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출구를 위해서

일본의 수출규제(관리)문제가 시작된지 벌써 한달이 되어 갑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진단과 대안을 내놓았고 정부 역시 일본에 협의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전환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은 도대체 왜 이런 조치에 나섰을까요. 효과적인 대응을 하려면 먼저 원인을 정확히 분석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부도 언론도 국민 대다수도 이번 사태의 근원적인 원인을 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제도 일본은 한국의 거듭된 협의요청을 거부했다는데, 제가 보기에 일본의 거부원인은 거기에 있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아베정부의 갑작스런 조치는 비판받을 만 합니다.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었으니 일본을 우방국으로 생각했던 한국정부와 국민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 했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군사동맹까지는 아니어도 한일군사협정을 맺고 있는 한국에 대해 `안보`를 이유로 관련물자수출수속우대국가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노골적인 적대시포즈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민들이 분노하고 일본제품불매운동에 나서 온 것도 그 자체로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분노를 넘어 증오와 혐오까지 유발중이라는 점에서는 문제지만, 그 이유가 정당하기만 하다면 분노와 그에 따른 대응을 문제시할 이유는 없겠지요. 저역시 민족주의의 문제를 일찌기 지적한 바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작금의 사태를 그저 민족주의의 문제로 보는 시각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민족주의나 반일감정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악감정을 우리에게 일으키는 여러 정보들이 과연 전부 올바른지에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많은 부분 잘못된 정보들이 우리 안에 필요한 만큼 이상의 악감정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정황입니다. 잘못된 정보에 의해 만들어진 악감정이 다시 잘못된 정보를 생산하고 또다시 전파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지금 한국사회에서 일본이나 일본관련문제에 대해 회자되고 있는 ‘상식`들은 많은 경우 올바른 정보가 아닙니다. 불매운동을 하려면 더욱, 한번쯤 멈추어 서서 그 점을 확인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이 발언과 행동을 선택하도록 만든 나의 생각, 나의 인식은 과연  올바른지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일본이 `부당한 행위`를 했고 불매운동은 그에 대한 `정당한 항의`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1919년  독립만세운동으로부터 꼭 100년 지난 해이기도 해서, 불매운동이 일본에 대한  `저항`행위로 인식되고 있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단지 현재 눈 앞에 있는 수출규제만이 아니라 과거사 전부에 대해 항의하고 있는 셈입니다.   `과거에 우리를 식민지화하고 지배했던 나라가 또다시 우리를 침략하고 지배하려 한다.`는 생각이, 그렇게 불매운동의 추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또하나 중요한 점은 우리의 분노가 많은 경우,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나라가 심지어 `사죄하지 않았다`는 인식에 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그저 수출규제 문제뿐 아니라,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 그에 더해 그런 과거와 눈앞에 있는 현재를 둘러싼 일본의 ‘태도’(로 인식되는)가 우리의 분노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에는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간단히 그 오해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1)’경제적’ 견제이자 침략인가?

일본이 `견제`상대로 명확히 의식하고 있는 건 한국이 아니라 중국입니다. 작금의 사태는 경제적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군사안보적 배제시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건, 아베수상이 말한대로 오랜기간 누적된 한국에 대한 불신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대한 적대시를 통해 한미일 공조체제를 (형식은 유지하되 심정적으로) 먼저 깬 건  한국이었습니다.  대통령께서 ‘일본은 동맹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2년전에 일본을 향해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아베수상은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면서 불신을 드러냈는데 그런 불신을 만든 건 한국쪽의 불신이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조치를 그저 ‘경제’ 전쟁`이나 `침략`으로 받아들이는 건 잘못된 판단일 뿐 아니라 잘못된 대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장기대응을 통해 대일무역역조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노력은 중요하지만, 당장의 공격적 대응은 관계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지금 한일양쪽에 필요한 건, 훼손된 상호신뢰를 어떻게 회복시킬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행동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경제노예로 만들 의도를 갖고 있다는 말까지 세간에는 나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적에 대한 공포심과 자존심을 자극해 자폭테러까지 시키며 항전케 했던 제국일본이 사용했던 레토릭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의 사태는 향후(특히 이번주) 한국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전환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체념이나 맞공격이 아니라,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신중하고도 유연한 대응입니다.

 

2)불신의 근본원인

수출규제를 만든  배경에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징용문제가 있습니다. 징용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쓴 글도 있고, 오랜 세월 연구해 온 훌륭한 연구자들이 계시니 더이상 첨언하지 않습니다.

다만, 징용판결자체 이상으로, 일본의 협의요청을 한국정부가 여러달 묵살해 온 것이 이번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확인해 둡니다. 개인이건 국가건 모든 신뢰관계의 기본은 상호존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2006년 노무현 정부가 만든 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해 ‘피해자’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들이, 소송으로 주목받고 한국의 징용관련 ‘상식’을 만든 이들에 대해 비판적이라는것도 덧붙여 둡니다.

중요한 건, 징용판결관련문제 뿐 아니라 위안부문제에서의 한일합의(2015)를 재검증하고, 합의에 따라 만든 화해치유재단을 정부가 해산조치에 들어간 사태가 일본의 한국불신의 출발점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잘못된 역사는 가능하다면 수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일합의와 위안부문제에 관한 정부와 국민 대다수의 ‘상식’을 만든 것은 20년 이상 위안부문제를 주관해 온 일부학자와 지원단체입니다. 언론이 오랫동안 그들의 주장만 보도한 결과, 우리사회는 학자는 물론 ‘위안부`당사자들의 목소리에조차, 기존상식과 ‘다른’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화해치유재단해산은 한국정부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한국정부의 징용관련 ’재단설치’ 제안에 일본이 소극적인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른바 `양심적시민`을 대표하는 일본의 위안부지원단체대표는, 금년초에 “위안부문제에 관한 한국의 인식은 20년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이 시점에서  다시 되새겨져야 하고, 무겁고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징용문제 역시 하나의 인식만이 주류가 되어 한일간 괴리를 심화시킬 것입니다. 결국 징용문제는 또하나의 위안부문제가 되어 한일양국은 수십년 갈등을 또다시 이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혐한과 위안부문제

90년대 이후 발생해 곧 30년이 되어가는 위안부문제는 일본인들 안에 혐한감정을 심은 첫 계기가 되었습니다. 90년대 이후 이 문제가 불거지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일본정부와 국민이 마음을 다해 사과하고 보상했는데도 전혀 인정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위안부지원단체에 의해 “일본은 전범국가!”일본은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은 뻔뻔한 국가!”라는 비난과 함께  그들자신은 사실과 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태의 주인공으로 일본은 전세계에서 지목되었습니다.

2010년대 이후 위안부지원운동의 일본비난은 더욱더 힘이 세졌고, 이에 따라 한국에 호의적이던 보통 사람들까지, 한국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지 몰라 당황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경에 한 일본인 고위급외교인사가 “나는 한국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런데 한국은 언제까지고 일본을 비난만 한다. 이제는 그냥 보통 국가로 대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 쓸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아직 기억합니다.

저는 그 사태를 심각하게 여겨 책을 썼습니다. 한일양국국민을 향한, 역사인식에서의 접점을 찾기 위한 제 나름의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책은 무력했고, 이후 7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려했던 사태들이 하나둘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혐한의 배경을 정확히 들여다 보는 건 아주 중요합니다. 개중에는 제국주의적 무시나 경멸이 만든 혐한도 있지만 많은 경우 혐한은 마음의 상처가 만든 것입니다. 그런 차이를 직시하고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후자가 전자보다 많아지는 일을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먄, 일본정부의 나쁜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더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일본이 협상에 응하지 않는 이유

한국정부가 뒤늦게나마 협상을 하자고 제안했는데도 일본정부가 응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정부의 이번 조치는, 정치이용이라기보다 상처입은 국민들을(혹은 정치인 자신을) 대변한 행위로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제의 근원은 수출이니 경제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과거사를 둘러싼 오랜 갈등의 세월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는 명료합니다. 산업경제성과의 무역회담이 아니라, 정부핵심인사와의 대화입니다. 과거를 둘러싼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인사를 찾고,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길을 함께 모색하는 일입니다.

 

5)자존심에 대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불매운동이 왜 답이 아닌지는 이미 명약관화합니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한국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과 회의의 표현일 뿐 경제때리기자체가 아니라면, 불매운동이며 교류중단을 떠받치고 있는 자존심,역사정신,시대정신등등의 생각이 오해에서 비롯된 지나친 과잉반응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정부는 일본을 향해 협의에 나서야만 특사를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협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특사를 먼저 보내야 합니다.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건, 굴복도 굴종도 아닙니다. 타자와 진정으로 마주할 기회를  만들어 끊겼던 ‘대화`를 회복시키기 위한 주체적인 ‘외교’노력입니다.

 

 

6)책임에 대해

한국사회의 의식은 징용판결 이후 최근 몇달과  70년전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의식은 한일합의를 검증하고 부정적인 결과가 발표된 최근 몇년과  그런 결과를 만든 90년대 이후 근과거를 향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한일간 상호이해부족의 원인은, ‘일본은 사죄를 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게 된, 오랜 세월 진행된 ‘엇갈린 커뮤니케이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숨을 가다듬고 냉전 종식 이후 한일관계를 다시 돌아 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접점을 찾는 일입니다. 그건, ‘위안부`가 쇠사슬에 묶여 감금된 상태에서 끔찍한 몰골로 일본군의 담력시험대상이 되었다는 내용의 만화가 높은 평가를 받고 유통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원인을 고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식의 이미지가 다시 우리 안에 혐일을 만들고, 더이상 언론과 지식인들이 앞장서지 않아도 청소년들이 스스로 혐일을 공유하고 행동에 나서게 된 현 정황에 대해 고찰하는 일입니다.

이는 물론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차세대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차세대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7)인식의 전환을 위해

위안부도 징용도 현재의 혼란은 일제시대에 대한 인식부족 혹은 인식과잉이 만들었습니다.  그 이전에 일제시대 전반에 대해 `왜`를 묻지 않았던  단순한 교육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피해를 물으려면 먼저 내용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보다 적확한 논리로 일본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가부에서 배포한 위안부문제 교재에는 오류가 적지 않고, 일본이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적어 두고 있습니다. `이견’ 을 허용하지 않고 주류연구자들의 주장만 반영된 결과입니다.

하지만 연구자도 지원자도 이제 조금씩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 목소리는 실은 그동안 묻혀 온 `위안부`들을 대변한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수십년 같은 민간단체를 지원하고, 국가가 그저 기존연구와 운동을 강화시키는위안부문제연구소나 교재를 만드는 방식으로 징용문제에 임하는 일은 더이상 반복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우리의 인식이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여러가지 시대적 상황이 만든 기묘한 착시현상입니다. 언젠가 세계가 그 사실을 인식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인식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8) 사죄하지 않았다?

잘못된 인식 중 가장 커다란 것이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사죄한 적이 없다’ 는 인식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앞서의 위안부운동이 퍼뜨리고 정착시킨 인식입니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도 말하는 것처럼 일본은 90년대 이후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의식을 갖게 되었고 또 그 마음을 나름대로 표해 왔습니다.

그저 `법적`책임을 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두고  `사죄를 하지 않았다`고 가르치는 건 엄연한 호도입니다. 올바른 비판을 위해서는 오히려 일본이 한 일과 한계를 정확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젊은이들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없이 건전하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사태는, 뒤늦게나마 성실히 책임과 마주하고 성의껏 시도해 온 사죄를 인정받기는 커녕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부정당하고,  해외에서도 같은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이 참을성을 버린 사태로 보아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런 근과거를 돌아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한일파트너십선언을 이루어내고 멋진 연설로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김대중대통령의 소중한 유산을 다시 계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9)외교의 역할

‘개인의 권리’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법원과 한국법원이 의견이 다르다면 그 때 나서야 하는 것이 정부이자 외교입니다. 양국국민에게 열려 있는,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양국 협의체제가 필요합니다. 장기대응으로, 과거에 시도된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실패를 참고해 사안별로 협의체를 구성할 것을 제안합니다.

개인청구권을 일본이 인정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일본이 인정한 건 `한일`양국의  개인 청구권입니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없애 버린 건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의 대법원판결이 옳다면 일본의 개인들에게도 한반도에 남기고 온 재산을 찾을 권리가 생깁니다. 그 때 어떤 혼란이 생길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일본기업이 중국인노동자들에게 배상을 한 건 중국은 중일수교 당시 배상금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혼란을 만든 건 역사를 오로지 기존 ‘법’을 범한 범죄인지 여부로 판가름 해야 하는 ‘역사의 사법화’현상입니다.  이제 다시 역사를 법정에서 광장으로 해방하고, ‘국민의 역사’뿐 아니라  ‘인간의 역사’로서 마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개인의 권리’의 진정한 의미도 보일 것입니다.

 

10) 역사와 마주 하는 방식

1965년 협정이 불충분한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틀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어떤 각오가 필요한 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의 담론들은 본격적인 검토도 아무런 각오도 없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도 관동대지진희생자등 새로운 피해자가  새롭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과 같은 혼란을 겪거나  재협정을 맺을 수는 없습니다.

시대적 한계를 인정 한다는 것은 과거를 깨부수고 새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 모자랐던 생각을 재인식하고 이해하고 미래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에 협상의 현장에서 나름 온힘을 다 해 애썼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역사라면 더더욱 껴안을 각오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일본을 향해 늘 요구해 오던 것이기도 합니다.

 

11)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부돕기란,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니라 충심어린 비판과 조언입니다.

한국은 분명 100년전의 한국이 아닙니다. 부당한 일이 있으면 싸워야 하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이겨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이기기는 커녕 해답도 보이지 않고, 결과적으로 문제는 장기화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장기화되는 그날이야말로 한일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하는  날일 것입니다.

전쟁은 이기든 지든 양쪽을 상처입힙니다. 이대로 가면 부정의 연쇄가 이어질 뿐입니다. 식민지배와 내전과 독재를 겪은 한국에는, 폭력의 고리를 끊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이자 힘입니다. 과거에 피해입은 개인을 지킬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힘입니다.

지금은 결사항전보다 결자해지가 필요합니다. 일본의 혐한파에 대한 분노보다, 양식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침략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식민지트라우마가 만든 반응입니다.  진정한 자존심을 만드는 건, 상대를 두려움도 편견도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여유입니다.

자성과 책임의식은 비판과 규탄보다 때로 힘이 더 셉니다. 그런 강인함이야말로,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 시켜줄 것입니다.

독립운동 100년인 금년이, 모두 함께 그 첫발을 내딛을 수 있는 획기적인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미래는 늘 오늘의 선택이 만듭니다.

 

<제언>

김대중대통령은 “외교란 상대국 국민들의 마음을 사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다시 그런 외교가 시작 되기를 바라면서 제언합니다.

1) 정부는 시급히, 일본이 신뢰하는 인사를 선택해 특사를 보내기 바랍니다.

비록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했지만 아직 합의를 파기한 건 아니라는 설명을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합의를 이끈 야치쇼타로안보국장과의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치국장과 신뢰관계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적임자가 필요합니다.

2)징용문제에 관해서는

1, 신일철등 일본기업의 자산매각을 막아야 합니다. 중국인 노무자에 대한 화해때와 달리 일본정부가 나선 건 해외국민에 대한 외교권발동의 차원으로 보아야 하고, 그런 차원에서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2,정부는 30개 가까이 된다는 노무/징용단체들의 목소리를 먼저 수렴하기 바랍니다. ‘일본기업의 배상’판결을 받아낸 소송의 원고들은 노무징용자들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판결문제의 해결이 곧 징용문제의 해결이 되지는 않습니다. 노무/징용자들 중에는 한국정부의 보상을 원하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리인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수렴해야 합니다.

3, 징용문제에 관해서는 연구가 꽤 축적되어 있습니다. 법조인 뿐 아니라 당사자와 학자의 다양한 의견이 전부 참조되어 그 안에서 합리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3)

‘위안부’할머니들께 지급하고 남은 일본의 돈 50여억원과 한국정부가 마련한 100억을 합쳐  <한일 과거사문제 협의체>를 만들것을 제안합니다. 그 협의체가 독도문제, 위안부문제, 징용문제등 각 분야별로 접점을 찾기 위한 대화를 통해 갈등을 슬기롭게 넘어설 방안을 강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폭피해자문제, 관동대지진피해자문제등 우리에겐 그 실태가 아직 충분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더 알려져야 하지만, 또다시‘소송`이라는 방식에만 의존할 경우, 현재와 같은 갈등은 앞으로도 수십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 협의체가 그런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대처하는 기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분과별로 논의하되 가능한  한 다양한 의견을 모아 논의할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거기에서의 경험 축적은 언젠가 북한과의 교류가 더 자유로워졌을 때 제기될 문제에도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자기주장뿐 아니라 상대의 말에도 귀기울일 줄 아는 인선이 필요합니다.

분야별로 논점과 찾아진 접점을 공개하는 작업을 통해 양국민들의 상호이해를 촉진시킨다면, 언젠가 한일평화의 날은 올 것입니다.

일본의 (사죄했다는)반론을 한국언론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日 “성실히 사죄했습니다만”…美 신문에 거짓 투고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156983_24634.html

아시아여성기금은, 국가예산이 들어갔고 무라야마전수상등 정부관계자가 이사장을 맡은, 실질적 정부보상이었다 (http://www.awf.or.jp/k-preface.htm).

그런데 정대협등 지원단체들이 “민간기금이다!”, ”돈은 필요없다!”, ”일본의 꼼수다!”, ”일본은 정말은 사죄할 생각 없다!”고 언론과 국민을 상대로 20여년 주장하면서 부정적 인식이 확산/정착되게 된다.

기금을 지원단체가 비난한 탓에, 기금관계자들은 할머니들께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편지를 전달했고, 할머니들은 이후에도 몰래 관계자에게 연락해 받아야 했다. 그것도 한국에 “일본은 사죄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정착된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 “전액 국가예산”으로 보상금을 편성한 것이 “한일합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지원단체는 “박근혜정부의 꼼수다!””법적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파기운동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정대협에 10억 이상의 돈이 모이게 되고 재단 설립. “정의/기억재단”이다.

운동에는 돈과 사람이 필요한데, 정대협의 주장만이 더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한일합의가 만든 셈이다. (이후 정대협은 아예 이름을 ‘정의기억연대”로 바꾸었는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정신대=위안부로 착각하게 만든 데 대한 국민적해명은 없었다.)

문희상국회의장이 일본의 사죄를 “법적인 사죄다. 국가간에서 사죄를 하거나 받은 일은 있다”는 엉뚱한 소리와 함께 “‘일왕’이 와서 사죄하라.”는 요구를 한 건, 이 모든 과정이 잊혀지거나 무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본은 사죄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사죄/보상한 적이 있다는 걸 말하면, 지원단체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법적사죄를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해 왔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이중적인 이해상태를 방치/조장해 온 셈이다.

최근들어 “법적 사죄를 안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죄하지 않은 일본”이라는 인식이 이미 깊이 각인된 국민들에게 그 양쪽을 구별할 여유와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현재의 모든 혼돈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한일합의 이후 지원단체와 함께 “법적책임”을 자신의 목소리로 외쳐온 분들은 사실 서너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들 주장이 옳건 그르건 그 사실 부터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한일합의 이후 “법적사죄가 아니니 사죄가 아니다!” 라고 주장해 온 할머니들은 극소수다. 그 소수가 마치 ‘위안부’할머니 전체 목소리인 것같은 착각이 사회전체에 존재했고, 모든 집회와 규탄은 그 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이면에서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인 분들은 그저 일본의 (화해치유재단의) 계략에 말려든 것으로만 취급되고 잊혀져 왔다. 보상금을 받은 분들이 많다는 기사는 거의 쓰여지지 않았고, 기사가 나온 이후에도 그런 분들을 취재한 기자도 전혀 없었다. 물론 그 분들 역시 비난이 두려워서 일본과의 화해를 말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다.

화해치유재단이 옳았는지, “법적사죄”주장이 옳은지 여부는 차후문제다.

문제는 이 모든 혼란이 거대한 망각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또, 이미 만들어진 그런 거대한 망각의 흐름에 도중에 편승하여 가속시킨 학자들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언론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발로 뛰고 자신의 머리로 사고하는 대신 지원단체나 일부학자가 주는 정보만 받아 써 왔다. 그 정보를 믿은 국민들에겐 죄가 없다.

그럼에도, 언론과 국민들의 망각에 기대어 오늘도 일본정부의 사죄/보상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들의 반박이

“반역사적이고, 반인권적이고 국제 상식에도 어긋”난 것이라며 파렴치한으로 모는 주장만이 “진실”로 통용된다. 이런 목소리에만 언론이 의존하는 한, 한일관계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한다.

내 방식/내 생각만이 옳다는 아집은, 한일관계 뿐 아니라 모든 관계를 깨뜨린다. 이미 우리 안에서 보고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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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문제와 일본의 보상

1차—아시아여성기금(1997-2003)

일본정부예산 200만엔+국민모금300만엔.
희망자 61명에게 전달. 한사람에게 전달사고 생겨 실제로는 60명.

2차—한일합의 보상금(2016-2018)

1인당 1억원. 당시 생존자 47명중 34명 수령. 두사람에 대해 수속 진행중이었으나 재단이 해산되어 버림.

(나눔의집 거주자도 6명 수령)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646527092040855?sfns=mo

위안부문제와 일본의 사죄

1992년 가토관방장관 담화

“..정부는 국적 및 출신지를 불문하고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운 고통을 겪은 모든 분들에 대해 다시금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전해드리고 싶다. “
http://www.awf.or.jp/k6/statement-01.html

1993년 고노관방장관 담화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출신지가 어디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회복이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http://www.awf.or.jp/k6/statement-02.html

1995년 이가라시관방장관의 기금발표문

“…특히 종군위안부 문제는 많은 여성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고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크게 손상 시킨 것으로, 저는 이 기회에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는 바입니다.”
http://www.awf.or.jp/k6/statement-07.html

1995년 무라야마수상 담화

“….소위 종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며 저는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http://www.awf.or.jp/k6/statement-04.html

1996년 하라아시아여성기금이사장의 편지문

“…그것은 실로 여성의 근본적인 존엄성을 짓밟은 잔혹한 행위였습니다. 귀하에게 가해진 행위에 대해서는 총리의 서한에도 인정되어 있는바와 같이 현재의 정부와 국민도 도의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저희들도 귀하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리는 바입니다.”
http://www.awf.or.jp/k6/statement-13.html
(일본국회 중의원/참의원 의장이었던 하라 분베이/무라야먀 전 수상 서명)

1997년 하시모토수상의 편지

“…저는 일본의 수상으로서 다시한번,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경험하시고 심신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합니다.”
http://www.awf.or.jp/pdf/0211.pdf
(하시모토류타로, 오부치게이조등 역대수상들이 사인한 편지를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금과 함께 할머니들께 전달.)

1998년 하라아시아 여성 기금 이사장의 편지

“아시아여성기금의 사업은 일본정부와 국민이 협력하여 도의적인 책임의식하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이며, 일본정부와 국민으로부터의 사죄와 보상의 마음으로서 그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한 할머님들에 대해 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http://www.awf.or.jp/k6/statement-22.html
(김대중대통령에 보낸 편지)

2005년 고이즈미수상 담화

“..또한, 일본국은 일찍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제국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함과 더불어 지난 대전에서의 내외의 모든 희생자께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
http://www.awf.or.jp/k6/statement-36.html

2010년 간수상담화

“저는 역사와 성실하게 마주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받아들이는 겸허함을 갖고,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에 솔직하고 싶습니다. 고통을 준 쪽은 잊기 쉬우나, 당한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함께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합니다.”
https://www.kantei.go.jp/jp/kan/statement/201008/10danwa.html

2015년 기시외무상의 한일합의 발표

“..당시의 군이 관여한 가운데 다수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을 깊이 상처입힌 문제이고, 일본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2015년 아베수상 발언(기시외무상이 전언)


“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경험하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합니다.”
https://www.mofa.go.jp/mofaj/a_o/na/kr/page4_001664.html


이만큼 했으니 더이상 사죄가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이 오랜 시간 표해 온 마음과 “제대로” 마주하는 일부터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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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할머니를 생각한다 3

3. 일본패전 이후

<정대협설명>


1945년, 싱가폴에서 일본군 제16사령부 소속 제10육군병원에서 간호사로 위장당하여 일본군인들 간호노동, 버려짐. 미군포로수용소에 수감.
1947년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지 8년 째 되던 22세에 귀향

<증언집>

“어느 날 갑자기 위안소의 일본 군인들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관리인인 한국 사람의 밥을 해 주면서 위안소에 그대로 있었다. 한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 그려져 있는 차를 타고 위안소에 와서 우리를 태우고 떠났다. 이때 그 한국인 관리인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차에 타고 보니 차 안에도 없었다. 그 길로 어디론가 숨어버렸나 보다. 우리는 그때까지 해방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그놈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일본군인들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싱가포르에 있는 제10 육군병원이었다.””일본군인들은 우리에게 간호훈련을 시켰다.”

“하루는 누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나가보니, 어떤 조선인 남자가 와서, 자기가 나의 형부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
“형부는 미군 수용소에 있는 중이었다.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수용소로 가자고 했다.”
“형부가 병원에다가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다. 형부가 왔다갔다 교섭을 하더니, 병원에 있는 조선인 여자300명이 다같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람이 굉장히 높고 큰 미군트럭을 가지고 와서 여자들을 전부 태우고 미군 수용소로 왔다.”

(어머니와의 해후)”열다섯 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5년만인 것이다.”

“형부는 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아는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후에 결혼을 하라 해서)”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말하니 어머니는 통곡을 하셨다.””부모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고 (결혼하라고)애원하셨다.”

<박유하해설>

전쟁이 끝나고 김할머니를 “버린”건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였다. 여기서의 “해방”은 명백히 ‘업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위안부가 도망을 시도하다 구속당하는 대상은 군이 아니라 업자였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미움/분노의 대상이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인 이유이기도 하다.

김할머니가 “간호”를 하게 된 건 “위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헌혈을 당하기도 했지만, 어지럼증을 호소하면 군인이 “포도당”주사를 놔 주기도 했다고 김할머니는 말한다.

수용소에 가게 관건 일본군에게 버려져서가 아니라 형부가 데려갔기 때문이다. 처음엔 거부당했지만 결국 “조선인 여자 300명”은 모두 무사히 미군에게 갈 수 있었다. ‘버려지고 학살’당했다는 스토리는, 전쟁터 극한상황에서 어쩌다 일어날 수 있었던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버려짐과 학살’이 전체양상인 것처럼 강조된다.

또, 김할머니는 그저 “수용소”라고 말하고 있을 뿐, “포로수용소”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포로”가 된 경우도 있지만, 점령군으로서의 미국이 점령지 사람들을 그저 ‘관리’차원에서 ‘수용’한 곳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위안부’를 포함한 조선인들은, 때로 일본인들과 함께, 미국의 도움을 받아 귀국했고 김할머니 역시 그렇게 귀국했다.

위안소에 있었던 기간을 김할머니는 “5년만”이라거나 “내가 없는 6년동안”이라고 표현한다. “8년”이 아니라.
김할머니의 “어머니의 통곡”은 “위안부”생활이 유발했지만, “부모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는 회한에 ‘일본군의 강제연행’이라는 인식은 없다.


과거 어떤 시기에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건 맞다. 하지만, ‘누가’ ‘왜’ 끌어 갔는지, ‘누가’ 한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는 총체적으로 봐야 한다. 규탄대상이 단순화될수록, “김복동”이라는 여성은 ‘역사’에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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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할머니를 생각한다 2

정대협의 발표자료엔 위안소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따라서 여기선 증언집만 사용한다.

2. 위안소생활

<증언집>

“우리를 데려간 일본남자와 조선인남자가 사복을 입고 문 앞에서 우리를 감시했다.”

“관리인은 우리를 부산에서부터 인솔했던 한국인이었다. 그는 일본 군복을 입고 계급장은 달지 않고 있었다.”

“관리인은 전쟁이 끝나면 큰 돈을 주겠다고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저렇게 큰 집을 살 만큼의 돈을 주겠다고 바깥의 큰 건물을 가리켰다.”

“한국에서부터 같이 간 일본사람과 조선 사람이 계속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싱가포르에서 몇달 있다가 수마트라로,인도네시아로 말레이지아로 자바로 우리는 계속 이동했다.”

“나는 어느 곳에서건 특별히 정을 준 사람은 없었다. 얼굴이 익을 만 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했으니 정들 사이도 없었고, 나는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일본이 이겨야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일본이 승전하기를 빌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인 여자들과는 말도 하지 않고 우리끼리만 어울려 다녔다. “

“위안부 시절 내 이름은 가네무라 후유코라고 하기도 했고, 요시코라고도 했다. 모두 군인들이 지어줬다.”

“관리인은 처음부터 같이 다녔던 일본에서 자란 40대 한국인이었는데 우리는 이사람을 ‘니상(오빠)’이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마음에 드는 위안부를 골라 데리고 자기도 했으며, 위안부들이 말을 안 들으면 막 때리고 욕도 했다. “

<박유하 해설>

여기서는 관리인들이(업자)”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보다 명확하게 표현된다. “군인이 나타나 끌고 갔다”는 증언을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들도 있는데 , 대개는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업자는 ‘위안부’에게 지급해야 할 돈을 데려오면서 지불한 빚으로 충당시킨 경우가 많았다. 다만, 꼬박꼬박 대신 저금해 준 경우도 있었으니 이 부분은 일괄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김할머니는 이 때 “이동”했다고 표현한다. 물론 이 때의 인솔자는 업자들이다. 군부의 요청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이동”은 경제논리로 이루어졌다.

“정을 준”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정을 주고 받는 정황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할머니의 경우 15세에 갔으니 어렸기 때문일 수 있다. 일본군과의 관계는 나이와 일본어 능력이 크게 좌우한 듯 하다.

일본을 좋아해서든 아니든 “일본의 승전”을 빌었다는 것은 “일본”이 구조적으로 “적”의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한다.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 역시(위계관계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일본군 위안부”의 첫번째 대상은 일본인여성이었다.
조선인들과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지만, 민족적차별은 똑같은 일에 동원된 여성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조선인을 포함한 업자들이 위안부와 ”자기도”했다는 건, “업자”가 그저 일본군의 명령으로 관리했을 뿐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상상이자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선 간단히 기술되고 있지만, 위안부들의 몸에 잔혹한 폭행을 가한 주체들은 압도적으로 업자였다. “성노예”들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군인들 또한 때로 폭행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규율로 금지되었고, 어길 경우 무겁지 않았어도 처벌받았다.

위안부들은, 군인들의 부당한 행위를 ‘헌병’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칼로 위협하는 군인과 싸우다가 상대를 죽였는데, 재판에서 무죄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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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할머니를 생각한다 1

지난주에 김복동 할머니가 작고했을 때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삼우제도 치러졌다니 뒤늦게나마 써 두기로 한다.

김복동 할머니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각 언론사가 보도한 바 있다. 그 자료를 제공한 건 아마도 정대협일 것이다.

그런데 김할머니는 1997년에 정대협이 출판한 증언집 에 자신의 체험을 아주 구체적으로 남겨놓고 있다.

물론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건, 가난, 성병검사,폭행, 강간, 자살시도, 병원에서 일하면서 당했던 부상병들을 위한 채혈등, 다른 대부분 위안부 할머니들과 비슷한 고통과 고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한번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저 세상에서나마 편안하시길 빌고 싶다.

김복동 할머니는 정대협이 관리하는 거주지에 계신 두어분 중 한분이었다. 함께 한 세월도 긴 만큼, 정대협 에는 아주 특별한 분이었을 것이다. 다른 분들과 달리 4일장에 시민장 형식으로 화려한 영결식을 치른 심경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렇다면 더더욱 그 분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지만, 할머니들이 사망하면 지원단체나 관계된 학자들이 전하는 건, 한결같이 단순화된 생애와 일본에 대한 분노 뿐이다. 심지어 유지를 왜곡하는 경우도 봤다.

이번에는 어땠을까. 외국언론들까지 선입견과 상식으로만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누군가는 써야 할 것 같아서 쓴다.

  1. 위안부가 되기까지

<정대협 설명>(페이스북)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출생

1940년 만 14세에 일본군‘위안부’로 연행.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성노예가 됨.

<증언집>(다 인용 할 수 없어서 부분 인용한다. 맥락이 명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질문해 주시면 답변할 생각.)

“동네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사람과 함께””한국말을 잘하는 일본사람”

“데이신타이(정신대)에 딸을 보내야 하니 내놓으세요”””아들이 없으니 딸이라도 나라를 위해 보내야”
“군복 만드는 공장”
“서류에 도장”(어머니가 못 찍겠다고 실랑이)

“일본사람이 버스에 태워 부산까지””일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는 조선 사람”이 “다른 처녀들을 끌고 온 듯.”
이 두사람이 인솔해서
“시모노세키에서 화물선””대만””광둥”으로 이동.

“우리를 인솔했던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이 우리를 높은 사람에게로 데려갔다””높은사람에게 서류를 냈다””이들은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저 하이,하이(예,예)라고만 대답하라고 일렀다.”

<박유하해설>
— 어느집에 딸이 있는지를 잘 아는 동네 조선사람이 업자를 데리고 나타났고, 정신대에 보낸다는 명목으로 데려갔다.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부모의 동의서일 가능성 높음.
그동안 지원단체들은(일부학자들도) 이런 정황을 전부 “연행”이라고 표현. 결국 영화 <귀향>의 이미지로 구체화하고 국민들에게 전파했다.

업자들이 데려온 여성들이 속임수에 의해 끌려 왔는지 여부를, 일본군은 체크했다. “높은 사람”에게 낸 “서류”란 계약서와 부모의 동의서등 당시 정부방침으로 요구된 서류들일 것이다. 그 정황에서 ‘그저 하이하이로 대답’하기를 종용받았다는 건, 데려간 소녀/처녀들이 일본어를 잘 모르는 것을 업자들이 이용했다는 얘기.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의 주인공은,군속대우를 받은 업자일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엔 흔한 옷이었으니 보통 민간인일 수도 있다.

22년전 증언집은, 제목과 소제목에서 소녀가 “전전”했다고 표현한다. 당시의 채록자들은 그렇게 이해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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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토리>에 대한 일본인 지원자들의 항의

페이스북을 쉬고 있었는데, 관부재판을 오랜 세월 지원해 왔던 후쿠오카의 일본분들이 영화 <허스토리>에 대한 항의문을 발표했기에 오랫만에 씁니다. 저도 얼마 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 영화가 역사왜곡을 했다는 항의입니다. 이 모임의 대표는 저도 잘 아는 노부부인데,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이런 지적은 그동안 별로 나오지 않았지만, 더 기탄없이 지적하고 반성하고 대화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언론사에도 보낸다고 하니, 기자님들 특히 주목 해 주세요. 또, 이 영화 관계자들 아시는 분들은 좀 알려주세요. 감독과 대화하고 싶답니다.

—————

<영화 『허스토리』의 제작자에게 항의한다!>

우리는 후쿠오카에 살고 있는 「전후 책임을 묻고・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회원들입니다.

이 영화는 관부재판을 소재로 한 실화에 바탕한 영화라고 선전했는데, 변호사도 지원모임도 취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고들조차 취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을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이 영화를 보고 경악했고, 분노와 슬픔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원고들의 바램과 지원모임의 바램이 무시되고 왜곡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부재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측이 함께 원고로서 임했던 재판입니다. 열 분의 원고중 일곱분이 근로정신대피해자입니다.

그 분들은 자신들의 피해가 한국사회에서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 환경 속에서 고독하게 투쟁해야 했습니다. 정신대가 곧 「위안부」라는 한국사회의 기존 인식 속에서 가족들과 지역사회의 편견의 눈초리를 받으며 싸워 왔고, 이제 겨우 그런 차이와 근로정신대의 피해실태가 인식되게 된 시점에서 그간의 편견을 증폭시키는 듯한 스토리를 만들어 근로정신대의 실태를 관부재판에서 지워 버린 것은 범죄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위안부」 원고들의 피해실태에 관해서도 증언기록이 존재하는데 왜 이 재판과는 관계가 없는 몇몇 피해자들의 경험을 짜집기해서 과다하게 각색한 걸까요. 이러한 제작자세로 보건대, 피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좋다는 식의 상업주의에 감독이 사로잡혀, 피해자의 고통에 귀기울이는 작업은 하지 않고 제작한 것은 아닌가 싶고, 감독의 불성실함과 태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최고재판소(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하며 시모노세키판결을 내렸던 재판관들의 성의와 용기에 대한 헤아림도 전혀 없어 보입니다.

절대로 픽션화해서는 안되는, 진실이라는 것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바로, 원고인 피해자가 목숨을 걸고 법정에서 호소한 「피해사실」입니다.

영화 속에서, 후지코시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어 「위안부」가 된 것으로 설정된 분은, 이 재판 원고였던 박SO할머니입니다. 이분은 98년 당시 시모노세키판결얘기가 한국에 보도되면서, 지역사회와 교회 사람들로부터 「위안부였던 거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창피하니까 재판은 하지 말아요!」라는 말로 가족들이 애원하는 정황 속에서 분노와 슬픔으로 인해 가벼운 뇌경색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훗날 치매 증상을 보이게 된 것은 이때 일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기도 합니다.

박SO 할머니는 물론 「위안부」가 되지 않았고, 이 분을 정신대에 보낸 것으로 설정된 스기야마선생님은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교사였으며 박할머니께서 많이 존경하고 사랑해 온 분입니다. 실제로 정신대로 보낸 교사는 6학년때 담임, 그러니까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스기야마선생님과의 후쿠오카에서의 감동적이었던 상봉장면을 완전히 다른 스토리—픽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만약 박SO할머니가 살아계셔서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분노하고 상처받으셨을까요. 스기야마선생님은 황민화 교육에 관계했던 자신을 깊이 후회하고, 한일간 진정한 우호를 위한 활동에 일생을 바쳐오신 분입니다. 아직 생존중이신 스기야마선생님이 이 영화를 우연히라도 만나는 일이 없기를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판이 시작된 이후로, 우리는 원고분들께 지원모임회원들의 집 혹은 교회에서 숙박하실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그곳에서 재판관련 회의를 했고 할머니들과 함께 식사를 했으며, 노래도 불렀고 춤도 추었습니다. 친해지면서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고민을 토로하실 때도 있었고, 그러면서 우리는 피해자들이 입은 깊은 상처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은, 원고들과 지원자들간의 상호신뢰와 사랑과 존경심이 깊어지면서 자신을 바꿔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원고들이 여관에서 숙박한 것으로 묘사된 부분과 그곳에서 발생한 일 전부가, 감독의 황당무계한 공상일 뿐입니다.

지원모임이 바랐던 것은, 원고 피해자들과 함께 하며 함께 싸우는 일, 그리고 일본사회에 그녀들의 피해를 알리면서 일본정부를 향해 해결을 촉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본국내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제작하는 모임」등의 역사수정주의자들과 싸우면서 전쟁피해진상규명법을 국회에서 성립시키기 위한 활동도 했고,「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배상법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 지역인 후쿠오카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기 위한 선거전등의 활동도, 부족하나마 해 왔습니다. 재판을 통해 만들어진 원고들과의 소중한 인연이, 우리모임의 역량을 넘는 싸움에까지 우리를 나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원고들과 지원자들의 그런 교류와 운동은 전혀 묘사하지 않았고, 당시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우익들의 조롱이나 시민들의 차가운 태도를 여기저기 끼워 넣어 일본사회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재판의 진실을 전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고들의 바램과 명예에 또한번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관부재판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려 하지는 않았던 영화 『허스토리』제작자들에게 통렬한 반성을 요구합니다!

2018년 10월 2일

전후 책임을 묻고/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438559472837619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에게 묻는다

어제 동북아시아역사재단에서 있었던 위안부문제 관련 학술모임에서 , 어떤 토론자가 서울대 인권연구팀이 지난 2월말에 대대적으로 발표했던 “위안부 학살 영상” 속의 인물은 실은 남성이라고 주장했다.

나 역시, 사용된 사진들이 이미 대부분 20년전에 일본인 학자가 발표한 논문에서 발표된 자료이고, 그 학자는 학살이 아닌 옥쇄로 해석하고 있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언제나처럼 언론은 서울대의 발표만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후에 그런 기사들은 나의 “범죄자료”로 법원에까지 제출된 상태다.

그런데 그런 정황을 말한 내 포스팅과 일본인 학자의 의견에 대해 서울대 인권팀 관계자들은 그동안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고, 이 토론문에 의하면 남성이라는 지적에도 답변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일일이 지적하지 않고 있지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기만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기만을 지적당해도 답변도 하지 않는다.

팀원 중 한사람인 강성현 교수는 내 책을 “틀렸다”고까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주장했는데, 무엇이 틀렸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고 했음에도 그 역시 묵살당했다.

하긴 너무나 여러번 겪은 일이어서 이런 일은 나에겐 더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 모두가 대한민국을 침몰케 하고 그 이전에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서울대팀이 제대로 답변해 주기를 다시한번 촉구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연구이니(여가부와 서울시) 국민과 언론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더 있다.

(2018/8/23)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381191515241082?sfns=mo

渦中日記 2017/11/8

나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중에 남성이 많은 이유를 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좀 심한 거 아닌가 싶다. “형사처벌에 반대하지만 책은 엉터리”라는 말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말로서의 힘은 전혀 없다. 고발한 이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바로 그 엉터리(허위를 책에 쓰는 뻔뻔함!)성과 할머니를 상처준다는 비윤리성에서 찾고 있으니.
학자라는 이름의 이나라 일부 남성들의 윤리성이란 고작, 형사판결에서 패소한 직후, 반대를 말하면서 우아하게 가슴 속 깊은 곳의 처벌욕망을 드러내는 수준인 것 같다.
나의 “붕괴와 몰락”을 지켜보겠다는 말로 돌을 던지라고 선동하는 이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은 많은 공통페친들께 감사드린다. 마침 페친 정리 중이라 좋아요를 누른 분들을 모두 삭제했다. 이런 말에 수긍하는 이들까지 친구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을, 삭제당한 분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는다.
여기서 언급된 녹음은 “돌아가시기 바로 전”이 아니라 몇개월 전이다. 물론 허가도 받은 녹음이다. 나는 위안부문제 관련 책을 또 쓸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연구”용도 아니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눔의 집에서 나를 경계했고, 만나러 갈 수 없었던 나에게 할머니가 자주 전화하셨고, 유언처럼 하시는 말씀이 많았기에 (만났을 땐 오히려, 당신의 말을 받아적으라고 하셨다)녹음했을 뿐이다. 모두 <제국의 위안부>를 내고 나서의 일이다.
이런 이들은 대개 자신의 잘못을 알아도 사과하지않는다. 명백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도. 그에게 “윤리”라는 게 남아 있다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부터 알았으면 좋겠다. 이런 이들을 명예훼손 고소하러 다니기엔 내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대화를 해야 할 이들은 침묵하고,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토론하자고들 하니, 난감하다. 통화록 전체를 공개하는 날이 온다 해도, 그에게 나를 “증명”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渦中日記 2017/11/2

“하지만 박교수의 저작은, 식민지의 여성을 전쟁에 동원한 “제국”이라는 시스템에 착목한 학술연구다.
박교수는 “많은 소녀들이 일본군에게 강제연행당했다”는 획일적인 이미지를 부정했다. 동시에 위안부를 필요로 한 제국주의 일본도 엄중한 시선으로 대한다.”
(2017/10/30, 마이니치. 毎日新聞 사설)
“박교수의 저서는, 위안부에 관한 한국에서의 단면적인 관점에 이의를 제기했다. 다른 한편으로 위안부의 가혹한 처지를 만들어낸 “대일본제국”의 책임을 추궁하고 있다. “(2017/10/31, 요미우리. 讀賣新聞 사설)
———
고발, 기소, 패소. 이런 일들로 주목 받을 때마다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우익의 주장과 같다는 얘기들이 나온다. 물론 승소했을때조차.
3년이상 해명하고 설명해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변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지만 변하지 않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내가 알기로 보수성향인 요미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제국의 위안부> 서평이나 인터뷰를 실은 적이 없다. 우파신문인 산케이도 마찬가지. 그건, 이들 신문에게 나의 책이 불편했다는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싣는다 해서 거절할 생각은 없다. 나는 오히려 그 독자들 중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인들에게 다른 생각을 전하고 싶었던 거니까.
이들의 언급에서 “획일적인 이미지를 부정” 했다는 것에만 주목할 사람도 있겠지만, “일본의 책임을 추궁”한 부분에 언급한다는 건, 내가 던진 공을 받아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미우리의 이런 언급은 내게는 기쁜 일이다. 물론 비판자들은 “요미우리가 긍정적으로 언급한 건 <제국의 위안부>가 우파의 입맛에 맞는 얘길 썼기 때문이다!”라고 다시 외치겠지만.

渦中日記 2017/11/1

11월이군요. 저 이제 괜찮습니다.
이하에 인용한 부분은 지난 금요일 판결문에 쓰여 있는 내용입니다.
반복된 부분도 있지만 아무튼 이 요약을 보면 재판부는 저의 책을 어느정도 제대로 읽은 듯 합니다.
그런데 왜 유죄라고 했을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명백하게 짓밟힐” 저의 인권보다 “훼손될지도 모르는” 기존연구와 운동의 권위를, 그리고 국내학자의 새로운 의견보다 나온지 20년이 넘은 국외의견을 중시한 결과입니다.
혹은
아래의 인용이 보여주는 것처럼
재판부를 포함 “제대로 읽은, 이미 존재하는 독자”보다, “잘못 읽을 지도 모르는 미지의 독자, 그리고 그렇게 유도한 지원단체및 일부학자”를 중시한 결과입니다.
자세히는 다시 쓸 생각입니다.
아무튼 이하 인용부분이 형사2심 재판부의 <제국의 위안부>독해입니다. 이렇게 받아 주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 기운차리려 합니다.
언론과 국민들, 무엇보다 비판자들이, 재판부의 이 견해를 우선 공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저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적관계” 라고 썼습니다. 물론 그 말을 반복해서 쓴 건 아닙니다.
이 판결은 결국, “모든 문장에서 이런 부분을 반복 해야 했다”는 판결입니다.
10월30일에 상고했습니다.
——————————-
“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에서 모든 조선인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니고 직접적인 폭행•협박 또는 기망•유혹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가 있으며, 일본국이나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한 증거가 없으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하여 강제력이 행사되었으며,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도 착취당했고, 일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등 내용을 함께 서술하고 있다.”(32)
“피고인은 이 사건 도서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을 모집한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모집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위안부들은 가난, 가부장제, 국가주의에 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위안소 내에서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해 강제력이 행사되었고,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 착취당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식민지인으로서 애국이 강제되었고,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동지적관계에 있었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37)
“피고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문제에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존재하고 조선인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매우 다양하며, 이 사건 도서는 피고인이 기존 자료를 토대로 현재 우리사회 주류적인 시각과는 다른 입장에서 위안부문제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내용이고 ,이사건 도서 곳곳에서 여러 예외적인 경우와 다양한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서술되어 있다.”(41)

渦中日記 2017/10/29

판결이 나고 이틀이 지났네요. 당일 아침에 데리러 와 준 후배를 비롯해 재판, 점심, 그리고 저녁시간을 마음 졸이고 슬픔 혹은 분노로 함께 해 주신 분들, 소회를 이런 저런 형태로 써 주신 분들, 또 저의 포스팅에 댓글과 감정표현으로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아직 기사들도 찾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판결직후 제가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기사화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심때처럼 수많은 기자분들이 있었는데.
누가 보내준, 조선일보 기사가 저의 말은 싣고 있지 않았지만 그나마 사태를 중립적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실한 기사조차 1심 판결이 “틀린의견이라도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고 썼더군요.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그 기사를 볼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에게 제가 엉터리학자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되니까요. 1심판결문이 말한 건 “틀린의견인지 여부를 법원이 알 수 없으니 보호해야 한다”였습니다. 그 신중하고도 명쾌한 인식을 제대로 전달한 곳은 거의 없었고, 여전히 잘못된 기사가 다시 재생산됩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싸고 명예가 훼손된 건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니라 저입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명예를 훼손시켰고 여전히 훼손중인 건 제가 아니라,
저의 책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썼다고 주장하면서 고발해 결과적으로 언론이 반복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하도록 만들었던( 그때마다 할머니들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겠지요),
차별의식 때문에 우리가 외면해온 그 옛날 소녀들의 삶과 실존을 여전히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나눔의집등 지원단체 관계자들과
그에 선동당한 언론과,
저에게 “자위대 위안부나 되라”고 말하는 이들을 방치하는 일로 이 사회의 여성혐오를 오히려 조장중인 이들입니다.
어젯밤에야 페북을 둘러 봤는데, 그동안 페북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적의가 다시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냈더군요.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는 <제국의 위안부>의 “학술적수준”이 어떤 건지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즉 직접 자료와 증언집에 접하지 않은 이들이) 학술적논의대상이 아니라는 등의 말을 서슴없이 하는 정황입니다.
물론 그 역시 학자들의 말을 옮긴 거지만 그렇게 말한 대표주자인 재일교포 정영환은 위안부문제 연구자가 아니고(즉 스스로 자료로 판단한 게 아니라 남의 연구에 의존해 발언), 제 의견이 틀렸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인 지적은 못하고 있는 강성현은 프로젝트 일원으로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고,
위안부문제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은 침묵하거나 인성공격에만 집중합니다.
그런데 그 정황을 모르는 이들이 저를 “무지””대단치 않다”는 등의 말로 저를 폄훼하는 것이지요.
사실 그런 말들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의 구조가 이제는 너무나 명료하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그게 제가 속한 한국사회의 문제여서 슬플 뿐입니다.
조만간 이 기간동안, 그리고 여전히 목도중인 정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쓸 수 있겠지요.
덧붙이자면, “내용에 반대하지만(엉터리지만/혹은 마음에 안 들지만) 법정판결에 반대”라는 말도 그 의도와달리 저의 책이 법정에 가게 된 걸 당연시하는 구조를 공고히 하고 만다는 얘기도 해 두고 싶군요. 저의 책을 “허위”라고 한 원고와 검찰과 재판부처럼요.
물론 마음은 감사하게 기억해 둡니다.
아무튼 책을 법정으로 보내고, 유죄판결을 부추기고, 그에 부응해 자료준비와 검토에 소요된 1심에서의 그많은 시간들, 저와 변호사의 노력과 판사의 진중하고도 섬세한 판단까지의 시간을
“전혀 고심/고려하지 않고 완벽하게 무시한” 2심 재판부의 인간에 대한 경시보다는 수백배 지적이고 겸허한 인식이니까요.
이제 판결에 대한 간단한 반박문을 쓸 생각입니다. 주심인 김문석 판사가 김영란 전 대법관의 동생이라 듣고 더욱 착잡한 심경입니다.

渦中日記 2017/10/27

형사2심, 패소했습니다.
1000만원 벌금 선고받았습니다.
刑事二審、敗訴しました。千万ウォン(100万円程度)罰金を宣告されました。
추가:상고할 겁니다.

IMF총재가 한국을 “집단자살사회”라고 말했다는 것

IMF총재가 한국을 “집단자살사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의미가 다소 애매하고 어감도 좋지 않지만, 이화여대생들과의 대화에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나온 소회인 듯 하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다.
저출산고령화가 문제시 되기 시작하면서 그래도 중국교포를 비롯한 이주민들이 들어오니 인구문제는 큰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얼마전 어떤 기사를 보니 유입되는 이주민조차 줄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한국은 자국민에게도 그렇지만 이주민들에겐 그 이상으로 따뜻한 나라가 아니니. 더구나 가난한 이주민들을 그저 자국의 “경제이익”이나 “재생산(출산)” 목적을 충족시켜줄 도구로만 대하고 있으니.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재생산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타박하지만, 그 문제 역시 입양으로 해결될 수 있다. 사실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제도로 바뀐 근대가 둥그런 앉은뱅이 식탁에서 4인용 식탁으로 바뀐 시대였다면, 그리고 그 시대가 여전히 “혈연”을 중심으로 한 親가족주의시대였다면, 홀로 사는 가구가 가구전체의 4분의1을 넘었다는 이시대야말로 “함께 혹은 홀로” 의 식탁의 면면이 바뀌는 게 당연한 시대가 아닐까. 물론 혈연중심 대가족제도로의 회귀도 포함한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동네살리기/지역살리기의 천편일률적인 발상과 정책에 대한 이의제기다. 대부분이 그저 역사나 자연에 의존하거나( 그러느라 남의 역사를 뺏어오고 보잘것 없는 자연을 과대포장하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 관광지로서의 일회성 만족을 충족시키는데에 그친다) 관공서/기업유치와 거대건물로 눈길을 사로잡아 보려 하지만, 오히려 “오늘”과 “일상”과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 봤으면 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좋은 마을, 장애인이 살기 좋은 마을, 노인이 살기좋은 마을, 취직못한 젊은이들의 자활을 돕는 마을, 개나 고양이가 살기 좋은 마을..
이런 것들을 만들다 보면 자치단체도 집중할 수 있으니 마음다해 꾸려 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특징이 자신에게 보다 소중한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그러다보면 아이와 노인과 동물을 위한 삶에서 새로운 철학과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 대상과 자신의 쾌적한 삶을 위한 상품아이디어/기업도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다른 지역과 세계가 벤치마킹을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모든 지역이 그만그만하게 모두에게 쾌적한 (최소한 가혹하지 않은) 공간으로의 탈바꿈을 할 수 있지 않을까…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발상은 거꾸로여서(그나마 모두가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모두가 주목하는 곳을 만들려는 현시욕이 앞선 탓에) 결국 모두에게 각박하고 결국 모두가 고독한 사회/국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살고 싶지 않은 사회로 느끼는 사람들이 안팎으로 많아져 가는 한 “집단자살”까진 아니더라도 “집단자폭” 사회는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사실, 사람을 문 개사건을 보면서 든 생각이기도 하다.
말 나온 김에 말하자면 저녁마다 걸어서 작은 음악회에 갈 수 있는 곳, 작고 아름다운 영화관이 있는 곳, 동네사람이 셰프이자 음식점 주인이어서 반가운 인사와 함께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내 책도 받아줄 작은 도서관이 있는 곳, 개와 고양이를 좋아해 개와 고양이 판이지만 남에 대한 배려와 자치체의 관리가 충분해서 기분좋은 산책을 가능케 해 주는 곳, 산책 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미술관/갤러리들이 박혀 있는 곳, 그런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네에 많아 언제고 같이 밥먹고 차마실 수 있는, 배려와 미소가 넘치는 그런 동네/도시에, 나는 살고 싶다.

渦中日記 2017/10/24

9월초에 있었던 피고인심문의 속기록을 오늘 메일로 받았다. 검사와 변호사의 심문이 하나의 파일로 되어 있어서 50쪽 가까운 내용.
검사의 질문은 내가 일본군의 강제연행을 부정했는지, 일본의 사죄를 둘러싸고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에서 다르게 쓰는 식의 교활함을 발휘했는지, 위안부가 “미성년”임을 부정했는지, 동지적관계를 지적한 의도가 내가 생각한 해결방법 주장에 있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질문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거나 전후관계조차 뒤집어 놓은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어서 일일이 바로잡으며 대답해야 했던 시간들. 왜곡과 모순으로 가득해 비논리적이면서도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만은 명확해서 그저 허망했던 질문들. 왜 그런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지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그러면서도 그 모든 의미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아서 담담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 곧 일단락되게 된다.
10월27일 금요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서관 403호.
이날, 지난 6월에 시작된 형사2심 판결이 나옵니다. 판결 후에 기자회견을 할 생각입니다.
기자님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渦中日記 2017/10/11

저의 “멘탈”이 궁금하거나 “본질”을 알았다고
하는 이들에게 굳이 설명할 의무는 없지만 신경쓰이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 덧붙입니다. 즉 이 글은 호사카교수나 그분의 선동에 동조하는 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호사카사태”를 걱정해 주고 계신 저의 페친과 학교동료들을 위해 쓰는 글입니다.
<학술모임 자금에 대해>
1. 호사카 교수가 의심하는 13년전,2004년 한일심포지엄은 대한민국 외교부의 지원을 받아 실시했습니다. 주제는 교과서문제였습니다.
2. 호사카 교수에게 “합숙세미나”라면서 이 역시 자금을 추궁당한 또하나의 모임은 2001년에 실시된 것이고 제가 아니라 당시 한양대에 있던 임지현교수가 주최한 겁니다. 엉뚱한 화살을 저에게 돌린 셈입니다.
3. 호사카 교수는 제가 주최한 2004년 모임에 이영훈교수가 참석했다는 이유로 뉴라이트 운운하며 일본의 검은돈 지원을 받았을 의혹을 강화시키려 하지만, 당시는 아직 뉴라이트라는 단어조차 나오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검색해 보니 이해 말에 결성되었군요.) 당시 함께 했던 한국멤버들은 이후, 사상적/정치적 입장에서 대충 세갈래로 나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영훈교수를 학자로서 존경하지만, 2004년 모임 이후로는정치/학술모임을 함께 한적이 없습니다.
4. 호사카 교수는, 이 모임의 두번째 모임에 위안부할머니가 참석해 고함을 쳤다면서 할머니한테 ” 치욕적인”모임이었다고 했지만, 할머니의 고함은 일본, 구체적으로는 와다하루키교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은 저의 재판에도 출석하셔서 저에게 욕을 하신 분인데, “치욕적인” 느낌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이 분이 아니라 저나 와다하루키교수일 겁니다.
5. 이 모임은 일본 도쿄대 교수이자 우익교과서를 반대하는 모임에 앞장섰고 “헌법 9조를 지키는 모임”사무국장인 고모리요이치교수와 제가 같이 만든 한일지식인 모임이었습니다. 따라서 학회도 아니고 제가 회장인 모임도 아닙니다. 어떤 모임인지,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라는 책에 정리되어 있으니 보실 수 있습니다.
<"협박"메일에 대해>
1. 호사카교수는 저에게 문자를 보내 추궁한 이후로도 또다시 연속 다섯번이나 메일을 보낸 끝에 “저를 협박했다는 내용을 정식으로 검찰(지금 교수님의 재판을 담당하는 검찰팀)에게공식문서로 제출하겠습니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이미 밝혀진 것처럼 그 메일은 제가 보낸 것도 아니고 사주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곳도 아니고 “재판을 담당하는 검찰”에게 제출하겠다는 말이야말로, 천박한 위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밤중 12시 넘은 시각까지 문자를 보내고, 다시 메일로 엉뚱한 의혹과 추측, 그리고 위협을 이어간 행위, 그리고 여기에 차마 쓰지 못하는 또다른 언사는 법적대응이 필요한 정도로 보이지만 에너지절약을 위해 하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이번 일로 호사카교수의 인격을 근본부터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대한민국국민들께서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2. 호사카교수에게 선동당한 모르는 이들의 언사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 이나영/강성현교수가 나서서 거든 일에 다시한번 실망했습니다. 제가 “열성 지지자들을 활용해 싸우게 만들었다””아주 나쁜 선동과 대화 방법을 능수능란하게”사용한다고 말한 강성현씨는, 얼마전에 제가 “틀린 소리”를 했다고 신문 인터뷰에서 말했기에, 어디가 틀렸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지만 응답이 없었지요.
호사카교수및 그의 어처구니 없는 선동에 동조한 이들과는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으니, 해명도 사과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 학계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만 것 같아 자괴감이 드는군요. 이 좋은 가을에.

渦中日記 2017/10/7

이슬람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물론 작가는 그런 책이 아니라고 하는데) 공개살해선고를 받고 책이 불태워졌으며 일본인 번역가가 살해당하기도 했던 살만 루슈디의 자서전을 읽었다. 무려 800쪽 이상되는 책.
태어난 나라에서 추방당하고, 도피생활을 10년 이상 해야 했던 루슈디를 생각하면 내가 당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튼 나는 아직, (모자를 쓰고서라도)거리를 활보할 수 있으니까.
루슈디가 받았다는 비난들https://parkyuha.org/wp-admin/post-new.php이 그 구조와 내용에서 너무 비슷해서 실소가 나왔다. 내 경우 책은 팔리지 않았지만.
인간은 늘 어리석은 일을 반복한다.
품위란, 타인의 불행에 어떻게 마주하는지, 스스로조차 속이려는 욕망을 어떻게 다루는지에서 드러난다.

渦中日記 2017/10/6

슬프고 힘든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은 여성신문의 공격. 어제 나온 기사인데 오늘 봤다.
“성매매 여성의 주체성 강조하는 일본의 성노동론,
일본군‘위안부’ 주체성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이어져 ”
라는 기사. http://m.womennews.co.kr/news_detail.asp…
내가 페미니스트인 걸 아시는 분들은 왜 내가 여성신문한테 공격을 받는지 의아하실 수도 있겠다. 여성 신문은 이 3년 동안 지속적으로 나를 비난하는 기사를 써 왔다. 말하자면 한겨레신문처럼.
나를 둘러싼 사태에서, 진보가 하나가 아니라는 건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여성주의도 하나가 아니다. 이하는 기사에 대한 간단한 논평.
1)<제국의 위안부>에서 “강조”한 주체성은 성매매에 관한 주체성이 아니라 “감정”(개인/여성)의 주체성이다. 우에노교수가 평가한 것도 그 맥락에서였다.
2)나는 조선인위안부가 “일본군을 자발적으로 지지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3)일본 지식인들의 <제국의 위안부>지지는 오노자와씨등이 주장하는 성노동론비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4)내가 행한 정대협 비판과 일부 일본인들의 지원단체 비판 역시 성노동론비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5)오노자와 담론은 내 책이 위안부의 (매춘에 대한) 자발성을 “강조”한 책인 것처럼 왜곡한다. 나와 나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이 성매매에 찬성하거나 “성매매비판”을 오히려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5)오노자와가 인용한 우에노의 말은 신문 인용이기 때문에 앞뒤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인용내용이 잘못된 것 같진 않지만, 이 중요한 논점을 말하는데 사용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오노자와는 비판대상의 “책”이 아니라 신문 논평 한마디로 비판하는 태만을 저지르고 있다.
무엇보다, 우에노 신문논평조차, 제대로 읽으면 성매매를 “찬성”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도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주의자의 생각이 일본 포르노 여배우의 인권문제개선이 안되는 이유인 것처럼 왜곡하는, 아주 악의적이자 (미안한 말이지만) 바보 같은 논리다.
6)”성매매”(매춘)에 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나는 성매매를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2000 년대 초반에 한국지식인 여성들이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지”한 일은 수많은 폐단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추진한 이들이, 그 선의와 정의감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7)오노자와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주장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논지를 왜곡해 가져다가 그것이 자신들의 실패의 원인인 것처럼 쓰고 있다.
<결론>
1)
오노자와의 비논리적 비약을(지적하지 못하고) 그럴듯한 논리인 것처럼 보도하고, 심지어 <제국의 위안부>공격에 사용하는, 학자들과 여성신문의 악의적 태도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2)
여성주의-페미니즘도 변해야 한다.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쓴 <제국의 위안부>를 “우파가 지지하는 제국의 위안부”로 왜곡 혹은 축소시켜온 이들의 담론을 통해, 과거역사문제를 넘어 진보의 사고/사상문제도 얽혀 있다는 걸 알게 된 분도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경식 /정영환 등의 문제를 급진진보의 문제로 말해 왔지만, 오히려 이들의 “보수성”을 말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급진은 무언가를 원리주의적으로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 귀결점이 어디일지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오노자와 담론에서도 같은 경향이 보인다. 이나영교수가 칭찬하는 “영페미”들이, 좀 더 깊은 사고로 이런 상황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 주기를 기대한다.
3)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정황–총우경화로 보이는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게 재단할 일이 아니다. 선거 결과를 보고 나서 필요하면 다시 쓰겠지만, 우선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일본에서 나를 비판하는 급진진보들은 우경화가 박유하를 지지하는 “리버럴”(여러번 언급했지만 자유주의라는 뜻이 아니라 진보다) 탓인 것처럼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보수적/원리주의적 급진 진보의 탓이다.
누구 탓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원인을 정확하게 알아야 현재의 판단과 미래행동에서 오류가 적을 것이기에 쓴다. 이들의 담론이 모두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나만의 위기이지만.
4)
이들은 내 책이 그런 “사상의 자장”안에서 논의되어야 할 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한 “쓰레기” 책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의 과다한 비난과 “징역3년”이라는 국가의 요구를 방치/방관을 넘어 가담중이다. 심지어 집단적으로.
내게는 이제, 검찰과 대중이 오히려 죄가 없어 보인다.
이른바 일부 페미니스트와 급진진보들에 대한 나의 실망과 분노는 거기에 있다. 이들의 잘못된 논지가 아니라.
5)
이덕일류의 역사기술문제에 대한 지적이 젊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무척 고무적이다. 그런데 왜 위안부문제에 관해서는 그런 이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내 경우, 오히려 “젊은 역사학자”들이 한국학계에서는 가장 먼저 목소리 높여 나를 비난했다. 이런 정황에 대해서도 분석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페북포스팅을 잠시 쉽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을 만나면서, 다시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이 드는군요. 혹은 두더지 때리기를 하고 있는 듯한.
정대협에 대한 생각, 한일합의에 대한 생각, 해야 할 말은 많지만, 판결 이후에 하겠습니다.
대신,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시게 한 친구신청하신 분들 수락하기 위해, 페친 정리하겠습니다.)

渦中日記 2017/10/5 (2)

노벨문학상, 영화로도 나와 있는 <남아있는 나날>을 쓴 가즈오 이시구로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일본계 영국인.
번역도 여러권 있어서 다행이다.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두개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사람의 수상