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国の慰安婦訴訟支援へのご参加をお願いします

さる10月27日、ソウル高等法廷裁判部は、元慰安婦の方たちの名誉を損なったとの嫌疑で起訴された朴裕河教授に罰金一千万ウォンの判決を下しました。韓国を、学問と表現の自由を尊重する国と信じてきた国内外のすべての人々にとって実に衝撃的なことと言うほかありません。2017年1月の第一審は、およそ一年をかけて、あたかも学術討論のような裁判を10回以上行い、朴教授に無罪を宣告しました。しかしこうした判決を軽く翻した二審の有罪宣告に、私たちは深い憂慮を禁じ得ません。

『帝国の慰安婦』の中で名誉毀損の証拠として検察が示した言葉は全て、証拠として有効とは言えず、著者に名誉毀損の意図があったとは考えられないというのが第一審の判断でした。同時に慰安婦問題は、社会の公的な関心事であるだけに、活発な公論形成のためにむしろ表現の自由を幅広く保証すべきだとして無罪の判決を出したのです。しかし、韓国司法部の合理性と公共性をあますところなく示してくれたその判決は二審で完璧にひっくり返りました。

有罪判決の根拠は二つに要約できます。そのひとつは、著者が「虚偽の事実」を提示したのであり、二つ目は、名誉毀損の「故意」があったとするものです。裁判部が、著者の慰安婦認識を「虚偽」とみなしたのは、韓国社会と国際社会の「正しい」認識とは異なるという理由でした。そして「故意」の判定は、慰安婦に対する「社会的評価」を「低下」させる効果のある主張であることを著者が知っていながらそうした主張をした、という判断に基づいていました。

しかし、これは学問的著作に向き合う態度として大変危険なものと私たちは考えます。慰安婦問題と関連して、「正しい」認識と「虚偽」の認識が最初から決まっているとみなすのは、慰安婦問題を活発な研究と討論の対象としないように方向付け、結果として慰安婦問題を日韓葛藤の原因として残しておく発想です。さらに、朴教授の本に名誉毀損の「効果」があると見るのは、その本のいくつかの効果の中の一つ、しかも、読者の側の特殊な利害関係のために生じやすい効果を誇張したものです。わたしたちは、二審裁判部が普遍的な学問の自由に関する関心より、特定の意図や目的を持つ学問活動や読書行為を奨励するのではないかとの疑問を持たざるを得ません。

『帝国の慰安婦』に対する賛否とはかかわりなく、私たちは二審裁判部の判決が韓国の学界・文化界に重大な危機をもたらすものと考えます。有罪宣告でもって裁判部が示唆したのは、韓国の学界・文化界は、今後身の安全を確保するためには国内の主流集団が「正しい」と認めた歴史認識のみに従わないと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もあります。

学問の自由を保障した韓国の憲法条文は聞こえのよい修辞でしかなく、主流集団の利益や見解と異なるすべての研究は、処罰の対象になることでしょう。こうした二審裁判部の判決を前に、軍事独裁政権とともに消えたとみなされていた思想的統制が新たに復活したかのような感覚を覚え、画一的な歴史認識がもう一度強制されるかのように感じる人は少なくないでしょう。

有罪判決を出された朴教授の前におかれた道は険しいです。「正しいと認められた見解」と異なる、自らの意見を表現しようとする全ての韓国人の将来への道もまた、険しいです。

朴教授が刑事起訴されたとき、韓国・日本および欧米の学界をはじめ社会の各分野の多くの方々が事態の深刻性を理解し、司法部の思慮深い判断を促す嘆願にたちあがりました。一審の無罪判決はそうした努力が無駄ではなかったことを確認させてくれました。
しかし二審の時代錯誤的な有罪判決は、「異なる」意見を許さない国家および社会権力の存在とその抑圧性を明確に見せつけています。こうした状況に対抗する市民の意志を表すべき時と考えます。

そこで、わたしたちは朴教授の訴訟を支援し、そのための募金を始めます。歴史と政治のある問題について異なる考えを持つとしても、その考えを語る権利は守られるべきというのが、この募金を始めるわたしたちの基本的な考えです。朴教授を始めとする韓国の学者と文化人たちが、「異なる意見を語る」という理由で犯罪者の鎖につながれるようなことが、今後はいっさい発生しないよう、どうか多くの方々のご関心とご参加をこころより願っております。

2017年12月7日

賛同人
姜信杓 Shin-pyo Kang (仁済大学名誉教授)
姜運求 Kang Woongu (写真家)
高榮範 Young B. Oh (劇作家)
高宗錫 Koh Jongsok (作家・言語学者)
金京玉 Kim kyungok (演劇評論家)
金成姬 Seonghee KIM (桂園芸術大学)
金映圭 Kim YoungQ (仁荷大学)
金英鎔 Kim YoungYong (元 韓国経済新聞社長)
金容均 Yong Kyun Kim (梨花女子大)
金容雲 Yong-Woon Kim (漢陽大学名誉教授)
金禹昌 Kim Uchang (高麗大学名誉教授)
金源祐 KIM Wonwoo (作家)
金澤秀 Taik Soo Kim (図書出版 ディ オリジン社長)
金哲 Kim Chul (延世大学 名誉教授)
南基正 Nam Kijeong (ソウル大学)
羅鍾一 Ra Jongyil (元駐日・駐英韓国大使)
朴慶洙 Park Kyungsoo (江陵原州大学)
朴三憲 Park Samheon (建国大学)
裵琇我 Bae Suah (作家)
徐賢錫 Seo Hyun-Suk (延世大学)
辛炯基 SHIN HYUNG KI (延世大学)
安秉直 Byong Jick Ahn (ソウル大学名誉教授)
劉峻 Yoo Jun (延世大学)
尹聖晧 Yoon Songho (東西大学)
尹海東 Hae-Dong Yun (漢陽大学)
李康民 Kangmin Yi (漢陽大学)
慶順 Kyung Soon (映画監督)
李京塤 Lee Kyounghoon (延世大学)
李大根 Dae-Keun LEE (成均館大学名誉教授)
李淳在 Lee, Soon-Jae (世宗大学)
李栄薫 Lee Younghun (元ソウル大学教授)
李祭夏 Je Ha Lee (作家)
鄭鍾柱 JEONG Jong-job (図書出版プリワイパリ社長)
趙寛子 Jo Gwanja (ソウル大学)
曺碩柱 Seok-ju Cho (成均館大学教授)
趙容来 Cho Yong Rea (国民日報編集代表)
崔圭承 Choi Kyu Seung (詩人)
崔範 Choi Bum (評論家)
黄永植 Hwang Youngsik (韓国日報主筆)
黃鍾淵 Jongyon Hwang (東国大学)
黃鎬贊 Ho Chan Hwang (世宗大学)
金學成 HAK SUNG KIM (タボッ法律事務所)
金香勳 Kim HyangHoon (法務法人 セントロ )
李成文 LEE SEONG MUN (法務法人 明渡 )
李東稙 Dong Jik Lee (法務法人 新源)
李敏錫 Minseok Lee (李敏錫 法律事務所)
崔銘奎 Choi Myung Kyu (崔銘奎 法律事務所)
許中赫 Hur ZungHyuk (許中赫 法律事務所)
洪世旭 Hong Sae Uk (法務法人 H’s)
韓政澔 Han Jung Ho (忠北大学教授)
50名

浅野豊美 (早稲田大学)
天江喜七郎 (元外交官)
岩崎稔 (東京外語)
池田香代子 (翻訳家)
上野千鶴子 (東京大学名誉教授)
大江健三郎 (作家)
小倉紀蔵 (京都大学)
尾山令仁 (牧師/神学者)
加納実紀代 (元敬和学院大學教授)
清眞人 (元近畿大学教授)
金枓哲 (岡山大学)
熊木勉 (天理大學)
古城佳子 (東京大学)
小森陽一 (東京大学)
佐藤時啓 (東京芸術大学・写真家)
篠崎美生子 (恵泉女子大学)
竹内栄美子 (明治大学)
東郷和彦 (京都産業大学・元外交官)
東郷克美 (早稲田大学名誉教授)
成田龍一 (日本女子大学)
中川成美 (立命館大学)
中沢けい (法政大学/作家)
西成彦 (立命館大学)
西田勝 (文芸評論家)
朴貞蘭 (大分県立芸術文化短期大学)
朴晋暎 (写真家)
深川由起子 (早稲田大学)
藤井貞和 (東京大学名誉教授)
和田春樹 (東京大学名誉教授)
Gregory Clark (国際大学)
四方田犬彦 (映画史、比較文学研究者)
千田有紀 (武蔵大学)
榎本隆司 (早稲田大学名誉教授)
33名

Andrew Gordon (Harvard University)
Brett de Bary (Cornell University)
Bruce Cumings (Chicago University)
Chizuko Allen (Hawaii University)
Daqing Yang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Jin-Kyung Lee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John Treat (Yale University)
Mark Selden (Cornell University)
Michael K. Bourdaghs (University of Chicago)
Miyong KIM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Noam Chomsky (MIT)
Sakai Naoki (Cornell University)
Sheldon Garon (Princeton University)
Tomi Suzuki (Columbia University)
Thomas Berger (Boston University)
William W. Grimes (Boston University)
Sejin Park (Adelaide University, Retired)
Alexander Bukh (Wellington Victoria University)
Reiko Abe Auestad (Oslo University)
Amae Yoshihisa (Chang Jung Christian University)
20名

合計 103名

「帝国の慰安婦」訴訟支援の会

問い合わせ先:日本語 [email protected]
韓国関連事項:英語・ 韓国語[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東アジア和解と平和の声)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동참 호소문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에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10월 27일 서울 고등법원 재판부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박유하 교수에게 벌금 천만원의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대한민국이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나라라고 믿어온 국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1심 재판부는 약 일 년 동안 학술 토론장을 방불케 하는 재판을 무려 열 번 이상이나 거친 끝에, 박 교수에게 무죄를 선고한 바 있습니다. 이 판결을 간단히 뒤집은 2심의 유죄 선고에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1심 재판부의 판단은, 『제국의 위안부』 중 명예 훼손의 증거라고 검찰이 적시한 문구들은 모두 증거로서 유효하지 않으며, 저자에게 명예 훼손의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위안부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공적 관심사인 만큼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국가기관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이 오가는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무죄로 판결했던 것입니다. 한국 사법부의 합리성과 공정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그 무죄 판결은 2심에서 완전히 전도되었습니다.

유죄 판결의 근거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저자가 “허위 사실”을 적시했으며, 둘째, 명예 훼손의 “고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재판부에서 저자의 위안부 인식을 “허위”라고 보는 근거는 그것이 우리 사회와 국제 사회의 “올바른” 인식과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의”란, 저자가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효과가 있는 주장임을 스스로 알면서,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적 저술을 대하는 태도로서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올바른” 인식과 “허위” 인식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은, 위안부 문제를 활발한 연구와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만들고, 아울러 그것을 한-일 갈등의 원인으로 계속 남아 있게 하는 발상입니다. 또한 박 교수의 책이 명예 훼손의 ‘효과’가 있다고 보는 것은, 그 책의 여러 효과 가운데 하나, 그나마도 독자 쪽의 특수한 이해 관계 때문에 생기기 쉬운 효과를 과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2심 재판부가 보편적인 학문의 자유에 대한 관심보다는 특정한 의도를 지닌 학문 활동이나 독서 행위를 장려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찬반 여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저자에 대한 2심 재판부의 판결이 우리 학계와 문화계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죄 선고를 통해 재판부가 시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앞으로 신변의 위해를 입지 않으려면 국내외의 주류 집단에서 “올바르다”고 인정하는 역사 인식만을 따라야 합니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한 대한민국 헌법 조문은 듣기 좋은 수식일 뿐이고, 주류 집단의 이익이나 견해와 상치되는 모든 연구는 처벌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2심 재판부의 판결 앞에서, 군사 독재 정권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사상적 통제가 다시금 부활하는 듯한 느낌, 획일적인 역사 해석이 또다시 강제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유죄 판결을 받은 박유하 교수의 앞 길은 험난합니다. ‘올바르다고 인정된 견해’와 다른,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한국인의 앞 길 또한 험난합니다. 박 교수가 처음 형사 기소되었을 때, 학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많은 분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하는 탄원에 나섰으며, 1심의 무죄 판결로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2심의 시대착오적 유죄 판결은,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국가 및 사회 권력의 존재와 그 억압성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는 시민 의지의 표출이 다시 필요한 때입니다.

이에 우리는 박유하 교수의 소송을 지원하고, 이를 위한 모금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역사와 정치의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할지라도, 그 생각을 말할 권리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모금을 시작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박 교수를 비롯한 한국의 학자와 문화인들이, ‘다른 의견을 말한다’는 이유로 범죄자의 사슬에 묶이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부디 많은 분들께서 관심 가져주시고 참여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입니다.

2017년 12월7일
『제국의 위안부』 소송 지원 모임

동참인

강신표 (인제대 명예교수)
강운구 (사진가)
경순 (영화감독)
고영범 (극작가)
고종석 (작가 언어학자)
김경옥 (연극평론가)
김성희 (계원예술대 교수)
김영규 (인하대 명예교수)
김영용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
김용균 (이화여대 교수)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김원우 (작가)
김택수 (도서출판 디 오리진 대표)
김철 (연세대 명예교수)
남기정 (서울대 교수)
라종일 (전 주영・주일대사)
박경수 (강릉원주대 교수)
박삼헌 (건국대 교수)
배수아 (작가)
서현석 (연세대 교수)
신형기 (연세대 교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유 준 (연세대 교수)
윤성호 (동서대 교수)
윤해동 (한양대 교수)
이강민 (한양대 교수)
이경훈 (연세대 교수)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순재 (세종대 교수)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이제하 (작가)
정종주 (도서출판 뿌리와 이파리 대표)
조관자 (서울대 교수)
조석주 (성균관대 교수)
조용래 (국민일보 편집인)
최규승 (시인)
최범 (디자인 평론가)
황영식 (한국일보 주필)
황종연 (동국대 교수)
황호찬 (세종대 교수)
김학성 (다벗합동법률사무소 대표)
김향훈 (법무법인 센트로 대표)
이성문 (법무법인 명도)
이동직 (법무법인 신원 대표)
이민석 (이민석 법률사무소 대표)
최명규 (최명규 법률사무소 대표)
허중혁 (허중혁 법률사무소 대표)
홍세욱 (법무법인 에치스 대표)
한정호 (충북대 교수)
50명

浅野豊美 Asano Toyomi (와세다대학)
天江喜七郎 Amae Kishichiro (전 외교관)
岩崎稔 Iawasaki Minoru (동경외국어대학)
池田香代子 Ikeda Kayoko (번역가)
上野千鶴子 Ueno Chizuko (동경대학 명예교수)
大江健三郎 Oe Kenzaburo (작가)
小倉紀蔵 Ogura Kizo (교토대학 교수)
尾山令仁 Oyama Reiji (목사)
加納実紀代 Kano Mikiyo (전 게이와가쿠엔대학 교수)
清眞人 Kiyoshi Mahito (전 긴키대학 교수)
金枓哲 Kim Doo-Chul (오카야마대학 교수)
熊木勉 Kumaki Tsutomu (텐리대학 교수)
古城佳子 Kojo Yoshiko (동경대학 교수)
小森陽一 Komori Yoichi (동경대학 교수)
佐藤時啓 Sato Tokihiro (동경예술대학・사진가)
篠崎美生子 Shiozaki Mioko (게이센여자대학 교수)
竹内栄美子 Takeuchi Emiko (메이지대학 교수)
東郷和彦 Togo Kazuhiko (교토산교대학 교수・전 외교관)
東郷克美 Togo Katsumi (와세다대학 명예교수)
成田龍一 Narita Ryuichi (일본여대 교수)
中川成美 Nakagawa Shigemi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中沢けい Nakazawa Kei (호세이대학・작가)
西成彦 Nishi Masahiko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西田勝 Nishida Masaru (문학평론가)
朴貞蘭 Park Jeongran (Oita Prefectural College of Arts and Culture)
朴晋暎 Area Park (Photographer)
深川由起子 Fukagawa Yukiko (와세다대학 교수)
藤井貞和 Fujii Sadakazu (동경대학 명예교수)
和田春樹 Wada haruki (동경대학 명예교수)
Gregory Clark (IUJ 명예교수)
四方田犬彦 Yomota Inuhiko (영화사, 비교문학연구자)
千田有紀 Senda Yuki (무사시대학 교수)
榎本隆司 Enomoto Takashi (와세다 대학 명예교수)
33명

Andrew Gordon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
Brett de Bary (미국 코넬대학 교수)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
Chizuko Allen (미국 하와이대학 교수)
Daqing Yang (미국 조지 워싱턴대학 교수)
Jin-Kyung Lee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고 교수)
John Treat (미국 예일대학 명예교수)
Mark Selden (미국 코넬대학 교수)
Michael K. Bourdaghs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
Miyong KIM (미국 텍사스대학 교수)
Noam Chomsky (미국 MIT대학 교수)
Sakai Naoki (미국 코넬대학 교수)
Sheldon Garon (미국 프린스턴대학 교수)
Tomi Suzuki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
Thomas Berger (미국 보스턴 대학 교수)
William W. Grimes (미국 보스턴대학 교수)
Sejin Park (호주 전 애들레이드 대학 교수)
Alexander Bukh (뉴질랜드 웰링턴 빅토리아대학 교수)
Reiko Abe Auestad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교수)
Amae Yoshihisa(대만 長榮대학 교수)
20명

총 10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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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행송금 국민은행 Kookmin Bank
543001-01-447733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으로 송금
2) 해외에서 보내실 경우, 국민은행 swift code는 CZNBKRSEXXX 입니다.
3) PayPal도 사용 가능합니다. 그 경우 사용하실 Paypal account는 이하와 같습니다. [email protected]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

渦中日記 2017/11/8

나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중에 남성이 많은 이유를 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좀 심한 거 아닌가 싶다. “형사처벌에 반대하지만 책은 엉터리”라는 말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말로서의 힘은 전혀 없다. 고발한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바로 그 엉터리(허위를 책에 쓰는 뻔뻔함!)성과 할머니를 상처준다는 비윤리성에서 찾고 있으니.
학자라는 이름의 이나라 일부 남성들의 윤리성이란 고작, 형사판결에서 패소한 직후, 반대를 말하면서 우아하게 가슴 속 깊은 곳의 처벌욕망을 드러내는 수준인 것 같다.
나의 “붕괴와 몰락”을 지켜보겠다는 말로 돌을 던지라고 선동하는 이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은 많은 공통페친들께 감사드린다. 마침 페친 정리 중이라 좋아요를 누른 분들을 모두 삭제했다. 이런 말에 수긍하는 이들까지 친구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을, 삭제당한 분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는다.
여기서 언급된 녹음은 “돌아가시기 바로 전”이 아니라 몇개월 전이다. 물론 허가도 받은 녹음이다. 나는 위안부문제 관련 책을 또 쓸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연구”용도 아니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눔의 집에서 나를 경계했고, 만나러 갈 수 없었던 나에게 할머니가 자주 전화하셨고, 유언처럼 하시는 말씀이 많았기에 (만났을 땐 오히려, 당신의 말을 받아적으라고 하셨다)녹음했을 뿐이다. 모두 <제국의 위안부>를 내고 나서의 일이다.
이런 이들은 대개 자신의 잘못을 알아도 사과하지않는다. 명백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도. 그에게 “윤리”라는 게 남아 있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부터 알았으면 좋겠다. 이런 이들을 명예훼손 고소하러 다니기엔 내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대화를 해야 할 이들은 침묵하고,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토론하자고들 하니, 난감하다. 통화록 전체를 공개하는 날이 온다 해도, 그에게 나를 “증명”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

‘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 (허핑턴 포스트 바로가기)

1. 자의적인 판결

2017년10월27일, 서울고등법원은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위안부에 대한 명예훼손을 한 책으로 판단하고 벌금 1000만원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2017년 1월 1심에서의 무죄 판결이후 나를 유죄로 판결할 만한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것이 아님에도 무죄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말하자면, 2심은 같은 책에 대한 판단을 증거가 아니라, 책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만으로 뒤집었다. 당연히 승복할 수 없었고 나와 변호사는 곧바로(10월30일) 상고했다. 법원에 제출할 상고이유서는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쓰게 되겠지만, 아래는 재판부뿐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이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선 간단히 써보는 글이다.

2심 판결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조선인위안부’와는 다른 위안부상을 보여 주고 있다. 또 저자는 ‘조선인위안부의 고통’에 관해서도 이 책에 쓰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을 책에서의 기술 전부에 쓰고 있지는 않다. 그 때문에 ‘자발적 매춘부였던 일본인위안부와는 다른, 성노예 조선인위안부’라는, 우리사회와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인식과는 다른 인식을 독자가 갖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다. 즉 ‘조선인 위안부=자발적 매춘부’라는 인식이다. 또한 유엔보고서등 국제사회와 일본의 고노담화등이 제시하는 인식에 따르면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인식은 명백한 허위이다. 저자의 인식을 허위로 단정하는 이유는 국제사회의 인식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인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제사회의 인식을 저자는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와 다른 인식을 말했다. 말하자면 ‘허위’를 말했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하면 대상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될 것인지를 인식했는지 여부도 명예훼손 여부 판정에서는 중요한데, 저자는 오래 위안부문제를 연구했으므로 그 파생효과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허위사실 적시와 집필목적에서 ‘고의(범의)’가 인정되므로 유죄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2심 판결은 ‘독자의 독해에 저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나에게 내려진 ‘벌금 1,000만원’을 검찰이 구형한 3년 징역형보다 가벼워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혹은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1,000만원이라는 액수는 징역이라면 5년에 해당하는, 명예훼손 관련 벌금형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금액이다. 재판부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처럼 강조했지만 징역형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3년 이상의 징역 형에 해당하는 처벌이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마치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명예훼손법률상 유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해당내용이 ‘사실’이어야 할 것이 첫번째 조건이 된다. 나에게 무죄를 내린 1심은 검찰이 지적한 35곳 중 30곳을 ‘의견표명’으로 규정하고 처음부터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5곳은 ‘사실’에 관한 기술로 규정하면서도 위안부의 사회적평가를 저하시키는 표현이 아니라거나, 개개인을 특정한 것이 아니므로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저자에게 명예훼손을 하려는 목적(고의)이 있었다고 볼 수 없고 “위안부문제는 국민들이 알아야 할 공공성/사회성을 갖는 공적관심사항이므로 활발한 공개토론과 여론형성을 위해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 해야 한다면서 무죄를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기까지 1심재판부는 무려 1년에 걸쳐 10회 넘게 재판을 진행했고, 본재판 이후에는 매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긴 시간을 들여 재판을 진행했다. 검사는 나를 비판한 학자들의 논리를 들고 와 나의 ‘범죄’를 주장했고, 결국 법정에서의 공방은 학술세미나와 다름없는 내용이 되었다. 그에 비해 2심은 고작 4번 진행되었고, 매번 한두시간만에 끝났다. 그렇다면 1심에서 제출된 방대한 자료를 세심하게 봐야만 이 사건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을 터인데 2심 판결은 결코 그랬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 왜곡과 소송의 본질

이 판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검사가 제출한 왜곡된 책 요약(악의적인 독해)을 그대로 차용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래에 인용해 두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책의 취지를 충분히 살펴 요약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가장 신경을 써서 독자의 오해가 없도록 쓴 부분에 관해 재판부는 검사가 멋대로 왜곡한 요약을 가져와 내가 한 말처럼 왜곡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위안부는 강제 연행되지 않았다’고 쓰지 않았다. 일본군의 모집과 관여/관리도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관여했는지 자세히 썼다.

“조선인 위안부가 해야 할 일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면서 본인 혹은 부모의 선택에 의해 자발적으로 갔다” 고 요약된 부분도 엉터리 요약이고,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도 내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위안부 비판자들의 말이다. “1996년 시점에서 위안부란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던 여성들” (42)이라는 표현 역시 재판부가 인용한 유엔보고서의 내용이다. 이런 논리라면 박유하가 `위안부는 자발적매춘부`라고 했다고 보도해 온 모든 언론과 개인도 명예훼손으로 고소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나는 “법률상 배상책임이나 공식사죄를 받을 수도 없다” (2)고 한 적이 없다. 나는 그런 방식만을 지고지선의 해결방법으로 생각해 온 지원단체의 운동방식과 논리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다. “공식사죄를 받을 수 없다”가 아니라 20년 이상 법적책임만을 주장해온 지원단체 생각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니 한일협의체를 만들어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 내가 책에 쓴 내용이다. 한국판 간행 이후 나온 일본판에서는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썼다.

내가 “피고인이 주장하는 해결방식을 제시” (39)했다는 말은 검사의 주장인데, 앞에서 쓴 것처럼 나는 한국어판에서는 구체적인 해결방식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고측도, 검사도 재판과정에서 내내 이런 말로 비난했는데 실은 이 주장에 ‘제국의 위안부’ 소송의 본질이 있다. 원고측(지원단체)이 소송을 시작한 건 사실, `위안부의 명예`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운동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책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이라는 부제목에서 나타낸 것처럼 90년대 이후 위안부문제지원운동의 문제를 비판한 책이기도 한데, 그것이 고발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해 온 `법적책임`에 대해 아는 분들은 최소한 내가 만난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는 안 계셨다.

3. ‘사실적시’라는 전제에 대해

이 판결은 나의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에서 모든 조선인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니고 직접적인 폭행·협박 또는 기망·유혹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가 있으며, 일본국이나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한 증거가 없으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하여 강제력이 행사되었으며,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도 착취당했고, 일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등 내용을 함께 서술하고 있다.”(32)
“피고인은 이 사건 도서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을 모집한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모집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위안부들은 가난, 가부장제, 국가주의에 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위안소 내에서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해 강제력이 행사되었고,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 착취당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식민지인으로서 애국이 강제되었고,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동지적관계에 있었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37)
“피고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존재하고 조선인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매우 다양하며, 이 사건 도서는 피고인이 기존 자료를 토대로 현재 우리사회 주류적인 시각과는 다른 입장에서 위안부문제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내용이고, 이 사건 도서 곳곳에서 여러 예외적인 경우와 다양한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서술되어 있다.”(41)

“예외적”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쓴 사람의 견해가 드러나 있어 꼭 전부가 완전한 건 아니지만 나의 책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한 요약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유죄가 내려졌을까?

사실 나는 명예훼손 소송에서는 ‘의견’인지 ‘사실’인지가 중요하다고 듣고 학술적인 책에서의 모든 기술은 기본적으로 의견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학문이란 `진실`을 찾는 과정이지만, 아무리 내가 알게 된 사항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내가 믿었던 `사실` 역시 언제고 새로운 탐구와 학설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학문은 `의견`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헤이든 화이트의 ‘메타역사'(1973)이후,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한 것처럼 보이는 역사서조차, 입수된 자료를 두고 학자가 문학적상상력으로 엮은 `문학`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은 점차 상식이 되고 있는 중이다. 다수의 지지와 검증을 거친 가설들이 세월과 공간을 넘어 ‘진리’, ‘사실’로 정착되어 오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은 문학적 플롯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플롯을 만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라는 인식은 과거의 역사에 겸허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말하자면 모든 역사서/학술서는 ‘진실=사실’을 추구하는 것이되 하나의 사항을 최종적 ‘사실’로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논리적으로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 시점에서의 ‘인식’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나의 문맥이나 표현자체도 ‘의견’으로서 표현한 곳이 많다.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자체보다 증언을 포함해 역사를 둘러싼 담론을 분석한 학술적 비평서이기 때문이다.

4. ‘사회적 평가 저하’라는 인식에 대해

재판부는 결과적으로 나의 책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 시킨다고 말한다. 재판부가 말하는 ‘사회적 평가 저하’란 위안부 할머니들이 ‘강제연행을 주장’ 하고 있는데 그와 반대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은 그런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내 책을 읽은 이들 중에는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더 생각하게 보게 되었고, 이전에 못 느꼈던 슬픔을 느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적지 않다. 오로지 그들의 독해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이 판결은 그렇게 읽은 모든 이들을 무시한 판결이다. 대신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이들의 존재와 그렇게 유인한 이들의 오독의 ‘가능성’을 편파적으로 우선시했다. 나에 대한 유죄판결은 그렇게 내려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서라기보다는 역사를 둘러싼 담론을 분석한 메타역사서다. 한국과 일본의 여러 층위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썼고, 하나의 ‘진실’ 자체보다 눈앞에 있는 진실(대상/정황)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를 모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필요한 만큼 ‘사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 ‘사실’을 둘러싸고 대립중인 이들이 서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지향하면서 쓴 책이다. 접점을 찾기 위해 양국 정부와 지원단체를 비판했지만, 위안부에 대해서는 부정도 비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시도한 건 오히려 그동안 지원단체가 묵과하거나 은폐했던 목소리를 살려내는 일이었다. 그동안 의식/ 무의식적으로 묻혀 왔던 그 모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야 말로 과거와의 대면에서 성실한 방식– 바람직한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판부는 나의 그런 시도를 인정하면서도, 나의 책에 반발한 지원단체(와 검찰)의 나의 책에 대한 왜곡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조차 제대로 읽고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면서도, 이 판결은 결국 재판부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독자를 무시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판결문에 일부 요약된 것처럼, 나는 ‘위안부의 자발성’을 강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구조를 만든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비판했다. 설사 자발적으로 간 위안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 경우라고도 썼다. ‘(관리) 매춘’이라는 단어는 재판부가 인용한 유엔보고서와 여러 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치평가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하나의 정황설명일 뿐이다. 문맥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의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가 되어야 한다면, 1996년에 보고서를 작성한 유엔보고관, 그리고 일본군위안소를 국가가 관리한 공창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는 다른 모든 학자들도 기소되고 유죄가 내려져야 한다.

5. ‘허위’라는 인식에 대해

재판부가 나의 책을 허위라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자료는 90년대 중반, 즉 20년도 더 전에 나온 자료들이다. 그나마 고노담화는 일본정부가 직접 조사해 내놓은 견해지만, 다른 유엔보고서나 국제사법위원회의 자료는 위안부문제가 문제로서 발생되기 시작한 초기에 지원단체들이 유엔등 국제사회에 제출한 자료등을 비전문가들이 검토해 나온 자료다.

물론 유엔의 쿠마라스와미보고서는 일본이나 한국, 그리고 북한에서 학자나 위안부의 증언을 듣고 종합한 보고서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공정하게 취합하려 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보고서는 지금은 부정되고 있는 (이 문제해결을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온 와다 하루키 교수조차 작년에 낸 책에서 요시다증언을 부정했다)요시다 증언등을 근거로 나온 보고서다. 그리고 동시대에 벌어졌던 유럽등 내전에서의 강간/학살과 똑같은 것으로 이해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학계는 이후 20년이상 연구를 진행했고 지금은 학계에서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위안부의 물리적 강제연행’을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강제동원을 주장했던 이들은 지금은 동원에서의 강제가 아니라 위안소에서 부자유했다는 식으로 내용을 바꿔서 여전히 똑같은 ‘강제성’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연구자나 지원단체관계자들이 그런 정황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변함없이 ‘강제연행’에 집착하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장해 온 ‘법적책임’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 방식만이 정의로운 사죄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책을 ‘허위’라면서 고발한 이유는, 위안부할머니를 모욕하거나 일본의 책임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법적책임’의 가능성에 내가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원단체의 사고에 의문을 제기한 나를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라며 목청높여 비난하고 급기야 고발/기소에 이른 원고측과 검찰의 주장을 2심 재판부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재판부의 판결문은 1심에서 제출한 방대한 나의 자료를 완벽하게 무시했음을 보여준다.

재판부는 나의 책을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댓가를 받고 성매매를 했다`(31)”,”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 고 했다고 요약한다. 그러면서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일본국가나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동원되어 일본군 위안소에서 성적 학대를 당하며 성노예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했다`” (31)는 것이야말로 “사실” 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모집은 했지만 일본군이 납치나 속임수를 허용한 정황이 없고 “공적으로는” (즉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지시한 흔적이 없고 오히려 그에 반하는 정황이 증언/수기등에서 보인다) 오히려 그런 정황을 단속한 정황이 보인다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할머니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당사자의 증언은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다만, 경찰과 같이 혹은 혼자 나타난 ‘군인’처럼 보였던 이들은 군속대우를 받고 군복을 지급받은 업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재판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곳을 나의 글로 착각하고, 그 부분에 내가 일일이 그에 반하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분을 ‘범죄’로 단정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대부분, 말한 이들을 비판하는 문맥, 혹은 전체를 정리하는 부분에서 쓰인 내용들이다. 오히려 지적된 대부분 앞뒤에 반박/비판이 들어가 있는데도. 그런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에만 반응한 셈이다.

재판부는 유엔보고서에 나오는 “일본정부가 강간수용소의 설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군부는 물리적 폭력, 유괴 강요와 속임수를 동원했다” (34)는 말, 일본군이 여성이나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업자에게 적극적 지원을 부여했다” 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 인식이 “위안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 이라고 주장한다(36). 나의 책은 이런 “중요한 부분이 사실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에 “허위” 라는 것이다.

재판부가 유엔보고서쪽이 진실일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국제사회’라는 단어를 무조건 권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원고측과 검찰이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원고측은 그동안 나온 국제보고서들과 고노담화를 나의 ‘범죄’를 증명하는 자료로 검찰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들의 고소/기소 취지는 말하자면 ‘국제사회는 물론 일본까지 공유하는 인식을 박유하가 혼자 부정하고 있다’였다.

하지만 나는 고노담화를 부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높이 평가했다. 다만 해석을 달리 했을 뿐이다. 지원단체는 예전에는 고노담화가 강제성을 부정한 것이라면서 미봉책으로 치부하고 비판했었다. 그러다가 아베정권에서 고노담화가 재검증대상이 되자 갑자기 고노담화가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라면서 지키기에 나섰을 뿐이다.
그런데, 고노담화를 만든 전 관방장관은 나의 기소반대성명에 서명하기도 했다(2015/11,http://www.ptkks.net/approval/). 나의 해석이 그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다면 그가 참여했을 리가 없다.

재판부는 국제보고서의 ‘성노예’인식이 옳고, 나의 책은 그에 반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지원단체의 성노예인식에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동시에 위안부가 분명히 `성노예적`존재라고 썼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하지만 피고인은 처음에는 일부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거나 여러가지 경우가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다가 이 사건 표현들에서는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서술하거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위 표현을 접하는 독자들은 ‘전체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또는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였고, 애국적으로 일본군과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서술되어 있고, 이러한 내용이 객관적인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사건 표현들은 허위사실에 해당한다”(37)고 말한다.

이런 재판부의 인식은 ‘자발적 매춘부’라면 피해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만든 것이기도 한데, 원래는 지원단체의 인식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 있던 이들이 오히려 ‘매춘’에 대해 차별적인 생각을 스스로 가졌거나(그들이 오로지 ‘순결한 소녀상’에 집착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20년 이상 여성인권운동을 하면서, 사회가 필요시하고 차별해 온 문제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시도한 나를 죄인으로 치부하고 고발한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한 상황을 모르는 채로, ‘사회가 위안부를 차별(사회적 평가 저하) 할 수 있으니 (저자의 의도가 그게 아니더라도) 처벌한다’ 고 한 셈이다.

6. 인물특정 여부에 대해

재판부는 나의 책이 특정 위안부를 지칭해 명예훼손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2심 재판부의 말이 맞다면 오히려 원고로 이름이 올라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 개별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누구의 이름도 의식하지 않고 책을 썼다. 그런데 원고측이(검찰이) 나의 ‘허위’ 를 증명하기 위해 재판부에 제출한 나눔의 집 거주 다섯분의 구술서에 따르면 오히려 아무도 그런 경험을 한 분은 없다. 심지어 그 중에는 ‘보국대’로 갔다고 말한 분조차 있다.

그런데 재판부는 내가 집필목적에 대해 쓴 서문중에서

“말하자면 한일양국은 20여년의 역사문제갈등을 거치면서 심각한 소통부재 상황에 빠져 버렸다. (중략) 그 갈등의 중심에 위안부문제가 있고, 그들(일본의 부정자)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위안부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38-39)라는 서문일부와, 이하 인용한 부분을 가져와 내가 구체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는 위안부를 특정했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과 일본사이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다. 피고인도 이 사건 도서에서 [한국의 위안부들과 지원단체는 그 후에도 일본정부와 세계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사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로 간주되고 있지만, 다른 나라는 사죄를 받아들였으므로 현재의 위안부 문제란 실은 이 몇십명의 위안부와 위안부지원단체가 주체가 된 한국인 위안부문제이기도 하다(171)] 라고 썼다” 면서 “스스로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나타내고 있는 사람에게만 명예훼손 문제가 생길 뿐” 이므로 “제3자가 일본군 위안부를 생각할 때는 전체 ‘조선인 위안부’보다는 우선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힌 ‘위안부피해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위안부를 “특정” 했다고 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 인용된 부분에서 내가 강조한 건 ‘한일갈등의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일 뿐, ‘갈등을 빚고 있는 그 위안부’가 아니다. 이 부분에서도, 책 전체에서도 나는 위안부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사죄요구가 옳지 않다고 쓴 적이 없다. 일부 할머니들에게 주어진 정보가 과연 정확했는지, 그렇게 생각하도록 이끈 지원단체의 사고가 과연 절대선인지를 의문시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300쪽이 넘는 나의 책을 읽으면서 위안부의 슬픔을 느꼈다는 이들은 대부분 재판부나 원고가 말하는 ‘특정한 그 위안부’가 아니라 ‘이름모를 위안부’, ‘전쟁터에서 동원된 위안부’를 떠올린 이들일 것이다. 그런 독자들이 실재하는 한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만일 내가 위안부문제를 그저 ‘사죄보상을 요구하는 그 위안부들의 문제’로 생각했다면 애써 ‘위안부의 슬픔과 고통’을 전하려는 책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기존지원단체과 같은 규탄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귀를 기울이면서, 문제적인 생각을 비판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위안부’의 실상을 보여주는 추상적인 ‘위안부’가 있고, 현재의 한일갈등의 중심인 구체적인 ‘위안부’ 할머니가 있다. 나의 책은 후자에도 주목했지만, 고찰 대상은 어디까지나 전자였다. 검찰이 매춘/강제성/동지적관계, 이 세 부분을 문제삼았다는 것은 전자를 문제삼아 기소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이름모를 위안부’를 포함해 모든 (추상적) 위안부에 관해 쓴 부분에 주목하면서 내가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현재의 구체적인) 위안부’를 특정했다는 말은 그들의 기소취지에 비추어 봐도 비논리적이다. 설사 오로지 나의 책을 읽고 현재의 위안부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의도하지 않은 한 그건 저자의 책임일 수 없다. 나의 고찰 대상이 어디까지나 전쟁터에서 사망한 ‘그녀들 모두’였다는 건 위안부에 대해 설명한 책의 1부를 이렇게 끝맺었다는 만으로도 분명하다. (2부와 3부는 90년대 이후의 갈등양상에 대해 썼고 4부는 현대가 과거를 반복하고 있는 구조에 대해 썼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들이 아닐까.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다 생명을 잃은 이들—말없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일본이 사죄해야 하는 대상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름을 잃은채로 성과 생명을 ‘국가를 위해’바쳐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제국의 위안부’들에게.” (104)

7. 목적 (“고의”)에 대해- ‘사회적 평가저하’를 한 건 누구인가?

재판부는 나의 책이 다양한 위안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피고인은 이 사건 표현들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서술하지 않거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를 접하는 독자들은 마치 대부분 또는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였고 애국적으로 일본군에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피고인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서 이 사건 표현들을 서술하였다고 보인다”고 했다 (41).

그러면서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를 집필한 목적, 이 사건 도서의 성격 및 전체내용을 감안하더라도 피고인은 이 사건 표현들에서 적시한 사실이 허위인 점과 그 사실이 피해자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 시킬 만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였다고 보인다. 피고인에게 명예훼손 고의가 인정된다” 는 것이다. (41-41)

말하자면 재판부는 그저 ‘가능성’을 처벌하고자 했고, 그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책의 모든 부분에서 재판부 스스로가 옳게 요약하기도 한 나의 책의 취지를 반복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책이라는 매체가 한 개인의 표현이기도 한 이상, 이런 생각은 개인의 표현방식에까지 국가가 관여해야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과 한국의 독자를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책을 썼고 각각의 부분에서 그 독자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나갔다. 같은 소재를 두고 약간 다른 뉘앙스로 기술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진실을 가능한 한 보되 더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어떻게 생각할 지’ 여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고와 검찰과 재판부는 나의 책이 정작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한 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부분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단어에만 집착했다. 하지만 단어자체가 문제라면, 나를 고발한 이후 언론이 나를 비난하면서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고 한 박유하”라고 반복해 온 시간들, 이 3년반의 시간들이야말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모욕적인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위안부를 비방할 의도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웬만한 독해력을 가진 독자라면 반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썼다. 책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악의적’으로 읽는 독자가 설사 있다 해도 그건 저자의 책임이 아니다.

내가 이 책에서 강조한 건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소녀’만 피해자로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인식이 오히려 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상황이었다. 설사 자발적으로 갔다 해도 그 사실이 은폐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50년 가까이 위안부 체험을 한 이들이 침묵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로 하여금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운 지원자들조차, 그러한 구조를 오히려 공고히 해 버린 건 단순한 오해나 시대적인 문제가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운동의 확산을 위해 전략적인 것으로 바뀌어 간 측면이 있다. 나는 그 전략을 이해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전략이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명백히 적어둔 나의 집필목적을 왜곡해가면서까지 지원단체들이 주장하는 대로 고의/범의를 보려 했다.

물론, 우리사회의 매춘에 대한 인식—‘사회적 평가 저하’를 재판부가 우려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책이 나온 후 나의 책을 근거로 그저 ‘위안부는 매춘부’로 생각하고 위안부에 대해 비판적이 된 이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렇게 읽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저 나의 책을 멋대로 왜곡해 자신들이 이미 해 왔던 말을 보완하기 위해 이용한 이들일 뿐이다. 중요한 건 매춘여부가 아니라 그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해여부다. 나는 오로지 그 옛날 소녀/여성들의 신산한 삶을 더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를 지향하며 자료와 글쓰기 방식을 골랐다. 그런 나의 책을 왜곡한 건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렇게 대립해 온 이들의 접점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썼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책을 있는 대로 받아들여 준 건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반독자들이었다. 이번 판결은 그렇게 ‘오독하는 독자들 ‘,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독자들’을 우선시한, 사회적 성숙을 오히려 퇴보시키는 판결이다.

8. 식민지 트라우마

원고측과 검찰과 재판부의 생각과 판단의 저변에는 우리의 식민지 트라우마가 있다.

예를 들면 재판부는 내가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과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한 부분을 들어 문제시했다. 물론 나는 완전히 같지 않다고 분명히 썼고, 조선인은 기본적으로 차별구조 속에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에 동원되어 다수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생활이 가져다 준 ‘여성’으로서의 고통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전대표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위안부속에서 굳이 한일차이를 보고 싶어 하는 건 그들이 인간의 아이덴티티를 성보다 민족에서 보고 싶어한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아이덴티티는 다양하고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것이 ‘여성’이기 때문이었는지, ‘조선인’이기 때문이었는지는 한마디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양쪽에 다 이유가 있었다고 썼다. 하지만 기존학자 대부분은 ‘여성의 인권’을 앞세워 운동과 연구를 해 왔으면서도, ‘일본’국적을 갖고 태어난 ‘여성’의 인권은 애써 무시 혹은 간과해 왔다. 그건 세계연대를 위해 ‘여성문제’임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조선인 위안부의 ‘여성’으로서의 고난 역시 도외시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여성’이면서도 공적으로는 ‘남성’을 비판할 수 없었고, 자신들을 착취한 ‘계급’의 문제를 말하지도 못했다. 물론 증언에서는 그런 구조를 충분히 말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묻혔던 말들을 살려내 언어화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만 여기서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지원단체와 일부 학자는 자신들의 인식만이 절대 옳은 것으로 간주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입을 막으려 했다. 혹은 재판 중에 나를 비판하는 일로 직간접으로 고발에 가담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서’를 지향한 것이 아닌 이 책을 두고 ‘역사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더구나 그들은 나의 책이 이른바 일본우익의 책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일본우익과 같다고 외치는 일로 나에 대한 국민비난을 조장하고, 대중에 의한 끔찍한 여성혐오적 비난과 협박을 방치했다. 이것이 대한민국과 재일교포 ‘페미니스트’와 위안부관련 학자와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3년 반 동안 보여준 모습이었다. 그런데 2심 재판부는 결국 그들의 손을 든 것이다.

재판부는 ‘동지적 관계’도 ‘허위’로 판단했지만, 나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라고 분명히 적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나의 책이 ‘애국을 강제했다’고 쓰고 있다고 적고 있으니 내가 강조한 메시지는 분명히 받아든 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원고측과 검찰의 왜곡요약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가 애국적 자긍적으로 협력하였다’고 썼다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물론 실제로 ‘애국적/자긍적’이었다고 스스로 말한 자료들도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목소리까지 포함해 위안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어야 한다. 한사람의 인간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싶다면.)

원고측 고발, 검찰기소, 그리고 이번 형사 2심 판결까지, 이들이 나의 책을 왜곡해 언급할 때마다, 그리고 이들의 말을 그대로 언론이 보도하고 SNS가 확신시킬 때마다, 나는 이들의 ‘허위’사실 유포에 의해 학자로서의 명예에 상처를 입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로 인해 실제로 ‘사회적평가가 저하’된 건 다름아닌 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원고측-고발자들의 목적이었다. 나에게 이 3년반동안 쏟아진 수많은 비난과 협박들은 그들의 의도가 성공했음을 증명한다.

공정하게 평가해야 할 사법부가 스스로 국가의 얼굴을 한 민간인의 손을 들어 한사람의 학자에게 형사처벌을 내린, 2017년 대한민국의 공간이 내게는 아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渦中日記 2017/11/2

“하지만 박교수의 저작은, 식민지의 여성을 전쟁에 동원한 “제국”이라는 시스템에 착목한 학술연구다.
박교수는 “많은 소녀들이 일본군에게 강제연행당했다”는 획일적인 이미지를 부정했다. 동시에 위안부를 필요로 한 제국주의 일본도 엄중한 시선으로 대한다.”
(2017/10/30, 마이니치. 毎日新聞 사설)
“박교수의 저서는, 위안부에 관한 한국에서의 단면적인 관점에 이의를 제기했다. 다른 한편으로 위안부의 가혹한 처지를 만들어낸 “대일본제국”의 책임을 추궁하고 있다. “(2017/10/31, 요미우리. 讀賣新聞 사설)
———
고발, 기소, 패소. 이런 일들로 주목 받을 때마다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우익의 주장과 같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물론 승소했을때조차.
3년이상 해명하고 설명해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변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지만 변하지 않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내가 알기로 보수성향인 요미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제국의 위안부> 서평이나 인터뷰를 실은 적이 없다. 우파신문인 산케이도 마찬가지. 그건, 이들 신문에게 나의 책이 불편했다는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싣는다 해서 거절할 생각은 없다. 나는 오히려 그 독자들 중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인들에게 다른 생각을 전하고 싶었던 거니까.
이들의 언급에서 “획일적인 이미지를 부정” 했다는 것에만 주목할 사람도 있겠지만, “일본의 책임을 추궁”한 부분에 언급한다는 건, 내가 던진 공을 받아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미우리의 이런 언급은 내게는 기쁜 일이다. 물론 비판자들은 “요미우리가 긍정적으로 언급한 건 <제국의 위안부>가 우파의 입맛에 맞는 얘길 썼기 때문이다!”라고 다시 외치겠지만.

渦中日記 2017/11/1

11월이군요. 저 이제 괜찮습니다.
이하에 인용한 부분은 지난 금요일 판결문에 쓰여 있는 내용입니다.
반복된 부분도 있지만 아무튼 이 요약을 보면 재판부는 저의 책을 어느정도 제대로 읽은 듯 합니다.
그런데 왜 유죄라고 했을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명백하게 짓밟힐” 저의 인권보다 “훼손될지도 모르는” 기존연구와 운동의 권위를, 그리고 국내학자의 새로운 의견보다 나온지 20년이 넘은 국외의견을 중시한 결과입니다.
혹은
아래의 인용이 보여주는 것처럼
재판부를 포함 “제대로 읽은, 이미 존재하는 독자”보다, “잘못 읽을 지도 모르는 미지의 독자, 그리고 그렇게 유도한 지원단체및 일부학자”를 중시한 결과입니다.
자세히는 다시 쓸 생각입니다.
아무튼 이하 인용부분이 형사2심 재판부의 <제국의 위안부>독해입니다. 이렇게 받아 주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 기운차리려 합니다.
언론과 국민들, 무엇보다 비판자들이, 재판부의 이 견해를 우선 공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저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적관계” 라고 썼습니다. 물론 그 말을 반복해서 쓴 건 아닙니다.
이 판결은 결국, “모든 문장에서 이런 부분을 반복 해야 했다”는 판결입니다.
10월30일에 상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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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에서 모든 조선인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니고 직접적인 폭행•협박 또는 기망•유혹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가 있으며, 일본국이나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한 증거가 없으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하여 강제력이 행사되었으며,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도 착취당했고, 일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등 내용을 함께 서술하고 있다.”(32)
“피고인은 이 사건 도서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을 모집한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모집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위안부들은 가난, 가부장제, 국가주의에 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위안소 내에서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해 강제력이 행사되었고,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 착취당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식민지인으로서 애국이 강제되었고,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동지적관계에 있었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37)
“피고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문제에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존재하고 조선인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매우 다양하며, 이 사건 도서는 피고인이 기존 자료를 토대로 현재 우리사회 주류적인 시각과는 다른 입장에서 위안부문제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내용이고 ,이사건 도서 곳곳에서 여러 예외적인 경우와 다양한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서술되어 있다.”(41)

아사히 신문 사설 번역문 [위안부 재판 한국의 자유가 흔들리고 있다.]

자유로워야 할 학문 활동에 검사가 개입하고 재판소가 유죄판결을 내린다. 한국의 민주주의에 있어서 불행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박유하 세종대학교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형사재판에서 서울 고법이 유죄판결을 내렸다.
저서의 많은 부분에 허위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고 인정하고, 전 위안부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는 결론을 내렸다. 박교수에게는 벌금 100만엔(1000만원)을 언도했다.
허위라고 본 것은, 전시에 전 위안부들을 모집하는 방법에 관한 기술 등이다. 연구의 대상이 되는 역사적 사실을 둘러싸고 공권력이 독자적으로 진부를 단정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1심에서는 대부분의 기술에 대해서 저자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무죄라고 하였다. 고법에서는 이를 뒤집고, 유죄라고 하면서도, 학문과 표현의 자유는 위축 되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학문의 자유가 보호 되어야 할 연구의 영역에까지 들어와서 형사처벌을 하는 사법을 앞에 두고 학자와 시민들이 위축되지 않을 리가 없다.
한국에서는 식민지시대에 관련한 문제는 민감해서, 미디어의 보도나 사법 판단에도 국민감정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박교수는 일본 관헌들이 어린 소녀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했다라는 한국내의 뿌리깊은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물리적인 연행조차 필요하지 않았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 한다.
사회에 침투한 ‘기억’이 학문상의 ‘옮음’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굳이 사실의 다양성에 주목하여서 식민지지배의 모순을 추궁하려 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폭력적인 연행은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견해가 최근 한국측의 연구성과에서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도 고려하지 않은채, 허위라고 단정한 사법판단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국에서 민심(民意)중시를 간판으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발족한지 곧 반년이 된다. 정부는 역사문제에 대해 일본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창하고 있는 단체로부터도 지지를 받고 있다. 혹시라도 고법이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논할 가치조차 없다.
한일간의 최근 행보를 되돌아보면 역사문제의 정치 이용은 엄금(厳禁)이다. 화해를 위한 교류와 이해의 심화를 장려하고, 자유로운 연구와 조사활동에 의한 역사적 사실 탐구를 촉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정부는 구 일본국의 관여하에, 고통스러운 체험을 강요당한 여성들의 존재를 숨기지 말고, 정보를 부단히 공개해 갈 필요가 있다.
한일 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도, 숨막히게 고정되어버린 역사관을 최대한 불식시키고, 자유로운 연구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강화해가고 싶다.
(번역: 오선영, 페이스북)

아사히 신문 원문 링크
(社説)「慰安婦」裁判 韓国の自由が揺らぐ [朝日新聞] Link

渦中日記 2017/10/29

판결이 나고 이틀이 지났네요. 당일 아침에 데리러 와 준 후배를 비롯해 재판, 점심, 그리고 저녁시간을 마음 졸이고 슬픔 혹은 분노로 함께 해 주신 분들, 소회를 이런 저런 형태로 써 주신 분들, 또 저의 포스팅에 댓글과 감정표현으로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아직 기사들도 찾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판결직후 제가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기사화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심때처럼 수많은 기자분들이 있었는데.
누가 보내준, 조선일보 기사가 저의 말은 싣고 있지 않았지만 그나마 사태를 중립적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실한 기사조차 1심 판결이 “틀린의견이라도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고 썼더군요.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 기사를 볼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에게 제가 엉터리학자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되니까요. 1심판결문이 말한 건 “틀린의견인지 여부를 법원이 알 수 없으니 보호해야 한다”였습니다. 그 신중하고도 명쾌한 인식을 제대로 전달한 곳은 거의 없었고, 여전히 잘못된 기사가 다시 재생산됩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싸고 명예가 훼손된 건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니라 저입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명예를 훼손시켰고 여전히 훼손중인 건 제가 아니라,
저의 책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썼다고 주장하면서 고발해 결과적으로 언론이 반복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하도록 만들었던( 그때마다 할머니들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겠지요),
차별의식 때문에 우리가 외면해온 그 옛날 소녀들의 삶과 실존을 여전히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나눔의집등 지원단체 관계자들과
그에 선동당한 언론과,
저에게 “자위대 위안부나 되라”고 말하는 이들을 방치하는 일로 이 사회의 여성혐오를 오히려 조장중인 이들입니다.
어젯밤에야 페북을 둘러 봤는데, 그동안 페북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적의가 다시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냈더군요.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는 <제국의 위안부>의 “학술적수준”이 어떤 건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즉 직접 자료와 증언집에 접하지 않은 이들이) 학술적논의대상이 아니라는 등의 말을 서슴없이 하는 정황입니다.
물론 그 역시 학자들의 말을 옮긴 거지만 그렇게 말한 대표주자인 재일교포 정영환은 위안부문제 연구자가 아니고(즉 스스로 자료로 판단한 게 아니라 남의 연구에 의존해 발언), 제 의견이 틀렸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인 지적은 못하고 있는 강성현은 프로젝트 일원으로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고,
위안부문제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은 침묵하거나 인성공격에만 집중합니다.
그런데 그 정황을 모르는 이들이 저를 “무지””대단치 않다”는 등의 말로 저를 폄훼하는 것이지요.
사실 그런 말들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의 구조가 이제는 너무나 명료하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그게 제가 속한 한국사회의 문제여서 슬플 뿐입니다.
조만간 이 기간동안, 그리고 여전히 목도중인 정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쓸 수 있겠지요.
덧붙이자면, “내용에 반대하지만(엉터리지만/혹은 마음에 안 들지만) 법정판결에 반대”라는 말도 그 의도와달리 저의 책이 법정에 가게 된 걸 당연시하는 구조를 공고히 하고 만다는 얘기도 해 두고 싶군요. 저의 책을 “허위”라고 한 원고와 검찰과 재판부처럼요.
물론 마음은 감사하게 기억해 둡니다.
아무튼 책을 법정으로 보내고, 유죄판결을 부추기고, 그에 부응해 자료준비와 검토에 소요된 1심에서의 그많은 시간들, 저와 변호사의 노력과 판사의 진중하고도 섬세한 판단까지의 시간을
“전혀 고심/고려하지 않고 완벽하게 무시한” 2심 재판부의 인간에 대한 경시보다는 수백배 지적이고 겸허한 인식이니까요.
이제 판결에 대한 간단한 반박문을 쓸 생각입니다. 주심인 김문석 판사가 김영란 전 대법관의 동생이라 듣고 더욱 착잡한 심경입니다.

渦中日記 2017/10/27

형사2심, 패소했습니다.
1000만원 벌금 선고받았습니다.
刑事二審、敗訴しました。千万ウォン(100万円程度)罰金を宣告されました。
추가:상고할 겁니다.

IMF총재가 한국을 “집단자살사회”라고 말했다는 것

IMF총재가 한국을 “집단자살사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의미가 다소 애매하고 어감도 좋지 않지만, 이화여대생들과의 대화에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나온 소회인 듯 하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다.
저출산고령화가 문제시 되기 시작하면서 그래도 중국교포를 비롯한 이주민들이 들어오니 인구문제는 큰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얼마전 어떤 기사를 보니 유입되는 이주민조차 줄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한국은 자국민에게도 그렇지만 이주민들에겐 그 이상으로 따뜻한 나라가 아니니. 더구나 가난한 이주민들을 그저 자국의 “경제이익”이나 “재생산(출산)” 목적을 충족시켜줄 도구로만 대하고 있으니.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재생산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타박하지만, 그 문제 역시 입양으로 해결될 수 있다. 사실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제도로 바뀐 근대가 둥그런 앉은뱅이 식탁에서 4인용 식탁으로 바뀐 시대였다면, 그리고 그 시대가 여전히 “혈연”을 중심으로 한 親가족주의시대였다면, 홀로 사는 가구가 가구전체의 4분의1을 넘었다는 이시대야말로 “함께 혹은 홀로” 의 식탁의 면면이 바뀌는 게 당연한 시대가 아닐까. 물론 혈연중심 대가족제도로의 회귀도 포함한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동네살리기/지역살리기의 천편일률적인 발상과 정책에 대한 이의제기다. 대부분이 그저 역사나 자연에 의존하거나( 그러느라 남의 역사를 뺏어오고 보잘것 없는 자연을 과대포장하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 관광지로서의 일회성 만족을 충족시키는데에 그친다) 관공서/기업유치와 거대건물로 눈길을 사로잡아 보려 하지만, 오히려 “오늘”과 “일상”과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 봤으면 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좋은 마을, 장애인이 살기 좋은 마을, 노인이 살기좋은 마을, 취직못한 젊은이들의 자활을 돕는 마을, 개나 고양이가 살기 좋은 마을..
이런 것들을 만들다 보면 자치단체도 집중할 수 있으니 마음다해 꾸려 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특징이 자신에게 보다 소중한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그러다보면 아이와 노인과 동물을 위한 삶에서 새로운 철학과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 대상과 자신의 쾌적한 삶을 위한 상품아이디어/기업도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다른 지역과 세계가 벤치마킹을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모든 지역이 그만그만하게 모두에게 쾌적한 (최소한 가혹하지 않은) 공간으로의 탈바꿈을 할 수 있지 않을까…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발상은 거꾸로여서(그나마 모두가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모두가 주목하는 곳을 만들려는 현시욕이 앞선 탓에) 결국 모두에게 각박하고 결국 모두가 고독한 사회/국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살고 싶지 않은 사회로 느끼는 사람들이 안팎으로 많아져 가는 한 “집단자살”까진 아니더라도 “집단자폭” 사회는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사실, 사람을 문 개사건을 보면서 든 생각이기도 하다.
말 나온 김에 말하자면 저녁마다 걸어서 작은 음악회에 갈 수 있는 곳, 작고 아름다운 영화관이 있는 곳, 동네사람이 셰프이자 음식점 주인이어서 반가운 인사와 함께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내 책도 받아줄 작은 도서관이 있는 곳, 개와 고양이를 좋아해 개와 고양이 판이지만 남에 대한 배려와 자치체의 관리가 충분해서 기분좋은 산책을 가능케 해 주는 곳, 산책 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미술관/갤러리들이 박혀 있는 곳, 그런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네에 많아 언제고 같이 밥먹고 차마실 수 있는, 배려와 미소가 넘치는 그런 동네/도시에, 나는 살고 싶다.

渦中日記 2017/10/24

9월초에 있었던 피고인심문의 속기록을 오늘 메일로 받았다. 검사와 변호사의 심문이 하나의 파일로 되어 있어서 50쪽 가까운 내용.
검사의 질문은 내가 일본군의 강제연행을 부정했는지, 일본의 사죄를 둘러싸고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에서 다르게 쓰는 식의 교활함을 발휘했는지, 위안부가 “미성년”임을 부정했는지, 동지적관계를 지적한 의도가 내가 생각한 해결방법 주장에 있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거나 전후관계조차 뒤집어 놓은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어서 일일이 바로잡으며 대답해야 했던 시간들. 왜곡과 모순으로 가득해 비논리적이면서도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만은 명확해서 그저 허망했던 질문들. 왜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지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그러면서도 그 모든 의미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아서 담담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 곧 일단락되게 된다.
10월27일 금요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서관 403호.
이날, 지난 6월에 시작된 형사2심 판결이 나옵니다. 판결 후에 기자회견을 할 생각입니다.
기자님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渦中日記 2017/10/11

저의 “멘탈”이 궁금하거나 “본질”을 알았다고
하는 이들에게 굳이 설명할 의무는 없지만 신경쓰이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 덧붙입니다. 즉 이 글은 호사카교수나 그분의 선동에 동조하는 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호사카사태”를 걱정해 주고 계신 저의 페친과 학교동료들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학술모임 자금에 대해>
1. 호사카 교수가 의심하는 13년전,2004년 한일심포지엄은 대한민국 외교부의 지원을 받아 실시했습니다. 주제는 교과서문제였습니다.
2. 호사카 교수에게 “합숙세미나”라면서 이 역시 자금을 추궁당한 또하나의 모임은 2001년에 실시된 것이고 제가 아니라 당시 한양대에 있던 임지현교수가 주최한 겁니다. 엉뚱한 화살을 저에게 돌린 셈입니다.
3. 호사카 교수는 제가 주최한 2004년 모임에 이영훈교수가 참석했다는 이유로 뉴라이트 운운하며 일본의 검은돈 지원을 받았을 의혹을 강화시키려 하지만, 당시는 아직 뉴라이트라는 단어조차 나오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검색해 보니 이해 말에 결성되었군요.) 당시 함께 했던 한국멤버들은 이후, 사상적/정치적 입장에서 대충 세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영훈교수를 학자로서 존경하지만, 2004년 모임 이후로는정치/학술모임을 함께 한적이 없습니다.
4. 호사카 교수는, 이 모임의 두번째 모임에 위안부할머니가 참석해 고함을 쳤다면서 할머니한테 ” 치욕적인”모임이었다고 했지만, 할머니의 고함은 일본, 구체적으로는 와다하루키교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은 저의 재판에도 출석하셔서 저에게 욕을 하신 분인데, “치욕적인” 느낌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이 분이 아니라 저나 와다하루키교수일 겁니다.
5. 이 모임은 일본 도쿄대 교수이자 우익교과서를 반대하는 모임에 앞장섰고 “헌법 9조를 지키는 모임”사무국장인 고모리요이치교수와 제가 같이 만든 한일지식인 모임이었습니다. 따라서 학회도 아니고 제가 회장인 모임도 아닙니다. 어떤 모임인지,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라는 책에 정리되어 있으니 보실 수 있습니다.
<"협박"메일에 대해>
1. 호사카교수는 저에게 문자를 보내 추궁한 이후로도 또다시 연속 다섯번이나 메일을 보낸 끝에 “저를 협박했다는 내용을 정식으로 검찰(지금 교수님의 재판을 담당하는 검찰팀)에게공식문서로 제출하겠습니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이미 밝혀진 것처럼 그 메일은 제가 보낸 것도 아니고 사주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곳도 아니고 “재판을 담당하는 검찰”에게 제출하겠다는 말이야말로, 천박한 위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밤중 12시 넘은 시각까지 문자를 보내고, 다시 메일로 엉뚱한 의혹과 추측, 그리고 위협을 이어간 행위, 그리고 여기에 차마 쓰지 못하는 또다른 언사는 법적대응이 필요한 정도로 보이지만 에너지절약을 위해 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이번 일로 호사카교수의 인격을 근본부터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대한민국국민들께서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2. 호사카교수에게 선동당한 모르는 이들의 언사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 이나영/강성현교수가 나서서 거든 일에 다시한번 실망했습니다. 제가 “열성 지지자들을 활용해 싸우게 만들었다””아주 나쁜 선동과 대화 방법을 능수능란하게”사용한다고 말한 강성현씨는, 얼마전에 제가 “틀린 소리”를 했다고 신문 인터뷰에서 말했기에, 어디가 틀렸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지만 응답이 없었지요.
호사카교수및 그의 어처구니 없는 선동에 동조한 이들과는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으니, 해명도 사과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 학계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만 것 같아 자괴감이 드는군요. 이 좋은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