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사사법화’를 넘어서 – ‘무기’화된 소송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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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기’화된 소송

징용문제를 두고 일본이 중재위를 설치하자며 강경하게 나오기 전까지, 한국에는 피해자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새로 보상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심지어 이 부분에서는 그동안 이런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정치/외교전문가들도 징용문제관계자들과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양국정부가 양국기업과 함께 재단을 만들자는 ‘새로운 재단 설치’안의 중심에 있는 최봉태변호사는 일찍부터 위안부문제/징용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이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4월, 일본에서 일본기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제안이 옳다는 주장을 하면서 ‘언론의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다.

 

*하나가 아닌 ‘피해자’

그런데 최봉태변호사의 주장에는 모순이 적지 않다. 신일철원고의 변호인들이 신일철의 주식을 압류하고 매각에 나서겠다고 하자 그는 ‘한일관계의 파국을 원하지는 않으니 한일정부가 협의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소송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역사문제를 사법의 장으로 반복적으로 가져와 ‘한일관계의 파국’이 우려되는 상황으로 한일관계를 몰고 온 건 바로 다름 아닌 최변호사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동원에 응해 이주한 노동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신일철 판결이 나오자마자 아베수상이 직접 나서서 해당원고들은 ‘징용령’하에 동원된 이른바‘ 징용공’과는 다르다는 반박을 하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들의 정황을 잘 알고 있었을 관계자들이다.

하긴 최변호사의 입장은 앞서의 판결에서 본 것처럼 어떤 경로로 노동을 하게 되었건 ‘한일합방불법론’에 의거한 ‘불법’동원으로 간주하고 모두 똑같은 ‘피해자’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니 구별을 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노무자들간에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모두를 “강제징용”으로 생각하게 된 데 대한 관계자들의 책임은 작지 않다. 더구나 노무당사자들이 그들 간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모든 문제해결은 사태를 정확하게 아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실제로, 일제시대 ‘피해자’관계 단체는 삼십개 가까이 된다고 한다. 최봉태변호사가 대리인을 맡고 있는 건 그중 미쓰비시중공업소송자들 뿐이니 그의 의견이 모든 노무자들을 대변하는 것일리도 없다.

실제로, 최변호사의 방식–‘소송’을 무기로 일본을 압박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한국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면서 매주 청와대앞에서 시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청와대 역시 이들의 존재를 언급한 적은 없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8-00012078-bunshun-int

이런 움직임들은 최변호사의 해결방식이 모든 피해자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설사 징용자문제가 최변호사 방식대로 진전된다 해도 그것이 곧 갈등해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누구를 위한 재단인가

최변호사는 자신이 주장하는 양국 정부와 기업이 만드는 재단설립에 필요한 금액을 “한·일 협정 당시 추산한 강제동원 피해자 규모는 국내외 103만명으로, 1인당 1억원 기준으로 할 때 103조원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부뿐 아니라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경제협력자금을 사용한 포스코·코레일·도로공사”등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최근에는 일본기자들을 향해 23조라고 말했다. 23만명에게 1억원씩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103조도 그렇지만 23조라면 엄청난 금액이다. ‘새로운 재단 설립’을 주창/지지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최변호사와 비슷한 입장을 취한 정치/외교전문가들은 이런 구체적인 예산산정을 인지했을까.

재단이 ‘장기적으로는 변호사수입이라는 면에서 돈이 된다, 일본에 노무자들의 공탁금이 있는데 재단을 운영하면서 그 공탁금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변호사들이 기여하면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은(https://youtu.be/xlV58lSvf9M), 그가 생각하는 재단설립이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보여준다. 그가 말하는 ‘공탁금’찾기 역시, 정말 시작된다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 1965년 협정을 건드리는 또하나의 사태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소송을 위해 피해자들에게 돈을 거두었다가 반환요구에 따라 돌려주었다는데, 공탁금 소송 역시 비슷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9-00012086-bunshun-int).

그는 이른바 “포괄적 화해’를 하면 필요금액이 삭감된다면서 일본을 향해 재단설립의 효용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은 바로 한일협정때 일본정부 쪽의 주장이었다. 징용자들의 피해를 일일이 따지려면 확인도 필요하고 확인서류가 구비되지 않으면 보상금액도 적어질 수 밖에 없으니 경제협력금이라는 형식으로 해결하자고 했던. 그는 스스로가 부정한 한일협정과 똑같은 방식을 시도중이다.

 

*‘개인청구권’은 누구의 것인가

그는 ‘정부협의’를 해야 한다고 그동안 주장해 왔는데, 그 이유는 협정을 통해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데에 있는 듯 하다. 정부협의에 맞서 개인적으로 소송을 하려는 이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데, ‘재단을 만들기 위한 법을 만들 때 피해자들이 더 이상 소송을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넣으면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징용자의 개인청구권이 1965년협정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다’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소송을 일으키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대법원에서의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그가 목표하는 것이 결국은 ‘정부가 다시한번’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이라면, 그가 그동안 해 온 소송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택한 해결방법에 따르게 하겠다는 것이라면, 그런 최변호사의 방식이 ‘인권’을 존중한 것으로 간주되기는 힘들다. 자신은 수많은 소송을 해 왔으면서도 당사자들의 소송권리는 빼앗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청구권이 정부간 협의로 소멸 가능한 것이라면, 1965년에 정부가 소멸시킨 청구권이 살아있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이상, 2019년4월15일 일본기자클럽에서의 회견). 자신이 주장해 대법원이 남아 있다고 판결한 개인 청구권을, 다시 한번 정부협의로 ‘소멸’시키는 것이 ‘정부간 협의’의 목적이라면, 그가 이제까지 해 온 소송들은 정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압박수단일 수 밖에 없다.

 

*크고 작은 기만들

소송을 무기 삼아 ‘개인 청구권’을 주장한 최변호사의 지론의 근거는 ‘한일합방불법론’이다.

그는 ‘한일합방이 불법’이라는 인정을 ‘국제적으로’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인정’을 해 준 나라는 없다.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면 1919년에 설립된 임시정부역시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실은 없었다.그의 이런 주장은 ‘일본사법부도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는 이야기와 이어지는 얘기인 듯 한데, 일본에서 과거사 관련해 원고측이 승소한 판결은 정신대/위안부할머니들이 함께 소송한 이른바 관부재판에서의 판결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건 1심에서의 판결이었고 고법에서는 뒤집혔다.

또 최변호사는 중국인노무동원에 대한 판결에 언급하며 일본최고재판소(대법원)가 “자율규제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고 주장한다.(2019/6/6.중앙일보).

하지만 최고재판소의 그 판결은 배상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구권 자체가 원천적으로 없는 건 아니지만 ‘조약에 의해 소멸되었으니 소송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 그 재판의 판결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청구권은 법적 유효성을 잃었지만 기업측이 스스로 뭔가를 할 수는 있겠다’는 내용이다.

그런 맥락을 생략하고 그저 일본최고재판소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자율구제를 권고했다’고만 말하면 듣는 이들은 ‘개인청구권 존재‘=’소송권리 인정‘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동안 ‘양국사법부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고 대사회적으로 말해 왔다. 그 양국정부를 압박하고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실제로 한국언론은 대부분 최변호사의 말을 그대로 전해 왔다. 최변호사는 일본언론을 향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전파해 달라고 했지만, 일본언론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는 전하지 않았다.

또 최변호사는 중국인의 노무자소송이 ‘화해’로 이끌어진 예를 들면서 일본이 한국을 증국과 다르게 취급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중국인들의 소송도 많은 경우 1972년에 중국정부가 일본과 수교하면서 전쟁배상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화해로 이끌어진 케이스도, 정부와 노무자간의 화해가 아니라 기업과 노무자간의 화해였다. 따라서 ‘중국인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는 최변호사의 주장도, 이런 배경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또하나의 기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또, 독일정부가 강제동원피해자들에게 보상한 사실을 들어 자신의 제안대로 재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유태인노동동원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말 그대로의 노예적 동원이자 노동이었다. 아무리 조선의 노동자가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해도 인종말살정책과는 구조도 맥락도 다르다. 구조와 맥락이 다르면 다른 판단/해결으로 대응하는 것이 상식이다. 오랫동안 ‘피해자’문제에 관여해 온 법률가가, 그런 ‘차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피해의 존재가, 더 큰 타국민의 피해를 자국민피해와 동일시해도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문제에서도 지원단체는 위안부들의 정황과 홀로코스트를 동일시해 왔다.

 

*한일협정 무화론

법학자 김창록도 최변호사의 거친 논지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런데 김창록 교수 역시 ‘한일협정에는 위자료가 없었으니 위자료청구를 해야 하고 한국정부는 “외교보호권‘을 가동시켜 피해자들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면에서는(<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역할강화를 희망하며>2019513,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주최,국내학술대회) 최변호사와 다르지 않은 한일협정무화론자다. 그는 1965년협정이 “파탄상황”(동)이니 “그 틀을 뛰어넘어 한일 과거청산을 규율할 새로운 법적틀을”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파탄상황”을 만든 건 바로 이런 주장들 자체다. 한일협정에 시대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거기서 얻은 교훈과 지혜를 현재와 미래에 살리려는 시도가, 과거 인물들이 한 일을 전부정하고 ‘새로운 과거’를 만드는 일로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더구나 관계국간의 자발적인 협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인 압박에 의해 그런 틀을 만들자는 것은 현실성도 없거니와 그 시도 자체가 이미 협정이라는 ‘법’의 부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새로운 틀”을 마련하려면 당연히 ‘오래된 틀‘로서의 한일협정은 파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파기수순의 시작점이야말로 한일관계 “파탄”의 순간일 것이다. 우선 한국은 일제시대는 물론 한일협정에 따라 해방이후에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모든 것을 먼저 돌려주어야 한다. 해방직후 조사된 일본인의 자산은 당시금액으로 무려 52억달러였다.(이대근<귀속재산 연구>,2015). 물론 한일협정때 받은 돈과 인력은 물론 그 이후에 전두환대통령이 받은 40억달러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일협정은 물론 시대적 한계를 여러 가지로 안고 있다. 그건 연합국 대부분이 ‘제국’으로서 식민지를 갖고 있던 필연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계를 갖지 않는 역사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란 언제나 그 시대를 고스란히 남긴 유산일 뿐이다. 과거역사를 만든 동시대 사고와 한계에 대해 고찰하는 작업은 언제까지고 유효하고 중요하지만, 그 고찰이 꼭 과거를 뒤집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는 세계의 앞으로의 과제라고 나 역시 생각하지만, 그런 커다란 과제가 자발적인 반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압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일본이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실시해 왔던 조치들–원폭피해자문제, 사할린교포문제, 그리고 위안부문제에 관해 실시해 온 일들은 당연히 ‘식민지지배’에 대한 속죄의 마음을 담은 조치였다.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마음이다.

 

*무기로서의 소송

그럼에도 최변호사는, 역사문제를 둘러싼 소송에서 적지않은 승소결과를 거두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승소했고 이어서 압류수속에도 나섰다(20190325, 뉴시스.“법원, 일제전법기업 상표권등 국내자산 압류결정..강제집행절차 개시) 그 사태를 최변호사는 “한일양국 사법부 판단을 무시한 전범기업의 말로”라고 표현하면서 “지금이라도 법치주의 국가에서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법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하길 바랍니다”(20190325 페이스북)라고 썼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전범’이라는, 국가나 기업에 붙일 수 없는 형용사를 사용하는데서 나타나는 일본에 대한 우위욕망과, 현재의 정황을 “사법부판단을 무시한 전법기업의 말로”로 간주하는 승자–‘법률가’로서의 오만이 가득하다. 실제로 그는 “한일정부협의를 통해 위안부문제와 징용공문제를 동시에 해결”(20190424. 최봉태 페이스북)해야 한다면서 양국 정부가“양국 사법부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해결이 됩니다”라는 말이 보여 주는 것처럼 ‘사법 지상주의’적이다. 그에게는 어떤 문제에서든 사법의 판단이 최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다. 그가 정부를 상대로 한 여러 소송들(외교부를 상대로 한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 위안부위헌소송등)이, 사법부를 통해 행정부를 움직이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것이었음을 보더라도 그의 사고는 명백하다. 그는 소송을 역사문제에서의 최고의 해결책으로 삼고 행동해 왔고, 자신의 생각대로 사태가 진전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저 대상자가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탄핵사유”(2018.11.1.ㅡ오마이뉴스)라면서 대통령마저 겁박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이다.

하지만 최변호사가 주도한 위헌판결에 패소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건 다름아닌 그 정부다. 패소상대가 외교부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박근혜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꽤 오랫동안 일본과 불편한 관계 속에 있었다. 한일합의는 그 결과로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니 한일합의에 찬성하든 아니든,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에서 승소해 한일협정 때 한국정부가 일본에게 보상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도록 했고 이후 한국정부의 피해자보상사업에서 중심에 있었는데도, 피해자들에게 ‘다시 소송을 해서 더 많은 돈을 받자’고 제의했다(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9-00012086-bunshun-int)

링크)고 한다. 현재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는 2018년대법원 판결은 말하자면 그 결과다. 이 과정 역시,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전제로 소송을 일으키고 승소했음에도 다시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겠다는 앞서의 패턴과 비슷하다. ‘피해자’를 위한다는 그의 수많은 소송들은, 언제나 마지막이 아니었다. 이어서 또 다른 협상/소송을 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한국정부를 향해 탄핵을 거론했던 최변호사는 일본기자들 앞에서는 일본정부가 따르지 않으면 국제적 여론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사법부를 움직여 한나라의 정부를 움직이는데 성공해 온 그간의 이력이 만든 자신감 가득한 협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는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을 상대로 피폭자 관련제소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일본도 하지 않았던(하지 않는 것이 꼭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대미원폭소송을 일으키겠다는 이유를 그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캐치프레이즈는, 굳이 ‘소송’을 통해 다시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세계가 공유중이다. 말하자면 더이상 새롭지도 참신하지도 않은 캐치프레이즈, 너무나 정당한 주장이어서 아무도 이의 제기할 수 없는 ‘정의’다. 그는 누구나 아는 정의를 소송이유로 사용해 자신의 소송을 정당화하고 여론을 움직여 왔다.

또 그는 자신이 소송을 하는 이유를 ‘인권침해를 받았는데도 현재까지 구제받지 못했다, 인권구제를 해야 할 상황이어서 소송을 일으켰다’‘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올바르게 만드는 토대다. 해결해야 할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일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일본기자회견) 여기서도 “인권”이라는, 그 누구도 반론할 이유가 없는 상식적인 정의를 내걸지만, 그가 지향하는, 국가가 주도하는 ‘청구권의 최종적 소멸’ 이 피해자들의 인권을 소중히 한 것인지는 피해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재단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로 ‘피해자들이 재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재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그동안 왜 들려오지 않았을까. 이는 언론의 관심이 소송이나 최변호사에게만 몰렸기 때문일 것이다.

(재단설립말고는 다른 해결안이 없다면서) ‘더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는 그의 말은 당연히 아름다운 명제지만, 소송위주의 그의 시도는 한일관계를 치명적으로 훼손했다. 그가 피해자전부를 대표하고 있지 않음에도, 지금 징용문제는 오로지 ‘소송‘을 주도하고 참여한 이들 위주로만 전개중이다. 더구나, 한일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은 징용자만이 아니다. 최변호사 방식을모두가 취한다면, 징병자들을 비롯한 또다른 피해자들이 끊임없이 소송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한일양국은 미래를 소송에 저당잡히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협의와 화해를 할 수 있으니 중재위도 필요없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갈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일본으로 하여금 중제위설치를 요구하도록 만든 것이 다름아닌 그가 일으킨 소송이었음을 은폐한다. ‘인권문제인데 정치외교문제로 접해서 문제가 어려워졌다’는 그의 주장은, 국가가 다시 나서서 ‘개인청구권을 없애’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다름아닌 정치/외교의 장을 필요로 하는 주장이라는 사실도 은폐한다. ‘인권’문제를 오로지 소송에 의존해 심각한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최변호사를 중심으로 하는 법률가들이었다. 그의 주장들은, 역사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법정으로 보내고 그렇게 나온 ‘판결’을 모두가 지켜야 하는 최고의 ‘법’으로 내세워,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조차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왔던 과거를 은폐한다. 작금의 징용관련 갈등은, 그가 선도했던 ‘역사의 사법화’의 결과다.

 

*법지상주의

그럼에도 그의 소송과 승소는 “우리헌법사상 빛나는 승리한 혁명”으로 칭해지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담론을 장악중이다. 승소판결을 ‘법치주의 승리’이자 ‘양국법률가의 승리’로 간주하면서 양측 정부가 판결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한국 외교부도 법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있기 때문”(최봉태<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역할강화를 희망하며>, 2019년5월13일,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주최 국내학술대회 자료집)이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그에게 ‘법치주의’,즉 ‘사법’의 권력이 학계나 정부보다 위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법치주의’라는 깃발을 들고 소송을 무기삼아 역사를 사법공간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유해 왔다. 하지만, 그의 ‘법지상주의’적 담론은, 그가 해 온 소송들 자체가 전부 1965년 협정의 부정에서,즉 국가간 법치주의부정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고 있다.

정부는 스스로 ‘법치주의’의 피해자가 되었으면서도 이런 ‘역사의 사법화’에 적극 가담해 왔다. 문재인대통령이 후쿠시마 수산물수입을 둘러싼 대립에서 한국이 승소하자 “앞으로 생길 다른 분쟁 소송에 참고로 삼기 위해서라도 1심 패소 원인과 상소심에서 달라진 대응 전략등 1,2심을 비교분석한 자료를 남길 필요가 있다”(20190416, 조선일보)고 했다는 사실은, 문대통령 스스로가 (최변호사와 함께 징용재판을 맡은 적이 있는 만큼) 일본과의 갈등을 소송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의문을 갖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대화’라는 외교채널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그 외교부가 만들어낸 화해치유재단을 ‘법적사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 해산시키고, 그 해산을 두고 최변호사가 “피해자들의 의사가 존중되게 된 것”(대구 MBC라디오,여론광장)이니 (일본이 보낸 100억원에 대한)“반환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대화가 아니라 법정에 역사문제에 대한 최종판단을 맡기는 방식, 실상은 학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학문이 선택적으로 이용되어 개인간/국가간 갈등수위를 높이는 ‘역사의 사법화’ 방식은 좀 더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더구나 피해자를 위해 역사문제를 돌아보는 과정이 고작 “승세를 몰아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문제의 해결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20190416, 최봉태 페이스북)라는 식으로 “승세”와 “주도권”을 찾아 상대를 제압하려는 방식인 한, 복잡다단한 역사문제가 생산적으로 풀릴 가능성은 지극히 적다.

소송이 만든 판결과 ,반년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해 온 한국정부에 대한 일본의 불 신은 극에 달했다(한국일보/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물론 최변호사등이 제공하는 정보에만 귀를 기울이며 결과적으로 그와 똑같이 생각하게 된 한국사회 역시 일본에 대한 불신을 한층 더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위안부문제 이후 쌓인 상호 불신을 해소하기는 쉽지 않아졌다.

소송이란 구조상 ‘이기고 제압’해서 자신의 방식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전투적 방식이다. 그런 방식이 결코 역사문제 해결방식으로 효과적이지 않았음은 이미 위안부문제가 증명했다. 일본유학목표가 “친일파가 저지른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것이었다는 최변호사는 자신의 싸움을 ‘독립군’의 싸움에 비견한다.

하지만, ‘해방되지 못한 피해자’의 “해방”은, 꼭 물리적으로 ‘이기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힘겨루기란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제국주의에 나섰던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방식일 뿐이다. 지극히 ‘근대적’인.

그는 그간의 활동이 보람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싶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를 믿고 의지했을 피해자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그는 자신이 주장중인 해결방안이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방식 자체의 모순을 들여다보지 않는 해결책이 성공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2019년 6월19일, 한국정부는 반년 이상의 침묵을 깨고 양국 기업이 재원을 마련해 해결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리고 이 제안은 최변호사의 제안인 양쪽 국가도 참여하는 안은 아니어도 최변호사의 제안과 가까운 안이었지만 곧바로 거부당했다.

오랫동안 실제로 피해자들과 함께 하며 강제동원피해를 연구해 온 연구자들 역시, 재단설립안에는 호의적이 아니다. 그 중 한사람은 재단설립안에 대해 “피해 문제 해결과 거리가 있는 미봉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현재 재단 설립 주장은 징용소송원고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생존자와 적극 ‘저항하는 피해자’만 해당”하고, “사망자 문제나 미수금 등 피해자 사회가 원하는 다양한 기대치나 요구하는 해결 방안과 무관”하다고 지적한다.(정혜경. 비공개세미나자료)

정부와 언론은, 좀 더 다양하게 연구자와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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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사법화’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 징용문제를 생각한다

(1) 신일철주금 판결을 읽는다

<1>판결문의 전제—한일합방불법론

한국 대법원의 징용문제 판결에 항의해 중재위 설치를 요구(2019/5/20)한 일본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2018년10월에 나온 신일철징용판결등 조선인징용자문제에 대한 정부간협의를 2019년 1월에 요청했던 일본이 한국정부의 답변을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중재위 요청으로 옮겨간 건,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고 한 이낙연 총리의 발언때문이었다.(2019/5/21, 고노외무상 기자회견). 국내적 대응을 할 수 없으면 중재위 설치에 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노외무상의 지적은, 유감스럽지만 논리적으로는 맞다.

한국정부는 이제라도 일본이 원래 요청했던 정부간협의에 응해야 한다. 제3자를 배석시켜야 하는 중재위를 가동시키게 되면, 한국은 결코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뒤에서 국제법학자의 의견도 소개하겠지만, 한국의 논리나 태도는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성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부가 4개월이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표면적 이유는 ‘사법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법자체가 아니라 판결의 정당성 여부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대통령은 당연히 이 판결을 읽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청와대의 무대응은, 단순한 ‘사법부 존중’을 넘어 ‘판결내용자체에 대한 동의’일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실, 2000년에 부산에서 제기된 미츠비시중공업을 대상으로 한 첫소송에서 원고측 변호인이기도 했다.

신일철이 피고가 된 징용판결에서, 대법원은 신일철이 징용‘피해자’에게 1억씩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 1억원은 세간의 이해와 달리 미지불임금에 대한 배상금액이 아니다. 대법원 판사들이 피해자에게 지급하라고 한 금액은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다.

그러니까 이 판결은, ‘징용자들이 일본기업에서 일하고도 임금을 지불받지 못했으니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본은 조선인을 자국국민에게 했던 것처럼 전쟁수행을 위한 노동에 동원했다, 하지만 한일합방은 ’강제로‘ 이루어졌으니 조선은 ’일본‘이 된 적이 없다, 따라서 동원자체가 불법이니 그에 대한 위자료를 보상하라’는 판결이었다. 당연히 이 판단은 ‘한일합방은 불법’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한일합방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불법이라는 주장은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90년대초부터 주창해 온 생각이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는 일본인 학자들 사이과의 격렬한 논쟁을 치러야 했고, 학계에선 여전히 갑론을박 중이다.

대법원이 그런 합방불법론을 채택했다는 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학계에서 아직 논의중인 주장 중 하나를 정설로서 채택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2018년 판결은, 학계에서 아직 논의중인 사안임에도 일부 학자들의 주장만 채택해 나온 판결이다.

이것만으로도 앞서 언급한 ‘역사의 사법화‘의 문제가 드러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한일합방’을 합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고 시작하는 조약문을 마련해 둔 건 물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영일동맹과 카츠라/태프트 협정을 통해 조선의 지배권을 서구세계에도 인정받는 과정을 빠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한일합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합방불법성을 전제로 한 판결에 따르는 정황은 생각하기 힘들다. 한일합방불법론은,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결정적인 근거로서 사용되었겠지만, 그 설에 기대는 한 오히려 어떤 요구든 일본의 동의를 얻기는 어렵다. 그런 구조를, 원고측은 물론 대법원 판사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하다.

판결문은, 일본이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었고, ‘1942년에 ’조선인 내지 이입 알선 요강‘을 통해 관알선을 통해 인력을’ 모집했으며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만들어 국가가 주도하는 징용대상에 조선인도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설명해 두고 있다. 말하자면, 시기에 따라 동원방식이 달랐고 ‘법’에 의한 동원이었음을 명시해 두고 있다. 그럼에도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그 전부를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규정하는 건 바로, ‘한일합방불법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제시대때 조선인은 (법적으로도) 일본인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2>법관 다수의 생각-개인청구권은 남아있다

이 판결의 주요 초점은 식민지배에 따른 피해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는지 여부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대법관 전원이 찬성한 판결은 아니었다. 그리고 법관들중 다수가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이하와 같다.

당시 한국정부가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해 언급’(강조는 필자)하였고 “12억2000만달러를 요구하면서 그 중 3억6400만달러(약 30퍼센트)를 강제동원피해보상에 대한 것으로 산정”하기는 했지만, 그건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공식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교섭과정에서 교섭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했고, 담당자가)피징용자의 고통을 언급한 것은 “협상에서의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또, 한국이 12억이상을 요구했는데 “정작 청구권 협정은 3억달러로 타결”되었으니“이처럼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일본이 따로 “구체적인 징용/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하거나 양국국교가 회복된 뒤에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대한민국의 요구에 그대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등 반발했으니 일본이 한국의 “피해배상”요구에 응한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일본은 증거를 일일이 찾아서 청구권을 계산하는 건 쉽지 않고 결국 금액이 적어지니, 유상/무상 경제협력의 형태로 금액을 올리는 것으로 청구권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또 청구권이란 “식민지배불법성에 따른 청구권”이었는데, ‘한일조약에 식민지 불법성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니 ‘식민지배가 만든 피해에 대한 배상’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돈은 문안 뿐 아니라 실제로도 경제협력자금일 뿐 식민지배에 관한 배상성격의 돈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법관들 다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다수의 생각대로 판결은 확정되었다.

 

<3>법관 소수의 생각

‘강요된 합방’(불법체제)속에서 기망이나 구타등 폭력적 “불법행위”로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수판사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보상요구(위자료청구)가 1965년협정에는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청구권도 외교적보호권도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반대했던 판사들의 생각도 판결문은 적어두고 있다.

그 중 두사람은,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후의 한국정부는 협정에 따른 의무를 수행했으므로 더 이상 개인청구권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을 위해 정부가 나서는 일, 즉 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도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문제가 ”기본적으로 청구권협정의 해석에 관한 문제“임을 명시하면서, 조약 해석은 “조약의 문언에 부여되는 통상적 의미에 따라 성실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미가 애매할 때는 협정당시의 문맥을 봐야 한다면서 청구권협정에는 명백히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양국국민은 더 이상 청구권 행사 불가능”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약국 사이에서는 물론 구 국민들 사이에서도 완정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언의 통상적 의미에 부합하고 단지 체약국 사이에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지로 않기로 했다는 의미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다수의견에 반대한 법관들의 생각이다.

또, 한국측이 조약협정해설에 “우리가 요구한 건 모두 소멸, 한국인의 대일본 각종청구등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했다고 써 두었고,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무상 3억달러는 피해국민에 대한 배상적인 성격“이라고 발언했으며 이후 실제로 정부는 몇 번에 걸쳐 보상을 실시했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또다른 근거다. 1965년 협정은 모든 걸 일괄해서 처리한 협정이었고, 일괄처리협정은 국제관습법상 일반적이므로, 국가가 보상이나 배상을 받았다면 그 국민은 개인청구권 행사가 불가하며,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청구권자체가 남아 있지 않으니 소송을 제기할 자격도 없다면서, 징용자를 포함한 노무자들에게 1970년대에 91억외에 2005년 이후에 5500억여원이 이들에게 지급되었다는 사실도 반대자들은 덧붙여 두었다.

이 외에도, 식민지배에 대한 위자료성의 청구권은 1965년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남아 있다면서도, 외교보호권은(국가가 나서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 당시 양국의 합의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의견을 남긴 법관도 세사람 있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국가와 국가사이의 청구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방 국민의 상대국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 까지도 협정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명백하고,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1)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의 대상에 피징용 충구권도 포함됨을 분명히 하고 있”고,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도 당연히 청구권협정 의 대상에 포함 시키는 것으로 상호 인식 하고 있었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또, 2005년 민간공동위 역시 1965년 협정으로 받은 3억달러에 피징용 손배청구권이 포함된다고 간주했고, 정부가 “청구권협정 이래 장기간에 그에 따른 보상들의 후속조치를 취하였”다고 강조한다 (28).이들은 한일양국이 당시 ‘보상’과 ‘배상’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가간 합의를 했더라도 개인청구권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소송권리는 아직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판결은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개인청구권은 이미 남아 있지 않거나, 남아 있다 해도 정부가 그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나서야 하는)건 아니라는 의견을 가졌던 법관은, 재판관을 포함한 전체 13인 중 6명이었다.

 

<4>국제법학자의 생각

이번 판결은 2012년에 원고가 패소했던 일본법원과 한국하급심에서 패소했던 소송에 원고승소 판결을 내려 고법으로 보냈다가 재상고된 결과였다. 말하자면 이번 판결과 2012년 판결은 내용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2012년 판결에 대해서는 학계로부터 본격적인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예를 들면 서울대 이근관 교수는 이 때의 판결을 “국내법적 사고를 무비판적으로 국제적인 차원으로 투사“한 판결이라면서 비판한다. “ 부산고법과 서울고법이 징용자들의 항소를 승인한 것은 외국판결의 승인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교수는 앞서의 소수법관들처럼, 개인청구권은 한일협정에 포함되어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회담과정 문서에 “피징용한국인의 보상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양국 및 양국국민간의 청구권(미수금 및 보상금)이 해결“되었다는 생각이, 협정 이후의 정부공식해설서, 1966년 이후의 (징용자등을 위한) 국회입법, 2005년에 한일회담문서가 공개되면서 만들어진 국무총리산하에 만든 민관 공동위의 공식의견에서 확인되고, 2009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불에 개인청구권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청구권 행사가 어렵다고, 외교부도 보도자료를 통해 말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다수법관들은 한국정부가 회담과정에서 “강제동원피해 보상”을 요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공식견해”가 아닌 담당자의 교섭자료였으니 그런 요구가 한일협정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일축했었다. 하지만 이교수는 당시 한국은 “생존자,부상자,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방에 대한 보상 요구“를 했으니 설사 그 자료가 참고자료라 해도 한국이 “개인의 피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권협상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또, 수령금액의 명분을 놓고 양국정부가 치열하게 대립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한국측에서 볼 때 청구권문제는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한일간의 불행한 과거의 청산’이라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명분에 관련 된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며 ”이 협정이 불행한 과거의 청산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고 한국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의 포함은 협정수용의 절대적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바로 그때문에 문안이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으로 절충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끝까지 그 금액이 ‘식민지피해배상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 했는데, 당시 받은 금액을 그저 “경제협력자금으로 치부하는 건 한국정부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입장과 어긋“날 뿐 아니라 식민지배상을 부정한 ”일본의 입장을 추수“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교수는 또, 이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 참고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설사 일본이 ‘한일합방불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도, 그 점은 청구권문제해결여부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의 말대로라면, ‘일본이 합방불법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협정에서 받은 돈에 배상성격의 금액이 들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다수법관들의 전제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이교수는,”국제관계에서 일방 당사국이 국제법상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기초위에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고 타방 당사국과의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는 자주 찾아 볼 수 있다”면서, 국내법에서도 화해라는 이름으로 절충하는 경우를 언급한다. 일본이 합방의 불법성을 인정했든 아니든(즉 한일협정을 통해 받은 돈에 배상금성격이 있든 없든) 한일양국정부는 식민지배문제가 “협정대상이 되어 해결되었다는 점에는 의사합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싸우고 나서 합의에 달하는 경우도 그 합의금의 의미는 각자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가간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 판결 요지는, ‘1910년합방은 불법이었으니 모든 동원이 원천적으로 강제고 불법이다’라는 것 말고도, ‘1965년 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는 아예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문제 등이 해결되었다 해도 동원과 노동과정에서 입은 피해에 대한 ‘위자료’는 청구되지 않았고 보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인청구권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교수는 협정에 식민지배보상임이 문안으로 명시되지 않았어도, 그런 내용이 문안 밖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교수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국가가 처리한 일에 대해 개인의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 자체는 필연적인 현상이라면서 개인청구권제기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국제법이 이 부분에서 국내법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 역시 개인의 이해를 고려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는 설명도 해 두고 있다.하지만 동시에, 국제사회는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와 관련하여 여전히 국가에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권문제는 물론 중요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국제사회의 현실보다 너무 멀리 또한 빨리 앞서 나갈 경우 국가간 분쟁을 빈발시키고 관련 개인에게는 당위적 입법론이 현실적 해석론으로 오인케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당위적 입법론이란, 피해자를 위한 법이 ‘당연히’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영국이나 미국등 인권문제에 예민한 민주국가에서도 외교문제에 대한 “사법자제의 원리”가 천명“되었다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2018년과 비슷한 결론을 내린 2012년 징용문제판결에 대한 이교수의 생각이다. 프랑스등에서도, 특히 외교문제에 관해서는 (최종적인 판단은 사법부가 행하지만) 대체로 행정부의 의견을 전통적으로 조회하고 존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한 국가가 외교문제에서 두 목소리로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국제법학자인 정인섭교수도, “국가가 타국과 자국민의 청구권에 영향을 미치는 합의를 할 수 없다면 국제관계에서 국가간 외교교섭과 타결이란 그 존재의의가 없게 된다. 통상 국가간 합의란 개인권리에 대한 분쟁을 최종적으로 타결하기 위하여 마지막방법으로 시도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5>”한일합방불법론”의 문제

하지만 이런 국제사회정황은 2012년이나 2018년 판결에서는 거의 참조되지 않은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판결은 옳고 그름을 떠나 ‘외국을 상대로 하면서도 지극히 국내적인 시각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런 ‘국내적 시각’의 판결에 기댄 생각이 국제사회와 만나게 되었을 때(일본이 요구중인 중재위나 국제사법재판소), 그들을 설득 가능할 확률도 크지는 않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이견’들이 국민들을 향해 발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승자의 목소리만 전달되는 ‘판결문’의 구조상, 소수(13명 중 6명이니 극소수인 것도 아니다)법관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이들도 없다. 이 판결은, 90년대 이후 목소리를 내 온 일부 법률가/법학자들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했고, 결과적으로 언론이 전하는 승자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은 더 이상 듣지도 참고하지도 않는 전체주의적 사회로의 가속화에 기여했다.

노동이든 징용이든, 일제시대 노동자들의 구술은 참혹하고 안타깝다.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모순을 드러내고 그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법이란 늘 뒤늦게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필요하다면 당연히 새로운 시스템=‘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번 징용판결에서의 요구가 미불임금=재산이 아니라 “위자료”라면, 즉 일제시대 동원(을 포함한 모든 ‘국민’으로서의 의무부과)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한 위자료라면, 그 대상은 노동자만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에 대한 피해요구라면, 일본어와 일본이름을 비롯한 모든 강요에 대해 위자료청구가 가능하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또, 제암리교회사건, 관동대지진에서의 피해자등, 우리에겐 아직 제대로 가시화되지 않은 피해자도 적지 않다. 그런 이들에 대한 역사청산이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를 묻는 일도 아직 남은 과제다.

더구나 사법부는 , ‘일본인의 개인청구권’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징용문제가 불거지면서, ‘개인청구권이 존재한다고 주장해 온 원고측 변호사들의 주장만을 보도해 오던 언론들은, 고노외무상이 “개인청구권은 존재한다”고 말한 걸 두고 “표리부동”(경향)이며, “실토”(한겨레)이자 “궤변”(연합/JTBC)라고 비난했지만, 고노외무상의 발언은 그런 의미였다고 봐야 한다. 원고측 변호사와 한국 언론들이 지적했던 “(일본관료인)야나이의 개인청구권관련 국회 발언”에서 야나이가 실제 언급한 것은 “한일양국의 개인청구권”이었다.

한일정부가 처리한 한국의 개인청구권이 살아 있는 거라면 미국이 처리한 일본인의 개인청구권도 살아 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며 탄광이며 회사들은, 해방 이후 미국의 중개를 거쳐 조선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껏 일본인 명의의 땅들이 여전히 남아 않다는 것은(2019/5/31 기사)식민지배의 후유증이 한국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걸 말해 준다. 한일협정이란, 조선인들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개인청구권을 포기한 협정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도, 정부는 국제사회가 사법의 외교개입이나 정치개입에 신중하다는 국제법학자들의 조언을 경청해야 한다. 한일회담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명백히 논의되지 않았던 건, 대부분 식민지를 보유했던 연합국들이 중심이 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한계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보는 일과, 당시의 보상금에 징용자들의 사망,행방불명, 부상자들에 대한 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는 일은 모순되지 않는다.

다수법관들은 한일회담과정에서 한국이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달러만 받”은 사실을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는 자료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80년대 이후 전두환대통령이 일본에게 100억불을 요구했고 최종적으로 40억불을 다시 지급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법부’의 판결은 물론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사문제가 정치외교문제가 되어 버린 이상, ‘사법부의 판단’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야 하는 필연성은 없다.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게 된 문제인 만큼 국민대다수의 호응도 필요하다.

판결문은 대한민국이 징용자를 포함한 노무자들에게 1970년대에 91억을 지급했고 2000년대에 5500억여원을 지급했다는 사실도 적어두고 있다. 누락된 이들이 있다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일본과 한국정부가 행한 일은 국민모두에게 공유될 필요가 있다.

이 문제가 중재위에 회부되었을 경우 한국정부가 국제사회에 나가 실패했을 경우의 후폭풍의 크기는 작지 않다. 앞장 선 건 소수여도 그 후폭풍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야 일은 명확하다. 모두가 다시 한번 사태를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는 일이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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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간담회 요약> – 2016년 7월 11일

기자간담회 자료 전문 다운로드

[요약]

1) “일본군/국가의 책임을 극소화했다”

국가책임을 말했고 그에 따른 사죄보상을 요구했음
당사자 포함한 협의체 제안
“대화로써 일본과 마주해야 한다”(제국,311)
“정부는 일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제국,312)

 

2) “일본어판과 다르다”

일본어판은 단순번역이 아니라 일본인독자를 향해 다시 쓴 책. 다시 쓴 책이 표현이 다른 건 당연.

 

3)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시했다”

차이/차별 구조와 고통 지적

 

4) 업자가 주범이라 했다

“법적책임’에 고집한다면 업자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했을 뿐

 

5) 위안부의증언을 찬탈했다

위위안부의 증언은 다양. 한 사람의 체험과 생각이 균일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 기존 연구자와 지원단체가 대변하지 않았던 부분을 보여 주었을 뿐.

 

6) “부정론자들의 담론을 기본적인 수준에서 계승”

근거없는 단정. 그랬다면 일본진보지식인이나 매체가 평가할 수가 없음

 

7) 센다 책에 조선인/애국은 없다

일본인의 증언임을 처음부터 지적. 애국을 읽은 건 박유하의 해석.

 

8) ”동족”이란 위안부 아닌  일본군의 목소리다”

일본군의 목소리임은 처음부터 지적.

 

9) “위안부의 평균나이가 25세”라고 했다”

전체평균이 25세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 중 하나로 제시

 

10) “위안부문제를 한국정부가 포기했다고 했다”

박유하가 지적한 건 위안부문제가 아니라 개인청구권

 

11) “조선인을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식민지의 거짓말”의 방점은  식민지. 해당부분은 제대로 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들의 슬픔을 강조한 부분(일본판에만 있는 이유) – 초보적 오독

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의 오류

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의 거짓말                                          (2016/7/11기자간담회자료중발췌)
(이탤릭체는 박유하의 주장이나 책 인용)

1.<정영환저서를 둘러싼 언론보도> (2016/6/30-7/7)

정영환의 주장과 출판사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

우경화로 인해 일본인들은 식민지지배에 대해 사과는 할 만치 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딱 부합하는 책이 제국의 위안부. 더욱이 한국인 저자가 썼으니 일본언론이 대대적으로 다루고 예찬을 했죠. 여기에 피해자에 대한 배려는 없었습니다.”(정영환 인터뷰. 한겨레)

“<제국>은 극우 <산케이신문>이나 우파 <요미우리신문> 말할 것도 없고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 같은 리버럴 매체들도 격찬하는 가운데 1만부 이상 팔려나갔다”(한겨레,)

“한미일 주류이익에 부합”(한겨레)
“위안부의 평균나이가 25세”라고 했다”

“피징용자 미수금을 위안부문제로 오인” (116ㅡ125, 한겨레,)

한국어판에 없는 주장/인용.뉴앙스를 달리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한국인의 비판을 피하려는 차원” (연합,한국)
“1965년 국교정상화 당시 일본이 위안부배상을 추진했고 한국이 거부했다는 박교수의 주장이 허구라는 사실도 사료검증으로 밝혔다”(한국.7/1)

“일본어판은 양국관계가 정체된 책임이 전후 일본의 보상과 사죄를 기억하지 못하는 한국측에 있다고 적는 등 일본인의 입맛에 맞도록 가필”(연합,7/1)

“동족이나 애국을 운운한 것은 위안부의 말이 아니라 일본군의 말”(국민)
“박교수가 들려주고자 했다는 위안부의 다른 목소리란 일본군들이 말하는 위안부이야기이고 일본인들이 듣고 싶어하는 위안부 이야기

“법적책임은 없다는 견해는 일본우익의 입장과 맥이 닿는다”

“사료오독/취사선택/잘못된 이해”(연합,7/1)

우익만이 아니라 좌파와 자유주의자에게도 환영” (연합,7.1)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도 비판이 없는 것은 사회전반으로 퍼진 은근한 우경화 영향”(연합,7.1)

“환영받는이유는 전쟁과 식민지배책임을 부정하려는 일본내역사수정주의의 흐름에 들어맞기 때문””역사수정주의에 리버럴까지 동조”” ‘리버럴이 보수파에 합류” (연합,7/3)

일본극우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

“일본지식인사회의 “지적퇴락” (연합,한겨레)

(한일합의에는)” 피해자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

“센다가코의 책에는 동지의식이 없다” (국민.7/1))

 

2.<제국의 위안부>는 어떤 책인가

피해자면서 협력자가 되도록 만든 제국주의와 동족을 가해자로 만든 식민통치 비판.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한 책.
한국/일본/정부/민간/부정자등 “다수에게 말 걸기- 다수의 청자-다이얼로그 지향
당시를 산 이들에 대해 단정/규탄하기 전에 생각하기- 역사인식에서는 동시대인물들의 정황및/심중에 대한 상상력 필요
“변명적기술”(36)이라는 정의 생각은 이 책의 형식에 대한 몰이해. 단죄적/법정주의적/징벌적 사고

—역사인식이란 대화. 자신을 알리고 이해받고 상대를 이해하는 일

“반역사성”이라는 단어는 정해진 (국정/민정)역사관을 지향하는 사고를 증명.
“피해자가 부재하는 화해”라는 인식은 피해자상을 단일화한 것.
<제국의 위안부>는 결과적으로 당사자의 일부를 배제해 온 운동과 연구에 대한 이의제기.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
  *당사자–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적대의식을 키워가는 차세대를 위해

*식민지체험의 간접트라우마를 갖게 된 후예, 또 다른 당사자인 우리자신,한국인들을 위해

 

 

 

  1. 정영환 저서의 근본적 문제


-근거없는 단정과 비틀어 읽기로 독자들의 분노/불신유발

1)도덕적 의구심을 유발하는 레토릭
“(쟁점을) 살짝 바꾸기 때문에” (37)
“사실에 관한 논의를 이미지문제로 살짝 바꾼다”(57)
“애매하게””기묘하게”
“논점을 살짝 바꿔 버리기까지 한다”(57)
“속임수”(58) “애매하게 처리’(59)”레토릭”
“성노예제의 개념을 성노예의 이미지의 문제로 살짝 바꾸는 것”(65)”불성실한 수법”(65)
”바꿔치기”

 

2)근거없는 추측과 비틀어 읽기로 독자를 오독으로 유인
“위안부연행에 일본군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듯이 읽히는 부분이 있다”(60)<“두가지 기술은 국가의 책임에 대해 모순되는 지적을 한 것인데 아마도 박유하의 실제주장은 후자일 것이다
”’위안부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면 모집자체를 중단해야 했을 것’ 이라는 기술은 공급이 따라갈 정도라면 군위안소제도에 문제는 없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56)

올바르게 읽기 위해 “논지의 재구성”을 해야 한다거나 ”터무니없는 부담”을 지우고 있다는 비판은 터무니없는 왜곡 혹은 선입견(서경식./윤건차등 재일교포지식인의 <화해를 위해서>비판의 문제의식 답습)에 의한 곡해

 

3)우경화 콤플렉스 / 냉전적사고-
(하타이쿠히코의) “일본군무죄론과 기본적으로는 동일”(66)

,“부정론자들의 담론을 기본적인 수준에서 계승”
“박유하가 전개한 논리는 고바야시 요시노리나 산케이신문으로 대표되는 명확한 역사수정주의 뿐 만 아니라.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정면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1990년대이래로 일본의 지식인들이 생산해 온 담론에 적지 않게 의거”(40)

 

<우익>에 연결시키는 일로 독자의 적개심 유발 .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오른쪽에 세워 비난.
결과적으로 ”양심적” 일본지식인마저 의심하도록 만드는 선동성.

역사에 대한 재고찰을 “역사수정주의”로 간주 (박노자.한겨레.2016/7/3) 혹은 우파로 모는 담론의 빈곤.
폭력의 사고/지식인의 대중화?/ 학문이라는 이름의 테러

 

4) 기존연구/사고에 무조건 대입시켜 왜소화.

학제적 연구에 대한 몰이해. 제국의 위안부는 메타역사서.

  1. 치명적 오류 혹은 거짓말
  • ”식민지지배책임에 관한 인식에 다대한 혼란 초래”(39)
    ”전후사의 긍정을 바라는 내셔널리즘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이러한 주장 때문에 일본우파뿐 아니라 이른바 ”리버럴”에게도 높은 평가”“<제국의 위안부사태란, “일본군무죄론에 의한 대일본긍정소망과 전후일본의 긍정소망이라는 두개의 역사수정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욕망이 낳은산물” (167,) “제국의 위안부는 피해자들의 소리를 마주하는 것을 거부하는 구실을 일본사회에 부여”(174) “책임부정론자 담론을 계승”(정,40)”식민지주의 이데올로기에 친화적”(141,이상 정영환)일본지식인들의 평가를 모두 거짓이나 포즈로 생각하는 편견과 왜곡.일본에서의 평가를 거꾸로,혹은 자의적으로 선택해 전달, 박유하와 현대 일본지식인에 대한 불신 야기.

 이하는 박유하의 저작들에 대한 평가. 산케이나 요미우리의 평가는 없었음.

박유하의 저작은 학문적인 수준도 높고, 시사문제 해설서로서도 균형이 잡혀있다. 그런데다 읽기 쉬운 문체로 쓰인 보기 힘든 우수작이다. 한국과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오해,무지, 혹은 감정적 대립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역사문헌이나 여론조사등의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책이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는 것은 양국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기뻐해야 할 일일 뿐 아니라 세계각지에서의 국가 혹은  민족간 화해를 가져오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이리에 아키라, 하바드 대 명예교수,2007. 오사라기지로 논단상 평)

위안부문제에 관한 전면적, 실증적, 동시에 윤리적인 분석이다”” 이책만큼 이 문제의 모든 측면을 이성적으로 검토한 책은 없다, 역사적인 위안부발생구조와 그 실태해명부터 위안부문제의 발생, 이에 대한 한국과 일본에서의 정치과정 각기의 기억의 생산과 재생산의 분석, 나아가 앞으로의 문제해결을 향한 제언까지”” 경청할 가치가 있는 문장으로 적혀져 있어”” 성노예냐 매춘부냐 하는 인식에서도 그리고 강제성 문제에서도 안이한 단순화를 허용하지 않는 다면적인 측면을 밝히고 있다. 여성을 수단화 물건화 도구화하는 구조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표한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축이다.”(다나카아키히코, 도쿄대 명예교수,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심사평)

“위안부와 군대라는 관계로부터가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틀 안에서 인간 정신이 어떤 양상이었는지의 문제를 파헤친 작품” (가마타사토시, 저널리스트,이시바시탄잔 기념 와세다저널리즘 대상 평 )

단순한 전시하의 인권침해로 보는 견해보다도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로까지 시야를 넓혀 문제를 파악하는 날카로움이 있다. 그것은 전시하의 인권침해적 범죄라는 이해보다도 엄중한 물음을 품고 있다. 박유하는 과거를 미화하고 긍정하려고 하는 역사수정주의자의 시점과는 정반대의 시선을 위안부피해자에게 쏟고 있는 것이다”(나카자와 게이)

이 책의 평가해야 할 점은 제국, 즉 식민지지배의 죄를 전면에 끌어낸 데있다”(우에노)“거시적인 규정성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의 상황을 꼼꼼하게 봐 가는 것이 식민지지배를 생각하는 시각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지배의 폭력성의 진지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는 잇고 있다고 생각한다”(아라라기 신조 조치대 교수)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선입견을 빼고 전체를 읽어 보기만 한다면 생길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일본의 면죄에 이용하는 것이라는 일부사람의 독해는 명백히 오독이며 이 책을 악용하는 것””이러한 측면의 강조는 식민지지배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길을 열어 줄지언정,일본의 면죄를 끌어내거나 하는 일은 없다”(니시마사히코 리츠메이칸 대 교수)”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가노 미키요 게이와대학 교수)””이러한 구조 야말로 식민지지배와 전쟁의 커다란 죄악,그리고 여성의 비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박유하씨가 동지적관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해석”(와카미야 요시후미 주필)”

이제 물음은 일본을 향하고 있다””일찍이 구미에 추종했고 강자로서 아시아를 지배한 일본은, 타자를지배하는 서양기원의 사상을 넘어서서 국제사회를 평화공존으로 가져갈 가치관을 보여 줄 수 있을것인가? 한국의 이해를 얻으며 도전하고 싶다” (야마다다카오 마이니치신문 칼럼니스트)

 

대부분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으로 읽고 있고 그러한 문제제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
오독하는 자는 누구인가?

 

2)”일본군무죄론”” 업자주범론” / 일본군과 국가의 책임을 극소화했다

업자가 주범이다 (53)

“일본군무죄론의 여섯가지 주장과 정확히 일치”(49) “일본군책임부정” (51)“군의 성노예가 아니라고 주장한다”(63)“위안부가 국가의 노예였다는 것을 사실상 부정한다”(54)“위안부의 모집을 지시한 것”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57)일본군의 책임을 “발상.수요.묵인 한정적 책임만 인정” “일본군무죄론과 기본적으로는 동일”(66)

 

<제국의 위안부>에 기술된 일본/군/부정자비판 (142-164)을 없는 것처럼 왜곡.
“법적책임’에 고집하려면 업자의 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했을 뿐
업자에는 일본인도 존재. 여성들을 돈벌이 도구로 삼아 착취한,”계급”책임을 물으려 한 시도

이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발췌.

 

일본군이 장기간 동안 전쟁이라는 ‘비일상’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병사 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라는 존재를 발상하고 모집한 것은 사 실이다. 그리고 군에서의 그런 수요증가가 사기나 유괴까지 횡행하게 된 이 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타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임으로써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은 이 문 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 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군의 수요를 자신들의 돈벌이에 이용하고 자국의 여성들을 지배자의 요구에 호응해 머나먼 타국으로 데려다놓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에 이런 일을 단속하고 처벌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행위야말로 ‘범죄’이고 따라서 그들에게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를 ‘범죄행위’로 규탄하는 이들의 표현에 따른다면, 업자들이야말로 ‘범죄’를 저지른 자들로서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20만 명이 아니라 2만 명, 아니 2000명 이라 해도,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을 직접 ‘동원’한 것이 업자들이었다고 해도, 또 그들이 ‘가라유키상’처럼 유괴되거나 자발적으로 팔려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50쪽)

업자들이 과도한 착취를 하지 않도록 관리했다는 것도, 군이 위안소의 ‘올바른 경영’을 지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위안소에서 폭행 등이 없도록 노력했다는 것이 위안소 설치와 이용의 책임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72쪽)

태평양전쟁 때 일본이 ‘위안부’를 필요시하고 위안부의 효과적인 공급을 위해 ‘관리’를 했던 건 분명하다. 그런 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한 ‘남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 ‘죄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136쪽)

물론 보수를 받았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설령 보수를 받았더라도 그 보수는 그녀들의 정신적•신체적 고통에 대한 대가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위안부’들이 ‘비싼 요금’을 받았다고 강조하는 이들도 있지만, ‘위안’이었건 ‘매춘’이었건 보수가 혹 높은 경우가 있었다면 그건 그만큼 그일이 모두가 꺼리는 차별적이면서 가혹한 노동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싼 요금’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 장소가 목숨을 저당잡혀 있던 전선이었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대부분의 위안부들은 자신들의 몸값을 저당잡혀 있는 신세였다. 또 그 착취의 주체가 설령 포주들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착취구조를 묵인하고 허용한(간혹 그 구조를 바로잡으려 한 군인도 있었지만 그건 예외적인 일로 보아야 한다) 군의 상부에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145-146쪽)

물론 이 소설 속의 장면은 위안소의 규율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니 예외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일 뿐 ‘조선인 위안부’에게 원래 요구된 역할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벌어진 ‘개인적’인 일 역시, 군인들의 대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공적’인 사회인식과 구조가 만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식과 구조를 만든 일본의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148쪽)

하지만 위안부를 모집한 중심 주체가 민간인이라 해도, 또 모집하는 데에 사기나 납치 등의 수법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병사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상부 역시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이 불법적인 행위를 막으려 했다 해도 불법적인 수단이 자행되는 시스템 자체를 방기했다면 시스템을 유지시킨 책임이 군에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 군이 위안부 모집에서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분명히 군이 ‘직접’ 모집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그것은 밀수품을 막으려는 국가의 태도에 비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군은 이때 소비자가 밀수품을 사지 않도록 밀수품을 막으려 했던 것이지만 정식 관세를 내면 통과시키는 식으로 수입 자체는 허가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은 상품의 품질에 대해 감시하고 불만을 제기할 수는 있어도 직접 관리와 개선에 나설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군이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는 사실도, 일본군이 상품과 그것이 유통되는 시스템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안부’가 임신했을 때 낙태시키는 일을 맡았던 한 군의가 ‘나는 검사관이라는 무기〓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가리킨다(http://www.ne.jp/asahi/tyuukiren/web-site/backnumber/05/yuasa_ianhu.htm). 그런 식의 일방적 권력의 존재는 군이 시스템을 ‘관리’한 관리자라는 사실, 다시 말해 ‘관여’했을 뿐 아니라 주체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군이 모집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군의 관여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군이 물리적으로 행사한 ‘강제연행’을 글자 그대로 ‘강제’ ‘연행’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강제연행’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행해진 경우는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사기든 납치든 업자와 포주들이 ‘강제’적으로 데려가는 일이 빈번했던 위안소를 유지한다는 것은 계속적인 수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공범자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살인교사와 비슷한 구조일 수밖에 없고, 그런 시스템을 필요로 한 것이 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군인에 의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 ‘강제’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식민지에서는 오히려 당연하다. 전쟁터가 아닌 식민지는 아직은 ‘일상’이 유지된 공간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법’이 작동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징병이든 징용이든 구성원의 의지에 반한 ‘강제적’ 모집 행위조차 ‘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것을 보여준다. 식민지에서 무차별적 ‘강제연행’은 없었던것으로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행위를 ‘유법有法’화해도 문제가되지 않는 비일상적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뿐이다.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온건했고 좋은 통치였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온건하고 좋은 통치란 어디까지나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 이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의 통치가 총체적인 ‘온건통치’였던 것은 일본 국가에 대한 복종이 전제된 공간에서의 일이었다. 정신대 모집은 ‘법’을 적용시켜 합법화하면서 위안부 모집을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식민지에서의 ‘온건통치’의 임계선이 무너지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 앞에 본 소설과 같은 일이 일어나거나 인도네시아나 중국 등지에서의 납치(수용)강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전쟁터’이자 ‘국가’ 바깥의 공간이어서 더 이상 ‘일상’을 유지하는 ‘법’을 작동시키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모집에서 업자와 포주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바로 그래서라고 이해해야 한다. ‘온건통치’의 범주에 ‘자발적으로’ 편입된 이들이 ‘개인적’으로 불법을 자행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온건통치를 유지하면서) 식민지인들에게 불법행위를 전담시켜 그들을 동족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식민지에 살았던 일본인들은 조선을 지배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건, ‘지배’라는 것이 구조적으로 언제나 저항과 반발을 내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체제 ‘사상범’을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유지법’이라는 ‘법’을 작동시키는 일로 ‘법’망 안에서 가능했지만, 식민지인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하는 것은 ‘온건통치’를 표방하는 한 불가능하다. 그러니,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군의 관여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제21군 사령부가 위안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여, 내무성에 400명, 대만 총독부에 300명의 여성을 모집해주기를 요청한 경위를 나타내는 자료’(요시미 요시아키, 2007. 5.) 외에도 위안부의 증언과 군인이 남긴 다수의 기록에서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군의 관여는 명백히 드러난다. 모든 위안소가 ‘군이 설치한, 군인•군속 전용 제도’(위의 글)라고 할 수는 없는 경우도 있지만, 군이 위안소를 필요로 하고 이용한 이상 위안소에 대한 군의 관여를 부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군이 주체가 되는 ‘강제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해야 한다. ‘위안부’ 이동에 군이 관여했다는 점을 두고 전쟁터이기 때문에 군이 보호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메뚜기」는 그 이동이 단순한 ‘보호’가 아니었다는 것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일본 본토와 한반도 사이의 이동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서 국가의 관리를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여권과 유사한 국가의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런데 일본인에 대해서는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출국을 ‘21세 이상의 경험자’로 정해놓았지만, 조선이나 대만의 경우에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요시미 요시아키, 2009년 여름). 이것은, 이미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식민지 여성들에 대해서는 국가의 보호의식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51-154쪽)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것은, 조선이 받았던 고통에 대해, 당한 당신한테 잘못이 있다고 가해자가 말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책임’은 어디까지나 ‘자기 책임’의 주체가 생각해야 할 문제다. 조선은 멸망 직전’이었는데 일본이 구해준 것이라며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은 강한 자의 논리일 뿐이다.

설사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갈등 해소는 자신의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데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는 이들은 식민지배를 하게 된 ‘이유’만 강조하고 싶어하지만, 상대방의 문제만을 지적하는 한 대화는 결국 닫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화에는 상대방의 긍지를 생각하는 상상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사죄와 보상은, 이제까지 부정해왔던 이들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도 필요하다.

(163쪽)

‘조선인 위안부’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강간이나 가혹한 노동의 원인은 식민지배와 국가와 남성중심주의와 근대자본주의가 빚은 가난과 차별에 있다. 나아가 그들을 그런 장소로 내몬 가부장제에 있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만들고 이용한 것은 ‘일본군’이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그런 시스템을 묵인한 국가에 있다.

(191쪽)

 

3) 피해자나 지원단체가 양보하라고 했다

당사자 포함한 협의체 제안

 

대화로써 일본과 마주해야 한다”(제국의 위안부,311)
“정부는 일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제국의 위안부,312)

 

4)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이 다르다

일본어판은 한국어판의 단순번역이 아니라 일본인독자를 향해 다시 쓴 책. 취지/표현이 “기본적으로”다르지 않다 했을 뿐, 다시 쓴 책에서 표현이 달라지는 건 당연.

장정일’ 박유하죽이기-이명원/정영환의 오독” 참조

http://www.huffingtonpost.kr/jeongil-jang-/story_b_9899800.html
5)일본인위안부와 조선인위안부를 동일시했다”

 
표면적인 “동족”의 틀 아래 존재한 차이/차별 구조, 고통 지적

물론 이런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기억일 수밖에 없다. 설사 보살핌을 받고 사랑하고 마음을 허한 존재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부들에게 위안소란 벗어나고 싶은 곳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이런 식의 사랑과 평화가 가능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녀들에게는 소중했을 기억의 흔적들을 그녀들 자신이 “다 내삐렀”다는 점이다. “그거 놔두면 문제될까봐”라는 말은, 그런 사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 그녀들 자신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 이후 내내 그렇게 ‘기억’을 소거시키며 살아왔다.

(67쪽)

물론 거듭 말하지만, 사랑과 평화와 동지가 있었다고 해도 ‘위안소’가 지옥 같은 체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명예와 칭송이 따른다 해도 전쟁이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지옥을 살아내는 힘이 되었을 연민과 공감, 그리고 분노보다 운명으로 돌리는 자세 역시 기억되어야 한다.

(76쪽)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일본인•조선인•대만인 ‘위안부’의 경우 ‘노예’적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군인과 ‘동지’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같은 ‘제국 일본’의 여성으로서 군인을 ‘위안’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부여된 공적인 역할이었다. 그들의 성의 제공은 기본적으로는 일본 제국에 대한 ‘애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남성과 국가의 여성 착취를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했지만, ‘일본’ 군인만을 위안부의 가해자로 특수화하는 일은 그런 부분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페미니즘 정신을 바탕에 둔 운동이었음에도 ‘일본’ 비판에 더 무게가 실리면서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인 ‘남성과 국가와 제국’의 문제로 다루는 일을 어렵게 하고 말았다. 다른 나라 역시 이 문제에서 무죄일 수 없음에도 그들의 문제를 보지 못하도록 만든 셈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중국이나 네덜란드 등 전쟁 상대였던 ‘적국의 여성’과 본국•식민지•점령지의 여성들이 처했던 위치는 다르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해주거나 ‘간호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박유하, 2009; 하야시 히로후미, 2010).

한 군의는 “내가 ‘위안부’를 처음으로 본 것은 거류민 여성에게 위생/응급처치 교육을 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든지, ‘너는 천황 폐하를 일본인과 똑같이 섬길 수 있어서 기쁘지?’ 하는 식으로 깔보았습니다”라고 고백한다(http://www.ne.jp/asahi/tyuukiren/web-site/backnumber/05/yuasa_ianhu.htm). 일본의 지원운동 방식은 이런 상황과 심리가 보여주는 ‘식민지인의 이용과 차별’의 교묘한 구조 역시 보지 못하도록 했다. ‘위안부’가 ‘간호사’를 겸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두고 그저 “‘간호사’로 만들어 당국이 연합국에게 위안부의 존재를 은폐하려”(『교도통신』, 2008. 7. 31.) 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정식 군속으로 임명해서 위안소의 존재도 감추는 동시에 함께 돌아갈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같은 기사)이었다고 해석하는 것 역시, 위안부의 ‘동지’성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그녀들은 전시에 이미 간호부로 일하고 있었다.

‘성노예’라는 단어는 ‘조선인 위안부’가 처한 그런 복잡한 상황을 보지 못하게 한다. 동지’적 관계를 직시하는 것이 꼭 ‘일본군’을 면책하는 일은 아닌데도 이 부분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은, 일본의 지원자들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보지 못했거나 한국의 정대협과 마찬가지로 ‘운동’에 불리한 사실로만 판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표면상으로는 ‘동지’적 관계였어도,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별감정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추어진 차별감정을 보기 위해서도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의 다면성은 오히려 직시되어야 했다. 명확하게 보는 일만이 책임을 져야 할 책임 주체와 피해자의 관계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동지’적 관계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을 고집했던 이들을 무조건 규탄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응답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했다. 위안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내면에 존재했던 차별의식을 지적하기 위해서도, ‘동지적 관계’는 우선 인정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일본 지원자 측의 운동가나 연구자들 역시 그런 사실은 눈감았거나 보지 못했고, 조선인 위안부에게서 그저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만을 보려 했다. 그것은, 명확한 ‘굴종’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자발적’인 협력을 강요당한 ‘식민지’의 복잡한 구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국가와 제국’ 비판이 앞선 나머지 식민지의 미묘한 심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동지적’ 상황을 그저 예외적인 것으로서 배제해버린 일은 ‘동지적’ 측면에만 혹은 ‘매춘부’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려 했던 이들의 반발을 불렀고, 대립을 심화시켰다. 말하자면 위안부의 증언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은 일, 다시 말해 위안부의 ‘피해’에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외면했던 일은 일본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다.

(137-139쪽)

 

조선인 위안부들은 이렇게 살아 있는 군인을 위안했을 뿐 아니라 죽은 군인들을 위로하는 역할도 했다. ‘피묻은 군복’을 빨아 다음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여차하면 함께 싸울 수 있는 훈련까지도 한 이들이 조선인 위안부였다. 그렇게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162쪽)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저항했으나 굴복하고 협력했던 식민지의 슬픔과 굴욕을 한 몸에 경험한 존재다.일본’이 주체가 된 전쟁에 ‘끌려’갔을 뿐 아니라 군이 가는 곳마다 ‘끌려’다녀야 했던 ‘노예’임에 분명했지만, 동시에 성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복’을 입은 댕기머리 조선인이기도 했지만, 일본옷을 입고 일본머리를 한 청초한 ‘야마토 나데시코’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처절하게 살아낸 존재였다.

(207쪽)

 

네덜란드’ 여성과 인도네시아 여성과 조선인 여성은 일본군과의 기본적 인 관계가 다르다. 일본군에게 네덜란드 여성은 ‘적의 여자’였지만, 인도네시아의 여성은 점령지의 여성이었고, 조선인 위안부는 같은 일본인 여성으로서의 동지적 관계였다. 그녀들이 입은 피해의 형태는 기본적인 관계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그런 기본관계를 벗어난 관계도 얼마든지 있었다.

(265-267쪽)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약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었을 뿐,위안’이라는 이름의 노동이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성과 신체를 혹사당하는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여전히 ‘위안부’ 생활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84쪽)일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에게 ‘적의 여자’와는 다른 관계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조선인 위안부라도 그녀들이 놓인 정황은 다양했다.조선인 위안부’란 식민지의 가난과 성적/민족적 차별의식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압도적으로 비대칭적인 숫자의 군인을 감당해야 했다는 점에서도 ‘위안부’가 ‘군인’과의 관계에서 희생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양쪽 다, 국민동원이라는 국가 시스템 속에서 함께 움직여진 장기말이었다. 그들은 둘 다 성과 생명을, 그것을 담는 신체를 ‘국가를 위해’ 바쳐야 했던 한 마리 ‘개미’들이었다. 포악한 군인이었건 온순한 군인이었건, 그들의 운명은 다르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남녀 간의 불평등, 민족적 불평등이라는 관계 속에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당신도 헤이타이(주-군인)나도 헤이따이상, 나도 이리 산 것도, 고향을 떠나서 이리 산 것도, 천황을 위하여”(『강제 3』, 107쪽)라는 노래를 했다는 증언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들은 함께 국가에 의해 고향을 멀리 떠나 타지로 ‘이동’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79쪽)

물론 역으로 강제성 속에 자발성이 있었고 성노예의 이면에 매춘부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국적에 따라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랐다.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 해결은 그 모든 상황의 차이를 보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분명한 것은 보수가 주어졌건 아니건 ‘위안부’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윤간이 국가에 의해 허용된 존재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한 의식은 여성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 대할 수 있게 만드는 차별의식이었다. 특히 ‘조선인 위안부’는 그런 인식이 명확히 드러난 경우다.

(143쪽)

병사들의 강간은 위안소라는 공공장소에서 ‘몇백 명이나 되는 줄을 서’는 일에 대한 염증이 만들고 있다. 말하자면 강간을 피하기 위해 위안소를 만들었다는 군 상부의 의도는 군대의 숫자를 생각하면 처음부터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될 수 없는 시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서의 강간 욕망은 그녀들이 ‘고작 조센삐’였기 때문에 생긴 욕망이었다. 말하자면 단순한 여성 경시뿐만 아니라 민족 경시가 그들에게 강간을 허용한 것이다. ‘저 여자들하고 한 번 하’는 데에 ‘몇 시간이고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일’로 생각한 것은 상대에게 그럴 만큼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조선인 위안부’란 그렇게, 여성을 도구화하는 성차별뿐 아니라 조선인임을 경시하는 민족차별이 만든 존재이기도 했다. 그 점이 일본인 위안부와 다른 점이다.

(147쪽)

‘점령지의 여성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은 ‘피해를 끼’쳐도 상관없는 여성이 있다는 사고를 전제로 한다.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위안소를 타국 군인에 의한 점령지에서의 강간과 비교하면서 일본은 ‘러시아같은 야만국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야만’과 대조되는 위안소, 잘 관리되면서 지극히 ‘문명’적으로 보이는 그곳은 가난이나 그 밖의 이유로 차별해도 되는 것으로 간주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공식적으로’ 용인한 장소일 뿐이다. 공창을 합법화하는 발상 자체가 인간에 의한 인간(여성)의 상품화라는 ‘야만’을 정당화하는 장치인 것이다.

(149쪽)

 

그것은 남성이고 군대이고 국가였다. 그리고 ‘일본 제국’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부’란 어디까지나 국가와 남성, 그리고 격리된 남성 집단을 만드는 전쟁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생긴 존재다. 위안부의 자발성이란, 본인이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국가와 남성과 가부장제의 차별(선별)이 만든 자발성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폭탄이 터지는 최전방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며 병사들의 욕구를 받아주어야 했다.

(159쪽)

그에 반해, 예외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인 위안부들은 대개 도회지의 좋은 시설에서 장교들을 중심으로 상대하며 상대적으로 편한 환경을 누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리고 그렇게 조선인 위안부들이 더 많이 가혹한 환경으로 가게 된 이유는, 그들이 식민지의 여성이라는 계급적이고 민족적인 이중차별의 결과로 일본 여성들보다 가난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군인들이 그녀들에게서 본 적극성이란 그런 상황이 만든 적극성이었다.

(161쪽)

 

한국의 기생집을 위안소와 똑같이 치부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위안소는 전쟁과 군인들을 위한 장소였다. 군인들이 쉽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군인’이라는 존재가 폭력에 길들여진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러 증언들은 그런 폭력 역시 차별의식이 기반에 깔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계질서에 길들여진 군인들에게 조선인 위안부란 권력을 갖지 못한 졸병이라도 권력을 시험할 수 있는 대상일 수 있었다.

(163쪽)

일본인 위안부가 아닌 ‘조선인 위안부’가 많았다는 것은 ‘조선’에 상대적으로 가난한 여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민지의 상황은 식민지배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한다면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성차별과 계급차별 이상으로 ‘식민지배’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었고, 고노 담화는 그 부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응답한 담화였다. 다시 말해 ‘고노 담화’란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응답한,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의 결과로 받아들여 사죄한 담화였다. 이후 다른 나라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문제가 복잡해지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고노 담화에서 인정된 ‘강제성’은 네덜란드나 중국에 대한 강제성과는 다른 차원의 강제성이었다.

(176쪽)

‘조선인 위안부’들이 위안소에서 겪은 강간이나 가혹한 노동의 원인은 식민지배와 국가와 남성중심주의와 근대자본주의가 빚은 가난과 차별에 있다. 나아가 그들을 그런 장소로 내몬 가부장제에 있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만들고 이용한 것은 ‘일본군’이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그런 시스템을 묵인한 국가에 있다.

(191쪽)

 

6) 일본인 위안부의 애국을 조선인위안부 것인 것처럼 썼다


일본인임은 명시. 센다의 책에서 애국을 읽은 것은 박유하의 해석이며 조선인위안부도 등장.
애국의 틀하에 놓여 있던 것은 조선인위안부증언집에 존재하는 기술에 근거한 지적.

 


센다의 책에서도 한 군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깜짝 놀란 건 지난濟南에 들어간 지 이틀 후에 어느새 작부가 들어온 일이었습니다. 작전을 수행하면서 전진하는 부대 뒤를 땀을 흘리며 따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숫자는 세 명인가 네 명이었는데, 거의 모두가 조선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약삭빠른 매춘업자가 전쟁수당을 받고 있는 군인들의 수당을 노리고 여자들을 모아 돈 벌러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들은 각기 일본식 머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옷도 입고 오비를 둘렀는데,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약삭빠른 업자의 지혜였겠지요. 군이 여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요구하거나 바란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업자였겠지요. 남자는 주둔지 한쪽 구석에 판자를 박고 돗자리를 둘러쳤는데,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엉성하나마 집을 지어냈습니다. 거지들의 오두막집 같은 거지요. 밖에서 돗자리를 들추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엉성한 집이었습니다. 부대에 영업허가를 받지도 않았겠지요. 형태로 봐서는 민간인이 마음대로 와서 제멋대로 장사를 하는 식이었을 겁니다.( 82쪽)

 

———————-

그런데 센다는 “속아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 이렇게도 쓴다.

그녀들이 부대를 따라 행동할 때는 양복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양복이라고 해봐야 면원피스나 투피스였다고 한다. 그런 복장으로 특별한 날에 입는 옷이나 자신의 일상용품들을 넣은 트렁크를 들고 군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습지대 같은 곳을 걸을 때 혹은 강을 건널 때는 훈도시(남성용 속옷-인용자)만 걸친 군인 옆에서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조건은 군인들과 똑같았던 것이다.(89쪽)

센다가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러한 광경에 근거한 것이리라. 센다가 말하는 정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사진도 실제로 남아 있다(33쪽의 <사진 2> 참조).

 

일본어판 (71-75), 한국어판 57-59 에 애국 사례 존재

간호원도 배운다고 배왔지. 미국 사람이 뭐시가(비행기가) 오는 거 같으면 총도 맞추면 이것 배우고. 이것저것 배우고 호다이(붕대)를 갖다가 어디 맞으면 어떻게 감으라 카는 거 그거 연신 배와주고 놀 여개가 없어요.(『강제 5』, 139쪽)

 

거기가 일선이라도 군인들 큰 전쟁 나가서 돌아오면 기모노 입고 에프론 하고 고로사마데시타(‘수고하셨습니다’) 인사하고 보통 때는 몸뻬 입고 안 그러면 스카트 같은 거 입고. 기모노는 겨울거 여름거 봄거. 도시 가서 돈 주고 사야지. 인기까이(원문에는 괄호 안에 ‘송별회’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연예회’[여흥을 곁들인 술자리]의 잘못된 일본어발음일 가능성이 크다인용자) 같은 거 하거든요.(같은 책, 140쪽)

 

조선인 위안부가 한 일은 성적 욕구를 받아주는 일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호도 붕대감기도 배웠고 심지어는 총쏘기(총조립하기?)까지 배워 군인들 과 함께 전쟁을 지탱했다.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면 ‘기모노에 에프론’ 차림 으로 맞아들이고 축하연에 참석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대동아전쟁 나고 거기 있는 여자들이 다 훈련받았지. 아침이면 다 나와서 모두 체조하고, 군대식으로 똑같이 훈련받았지. 신작로 운동장에서 훈련을 달 반은 받 았어. 수류탄 던지는 거 그거는 거 부대서. 부대서 거기서 훈련시키는 사람 있어. 훈련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군인이지.(같은 책, 140쪽)

 

이것은 전쟁 발생 이후의 상황인데, 후에 다시 보겠지만 위안부들이 처했던 상황은 장소와 시기에 따라 달랐고 전선인지 후방인지에 따라서도 달랐 다. 또한 어떤 군인을 만났는지에 따라서도 달랐다. 물론 그 어떤 경우도 그들이 처한 상황이 불행한 상황이었다는 본질적인 구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안부의 그런 다양한 모습을 보지 않고는 결코 위안부의 총체적인 면모를 포착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일본인위안부의 경우다. 그러나 조선인위안부가 “제국의 위안부”였던 이상 기본적인관계는 같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패전 전후에 위안부들이 부상병을 간호하기도 하고 빨래와 바느질을 하기도 했던 배경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사유리,스즈란,모모코와 같은 일본이름으로 불렸다(후루야마고마오, 하얀논밭,12쪽)는 것도. 식민지인이 ‘위안부”가 되는 일이란 대체일본인이 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제국,62-63).

 

한 일본인 위안부의 이야기는위안부’와 군인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 고 있다.

 

위안부가 될 때, 전쟁터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이런 몸이 된 나도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전선의 위안소에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후방 병참기지에 있게 되면 점차 생활에 익숙해진다고 할까 지쳐버리거든요. 왜냐하면 전방에서는 군인들과 먹는 것도 같이 먹고 본인들은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우리도 그런 그들을 진짜로 위로해주려고 생각했지요. 군인들도 우리를 보면 ‘수고가 많네’라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후방으로 가면 정말로 공동변소 취급인 거예요. 장교나 하사관들 중엔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요.(센다 가코, 81~82쪽)

 

즐거웠던 일은, 글쎄요. 내 경우에는 역시 시코쿠 사람을 만났을 때였어요. 그것도 아이치愛知라든가 마쓰야마松山라든가, 고향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기뻤지요. 군인들도 마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성관계를 빼고 고향의 축제나 산이 나 강 얘기를 같이 하곤 했어요. 군인들도 그걸로 만족했지요.(같은 책, 82쪽)

 

이렇게 ‘위안부’를 둘러싼 상황은 전방인지 후방인지에 따라 달랐을 뿐 아니라 상대에 따라서도 달랐다. 자원한 ‘위안부’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할이 군인의 ‘위안’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것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몸’이 되었다고 자기 자신을 비하해야 할 만큼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을 받아온 그녀들에게는, 군인을 상대하는 ‘위안부’란 처음으로 자신의 앉을 자리를 ‘양지’에 내받은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약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었을 뿐,위안’이라는 이름의 노동이 대부분의 ‘위안부’들에게 성과 신체를 혹사 당하는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여전히 ‘위안부’ 생활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84쪽)일 수 밖에 없었다.

 (59쪽)

 

..이웃한 장소에 위안소의 비참은 존재했다. 위안부들과의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군인의 말을 인용했던 센다 또한 이렇게 말한다.

하긴 이런 일은 전쟁에 어느 정도 인간적인 마음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장교가 있는 부대나 주둔지뿐이고, 그 숫자가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부대나 주둔지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닌 듯하다. 보통은 아무런 즐거움도 없는 공동변소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런 위안소에서는 여자들은 하루종일 팬티를 벗은 채로 “자, 다음!”, “다음!” 하는 식으로 무표정하게 숫자를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군인들 역시 거칠었다고 한다.(81쪽)

 

7) 동지적 관계는 없다/’동족’이란 일본병사의 시각이다

 

 “동지적 관계”의 1차적 의미는 식민지화되어 <일본인>이 되어야 했던 구조를 지칭한 개념

 군인체험을 한 일본인작가의 소설은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일부 일본인 들에게 :”그들의 조상도 이렇게 썼다” 는 의미로 사용. 후루야마의 소설들은 실체험에 바탕한 이야기.
자료집 참조

”동족”이라는 단어가 일본군인의 말임은 명기. “일본인범주에 들어가게 된 조선인”/국가에 의해 전쟁터에 끌려 온 개인이라는 의미. 동시에, 참혹한 정황도 기술(142-166)

 

후루야마는 “우리가 네이판 마을에 니퍼 하우스(니퍼야자 잎으로 지붕을 얹고 벽을 두른 집-인용자)를 만들고 3주 정도 지나자 조선인 위안부가 열 명쯤 왔다. 그녀들은 모두 사유리니 스즈란이니 하는 꽃이름을 딴 유곽식 일본이름을 갖고 있었다”면서 그가 만난 ‘조선인 위안부’의 말을 이렇게 기록한다.

징용이라고 했어. 나 경상남도에서 밭에 있었거든. 그런데 징용이라고 그러면서 데려가는 거야. 기차를 탔고 배를 탔지. 나, 위안부가 된다는 거 몰랐어.”

여유롭고 느긋한 성품이란 이런 걸 말하는군. 하루에한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었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운이야. 위안부가 된 것도 운이지.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도 운이고. 모두가 다 운이라고.”(「개미의 자유」, 84쪽)

여기에는 속아서 왔다면서도 “군인들이 총알 맞는 것”과 “위안부가 된 것”을 그저 운이 나빴다는 식으로 간주하고 군인을 원망하지 않는 위안부가 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미 식민지가 된 지 오래인 땅에서 자라나 자신을 ‘일본’의 일원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성은 어디까지나 동족으로서의 ‘군인’일 뿐 적국으로서의 ‘일본군’이 아니다. 그녀가 일본군을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불행한 ‘운’을 가진 ‘피해자’로 보면서 공감과 연민을 표할 수 있는 것도 그녀에게 그런 동지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한테 나가 압박은 많이 받았지. 압박은 많이 받았지마는, 내 운명인디. 내가 세상을 잘못 만나고 내 운명이고, 나를 그렇게 한 일본 사람을 나쁘다는 소리는 안 해. 그리고 같은 한국 사람이지마는 한국 사람이 주인이 돼갖구는 얼마나 나를 뚜들겨패는지 몰라. 손님을 안 받을라 한다구. 샅이 아파싸서 죽갔는디. 막 눈물이 절로 나오는 기라. 밥도 못 먹지.(『강제 3』, 225쪽)

위안부 체험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이는 우리 앞에도 있다. 말하자면 똑같은 가혹한 ‘운명’을 겪고도 그 운명에 대한 ‘태도’는 위안부마다 달랐고, 지금도 다르다. 그런 그녀는 일본군이 아닌 업자를 ‘폭행’의 주체로 기억한다.

(75쪽)

조선인 위안부들은 이렇게 살아 있는 군인을 위안했을 뿐 아니라 죽은 군인들을 위로하는 역할도 했다. ‘피묻은 군복’을 빨아 다음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여차하면 함께 싸울 수 있는 훈련까지도 한 이들이 조선인 위안부였다. 그렇게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

(162쪽)

‘조선인 군인’들에게는 ‘조선인 위안부’는 ‘비싸’서 이용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현지 여자는 주로 병정들이 상대”했다는 것은 ‘위안’이라는 행위가 ‘인간의 상품화이자 계급화’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조선인 위안부’가 제국 내에서 놓여 있었던 위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인들에게 차별받는 대상이면서도, 그들은 말이 통하고 외모가 일본인과 비슷하며 같은 ‘동족’으로서 기밀을 지킬 수 있는 존재로서 ‘일본인 위안부’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였다.

(294쪽)
8)위안부의 평균연령을 25세라 했다/미성년자 존재를 경시했다

“ 박유하의 사실인식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다. 박유하는 미국의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이 작성한 <일본인포로심문보고>제49호에 있는,버마 미치나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기록을 근거로 평균연령이 25세라고 주장한다…..20명의 징집당시 평균연령은 21.15세이며…..(중략)더욱이 포로가 되었던 당시의 평균 연령도 23.15세며 ‘25세’가 아니다.”

“박유하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정, 67-68)

 

전체평균이 25세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 중 하나로 제시
<미성년-20세 이하>가 아니라 대사관 앞 소녀로 상징되는 소녀. 14-5세?

동시에 소녀존재도 지적

 

실제로는 위안부들은, “내가 나이가 제일 적었지. 거 간 중에. 다른 여자들은 다 스무 살 넘었어”(『강제 5』, 35쪽)라거나 “우리 있는 데는 한 스무 명 남더라구. 그 사람들은 나이가 조금 많고 스무 살 다 넘고 전라도서도 오고 경상도서도 왔더만”(87쪽)이라고 말한다. 증언한 본인 말고는 “스무 살 다 넘” 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우리 앞에 있는 위안부들의 당시 나이는 오히려 ‘예외’였다.

 

거기 위안죠(위안소)가 많아. 많으니께 공치는 사람도 있더라구. 거기 가면 다 남자 상대만 한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이 아니더라구. 거기 여자들하고 다 얘기 해봤지. (중략) 나이가 다 고만고만해. 한 스무 살, 스물한 살, 최고 많은 게 스물다 섯 살. 서른 살 최고 많더라고.(『강제 3』, 96쪽)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8월에, 미얀마(버마) 미트키나 함락 이후의 소탕작전에서 미군의 포로로 수용되어 전쟁정보국OWI의 심문을 받은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004, 296쪽에서 재인용)였다. 어느 조 선인 출신 일본군도 위안부들이 ‘스무 살, 스물한 살’이었던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아 ‘누님’으로 부르며 지냈다고 증언하면서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정신대가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2011).

 

(조선에서의 모집이 시작된 것은 1942년 5월 초, 업자들은 전방의 병원에서 부상당한 병사의 붕대를 감아주고 사기를 북돋아주자는 등의 말로 여성 한 사람당 200~300엔의 돈을 건네주고 데려갔다. 이런 방식으로 300명 가까운 여성이 1942년 8월 20일, 랑군에 도착, 그곳에서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전방으로 보내졌다. 포로가 된 여성은 중국 국경에 가까운 미트키나에 있었던 ‘마루야마 클럽’이라고 불렸던 위안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세. 자신들의 직업이 싫다고 말했고, 일이나 자신의 가족에 관해서는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96쪽에서 재인용)

(83쪽)

 

소녀관련부분 기술

물론 어린 소녀가 위안부가 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어린 소녀가 위안소에 가게 되었을 때는 “어떤 군인이 몇 살이냐고 해서 열 네 살이라고 대답했더니 ‘젖이나 더 먹고 오지, 부모형제 보고 싶어서 어떻 게 왔느냐’”(『강제 2』, 51쪽)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나이가 결코 평균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위안부상이 소녀로 정착된 것(위안부를 다룬 한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소녀 이야기>인 것도 그런 의식을 반영한다)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탓도 있지만 앞서의 20만 명 설과 마찬가지로 그런 상상이 우리의 피해의식을 키워주고 유지하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증언한 ‘위안부’들의 대부분이 십대에 강간당하거나 위안부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니 일본군이 ‘어린 소녀까지도’ 상대했다는 것은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녀 위안부’가 위안부의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위안부들 중에 어린 소녀가 있게 된 것은 ‘일본군’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강제로 끌어간’ 유괴범들, 혹은 한 동네에 살면서 소녀들이 있는 집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우리 안의 협력자들 때문이었다. 위안부가 된 소녀들을 가족이나 이웃으로서 보호하기 보다는 공부라는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해서 공동체 바깥으로 내친 우리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50-52쪽)

일제 시대에 어린 여성들을 꼬여 팔아넘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신문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1월 11일자 『매일신보』의 기사.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최재현(37)과 그의 처 이성녀(24)는 수일 전 서로 공모하여 동면 동리에 있는 김인섭의 둘째딸 양근(12)을 유인해다가 군산부 개복정 2정목 지나支那 요리업자 장우경에게 몸값 50원을 받고 작부로 팔고자 계약서를 작성하던 중 경찰에 발각되어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55쪽에서 재인용)

첫 번째 증언에서 짐차에 태워 간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동네 이장이었다. 세 번째 증언을 한 소녀가 여기저기 전전하다 공장으로 가는 줄 알고 ‘위안부’가 된 나이는 열다섯 살이다. 이처럼, 어린 소녀들이 ‘위안부’가 된 경우는 대부분 주변 사람이 속여 데려가거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보호공간이 되지 못한 경우다.

(53쪽)

 

소녀상은 분명 성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대사관 앞에 서 있는 것은 위안부가 된 이후의 실제 ‘위안부’가 아니라 위안부가 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혹은 앞에서 살펴본 위안부의 평균 연령이 25세였다는 자료를 참고한다면, 실제로 존재한 대다수의 성인 위안부가 아니라 예외적인 존재였던 위안부만을 대표하는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대사관 앞 소녀상이 실제 위안부를 상징하는 상일 수는 없다.( 정창화감독<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참조)

(204쪽)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이 직접 ‘강제로 끌어간’ 존재이고 그들을 ‘감금’한 것도 일본군이고 모든 군인은 포악하고 모든 위안부는 ‘순진한 어린 소녀’로만 간주하는 일은 그런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위안부(이른바 ‘매춘부’를 포함)들을 배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피해자성을 희석시키고 싶지 않은 피해자로서의 욕망이 시키는 일이지만, 표면적인 모습이 ‘완벽한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들 역시 피해자이고 희생자였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자란 한 사람의 조선인 위안부가 그 두 얼굴을 갖는 것은 ‘식민지화’된 순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식민지화되었던 우리 자신, 우리의 과거와 화해할 수가 없다

(295쪽)

 

9) 위안부문제를 한국정부가 포기했다

박유하가 지적한 것은 위안부문제가 아니라 개인청구권

 

 

10)조선인을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민족의 거짓말론은 일본군뿐 아니라 업자도 면책하며 말단의 민중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담론인 것이다”(85)

식민지의 거짓말”의 방점은  식민지. 해당부분은 제대로 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들의 슬픔을 강조한 부분(일본판에만 있는 이유) –초보적 오독

 

11)위안부가 “성노예”임을 부정했다/일본이 바라는 위안부이미지를 써서 일본에 받아들여졌다

 

‘조선인 위안부’는 분명, 식민지가 된 나라의 백성으로서 일본의 국민동원과 모집을 구조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노예였다. 조선인으로서의 국가 주권을 가졌다면 누릴 수 있었을 정신적인 ‘자유’와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에서도 분명 ‘노예’였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노예’가 ‘감금해놓고 언제든 군인들이 무상으로 성을 착취했다’는 식의 것인 한 ‘조선인 위안부’는 그런 성노예와는 다른 존재다. 그런 상황에 노출된 이들이 설사 있었다 해도, 그것이 처음부터 ‘위안부’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성노예’란 성적인 혹사 이외의 경험과 기억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말이다. 그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런 측면에만 주목하고 ‘피해자’의 틀에서 벗어나는 기억을 은폐하는 것은 위안부의 전全인격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위안부들이 자신의 기억의주인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의 기억에 의해서만 존재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우리 또한 그들을 ‘노예’로 만드는 주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117쪽)

 

2012년에 ‘위안부’ 대신 ‘성노예’라는 단어를 공식적인 명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당사자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자신의 위안부 생활이 ‘성노예’로 말해지는 데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해왔 으면서도 정작 그 명칭이 정착되는 데에는 반대한 것은 의식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이름이 자신들의 ‘과거’의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노예’라는 호칭은 분명 ‘위안부’를 나타내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위안부’의 전부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성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그네들이 애써 가지려 했던 인간으로서의 긍지의 한 자락까지도 부정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131쪽)

 

그동안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지원자들은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해왔다. 물론 위안부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거부할 수 없고 도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종속적이었다. 또 그녀들의 선택이 설사 표면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였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구조적 강제’ 속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녀들의 처지는 노예적이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노예’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위안부’의 ‘자유’를 억압한 주체는 ‘일본’이나 ‘군’만은 아니다. 그녀들을 인신 매매 등의 수단을 통해 모집하고 이동시키고 군에 넘겼으며 ‘위안부’들의 노동의 대가인 군표를 가로채는 형태로 관리했던 업자와 포주들이야말로 그녀들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구속한 주체였다. ‘군인’ 이상으로 오히려 더 빈번하게, 더 가혹하게 ‘위안부’의 자유를 구속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은 업주와 포주들이었다. 임금을 받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상황을 ‘노예’적인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녀들의 ‘주인’은 군인이 아니라 ‘업자’이고 포주였다. 설사 그들에게 군인 이상의 권력이 없었다 하더라도 ‘위안부’의 주인이 ‘업자’인 건 분명하다.

(135-136쪽)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는 우선 출신지가 ‘본국’인지 ‘식민지’인지 ‘적국’인지 ‘점령지’인지에 따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발성’ 속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강제’가 존재했고, ‘매춘부’라는 외견 속에 ‘성노예’라는 측면이 존재했다.

물론 역으로 강제성 속에 자발성이 있었고 성노예의 이면에 매춘부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정도의 차이는 국적에 따라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랐다.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 해결은 그 모든 상황의 차이를 보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143쪽)

 

 

 

 

 

참고자료

서문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2013/7)

 

위안부 문제는 왜 1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나는 8년 전 에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뿌리와이파리, 2005)라는 책에서의 일이다. 나는 또 “일본이 주변국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있다면, 혹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면, 거기에는 이제까지의 비판의 형식과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데에도 원인이 없지 않다”라고도 썼다. 그리고 한일간의 문제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복잡”한 문제이고 그런 “복잡함”을 보기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문제들을 조금 깊이 볼 수 있다면 분노와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어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면 “그때 비로소 화해를 위한 논의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도.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나도록, 그때 바랐던 “생산적인 논의”는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한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일관계를 둘러싼 상황은 그동안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안의 견고한 기억들”에 “화해를 지향하는 균열”을 내보려 했던 8년 전의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그 책이나 또 다른 한일관계 관련 책들(『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 공편저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등)에서 내가 중점을 두었던 것은 민족주의 비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민족주의’ 비판만으로는 한일 간의 갈등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 책의 시도가 실패한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일 간의 갈등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책은, 세월이 흘러 이제는 ‘왜 2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는지’ 를 물어야 하게 된, 그런 ‘복잡한 구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 책이다.

무엇보다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상황은 당시보다 훨씬 나빠졌다. 그리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위안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위안부’는 실은 결코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우리는 ‘위안부’에 관해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려왔다.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문제가 있을 때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야만 상황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정보에는 때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20년은 그중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취사 선택해서 들어왔고 그에 바탕해 위안부에 관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온 세월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 편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아프기까지 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편함과 아픔을 공유하려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그런 불편함과 아픔을 거치지 않고서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도 완전한 군인이지”(『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 246쪽)라고 말하는 위안부의 목소리를 듣고, 그 말이 상징하는 ‘식민지의 모순’을 직시해야 하는, 아프기까지 한 불편함.

 

불편한 일을 굳이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그 모습을 외면하는 사이에, ‘식민지배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그 모습들을 왜곡해서 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나선 이들의 대부분은 극도의 ‘혐한’감정을 갖고 있는데, 그들의 혐한감정은 특히 이 10여 년 동안 서서히 커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혐한은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 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분이 크다. 그리고 문제는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런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이 일본 사회에 급격히 늘어나는 중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혐한파뿐 아니라 한국을 잘 알고 좋아했던 이들조차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한국과 소통하기 가 힘들다고 느낀다.”(지한파 교수) 그동안 일본에게 한국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의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알고 보니 짝사랑을 한 셈이다. 이제 그만 그런 감정을 버리고 한국을 보통 나라로 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외교관) 나는 한국을 좋아하는데, 한국인들은 거짓말까지 하면서 일본을 욕하고 언제까지고 일본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이젠 한국이 싫어지려고 하는데, 어쩌면 좋은가?”(대학생)

 

말하자면 한일 양국은 20여 년의 역사 문제 갈등을 거치면서 심각한 소통부재 상황에 빠져버렸다. 외교채널조차 가동되지 못한 지 일년이 넘었고, 현재 두 나라 국민은 상대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갈등의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고, 그들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위안부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미 8년 전의 책에서 나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나름대로 ‘사죄와 보상’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일부 위안부들이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지원단체는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 우리가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 판단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위안부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국가 문제가 된 이상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지원단체나 소수의 연구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제까지의 20년 동안에는 오로지 소수의 관계자들의 생각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태도를 결정지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소수’라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들의 판단이 전부 옳거나 진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안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지원단체의 의견에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현재의 방식으로는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마도 한국의 교과서는 ‘결국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아무런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고 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일 수가 없다. 그런 이상, 나는 다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저 좋은 한일관계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동안 양국의 이해를 위해, 나아가 동아시아의 상호 신뢰회복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 온 이들이 쌓아올린 신뢰의 탑이 적대와 대립의 언어만이 난무 하는 가운데 무너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갈등을 조장하는 담론들이 마음 여린 이들을 상처 입히고, 마음을 닫도록 만드는 것을 팔짱만 끼고 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쓰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문제가 단지 ‘해결’을 기다리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한국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일본’만의 특수한 일로 생각하는 사고는 그런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평화’를 지향하는 현재의 운동이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금 도서 지정 관련 보도

성남도서관에서 나의 책들을 19금 도서로 지정한 배경을 취재해 준 기자분이 있었다. 깊이 감사드린다.

우연히도 오늘, 서울의 한 남자 고등학생 둘이 <제국의 위안부>가 “방과후수업”의 과제도서였다면서 남은 질문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었다. 고등학교 1학년. 책을 읽고 찾아온 학생중에는 최연소다.

책을 너무 좋아한다는 두 학생한테 성남시 조치 얘기를 했더니 학생들도 기막혀 했다.

아이들은 때로, 어른들을 훌쩍 앞서간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6090107263917300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6654784694765

 

건다미, 『제국의 위안부』에서 ‘동지적’ 관계 란 워딩이 씌여진 맥락

내가 이해하기로 제국의 위안부에서 ‘동지적’ 관계 란 워딩이 씌여진 맥락은 이런거라고 생각해.

초기 정대협은 정신대와 위안부도 구분하지 못했음. 피해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래서 계속 정신대와 같은 ‘공적인’ 강제동원 체계속에 위안부 문제를 증명하려고 했지만 증거가 나올리 없지. 이렇게 시간만 허비해.

정대협도 이 입장 스스로 철회한게 아니라 정신대 피해자들에게 항의를 받고서야 철회하고 사과함. 그러면 이때부터라도 위안부란 존재가 대체 무엇이었나를 제대로 들여다 보고 연구해야 하는데 전략을 바꿔서 ‘성노예’라는 개념으로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일본에 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식으로 나가지. 다분히 운동의 전략적 사고만 한거지.

하지만 이 문제가 또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정신대와의 혼동이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강제연행)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면 ‘성노예’라는 개념은 위안소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라는 걸 알려주는 여러가지 증언과 상충되는 면이 있거덩.

실제로 노예적 상황에 처해지도록 감금과 폭력으로 매일 매일 혹사시킨 직접 주체가 포주이기 때문이야. 일종의 하청관계라서 일본군이 정기적인 성병검사하는 관리차원을 넘어서서 운영에 직접적으로 구체적으로 관여한 증거도 또 없단 말이지. 오히려 위안부들은 포주로 부터의 폭압적 상황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일본군의 보호를 받기 위해 좀더 높은 지위의 군인과 연애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위안부들이 간호사역할을 하기도 하고 군인들 환송회를 가고 죽은 군인들 무덤도 돌봐주고 함께 훈련을 받기도 하고 함께 아편을 하기도 하고 같이 신세타령을 하거나 전장터에서 살아돌아 오라는 격려도 해주고…

직접 점령지에서 군인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수용된 점령지 여성들 증언에 그런 내용 있는거 봤냐? 분명 다른 면이 있거덩.

일본 우익들은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과 마찬가지로 위안소 풍경에 관련된 여러 증언과 사실을 근거로 위안부문제 자체를 부정하지.

그러면 과연 조선인 위안부는 점령지 출신의 위안부보더 더 편한 생활을 했냐 하면 또 그런건 아니여.

직접적 폭력과 강압의 주체가 다르다는 거지. 점령지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직접 개취급 노예취급을 당했다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대신 민간인 업자-포주에게 맨날 두들겨 맞고 감시당하고 감금, 혹사당하면서 개취급 노예취급을 당하고 일본군과의 관계에선 전쟁을 치루는 같은 황국의 신민으로서 ‘위안’을 해줘야 하는 애국자 역할까지 강요받은 거라고.

즉, 조선인 포주-업자와의 하청관계와 위안과 애국이라는 내면화된 국민동원 이데올로기를 통해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 사이의 직접적 폭력성을 은폐할 수 있었던 것. 그래서 그 은폐의 구조를 드러내지 않고 직접적 폭력성을 증명하는 증거찾기에만 집중하는 방식의 운동은 결국 별다른 성과를 낼 수 없었던 것.

동지적 관계란 점령지 위안부와는 다른 면 그 은폐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지. 그리고 이 개념은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함.

일본군 병사들 조차도 자신들이 점령지 여성(적의 여성)과 조선인 위안부를 명확히 구분하고 다르게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면적으로 ‘정당화’하고 있거덩. 이건 일본군을 한국군이나 다른나라 군대와 바꿔도 마찬가지여. 그만큼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좀더 구조적이고 보편적이 문제로 볼 필요가 있다는 거여.

그냥 일본군의 만행이라는 특수화된 범주를 넘어서서 여성에 대한 성적착취를 정당화시키는 ‘가부장제 국가’.. 그리고 가난한 여성이 주로 표적이 되는 ‘계급’문제등으로 봐야 하는 거지.
그래서 ‘위안’이라는 국민동원 이데올로기는 식민지 이후에도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로 재생산 될 뿐 아니라

전시가 아니더라도 ‘성매매 합법화’와 ‘공창제’를 주장하는 남성들의 의식속에서도 내면화되어 재생산되고 있지. 남성의 성욕해소에 도움을 줘서 성범죄를 예방한다는 개소리가 사실 당시의 ‘위안’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똑같은 거거든. 여성의 성적대상화가 너무도 일상적이고 당연해서 그걸 언제든 국가,민족,사회의 공적 구조로 끌여들여 정당화시키는 짓까지 한다는 거야.  (난 그래서 ‘성노예’라는 용어보다 일본군이 썼던 ‘위안부’라는 용어가 오히려 더 그 실체를 잘 드러내 주는 개념이라고 생각함.)

위안부제도를 공적으로 용인하고 정당화했던 구조적 강제성으로 문제를 접근해야 제대로 된 역사에 대한 반성도 이끌어 낼 수 있는거 아니냐. 그래야 일부 표면적인 사실관계 끌어다가 위안부 부정하는 일본우익의 논리도 씹을 수 있는 거고. 그런 논리에 휘말려 위안부 피해자들 이미 백발이 되 다 늙고 죽어가는데 직접적 강제성 증거찾고 문서찾고 그딴 헛발질로 허송세월만 보내지 말란 얘기여.

오히려 일본군이 폭력과 강압의 직접적 주체로 전면에 나서지 않았어도 어떻게 이 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고 희생될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 더 끔찍한 역사적 사실이잖아.
그런 합법적이고 공적인 구조와 체계를 만들어낸 장본인으로서 당시의 일본군-일본정부-국가의 책임, 더나아가 전국민적 의식의 차원까지 책임을 묻고 반성하게 하는게 위안부문제와 관련한 과거사 청산의 핵심이라는 생각은 안드나?

안그러면 그 정당화의 구조는 언제든지 다른 모습으로 다른 국적으로 반복될 수 있잖아.
세월호도 그저 박근혜정부 탓으로만 돌리고 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냐? 뭐 문재인이 대통령었다면 사고 예방되고 전원구조도 되고 막 그랬을 거 같아?그것도 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야 제대로 문제가 해결되는 거지. 그거랑 비슷한 이치.

물론 그렇다고 제국의 위안부가 구조적 문제를 치밀하고 꼼꼼하게 탐구했다고 보긴 어려워. 좀더 충실히 보완되어야 할 부분들도 많고 그런면에서 생산적인 비판과 논쟁이 이루어진다면 대환영.

하지만 지금 하는 꼬라지는 문맥도 제대로 파악못하고 왜곡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
이상.

작성자 : 건다미
출전 : 건다미 페이스북

0328 연구집회가 남긴 것 – 아라라기 신조(蘭 信三, 죠치대 교수)

 

1. 들어가며

2016년 3월28일에 열린 연구집회 “‘위안부’ 문제에 어떻게 마주하는가―박유하 씨의 저술과 그 평가를 소재로”(이하 0328 연구집회로 약칭)는 참가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0328 연구집회의 의미를 어떠한 위치로 정립시키느냐는 내게 있어서 상당히 어려웠으며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집회 후반의 전개, 집회 종료 후의 전개, 미디어의 보도 등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어려움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상호간에 많은 부분에서 인식을 공유하고 본래 함께 투쟁해야 하는 쌍방이 서로 비판을 하는 모습에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본 연구집회의 발기인인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씨의 노력과 의도와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사태는 움직여갔다. 그렇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연구집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른바 중간파들에게 계속해서 큰 임팩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2. 0328 연구집회의 경위

우선, 이 연구집회가 개최되게 된 경위에 대해 짚어 보도록 한다.

박유하의‘제국의 위안부’가 2013년에 한국에서, 2014년에 일본에서 간행되자 일본에서는 바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간행 1년 후인 2014년 6월에 한국에서 민사소송이 제기되었며 같은 해 11월에 검찰청에 의해 불구속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 특히 검찰 기소를 우려하여 2015년 11월26일에 미국과 일본의 54명이 ‘박유하 씨 불구속 기소에 대한 항의성명’을 발표하여 한일 양국 사회에 임팩트를 던져 주었다. 그때 본 연구집회의 발기인인 도노무라 마사루 씨는 성명에 찬동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을 했었는데, 또 하나의 액션으로서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의 연구집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제1탄으로‘위안부’문제와 박유하 씨를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는 두 그룹이 토론의 장을 공유하고 상호간의 의견을 서로 이야기하는 획기적인 장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0328 연구집회가 실현되게 된 대략적인 경위이다.

도노무라 씨와 오랜 기간 공동연구를 계속해 오면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일찍이 도노무라 씨에게 이 이야기의 제안을 받아 전면적인 협력과 전면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도노무라 씨가 김부자, 나카노 도시오(中野敏男), 양징자, 정영환 씨들과, 그리고 또 한 축의 당사자인 니시 마사히코(西成彦), 모토하시 테츠야(本橋哲也) 씨들과 대화하는 과정을 지켜봐 왔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이고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는 포기 직전까지 갔었으나, 도노무라 씨의 끈질긴 협상과 양쪽의 대표(본 연구집회의 실행위원이 됨)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0328 연구집회는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당초의 경위도 있고 도노무라 씨가 부탁하기 쉽다는 이유로 연구집회의 사회를 맡게된 나는, 서로 다가갈 수 있는 집회가 될 수도, 결렬로 끝날 수도, 획기적인 집회가 될 수도, 최악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떠올리면서0328 연구집회에 임했다. 조선근현대사의 전문가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 씨와 공동 사회였는데, 나는 여하튼 연구집회가 무사히 개최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으며, 그런 기회에 양쪽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의 상이점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었으며, 또한 바라건대 다음 집회에 대한 단계를 시사하고 끝내는 것이 세 번째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노무라 씨가 여러가지로 꼬여있는 이‘위안부’문제라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이번 한 번 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논의를 통한‘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지향하고, 박유하 씨를 둘러싼 인식과 행동의 상이점을 풀어내는 실마리를 지향하는 제 1탄이 본 연구집회였다.

13시 오픈, 130명 정원의 회의장은 거의 꽉 차 양 옆쪽으로 의자를 임시로 설치했는데 이 자리도 거의 차서 연구집회에 등록한 참가자와 매스컴 관계자들로 회의장은 만원을 이루었으며 잠시 후 시작되는 연구집회에 대한 주목과 기대감으로 회의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13시반에 시작되어 도노무라 씨의 개회인사에 이어 양쪽 보고자와 코멘테이터의 보고와 코멘트가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앞에 나와 발언한 전원이 일본군‘위안부’문

제가 식민지 지배와 제국 일본의 근원적인 책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대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이에 아무런 인식의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박유하 저‘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문제의 이해에 공헌한 의의를 강조하느냐, 그 작품의 결점을 가차없이 비판하느냐로 입장이 확실이 갈렸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던 양쪽을 같은 테이블에 앉게 한 도노무라 씨의 의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양쪽의 보고는 각자의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양쪽 다 훌륭했다. 직접 보고를 들으니 재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여기서 특필할만한 것은 박유하 씨가 검찰에 기소된 것에 대하여 “본래 바라는 바가 아니다.”라는 점에서 양쪽 모두 일치했다는 점이다.

나는 박유하 씨를 비판하는 발언자의 보고를 듣고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 한가지 점이 가장 강하게 와 닿았다. 그렇구나, 바라는 바는 아니었구나 라고. 물론 내가 박유하 씨와 공동연구를 하고 있고 성명에도 서명을 한 사람으로서 이런 부분에 지나칠 정도로 감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후 휴식시간을 갖고 사회를 맡은 이타가키 씨와 내가 문제들을 정리하고 지정 토론자가 각각 5명씩 연단에 올라와 의견을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여기까지는 양쪽이 얼굴을 마주대고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의 상이점을 서로 확인한다는 두 번째 목적은 실현되었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는 마지막 종합토론에서 다음 단계를 향한 나름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느끼게 했다. 입장이 다른 양쪽이 확 접근을 한 분위기가 있었다, 고 나는 그렇게 느꼈다. 단, 내 안에서 ‘희망’이 ‘욕심’이 되어 양쪽에서 몇 명만 대표로 나와 마지막 논의로 향한다는 시나리오를 순간적으로 생각했던, 시간은 17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양쪽의 의견을 들은 결과 마지막으로 무엇을 논해야 하는가, 과제는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고 싶어서였다. “다음 일정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까 연단에 오를 수 없다.”라고 하는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씨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서 앞에 나와 말씀을 들었다.

니시, 우에노 씨와 양, 정, 오노사와 아카네 씨의 양쪽을 대표하는 논객이 연단에 올라 마지막 논의가 이루어졌다. (검찰청에 의한) “기소를 취하할 수 없는가”라는 우에노 씨의 과감한 발언으로 (이는 본래 박유하 씨를 지원하는 성명파(声明派) 모두가 생각하는 바였지만) 회의장은 어수선해졌고, 마지막으로 모토하시 씨와 나카노 씨의 총괄 시간으로 넘어갔으나 대립점이 표면화되면서 사회자인 도노무라 씨를 비롯한 실행위원 분들에 대한 감사나 등단해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도 표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다음 집회에 대한 단계를 제시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했다.

3. 증언에서 이야기로 -0328 연구집회의 하나의 과제

마지막 장면에서의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과 사회자의 불찰로 인해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 했으며, 무엇보다도 눈 앞에 보였던 큰 성과마저도 우리의 손 안에서 빠져나감으로써 나는 망연자실했으며, 폐회 후에도 자책감에 빠졌다. 마지막 장면의 자초지종이 납득이 안 갔다.

그러나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리고 양쪽의 의견에 순순히 귀를 기울였던 이른바 중간파 청년으로부터의 열의가 가득한 감사의 메일에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 연구집회에서 ‘얻은 것’을 더 제대로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하튼 양쪽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논의를 한다고 하는 당초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므로.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될 것이므로.

 

이 연구집회를 바탕으로 한 제 2탄이라고까지는 자리매김할 수 없으나, 0328 연구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올 9월4일에 일본 오럴히스토리 학회에서 ‘전시 성폭력과 오럴히스토리’라는 심포지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심포지엄의 등단자의 대부분이 이 연구집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강한 임팩트를 받고 있다. 원래 이 심포지엄은 작년 가을부터 준비가 진행되어 오히려 본 집회보다도 먼저 기획된 것인데, 0312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열린 전시 성폭력에 관한 비교연구적 심포지엄과 본 연구집회를 경험하는 가운데, 이 두 개의 논의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집회는 1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도노무라 씨의 액션은 이어져 나갈 것이다.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전시 성폭력과 오럴 히스토리’라는 심포지엄이 이어받을 논점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즉, 본 연구집회에서도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가 ‘당사자의 이야기’로서 ‘특권화’되어 보고되었는데, 그 증언으로서의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도 나약한 것이었다. 현재의 오럴 히스토리 연구의 수준으로 말하자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다양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면적인 ‘이야기의 장’이나 사회적 문맥으로서의 ‘이야기의 자기장’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다고 이해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랜 운동과 법정 투쟁을 겪으면 당사자의 이야기는 그 운동과 운동체 안에서 규정되어지며(이것은 소위 ‘재판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국 사회의 모델 스토리(일종의 동형적(同型的)이고 표준화된 이야기)에 의해 규정되어진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때, 그곳’에서의 과거의 사건에 관한 이른바 ‘증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곳에서’의 사회적인 문맥으로 규정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거의 체험은 복잡하며 다양한 문맥들이 폭주하고 있다. 다양한 장면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체험자의 해석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때, 그곳’에서의 과거의 사건은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각이 생겨날 수 있으며(이른바 ‘라쇼몽(羅生門)적인 현실’), 그 이후의 전후에 놓여진 상황(이를 전후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속에서 그 해석이 바뀔 수 있으며, 특히 재판의 이야기가 주류가 되면 아무래도 이에 규정을 받게 된다. 지금은 이러한 시각은 오럴 히스토리 연구에서 구축주의 뿐 만 아니라 실증주의도 공유하고 있는 시각이다. 즉, 확고한 부동(不動)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 이야기 속의 다성성(多声性), 이야기의 변화를 어떻게 들어내고 읽어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아라라기 신조(2015)「오럴 히스토리의 전개와 과제」『이와나미강좌 일본의 역사 제21권 사료론』이와나미쇼텐)

 

박유하 씨의 작업의 획기적인 점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건져내어 한국사회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모델적 스토리를 상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평가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오키나와전투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도 ‘당사자의 증언’의 진위가 실증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문제화되었던 경위가 있다. 이 논쟁에 바탕을 둔 도베 히데아키(戸邊秀明) 씨의 최근의 작업(도베 히데아키(2105)「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이 오늘날에 있어서 촉구하는 것」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편저『기억과 인식 속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이와나미쇼텐, 2015)에서 이러한 점이 훌륭하게 해부되고 논해졌다. 오키나와전투와 ‘위안부’ 문제의 문맥은 물론 크게 차이가 있지만 도베 씨가 제시하는 시점은 “당사자의 증언 또는 이야기”에 의거한 논의에 있어서 크게 참고가 될 것이다.

 

박유하 씨의 작업은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큰 장점과 큰 결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박유하 씨의 논의는 운동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수정주의자)에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박유하 씨를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 내용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그러나 요시미(吉見)・우에노(上野) 논쟁 때에도 방법론적으로 실증주의가 구축주의가 의견이 맞지 않았으며, ‘역사의 재심(再審)’과 ‘역사의 수정’은 표리의 관계에 있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식민지 지배는 범죄였다고 규탄하면 끝날 정도로 ‘역사의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 사실 이러한 점에 수정주의자가 현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가지게 된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시점을 바꾸면 궁극적으로 “식민지 지배 속에서의 주체성은 단어의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 주체적인가”라는 어려운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거시적인 의미에서 식민지 지배의 죄는 명확하다. 물론 이 연구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수정주의자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 하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보다 더 좋은 삶의 방식, 보다 더 좋은 생활을 지향하며 노력을 한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아이들은 천지난만하게 노력을 하며, 세상살이에 익숙한 어른들은 수단으로서 노력도 한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일종의 ‘주체성’을 식민지 지배라는 큰 틀에서의 ‘몸부림’ 밖에는 안 된다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가? 거시적인 규정성(規定性)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mesolevel)의 상황들을 꼼꼼하게 봐 가는 것이 식민지 지배를 생각하는 시점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의 진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 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 씨는 수용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0328 연구집회에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식민지 지배라는 시스템이 지니는 복잡함과 교활함에 입각한 치밀한 논의의 장이었다. 그러나 0328 연구집회는 강한 임팩트를 남겼으며 적어도 다음 심포지엄에 강렬한 자극과 숨결을 남겨주었다. 도노무라 마사루 씨의 ‘만용’은 계속 살아 있으며, 나는 적어도 계속 살아 있게 할 것이다.

0328 연구모임 – 센다 유키(千田有紀, 무사시대 교수)

센다 유키(千田有紀)

 

아라라기 :그럼, 이제 지정토론자 두 분만 남으셨는데, 젠더 연구의 주역을 맡고 계신 센다 유키 씨 부탁드리겠습니다.

 

센다 유키:센다 유키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코멘트에 관한 제안이 왔을 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망설였습니다만, 저는 예전에 외국어대학교에 근무를 했었는데 B쪽에 앉아 계신 분들과 함께 연구를 한 적도 있고, 또 그런 가운데 박유하 씨와도 함께 프로젝트를 했었던 경험도 있어서 말씀을 좀 드려야겠다 싶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이 종군 ‘위안부’ 문제에 접하게 된 것은 1991년 할머니께서 커밍아웃하시기 전에 대학시절인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저와 성이 같습니다만, 센다 가코(千田夏光) 씨의『종군위안부』문고판을 읽고 종군 ‘위안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유하 씨도 센다 씨의 책을 인용하고 계신데, 저는 오히려 센다 씨의 책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굉장히 강렬한 위화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역시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기술되어 있는 부분에서, 일본인 ‘위안부’는 창부였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공창제도 하에 있었던 일본인 ‘위안부’는 나이가 좀 든 여자이며 성병을 가지고 있었고 창부였다는 식으로 상당히 모욕적인 기술을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인 소녀들은 젊은 처녀의 소녀들이 연행되어 왔기 때문에 가엾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방금 전에 김부자 씨도 말씀을 하셨지만, 사실로서 젊은 여자아이들이, 소녀들이 징용되었다는 사실이 존재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때 역시 그 피해를 강조할 때, 그럼 일본인 ‘위안부’는 성병이 있고 창부였으니까 괜찮다, 나이가 든 여자들이었다 라는 식으로 멸시하는 형태로 종군‘위안부’를 이야기해도 좋은가 라는 의문이 계속 제 안에 남아 있고, 확실히 해소가 되지 않는 제 안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니시노(西野) 씨나 오늘도 팸플릿이 있습니다만, 방금 전에 발표하신 오노자와(小野沢) 씨나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연구가 진척이 되고 있다는 점은 제 자신에게 있어서 굉장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역시 세계대전 전의 공창제도 하에서 창부가 되었던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특히 쇼와공황 후에 생계가 어려워진 동북지방에서 팔려온다거나, 팔려온 소녀같은 사람들이 공창제도 하에서 창부가 되었는데, 이러한 일본인 ‘위안부’에 관해서도 저는 깊은 문제점과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종군위안부’ 문제가 문제화된 이후에 추궁하려 하면 오히려 말을 못 하게 되었다고 할까, 일본인인 당신이 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 말하는가,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식민지주의의 문제라는 식으로, 제 자신의 문제의식이 소거되어지는 점과, 같은 ‘위안부’여도 일본인 ‘위안부’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식의 언설이 있다는 데 대해 계속 위화감을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 자체는 해소된 것 같으므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제 자신은 아까도 나왔습니다만, 모델적 피해자 같은 것을 만들지 말고, 나이가 어리다든가 처녀라든가가 아니라, 역시 어떠한 형태이든 ‘위안부’라는 제도가 비참했다 라는 형태로 이야기가 문제화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박유하 씨의 이 책이 문제가 없다라든가, 하자가 없다라든가, 역사 자료들을 꼼꼼히 다뤘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문장도 좀 더 뭐랄까 기술방식이 상당히 거칠다는 여러분들의 생각은 물론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바탕 하에 평가를 한다면, 역시 폭력의 문제의 복잡성이라는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조선인 업자들이 상당히 직접적으로 조선인 ‘위안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는데, 폭력을 휘두르는 형태로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원시적(primitive)이며 지배로서는 파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면 말을 듣게 하지 못 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의 문맥에서도 포스트 구조주의 이후에 지배로서는 파탄되었다고 봅니다. 오히려 보다 더 교묘한 폭력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증언집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눈치를 보는 식으로 이런 행동을 하면 마음에 들어해 줄 지도 모른다는 형태로 상대방의 눈치를 보는 것, 이러한 것이 보다 더 교묘한 지배이며, 또한 한 단계 위의 지배라는 것은 자발성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눈치를 보지 않더라도 스스로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 라는 형태로 주체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가장 비참한 지배의 완성형으로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황민화 정책 하에 일본인으로서 자신이 국가에 봉사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박유하 씨는 모두가 그러한 동지적 관계라든가, 애국적이라는 기술을 하고 있는 인상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 라고는 단언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것 자체가 실로 비참하며,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러한 것 자체가 비참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하나로 결속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최근 10년,20년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만, 제 자신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많이 망설여집니다만, 마찬가지로 민족도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하나로 결속된 존재는 아니며, 박유하 씨가 업자의 문제를 다룬 것 자체도 중요한 문제 제기이고, 그러한 것 자체가 국가의 책임을 면책하는 것은 물론 아니며, 오히려 같은 민족 하에서 그러한 폭력적인 관계, 이해관계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식민지주의의 비참함을 두드러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저는 이러한 논의는 논의 자체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을 하며, 여러분들도 거듭 말씀을 하셨지만, 형사라든가 민사라는 그런 장소가 아니라, 이렇게 열린 장소에서 제대로 논의를 해 가는 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겠습니다.

논의를 깊게 하고 싶은 일 – 와카미야 요시부미(전 아사히 신문 주필)

연구 집회에서 다양한 주장을 듣고 큰 공부가 되었으나, 동시에 논의가 상당히 어긋나는 안타까움이 쌓였다. 네 가지 관점에서 감상을 적어 두고 싶다.

 

(1) 왜 어긋났을까?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쪽은 오로지 박유하 씨가 든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사실과 인용의 ‘잘못’을 집어냈다. 지지자들은 그러한 사안에 대한 의견 개진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저서의 ‘전체적인 의의’를 강조했다. 반대로 비판하는 쪽은 박유하 씨가 던진 근본적인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공격으로 일관한 감이 있었다. 이렇게 엇갈림이 이어졌다.

우선 집회는 말하자면 박유하 씨가 없는 ‘결석재판’으로 개개의 사항까지 그녀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비판에 반론하든, 혹은 해당하는 부분이 있다면 정정하든지 해서 박유하 씨의 솔직한 변을 듣고 싶다.

반대로 ‘모두 잘못된 날조본이다’라는 비판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극단적이며 설득력이 떨어진다. 박유하 씨가 던진 근본적인 의문은 왜 위안부 문제가 여기까지 장기화하고, 해결이 막혀 왔는가에 있다. 일본 정부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상당수의 위안부가 받은 아시아 여성기금을 지원단체가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수령을 막는 것 만으로 된 것일까? 또 박유하 씨가 일본이라는 국가에 ‘법적 책임’은 없다고 한 점에 대한 논의는 많이 있어서 좋은데, 그럼 일을 직접 착수한 업체는 국가에 의해 조종됐다는 것만으로 책임은 없는가. 박유하 씨의 문제제기를 ‘일본을 면책하는 논리’라고 단정하지 말고 연구 집회에 어울리는 토론을 하길 바랬다.

 

(2) ‘동지적 관계’였나?

비판 중 하나는 병사와 위안부 사이에서 한정적이든 간에 ‘동지적 관계’였다고 한 박유하 씨의 담론에 집중됐다. 이것은 주디스 허만이 『트라우마』에서 지적한 ‘피감금자가 고립됨에 따라 감금자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해져 간다’는 현상으로, ‘동지적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었다. 이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현상으로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귀중한 지적이었다고 본다.

다만, 모처럼이었으니 좀 더 깊은 논의가 있기를 바랬다. 병사들은 단순한 ‘감금자’였을까? 그들도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에 동원된 피해자(피감금자)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더구나 거기는 전쟁터다. 잘못하면 부대가 모두 적의 공격에 처하기 쉽고, 병사도 위안부도 생사를 같이 하는 운명이다. 위안부에게 있어서도 결정적인 적은 외부에 있었다. 그런 열악한 처지에 있는 병사들에게 여성들이 민족의 벽을 넘어 인간으로서 약간의 동정이나 공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도 아닐 것이다.

애당초 일본군 병사 중에는 조선 출신도 있었는데, 아무리 차별이 있든 그들이 전쟁터에서 일본인 병사와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위안부와 병사의 관계도 그와 닮은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위안부가 상대를 한 병사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 이러한 구조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커다란 죄악, 그리고 여성의 비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박유하 씨가 ‘동지적 관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해석했는데, 틀린 것일까? 다음 기회에 논의를 깊게 하고 싶다.

 

(3) ‘자발적’이었나?

부끄러운 일인데, 70-80년대 한국에는 ‘기생 관광’이 성행하여,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많이 방문했다. 일찍이 서울에서 유학한 나는 젊은 여성을 뻔뻔하게 호텔로 데리고 들어가는 남자들을 보면 외면하고 싶어졌다. 여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러나 그녀들은 업자에게 지배당하고 임금을 빼앗기는 존재였지만, 공권력에 강요당한 것은 아니었다. 심각한 가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음에 틀림없고, 본래의 의미의 자유의지는 결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물리적인 강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자발적’이었다. 이것도 슬픈 현실이다.

식민지 시대에 이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이 있었다 것은 틀림없다. 가난도 남존여비의 풍조도 보다 심한 시대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지 못한 그녀들은 ‘어차피 해야하면’이라고 모집에 응해서 전쟁터로 간 예도 있었다. 박유하 씨는 그러한 현실에 눈을 돌리고, 모든 ‘소녀를 강제로 데려 갔다’는 것처럼 보는 시선이 부자연스럽다고 지적. 더욱이 그녀들이 ‘자발적’으로 모집에 응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 구조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해석도 틀린 것일까?

 

(4) 명예를 훼손했는가?

박유하 씨 기소에 대해서 ‘이 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됐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항의 성명을 한 점에 대해 ‘소송한 위안부들의 마음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항의글이 오해를 주었다면 유감이지만, 명예 훼손은 당사자의 ‘기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박유하 씨의 책으로 그녀들의 마음이 다쳤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킨 저작의 역량 부족을 물어도 좋다. 그러나 정말로 ‘명예’가 훼손되었는지의 여부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항의 성명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위안부 분들의 슬픔의 깊이와 복잡함’을 느낀 사람이 많고 일본에서 자유주의로 불리는 사람들이 큰 공감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더붙여 말하자면, 박유하 씨의 책은 위안부에 다양한 케이스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 원고인 각각의 여성들에 대해 ‘이렇다’라고 쓴 것이 아니다. 명예훼손으로 재판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을 둘러싼 논의는 많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언론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며 재판을 하고, 특히 형사 처벌까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비판하는 파가 그 논의를 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형사 처벌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아쉬웠다.

『제국의 위안부』가 여는 것 – 가노 미키요(게이와가쿠엔 대, 여성사・젠더사)

‘박유하 씨 기소에 대한 항의 성명’에 불민한 나도 <저명한 문화인>에 섞여 이름을 올렸다. 성명 발표 후 여러 친구로부터 전화와 메일을 받았다. 모두 『제국의 위안부』에 비판적이고 고소의 <정의>를 확신했다. 연락을 해 준 건 나의 무지를 염려해서였던 것 같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박유하 씨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걸 느꼈다.

3 월 28 일 연구 집회는 논의가 맞물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각각의 발상의 차이를 확인했다는 건 스타트 라인으로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늦었지만, 내가 왜 성명에 이름을 올렸는지 염려해 준 친구들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여기에 써 두고 싶다.

 

  •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훼손’에 대해서

‘항의 성명’에는 ‘이 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됐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쓰여져 있다. 명예가 훼손됐는지 어떤지는 당사자가 정할 문제이니, 이 표현은 문제가 될 거라고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올린 건 ‘명예훼손’이라는 말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왜 전작 『화해를 위해서』 는 문제가 되지 않고, 『제국의 위안부』는 됐는가 하는 점이다. 고소를 한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은 『제국의 위안부』의 ‘자발적 매춘’이나,  일본 병사와의 ‘동지적 관계’, ‘애국’이라고 기술한 부분에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은 『화해를 위해서』의 「위안부」 장에도 있다.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당시의 일본이 매춘을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 온 여성도 당시 일본이 군대를 위한 조직을 발상했다는 점에서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헤이본샤 라이브러리판 p90, 역자 주: 이 부분은 『화해를 위해서』 한국어판(뿌리와이파리)에서 발췌)

「그들이 ‘일본인’으로서 ‘애국’하기 위해 갔다면, 그것을 구조적으로 종용했다는 의미에서 더욱 ‘일본의 책임’이 커질 수밖에 없다」 (헤이본샤 라이브러리판 p91, 역자 주: 이 부분은 『화해를 위해서』 한국어판(뿌리와이파리)에서 발췌)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 의 취지 그 자체이다. 왜 같은 취지이며 표현인데 『화해를 위해서』는 명예훼손을 묻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답은 단순한 것 같다. 1월에 일본에 방문한 나눔의 집 소장에 따르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의 해당부분을 수 차례 읽어 드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3 · 28 집회에서 양징자 씨가 발언한 것처럼, ‘거짓말과 속임수를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꿰뚫어 본’(자료집 p63)다는 그들이, 읽어주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을 것이다.

또 하나, 의문이 든 이유가 있다.  20 년 전, 모리카와 마치코 씨가 구성하고 해설한 『문옥주  버마 전선 방패 사단의 ‘위안부’였던 나 』(나시노키샤(1996), 증보 신장판(2015))는 뛰어난 여성 문제 연구서로 제 16 회 야마카와 기쿠에 상을 수상했다. 나는 수상 심사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추천했는데, 반대도 있었다. ‘운동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지 않을까’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 운동의 주류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의해서 ‘위안부 = 성 노예’라고 정의되어 국가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된 문옥주 씨의 ‘위안부’ 생활은 ‘성 노예’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았다.

문 씨는 일본 노래를 외우는 등 일본 병사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인기인이 되어,  랑군 시장에서 하이 칼라 옷과 보석을 구입하거나 큰 돈을 저축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일상이 비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 상병 야마다 이치로와의 <사랑>은 문 씨에게 얼마나 구원이 되었을까? 그는 문 씨에게 청혼하며 조선인이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고상하고, 상냥하고, 익살스럽고, 지혜로웠다고  50 년이 지난 후에도 문 씨는 거리낌없이 야마다를 칭찬한다.

이러한 문 씨의 모습에 나는 감동했다. 어떤 가혹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생존 전략을 구사하고 정체성을 찾으며, 사랑을 키우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예를 훼손하기는 커녕 자랑할 만한 일처럼 보인다.

 

  • 『제국의 위안부』가 여는 것

그러나 물론 문옥주 씨의 예를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 책은 ‘위안부 문제’ 를 부정하는 논거가 되고 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저금 센터 원부라는 공문서에 남은 문 씨의 다액의 군사우편 저금을 가지고 ‘역시 위안부는 막벌이 창녀다’라는 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염려한 대로 운동의 발목을 잡게 됐다.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이 ‘명예 훼손’이라고 한 것도 이런 견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옥주 씨의 필사적인 생존 전략은 ‘위안부 문제’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고, ‘성 노예’에서 <특권적>인 일본인 ‘위안부’까지 다양한 ‘위안부’를 감싸 안는 큰 틀 ーー. 박유하 씨가 사념을 집중한 ‘제국의 위안부’라는 관점은 여기에 연결되는 게 아닐까. 3 · 28 집회에서 요시미 요시아키 씨는 업자의 책임보다 군의 책임 쪽이 무겁다고 말했다. ‘박유하 씨는 이같은 구조적인 인식이 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자료집 p71). 그러나 박유하 씨의 ‘제국의 위안부’는 군대도 통합 식민지 지배라는 큰 구조를 묻고 있다.

‘제국’이라는 틀을 세울 때, 영역 내의 <민족>의 경계는 모호하다. 특히 전시 하의 ‘대일본제국’은 ‘내선 일체’를 내걸고 조선반도의 ‘황민’화를 도모했다. 물론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차별은 있다.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사이에도 분명한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인 ‘위안부’가 ‘초센초센(조선, 조선)이라고 바보 취급 하지마, 텐노헤이카(천황폐하)는 같다’라고 대꾸 못할 건 아니었다.

<민족>의 경계는, 젠더 관점을 넣어 보면 더욱 까다로워진다. 1925 년의 보통 선거법은 여성을 배제했지만, ‘내지’거주 식민지 남성은 참정권을 받았다. 참정권은 ‘권리 중의 권리’이며, <국민> 권리 중  가장 큰 권리라고 한다면, 일본 여성은 <국민>이 아니었지만, 재일 조선 남성은 <국민>이었던 것이다. ‘제국’에게 식민지 가부장제 이용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패전으로 인한 ‘제국’의 해체로, 그것은 역전됐다. 일본 여성은 <국민>으로, 식민지 남성은 <비국민>으로. <민족>의 경계가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올해 4 월 매스 미디어는 ‘여성 참정권 70 년’을 보도했지만, 동일한 선거법 개정으로 식민지 남성이 참정권을 박탈당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헌데 ‘위안부’에 맞추면 <민족>의 차이보다도 젠더의 문제가 된다. 가혹한 전선에서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 병사의 <민족>을 넘은 ‘동지적 관계’가 성립해도 전후의 처우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일본군 병사는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고, 살아 남으면 연금도 지급된다. 그러나 ‘위안부’는 연금은 커녕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혀 가족과 고향조차 잃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인 ‘위안부’도 마찬가지다. 미와 아키히로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노래부르고 있다. 「싸움에 지고 돌아 가면 나라 사람들에게/훈장 대신 침을 맞고/손가락질 당하고, 험담을 듣고/ (생략) /대일본제국 만세 만세 만세 “(「조국과 여자들」)

 

『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 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 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3 · 28 집회에서 역사학 분야로부터 실증주의적 비판이 잇따랐는데, 물론 그 점에는 이론상에서도 실천상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니시 마사히코 씨가 말한대로, 이 책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그 앞에 열리는 문제를 함께 단련해 가기를 바란다.

3.28 집회를 끝내고 –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도쿄대 명예교수)

당일날 나에게는 지정토론자의 역할이 주어졌다. 5분이라는 시간 제약 아래 충분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여기에서 설명하고 그날의 소감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로, 집필물을 법정에 세우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이 집회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뜻 있는 자들의 성명이 계기가 되어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명에 동의한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여 나의 입장은 사상이나 연구 상의 대립은 어디까지나 시민영역(이와 같은 자리의 학자 간의 의견 교환을 포함)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박유하 비판파는 형사고발의 원고가 ‘위안부’ 피해당사자라는 점을 절대시하고 있는데 설사 원고가 고소를 해도 기소에 이르기까지는 검찰권력의 의사결정이 수반하게 된다. 당사자가 ‘상처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사직 당국이 ‘명예 훼손’ 판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은 판정을 검찰이라는 행정권력이 행사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리고 검찰이 ‘명예훼손’이라 판정을 내린 데 대하여 그 판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판단이 엇갈리는 연구 상의 견해를 사법적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명’이 당사자의 고소에 대해서가 아니라 검찰의 형사 기소에 대하여 발표된 것에 주의해야 한다.) 많은 연구자가 동의하리라 생각되는 이러한 최소한의 동의조차 이룰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고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집필물의 저자를 형사 피고인으로  법정에 세움으로써 본인이 받게 될 사회적, 심리적 타격의 심각성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렇게 당해도 당연하다는 듯이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징벌적인 태도에도 커다란 위화감을 느낀다.

둘째로, 이 책의 평가에 대하여. 분명히 이 책에는 비판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같은 문제점이 많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설혹 형사기소에 반대를 하고 있어도 이 책에 대해 전부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집회에서도 문제로  지적된 ‘동지적’, ‘애국적’, ‘자발적’이라는 단어의 쓰임에 대해서는 오해를 초래할 표현과 허점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맥으로 판단한다면 ‘구조적 폭력’ 아래에서 ‘동지적이라고 간주되는’이라든지 ‘강제된 자발성’으로 읽을 수 있음은 저자가 이 책 전체에서 거듭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다. 정영환씨의 해석처럼 ‘업자  주범・군 종범설’이라는 주장으로는 도저히 읽히지 않는 것은 문맥을 통해서 봐도 분명하다. 또한 인용 의 하자를 가지고 이 책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내 견해로는 이 책의 평가해야 할 점은 ‘제국’, 즉  식민지 지배의 죄를 전면에 끌어낸 데 있다. 그것은 조선인‘위안부’문제에  일반적인‘전시하의 성폭력’의 문제로 해소할 수 없는 ‘식민지 지배’의  특수성이라는 차이를 가지고 들어 온 데 있다. 일본 전통의상, 일본식 이름, 일본어 사용을 강요 당한 조선인‘위안부’는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일본인 여성의 대체물’이었으며 그런 뜻에서 일본군의 ‘동지’적인 입장에 있었으며, 전쟁터에서는 피점령자와 연합군으로부터 ‘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오히려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과거 이상으로 엄격하게 추궁하고 있으며, 이 책을 평가하는 많은 일본인 지식인은 그러한 지적을 엄숙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비판자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

‘전쟁의 성폭력’ 비교사가 전망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강간, 매매춘, 연애에 이르는 연속성과 차이를 논할 필요성이 지적되고 있다. ‘구조적 폭력 아래서  강요당한 협력관계와 공범관계’라고 하는 복잡한 상황을 복잡한 상태인 채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키나와전의 ‘집단자결’의 자발성과 강제성의 관계를 논할 수도 , 또한 조선인 일본군 병사에 대하여 논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이 책의 저자가, 오늘날 사태가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 대한 책임을  한국 내의 운동 단체에 묻고 있는 것에 대해서 나는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지적은 공정하지 않다고 공공적인 자리에서도 발언했으며 저자 본인에게도  직접 전달했다는 점을 명시해두고자 한다.

이 집회는 지금까지 함께 자리하는 일이 없었던 연구자가, 대립되는 견해를 넘어 한자리에 앉아 토론을 하는 획기적인 기회였다. ‘성명’ 동참자의 상당수는  사태의 경직성을 우려하고,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며, 또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결코 면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으며  비판파에게 문제제기 하고 다가가는 자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판파는 그것에 답하려고 하지 않은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같은 편이 될 수 있었을 지 모르는  사람들을 적으로 상대함으로써 소수자의 운동은 더욱 더 분단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우파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위안부’문제를, 온전한 ‘공론’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공동투쟁’이 필요할 텐데 원칙적인 논의를 되풀이하는 그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해결’할 생각인가. ‘다음으로 이어지는 논의’를 바라는 우리들의 생각은 실현되지 못하고, 참석자에게 허탈감만 남기고 끝났다고 한다면 대단히 유감이다.

끝으로 어려움을 딛고 이 토론 집회를 실현시켜주신 실행위원 여러분께 짐심으로 감사드린다.

3월 28일 연구 집회를 끝내고 – 도노무라 마사루(도쿄대 교수)

 

 

박유하의 논저를 둘러싸고 열린 이번 집회에 대해서는 ‘의의가 깊은 모임이었다’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 자신은 단상에서 발화된 말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발언을 기록으로 남기고 공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다. 통상의 집회나 각종 연구회 이상으로 신경이 쓰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발표자/코멘테이터/지정토론자 부탁을 들어주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실행위원회 멤버들은 상호 인식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일단은 집회를 의의 있는 것으로 실현시키겠다는 점에서 일치하여 준비에 임했다. 여러 어려운 조건을 넘어서서 간신히 집회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이외의 실행위원 4명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는 것을 감히 써 두고 감사 드리고 싶다.

그리고 역시 운영 상의 실수가 있었던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여러 가지 반성은 있지만, 박유하 비판측, 옹호측이라는 식으로 나눠 참가등록을 실시해서, 접수를 분리한 것처럼 여겨지게 한 것은 실수였다. 이것은 나의 실수다. 실제로는 ‘니시/모토하시 관계자’, ‘김/나카노 관계자’ 이외에도 실행위원회에서 협의/확인 후 도노무라가 연락을 한 ‘기타/미디어 관계자’의 등록도 있었고,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니시/모토하시 관계자’ 중에 ‘박유하씨의 논저와 관련하여 평가가 나뉘는 것에 대해서 자기도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에 공부할 생각으로 왔다’고 하는 사람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다.

나 자신은 당일 말한 것처럼 ‘회색파’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비판의 형태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박유하의 언설은 새로운 역사수정주의라고 하며, 그녀의 저작을 완전히 부정하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서 내쳐버려도 될까, 비판한다 하더라도 박유하의 논리를 바탕으로 식민지주의 비판의 논의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 니시 마사히코씨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다만, 니시쪽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2015년 11월 26일의 박유하 기소에 대한 항의성명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과 박유하를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니, 전자는 ‘위안부’ 피해자나 그녀들을 지원하는 운동과의 접점을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반면, 후자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느껴졌고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얼마 전에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피해자와 관계를 맺고 활동해 온 사람들이 박유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이번 연구 집회를 발안한 이유 중 하나다(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경위는 있지만 생략한다).

회장에 있었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 집회에서는 박유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발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우세’한 분위기가 있었다. 분명히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하여, 사료를 원점에서 찾아보고 문제점을 밝힌 작업은 의의가 있고, 그것을 위해 들인 노력에도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오랜 세월 ‘위안부’ 피해자들 옆에서 그녀들과 함께 운동을 전개해 온 양징자의 코멘트에는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느끼고 있던, 박유하에 대한 비판의 형태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역사 연구자니까, 역사 연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아래에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확인 차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역사 연구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위의 입장,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오히려 역사학이 잘 못하는 영역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내가 역사 연구 분야에서 만큼은 어느 정도 전문가 그룹으로 인정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위안부’를 둘러싼 역사 연구는 그것이 커다란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1990년대 초반부터 생각해 보면, 상당히 진전됐다. 당시 중요한 논점 중 하나가 된 것은 일본 국가의 관여였고(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이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리고 다녔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고, 김학순씨가 피해자라고 밝히고 나서면서 ‘위안부 문제’가 쟁점화된다. 이러한 경위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실증이 정교하고 치밀하게 쌓아 올려졌다. 그리고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우파의 허위 선전에 대항하는 형태로 폭력성, 자유의 박탈도 다시금 강조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위안부’ 연구에 돌입하고자 하는 역사 연구자도 없었고, 애초에 그것이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현재까지 많은 사료의 발굴에 노력하고 사실을 해명해 온 연구자들, 시민운동 관계자들은 정말로 훌륭한 일을 해냈으며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에 의한 강제가 있었다는 것, 알기 쉬운 물리적 피해가 강조되어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면 그것만 문제인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되고 만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 역사 연구자가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며, 직접적인 국가에 의한 폭력의 배경에 있는 모든 사실과 현상도 시야에 넣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조선사 연구회나 역사학 연구회 등의 모든 단체에 의한 2015년 5월 25일자 성명에서는 ‘최근의 역사 연구는 …… ‘위안부’ 제도와 일상적인 식민지 지배/차별 구조와의 관련도 지적’해 왔다고 하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역사 연구의 성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충분한 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널리 시민들에게 알려져 있을까? 여전히 ‘위안부’ 피해는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나 물리적인 폭력을 언급하여, 이렇게 끔찍한 사실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오지 않았는가?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반론도 그런 식의 것이었거나, 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긍정적 평가 중 하나는 그런 이야기 방식을 넘어서서 식민지 지배의 심각성을 논하려고 한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 책에 대해, 구조적 강제성을 논하고 있다(아사노씨), 식민지의 문제 전체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우에노씨)라는 평가나,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폭력의 심각성을 지적한 발언(센다씨)도 그러한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위안부’ 문제나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온 역사학자라면 이러한 상황을 앞에 두고 일단은 자신들의 ‘협량’, ‘역부족’을 자각(고통를 동반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역사학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즉, 문학연구자인 박유하가 할 수 없었던 형태로, 국가가 직접 관여하지 않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일상적으로 존재한 식민지 사회의 실태,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위안부’들의 피해를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 이외의 시민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지혜를 짜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한 논저를 다수 세상에 내보내는 일, 이 일이야말로 ‘위안부’ 문제, 식민지 지배 문제를 연구 테마로 하는 역사 연구자들에게 요구되는 임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식민지 지배 중 일본의 가해에 대해 자주 우파 쪽은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는 없었다, 민간에 의한 임의의 행위였다, 자발적 활동이었다라는 것을 들어 국가의 책임을 면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식민지 지배의 반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민운동가들이나 역사 연구자들의 반론은 많은 경우, 실태로서 현저한 인권침해가 있었고 그렇기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 실태로서 국가가 관여했다는 식의 사실 제시다. 예를 들어, 노무 동원과 관련하여 우파에서 ‘징용’과는 다르다, 따라서 나라에 책임은 없다라는 말을 하면, 이에 대한 반론은, 모집이나 관의 알선으로 온 노동자도 똑같이 노예 노동에 종사시켰다, 요원 확보에는 경찰이나 말단 행정 공무원이 관계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는 창씨개명과 관련해서도, 우파에서 신고제였으며 강제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그에 대한 반론은 다양한 압력이 가해진 결과로서 많은 신고가 있었던 것이라는 식이다(엄밀히 말하면, 법정창씨라는 제도가 있어서 법적으로도 강제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미즈노 나오키씨나 고 김영달씨의 연구를 참조하길 바란다).

이러한 반론은 필요하고 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으로 일관할 경우,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강제가 아닌’ 것이 가지는 의미와 그로부터 발생된, 지배 당하는 민중의 고통은 시야 밖에 놓이게 된다. 위의 예에서 말하자면, 국가의 행정 명령으로 어떤 사업소에서 일할 것을 강제=징용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가능해지는, 노예적인 노동의 간과나 국민 보호의 부재 같은 국가의 ‘책임 회피’는 문제에서 빠지게 될지도 모르고, 창씨를 신고할지 말지를 두고 생기는 조선 민족 내부의 균열이나 자신이 직접 신고하여 이름을 바꿈으로써 느꼈을 자책감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위안부’와 관련하여 생각해도, 국가가 행정 명령을 내서 군인에 대한 성적 위안을 명령한 것은 아니다(징용 명령서로 그것을 명령한 것도 아니고, 국가총동원법의 조문을 통해서도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더러운 일에는 국가가 관여하지 않으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는 국가의 비열함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피지배 민족 내부에 복잡한 고통을 발생시켰다. 이렇게 생각하며 ‘국가에 의한 강제는 아닌’ 것의 문제성을, 물론 ‘실태로서의 국가에 의한 강제’를 지적함과 동시에, 이야기해 가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상,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고, 식민지주의의 문제를 보다 깊게 생각할 때 참고가 되길 바라며 이야기해 보았다. 집회 운영상의 문제도 포함하여 기탄 없는 비판을 부탁 드린다.

 ‘서발턴(subaltern)의 말’이란 무엇인가?, 3.28집회를 돌아보며 – 모토하시 데쓰야(도쿄게이자이대 교수)

 

모토하시 데쓰야

 

3.28연구 집회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집회의 마무리 발언으로 당일 대강 다음과 같은 감상을 말했다–

“일단 첫 번째 감상은 ‘서발턴’에 대해서입니다. 이번 문제를 생각하면서 알게 된 것은 왜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형으로 제의하고,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발턴에게 말하지 못 하게 하는’ 것도, ‘서발턴에게 말하게 하는’ 것도 둘 다 똑같이 폭력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더 생각해 보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말하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것일까요? ‘발화된 말’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나, 발화되어 버림으로 인해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듣는 사람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말하는 사람 본인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건 ‘없었던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지만, 그 ‘알 수는 없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헤아림이나 조심스러움이 없으면, 서발턴의 목소리는 더욱더 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 대변표상(代弁表象)이라는 문제는 말을 통해 살아가는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아포리아이고, 그것에 대해 계속 자각적이고자 하는 것이 이번 문제에서 무언가 결실을 맺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전 양징자씨가 소개해 주신 김복동 할머니의 ‘미소’(역자주 : 개중에는 좋은 군인들도 있어서 기다려졌다고 증언하며 띄운 미소)가 마음에 와 꽂혔습니다. 그것을 들은 것만으로도 오늘 여기에 온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감상은 ‘후미에(역자주 : 그림 밟기. 에도시대 때, 기독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예수나 마리아의 그림을 밟게 한 것. 또는 그 그림.)’에 대해서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른바 ‘후미에적인 상황’을 만든 것이 박유하씨의 저서 출판인지, 그것에 대한 고소인지, 박유하씨의 저서에 대한 비판인지, 몇 개의 성명인지, 그것을 물어봐야 별 의미는 없겠지요. 오히려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후미에’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처럼 넓은 의미로 ‘인문학’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텍스트를 읽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거나 자신의 말로 생각하는 것은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말을 재료로 하여 생각하는 행위인 이상,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즉 ‘인문학’이란 ‘후미에’에 다름 아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후미에’를 밟아야만 하는 사람들을 어떠한 동기로 한 쪽 진영에 속해 있다고 공격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확장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더 좋지 않은 일은 ‘후미에’를 앞에 두고 사고정지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후미에’란 사고를 유도하는 것이므로 ‘후미에’는 계속 만들어야 할 것이며, 때로는 용기 있게 밟아야 할 테지만, 그걸 가지고 타자를 판단하는 데에는 한없이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 번째는 ‘항의 성명’에 대해서입니다. 어떤 형태이건 간에, 피해자/생존자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형태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그분들의 힘을 키우는 일에 이번 집회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를 각각의 현장에서 이제부터 우리들 각자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건 서로의 입장을 비판하는 일, 서로의 의견에서 배우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논의를 듣다가 마지막에 개인적으로 저도 이 곳에서 실제로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저는 ‘박유하씨의 기소에 대한 항의 성명’에 서명한 한 사람입니다만, 그 안에 ‘무엇보다도, 이 책으로 인해 전 위안부 분들의 명예가 손상됐다고 생각되지 않고’라는 한 문장이 들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여기에서 반성하고자 합니다. 반성의 이유는 무엇보다 나눔의 집의 생존자 분들이 대체 어떤 상황에서, 재판에 의한 고소라는 수단을 단행했는지 저 자신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 모든 행동이 옳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건에 대해서 생존자 분들이 그러한 수단을 취하신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적어도 저처럼 그 곳에 없었던 사람이 ‘손상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망설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내 발언의 주안점은 서발턴의 생각은 어떻게 표상 가능할까라는 물음에 있으며, 그 답은 어떤 사람에게도(본인이나 당사자도 포함해서)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당일 집회에 나오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발언을 통해 내가 던진 공은 완전히 목표를 빗나갔고, 결국 내가 말한 이 ‘마무리 발언’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었다. 그 일과 관련하여 여기에서 집회를 끝낸 후의 나 나름대로의 반성과 감상을 기록해 두고 싶다.

먼저, 위와 같은 ‘마무리 발언’을 함에 있어서, 내 쪽에서 몇 가지 큰 전망의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제국의 위안부』 라는 저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집회에서 나온 논의로부터 무언가 결실을 평가하면서 그 성과를 토대로 이후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임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발턴’과 ‘후미에’에 주목하는 것이 이론적인 핵심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인문학 연구자로서 이러한 ‘연구 집회’의 마무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런 문맥에서 ‘항의 성명’에 대한 자신의 반성도 표명했다. 나 한 사람의 행동이나 결의 자체는 문제의 크기에 비추어 볼 때, 전혀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집회의 의의를 재확인하고, 앞으로의 운동이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 나름의 ‘연구 집회’에 대한 생각은 참가자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름을 말해 죄송하지만 내 발언 다음에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측에서 ‘마무리’로 발언한 나카노 시게오씨는, ‘마무리’란 어떤 ‘접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와는 인식이 완전히 달랐고, 그 점에서 나의 마무리는 ‘헛스윙’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의 두 번째 ‘오해’는 ‘미디어’ 참가자들의 취급과 속내에 대해서다. 나는 이번 ‘연구 집회’라는 성격과 의의를 생각해서, 설령 미디어나 저널리즘에 적을 둔 사람들이 참가하더라도 각자가 『제국의 위안부』라는 저서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듣고 개인적으로 새로운 지식과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 내가 한 상정이 안이했던 듯 하다. 이미 집회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 등에 투고된 기사 중 몇 개가(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보여주는 것처럼 기자나 저널리스트 중에는 집회에서 무언가를 겸허히 배우겠다는 자세보다는, 자기나 자기가 소속된 미디어를 통해 이미 나온 이 문제에 관한 판단을 추인하고 강화할 방편으로 이번 집회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여겨지는 기사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런 기사를 쓰는 사람들이 ‘서발턴’이나 ‘후미에’를 둘러싼 원리적 고찰 같은 ‘귀찮은’ 부분을 무시하고, ‘항의 성명’의 서명인 중 한 명의 ‘반성’에 달려들어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안이한 말로 결론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나의 ‘마무리 발언’에 대한 견해가, 대립을 부추기는 일이 보도의 책무인 양 기사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별 상관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상정하지 못한 나의 판단 미스에 기인한 것이고, 나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반성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연구 집회의 목적은 『제국의 위안부』라는 저서에 관해서 의견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말을 나눔으로써 타협이나 경계의 확인을 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피해자의 의향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해결되기를 목표로,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각자가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에 있었다. 과연 집회는 그러한 목적에 조금이라도 다가갔을까? 만약 이 집회가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의 ‘옳음’을 확인하는 데에만 그쳤다고 한다면, 그것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 무슨 공헌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진지하게 임하는 한, ‘종군위안부’로 삼아진 사람들 같은 피해자의 마음은 그 누구도 대변할 수 없다. 이 냉엄한 사실은 ‘연구자’, ‘운동가’, ‘지원자’, 나아가 ‘당사자’와 ‘비당사자’라는 구별 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를 토대로 생각하면, 『제국의 위안부』관련 문제 중 하나인 ‘할머니들 자신에 의한 고소’라는 사태의 재고가 필요해진다. 구체적으로는 집회 중에도 나온 ‘할머니들 자신이 고소한 것이니까……’라는 변명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바로 이 ‘할머니들 자신에 의한 고소’라는 ‘사실’을 ‘후미에’ 삼아 사고정지돼서 ‘서발턴의 목소리’에 관한 신중한 고찰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사태는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의 ‘대립’이라는 저널리스틱한 이슈가 되기만 할 것이며, 그것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미디어의 ‘유통기한’이 지나면 폐기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서발턴’을 눈앞에 두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사고정지’나 ‘복화술’도 이에 포함된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정답이 없는 물음을 쉼 없이 던지며 ‘후미에’라는 사고의 유도에 응답하기 위한 길은 한없이 어렵지만, 길은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만들어지는 법이다. 이번 집회에 참가한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앞으로도 그런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3/28 연구집회를 끝내고 – 니시 마사히코(리츠메이칸 교수)

『제국의 위안부』가 서울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미성년 여자에 대한 지속적인 성적 능욕’이라는 ‘위안부상’의 ‘정형’을 재심에 부치려고 한 책이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확한데, 그 책이 ‘일본의 면죄’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선입관을 빼고 전체를 읽어 보기만 한다면 오해가 생길 리가 없다. 그것을 ‘일본의 면죄’에 길을 트는 타협적인 책이라고 이해하는 일부의 독해는 명백히 ‘오독’이며, 이 책을 ‘악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3월 28일 집회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은, 극히 일부의 우파적인 ‘오독=악용’을 과잉 의식하여 이 책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분들이 좌파 안에 적지 않다는 현실이었다. 『제국의 위안부』의 평가를 둘러싸고 일부의 우파와 일부의 좌파 사이에 ‘적대적 공존관계’가 성립되어 버린 듯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3월 28일 집회에서는 적어도 ‘일본의 면죄’를 부르짖으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집회 중반에 내가 확인한 바다. ‘우리들’이 꼭 ‘적대’해야 할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본 집회는 일단 성공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책임’을 물을 때, 설령 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한다는 대의명분이 있다고는 해도,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미성년 여자에 대한 지속적인 성적 능욕’이라는 ‘위안부상’에 구애되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문제시되고 있었다.

애초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실태는 그러한 ‘물리적인 폭력성’이나 ‘위법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식민자들 안에서 다종다양한 ‘협력자’를 동원한 데다가, 그들과 그녀들에게 ‘자발성’마저 심어 놓는 교묘한 지배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위안부 문제’란 ‘협력자성’이나 ‘자발성’까지를 포함하여 ‘식민지 지배’의 ‘폭력’을 ‘구조적’인 것으로 파악할 단서를 제공해 주는, 어떤 의미로는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3월 28일, ‘지정토론자’로서 발언한 센다 유키씨는 가부장제적인 ‘지배’ 구조를 생각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폭력(가정 폭력 등)에만 주목해서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신체적인 폭력은 ‘저항’을 낳을 뿐이며 ‘지배’를 견고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 오히려 피해자에 대해 ‘협력자성’이나 ‘자발성’을 심는 것이 ‘가부장제’라는 것의 지배 형태다. 그렇다면 바로 그러한 ‘구조’ 그 자체를 비판 대상으로 설정하는 『제국의 위안부』는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정면으로 마주한 ‘위안부론’으로서 읽혀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요시미 요시아키씨는 박유하씨가 《오노다 히로오씨의 증언을 근거로 여성이 장사를 열심히 하기 위해 군인에게 ‘교태를 부리’거나 ‘밝게’ 보이고 ‘즐거운 듯’ 행동했다면 ‘그것은 여성들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애쓰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면서 《제국 육군의 장교와 같은 시선으로 논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당일 배포 자료, p.71)라고 박유하씨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렇다면 요시미씨는 이 인용에 이어지는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읽었을까?–《업자들의 엄격한 구속과 감시 속에서, 자신의 의지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녀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의 당혹감과 분노, 슬픔을 억누르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래하는 위안부가 비참한 위안부와 대치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교태를 부리’는 웃음도 위안부들의 비참함과 대치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아사히신문출판, p.231)

위안부의 양면성은 ‘가정 폭력 피해 여성’의 그것과 연결지어도 생각할 수 있다는 사고법을 시도한 것이 박유하씨였다고 한다면, 《여성들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 남으려고 악전고투했는지 하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며 박유하씨의 작업을 내쳐버려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박유하씨와 요시미씨는 같은 것을 다른 입장에서 말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두 사람이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위안부 문제’의 배경에 있는 ‘구조적인 문제’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일차원적인 피해’에 초점을 맞춰 문제의 해결을 서두르고자 하는 역사 연구나 지원 운동의 전술에야말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노래하는 위안부’ 등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위안부’에 대한 이해를 어느샌가 일면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지원 운동 속에조차 뿌리 깊을지도 모르는 ‘매춘부’ 차별이 그러한 것처럼.

어찌 됐든 앞으로의 ‘위안부 연구’는 박유하씨가 끈질기게 파헤친 ‘양면성’을 균형감 있게 시야에 넣고, ‘가해자/피해자’의 전체상을 확인하는 일이 주류가 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땐 『제국의 위안부』를 그냥 폄하하기만 하는 ‘위안부 연구’ 따위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등 짚고 넘기’를 비유로 든 것은 바로 그러한 미래를 전망해서이고, 멀리 내다보면 ‘등 짚고 넘기’는 이미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예를 들어, Fight for Justice(편)의 『Q&A 조선인 ‘위안부’와 식민지 지배 책임』(오차노미즈쇼보, 2015)은 『제국의 위안부』 비판을 여러 곳에 집어넣은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병사와의 연애나 심정적 교류가 있었을 수 있다고 해도 트라우마 연구에 의하면 가혹한 현실을 살아남기 위한 반사적 행동,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판단됩니다》(p.55)라는 김부자씨의 서술 하나만 봐도 『제국의 위안부』의 문제 제기와 함께 읽음으로써 한층 더 생생해지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단, 김부자씨는 《일부분을 전체화해서 ‘같은 일본인으로서의 <동지적 관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라고 못을 박아 모처럼 열린 회로를 닫아 버린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란 지금 와서 보면 지극히 취약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동지적 관계>를 광범위에 펼침으로써 견고한 실효 지배를 가능케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박유하씨가 조선 반도나 대만의 위안부를 생각할 때에 중시한 ‘동지’적 관계성은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효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러한 측면의 강조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길은 열어 줘도, ‘일본의 면죄’를 도출하거나 하는 이야기는 되지 않는다. 이 책에 대한 ‘오독’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일본의 면죄’를 꾀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어울리는 일이고, ‘일본의 책임’을 깊이 숙고하려는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조심성 없이 추종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식민지 지배’란 안팎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협력자’를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다고 생각한다(‘글로벌화’도 그러하다). ‘식민지 지배’를 억지로 추진한 ‘제국 일본’의 폭력성을 빠짐없이 들추어내는 것은 필수다. 그러나 ‘식민자=가해자’, ‘피식민자=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은 역사의 세세한 부분을 잘 안 보이게 만든다. 이 사실을 재차 강조해 두고 싶다.


지면에 다소 여유가 있어서 마지막으로 나카노 도시오씨가 ‘총정리’에서 발언한 《일본 군인과 ‘위안부’를 공통으로 ‘피해자’로 묶는 인식》에 대해서 약간만 보충을 해 두고자 한다.

나는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전쟁 수행에 있어서의 ‘가해성’, 특히 그 ‘가학성’에 대해서 눈을 감고자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위안부 제도’는 전장에서의 보다 광범한 ‘전시 폭력’의 일부로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와 관련해서는 3.1 독립운동의 ‘진압’이나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등, ‘민족 정화’와 연결된 폭력의 기억을 어떻게 계승할 것이냐 하는 커다란 문제가 눈앞에 있다(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의견 교환의 장이 조직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설령 그런 문제들과 ‘이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가해의 중층성’이 더해져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이 문제에서는 ‘피해자’측에서 할 수 있었던 대응에도 개별 사례마다 차이가 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과거에 마주할 때, ‘식민자=가해자’, ‘피식민자=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에 의거해서만은 진상 규명조차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 복잡한 문제를,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식민지주의’, 또는 ‘인종주의’ 문제와 연결지어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서두른 나머지, 해당 문제가 안고 있는 고유의 어려움을 외면해야만 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바로 이 사태를 따져 묻고 있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인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인과 한국인은 각각 ‘가해자성’과 ‘피해자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정도나 양태는 다르며, 그 차이는 위에서 말한 ‘민족 정화’적인 사고(=인종주의)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일 양국민이 서로 짊어지게 된 ‘가해자성’을 외면하지 않고, 전 위안부 분들 앞에서 함께 자세를 바로 하는 일. 타자의 ‘가해자성’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가해자성’을 탕감하려고 하는 심성에서 자유로워지는 일. ‘자기 면책’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자는 요청에 한일 양국민이 각각의 입장에서 응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둘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가해자성’만을 떠맡는 일이 고통스럽다면, ‘피해자’였을지도 모르는 우리들 자신의 다른 한 측면과 묶는 형태로라도 그 부담을 견뎌낼 것. ‘피해자 의식’을 통한 ‘연대’의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나 나름의 주장에 담긴 속뜻이란 그런 것이다.

니시 마사히코

김규항, 더러운 여자는 없다 (경향신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한 건 1991년 김학순 할머니(1924~1997)의 증언부터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의 첫 증언자는 김 할머니가 아니라 오키나와에 살던 배봉기 할머니(1914~1991)다. 배 할머니는 김 할머니보다 16년 먼저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언론에 밝힌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7살 때 식모로 팔려간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떠돌던 그는 29살이 되던 1943년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어도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위안부가 된다.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말마저 잊은 채 살아가던 그가 증언을 결심한 이유는 일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였다(1972년 오키나와를 되찾은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조선인들에게 신고를 거쳐 특별 영주권을 준다).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인 그가 한국에서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독재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 했다는 것, 증언이 조총련계를 통해서였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위안부 운동이 본격화한 후에도, 파국적 한·일 위안부 협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현재까지도 그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는 데는 다른 정서적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배 할머니를 취재한 기사(한겨레 2015년 8월7일자)에 따르면 그는 위안부였음을 털어놓을 때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라고 거듭 말하곤 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고,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다양한 사연과 삶의 배경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중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위안부상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좀 더 집중한다. ‘순결한 조선처녀’라 여겨지면 존중심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아예 눈감아 버린다.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그런 위선적 태도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 사회에서 폭넓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위안부는 모두 강제로 끌려간 소녀였다’는 우리의 강변은 ‘위안부는 모두 자발적 매춘부였다’는 일본 우익의 강변과 쌍을 이루어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미군을 상대로 같은 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일본놈들의 만행’이 아니라, 가부장제 국가에서 언제나 여성에게 존재하는 폭력 구조의 일부다. 폭력 구조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도 남성 수용자를 위한 위안부가 존재했을 만큼 일반적이며 뿌리 깊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그러한 본질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2014년 6월 미군 위안부 122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이 위안부가 된 경로 역시 다양했다. 인신매매로 끌려온 소녀도 있고 가족에 의해 팔려온 사람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온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애국교육’을 하고 미군의 건강을 위해 성병관리를 하고 도망치면 경찰을 통해 잡아오기까지 했던 한국 정부는 그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우리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와 그들을 동등하게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순결한 처녀들이 아니라 ‘양갈보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저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연대 요청을 거부하고 위안부 소녀상에 온전히 자신을 일치시키는 걸 비판하거나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드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소녀상으로 단일화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알량한 역사의식과 지배체제로부터 주입된 민족의식과 전근대적 여성관을 위안부 소녀상을 내세워 은폐하려 드는 건 말이다.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은 자유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일 같아 보여도,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여성이 국가와 남성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는 가부장제 구조 속의 일이다. 위안소가 ‘인정된’ 장소였고 ‘합법적’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법’이 국가와 군이 만든, 남성을 위한 ‘법’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자원’한 처녀들이었건,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들’이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는 박유하의 말이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을 더러운 여자들로 모욕하는 건 누구인가. 더러운 여자는 없다. 더러운 게 있다면 여성을 깨끗한 여자와 더러운 여자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폭력, 그에 기반을 둔 우리의 싸구려 정의일 것이다.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는 전문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https://parkyuha.org/)

원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더러운 여자는 없다 (경향신문)

渦中日記 2016/1/15

집에 돌아온 지 36시간 경과.
대부분을 “無為”의 시간으로 보냈다.

고발직후, 가처분판결직후, 기소, 한일합의, 그리고 민사재판 판결. 다섯번째 반복된 “집단비난”의 결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한일합의 이후, 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드러나게 박대통령지지자들인 게 눈에 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를 둘러싼 사태를 나는 어느정도 분석할 수 있고(할머니,지원단체, 대중,학자,언론,일본..), 어쩌면 내가 가장 잘 아는 일이니 내가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일이 쓰기에는 의욕과 힘이 충분치 않다.
언젠가, 일본도 잘 아는 누군가가, 그 일을 해 주기를 바라고 싶다. 내가 페이스북등이나 그 밖의 글/인터뷰를 통해 해 온 얘기는 내가 알고 경험한 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내가 “자발적 매춘부”로 쓴 것은 아니라는 걸 독자들이 알 수 있게 쓴 기사가 눈에 띄었다. 2013년 1월, 꼭 이맘때 평화로웠던 시기의 평화로운 대화의 순간을 올려 준 경향신문 기자의 마음이 고맙다.
어쩌면 모든 것이 “지적태만”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대신 넘쳐나는 “정서과잉”과 “욕망”들이 만든 일.

80년대엔 국가폭력이 국민을 옥죄었다.
“민주”화 된 2010년대엔, “국가화된 국민”이 “개인”을 옥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책에서 “국가에 동원되는 개인”의 아픔에 대해서 썼었다. 그런데 나 역시 그 한사람이 되었다.

“참을 수 없는 아이러니”들을 견디면서,
풀기엔 너무도 많은 층위의 옥죄는 구조들, 얼키고 설켜 이미 보이지 않는 “악의”들을 풀어야 하는 과제가 내 앞에 놓여있다.
2016년도 힘든 한해가 될 것 같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601131905341&code=940100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7987926561452

渦中日記 2016/1/13

인천공항에 4시반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켜니 여기저기서 문자.
2시에 있었던 민사재판 선고에서 판사들이 원고측 손을 들어주었다는 소식들. 뒤이어 법원의 보도자료가 도착했다.

극심한 아이러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어쩌면 이 재판은 아주 오래 갈지도 모르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6956113331300

渦中日記 2016/1/7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아직 여유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이번 워싱턴 행이 “일본의 돈”이라는 악의적인 기사를 봤다. 이번 회의는 윌슨센터와 와세다대학의 공동 프로젝트인 “동아시아에서의 과도기 정의 수립”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학문적 회의다.
갑자기 “한일합의”가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 문제도 언급되겠지만, 그 얘기를 중심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도 아니다. 전에도 썼지만, 이 회의는 반년도 더 이전에 계획된 회의다.

한일합의에 대한 의견을 쓰라고 종용받기도 했는데, 내 의견은 분명하다. 갑작스런 합의는 문제가 있다. 국민적납득과 합의가 가능하도록 논점을 공론화하고 국민이 공유하는 절차와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대립되는 학자들이 접점을 찾는, 당사자도 포함하는 “협의체”를 만들라고 책을 낼 때부터 제안했었다.
그러니 이런 합의에 내가 무조건 찬성하거나 웃을 거라고(나의 힘이 그렇게 클 리도 없다) 생각하는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어렵게 결정된 것이니 순서는 거꾸로 되었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일본지원단체가 이 합의를 “운동의 성과”로 받아들인 식의 긍정마인드를 나는 평가한다.

정부가 내내 지원단체와 논의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마지막에 배제된 모양이다. 지금의 격렬한 반발은 거기서 온 듯 하다.
정부가 배제한 건 위안부할머니일까. 혹은 지원단체의 주장이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언젠가 밝혀지리라고 믿는다.

분명한 건, “또 다른 백억원 모금”의 발상은 이미 1997년에 정대협이 시도했던 일이라는 것.
일본국민의 “속죄금”과 “의료복지비”를 정대협이 거부했고, 받은 일곱 분 할머니들을 정대협이 비난하며 모금을 시작했고, 초라한 모금실적에 한국정부가 나서서 할머니들에게 같은 금액의 지원금을 지급했었다. 그건 한편으로는 “할머니들은 우리가 돌본다”는 발상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요구는 요구대로 이어졌고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성공했지만 일본인들의 마음은 더 닫히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니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15년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할 각오,그리고 시작하기전에 “모든”위안부할머니께 그런 선택에 대한 수락을 받아야 할 거라는 점이다.
엄마부대나 어버이연합도 문제지만, 그들이 문제라고 해서 운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일 수 밖에 없다.

필요 있어 다시 읽었더니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쓰인 이 글이 가슴에 더 와 닿아, 일본 학자의 글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올려둔다. 이들은 진보학자들이고 자신들의 운동을 반성하는 차원에서의 글이다.
전에 한번 전문을 올렸었지만 특히 중요한 부분만 몇 번에 나눠 올리려고 한다. 위안부문제에 관심갖는 사람은 꼭 읽어야할 논문이 될 것이다. 나의 의견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전문은 곧 어떤 잡지에 게재될 것이라고.

——–
“한편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몇 가지 논쟁적인 대립점이 표출되었다. 예를 들면 ‘위안부’ 논쟁의 존재방식을 둘러싸고 메타 차원에서 재귀적(再歸的)인 물음을 던진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내셔널리즘과 젠더』 세이도샤, 1998년)와 박유하(『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사토히사시 번역, 헤이본샤, 2006년)를 둘러싸고 문제의 방법론적 심화와 자기성찰의 계기가 만들어진 측면도 있었으나, 때로는 이에 대해 운동의 분열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주장도 나왔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현재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아사히신문출판, 2014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이토록 비판이 분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 사이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도 이 시기에 운동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성적인 물음과 문제 제기를 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박유하와 마찬가지로 정대협 측에도 문제의 단순화와 일면화(一面化)가 있는 게 아니냐는 자문자답이었다(야마시타 영애『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아카시쇼텐, 2008년). 그러나 분열과 분단 속에서 그러한 문제 제기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문제의 국면이 다양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위안부’ 논쟁은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제기된 것과 같은 보편적인 문제 보다는 민족적 담론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게다가 본래 이 문제와 모순될 수 있는 국제적인 맥락이 덧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면 정대협은 국제적인 반향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한편으로 문제를 국가 단위로 잘라 놓는 것과 같이 단순화해 버리고 말았다. 미국 하원에서는 정대협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태로 의회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가 세밀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에서의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피해자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로 결의가 이루어졌고 문제를 심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취급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소녀상’을 사용하여 피해자의 일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니는 복잡한 정치적 측면(politics)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젠더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에노 치즈코가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모델 피해자론’이라는 형태로 이미 지적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한 일본의 전후(戦後)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오사 시즈에(長 志珠絵)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2738360419742

渦中日記 2015/12/31

우울한 연말에 뜻깊은 선물을 받았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는 출발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간혹 이를 혼동하거나 구분하기를 거부한다.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의 이면에는 역사에 대한 판단과 학자의 양심과 주장이라는 복잡한 구조를 지극히 단선적 이해로 규정하려는 음모가 숨어 있다.”(출판기획자 이홍)

이렇게 평해 주셨으니 꼭 “삭제판”이라는 특수성에만 주목한 건 아니라고 멋대로 생각해야겠다.
다양한 레벨의 “음모”가 존재하는 건 사실. 음모와 맞서지 않고도 편안해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인생은 일과 사람과 놀이.
일에선 상과 비난을 같이 받았고,
사람에선 새로운 만남과 오랜 만남들이 “성명”으로 가시화되었으니 가히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그런데 재판에 쫓기느라 놀이시간이 압도적으로 적었다.
내년엔 만나고 싶었으나 못 만났던 이들을 생각대로 만날 수 있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기를.

삭제판을 위해 조언주시고, 우울할 때도 기쁠 때도 늘 함께 해 주신 분들께 고개숙여 고마움 전합니다.

새해에도 늘 편안하시고 더 좋은 한 해 맞으시길 빕니다.

박유하 드림

https://www.facebook.com/jongjoo.jeong/posts/1668692550065804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58238324203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