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의 보수화/정의의 악의

이 며칠 도를 넘어선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뒤늦게 시사인 기사를 보았는데, 자료에도 없는 소리를 내가 지어낸 것처럼 쓰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와카미야 선생 사망 소식을 그 밤에 들었으니 내겐 최악의 날이었다.

비판자들은, 자신이 단 한사람을 향해 집단 공격에 참여중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재판 중이라는 것도 잊고 있을 것이다. 재판내용과 상관없는 비판마저 “박유하의 책은 문제있는 책”이라는 담론이 되어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물론 이 모든 것이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더 할 말은 없다.

정영환 비판조차 잘못 옮긴 것으로 보이는 이 “편집위원”은 알고보니 아직 박사과정 재학중인 학생이라고 한다. 아사히신문출판사에 정정을 요구하는 패기는 좋았지만, 그전에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보인다.

“제국의 변호인-박유하에게 묻다”는 책도 나왔다.
제목을 붙인 이는 페이스북에서도 나를 비난했던 손종업씨라는 걸 알았다. 그는 고발 직후에 내가 일본에 돈을 받은 것처럼 쓰고 금년 들어서는 나를 아이히만에까지 비교하며 비난했던 이다.
비판보다도, 제목의 함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를 데려다 책을 만든 이들의 존재에 더 한숨이 나온다.
이미 여러번 말했지만 “제국의 위안부”란 “제국에 동원된 위안부”라는 뜻이다. 설사 주체적으로 보였거나 행동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책은, 내용의 오용에 이어, 이제 제목마저 오용되고 있는 중이다.

대중선동이 “비평”의 얼굴을 하고 세상에 나오는 시대가 되었다. 혹은 정의의 얼굴로.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정의와 악의는 고작 한 글자 차이다.

나뿐 아니라 나를 옹호해 온 이들에 대한 비판도 담았다니 사태는 이제 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일본에서 2007년부터 시작된 갈등이 10년후 한국에서 본격화된 양상.
그때와 다른 것은 그때는 비판자들이 극소수였지만 지금은 수십수백명이(그 뒤엔 수천명이) 한미일 연대망을 이용해 나 하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물론 현실적패배감이 부추기는 일일 것이다.

< 제국의 위안부>는 지원단체와 일본의 일부 지원자를 비판한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응답”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의 응답은, 10개월에 걸친 침묵끝의 고발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학자들마저 본격적으로 지원단체에 발 맞추고 있다.
연구와 학문이 운동논리를 사유하지 못했던 건 사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운동이든 이론이든,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면 보수화 될수밖에 없다.

급진의 보수화는 피해자로서의 마이너리티 의식이 만든다. 하지만 마이너리티가 온전히 정의일 수 있는 것은,그들이 적으로 간주한 이에게도 정의로울 수 있을 때다.

나를 두고, 한편에선 “제국의 변호인”(손정업)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국에 대적해 온 “일본 리버럴(진보)의 비겁한 무기”(정영환)라고 한다. 이들에겐 내 책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 같다.
혼란은 선입견이나 목적이 있었을 때 일어난다. 기존인식에 꿰어 맞추려 하는 한, 거기서 일탈하는 기술들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금년들어 이들의 공격이 강해진 건, 일본어판의 수상과, 오에겐자브로/우에노치즈코/고노&무라야마 등의 지식인 성명, 그리고 한일합의에 원인이 있는 듯 하다. (한국은 물론 일본판 위키페디아마저, 정영환을 비롯한 이들의 시각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내겐 남의 일이 아니다)

위기의식은 이해하지만, 사태를 정확히 파악 해야 이길 수 있다. 일본을 20년 이상 비판해 왔으면서 운동이이길 수 없던 건, 정확하게 비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시작된 한일진보시민연대의 문제와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민주”라는 개념이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기능했던 시대에서 30년이 지났다. 군사독재국가를 넘어선 시대의 “민주”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어야 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59084934118417

이미지와 폭력–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한일합방 36년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이 땅에서 본격적인 권력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청일전쟁때 부터였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의 전쟁터는 일본도 아니고 중국전체도 아니고, 중국의 극히 일부와 조선땅이었다. 민비암살이라는 끔찍한 폭력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그런 유린의 연장선상의 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민비가 암살당했을 때、일본언론은 그 사실을 충격이 아니라 당연한 일처럼 보도했다. 심지어 훗날 일본의 문호로 추앙받게 되는 26살청년, 나쓰메 소세키조차 “최근에 가장 고마웠던 일은 왕비 살해…”라고 친구 마사오카 시키에게 감상을 적어 보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일본인들이 원래부터 냉혈한이기 때문일까.

일본언론은 일찍부터 민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질투많고 권력욕 강한 악녀. 그것이 민비에 관한 보도들이 만들어내 일본인 안에 심어놓은 이미지였다.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젊은 엘리트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한건지 모르도록 만든 것은 그런 식의 편향적 보도들이었다. 또 훗날 일본군이 중국 전쟁터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편견을 바탕으로 교육되고 확산된 차별의식이었다.
폭력행사는,타자를 고통을 모르는 물건으로 봐야 가능한 일이다. 미움과 차별은, 때로 그 필수조건이 된다.

어제 한국정부가 구마모토에 뒤늦게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 위안부할머니의 성금을 둘러싸고 찬반이 격렬한 듯 하다. 뒤늦은 대응과 기부에조차 차갑게 닫힌 2016년 대한민국의 심성에 대해서 일부언론이 비판적인 칼럼을 내놓았지만, 그런 신문들조차 “일본에 대한 미움”은 당연한 듯 전제된다.
그리고 미움의 크기는 늘 위안부문제에서 가장 크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하는 파렴치한 태도, 과거의 잘못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뻔뻔스러움”(2016/4/21.국민일보)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90년대 들어 시작된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은, “파렴치한” 일본상, 그리고 이제 악마같은 일본상 구축에 성공했다. 미운 건 일본이 아니라 일본정부라고 뒤늦게 말해본 들, 이대로 가면 일본과 전쟁을 한다 해도 기꺼이 참여할 피끓는 청년들과, 그들을 등두드려 내보낼 국민들이 대다수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현재의 북한이 그런 것처럼.

이 모두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이 20여년의 보도–독자적인 조사도 관계자들에 대한 취재도 없이 그저, 지원단체가 주는보도자료들을 언론이 받아써 온 결과다.
물론 그런 보도들을 추인하거나 리드하기조차 했던 지식인들이나 전문가들의 책임 역시 작지는 않다 . 또 최근 몇 년동안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끔찍하게 형상화할지에 골몰하고 졸속공부에서 경쟁했던, 그림과 영상 제작자들 역시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 국민다수의 생각을 만드는데 일조한 이들이라면, 이미지와 지식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일상속에서의 적대와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더 큰 폭력에 대한 책임의식을 뒤늦게라도 가져봤으면 좋겠다. 물론 수용하고 전달해 왔던 우리 모두도.
악마화 하지 않고도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 악마화는 오히려 본질을 놓친다.
“뻔뻔한 일본””사죄않는 일본”이미지의 재생산 속에서 우리가 해 온 일은 고작,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었다는 이승복 소년을 소녀상으로 대치한 일 뿐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한다.

우려되는 것은 사실 일본에 대한 몰이해가 아니다. 그 몰이해가 만든 미움이, 우리를 조금씩 냉담하게 만들고 있는 정황이다. 또 우리를 그렇게 편협하고 차가운 한국인으로만들어버리고 만 상황이다.
인간의 죽음에조차 쾌재를 부르는.
26 살 나쓰메소세키처럼.

일본인들을 돕는지 여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2016년 봄, 대한민국은 대만과 달리 구마모토에 냉담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정황이, 20여년동안 남의 말에 결코 귀를 기울이는 법 없이, 양극단 사람들의 적대와 과장과 은폐에 휘둘린 결과라는 점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건 바로 그런 적대와 증오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증오를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채 먼저 희생된다. 불화 역시 마찬가지. 적대담론의 폭력성을 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추신)
재해때마다 화제가 되는 “일본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재해가 많아 체념적이 되어서도 아니고, 그저 어릴 때부터 방재훈련을 많이 받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일본어머니들이 자식에게 가장 많이 말한다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배려심이 몸에 밴 결과일 뿐이다.
긴급한 순간에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해야 가능하다. 자아보다 조화, 나의 욕망보다 타자의 평안에 가치를 두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50782178282026

건다미, 『제국의 위안부』에서 ‘동지적’ 관계 란 워딩이 씌여진 맥락

내가 이해하기로 제국의 위안부에서 ‘동지적’ 관계 란 워딩이 씌여진 맥락은 이런거라고 생각해.

초기 정대협은 정신대와 위안부도 구분하지 못했음. 피해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래서 계속 정신대와 같은 ‘공적인’ 강제동원 체계속에 위안부 문제를 증명하려고 했지만 증거가 나올리 없지. 이렇게 시간만 허비해.

정대협도 이 입장 스스로 철회한게 아니라 정신대 피해자들에게 항의를 받고서야 철회하고 사과함. 그러면 이때부터라도 위안부란 존재가 대체 무엇이었나를 제대로 들여다 보고 연구해야 하는데 전략을 바꿔서 ‘성노예’라는 개념으로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일본에 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식으로 나가지. 다분히 운동의 전략적 사고만 한거지.

하지만 이 문제가 또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정신대와의 혼동이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강제연행)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면 ‘성노예’라는 개념은 위안소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라는 걸 알려주는 여러가지 증언과 상충되는 면이 있거덩.

실제로 노예적 상황에 처해지도록 감금과 폭력으로 매일 매일 혹사시킨 직접 주체가 포주이기 때문이야. 일종의 하청관계라서 일본군이 정기적인 성병검사하는 관리차원을 넘어서서 운영에 직접적으로 구체적으로 관여한 증거도 또 없단 말이지. 오히려 위안부들은 포주로 부터의 폭압적 상황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일본군의 보호를 받기 위해 좀더 높은 지위의 군인과 연애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위안부들이 간호사역할을 하기도 하고 군인들 환송회를 가고 죽은 군인들 무덤도 돌봐주고 함께 훈련을 받기도 하고 함께 아편을 하기도 하고 같이 신세타령을 하거나 전장터에서 살아돌아 오라는 격려도 해주고…

직접 점령지에서 군인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수용된 점령지 여성들 증언에 그런 내용 있는거 봤냐? 분명 다른 면이 있거덩.

일본 우익들은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과 마찬가지로 위안소 풍경에 관련된 여러 증언과 사실을 근거로 위안부문제 자체를 부정하지.

그러면 과연 조선인 위안부는 점령지 출신의 위안부보더 더 편한 생활을 했냐 하면 또 그런건 아니여.

직접적 폭력과 강압의 주체가 다르다는 거지. 점령지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직접 개취급 노예취급을 당했다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대신 민간인 업자-포주에게 맨날 두들겨 맞고 감시당하고 감금, 혹사당하면서 개취급 노예취급을 당하고 일본군과의 관계에선 전쟁을 치루는 같은 황국의 신민으로서 ‘위안’을 해줘야 하는 애국자 역할까지 강요받은 거라고.

즉, 조선인 포주-업자와의 하청관계와 위안과 애국이라는 내면화된 국민동원 이데올로기를 통해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 사이의 직접적 폭력성을 은폐할 수 있었던 것. 그래서 그 은폐의 구조를 드러내지 않고 직접적 폭력성을 증명하는 증거찾기에만 집중하는 방식의 운동은 결국 별다른 성과를 낼 수 없었던 것.

동지적 관계란 점령지 위안부와는 다른 면 그 은폐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지. 그리고 이 개념은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함.

일본군 병사들 조차도 자신들이 점령지 여성(적의 여성)과 조선인 위안부를 명확히 구분하고 다르게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면적으로 ‘정당화’하고 있거덩. 이건 일본군을 한국군이나 다른나라 군대와 바꿔도 마찬가지여. 그만큼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좀더 구조적이고 보편적이 문제로 볼 필요가 있다는 거여.

그냥 일본군의 만행이라는 특수화된 범주를 넘어서서 여성에 대한 성적착취를 정당화시키는 ‘가부장제 국가’.. 그리고 가난한 여성이 주로 표적이 되는 ‘계급’문제등으로 봐야 하는 거지.
그래서 ‘위안’이라는 국민동원 이데올로기는 식민지 이후에도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로 재생산 될 뿐 아니라

전시가 아니더라도 ‘성매매 합법화’와 ‘공창제’를 주장하는 남성들의 의식속에서도 내면화되어 재생산되고 있지. 남성의 성욕해소에 도움을 줘서 성범죄를 예방한다는 개소리가 사실 당시의 ‘위안’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똑같은 거거든. 여성의 성적대상화가 너무도 일상적이고 당연해서 그걸 언제든 국가,민족,사회의 공적 구조로 끌여들여 정당화시키는 짓까지 한다는 거야.  (난 그래서 ‘성노예’라는 용어보다 일본군이 썼던 ‘위안부’라는 용어가 오히려 더 그 실체를 잘 드러내 주는 개념이라고 생각함.)

위안부제도를 공적으로 용인하고 정당화했던 구조적 강제성으로 문제를 접근해야 제대로 된 역사에 대한 반성도 이끌어 낼 수 있는거 아니냐. 그래야 일부 표면적인 사실관계 끌어다가 위안부 부정하는 일본우익의 논리도 씹을 수 있는 거고. 그런 논리에 휘말려 위안부 피해자들 이미 백발이 되 다 늙고 죽어가는데 직접적 강제성 증거찾고 문서찾고 그딴 헛발질로 허송세월만 보내지 말란 얘기여.

오히려 일본군이 폭력과 강압의 직접적 주체로 전면에 나서지 않았어도 어떻게 이 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고 희생될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 더 끔찍한 역사적 사실이잖아.
그런 합법적이고 공적인 구조와 체계를 만들어낸 장본인으로서 당시의 일본군-일본정부-국가의 책임, 더나아가 전국민적 의식의 차원까지 책임을 묻고 반성하게 하는게 위안부문제와 관련한 과거사 청산의 핵심이라는 생각은 안드나?

안그러면 그 정당화의 구조는 언제든지 다른 모습으로 다른 국적으로 반복될 수 있잖아.
세월호도 그저 박근혜정부 탓으로만 돌리고 규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냐? 뭐 문재인이 대통령었다면 사고 예방되고 전원구조도 되고 막 그랬을 거 같아?그것도 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야 제대로 문제가 해결되는 거지. 그거랑 비슷한 이치.

물론 그렇다고 제국의 위안부가 구조적 문제를 치밀하고 꼼꼼하게 탐구했다고 보긴 어려워. 좀더 충실히 보완되어야 할 부분들도 많고 그런면에서 생산적인 비판과 논쟁이 이루어진다면 대환영.

하지만 지금 하는 꼬라지는 문맥도 제대로 파악못하고 왜곡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
이상.

작성자 : 건다미
출전 : 건다미 페이스북

혐오의 방정식

일본의 위안부문제 지원자들도 더이상 하나가 아니다. 한일합의에 관해서도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이 기사에 언급된 이들은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 중인 이들이다.

분명 이들이 말하는 대로, 일본인들 일부가 내 책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얘기에 멋대로 이용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독해력과 무절제한 왜곡욕망의문제. 심지어 영어요약을 멋대로 만들어 내가 한 요약인 것처럼 유포중인 블로그조차 있었다. (일본쪽 출판사에 대응을 의뢰중)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내 책을 멋대로 왜곡하는 건 이들 역시 마찬가지. 그리고 이 20수년간의 한일갈등은 이 양쪽이 그런 식으로 세간에 제공해 온 정보의 과장과 은폐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책이 평가받은 건 일본의 책임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제국의 책임”임을 말했기 때문이고, 이 양쪽 세력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그런 나의 논지에 공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언젠가 전여옥이 “일본에는 추녀만 많다”면서 “일본은 없다”고 했던 것처럼, 소수 문제적인 이들에게만 주목하면서 그들을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한 사람들이다.
더 불행한 건 이 양쪽은 똑같이, 자신들이 확산시킨 혐오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의 인권을 말하지만 나의 인권은 개의치 않는다. 이들이 며칠 전, 내가 감옥에 갈 수도 있는 형사재판을 반대하지 않는 자세를 분명히 한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기사 오류를 바로 잡아둔다. 물론 이번 경우 기자가 아니라 발표자가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군관여부정–일본군 조선반도 “공식적 강제연행”부정
*책임부정–“법적” 책임 부정

타자에 대한 적개심과 처벌을 부르려는 행위가,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던 슬픈 봄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8315212&sid1=00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38957019464542

0328 연구집회가 남긴 것 – 아라라기 신조(蘭 信三, 죠치대 교수)

 

1. 들어가며

2016년 3월28일에 열린 연구집회 “‘위안부’ 문제에 어떻게 마주하는가―박유하 씨의 저술과 그 평가를 소재로”(이하 0328 연구집회로 약칭)는 참가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0328 연구집회의 의미를 어떠한 위치로 정립시키느냐는 내게 있어서 상당히 어려웠으며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집회 후반의 전개, 집회 종료 후의 전개, 미디어의 보도 등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어려움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상호간에 많은 부분에서 인식을 공유하고 본래 함께 투쟁해야 하는 쌍방이 서로 비판을 하는 모습에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본 연구집회의 발기인인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씨의 노력과 의도와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사태는 움직여갔다. 그렇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연구집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른바 중간파들에게 계속해서 큰 임팩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2. 0328 연구집회의 경위

우선, 이 연구집회가 개최되게 된 경위에 대해 짚어 보도록 한다.

박유하의‘제국의 위안부’가 2013년에 한국에서, 2014년에 일본에서 간행되자 일본에서는 바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간행 1년 후인 2014년 6월에 한국에서 민사소송이 제기되었며 같은 해 11월에 검찰청에 의해 불구속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 특히 검찰 기소를 우려하여 2015년 11월26일에 미국과 일본의 54명이 ‘박유하 씨 불구속 기소에 대한 항의성명’을 발표하여 한일 양국 사회에 임팩트를 던져 주었다. 그때 본 연구집회의 발기인인 도노무라 마사루 씨는 성명에 찬동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을 했었는데, 또 하나의 액션으로서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의 연구집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제1탄으로‘위안부’문제와 박유하 씨를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는 두 그룹이 토론의 장을 공유하고 상호간의 의견을 서로 이야기하는 획기적인 장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0328 연구집회가 실현되게 된 대략적인 경위이다.

도노무라 씨와 오랜 기간 공동연구를 계속해 오면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일찍이 도노무라 씨에게 이 이야기의 제안을 받아 전면적인 협력과 전면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도노무라 씨가 김부자, 나카노 도시오(中野敏男), 양징자, 정영환 씨들과, 그리고 또 한 축의 당사자인 니시 마사히코(西成彦), 모토하시 테츠야(本橋哲也) 씨들과 대화하는 과정을 지켜봐 왔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이고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는 포기 직전까지 갔었으나, 도노무라 씨의 끈질긴 협상과 양쪽의 대표(본 연구집회의 실행위원이 됨)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0328 연구집회는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당초의 경위도 있고 도노무라 씨가 부탁하기 쉽다는 이유로 연구집회의 사회를 맡게된 나는, 서로 다가갈 수 있는 집회가 될 수도, 결렬로 끝날 수도, 획기적인 집회가 될 수도, 최악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떠올리면서0328 연구집회에 임했다. 조선근현대사의 전문가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 씨와 공동 사회였는데, 나는 여하튼 연구집회가 무사히 개최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으며, 그런 기회에 양쪽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의 상이점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었으며, 또한 바라건대 다음 집회에 대한 단계를 시사하고 끝내는 것이 세 번째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노무라 씨가 여러가지로 꼬여있는 이‘위안부’문제라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이번 한 번 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논의를 통한‘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지향하고, 박유하 씨를 둘러싼 인식과 행동의 상이점을 풀어내는 실마리를 지향하는 제 1탄이 본 연구집회였다.

13시 오픈, 130명 정원의 회의장은 거의 꽉 차 양 옆쪽으로 의자를 임시로 설치했는데 이 자리도 거의 차서 연구집회에 등록한 참가자와 매스컴 관계자들로 회의장은 만원을 이루었으며 잠시 후 시작되는 연구집회에 대한 주목과 기대감으로 회의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13시반에 시작되어 도노무라 씨의 개회인사에 이어 양쪽 보고자와 코멘테이터의 보고와 코멘트가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앞에 나와 발언한 전원이 일본군‘위안부’문

제가 식민지 지배와 제국 일본의 근원적인 책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대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이에 아무런 인식의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박유하 저‘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문제의 이해에 공헌한 의의를 강조하느냐, 그 작품의 결점을 가차없이 비판하느냐로 입장이 확실이 갈렸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던 양쪽을 같은 테이블에 앉게 한 도노무라 씨의 의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양쪽의 보고는 각자의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양쪽 다 훌륭했다. 직접 보고를 들으니 재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여기서 특필할만한 것은 박유하 씨가 검찰에 기소된 것에 대하여 “본래 바라는 바가 아니다.”라는 점에서 양쪽 모두 일치했다는 점이다.

나는 박유하 씨를 비판하는 발언자의 보고를 듣고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 한가지 점이 가장 강하게 와 닿았다. 그렇구나, 바라는 바는 아니었구나 라고. 물론 내가 박유하 씨와 공동연구를 하고 있고 성명에도 서명을 한 사람으로서 이런 부분에 지나칠 정도로 감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후 휴식시간을 갖고 사회를 맡은 이타가키 씨와 내가 문제들을 정리하고 지정 토론자가 각각 5명씩 연단에 올라와 의견을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여기까지는 양쪽이 얼굴을 마주대고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의 상이점을 서로 확인한다는 두 번째 목적은 실현되었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는 마지막 종합토론에서 다음 단계를 향한 나름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느끼게 했다. 입장이 다른 양쪽이 확 접근을 한 분위기가 있었다, 고 나는 그렇게 느꼈다. 단, 내 안에서 ‘희망’이 ‘욕심’이 되어 양쪽에서 몇 명만 대표로 나와 마지막 논의로 향한다는 시나리오를 순간적으로 생각했던, 시간은 17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양쪽의 의견을 들은 결과 마지막으로 무엇을 논해야 하는가, 과제는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고 싶어서였다. “다음 일정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까 연단에 오를 수 없다.”라고 하는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씨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서 앞에 나와 말씀을 들었다.

니시, 우에노 씨와 양, 정, 오노사와 아카네 씨의 양쪽을 대표하는 논객이 연단에 올라 마지막 논의가 이루어졌다. (검찰청에 의한) “기소를 취하할 수 없는가”라는 우에노 씨의 과감한 발언으로 (이는 본래 박유하 씨를 지원하는 성명파(声明派) 모두가 생각하는 바였지만) 회의장은 어수선해졌고, 마지막으로 모토하시 씨와 나카노 씨의 총괄 시간으로 넘어갔으나 대립점이 표면화되면서 사회자인 도노무라 씨를 비롯한 실행위원 분들에 대한 감사나 등단해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도 표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다음 집회에 대한 단계를 제시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했다.

3. 증언에서 이야기로 -0328 연구집회의 하나의 과제

마지막 장면에서의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과 사회자의 불찰로 인해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 했으며, 무엇보다도 눈 앞에 보였던 큰 성과마저도 우리의 손 안에서 빠져나감으로써 나는 망연자실했으며, 폐회 후에도 자책감에 빠졌다. 마지막 장면의 자초지종이 납득이 안 갔다.

그러나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리고 양쪽의 의견에 순순히 귀를 기울였던 이른바 중간파 청년으로부터의 열의가 가득한 감사의 메일에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 연구집회에서 ‘얻은 것’을 더 제대로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하튼 양쪽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논의를 한다고 하는 당초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므로.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될 것이므로.

 

이 연구집회를 바탕으로 한 제 2탄이라고까지는 자리매김할 수 없으나, 0328 연구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올 9월4일에 일본 오럴히스토리 학회에서 ‘전시 성폭력과 오럴히스토리’라는 심포지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심포지엄의 등단자의 대부분이 이 연구집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강한 임팩트를 받고 있다. 원래 이 심포지엄은 작년 가을부터 준비가 진행되어 오히려 본 집회보다도 먼저 기획된 것인데, 0312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열린 전시 성폭력에 관한 비교연구적 심포지엄과 본 연구집회를 경험하는 가운데, 이 두 개의 논의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집회는 1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도노무라 씨의 액션은 이어져 나갈 것이다.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전시 성폭력과 오럴 히스토리’라는 심포지엄이 이어받을 논점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즉, 본 연구집회에서도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가 ‘당사자의 이야기’로서 ‘특권화’되어 보고되었는데, 그 증언으로서의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도 나약한 것이었다. 현재의 오럴 히스토리 연구의 수준으로 말하자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다양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면적인 ‘이야기의 장’이나 사회적 문맥으로서의 ‘이야기의 자기장’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다고 이해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랜 운동과 법정 투쟁을 겪으면 당사자의 이야기는 그 운동과 운동체 안에서 규정되어지며(이것은 소위 ‘재판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국 사회의 모델 스토리(일종의 동형적(同型的)이고 표준화된 이야기)에 의해 규정되어진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때, 그곳’에서의 과거의 사건에 관한 이른바 ‘증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곳에서’의 사회적인 문맥으로 규정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거의 체험은 복잡하며 다양한 문맥들이 폭주하고 있다. 다양한 장면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체험자의 해석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때, 그곳’에서의 과거의 사건은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각이 생겨날 수 있으며(이른바 ‘라쇼몽(羅生門)적인 현실’), 그 이후의 전후에 놓여진 상황(이를 전후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속에서 그 해석이 바뀔 수 있으며, 특히 재판의 이야기가 주류가 되면 아무래도 이에 규정을 받게 된다. 지금은 이러한 시각은 오럴 히스토리 연구에서 구축주의 뿐 만 아니라 실증주의도 공유하고 있는 시각이다. 즉, 확고한 부동(不動)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 이야기 속의 다성성(多声性), 이야기의 변화를 어떻게 들어내고 읽어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아라라기 신조(2015)「오럴 히스토리의 전개와 과제」『이와나미강좌 일본의 역사 제21권 사료론』이와나미쇼텐)

 

박유하 씨의 작업의 획기적인 점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건져내어 한국사회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모델적 스토리를 상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평가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오키나와전투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도 ‘당사자의 증언’의 진위가 실증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문제화되었던 경위가 있다. 이 논쟁에 바탕을 둔 도베 히데아키(戸邊秀明) 씨의 최근의 작업(도베 히데아키(2105)「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이 오늘날에 있어서 촉구하는 것」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편저『기억과 인식 속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이와나미쇼텐, 2015)에서 이러한 점이 훌륭하게 해부되고 논해졌다. 오키나와전투와 ‘위안부’ 문제의 문맥은 물론 크게 차이가 있지만 도베 씨가 제시하는 시점은 “당사자의 증언 또는 이야기”에 의거한 논의에 있어서 크게 참고가 될 것이다.

 

박유하 씨의 작업은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큰 장점과 큰 결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박유하 씨의 논의는 운동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수정주의자)에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박유하 씨를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 내용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그러나 요시미(吉見)・우에노(上野) 논쟁 때에도 방법론적으로 실증주의가 구축주의가 의견이 맞지 않았으며, ‘역사의 재심(再審)’과 ‘역사의 수정’은 표리의 관계에 있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식민지 지배는 범죄였다고 규탄하면 끝날 정도로 ‘역사의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 사실 이러한 점에 수정주의자가 현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가지게 된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시점을 바꾸면 궁극적으로 “식민지 지배 속에서의 주체성은 단어의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 주체적인가”라는 어려운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거시적인 의미에서 식민지 지배의 죄는 명확하다. 물론 이 연구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수정주의자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 하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보다 더 좋은 삶의 방식, 보다 더 좋은 생활을 지향하며 노력을 한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아이들은 천지난만하게 노력을 하며, 세상살이에 익숙한 어른들은 수단으로서 노력도 한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일종의 ‘주체성’을 식민지 지배라는 큰 틀에서의 ‘몸부림’ 밖에는 안 된다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가? 거시적인 규정성(規定性)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mesolevel)의 상황들을 꼼꼼하게 봐 가는 것이 식민지 지배를 생각하는 시점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의 진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 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 씨는 수용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0328 연구집회에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식민지 지배라는 시스템이 지니는 복잡함과 교활함에 입각한 치밀한 논의의 장이었다. 그러나 0328 연구집회는 강한 임팩트를 남겼으며 적어도 다음 심포지엄에 강렬한 자극과 숨결을 남겨주었다. 도노무라 마사루 씨의 ‘만용’은 계속 살아 있으며, 나는 적어도 계속 살아 있게 할 것이다.

0328 연구모임 – 센다 유키(千田有紀, 무사시대 교수)

센다 유키(千田有紀)

 

아라라기 :그럼, 이제 지정토론자 두 분만 남으셨는데, 젠더 연구의 주역을 맡고 계신 센다 유키 씨 부탁드리겠습니다.

 

센다 유키:센다 유키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코멘트에 관한 제안이 왔을 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망설였습니다만, 저는 예전에 외국어대학교에 근무를 했었는데 B쪽에 앉아 계신 분들과 함께 연구를 한 적도 있고, 또 그런 가운데 박유하 씨와도 함께 프로젝트를 했었던 경험도 있어서 말씀을 좀 드려야겠다 싶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이 종군 ‘위안부’ 문제에 접하게 된 것은 1991년 할머니께서 커밍아웃하시기 전에 대학시절인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저와 성이 같습니다만, 센다 가코(千田夏光) 씨의『종군위안부』문고판을 읽고 종군 ‘위안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유하 씨도 센다 씨의 책을 인용하고 계신데, 저는 오히려 센다 씨의 책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굉장히 강렬한 위화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역시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기술되어 있는 부분에서, 일본인 ‘위안부’는 창부였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공창제도 하에 있었던 일본인 ‘위안부’는 나이가 좀 든 여자이며 성병을 가지고 있었고 창부였다는 식으로 상당히 모욕적인 기술을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인 소녀들은 젊은 처녀의 소녀들이 연행되어 왔기 때문에 가엾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방금 전에 김부자 씨도 말씀을 하셨지만, 사실로서 젊은 여자아이들이, 소녀들이 징용되었다는 사실이 존재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때 역시 그 피해를 강조할 때, 그럼 일본인 ‘위안부’는 성병이 있고 창부였으니까 괜찮다, 나이가 든 여자들이었다 라는 식으로 멸시하는 형태로 종군‘위안부’를 이야기해도 좋은가 라는 의문이 계속 제 안에 남아 있고, 확실히 해소가 되지 않는 제 안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니시노(西野) 씨나 오늘도 팸플릿이 있습니다만, 방금 전에 발표하신 오노자와(小野沢) 씨나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연구가 진척이 되고 있다는 점은 제 자신에게 있어서 굉장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역시 세계대전 전의 공창제도 하에서 창부가 되었던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특히 쇼와공황 후에 생계가 어려워진 동북지방에서 팔려온다거나, 팔려온 소녀같은 사람들이 공창제도 하에서 창부가 되었는데, 이러한 일본인 ‘위안부’에 관해서도 저는 깊은 문제점과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종군위안부’ 문제가 문제화된 이후에 추궁하려 하면 오히려 말을 못 하게 되었다고 할까, 일본인인 당신이 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 말하는가,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식민지주의의 문제라는 식으로, 제 자신의 문제의식이 소거되어지는 점과, 같은 ‘위안부’여도 일본인 ‘위안부’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식의 언설이 있다는 데 대해 계속 위화감을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 자체는 해소된 것 같으므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제 자신은 아까도 나왔습니다만, 모델적 피해자 같은 것을 만들지 말고, 나이가 어리다든가 처녀라든가가 아니라, 역시 어떠한 형태이든 ‘위안부’라는 제도가 비참했다 라는 형태로 이야기가 문제화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박유하 씨의 이 책이 문제가 없다라든가, 하자가 없다라든가, 역사 자료들을 꼼꼼히 다뤘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문장도 좀 더 뭐랄까 기술방식이 상당히 거칠다는 여러분들의 생각은 물론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바탕 하에 평가를 한다면, 역시 폭력의 문제의 복잡성이라는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조선인 업자들이 상당히 직접적으로 조선인 ‘위안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는데, 폭력을 휘두르는 형태로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원시적(primitive)이며 지배로서는 파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면 말을 듣게 하지 못 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의 문맥에서도 포스트 구조주의 이후에 지배로서는 파탄되었다고 봅니다. 오히려 보다 더 교묘한 폭력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증언집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눈치를 보는 식으로 이런 행동을 하면 마음에 들어해 줄 지도 모른다는 형태로 상대방의 눈치를 보는 것, 이러한 것이 보다 더 교묘한 지배이며, 또한 한 단계 위의 지배라는 것은 자발성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눈치를 보지 않더라도 스스로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 라는 형태로 주체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가장 비참한 지배의 완성형으로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황민화 정책 하에 일본인으로서 자신이 국가에 봉사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박유하 씨는 모두가 그러한 동지적 관계라든가, 애국적이라는 기술을 하고 있는 인상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 라고는 단언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것 자체가 실로 비참하며,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러한 것 자체가 비참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하나로 결속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최근 10년,20년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만, 제 자신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많이 망설여집니다만, 마찬가지로 민족도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하나로 결속된 존재는 아니며, 박유하 씨가 업자의 문제를 다룬 것 자체도 중요한 문제 제기이고, 그러한 것 자체가 국가의 책임을 면책하는 것은 물론 아니며, 오히려 같은 민족 하에서 그러한 폭력적인 관계, 이해관계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식민지주의의 비참함을 두드러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저는 이러한 논의는 논의 자체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을 하며, 여러분들도 거듭 말씀을 하셨지만, 형사라든가 민사라는 그런 장소가 아니라, 이렇게 열린 장소에서 제대로 논의를 해 가는 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겠습니다.

논의를 깊게 하고 싶은 일 – 와카미야 요시부미(전 아사히 신문 주필)

연구 집회에서 다양한 주장을 듣고 큰 공부가 되었으나, 동시에 논의가 상당히 어긋나는 안타까움이 쌓였다. 네 가지 관점에서 감상을 적어 두고 싶다.

 

(1) 왜 어긋났을까?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쪽은 오로지 박유하 씨가 든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사실과 인용의 ‘잘못’을 집어냈다. 지지자들은 그러한 사안에 대한 의견 개진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저서의 ‘전체적인 의의’를 강조했다. 반대로 비판하는 쪽은 박유하 씨가 던진 근본적인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공격으로 일관한 감이 있었다. 이렇게 엇갈림이 이어졌다.

우선 집회는 말하자면 박유하 씨가 없는 ‘결석재판’으로 개개의 사항까지 그녀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비판에 반론하든, 혹은 해당하는 부분이 있다면 정정하든지 해서 박유하 씨의 솔직한 변을 듣고 싶다.

반대로 ‘모두 잘못된 날조본이다’라는 비판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극단적이며 설득력이 떨어진다. 박유하 씨가 던진 근본적인 의문은 왜 위안부 문제가 여기까지 장기화하고, 해결이 막혀 왔는가에 있다. 일본 정부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상당수의 위안부가 받은 아시아 여성기금을 지원단체가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수령을 막는 것 만으로 된 것일까? 또 박유하 씨가 일본이라는 국가에 ‘법적 책임’은 없다고 한 점에 대한 논의는 많이 있어서 좋은데, 그럼 일을 직접 착수한 업체는 국가에 의해 조종됐다는 것만으로 책임은 없는가. 박유하 씨의 문제제기를 ‘일본을 면책하는 논리’라고 단정하지 말고 연구 집회에 어울리는 토론을 하길 바랬다.

 

(2) ‘동지적 관계’였나?

비판 중 하나는 병사와 위안부 사이에서 한정적이든 간에 ‘동지적 관계’였다고 한 박유하 씨의 담론에 집중됐다. 이것은 주디스 허만이 『트라우마』에서 지적한 ‘피감금자가 고립됨에 따라 감금자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해져 간다’는 현상으로, ‘동지적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었다. 이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현상으로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귀중한 지적이었다고 본다.

다만, 모처럼이었으니 좀 더 깊은 논의가 있기를 바랬다. 병사들은 단순한 ‘감금자’였을까? 그들도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에 동원된 피해자(피감금자)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더구나 거기는 전쟁터다. 잘못하면 부대가 모두 적의 공격에 처하기 쉽고, 병사도 위안부도 생사를 같이 하는 운명이다. 위안부에게 있어서도 결정적인 적은 외부에 있었다. 그런 열악한 처지에 있는 병사들에게 여성들이 민족의 벽을 넘어 인간으로서 약간의 동정이나 공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도 아닐 것이다.

애당초 일본군 병사 중에는 조선 출신도 있었는데, 아무리 차별이 있든 그들이 전쟁터에서 일본인 병사와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위안부와 병사의 관계도 그와 닮은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위안부가 상대를 한 병사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 이러한 구조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커다란 죄악, 그리고 여성의 비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박유하 씨가 ‘동지적 관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해석했는데, 틀린 것일까? 다음 기회에 논의를 깊게 하고 싶다.

 

(3) ‘자발적’이었나?

부끄러운 일인데, 70-80년대 한국에는 ‘기생 관광’이 성행하여,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많이 방문했다. 일찍이 서울에서 유학한 나는 젊은 여성을 뻔뻔하게 호텔로 데리고 들어가는 남자들을 보면 외면하고 싶어졌다. 여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러나 그녀들은 업자에게 지배당하고 임금을 빼앗기는 존재였지만, 공권력에 강요당한 것은 아니었다. 심각한 가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음에 틀림없고, 본래의 의미의 자유의지는 결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물리적인 강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자발적’이었다. 이것도 슬픈 현실이다.

식민지 시대에 이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이 있었다 것은 틀림없다. 가난도 남존여비의 풍조도 보다 심한 시대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지 못한 그녀들은 ‘어차피 해야하면’이라고 모집에 응해서 전쟁터로 간 예도 있었다. 박유하 씨는 그러한 현실에 눈을 돌리고, 모든 ‘소녀를 강제로 데려 갔다’는 것처럼 보는 시선이 부자연스럽다고 지적. 더욱이 그녀들이 ‘자발적’으로 모집에 응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 구조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해석도 틀린 것일까?

 

(4) 명예를 훼손했는가?

박유하 씨 기소에 대해서 ‘이 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됐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항의 성명을 한 점에 대해 ‘소송한 위안부들의 마음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항의글이 오해를 주었다면 유감이지만, 명예 훼손은 당사자의 ‘기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박유하 씨의 책으로 그녀들의 마음이 다쳤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킨 저작의 역량 부족을 물어도 좋다. 그러나 정말로 ‘명예’가 훼손되었는지의 여부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항의 성명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위안부 분들의 슬픔의 깊이와 복잡함’을 느낀 사람이 많고 일본에서 자유주의로 불리는 사람들이 큰 공감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더붙여 말하자면, 박유하 씨의 책은 위안부에 다양한 케이스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 원고인 각각의 여성들에 대해 ‘이렇다’라고 쓴 것이 아니다. 명예훼손으로 재판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을 둘러싼 논의는 많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언론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며 재판을 하고, 특히 형사 처벌까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비판하는 파가 그 논의를 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형사 처벌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아쉬웠다.

『제국의 위안부』가 여는 것 – 가노 미키요(게이와가쿠엔 대, 여성사・젠더사)

‘박유하 씨 기소에 대한 항의 성명’에 불민한 나도 <저명한 문화인>에 섞여 이름을 올렸다. 성명 발표 후 여러 친구로부터 전화와 메일을 받았다. 모두 『제국의 위안부』에 비판적이고 고소의 <정의>를 확신했다. 연락을 해 준 건 나의 무지를 염려해서였던 것 같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박유하 씨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걸 느꼈다.

3 월 28 일 연구 집회는 논의가 맞물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각각의 발상의 차이를 확인했다는 건 스타트 라인으로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늦었지만, 내가 왜 성명에 이름을 올렸는지 염려해 준 친구들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여기에 써 두고 싶다.

 

  •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훼손’에 대해서

‘항의 성명’에는 ‘이 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됐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쓰여져 있다. 명예가 훼손됐는지 어떤지는 당사자가 정할 문제이니, 이 표현은 문제가 될 거라고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올린 건 ‘명예훼손’이라는 말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왜 전작 『화해를 위해서』 는 문제가 되지 않고, 『제국의 위안부』는 됐는가 하는 점이다. 고소를 한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은 『제국의 위안부』의 ‘자발적 매춘’이나,  일본 병사와의 ‘동지적 관계’, ‘애국’이라고 기술한 부분에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은 『화해를 위해서』의 「위안부」 장에도 있다.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당시의 일본이 매춘을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 온 여성도 당시 일본이 군대를 위한 조직을 발상했다는 점에서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헤이본샤 라이브러리판 p90, 역자 주: 이 부분은 『화해를 위해서』 한국어판(뿌리와이파리)에서 발췌)

「그들이 ‘일본인’으로서 ‘애국’하기 위해 갔다면, 그것을 구조적으로 종용했다는 의미에서 더욱 ‘일본의 책임’이 커질 수밖에 없다」 (헤이본샤 라이브러리판 p91, 역자 주: 이 부분은 『화해를 위해서』 한국어판(뿌리와이파리)에서 발췌)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 의 취지 그 자체이다. 왜 같은 취지이며 표현인데 『화해를 위해서』는 명예훼손을 묻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답은 단순한 것 같다. 1월에 일본에 방문한 나눔의 집 소장에 따르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의 해당부분을 수 차례 읽어 드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3 · 28 집회에서 양징자 씨가 발언한 것처럼, ‘거짓말과 속임수를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꿰뚫어 본’(자료집 p63)다는 그들이, 읽어주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을 것이다.

또 하나, 의문이 든 이유가 있다.  20 년 전, 모리카와 마치코 씨가 구성하고 해설한 『문옥주  버마 전선 방패 사단의 ‘위안부’였던 나 』(나시노키샤(1996), 증보 신장판(2015))는 뛰어난 여성 문제 연구서로 제 16 회 야마카와 기쿠에 상을 수상했다. 나는 수상 심사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추천했는데, 반대도 있었다. ‘운동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지 않을까’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 운동의 주류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의해서 ‘위안부 = 성 노예’라고 정의되어 국가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된 문옥주 씨의 ‘위안부’ 생활은 ‘성 노예’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았다.

문 씨는 일본 노래를 외우는 등 일본 병사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인기인이 되어,  랑군 시장에서 하이 칼라 옷과 보석을 구입하거나 큰 돈을 저축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일상이 비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 상병 야마다 이치로와의 <사랑>은 문 씨에게 얼마나 구원이 되었을까? 그는 문 씨에게 청혼하며 조선인이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고상하고, 상냥하고, 익살스럽고, 지혜로웠다고  50 년이 지난 후에도 문 씨는 거리낌없이 야마다를 칭찬한다.

이러한 문 씨의 모습에 나는 감동했다. 어떤 가혹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생존 전략을 구사하고 정체성을 찾으며, 사랑을 키우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예를 훼손하기는 커녕 자랑할 만한 일처럼 보인다.

 

  • 『제국의 위안부』가 여는 것

그러나 물론 문옥주 씨의 예를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 책은 ‘위안부 문제’ 를 부정하는 논거가 되고 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저금 센터 원부라는 공문서에 남은 문 씨의 다액의 군사우편 저금을 가지고 ‘역시 위안부는 막벌이 창녀다’라는 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염려한 대로 운동의 발목을 잡게 됐다.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이 ‘명예 훼손’이라고 한 것도 이런 견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옥주 씨의 필사적인 생존 전략은 ‘위안부 문제’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고, ‘성 노예’에서 <특권적>인 일본인 ‘위안부’까지 다양한 ‘위안부’를 감싸 안는 큰 틀 ーー. 박유하 씨가 사념을 집중한 ‘제국의 위안부’라는 관점은 여기에 연결되는 게 아닐까. 3 · 28 집회에서 요시미 요시아키 씨는 업자의 책임보다 군의 책임 쪽이 무겁다고 말했다. ‘박유하 씨는 이같은 구조적인 인식이 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자료집 p71). 그러나 박유하 씨의 ‘제국의 위안부’는 군대도 통합 식민지 지배라는 큰 구조를 묻고 있다.

‘제국’이라는 틀을 세울 때, 영역 내의 <민족>의 경계는 모호하다. 특히 전시 하의 ‘대일본제국’은 ‘내선 일체’를 내걸고 조선반도의 ‘황민’화를 도모했다. 물론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차별은 있다.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사이에도 분명한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인 ‘위안부’가 ‘초센초센(조선, 조선)이라고 바보 취급 하지마, 텐노헤이카(천황폐하)는 같다’라고 대꾸 못할 건 아니었다.

<민족>의 경계는, 젠더 관점을 넣어 보면 더욱 까다로워진다. 1925 년의 보통 선거법은 여성을 배제했지만, ‘내지’거주 식민지 남성은 참정권을 받았다. 참정권은 ‘권리 중의 권리’이며, <국민> 권리 중  가장 큰 권리라고 한다면, 일본 여성은 <국민>이 아니었지만, 재일 조선 남성은 <국민>이었던 것이다. ‘제국’에게 식민지 가부장제 이용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패전으로 인한 ‘제국’의 해체로, 그것은 역전됐다. 일본 여성은 <국민>으로, 식민지 남성은 <비국민>으로. <민족>의 경계가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올해 4 월 매스 미디어는 ‘여성 참정권 70 년’을 보도했지만, 동일한 선거법 개정으로 식민지 남성이 참정권을 박탈당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헌데 ‘위안부’에 맞추면 <민족>의 차이보다도 젠더의 문제가 된다. 가혹한 전선에서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 병사의 <민족>을 넘은 ‘동지적 관계’가 성립해도 전후의 처우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일본군 병사는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고, 살아 남으면 연금도 지급된다. 그러나 ‘위안부’는 연금은 커녕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혀 가족과 고향조차 잃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인 ‘위안부’도 마찬가지다. 미와 아키히로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노래부르고 있다. 「싸움에 지고 돌아 가면 나라 사람들에게/훈장 대신 침을 맞고/손가락질 당하고, 험담을 듣고/ (생략) /대일본제국 만세 만세 만세 “(「조국과 여자들」)

 

『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 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 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3 · 28 집회에서 역사학 분야로부터 실증주의적 비판이 잇따랐는데, 물론 그 점에는 이론상에서도 실천상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니시 마사히코 씨가 말한대로, 이 책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그 앞에 열리는 문제를 함께 단련해 가기를 바란다.

3.28 집회를 끝내고 –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도쿄대 명예교수)

당일날 나에게는 지정토론자의 역할이 주어졌다. 5분이라는 시간 제약 아래 충분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여기에서 설명하고 그날의 소감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로, 집필물을 법정에 세우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이 집회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뜻 있는 자들의 성명이 계기가 되어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명에 동의한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여 나의 입장은 사상이나 연구 상의 대립은 어디까지나 시민영역(이와 같은 자리의 학자 간의 의견 교환을 포함)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박유하 비판파는 형사고발의 원고가 ‘위안부’ 피해당사자라는 점을 절대시하고 있는데 설사 원고가 고소를 해도 기소에 이르기까지는 검찰권력의 의사결정이 수반하게 된다. 당사자가 ‘상처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사직 당국이 ‘명예 훼손’ 판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은 판정을 검찰이라는 행정권력이 행사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리고 검찰이 ‘명예훼손’이라 판정을 내린 데 대하여 그 판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판단이 엇갈리는 연구 상의 견해를 사법적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명’이 당사자의 고소에 대해서가 아니라 검찰의 형사 기소에 대하여 발표된 것에 주의해야 한다.) 많은 연구자가 동의하리라 생각되는 이러한 최소한의 동의조차 이룰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고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집필물의 저자를 형사 피고인으로  법정에 세움으로써 본인이 받게 될 사회적, 심리적 타격의 심각성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렇게 당해도 당연하다는 듯이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징벌적인 태도에도 커다란 위화감을 느낀다.

둘째로, 이 책의 평가에 대하여. 분명히 이 책에는 비판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같은 문제점이 많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설혹 형사기소에 반대를 하고 있어도 이 책에 대해 전부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집회에서도 문제로  지적된 ‘동지적’, ‘애국적’, ‘자발적’이라는 단어의 쓰임에 대해서는 오해를 초래할 표현과 허점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맥으로 판단한다면 ‘구조적 폭력’ 아래에서 ‘동지적이라고 간주되는’이라든지 ‘강제된 자발성’으로 읽을 수 있음은 저자가 이 책 전체에서 거듭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다. 정영환씨의 해석처럼 ‘업자  주범・군 종범설’이라는 주장으로는 도저히 읽히지 않는 것은 문맥을 통해서 봐도 분명하다. 또한 인용 의 하자를 가지고 이 책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내 견해로는 이 책의 평가해야 할 점은 ‘제국’, 즉  식민지 지배의 죄를 전면에 끌어낸 데 있다. 그것은 조선인‘위안부’문제에  일반적인‘전시하의 성폭력’의 문제로 해소할 수 없는 ‘식민지 지배’의  특수성이라는 차이를 가지고 들어 온 데 있다. 일본 전통의상, 일본식 이름, 일본어 사용을 강요 당한 조선인‘위안부’는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일본인 여성의 대체물’이었으며 그런 뜻에서 일본군의 ‘동지’적인 입장에 있었으며, 전쟁터에서는 피점령자와 연합군으로부터 ‘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오히려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과거 이상으로 엄격하게 추궁하고 있으며, 이 책을 평가하는 많은 일본인 지식인은 그러한 지적을 엄숙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비판자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

‘전쟁의 성폭력’ 비교사가 전망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강간, 매매춘, 연애에 이르는 연속성과 차이를 논할 필요성이 지적되고 있다. ‘구조적 폭력 아래서  강요당한 협력관계와 공범관계’라고 하는 복잡한 상황을 복잡한 상태인 채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키나와전의 ‘집단자결’의 자발성과 강제성의 관계를 논할 수도 , 또한 조선인 일본군 병사에 대하여 논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이 책의 저자가, 오늘날 사태가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 대한 책임을  한국 내의 운동 단체에 묻고 있는 것에 대해서 나는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지적은 공정하지 않다고 공공적인 자리에서도 발언했으며 저자 본인에게도  직접 전달했다는 점을 명시해두고자 한다.

이 집회는 지금까지 함께 자리하는 일이 없었던 연구자가, 대립되는 견해를 넘어 한자리에 앉아 토론을 하는 획기적인 기회였다. ‘성명’ 동참자의 상당수는  사태의 경직성을 우려하고,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며, 또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결코 면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으며  비판파에게 문제제기 하고 다가가는 자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판파는 그것에 답하려고 하지 않은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같은 편이 될 수 있었을 지 모르는  사람들을 적으로 상대함으로써 소수자의 운동은 더욱 더 분단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우파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위안부’문제를, 온전한 ‘공론’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공동투쟁’이 필요할 텐데 원칙적인 논의를 되풀이하는 그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해결’할 생각인가. ‘다음으로 이어지는 논의’를 바라는 우리들의 생각은 실현되지 못하고, 참석자에게 허탈감만 남기고 끝났다고 한다면 대단히 유감이다.

끝으로 어려움을 딛고 이 토론 집회를 실현시켜주신 실행위원 여러분께 짐심으로 감사드린다.

3월 28일 연구 집회를 끝내고 – 도노무라 마사루(도쿄대 교수)

 

 

박유하의 논저를 둘러싸고 열린 이번 집회에 대해서는 ‘의의가 깊은 모임이었다’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 자신은 단상에서 발화된 말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발언을 기록으로 남기고 공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다. 통상의 집회나 각종 연구회 이상으로 신경이 쓰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발표자/코멘테이터/지정토론자 부탁을 들어주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실행위원회 멤버들은 상호 인식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일단은 집회를 의의 있는 것으로 실현시키겠다는 점에서 일치하여 준비에 임했다. 여러 어려운 조건을 넘어서서 간신히 집회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이외의 실행위원 4명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는 것을 감히 써 두고 감사 드리고 싶다.

그리고 역시 운영 상의 실수가 있었던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여러 가지 반성은 있지만, 박유하 비판측, 옹호측이라는 식으로 나눠 참가등록을 실시해서, 접수를 분리한 것처럼 여겨지게 한 것은 실수였다. 이것은 나의 실수다. 실제로는 ‘니시/모토하시 관계자’, ‘김/나카노 관계자’ 이외에도 실행위원회에서 협의/확인 후 도노무라가 연락을 한 ‘기타/미디어 관계자’의 등록도 있었고,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니시/모토하시 관계자’ 중에 ‘박유하씨의 논저와 관련하여 평가가 나뉘는 것에 대해서 자기도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에 공부할 생각으로 왔다’고 하는 사람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 싶다.

나 자신은 당일 말한 것처럼 ‘회색파’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비판의 형태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박유하의 언설은 새로운 역사수정주의라고 하며, 그녀의 저작을 완전히 부정하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서 내쳐버려도 될까, 비판한다 하더라도 박유하의 논리를 바탕으로 식민지주의 비판의 논의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 니시 마사히코씨와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다만, 니시쪽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2015년 11월 26일의 박유하 기소에 대한 항의성명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과 박유하를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니, 전자는 ‘위안부’ 피해자나 그녀들을 지원하는 운동과의 접점을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반면, 후자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느껴졌고 그 부분이 신경 쓰였다.

얼마 전에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피해자와 관계를 맺고 활동해 온 사람들이 박유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이번 연구 집회를 발안한 이유 중 하나다(그 외에도 여러 가지 경위는 있지만 생략한다).

회장에 있었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 집회에서는 박유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발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우세’한 분위기가 있었다. 분명히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하여, 사료를 원점에서 찾아보고 문제점을 밝힌 작업은 의의가 있고, 그것을 위해 들인 노력에도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오랜 세월 ‘위안부’ 피해자들 옆에서 그녀들과 함께 운동을 전개해 온 양징자의 코멘트에는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느끼고 있던, 박유하에 대한 비판의 형태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역사 연구자니까, 역사 연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아래에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확인 차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역사 연구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위의 입장,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오히려 역사학이 잘 못하는 영역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내가 역사 연구 분야에서 만큼은 어느 정도 전문가 그룹으로 인정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위안부’를 둘러싼 역사 연구는 그것이 커다란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1990년대 초반부터 생각해 보면, 상당히 진전됐다. 당시 중요한 논점 중 하나가 된 것은 일본 국가의 관여였고(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이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리고 다녔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고, 김학순씨가 피해자라고 밝히고 나서면서 ‘위안부 문제’가 쟁점화된다. 이러한 경위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실증이 정교하고 치밀하게 쌓아 올려졌다. 그리고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우파의 허위 선전에 대항하는 형태로 폭력성, 자유의 박탈도 다시금 강조되었다. 1990년대 초에는 ‘위안부’ 연구에 돌입하고자 하는 역사 연구자도 없었고, 애초에 그것이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현재까지 많은 사료의 발굴에 노력하고 사실을 해명해 온 연구자들, 시민운동 관계자들은 정말로 훌륭한 일을 해냈으며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에 의한 강제가 있었다는 것, 알기 쉬운 물리적 피해가 강조되어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면 그것만 문제인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되고 만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 역사 연구자가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며, 직접적인 국가에 의한 폭력의 배경에 있는 모든 사실과 현상도 시야에 넣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조선사 연구회나 역사학 연구회 등의 모든 단체에 의한 2015년 5월 25일자 성명에서는 ‘최근의 역사 연구는 …… ‘위안부’ 제도와 일상적인 식민지 지배/차별 구조와의 관련도 지적’해 왔다고 하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역사 연구의 성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충분한 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널리 시민들에게 알려져 있을까? 여전히 ‘위안부’ 피해는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나 물리적인 폭력을 언급하여, 이렇게 끔찍한 사실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오지 않았는가?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반론도 그런 식의 것이었거나, 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긍정적 평가 중 하나는 그런 이야기 방식을 넘어서서 식민지 지배의 심각성을 논하려고 한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 책에 대해, 구조적 강제성을 논하고 있다(아사노씨), 식민지의 문제 전체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우에노씨)라는 평가나,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폭력의 심각성을 지적한 발언(센다씨)도 그러한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위안부’ 문제나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온 역사학자라면 이러한 상황을 앞에 두고 일단은 자신들의 ‘협량’, ‘역부족’을 자각(고통를 동반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역사학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즉, 문학연구자인 박유하가 할 수 없었던 형태로, 국가가 직접 관여하지 않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일상적으로 존재한 식민지 사회의 실태,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위안부’들의 피해를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 이외의 시민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지혜를 짜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한 논저를 다수 세상에 내보내는 일, 이 일이야말로 ‘위안부’ 문제, 식민지 지배 문제를 연구 테마로 하는 역사 연구자들에게 요구되는 임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식민지 지배 중 일본의 가해에 대해 자주 우파 쪽은 국가의 직접적인 관여는 없었다, 민간에 의한 임의의 행위였다, 자발적 활동이었다라는 것을 들어 국가의 책임을 면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식민지 지배의 반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민운동가들이나 역사 연구자들의 반론은 많은 경우, 실태로서 현저한 인권침해가 있었고 그렇기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 실태로서 국가가 관여했다는 식의 사실 제시다. 예를 들어, 노무 동원과 관련하여 우파에서 ‘징용’과는 다르다, 따라서 나라에 책임은 없다라는 말을 하면, 이에 대한 반론은, 모집이나 관의 알선으로 온 노동자도 똑같이 노예 노동에 종사시켰다, 요원 확보에는 경찰이나 말단 행정 공무원이 관계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는 창씨개명과 관련해서도, 우파에서 신고제였으며 강제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그에 대한 반론은 다양한 압력이 가해진 결과로서 많은 신고가 있었던 것이라는 식이다(엄밀히 말하면, 법정창씨라는 제도가 있어서 법적으로도 강제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미즈노 나오키씨나 고 김영달씨의 연구를 참조하길 바란다).

이러한 반론은 필요하고 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으로 일관할 경우,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강제가 아닌’ 것이 가지는 의미와 그로부터 발생된, 지배 당하는 민중의 고통은 시야 밖에 놓이게 된다. 위의 예에서 말하자면, 국가의 행정 명령으로 어떤 사업소에서 일할 것을 강제=징용은 아니라고 함으로써 가능해지는, 노예적인 노동의 간과나 국민 보호의 부재 같은 국가의 ‘책임 회피’는 문제에서 빠지게 될지도 모르고, 창씨를 신고할지 말지를 두고 생기는 조선 민족 내부의 균열이나 자신이 직접 신고하여 이름을 바꿈으로써 느꼈을 자책감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위안부’와 관련하여 생각해도, 국가가 행정 명령을 내서 군인에 대한 성적 위안을 명령한 것은 아니다(징용 명령서로 그것을 명령한 것도 아니고, 국가총동원법의 조문을 통해서도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더러운 일에는 국가가 관여하지 않으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는 국가의 비열함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피지배 민족 내부에 복잡한 고통을 발생시켰다. 이렇게 생각하며 ‘국가에 의한 강제는 아닌’ 것의 문제성을, 물론 ‘실태로서의 국가에 의한 강제’를 지적함과 동시에, 이야기해 가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상,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고, 식민지주의의 문제를 보다 깊게 생각할 때 참고가 되길 바라며 이야기해 보았다. 집회 운영상의 문제도 포함하여 기탄 없는 비판을 부탁 드린다.

 ‘서발턴(subaltern)의 말’이란 무엇인가?, 3.28집회를 돌아보며 – 모토하시 데쓰야(도쿄게이자이대 교수)

 

모토하시 데쓰야

 

3.28연구 집회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집회의 마무리 발언으로 당일 대강 다음과 같은 감상을 말했다–

“일단 첫 번째 감상은 ‘서발턴’에 대해서입니다. 이번 문제를 생각하면서 알게 된 것은 왜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형으로 제의하고,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발턴에게 말하지 못 하게 하는’ 것도, ‘서발턴에게 말하게 하는’ 것도 둘 다 똑같이 폭력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더 생각해 보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말하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것일까요? ‘발화된 말’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나, 발화되어 버림으로 인해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듣는 사람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말하는 사람 본인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건 ‘없었던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지만, 그 ‘알 수는 없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헤아림이나 조심스러움이 없으면, 서발턴의 목소리는 더욱더 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 대변표상(代弁表象)이라는 문제는 말을 통해 살아가는 우리들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아포리아이고, 그것에 대해 계속 자각적이고자 하는 것이 이번 문제에서 무언가 결실을 맺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금 전 양징자씨가 소개해 주신 김복동 할머니의 ‘미소’(역자주 : 개중에는 좋은 군인들도 있어서 기다려졌다고 증언하며 띄운 미소)가 마음에 와 꽂혔습니다. 그것을 들은 것만으로도 오늘 여기에 온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감상은 ‘후미에(역자주 : 그림 밟기. 에도시대 때, 기독교 신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예수나 마리아의 그림을 밟게 한 것. 또는 그 그림.)’에 대해서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른바 ‘후미에적인 상황’을 만든 것이 박유하씨의 저서 출판인지, 그것에 대한 고소인지, 박유하씨의 저서에 대한 비판인지, 몇 개의 성명인지, 그것을 물어봐야 별 의미는 없겠지요. 오히려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후미에’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처럼 넓은 의미로 ‘인문학’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텍스트를 읽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거나 자신의 말로 생각하는 것은 매일 ‘후미에’를 밟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말을 재료로 하여 생각하는 행위인 이상,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즉 ‘인문학’이란 ‘후미에’에 다름 아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후미에’를 밟아야만 하는 사람들을 어떠한 동기로 한 쪽 진영에 속해 있다고 공격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확장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더 좋지 않은 일은 ‘후미에’를 앞에 두고 사고정지에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후미에’란 사고를 유도하는 것이므로 ‘후미에’는 계속 만들어야 할 것이며, 때로는 용기 있게 밟아야 할 테지만, 그걸 가지고 타자를 판단하는 데에는 한없이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 번째는 ‘항의 성명’에 대해서입니다. 어떤 형태이건 간에, 피해자/생존자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형태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그분들의 힘을 키우는 일에 이번 집회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를 각각의 현장에서 이제부터 우리들 각자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건 서로의 입장을 비판하는 일, 서로의 의견에서 배우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논의를 듣다가 마지막에 개인적으로 저도 이 곳에서 실제로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저는 ‘박유하씨의 기소에 대한 항의 성명’에 서명한 한 사람입니다만, 그 안에 ‘무엇보다도, 이 책으로 인해 전 위안부 분들의 명예가 손상됐다고 생각되지 않고’라는 한 문장이 들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여기에서 반성하고자 합니다. 반성의 이유는 무엇보다 나눔의 집의 생존자 분들이 대체 어떤 상황에서, 재판에 의한 고소라는 수단을 단행했는지 저 자신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그 모든 행동이 옳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건에 대해서 생존자 분들이 그러한 수단을 취하신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적어도 저처럼 그 곳에 없었던 사람이 ‘손상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망설이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내 발언의 주안점은 서발턴의 생각은 어떻게 표상 가능할까라는 물음에 있으며, 그 답은 어떤 사람에게도(본인이나 당사자도 포함해서)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당일 집회에 나오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이 발언을 통해 내가 던진 공은 완전히 목표를 빗나갔고, 결국 내가 말한 이 ‘마무리 발언’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었다. 그 일과 관련하여 여기에서 집회를 끝낸 후의 나 나름대로의 반성과 감상을 기록해 두고 싶다.

먼저, 위와 같은 ‘마무리 발언’을 함에 있어서, 내 쪽에서 몇 가지 큰 전망의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제국의 위안부』 라는 저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집회에서 나온 논의로부터 무언가 결실을 평가하면서 그 성과를 토대로 이후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임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발턴’과 ‘후미에’에 주목하는 것이 이론적인 핵심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인문학 연구자로서 이러한 ‘연구 집회’의 마무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런 문맥에서 ‘항의 성명’에 대한 자신의 반성도 표명했다. 나 한 사람의 행동이나 결의 자체는 문제의 크기에 비추어 볼 때, 전혀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집회의 의의를 재확인하고, 앞으로의 운동이나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 나름의 ‘연구 집회’에 대한 생각은 참가자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름을 말해 죄송하지만 내 발언 다음에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측에서 ‘마무리’로 발언한 나카노 시게오씨는, ‘마무리’란 어떤 ‘접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와는 인식이 완전히 달랐고, 그 점에서 나의 마무리는 ‘헛스윙’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의 두 번째 ‘오해’는 ‘미디어’ 참가자들의 취급과 속내에 대해서다. 나는 이번 ‘연구 집회’라는 성격과 의의를 생각해서, 설령 미디어나 저널리즘에 적을 둔 사람들이 참가하더라도 각자가 『제국의 위안부』라는 저서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듣고 개인적으로 새로운 지식과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 내가 한 상정이 안이했던 듯 하다. 이미 집회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 등에 투고된 기사 중 몇 개가(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보여주는 것처럼 기자나 저널리스트 중에는 집회에서 무언가를 겸허히 배우겠다는 자세보다는, 자기나 자기가 소속된 미디어를 통해 이미 나온 이 문제에 관한 판단을 추인하고 강화할 방편으로 이번 집회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여겨지는 기사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런 기사를 쓰는 사람들이 ‘서발턴’이나 ‘후미에’를 둘러싼 원리적 고찰 같은 ‘귀찮은’ 부분을 무시하고, ‘항의 성명’의 서명인 중 한 명의 ‘반성’에 달려들어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안이한 말로 결론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나의 ‘마무리 발언’에 대한 견해가, 대립을 부추기는 일이 보도의 책무인 양 기사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별 상관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상정하지 못한 나의 판단 미스에 기인한 것이고, 나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반성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연구 집회의 목적은 『제국의 위안부』라는 저서에 관해서 의견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말을 나눔으로써 타협이나 경계의 확인을 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피해자의 의향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해결되기를 목표로,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각자가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에 있었다. 과연 집회는 그러한 목적에 조금이라도 다가갔을까? 만약 이 집회가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의 ‘옳음’을 확인하는 데에만 그쳤다고 한다면, 그것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 무슨 공헌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진지하게 임하는 한, ‘종군위안부’로 삼아진 사람들 같은 피해자의 마음은 그 누구도 대변할 수 없다. 이 냉엄한 사실은 ‘연구자’, ‘운동가’, ‘지원자’, 나아가 ‘당사자’와 ‘비당사자’라는 구별 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를 토대로 생각하면, 『제국의 위안부』관련 문제 중 하나인 ‘할머니들 자신에 의한 고소’라는 사태의 재고가 필요해진다. 구체적으로는 집회 중에도 나온 ‘할머니들 자신이 고소한 것이니까……’라는 변명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바로 이 ‘할머니들 자신에 의한 고소’라는 ‘사실’을 ‘후미에’ 삼아 사고정지돼서 ‘서발턴의 목소리’에 관한 신중한 고찰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사태는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의 ‘대립’이라는 저널리스틱한 이슈가 되기만 할 것이며, 그것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미디어의 ‘유통기한’이 지나면 폐기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서발턴’을 눈앞에 두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사고정지’나 ‘복화술’도 이에 포함된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정답이 없는 물음을 쉼 없이 던지며 ‘후미에’라는 사고의 유도에 응답하기 위한 길은 한없이 어렵지만, 길은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만들어지는 법이다. 이번 집회에 참가한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앞으로도 그런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3/28 연구집회를 끝내고 – 니시 마사히코(리츠메이칸 교수)

『제국의 위안부』가 서울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미성년 여자에 대한 지속적인 성적 능욕’이라는 ‘위안부상’의 ‘정형’을 재심에 부치려고 한 책이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확한데, 그 책이 ‘일본의 면죄’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선입관을 빼고 전체를 읽어 보기만 한다면 오해가 생길 리가 없다. 그것을 ‘일본의 면죄’에 길을 트는 타협적인 책이라고 이해하는 일부의 독해는 명백히 ‘오독’이며, 이 책을 ‘악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3월 28일 집회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은, 극히 일부의 우파적인 ‘오독=악용’을 과잉 의식하여 이 책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분들이 좌파 안에 적지 않다는 현실이었다. 『제국의 위안부』의 평가를 둘러싸고 일부의 우파와 일부의 좌파 사이에 ‘적대적 공존관계’가 성립되어 버린 듯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3월 28일 집회에서는 적어도 ‘일본의 면죄’를 부르짖으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집회 중반에 내가 확인한 바다. ‘우리들’이 꼭 ‘적대’해야 할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본 집회는 일단 성공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책임’을 물을 때, 설령 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한다는 대의명분이 있다고는 해도,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나 ‘미성년 여자에 대한 지속적인 성적 능욕’이라는 ‘위안부상’에 구애되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가 문제시되고 있었다.

애초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실태는 그러한 ‘물리적인 폭력성’이나 ‘위법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식민자들 안에서 다종다양한 ‘협력자’를 동원한 데다가, 그들과 그녀들에게 ‘자발성’마저 심어 놓는 교묘한 지배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위안부 문제’란 ‘협력자성’이나 ‘자발성’까지를 포함하여 ‘식민지 지배’의 ‘폭력’을 ‘구조적’인 것으로 파악할 단서를 제공해 주는, 어떤 의미로는 상징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3월 28일, ‘지정토론자’로서 발언한 센다 유키씨는 가부장제적인 ‘지배’ 구조를 생각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폭력(가정 폭력 등)에만 주목해서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신체적인 폭력은 ‘저항’을 낳을 뿐이며 ‘지배’를 견고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 오히려 피해자에 대해 ‘협력자성’이나 ‘자발성’을 심는 것이 ‘가부장제’라는 것의 지배 형태다. 그렇다면 바로 그러한 ‘구조’ 그 자체를 비판 대상으로 설정하는 『제국의 위안부』는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비판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정면으로 마주한 ‘위안부론’으로서 읽혀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요시미 요시아키씨는 박유하씨가 《오노다 히로오씨의 증언을 근거로 여성이 장사를 열심히 하기 위해 군인에게 ‘교태를 부리’거나 ‘밝게’ 보이고 ‘즐거운 듯’ 행동했다면 ‘그것은 여성들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애쓰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면서 《제국 육군의 장교와 같은 시선으로 논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당일 배포 자료, p.71)라고 박유하씨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렇다면 요시미씨는 이 인용에 이어지는 다음 문장을 어떻게 읽었을까?–《업자들의 엄격한 구속과 감시 속에서, 자신의 의지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녀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의 당혹감과 분노, 슬픔을 억누르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래하는 위안부가 비참한 위안부와 대치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교태를 부리’는 웃음도 위안부들의 비참함과 대치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아사히신문출판, p.231)

위안부의 양면성은 ‘가정 폭력 피해 여성’의 그것과 연결지어도 생각할 수 있다는 사고법을 시도한 것이 박유하씨였다고 한다면, 《여성들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 남으려고 악전고투했는지 하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며 박유하씨의 작업을 내쳐버려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박유하씨와 요시미씨는 같은 것을 다른 입장에서 말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두 사람이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위안부 문제’의 배경에 있는 ‘구조적인 문제’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일차원적인 피해’에 초점을 맞춰 문제의 해결을 서두르고자 하는 역사 연구나 지원 운동의 전술에야말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노래하는 위안부’ 등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위안부’에 대한 이해를 어느샌가 일면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지원 운동 속에조차 뿌리 깊을지도 모르는 ‘매춘부’ 차별이 그러한 것처럼.

어찌 됐든 앞으로의 ‘위안부 연구’는 박유하씨가 끈질기게 파헤친 ‘양면성’을 균형감 있게 시야에 넣고, ‘가해자/피해자’의 전체상을 확인하는 일이 주류가 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땐 『제국의 위안부』를 그냥 폄하하기만 하는 ‘위안부 연구’ 따위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등 짚고 넘기’를 비유로 든 것은 바로 그러한 미래를 전망해서이고, 멀리 내다보면 ‘등 짚고 넘기’는 이미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다.

예를 들어, Fight for Justice(편)의 『Q&A 조선인 ‘위안부’와 식민지 지배 책임』(오차노미즈쇼보, 2015)은 『제국의 위안부』 비판을 여러 곳에 집어넣은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병사와의 연애나 심정적 교류가 있었을 수 있다고 해도 트라우마 연구에 의하면 가혹한 현실을 살아남기 위한 반사적 행동,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판단됩니다》(p.55)라는 김부자씨의 서술 하나만 봐도 『제국의 위안부』의 문제 제기와 함께 읽음으로써 한층 더 생생해지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단, 김부자씨는 《일부분을 전체화해서 ‘같은 일본인으로서의 <동지적 관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라고 못을 박아 모처럼 열린 회로를 닫아 버린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란 지금 와서 보면 지극히 취약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동지적 관계>를 광범위에 펼침으로써 견고한 실효 지배를 가능케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박유하씨가 조선 반도나 대만의 위안부를 생각할 때에 중시한 ‘동지’적 관계성은 ‘식민지 지배’가 가져온 ‘효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러한 측면의 강조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길은 열어 줘도, ‘일본의 면죄’를 도출하거나 하는 이야기는 되지 않는다. 이 책에 대한 ‘오독’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일본의 면죄’를 꾀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어울리는 일이고, ‘일본의 책임’을 깊이 숙고하려는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조심성 없이 추종해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식민지 지배’란 안팎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협력자’를 생산하는 시스템이었다고 생각한다(‘글로벌화’도 그러하다). ‘식민지 지배’를 억지로 추진한 ‘제국 일본’의 폭력성을 빠짐없이 들추어내는 것은 필수다. 그러나 ‘식민자=가해자’, ‘피식민자=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은 역사의 세세한 부분을 잘 안 보이게 만든다. 이 사실을 재차 강조해 두고 싶다.


지면에 다소 여유가 있어서 마지막으로 나카노 도시오씨가 ‘총정리’에서 발언한 《일본 군인과 ‘위안부’를 공통으로 ‘피해자’로 묶는 인식》에 대해서 약간만 보충을 해 두고자 한다.

나는 ‘제국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전쟁 수행에 있어서의 ‘가해성’, 특히 그 ‘가학성’에 대해서 눈을 감고자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위안부 제도’는 전장에서의 보다 광범한 ‘전시 폭력’의 일부로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와 관련해서는 3.1 독립운동의 ‘진압’이나 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등, ‘민족 정화’와 연결된 폭력의 기억을 어떻게 계승할 것이냐 하는 커다란 문제가 눈앞에 있다(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의견 교환의 장이 조직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설령 그런 문제들과 ‘이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가해의 중층성’이 더해져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이 문제에서는 ‘피해자’측에서 할 수 있었던 대응에도 개별 사례마다 차이가 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과거에 마주할 때, ‘식민자=가해자’, ‘피식민자=피해자’라는 단순한 ‘도식’에 의거해서만은 진상 규명조차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 복잡한 문제를,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식민지주의’, 또는 ‘인종주의’ 문제와 연결지어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서두른 나머지, 해당 문제가 안고 있는 고유의 어려움을 외면해야만 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바로 이 사태를 따져 묻고 있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인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인과 한국인은 각각 ‘가해자성’과 ‘피해자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정도나 양태는 다르며, 그 차이는 위에서 말한 ‘민족 정화’적인 사고(=인종주의)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일 양국민이 서로 짊어지게 된 ‘가해자성’을 외면하지 않고, 전 위안부 분들 앞에서 함께 자세를 바로 하는 일. 타자의 ‘가해자성’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의 ‘가해자성’을 탕감하려고 하는 심성에서 자유로워지는 일. ‘자기 면책’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자는 요청에 한일 양국민이 각각의 입장에서 응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둘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가해자성’만을 떠맡는 일이 고통스럽다면, ‘피해자’였을지도 모르는 우리들 자신의 다른 한 측면과 묶는 형태로라도 그 부담을 견뎌낼 것. ‘피해자 의식’을 통한 ‘연대’의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나 나름의 주장에 담긴 속뜻이란 그런 것이다.

니시 마사히코

배홍진, 중세적인 종교재판

 

배홍진

3월 6일 ·

박유하 교수를 비판하는 진보 지식인들은 박교수가 진보주의의 가면을 쓴 채, 국가주의나 제국주의의 담론에 교묘하게 봉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이지 씁쓸한 건, 책에 명시적으로 나오는 박교수의 논지나 의견엔 침묵하고, 그 논지의 배면에 흐르는 박교수의 무의식이라 할만한 것을 다분히 자의적으로 추측해 비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논리적 전개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박 교수는 물론 A는 오렌지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따져보면 박교수는 A는 오렌지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통해 A를 호도하고 왜곡하려는 교묘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거의 백년동안 꽈배기만 만들어온 사람처럼, 혹은 문맥의 심층까지 내려가 뭔가 비판할 건덕지를 찾는 탐험가들처럼, 이 책은 어쨌든 꼬아봐야 진짜 의도를 알 수 있어, 혹은 이 책은 분명 다른 속셈을 지니고 있을테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텍스트의 지하로 내려가 봐야돼, 라고 말한다.

사실 그들이 얘기하는, 진보의 가면을 쓴 국가주의를 먼저 비판하기 시작한 건 박유하 교수다. 민족, 역사, 애국이란 미명이 지식과 운동에 이용될 때 어떻게 정의를 가장한 반목과 증오의 담론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폭력의 멘탈리티로 귀결되는지를 박유하 교수는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어떤 논지들은 이미 지식인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었던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걸 책으로 용기있게 구체적으로 쓴 사람은 없다. 그들은 자기들도 알고 있던 거야, 라고 얘기하는데 정작 자기들은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내지않고 있다가 박교수가 목소리를 내니,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당신은 그 사실을 이용해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고 있어, 라고 성토한다. 도대체 뭐하자는 짓인가.

박교수를 얼마든지 부정하고 비판해도 좋다. 심지어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해도 좋다. 다만 한국 사회가, 인문학자가 자신이 쓴 책으로 감방을 갈 이유가 없는 사회라면 말이다. 정의감에 넘치는 지식인들은 먼저 박유하를 물어뜯기 전에, 한 지식인의 인문학 저서를 범죄 행위의 증거 따위로 생각하는, 이 사회의 그 대단한 상식부터 물어뜯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당신들이 믿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종교적 신앙의 대상은 더더욱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태를 명백히 중세적인 종교재판이라 생각한다.

박일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해야 할 것들

출처: https://www.facebook.com/poem.river/posts/677484008990769

어제 오늘에 걸쳐 <제국의 위안부>를 다 읽었다.
그동안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들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피상적이었는지를 알게 해준 책이다. 이 책의 핵심은 위안부에 대해 하나의 기억(어린 조선 소녀들에 대한 강제연행, 일본 군인들에 의한 집단 강간과 잔인한 폭력, 민족의 자존심을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투사 할머니들 등)만 강요함으로써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위안부의 실체와 그런 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기억과 의식을 소거시켰고, 그로 인해 문제 해결마저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책이 학문적 비판이 아니라 고발의 대상이 된 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즉 정대협에 대한 비판이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유하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결코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닌데도 사태가 이렇게 이른 데는 정대협이라는 존재가 자리잡고 있다.

일단 내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사실 몇 가지부터 얘기해 보자.
조선인 위안부의 평균 나이가 25세라는 것(소녀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은 개인 보상의 여지를 남겨 두려고 했는데 오히려 한국이 거부하고 국가 간에 전체적으로 일괄타결을 요청해서 개인 몫까지 국가가 대신해서 받았으며, 이러한 사실이 나중에 개인들이 일본 법정에 제소한 재판에서 계속 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몇 차례에 걸쳐(197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5년) 대신 보상금을 지급했다는 것.
1994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국가 책임을 인정한 고노담화에 이어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조성하여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급하였으며, 이때 수상의 편지를 함께 전달했다는 것.
우리나라의 위안부 피해자들도 60여명이 이 기금을 수령했으며, 필리핀과 네덜란드는 이 기금으로 위안부 문제를 종결지었다는 것 등이다.

고발의 증거로 제시된 내용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였다는 말이다. 앞뒤 자르고 이 말만 떼어 와서 들이밀면 박유하 교수가 민족의 배반자이자 죽일 년이 되는 건 당연지사일 것이다. 박교수는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책에서 밝힌 내용들을 간추리면 몇 가지 층위가 있다.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병사들도 제국의 강요에 의해 끌려왔으며 그런 점에서 서로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일본인 병사들이 전투에 나갈 때 환송회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살아서 돌아오라고 당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우에 따라 간호원처럼 일본인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는 역할을 부여받았으며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아시아의 제3국이 보았을 때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자신의 희생이 국가(일본)를 위한 것이라는 의식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는 것이 그나마 비참한 처지를 버틸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와 같은 근거들을 제시한다. 물론 이러한 근거들은 강요된 동지적 관계임에 분명하고, 친일파들처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박교수는 이러한 상황이 식민지의 내적 모순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으며, 그러한 점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지적 관계라는 말 대신에 협력적 관계와 같은 말을 썼으면 오해를 피해갈 수 있었을까? 어감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비난은 똑같이 쏟아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표현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서술한 것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멸시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며, 그로 인해 일본의 죄악상이 감춰지는 것도 아니다.

두 번째로 강제 연행과 매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정신대는 노동력 확보를 위해 국가가 동원령을 내려 끌고 간 것이며, 위안부는 그와 별개로 진행된 사안이라는 점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그래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기구 이름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위안부는 드물게 강제로 연행하거나 자발적으로 지원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업자들이 중간에서 감언이설로 꼬여서 데려갔다. 일본 사람들이 위안부는 강제성이 없었으며, 돈을 받고 매춘에 종사한 여성일 뿐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이기도 하다. 형식상으로는 업자들이 데려간 것이 맞으며, 일본 군인들이 돈을 내고 위안부의 성을 산 것도 맞다. 이에 대해 박교수는 국가와 군대가 위안부 여성을 필요로 해서 업자들에게 요청을 했으며, 위안소의 관리 및 위안부들의 이동에 직접 관여를 했으므로 일본이 국가의 책임을 피해갈 수 없으며 마땅히 보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고노 담화에서 일본도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박교수는 위안부가 강간과 (강요된)매춘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강간적 매춘 혹은 매춘적 강간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박교수는 아시아여성기금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며, 이 기금을 격렬하게 반대한 정대협과 결정적으로 대립지점을 형성한다. 박교수가 보기에 이 기금의 성격은 국가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며(국가가 운영하고 90% 정도를 국가재정에서 부담했으므로), 보상금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정대협은 민간 주도의 위로금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어로 ‘償ぃ金’이라고 된 표기를 해석함에 이어 박교수는 분명히 보상금이고, 영어로는 속죄의 의미를 갖는 atonement로 표기되는데도 정대협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일부러 위로금이라고 의미를 깎아내렸다고 주장한다.
현재 정대협은 일본 의회의 법률 제정에 의한 배상을 주장하고 있으며, 박교수는 법률 제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계속 이러한 주장에 매달릴 경우 위안부 문제는 영영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박교수의 주장은 입법을 대신해 일본 정부가 추가 보상을 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원자 단체와 위안부 당사자 특히 다른 의견을 가진 위안부들도 참여시켜 합의를 끌어낸 후 전 세계인이 보는 데서 사죄와 보상을 실시할 것, 그리고 사죄의 내용에는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식민지배로 일어난 모든 문제(3.1운동 피해자, 관동대진재 피해자, 징병 피해자, 고문 피해자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이 책에서 쉽게 동의가 되지 않았던 부분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하지만, 그것을 ‘국가범죄’로 정의하기는 힘들다는 부분에서였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기획하고 관여한 것은 맞지만, 공식적으로는 모집 과정에서 사기나 협박을 금지하고 위안소에서의 폭행이나 강간을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국가범죄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은 지나치게 형식논리에 갇힌 듯하다.

마무리를 하자. 박교수는 정대협 등 위안부 지원자 단체들의 ‘정의의 독점’에 대해 우려한다.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목소리만 남기고 다른 목소리는 소거시키는 것-그래서 나눔의 집에서 나와 사는 할머니가 있는 것처럼-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모든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선택적으로만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해결을 어렵게 하고, 할머니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권위를 다지려고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지금도 미군을 위해 존재하는 기지촌이 위안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 고민해야 할 거리들을 많이 던져주고 있다. 더 이상은 힘들어서 이만!

김규항, 더러운 여자는 없다 (경향신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한 건 1991년 김학순 할머니(1924~1997)의 증언부터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의 첫 증언자는 김 할머니가 아니라 오키나와에 살던 배봉기 할머니(1914~1991)다. 배 할머니는 김 할머니보다 16년 먼저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언론에 밝힌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7살 때 식모로 팔려간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떠돌던 그는 29살이 되던 1943년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어도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위안부가 된다.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말마저 잊은 채 살아가던 그가 증언을 결심한 이유는 일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였다(1972년 오키나와를 되찾은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조선인들에게 신고를 거쳐 특별 영주권을 준다).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인 그가 한국에서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독재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 했다는 것, 증언이 조총련계를 통해서였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위안부 운동이 본격화한 후에도, 파국적 한·일 위안부 협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현재까지도 그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는 데는 다른 정서적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배 할머니를 취재한 기사(한겨레 2015년 8월7일자)에 따르면 그는 위안부였음을 털어놓을 때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라고 거듭 말하곤 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고,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다양한 사연과 삶의 배경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중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위안부상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좀 더 집중한다. ‘순결한 조선처녀’라 여겨지면 존중심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아예 눈감아 버린다.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그런 위선적 태도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 사회에서 폭넓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위안부는 모두 강제로 끌려간 소녀였다’는 우리의 강변은 ‘위안부는 모두 자발적 매춘부였다’는 일본 우익의 강변과 쌍을 이루어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미군을 상대로 같은 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일본놈들의 만행’이 아니라, 가부장제 국가에서 언제나 여성에게 존재하는 폭력 구조의 일부다. 폭력 구조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도 남성 수용자를 위한 위안부가 존재했을 만큼 일반적이며 뿌리 깊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그러한 본질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2014년 6월 미군 위안부 122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이 위안부가 된 경로 역시 다양했다. 인신매매로 끌려온 소녀도 있고 가족에 의해 팔려온 사람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온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애국교육’을 하고 미군의 건강을 위해 성병관리를 하고 도망치면 경찰을 통해 잡아오기까지 했던 한국 정부는 그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우리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와 그들을 동등하게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순결한 처녀들이 아니라 ‘양갈보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저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연대 요청을 거부하고 위안부 소녀상에 온전히 자신을 일치시키는 걸 비판하거나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드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소녀상으로 단일화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알량한 역사의식과 지배체제로부터 주입된 민족의식과 전근대적 여성관을 위안부 소녀상을 내세워 은폐하려 드는 건 말이다.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은 자유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일 같아 보여도,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여성이 국가와 남성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는 가부장제 구조 속의 일이다. 위안소가 ‘인정된’ 장소였고 ‘합법적’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법’이 국가와 군이 만든, 남성을 위한 ‘법’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자원’한 처녀들이었건,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들’이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는 박유하의 말이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을 더러운 여자들로 모욕하는 건 누구인가. 더러운 여자는 없다. 더러운 게 있다면 여성을 깨끗한 여자와 더러운 여자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폭력, 그에 기반을 둔 우리의 싸구려 정의일 것이다.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는 전문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https://parkyuha.org/)

원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더러운 여자는 없다 (경향신문)

신은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사태를 바라보며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것은 책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발터 벤야민과 기억의 정치학으로 석사 논문을 썼던 나에게 전쟁과 국가폭력,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증언은 중요한 관심사였다. 논문 막바지에 이를 무렵, 뒤늦게 발견한 책들을 통해 피해/가해의 경계, 그리고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기억이 단일한 것이 아니며 젠더가 그 비균질성의 핵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공부를 더 진전시키지 않았고 그 이후 떠난 인도 여행을 계기로 전공을 인류학으로 전환해버렸다.

영국에 와서 두번째 석사 논문을 쓰던 때, 내 주제는 재난과 불평등이었다. 지진이나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난에서부터 내전등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의 순간 혹은 에볼라와 같은 질병에 이르기까지 ‘재난’ 이라고 불리는 많은 극단적 상황들은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믿어왔던 사회의 질서를 정지시키거나 파괴하고 때로는 (다양한 목적에서의) 군사적, 인도적 개입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나 재난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상황이 사회적인 약자들 (특히 여성과 빈곤층)에게는 이미 상례였으며, 많은 경우 여성들은 중층의 고난에 직면한다. 많은 현장연구들은 재난상황이나 난민캠프 등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약자, 특히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착취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일례로 대지진 이후 아이티의 대피소에서는 구호물자로의 접근과 분배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성을 댓가로 요구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것은 여성에 남성에게 종속된 사회에서는(나는 지구상의 모든 사회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이 여성을 그저 ‘무력한 피해자’로만 위치짓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그 안에서도 갈등하고 협상하며 연대를 만들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혹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종종 울지 않을 수 없었지만,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분노와 슬픔이 나와 그 여성들을 이어주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대담에서 ‘낚시바늘에 걸려 버둥거리는 물고기의 고통’ 에 대해 말했을 때의 인상과 종종 겹쳐진다.

아감벤은 그의 책, <아우슈비츠의 잔여들>에서 바로 그러한 잔여들에 대해 말했다. 진정한 증인은 살아남은 이들이 아니라 바로 죽어간 자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죽은자도 산자도 되지 못했던 ‘무젤만들’ 혹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언어조차 갖지 못해 의미없는 소리들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던 어린아이, 후르비넥이라고 말한다. 그 고통은 ‘홀로코스트 산업’ 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화된 추모의 형식 속에서가 아니라, 미국의 유대뮤지엄에서조차 추모의 자리를 얻지 못했던 소수자들, 국가없는 이들의 존재를 통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침묵’의 형식을 통해 들려온다.

나는 이런 논의가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대하는 아주 ‘상식적’ 인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이라는 단어는 종종 모든 것을 삼킨다. 박유하 교수의 책을 ‘안읽어봐도 뻔하다’ 며 비난하는 이들의 말들에, 과거사를 사과하라며 다짜고자 식사자리에서 일본 여학생들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한 한국 남성 유학생에게(같은 기숙사엔 일본 남학생들도 살고 있는데 왜 그는 여학생들에게만 그런 짓을 했을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간 무고한 소녀들’ 에 관해서만 말하는 언론에, 그리고 박유하 교수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욕설을 퍼부었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분노를 느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공부하고 여행했던 여러 나라들에서 좋은 일본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조심스럽게 한국인들은 일본을 싫어하느냐고 묻는 이도 있었는데, 몇 해 전의 나는 그 친구에게 내가 한국에서 배웠던 대로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들이었다고!” 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여전히 몹시 부끄러워하며 마음에 품고 있다. 그들 또한 내가 그러했듯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과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친구가 된 이후, 우리는 오에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오키나와 뉴스를 찾아본다. 또한 그 일본 친구들은 나에게 ‘일본제국’의 군인으로 죽어야했던 조선인 병사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내주고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조선인 원폭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굳이’ 찾아가 애도를 표한다.

영국에 와서 배운 ‘최상의 것’은 그런 신뢰였다. 심지어 같은 전공 안에서도 입장은 천차만별이고 출신 국가도 문화도 다른 이들은 종종 논쟁이란 이름으로 부딪혔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우리가 대화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악의를 과장하지 않아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이런 누구나 동의하는 전제들이 있었다. 안봐도 뻔한 것이 아니라, 낯설고 불편해도 듣고 질문하고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나는 이 문제에 ‘지나치게’ 열정적인 이들이 박유하 교수가 연구를 계속하면서, 일본인/한국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쌓아온 경험과 시간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제 처음으로(어쩌면 당분간은 마지막일지도 모를) 박유하 교수의 세미나에 다녀왔다. 전공은 다르지만, 나 역시 어디에서건 들리지 않은 목소리들을 들으려, 여성들의 말을 기록하려 애쓸 것이다. 남성들이, 국가가 원하는 서사가 아닌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이야기를.

지난해 노벨상을 수상한 알렉시예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는 전쟁을 경험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자신이 얼마나 예뻤는지 혹은 무서웠는지를 말하는 여성에게 그녀의 남편은 “내가 당신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얘기해. 얘기하다 또 울지 말고. 예쁘고 싶었다느니, 긴 머리를 자르고 엉엉 울었다느니, 그런 쓸데없는 여자들 얘기는 제발 좀 하지 마.” 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을 알렉시예비치는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과거의 사막에 뚝 떨어지곤 했다.” 고 묘사한다.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사막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 페이스북에 글을 거의 쓰지 않지만 이렇게 쓴 건, 박유하 선생님께 건강하시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후속 연구들을 보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이 폭풍이 지나간 이후가 되겠지요. 여튼, 건강하세요!

Samuel Lee, 같은 책을 읽고도 정 반대의 생각을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Samuel Lee

1월 22일 ·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팰로앨토 ·

[제국의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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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책을 읽고도 정반대의 생각을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나는 이미 여러 차례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 게시판에서 이 소름 끼치는 [마녀사냥을 멈추라]고 호소했다. 2016년 벽두부터 또 [박유하 교수 9천만 원 배상판결], [피해 할머니 20억 회유] 등의 마녀사냥이 이어지는 한국 온라인 뉴스를 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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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국의 위안부]를 읽지 않았다면 나도 어쩌면 마녀(?)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사실 내가 [제국의 위안부]를 굳이 읽은 이유는 마녀(?)에게 바로 즉사할 짱돌을 겨냥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만들어 읽었다. 식상하고 따분한 이야기로 시작한 [제국의 위안부]를 인내심을 가지고 읽고 난 뒤 내 생각은 180도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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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시장바닥 쌈박질 수준의 원색적이고 선동적인 뿔난 빨갱이 때려잡자는 수준의 반일이야기만 접하던 나에게 [제국의 위안부]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일찍이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문제를 이처럼 차분하고 준엄하게 아프도록 지적하고 설득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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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을 입학 한지 2달 반 만에 5.18 최초의 희생자인 이세종 선배의 무참한 죽음 앞에서 금마 7공수에게 잡혀 근 5달에 걸친 불법 감금과 상상할 수 없는 구타와 고문을 당했던 사람이다. 이미 쓰여진 조서를 마치 내가 진짜 그랬던 것처럼 찢어지고 깨진 내 살과 뼛속에 녹여 버리려는 광기를 어찌해볼 도리없이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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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전라도 학생들을 선동하여 학생소요를 일으킬 목적으로 서울에서 김대중에게 50만 원을 받아 전라도 대학에 위장 입학했다”는 게 골자인 그 조서는 살인마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10월까지도 외우질 못해 그들의 조작은 무위로 끝나고 나는 살인마 전두환이 베푼 대국민 화합 차원으로 풀려나 망가진 몸을 이끌고 보안대 인후 공사 정문에서 내 어머니에게 인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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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를 읽으며 1980년 그 투라우마가 떠오르는 것은 차분하고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일본의 잘못을 지적해 가는 [제국의 위안부]를 일본의 앞잡이라 무고하는 꼴을 보기 때문이리라. 그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게 돈을 받았네], [20억으로 회유를 했네] 하며 한국의 사법부까지 한통속 장바닥 개싸움을 벌이는 꼴을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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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은 내가 느끼기에 상식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까지 온갖 괴변을 동원해 가며 마녀사냥에 동참하고 있다는 게 슬프게 만든다. 그것은 내가 두 문단이 넘어가는 글을 써보면 한줄도 읽지 않고 지레짐작으로 소설을 만들어 댓글을 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되는 점도 있다. 마치 모든 한국인이 정신과적인 문제를 가진듯이 말이다. 어쩌면 남의 글 한 문단도 읽어줄 여유가 없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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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한국인에게 적개심을 품고 언젠가 살인마 전두환을 비롯해 한국이 이 지구 상에서 사라질 그 날을 내 눈감기 전에 꼭 보겠노라는 심정으로 한국땅을 떠났으나 2003년 5.18 민주화 유공자로 한국이 화해를 청해오고 살인마 전두환이 권좌에서 내려온 뒤라 다시 한국과 화해를 시작해 오며 페이스북상이지만 감 놔라 배 놔라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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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상대하는 정치가나 딴따라들에게는 그리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온 정신을 모으고 자료를 구하고 하나하나 확인해 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느 길이 바른 문제 해결인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나 같은 허접스러운 학문을 하는 사람도 미국에서 분에 넘치는 대접과 보호를 받는 데 국가의 도움도 없이 자기 혼자 마련한 [제국의 위안부]라는 연구 성과를 마녀사냥으로 뭉개버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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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유하(Park Yuha) 의 [제국의 위안부]에서 이런 외롭고 처연한 돌아봄에 분명히 일본의 지성들이 바른 답을 하리라 믿는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한다. 한국의 원색적인 선동에 길든 인생 들이여, 제발 ‘마녀 사냥’을 멈추고 차가운 가슴으로 한국의 미래를 생각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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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현, 흠잡기 위해 읽어본 ‘제국의 위안부’ (동아일보)

혹시 일본 극우세력의 앞잡이는 아닐까, 한국 내에서는 ‘극우의 애완견’으로 조롱당하지만 매년 일본 입맛에 맞는 책을 출간하는 ‘오선화(일본명 고젠카)’ 같은 인물은 아닐까. 의심이 갔다.

2013년 8월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란 책을 일부러 나오자마자 샀던 이유는 흠을 잡기 위해서였다.

원문: [@뉴스룸/노지현]흠잡기 위해 읽어본 ‘제국의 위안부’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