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진, 『제국의 위안부』,[평화운동] 나는 박유하 교수를 지지한다

[책 제국의 위안부] [평화운동] 나는 박유하 교수를 지지한다

– 박유하 교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우익도 아니고, 친일파도 아니다.

– 그렇다고 하는 이들은 무지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 이던지, 안다면 왜곡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발언은 무책임한 것이고, 한국을 위한 것도 아니고, 위안부문제의 해결에 도움되는 것도 아니다.

– 나는 일본과 화해하자는 것은 북한과 화해하자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종류의 평화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운동을 해서 친일파가 되는 것도 아니고, 종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꺼꾸로 이런 운동은 일본의 시민들과, 가능하다면 북한의 시민들과도 같이 해야하는 운동이라 생각한다. 이 운동은 <국제적인 평화운동>인 것 이다. 책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서 상을 받은 것은 일본의 우익 때문이 아니고, 위안부문제에 있어 한국에 사과하고 화해를 하고 싶어하는 일본의 시민사회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북한과는 화해를 하자는 사람들이 일본과 화해하자는 데는 반대이다. 일본이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않아서 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주장을 북한에는 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북한에는 그런 주장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북한과 달리 민주사회이고 모든 이슈에 관해 뭉처저 있지가 않다. 일본의 우익이 일본을 대표하지 않는다. 일본에도 한일관계에 화해를 바라는 그룹들이 많이 있다. 일본과 화해를 하자는 것은 그들과 손잡고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저오자는 것이기도 하다.

– 재일학자 정영환은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라는 이름의 블록을 가지고 하는 것은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시대에 지난 시각으로 계속 일본을 비판하고 있다. 이점에 대하여는 다른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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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성

나의 책을 혹 “일본의 우익이 환영”했다면, 그리고 그들이 내 책을 읽고 반성적인 입장을 취했다면 나는 그들의 환영을 거부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런 식의 소개는 명백한 왜곡이자 거짓이다. 물론 한 사람의 성실한 서평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쓰기에 이르렀다는 건, 2년에 걸친, 정영환을 비롯한 비판자들의 왜곡작업이 충분히 성공했다는 것일 터이다. 내가 견디기 힘든 건, 비판이 아니라 왜곡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보여주는 비겁함이다.

이미 여러번 말하고 썼지만, 나에 대한 기소반대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진보지식인이고, 나에게 상을 수여한 곳도 산케이나 요미우리가 아닌 마이니치신문과 아사히 신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평가한 건 위안부문제를 식민지 지배책임으로 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든 나를 우익과 이어져 있는 사람으로 몰고 싶어한다.

문제는 그 자체보다, 오로지 일본의 누구와 이어져 있는지로 자기정당화를 하거나 누군가를 내치는 이런 심성이다. 이거야 말로 우리 안의 식민성이 아니고 무엇일까. 해방후 70년이 지나도록 일본과의 연관성으로만 자신을 파악하는 이들이나, 나와 가까운 건 진보쪽이라고 외쳐야 하는 나나, 서글픈 건 마찬가지다.

정영환을 비롯한 비판자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당신들은 내가 당한 전국민적 비난과 재판에 따른 고통만으로는 내가 겪는 일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그토록이나 집요한 증오를 드러내는 이유는,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일본이 사죄하고 보상했다”고 썼기 때문인가. 나의 책이 오로지 그런 책인 것도 아니지만 설사 그렇다 한 들, 그건 형무소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인가.
그래서 기자회견까지 해서 나를 죄인으로 고발하려 하는가.

좌파든 우파든, 중요한 건 타자에 대한 상상력과 윤리적인 태도다.
짧았던 평화로운 시간이 끝나고, 이제 다시 총성이 들려 온다. 총을 겨누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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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불화인가

고발 직후부터 집요하게 나를 비판해 온 재일교포 정영환의 책이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다른 것보다, 푸른역사에서 그 책이 나왔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나의 페친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을 훌륭한 출판사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번 재판에서, 검사는 김부자교수의 책을 들고 와서 나의 범죄사실을 증명하는 “범죄증거”라 했었다. 이미 일부 논문이 제출된 바 있지만, 다음번 재판에는 이 책이 제출될 가능성이 높다. 관계자들이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민변회장이 정영환 책의 출판기념강연회에 등장하고, 학자들이 재판중인 사람에 대한 왜곡과 규탄에 나서는 현황이,나의 일이지만 한국의 일이기도 해서, 우려스럽다.
지켜야 할 대상이 일(학문 혹은 법)자체가 아닐 때,그 공간은 낙후되거나 부패한다.

정영환씨는 한국과 북한에서 정치적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입국이 불허된 사람이다. 국가가 개인의 이동의 자유를 관리하는 일에 나는 비판적이지만, 이들의 담론이 한일화해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내비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정영환의 두려움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나를 빼고(그의 표현에 따르면 망각하고) 화해할까 봐 두려워 하기보다는, 재일교포사회와 일본과의, 혹은 북한과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다.

이들에게, 바로 얼마전에들은,정대협의 한일합의비판을 비판하던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이들이 만들려 하는 건, 누구를 위한 불화인가.

반론 1(2015/8, 페이스북 노트)
https://parkyuha.org/%eb%b9%84%ed%8c%90%ec%9d%b4-%ec%a7%80%…/

반론 2(2015/8, 역사비평 112호)
https://cldup.com/mt2lV_7iqt.pdf

장정일 작가의 정영환 비판(2016/5, 허핑톤포스트)
https://parkyuha.org/%eb%b0%95%ec%9c%a0%ed%95%98-%ec%a3%bd%…/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401263399900570

고발 2년을 맞으면서

내일은 다시 재판이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국민참여재판여부가 최종결정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연히도 내일은 고발에서 꼭 만 2년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재판 뿐 아니라 멈추지 않는 비난들 때문에 제겐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지만, 그런 만큼, 그 과정을 지켜 보시고, 지지하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다시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8월말 재판까지는, 재판과 그동안 쓰지 못했던 반론을 쓰는 일에 집중할 생각이지만, 그동안 생각만큼 하지 못했던 일–페친들과의 만남의 시간도 가능한한 가질 생각입니다.

친구신청해 주신 분들께도, 조금만 더 너그로운 마음으로 기다려 주십사 부탁 드립니다.
짬짬이, 페친을 줄여볼 생각입니다. 혹시 교류가 있었는데도 제가 실수한 경우, 메시지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본재판에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 해도, 여론이 바뀌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일은 홈페이지도 새로 공개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 주시고, 앞서서 저를 이해해 주신 페친 여러분들께서, 더 많은 분들이 또다른 여러분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이 나온 직후에 긍정적인 서평을 써 주셨던 사진가 이상엽 선생님과도, 이후 페친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나 괜찮아” 사진을 찍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2년이라는 긴 시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더 나은 사회를, 같이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6년 6월 14일 박유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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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 총기난사

미움과 경멸(차별)은 폭력을 만든다. 끔찍한 살인자가 된 29세 ‘보통’ 청년의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미국인이었는지 게이였는지,그가 없는 이제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자라면서도 미국인의 생명을 경시하고, 게이들의 행복을 경멸하고,빨래를 잘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도록 만든 것이, 그가 받은 교육임은 분명하다. 애국심과 인종주의와 여성차별은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런 한 총기단속은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없다.

타자의 일상과 생명을 한순간에 엉망으로 만들어도 된다는 생각을 누가 정당화하는가. 함부로 “그들”로 규정짓고, 그들이 더이상 세상에 없어도 된다고 누가 ‘함부로, 쉽게’ 생각하도록 만드는가.

‘보통’ 청년의 집단살인사건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안에도 내 안에도 폭력범은 있다. 늘, 언제나. 먼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닌 이유.

올랜도 총기난사 관련기사

금비녀 애국심

한 페친이 올린 흥미로운 영상을 공유해 둔다.
1938년영상이니 중일전쟁발발 직후인 듯 하다.

진해해군사령부가 만들었으니, 이 필름은 국민모두가 이랬다기 보다는 이래야 한다고 하는, 당위를 강조하는 영상인 건 틀림없다. 이른바 국책필름.

그렇다 하더라도 이 풍경을 이른바 친일파의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여기에 나오는 한 여성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조선의 여성들은 자신을 그저 “일본여성”으로 생각했을 뿐이니까. 거기엔 그저 협조해야 할 “국가”가 있을 뿐, 따로 “親”해야 할 “日本”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진심이든, “비국민”소리를 들을까 두려워서든, 밥을 지을 때마다 쌀 한줌 덜어 모아두었다가 헌금하고, 머리에 있어야 할 “금비녀”를 아낌없이 뽑아 바친 “애국심”은, 60년 지난 1997년 IMF사태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니 이런 국민동원적 애국심이야말로 “일제잔재”의 핵심이었다.

조선인 포로 심문조서가 보여주는 가혹한 노동과 차별대우는, 이런 금비녀애국심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발적애국심이야말로 그 시스템이 차별적이었음을 증명한다. 일본인 이상으로 일본인이 되는 일. 권력을 갖지 못한 자가 권력을 가진 자를 모방하도록 만드는 일. 식민지화의 죄는, 바로 거기에 있다.

영상 링크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8954011131509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어제 올린 포로심문 조서 기사를 게재한 한국 언론은많지 않은 듯 하다. 그나마, 우리한테 중요할 수 있는 위안부관련 기술까지 공정하게 언급한 곳은 경제지 한 곳 밖에 없었다.

낯선 인식을 무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미 국제문제화된 문제다. 우리가 마이니치를 무시해도, 세계는 마이니치신문을 본다. 이런 식의 자폐성은 한일 국민간 공통인식공유를 더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세계 속의 고립을 부를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편향성 속에서 자란 우리아이들이 훗날 겪을 일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물론 현재 역시 이미 20년전의 “훗날”이다. 내가 지원단체의 책임을 물어 온 이유는 거기에 있다.

“부모에 의해 팔려간” 사실을 너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일본에서도 그런 일은 있었고, 오늘날도 부모에 의해 팔려가는 소녀는 전세계에서 적지 않으니까. 중요한 건, 그들의 공통점은 빈곤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나는, 이들이 말하는 “부모”에는 “수양부모”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기본정보를 공유해야 토론도 반박도 가능할 것 아닌가. 우리가 모르는 척 하는 동안 일본의 혐한파들은 또다시 한국을 조롱중이다.

역사란, 조상의 “후예”로서의 긍지를 찾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과거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지혜는 계승하고 잘못은 직시하는 일. 당시와는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고민을 이어가는 일. 그게 아니라면, 역사와 마주하는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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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혼돈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 중에는 “논문으로 쓰지 왜 ‘대중서'( 그들은 굳이 대중서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로 냈느냐는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학계에서논의하면 되는 문제를 왜 갑자기 일반인들 앞에 내놓았느냐는 것이다.

주석등 형태를 갖추고 논문문체로 썼으면 그럴듯한 학술서로 보였을 이 책을 굳이 일반서 형태로 쓴 것은, 위안부 문제가 한일양국국민들에게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 정부나 학자들의 논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국민의 국민적 합의 없이 위안부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대립하는 학자들의 협의체를 만들어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동시에 그 논의가 밀실논의여서는 안되고, 언론과 관계자가 논의자체를 국민들에게 전해 학계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 왔다. 학자들은 웬만해서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으니 양측 이야기를 잘 듣고 제3자가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학계에선 더이상 위안부동원을 강제연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계자들이 언론과 국민을 향해서 그렇게 말하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 초기에 강제연행으로 생각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시관 같은 곳엔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결국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대한민국의 일반상식은 일원화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직도 “군인이 강제연행”했다고 믿고 누군가는 “업자가 끌고 갔다”고 알고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 여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과정이 만드는 거국적소모 쪽이다.그리고 이 모두가, 학자가 대중을 우습게 보고, 지원단체 역시 대중을 동원해 운동을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정보는 독점해 온 결과라는 점이다.

성남시 도서관이 나의 한일관계 관련 책 중 세 권을 “19금 도서”로 만든 것 역시, 정보를 독점하려는 어른들의 오만이 만든 일이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선 18세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오늘, 한일 합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정부와는 다른 재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 여부를 떠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많지 않은 힘과 돈의 분산과정이다.
근대의 차가운 합리주의조차 아직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탈근대 커녕, 근대의 혼돈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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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일, 읽어보길 권함

이경일님이 새로운 사진 2장을 추가했습니다.

5월 25일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울 ·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었다. 박교수가 배포한 34곳이 삭제된 2판 PDF를 읽다 갑갑해서 초판 무삭제본을 도서관을 뒤져 구해 읽었다.

사서가 금고에서 꺼내주어 좀 놀랬다.

다 읽고나니 내가 박교수라면 이 책으로 일어난 사태를 당하고 복장이 터져 죽을만큼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문 수준의 이 책에서 박교수가 주장하는 바는 서울 정대협이 만든 이미지에 휘둘리는 세상에 대해 정견을 갖자는 것이다. 또한 우리 안의 착취자들이 있었음을 적시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정신대가 현재에도 미군 주둔지 주변에도 현존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읽으면서 슬픈 우리 역사 단면의 선혈 흐르는 참상을 느꼈다. 남자로서 남성성의 끊임없는 정욕의 밑바닥도 본 느낌.

무엇보다 김종영 편집장의 지적처럼 쉽게 휩쓸리고 사실보다는 ‘제공된 주장’에 견강부회하는 우리네의 민낯이 슬펐다.

가슴 아프고 읽기 절대 쉽진 않지만 대강이라도 읽으시길 바란다.

장정일, 박유하 죽이기 | 정영환·이명원의 오독 (허핑턴포스트)

장정일 소설가

『녹색평론』5~6월호(제148호)를 받았다. 목차에서 이명원 형의「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지식인의 지적 쇠퇴」를 발견하고 그것부터 읽었다.

위의 글에서 이명원은 박유하의 한국어판『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2013)와 일본어판『제국의 위안부』(아사히신문출판,2014)를 가리켜 “두 책은 사실상 동일한 서적이라 보기 어렵다”(65쪽)면서,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의 지식인과 독자들이 격렬한 박유하의 팬덤(fandom)으로 전락하는 마술은 [판본을 달리한 지은이의] 이런 수사학적 책략 탓”(66쪽)이라고 말한다.

『제국의 위안부』의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이 ‘동일한 서적’이 아니며, 바로 거기에 박유하의 간계가 숨어 있다는 식의 이런 음모론은 원래 이명원의 것이 아니라, 일본어판 출간 즉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온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의 것이다. 정영환의 주장은 이타가키 류타와 김부자가 함께 엮은『’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삶창,2016)에「’전후 일본’을 긍정하고픈 욕망과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제목을 실려 있다. 거기서 정영환은 한국어판 262쪽과 그것을 번역한 일본어판 251쪽을 비교하고 나서,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 주장은 일본어판을 읽지 않으면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98쪽)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의 사례보다 더 심각한 사례가 있으면 모르되, 정영환이 먼저 제기하고 이명원이 고스란히 받아쓴 ‘(한국어판)262쪽/(일본어판)251쪽’의 차이는 결코 두 사람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한국어판)262쪽/(일본어판)251쪽’의 차이를 놓고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 주장은 일본어판을 읽지 않으면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라느니, “두 책은 사실상 동일한 서적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좋게 봐서 오독이지만, 실제로는 ‘고의적인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저 대목이『제국의 위안부』의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의 ‘핵심 주장’을 다르게 하고 있는지, 정영환이『’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에 번역해서 싣고(94~95쪽), 이명원이「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지식인의 지적 쇠퇴」에 고스란히 인용한(64~65쪽) 문제의 대목을 살펴보자(일본어판 인용문에 나오는 밑줄은 정영환·이명원의 것이며,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에 있는 볼드체는 나의 것이다).

(한국어판) 말하자면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의 요청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식민화 과정에서의 동학군의 진압에 대해서도, 1919년의 독립운동 당시 수감·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살해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밖에 ‘제국 일본’의 정책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가혹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는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들은 국민동원의 한 형태였다고 볼 수 있지만, 제국의 유지를 위한 동원의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배의 희생자다.

(일본어판) 그러한 의미로는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고 이 사실은 한국에 더 알려야 하겠지만, 그것(지금까지의 사죄 – 번역자 주)은 실로 애매한 표현에 불과했다. 1919년의 독립운동 때 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제국 일본’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혹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할 기회가 없는 채로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정영환·이명원은 일본어판에 자신들이 밑줄 친 문장을 들어 박유하가 한국어판에서는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고 해놓고서, 일본어판에서는 그것을 뒤집었다고 말한다.

일본어판의 독자를 위해 바꿔 쓴 부분 중에 주목해야 할 포인트로서, 저자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바뀌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에는 일본 정부는 식민지화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라고만 쓰여 있는데, 일본어판에는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다는 문장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문장이 추가되면 “공식적으로”라는 의미가 사죄를 한 사실은 있으나 “애매한 표현” 때문에 한국에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뜻으로 바뀝니다. (정영환 : 96쪽)

위의 각기 다른 판본을 보면, 삽입된 문장들 때문에 매우 상이한 의미를 띠게 된다. 한국 독자들에게 쓴 글에서는 식민지배 책임에 대해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다가, 일본판에서는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고”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렇게 판본이 다른 두 책은 사실상 동일한 서적이라 보기 어렵다. (이명원 : 65쪽)

어떻게 읽으면 저렇게 될까? 두 사람 다 기가 찬 해석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상한 것인가 싶어, 문과와 전혀 거리가 먼 통계학과를 나온 지인에게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을 읽히고 나서, 일본어판은 한국어판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지인의 대답은 명쾌했다. “일본어판에 정영환·이명원이 밑줄 친 대목은, 바로 그 위에 나오는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에 대한 부연이다.” 맞다!

그러면 한국어판의 “일본은 1945년에 제국이 붕괴하기 이전에 ‘식민화’했던 국가에 대해 실제로는 공식적으로 사죄 ․ 보상하지 않았다”에는 부연이 없는데, 왜 이 대목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일본어판의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에는 저런 부연이 필요했을까? 밑줄 친 대목으로 부연하지 않았다면, 일본인들은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라는 박유하의 단정에 의문과 반발심을 느꼈을 것이다. ‘무슨 말이야? 일본 정부가 사과하지 않았다니?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토미이치는 무려 총리였지 않는가?

박유하는 일본인의 의문에 답하고 반발심을 누그러뜨리고자 정영환·이명원이 밑줄 친 대목을 일본어판에 넣은 것이다. ‘일본 정부의 수반이 사과를 해온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공식적이라고 하기에는 늘 애매한 것이었다.’ 정영환·이명원이 일본어판에 밑줄 친 대목의 아래 부분을 보면, 밑줄 친 그 대목이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은 없다”의 부연 설명이라는 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박유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학문적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박유하 죽이기’를 하고 있다는 의혹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원문: 박유하 죽이기 | 정영환·이명원의 오독 (장정일, 허핑턴포스트)

서윤, 저들의 양심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서윤

5월 7일 ·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스마트폰을 쓰다보니 이제는 그 기능에 별반 놀라워하는 사람이 없지만, 나는 지금도 내 손에 들린 기계가 늘 신기하다.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도 그렇고, 컴퓨터라는 기계는 다 신기해보인다.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 기능을 사용하다 보면 편리함도 편리함이지만 구현해낸다는 게 참 어려운 일임을 아는 터라, 매번 그렇다.

조금이라도 어떤 분야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아는 편이라면 늘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새삼 놀랄 것이 없는데도 계속 놀라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러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 경이로움은 익히 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2014년 6월 15일 오전 8시 30분경 연합뉴스에서 최초로 <제국의 위안부> 소송 기사가 떴을 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6월 13일에 박유하 선생님과 페친이 되었고, 이틀간 담벼락을 보면서 느낀 바로는 전혀 그런 이야기를 쓸 분이 아니었기에, 먼저 했던 행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혀로 입술을 핥은 것이었다. 의구심이 들 때 내가 하는 습관이다. 당시 기사내용은 나눔의집 측에서 배포한 자료를 확인없이 배포한 것이었고, 이후 유수 일간지에서도 역시 확인없이 복사-재배포를 거듭했다. 놀란 건 그때부터였다.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제국의 위안부>를 사 읽고, 이어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화해를 위해서>를 구해 읽으며 나는 저자인 박 선생님이 도저히 제국주의자는 될 수 없는 분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볼 근거가 전혀 없었다. 이런 생각은 했다 : “어쩌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런 논변은 설 자리가 없을수도 있겠다.” ‘관계’가 와해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항상 의탁할 곳을 찾게 마련이며, 지금 같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의탁할 곳은 결국 ‘국가’이기 때문이며, 국가 역시 그런 의존성을 높이는 데 적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국가를 허구라든가 악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국가는 물질적 실재가 아닌 상상적 실재이며, 그러므로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그 이미지는 실재보다 힘이 세다. 원래 이미지가 실재보다 힘이 세기는 하다. 그래서 실재보다는 이미지로부터 규범, 실천, 변화, 이런 것들이 나온다. 게다가 국가를 악이라고 해봐야 이미 영속성마저 띠어가는 국가를 엎어놓고 빠따 때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해서 고민해야 할 것은 국가를 어찌 없애버릴 것인가가 아니라, 국가의 존재양식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있다. 무언가에 의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며 한 인간이 살아가는 실존의 영역은 매우 협소하므로, 국가보다는 지역사회와 같은 작은 영역에 가장 크게 의탁하는 편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 넘어가자.

어쨌든 국적이라는 게 많은 것을 보장하는 한 국가를 우습게 보는 건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래서 국경을 진지하게 염두에 두는 사고방식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국경을 진지하게 여긴다 하여 국경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서슴없이 ‘사상범’이란 말을 써도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친일파’라는 말을 이토록이나 거칠게 사용하는 이가 어떻게 말글을 다루는 직업의 하나인 기자씩이나 하고 있을까? 기사를 읽다 기함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오해이고 오독이고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러 명의 연구자가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뒤 박유하가 일본군 위안부를 여러 대목에서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했다고 판단했고, 재판부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구절을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296쪽, 삭제)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를 무엇이라 읽어야 오독이 아닐까. 대략난감이다.”

누가 난감해야 하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읽고 이 기사를 쓴 것일까? 기본적으로 책은 읽고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라는 책을 기획한 것일까? 위의 문장은 앞부분에서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일본 논자들을 비판하는 대목과 조응한다. 위안부들을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 부르는 일본의 논자들의 인식, 그것이 ‘매춘부는 피해를 입어도 상관없다’는 폭력적 인식임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또한 국가이고 남성이고 가난이 주범인 위안부 문제에서 별안간 민족의 문제를 맨앞에 세워 실제로 유곽 여성들이 먼저 갔던 위안부의 모습을 소거한 그간의 인식을 비판하는 글이기도 하다. 유곽 여성들은 위안부로 차출되어도 좋다는 것이냐 묻는 대목이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숙연할 정도로 진지하게 비판의 이유를 밝히는 기자의 지성은 도대체 어디쯤에 놓여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판결문에는 있지도 않은 ‘허위사실’이란 말을 버젓이 기사에 내놓는 이 기자의 양심은 얼마나 우거진 것인지, 가능하다면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다. 이런 글을 볼적마다 새록새록 놀라울 뿐이다. 마치 기계에 늘 경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재승, 최종길, 정진성 등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모리배들이 낭창낭창한 목소리로 관심법들 시전하는 걸 흉내내서, 나도 관심법 한 번 시전해봐야겠다.

이 기자는 이거 쓰고 우수리를 얼마나 받을까? 손종업이라는 사람이 이전에 박유하 교수를 가리켜 “일본 우익의 돈을 받았다”는 식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하였으니 미러링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잖은가? 손종업, 이재승, 아, 그리고 지난해 거짓말 담긴 성명서에 무거운 책임을 느껴서 이름 올린 홍성수까지, 그들은 어디서 얼마를 받아먹고 이런 거짓부렁을 일삼을까?

나도 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다. 저들처럼 양심적인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우수리를 받아먹는단 말을 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저들의 양심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

건다미, 법적 책임론에 대하여

 

건다미

5월 6일 ·

박유하 교수가 2013년 기사를 링크해서 나도 봤는데..
그래도 이때만 해도 좀 제대로 읽고 토론하는 분위기가 있었음.
그리고 기사 내용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법적 책임’과 고노담화에 관한 한국인들의 왜곡된 이해에 대해서 좀더 부연 설명해 볼까 해.
저번에 박노자는 물론 손아람 조차도 ‘법적 책임’에 대한 왜곡을 일삼는 경향이 있음.
일단 법적책임을 지운다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는 가해자들을 추적해서 전범 재판을 통해 처벌하는 거야. 유태인들은 최근까지도 가해자들을 세계 곳곳에 추적해서 고발하지? 뉘른베르그 전범재판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제대로 진상규명이 필요하고 처벌받지 않은 부분에 끝까지 물고 늘어지잖아. 아이히만 재판같은 무리수까지 동원하고 말이야. 개인이 아니라 아예 조직적으로 협력해서 증거를 모으고 가해자들을 추적해.
근데 이거 우리나라는 못했지? 일단 첫째 이유가 해방이후 전쟁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반민특위가 무산된게 큰데..하지만 위안부의 경우엔 반민특위가 아니라 아예 피해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았잖아? 그거 누구 책임이야? 한국인들 책임이잖아.
아사히의 특종보도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묻혀 있었을껄?
그러니 가해자를 추적해서 처벌하는거 현실적으로 불가능함. 당사자의 증언만 남아 있을 뿐 추가적인 재조사도 할 수가 없어. 고문당한 박복순 할머니의 사례처럼 기혹행위한 자들 추적해서 법적 처벌할 수가 없음.
그러면 결국 포괄적인 책임을 일본이 지고 사과하는 거야. 그런데 기혹행위에 대한 증언을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부인했나? 부인한적 없거든? 고노담화 내기전에 일본 정부차원의 조사, 피해자 증언 청취등의 과정이 있었고 거기서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강제납치나 가혹행위 사례에 대해서도 인정했음. 다만 증언의 세부적 사항까지는 이제 와서 재조사하여 검증할 수 없다는 것도 함께 인정한 거지.
고노담화에 부정된 건 일본군의 조직적 공적인 깅제연행설이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부정한게 아니라고. 부정했으면 고노담화가 나올수 없지.
게다가 고노담화의 내용은 기존의 한국인들의 인식보다 더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어. ‘출신에 관계없이’ 나이가 어리든 많든 자발적이든 납치당했든 속았든..일본군의 관여하에 일어난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을 해친 사건으로서 사죄한다는 내용이야.
물론 나같은 사람의 입장에서야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국가주의로 정당화한 구조’에 대한 책임의 내용이 담겨야 더욱 확실한 사죄가 된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고노담화를 발표할 시기에 일본이 최대한 사죄를 하려했다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팩트’라고.
일본정부의 공식적 입장-고노담화 는 결코 일본 우익의 입장이 아님. 당시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던 양심적인 일본 국민들의 성취라고 보는게 올바른 태도임.
오히려 일본 우익들은 아베같은 정치인 앞장세워 계속 고노담화를 수정하고 부정하려 했음. 그러니까 한국인들이 고노담화를 지나치게 가치절하 하며 ‘일본은 사죄한 적이 없다’고 하는 건 사실에도 어긋난 정치선동일 뿐이여.
그리고 지원단체가 보상의 법적책임 인정이 ‘사죄의 증거’라는 논리를 내세웠기 때문이기도 해. 그 논리에 따라 일본이 아무리 사죄를 해도 보상의 법적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죄를 안한 게 되는 거지.

둘째, 법적책임의 두번째 항은 보상과 관련된 것이야. 이것도 왜곡이 심한데, 일본정부가 보상과 관련해서 공식적으로 ‘법적책임이 없다’고 한 적이 없음.
정확하게는 한일기본조약으로 이미 법적책임을 다했고 새롭게 <또다시 반복할 법적책임은 없다> 는게 공식적 입장이지. 법적으로 이중배상의 책임을 부정한거.
한일기본조약이 조약으로 국제법적으로 유효하다면 보상의 법적책임은 일본정부가 아니라 한국정부가 져야 하는 거임.
한일기본조약 청구권 조항과 관련된 당시의 회의록을 보면 일본은 오히려 조항을 넣지말고 국교정상화 이후에 시간을 갖고 진상조사를 한 다음 직접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 주겠다고 제안을 하는데 한국정부쪽이 한사코 거부하고 모든 개인청구권을 자신들이 대행해서 완결짓고 ‘최종적 해결’이라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우기지. 우긴 이유도 골때려. 당시 보상금액을 최대한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고 해. 결국 이렇게 보상금받아 피해자들에게 안주고 지들이 낼름 처먹은 거잖아. 이거 100% 한국정부의 책임임.
한일협정의 청구권 조항으로 꼬이지만 않았다면 당근 일본정부가 공식사죄담화까지 발표한 마당에 사법부의 개인배상 재판은 아무 무리없이 피해자들의 승소로 이어졌겠지. 한일협정때도 진상조사와 개인보상에 적극적 입장을 취했던 일본이 거부할 이유가 없어.
그런데 위안부 문제가 이슈가 된 90년대 이후로 한국정부는 이 ‘법적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없음. 마치 자기들은 제3자인 것처럼 방관자처럼 또는 마지못해 행동해. 이 부분에 대해 몇년전 헌법재판소에 위헌판결을 받잖아. 그 판결내용이 바로 ‘방관자처럼 행세하지 말고 문제해결에 적극 노력하라’는 것이여.
이 부분과 관련해서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서도 왜 정대협이 일본대사관앞에서 수요집회만 할 뿐 한국정부를 상대로 투쟁하지 않느냐는 불만을 터뜨리는 분들도 있었음. 하지만 이런거 다 묻혀버렸지.
이 법적문제는 그리 만만한게 아니여.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이든 독일이든 다 똑같아. 조약을 맘대로 재해석하고 뒤집지 못함.
지난 그리스 디폴트 위기때를 생각해봐. 치프라스가 독일에 대해 나치피해보상이 과거에 불충분하게 이루어졌다며 추가배상 하라고 요구했지만 독일은 끝까지 거부하잖아? 독일이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어서 그런줄 아냐? 이전에 맺은 조약을 근거로 거부했던 거지. 그런걸 함부로 뒤집지 말라고 경고한거야. 그러면 법적 안정성도 해치고 밑도 끝도 없이 정부는 소송에 계속 시달려야 하거든.
그래서 독일정부도 그런건 안함. 대신에 기금이나 재단 같은걸 내세워 추가보상과 추가적인 진상조사를 전담케 하는 기구를 따로 만들어서 해결함.
이게 바로 ‘법적 문제’야.
한국인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이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 생때쓴다고 인식하는데 그것도 착각임. 대일 강경파인 멕두걸 유엔인권위원도 이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 위해선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하면 된다고 하지만 승소하리란 보장은 없다고 얘기하거덩?
한국쪽이 추가적 법적배상 책임을 일본에게 묻기 위해 갖가지 법논리를 개발하지만 국제법적으로 인정받기가 그리 쉬운게 아니라고… 한국정부의 원죄적 책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피해자들은 일본으로 부터도 한국정부로 부터도 보상을 받지 못한 처지가 되어 버렸지. 한국정부도 ‘법적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사실 보상과 관련한 법적책임은 한국정부에게 더 있음에도 그걸 요구하는 운동단체나 국민들도 없지?
때문에 이 문제는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거임.
더이상 법적책임 운운하는거 부질없는 거여.
(내 생각엔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반반씩 도의적 책임을 지고 함께 기금이나 재단을 만들어서 해결하는게 가장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함.)
그리고 박유하 교수를 비롯해 누가 ‘법적책임이 없다’고 했냐? 한일기본조약으로 법적문제가 꼬여 있어서 계속 법적책임을 일본정부에게만 묻기가 ‘어렵다’고 한거지. ‘(애초에) 없다’와 ‘(현실적으로) 어렵다’ 말뜻 구분 못하냐?
그럼 니들은 쉬운 문제라고 생각하니? 쉬우면 지금이라도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해.
실제적으로 법적문제 해결에 보탬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왜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 역적 취급하냐?
이 문제와 관련해서 지금 박유하 스토커 자임하는 이들과 아닌 이들의 차이는 박노자 처럼 ‘일본은 깡패집단’ ‘일본은 반인륜적인 범죄집단’ 등등 과격한 레토릭을 구사하며 느낌표 !! 팍팍 넣는거 밖엔 없음. 그러면 법적문제가 해결돼?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증말.

결론적으로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해야 할 것을 정리해 보자.

  1. 전시 가혹행위와 위안부제도의 폭력성에 관한 범주의 혼동이나 강제연행설 같은 팩트에 어긋난 주장으로 우익의 입지만 강화시키는 기존의 주장들을 재평가하고 위안부 제도를 운용한 것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과 사죄의 본질적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한국-일본 국민들간의 역사인식의 합의를 만드는 것.
  2. 더이상 보상의 ‘법적 책임’ 문제에 연연하지 말고 ‘인도주의’에 입각한 정치적 해결방안을 만드는 데에 정부-민간이 함께 참여해야 함.
  3. ‘위안부란 어떤 존재였는가’ 라는 <제국의 위안부>가 던진 문제의식을 보충하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 당시의 가난한 여성들이 처해진 사회적 지위, 젠더와 계급에 관한 보다 풍부한 사료 연구와 토론이 이루어 져야 함.

이상.

배홍진, 중세적인 종교재판

 

배홍진

3월 6일 ·

박유하 교수를 비판하는 진보 지식인들은 박교수가 진보주의의 가면을 쓴 채, 국가주의나 제국주의의 담론에 교묘하게 봉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이지 씁쓸한 건, 책에 명시적으로 나오는 박교수의 논지나 의견엔 침묵하고, 그 논지의 배면에 흐르는 박교수의 무의식이라 할만한 것을 다분히 자의적으로 추측해 비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논리적 전개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박 교수는 물론 A는 오렌지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따져보면 박교수는 A는 오렌지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통해 A를 호도하고 왜곡하려는 교묘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거의 백년동안 꽈배기만 만들어온 사람처럼, 혹은 문맥의 심층까지 내려가 뭔가 비판할 건덕지를 찾는 탐험가들처럼, 이 책은 어쨌든 꼬아봐야 진짜 의도를 알 수 있어, 혹은 이 책은 분명 다른 속셈을 지니고 있을테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텍스트의 지하로 내려가 봐야돼, 라고 말한다.

사실 그들이 얘기하는, 진보의 가면을 쓴 국가주의를 먼저 비판하기 시작한 건 박유하 교수다. 민족, 역사, 애국이란 미명이 지식과 운동에 이용될 때 어떻게 정의를 가장한 반목과 증오의 담론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폭력의 멘탈리티로 귀결되는지를 박유하 교수는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어떤 논지들은 이미 지식인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었던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걸 책으로 용기있게 구체적으로 쓴 사람은 없다. 그들은 자기들도 알고 있던 거야, 라고 얘기하는데 정작 자기들은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내지않고 있다가 박교수가 목소리를 내니,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당신은 그 사실을 이용해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고 있어, 라고 성토한다. 도대체 뭐하자는 짓인가.

박교수를 얼마든지 부정하고 비판해도 좋다. 심지어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해도 좋다. 다만 한국 사회가, 인문학자가 자신이 쓴 책으로 감방을 갈 이유가 없는 사회라면 말이다. 정의감에 넘치는 지식인들은 먼저 박유하를 물어뜯기 전에, 한 지식인의 인문학 저서를 범죄 행위의 증거 따위로 생각하는, 이 사회의 그 대단한 상식부터 물어뜯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당신들이 믿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종교적 신앙의 대상은 더더욱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태를 명백히 중세적인 종교재판이라 생각한다.

박일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해야 할 것들

출처: https://www.facebook.com/poem.river/posts/677484008990769

어제 오늘에 걸쳐 <제국의 위안부>를 다 읽었다.
그동안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들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피상적이었는지를 알게 해준 책이다. 이 책의 핵심은 위안부에 대해 하나의 기억(어린 조선 소녀들에 대한 강제연행, 일본 군인들에 의한 집단 강간과 잔인한 폭력, 민족의 자존심을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투사 할머니들 등)만 강요함으로써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위안부의 실체와 그런 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기억과 의식을 소거시켰고, 그로 인해 문제 해결마저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책이 학문적 비판이 아니라 고발의 대상이 된 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즉 정대협에 대한 비판이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유하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결코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닌데도 사태가 이렇게 이른 데는 정대협이라는 존재가 자리잡고 있다.

일단 내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사실 몇 가지부터 얘기해 보자.
조선인 위안부의 평균 나이가 25세라는 것(소녀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은 개인 보상의 여지를 남겨 두려고 했는데 오히려 한국이 거부하고 국가 간에 전체적으로 일괄타결을 요청해서 개인 몫까지 국가가 대신해서 받았으며, 이러한 사실이 나중에 개인들이 일본 법정에 제소한 재판에서 계속 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몇 차례에 걸쳐(197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5년) 대신 보상금을 지급했다는 것.
1994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국가 책임을 인정한 고노담화에 이어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조성하여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급하였으며, 이때 수상의 편지를 함께 전달했다는 것.
우리나라의 위안부 피해자들도 60여명이 이 기금을 수령했으며, 필리핀과 네덜란드는 이 기금으로 위안부 문제를 종결지었다는 것 등이다.

고발의 증거로 제시된 내용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다는 말이다. 앞뒤 자르고 이 말만 떼어 와서 들이밀면 박유하 교수가 민족의 배반자이자 죽일 년이 되는 건 당연지사일 것이다. 박교수는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책에서 밝힌 내용들을 간추리면 몇 가지 층위가 있다.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병사들도 제국의 강요에 의해 끌려왔으며 그런 점에서 서로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일본인 병사들이 전투에 나갈 때 환송회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살아서 돌아오라고 당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우에 따라 간호원처럼 일본인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는 역할을 부여받았으며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아시아의 제3국이 보았을 때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자신의 희생이 국가(일본)를 위한 것이라는 의식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그나마 비참한 처지를 버틸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와 같은 근거들을 제시한다. 물론 이러한 근거들은 강요된 동지적 관계임에 분명하고, 친일파들처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박교수는 이러한 상황이 식민지의 내적 모순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으며, 그러한 점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지적 관계라는 말 대신에 협력적 관계와 같은 말을 썼으면 오해를 피해갈 수 있었을까? 어감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비난은 똑같이 쏟아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표현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서술한 것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멸시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며, 그로 인해 일본의 죄악상이 감춰지는 것도 아니다.

두 번째로 강제 연행과 매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정신대는 노동력 확보를 위해 국가가 동원령을 내려 끌고 간 것이며, 위안부는 그와 별개로 진행된 사안이라는 점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그래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기구 이름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위안부는 드물게 강제로 연행하거나 자발적으로 지원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업자들이 중간에서 감언이설로 꼬여서 데려갔다. 일본 사람들이 위안부는 강제성이 없었으며, 돈을 받고 매춘에 종사한 여성일 뿐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이기도 하다. 형식상으로는 업자들이 데려간 것이 맞으며, 일본 군인들이 돈을 내고 위안부의 성을 산 것도 맞다. 이에 대해 박교수는 국가와 군대가 위안부 여성을 필요로 해서 업자들에게 요청을 했으며, 위안소의 관리 및 위안부들의 이동에 직접 관여를 했으므로 일본이 국가의 책임을 피해갈 수 없으며 마땅히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고노 담화에서 일본도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박교수는 위안부가 강간과 (강요된)매춘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강간적 매춘 혹은 매춘적 강간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박교수는 아시아여성기금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며, 이 기금을 격렬하게 반대한 정대협과 결정적으로 대립지점을 형성한다. 박교수가 보기에 이 기금의 성격은 국가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며(국가가 운영하고 90% 정도를 국가재정에서 부담했으므로), 보상금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정대협은 민간 주도의 위로금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어로 ‘償ぃ金’이라고 된 표기를 해석함에 이어 박교수는 분명히 보상금이고, 영어로는 속죄의 의미를 갖는 atonement로 표기되는데도 정대협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일부러 위로금이라고 의미를 깎아내렸다고 주장한다.
현재 정대협은 일본 의회의 법률 제정에 의한 배상을 주장하고 있으며, 박교수는 법률 제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계속 이러한 주장에 매달릴 경우 위안부 문제는 영영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박교수의 주장은 입법을 대신해 일본 정부가 추가 보상을 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원자 단체와 위안부 당사자 특히 다른 의견을 가진 위안부들도 참여시켜 합의를 끌어낸 후 전 세계인이 보는 데서 사죄와 보상을 실시할 것, 그리고 사죄의 내용에는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식민지배로 일어난 모든 문제(3.1운동 피해자, 관동대진재 피해자, 징병 피해자, 고문 피해자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이 책에서 쉽게 동의가 되지 않았던 부분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하지만, 그것을 ‘국가범죄’로 정의하기는 힘들다는 부분에서였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기획하고 관여한 것은 맞지만, 공식적으로는 모집 과정에서 사기나 협박을 금지하고 위안소에서의 폭행이나 강간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국가범죄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은 지나치게 형식논리에 갇힌 듯하다.

마무리를 하자. 박교수는 정대협 등 위안부 지원자 단체들의 ‘정의의 독점’에 대해 우려한다.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목소리만 남기고 다른 목소리는 소거시키는 것-그래서 나눔의 집에서 나와 사는 할머니가 있는 것처럼-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모든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선택적으로만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해결을 어렵게 하고, 할머니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권위를 다지려고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지금도 미군을 위해 존재하는 기지촌이 위안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 고민해야 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주고 있다. 더 이상은 힘들어서 이만!

김규항, 더러운 여자는 없다 (경향신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한 건 1991년 김학순 할머니(1924~1997)의 증언부터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의 첫 증언자는 김 할머니가 아니라 오키나와에 살던 배봉기 할머니(1914~1991)다. 배 할머니는 김 할머니보다 16년 먼저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언론에 밝힌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7살 때 식모로 팔려간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떠돌던 그는 29살이 되던 1943년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어도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위안부가 된다.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말마저 잊은 채 살아가던 그가 증언을 결심한 이유는 일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였다(1972년 오키나와를 되찾은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조선인들에게 신고를 거쳐 특별 영주권을 준다).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인 그가 한국에서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독재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 했다는 것, 증언이 조총련계를 통해서였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위안부 운동이 본격화한 후에도, 파국적 한·일 위안부 협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현재까지도 그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는 데는 다른 정서적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배 할머니를 취재한 기사(한겨레 2015년 8월7일자)에 따르면 그는 위안부였음을 털어놓을 때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라고 거듭 말하곤 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고,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다양한 사연과 삶의 배경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중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위안부상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좀 더 집중한다. ‘순결한 조선처녀’라 여겨지면 존중심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아예 눈감아 버린다.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그런 위선적 태도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 사회에서 폭넓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위안부는 모두 강제로 끌려간 소녀였다’는 우리의 강변은 ‘위안부는 모두 자발적 매춘부였다’는 일본 우익의 강변과 쌍을 이루어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미군을 상대로 같은 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일본놈들의 만행’이 아니라, 가부장제 국가에서 언제나 여성에게 존재하는 폭력 구조의 일부다. 폭력 구조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도 남성 수용자를 위한 위안부가 존재했을 만큼 일반적이며 뿌리 깊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그러한 본질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2014년 6월 미군 위안부 122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이 위안부가 된 경로 역시 다양했다. 인신매매로 끌려온 소녀도 있고 가족에 의해 팔려온 사람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온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애국교육’을 하고 미군의 건강을 위해 성병관리를 하고 도망치면 경찰을 통해 잡아오기까지 했던 한국 정부는 그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우리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와 그들을 동등하게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순결한 처녀들이 아니라 ‘양갈보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저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연대 요청을 거부하고 위안부 소녀상에 온전히 자신을 일치시키는 걸 비판하거나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드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소녀상으로 단일화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알량한 역사의식과 지배체제로부터 주입된 민족의식과 전근대적 여성관을 위안부 소녀상을 내세워 은폐하려 드는 건 말이다.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은 자유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일 같아 보여도,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여성이 국가와 남성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는 가부장제 구조 속의 일이다. 위안소가 ‘인정된’ 장소였고 ‘합법적’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법’이 국가와 군이 만든, 남성을 위한 ‘법’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자원’한 처녀들이었건,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들’이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는 박유하의 말이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을 더러운 여자들로 모욕하는 건 누구인가. 더러운 여자는 없다. 더러운 게 있다면 여성을 깨끗한 여자와 더러운 여자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폭력, 그에 기반을 둔 우리의 싸구려 정의일 것이다.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는 전문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https://parkyuha.org/)

원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더러운 여자는 없다 (경향신문)

신은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사태를 바라보며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것은 책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발터 벤야민과 기억의 정치학으로 석사 논문을 썼던 나에게 전쟁과 국가폭력,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증언은 중요한 관심사였다. 논문 막바지에 이를 무렵, 뒤늦게 발견한 책들을 통해 피해/가해의 경계, 그리고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기억이 단일한 것이 아니며 젠더가 그 비균질성의 핵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공부를 더 진전시키지 않았고 그 이후 떠난 인도 여행을 계기로 전공을 인류학으로 전환해버렸다.

영국에 와서 두번째 석사 논문을 쓰던 때, 내 주제는 재난과 불평등이었다. 지진이나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난에서부터 내전등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의 순간 혹은 에볼라와 같은 질병에 이르기까지 ‘재난’ 이라고 불리는 많은 극단적 상황들은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믿어왔던 사회의 질서를 정지시키거나 파괴하고 때로는 (다양한 목적에서의) 군사적, 인도적 개입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나 재난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상황이 사회적인 약자들 (특히 여성과 빈곤층)에게는 이미 상례였으며, 많은 경우 여성들은 중층의 고난에 직면한다. 많은 현장연구들은 재난상황이나 난민캠프 등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약자, 특히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착취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일례로 대지진 이후 아이티의 대피소에서는 구호물자로의 접근과 분배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성을 댓가로 요구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것은 여성에 남성에게 종속된 사회에서는(나는 지구상의 모든 사회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이 여성을 그저 ‘무력한 피해자’로만 위치짓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그 안에서도 갈등하고 협상하며 연대를 만들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혹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종종 울지 않을 수 없었지만,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분노와 슬픔이 나와 그 여성들을 이어주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대담에서 ‘낚시바늘에 걸려 버둥거리는 물고기의 고통’ 에 대해 말했을 때의 인상과 종종 겹쳐진다.

아감벤은 그의 책, <아우슈비츠의 잔여들>에서 바로 그러한 잔여들에 대해 말했다. 진정한 증인은 살아남은 이들이 아니라 바로 죽어간 자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죽은자도 산자도 되지 못했던 ‘무젤만들’ 혹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언어조차 갖지 못해 의미없는 소리들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던 어린아이, 후르비넥이라고 말한다. 그 고통은 ‘홀로코스트 산업’ 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화된 추모의 형식 속에서가 아니라, 미국의 유대뮤지엄에서조차 추모의 자리를 얻지 못했던 소수자들, 국가없는 이들의 존재를 통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침묵’의 형식을 통해 들려온다.

나는 이런 논의가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대하는 아주 ‘상식적’ 인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이라는 단어는 종종 모든 것을 삼킨다. 박유하 교수의 책을 ‘안읽어봐도 뻔하다’ 며 비난하는 이들의 말들에, 과거사를 사과하라며 다짜고자 식사자리에서 일본 여학생들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한 한국 남성 유학생에게(같은 기숙사엔 일본 남학생들도 살고 있는데 왜 그는 여학생들에게만 그런 짓을 했을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간 무고한 소녀들’ 에 관해서만 말하는 언론에, 그리고 박유하 교수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욕설을 퍼부었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분노를 느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공부하고 여행했던 여러 나라들에서 좋은 일본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조심스럽게 한국인들은 일본을 싫어하느냐고 묻는 이도 있었는데, 몇 해 전의 나는 그 친구에게 내가 한국에서 배웠던 대로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들이었다고!” 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여전히 몹시 부끄러워하며 마음에 품고 있다. 그들 또한 내가 그러했듯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과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친구가 된 이후, 우리는 오에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오키나와 뉴스를 찾아본다. 또한 그 일본 친구들은 나에게 ‘일본제국’의 군인으로 죽어야했던 조선인 병사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내주고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조선인 원폭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굳이’ 찾아가 애도를 표한다.

영국에 와서 배운 ‘최상의 것’은 그런 신뢰였다. 심지어 같은 전공 안에서도 입장은 천차만별이고 출신 국가도 문화도 다른 이들은 종종 논쟁이란 이름으로 부딪혔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우리가 대화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악의를 과장하지 않아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이런 누구나 동의하는 전제들이 있었다. 안봐도 뻔한 것이 아니라, 낯설고 불편해도 듣고 질문하고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나는 이 문제에 ‘지나치게’ 열정적인 이들이 박유하 교수가 연구를 계속하면서, 일본인/한국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쌓아온 경험과 시간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제 처음으로(어쩌면 당분간은 마지막일지도 모를) 박유하 교수의 세미나에 다녀왔다. 전공은 다르지만, 나 역시 어디에서건 들리지 않은 목소리들을 들으려, 여성들의 말을 기록하려 애쓸 것이다. 남성들이, 국가가 원하는 서사가 아닌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이야기를.

지난해 노벨상을 수상한 알렉시예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는 전쟁을 경험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자신이 얼마나 예뻤는지 혹은 무서웠는지를 말하는 여성에게 그녀의 남편은 “내가 당신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얘기해. 얘기하다 또 울지 말고. 예쁘고 싶었다느니, 긴 머리를 자르고 엉엉 울었다느니, 그런 쓸데없는 여자들 얘기는 제발 좀 하지 마.” 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을 알렉시예비치는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과거의 사막에 뚝 떨어지곤 했다.” 고 묘사한다.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사막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 페이스북에 글을 거의 쓰지 않지만 이렇게 쓴 건, 박유하 선생님께 건강하시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후속 연구들을 보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이 폭풍이 지나간 이후가 되겠지요. 여튼,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