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전 한겨레기자의 글

우리시대 선각자이자 그때문에 터무니없는 고초를 겪고 있는 박유하 교수님이 오늘 부로 세종대 정년퇴임을 맞이했다.

박 교수님의 문제작 ‘제국의 위안부’는 여러 시각으로 읽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최고 수준의 페미니즘 작품이다.

“분명한 것은 보수가 주어졌건 아니건 ‘위안부’란 남성에 의한 여성의 윤간이 국가에 의해 허용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한 의식은 여성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로 대할 수 있게 만드는 차별의식이었다. 특히 ‘조선인 위안부’는 그런 인식이 명확히 드러난 경우다.”(제국의 위안부 143쪽)

“말하자면 강간을 피하기 위해 위안소를 만들었다는 (일본) 군 상부의 의도는 군대의 숫자를 생각하면 처음부터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될 수 없는 시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서의 강간욕망은 그녀들이 고작 ‘조선삐’였기 때문에 생긴 욕망이었다. 말하자면 단순한 여성 경시 뿐만 아니라 민족경시가 그들에게 강간을 허용한 것이다.”(같은 책 147쪽)

책도 안읽어본 사람들이 맹목적인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없는 죄를 만들고 심판하려 들고, 재판회부 7년이 지나도록 박 교수의 정년이 지나도록 사법부는 비겁하게 재판을 끝내지도 않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뒤늦게라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 특히 2030젊은 여성들은 위안부 문제를 ‘소녀상’이란 한가지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국가폭력과 가부장제 사회의 맥락 속에서 바라본 박 교수의 접근법에 주목해 텍스트를 읽어보길 권한다.

후속작 ‘역사와 마주하기’ 한국판도 최근 출간됐다. 나도 오늘 주문했다.

텍스트의 문장 때문에 그 문장도 제대로 독해못한 자들에 의해 고소당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7년이란 세월속에 재판을 방치한 야만의 세월은 끝나야 한다.(김도형, 전 한겨레기자. 2022/8/31, 페이스북)

[시론] 한·일 역사 화해 5개년 계획 만들자

지원 단체와 문 정부가 주장해 온 법적 책임이란 연구가 아직 불충분했던 시대에 도출된 주장이다. 법적 책임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도 아니다. 1990년대 다수가 사죄하는 마음을 가졌던 일본 국민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 일본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제 위안부 운동의 실패도 돌아봐야 한다. 지원 단체들의 목소리에 가려 당사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

원문 :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mparticle/25068609

위안부 이야기의 진실을 찾아서 – 석지영

한편 한국에서는 책임을 축소하려는 일본에 대한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고, 이따금씩 이러한 분노가 ‘일본군이 총구를 겨눠가며 한국 처녀들을 성노예로 납치해갔다’는 식이 아닌 주장 앞에서는 편협함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2015년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 여성 모집 당시 한국인의 역할 및 “노예같은 조건”하에 감금된 일부 위안부 여성들과 일본군 사이의 연애 관계에 대한 고찰을 담은 저서를 출간하여 위안부 여성들로부터는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검찰로부터는 형사 기소를 당했다. 일각의 주장에서처럼 박 교수가 저서에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위안부 여성들의 잔인한 고통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고든 하버드대 일본 근현대사 교수는 일본 및 미국 내 학자 66인과 함께 성명을 내고 한국 정부의 박 교수 형사 기소에 대해 “대단히 유감이며 우려스럽다”며 박 교수 저서의 학술적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결국 박 교수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는 배상 판결을 받았다. 형사 재판에서는 학문의 자유를 인정한 1심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출처 : THE NEW YORKER

“할머니 속여” 기소된 윤미향, 정대협 비판해 고발당한 박유하

윤미향과 박유하는 2012년 11월 외교부 주최 위안부 문제 간담회에 참석했는데 당시 윤미향은 자기 발언을 마치자 먼저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 봄 정대협 심포지엄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2005년 첫 만남 이후 지난 15년간 두 여성은 진지한 대화도 생산적인 논쟁 기회도 갖지 못했다. 위안부 문제가 전혀 풀리지 않은 지금 돌이켜 보면 못내 안타까운 대목이다.

출처: 중앙일보

‘일본군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서평 좌담회

‘일본군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서평 좌담회 (1부)

‘일본군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서평 좌담회
▶ 주최 :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
▶ 날짜 : 2020. 10. 30
▶ 장소 : 출판문화회관

🎤 배춘희 할머니 ‘목소리’ 의미와 위안부 문제
📌 1부
정혜경 – https://youtu.be/yOYdvyFguPw
심규선 –https://youtu.be/10Lxjg4i4j0
호리야마 – https://youtu.be/G3cDCGPOvao
도노무라 – https://youtu.be/inx4cowWrEw

📌 2부
박유하 – https://youtu.be/zOx50GNYXGM
패널토론 – https://youtu.be/oeRB5l6qsdA
질의/응답 – https://youtu.be/5OrrBhdSkW4

 

 

서평회 녹화 보기

명예훼손을 이유로『제국의 위안부』34개 문장의 삭제를 인용한 가처분 사건 비판

명예훼손을 이유로『제국의 위안부』34개 문장의 삭제를 인용한 가처분 사건 비판

– 서울동부지방법원 2014카합10095 결정에 대한 반론*

홍승기 –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초록 : 명예권의 배타성을 전제로 침해행위의 금지를 인정하려면 검열금지의 헌법 원칙(제21조 제2항)에 비추어 엄격하고 명확한 실체적 요건을 요구하고, 그 입증책임을 피해자의 부담으로 하여야 한다(대법원 2005. 1. 17.자 2003마1477 결정 등). 박유하 교수의 2013년 작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출판금지가처분 사건에서, 2015년 2월 17일 법원은 일본군 위안부 9인이 명예를 훼손당하였다는 이유로 ‘34개 사항을 삭제하지 않고는 출판 등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하였다(서울동부지방법원 2014카합10095 결정). 이 결정 이후 『제국의 위안부』는 형사사건, 민사사건에 휘말려 아직도 사건이 계속 중이다. 이 사건의 실질적 당사자는 ‘지원단체’이고, 채권자들은 『제국의 위안부』에서 전혀 특정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는 전체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고통을 분석한 『제국의 위안부』가 개별 채권자의 명예를 훼손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 한편, 법원이 삭제를 명한 이 사건인용 부분은 『제국의 위안부』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대체로 학자의 의견이거나 ‘허위’가 아닌 사실로서, 학문의 자유·표현의 자유라는 공공의 이해에 직결되는 쟁점이다. 법원은 당사자조차 특정되지 않은사안에서, 단행 가처분에 반드시 필요한 고도의 입증책임을 간과하고 출판금지 가처분을 인용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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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박유하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30년, 무엇 이뤘나”

위안부 11명에게서 고소당한 ‘제국의 위안부’ 저자
이용수 할머니 향한 도넘은 비판, “주객 전도…비난 멈춰야”
“일부 할머니 생전 정대협 운동 방식에 의문 품기도”
“2014년 심포지엄에서 할머니 목소리 공개한 것 미움 받았다”
“일본 설득하지 못한 것이 운동 본질적 한계…공과 평가해야”

 

[인터뷰]박유하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30년, 무엇 이뤘나” 읽기

 

[김길호의 일본이야기]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저자의 후기까지 깨알 같은 활자로 발간한 324쪽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필자의 소감을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조선인 위안부의 입문서이며 또 하나의 위안부 교과서였다.” 이 책은 그 동안 한.일관계에서 언제나 걸림돌이었던 위안부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각도로 분석한 위안부의 조감도였다.

출처 : 제주투데이(http://www.ijejutoday.com)

 

[김길호의 일본이야기]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읽기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故배춘희 등 할머니들 정대협 두려워 대놓고 비판 못해”

● 정대협 비판하다 ‘마녀사냥’ 당해…빨갱이보다 무서운 친일파 낙인
● 정대협 운동, ‘돈’ 아닌 ‘인맥 30년’으로 들여다봐야
● 돈 받은 할머니들은 비난하고, 자신들 따르는 할머니들만 대변해
● 할머니들, 정대협 비판한 사실 알려질까 두려워해
● 사죄보다 보상 원한 할머니들 목소리 묻혀
●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배춘희 할머니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져
● 정대협이 日 양심적 지식인과 연대 막아…위안부 운동 이대론 안 된다

누구나 힘든 시기를 사는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뒤숭숭하고 먹고살기가 막막한 이런 때야말로 정신 줄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허문명의 SOUL’은 삶을 뒤흔들어대는 여러 난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영혼과 정신 줄을 꽉 붙잡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신동아 기사 확인하기

박유하 재판 분석 by 박인식

요 약

○ 저자가 규정한 대로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를 둘러싼 사회현상과 담론을 고찰하기 위해 저술한 ‘메타역사서’로, ‘역사에 대한 해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적시’보다는 ‘의견 표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피해자들은 ‘출판금지 가처분 변경신청’을 통해 “허위사실을 전파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소송의 논리를 스스로 허물었습니다. 재판부에서는 이 책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나 름의 방안을 제시한 단순한 의견표명으로서,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보호영역 내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표현 중 34곳의 삭제를 인용했습니다. 재판부의 판단과 일부 삭제 인용은 서로 모순된 것으로 보입니다.

○ 저자는 이 책에서 “당시 실정법에 의하면 ‘강제연행’이 아닐 수 있으나 실제로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니라 ‘제국’이라는 ‘구조적 강제’가 연행했다”고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사2심 재판부는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독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서술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벌금 1천만 원을 선고했습니다. 독자의 오독 책임까지 저자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 대법원 판례에서는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행위일지라도 ‘가치판단’이나 ‘의사표명’에 해당하면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책은 ‘역사에 대한 해석’을 다룬 ‘의견표명’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형사1심에서는 이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반면에 형사2심에서는 “표현 일부가 허위이고 그로 인해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될 것을 저자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 재판부에서는 결정문에서 “학문 연구는 기존 사상이나 가치체계와 상반되거나 저촉된다 해도 용인해야 한다. ‘공적관심사가 된 역사적 사실’에 관한 표현에 대해서는 피해자 명예 못지않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습니다. 이 책은 여기서 특정하고 있는 바로 그 ‘공적관심사가 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삭제요청 표현 중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 누군가 명예훼손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어 출판물에 이의를 제기했다면, 그 결론은 출판금지이거나 출판허용 둘 중 하나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판물 한 문단 한 단어를 떼 내어 이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재단한다면 어떤 저자도 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 책에 대한 제반 소송은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위안부 할머니들 이름으로 제기되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피해 당사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지원단체의 운동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저자를 제재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원단체에서 소송을 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PDF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의견 2020.07.04 박인식 Rev.2

한일관계, 출구를 위해서

일본의 수출규제(관리)문제가 시작된지 벌써 한달이 되어 갑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진단과 대안을 내놓았고 정부 역시 일본에 협의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전환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은 도대체 왜 이런 조치에 나섰을까요. 효과적인 대응을 하려면 먼저 원인을 정확히 분석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부도 언론도 국민 대다수도 이번 사태의 근원적인 원인을 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제도 일본은 한국의 거듭된 협의요청을 거부했다는데, 제가 보기에 일본의 거부원인은 거기에 있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아베정부의 갑작스런 조치는 비판받을 만 합니다.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었으니 일본을 우방국으로 생각했던 한국정부와 국민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 했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군사동맹까지는 아니어도 한일군사협정을 맺고 있는 한국에 대해 `안보`를 이유로 관련물자수출수속우대국가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노골적인 적대시포즈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민들이 분노하고 일본제품불매운동에 나서 온 것도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분노를 넘어 증오와 혐오까지 유발중이라는 점에서는 문제지만, 그 이유가 정당하기만 하다면 분노와 그에 따른 대응을 문제시할 이유는 없겠지요. 저역시 민족주의의 문제를 일찌기 지적한 바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작금의 사태를 그저 민족주의의 문제로 보는 시각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민족주의나 반일감정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악감정을 우리에게 일으키는 여러 정보들이 과연 전부 올바른지에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많은 부분 잘못된 정보들이 우리 안에 필요한 만큼 이상의 악감정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정황입니다. 잘못된 정보에 의해 만들어진 악감정이 다시 잘못된 정보를 생산하고 또다시 전파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지금 한국사회에서 일본이나 일본관련문제에 대해 회자되고 있는 ‘상식`들은 많은 경우 올바른 정보가 아닙니다. 불매운동을 하려면 더욱, 한번쯤 멈추어 서서 그 점을 확인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 발언과 행동을 선택하도록 만든 나의 생각, 나의 인식은 과연  올바른지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일본이 `부당한 행위`를 했고 불매운동은 그에 대한 `정당한 항의`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1919년  독립만세운동으로부터 꼭 100년 지난 해이기도 해서, 불매운동이 일본에 대한  `저항`행위로 인식되고 있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단지 현재 눈 앞에 있는 수출규제만이 아니라 과거사 전부에 대해 항의하고 있는 셈입니다.   `과거에 우리를 식민지화하고 지배했던 나라가 또다시 우리를 침략하고 지배하려 한다.`는 생각이, 그렇게 불매운동의 추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또하나 중요한 점은 우리의 분노가 많은 경우,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나라가 심지어 `사죄하지 않았다`는 인식에 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그저 수출규제 문제뿐 아니라,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 그에 더해 그런 과거와 눈앞에 있는 현재를 둘러싼 일본의 ‘태도’(로 인식되는)가 우리의 분노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에는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간단히 그 오해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1)’경제적’ 견제이자 침략인가?

일본이 `견제`상대로 명확히 의식하고 있는 건 한국이 아니라 중국입니다. 작금의 사태는 경제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군사안보적 배제시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건, 아베수상이 말한대로 오랜기간 누적된 한국에 대한 불신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대한 적대시를 통해 한미일 공조체제를 (형식은 유지하되 심정적으로) 먼저 깬 건  한국이었습니다.  대통령께서 ‘일본은 동맹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2년전에 일본을 향해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아베수상은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면서 불신을 드러냈는데 그런 불신을 만든 건 한국쪽의 불신이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조치를 그저 ‘경제’ 전쟁`이나 `침략`으로 받아들이는 건 잘못된 판단일 뿐 아니라 잘못된 대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장기대응을 통해 대일무역역조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노력은 중요하지만, 당장의 공격적 대응은 관계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지금 한일양쪽에 필요한 건, 훼손된 상호신뢰를 어떻게 회복시킬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행동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경제노예로 만들 의도를 갖고 있다는 말까지 세간에는 나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적에 대한 공포심과 자존심을 자극해 자폭테러까지 시키며 항전케 했던 제국일본이 사용했던 레토릭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의 사태는 향후(특히 이번주) 한국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전환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체념이나 맞공격이 아니라,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신중하고도 유연한 대응입니다.

 

2)불신의 근본원인

수출규제를 만든  배경에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징용문제가 있습니다. 징용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쓴 글도 있고, 오랜 세월 연구해 온 훌륭한 연구자들이 계시니 더이상 첨언하지 않습니다.

다만, 징용판결자체 이상으로, 일본의 협의요청을 한국정부가 여러달 묵살해 온 것이 이번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확인해 둡니다. 개인이건 국가건 모든 신뢰관계의 기본은 상호존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2006년 노무현 정부가 만든 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해 ‘피해자’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들이, 소송으로 주목받고 한국의 징용관련 ‘상식’을 만든 이들에 대해 비판적이라는것도 덧붙여 둡니다.

중요한 건, 징용판결관련문제 뿐 아니라 위안부문제에서의 한일합의(2015)를 재검증하고, 합의에 따라 만든 화해치유재단을 정부가 해산조치에 들어간 사태가 일본의 한국불신의 출발점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잘못된 역사는 가능하다면 수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일합의와 위안부문제에 관한 정부와 국민 대다수의 ‘상식’을 만든 것은 20년 이상 위안부문제를 주관해 온 일부학자와 지원단체입니다. 언론이 오랫동안 그들의 주장만 보도한 결과, 우리사회는 학자는 물론 ‘위안부`당사자들의 목소리에조차, 기존상식과 ‘다른’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화해치유재단해산은 한국정부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한국정부의 징용관련 ’재단설치’ 제안에 일본이 소극적인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른바 `양심적시민`을 대표하는 일본의 위안부지원단체대표는, 금년초에 “위안부문제에 관한 한국의 인식은 20년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이 시점에서  다시 되새겨져야 하고, 무겁고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징용문제 역시 하나의 인식만이 주류가 되어 한일간 괴리를 심화시킬 것입니다. 결국 징용문제는 또하나의 위안부문제가 되어 한일양국은 수십년 갈등을 또다시 이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혐한과 위안부문제

90년대 이후 발생해 곧 30년이 되어가는 위안부문제는 일본인들 안에 혐한감정을 심은 첫 계기가 되었습니다. 90년대 이후 이 문제가 불거지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일본정부와 국민이 마음을 다해 사과하고 보상했는데도 전혀 인정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위안부지원단체에 의해 “일본은 전범국가!”일본은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은 뻔뻔한 국가!”라는 비난과 함께  그들자신은 사실과 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태의 주인공으로 일본은 전세계에서 지목되었습니다.

2010년대 이후 위안부지원운동의 일본비난은 더욱더 힘이 세졌고, 이에 따라 한국에 호의적이던 보통 사람들까지, 한국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지 몰라 당황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경에 한 일본인 고위급외교인사가 “나는 한국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런데 한국은 언제까지고 일본을 비난만 한다. 이제는 그냥 보통 국가로 대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아직 기억합니다.

저는 그 사태를 심각하게 여겨 책을 썼습니다. 한일양국국민을 향한, 역사인식에서의 접점을 찾기 위한 제 나름의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책은 무력했고, 이후 7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려했던 사태들이 하나둘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혐한의 배경을 정확히 들여다 보는 건 아주 중요합니다. 개중에는 제국주의적 무시나 경멸이 만든 혐한도 있지만 많은 경우 혐한은 마음의 상처가 만든 것입니다. 그런 차이를 직시하고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후자가 전자보다 많아지는 일을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먄, 일본정부의 나쁜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더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일본이 협상에 응하지 않는 이유

한국정부가 뒤늦게나마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는데도 일본정부가 응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정부의 이번 조치는, 정치이용이라기보다 상처입은 국민들을(혹은 정치인 자신을) 대변한 행위로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제의 근원은 수출이니 경제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과거사를 둘러싼 오랜 갈등의 세월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는 명료합니다. 산업경제성과의 무역회담이 아니라, 정부핵심인사와의 대화입니다. 과거를 둘러싼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인사를 찾고,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하는 일입니다.

 

5)자존심에 대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불매운동이 왜 답이 아닌지는 이미 명약관화합니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한국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과 회의의 표현일 뿐 경제때리기자체가 아니라면, 불매운동이며 교류중단을 떠받치고 있는 자존심,역사정신,시대정신등등의 생각이 오해에서 비롯된 지나친 과잉반응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정부는 일본을 향해 협의에 나서야만 특사를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협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특사를 먼저 보내야 합니다.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건, 굴복도 굴종도 아닙니다. 타자와 진정으로 마주할 기회를  만들어 끊겼던 ‘대화`를 회복시키기 위한 주체적인 ‘외교’노력입니다.

 

 

6)책임에 대해

한국사회의 의식은 징용판결 이후 최근 몇달과  70년전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의식은 한일합의를 검증하고 부정적인 결과가 발표된 최근 몇년과  그런 결과를 만든 90년대 이후 근과거를 향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한일간 상호이해부족의 원인은, ‘일본은 사죄를 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게 된, 오랜 세월 진행된 ‘엇갈린 커뮤니케이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숨을 가다듬고 냉전 종식 이후 한일관계를 다시 돌아 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접점을 찾는 일입니다. 그건, ‘위안부`가 쇠사슬에 묶여 감금된 상태에서 끔찍한 몰골로 일본군의 담력시험대상이 되었다는 내용의 만화가 높은 평가를 받고 유통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원인을 고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식의 이미지가 다시 우리 안에 혐일을 만들고, 더이상 언론과 지식인들이 앞장서지 않아도 청소년들이 스스로 혐일을 공유하고 행동에 나서게 된 현 정황에 대해 고찰하는 일입니다.

이는 물론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차세대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차세대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7)인식의 전환을 위해

위안부도 징용도 현재의 혼란은 일제시대에 대한 인식부족 혹은 인식과잉이 만들었습니다.  그 이전에 일제시대 전반에 대해 `왜`를 묻지 않았던  단순한 교육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해를 물으려면 먼저 내용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보다 적확한 논리로 일본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가부에서 배포한 위안부문제 교재에는 오류가 적지 않고, 일본이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적어 두고 있습니다. `이견’ 을 허용하지 않고 주류연구자들의 주장만 반영된 결과입니다.

하지만 연구자도 지원자도 이제 조금씩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 목소리는 실은 그동안 묻혀 온 `위안부`들을 대변한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수십년 같은 민간단체를 지원하고, 국가가 그저 기존연구와 운동을 강화시키는위안부문제연구소나 교재를 만드는 방식으로 징용문제에 임하는 일은 더이상 반복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의 인식이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여러가지 시대적 상황이 만든 기묘한 착시현상입니다. 언젠가 세계가 그 사실을 인식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인식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8) 사죄하지 않았다?

잘못된 인식 중 가장 커다란 것이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사죄한 적이 없다’ 는 인식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앞서의 위안부운동이 퍼뜨리고 정착시킨 인식입니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도 말하는 것처럼 일본은 90년대 이후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의식을 갖게 되었고 또 그 마음을 나름대로 표해 왔습니다.

그저 `법적`책임을 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두고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가르치는 건 엄연한 호도입니다. 올바른 비판을 위해서는 오히려 일본이 한 일과 한계를 정확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젊은이들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없이 건전하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사태는, 뒤늦게나마 성실히 책임과 마주하고 성의껏 시도해 온 사죄를 인정받기는 커녕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부정당하고,  해외에서도 같은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이 참을성을 버린 사태로 보아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근과거를 돌아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한일파트너십선언을 이루어내고 멋진 연설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김대중대통령의 소중한 유산을 다시 계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9)외교의 역할

‘개인의 권리’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법원과 한국법원이 의견이 다르다면 그 때 나서야 하는 것이 정부이자 외교입니다. 양국국민에게 열려 있는,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양국 협의체제가 필요합니다. 장기대응으로, 과거에 시도된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참고해 사안별로 협의체를 구성할 것을 제안합니다.

개인청구권을 일본이 인정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일본이 인정한 건 `한일`양국의  개인 청구권입니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없애 버린 건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의 대법원판결이 옳다면 일본의 개인들에게도 한반도에 남기고 온 재산을 찾을 권리가 생깁니다. 그 때 어떤 혼란이 생길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일본기업이 중국인노동자들에게 배상을 한 건 중국은 중일수교 당시 배상금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혼란을 만든 건 역사를 오로지 기존 ‘법’을 범한 범죄인지 여부로 판가름 해야 하는 ‘역사의 사법화’현상입니다.  이제 다시 역사를 법정에서 광장으로 해방하고, ‘국민의 역사’뿐 아니라  ‘인간의 역사’로서 마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개인의 권리’의 진정한 의미도 보일 것입니다.

 

10) 역사와 마주 하는 방식

1965년 협정이 불충분한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틀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어떤 각오가 필요한 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의 담론들은 본격적인 검토도 아무런 각오도 없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도 관동대지진희생자등 새로운 피해자가  새롭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과 같은 혼란을 겪거나  재협정을 맺을 수는 없습니다.

시대적 한계를 인정 한다는 것은 과거를 깨부수고 새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 모자랐던 생각을 재인식하고 이해하고 미래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협상의 현장에서 나름 온힘을 다 해 애썼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역사라면 더더욱 껴안을 각오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일본을 향해 늘 요구해 오던 것이기도 합니다.

 

11)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부돕기란,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니라 충심어린 비판과 조언입니다.

한국은 분명 100년전의 한국이 아닙니다. 부당한 일이 있으면 싸워야 하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이겨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이기기는 커녕 해답도 보이지 않고, 결과적으로 문제는 장기화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화되는 그날이야말로 한일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하는  날일 것입니다.

전쟁은 이기든 지든 양쪽을 상처입힙니다. 이대로 가면 부정의 연쇄가 이어질 뿐입니다. 식민지배와 내전과 독재를 겪은 한국에는, 폭력의 고리를 끊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이자 힘입니다. 과거에 피해입은 개인을 지킬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힘입니다.

지금은 결사항전보다 결자해지가 필요합니다. 일본의 혐한파에 대한 분노보다, 양식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침략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식민지트라우마가 만든 반응입니다.  진정한 자존심을 만드는 건, 상대를 두려움도 편견도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입니다.

자성과 책임의식은 비판과 규탄보다 때로 힘이 더 셉니다. 그런 강인함이야말로,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 시켜줄 것입니다.

독립운동 100년인 금년이, 모두 함께 그 첫발을 내딛을 수 있는 획기적인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미래는 늘 오늘의 선택이 만듭니다.

 

<제언>

김대중대통령은 “외교란 상대국 국민들의 마음을 사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다시 그런 외교가 시작 되기를 바라면서 제언합니다.

1) 정부는 시급히, 일본이 신뢰하는 인사를 선택해 특사를 보내기 바랍니다.

비록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했지만 아직 합의를 파기한 건 아니라는 설명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합의를 이끈 야치쇼타로안보국장과의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치국장과 신뢰관계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적임자가 필요합니다.

2)징용문제에 관해서는

1, 신일철등 일본기업의 자산매각을 막아야 합니다. 중국인 노무자에 대한 화해때와 달리 일본정부가 나선 건 해외국민에 대한 외교권발동의 차원으로 보아야 하고, 그런 차원에서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2,정부는 30개 가까이 된다는 노무/징용단체들의 목소리를 먼저 수렴하기 바랍니다. ‘일본기업의 배상’판결을 받아낸 소송의 원고들은 노무징용자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판결문제의 해결이 곧 징용문제의 해결이 되지는 않습니다. 노무/징용자들 중에는 한국정부의 보상을 원하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리인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수렴해야 합니다.

3, 징용문제에 관해서는 연구가 꽤 축적되어 있습니다. 법조인 뿐 아니라 당사자와 학자의 다양한 의견이 전부 참조되어 그 안에서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3)

‘위안부’할머니들께 지급하고 남은 일본의 돈 50여억원과 한국정부가 마련한 100억을 합쳐  <한일 과거사문제 협의체>를 만들것을 제안합니다. 그 협의체가 독도문제, 위안부문제, 징용문제등 각 분야별로 접점을 찾기 위한 대화를 통해 갈등을 슬기롭게 넘어설 방안을 강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폭피해자문제, 관동대지진피해자문제등 우리에겐 그 실태가 아직 충분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더 알려져야 하지만, 또다시‘소송`이라는 방식에만 의존할 경우, 현재와 같은 갈등은 앞으로도 수십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 협의체가 그런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대처하는 기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분과별로 논의하되 가능한  한 다양한 의견을 모아 논의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거기에서의 경험 축적은 언젠가 북한과의 교류가 더 자유로워졌을 때 제기될 문제에도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자기주장뿐 아니라 상대의 말에도 귀기울일 줄 아는 인선이 필요합니다.

분야별로 논점과 찾아진 접점을 공개하는 작업을 통해 양국민들의 상호이해를 촉진시킨다면, 언젠가 한일평화의 날은 올 것입니다.

2. ‘역사사법화’를 넘어서 – ‘무기’화된 소송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2) ‘무기’화된 소송

징용문제를 두고 일본이 중재위를 설치하자며 강경하게 나오기 전까지, 한국에는 피해자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새로 보상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심지어 이 부분에서는 그동안 이런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정치/외교전문가들도 징용문제관계자들과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양국정부가 양국기업과 함께 재단을 만들자는 ‘새로운 재단 설치’안의 중심에 있는 최봉태변호사는 일찍부터 위안부문제/징용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이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4월, 일본에서 일본기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제안이 옳다는 주장을 하면서 ‘언론의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다.

 

*하나가 아닌 ‘피해자’

그런데 최봉태변호사의 주장에는 모순이 적지 않다. 신일철원고의 변호인들이 신일철의 주식을 압류하고 매각에 나서겠다고 하자 그는 ‘한일관계의 파국을 원하지는 않으니 한일정부가 협의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소송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역사문제를 사법의 장으로 반복적으로 가져와 ‘한일관계의 파국’이 우려되는 상황으로 한일관계를 몰고 온 건 바로 다름 아닌 최변호사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동원에 응해 이주한 노동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신일철 판결이 나오자마자 아베수상이 직접 나서서 해당원고들은 ‘징용령’하에 동원된 이른바‘ 징용공’과는 다르다는 반박을 하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들의 정황을 잘 알고 있었을 관계자들이다.

하긴 최변호사의 입장은 앞서의 판결에서 본 것처럼 어떤 경로로 노동을 하게 되었건 ‘한일합방불법론’에 의거한 ‘불법’동원으로 간주하고 모두 똑같은 ‘피해자’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니 구별을 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노무자들간에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모두를 “강제징용”으로 생각하게 된 데 대한 관계자들의 책임은 작지 않다. 더구나 노무당사자들이 그들 간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모든 문제해결은 사태를 정확하게 아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실제로, 일제시대 ‘피해자’관계 단체는 삼십개 가까이 된다고 한다. 최봉태변호사가 대리인을 맡고 있는 건 그중 미쓰비시중공업소송자들 뿐이니 그의 의견이 모든 노무자들을 대변하는 것일리도 없다.

실제로, 최변호사의 방식–‘소송’을 무기로 일본을 압박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한국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면서 매주 청와대앞에서 시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청와대 역시 이들의 존재를 언급한 적은 없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8-00012078-bunshun-int

이런 움직임들은 최변호사의 해결방식이 모든 피해자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설사 징용자문제가 최변호사 방식대로 진전된다 해도 그것이 곧 갈등해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누구를 위한 재단인가

최변호사는 자신이 주장하는 양국 정부와 기업이 만드는 재단설립에 필요한 금액을 “한·일 협정 당시 추산한 강제동원 피해자 규모는 국내외 103만명으로, 1인당 1억원 기준으로 할 때 103조원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부뿐 아니라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경제협력자금을 사용한 포스코·코레일·도로공사”등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최근에는 일본기자들을 향해 23조라고 말했다. 23만명에게 1억원씩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103조도 그렇지만 23조라면 엄청난 금액이다. ‘새로운 재단 설립’을 주창/지지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최변호사와 비슷한 입장을 취한 정치/외교전문가들은 이런 구체적인 예산산정을 인지했을까.

재단이 ‘장기적으로는 변호사수입이라는 면에서 돈이 된다, 일본에 노무자들의 공탁금이 있는데 재단을 운영하면서 그 공탁금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변호사들이 기여하면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은(https://youtu.be/xlV58lSvf9M), 그가 생각하는 재단설립이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보여준다. 그가 말하는 ‘공탁금’찾기 역시, 정말 시작된다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 1965년 협정을 건드리는 또하나의 사태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소송을 위해 피해자들에게 돈을 거두었다가 반환요구에 따라 돌려주었다는데, 공탁금 소송 역시 비슷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9-00012086-bunshun-int).

그는 이른바 “포괄적 화해’를 하면 필요금액이 삭감된다면서 일본을 향해 재단설립의 효용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은 바로 한일협정때 일본정부 쪽의 주장이었다. 징용자들의 피해를 일일이 따지려면 확인도 필요하고 확인서류가 구비되지 않으면 보상금액도 적어질 수 밖에 없으니 경제협력금이라는 형식으로 해결하자고 했던. 그는 스스로가 부정한 한일협정과 똑같은 방식을 시도중이다.

 

*‘개인청구권’은 누구의 것인가

그는 ‘정부협의’를 해야 한다고 그동안 주장해 왔는데, 그 이유는 협정을 통해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데에 있는 듯 하다. 정부협의에 맞서 개인적으로 소송을 하려는 이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데, ‘재단을 만들기 위한 법을 만들 때 피해자들이 더 이상 소송을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넣으면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징용자의 개인청구권이 1965년협정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다’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소송을 일으키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대법원에서의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그가 목표하는 것이 결국은 ‘정부가 다시한번’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이라면, 그가 그동안 해 온 소송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택한 해결방법에 따르게 하겠다는 것이라면, 그런 최변호사의 방식이 ‘인권’을 존중한 것으로 간주되기는 힘들다. 자신은 수많은 소송을 해 왔으면서도 당사자들의 소송권리는 빼앗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청구권이 정부간 협의로 소멸 가능한 것이라면, 1965년에 정부가 소멸시킨 청구권이 살아있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이상, 2019년4월15일 일본기자클럽에서의 회견). 자신이 주장해 대법원이 남아 있다고 판결한 개인 청구권을, 다시 한번 정부협의로 ‘소멸’시키는 것이 ‘정부간 협의’의 목적이라면, 그가 이제까지 해 온 소송들은 정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압박수단일 수 밖에 없다.

 

*크고 작은 기만들

소송을 무기 삼아 ‘개인 청구권’을 주장한 최변호사의 지론의 근거는 ‘한일합방불법론’이다.

그는 ‘한일합방이 불법’이라는 인정을 ‘국제적으로’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인정’을 해 준 나라는 없다.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면 1919년에 설립된 임시정부역시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실은 없었다.그의 이런 주장은 ‘일본사법부도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는 이야기와 이어지는 얘기인 듯 한데, 일본에서 과거사 관련해 원고측이 승소한 판결은 정신대/위안부할머니들이 함께 소송한 이른바 관부재판에서의 판결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건 1심에서의 판결이었고 고법에서는 뒤집혔다.

또 최변호사는 중국인노무동원에 대한 판결에 언급하며 일본최고재판소(대법원)가 “자율규제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고 주장한다.(2019/6/6.중앙일보).

하지만 최고재판소의 그 판결은 배상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구권 자체가 원천적으로 없는 건 아니지만 ‘조약에 의해 소멸되었으니 소송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 그 재판의 판결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청구권은 법적 유효성을 잃었지만 기업측이 스스로 뭔가를 할 수는 있겠다’는 내용이다.

그런 맥락을 생략하고 그저 일본최고재판소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자율구제를 권고했다’고만 말하면 듣는 이들은 ‘개인청구권 존재‘=’소송권리 인정‘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동안 ‘양국사법부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고 대사회적으로 말해 왔다. 그 양국정부를 압박하고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실제로 한국언론은 대부분 최변호사의 말을 그대로 전해 왔다. 최변호사는 일본언론을 향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전파해 달라고 했지만, 일본언론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는 전하지 않았다.

또 최변호사는 중국인의 노무자소송이 ‘화해’로 이끌어진 예를 들면서 일본이 한국을 증국과 다르게 취급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중국인들의 소송도 많은 경우 1972년에 중국정부가 일본과 수교하면서 전쟁배상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화해로 이끌어진 케이스도, 정부와 노무자간의 화해가 아니라 기업과 노무자간의 화해였다. 따라서 ‘중국인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는 최변호사의 주장도, 이런 배경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또하나의 기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또, 독일정부가 강제동원피해자들에게 보상한 사실을 들어 자신의 제안대로 재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유태인노동동원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말 그대로의 노예적 동원이자 노동이었다. 아무리 조선의 노동자가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해도 인종말살정책과는 구조도 맥락도 다르다. 구조와 맥락이 다르면 다른 판단/해결으로 대응하는 것이 상식이다. 오랫동안 ‘피해자’문제에 관여해 온 법률가가, 그런 ‘차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피해의 존재가, 더 큰 타국민의 피해를 자국민피해와 동일시해도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문제에서도 지원단체는 위안부들의 정황과 홀로코스트를 동일시해 왔다.

 

*한일협정 무화론

법학자 김창록도 최변호사의 거친 논지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런데 김창록 교수 역시 ‘한일협정에는 위자료가 없었으니 위자료청구를 해야 하고 한국정부는 “외교보호권‘을 가동시켜 피해자들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면에서는(<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역할강화를 희망하며>2019513,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주최,국내학술대회) 최변호사와 다르지 않은 한일협정무화론자다. 그는 1965년협정이 “파탄상황”(동)이니 “그 틀을 뛰어넘어 한일 과거청산을 규율할 새로운 법적틀을”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파탄상황”을 만든 건 바로 이런 주장들 자체다. 한일협정에 시대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거기서 얻은 교훈과 지혜를 현재와 미래에 살리려는 시도가, 과거 인물들이 한 일을 전부정하고 ‘새로운 과거’를 만드는 일로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더구나 관계국간의 자발적인 협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인 압박에 의해 그런 틀을 만들자는 것은 현실성도 없거니와 그 시도 자체가 이미 협정이라는 ‘법’의 부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새로운 틀”을 마련하려면 당연히 ‘오래된 틀‘로서의 한일협정은 파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파기수순의 시작점이야말로 한일관계 “파탄”의 순간일 것이다. 우선 한국은 일제시대는 물론 한일협정에 따라 해방이후에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모든 것을 먼저 돌려주어야 한다. 해방직후 조사된 일본인의 자산은 당시금액으로 무려 52억달러였다.(이대근<귀속재산 연구>,2015). 물론 한일협정때 받은 돈과 인력은 물론 그 이후에 전두환대통령이 받은 40억달러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일협정은 물론 시대적 한계를 여러 가지로 안고 있다. 그건 연합국 대부분이 ‘제국’으로서 식민지를 갖고 있던 필연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계를 갖지 않는 역사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란 언제나 그 시대를 고스란히 남긴 유산일 뿐이다. 과거역사를 만든 동시대 사고와 한계에 대해 고찰하는 작업은 언제까지고 유효하고 중요하지만, 그 고찰이 꼭 과거를 뒤집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는 세계의 앞으로의 과제라고 나 역시 생각하지만, 그런 커다란 과제가 자발적인 반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압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일본이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실시해 왔던 조치들–원폭피해자문제, 사할린교포문제, 그리고 위안부문제에 관해 실시해 온 일들은 당연히 ‘식민지지배’에 대한 속죄의 마음을 담은 조치였다.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마음이다.

 

*무기로서의 소송

그럼에도 최변호사는, 역사문제를 둘러싼 소송에서 적지않은 승소결과를 거두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승소했고 이어서 압류수속에도 나섰다(20190325, 뉴시스.“법원, 일제전법기업 상표권등 국내자산 압류결정..강제집행절차 개시) 그 사태를 최변호사는 “한일양국 사법부 판단을 무시한 전범기업의 말로”라고 표현하면서 “지금이라도 법치주의 국가에서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법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하길 바랍니다”(20190325 페이스북)라고 썼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전범’이라는, 국가나 기업에 붙일 수 없는 형용사를 사용하는데서 나타나는 일본에 대한 우위욕망과, 현재의 정황을 “사법부판단을 무시한 전법기업의 말로”로 간주하는 승자–‘법률가’로서의 오만이 가득하다. 실제로 그는 “한일정부협의를 통해 위안부문제와 징용공문제를 동시에 해결”(20190424. 최봉태 페이스북)해야 한다면서 양국 정부가“양국 사법부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해결이 됩니다”라는 말이 보여 주는 것처럼 ‘사법 지상주의’적이다. 그에게는 어떤 문제에서든 사법의 판단이 최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다. 그가 정부를 상대로 한 여러 소송들(외교부를 상대로 한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 위안부위헌소송등)이, 사법부를 통해 행정부를 움직이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것이었음을 보더라도 그의 사고는 명백하다. 그는 소송을 역사문제에서의 최고의 해결책으로 삼고 행동해 왔고, 자신의 생각대로 사태가 진전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저 대상자가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탄핵사유”(2018.11.1.ㅡ오마이뉴스)라면서 대통령마저 겁박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이다.

하지만 최변호사가 주도한 위헌판결에 패소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건 다름아닌 그 정부다. 패소상대가 외교부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박근혜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꽤 오랫동안 일본과 불편한 관계 속에 있었다. 한일합의는 그 결과로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니 한일합의에 찬성하든 아니든,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에서 승소해 한일협정 때 한국정부가 일본에게 보상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도록 했고 이후 한국정부의 피해자보상사업에서 중심에 있었는데도, 피해자들에게 ‘다시 소송을 해서 더 많은 돈을 받자’고 제의했다(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9-00012086-bunshun-int)

링크)고 한다. 현재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는 2018년대법원 판결은 말하자면 그 결과다. 이 과정 역시,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전제로 소송을 일으키고 승소했음에도 다시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겠다는 앞서의 패턴과 비슷하다. ‘피해자’를 위한다는 그의 수많은 소송들은, 언제나 마지막이 아니었다. 이어서 또 다른 협상/소송을 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한국정부를 향해 탄핵을 거론했던 최변호사는 일본기자들 앞에서는 일본정부가 따르지 않으면 국제적 여론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사법부를 움직여 한나라의 정부를 움직이는데 성공해 온 그간의 이력이 만든 자신감 가득한 협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는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을 상대로 피폭자 관련제소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일본도 하지 않았던(하지 않는 것이 꼭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대미원폭소송을 일으키겠다는 이유를 그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캐치프레이즈는, 굳이 ‘소송’을 통해 다시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세계가 공유중이다. 말하자면 더이상 새롭지도 참신하지도 않은 캐치프레이즈, 너무나 정당한 주장이어서 아무도 이의 제기할 수 없는 ‘정의’다. 그는 누구나 아는 정의를 소송이유로 사용해 자신의 소송을 정당화하고 여론을 움직여 왔다.

또 그는 자신이 소송을 하는 이유를 ‘인권침해를 받았는데도 현재까지 구제받지 못했다, 인권구제를 해야 할 상황이어서 소송을 일으켰다’‘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올바르게 만드는 토대다. 해결해야 할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일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일본기자회견) 여기서도 “인권”이라는, 그 누구도 반론할 이유가 없는 상식적인 정의를 내걸지만, 그가 지향하는, 국가가 주도하는 ‘청구권의 최종적 소멸’ 이 피해자들의 인권을 소중히 한 것인지는 피해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재단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로 ‘피해자들이 재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재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그동안 왜 들려오지 않았을까. 이는 언론의 관심이 소송이나 최변호사에게만 몰렸기 때문일 것이다.

(재단설립말고는 다른 해결안이 없다면서) ‘더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는 그의 말은 당연히 아름다운 명제지만, 소송위주의 그의 시도는 한일관계를 치명적으로 훼손했다. 그가 피해자전부를 대표하고 있지 않음에도, 지금 징용문제는 오로지 ‘소송‘을 주도하고 참여한 이들 위주로만 전개중이다. 더구나, 한일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은 징용자만이 아니다. 최변호사 방식을모두가 취한다면, 징병자들을 비롯한 또다른 피해자들이 끊임없이 소송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한일양국은 미래를 소송에 저당잡히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협의와 화해를 할 수 있으니 중재위도 필요없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갈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일본으로 하여금 중제위설치를 요구하도록 만든 것이 다름아닌 그가 일으킨 소송이었음을 은폐한다. ‘인권문제인데 정치외교문제로 접해서 문제가 어려워졌다’는 그의 주장은, 국가가 다시 나서서 ‘개인청구권을 없애’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다름아닌 정치/외교의 장을 필요로 하는 주장이라는 사실도 은폐한다. ‘인권’문제를 오로지 소송에 의존해 심각한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최변호사를 중심으로 하는 법률가들이었다. 그의 주장들은, 역사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법정으로 보내고 그렇게 나온 ‘판결’을 모두가 지켜야 하는 최고의 ‘법’으로 내세워,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조차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왔던 과거를 은폐한다. 작금의 징용관련 갈등은, 그가 선도했던 ‘역사의 사법화’의 결과다.

 

*법지상주의

그럼에도 그의 소송과 승소는 “우리헌법사상 빛나는 승리한 혁명”으로 칭해지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담론을 장악중이다. 승소판결을 ‘법치주의 승리’이자 ‘양국법률가의 승리’로 간주하면서 양측 정부가 판결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한국 외교부도 법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있기 때문”(최봉태<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역할강화를 희망하며>, 2019년5월13일,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주최 국내학술대회 자료집)이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그에게 ‘법치주의’,즉 ‘사법’의 권력이 학계나 정부보다 위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법치주의’라는 깃발을 들고 소송을 무기삼아 역사를 사법공간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유해 왔다. 하지만, 그의 ‘법지상주의’적 담론은, 그가 해 온 소송들 자체가 전부 1965년 협정의 부정에서,즉 국가간 법치주의부정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고 있다.

정부는 스스로 ‘법치주의’의 피해자가 되었으면서도 이런 ‘역사의 사법화’에 적극 가담해 왔다. 문재인대통령이 후쿠시마 수산물수입을 둘러싼 대립에서 한국이 승소하자 “앞으로 생길 다른 분쟁 소송에 참고로 삼기 위해서라도 1심 패소 원인과 상소심에서 달라진 대응 전략등 1,2심을 비교분석한 자료를 남길 필요가 있다”(20190416, 조선일보)고 했다는 사실은, 문대통령 스스로가 (최변호사와 함께 징용재판을 맡은 적이 있는 만큼) 일본과의 갈등을 소송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의문을 갖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대화’라는 외교채널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그 외교부가 만들어낸 화해치유재단을 ‘법적사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 해산시키고, 그 해산을 두고 최변호사가 “피해자들의 의사가 존중되게 된 것”(대구 MBC라디오,여론광장)이니 (일본이 보낸 100억원에 대한)“반환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대화가 아니라 법정에 역사문제에 대한 최종판단을 맡기는 방식, 실상은 학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학문이 선택적으로 이용되어 개인간/국가간 갈등수위를 높이는 ‘역사의 사법화’ 방식은 좀 더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더구나 피해자를 위해 역사문제를 돌아보는 과정이 고작 “승세를 몰아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문제의 해결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20190416, 최봉태 페이스북)라는 식으로 “승세”와 “주도권”을 찾아 상대를 제압하려는 방식인 한, 복잡다단한 역사문제가 생산적으로 풀릴 가능성은 지극히 적다.

소송이 만든 판결과 ,반년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해 온 한국정부에 대한 일본의 불 신은 극에 달했다(한국일보/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물론 최변호사등이 제공하는 정보에만 귀를 기울이며 결과적으로 그와 똑같이 생각하게 된 한국사회 역시 일본에 대한 불신을 한층 더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위안부문제 이후 쌓인 상호 불신을 해소하기는 쉽지 않아졌다.

소송이란 구조상 ‘이기고 제압’해서 자신의 방식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전투적 방식이다. 그런 방식이 결코 역사문제 해결방식으로 효과적이지 않았음은 이미 위안부문제가 증명했다. 일본유학목표가 “친일파가 저지른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것이었다는 최변호사는 자신의 싸움을 ‘독립군’의 싸움에 비견한다.

하지만, ‘해방되지 못한 피해자’의 “해방”은, 꼭 물리적으로 ‘이기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힘겨루기란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제국주의에 나섰던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방식일 뿐이다. 지극히 ‘근대적’인.

그는 그간의 활동이 보람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싶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를 믿고 의지했을 피해자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그는 자신이 주장중인 해결방안이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방식 자체의 모순을 들여다보지 않는 해결책이 성공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2019년 6월19일, 한국정부는 반년 이상의 침묵을 깨고 양국 기업이 재원을 마련해 해결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리고 이 제안은 최변호사의 제안인 양쪽 국가도 참여하는 안은 아니어도 최변호사의 제안과 가까운 안이었지만 곧바로 거부당했다.

오랫동안 실제로 피해자들과 함께 하며 강제동원피해를 연구해 온 연구자들 역시, 재단설립안에는 호의적이 아니다. 그 중 한사람은 재단설립안에 대해 “피해 문제 해결과 거리가 있는 미봉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현재 재단 설립 주장은 징용소송원고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생존자와 적극 ‘저항하는 피해자’만 해당”하고, “사망자 문제나 미수금 등 피해자 사회가 원하는 다양한 기대치나 요구하는 해결 방안과 무관”하다고 지적한다.(정혜경. 비공개세미나자료)

정부와 언론은, 좀 더 다양하게 연구자와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2. ‘역사사법화’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 징용문제를 생각한다

(1) 신일철주금 판결을 읽는다

<1>판결문의 전제—한일합방불법론

한국 대법원의 징용문제 판결에 항의해 중재위 설치를 요구(2019/5/20)한 일본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2018년10월에 나온 신일철징용판결등 조선인징용자문제에 대한 정부간협의를 2019년 1월에 요청했던 일본이 한국정부의 답변을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중재위 요청으로 옮겨간 건,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고 한 이낙연 총리의 발언때문이었다.(2019/5/21, 고노외무상 기자회견). 국내적 대응을 할 수 없으면 중재위 설치에 응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고노외무상의 지적은, 유감스럽지만 논리적으로는 맞다.

한국정부는 이제라도 일본이 원래 요청했던 정부간협의에 응해야 한다. 제3자를 배석시켜야 하는 중재위를 가동시키게 되면, 한국은 결코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뒤에서 국제법학자의 의견도 소개하겠지만, 한국의 논리나 태도는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성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정부가 4개월이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표면적 이유는 ‘사법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법자체가 아니라 판결의 정당성 여부다.

중요한 사안인 만큼 대통령은 당연히 이 판결을 읽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청와대의 무대응은, 단순한 ‘사법부 존중’을 넘어 ‘판결내용자체에 대한 동의’일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실, 2000년에 부산에서 제기된 미츠비시중공업을 대상으로 한 첫소송에서 원고측 변호인이기도 했다.

신일철이 피고가 된 징용판결에서, 대법원은 신일철이 징용‘피해자’에게 1억씩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 1억원은 세간의 이해와 달리 미지불임금에 대한 배상금액이 아니다. 대법원 판사들이 피해자에게 지급하라고 한 금액은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다.

그러니까 이 판결은, ‘징용자들이 일본기업에서 일하고도 임금을 지불받지 못했으니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본은 조선인을 자국국민에게 했던 것처럼 전쟁수행을 위한 노동에 동원했다, 하지만 한일합방은 ’강제로‘ 이루어졌으니 조선은 ’일본‘이 된 적이 없다, 따라서 동원자체가 불법이니 그에 대한 위자료를 보상하라’는 판결이었다. 당연히 이 판단은 ‘한일합방은 불법’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한일합방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불법이라는 주장은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90년대초부터 주창해 온 생각이다. 하지만 90년대 후반에는 일본인 학자들 사이과의 격렬한 논쟁을 치러야 했고, 학계에선 여전히 갑론을박 중이다.

대법원이 그런 합방불법론을 채택했다는 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학계에서 아직 논의중인 주장 중 하나를 정설로서 채택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2018년 판결은, 학계에서 아직 논의중인 사안임에도 일부 학자들의 주장만 채택해 나온 판결이다.

이것만으로도 앞서 언급한 ‘역사의 사법화‘의 문제가 드러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한일합방’을 합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고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고 시작하는 조약문을 마련해 둔 건 물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영일동맹과 카츠라/태프트 협정을 통해 조선의 지배권을 서구세계에도 인정받는 과정을 빠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한일합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합방불법성을 전제로 한 판결에 따르는 정황은 생각하기 힘들다. 한일합방불법론은,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결정적인 근거로서 사용되었겠지만, 그 설에 기대는 한 오히려 어떤 요구든 일본의 동의를 얻기는 어렵다. 그런 구조를, 원고측은 물론 대법원 판사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하다.

판결문은, 일본이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었고, ‘1942년에 ’조선인 내지 이입 알선 요강‘을 통해 관알선을 통해 인력을’ 모집했으며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을 만들어 국가가 주도하는 징용대상에 조선인도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설명해 두고 있다. 말하자면, 시기에 따라 동원방식이 달랐고 ‘법’에 의한 동원이었음을 명시해 두고 있다. 그럼에도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그 전부를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규정하는 건 바로, ‘한일합방불법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제시대때 조선인은 (법적으로도) 일본인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2>법관 다수의 생각-개인청구권은 남아있다

이 판결의 주요 초점은 식민지배에 따른 피해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는지 여부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대법관 전원이 찬성한 판결은 아니었다. 그리고 법관들중 다수가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이하와 같다.

당시 한국정부가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해 언급’(강조는 필자)하였고 “12억2000만달러를 요구하면서 그 중 3억6400만달러(약 30퍼센트)를 강제동원피해보상에 대한 것으로 산정”하기는 했지만, 그건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공식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교섭과정에서 교섭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했고, 담당자가)피징용자의 고통을 언급한 것은 “협상에서의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또, 한국이 12억이상을 요구했는데 “정작 청구권 협정은 3억달러로 타결”되었으니“이처럼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일본이 따로 “구체적인 징용/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하거나 양국국교가 회복된 뒤에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 대한민국의 요구에 그대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는 등 반발했으니 일본이 한국의 “피해배상”요구에 응한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일본은 증거를 일일이 찾아서 청구권을 계산하는 건 쉽지 않고 결국 금액이 적어지니, 유상/무상 경제협력의 형태로 금액을 올리는 것으로 청구권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또 청구권이란 “식민지배불법성에 따른 청구권”이었는데, ‘한일조약에 식민지 불법성이 언급되어 있지 않았으니 ‘식민지배가 만든 피해에 대한 배상’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돈은 문안 뿐 아니라 실제로도 경제협력자금일 뿐 식민지배에 관한 배상성격의 돈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법관들 다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다수의 생각대로 판결은 확정되었다.

 

<3>법관 소수의 생각

‘강요된 합방’(불법체제)속에서 기망이나 구타등 폭력적 “불법행위”로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수판사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보상요구(위자료청구)가 1965년협정에는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청구권도 외교적보호권도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반대했던 판사들의 생각도 판결문은 적어두고 있다.

그 중 두사람은,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후의 한국정부는 협정에 따른 의무를 수행했으므로 더 이상 개인청구권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을 위해 정부가 나서는 일, 즉 국민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도 당연히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문제가 ”기본적으로 청구권협정의 해석에 관한 문제“임을 명시하면서, 조약 해석은 “조약의 문언에 부여되는 통상적 의미에 따라 성실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미가 애매할 때는 협정당시의 문맥을 봐야 한다면서 청구권협정에는 명백히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양국국민은 더 이상 청구권 행사 불가능”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약국 사이에서는 물론 구 국민들 사이에서도 완정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언의 통상적 의미에 부합하고 단지 체약국 사이에서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지로 않기로 했다는 의미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다수의견에 반대한 법관들의 생각이다.

또, 한국측이 조약협정해설에 “우리가 요구한 건 모두 소멸, 한국인의 대일본 각종청구등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했다고 써 두었고, 당시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무상 3억달러는 피해국민에 대한 배상적인 성격“이라고 발언했으며 이후 실제로 정부는 몇 번에 걸쳐 보상을 실시했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또다른 근거다. 1965년 협정은 모든 걸 일괄해서 처리한 협정이었고, 일괄처리협정은 국제관습법상 일반적이므로, 국가가 보상이나 배상을 받았다면 그 국민은 개인청구권 행사가 불가하며,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청구권자체가 남아 있지 않으니 소송을 제기할 자격도 없다면서, 징용자를 포함한 노무자들에게 1970년대에 91억외에 2005년 이후에 5500억여원이 이들에게 지급되었다는 사실도 반대자들은 덧붙여 두었다.

이 외에도, 식민지배에 대한 위자료성의 청구권은 1965년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남아 있다면서도, 외교보호권은(국가가 나서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의무) 당시 양국의 합의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의견을 남긴 법관도 세사람 있었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국가와 국가사이의 청구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방 국민의 상대국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 까지도 협정의 대상으로 삼았음이 명백하고,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1)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의 대상에 피징용 충구권도 포함됨을 분명히 하고 있”고,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도 당연히 청구권협정 의 대상에 포함 시키는 것으로 상호 인식 하고 있었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또, 2005년 민간공동위 역시 1965년 협정으로 받은 3억달러에 피징용 손배청구권이 포함된다고 간주했고, 정부가 “청구권협정 이래 장기간에 그에 따른 보상들의 후속조치를 취하였”다고 강조한다 (28).이들은 한일양국이 당시 ‘보상’과 ‘배상’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국가간 합의를 했더라도 개인청구권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기 때문에 소송권리는 아직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판결은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개인청구권은 이미 남아 있지 않거나, 남아 있다 해도 정부가 그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나서야 하는)건 아니라는 의견을 가졌던 법관은, 재판관을 포함한 전체 13인 중 6명이었다.

 

<4>국제법학자의 생각

이번 판결은 2012년에 원고가 패소했던 일본법원과 한국하급심에서 패소했던 소송에 원고승소 판결을 내려 고법으로 보냈다가 재상고된 결과였다. 말하자면 이번 판결과 2012년 판결은 내용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2012년 판결에 대해서는 학계로부터 본격적인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예를 들면 서울대 이근관 교수는 이 때의 판결을 “국내법적 사고를 무비판적으로 국제적인 차원으로 투사“한 판결이라면서 비판한다. “ 부산고법과 서울고법이 징용자들의 항소를 승인한 것은 외국판결의 승인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교수는 앞서의 소수법관들처럼, 개인청구권은 한일협정에 포함되어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회담과정 문서에 “피징용한국인의 보상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양국 및 양국국민간의 청구권(미수금 및 보상금)이 해결“되었다는 생각이, 협정 이후의 정부공식해설서, 1966년 이후의 (징용자등을 위한) 국회입법, 2005년에 한일회담문서가 공개되면서 만들어진 국무총리산하에 만든 민관 공동위의 공식의견에서 확인되고, 2009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불에 개인청구권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청구권 행사가 어렵다고, 외교부도 보도자료를 통해 말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다수법관들은 한국정부가 회담과정에서 “강제동원피해 보상”을 요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공식견해”가 아닌 담당자의 교섭자료였으니 그런 요구가 한일협정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일축했었다. 하지만 이교수는 당시 한국은 “생존자,부상자,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방에 대한 보상 요구“를 했으니 설사 그 자료가 참고자료라 해도 한국이 “개인의 피해에 대한 배상을 청구권협상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또, 수령금액의 명분을 놓고 양국정부가 치열하게 대립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한국측에서 볼 때 청구권문제는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한일간의 불행한 과거의 청산’이라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명분에 관련 된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며 ”이 협정이 불행한 과거의 청산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컸고 한국인의 피해에 대한 보상의 포함은 협정수용의 절대적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바로 그때문에 문안이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으로 절충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끝까지 그 금액이 ‘식민지피해배상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 했는데, 당시 받은 금액을 그저 “경제협력자금으로 치부하는 건 한국정부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입장과 어긋“날 뿐 아니라 식민지배상을 부정한 ”일본의 입장을 추수“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이교수는 또, 이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 참고해야 할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설사 일본이 ‘한일합방불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도, 그 점은 청구권문제해결여부와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의 말대로라면, ‘일본이 합방불법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협정에서 받은 돈에 배상성격의 금액이 들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다수법관들의 전제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이교수는,”국제관계에서 일방 당사국이 국제법상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기초위에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고 타방 당사국과의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는 자주 찾아 볼 수 있다”면서, 국내법에서도 화해라는 이름으로 절충하는 경우를 언급한다. 일본이 합방의 불법성을 인정했든 아니든(즉 한일협정을 통해 받은 돈에 배상금성격이 있든 없든) 한일양국정부는 식민지배문제가 “협정대상이 되어 해결되었다는 점에는 의사합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싸우고 나서 합의에 달하는 경우도 그 합의금의 의미는 각자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가간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 판결 요지는, ‘1910년합방은 불법이었으니 모든 동원이 원천적으로 강제고 불법이다’라는 것 말고도, ‘1965년 협정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는 아예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문제 등이 해결되었다 해도 동원과 노동과정에서 입은 피해에 대한 ‘위자료’는 청구되지 않았고 보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인청구권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교수는 협정에 식민지배보상임이 문안으로 명시되지 않았어도, 그런 내용이 문안 밖에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교수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면서 국가가 처리한 일에 대해 개인의 권리를 찾으려는 움직임 자체는 필연적인 현상이라면서 개인청구권제기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 국제법이 이 부분에서 국내법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 역시 개인의 이해를 고려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는 설명도 해 두고 있다.하지만 동시에, 국제사회는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와 관련하여 여전히 국가에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권문제는 물론 중요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국제사회의 현실보다 너무 멀리 또한 빨리 앞서 나갈 경우 국가간 분쟁을 빈발시키고 관련 개인에게는 당위적 입법론이 현실적 해석론으로 오인케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당위적 입법론이란, 피해자를 위한 법이 ‘당연히’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영국이나 미국등 인권문제에 예민한 민주국가에서도 외교문제에 대한 “사법자제의 원리”가 천명“되었다면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2018년과 비슷한 결론을 내린 2012년 징용문제판결에 대한 이교수의 생각이다. 프랑스등에서도, 특히 외교문제에 관해서는 (최종적인 판단은 사법부가 행하지만) 대체로 행정부의 의견을 전통적으로 조회하고 존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한 국가가 외교문제에서 두 목소리로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국제법학자인 정인섭교수도, “국가가 타국과 자국민의 청구권에 영향을 미치는 합의를 할 수 없다면 국제관계에서 국가간 외교교섭과 타결이란 그 존재의의가 없게 된다. 통상 국가간 합의란 개인권리에 대한 분쟁을 최종적으로 타결하기 위하여 마지막방법으로 시도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5>”한일합방불법론”의 문제

하지만 이런 국제사회정황은 2012년이나 2018년 판결에서는 거의 참조되지 않은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판결은 옳고 그름을 떠나 ‘외국을 상대로 하면서도 지극히 국내적인 시각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런 ‘국내적 시각’의 판결에 기댄 생각이 국제사회와 만나게 되었을 때(일본이 요구중인 중재위나 국제사법재판소), 그들을 설득 가능할 확률도 크지는 않다.

그런데도 이런 식의 ‘이견’들이 국민들을 향해 발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승자의 목소리만 전달되는 ‘판결문’의 구조상, 소수(13명 중 6명이니 극소수인 것도 아니다)법관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이들도 없다. 이 판결은, 90년대 이후 목소리를 내 온 일부 법률가/법학자들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했고, 결과적으로 언론이 전하는 승자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은 더 이상 듣지도 참고하지도 않는 전체주의적 사회로의 가속화에 기여했다.

노동이든 징용이든, 일제시대 노동자들의 구술은 참혹하고 안타깝다.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모순을 드러내고 그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법이란 늘 뒤늦게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필요하다면 당연히 새로운 시스템=‘법’이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번 징용판결에서의 요구가 미불임금=재산이 아니라 “위자료”라면, 즉 일제시대 동원(을 포함한 모든 ‘국민’으로서의 의무부과)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한 위자료라면, 그 대상은 노동자만은 아니다. ‘정신적 고통’에 대한 피해요구라면, 일본어와 일본이름을 비롯한 모든 강요에 대해 위자료청구가 가능하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또, 제암리교회사건, 관동대지진에서의 피해자등, 우리에겐 아직 제대로 가시화되지 않은 피해자도 적지 않다. 그런 이들에 대한 역사청산이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를 묻는 일도 아직 남은 과제다.

더구나 사법부는 , ‘일본인의 개인청구권’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징용문제가 불거지면서, ‘개인청구권이 존재한다고 주장해 온 원고측 변호사들의 주장만을 보도해 오던 언론들은, 고노외무상이 “개인청구권은 존재한다”고 말한 걸 두고 “표리부동”(경향)이며, “실토”(한겨레)이자 “궤변”(연합/JTBC)라고 비난했지만, 고노외무상의 발언은 그런 의미였다고 봐야 한다. 원고측 변호사와 한국 언론들이 지적했던 “(일본관료인)야나이의 개인청구권관련 국회 발언”에서 야나이가 실제 언급한 것은 “한일양국의 개인청구권”이었다.

한일정부가 처리한 한국의 개인청구권이 살아 있는 거라면 미국이 처리한 일본인의 개인청구권도 살아 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 건너온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며 탄광이며 회사들은, 해방 이후 미국의 중개를 거쳐 조선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껏 일본인 명의의 땅들이 여전히 남아 않다는 것은(2019/5/31 기사)식민지배의 후유증이 한국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걸 말해 준다. 한일협정이란, 조선인들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개인청구권을 포기한 협정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도, 정부는 국제사회가 사법의 외교개입이나 정치개입에 신중하다는 국제법학자들의 조언을 경청해야 한다. 한일회담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명백히 논의되지 않았던 건, 대부분 식민지를 보유했던 연합국들이 중심이 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한계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보는 일과, 당시의 보상금에 징용자들의 사망,행방불명, 부상자들에 대한 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는 일은 모순되지 않는다.

다수법관들은 한일회담과정에서 한국이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달러만 받”은 사실을 원고들의 손을 들어주는 자료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80년대 이후 전두환대통령이 일본에게 100억불을 요구했고 최종적으로 40억불을 다시 지급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법부’의 판결은 물론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역사문제가 정치외교문제가 되어 버린 이상, ‘사법부의 판단’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야 하는 필연성은 없다.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게 된 문제인 만큼 국민대다수의 호응도 필요하다.

판결문은 대한민국이 징용자를 포함한 노무자들에게 1970년대에 91억을 지급했고 2000년대에 5500억여원을 지급했다는 사실도 적어두고 있다. 누락된 이들이 있다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일본과 한국정부가 행한 일은 국민모두에게 공유될 필요가 있다.

이 문제가 중재위에 회부되었을 경우 한국정부가 국제사회에 나가 실패했을 경우의 후폭풍의 크기는 작지 않다. 앞장 선 건 소수여도 그 후폭풍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야 일은 명확하다. 모두가 다시 한번 사태를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는 일이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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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1. 역사의 사법화 (3)

1.역사의 사법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그런데 지금, 위안부문제와 똑같은 일이 징용문제에서 벌어지려 하는 중이다. ‘징용’자체에 대한 공통인식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상태인데도(도노무라 마사루의 <조선인강제연행>, 이우연의 논문등도 참고될 필요가 있음에도), 사법부는 역사학자의 학문성과는 배제하고 법률가들의 주장에만 호응해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위안부문제의 경우, 지원자들은 사법부의 권위를 빌려 행정부를 움직였고, 국민의 세금과(정부지원/지자체지원) 국민의 기부금을 사용해 국민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최봉태변호사는, 작년 10월말에 나온 대법원징용판결의 흐름을 만드는 데 기여한 핵심인물이자, 2006년에 정대협과 함께 위안부문제에서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일으킨 헌법소원의 주역이기도 하다. 작년 가을 판결이후, 그는 여러 언론에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며 ‘정부가 양국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주장 중이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 4반세기의 ‘법’의 관여가, 역사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검증이다.

‘법’이 갈등해결의 최종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 인류의 오래된 습관이자 약속이다. 법은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룰‘로서 작동하고, 그런 의미에서 때로 인권보호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법‘의 관여는 그 자체로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곧 역사문제갈등의 최종판단주체가 꼭 법률가이거나 법정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사실 한일양국은 그 점을 알고 있었고, 역사문제에서 양국인식의 접점을 찾기 위해 함께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만들어 가동시킨 적도 있다.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학자들조차 접점을 찾을 수 없었던 문제를 법정으로 보냈다는 것은, 상대의 주장에 대한 경청과 접점찾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목소리 높여 외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역사공동위원회의 실패는 인선에 있다. 학자들 중에도 상대편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접점을 찾거나 업그레이드된 비판으로 논의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이들은 적지 않다. )

하물며 법정에서도 역사문제를 판단하려면 학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법정은 결국 ‘학술적’ 공방이 된다.그렇다면,역사를 둘러싼 학술적 논쟁의 장이 법정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더구나, 역사학자조차도 자신의 생각을 변함없는 정언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학문이란 끊임없이 갱신되는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의 사태에 관한 인식에서 당사자와 주변인들 ‘모두가 완전히’ 일치하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능한 건 그저, 관계자들 최대다수의 ‘합의점’을 찾는 일일 뿐이다. 실제로 법정에서도 ‘합의’라는 이름의 접점 찾기가 곧잘 이루어지는 건 이미 잘 알려진 대로다.

법정이란, 어떤 사태를 두고 예스와 노를 명백히 해야 하는 공간이다. 예스인지 노인지에 대답하는 일이란 문제를 한없이 단순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화시키는 이유는, 법정에서는 오로지 기존의 ‘법’을 어겼는지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법을 위반한 ‘범죄’로 간주되어야만 처벌가능한 ‘법’의 성격상,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이들 역시, 그 때문에 위안부동원과 위안소라는 장소가 ‘불법‘여부인지에 주목하면서 기존의 ’법‘을 어겼다고 강조해왔다.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강제연행’이라고 말해 왔던 이유는 거기에 있다. 물론 그들은 처음엔 위안부동원을 군인에 의한 강제동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동원과정에서의 강제성이 애매해지자, 이번에는 강제성을 위안소에서의 생활로 옮겨 설명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후에 다시 보겠지만 이미 성립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이 말은 위안부문제에서 일본이나 군의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강제성’강조가 위안부문제를 국가와 국가간의(민족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일본인위안부‘가 잊혀진 이유는 거기에도 있다. ‘일본인위안부’란 당연히 ‘일본군(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에 의구심을 만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안부문제가 ‘인권’문제라면 당연히 ‘일본인위안부’문제도 주목받았어야 했음에도, 일본인위안부는 그렇게 해서 같은 4반세기동안 철저히 잊혀졌다. 다름 아닌 ‘인권’문제를 직접 다루는 이들에 의해서다.

일본인 위안부가 주목받지 못한 건 다른 이유도 있지만 ‘위안부문제의 사법화’에도 있다. 위안부문제가 민족간 문제이기 이전에 남녀문제이자 계급문제라는 인식을 미처 갖지 못했던 ‘법지상주의’는, 많은 이들이 위안부문제를 오로지 <일본군이 ‘타국’여성을 노예처럼 끌어간 국가간문제>로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역사의 사법화’는 때로 순기능도 한다. 하지만 위안부문제의 경우, 문제자체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한 정황에서 과거의 ‘전쟁범죄’로만 인식되면서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를 배제했다.

징용문제 판결을 두고 대통령과 외교부가, 사법부가 하는 일이니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이런 과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대통령 자신 변호사로서 ‘역사의 사법화’에 관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의 최봉태 변호사에 따르면 문대통령은 2000년에 부산에서 일으킨 최초의 징용자소송에 참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사반세기에 걸친 ‘역사의 사법화’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사법화’는 또다른 모순을 만들면서 동시대뿐 아니라 차세대의 평화마저 위협하게 것이다. 그 조짐은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의 사태에서의 정의를 판단하는 능력은 법관들에게만 있지 않다. 더구나 사법이 때로 거꾸로 폭력이 되어 온 역사는 멀리 가지 않아도 냉전시대의 인혁당사건이 보여 주었다.

 ‘역사의 사법화’의 세월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지원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당사자주의가 중요하다면 더더욱, ‘역사의 사법화’의 주역이었던 대리인/대변인들이 아니라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목소리를 내 온 ‘당사자’는 실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사법공간은, 대립되는 의견의 한쪽 손을 들어주는 일로 복잡한 사안을 단순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도 ‘법’이란 역사문제를 관장하는 장으로 최적의 도구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역사문제가 정치문제이자 외교문제가 되어 국민모두의 문제가 된 이상, 그 해결은 당사자들은 물론, 해당국민들이 함께 납득 가능한 해결이 되어야 한다. 접점을 찾기 위한 모든 과정은 내외부간 접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어야 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힘으로 제압하는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의 목표는 동시대는 물론 차세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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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2)

1.역사의 사법화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를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지원자들, 그 중에서도 ‘법’전문가인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이 해야 할 사죄가 ‘법적사죄’라는 주장을 해 온 것도,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온 것도 법학자/법률가들이다.

그런데, 한시대의 역사가 야기한 문제에 대한 사죄가 왜 꼭 ‘법적’사죄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없었다. 자세히는 따로 쓰겠지만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강제연행-국가책임’이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식이 왜 ‘법’을 기반으로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없었다는 얘기다.

일본이 90년대 이후 여러번에 걸쳐 사죄와 보상을 실시하며 위안부할머니들의 목소리와 지원자들의 요구에 대답했음에도, 그런 사죄는 의미가 없다면서 국회에서 ‘배상’법을 만들어서 사죄/보상해야 한다는 게 ‘법적사죄’의 내용이다. 

그런데 일본국회의원들 중 일부는 90년대에서 2000년대초반까지, 그 배상법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이 아닌데 왜 국가범죄인가?’ 라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그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반발이 생겼는지 분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그 반발을 경청하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이후 있었던 건, 자신들의 주장을 돌아보고 일본을 움직이도록 만들 더 날카로운 비판방식모색이나 새로운 접점찾기가 아니라, 실질적 내용을 바꾼 ‘강제연행’주장과, ‘죄의식도 책임의식도 없는’ 일본에 대한 비난, 그리고 소송이었다.

2015년말에 있었던 ‘한일합의’에 지원자들이 반대한 이유도, 실은 그것이 ’법적‘사죄가 아니었다는, 그 단하나의 이유에 있다. 나는 그 주장의 문제점을 이미 논한 바 있지만, 이 글 후반에서 다시한번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한다. 

사실, ‘위안부를 매춘부라 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 역시 나에 대한 고소의 표면적 이유일 뿐, 고발자들이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고소한 이유는 ‘박유하의 활동이 자신들의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이 내용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고소장에 명확히 쓰여 있다. 덧붙여 두자면, 그 터무니 없는 주장을 담은 보고서를 만든건 로스쿨 학생들이고, 그렇게 읽도록 이끈 것도 변호사였다.

위안부지원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고소하고 승소하여 정부를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앞에 썼지만, 문제해결수단으로 사법부나 국제재판소가 쉽게 이용되는 건 한국만이 아닌 듯 하다. 그런 현상을 두고 어떤 이는 “정치의 사법화”“외교의 사법화” 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런데 지금 더 심각한 건 ‘역사의 사법화’ 현상이다.

20세기말에 일어나 21세기로 이어진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건 학자 이상으로 법률가와 법학자들이었다. 

실제로, 위안부문제담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논리를 만든 것도, 역사학자 이상으로 법률가들이다. 그 선두에 섰던 건 도츠카에츠로라는 일본인 변호사였다. 그는 80년대부터 인권문제를 유엔에 어필하는 활동을 해 왔는데,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어필하고 싶어했던 정대협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에 따르면, 지금은 일반화된 ‘성노예’라는 단어도 그가 만든 단어였다.

90년대 이후 정대협 역시 유엔을 향해 열정적으로 활동했지만,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나(쿠마라스와미도 법학자다) 맥두걸 보고서가 세상에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든 건 이들 일본인변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변호사협회자체가, 단체로서, 조직적으로 일찍부터 이 문제와 마주해 왔다. 위안부문제나 징용문제등 ‘피해자’문제에 일찍부터 관여해 온 최봉태변호사가, 자신이 피해자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가 일본유학 당시 일본인 변호사들이 열정적으로 이 문제를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본 것에 있다고 한 말은 그런 정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위안부문제가 대두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인 1994년에 국제법률가위원회가 보고서를 내놓은 것도, 이들 일본법률가들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문제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현시점에서의 시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끼친 건 역사가나 증언자 이상으로 법학자/법률가들이다.

법률가들을 역사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만든 건 ‘동경재판 혹은‘ 뉴른베르크재판’이었다. 말하자면 과거의 역사에서 일어난 문제가 법정에서 ‘처벌’된 것을 아는 이들이, 새롭게 맞닥뜨리게 된 과거문제 역시 그와 비슷한 문제로 이해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처벌’하려 했던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위안부문제를 ‘전쟁‘중인 적대국가 사이에 일어난 일로만 이해하고, ’전쟁범죄‘로 이해했다. 이들의 보고서는, 동시대에 일어난 아프리카/동유럽의 내전에서의 부족간강간납치등 여성들의 피해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정대협을 비롯한 지원자들이 위안부문제를 그런 문제들과 같은 문제인 것처럼 어필했기 때문이고, 유엔인권위원회나 국제법률가위원회는 그런 의견을 받아들여 동시대비극과 위안부문제를 동일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미 위안부동원은 공창제를 이용한 간접적 동원이었음이 연구되었고 발표되고 있었다(김부자, 송연옥., 야마시타영애등). 하지만 그런 ‘학문’내용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유엔에 제출된 흔적은 없다. 물론, 위안소에 조선인 대만인 뿐 아니라 일본인도 많았고, 오히려 일본인여성들이 위안부제도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도 강조되지 않았다. 

기존학자들은 1932년 상하이에서 처음 위안소가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미 청일전쟁때 한반도에는 군인을 위한 일본여성들이 있었다. 러일 전쟁 직후에 1910년에 만들어진 진해의 일본군기지가 ‘위안’을 의뢰한 여성들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여성들이었다.

일본과 조선은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화’를 매개로 한 관계였다. 좋든 싫든 조선은 이 시기 ‘일본제국’치하에 놓였으니 일본과 국가단위로 적이 되어 싸운 중국과는, 만주국을 제외하면 근본적으로 관계가 달랐다. 따라서 조선인 위안부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고찰해야 하는 문제였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제목에 굳이 <제국><식민지지배>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상호관계를 정확히 보아야만 정확한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판만이 해결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이다.

<제국의 위안부>이후, 20년 이상 ’전쟁범죄‘ 라는 말만을 사용해 왔던 연구자/활동가들은 ‘전쟁책임’이라는 단어대신 ‘식민지지배책임’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은 나의 책을 법정으로 보낸 이들에게 동조해 <제국의 위안부>를 계속 비난중이다.

90년대이후 한일갈등문제에서 ‘법’관계자들은 분명 선의와 열정을 다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써 왔다. 그리고 그 노력은 충분히 평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활동은 안타깝게도 4반세기가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법률가들에 의해 사법부가 그들의 손을 들어줬고 그에 따라 정부까지 나섰음에도. 선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과정을 보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세상의 오해와 대립을 증폭시키고 ,결과적으로 갈등을 유지시켰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