴主体になっていても、裁判資料はすべて周りの人々が作成したものであり、私は私を守るためにそうした資料に対し反論してきた。むろん、これからも反論し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うである限り、この裁判がどのように始まったにせよ、実状において、法廷が裁判を助ける周りの人々と私の考えが対立している場で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この事件の最大のアイロニーは、私を処罰したがる学者たちが裁判所にはいないということだ。そのような空間で、彼らと私の考えが法曹関係者たちに代弁され、まもなく、結論までもが、学者不在の場で下されるであろう。

とはいえ、どのような過程があったにせよ、私の本がハルモニたちの怒り、悲しみ、戸惑いを誘発するきっかけとなったので、私は告訴された直後、「ハルモニたちに申し訳ない」「今回の訴訟の主体は実際には『ナヌムの家』(注:元慰安婦が共同生活を送る支援団体の施設)の所長と思われるが、彼から歪曲された説明を聞かされたかもしれない、若しくは本の一部を読まされたかもしれないハルモニたちの怒りは理解できます。そして本来の意図とは異なる形で伝わったにせよ、私の本が原因となってハルモニたちに苦痛を与えたのならば、申し訳ないと思います」と書いた(2014年6月16日フェイスブック)。

そして最近、ハルモニたちに直接手紙を書こうとした。いや、私は既に3回も手紙を書こうと試みた。
しかし、そうした手紙を書き、また近い人たちの意見を聞く過程で、私はそれまであまり考えてこなかったことを色々と考えさせられた。そして、まずはこの文を先に書くことにした。

告訴以降の私の行動と文章は、注目され、監視され、疑いに満ちた「解釈」の洗礼を受けてきた。そのように私の言葉が変形されてきた以上、たとえその手紙が出されたとしても、そうした運命から逃れられなかったであろう。

なので、ハルモニたちに手紙を書くことは少し留保しておく。そして私の言葉と行動が、「解釈」の暴力の下に置かれない日を待つことにする。

まずは、この事態を、時間をかけてゆっくりと振り返ろうとするこの作業が、ハルモニたちと批判者たちに対する手紙になることを願いたい。

慰安婦問題は単純に日韓の問題ではない。20年以上にわたる日韓両国の運動と、関係学会と、この問題を長い歳月の間報道してきたメディア、この問題を巡って発言してきた知識人、そして現実の国家政治まで影を落としている問題なのだ。慰安婦問題に関して書いた私もまた、そうした構図の中に入れられてしまった。かように複雑に絡まった問題を、どこまで解くことできるだろうか。それでも試みてみる。

そうした私の試みが、この問題に深く関わってきた人たちに、小さくても何らかの刺激になることを願っている。そして私の文がきっかけとなって、それぞれの場から見えた事柄と考えが、より多く世の中に出てくることを願っている。そうなったとき、慰安婦問題は、私たちの中において、私たちの時代を前に進める動力に、初めてなってくれるであろう。そのとき私たちは、葛藤と傷に見舞われた4半世紀の過去をようやく肯定的に抱きしめられ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続く)

Source: http://www.huffingtonpost.jp/park-yuha/historical-consideration-one_b_11763860.html

[형사1심] 제1회 공판기일 제출 의견서 (박유하 변호인)

전문 다운로드 : 형사소송 제1회 공판기일 제출 의견서 (박유하 변호인)

검찰은 범죄일람표 1번 내지 35번을 피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의 증거로 제시하였는 바, 피고인은 이하에서 위 각 범죄일람표의 기재내용이 ① 피고인 개인의 ‘단순한 의견표명’에 불과하며 ② 설령 위 내용이 의견표명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위 부분에 대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해석을 통해서도 구체적 사실을 표현한다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피고인은 이 사건 도서에서 위안부는 성노예였으며, 일본군의 강제연행이 있었으며, 일본국은 위안부 문제에 있어 책임이 있다는 점 등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바,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가 성립하지 아니하거나,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여 피고인은 무죄임에 대하여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2) 元「慰安婦」の方たちとの出会い

1.2 元「慰安婦」の方たちとの出会い

 

慰安婦問題を改めてちゃんと論じようと思ったのは、『帝国の慰安婦』にも書いたように、日本政府がいわゆる佐々江案を提案したのに韓国政府が支援団体の反対を気にして拒否した2012年の春である。もっとも、慰安婦問題に対する私の考えの概略はすでに『和解のために』の中で書いていた。そういう意味では、あえてまた書くべき必然性はなかった。しかし、日韓両国民(若しくは左翼と右翼に)に向けて意見を提示した『和解のために』は、日本では過分な反応を得たが、韓国(支援団体)ではメディアの好意的レビューを得ながらも当事者周辺の人たちには黙殺された。そして、2010年代に入ってから、挺対協の少女像建立と李明博元大統領の竹島訪問以降、両国のメディアには露骨な嫌悪と憎悪が溢れるようになっていた。なにより、大人の主張を信じるほかない若者たちが、傷つき敵対心を募らせつつあった。私は、それまでの四半世紀以上に深刻な四半世紀を目の前に見る思いがした。

そこで、帰国後、時間を惜しんで執筆に励んだ。人に会うことさえできるだけ減らした。一冊の本が世の中を変えられるとは思わなかったが、小さな声が別の声と出会うためには、まずは静かな湖に石を投げるべきと考えた。毎日のように何らかの日韓間の葛藤が報道されるような状況だったので、できるだけ早く書きたくもあった。怨恨を抱いたままこの世を去る方が一人でも少ないこと願っていた。そして2013年夏、私は『帝国の慰安婦』を出版した。

 

『帝国の慰安婦』はいわゆる歴史書ではない。歴史と`向き合う方法`について考えた本である。そのために必要な、最小限の「ファクト」について考えてみた本だ。学術書の体にも作れる資料を用いながらも一般書の形式で出したのは、両国民が広く知るようになった問題である以上、アカデミズム内の議論だけでは、この事態を乗り越えられないと考えたからである。

 

追われるような気持ちで本を出してから、私はその秋から元慰安婦の方たちに会うことを始めた。執筆中に会わなかったのは、20年も前の古い証言集の方こそが、慰安婦をめぐる状況を豊かに示していると思ったからである。そこには、イメージが単一化される以前の、「国民の常識」となり「国定教科書」的集団記憶になる前の、「女たちの話」があるがままに残されていた。

 

私は証言集に残されていた、そうした女性たちの声に耳を傾け、それに基づいて「朝鮮人慰安婦」がどのような存在であったかを考えた。結論として、アジア女性基金事業の終了とともにこの問題を忘れていた感があった日本に向けて、新たな謝罪と補償が必要と書いた。どういった形が良いかは、当事者も含む協議体を作って議論し、この問題について国民に広く知ってもらうようにメディアの参加も得ての解決が必要とした。日本版では国会決議が必要とも付け加えた。しかし、証言集のみに依拠しての結論だったので、私には「今、ここ」を生きている元慰安婦の方たちに会う必要があった。

 

慰安婦問題発生初期から元慰安婦たちのために尽力してきていながら、アジア女性基金関係者ということで挺対協から敵対され、入国禁止にまでなった日本の女性ジャーナリストがいた。『和解のために』でそのことに触れたことが縁になって、私はその女性と会うことにもなった。その人は基金解散以降も続いた、日本政府の予算で行われた元慰安婦のアフターケア事業にかかわっていた。

 

そこで私は、その女性がまたソウルを訪問した時、元慰安婦に一緒に会いたいと頼んだ。そして市内のあるホテルで元慰安婦の方たちに会うことができた。中には、証言集で口述を読んだことのある方もいられた。

その出会いは私にとっては緊張に満ちた体験だった。「和解のために」を出した後でもあり、10年前とは状況も気持ちも変わっていた。本を書くことは元慰安婦の人生や歴史や現在の政治にコミットしたことでもある。私には書いたことに対する責任があった。自分の分析が間違っているとは思わなかったが、それでも、私の知らない歳月、私の知らない辛酸を極めた体験に向き合うことは、緊張を要した。

その日、私は元慰安婦の方たちから主に日本の謝罪と補償についての考えを聞いた。体験を一部聞きもしたが、個々の詳しい体験を聞くことは控えた。慰安婦問題の専門家になろうとも思わなかったし、新たに本を書く気持ちもなかったからである。私ひとりのために、苦痛の記憶を思い出させる権利はないとも思った。

 

そして、以外にも最初の出会いの時から、私は彼女たちが望む謝罪と補償が、支援団体が語ってきた主張とは異なることを知った。その後自宅に出向いてお会いした他の方も同じだった。その方は、「強制的に連れて行かれた」体験を繰り返し語る方だったが、それでも「法的責任」の要求などは要らない、補償金を受け取れればいいと述べた。

 

驚きはなかった。すでにアジア女性基金を巡っておきた分裂と葛藤を知っていたので、そうした声の存在は十分に予想できることだった。同時に、そうした声があるという理由だけで、長い歳月の間、この問題を様々に研究し考え、解決のために頑張ってきた支援者たちの考えが、当事者でないという理由だけで無視されるべきとも思わなかった長い歳月を当事者たちを支えてきた支援者たちは、半分当事者のようなものと考えたからである。

 

重要なのは、そうした声がこれまで「聞こえてこなかった」ということだった。私はそのことを再確認しながら、『和解のために』と『帝国の慰安婦』にを通しての私の試みが無力だったことを知った。本を書いた重要な目標の一つは、この問題に関する元慰安婦の「もう一つの声」を伝えることだった。しかし、私の試みは依然として失敗したままだった。元慰安婦たちとの出会いは、わたしにはそう気付かざるを得ない時間でもあった。

 

その他の元慰安婦の方たち会うには、挺対協やナヌムの家を介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すべての個人情報は支援団体が持っていたからである。

しかし、水曜集会に参加してきた私の教え子は、元慰安婦の方たちとは話すどころか接近さえできなかったと言った。元慰安婦が外部の人に会うことを極力避けているように見えたとも言った。

 

挺対協に私が直接連絡をとらなかったのは、挺対協が私を『帝国の慰安婦』刊行直後に早くも訴えようしていたことを知っていたからである。本が発刊されて間もない頃、挺対協関係者が弁護士を呼んで私を訴えるべく相談したことを、私は二つの経路から知った。しかしこのとき相談した弁護士は、告訴に対して否定的だったと聞く。

ところが、2016年3月、私への起訴に抗議する声明を出してくれた日本の学者たちが開いてくれた討論会に出された李・ナヨン教授の資料には、元挺対協代表の鄭チンソン教授と私の本をめぐって相談し、対応するだけの「価値がなかったため」対応しなかったと記されていた。

 

どちらが真実か、私は知らない。確実に言えるのは、最初の告訴状で指摘された100箇所以上の本の抜粋の中には、挺対協に関する記述が少なく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帝国の慰安婦』は挺対協批判でもあるのだから、関係者たちの戸惑いも理解できないわけではない。私への告訴に踏み切ったのはそれから10ヶ月後のナヌムの家であり、挺対協が実際に関与したのかどうか、関与したとしてどのくらい関与したのかこれもまた私にはわからない。

しかし、仮処分と損害賠償裁判に出された原告側の書面と資料にあったのは、運動家と学者の顔・意見そのものだった。私の本を「虚偽」とみなすべき「証拠資料」として出されていた多くの資料が20余年の挺対協の活動のたまものであることは間違いない。国連報告書の類は言うまでもなく、そこには河野談話さえ入っていた。慰安婦問題を否定する人たちを批判するために用意された全ての資料が、今度は私に向けて出されていた。現在進行中の刑事裁判でも、まったく同じ資料が提出されている。

 

そのような挺対協を介して元慰安婦の方たちに会うのは不可能にみえた。そこで、私はもう一つの支援団体(福祉施設)であるナヌムの家に連絡した。挺対協と違って自分たちの考えを積極的に外に出すような活動をしなかったので聞きたかったからでもある。

始めて電話で繋がったナヌムノ家の所長に、学期中でソウルから離れているナヌムノ家まで行く時間がまだなかなか作れないので、近々ソウルに用事がある時は連絡してほしいと頼んだ。はじめ所長は、私に丁重に接した。

そしてある日、(11月のことだが)私の方でナヌムの家に行けそうだと電話で話したとき、当日自分は不在だが、事務局長と話したらいいと言ってくれた。

そこで私は、11月末のある日、先の日本人女性ジャーナリストと一緒にナヌムの家に行った。ホテルで会った方のうちのひとりがナヌムの家で暮らしていたので、その方とは再びの出会い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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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할머니들과의 만남

박유하

앞서 쓴 것처럼, 위안부문제론을 한 권의 책으로 제대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2012년 봄이다. 사실 나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은 <화해를 위해서>에 거의 썼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굳이 다시 써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일양국에 (혹은 좌파와 우파에게) 말걸기를 시도한 <화해를 위해서>는 일본에서는 과분한 반응을 얻었지만 한국(지원단체)에서는 묵살당했다. 그리고 정대협의 소녀상 건립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이후 양국 언론은 혐오와 증오만이 넘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른들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청소년들이, 상처받고 적개심을 다지면서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었다. 지난 4반세기이상으로 심각한 4반세기를 예상해야 할 상황이었다.

귀국 후, 촌음을 아껴 집필에 매진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가급적 줄였다. 책 한 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작은 물동그라미(파문)가 또다른 물동그라미를 만날 수 있도록 하려면, 우선은 나부터 돌을 던져야 했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원한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는 분이 한분이라도 적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3년 여름에 <제국의 위안부>를 내놓을 수 있었다.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 책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담으려 한 책이다. 학술서로 만들 수 있는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일반서 형태로 낸 것은, 양국국민이 널리 알게 된 문제인 이상, 아카데미즘 안에서의 논의만으로는 이 사태를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쫓기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내고 나서, 나는 할머니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집필 중에 할머니를 만나지 않은 것은, 오래된 증언집들에 오히려 더 풍부한 서사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는, 단일화되기 이전의, ‘국민의 상식’이자 ‘국정교과서’가 되기 이전의 “여성의 이야기”가 온전하게 담겨 있었다.

나는 증언집을 통해 그렇게, 훼손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또 그에 근거해 조선인위안부가 어떤 존재인지 분석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죄와 보상이 필요하며 그를 위한 협의체에 당사자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썼다. 그러니 책을 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뒤늦게나마 “지금 이곳”의 힐머니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위안부문제 초기부터 할머니들을 위해 애써왔음에도 90년대 후반에 아시아여성기금일을 하면서 정대협과 갈등을 빚고 입국금지를 당한 일본의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화해를 위해서>에서 그 이야기를 쓴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여성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여성은 기금해산 이후에도 이어진 일본정부에 의한 예산으로 할머니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성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함께 만나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시내 한 호텔에서 위안부할머니들 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증언집에서 이미 체험을 읽은 적이 있는 분도 계셨다. 그 만남은 긴장되는 체험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월, 내가 모르는 신산한 체험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고 긴장을 요한다. 그날, 나는 그분들과 주로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체험을 듣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위안부문제로 또다른 책을 쓸 생각이 없는 이상, 그분들께 나 하나를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불러내도록 해야 할 권리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이 원하는 사죄와 보상이 지원단체가 말해오던 주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에 자택으로 찾아가 만난 또다른 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분은 강제로 끌려간 체험을 스스로 말씀하시는 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법적책임’요구같은 건 필요없고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아시아여성기금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오랜 세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해 온 주변인들의 생각이 주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그런 목소리가 그동안 ‘들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것을 새삼 다시 확인하면서, <화해를 위해서>와 <제국의 위안부>에서의 나의 시도가 무력했음을 알았다. 나의 책의 주요목표는, 이 문제에 대한 할머니들의 생각을 전하는 일이었지만, 나의 시도가 여전히 실패중임을 아프게 깨달아야 했던 시간이었다.

또다른 할머니들을 만나려면 한국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나 나눔의집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온 나의 제자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고 했다. 지원단체가 할머니와 외부인의 만남을 극력 꺼리는 듯 했다고 말했다. 정대협에 내가 직접 연락하지 않은 것은, 정대협이 나를 발간직후에 고발하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 발간직후인 9월 경에, 정대협이 변호사를 불러 나에 대한 고발에 관해 의논했다는 것을, 나는 정대협관계자가 올려놓은 일지에서 봤다. 그리고 이 때 의논했던 변호사는 고발에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훗날 다른 변호사를 통해 듣기도 했다. 그런데 2016년3월, 나의 책에 대한 논의를 하는 모임이 도쿄에서 열렸을 때 제출된 이나영교수의 자료에는, 전 정대협대표인 정진성 교수 등과 논의했으나 내 책이 대응할 만한 ‘가치가 없어’서 대응하지 않은 것으로 쓰여 있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발장에 지적된 100곳 넘는 부분 중에는 정대협에 관한 기술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책에서 정대협을 비판했으니 이들의 당혹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 대한 나눔의 집 고발에 정대협이 관여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원고측 서면과 자료에서 운동가와 학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 적은 없다. 그리고 그런 연구와 자료들을 만든 것이 정대협운동인 건 분명했다.

정대협을 통해 할머니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또하나의 지원단체인 나눔의집에 연락을 했다. 전화로 연결된 나눔의집 소장에게, 학기 중이어서 광주에 내려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가 당분간 쉽지 않으니, 혹 서울에 용무가 있을 경우 연락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후 서울에서 만날 수는 없었다. 그가 나의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대협에 대한 비판서이기도 한 나의 책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예의를 갖춰 대했고, 11월 말에 내가 나눔의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당일 자신은 나눔의집에 없지만 사무국장과 얘기하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앞서의 일본인 여성과 나눔의 집에 함께 갔다. 호텔에서 만난 할머니 중 한 분이 나눔의 집에 계시기도 했기 때문에 그 분과는 재회의 만남이 될 터였다.

(1) 慰安婦問題との出会い、『帝国の慰安婦』まで

1。ぺ・チュンヒさんへの想い

1.慰安婦問題との出会い、『帝国の慰安婦』まで

 

すでに書いたことがあるが(「外交とは何か」 ,2014/3/11, facebook note)

私は1990年代の初めに東京で行われた元慰安婦たちの証言集会で、通訳ボランティアをやったことがある。それが慰安婦問題との初めての出会いだった。だから慰安婦問題は私にとっても4半世紀経った問題ということになる。

もっとも、運動や本格的な研究を早くに始めた人たちに比べれば、私のこの「出会い」は取るに足らない体験に過ぎない。そうした意味で、長い間この問題に関心を持ち続け、元慰安婦の方たちと研究または運動という形で共に歩んできた方々には常に敬意を表したい。

 

私の研究対象は日本近代文学である。そのため、慰安婦問題を考察対象にすることは考えなかったし、帰国後も、そうした状態は続いた。冷戦終了後の韓国の90年代は強力なナショナリズムの時代でもあり、慰安婦問題がそうした時代に支えられる形で社会問題化されたことも、私をしてこの問題に近づけさせなかった理由である。

私は当時、日本近代を代表する作家夏目漱石のナショナリズムが帝国主義を支えるようになる仕組みに関心をもっていた。民族アイデンティティ自体が女性に抑圧的だという事実を認識し始めた頃でもあった。そのため、そうしたナショナリズムに女性運動が頼っている状況を、複雑な心境で眺める他なかったのである。そして、幸か不幸か、慰安婦問題の中心にいた人たちとのネットワークもわたしにはなかった。80年代後半を日本留学で過ごした結果として、民主化運動関係者も、梨花女子大学を中心とする女性運動関係者もそして実践的キリスト教関係者も私の周りにはいなかったのである

 

それでも慰安婦問題に対する関心を持続できたのは、やはり1990年代の初めに同時通訳をしながら、泣き叫ぶ元慰安婦の方たちの白いチマチョゴリ姿が私の胸の中に深く刻まれたからであろう。同時に、十代からの私の読書リストの中に、韓国戦争前後を背景としたいくつかの小説があったからかも知れない。いわゆる「洋公主」に注がれた暖かな視線のいくつかの小説のおかげで、私は彼女たちの悲しみを理解することができた。

さらに、韓国で日本学を教える者として、若者たちの日本に対する敵愾心や、日本に向けられる自分の好意に対する罪の意識に、無関心ではいられなかったことも、私の関心を継続させてくれた。

 

元慰安婦の方と直接会って話す機会を得たのは、それから10年以上過ぎた2003年の冬だった。当時、金君子さんなどナヌムの家に暮らしていた数名の方が、韓国政府の無関心への抗議意思表示として、国籍を放棄すると発表したことがあった。丁度、訪韓中であった日本のフェミニスト学者の上野千鶴子さんもその問題に興味をもっておられ、上野さんの知り合いと3人でナヌムの家を訪ねた。そして、この時の訪問で、ナヌムの家の建設に少なからぬ日本人が寄付していること、上野さんもその一人であること、ナヌムの家に来ているボランティアの多くがが日本人であることなどを知った。

 

特に新鮮な衝撃を受けたのは、金君子さんの抱く憎しみが日本軍より(義理の)父親に対してより大きいこと、ナヌムの家からわざわざ離れたところに暮らす方がいること、そしてその方の心の中にある日本軍兵士を想う心が生きていたことだった。

この日得た認識を、私は2年後に出版した『和解のために』に少し書いた。ひとりの中の記憶と社会との関係、過去の記憶と現在の相関作用などに興味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もこの頃である。

 

2005年、私は初めて慰安婦問題を扱った本『和解のために–教科書・慰安婦・靖国・竹島』を出した。それは、それまで慰安婦問題の中心にいた研究者と運動家に対する私なりに試みたコミュニケーションでもあった。90年代に元慰安婦たちに向けられていた多くの日本人の心、当時の韓国にはほとんど知らされていなかった日本の謝罪と補償について韓国に紹介する意味もあった。

 

しかし、韓国ではいくつかの書評を得ただけで、慰安婦問題の中心にいる人たちの反応はまったくなかった。

そして、その年の暮れに、前年度の2004年に小森陽一さん、金哲さん、崔元植さんたちと一緒に作った「日韓、連帯21」の企画で和田春樹さん、上野千鶴子さんを報告者とし、小森陽一さんを討論者とする慰安婦問題シンポジウムを開いた(「東アジア歴史認識のメタヒストリー」収録、青弓社)。その時事務局長だった尹美香挺対協現代表を討論者として招待もした。しかし話は噛み合わなかった。

 

翌年の終わり、日本で『和解のために』が翻訳された。私が最も信頼していた研究者たちが書評会を開いてくれたが、同じく周りにいた別の人たちは批判者に回り、その書評会に出席しなかった。そして、その時討論者として参加してくれたある研究者は、討論会に出ることを挺対協の人たちから反対されたと述べた。

そしてその年の夏、「和解のために」に対する最初の批判が現れた。韓国で挺対協活動を行っていた金富子さんの批判である。その後何人かの批判がさらに出たが、そこには、「和解のために」が誰かに言われて書かされたとする誤解までがあった。現在まで続いている、根拠のない疑惑や誤解は、思えば10年前から始まっていたのである。

 

そして2008年、2009年に徐京植さん、尹健次さんなどによる朴裕河批判が、主にハンギョレ新聞誌上を借りる形で韓国で相次いだ。

両氏は、私の本が日本の右翼の賞賛を得た、日本のリベラルな知識人たちが朴裕河の本を支持するのは実は植民地支配に対する真の謝罪意識がないため、などと語った。思いもよらぬ、根拠のない攻撃に私は戸惑ったが、記事を書いた記者に抗議したのみで、それ以上の対応はしなかった。

この時の選択が間違った行動だったことを知ったのは、それから何年か経った2014年6月である。突き付けられた告訴状には、朴裕河のいう和解とは日米韓の同盟を強化させるもの、といった考えがそこにはあった。朴裕河の歴史認識は間違っているとする、徐京植/尹健次両氏の影響があからさまなその告訴状は、私が適切な形で訂正しなかったため、私に対する疑いが韓国で拡散されてしかったことを示していた。

あるいは、私を批判した人たちが訴状作成に直接関係したのだろうか。私は未だ、告訴をめぐる状況を知らない。いずれにしても、この告訴が、慰安婦問題に関する知識人たちの考えの影響の元に行われたことだけは確かである。しかも、告訴のあとは学者による、より露骨な告訴への加担が目立っている。

 

2010年代に入り日韓の関係は更に悪化し、そうした状況の中心には常に慰安婦問題があった。私は、『植民地支配とは何か』というタイトルになるはずの、日本に向けて書く予定だった本の中に、慰安婦問題に1章を割くことにした。アジア女性基金解散以降、慰安婦問題に対する関心が著しく低下し、否定者だけが関心を持っているように見えた日本に向けてまだ話したいことがあったからである。

 

そして2011年の秋、研究年を迎え滞在することとなった東京市内早稲田大学周辺の小さな家で、後に『帝国の慰安婦』の一部ととなる原稿を書き始めた。後日、告訴の対象となった、元慰安婦たちの名誉を毀損するものだと指摘された「売春的強姦、あるいは強姦的売春」という言葉は、実はその時書かれたものである。

つまり、わたしは「売春!」と主張する人たちに向けて、実はそれは構造的に「強姦」的なものであることを喚起させようとした。言い換えれば、売春ではなく構造的強姦であることを強調した表現である。(のちに韓国語版を書く時構成を変えたために元の文脈が見えなくなってしまったが、連載した<ウェブ論座>には原文にはそうした意図が残っているはずだ。)

2012年の4月と5月に慰安婦問題解決に向けての日本政府の試みが挫折するのを見ながら、私は韓国に向けてもう一度本を書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そこで、もとの予定を変えて『帝国の慰安婦』の韓国語版を構想し始めたのである。

つまり、<帝国の慰安婦>はもともとは日本に向けて書かれたものである。当然、日本の責任を問うための本である。

それまで戦争犯罪としてのみ扱われてきた慰安婦問題を朝鮮人慰安婦に限定しつつ植民地支配が引き起こした問題として考え、しかし、これまで日本がその点を認識したことはなかったことを強調し、したがって、それに基づく謝罪と補償が新たに必要、としたのがこの本だった。

同時に、業者や村の人々、さらに親など韓国の中の責任を問うことを避けるつもりはなかった。というのも、それは何よりも元慰安婦の一部の人々の考えでもあったから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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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제국의 위안부』까지

박유하

1. 배춘희 할머니를 생각하며

1.1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제국의 위안부』까지

이미 쓴 적이 있지만(‘외교란 무엇인가’), 나는 1990년대 초, 아직 유학 막바지 무렵에 도쿄에서 위안부할머니들의 증언집회에서 통역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안부문제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니 위안부문제는 내게도 4반세기 함께 한 문제인 셈이다. 물론 운동이나 본격적인 연구를 이 무렵 시작한 이들에 비하면 나의 이 ‘만남’이란 아주 작은 체험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세월 이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할머니들과 연구 혹은 운동이라는 형태로 함께 해 온 분들께 먼저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의 연구대상은 일본근대문학이고, 그런 의미에서도 위안부문제는 이 무렵의 내겐 아직 본격적인 고찰대상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귀국 후에도 나는 이른바 ‘위안부문제’와 나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냉전종식후 한국의 90년대는 강력한 민족주의시대였고, 위안부문제는 그러한 시대에 기대는 형태로 사회문제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일본근대를 대표하는 작가 나츠메소세키의 민족주의가 어떤 식으로 제국주의를 지탱하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 민족아이덴티티자체가 여성에 억압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무렵이기도 했다. (훗날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라는 책에 그 인식을 담게 되었다.) 따라서 그런 민족주의에 여성운동이 의지하는 정황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이들과 교류할 만한 네크워크도 없었다. 80년대 후반을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보낸 탓에, 민주화운동관계자도,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관계자도, 그리고 실천적 기독교관계자마저 내 주변엔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의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이 지속된 것은 역시 1990년 대 초반에 동시통역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흘렸던 눈물체험과 절규하던 할머니들의 하얀 치마저고리 모습이 내 안에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십대부터의 나의 독서물리스트 안에 한국전쟁전후의 소설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양공주’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담긴 몇몇 소설가들 덕분에 나는 그녀들을 내 안에서 편견없이 바라볼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일본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나 일본을 좋아하는 일에 대한 죄의식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것도, 나의 관심을 지속시켜 준 중요한 동인이었다.

할머니들을 가까이 만나 이야기하는 기회를 갖게 된 건 그로부터 무려 10년이나 지난 2003년 겨울이었다. 당시 김군자 할머니 등 나눔의 집에 계신 몇 분이, 한국정부의 무관심을 질책하면서 항의의 표시로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한 일이 있었다. 마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페미니스트학자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 우에노선생의 제자와 셋이서 나눔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 때의 방문에서 나는 밖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 건설에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 나눔의 집에 와서 봉사를 하는 이는 대부분 일본인이라는 사실 등.

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김군자 할머니의 미움이 일본군보다 (수양)아버지를 향해 더 크다는 사실, 일부러 나눔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시는 분이 있고, 그 분의 가슴에는 한 일본군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날 얻은 인식도 나는 2년 뒤에 낸 <화해를 위해서>에 썼다. 한 사람 안의 기억과 사회의 관계, 과거 기억과 현재의 상관작용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작고한 니시카와 나가오 선생의 부인이신 니시카와 유코 선생이 중심이 되고 우에노 선생, 역사학자 나리타류이치 선생이 함께 한, 일본학술지 <思想>이 기획한 근대가족과 국가문제특집에 재일교포작가 이회성론을 발표하면서, 기억이 어떤 식으로 인간을 무너뜨리거나 지탱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때이기도 했다.

2005년, 나는 처음으로 위안부문제를 다룬 책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냈다. 그건, 그 동안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연구자와 운동가들에 대한 내나름의 말걸기이기도 했다. 90년 대에 할머님들을 향했던 일본인들의 마음, 당시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 대해 한국에 소개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몇몇 서평을 얻었을 뿐,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는 이들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리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해 말, 그 전년도인 2004년에 일본의 고모리요이치 교수, 김철 교수, 최원식 교수 등과 함께 만든 <한일, 연대 21> 주최로 와다하루키 선생, 우에노치즈코 선생을 발제자로, 그리고 고모리 요이치 선생을 토론자로 하는 위안부문제 심포지엄을 열면서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 수록), 그리고 윤미향 정대협 현대표를 토론자로 초대했다. 하지만 소통은 쉽지 않았다.

다음해 말, 일본에서 <화해를 위해서>가 번역되었다. 내가 가장 신뢰했던 주변 연구자들은 진지한 관심을 갖고 서평회를 열어 주었지만, 그 연구모임에서 함께 했던 서경식, 김부자 선생을 비롯한 재일교포연구자들과 몇몇 연구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토론자로 참석했던 야마시타 선생의 말에서, 정대협사람들이 나의 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2007년 여름, 이 책에 대한 첫 비판이 나왔다. 한국에서 정대협활동을 하기도 했던 김부자 선생의 비판이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비판이 이어졌는데 그들은 나의 책이 아사히신문의 고 와카미야 주필이나 와다 선생과의 개입이 있었던 걸로 생각하는 오해마저 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근거없는 의구심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리고 2008년, 2009년에 서경식 교수, 윤건차 교수 등의 나에 대한 비판이, 주로 한겨레신문을 통해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책이 일본우익의 상찬을 받았으며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이 박유하의 책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조차 정말은 식민지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죄의식이 없어서라는 요지의 글들이었다. 생각지도 않던 공격에 나는 많이 놀랐지만, 결국 글을 쓴 해당기자에게 항의했을 뿐, 더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나의 이 때 행동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 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 지난 2014년 6월, 고발장을 받아들었을 때다. 박유하가 말하는 화해란 한미일 동맹을 강화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녹아든. 나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서경식교수나 윤건차 교수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는 그 고발장은, 내가 방관하는 사이 나에 대한 의구심이 한국에 확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면 나를 비판했던 이들이 직접 관여한 것일까. 나는 아직 그 내막을 모른다.

아무튼, 내가 앞서, 이 고발이 정말은 위안부문제에 관한 지식인들의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 시간 속에서 위안부문제에 대해 또 책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2010년대 들어서자 한일관계는 시시각각 더 나빠졌고, 그런 정황의 중심에는 늘 위안부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다른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지배란 무엇인가>로 제목을 붙일 예정이었던, 일본인들을 향해 쓰일 예정이었던 그 책 안에, 나는 위안부문제에 한 챕터를 할애하기로 했다. 아시아여성기금 해산 이후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낮아진 일본인에게, 특히 위안부는 그저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1년 가을 , 연구년을 맞아 머물게 된 도쿄시내 와세다 대학 근처 작은 집에서 그 글을 쓰기 시작했다. 훗날 고발대상이 된, 위안부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된 ‘매춘적 강간, 혹은 강간적 매춘’이라는 말은 사실 그 글 안에 사용된 말이다. 말하자면 ‘매춘!’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실은 그것은 구조적으로 ‘강간’적인 것임을 환기시키려는 단어였다. 다시 말해 매춘이 아니라 강간에 방점이 찍힌 표현이다. (후에 한국어 책을 먼저 내면서 구성을 바꾼 탓에 원래의 나의 취지가 불명확해지고 말았지만, <웹 논좌>라고 하는 아사히신문사 계열의 그 매체의 원래 글에는 나의 그런 의도가 남아 있을 것이다.)

2012년 4월과 5월에 위안부문제를 향한 일본정부의 시도가 좌절되는 걸 보면서 나는 한국을 향한 말걸기를 다시한번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래의 예정을 바꾸어 <제국의 위안부>혹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제목이 될 한국어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원래 일본을 향해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당연히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한 책이다. 다만 기존연구자들과 지식인, 그리고 지원단체와는 다르게 풀어본 책이다

그동안 전쟁범죄로만 다루어져 왔던 위안부문제는, 조선인위안부에 한정해서 보았을 때는 식민지 지배가 야기시킨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 그러나 그동안 일본이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한 적은 없었다는 점, 그러니 그에 기반한 사죄와 보상이 새롭게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취지였다. 그러나 동시에, 업자나 마을사람. 혹은 부모 등 우리 안의 책임을 묻는 일 역시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한국어판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였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건 할머니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 들어가면서

박유하

들어가면서 — 누구를 위한 불화인가

내가 쓴 책,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에 대해 써 보려 한다. 정말은 진작 써야 했다. 하지만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5일 후면 2013년에 낸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책임>을 ‘범죄’로 치부하려 하는 재판이 열린다. 그리고 이 기간동안 페이스북에 그때 그때 일어난 일이나 생각은 어느 정도 써 왔기에 ‘기록’은 어느 정도 해 온 셈이기는 하다. 동시에 이런저런 인터뷰와 몇개의 공식적인 글들에도 이 기간동안의 나의 생각은 쓰여 있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글은 쓰지 못했다. 나는 이미 <화해를 위해서>의 일본판이 2007년에 한 재일교포여성연구자와 그 주변 몇몇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을 때부터 한일지식인들의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쓰려 했었다. 하지만 다른 일들에 치여 차일파일 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더이상 미루면 안될 것 같아 쓰기 시작한다. 재판을 앞두고 있지만, 아니 재판을 앞두고 있기에 더더욱.

과거를 돌아보는 이 글은 앞으로의 재판과 함께 진행될 것이고, 사태에 대한 내 나름의 정리와 분석과 반성을 담는 글이 될 것이다. 물론 그동안 나를 향해 쏟아진 수많은 비판과 비난과 의혹에 대답하는 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너무 늦었지만, 특히 비판자들이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제국의 위안부>는 세 개의 소송의 대상이 되었다. 명예훼손이니 처벌해 달라고 국가(검찰)에 호소하는 형사재판, 이 책으로 인해 손해를 입었으니 배상하라고 하는 민사소송, 그리고 이 두 개의 재판의 결론이 나기 전에 빨리 이 책의 문제되는 부분을 삭제해 달라는 가처분소송 (다시 쓰겠지만 처음엔 전면 출판/판매금지 요구였는데 후에 요구내용이 바뀌었다), 이 세가지 소송이다. (간단한 경과설명을 이 홈페이지에 해 두었다.)

그리고, 2015년 2월에 가처분소송에서, 2016년 1월에 민사소송에서 나는 패소했다. 두 재판에 대해 곧바로 항소했지만 이 재판들의 2심은 형사재판 1심 판결 이후로 미루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현재는 형사재판만 진행 중이다. 그리고 반년 가까이 ‘준비재판’만을 해 왔고, 이제 형사본재판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10월 10일에 형사재판 1심이 끝나게 된다.

내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쓴 책이 ‘심판’ 대상이 된다는 것도 그렇지만, 내가 이 재판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나를 벌해 달라고 국가에 호소한 주체가 전 ‘위안부’ 할머니들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자세히 쓰겠지만, 이 고발과 기소는,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지식인들(운동가 포함)간의 생각차이가 만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은 할머니의 주체성을 부정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할머니들 중에는 이 사태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가능한 분들이 분명히 계신다. 그런 한 고소주체가 할머니들이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학자들조차, 결국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에 따라 책에 대한 평가가 갈린다. 더구나 법원에는 그동안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해 지원단체 등이 해온 활동관련 자료와 연구자들의 글이 다수 인용되거나 직접 제출되어 있다. 할머니들이 고발주체라 해도 재판자료는 모두 주변인들이 만든 것이고,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자료들을 반박해 왔다. 물론 앞으로도 써야 한다.

그런 한 이 재판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실상은 재판을 돕는 주변인과 나의 생각이 대립되고 있는 장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사건 최대의 아이러니는, 나를 처벌하고 싶어 하는 학자들이 법원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공간에서, 그들과 나의 생각이 법조인들에 의해 대변되고 있고, 이제 곧, 결론마저 학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려질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떤 과정이 있었건 할머니들의 분노 혹은 슬픔, 당혹감을 유발한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기에, 나는 고발당한 직후, ‘할머니들께 죄송하다’ (2014년 6월 16일 페이스북. ‘이번 소송의 주체는 실제로는 나눔의집 소장으로 여겨지지만 그에게 왜곡된 설명을 들었거나 책의 일부를 봤을 지도 모르는 할머니들의 분노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의도와는 다르게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아무튼 저로 인해 할머니들이 마음아프셨다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고 썼다.

그리고 최근에, 할머니들께 직접 편지를 쓰려 했다. 아니 나는 이미 세 번이나 편지쓰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 편지들을 쓰고, 또 가까운 이들에게 보여주는 과정에서 나는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선은 이 글을 먼저 쓰기로 했다.

고발 이후 나의 행동과 글은, 주목받고 감시당하고, 의구심으로 가득한 ‘해석’의 세례를 받았다. 그런 식으로 나의 말이 변형되어 온 이상, 그 편지가 쓰여졌던 들, 그 또한 그런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들께 편지쓰는 일을 잠시 유보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의 언행들이 ‘해석’의 폭력아래 놓이지 않는 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우선은, 이 사태를 시간들여 천천히 돌아보고자 하는 이 작업이, 할머니들과 비판자들을 향한 편지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위안부문제는 단순한 한일문제가 아니다. 20년 이상에 걸친 한일 양국의 운동과, 관계학회와, 이 문제를 오래 보도해 온 언론, 이 문제를 둘러싸고 발언해 온 지식인들, 그리고 현실의 국가정치마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문제다. 위안부문제에 대해서 쓴 나 역시 그 구도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복잡하게 꼬여 있는 문제들을 내가 얼마만큼 잘 풀어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도하기로 한다.

그런 나의 시도가,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해 온 이들에게 작더라도 어떤 울림을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나의 글이 계기가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보였던 일들과 생각이, 더 많이 세상에 보여지기를 바라고 싶다. 그런 일들이 이루어질 때, 아마도 위안부문제는 우리 안에서 우리 시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처음으로 되어 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갈등과 상처로 얼룩진 4반세기 과거를 비로소 긍정적으로 껴안을 수 있지 않을까.

이하는 현재 구상중인 글 내용. 이른바 반론은 3부에서 쓸 생각이다.

앞으로의 시간들은, 고발이후 2년 2개월 동안의 메일과 페이스북을 되돌아보며, 내가 쓴 글과 나와 대화나눈 이들을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면서 못했던 일이다.

이 2년 여는, 그런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四方田犬彦, 朴裕河を弁護する

朴裕河を弁護する

四方田犬彦

 

 

比較文学は人文科学の領域にあって、ひどく効率の悪い学問である。

まず自国語のみならず、複数の外国語に精通し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少なくとも自在にそのテクストを読み、学会の場で意見交換ができなればならない。自国語で書かれたテクストだけを、自国の文脈の内側だけで解釈する作業と比較するならば、はるかに時間と労力、そして情熱が必要とされる。にもかかわらず、人はどうして比較文学なる分野に魅惑され、それを研究することを志すのだろうか。比較文学は人に何を与えてくれるのだろうか。

ごく簡単にいう。それは人をして(政治的にも、文化的にも)ナショナリスムの頚城から解放するという効用をもっている。『源氏物語』の巻名である「総角(あげまき)」の一語が、韓国で未婚男子を示すチョンガーと書記において同じだと知るならば、人は日本でしばしば口にされている文化純粋主義なるものが、稚拙な神話にすぎないことを認識できる。朝鮮の李箱と台湾の楊熾昌を中原中也のかたわらにおいて読むことは、1920年代から30年代にかけて、東アジアもまた世界的な文学的前衛運動の圏域内にあったことを理解することである。それはともすれば一国一言語の内側で自足した体系を築き上げているかのように見える文学史が、実は他者との不断の交流のうちに成立した、偶然の現象にすぎないことをわれわれに教えてくれる。一国の文学こそが民族に固有の本質をすぐれて表象するという前世紀の素朴神話の誤りを、告げ知らせてくれるのだ。比較文学がわれわれに教えてくれるのは、文化と文学をめぐるナルシシックな物語の外側に拡がっている、風が吹きすさぶ領野を指し示してくれることである。

だがその一方で、比較文学者はしばしば、思いもよらぬ偏見の犠牲者であることを強いられることになる。コロンビア大学でこの学問を講じていたエドワード・W・サイードを見舞った受難が、その典型的な例であった。

大学でヴィコとアウエルバッハを篤実に論じていたサイードが、ある出来ごとが引き金となって、出自であるパレスチナ問題について発言を開始した。何冊かの著書がアメリカの狭小なアカデミズムの枠を越え、国際的な影響力をもつにいたったとき、彼は大きな誹謗中傷に見舞われることになった。サイードを非難攻撃し、ありえぬゴシップを振りまいたのは、もっぱらユダヤ系アメリカ人の中東地域研究者である。彼らはサイードが中東史の学問的専門家ではないと断定し、アマチュアにはパレスチナについて論じる資格がないというキャンペーンを展開した。サイードを誹謗中傷したのはイスラエル人ではなく、主にアメリカ国籍をもち、合衆国に居住するユダヤ人であった。イスラエルには冷静に彼の著書を紐解き、その果敢なる言動に共鳴するイラン・パペ(後にイスラエルを追放)のようなユダヤ人の中東史専門家がいた。しかし反サイード派はサイードの著書が事実を歪曲する反ユダヤ主義者だと主張し、彼がパレスチナでインティファーダに賛同し、石を投げている写真なるものを捏造して、平然とテロリスト呼ばわりをした。彼らの多くは、いうまでもなく政治的シオニスムの賛美者であり、国家としてのイスラエルこそ離散ユダヤ人の究極の解決の地であるという信念において共通していた。

こうした事実を知ったとき、わたしはかつて自分がテルアヴィヴ大学で教鞭をとっていた時期に見聞したことを思い出した。わたしが知るかぎり、イスラエルに生まれ育ったユダヤ人の多くはパレスチナ人の存在を自明のものと見なし、事態の悲惨を前に肩を竦ませながら、状況をプラクティカルに眺めていた。それに対し、アメリカから到来したユダヤ人は両民族の対立をきわめて観念的にとらえ、パレスチナ人に対し常軌を逸した憎悪を向けているのだった。

わたしは狂信的ユダヤ系アメリカ人学者たちがサイードに向けた攻撃性の深層が、漠然とではあるが推測できなくはない。彼らはこのパレスチナ出身の比較文学者を自分たちの「専門領域」から排除するという作業を通して、合衆国にあってしばしば希薄になりがちな、ユダヤ人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構築したかったのである。現実にイスラエルに居住せず、ヘブライ語もできないがゆえに、逆にイスラエルを約束の地として純化して夢見ている者にとって、サイードとは自分がユダヤ人であることを確認させてくれる貴重な媒介者であったのである。

朴裕河の『帝国の慰安婦』はまず韓国で刊行され、しばらくして日本語に翻訳された。それは少なからぬ日本の知識人、それも日本で支配的な右派メディアに対しつねに異議申し立てをしてきた知識人の側から共感をもって迎えられ、いくつかの賞を受賞した。この賞賛・受賞と時を同じくして、韓国の朝鮮史研究家たちが彼女に激しい攻撃を開始した。またそれが慰安婦を侮辱しているという理由から刑事訴訟の対象になった直後から、在日韓国人の朝鮮史専門家が、朴裕河の著作は事実無根な記述に溢れているというキャンペーンを展げた。わたしは彼らが専門家としての怨恨や嫉妬から、またアイデンティティー危機の回避のために朴裕河を中傷したなどといった情けないことは、ゆめにも思いたくない。とはいえ彼らが、日本帝国主義に郷愁を抱いている日本の右派を悦ばせるために『帝国の慰安婦』は執筆されたといった口吻をもし漏らしたとすれば、それは意図的になされた卑劣な表現であろうと考えている。それは彼らの積年の研究をみずから侮辱するだけに終わるだろう。

とはいえわたしがただちに想起したのが、サイードが体験した受難のことであったことは書いておきたい。朴裕河とサイードは歴史家ではなく、比較文学の専門的研究者である点で共通していた。また朴は初期の著作である夏目漱石論や柳宗悦論に顕著なように、『オリエンタリズム』の著者から理論的な示唆を受け、社会に支配的な神話を批判するための勇気を受け取っていた。そしてサイードが「アマチュア」という名のもとに誹謗されたように、朴裕河もまた慰安婦問題の専門家ではないのに発言をしたという理由から、熾烈なる非難攻撃を受けた。

わたしは以前に自分が受けた嫌がらせと脅迫のことを思い出した。1995年のことであったが、映画が考案されて百年になるというので、NHK教育TVがわたしに12回連続で世界映画史の番組を作るようにと依頼してきた。わたしはそれに応じ、黒澤明やジョン・フォード、フェリーニといった、いわゆる世界の名画を紹介することを続けた。ただ最終回だけは、もうこれで最後というので、思い切って16ミリの個人映画をTV画面で放映することにした。取り上げたのは山谷哲夫が1979年に撮った『沖縄のハルモニ』という作品で、監督の手元にある一本しか存在していないというフィルムを、好意的に貸していただいた。そのなかで元慰安婦であった女性は、日本にはやっぱり戦争に勝ってほしかったと繰り返し語り、美空ひばりと小林旭がいかに素晴らしいかを語った。今さら国になど、とても恥ずかしくて帰れないよという言葉が、わたしに強い印象を与えた。現在のNHKではまずありえないことだとは思うが、番組は割愛されることなく放送された。

公共放送でこの16ミリ映画の一部が2分ほど放映された直後から、すさまじい抗議がNHKと当時わたしが奉職していた大学宛に寄せられた。手紙には「非国民」「売国奴」といった表現に加え、韓国人と被差別部落民をめぐるさまざまな罵倒語が連ねられていた。「故郷のソ連に帰れ」という文面もあった。わたしは恐怖こそ感じなかったが、手紙に記された表現の貧しさに驚きを禁じえなかった。どうして誰もが均一的な語彙に訴えることしかできないのだろう。この時の体験が契機となって、5年後にソウルの大学で教鞭を執ることになった時、わたしは挺身隊対策協議会(「挺対協」)が主催している水曜集会に参加し、和菓子をリュックサックに詰めてナヌムの家を訪れ、元慰安婦たちといくたびか話をすることになった。

もっとも朴裕河への誹謗中傷は、規模とその後性格において、わたしのそれとはまったく異なっている。それは比較にならぬまでに深刻であり、はるかに大掛かりなものだ。(韓国語でいう、あまりいい言葉でなないが)「無識」な者によってなされた突発的なものではなく、一定の知識層の手で体系的に、そして戦略的に準備されたものである。中傷者は元慰安婦の名のもとに彼女を刑事犯として告訴し、国民レヴェルでの世論を操作して、彼女が「大日本帝国」を弁護しているという悪意あるデマゴギーに終始した。彼女が韓国に居住するかぎり、孤立と脅威を感じるように、集団的な行動に訴えた。その迫害の激しさは、日本のあるドイツ文学者に、アイヒマンを論じたハンア・アーレントの名を口に出させるほどであった。

なるほど彼女はこれまで慰安婦問題を生涯の主題として研究してきた歴史家ではない。先に記したように、日本文学研究を中心とした、一介の比較文学者である。だが、彼女を「アマチュア」という名のもとに断罪しようとする動きに対しては、わたしは反論を述べておきたい。知識人とは専門学者とは異なるものだと前提した上で、それは本来的にアマチュアであることを必要条件とするというサイードの言葉を引いておきたい。サイードは『知識人とは何か』(大橋洋一訳、平凡社、1995年)のなかで、次のように記している。

「アマチュアリズムとは、専門家のように利益や褒章によって動かされるのではなく、愛好精神と抑えがたい興味によって衝き動かされ、より大きな俯瞰図を手に入れたり、境界や障害を乗り越えてさまざまなつながりをつけたり、また、特定の専門分野にしばられずに専門職という制限から自由になって観念や価値を追求することをいう。」

もしわたしが朴裕河事件をサイードの受難に比較することが正当であるとすれば、これからわたしが書くべきことは、『帝国の慰安婦』が提出している「より大きな俯瞰図」について語ることである。それは、些末な事実誤認や資料解釈の相対性の次元を越え、日本と韓国におけるナショナリスムを批判しながらも、日本がかつて行った歴史的罪過を批判的に検討するヴィジョンを提出することに通じ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がこの著書から学びえたことを、以下に記しておきたい。

 

歴史的記憶にはいく通りもの層が存在している。単なる事実と統計の列挙が歴史認識とは異なることを知るためには、まず記憶とそれを語る声の多層性という事実を了解し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りわけそれが戦争や革命といった動乱時の記憶の場合、いかなる視座をとりうるかによって、いくらでも異なった(能動的な、反動的な)評価がなされうる。

記憶のもっとも頂点には、国家的な記憶、つまり現政権である体制が承認し、メディアにおいて支配的であるばかりか、教科書の記載を通して教育制度の内側にまで深く食い込んでいる物語が存在している。この物語は「神聖にして犯すべからず」といった性格をもっている。

この国家記憶に準じるものとして、特権的な声が造り上げる定番(ヴァナキュラー)の言説がある。それは社会において充分にカリスマ化された人物、神話化された「当事者」の証言であったり、メディアに決定的な影響力をもつ著名人の発言であることが多い。ヴァナキュラーな言説はつねにメディアの関数である。それはメディアによって戦略的に演出され、記録され、イデオロギー的形成物として公共に投じられる。正確にいえば、それは歴史というよりは、ロラン・バルト的な意味合いで「神話」と呼ぶべきであろう。神話が携えているイデオロギー的権能の強さは、この言説を国家記憶とは別の意味で、社会に支配的な言説、公式的と呼べる言説として機能している。

三番目に、記憶の下層にあって、その時代を生きた名もなき人間、忘れされてしまった人間、不当に貶められ、その声に接近することが困難となってしまた者たちの声がある。それはまさに「生きられた時間」の「生きられた体験」(ミンコフスキー)による、生々しい証言であるはずなのだが、メディアを経過していないため、論議も継承もされることなく、ヴァナキュラーな記憶によって抑圧されるがままになっている。知識人やメディアに携わる者を濾過器として通過しないかぎり、この声は立ち現れることができない。

だがこの声はまだ困難を克服していけば到達できる可能性をもっているだけ、そのさらに底辺に拡がっている最後の、第四の声よりはましであるかもしれない。第四の声とは文字通り沈黙である。世界のもっとも低い場所に生きることを強いられたサバルタンが生きているのが、そのような状況である。彼らはけっして語らない。語るべき声をもたない。いかなる啓蒙的な契機を前にしても、牡蠣のように口を閉ざし続ける。

現下に問題とされている従軍慰安婦問題に即していうならば、最頂点にある国家の言説とは、2016年に朴槿恵大統領と阿部首相が取り交わした日韓の合意がその最新ヴァージョンにあたる。そしてこの問題は、日本が十億円を韓国に払うことで決着をみたというエピローグまでが添えられている。

ヴァナキュラーな声とは、挺対協とその周辺にいる同伴者的歴史学者の手になる、韓国で支配的な言説のことである。慰安婦はつねに民族主義的な精神に満ち、日本軍に対して抵抗することをやめなかったと、彼らは主張している。彼女たちを慰安婦に仕立て上げたのはもっぱら日本軍であり、いかなる韓国人も、いかなる場合にあっても被害者であった。慰安婦はいかなる場合にも高潔であり、無垢であり、模範的な韓国人であった。こうした主張のもとに、声は特定の映像を造り上げる。そして挺対協は自分たちが元慰安婦の声の、唯一にして正統的な表象者であることを自認している。

第三の声は、1990年代に次々と名乗りを挙げた、元従軍慰安婦の女性たちのものである。それはどこまでも個人の声であり、本来はきわめて多様かつ雑多な要素に満ちたものであるが、先に記したように、残念なことにもっぱら第二の声、すなわちヴァナキュラーな声によって秩序付けられ、ノイズを取り去った状態でしか、われわれの眼に触れることができない。

では、第四の声はどこにあるのだろうか。それは韓国で名乗り出なかった元慰安婦たちの記憶である。また韓国と異なり、みずから名乗り出ることが皆無に等しい、日本の元慰安婦たちの内面に隠された記憶である。奇妙なことに慰安婦問題を口にする者たちは、もっぱら韓国におけるそれを論じるばかりで、夥しく存在していたはずの日本人慰安婦の存在を、当然のように無視している。その原因は、彼女たちの声が存在していないからだ。

 

朴裕河はなぜ誹謗中傷の対象とされたのか。簡単にいって、彼女がヴァナキュラーとされた支配的な声に逆らい、ありえたかもしれぬalternative今ひとつの声を、膨大な元慰安婦証言集から引き出すという行為を行なったからだ。慰安婦物語の絶対性に固執する者たちの逆鱗に触れたのは、彼女のそうした身振りであった。

朴裕河は彼女いうところの「公式の記憶」が近年にわたって、いかに慰安婦神話を人為的に築き上げてきたかを丹念に辿り、勇敢にもその相対化を試みた。この記憶=物語がこれまで隠蔽し排除してきた慰安婦たちの複数の声に、探究の眼差しを向けた。そのさいに参照テクストとして、韓国人と日本人が執筆した小説作品から韓国の映画、漫画、アニメに言及し、韓国社会における慰安婦神話の形成過程を分析する手がかりとした。

誤解がないように明言しておくと、こうした作業はどこまでも比較文学者の手になるものであることだ。彼女はひとつの言説をとりあげるとき、それを絶対的な事実としてではなく、ある視座(イデオロギー的な、文化的な)から解釈された「事実」と見なしている。ここで『道徳の系譜学』のニーチェを引き合いに出すのは、なんだか大学の初級年度生を前に講義をしているようで気が引けるが、いかなる事実もその事実をめぐる解釈であるという認識論的な前提を了解しておかないと先に進めないことは、まず断っておくことにしたい。朴裕河とは朴裕河の解釈の意志のことである。彼女は先にわたしが述べた三番目の声に向かいあった。さまざまな多様性をもち、個人の生涯をかけた体験に基づくものでありながら、ヴァナキュラーな支配原理のもとでは不純物として排除され、切り捨てられてきた声のなかにそっと入り込み、そこから公式記憶と相反する物語を引き出すことに成功した。

何が彼女のこうした作業を動機づけているのか。それは慰安婦問題をより大きな文脈、すなわち帝国主義と家父長制を基礎として形成されてきた、東アジアの近代国民国家体制の文脈の中で認識し、それをより深い次元において批判するためである。この大がかりなヴィジョンを理解することなく、その著作にある資料的異動をあげつらい、歴史実証主義者を僭称してみたところで、不毛な演技に終わり、彼女を批判したことにはならない。歴史的と見なされてきた「事実」とは、つねに特定のイデオロギーに携われて「事実」として定立されるという、古典的な命題が確認されるだけにすぎない。

 

朴裕河が従来の公式的な慰安婦神話に対して突きつけた疑問は、大きくいうならば次の二点に要約される。

ひとつは慰安婦たちがかならずしも民族意識をもった韓国人として、日本軍に対し抵抗する主体ではなかったという指摘であり、もうひとつは、彼女たちを幼げで無垢可憐な少女として表象することが、その悲惨にしてより屈辱的であった現実が巧妙に隠蔽されてしまうという指摘である。

慰安婦たちは日本兵のために、ただ性を提供したばかりではなかった。彼女たちは故郷と家族から遠く離れ、残酷な戦場で生命を危険に晒している若者たちのため、文字通り慰安を与えるべき存在であった。慰安婦と日本兵の違いは、前者が性を差し出したのに対し、後者が生命を差し出すことを強要されたというだけで、いずれもが帝国にとっては人格的存在ではなく、代替可能な戦力にすぎなかった。朴裕河は慰安婦の証言のみならず、多様なテクストを動員しながら、慰安婦が日本軍に協力しなければ生き延び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苛酷な状況を想像せよと、われわれに求める。この一節を読んだだけでも、彼女が元慰安婦を売春婦呼ばわりし、侮辱したという韓国での起訴状が事実無根のものであり、明確な悪意のもとに準備されたものであることが判明する。

朴裕河の分析が秀でているのは、被植民者である朝鮮人慰安婦が、その内面において日本人に過剰適合し、しばしば外地において日本人として振る舞ったことを調べあげた点である。これは従来の公式記憶からすればあってはならない事実であった。だが朴裕河は彼女たちを非難するわけではなく、逆にこうした帝国の内面化こそが帝国のより赦されざる罪状であると指摘している。日本軍兵士と慰安婦を犯す/犯されるといった対立関係において見るのではなく、ともに帝国主義に強要された犠牲者であると見なす視点は、今後の歴史研究に新しい倫理的側面を提示することだろう。それは日本帝国主義による強制連行が朝鮮人・中国人にのみ行使されたのではなく、長野県や山形県の農民が村をあげて満洲国開拓に動員された場合にも指摘しうるとする立場に通じている。

朝鮮人慰安婦たちはチマ・チョゴリといった民族服を着用することなど、許可されていなかった。彼女たちは少しでも日本人に似るように、名前も日本風に改め、着物を着用することを命じられていた。これはその姿を一度でも目撃したことのある韓国人にとっては、これ以上にない屈辱であろう。ソウルの日本大使館の前に建立され、現在では韓国の津々浦々にレプリカが並ぶことになった少女像に対し、朴裕河が強い違和感を覚えるのは、その像が現実の慰安婦が体験した屈辱の記憶を隠蔽し、理想化されたステレオタイプの蔓延に預かっているためである。この少女像は、たとえ韓国がいかに日本に蹂躙されたとしてもいまだに処女であるという神話的思い込みに対応する形で制作された。その意味で、敗戦後アメリカに占領された日本で、原節子が「永遠の処女」として崇拝され、現在でも日本を代表する表象であり続けていることを思い出させる。

だが、なぜ少女像なのか。朴裕河を非難攻撃する者たちは、慰安婦の平均年齢の高さからしてこの彫像は不自然であるという彼女の主張に対し、なぜにかくも目くじらを立てて反論するのか。問題は統計資料をめぐる解釈の次元にはない。慰安婦が純潔な処女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狂信している韓国人の神話の側にある。だがここで朴裕河を離れて私見を語れば、歴史的な犠牲者を無垢なる処女として表象することは、何も慰安婦にかぎったことではない。31独立運動で虐殺された柳寛順(ユ・グワンス)も、北朝鮮に拉致されて生死が定かでない横田めぐみ(日本では「ちゃん」をつけなければいけない)も、沖縄の洞窟で大部分が殺害された「ひめゆり部隊」の面々も、すべて少女であり、それゆえに悲劇の効率的な記号として喧伝されてきたからだ。これは政治人類学的にいって東アジアに特有の病理にほかならない。朴裕河の少女像批判は、戦後の日本人までが無意識下において、このステレオタイプの象徴法に操作されてきたという事実へと、われわれを導いてゆく。

『帝国の慰安婦』の著者が主張したいのは、かかる問題が戦時に独自のものではないという事実である。慰安婦問題の究極の原因として糾弾されるべきなのは帝国主義であり、そのかぎりにおいて兵士も慰安婦もひとしく犠牲者に他ならない。このヴィジョンは日本と韓国を永遠の対立関係におき、日本側が一方的に歴史を歪曲したと主張する「慰安婦の代表者」の不毛なナショナリスムを、論理的に相対化することになる。韓国における公式記憶が歪曲し隠蔽してきた慰安婦の真実を探求するためには、朴裕河が提出した見取り図の大きさを理解しなければならない。

 

朴裕河は『帝国の慰安婦』の最後の部分で、鄭昌和(チョン・チャンファ)が1965年に監督した『サルビン河の夕焼け』なるフィルムを取り上げている。この書物のなかで映画への言及がなされている、唯一の箇所である。舞台はミャンマーの日本軍駐屯地である。朝鮮人慰安婦の女性が、彼女が配属された「親日派」の学徒兵将校に話しかける。自分は看護婦になるというのでここに騙されてきた。あなたはまだ日本帝国主義が紳士的だと信じているのかと、彼女はいう。この映画の場面から判明するのは、フィルムが制作された1960年代には、韓国人は慰安婦をめぐって、90年代に確立された公式的記憶とは異なった記憶を抱いていたという事実である。この慰安婦はすべての悲惨の根源に日本帝国主義が横たわっていることは充分に認識していたが、自分がここにいるのは強制連行の結果ではないと主張しているのである。『サルビン河の夕焼け』は(今日では「芸術的映画」の範疇に入れられていないため、韓国の映画研究家がそれに言及することはないが)こうして、強制連行の神話が集合的記憶として人為的に形成される以前の、一般韓国人の歴史認識を知るために、貴重な資料たりえている。

朴裕河が韓国のB級映画に言及したことを受けて、映画史家であるわたしは、その後の韓国映画がいかに従軍慰安婦を描いてきたかを、日本映画と比較しつつ補足的に記しておこうと思う。

韓国では1970年代から80年代にかけて、何本かの慰安婦映画が製作されている。1974年の時点で、まずラ・ブンハン監督(不詳)によって『女子挺身隊』なる作品を撮られている。フィルムはもはや現存しておらず、映画研究家の崔盛旭氏が最近発掘した新聞広告を通してしか、目下のところ手掛かりがない(図版参照)。英語題名をBloody Sexといい、「慰安婦8万の痛哭。映画史上最大の衝撃をもった問題の大河ドラマ」と、宣伝文句が記されている。朴正熙軍事政権下では、女性のヌードを含め、エロティックな映画表現は厳しい検閲の対象とされていた。そこで製作者と監督は、日本軍の歴史的蛮行を糾弾するという道徳的口実のもとに、エロ描写をふんだんに盛り込んだフィルムを作ることを思いついた。韓国人による強姦場面はけしからんが、日本の狂気の軍隊が強姦をするのなら歴史的事実として表象が許されるという、韓国人の民族感情を逆手にとった制作姿勢が、ここに窺われる。

わたしが実際に韓国の劇場で観ることのできた慰安婦映画は、李尚彦(イ・サンオン)監督の『従軍慰安婦』である。1980年代初頭のことであった。李監督は野球選手の張本勳の伝記映画を撮った人で、フィルモグラフィーから判断するかぎり、どうやら素材を選ばずに注文次第で監督する人のようだ。『従軍慰安婦』は好評だったので、シリーズ化されていると聞いた。製作意図は先の『女子挺身隊』の延長上にある。朝鮮人の無垢な処女たちが拉致され、慰安所に押し込められると、日夜、日本兵に凌辱される。しかし途中から日本兵だということはどうでもよくなってしまい、単なる男女の性行為だけが何組も続くことになる。この手のフィルムが韓国で社会的に糾弾されず、堂々と政策されてきたのは、おそらく慰安婦問題に関わる知識人が自国の映画というメディアを徹底して軽視にしていて、その存在に気が付かなかったか、学問的対象として論じるに値しないと軽蔑していたからだろう。

とはいえゼロ年代になり、韓国でも本格的に(植民地化時代を含めて)自国の映画を分析的に研究しようという機運が盛り上がってきた。だが寡聞にして、こうした慰安婦もの映画が論じられたという話をきかない。解放後の韓国に公式的記憶があり、慰安婦についても公式的記憶が形成されていくなかで、韓国映画史も公式的記憶を作り上げてきた。そこではドキュメンタリー『ナヌムの家』が模範的作品として喧伝されることはあっても、おそらくそれよりははるかに大量の観客を動員したはずの『女子挺身隊』に始まる慰安婦映画は、けっして言及されることがない。それは言及すべきではない、恥辱のフィルムだということなのだろう。

それにしてもわたしに納得がいかないのは、この手の韓国エロ映画を、韓国の男性観客はいったいどのような気持ちで観ていたのだろうかという疑問である。彼らは男性として日本兵士の側に同一化して、女性を犯すことの疑似快楽を得ていたのか。それとも同じ韓国人として、犯される慰安婦の側にマゾヒスティックな感情移入して観ていたのか。

いずれにしてもここで視覚的にも、物語的にも得られる快楽とは倒錯的なものである。わたしはかつて上海の街角を散歩していたとき、荷車のうえに「南京大屠殺」(中国では「虐殺」という語を用いない)についての、毒々しい表紙のゾッキ本が積み上げられているのを見て、きわめて複雑な感情に駆られたことを思い出す。いうまでもなくそれは、歴史的事件を隠れ蓑とした、残虐行為についてのポルノグラフィーであった。おそらくこうした例は世界の他の場所でも存在していることだろう。それを分析するのは歴史学ではなく、メディアの社会心理学である。人はなぜ、自民族の被害者を主題としたポルノグラフィーに快感を感じ、それを商品化してきたのか。

わたしはかつて黒澤明から鈴木清順、そして8ミリの山谷哲夫までが、朝鮮人従軍慰安婦をスクリーンに表象しようとしていかに努力してきたかを辿ったことがある(四方田犬彦「李香蘭と従軍慰安婦、『李香蘭と原節子』(岩波書店、2014年)に収録」。GHQによる検閲下で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黒澤は谷口千吉と組んで、田村泰次郎の『春婦伝』を映画にしようと企て、そのたびごとに脚本を許可されず、突き返された。この企画は、谷口が朝鮮人慰安婦を日本人慰安団の女性歌手に置き換えることで、『暁の脱走』(1949)を監督することで決着がついたが、黒澤の正義感はそれでは収まらなかった。

日活の鈴木清順は彼らの挫折を踏まえた上で、1965年、ついに野川由美子主演で『春婦伝』の映画化に成功した。そこには主人公ではないが一人の朝鮮人慰安婦が登場している。彼女は最後まで一言もモノをいわないが、主人公の男女が絶望して死に急いだのを知ると、初めて口を開き、「日本人はすぐ死にたがる。踏まれても蹴られても、生きなければいけない。生き抜く方がもっと辛いよ。死ぬなんて卑怯だ」と語る。これは重要な役であり、重要なセリフだ。清順は彼女を、いかに悲惨な状況にあっても主体性を失わず、世界を透徹した眼差しのもとに眺める存在として描いている。

日本の志をもった映画人たちが困難にもめげず、慰安婦問題に真剣に向かい会おうとしていたとき、韓国の映画人はそれを単なるエロ映画の素材としてしか見ようとしなかった。この落差は大きい。韓国の研究者のなかでこの問題に答えてくれる人はいるだろうか。

 

日本が中国を侵略していた時代のことである。上海では国民党によるテロが横行していた。

あるとき魯迅の弟が、いくら犬が憎くても、水に落ちた犬をさらに打つことは感心しないねといった。別の人物がそれを支持して、中国人には昔からフェアプレイの精神が欠けていると論じた。犬と戦うには、犬と対等な立場に立って戦うべきであり、苦境にある犬を攻撃するのは卑怯であるという考えである。

魯迅は烈火のごとく怒った。たとえ水に落ちたとしても、悪い犬は絶対に許してはいけない。もしそれが人を噛む犬であれば、陸上にいようが水中にいようが関係ない。石を投げて殺すべきだ。中国人によくあるのは、水に落ちた犬をかわいそうと思い、つい許してやったために、後になってその犬に食べられてしまうという話ではないか。犬が水に落ちたときこそいいチャンスではないか。

恐ろしい言葉である。つねに国民党政権に生命を狙われ、友人や弟子を次々と殺されていった知識人にしか口にすることのできない、憎悪に満ちた言葉である。

だが最近になって、わたしは魯迅のこの考えにいくぶん距離を抱くようになった。なるほど彼をとり囲んでいた状況は苛酷だった。だからといって敵に対し熾烈な憎悪を向け、その殲滅を願うだけ、はたして状況を好転させることができるのだろうか。わたしがこう書くのは、70年代に新左翼の各派が相互に殺し合いを続けてきたのを、どちらかといえば間近なところで眺めてきたからである。わたしは尊敬する『阿Q正伝』の作者にあえて逆らっていいたい。今こそ犬を水から引き揚げ、フェアプレイを実践するべき時なのだ。少なくとも憎悪の鎖を断ち切るためには。

1930年代の上海から2000年代のソウルと東京まで、人は何をしてきたのだろうか。

誰もが水に落ちた犬を目ざとく見つけると、ただちに恐ろしい情熱を発揮して、溺れ苦しむ犬に石を投げることをしてきた。彼らはもし犬が普通に地上を徘徊していたとしたら、怖くてしかたがないものだから、けっして石を投げなかったことだろう。ところが、いかに罵倒の言葉を投げかけ石を投げたところで、わが身の安全は確保されたとひとたびわかってしまうと、態度を豹変してきた。ここには純粋の憎悪がある。だが魯迅の場合とは違い、その憎悪には必然的な動機がない。それは集団ヒステリーと呼ばれる。

朴(パク)裕(ユー)河(ハ)従軍慰安婦問題をめぐる著作を韓国で刊行したとき何が起きたかを、ここで冷静にもう一度考えてみよう。ずさんで恣意的な引用をもとにして刑事訴訟がなされ、彼女は元慰安婦の一人ひとりに多額の慰謝料を払うことを命じられた。そればかりか、勤務先の大学からは給料を差し抑えられ、インターネットでの嫌がらせはもとより、身の安全においても危険な状況に置かれることとなった。文字通り、心理的に生命の危険に晒されているといってよい。

だが、まさにその時なのだ。韓国人と在日韓国人によって熾烈な攻撃が開始されたのは。これこそ、水に落ちた犬に投石する行為である。

彼らの一部は、日本において朴裕河が高く評価され、少なからぬ知識人がその著作に肯定的な態度を示したことを疑義に感じ、それを揶揄し、その「殲滅」を求めて行動を起こしている。朴裕河が慰安婦の証言資料を恣意的に解釈し、歪曲していると主張して、彼女がこの問題をめぐって永久に口を閉ざすことを求めている。朴裕河を支持する者たちは彼女が韓国にあって被った法的受難と社会的制裁をまず解決し、フェアな議論の場が成立したことを待って、大日本帝国の罪状と被植民者の状況について討議探究を開始すべきであると友好的に考えているのに対し、支持者を非難する側は勝ち負けの次元において声高い扇動を重ね、事情に通じていない日本の無邪気なメディアに働きかけている。

では仮に彼らが「勝利」を獲得したとして、彼らは何を獲得したことになるのか。慰安婦問題に誠実な関心を寄せてきた日本の知識人の多くは、それを契機として問題への無関心を示すことになるだろう。この問題を植民地支配と女性の人権蹂躙の問題として見つめようとする者たちがいっせいに後退してしまったとき、日本の世論に残るのは慰安婦の存在を否定し、植民地支配を肯定的に賞賛する右派の言説である。今日でさえ圧倒的な力をもつこの右派の扇動によって、「嫌韓」主義者はこれまで以上に跳梁跋扈し、さらなるイトスピーチの嵐が巻き起こることは目に見えている。当然の成り行きだろう。慰安婦問題をめぐる日韓の相互了解は、いかに両政府が金銭的な補償による合意に達したとしても、それとは無関係に、これまで以上に困難で錯綜したものと化すだけだろう。朴裕河が果敢にも提示を試みた「より大きな俯瞰図」と、韓国の公式的記憶の相対化が排除されたとき、生じるのがそうした事態であることは目に見えている。

もし朴裕河の批判者たちに研究者としてフェアプレイの精神があるとすれば、まず韓国でなされている法的な措置に抗議し、その解決を待って真剣な討議に入るべきではないか。人は集団ヒステリーの罠に陥らないために、冷静になってモノゴトの順序を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

水に落ちた犬を打つな。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박유하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2016. 6. 17 (1092호) 37쪽~39쪽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세종대 교수) X 나카지마 다케시 (도쿄공업대학 교수, 본지 편집위원)

서발턴의 목소리는 전달되었나?

“이 책은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 나카지마다케시

“’국가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 박유하

한국의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저술한 <제국의 위안부>가 한일 학자들 사이에서 장기적인 논쟁을 부르고 있다. 전 ‘위안부’ 9명에 의한 명예훼손 형사 고소로 작년 11월에 박교수는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이에 미국과 일본의 학자들 54명이 항의성명을 냈다. 한편, 성명에 대한 반론도 일어났다. 성명에 참여한 나카지마 다케시본지편집위원의 요청으로 올해 2월 일본을 방문한 박교수와 대담을 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싸고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카지마: 저는 <화해를 위해서>의 일본어판이 2006년에 나왔을 때, 선생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어판이 나왔을 때 곧바로 읽어 봤습니다.

이 책의 중요한 틀의 배경에는 서발턴 연구가 제기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서발턴연구란 1980년대에 인도를 중심으로 나온 문제인데,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주체성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의 다원적인 주체성을 다루면서,  그녀들을 여러 고통스러운 정황 속으로 내몬 제국의 폭력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박: 저도 바로 그 문제를 생각했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표현도 비판을 받는데, ‘제국에 동원되었다’라는 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협력을 강요당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국의 일원으로서의 협력도 말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중심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런 질문을 만드는 것은, 기존에 존재해온 개념으로만 이해하려 하는  사고입니다. ‘위안부’라는 다면적인 주체를 한가지 모습으로 규정하는 일을 유보하고 애매한 상태로 놔 두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일로 느끼는 것은 그러한 사고때문이 아닐까요?

‘애국’은 과잉 적응의 결과

나카지마: 박유하선생이  쓰신 중요한 문제중 하나는 ‘위안부’를 알선한 조선인 업자 문제입니다. 그들은 여성을 데려가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생활이 있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의 뜻에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편, 일부 ‘위안부’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리면서도 제국 육군을 지탱하고 있다는 긍지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과잉 적응입니다. 일본의 우파 쪽 사람들이 말하는, ‘거 봐라. 잘 지내고 있지 않았는가’라는 식의 주장과는 정반대 이야기지요. 그런데 잘못 이해되어 우파논의와 같은 레벨로 취급 받고 말았습니다.

저는 인류학을 공부한 후 역사를 연구했습니다만, 우파와 좌파의 담론 사이에서 모두가 잘라내버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나카무라야의 보오스>를 쓰게 된 커다란 계기입니다. 보오스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일본의 군사력을 사용하여 아시아, 인도를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우파, 좌파 각개의 역사이야기만으로는 파악해 내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똑같은 문제가 한국에서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들의 평가에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광수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저 일본에 아부하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 매우 엄중한 비판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30년대에 들어와서 바뀌었습니다.  ‘일군만민’ 등의 일본의 국체론을 전용해서  “황국신민은 천황폐하 아래에서 평등하다. ‘내선일체’라고 할 거면 평등하게 대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반격을 하기 위해서 일본의 국체를 (자기 방식으로) 전용해 나갑니다. 이런 식의 주체성을 주의 깊게 읽어내는 작업이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동시에,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 한국에서 2013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관리인 남성은 ‘황국신민’이라고 할 만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책 후반에 나오는 1944년 설날일기에는 ‘천황의 위광을 온 천하에 떨쳐야 한다’,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했다’(321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는 1905년생이니 정확히 일본에 의한 병합시대를 산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내면에 ‘애국’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마음이 생겨난 정황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총력전 체제 이후에는 위안부도 그런 틀 안에서 동원되었다는 것을 제 책에서는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우파의 사고나 논의가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도 썼습니다.

우파에 대한 서포트작업이 아니다.

나카지마: ‘위안부’가 된 여성들과 병사의 이른바 의사(擬似)가족화라는 문제를 우파 사람들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석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상황이 보여주는 슬픔만큼 가혹한 일은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쓰여 있는 것은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일본인 병사가 ‘위안부’에게 의사가족이 되기를 요구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전선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습니다.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상대가 ‘위안부’였습니다. ‘위안부’들은 그 슬픔과 고통을 받아주려고 합니다. 일부 병사는 ‘위안부’처럼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징병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의 행위는 ‘제국’에 의해 구성된 가해구조 바깥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박: 시기와 공간에 따라 다른 체험을 했으니,  한 사람의 ‘위안부’ 안에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는 사실, 같은 시기와 공간 안에 있었어도 연령이나 일본어 능력 등에 따라 경험이나 감정이 달랐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 속에서 제가 쓰고 싶었던 것은 ‘국가 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입니다. 진심에서건 표면적에서건, 인간은 국가 이야기에 자신을 아이덴티파이(동일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바람직한) ‘이야기’와 맞지 않는 체험이나 감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표면화됐을 때, 국가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은폐하거나 반대로 징벌하거나 합니다. 그런 일에 젠더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나카지마: 이를 두고 일본의 우파를 서포트하는 논의라고 말하거나, 일본에 대한 면죄론이라고 인식해 버리는 것은 정말로 말이 안 됩니다. 일본의 특공대에서 죽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는 우파가 일원화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와 부합하지 않는 특공대원은 많이 있습니다. 너무 싫어서 도망친 사람 등,,여러 주체성이 있지요. 특공대를 하나의 이야기로 환원하는 것은 주체의 다양성이나 복잡성을 말살시키는 일입니다. 똑같은 방식의 ‘이야기의 폭력’을 좌파가 행해서는 안 됩니다.

박: ‘위안부’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온 사람은 소수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위안부’ 문제에 강하게 공감하면서 국민을 개입시켜 논의가 두 쪽으로 갈려 있습니다. 이 분열은 한일 문제처럼 보이지만 저는 좌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사태를 곧잘 정치적 입장에 입각해서 바라보기 쉬운데, 그런 입장과 상관없이 사태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설 공간은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고, 제3의 공간을 넓히는 시도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제국’이라는 말에 담은 것은 민족뿐만 아니라 성이나 계급의 지배, 배제/차별의 문제입니다. 즉,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 일본이라는 국가 주체의 문제로 여겨져 정치 문제로만 이해되어 왔지만, ‘이동’을 유발하는 경제 문제가 주목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경제적 욕망을 내면화하는 형태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 갔습니다만, 그런 문제에의 주목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착취하는 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거기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기반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업자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고, 그 사실도 썼습니다.

이분법 바깥의 사태를 그려냈다

나카지마: 일본인 병사와 협조한 ‘위안부’라는 것은 지원단체가 그리는 피해자상과는 다릅니다. 한편으로 일본의 우파가 그려내는 ‘매춘부’라는 상과도 다릅니다. 그런 식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를 드러내는 일로  ‘제국’의 폭력구조를 밝혀내려고 한 것이 박유하선생의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저를 비난한 사람은 한국의 경우 남성학자가 많았습니다. 일본을 면죄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 무엇을 면죄하고 억압하며 은폐하고 있는지 거꾸로 묻고 싶었습니다.

일본인, 일본 국가에 의해 조선 민족이 지배 당하고, 피해자가 되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보는 동안) 민족 레벨 이외의 구조적 문제가 사라져 버렸지요.

나카지마: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논의되었던 서발턴의 목소리의 대변/ 표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피박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해 온 것은 특정 서발턴을 만들어 대변/표상하는 일의 권력성과 폭력성입니다.

박: 맞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아니면서’라든지 ‘운동가도 아니면서’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화해를 말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뿌리 깊은, 당사자를 일원화하는 사고가 또다른 당사자를 배제하는 권력으로서 기능해 왔습니다. 동시에 ‘대변자(후예)의 당사자성’이 빠진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돌아 보지 않아서 생긴 권력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카지마: 저도 작년에 박유하선생님의 불구속 기소에 항의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후,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저는 사상사와 쇼와(昭和)사도 연구하고 있고 넓은 의미에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조선어 문헌을 읽을 수 있을 것, ‘위안부’ 연구자일 것 등이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전문가’의 요건이 된다면 대부분의 논자들은 의논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말의 억압 때문에 문제를 다각적으로 논할 수 없게 되지요.

지워져 버린 ‘주체성’

나카지마: ‘나눔의 집’의 방침에 거리감을 느끼던 전 ‘위안부’분의 존재가 책에 쓰여 있습니다. 특정 ‘위안부’상이 확립되어 버리면 그 자신의 생각은 그 공간에서는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나눔의 집에 거주하면서 일본고발에 참여하는존재도 중요합니다. 어느 쪽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면이 있으면서도 정치에 휩쓸려 온 전 ‘위안부’의 전체상을 보지 않으면 문제는 한 발짝도 진전되지 않을 것입니다.

박: 그 분은  운동의 방식과 ‘위안부’를 둘러싼 이해에 관해 (지원단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가족이 없기도 해서 자주 저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일본을 비판하지 않으면 주변으로부터 ‘일본을 좋아하는 거지?’라든가, ‘가짜 위안부’라고 비판 받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먼저 이쪽이 ‘용서하겠다’고 하면 일본이 그에 맞는 대응을 하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목소리를 저는 고소 당하기 직전, 14년 4월 한국에서 개최했던심포지엄을 통해 알렸습니다. 지원 단체를 거치지 않고 보상금을 직접 받고 싶다는 또다른 목소리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반 후에 고소를 당했습니다.

나카지마: 그런 식의 차이나 (어느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규정성이 중요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에서는 그런 부분이 완전히 도외시 되어 버립니다. 박유하선생님은 여기에 메스를 가해 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서발턴 연구의 성과에 바탕한 중요한 문제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2월 5일, 오사카 시내에서

일본어원문(日本語): 対談原文 – 『週刊金曜日』2016年 6月 17日号よ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